총에 맞았더니 먼치킨이 되었다
1. 해적
태평양의 무인도에서 고등학생 은가은이 물었다.
"오빠. 우리가 이 섬에 조난된 거, 얼마나 됐어?"
신성재가 옆을 가리켰다. 바위에 正 표시 여섯 개가 그려져 있었다.
"한 달."
두 사람은 무인도에서 한 달을 버텼다.
"오빠. 배고파."
"나도 배고프다."
"우리 어제도 굶었다?"
"어제는 비가 왔지만, 그저께는 조개 먹었잖아."
"이젠 조개도 안 잡혀."
지난 한 달 동안은 바닷가에서 채집으로 버텼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도 거의 잡히지 않았다.
신성재가 몸을 일으켰다.
"통발이나 보러 가자."
두 사람은 바닷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은가은이 말했다.
"진짜 배고프다."
두 사람은 이 섬에 조난된 후로 항상 배가 고팠다.
신성재가 넝쿨을 이용해 어설프게 만든 통발을 건져보았다.
"어? 묵직한데?"
은가은이 활짝 핀 얼굴로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응원했다.
"오늘은 뭐라도 잡나요!"
신성재가 통발을 물에서 꺼냈다. 꽤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와 손바닥 크기의 물고기 네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은가은이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다.
"대박! 고기 큰 거 봐! 오늘은 생선구이다! 아싸아!"
"야. 뛰지 마. 배고파져."
"빨리 굽자!"
신성재가 장작을 모았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나무는 모두 젖어 있었다. 미리 만들어 보관하던 불씨도 꺼졌다. 새로 불을 붙여야 한다.
그나마 불붙이는 데 쓸 불쏘시개는 조난될 때 챙긴 비닐에 넣어 보관해 비에 젖지 않았다.
신성재가 따로 챙겨둔 나무 두 개와 불을 붙이는데 쓸 작은 활 형태의 도구를 연결했다. 그런 후에 부지런히 활을 앞뒤로 움직였다. 나무막대가 빠르게 회전했다.
은가은이 옆에서 불쏘시개를 넣어가며 입으로 바람을 후후 불었다. 겨우 불이 붙었다.
"오빠! 됐어!"
그렇게 살린 불을 적당히 키운 후에 장작을 넣었다.
장작은 마른 나무가 아니라서 연기가 많이 났다.
그런 걸 따지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연기가 심하면 옆으로 피하면 그만이다.
은가은이 불에 구워지는 생선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고기. 고기. 맛있는 고기."
"이거 아껴 먹어야 돼."
"알아.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인 거."
이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건 이 무인도에 온 후로 처음이다.
그녀가 익어가는 생선을 보며 말했다.
"난 여기서 구출되면 고기 많이 먹을 거야. 생선구이도 먹고, 해물탕도 먹고, 소고기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치킨도 먹고."
"아. 치킨."
"그래! 치킨!"
오늘은 커다란 고기 한 마리에 손바닥보다 큰 물고기를 네 마리나 잡았다. 이렇게 많이 잡은 날은 오늘밖에 없다.
평소에는 더 작은 고기 한 마리를 겨우 잡아 둘이 나눠 먹었다. 그나마도 안 잡히는 날이 많았다.
신성재가 제안했다.
"오늘은 각자 한 마리씩 먹고, 남은 두 마리는 내일이랑 모래에 반 마리씩 먹자."
"예에에! 생선구이!"
"큰 거는 훈제로 만들어서 아껴먹자."
"너무 좋아!"
"그래. 나도 좋…. 잠깐만."
신성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가은은 구워지는 생선만 보면서 물었다.
"왜? 뭔데? 고기 또 있어?"
"배다."
"이 섬에 배나무가 어디 있…."
그녀의 고개가 바다 쪽으로 휙 돌아갔다.
"배? 배!"
바다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배가 보였다. 여객선처럼 크진 않았지만, 어선이나 소형 화물선 정도 크기는 되었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무인도에 갇혀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한 달을 버텼다.
여기서 병이라도 걸리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몇 달 더 지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배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해안가로 달려가 신나게 팔을 흔들었다.
신성재가 외쳤다.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오빠! 여기가 한국이냐? 나처럼 영어로 해야지!"
은가은이 영어로 소리를 질렀다.
"썸바디 헬프 미!"
두 사람은 없는 힘을 쥐어짜서 소리를 지르고 팔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신성재의 팔이 서서히 느려졌다.
"어?"
"오빠! 왜 쉬는데! 빨리 더 흔들어야 저 배에서 우리를 보잖아!"
신성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적이다."
은가은의 팔도 멈추었다.
"진짜?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가 탄 여객선을 공격한 게 저놈들이야. 내가 저 배를 그때 봤어."
"그, 그러면…."
"저 새끼들은 사람을 사냥감 취급…."
배의 앞머리에서 그들을 향해 소총을 겨누는 놈이 보였다. 놈이 쓰는 건 AK-47 돌격소총이었다.
신성재가 소리를 질렀다.
"도망쳐!"
두 사람은 즉시 뒤돌아서 뛰었다. 신성재가 외쳤다.
"섬 반대편으로 가! 일주일 전에 발견한 바위 사이 빈틈에 숨어!"
"거긴 한 명밖에 못 숨잖아!"
"틈새에 몸을 끼워 넣으면 두 명도 가능…."
갑자기 총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총성이 뒤따라왔다.
총소리가 몇 번 더 들리다가 눈앞에서 피가 튀었다.
"꺄아악!"
은가은이 앞에서 엎어졌다.
"가은아!"
배는 아직 멀리 있는데 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신성재가 총에 맞고 쓰러진 은가은을 두 팔로 안으려고 했다.
날아온 총탄이 이번에는 신성재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신성재가 그 자리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쿨럭."
7.62mm 소총탄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치명상이었다.
신성재는 자기가 죽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무인도에서 총 맞아 죽을 줄은 몰랐….'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초대형 사고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가 직접 경험한 기억이 아니다.
'평행세계?'
던전과 마법사가 존재하는 평행세계에서 초대형 사고가 터졌던 게 기억났다.
그 사태를 해결하러 간 마법사의 모든 기억이 유니크 메모리 아이템에 복제됐다가, 아이템이 부서지며 복제된 기억만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평행세계의 마법 지식이 나한테로 튀었어?'
왜 하필 신성재가 그 기억을 넘겨받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이건 평행세계의 마법사 신성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넘어온 기억에는 평행세계의 신성재가 아는 모든 마법 지식이 들어 있었다.
그 마법 지식은 1년 전부터 이쪽 세계 신성재의 몸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신성재가 총에 맞고 죽어가는 순간에 활성화됐다.
막대한 정보가 뇌로 다운로드 됐다.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쭉 펴지고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커흑!"
마법 지식의 각인 시간은 짧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승된 마법 지식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마법을 써야 산다!'
지금은 의문을 가질 때도, 이것저것 따질 때도 아니다.
이미 총에 맞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평행세계의 마법 지식은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신성재가 당장 쓸 수 있는 마나량을 계산했다.
평행세계에서 마법 지식이 전승될 때 약간의 마나가 따라왔다. 그동안 몸속에 잠들어 있던 그 마나는 지금 즉시 사용할 수 있다.
평행세계의 마법은 스킬을 기반으로 한다. 그 스킬은 마법사가 수련해서 얻거나, 각성하는 형태로 손에 넣는다.
신성재도 그런 식으로 신규 스킬을 각성할 기회가 생겼다. 평행세계를 넘어온 지식이 다운로드 될 때만 가능한 특수 효과였다.
그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지금 꼭 필요한 마법들을 빨리 골라야 한다.
제일 먼저 개방해야 하는 마법은 정해져 있다.
그는 지금 총에 맞았다. 이 상처부터 치료해야 한다.
신성재가 첫 번째 각성 마법을, 지구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갑자기 몸속에서 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바람은 몸속에서 회전하다가, 상처 부위에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마나가 작은 모래시계 형태로 회전했다.
그가 사용한 건 신체 일부를 다치기 직전 상태로 돌려놓는 마법이다.
효과는 확실했다. 관통당한 상처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마치 고속으로 지혈되고 아무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그 마법으로 초기 보유 마나의 30%를 소모했다.
문제가 생겼다. 신체에 저장된 마나의 양이 너무 적었다.
해적선이 더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신성재가 일어났다. 이미 가슴의 총알구멍은 사라졌다.
"내 몸에 깃든 마나의 총량은 100포인트였는데."
지금 지구에는 마나의 양을 표현하는 단위가 없다.
대신에 저쪽 세계에는 그런 단위가 있다. 지구에서 무게의 단위로 g이나 kg을 쓰듯이, 저쪽 세계는 마나의 단위로 포인트를 쓴다.
"30포인트의 마나는 방금 모래시계 마법에 썼으니까, 남은 건 70포인트."
적을 확인하려면 멀리 볼 수 있는 마법이 필요하다. 단순히 멀리 보는 건 마나 포인트 소모가 적다.
그런데 멀리 보는 마법은 하나가 아니다. 지금 개방한 마법은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다.
그러니 기왕이면 제대로 된 걸 골라야 한다.
[이글 아이]
신성재가 정찰 마법을 선택해 사용했다.
10포인트의 마나가 소모됐다. 단순히 멀리 보는 게 아니라 적의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정찰하기 위해 10의 마나를 소모했다.
마법을 쓰자마자 멀리서 다가오는 배 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배 앞머리에서 AK-47 돌격소총을 들고 낄낄대는 놈의 누런 이빨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놈은 신성재가 일어난 걸 보고 다시 사격하려 했다. 이대로 두면 총알이 또 날아온다.
이글 아이 마법 덕분에 해적선의 상태를 선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신성재가 새로운 마법을 개방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염라의 불]
쇠를 녹이는 초고열의 불꽃을 일으키는 마법이 발동됐지만, 마나를 겨우 10포인트밖에 쓰지 않아 불의 크기는 주먹보다도 작았다.
그 불꽃이 손 위 허공에 떠올랐다.
거리가 문제였다. 해적선은 바다 위에 있었다. 불꽃을 바다 위로 보낼 마법이 추가로 필요했다.
[무빙]
무빙 마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금 사용한 건 신성재가 보는 곳으로 대상을 옮기는 마법이다.
10포인트의 마나가 더 소모되었다.
미리 만들어둔 불꽃이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목적지는 신성재가 '이글 아이'를 이용해 보고 있는 해적선 바로 위쪽 하늘이다.
그 불꽃은 해적선 위 허공으로 날아갔다가 눈송이처럼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해적들은 갑자기 날아온 불꽃이 뭔지 몰라서 구경만 한다.
배의 앞에 있던 놈은 얼굴을 구겼다. 그는 그 불꽃이 신성재의 앞에서 생성되어 날아오는 걸 보았다.
하지만 해적은 그게 뭔지까지는 몰랐다.
"저 새끼 뭘 쏜 거야? 조명탄이야?"
멀리서 불꽃이 날아왔다. 조명탄이 제일 의심스러웠다.
그가 신성재를 향해 소총을 조준했다.
"사냥감이 반항해 봤자 조명탄 따위가 한계지. 이번엔 진짜로 죽여버린다."
움직이는 배에서 쏘는 총은 명중률이 떨어진다. 그래도 여러 발을 쏘면 한 발쯤은 맞는다.
해적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신성재의 옆쪽으로 날아갔다.
신성재가 해적선 위로 떨어지는 불꽃을 향해 새로운 마법을 발동했다.
[하이드라]
분열 확산 마법이 '염라의 불'에 사용되면서 5포인트의 마나가 추가로 소모되었다. 해적선 위로 떨어지던 불꽃이 네 개로 갈라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네 개의 작은 불꽃은 배 위에 쌓여 있는 RPG 탄두와 다이너마이트에 떨어졌다.
염라의 불은 쇠를 녹일 정도로 고열을 내뿜는 마법이다. 그 뜨거운 불꽃이 RPG 탄두 표면의 금속에 구멍을 뚫으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곧바로 탄두가 폭발했다. 하나가 아니라 분열된 불꽃이 닿은 폭발물 네 개가 동시에 터졌다.
시뻘건 화염이 폭풍처럼 일어나 배를 휩쓸었다.
"끄아악!"
폭발에 휘말린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배의 앞에서 사격하려던 놈도 마찬가지였다.
"케에엑!"
배에 남아 있던 다른 탄두와 폭발물이 연쇄 폭발했다.
그리 크지 않던 해적선은 갈가리 찢어지며 침몰했다.
신성재는 정찰 마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적선은 격침됐다. 해적도 전멸시켰다.
신성재가 마나 잔량을 확인했다.
"35포인트."
30포인트만 있어도 총에 맞아 쓰러진 은가은을 살릴 수 있다.
2. 비행기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의학 기술로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이 아니다. 아예 다치기 전 상태로 돌려놓는 마법이다.
그런데 그 마법은 시간제한이 있다. 다치고 나서 방치된 시간이 길수록 필요 마나량이 증가한다.
대신에 지금처럼 다치자마자 그 마법을 쓰면 최소한의 마나로도 상처를 없앨 수 있다.
그가 은가은의 상처에 손을 댔다.
"넌 여기서 구출돼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학교도 가야지. 그러니까 살아라."
신성재의 가슴에 났던 총상을 없앨 때는 30포인트의 마나가 소모됐다.
그가 은가은에게 30마나짜리 복원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이 발동됐다. 그녀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신성재는 전승된 지식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상처가 회복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은가은을 살리는 데는 30마나면 충분했다.
완벽하진 않았다. 그녀의 몸에 총상 흉터가 남았다.
신성재보다 해적선부터 잡느라 조금 늦게 복원 마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30마나로는 살짝 부족했다.
이제 마나의 잔량은 5였다. 이미 해적선은 침몰해 위험은 사라졌다.
"그래. 서비스다. 너도 나중에 비키니 입어봐야지."
신성재가 남은 마나 5포인트를 모두 소모했다.
복원 마법이 추가로 들어가며 그녀의 피부에서 흉터를 지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부에 흐릿한 흔적이 보이긴 했다.
이제 마나가 바닥났다. 그래도 체력은 남아 있다.
신성재가 은가은을 들고 모닥불 쪽으로 이동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따뜻한 불이 필요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바닷물에 씻겨나갔다.
신성재가 모닥불 옆에 그녀를 눕혔다. 그런 후에 그도 다른 쪽에 드러누웠다.
"힘들다."
그는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마법을 썼다. 난생처음 쓰는 마법이다. 마법을 사용한 전투 역시 처음 경험했다.
신성재가 완전히 지친 상태로 누워서 쉬고 있는데, 옆에서 은가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 왜 살아있어?"
"응? 너 기절한 거 아니었냐?"
은가은이 눈을 겨우 뜨며 말했다.
"기절할 것처럼 아팠어. 정신도 막 왔다 갔다 했어."
"어디까지 봤냐?"
은가은이 모닥불 옆에 드러누운 채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불꽃 날아가는 거? 하이드라?"
"가은아. 그거 꿈에서 본 거야."
"그런가?"
"어. 그래."
"나 바보 아니다?"
"아니구나."
***
해적선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흔적도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죽다 살아났다. 다시 죽지 않으려면 밥은 먹어야 한다. 계속 굶으면 해적이 아니라 굶주림 때문에 죽는다.
은가은이 모닥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 고기가 다 탔어!"
생선 다섯 마리는 그 난리를 겪으며 불에 완전히 타버렸다.
"히잉. 배고픈데. 맛있는 거 먹을 줄 알았는데."
은가은이 타버린 생선을 뒤적여서 먹을 수 있는 살이 있는지 찾았다. 짙은 갈색으로 변한 작은 조각을 뜯어내 입에 넣었다가 곧바로 뱉었다.
"히잉."
신성재가 말했다.
"고기는 잡으면 돼."
"어떻게?"
신성재가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다. 그런 후에 바닷가로 이동했다. 푹 쉬었더니 마나가 꽤 회복됐다.
바닷가에서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근처 바다의 수면 아래가 보였다. 깊은 곳까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깊이는 식별할 수 있었다.
물속을 돌아다니는 고기가 보였다. 평소라면 거리가 멀어서 잡을 수 없는 고기였다.
신성재가 나뭇가지를 창처럼 던지며 마법을 다시 사용했다.
[무빙]
마법이 창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이건 원래 바람 계열 보조 마법을 쓰는 쪽이 효율이 높지만, 무빙도 효과는 있었다.
나무창이 바다에 꽂혔다. 수면 아래를 헤엄치던 꽤 큰 고기의 몸통을 나무가 정확히 관통했다.
신성재가 마법을 한 번 더 사용했다.
[무빙]
나무창이 고기를 매달고 바닷가로 끌려왔다. 신성재가 창을 잡고 위로 들었다. 커다란 고기가 나무창에 꿰인 채로 펄떡였다.
은가은이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꺄악! 고기다! 엄청 크다!"
신성재가 생선의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낸 후에 나무창에 다시 꽂아 모닥불 위에 얹었다.
은가은이 군침을 삼켰다.
"맛있겠다!"
신성재가 물었다.
"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해!"
"근데 왜 안 물어봐?"
"고기부터 먹으려고! 나 너무 배고파!"
"어…. 그래. 빨리 구워줄게."
신성재가 모닥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염라의 불]
염라의 불 마법은 쇠를 녹이는 초고열 불꽃을 만든다.
그 마법이 모닥불에 떨어졌다. 남은 나무가 순식간에 고열을 내뿜으며 거칠게 타올랐다.
신성재가 생선이 꽂힌 막대를 위로 들며 그 열기로 생선을 익혔다.
"3초 삼겹살 알아? 이것도 그런 거야. 초고열로 생선을 순식간에 익히는 거지."
"우와아! 고기가 다 익었어! 바짝 익었어!"
신성재가 그걸 옆에 있는 돌 위에 얹었다. 은가은이 얼른 손을 뻗었다. 신성재가 그 손을 막았다.
"지금 먹으면 입 다 덴다. 맨손으로 먹으면 손까지 데니까 조금만 기다려."
"배고파!"
신성재가 나뭇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어 생선을 찢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이제 먹자."
은가은이 얼른 나뭇가지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한 점 집었다. 고기가 워낙 커서 한 젓가락만 집어도 꽤 큰 살점이 나왔다.
그녀가 그걸 후후 분 후에 입에 넣었다. 입에서 뜨거운 김이 나왔다.
"맛있어!"
"네가 지금 뭐가 안 맛있겠냐. 어디, 나도…. 맛있잖아!"
"이거 겁나 맛있어!"
"진짜 맛있다!"
마법의 불로 익힌 생선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은가은은 정신없이 생선을 먹었다. 생선이 조금 식은 후에는 손으로 잡고 뜯어먹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앗! 오빠. 이거 남겨뒀다가 내일 먹어야 하잖아."
"지금 다 먹어. 내일은 또 잡으면 돼."
"또 잡을 수 있어?"
신성재가 손가락을 하나 세워 옆으로 움직여 보이며 씩 웃었다.
"봤잖아. 마법으로 나무창 날려서 생선 잡는 거."
"아싸아!"
은가은이 신나서 손으로 생선살을 뜯어내 입에 넣고 씹었다.
"진짜 맛있다. 히히."
***
두 사람은 커다란 생선 한 마리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아. 배부르다."
어제부터 굶었으니 어지간한 양을 먹어서는 배가 찰 리 없다. 그런데도 배가 부를 정도로 생선의 크기가 컸다.
"오빠. 우리 이 섬에 갇히고 나서 처음으로 배부르다."
신성재도 배를 슬슬 문질렀다.
"그러게. 배부른 게 이렇게 행복한 거라는 거, 처음 알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점점 채워졌다.
"어? 비 오겠다."
"집에 가자."
집으로 사용하는 건 움막이다. 그건 신성재가 부러진 나무와 넓은 잎으로 얼기설기 만든 것이라, 비만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집 고쳐야겠다."
"그런 것도 돼?"
"지붕부터 갈자."
신성재가 돌 몇 개를 한 손에 쥐고 위로 휙 던졌다. 그러면서 마법을 사용했다.
[하이드라]
돌들이 공중에서 사방으로 휙휙 날아가 넓은 잎의 줄기를 여러 개 잘라냈다.
"우와아! 큰 이파리다!"
땅에서 줍던 것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좋은 넓은 잎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들은 그걸 주워 움막의 위에 기와처럼 덮었다. 그 정도만 해도 비가 샐 걱정은 별로 없었다.
장작으로 쓸 나무도 주워왔다. 젖은 나무 여러 개가 염라의 불로 달군 커다란 돌 위에서 바짝 말랐다.
은가은은 신났다.
"오늘 밤은 따뜻하겠다! 바닥에 깔 것도 많고, 난로 같은 뜨거운 돌도 있고, 장작도 많아! 배도 불러!"
"여기가 집보다 낫냐?"
"선 넘네. 그건 아니지!"
"그치?"
***
자기 전에 모닥불을 쬐며 신성재가 말했다.
"한 달 전의 나한테 말 좀 전해주고 싶다. 그 돈으로 여행 가지 말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라고."
고등학생 은가은의 생각은 달랐다.
"난 오빠한테 꼭 여행 가라고 말해줘야지."
"한 달 전엔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다만?"
"오빠가 여행 안 갔으면 나 혼자 이 무인도에 조난됐을 텐데? 여행을 가야 같이 고립되지."
"가은아. 넌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남았을 거야. 짐승 같은 생존능력이 있잖아."
"그럼 해적은?"
"어…. 그러네. 내가 같이 왔어야 하네."
고등학생인 은가은이 불을 쬐며 말했다.
"개학하기 전에 구출되고 싶다."
"너 모범생 아니었다며."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하거든?"
"그럼 한국대 가나?"
은가은이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건 좀 무리…."
신성재가 자랑했다.
"난 한국대 나왔는데."
"앗! 한국대 나온 백수가 눈앞에 있네?"
"난 잠깐 쉬는 거야."
"오빠 보니까 한국대 별것 없네. 아무나 가는구나."
"그 아무나에 너는 없지?"
"내가 한국대 꼭 가고 만다."
"어. 그건 무리."
"그게 고등학생한테 할 말이냐?"
"그리고 나 백수 아니다. 전문직이다."
은가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문직? 그동안 그런 말 없었잖아. 변호사나 회계사 같은 거야?"
"마법사. 같은 사짜지."
"사기꾼의 사짜… 는 아니네. 진짜 마법 쓰는 거 봤으니까.
은가은은 세상에 진짜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게 상식이다.
그런데 오늘 진짜 마법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마법 그거, 원래 쓸 수 있었어?"
"그랬으면 우리가 한 달이나 이 무인도에서 고생했겠냐?"
"그럼 어떻게 된 건데?"
"우리 지구에는 마법이 없는데."
신성재가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세상의 나는 마법사더라고."
"응?"
"평행세계의 신성재가 가지고 있던 기억 복제용 유니크 아이템이 깨졌어. 덕분에 내가 그 혜택을 봤지."
"와…. 평행세계의 은가은은 뭐하는 거야!"
"그 아이템은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어. 그러니까 이건 그쪽 세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야."
***
이튿날 그들은 바닷가로 갔다.
어제 침몰한 해적선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신성재가 물었다.
"오늘은 뭐 먹고 싶냐?"
"고를 수도 있어?"
"내가 바닷속을 딱 볼 수 있거든? 생선이나 조개, 게 같은 것도 다 고를 수 있다."
"문어도?"
"먹어도 되는 문어를 넌 구분할 수 있냐?"
"아니. 근데 해독제 같은 건 마법으로 어떻게 안 돼?"
"나중엔 되는데, 지금은 안돼."
신규 마법 각성 효과는 어제 그 순간에 끝났다. 이제 새로운 마법을 추가로 익히려면, 마법 지식을 연구해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럼 커다란 조개하고! 고등어!"
"고등어가 있겠냐?"
"그럼 참치?"
"그냥 큰 고기 잡아줄게. 큰 조개하고."
신성재가 마법으로 커다란 생선과 조개를 잡았다. 모닥불도 마법으로 만들고, 생선과 조개도 마법으로 구웠다.
은가은은 신나서 조개도 먹고 고기도 먹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열심히 뜯어먹다가 물었다.
"오빠. 왜 눈을 그렇게 뜨고 날 보는데?"
"물 마법도 개방할걸. 그래야 네가 좀 씻을 텐데."
"왜? 지금 나 거지꼴이야?"
"어. 지금 내 상태랑 비슷해."
"그럼 거지보다 못한데?"
"네가 그 꼴이라고."
"히히."
두 사람은 고기를 실컷 먹고 바닷가에 드러누웠다.
"아. 배부르다."
"나도 배부르다."
그렇게 멍하니 누워서 쉬다가 신성재가 몸을 일으켰다.
하늘 저 멀리에서 작은 점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
신성재가 정찰 마법을 사용했다.
[이글 아이]
작은 점의 정체가 뭔지 확실히 보였다.
"비행기다!"
저 비행기가 왜 이쪽으로 날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비행기가 아무것도 못 보고 이 섬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스킬 기반의 각성 마법을 개방할 기회는 이미 어제 끝났다.
앞으로 노력하고 연구하면 새로운 마법을 개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날로 먹지는 못한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
신성재가 전승된 기억을 검색했다. 스킬 기반의 마법을 분석하고 평행세계의 신성재가 연구한 지식을 뒤졌다.
지금 상황에서 쓸 방법이 생각났다.
그가 손을 옆에 있는 젖은 장작 쪽으로 뻗으며 마법을 발동했다.
[염라의 불]
초고열이 마법이 발동됐다. 그걸 발동 도중에 일부러 강제로 중단했다.
장작은 초고열로 불타는 대신에 불완전 연소를 대규모로 일으켰다. 연기가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그 연기는 거대한 회색 기둥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후우. 됐다."
은가은이 걱정했다.
"오빠. 비행기에서 이거 볼 수 있을까?"
신성재가 이글 아이 마법으로 비행기를 보며 대답했다.
"못 보면 섬 전체에 불이라도 지를…. 아. 봤나 보다. 비행기가 선회한다."
***
다국적 해상 순찰대의 초계함 함장이 물었다.
"해적선은 아직도 못 찾았나?"
"항공기를 동원해 수색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쯧. 그 살인마들을 잡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래도 실종자를 두 명이나 찾아서 다행이긴 해."
***
신성재와 은가은은 무인도에서 구출됐다. 두 사람이 태평양의 무인도에 조난된 지 한 달 만이었다.
"가은아."
"응?"
"내가 마법사라는 건 비밀이다."
"나 바보 아니다?"
"아니야?"
"당연하지!"
3. 연구
신성재와 은가은이 무인도에서 구출되고 1년이 지났다.
신성재는 무인도에서 마법 지식을 얻었다. 지난 1년간은 그 마법 지식을 연구했다.
마법 지식은 머리로 안다고 해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인도에서 개방한 마법은 그대로 쓸 수 있지만, 다른 마법은 연구가 필요했다.
마법 지식을 받을 때 덤으로 따라온 지식도 많이 있었다. 저쪽 세계 신성재의 기억 덕분에 평행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양쪽의 기술 수준은 비슷했다. 그런데 그 기술의 바탕이 달랐다.
"저쪽 세계는 마법 기반의 기술 체계라서, 비슷하면서도 다르단 말이야."
그래서 저쪽 세계의 마법 공학은 이쪽 세계의 과학기술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우리 세계에는 마나가 깃든 소재가 없으니까, 마법 공학을 알아도 써먹을 수가 없구나."
저쪽 세계의 마법 공학은 마나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그 에너지는 보통은 마나가 깃든 돌 같은 소재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쪽 세계에는 그런 돌이 없다.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광물을 확인했지만 마나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은가은은 고2가 되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신성재가 한국대를 졸업했다는 걸 알고 작년부터 그에게 과외를 맡겼다.
과외비도 넉넉하게 줬다. 그 과외비에는 무인도에서 은가은이 살아남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금액이 꽤 많았다.
마법 연구에 집중하느라 직장에 다니지 않는 신성재에게 그 돈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은가은이 과외수업을 받으며 물었다.
"마나가 나오는 돌이 없어도 오빠는 마법을 쓰잖아."
"난 예외지."
신성재가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작은 마법을 사용했다.
[반디의 불]
1포인트의 마나가 소모되며 그의 손가락 끝에서 촛불 크기의 불꽃이 생성됐다. 이건 구출된 후에 연구를 통해 새로 개방한 마법이다.
"나야 내 몸에서 자연 회복되는 마나를 쓰는 거니까."
"이 세상에 마법사는 역시 오빠 혼자인 거지?"
"대기 중에서 마나가 감지되지 않아. 마나가 없는데 마법사가 저절로 생길 순 없어. 그러니까 나밖에 없겠지."
은가은이 물었다.
"근데, 방금 손가락에 불꽃 그거, 무인도에서 해적선을 처리할 때 본 그거보다 작은데?"
신성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은아. 넌 그날 너무 많은 걸 봤어."
"목소리 깔아도 안 멋있어."
"어. 그래."
신성재가 손가락의 불을 꺼뜨렸다. 그런 작은 것도 계속 켜놓으면 마나를 조금씩 잡아먹는다.
"무인도에서 네가 본 건 쇠를 녹이는 초고열의 불꽃이야."
"방금 그건?"
"그거의 열화판. 이미 개방한 마법의 하위호환이라서 어렵지 않게 개방할 수 있었지. 가스레인지에 불이 안 붙을 때 이걸 쓰면 편해."
이 지구와 평행세계는 환경이 많이 달랐다. 특히 마나가 감지되지 않는 환경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환경에서 새 마법을 개방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성재가 쓸 수 있는 마법이 없는 건 아니다. '염라의 불' 같은 마법 몇 개는 각성 당시에 개방했다. 일단 개방한 건 계속 쓸 수 있다.
"다른 마법을 새로 개방하려면 이쪽 세계 환경에 맞게 고쳐야 해. 그런데 가은아."
"응?"
"너 벌써 고2이야. 이렇게 해서 한국대 가겠냐?"
"목표를 좀 낮춰서 인서울…."
"지금 상태로는 그것도 어렵지?"
"우애앵?"
"더 공부해.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그녀가 제로 콜라를 벌컥 마신 후에 외쳤다.
"고등학교는 역시 지옥이야!"
"무인도에서 고생한 걸 생각해봐. 배부른 것만으로도 천국이지."
"원래 천국에도 급이 있는 거거든? 천국에서도 제일 밑바닥에 있으면 거기가 지옥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성적 잘 나오는 마법은 없어?"
그녀는 무인도에서 신성재가 마법으로 해적선을 격침하고, 총에 맞은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걸 봤다. 그때 총에 맞은 자리는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아주 옅은 흉터가 보인다.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그래서 혹시 공부 잘하게 되는 기적도 있나 하는 기대를 은근히 했다.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의 활력이 증가하는 마법은 있는데…."
은가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싸아! 나한테 그거 걸어줘! 인서울 다 뒤졌어! 나 한국대 갈 거야!"
"근데 그거, 지금은 못 쓴다."
"엥? 아, 왜!"
"그런 마법을 우리 세계에서 쓰려고 연구 중인데, 결과 나오려면 멀었어. 그러니까 넌 지금처럼 공부해. 이대로는 인서울도 어렵다."
"우이씨. 내가 한국대 가고 만다!"
"응. 무리야."
***
1년이 더 지났다.
무인도에서 마법을 각성하고 2년이 흘렀다. 은가은은 고3이 됐다.
신성재는 그동안 꾸준히 마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마법을 개방하는 건 쉽지 않았다.
"길이 보이기는 하는데…. 갈 길이 머네."
그렇다고 지난 2년간 새로 개방한 마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이미 개방한 마법의 변형이나 그 하위 마법이라면 여러 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금이 쩍 가 있는 컵을 손으로 잡고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총에 맞은 상처를 되돌릴 때도 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법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바뀌었다. 주문은 같지만 디테일이 조금 달랐다. 엄밀히 구분하면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 2호쯤 되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컵에 깃들었다. 가늘고 길게 가 있던 금이 마치 지우개로 지워지듯 스르륵 사라졌다.
신성재가 금이 갔던 곳을 손으로 만져보며 말했다.
"역시 사물 복원 마법은 사람을 치료할 때와는 사용 조건이 달라."
모래시계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할 때는 다치자마자 써야 효과가 좋다.
신성재가 총에 맞았을 때는 다친 직후에 그 마법을 쓴 덕분에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반면에 은가은은 겨우 1, 2분 늦게 치료했는데도 마나를 더 써야 했다. 그랬는데도 흐릿한 흉터가 남았다.
"이 컵은 한 달 전에 금이 간 건데도 복원이 되네."
사물에 그 마법을 쓰면 오래전에 손상된 것도 복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사람은 음식을 먹고 활동하면서 몸의 구성 성분이 조금씩 바뀌는데, 사물은 그대로니까 마법 효과가 더 잘 먹히는 거겠지."
***
그해 겨울에 은가은이 대학에 합격했다.
그녀가 두 손을 위로 쭉 뻗으며 외쳤다.
"내가 대학 간다 그랬지!"
신성재가 물었다.
"너 한국대 간다더니?"
은가은은 당당했다.
"한국대나 한강대나 한 글자 차이잖아! 둘 다 인서울이니까 거기가 거기지!"
"그래. 고생했다."
그녀가 위로 뻗었던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고생했으니까 나 선물!"
"너처럼 기본기가 없는 애를 대학에 보내려고 내가 진짜 힘들게 가르쳤다. 그러니까 선물은 네가 나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아, 몰라! 선물!"
"뭘 원하는데?"
은가은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제 나도 마법 가르쳐줘!"
"응?"
그녀가 선언했다.
"난 마법 소녀가 될 거야!"
"소녀는 아니지 않나?"
"나 소녀다!"
"네가 마법을 배울 수 있는지부터 보자."
은가은이 큰소리쳤다.
"오빠도 하는데 난 당연히 할 수 있지!"
***
할 수 없었다.
신성재가 가장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봤다. 마법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인 기본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신성재가 말했다.
"마법사가 되려면 마나를 통제할 줄 알아야 해. 그러려면 먼저 마나를 느껴야지."
은가은은 억울했다.
"아니, 나는 왜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데!"
그녀는 마나를 느끼는 단계에서 벽에 부딪혔다. 신성재가 마나를 만들어서 몸에 직접 넣어줘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신성재가 설명했다.
"그건 네가 마나를 접할 기회가 없는 현대 지구의 사람이기 때문이지."
신성재는 평행세계에서 마법 지식을 받을 때 부수 효과로 마나도 받았다. 그 마나는 일 년 동안 몸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마나의 양이 그의 초기 마나량이 되었다.
일 년이나 마나가 몸속에 고정되어 있었던 덕분에 그는 현대 지구인인데도 마나를 쉽게 감지했다.
그래서 그는 무인도에서 상처 복원 마법이나 공격마법을 곧바로 쓸 수 있었다.
반면에 은가은은 평범한 사람이다. 살면서 마나를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마나 감지를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은가은이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흔들며 통곡했다.
"우애앵! 왜 나만 안 되는데!"
"너만 안되는 거 아니다."
"그럼?"
"마법은 말이야."
신성재가 자랑했다.
"나만 되는 거야!"
"뿌애앵!"
***
은가은은 삐졌다.
신성재가 살살 달랬다.
"밥 사줄 테니까, 먹고 기분 풀어라."
은가은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소고기?"
"돈은?"
"과외비 받잖아."
은가은의 부모님은 신성재가 무인도에서 은가은을 보호해주고 살려서 데려온 걸 무척 고마워했다. 그래서 은가은이 고3 수능을 볼 때까지 과외를 고액으로 맡겼다.
"너 대학 갔으니까 과외도 끝났어. 이제 알바비가 없으니 소고기도 없다."
"그럼 돈을 벌어야지!"
"취직하면 마법 연구할 시간이 없어."
은가은이 물었다.
"돈 만드는 마법은 없어?"
"개인이 지폐를 만들면 중범죄다?"
"아니, 그거 말고. 오빠 혹시 연금술도 가능해?"
"연금술 지식은 있지. 이쪽 세계에는 저쪽 세계의 재료가 없어서 그대로 적용할 순 없지만."
은가은이 손뼉을 쳤다.
"그거다!"
"응?"
"연금술로 황금을 만드는 거야! 아주 황금탑을 쌓아! 난 그 탑에서 가끔 떨어져나오는 금괴 정도로 만족할게!"
신성재가 피식 웃었다.
"되겠냐?"
"안돼?"
다른 물질을 황금으로 바꾸는 건 저쪽 세계에서도 안 되는 일이다. 마나가 감지되지 않는 지구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은가은은 실망했다.
"쳇. 날로 먹나 했더니."
"생선구이나 먹으러 가자."
"아싸! 생선구이!"
***
식당에 가서 모듬 생선구이를 먹였더니 은가은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맛있냐?"
은가은이 젓가락으로 고등어 살을 집으며 대답했다.
"우리 무인도에 있을 때는 물고기 작은 거 한 마리 잡아서 구워 먹어도 신났는데, 여긴 봐. 이렇게 큰 생선을 막 먹어도 돼."
"너 지금 너무 막 먹어."
"게다가 이거 고등어야!"
그녀가 고등어 살을 입에 넣으며 배시시 웃었다.
"부자 된 거 같아."
"그래. 더 먹어라. 넌 고등어로 플랙스가 되니까 가성비가 참 좋구나."
그렇게 말하는 신성재도 생선구이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성비가 좋은 입을 가졌지만, 그래도 돈을 벌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연구하려면 자유로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마법은 회사에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연구가 아니다.
그런데 직장이 없으니 연구비나 생활비가 모자랐다. 이제 과외도 끝났다.
"그렇다고 취직해서 출근하면 연구할 시간이 없으니까, 다른 대안이 필요한데…."
생선구이 식당의 TV에서 골동품의 가치를 매기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신성재는 대학교만 졸업하고 취직은 하지 않았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마법 연구비도 꽤 많이 필요했다.
그 돈을 외국에서 지내는 부모님께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한국에서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면서 사는 줄 안다. 2년 전에 무인도에 한 달간 조난됐다가 구출됐다는 것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식당 TV에서 골동품 전문가가 말했다.
- 이 도자기는 여기 이 부분이 파손되지만 않았다면 가치가 열 배는 더 높았겠지요.
- 네. 정말 아쉽습니다. 이 작은 손상 하나로 가격이 열 배나 차이가 나는군요.
신성재가 그걸 보며 말했다.
"저런 거 고쳐 팔면 돈이 되나?"
은가은이 고등어를 깨끗하게 발라먹으며 말했다.
"되겠지?"
"저렇게 깨진 건 가격이 싸겠지?"
"그래도 저 정도면 꽤 비싸지 않나?"
"파편 몇 조각만 남은 건?"
"그건 그냥 버릴걸?"
"음…."
신성재가 복원 마법의 한계를 생각해보았다.
'그렇게까지 파손된 건 아직은 안 돼. 부서진 조각이 다 있어야 해.'
모래시계 마법을 쓰면 깨진 걸 도로 붙이거나 변형된 걸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소실된 걸 생성해내진 못한다. 그건 복원이 아니라 창조 마법의 영역이다.
은가은이 물었다.
"왜? 깨진 도자기가 필요해? 아빠가 아끼는 백자가 있는데, 내가 슬쩍 깨서 가져올까?"
"아끼는?"
"아빠 말로는 조선 시대 백자래."
"그걸 깨면, 감당은 되고?"
"깬 줄도 모르게 쓱 고쳐놓으면 되잖아."
"그럼 뭐하러 깨는데?"
은가은이 젓가락으로 식탁을 톡 쳤다.
"아차!"
"이런 너를 대학 보내느라 내가 2년 반 동안 진짜 고생 많이 했다. 장하다. 신성재."
"고등어 맛있다. 히히."
"바보 흉내를 너무 잘 내서 진짜인 줄 알겠다. 아니, 진짜인가?"
"나 바보 아니다!"
"진짜구나."
4. 복원
신성재는 은가은을 집에 보내고 혼자서 종로에 갔다.
그는 망가진 골동품을 어디서 파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인사동 골동품점이나 고미술상을 둘러보려고 했다.
처음 방문한 가게에서는 주인이 코웃음을 쳤다.
"여기엔 그런 건 없습니다. 멀쩡한 걸 팔아야지 깨진 걸 왜 팝니까?"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고미술점이었다.
"우린 완벽한 상태의 미술품만 거래합니다만?"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골목 안쪽에 있는 골동품점이었다.
그 가게의 주인인 도종호 사장이 말했다.
"어…. 특이한 걸 찾으시네."
"그래서 그런지 찾기가 쉽지 않네요. 여기도 없을까요?"
"마침 그런 게 있긴 한데."
그가 안쪽으로 들어가 작은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속에는 일곱 조각이 난 비녀가 들어 있었다. 금속이 아니라 옥을 깎아 만든 비녀였다.
"비녀네요?"
"100년쯤 전에 만들어진 물건인데, 열흘쯤 전에 우리 딸이 깨먹었습니다."
"깔끔하게 잘 깨졌네요."
"우리 딸이 월급 받으면 돈으로 받아내려고 잘 가지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거, 복원하실 겁니까?"
"글쎄요. 이게 문화재도 아닌데 굳이 옥비녀를 돈 들여서 복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성재가 비녀의 상태를 보았다. 일곱 개로 조각나긴 했는데 다행히 소실된 부분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제안했다.
"그럼 이걸 제가 사고 싶은데요."
"이걸?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주긴 하는데, 이걸 사서 어디 쓰려고요?"
"제가 복원해보려고요."
도종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접착제로 억지로 붙여봤자 제대로 붙지도 않고, 붙는다 해도 가치가 없습니다. 박물관에 들어갈 유물급도 아닌데 그렇게 붙인 걸 누가 사겠습니까?"
"접착제 안 쓰고 해결하려고요."
"예? 어떻게…."
"저만의 노하우입니다."
"음…."
도종호 사장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뭐 옥값만 줘요. 잘 갈면 간단한 장신구는 만들 수 있을 양이니까…. 5만 원?"
"복원한다는 말을 안 믿으시는군요."
"하하하. 전문 업체에 비싼 돈을 주고 맡기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
도종호 사장의 딸 도서윤 형사가 그날 저녁때 가게로 찾아왔다.
"아빠. 여기 있던 비녀 어디 갔어? 내가 깨먹은 그거. 내가 살게."
"그거 원래는 백만 원은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깨져서 아니잖아. 2만 원이면 되지? 이 돈으로 저녁 먹자. 국밥 좋지?"
"내 딸이 형사가 된 줄 알았더니 날강도가 됐구나."
"가난한 공무원이라서 그래!"
"근데 그거 이미 팔았다."
"엥? 깨진 건데 어떻게 팔려?"
도종호가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젊은 손님이 이 돈 주고 사더라. 복원해보겠다길래 그러라고 했지. 저녁은 이걸로 먹자."
"앗! 그럼 오늘 저녁은 낙원 상가 아구찜!"
"내가 날강도를 키웠어."
***
신성재는 5만 원을 주고 산 옥비녀 조각을 집에서 맞춰보았다.
일곱 개의 조각은 절단면이 대충 잘 맞았다. 잃어버린 건 없었다. 심지어 깨알처럼 작은 조각들까지 먼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바닥에 있던 걸 다 쓸어담았나 본데…."
조각을 잘 맞춰도 절단면의 경계가 손끝에 느껴졌다.
"이 작은 조각들이 떨어져나온 자리겠지."
그래도 이정도면 상태는 괜찮았다.
그는 먼저 비녀를 일렬로 맞춰놓았다. 그런 후에는 조각난 부분이 벌어지지 않게 집게를 이용해 고정했다.
신성재가 비녀에 손을 대며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대상의 상태를 이전으로 되돌리는 마법이 그의 손에서 발현되었다. 몸속에 저장된 마나가 소비되었다.
비녀의 상태가 변했다. 집게를 이용해 붙여놓은 절단면이 저절로 수복되며 스르륵 달라붙었다.
모래시계 마법은 이미 발동됐지만, 절단된 곳이 많아 추가 마나가 소모되었다.
그래도 효과는 대단했다. 절단면은 처음에는 가느다란 금이 남은 상태로 복원되었다. 마나를 조금 더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균열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신성재가 마나 공급을 중단했다.
그가 비녀를 고정한 집게들을 빼며 말했다.
"어렵지 않네."
아직 복원 마법의 숙련도가 낮아 마나를 많이 써야 했다. 집중도 해야 했고, 시간도 걸렸다.
대신에 결과가 좋았다. 옥비녀가 완벽하게 원래 형태로 되돌아왔다.
그가 표면을 살폈다. 깨질 때 떨어져 나간 미세한 조각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깨진 자리 중 일부에 작은 흠집들이 생겨 있었다.
이미 떨어져 나가 사라진 부분은 새로 만들어낼 수 없다.
대신에 절단면 주변의 물질을 조금 이동시켜 흠집을 메울 수는 있다. 신성재가 모래시계 마법을 다시 사용했다.
비녀 표면의 옥 성분이 깨어진 부분으로 스르륵 이동해 그 자리를 채웠다.
순식간에 미세한 흠집조차 사라졌다. 비녀는 깨진 적이 없는 것처럼 단단하게 붙었다.
신성재가 비녀를 들어 빛에 비춰보며 말했다.
"이걸 그 가게에 도로 팔면 얼마나 하려나."
이 작업 자체는 짧았지만, 준비하는데 시간이 꽤 걸려 이미 저녁때는 놓치고 한밤중이 되었다.
"밥이나 먹고 와야지."
***
도서윤 형사는 종로에 가서 밥을 먹고 경찰서로 돌아왔다. 오늘도 야근이다.
뉴스 체크를 위해 틀어놓은 TV에서 살인강도 사건이 나오고 있었다.
범인이 저지른 강도질은 밝혀진 것만 세 건이다. 그중 한 건은 피해자가 사망했고, 다른 한 건은 피해자가 중환자실에 있었다.
형사팀장이 말했다.
"저 새끼가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다. 사건은 셋인데 칼에 찔린 피해자가 다섯이고 그중 한 명은 사망했다."
다친 피해자 중 한 명은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이다.
그 강도 사건은 세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관할 경찰서도 셋이다. 도서윤도 그중 한 경찰서에서 근무했다.
팀장이 말했다.
"칼을 잘 쓰는 놈이고, 찌를 때 망설임이 없는 놈이다. 빨리 못 잡으면 피해자가 또 나올 텐데."
팀장이 도서윤을 돌아보았다.
"이 상황에서 넌 아구찜이 입에 들어가디?"
"아빠가 오늘 장사가 잘 됐다면서 사주셨어요."
도서윤이 가족을 팔았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순식간에 쓰레기가 된다. 팀장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어…. 우리도 밥은 먹고 일해야지. 하여간! 저 새끼 잡기 전엔 퇴근 못 하니까 그렇게 알아!"
"누군지 알아야 잡죠."
"몽타주는 나왔잖아!"
"마스크 쓴 상태의 몽타주라서 그걸로는 어렵지 않나 싶은데요."
***
신성재가 비녀를 내려놓고 밥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 근처 식당들은 문을 닫았다. 대신에 편의점이 있었다.
"도시락이랑 컵라면 원 플러스 원 있으면 좋겠다. 도시락에 뜨끈한 국물이…."
편의점 쪽에서 날 선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마법을 각성한 후에 생긴 감각이다.
"음?"
잠시 후에 그쪽에서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남자가 뛰어왔다. 남자의 손에 칼이 있었다.
남자가 신성재 쪽으로 뛰면서 칼을 앞으로 휘둘렀다.
"비켜 이 새끼야!"
"아이고 무서워라."
신성재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마법을 발현했다.
[바람 주먹]
마나의 힘이 공기에 물리력을 부여했다. 마법에 맞았을 때 생기는 자국이 주먹과 비슷해 이 마법의 이름은 바람 주먹이 되었다.
아직 마법의 숙련도가 낮아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바람 주먹'은 근접전투용 마법이라 손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위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신에 거리가 가까우면 충분한 위력이 나왔다.
바람 주먹 마법이 달려오는 놈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케엑!"
칼을 앞으로 휘저으며 뛰어오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편의점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신성재가 혀를 찼다.
"쯧. 도시락 사 먹으려고 했는데, 글렀네."
그가 편의점 앞으로 걸어갔다.
편의점의 여자 직원이 한쪽 팔에서 피를 흘리며 야외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이 세 명 있었다.
"강도였대요."
"신고는 했대요?"
"119도 불렀대요."
도와주려고 다가간 사람도 두 명이 있었다.
신성재가 직원의 옆으로 걸어가 팔에 손을 댔다.
"아프시겠다."
"네? 네?"
"제가 이런 거 잘 보는데."
"네?"
칼에 맞은 직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신성재가 그녀의 팔에 마법을 슬쩍 걸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방금 찔린 상처라면 이 마법이 특히 잘 듣는다.
마법이 발현되자마자 상처 제일 안쪽의 혈관이 빠르게 수복됐다. 중요한 신경은 다치지 않았다. 칼에 다친 근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고통스러워하던 직원의 얼굴이 갑자기 확 펴졌다.
"어?"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이젠 좀 참을 만해졌다.
신성재는 완전히 치료될 만큼 마법을 쓰진 않았다. 칼에 맞아 피가 흘렀으니 상처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한다.
"깊은 상처는 아니네요. 흉터는 병원에서 해결해줬으면 좋겠는데."
신성재가 직원의 팔에서 손을 뗐다.
지금은 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긴 글렀다. 이 시간에는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이 없다.
그는 입맛만 다시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갈 때는 다른 골목을 사용했다.
"라면이나 먹어야겠다. 달걀 두 개 넣어서."
***
도서윤 형사가 편의점 강도 사건 현장에 출동했다가 돌아와 팀장에게 보고했다.
"편의점 직원이 팔에 칼을 맞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깊은 상처는 아니랍니다."
형사팀장이 물었다.
"피해자가 피를 많이 흘렸다더니?"
"그렇긴 한데요. 병원에 확인해보니까 상처 자체는 깊지 않답니다. 지금 치료받는 중입니다."
"다행이네. 범인은 어떻게 잡은 거야?"
범인은 이미 체포됐다는 소식이 형사팀에도 전달된 상태였다.
다른 형사가 보고했다.
"근처 골목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잡은 사람은?"
"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서 확인이 안 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나 주민이 잡은 게 아닐까 합니다만…."
"범인은 뭐래? 누구한테 맞았대?"
"제대로 못 봤답니다. 그저…."
"그저?"
"주먹이 보이지도 않았다고…."
"주먹이 그렇게 빨라? 권투선수인가?"
"종합격투기일 수도 있습니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범인을 잡아놓기만 하고, 나서지 않는다?"
도서윤이 옆에서 설명했다.
"범인의 코뼈가 부러졌거든요. 이빨도 세 대가 나갔고요. 얼굴에 주먹을 아주 제대로 꽂았던데요."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거군. 하긴. 강도 잡았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형사팀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도서윤이 전화를 받았다.
"어? 네? 누구라고요?"
그녀가 전화를 받다 말고 팀장에게 말했다.
"팀장님. 잡았다는데요?"
"누구를 잡아?"
도서윤이 벽에 있는 수배자 몽타주를 가리켰다. 요즘 그들이 퇴근도 못 하게 만든 살인강도의 몽타주였다.
"저 새끼요."
팀장은 깜짝 놀랐다.
"뭐? 어디서?"
"아까 편의점 옆에서 붙잡힌 강도 놈이요. 그놈이 그놈이라는데요?"
"확실해?"
"피해자가 마침 인터넷에 올라온 저 수배 몽타주를 보다가 범인을 알아봤답니다. 범인이 그걸 눈치채고 칼을 휘둘렀다고 하고요."
"그럼 확실하겠네! 예전 현장에서 DNA 나온 거 있지? 긴급으로 확인 요청해!"
수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붙잡힌 놈이 그들이 찾던 범인이라는 건 금방 확인됐다.
팀장이 말했다.
"운이 좋았구나. 피해자가 팔만 조금 베이고 끝났으니까."
도서윤이 말했다.
"피해자가 운이 더 좋았으면 범인과 마주치지도 않았겠죠."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저 새끼 잡았잖아."
"아, 네."
최근 시끄럽게 하던 살인강도를 잡았다. 직접 잡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못 잡는 것보단 훨씬 낫다.
"그런데 저 새끼한테 현상금이 걸려 있잖아."
"네. 그러니까 돈이 나오겠죠."
형사팀장이 지시했다.
"그럼 그 사실을 공개해 보자고. 현상금 뉴스를 보면 그 사람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
5. 시계
신성재가 이튿날 골동품상점을 다시 찾아갔다.
도종호가 그를 알아보고 웃었다.
"다시 오셨네? 복원은 어떻게 할 만합니까?"
"다 고쳤습니다."
"에이. 접착제로 붙이면 안 된다니까요."
신성재가 어제 받아간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렇게 복원한 거 아닙니다."
도종호가 상자를 열며 웃었다.
"하하하. 그럼 뭐 쇠붙이처럼 용접이라도 했…."
도종호의 표정이 굳었다. 조각났던 비녀가 온전한 형태로 들어 있었다.
"어? 어?"
"잘 붙였지요?"
도종호가 비녀를 들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이렇게…. 붙인 부분이 하나도 안 보이게…."
그가 옥비녀를 불빛에 비춰보았다.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보기도 했다.
그러다 아예 확대경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손잡이가 달린 동그란 확대경을 썼다. 그다음에는 시계 공방에서 쓰는 고배율 확대경을 이용해 표면을 살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잠시만요."
그는 이번에는 스마트폰용 광학 현미경을 꺼냈다. 그건 도종호가 골동품의 진품 여부를 판단할 때 가끔 쓰는 것이다.
그가 고배율로 비녀의 표면을 살폈다.
"대단하군요. 이건 그냥 부러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무슨 접착제를 쓴 겁니까?"
"접착제는 아니라니까요."
"아. 그러셨지. 그럼 무슨 레이저나 초진동 접합 장치 같은 걸 쓰신 건가? 뉴스에서 보니까 첨단기술 업계에서는 그런 것도 쓴다던데…."
"노하우는 공개할 수 없어서요."
"아. 하긴. 노하우는 중요하죠."
신성재가 물었다.
"이 비녀를 도로 매입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죠. 그런데…."
도종호가 현미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이거 단단히 잘 붙었는지 확인이 좀 더 필요한데…."
"확인하시죠."
"그리고…."
"왜 그러십니까?"
"내가 값을 깎으려는 게 아니라, 이 상태면 이거 팔 때 50만 원쯤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수리한 곳이 떨어지면 돈은 돌려주는 조건으로요."
"나쁘지 않네요."
5만 원에 산 게 50만 원이 되면 마법 한 방에 열 배로 가치가 올라간 게 된다.
물론 이 골동품상에서 50만 원에 그대로 매입해줄 리 없다. 여기서도 손님을 찾아 판매하려면 남는 게 있어야 한다.
도종호가 설명했다.
"근데 이 비녀가 원래는 100짜리란 말이죠."
"수리해서 가격이 반으로 떨어진 겁니까? 수리는 완벽해서 내구도가 약해지진 않았습니다만?"
수리 과정에서 비녀 속에 숨어 있던 미세한 균열이 추가로 사라졌다. 그래서 내구도는 오히려 올라갔다.
"당연히 그것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이 표면 문양 때문입니다. 여기를 보시죠. 좀 지워졌습니다."
"아…."
"수리하다 이렇게 된 것 같은데, 이러면 가격이 많이 깎입니다."
신성재는 비녀 표면의 문양이 왜 살짝 지워졌는지 깨달았다. 깨진 부분을 다시 붙일 때, 모서리가 미세하게 떨어져 나간 곳들이 있었다. 그걸 그대로 붙였더니 그 자리는 흠집으로 남았다.
그 흠집은 바로 옆에 있는 비녀의 다른 부분을 이용해 매웠다. 물질을 창조한 게 아니라 옥비녀의 표면 성분을 끌어다 쓴 것이다.
그때 그 표면에 있던 무늬가 조금 지워졌다.
그래서 이 옥비녀는 부러졌던 부분마다 표면의 무늬가 조금씩 지워진 상태로 복원됐다.
도종호가 말했다.
"이 부분들만 지워진 걸 보면 이게 어제 5만 원에 판 그 비녀가 확실한데, 거 참 신기하네요. 이게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달라붙지?"
신성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궁리했다.
'복원을 완벽하게 하려면 보조 마법이 필요하겠어.'
해결법은 있다. 원래 무늬나 상태를 확인하고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 기능을 하는 보조 마법이 필요하다.
지금 이 비녀는 이미 마법으로 복원한 상태라 다시 손대기 어렵다.
신성재가 물었다.
"그래서 매입하실 건가요?"
"음…. 나도 남는 게 있어야 하니까, 30만 원?"
"30에 받아서 50에 파신다…. 그렇게 원가 다 공개하셔도 됩니까?"
도종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원래는 안 되죠. 그런데 이렇게 실력이 좋은 복원 전문가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어차피 이 바닥 일 좀 하다 보면 원가 정도는 금방 알게 될 테고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아. 도종호입니다."
"신성재입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합니다. 우리 딸은 사고나 치고 다니는데. 그 비녀도 우리 딸이 깨 먹은 겁니다."
"어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걔가 공무원입니다. 하하하."
"따님이 나랏일 하시는군요."
"그렇죠. 으하하하."
딸을 칭찬하니 분위기가 좋아졌다. 신성재는 믹스 커피까지 얻어 마시며 골동품 업계의 동향을 들었다.
신성재가 대화 도중에 물었다.
"망가진 물건 중에, 완벽하게 복원하면 가치가 확실히 커지는 게 있을까요?"
"그런 거야 많지요. 매장에 가져다 놓지 않아서 그렇지."
"가지고 계신 게 있으면 제가 샀으면 하는데요."
오늘 비녀를 팔면 30만 원을 받는다. 원가는 5만 원이니 다섯 배가 남았다.
"30만 원쯤 하는 거로요."
"음…. 그 가격대는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나중에라도 구해지면 연락 주시죠."
***
그날 저녁때 도서윤 형사가 가게에 들렀다. 그녀가 어젯밤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 현상수배까지 떨어진 강도를 누가 편의점 옆 골목에서 딱 잡아놓고 사라졌다니까?"
"그렇구나."
"현상금을 줘야 하는데 누군지를 몰라서 줄 수가 없어. 나타나지도 않아. 진짜 누구지?"
도종호 사장은 비녀를 확인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구나."
"아빠. 내 말 듣고…. 어? 그 비녀 그거잖아."
"그래. 네가 부러뜨린 그거다."
"그게 왜 멀쩡해? 그리고 그거 어제 팔았다며."
"고쳐왔더라. 그것도 겨우 하루 만에. 그래서 30만 원에 다시 샀다."
"그게 돼? 접착제로 붙이는 건 안 된다더니?"
도종호가 비녀를 살펴보며 말했다.
"원래는 안 되는 게 정상인데, 그걸 해냈더라. 현미경으로 접합 부분을 확인해봤는데 완벽하게 붙였어. 부러진 부분을 따라 무늬가 살짝 지워지긴 했지만, 이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신기하네. 연구소 같은 곳에서 무슨 최신 장비라도 썼나?"
"노하우라더라고. 왜? 소개해줘?"
도서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골동품 복원 기술이 수사에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아."
***
이튿날 도종호 사장이 신성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신성재 씨. 파는 게 아니라 복원을 맡겼으면 하는 게 있는데, 이건 옥이 아니라 쇠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모래시계 마법은 잘만 쓰면 총에 맞은 상처도 지워버릴 수 있다. 다만 상처 치료는 시간제한이 있다.
그런데 사물은 그 제한이 크게 완화된다.
특히 금속은 그 제한이 더 널널하다. 금속 원자는 시간이 지나도 다른 물질로 대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속 복원은 더 잘합니다."
- 아. 그래요? 그러면 시간 될 때 좀 오겠어요? 물건을 보여줄 테니까.
신성재가 그날 오후에 도종호의 골동품상점에 들렀다.
도종호가 안쪽으로 들어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나무로 만든 상자는 가로세로 각각 한 뼘 정도 크기였다.
상자의 나무는 최근 생산되는 합판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원목이었다.
"내 친구가 최근에 옛날 물건을 정리하다가 찾은 시계입니다. 그 친구 증조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돈 잘 쓰면서 놀고먹는 한량이셨는데, 그분이 쓰셨다더군요."
도종호가 상자를 열었다.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시계는 반쯤 부서진 상태였다.
"이건…."
"뭐에 맞아서 이렇게 됐는지 몰라도, 아주 옛날에 심하게 망가졌다더군요."
도종호가 신성재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외형이라도 그럴듯하게 복구하면 친구한테 체면이 서겠는데요."
이 시계를 복구하려면 소실된 부분이 없어야 한다.
찌그러지고 금이 가고 찢어진 건 상관없다. 그런 건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까짓거, 해보죠."
"외형만이라도 원래대로 만들어주면, 수리비로 100만 원까지 생각한다더군요. 그런데 새로 만들어 끼우는 게 아니라, 이걸 그대로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을 더 쓰라고 하긴 했는데…."
"수리비는 다 고쳐놓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시죠."
***
신성재가 망가진 회중시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형을 복원하는 건 모래시계 마법을 쓰면 쉽게 되는데…."
이 시계는 파손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서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소실된 부분을 주변에서 함부로 끌어다 채워서 복구하면 원래 형태를 좀 잃겠지."
옥비녀를 수리할 때는 그러다가 무늬가 좀 지워졌다. 그러면서 가격도 낮아졌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신성재는 평행세계 마법사 신성재의 지식을 넘겨받았다. 그 지식을 처음 깨달을 때 마법도 몇 개 개방했다.
그것과 완전히 다른 마법을 새로 개방하는 건 쉽지 않다. 가능은 한데, 지금 지구에서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했다.
다만, 이미 개방된 마법과 연관된 건 그나마 할 만했다.
"어디 보자. 마법 테크 트리가…."
신성재는 이미 개방한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과 연결된 것 중에서 도움이 될 만한 걸 조사했다. 그러다 적당한 마법을 찾아냈다.
"크로노스의 눈?"
사물이 큰 충격을 받거나 특별한 힘에 노출됐을 때, 그 시점의 주변 상황을 잔상을 보듯이 돌려보는 마법이 있다.
그건 크로노스의 모래시계와 연계된 마법이라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도 신규 개방이 가능했다.
"물건의 과거 전체를 보는 건 무리지만…."
지금 이 회중시계는 완전히 찌그러지고 찢긴 상태다. 이러면 부서질 때의 상황이 시계에 강하게 새겨지고, 마법으로 그 잔상을 도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마법은 단독으로 쓸 수는 없다. 모래시계 마법과 연동되는 것이라, 시계를 복원하면서 같이 사용해야 한다.
"눈 마법을 개방하려면 며칠은 연구해야겠다."
6. 잔상
신성재는 새로운 마법 연구에 사흘을 썼다.
평행세계에서의 마법 이론은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그걸 현대 지구에서 쓰려면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신성재가 부서진 시계에 손을 대고 마법을 사용했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이 마법은 무인도에서 개방해 그동안 여러 번 사용했다. 그만큼 숙련도도 높아졌다.
마나가 소모되면서 시계의 우그러든 금속판이 서서히 펴졌다. 마치 구겨진 천이 쭉 펴지는 듯했다.
시계 유리는 금이 쫙쫙 가 있었다. 그 균열 사이가 도로 채워지며 달라붙었다. 그러면서 금 간 유리가 점점 깨끗해졌다.
신성재는 이 시계의 외형만 수리하는 게 아니다.
"안쪽도 복구해야 제값을 받지."
마나가 추가로 소모되었다. 시계 내부에서 찌그러져 있던 기어나 태엽, 휘어진 시곗바늘이 점점 원래 형태를 찾아갔다.
'역시 소실된 부분이 좀 있어.'
내부는 밀봉되어 있어 소실된 게 없지만, 외부는 상태가 달랐다. 유리는 1%쯤 소실됐고, 시계 외부의 금속도 조금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복구되는 시계의 모습은 딱 그 부족분만큼이 원래와 달라졌다.
이제부터 그걸 도로 채워야 한다.
신성재가 시계가 부서질 때의 상황을 마법으로 들여다보았다.
[크로노스의 눈]
마나가 추가로 소모되었다. 당시 상황이 마치 현장에서 보듯 선명하게 보였다.
시계가 찌그러진 건 권총탄에 맞았기 때문이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으로 맞은 덕분에 시계의 주인은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런데 그 상황이 특이했다. 신성재는 시계의 상태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주변까지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그가 마나를 계속 투입했다. 시계를 중심으로 주변 모습이 입체적으로 보였다. 마치 3D 홀로그램 영상 한복판에 들어가 주변을 보는 듯했다.
"이건…."
일단 잔상 확인 마법을 멈추었다. 당시 상황은 충분히 파악했다.
아직 복원 마법은 종료되지 않았다. 잔상 역시 정지된 상태로 시야 한쪽에 떠 있었다.
그는 과거 잔상과 현재 시계를 겹쳐 보았다. 어디가 소실됐는지 확실히 보였다. 무늬가 없는 부분에서 필요한 금속을 조금 끌어내 손상된 부분을 채웠다.
찌그러지고 깨진 부분을 복원하는 것보다 이 작업이 더 오래 걸렸다.
시계의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그걸 복원하는 데 마나를 많이 썼다. 크로노스의 눈도 마나를 소모했다.
시계 복원에 쓴 마나는 무인도에서 처음 확보했던 마나의 1.5배나 됐다.
그동안 신성재의 최대 마나량이 꽤 늘었다. 이제 이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내 마나통이 많이 커졌네."
신성재가 한 시간 동안 복원한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손에는 사용감은 조금 있지만 잘 관리된 시계가 들려 있었다. 자잘한 흠집은 있어도 완전히 부서졌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성재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거, 실수로 부서진 게 아니야."
그는 시계가 권총탄을 빗맞을 때 주변에 보인 것들을 떠올렸다. 마법을 사용할 때의 느낌과 주변의 정보로 언제 이 시계가 망가졌는지 추측했다.
"그 당시 사건이…."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도 기록을 보면 그때의 일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는 인터넷으로 100년 전에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검색했다.
일제 강점기라 해도 종로에서 일본 순사가 권총을 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만약 그 일이 역사적 사건이라면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시계 주인은 도망치는 사람을 도와주다가 대신 총에 맞은 건데…."
관련 정보를 찾다 보니, 도망치던 사람의 얼굴 사진이 나왔다.
"독립운동하던 분이네."
이 시계의 주인이 아니라, 순사를 피해 도망치던 사람이 독립운동가였다.
시계의 주인이던 한량은 그때 술을 마시고 휘적거리면서 걷다가, 그 사건에 우연히 끼어들었다.
***
신성재가 도종호 사장을 만나 나무 상자를 넘겼다.
"시계의 복원이 끝났습니다."
도종호가 눈을 껌뻑였다.
"벌써요?"
"제가 원래 빠릅니다."
도종호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구부러진 것은 펴고, 찢겨나간 곳은 용접했겠지. 그것만 잘해도 충분….'
상자를 열던 그의 표정이 굳었다.
"어?"
그가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이렇게…."
그가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용접 자국도 없고, 편 자국도 없고…. 설마 다른 시계의 뚜껑을 가져다 갈아 끼운 건 아니죠? 그러면 안 되는데…."
부품을 통째로 갈아 끼울 거면 신성재에게 맡길 필요가 없다.
"전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만?"
신성재는 시계 표면의 흠집까지 지우진 않았다. 그가 마법으로 복원한 건 부서지기 직전 모습이다. 그때까지의 사용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종호는 친구가 준 사진을 꺼내 지금 이 시계와 비교했다. 그건 100년 전에 찍은 사진의 복사본이었다. 사진 속 시계에서 보이는 흠집이 지금 이 시계에도 있었다.
도종호가 눈을 껌뻑이다가 물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고철이 이렇게 감쪽같이 복원됩니까? 그것도 이렇게 빨리."
"노하우라서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가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정도면 그 친구도 만족…. 어?"
시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도종호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왜… 작동합니까?"
"내부 부품도 다 복원했거든요."
"예?"
"톱니바퀴부터 태엽까지 싹 다."
도종호는 상식선에서 상황을 이해했다.
"아. 그러면 내부는 요즘 만들어진 다른 시계에서 가져다가 교체…."
"원래 있던 부품들을 그대로 복원했습니다."
"예?"
도종호가 눈을 껌뻑이다가, 돋보기를 가져와 시계를 확인했다. 기록용으로 받아둔 사진과도 비교했다.
사진으로는 세밀한 곳까지 비교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시계의 문자판이 사진 속에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거기에도 같은 흠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계 전문가는 아니다. 그렇지만 신성재의 말이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시계의 내부 부품까지 진짜 옛날 것인지는 시계 전문가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의심할 게 아니라 믿는 게 낫다.
그런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이게 왜 가능합니까?"
"되던데요."
"아니, 어떻게…."
"노하우라서."
도종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도종호의 머릿속에 이것 외에도 복원이 필요한 골동품이 몇 개 생각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안다.
그걸 맡기려면 지금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원래 이 시계의 복원비는 100만 원이었다. 그런데 그건 시계의 외형만 완벽하게 복원했을 때의 가격이다.
100년 전에 만들어진, 다 부서진 시계를 부품 단위로 수리해 다시 작동하게 만들었다면 가격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신성재와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여기서 가격을 후려치면 이제 막 시작한 관계가 깨진다.
"이 시계 주인인 친구에게 이야기해서, 복원비를 제대로 받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복원했는데 100만 원은 말이 안 되죠. 더 받아야죠."
신성재가 말했다.
"제가 그분 좀 만났으면 하는데요."
"예? 왜…."
"이 시계가 망가진 이유를 아시나 해서요."
"증조할아버지가 한량이라 그냥 해먹었다던데요."
"그게 아닙니다."
"예?"
***
박성훈은 꽤 큰 인테리어 회사의 사장이다.
신성재가 박성훈을 만나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분은 독립운동으로 훈장까지 타신 분입니다. 이분의 회고록에 있는 이 부분을 보시죠."
'일제 순사에게 쫓기던 그때 내가 피할 수 있게 틈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었다. 머리에는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 문장 뒤에도 인물 묘사가 더 적혀있었다.
박성훈이 침을 꼴깍 삼켰다. 많이 듣던 외모였다.
"설마 이 사람이…."
'그 사람은 나를 돕다가 순사의 권총에 대신 맞았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총에 맞아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조국이 해방된 후에 그 사람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누구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신성재가 말했다.
"박성훈 사장님의 증조할아버님이 맞을 겁니다."
"아니, 왜 그걸 말씀을 안 하시고…."
"일제 강점기에는 그 일이 밝혀지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갈 수 있어서 비밀로 했을 겁니다."
"아니, 한량이셨다고 들었는데…."
"한량이라도 그 상황에서는 독립운동가를 돕고 싶으셨나 보죠."
박성훈은 당황했다. 믿고 싶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냥 넙죽 믿기는 어려웠다.
"이걸 믿어야 하는지 난감합니다."
"안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죠. 워낙 옛날 일이라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
이튿날 도종호 사장이 말했다.
"그 친구가 진짜 만족하더군요."
박성훈은 도종호에게 연락해 복원비로 5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닙니까? 겨우 시계 하나인데요."
"내부 부품까지 전문가에게 맡겨서 확인했는데, 그걸 다 어떻게 복원했는지 전문가도 놀랐답니다. 그것까지 고려해서 수리비를 책정했답니다."
"저야 좋지요."
그 회중시계는 100년 전에도 비싼 물건이었다. 현재의 물가로 환산하면 500만 원보다 훨씬 더 비싼 시계였다.
그런 시계가 100년이 지났는데도 보존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그러면 지금 가격은 그때보다 많이 비싸진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수리비를 신성재 씨를 만나서 직접 주고 싶다더군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신성재 씨가 그 시계에 관해 해준 증조할아버님 이야기 말입니다. 확인했답니다."
***
이튿날 도종호 사장의 가게에서 시계 주인인 박성훈과 신성재가 만났다.
박성훈이 회중시계를 상자에서 꺼내며 말했다.
"어머니께 이 시계를 보여드리면서 어제 들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제 증조부,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의 할아버지께서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한 번씩 하셨답니다."
박성훈이 살짝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증조부께서 살면서 딱 한 번, 목숨을 걸고 일본 순사와 싸운 적이 있답니다. 그때 이야기를 어머니가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그 이야기는 박성훈도 어젯밤에 처음 들었다.
"가문의 영광이죠. 하하하."
신성재가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증조부님께서 그때 하신 일을 증명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신성재 씨에게 의뢰하려고 합니다. 그 조사까지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신성재가 그 당시 상황을 아는 건, 크로노스의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때 일제 순사에게 쫓기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마법으로 봤던 상황을 인터넷에 검색해서 알아냈다.
그 사건은 기존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알아낸 게 아니다. 그러니 이런 의뢰는 받을 수 없다.
"저는 다른 일이 많습니다. 그건 전문가에게 의뢰하시죠."
"아…."
신성재가 너무 단호히 거절해서, 박성훈은 조사 의뢰를 포기했다.
"대학교수 쪽으로 알아봐야겠군요."
박성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시계 복원 비용은 이미 받았다. 이건 다른 일의 사례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도 자랑할 게 하나쯤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꼭 사례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박성훈은 인테리어 공사 업체 사장이라는 명함도 내밀었다.
"혹시 집 인테리어 하실 일이 있으면 확실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신성재는 돈도 반갑지만 이게 더 반가웠다.
마법사의 연구실을 만들려면 집 내부 공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사는 곳은 그의 집이 아니다. 게다가 마법사의 연구실을 만들려면 원룸이 아니라 지하실이 포함된 단독주택이 필요하다.
신성재가 명함을 확인했다. 인테리어가 주력이고 필요하면 단독주택 건축도 하는 회사였다.
신성재가 말했다.
"나중에 집을 사면 의뢰하겠습니다. 조금 특이한 구조로 공사할 게 있거든요."
"그때는 원가만 받고 해드리죠. 하하하."
***
그날 저녁때 골동품 가게 사장 도종호가 도서윤에게 물었다.
"딸. 너 알바 할 생각 없냐? 그런 사건을 조사하는 건 네가 전문가잖아."
가게에 와서 저녁을 먹던 도서윤이 인상을 썼다.
"아빠. 난 학자가 아니라 형사야. 미제 사건도 몇 년 전 사건이라야 들여다보지, 무슨 백 년 전 사건을 알아내래?"
"안 되나?"
"안 돼."
***
신성재가 집으로 돌아와 봉투를 확인했다. 그 봉투에도 오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복원 마법 쓰고, 자료 좀 찾았더니 천만 원이 들어온다?"
그 시계의 복원 작업에는 사흘이 걸렸다. 그것도 과거의 잔상을 보는 보조 마법 '크로노스의 눈'을 새로 개방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사흘이 걸렸다.
정작 시계를 복원하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일단 개방한 마법은 계속 쓸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당일치기로 유물 복원 작업을 끝낼 수 있다.
"이거, 개꿀인데?"
7. 폐차
신성재는 인사동 골동품상인 도종호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했다.
어떤 달은 도종호가 고가의 골동품 복원 의뢰를 구해왔다. 그러면 신성재가 복원하고 대가를 비싸게 받았다. 도종호는 소개비를 챙겼다.
도종호는 신성재가 원하는 적당히 망가진 골동품 매물도 가끔 찾아주었다. 신성재는 그런 골동품을 저렴하게 매입해 복원한 후에 비싸게 팔았다.
신성재의 복원 실력이 소문나는 건 금방이었다.
"복원 못 하는 골동품이 없다며?"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망가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복원해준다더라."
"새로 만들어서 바꿔치기한 거 아니고?"
"의뢰한 사람들이 그런 것도 확인 안 했겠어? 한두 푼짜리가 아닌데."
소문이 나면서 도종호 외에도 골동품 복원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물론, 의뢰한다고 다 받아주는 건 아니다.
"까다롭게 고른다더라."
"예술혼을 자극받는 것만 한다던가?"
"복원 기술자가 무슨 예술이야?"
"복원도 그 정도면 예술이지."
신성재가 의뢰를 받는 조건은 까다로웠다. 마나는 덜 쓰면서 효과가 좋고, 보수도 많아야 했다.
복원 의뢰를 맡기러 온 사람 중에는 비법을 알아내려는 사람도 있었다.
신성재가 말했다.
"노하우는 공개 안 합니다."
"복원 비용만 이천만 원인데, 어떤 기술을 쓰는지 듣지도 않고 맡기란 겁니까?"
이천만 원이 아니라 이억, 이십억 원이라 해도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냥 가시죠. 이 의뢰는 안 받겠습니다."
"아니, 거 참…. 그럼 기술을 묻지 않는 대신에 비용이라도 좀 깎아주시죠. 손이 빠르다던데, 천만 원에 어떻습니까? 그럼 맡기겠습니다."
"아직도 안 가셨네?"
***
은가은이 생선구이를 먹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의뢰는 받았어?"
"거절했지."
"깎아도 천만 원인데?"
"어떤 기술을 쓴 건지 분석하려는 의도가 보이더라."
"그게 분석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거였어?"
신성재도 생선구이를 먹으며 대답했다.
"아니. 못 알아내지. 내가 쓴 건 과학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거절해?"
"마법으로 복원하기 어려운 골동품이더라. 가죽이 들어가거든. 그래서 안 깎아준다는 핑계로 거절했지."
"가죽은 안 되나?"
"되긴 하는데 쉽지 않아. 숙련도를 더 높여야 해."
"숙련도를 높이려면 일을 많이 받아봐야 하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그러다 의뢰품을 망가뜨리면 골치 아파져. 그냥 내가 따로 연습할 걸 찾아보는 게…. 음?"
"왜?"
그가 생선구이 식당 앞을 보았다. 폐차 직전의 차가 서 있었다.
"음…."
"왜 그러냐니까?"
"저런 차 말이야. 수리할 게 많겠지?"
"저건 폐차장 가야 하는 거 아냐?"
신성재의 복원 마법은 지금은 금이 간 도자기나 금속 골동품 등을 수리하는 데 쓴다.
"저런 차 한 대를 복원 마법으로 수리하려면, 부품 하나하나, 도장표면 하나하나에 마법을 걸어야 해. 지금 수준으로는 최소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마법이 필요하지."
"그러면 숙련도가 올라?"
"확실히 오르지. 차 내부의 경화된 고무나 시트의 가죽이 닳은 부분도 해결해야 하니까, 마법 실험과 연습용으로 딱 좋겠어."
은가은이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저 차는 그렇게 고쳐도 얼마 안 할 거 같은데?"
신성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 고치면 비싸지는 명품 올드카로 연습해야지."
"응?"
***
신성재는 밥을 먹고 나서 중고차 매매상 몇 곳을 방문했다.
마음에 드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중고차 매매상이 보유한 물건은 모두 당장 탈 수 있는 차였다. 탈 수 있는데 희귀한 차는 중고라도 가격이 비쌌다.
"어떻게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게 없나."
은가은이 스마트폰으로 블로그를 보여주었다.
"이거 어때?"
"뭐냐. 이 다 썩은 차는?"
"그래도 한정판 스포츠카래."
"1984년식?"
신성재가 썩은 스포츠카의 주인인 김완수를 만났다.
김완수가 차에 관해 설명했다.
"이게 1984년에 딱 100대만 생산된 한정판 스포츠카입니다. 40년 전에 레이싱 경기에 사용된 듀얼 클러치를 쓸 정도로 특별하게 만든 차죠."
김완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만든 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멀쩡한 차가 몇 대 없습니다. 운행하다 사고로 파손되고, 보관 잘못으로 파손되고, 다 망가졌습니다."
신성재가 차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 차도 안 멀쩡하군요."
지금 이 차의 철판은 녹이 너무 슬어서 당장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상태였다. 시트나 다른 내장재도 엉망진창이고, 엔진룸은 상태가 개판이었다.
차의 상태는 아직 폐차하지 않은 게 신기한 수준이었다.
"이거 굴러가긴 합니까?"
"이젠 안 굴러갑니다."
김완수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외국에서 수입할 때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가 스마트폰에 넣어둔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태라고 사진을 받았습니다. 속았죠. 다른 그나마 상태 좋은 차의 사진에, 포토샵으로 조작까지 한 거였습니다."
"받아보니까 다 썩은 차가 온 거군요."
"수입할 때 정식으로 등록까지 다 했는데 받아놓고 보니까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전시용으로도 못 씁니다. 철판도 다 썩었어요."
"차량을 등록할 때 확인은 안 하셨습니까?"
"제가 그때 바빠서 대행업체에 맡겼는데, 어휴…. 그 대행업체가 이 차를 팔아먹은 사기꾼이거든요."
"그럼 반품하시지."
"그놈들이 돈만 먹고 튀어서요. 마지막으로 크게 해먹은 게 이 차였던 거죠."
"그러시구나."
수집가 김완수가 말했다.
"저도 여러 경로로 알아봤는데, 이건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부품을 구할 방법이 아예 없습니다. 부품이 있다 해도 철판부터 내부까지 다 썩어서 답도 없고요."
"그럼 이 차는 어쩌시게요?"
"이게 원래 유명한 갤러리의 관장님이 의뢰한 차인데, 이 꼴로 넘길 수도 없고, 더 가지고 있어 봐야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폐차하려던 중에 도종호 사장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차를 인터넷에서 찾아낸 건 은가은이고, 인맥을 통해 만남을 주선한 건 인사동 도종호 사장이다.
신성재가 제안했다.
"이거 저한테 파시죠."
"이 차를 복원하려고 한다면서요? 도 사장님 말로는, 복원 전문가시라고 하던데요."
"연습 삼아 하려고요."
수집가 김완수가 말했다.
"그럼 그냥 가지세요. 어차피 폐차비밖에 못 받는데, 겉모습이라도 원형을 찾았으면 좋겠군요. 다시 달리지는 못하겠지만요."
***
신성재는 고철값만 주고 차를 받아왔다. 김완수는 그것도 안 받겠다고 했지만, 거래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차량 자체는 운행 불가 상태였다. 그래서 견인차를 이용해 옮겼다.
차를 복원하려면 작업할 장소가 필요했다. 이건 신성재의 원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서울 외곽에 작은 창고를 하나 빌렸다.
"어차피 마법 연구와 복원 작업을 할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1년쯤은 여기를 쓰자."
차는 그곳에 가져다 놓았다. 창고가 작지만 그래도 차 한 대는 들어갈 공간은 나왔다. 이제 내부에서 그 차에 무슨 짓을 하든 외부에선 볼 수 없다.
"40년 동안 험하게 굴렸나 보네."
그 스포츠카는 외부 철판이 전체적으로 녹이 슬어 있었다. 녹이 심한 곳은 아예 구멍이 날 정도였다.
페인트가 살아있는 부분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타깃은 40년 전."
신성재가 차의 표면에 손을 대고 마법을 썼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30포인트의 마나가 소모되면서 차 표면의 작은 부분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성재는 마법으로 40년의 시간을 되돌리는 중이다.
사람은 다치고 4분만 지나도 회복이 쉽지 않은데, 철판은 40년이 지나도 가능하다.
철판은 시간이 지나도 그 성분이 다른 원자로 대체되지 않는다. 산소가 철 원자에 달라붙어 녹이 슬긴 했지만, 원래 원자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손상이 워낙 심해서, 30포인트의 마나로는 손바닥 정도 넓이에만 마법을 적용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쉽진 않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사물이나 상처를 복원한다. 그 마법은 신비의 영역이라 기존에 알려진 물리나 화학 법칙을 벗어난 형태로 적용된다.
철판 표면의 녹에서 산소가 사라지고, 산화철이 원래 형태로 되돌아갔다.
철 원자에서 단순히 산소만 분리된 게 아니다. 부풀어 오른 부분이 가라앉으며 40년 전처럼 매끈한 철판으로 바뀌었다.
이미 떨어져 나간 페인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녹이 슬면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 생긴 구멍도 메워지진 않았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 마법은 그곳에 있는 물질만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뿐, 없어진 물질을 도로 만들어내진 못했다.
그래도 신성재가 손바닥을 댄 한 뼘 넓이의 철판은 마치 새것처럼 변해 있었다.
신성재가 결과물을 보고 슬쩍 웃었다.
"딱 좋아."
복원된 범위는 좁지만 상관없다. 이런 오래된 낡은 차도 복원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 이 차를 이용해 반복 작업으로 숙련도를 높이면 되는데…."
차량을 완전히 복원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구멍 난 부분도 마법으로 복원해야 한다. 다만 물질을 창조할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른 금속을 융합하는 마법도 더 연구하고."
그런 것도 이 차를 실험체로 삼아 연습하고 연구하면 된다.
"엔진이나 배선까지 완전히 복원하는 걸 목표로 하자."
그런데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한땀 한땀 작업하려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올해 내내 마법을 연구하고 시험해야 한다.
"음…. 천천히 하자."
그때까지 이 차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숙련도 작업은 남는 시간에 조금씩, 마나가 충분할 때 꾸준히 하면 된다.
***
신성재는 틈날 때마다 차량을 조금씩 복원했다. 구멍이 뚫린 부분은 비슷한 금속을 가져다 복원의 재료로 사용했다.
페인트가 소실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페인트를 몇 종류 구해 시험하며 필요한 성분을 추출했다. 그걸 복원 마법의 소재로 쓰면 40년 전에 사용했던 페인트가 그대로 재현됐다.
***
은가은이 물었다.
"차 고치는 건 잘 돼?"
"갈 길이 멀다."
"그럼 그건 때려치우고 놀러나 가자. 우리 학교 오늘 축제야."
"방해할 거면 넌 축제나 가라."
"아빠 카드 받아왔는데. 소고기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물론 나도 같이 가려고 했다. 이건 내일 하지 뭐."
***
신성재는 복원 마법만 연구한 게 아니다. 인첸트 마법도 연구했다.
인첸트 마법에 관한 지식은 이미 있다. 마법 개방도 한다.
그 마법을 금속이나 사물, 심지어 복원 중인 자동차에도 걸어봤다.
"마법 인첸트는 되는데."
모든 마법을 인첸트하진 못했지만, 간단한 마법 몇 개는 차에 인첸트해도 잘 작동했다.
문제는 유지시간이었다.
"유지시간이 너무 짧다."
처음에 부여한 마나가 다 소모되면 인첸트 된 마법도 사라졌다.
평행세계에서는 그 문제를 쉽게 해결했다. 마법진에 마치 배터리처럼 마나를 계속 공급할 수 있는 물건을 추가하면 된다.
제일 흔히 쓰는 건 마나를 품은 돌이었다.
그런데 이쪽 세계에는 마나를 품은 물건이 없다. 그런 돌도 없다.
"인첸트 마법은 유지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직은 쓸모가 없어."
8. KTX
1년 가까운 시간이 더 지났다.
신성재가 무인도에 조난됐다가 마법 지식을 얻어 마법사가 되고, 마법으로 해적선을 침몰시킨 지 3년이 지났다.
복원 마법의 숙련도는 더 높아졌다. 다 썩은 자동차를 복원한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덕분에 파손된 유물을 마법으로 복원했을 때의 완성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
심지어 복원 속도도 빨라졌다.
그만큼 복원 전문가로서의 명성도 높아졌다.
인사동 골동품상 도종호 사장이 말했다.
"신성재 씨는 아무 의뢰나 받지 않아."
도서윤 형사가 물었다.
"다른 곳에서 맡기는 비용의 두 배를 낸다 해도?"
"지난번엔 세 배인데도 거절하더라. 그리고 너희 경찰서에 그런 예산이 있어? 신성재 씨 비싸다?"
"아빠 인맥으로 어떻게 할인 안 돼? 한 99% 할인?"
"되겠냐? 안 그래도 내 인맥으로 부탁 좀 해달라는 요구가 많아서 힘들다. 나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자주 부탁하냐?"
"칫."
"뭔데 그래?"
도서윤 형사가 설명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쇳조각인데, 녹이 많이 슬었거든? 근데 이게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요즘 형사는 느낌으로 수사하냐? 과학수사 그런 거 안 해?"
"어쨌든 원래 모양을 알고 싶다고!"
"끄응. 내가 부탁은 해볼게."
***
신성재는 폐차장에 보내야 할 상태이던 1984년식 스포츠카를 거의 1년 동안 틈틈이 복원했다.
그 차가 지금은 방금 공장에서 나온 것처럼 반짝거렸다.
신성재가 선언했다.
"복원 끝. 후우. 힘들었다."
은가은이 차 옆에서 손뼉을 쳤다.
"우왕! 이제 진짜 새 차 같아!"
"새 차나 마찬가지지. 모든 부품을 40년 전 상태로 돌려놨으니까."
"시트도 새것 같아."
"시트가 특히 힘들었다."
금속은 복원이 수월한 편이다. 인조가죽도 좀 낫다.
하지만 천연가죽은 쉽지 않았다. 마나가 수십 배나 들어가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상태가 이렇게 완벽한데?"
"그만큼 고생했어. 앞으로 가죽은 의뢰 안 받으려고."
은가은이 손으로 보닛을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포붕이. 다시 태어났네!"
"포붕이?"
"포돌이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경찰차도 아닌데."
"붕은 뭔데?"
"붕붕이의 붕이야. 얘가 눈이 땡그란 게 아주 미인상이야."
신성재가 이 차를 복원한 건 마법 숙련도 향상을 위해서였다.
이젠 금이 간 도자기 같은 건 순식간에 복원할 정도로 그 마법이 능숙해졌다.
은가은이 작업대 위에 있는 쇳조각을 보며 물었다.
"앗. 이거 뭐야? 부품 하나 빼먹은 거 아냐?"
"그건 도 사장님이 부탁해서 복원한 거야. 완전히 녹슬어서 온 쇳조각인데, 멀쩡해졌지?"
"돈은 받았어?"
"따님이 무슨 사건 수사에 필요한 거라고 부탁했대. 서비스로 해준 거야."
"사건이라니?"
"딸이 형사래."
은가은은 쇳조각을 내려놓고 차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드라이브 가나?"
"간단하게 파주…."
"망고시루케이크 먹으러 가자! 나 그거 먹고 싶었어!"
은가은은 해적선을 피하다 무인도에 조난돼 한 달 동안 굶주리며 살았다.
그때부터 식탐이 생겼다. 맛있는 건 먹어줘야 했다.
그러느라 살이 좀 붙긴 했지만, 왜 그러는지 아니까 말리기 어려웠다.
신성재가 물었다.
"그건 어디서 파는데?"
"대전?"
"지금?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나?"
"맛있대!"
무인도에서 한 달 동안 굶주린 건 신성재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겨우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을 걸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맛도 없었다.
그래서 신성재도 맛있는 걸 좋아한다. 신성재가 운전석 문을 열며 외쳤다.
"맛있으면 가야지! 야! 타!"
은가은이 얼른 조수석에 탔다.
"오빠! 달려!"
***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신형 KTX 열차의 기관사가 기차를 출발시켰다.
기차는 서울을 향해 달렸다. 기관사가 무전으로 물었다.
"지금 우리 차에 몇 명이나 탔지?"
객실의 동료가 대답했다.
- 천스물두 명입니다.
"우리까지 천스물넷이네."
***
서울에 있는 철도 교통통제센터의 통신 케이블망이 지나가는 지하 선로에서 작은 불빛이 깜빡였다.
달력의 빨간 날에도 기차는 다닌다. 통제센터 직원이 잠시 쉬는 시간에 휴게실에서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휴일에 일하는 건 역시 힘들다."
동료 직원이 커피를 내밀었다.
"마시고 힘내라."
"짠돌이가 어쩐 일로 커피를 사냐?"
"민영이가 올라오고 있거든."
"데이트냐?"
동료가 실실 웃었다.
"부산에서 기차 탔다더라. 출발하는 거 보고 나왔다."
"좋겠다."
지하 통신선로에서 깜빡이던 불빛이 갑자기 새빨갛게 변했다. 곧바로 그 장치와 연결되어 있던 폭탄이 폭발했다.
폭발이 지하 통신선로를 덮쳤다. 충격파가 케이블을 찢고 끊었다. 화염이 통신 케이블을 녹이고 태웠다.
폭발 충격이 관제센터 건물을 흔들었다.
"뭐, 뭐야!"
"지진이야?"
창밖으로 통신선로와 연결된 맨홀 몇 개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맨홀 구멍에서 불꽃이 위로 치솟았다.
"도대체 뭐가 터진 거야!"
그 폭발은 통신망만 끊은 게 아니다. 전력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갑자기 건물 전체의 전기가 나갔다.
무정전전원장치 덕분에 통제센터의 일부 장비는 기능을 유지했다.
하지만 건물의 조명은 모두 나갔다. 실내가 어두워졌다. 모니터도 필수적인 것 몇 개 외에는 모조리 꺼졌다.
"관제 시스템부터 확인해!"
"통신이 끊겼습니다! 철도 관제도 모두 차단됐습니다!"
***
철도 교통관제센터의 전기와 통신이 모두 마비됐다. 당연히 비상이 걸렸다.
"중요 현장에 전화해서 수동으로 관리하라고 지시해! 모든 열차에 상황 전파해!"
"알겠습니다!"
"복구는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젠장."
상황실장이 직원들을 향해 외쳤다.
"통신 복구될 때까지 관리 철저히 합시다! 기관사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하면 사고는 나지 않아! 열차 연착이야 어쩔 수 없지만, 우리만 잘하면 문제는 안 생깁니다!"
문제가 생겼다.
***
부산에서 출발한 KTX 열차가 경주역에 잠시 정차했다가 대구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문제는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일어났다. 기관사의 뒤쪽에 복면을 쓴 놈이 나타났다. 열차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숨어 있던 놈이었다.
기관사는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 당신 누구…. 으아악!"
얼굴을 가린 놈이 전기충격기로 기관사를 기절시켰다.
그런 후에 열차의 안전장치와 운전장치에 작은 기계를 부착했다.
범인은 기관사의 몸에 마취제도 주사했다. 그런 후에 출입문을 봉쇄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범인이 설치한 기계장치가 기관사의 손 대신에 정해진 순서대로 운전장치의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움직였다. 기관사가 기절했어도 열차는 출발했다.
KTX 열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범인은 얼굴을 가린 마스크와 모자를 손으로 만져 확인한 후에 조용히 경주역을 벗어났다.
이제 부산발 서울행 KTX 열차에는 운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통제센터는 테러 때문에 열차의 현재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동대구역 승강장에 승객들이 열차에 탑승하기 위해 서 있었다.
"열차 들어온다."
"어? 왜 속도가 빠른 것 같…."
동대구역 승강장을 KTX 열차가 고속으로 통과했다. 요란한 소리와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여기서 타는 게 아닌가?"
"맞는데?"
"그럼 저 차는 뭔데?"
***
통제센터는 테러로 기능을 잃었다. 전산망도 먹통이 됐다.
그래도 직원들의 휴대폰은 작동했다. 대구의 상황이 통제센터에 알려졌다.
"정차하지 않고 역을 통과한 기차가 있습니다! 오히려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뭐? 어느 노선에!"
"부산발 서울행… KTX입니다! 방금 동대구역을 통과했습니다!"
상황실장이 소리를 질렀다.
"어떤 미친 새끼야! 당장 연락해서 속도 줄이라고 해!"
"무선은 우리 쪽이 먹통이라 연결이 안 됩니다!"
"기관사한테 전화라도 걸어!"
"이미 해봤는데, 전화를 안 받습니다!"
"객실 승무원한테라도 해!"
"승무원도 연락이 안 됩니다!"
"뭐?"
상황실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이곳은 조금 전부터 통제 기능을 잃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지시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기차가 있었다.
이게 우연일 리가 없다.
"열차 테러다!"
***
신성재와 은가은은 복원한 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는 중이다. 오송 근처를 지나면서 은가은이 말했다.
"망고시루도 먹고, 명란빵도 먹고, 팥빙수도 먹어야지."
"맛있겠다."
"오빤 뭐 먹을 거야?"
"그거 다 너 혼자 먹을 거였구나?"
"당연하지!"
"망고시루는 양이 많을 텐데?"
"앗!"
"왜?"
은가은이 스마트폰에 뜬 속보를 보며 말했다.
"서울에서 사고가 났대. 철도 통제센터 근처에서 뭐가 터졌나 봐."
"인명피해는?"
"없대."
"다행이네. 복구는 언제 된대?"
"빨라도 며칠은 걸릴 거라는데?"
***
철도 통제센터 직원들은 사태 해결을 위해 뛰어다녔다.
"외부의 예비 장비는 최근에 고장 나서 부품이 오길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른 장비를 찾아!"
그러다 아이디어가 나왔다.
"오송에 짓고 있는 제2 센터! 거기에 KTX 열차를 원격으로 제어하는 신형 장비가 있습니다!"
"거기 아직 공사 중이잖아. 그 장비는 작동하는 거 맞아?"
"장비 테스트를 이미 몇 차례 했습니다! 그 장비를 사용하면 열차를 세울 수 있습니다!"
"거기 지금 우리 직원이 있나?"
오늘은 휴일이다. 건설회사도 출근하지 않았다.
"건설 쪽이 쉴 때 장비를 테스트하려고 팀이 하나 들어갔습니다!"
상황실장이 외쳤다.
"당장 연락해! 통제권 당장 넘기고, 저 망할 서울행 열차부터 원격으로 세워!"
"예!"
***
오늘은 휴일이라 제2 센터 건설 현장의 외부에는 경비원 세 명만 근무하고 있었다.
센터 내부에는 다섯 명의 전산팀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설치될 신형 장비의 테스트를 하러 왔다가 긴급 지시를 받았다.
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빨리 라인 연결해! 절차 다 무시하고 일단 그 열차부터 세워!"
"연결했습니다!"
"세울 수 있지?"
"예. 권한 다 받았으니까, 곧 됩니다."
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열차 탑승객이 천 명이 넘는다더라. 우리가 못 세웠으면…. 어휴. 다 죽을 뻔했…."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몇 번 들렸다. 소음기 때문에 총소리치고는 조금 작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못 들을 수가 없다.
"어? 어? 뭐야?"
비명도 들렸다.
"으아악!"
"뭐, 뭔데!"
잠시 후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복면을 쓴 괴한 다섯 명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기관단총으로 무장했다.
"모두 장비에서 손 떼!"
총구가 그들을 향했다. 엔지니어들이 깜짝 놀라 장비에서 물러났다.
복면 위에 별이 그려진 놈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부하에게 지시했다.
"확인해."
부하가 얼른 다가가 신형 장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차와 선로의 통제권이 넘어와 있습니다."
두목이 웃었다.
"흐흐. 순조롭군."
***
은가은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 총소리다."
그녀는 무인도에서 실제 총소리를 들었다. 그 총탄에 맞아본 적도 있다.
지금 들린 건 소음의 종류가 조금 다르지만, 총소리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신성재도 그 소리를 들었다.
"한 발이 아닌데?"
"군대 사격장에서 훈련하나?"
"훈련하면서 나는 소리는 아니야. 이건 마치…."
은가은의 표정이 나빠졌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물었다.
"그 해적 놈들이 무인도에서 우리를 쏠 때처럼 조준 사격하는 느낌?"
"그렇지."
신성재가 인상을 썼다.
"느낌이 안 좋은데…."
"나도 그래. 오빠. 가볼까?"
"망고시루는?"
"설마 품절 나겠어?"
신성재가 차의 방향을 틀었다.
"휴대폰 꺼둬라. 혹시 모르니까."
9. 테러
서울에 있는 통제센터에서 비명에 가까운 보고가 속속 올라왔다.
"제2 센터 공사현장이 무장 괴한에게 점령됐습니다!"
"경비원들은 어떻게 됐어?"
"확인이 안 됩니다만, 총에 맞은 것 같습니다!"
공사현장 경비원이 총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총소리가 났다.
"현장 인근 CCTV가 모두 먹통이 됐습니다! 놈들이 끊었습니다!"
"경찰은!"
"신고했습니다!"
옆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상황실장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이번엔 또 뭔데!"
"부산행 KTX 한 대가 정차하지 않고 역을 지나쳤습니다!"
"그건 이미 알…. 잠깐? 부산행?"
좀 전에 동대구역을 지나간 열차는 서울행이다.
"예! 부산행입니다! 대전역을 지나갔습니다!"
"씨발! 한 대가 당한 게 아니란 말이냐!"
"아악!"
"열차가 또 당했나!"
"열차가 아니라, 선로가 바뀌어 있습니다!"
"뭐?"
"방금 대전역을 지나간 하행선 KTX 열차가, 상행선 선로로 달리고 있습니다!"
상황실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어떻게 그런 일이…."
"제2 센터에서 선로를 원격으로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 그럼…."
실장은 적의 목적과 수법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전부 다 함정이었어! 제2 센터 테스트 장비에 권한을 넘기게 하려고, 이곳 통신선과 전력선을 끊은 거야!"
"이대로 가면 두 기차는 충돌합니다!"
시속 300km/h로 달리는 열차 두 대가 브레이크 없이 충돌하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는 뻔하다. 최악의 경우는 생존자가 없을 수도 있다.
"시간이 얼마나 있나!"
"충돌까지 5분 조금 더 남았습니다!"
상황실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 구간에 전기 끊어! KTX 열차에 공급되는 전기를 아예 끊으라고!"
***
KTX 열차는 엔진이 아니라 모터로 움직인다. 필요한 전기는 열차 외부에서 공급받는다.
두 대의 열차가 달리는 구간의 전력 통제실로 사람들이 뛰어갔다. 선로의 전기는 그곳에서 끊을 수 있다.
제일 먼저 통제실로 뛰어가던 사람의 발목에 선이 걸렸다. 딸깍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에 옆쪽에서 폭탄이 터졌다.
"으아악!"
사람들이 급히 뜀박질을 멈췄다.
"뭐, 뭐야!"
"지뢰 같은 게 있습니다!"
서울 통제센터의 상황실장이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 그냥 들어가서 차단해! 그거 안 끊으면 이천 명이 죽는다고!
그 말에 다른 사람이 전진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감지기에 걸렸다. 이번에는 인계철선이 아니라 레이저 감지 방식이었다.
폭탄이 하나 더 터졌다.
"아악!"
"저긴 못 들어갑니다! 부비트랩이 하나가 아닙니다!"
- 전력을 차단할 다른 방법은 뭐야!
"찾아보겠습니다!"
***
상황실장이 서울 통제센터에서 소리를 질렀다.
"한전은 어떻게 됐어? 필요하면 충청도 지역 전기를 다 끊으라고 해!"
"그러려면 절차가 필요해서, 5분 안에는 못 끊는답니다!"
"그럼 그냥 고압선에 총이라도 쏴서 끊으라고 하란 말이다!"
"그 구간엔 지금 총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5분 이상 걸립니다!"
"씨발! 그놈의 5분! 저 새끼들이 5분 안에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게 설계한 거야! 이 상황 자체가 저 새끼들의 설계란 말이다!"
그것까진 깨달았지만, 해결 방법이 없었다. 5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러면 다 죽는단 말이다!"
센터장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충돌까지 얼마나 남았지?"
"이제 5분도 안 남았습니다!"
달리는 열차에 5분 안에 탑승해 조치할 방법은 없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겨, 경찰은? 군대는?"
"제2 통제센터로 가는 중인데, 5분 안에 도착하는 건 순찰차 한 대뿐이랍니다."
리볼버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 한두 명이 5분 안에 적을 제압하고 열차를 세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센터장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분 후에 이천 명이…. 죽는다고?"
***
차의 라디오에서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기존 라디오 방송이 잠시 중단되고 문자 내용이 전달됐다.
"오빠! 제2 통제센터라는 곳이 테러범들에게 장악됐대! 그게 저기인가 봐!"
"5분 안에 열차가 충돌한다?"
"어떻게 해?"
신성재는 이미 차에서 내린 상태였다.
"가은아. 네가 이 차 몰고 가. CCTV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에서 기다려."
"오빠는?"
"마법사 걱정은 하는 거 아니다."
***
경찰차 한 대가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바로 앞에 제2 센터 공사현장이 보였다.
"다 왔…."
갑자기 순찰차를 향해 기관단총의 총탄이 쏟아졌다.
9mm 탄두가 차체와 유리를 퍽퍽 뚫었다. 그 순찰차는 방탄 사양이 아니다. 얇은 철판과 앞유리는 총탄을 막지 못했다.
"으악!"
총탄에 맞은 앞타이어도 터졌다. 차가 중심을 잃고 길가에 처박혔다.
매복해 있다가 순찰차를 기습한 테러리스트가 무전으로 보고했다.
"경찰차 제거 완료. 경찰들을 처리하고 계속 매복하겠음."
테러리스트가 무전을 종료하고 경찰차 쪽으로 가려 했다.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테러리스트가 즉시 뒤로 휙 돌아섰다.
늦었다.
신성재가 손을 뻗었다.
[바람 주먹]
테러리스트의 목에 마법으로 만든 주먹이 꽂혔다. 적의 목이 꺾였다.
"켁!"
그가 뒤로 나자빠지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허공으로 몇 발 날아갔다.
신성재가 경찰차 쪽으로 마법을 썼다.
[이글 아이]
해적선을 조사할 때 썼던 정찰 마법이 사용됐다. 그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경찰 두 명은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은 총에 맞긴 했는데 급소를 맞진 않았다.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신성재가 안쪽으로 이동했다.
***
제2 센터를 장악한 두목이 총소리를 들었다.
"확인 사살이군."
그는 밖에 매복한 부하가 경찰들을 죽였다고 착각했다.
부하가 물었다.
"부비트랩 설치 마쳤습니다. 언제 터트릴까요?"
"누군가 5분 안에 도착했을 때를 대비한 부비트랩이니까, 우리가 터트릴 필요는 없지. 열차를 세우려고 서둘러 뛰어오는 놈들이 걸리면 그때 터져야지."
"다른 지역에서 이미 몇 개 터트렸으니까, 부비트랩을 눈치채고 피해서 들어오려 할 겁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5분이 넘게 걸린다."
"혹시 5분 안에 들어오면…."
"그때 원격으로 터트려야지."
"인질들은 어떻게 할까요?"
두목이 엔지니어들을 보았다. 다섯 명 모두 케이블타이로 묶여 있었다.
"폭탄이 터지면 죽게 세팅해. 그래야 경찰특공대의 무리한 진입으로 인질이 죽었다는 기사가 뜨지. 비난할 대상이 필요한 놈들이 좋아할 기사가 될 거야."
***
신성재가 건물 입구로 이동했다. 담벼락이 있었다. 그 너머에 매복한 놈이 감지됐다.
신성재가 담벼락 앞에서 위로 뛰었다. 그의 발이 담장 벽을 마치 평지처럼 밟았다. 마법의 힘이 공기를 제어해 그의 몸을 띄웠다. 바람 주먹과 비슷한 원리의 전투보조 마법이었다.
신성재가 담장을 뛰어넘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적은 총구를 앞으로 향하고 신성재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놈의 뒤통수에 바람 주먹이 꽂혔다.
"컥!"
옆쪽에 매복한 놈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놈은 즉시 신성재 쪽으로 총구를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신성재가 왼손을 뻗었다. 바람 주먹은 거리가 멀어지면 위력이 급격히 감소하지만, 그래도 적의 총구를 옆으로 밀어낼 정도는 된다.
발사된 총탄이 신성재의 옆쪽으로 날아가 벽에 연달아 박혔다.
신성재가 바닥에 쓰러뜨린 놈의 전투복에서 단검을 뽑아 적을 향해 던졌다. 날아가는 단검에 전투보조마법을 걸었다.
[바람 손]
손의 형태로 뭉쳐진 바람이 날아가는 칼의 뒤를 밀어 속도를 높였다. 칼날의 방향도 조정해 정확도를 높였다.
바람의 힘을 받으며 날아간 칼날이 적의 목에 박혔다.
"컥!"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신성재는 뒤통수를 쳐 기절시킨 놈의 기관단총을 들었다. 탄창이 가득 차 있었다.
"마법사를 죽이려다가 실패했으면, 죽어야지."
그게 저쪽 세계의 방식이다.
신성재가 쓰러진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
테러리스트 두목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침입자다."
부하는 엔지니어들에게 마취제 주사를 놓고 있었다. 인질들이 지금은 살아있다가 폭탄이 터질 때 죽게 해야 진압대원들이 욕을 먹는다.
부하가 주사기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진압부대의 도착이 너무 빠릅니다."
"그래. 너무 빠르지. 그리고 너무 조용해."
"그럼…."
"한두 놈이겠지. 처리하고 빠져나간다."
"그럼 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직 마취제 주사를 맞지 않은 엔지니어가 한 명 있었다.
"계획이 바뀌었다. 다 죽여."
"예."
부하가 총구를 엔지니어 쪽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깨어있는 엔지니어가 빌었다.
"사, 살려주세요!"
부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요란했다.
엔지니어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방아쇠를 당기던 테러리스트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테러리스트가 옆으로 나자빠졌다.
"어?"
두목이 옆으로 뛰며 출입구 쪽으로 사격했다. 총탄이 출입구 주변으로 날아갔다.
엔지니어는 상황을 깨달았다.
"구, 구출팀!"
구출팀이 아니라 신성재였다. 신성재가 적에게서 빼앗은 기관단총으로 부하부터 처리했다.
두목은 이제 자기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침입자가 혼자라는 것도 눈치챘다.
두목이 신성재가 몸을 피한 곳으로 총구를 향하며 무선 폭파 리모컨을 꺼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이거 터지면 다 죽어!"
신성재의 목소리가 두목의 등 뒤에서 들렸다.
"그러냐?"
"어?"
두목의 손목에 단검이 푹 꽂혔다. 손가락이 마비됐다.
"끄아악!"
리모컨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신성재가 그 리모컨을 받았다. 두목은 왼팔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돌아섰다. 그 상황에서도 총을 쏘려고 했다.
너무 느렸다. 신성재가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두목의 몸에 퍼버벅 꽂혔다.
"케에엑."
두목이 뒤로 나자빠졌다.
신성재가 엔지니어를 돌아보았다.
엔지니어가 눈물을 쏟으며 환성을 질렀다.
"우리 편이 이겼어! 고맙습니다!"
신성재가 엔지니어의 두 손에 묶인 케이블타이를 자르며 물었다.
"달리는 열차를 원격으로 세우려면 누구를 깨워야 합니까?"
마법을 쓰면 기절한 사람을 강제로 깨울 수 있다. 건강에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제,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세워요. 당장."
"네!"
***
긴급 재난 문자는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에게도 날아갔다. 다들 비명을 질렀다.
"으흐흐흑.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이럴 거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걸!"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전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엄마. 나 어떤 딸이었어?"
- 못된 년이지. 집에 가면 반찬부터 냉장고에 넣어.
"그게 아니라 지금…."
갑자기 열차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열차가 충돌하는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꺄악!"
그러다 이게 충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브, 브레이크?"
"열차를 세울 수 있게 된 거야?"
서로 마주 보고 달리던 열차 두 대의 속도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
철도 통제센터에서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공군에 요청해서 선로를 폭격해야 합니다!"
"폭격이라니! 그러다 두 대 다 탈선합니다!"
"그래도 정면충돌보다는 낫잖습니까? 이대로는 이천 명이 다 죽습니다!"
"전투기가 전력선만 정밀하게 쏘면 안 될까요?"
"지금 전투기가 현장 근처에 있는 건 맞습니까?"
"누가 공군에 전화 좀 걸어!"
갑자기 환성에 가까운 비명이 터졌다.
"열차 속도가 줄어든답니다!"
사람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어? 뭐?"
다른 쪽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던 사람이 외쳤다.
"제2 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원격으로 긴급제동을 걸었답니다!"
사람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마, 만세!"
상황실장이 소리를 질렀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상황 계속 파악해!"
속도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충돌하기 전에 서야 한다.
상황실장은 너무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10. 히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