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쥐뿔은 있었던 환생
"...해치웠나?"
재가 되어 사라지는 마물의 모습에 기사, 라이오넬은 검을 늘어뜨렸다.
검게 드리웠던 하늘은 어느새 푸르른 제 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고 살육에 지친 그의 마음도 다시 평온을 찾....
"용사님께서 해내셨다!"
"마왕을 쓰러트리셨어!"
"으음."
...지 못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환호성에 라이오넬은 마치 체한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후우."
한숨을 푹 내쉰 그는 멀리 보이는 마왕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의 환호는 모두 저곳에서 마왕을 쓰러트렸을 용사에게 향하고 있었다.
'저곳에는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라이오넬은 두 눈을 감았다.
문득 든 추한 생각을 그는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과거를 거스르며 그의 마음속 부정을 먹어 치우고 살을 찌워 갔다.
그 추한 것은 욕심이 많았다.
과거도 모자라 전생의 부정까지 눈독 들일 때 그는 다시 눈을 떴다.
"...."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을 눈치챈 그것이 다시 부정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둔다면 심마(心魔)에 빠질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의 고삐를 죄지 않았다.
그저 그것과 함께 과거를, 전생을 되짚었다.
"길었지."
그에게 있어서 정말로 긴 여정이었다.
그는 이곳에 있기 전 대한민국의 평범한 백수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괜히 광합성 한다고 나가서는....'
그는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섰다가 트럭에 치였고 그대로 환생했다.
"올해가 몇 년째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는 은퇴한 기사의 늦둥이 아들로 환생했다.
처음에는 실망했었다.
만화나 소설처럼 고귀한 신분도 아닐뿐더러 세계를 좌지우지할 엄청난 힘을 얻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투정도 잠시.
그는 곧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그럼 아무것도 없는 나는, 대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그나마 있던 전생의 기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오히려 그가 이 세계의 상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신이시여.'
그때 그는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음과 동시에 저주했다.
그리고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인 채 겁쟁이처럼 사는 것을 선택했다.
당연히 주변으로부터 모욕과 경멸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백수였던 그에게 그것은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았겠지."
꾹,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험.
그러나 우습게도 그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그는 무(武)의 재능을 깨달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용사."
잊고 있었던 희망이라는 단어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왕이 다시 눈을 뜨리라.]
수백 년 만에 대신전으로 내려온 신탁.
그것은 그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마왕의 부활을 예고했다.
그 소식을 접한 그는 확신했다.
이거 나다.
누가 봐도 환생한 내가 용사인 게 당연하잖아?
하하, 그래!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어!
이 운명이야말로...!
그러나.
"크크크, 용사는 내가 아니었지."
용사는 그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제국 남부를 호령하는 후작가의 막내 공자.
고생은 해 보지도 않은, 온실 속 화초 같은 그 모습에 그는 분노했다.
그러나 뒤이은 소식에 그는 좌절하고 말았다.
이른 나이에 오러까지 발현하는 기사라니....
넘을 수 없는 벽을 앞에 두고 그는 기어이 술에 기대어 현실도피까지 했었다.
추하다.
추하디, 추하고, 추하구나.
태생적 불평등이야 이미 전생에서 지겹게 봐 왔을 텐데.
"흐흐."
꽈악!
거기까지 회상한 그는 그것의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부정을 삼키며 한껏 덩치를 키운 그것이 멈춰 섰다.
"하하! 으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웃음과 함께 그것들을 모두 게워 냈다.
가슴의 답답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방금은 너무 품위 없이 웃었나?
그가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느라 그에게 신경을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어험."
그래도 곧 귀족이 될 몸인데 이제부터라도 체통을 지켜야지.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을 빳빳이 치켜세웠다.
'그래, 용사 건은 잊자.'
그가 모시는 동부 변경백은 그에게 약속했다.
이 전투가 끝나면 그동안의 공을 치하해 그를 남작 위에 봉할 것임을.
'좋아, 일단 귀족이 되면 자서전부터 쓰자.'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 엮으면 아마 수십 권 분량은 나오지 않을까?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은 비록 없지만 그거야 이제부터 만들면 되는 거고.'
그는 연인쯤이야 그동안 갈고닦은 댄스 실력을 선보인다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머! 거기, 현란한 스텝의 신사분? 혹시 성함이 어떻게...?"
"후후,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마왕 토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라이오넬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 훌륭한 분이셨다니! 우리 결혼해요!"
"흐흐흐."
"경, 즐거워 보이는군."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묵례했다.
"됐네, 그보다 크게 다친 곳은.... 흠, 그 모습을 보면 당연히 없겠지."
그가 고개를 드니 낯익은 은빛 머리의 미공자가 그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련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레오나 헌틀리.
그가 도련님이라 칭한 이는 동부 변경백의 후계자였다.
갑옷 곳곳이 상해 있었고 얼굴에도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여자 같은데.'
그러나 그는 그것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나저나 뭘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즐거운가?"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아!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서 경에게 남작 위를 약속했었지?
"네, 과분하게도."
"흠, 그럼 경은 이후 어떻게 지낼 생각인가?"
그는 방금까지 생각했던 것들을 그대로 레오나에게 전했다.
말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스텝까지 선보이자 레오나는 감탄까지 하며 호위 병력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감탄, 맞지?'
"그래, 경도 이제 반려를 찾을 때가 됐지."
그렇게 말하는 레오나의 표정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라이오넬이 귀족이 된다는 말은 곧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라이오넬은 레오나와 함께한 시간이 제법 길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응?"
"한 번 기사는 영원한 기사라고 말입니다."
참고로 그는 전생에 육군 출신이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나중에 너무 자주 온다고 타박이나 하지 마시지요."
"후후, 그래. 기대하겠네."
여전히 그 얼굴에는 쓸쓸함이 엿보였지만 나머지는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쿠르릉!
"...?"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천둥소리.
라이오넬은 좋지 않은 예감에 고개를 들었다.
"이럴 수가."
푸른 하늘은 어디 가고 마왕성을 중심으로 다시 하늘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
살기!
고개를 돌리자 분명 재가 돼 사라졌던 오크가 힘껏 도끼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그러나 생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오크의 도끼가 그의 정수리를 노리며 날아왔다.
후웅!
가볍게 옆으로 비켜서며 도끼를 피해 낸 라이오넬이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철컥!
그리고 발검과 동시에 오크의 목을 노렸다.
까앙!
"쯧, 늦었나."
딱 한 뼘을 남기고 오크의 도끼가 그의 검을 막아섰다.
"아직 한 발 남았...."
퉁, 투둥!
곧바로 연격을 이어 가려던 라이오넬은 갑자기 가벼워진 검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반 토막 난 검신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륵! 그륵!"
그 모습에 수세에 빠졌던 오크가 커다란 어금니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웃겨?"
그는 들고 있던 나머지 반 토막을 재빨리 오크에게 집어 던졌다.
"...!"
차앙!
깜짝 놀란 오크가 그 검을 쳐 내는 사이.
그는 쓰고 있던 투구의 깃대를 붙잡아 벗으며 그대로.
퍼억!
오크의 머리 위로 내려찍었다.
"그어억!"
예상치 못한 공격, 그 고통을 참지 못한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도끼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이 도끼는 제 겁니다."
라이오넬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도끼를 주워 든 그가 그대로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경, 괜찮은가!"
"네, 도련님."
녹색 피가 묻은 투구를 다시 쓴 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미 곳곳에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가 잠시 머리를 굴리려는 찰나.
"끼에에에엑!"
이번에는 그 틈을 노리고 고블린이 달려들었다.
"넌 새꺄, 도끼도 필요 없어."
귀찮은 표정을 한 라이오넬이 달려드는 고블린의 턱으로 주먹을 날렸다.
퍼억!
건틀릿을 낀 주먹에 정확히 얻어맞은 고블린이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꽈직!
부츠로 넘어진 고블린의 목을 짓밟은 라이오넬이 다시 생각을 이었다.
'설마, 용사가 실ㅍ....'
"아니, 아니겠지."
애써 불안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지웠으나.
콰앙!
"...!"
그런 그를 비웃듯 근처에서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은 물론 마물들까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오거?"
하지만 그렇다면 그 커다란 덩치가 보였어야 했다.
'그리고 이 싸늘한 감각은....'
"크아악!"
"꽤애액!"
라이오넬은 굉음이 터진 이후 비명이 점점 이곳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련님, 당장 후방으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경은?"
지금까지 쌓은 경험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한다고.
"여기에 남아 시간을 벌겠습니다."
"...."
그가 아는 레오나는 현명한 이였다.
레오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허리에 찬 검을 라이오넬에게 건넸다.
"이 검을 경에게 빌려주겠네."
라이오넬이 그 검을 받아 들었다.
"반드시 직접 돌려주러 오게. ...명령이네."
어려운 명령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호위 병력과 함께 물러나는 레오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는 새로운 검을 들었다.
그사이 그의 눈앞으로 어둠이 나타났다.
"...."
그것은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적.
그러나 라이오넬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죽겠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툭.
검은 갑옷이 갑자기 들고 있던 검을 땅바닥에 내던지더니 스윽, 등으로 손을 뻗어 새로운 검을 꺼내 들었다.
"맙소사."
그 새로운 검의 모습에 라이오넬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성검...!"
대신전에서 처음 본 순간 뇌리에 박힌 그 모습.
비록 성스러운 빛은 잃었지만 성검이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게 저기에....'
"아."
조졌군.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어째서 성검을 검은 갑옷이 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시간을 끌어야 한다.'
라이오넬은 심호흡을 하며 레오나가 건네줬던 검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우웅!
"니미...."
성검에 깃드는 검은 오러를 본 순간 그의 입에서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백수 때부터 느낀 거지만....'
라이오넬은 생각했다.
세상이란 녀석은 항상 자신에게만 가혹한 것 같다고.
***
푸욱!
"쿨럭!"
복부를 헤집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멋대로 열린 라이오넬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아니, 지금은 됐다.
라이오넬은 그의 몸에 깊숙이 박힌 성검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 아.'
검을 휘두르려던 라이오넬은 그제야 진작 양팔이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눈, 보통이 아니군."
마치 가래가 끓는 듯 거친 목소리가 검은 투구에서 새어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내 검을 따라 하다니."
검은 갑옷의 손이 투구 안면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미세하게 난 작은 구멍이 있었다.
"흐흐."
라이오넬은 그것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오러만 있었어도 투구를 그냥 뚫어 버렸을 텐데.
촤악!
"커헉!"
성검이 뽑힘과 동시에 그의 몸이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오러 없이도 이 정도일 줄이야. 어째서 성검이 그 애송이를.... 흠, 쓸데없는 소리였나."
검은 갑옷은 땅에 엎어진 채 피를 쏟아 내고 있는 라이오넬을 보며 입을 닫았다.
'젠장,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지는군.'
입으로 뱉은 피가 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아무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던가?
붉었던 세상이 검게 변했다.
'의식이....'
***
[환생자 특전, 프리뷰 사용을 종료합니다.]
[프리뷰가 특전 목록에서 사라집니다.]
"...?"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라이오넬은 정신을 차렸다.
'트럭에 치인 직후에 들었던 목소리.'
그는 곧바로 목소리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그 목소리가... 잠깐."
방금 특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목소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사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프리뷰 결과를 분석 중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환생한 게 아니었군."
프리뷰가 그의 능력이라는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프리뷰, 우리말로 하면 미리 보기.
"지금까지의 내 삶은 그저 미리 체험해 본 것일 뿐이라는 건가?"
[프리뷰를 통해 환생자가 이 세계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음을 확신했다.
후회스러웠던 삶.
그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니!
순간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크게 들떴지만 그는 곧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검은 갑옷."
용사에게서 성검을 빼앗고 그를 죽인 적.
거기에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마왕까지.
다시 시작한다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까짓거! 한번 해 보...?"
[환생자가 ■■을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특전이 해금되었습니다.]
"응? 뭐라고?"
[파마(破魔)의 ■을 ■■할 수 있습니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안내를 종료합니다.]
"아니! 지지직거렸다고! 리플레이!"
[환생자의 리스폰 시기를 검색 중입니다.]
[특이점 발견, 해당 시기로 좌표를 고정합니다.]
[환생자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그러나 그의 항의가 무색하게 목소리는 사라졌고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이 보일 때쯤, 그가 제일 처음 보게 된 것은.
"죽어, 이 새끼야!"
그의 얼굴로 날아드는 주먹이었다.
2화. 화려하게 (1)
"죽어, 이 새끼야!"
날아오는 주먹을 본 순간, 라이오넬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했다.
슈욱!
'느리다.'
뺨을 스치고 지나는 주먹에 라이오넬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평가는 날아든 주먹에 관한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몸에 대한 것이었다.
"어쭈? 피했다 이거지?"
거구의 소년이 뒤로 물러서는 그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그러고는 양어깨를 붕붕 돌리며 너 같은 건 언제든 때려눕힐 수 있다는 여유를 내보였다.
"...."
그러나 정작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해야 할 라이오넬의 관심사는 온통 다른 곳에 있었다.
'왜소한 몸.'
단련이 부족해 여물지 못한 육체를 살핀 그는 이어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는, 제3훈련소인가?'
눈에 익은 건물들을 통해 그는 이곳이 변경백령의 주도(主都) 이스트본에 위치한 종자들의 훈련소 중 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봐, 라이오넬. 주변으로 아무리 눈깔 굴려 봐야 네놈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일같이 장난감처럼 그를 괴롭히던 거구의 소년.
"케일럽."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지금까지 흐릿했던 이 시기 그의 기억들이 점차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뭐라고? 네까짓 게 감히!"
반면, 라이오넬이 스스럼없이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싫었는지 거구의 소년, 케일럽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겁을 상실했구나!"
케일럽이 다시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슈욱!
흥분한 목소리와 달리 간결하면서도 날렵한 움직임.
라이오넬은 그것을 가볍게 피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지금 종자들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자라 불릴 만하군.
"또 피해? 하! 그래도 훈련소 물은 좀 먹었다 이거지?"
케일럽은 이를 갈며 움켜쥔 두 주먹을 라이오넬을 향해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소년의 눈앞에 있는 라이오넬은 그가 알던 훈련소의 최약체이자 겁쟁이 라이오넬이 아니었다.
'슬슬 몸이 익숙해지는군.'
동부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한 사람.
비록 마지막까지 오러를 피워 내지 못했으나 그 무훈만큼은 누구보다 높이 쌓아 올린 기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몸통이 텅 비었어."
계속해서 주먹이 빗나가자 조바심이 난 케일럽의 움직임은 점점 커졌고 라이오넬은 그 빈틈을 정확히 찔렀다.
퍽!
"큭!"
통증과 함께 호흡이 끊긴 케일럽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라이오넬과 자신이 얻어맞은 부위를 번갈아 봤다.
"그동안 실컷 나를 때리던 놈이...."
라이오넬이 마치 약 올리듯 그를 향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고작 한 대 맞았다고 이렇게 엄살 피우면 너무 실망인데?"
"너, 너! 라이오넬 이 개자식!"
케일럽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주먹을 들면 반항은커녕 몸을 웅크리기 급급했던 라이오넬이었다.
그런 겁쟁이가 감히!
이내 도발을 견디지 못한 그가 다시 달려들었다.
"죽어!"
아까처럼 날카로운 것이 아닌 시정잡배나 내지를 법한 주먹.
"너나 죽어, 이 자식아."
그것을 가볍게 옆으로 흘려 낸 라이오넬이 그대로 반격했다.
퍼억!
"푸후!"
케일럽의 왼쪽 뺨으로 깔끔하게 들어간 훅.
홱 돌아간 그의 입에서 침과 함께 하얀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케일럽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뒤로 넘어지는 것을 간신히 버텨 내고 분노에 이를 악물었을 때에야 그는 입안이 약간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곧 땅바닥에 떨어져 흙투성이가 된 그의 이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 이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라이오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빨이 빠져 버렸군. 그러게 평소에 양치를 열심히 했어야지."
"죽, 죽, 죽...!"
"뭐? 앞으로 죽만 먹고 살겠다고? 이봐, 케일럽. 이제 겨우 이빨 하나 정도 빠졌을 뿐이야.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죽여 버리겠다아아아아!"
마치 성난 들소처럼 케일럽이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돌진해 왔다.
투우사가 된 기억은 없는데, 라고 작게 중얼거린 라이오넬은 그를 잡아채려는 케일럽의 두 팔을 옆으로 빙글 돌며 가볍게 피해 낸 후 발을 내밀었다.
툭.
쿠당탕탕!
지나치게 정면으로 쏠린 무게중심 탓에 케일럽은 성대하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 으으...."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케일럽은 가까스로 엎어진 몸을 뒤집었다.
간신히 숨통이 트이고 숨을 몰아쉬던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리 위로 라이오넬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허억!"
케일럽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지금 어떻게 저항해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라이오넬이 손을 쓰는 대로 당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그저 빙긋 웃은 채 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빨이었다.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훈련소 지붕에 던져둬. 그래야 까치가 새 이빨을 물어다 주지."
"...?"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라이오넬은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케일럽의 눈에 주먹만 한 돌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뒤를 잡을 수만 있다면...!
"기사가 아니라 양아치가 되고 싶은 거라면 그 돌을 집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돌을 향해 손을 뻗던 케일럽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 상태에서 눈동자만 또르르 굴린 그는 곧 헉, 하고 헛숨을 삼켜야 했다. 어느새 라이오넬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해 한 차례 씨익 웃어 준 라이오넬이 다시 몸을 돌렸다.
케일럽은 그 뒷모습과 돌을 향해 뻗었던 자신의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뒤늦게 올라오는 자괴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라이오넬은 곧장 숙소로 향했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오늘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아야 하는데."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어디 보자, 케일럽에게 얻어맞은 날로 추측을 해 보자면....
절레절레.
라이오넬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케일럽에게는 허구한 날 얻어맞았으니 그걸로 날짜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화나네."
이빨 하나 더 뽑을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이게 누구야? 반푼이 라이오넬이잖아?"
"오늘은 용케 케일럽을 피했나 보지? 얼굴이 멀쩡하네?"
근처를 지나던 종자 둘이 라이오넬을 알아보고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누구더라?'
라이오넬이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침묵하는 사이 그것을 오해한 둘이 낄낄 웃었다.
"야 야, 그렇게 쫄지 마. 오늘은 널 괴롭힐 생각이 없으니까."
"맞아, 어차피 내일 대련 평가가 있는 날인데 괜히 힘 뺄 필요는 없지."
대련 평가.
그 말에 라이오넬의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기억이 색깔을 되찾았다.
"하하하, 벌써부터 얻어터져서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흐어어엉! 제발! 이제 그만 때려요! 살려 주세요!"
"으하하하하!"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던 둘은 라이오넬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나간 건가, 그들은 어깨를 으쓱였다.
"부디 내일까지 몸조리 잘하길 바랄게."
"흐흐, 꾀병을 부려 봐야 소용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두 종자는 그렇게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을 남기고 멀어졌다.
'좋은 정보를 얻었군.'
라이오넬은 그들이 멀어지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래, 여기가 내 방이었지."
헤매지 않고 제대로 방에 도착한 라이오넬은 미묘한 표정으로 안을 살폈다.
그야 이곳에서 좋은 기억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 단출한 방은 그저 작은 피난처였을 뿐이었다.
풀썩.
침대로 몸을 던진 라이오넬은 그대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흠, 내일이 대련 평가라."
대련 평가는 분기마다 교관과 대련하면서 그 실력을 평가받는 자리였다.
일반적으로 숙련된 교관들과의 대련이니 크게 다칠 일은 없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라이오넬, 그는 예외였다.
"망할 자식들."
왜냐하면 라이오넬은 같은 종자들뿐만 아니라 교관들에게도 괴롭힘의 대상이었으니까.
두 종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도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평가 이후 퇴소당했었지."
사유는 바로 자질 부족.
대련 평가에서 받은 교관들의 차별적인 대우에 참다못한 라이오넬은 살려 달라는 심정으로 훈련소장을 찾았었다.
그러나 훈련소장은 오히려 모욕적인 언사로 라이오넬을 다그친 후 저런 우스운 사유를 들먹이며 퇴소를 명령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이오넬은 씁쓸하게 웃었다.
훗날 기사가 된 라이오넬은 우연찮게 다른 임무를 수행하다 과거 이런 처우를 받았던 것이 누군가의 사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었다.
그때 그가 느꼈던 허탈감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후우."
한숨을 푹 내쉰 라이오넬은 다시 처음부터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과거로 돌아온 그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용사가 패하는 미래를 바꾸는 것.
당연히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바로 남부로 가서 용사가 될 후작가 막내 공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너 용사니까 훈련 빡시게 해!'라고 윽박지른들.
"기다리는 건 교수형 밧줄이겠지."
그러니 하나하나 손에 닿는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 손에 닿는 것.
예를 들자면.
"그 사건."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그의 고향은 물론 가족까지 잃었던 사건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은 그가 훈련소에서 쫓겨난 후 그해 겨울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쫓겨나는 편이 더 이득인가?"
한창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
지금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충분히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다.
"어차피 이번에도 퇴소는 피할 수 없을 테고."
그가 훈련소에 입소한 순간 이미 그렇게 각본이 짜여 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주한 인간을 잡아 족치지 않는 이상 그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게 뻔했다.
거기에 그 사주한 인간은 안타깝게도 지금 그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흐흐.
그러나 라이오넬은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나갈 필요는 없잖아?"
상황은 같았지만 이곳에 있는 라이오넬은 그때의 라이오넬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화려하게 가 보자고."
라이오넬의 입가로 섬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뭐? 케일럽이 아파서 오늘 빠지고 싶다 했다고?"
훈련소장이 그렇게 되묻자 교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어제 자율 훈련 중에 타박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타박상?"
그 대답에 훈련소장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케일럽은 이미 다른 종자들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었기에 타박상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들려왔다.
다대일 전투 훈련이라도 한 건가?
"그럼 그렇게 해. 어차피 그 녀석은 이런 평가가 무의미한 녀석이니까."
"알겠습니다."
훈련소장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건을 넘겼다.
"그것보다 오늘 라이오넬을 담당할 교관이 누구지?"
"접니다."
훈련소장의 질문에 교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잘됐군. 얼마 전에 그분께 연락이 왔는데 슬슬 내보내고 싶으신 모양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일이 끝나는 대로 그분께서 추가 보상을 해 주신다고 하니 확실하게 마무리하게."
"맡겨 주십시오."
군례를 하고 빠져나가는 교관을 지켜본 후 훈련소장은 연병장이 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연병장에는 이미 제3훈련소 소속 종자들이 집합해 있었다.
"이제 곧 마지막이라니 아쉽구나."
그 가운데에서 라이오넬의 모습을 쉽사리 찾아낸 그의 눈은 진득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3화. 화려하게 (2)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그 사실을 비틀어 라이오넬에게 적용한 건 육체뿐만 아니라 심적인 고통까지 주기 위해 어른들이 저열한 지혜를 짜냈기 때문이다.
"...."
대련장에서는 이미 한창 평가가 진행 중이었다.
오늘 라이오넬을 담당하게 된 교관 바톤은 대기 줄 제일 뒤편에 있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간 봐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라이오넬은 다리를 꼰 채 따분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대련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리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며 순서를 기다리던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정신줄을 놓은 건가?'
그렇다면 교관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줘야지."
바톤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대련장으로 옮겼다.
그의 머릿속은 곧 그가 받게 될 보상에 대한 것으로 가득 채워졌다.
"다음, 종자 라이오넬! 앞으로!"
그리고 드디어 라이오넬의 이름이 호명됐을 때 평가를 마치고 쉬고 있던 종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교관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지적해야 했지만 그들은 모두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목검을 들어라, 라이오넬."
맞은편에 선 라이오넬을 향해 바톤이 성의 없는 턱짓으로 라이오넬의 목검을 가리켰다.
라이오넬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중단세를 취했다.
"제대로 할 생각이 없나 보군."
"그건 누구한테 하는 말입니까? 저? 아니면 교관님?"
"...."
그 대답에 바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군.
우선 정수리부터 노리자.
그럼 저 여유를 부리는 얼굴에서 금방 핏기가 빠져나가겠지.
생각을 정리한 바톤이 목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럼 지금부터 평가를 시작한다!"
마치 포효를 내지르듯 소리친 바톤은 곧바로 목검을 들어 라이오넬의 정수리를 노렸다.
'자, 이제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자빠져야지?'
몇 번이나 봐 왔던 광경.
바톤의 입꼬리가 목검의 궤적처럼 비열한 호선을 그려 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 구겨지고 말았다.
"...!"
라이오넬은 그의 목검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막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 떨어지는 목검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바톤이었다.
위협하기 위해 힘을 줄이긴 했으나 머리에 제대로 맞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혹시나 잘못돼 죽기라도 한다면...!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톤의 몸은 그대로 굳어졌고 대련장은 일순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
미숙한 종자를 쓰러트리는 건 가능했다.
그러나 교관을 상대하는 건 지금 몸으로는 무리라는 것을 라이오넬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오넬은 기책을 냈다.
빠악!
"...!"
목검을 이마로 받아 낸 순간, 둔탁한 충격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흐려진 시야 너머로 미리 봐 둔 곳을 향해 목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푹!
"끄윽!"
눈앞의 사태에 당황한 바톤은 그것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명치를 그대로 내준 바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검 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라이오넬은 곧 서서히 선명해지는 시야 너머로 꺽꺽거리는 바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가, 계속할까요?"
"꺽, 꺼억!"
"뭐라고요? Go, Go? 계속하라고요? 알겠습니다."
라이오넬이 목검을 세웠다.
"교관님의 투철한 직업 정신! 제가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하앗!"
퍼억!
라이오넬이 휘두른 목검이 바톤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겨우 호흡을 되찾아 가던 바톤은 눈앞이 핑 도는 듯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
한편, 대련장 너머에 있던 이들은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퍽! 퍽!
"교관님! 제 검이 어떻습니까!"
퍽! 퍽!"
"교관님께서 직접 제 몸에 새겨 주신 검입니다! 그러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서, 새꺄! 어떻냐고 묻잖아!"
꿈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광경.
라이오넬은 바톤을 쓰러트리고 몸을 둥글게 만 그를 향해 일방적으로 검격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제 검격이 아닌 매질이었다.
한때 교관들이, 종자들이 라이오넬에게 했던 것을 그가 그대로 되돌려 주고 있었다.
"미, 미친...."
지켜보고 있던 종자들의 두 눈은 어느새 두려움에 젖어들어 파르르 떨렸다.
찢어진 이마로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라이오넬의 모습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사, 살려 줘...!"
바닥에서 매질을 버티던 바톤의 입에서 비명 같은 구조 신호가 터져 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살려는 드릴게!"
그럼에도 목검을 들어 올린 라이오넬을 보며 바톤은 히이익, 하고 하찮은 비명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어서 말려!"
"잡아! 잡으라고!"
하지만 그 하찮은 비명 덕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교관들이 일제히 달려들면서 라이오넬의 마지막 대련 평가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종자 라이오넬, 넌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훈련소장의 말에 라이오넬은 그만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남에게는 엄하지만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관대한 이를 벌써 두 명이나 만난 셈이었으니.
그리고 자기애 넘치는 훈련소장은 그런 라이오넬의 태도를 용납할 인간이 아니었다.
"넌 퇴소야! 당장 이 훈련소에서 꺼져!"
"오, 이런 꼴로요?"
라이오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멀쩡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그를 말리려고 달려든 교관들에 의해 얼굴은 멍과 부어오른 자국으로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다리마저 부러졌는지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래! 명령이다!"
"음, 곤란한데."
"뭐? 이 자식이 미쳤나! 당장 꺼지지 못해!"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몸이 이래서 군례는 못하겠네요."
라이오넬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크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종자가 피떡이 돼서 퇴소당한 적이 있었나?"
"...."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일로 쫓겨나는 것처럼 보일 텐데.... 이야, 나라면 호기심에 한 번쯤은 알아볼지도?"
"...!"
순간 찔리는 게 있던 훈련소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뒤가 구린 일을 하고 있는 그였기에 괜한 일로 시선을 끄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잠깐!"
훈련소장의 만류에 라이오넬이 제자리에 우뚝 섰다.
"의무실에서 치료받고 그게 끝나는 대로 떠나도록."
그 말에 라이오넬이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차피 제가 여기 오래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될 텐데 그냥 시원하게 포션이나 좀 내어 주시죠?"
능청스러운 라이오넬의 태도에 훈련소장의 미간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빨리 내보내야 하는 건 맞았기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주인님, 훈련소장으로부터 서신입니다."
"음."
하인으로부터 서신을 넘겨받은 노인은 물고 있던 파이프를 내려놓고 서신을 펼쳤다.
"...."
곧 서신의 내용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하인에게 말했다.
"준비했던 걸 넘겨주도록."
"알겠습니다, 주인님."
허리를 숙인 하인이 빠져나가자 노인은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후우...."
입에서 새어 나온 무거운 연기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유유히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한번 들러야겠어."
노인이라 하기에는 다부진 손이 깃펜을 감싸 쥐었다.
"망가진 아들을 본 자네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는군."
변경백의 신임을 듬뿍 받아 기어코 땅의 권리까지 받아 낸 옛 동료를 떠올리며 노인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
가져갈 짐이라고는 여기 올 때 가져온 옷 몇 벌과 검 하나가 전부.
라이오넬이 짐을 싸고 방을 나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그가 방을 나섰지만 평소처럼 이죽거리며 조롱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련 평가에서 라이오넬의 활약이 인상 깊었는지 오늘만큼은 다들 고개를 돌리며 청안(靑眼)을 피하기 바빴다.
그 덕에 라이오넬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생각을 정리하며 훈련소를 나설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퇴소당했으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라이오넬의 시선이 멀리 한 곳을 향했다.
이스트본의 서쪽 구역으로 부유층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를 훈련소에서 쫓아낸 원흉이 바로 저곳에 있었다.
은퇴 기사 안토니.
아버지와 동료였던 자로, 어째서 그가 자신을 노렸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안토니가 죽은 뒤였으니까.
"뭐, 이제 와서 이유 따위는 상관없지."
중요한 건 그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건드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그는 한때 안토니가 자신을 노린 이유를 찾기 위해 그의 행적을 파헤친 적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현시점에서 안토니에 대해 그 스스로를 제외하면 라이오넬이 가장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휘적휘적.
라이오넬은 이미 목적지를 생각해 뒀다는 듯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안토니의 영향권이던 훈련소에서도 나왔으니 마음대로 움직여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
제국의 북부, 서부, 남부에는 없는 변경백이 동부에만 존재하는 이유는 마물들의 영역이 동부 국경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동부에서는 도시나 마을을 벗어났을 때 마물과 마주치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동부에 적을 둔 상인이라면, 소수로 움직이는 행상인부터 거대 상단까지 거래 물건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호위에는 꽤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반인 중 길을 나설 때는 일정한 돈을 내고 그들과 합류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밀리어 상단]
"...."
간판을 확인한 라이오넬은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젠장, 용병들을 웃돈을 주고 다 쓸어 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놈들! 일부러 우리를 엿 먹이려고 이러는 게 틀림없어!"
"이런 상도둑도 없는 자식들!"
"젠장! 적어도 마로니에까지만 갈 수 있다면 거기서 용병을 모을 수 있을 텐데!"
건물 안은 분주하게 움직이거나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보더라도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접수대로 향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당분간 의뢰는...."
"도시 마로니에까지 가려고 하는데 그곳을 거쳐 가는 상행이 있을까요?"
마로니에는 이스트본으로부터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라이오넬의 고향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방금, 마로니에라고 하셨나요?"
친절하게 라이오넬을 돌려보내려던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직원의 눈이 빠르게 라이오넬의 몸을 훑었다.
그러다 허리에 찬 검을 보더니 소리쳤다.
"하, 한 명 찾았다!"
***
상인이란 본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값을 매기는 존재.
이번 상행의 책임자인 라칸은 직원이 데리고 온 라이오넬을 보며 눈을 번뜩였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다.
'싸구려군.'
나이가 어려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 몸에 붙은 근육이 검사치고는 많이 부족해 보였다.
"자네, 아무리 급하다지만 아직 성인도 안 된 소년을 데리고 오면 어쩌나."
"죄, 죄송합니다."
직원을 가볍게 타이른 라칸은 라이오넬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님, 보시다시피 현재 저희에게 여유가 없습니다. 마로니에까지 가시려면 다른 곳을 찾는 게 좋을 것...."
"사람을 구하는 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황에 말까지 끊기자 라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장난치는 거라면 다른 곳에서...."
"출신 상관없이, 마로니에까지 가는 거라면 사람을 구해다 드리죠."
"...."
라이오넬의 입에서 제법 구체적인 조건까지 나오자 말이 두 번 끊겼음에도 라칸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라칸은 이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바랄 게 없군요. 그래서, 그쪽은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4화. 홀이냐 짝이냐
회귀 전, 라이오넬이 안토니에 대해 알아보던 시기.
라이오넬은 동료의 소개로 또래의 한 수사관을 만날 수 있었다.
수사관의 이름은 율리안.
그는 안토니에게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누나를 잃어 원한이 있던 자로, 그 행적을 파헤치던 중이었다.
같은 적 그리고 같은 아픔을 가진 둘은 금방 마음이 맞아 서로의 과거사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시골 출신의 기사와 뒷골목 출신 수사관은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값 내기나 할까?"
그날도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중 율리안은 대뜸 그렇게 말하며 주사위 세 개를 테이블 위로 꺼냈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 후 그곳에 주사위를 넣더니 마구 섞기 시작했다.
"홀, 짝?"
이내 술잔을 테이블 위로 덮은 그가 물었다.
그리고 그날은 라이오넬이 온전히 술값을 내야만 했다.
"...."
그리운 과거에 라이오넬의 입가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밀리어 상단에서 나온 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뒷골목으로 향했다.
뒷골목이라고 해서 마치 세상이 바뀌듯 음습한 거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빨랫거리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아이들.
그리고 희미하게 풍기는 여자들의 분 냄새에 라이오넬은 뒷골목 초입에 들어섰음을 느꼈다.
홍등가.
밤만 되면 도시에서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거리.
해가 중천에 뜬 지금도 겉보기에는 여기가 뒷골목인지 바로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바닥을 기고 있는 친구들만 아니면 말이지."
이곳을 관리하는 덩치들에게 질질 끌려 사라지는 취객들을 보며 라이오넬은 피식 웃었다.
"어머,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보기 드문 손님이네?"
반면 금발 청안의 소년은 이곳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견이었다.
파이프를 물고 있던 한 여인이 라이오넬을 향해 다가왔다.
얇은 옷감 너머로 잘록한 몸매가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여인의 표정에선 피로감만 묻어날 뿐 수치심은 없었다.
"영업시간은 아니지만 우리 손님만 괜찮다면 낮에 피는 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려 줄 수 있는데...."
허리를 숙인 여인이 옷깃을 붙잡아 슬쩍 밑으로 내렸다.
"어때?"
그 매혹적인 모습에 라이오넬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내리는 여인의 손을 떼어 냈다.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거든."
여인은 손수 옷깃까지 여미어 주는 라이오넬의 손길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네."
"그런가?"
"볼일이 있다면 얼른 처리하고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여기는 겉보기와는 달리 늪과 같은 곳이니까."
여인은 그렇게 말한 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둘은 곧 다시 만나게 됐다.
"마담을 만나고 싶다고?"
단순하게 '화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이곳은 여느 창관 건물과 달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
"뭐? 어? 이런 거시기에 털도 안 난 것 같은 놈이 말까지 짧네."
입구를 경비하던 덩치가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이며 위협적인 태도로 라이오넬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리 요즘 거지 같아도 그렇지, 마담은 너 같은 애송이가 쉽게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흠, 내가 뭐 때문에 왔는지 안다면 아마 마담도 맨발로 뛰쳐나올걸."
라이오넬의 코앞까지 다가온 덩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요즘 들어 그런 말을 많이 듣는 편이지."
"그럼 미친놈한테는 매가 약이라는 것도 알겠...."
덩치가 주먹을 들어 올릴 때였다.
"어머, 설마 선약이 있다는 곳이 여기였어?"
갑작스레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주먹을 들어 올렸던 덩치도, 반격으로 이빨 하나 뽑을 생각이던 라이오넬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라이오넬과 마주쳤던 파이프의 여인이 서 있었다.
***
"고마워."
건물 안으로 들어선 라이오넬이 앞에서 그를 안내하는 여인, 소피아에게 말을 건넸다.
"후후, 감사 인사는 아껴 두는 게 좋을걸. 밤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지만 낮에 오는 쪽은 그게 아닐 때도 있었거든."
이쪽이야. 소피아는 건물 깊숙한 곳까지 라이오넬을 안내하고는 커다란 문에 노크했다.
똑똑.
"마담, 손님을 데리고 왔어요."
"들어오라고 그래."
"부디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
소피아는 라이오넬을 향해 윙크를 날리고는 문을 열었다.
"...."
그러나 라이오넬이 방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사방에서 살기 어린 눈빛이 날아들었다.
끼익.
거기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는 라이오넬이 완전히 방으로 들어서자 마치 퇴로를 차단하듯 문을 닫으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래...."
허스키한 목소리에 라이오넬은 고개를 들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어깨 너머로 내려오는 풍성한 장발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양옆으로 트인 검은 원피스 너머로는 홍등가의 꽃들과 달리 꾸준히 단련한 육체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발렌티나.
이스트본 뒷골목을 주름잡는 세력 중 하나인 '화원'의 보스였다.
"최근 세력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도발과도 같은 발언에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발렌티나 역시 잠깐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내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내 걱정이나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고, 하고 싶은 말이나 빨리 해."
라이오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쭉 살폈다.
그녀의 부하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부하들을 두고도 밀리는 거라면,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닥쳐라!"
옆에서 그녀를 지키던 부하 중 한 사람이 라이오넬의 언행에 참지 못하고 결국 고함을 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나머지 부하들도 출수(出手)할 준비를 마친 채 눈을 부라렸다.
"그만, 그만."
발렌티나가 손을 내저으며 분위기를 다시 돌리고는 라이오넬을 노려봤다.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그때는 내 부하들을 말리지 않을 테니까 이제 그만 용건을 말하는 게 어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라이오넬이 대답했다.
"납치된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
그 순간 의자에 앉아 있던 발렌티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은퇴 기사 안토니는 그 무훈이야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기사였으나 고결한 기사였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야심이 많은 자였으며 그 야심을 위해서라면 불의와 손잡는 것도 서슴지 않는 자였다.
자신이 만든 상단을 위해 기존에 지켜지던 상도덕을 무시한 것도.
뒷골목을 지배하기 위해 누군가를 납치한 것도.
모두 그런 성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고?"
"그래."
"...그걸 네놈은 어떻게 알고 있지?"
"그런 걸 따질 때인가? 아무래도 급하지 않은 모양이군."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발렌티나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부하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부하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별말 없이 빈 의자를 집어 들어 라이오넬의 뒤편에 내려놓았다.
"앉아."
라이오넬이 순순히 의자에 앉자 이어서 부하들이 그 앞으로 테이블과 맞은편 의자를 하나 더 준비했다.
"방금 그 말로 네놈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발렌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오넬의 맞은편, 새로운 의자에 앉았다.
"그거야 모르지. 내 앞에 있는 여자가 배편을 줄 수도 있는 거고."
"좋아."
라이오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앞으로 부하가 주사위 세 개 그리고 맥주잔 크기의 나무 원통을 내려놓았다.
"단순한 호의로 온 건 아닐 테고, 네놈도 어차피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온 걸 테지?"
"맞아."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사람이 필요해. 칼 좀 쓰는 친구들로 열 명. 음, 마물과 싸운 경험이 있는 이면 좋겠군."
"그 정도는 문제없지."
그렇게 대답하며 그녀는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혹시 주사위 내기를 해 본 적 있나?"
라이오넬은 회귀 전 율리안과 했던 것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열 번 정도 해서 다 졌었나?
그는 율리안과의 내기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해 본 적이 있나 보군. 규칙은 간단해. 내가 섞고 네가 홀인지 짝인지 맞히면 되는 거야."
"내가 이기면?"
"그럼 네가 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고 사람도 빌려주지."
"내가 지면?"
그 순간 주사위를 쥔 그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네놈의 손가락 마디를 하나 자를 거야. 물론 네놈의 제안도 듣지 않을 거고."
"오, 이런."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나는 자비로우니까. 네가 이길 때까지 어울려 주지. ...그만큼 손가락은 닳겠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부하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이래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거였군.
라이오넬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럼 시작하지."
그녀가 막 원통에 주사위를 집어넣을 때였다.
"홀."
"...아직 섞지도 않았는데."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가 잠깐이지만 손을 떨었다.
주위에 있던 부하들 역시 라이오넬의 선택에 당황했는지 작게 헛숨을 삼켰다.
"다시 한번 기회를...."
"홀."
라이오넬의 대답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소년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하하하하하!"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주사위를 섞기 시작했다.
그리고.
탁!
"마음이 바뀌진 않았겠지?"
전과 달리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발렌티나의 질문에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원통을 들었다.
1, 1, 1.
"네가 이겼다."
***
"뭐? 주사위 눈을 원하는 숫자로 맞힐 수 있다고?"
"응."
"이 망할 자식! 그럼 사기잖아!"
"당한 놈이 잘못이지, 뭐."
분개하는 라이오넬을 보며 율리안이 실실 웃었다.
"내 돈 내놔! 이 자...!"
"실은, 이거 누나가 가르쳐 준 기술이야."
"...식아, 갑자기 거기서 탈룰라를."
"응?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죽은 누나를 그리워하는 율리안의 애수 젖은 표정에 라이오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거,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있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연히 없지."
"...그래, 속은 내가 등신이지."
라이오넬이 텅 빈 주머니를 들여다보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율리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누나가 딱 한 번 진 적이 있었어."
"오?"
"형부한테 졌는데, 이게 뭐라고 해야 하나.... 믿음의 베팅?"
"그게 뭐야?"
***
문이 닫혔다.
사지 멀쩡히 나가는 라이오넬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발렌티나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약지에서 반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돌아가신 형님과 같은 선택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그녀가 조심스레 반지를 쓰다듬었다.
허약한 남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지혜로웠고 순수했으며 강단이 있는 남자였다.
아이를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만이 유일한 불만이었는데, 이렇게 아이를....
"아, 그래도 아이는 아닌가?"
동생 율리안과 또래인 소년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마담, 인원은 어떻게 할까요?"
라이오넬이 말하길, 이번 납치의 배후는 뒷골목을 장악해 검은 돈을 만지려는 은퇴 기사 안토니이며, 율리안은 마로니에에 마련된 거처에 감금돼 있다는 것이었다.
즉, 라이오넬이 원하는 인원은 그대로 율리안 구출조가 되는 셈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야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편, 밀리어 상단에서는.
"라칸 님, 그 소년이 정말 사람을 모아 올까요?"
"글쎄다."
라칸은 라이오넬의 모습을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분명 소년의 가치는 싸구려였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벌컥!
"라, 라칸 님!"
"응?"
"와, 왔습니다! 그 소년이 왔다고요!"
갑자기 들이닥친 직원의 말에 라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람은?!"
"그, 그게...."
"실패한 건가?"
"아, 아닙니다! 그, 데려오긴 했는데...."
확실한 대답 대신 어물쩍거리는 태도.
라칸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직접 확인하기 위해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그리고.
"넌 또 뭐야? 눈 안 깔아! 확 그냥 눈깔 먹물을 싹 뽑아 버릴라!"
"...."
그의 머릿속으로 라이오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출신 상관없이, 마로니에까지 가는 거라면 사람을 구해다 드리죠."
"...."
"출신 상관없이...."
"맙소사."
라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5화. 알 수 없는 빛
상단들이 아무리 호위에 신경을 쓴다 한들 금액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이야 상단이 직접 호위 병력을 100% 운용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고의 방법은 최악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법이었다.
가성비보다는 보안과 신뢰를 중요시하는 대형 상단들은 그런 비용을 선뜻 감당하는 편이었지만, 용병 몇 명 좀 뺏겼다고 휘청거리는 밀리어 상단에게 용병을 빼고 호위 병력을 구성한다?
그것은 꿈만 같은 소리였다.
'그렇다고 뒷골목 건달들이라니...!'
덜컹거리는 마차 탓인지 그 안에 있던 라칸은 목덜미가 뻐근함을 느꼈다.
그와 같은 상인들이 용병을 고용하는 이유는 적어도 용병 길드의 보증이라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틀리면 달아나는 용병이나 강도로 돌변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런 건달들에게는 그런 보증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라칸이 이런 도박 같은 수를 던지며 상행에 나선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소년의 정체가 바로 변경백에게 영지를 받은 명예로운 기사 조셉의 아들이라는 점.
둘째, 건달이기는 하나 발렌티나를 포함한 10인은 웬만한 용병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점.
셋째, 이번 상행을 포기하면 좆 된다는 점.
"...."
사실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컸다.
무려 이번 거래처는 대신전이었으니까.
이 거래를 따내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라칸은 허구한 날 신전을 찾아가 기부금을 투척하고 신을 부르짖던 나날을 떠올렸다.
그렇게 사제들과 친분을 쌓고 주교들과 선을 만들었으며 기어코 거래를 뚫어 낸 그였으니 스스로 일류 상인이라 칭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수익은 별로 얻지 못하겠지."
신전과의 거래가 그렇듯 마진을 그리 많이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그보다 훨씬 큰 가치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성은 당연히 신뢰로 이어지고 그것은 더 나은, 더 많은 거래처를 그의 상단과 연결시켜 줄 것이 분명했다.
"...실패하면 끝이겠지만."
작게 한숨을 내쉰 라칸은 뒤편에 난 작은 창으로 밖을 흘끔 살폈다.
건달들 틈에 자연스레 섞여 있는 금발 청안의 소년은 마치 야수 무리에 낀 토끼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훈련소에서는 자질 부족으로 퇴소당했다고 들었는데....'
라이오넬과 정식으로 계약하기 전 그에 대해 알아본 라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으로 보는 소년은 절대 그런 이유로 쫓겨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애송이가 어떻게 한창 외부 세력과 영역 다툼 중인 발렌티나를 데려올 수 있었겠는가.
'정보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라칸은 곧 고개를 젓고 눈을 감았다.
급한 불을 끈 덕택인지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
"...마로니에로 가고 싶었던 거라면 다른 상단을 통해 가도 됐을 텐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가는 이유가 뭐지?"
나야 덕분에 동생을 찾을 수 있겠지만, 장신인 발렌티나가 라이오넬의 옆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안토니, 그 영감한테는 빚이 있거든. 그러니 이왕 가는 길이라면 한 방 먹일 수 있는 쪽이 낫잖아?"
"빚이라."
어쩌다 그런 놈에게 물리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굳이 그걸 묻지 않았다.
"두렵지는 않아?"
"내가? 하하하, 조만간 그놈이 날 두려워해야 할 텐데."
자신 있게 웃는 소년의 얼굴에서는 정말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기특함에 발렌티나는 저도 모르게 소년의 금발로 손을 뻗었다.
"응? 뭐야? 이거 무슨 뜻이야?"
머리를 마구 헝크는 그녀의 손길에 소년이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거시기에 털도 안 난 것 같은 놈이 간은 크네."
이어지는 덩치의 말에 주변에 있던 화원의 조직원들이 낄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상행길은 해가 서서히 질 때까지 별다른 일 없이 평온했다.
숲길을 지나던 상행단은 곧 터를 잡아 멈추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라이오넬 역시 준비를 도우려 했지만 라칸과 발렌티나의 배려로 작업에서 빠지는 건 물론 개인 천막까지 받을 수 있었다.
"손님은 충분히 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넌 쉬고 있어. 일은 우리가 할 테니까."
가시방석 같던 훈련소에서 나온 후에는 혼자 차분히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라이오넬으로서는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스읍, 후우...."
천막 안으로 들어온 라이오넬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기사라면 누구나 이루고 싶은 경지가 있다.
바로 자신의 검에 오러를 피워 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아에 심상 세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심상 세계는 그저 검만 열심히 휘두르고 육체를 단련한다 해서 만들어지진 않는다.
거기에 더해서 명상을 통해 스스로 쌓아 올린 무훈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
그러나 과거 라이오넬은 최후까지 심상 세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었다.
그것은 평생을 기사로서 수련해 온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실제로 오러를 피워 내지 못한 채 은퇴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의 말소리 대신 풀벌레의 지저귐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쯤 라이오넬은 눈을 떴다.
"오늘도 글렀군."
짧게 혀를 찬 라이오넬은 곧바로 눕기보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상 중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 뇌리에 박히는 바람에 쉽게 잠들지 못할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검은 갑옷."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 갑옷이 펼쳤던 검이 떠올랐다.
우습게도 라이오넬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검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 해 볼까?"
검을 집어 든 라이오넬은 머릿속으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막을 나섰다.
그러나.
"응?"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계속 경계를 서던 이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
이럴 때는 항상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떠올린 라이오넬이 이 사실을 알리려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슈욱!
"...!"
팅!
갑자기 그를 향해 날아온 화살을 가볍게 튕겨 낸 라이오넬은 이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습격이다!"
고요했던 야영지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키에에에엑!"
숨어서 접근하던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라이오넬은 곧바로 마물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선두에 있던 고블린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들고 있던 녹슨 단검을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어딜!"
촤악!
가슴을 깊게 베인 고블린이 그대로 축 늘어지며 재로 변했으나 라이오넬의 눈은 이미 다른 적을 찾고 있었다.
'고블린뿐인가?'
서걱!
달려드는 또 다른 고블린의 목을 날리며 라이오넬은 끊임없이 눈을 움직였다.
그러나 어두운 숲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놈들은 전부 고블린뿐.
'그럴 리가 없는데.'
라이오넬은 어설펐지만 자신을 노리고 날아든 화살을 떠올렸다.
고블린은 약하나 영악한 마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수상함을 느낀 라이오넬을 특정해 화살을 날릴 정도로 지능적이지는 않았다.
"으아아아악!"
그때 반대편, 식량과 짐이 있는 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라이오넬은 서둘러 상대하는 고블린을 베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망할."
그곳에는 다른 고블린보다 두세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놈이 주변을 휘젓고 있었다.
고블린의 변종, 홉고블린이었다.
'그래, 저런 놈 정도는 돼야 가능하지.'
"라이오넬! 무사해?"
때마침 발렌티나가 조직원들과 함께 라이오넬의 곁으로 달려왔다.
"발렌티나, 여기를 부탁해!"
"응? 뭐?"
라이오넬은 되묻는 그녀를 뒤로하고 홉고블린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
"으, 으으...."
도망치다 넘어진 라칸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홉고블린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손에 쥔 도끼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 이런...!"
금방이라도 정수리로 떨어질 것만 같은 도끼를 보는 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진 라칸은 기지도 못한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젠장,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우, 움직여! 우, 움직이라고!"
그러나 그의 애원과 달리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내 서슬 퍼런 도끼날이 마치 단두대의 그것처럼 떨어질 때였다.
슈욱!
"크아악!"
비명을 내지른 건 라칸이 아닌 홉고블린이었다.
놈의 팔뚝에는 고블린들이나 쓰는 녹슨 단검이 꽂혀 있었다.
통증도 통증이었으나 고작 이따위 것에 살을 내줬다는 사실에 화가 난 홉고블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발 청안의 작은 인간이 씨익, 입꼬리를 올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딱 좋군."
홉고블린은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앞의 작은 인간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감히, 내 주먹 하나 감당 못 할 인간이!'
"키아아아악!"
고블린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운 포효가 작은 인간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작은 인간은 두려움에 벌벌 떨 것이라 예상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악한 마물의 머릿속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경계심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그러나.
"끼에에엑!"
곳곳에서 들리는 작은 고블린들의 비명에 홉고블린은 경계심 대신 조바심을 보이고 말았다.
'작은 고블린들은 내가 없으면 안 돼!'
"키아아아악!"
홉고블린이 다시 한번 포효를 내지르며 이번에는 직접 작은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
후웅!
거칠게 허공을 가르는 도끼를 보며 라이오넬은 '만약 회귀하고 처음 만난 게 어설픈 종자가 아니라 홉고블린이었다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머리가 터져서 죽었겠지.'
그러나 이미 이 미숙한 몸에 익숙해진 라이오넬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홉고블린의 연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키아악! 키아악!"
그것이 꽤 약을 오르게 했는지 홉고블린의 동작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떠올리자.'
그가 본 검은 갑옷의 검은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귀족을 떠올리게 했다.
화려한 복장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면서도 절대 천박하지 않으며 기품 있고 경쾌한 움직임.
그 검은 그것들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더러운 마물의 검에서 그런 것들이 느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키익?"
라이오넬의 달라진 분위기에 홉고블린이 멈칫하는 순간, 라이오넬의 검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서걱!
처음은 도끼를 쥔 오른 손목.
분명 얕게 베였으나 힘줄을 당하고 만 홉고블린이 도끼를 놓치고 말았다.
"키아아악!"
순식간에 무기를 잃은 홉고블린의 눈이 분노로 뒤집어졌다.
그리고 라이오넬을 그대로 땅에 박아 버리려는 듯 커다란 주먹을 아래로 내리쳤다.
쾅!
주먹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애꿎은 지면만 때린 홉고블린이 처음으로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비산하는 흙먼지 사이로 다시 검이 번뜩였다.
서걱!
그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남은 손도 축 늘어졌다.
"크으으...."
그제야 영특한 마물은 자신이 포식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늦고 말았다.
달아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지만.
서걱.
발목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과 함께 홉고블린의 신형이 무너졌다.
"역시 힘이 좀 붙어야 하겠는데."
라이오넬은 바닥에 엎어진 채 덜덜 떨고 있는 홉고블린의 모습을 훑어보며 가볍게 혀를 찬 후 그 목을 향해 검을 겨눈 채 주변을 살폈다.
슬슬 전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애초에 홉고블린이 아니면 그리 강한 적이 아니었다.
"연습 상대가 돼 줘서 고마웠고 지옥에나 떨어져라."
푹!
검이 목에 틀어박히며 홉고블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근!
"...응?"
심장이 크게 뛰었다.
동시에 라이오넬은 몸속 깊은 곳에서 힘이 차오르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이게 대체...?'
지금까지 처음 느껴 본 감각.
그러나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허."
그의 검이 희미하지만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6화. 의심
"...."
홉고블린의 습격 이후 뒷수습을 마친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다행히 상행단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라이오넬이 아니었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던 라칸의 얼굴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휴, 내가 장사를 접어야지."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날 소리를 하며 라칸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마차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런데 어제 그 빛은 대체 뭐였지?"
홉고블린을 쓰러뜨린 직후, 당시 근처에 있던 라칸은 라이오넬의 검에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목격했었다.
"오러는 아니었고."
라칸은 기사가 오러를 피워 내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의 검에서 나온 빛은 오러라기보다는....
"사제들이 사용하는 성법 같았는데."
라칸은 곧 고개를 저었다.
라이오넬에게서는 사제들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성서나 십자가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잠깐."
그는 이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신전에 가서 물어볼까?'
도시 마로니에의 주교와는 꽤 친분을 쌓아 둔 그였다.
주교는 그가 다소 황당한 질문을 하더라도 웃으며 받아 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이 건으로 신전 쪽과 좀 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만 되면 참 좋을 텐데.
"...."
한편 라이오넬 역시 어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힘이 차오르는 것 같은 신비한 감각 그리고 새하얗게 빛났던 검.
라칸이 추측했던 것처럼 그건 오러가 확실히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아직 심상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으니까.
'단순히 전후 관계만 따진다면....'
홉고블린을 쓰러트렸을 때 그 현상이 발생했으니 분명 거기에 원인이 있을 터였다.
'응?'
그때 라이오넬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환생자가 ■■을 획득했습니다.]
[파마(破魔)의 ■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들었던 목소리.
파마라 한다면 마를 깨트린다는 뜻.
그리고 어제 그는 마물들을 쓰러트렸다.
라이오넬의 생각이 더욱 깊어졌지만 곧 그는 혀를 차며 사고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쯧, 실마리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거기서 지지직거려서는."
그는 중요한 순간에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원망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
다행히 첫날을 제외하면 상행단은 마물은 물론 도적 떼와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마로니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님, 이걸 받으시죠."
"이건?"
"제 목숨값입니다."
라칸이 건네준 것을 받아 든 라이오넬의 눈에는 잠깐이지만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상인패였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그걸 들고 저희 상단을 찾아 주시지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상인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호의.
라이오넬은 그것을 받자마자 소중히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라칸.
라이오넬과 마주하고 있는 이의 이름은 그가 회귀 전 들어 봤던 유명인의 이름과 같았다.
바로 대상인 라칸.
그는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던 상인으로, 대신전과의 거래도 따낼 정도로 수완이 좋았으나 누군가의 음모로 무너지고 말았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섰고 이윽고 대상인이라 불리는 입지적인 인물이 되었다.
'흐흐흐, 예상치 않게 좋은 선물을 얻었군.'
대상인이 될 남자의 상인패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라이오넬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제가 부탁드렸던 건 어떻게 됐나요?"
"아, 그건 당연히 원래 계약 조건이었으니 지금 물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기 전까지 늦지 않게 최상품으로 준비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길."
막 라칸과의 대화를 마칠 때쯤 발렌티나가 라이오넬의 곁으로 다가왔다.
"슬슬 마무리된 것 같은데, 이제 이쪽 부탁을 들어줘야지?"
"물론이지."
라칸과 인사를 나눈 후 라이오넬은 발렌티나와 그 조직원들을 데리고 마로니에의 그늘 속으로 향했다.
"가면 사세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 때 벽에 붙어 있던 작은 소년이 라이오넬을 붙잡았다.
"뒷골목에서 가면을 파는 건 흔한 일이지."
눈치가 빠른 아이야.
라이오넬의 뒤에 있던 발렌티나가 말했다.
보통 외부인이 음지로 들어올 때는 꺼림칙한 일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만큼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할 테니 가면은 그에 딱 맞는 도구였다.
어린 소년은 발렌티나의 말대로 라이오넬과 그 일행을 보자마자 외부인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쪽 거리에는 없던데?"
라이오넬이 이스트본의 뒷골목을 떠올리며 눈을 끔뻑이자 발렌티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술에 취한 개가 돼서 들어오는데 가면이 무슨 소용이야?"
"일리가 있군."
홍등가에 발을 들이는 이들 대부분이 이미 술에 절여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얼마지?"
그러고는 어린 소년에게 가면을 하나 구입해 썼다.
여우 가면이었다.
발렌티나와 조직원들 역시 갖가지 동물 모양 가면을 산 후 얼굴에 가져가 썼다.
그리고 곧 그들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한 목조건물을 시야에 넣었다.
***
"젠장, 이놈의 피비린내는 대체 언제까지 맡아야 하는 거야?"
이미 주인은 없고 제 기능을 상실한 도살장이었으나 그간 짙게 밴 가축의 피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비릿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코가 썩겠군, 썩겠어!"
늙은 스승의 명령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는 남자, 마나만의 입에서 몇 번째일지 모를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사로 만들어 주겠다니 하긴 했는데.... 씨발, 이게 맞나?"
납치에 감금까지.
이건 순 뒷골목 건달들이나 할 법한 짓 아닌가?
"어이, 일어나."
인상을 찌푸린 채 검집으로 옆에 있는 소년을 쿡 찔렀다.
벽에 기댄 채 졸고 있던 소년, 율리안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율리안은 밧줄로 결박당한 채 재갈을 물고 있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지금 잠이 처와?"
퍼억!
마나만의 발에 걷어차인 율리안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요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율리안은 신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빌어먹을."
마나만은 그런 율리안을 내려다보며 욕설만 내뱉을 뿐 더 이상 손대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괴롭혀 봐야 그만큼 숨만 차고 이 엿 같은 공기를 더 삼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쾅!
"혀, 형님!"
그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그의 부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닥쳐! 적어도 대장이라고 해!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싱숭생숭한데."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쪽으로 몰려오는 무리가 있답니다!"
"뭐?"
"설마 '화원'에서 눈치를 챈 건 아닐까요?"
움찔.
화원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바닥에 힘없이 엎어져 있던 율리안의 눈에 순간 생기가 돌았다.
"이스트본에 있는 놈들이 여기를 어떻게 알아? 헛소리하지 말고.... 아니다. 지금 밖에 나간 애들 빨리 불...."
쿵!
"...야,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렸냐?"
"예? 어떤 소...."
쿵!
마나만과 그 부하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입구가 아닌 반대편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
벽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씨발! 야! 저 새끼 들고 빨리 따라와!"
마나만이 그 말만 던지고 서둘러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콰앙!
나무 벽이 부서지며 동물 가면을 쓴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봤냐! 이 거시기에 털도 안 난 것 같은 놈아! 이게 바로 어른의 힘이란 거다!"
토끼 가면을 쓴 덩치가 이두박근을 뽐내며 소리쳤다.
그걸 본 여우 가면 라이오넬이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등신들아! 빨리 쫓기나 해!"
사자 가면을 쓴 발렌티나가 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
"헉, 허억! 따돌렸나?"
마나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혀, 형님! 후욱! 후욱! 저, 저 죽겠습니다!"
그 뒤를 따라 율리안을 둘러업고 뛰던 그의 부하가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내가 더 힘들다, 새꺄! 여기까지 오면서 휘파람 부느라 죽는 줄 알았네."
흩어져 있던 부하들을 부르기 위해 쉴 새 없이 입술을 붙잡았던 마나만이었다.
그 노력이 없었다면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는 추격자들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마차가 오는 대로 곧바로 여기서 뜨...."
"형님!"
"...!"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마나만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카앙!
가까스로 검격을 막아 낸 그가 비치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젠장, 벌써 여기까지!"
자세를 다잡은 마나만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뭐야, 설마 너 혼자냐?"
습격자가 고작 여우 가면을 쓴 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습격자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약하군.'
대충 계산이 끝난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크, 멍청한 놈. 올 거면 다른 동물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야지."
여유를 되찾은 마나만이 여우 가면을 향해 물었다.
"네놈, 여기는 대체 어떻게 알아냈지?"
이번 일은 그의 스승인 안토니가 꽤나 공을 들인 일이었다.
그것은 제자 중 한 사람인 자신을 여기에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추격자들이 대체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는지 궁금했다.
"흠, 그걸 꼭 알아내야 하는 건가?"
"...?"
"누군가 알려 줄 수도 있지. 가령... 너의 실패를 바라는 어떤 사람이."
"...!"
여우 가면의 대답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참, 너 여우가 어떻게 우는지 아냐?"
"...뭐?"
한참 생각이 많아지는 찰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은 마나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그 인상이 찌푸려지는 순간.
타닷!
먼저 움직인 것은 여우 가면이었다.
"하티 하티 하티 호!"
우스꽝스러운 소리와는 달리 날카로운 궤적으로 검이 날아들었다.
"이런 미친!"
카앙!
가벼웠다.
그러나 흘릴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프지는 않았다.
캉! 캉! 캉!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연격에 마나만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려야 했다.
'무슨 놈의 검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 그가 여우 가면보다 앞서는 건 근력밖에 없었다.
"죽어!"
후웅!
그러나 힘으로 여우 가면을 뿌리치고 공세를 잡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여우 가면은 마치 춤을 추듯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그를 농락했다.
"형님! 놈들입니다!"
부하의 외침에 힐끔 곁눈질하니 피칠갑을 한 추격자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그닥, 다그닥.
"...! 야! 그 새끼 이쪽으로 넘겨!"
그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다시 한번 검을 크게 휘두르며 거리를 벌린 뒤 부하가 넘긴 율리안을 잡아챘다.
"쯧."
혀를 차며 멈칫하는 여우 가면을 보며 득의에 찬 미소를 지은 마나만이 가도를 향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형님! 왔습니다!"
부하가 마차의 도착을 알렸을 때는 이미 추격자들이 코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거나 먹어라!"
마나만은 율리안을 발로 걷어찬 후 재빨리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거기서! 이 개자식아!"
추격자에게서 분한 듯 터져 나온 욕설.
그것은 즉 그가 무사히 도망쳤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러나 마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은 마나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으로 여우 가면이 뿌린 의심의 씨앗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7화. 고향으로 가는 길
먼 과거, 신은 그가 아끼는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그 자신의 힘을 글로써 풀어 남겼다.
그것이 바로 성서였다.
성서는 오로지 신실한 이들만이 해석하고 탐구할 수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사제이며, 사제가 그로서 보여 주는 기적을 성법이라 불렀다.
"검에서 새하얀 빛이 나타났단 말입니까?"
"네, 주교님. ...아니, 뭐.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고요."
마로니에의 주교 레비는 라칸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지금 이 화제가 그저 농담이나 하자고 꺼낸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혹시 그 검을 들고 계셨던 분이 성서를 탐구하시는 분입니까?"
라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적어도 사제는 아니었습니다."
그 대답에 레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군요."
"답이라면, 어떤...?"
"만약 정말로 라칸 님이 본 것이 성법의 한 종류였다면, 그분께는 아마 성흔이 있을 겁니다."
"성흔?"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라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생소하실 겁니다. 사실 저도 이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처음이니까요."
그 말에 라칸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비는 이제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하하, 그런 눈으로 보시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 받습니다만."
"아이고, 아닙니다. 주교님."
가볍게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푼 레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제들이 어떻게 성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요?"
"네."
"실은 약 4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는 태어날 때부터 성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성서나 신학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라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들은 당시 신의 사랑을 품은 자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같이 신비한 흉터를 가지고 있었지요."
"아! 그럼 그것이...?"
"네, 바로 성흔입니다."
레비의 대답에 라칸은 라이오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럼 라이오넬이 성흔을... 잠깐.'
"아까 약 400년 전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흔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겁니까?"
"그런 셈이지요. 하하, 만약 라칸 님이 보신 게 사실이라면 약 400년 만의 대발견이 되는 셈입니다."
"...."
그 말에 라칸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보통 성흔을 가진 아이는 유아세례 때 그 특이성 때문에 이미 알려졌을 텐데요."
"아...."
탄식.
라칸이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레비는 아쉬워하는 라칸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후천적으로 얻었을지도 모르니까요."
"후천적이라면?"
"직접 새기는 것이지요."
"네?"
"성검에는 성흔을 새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어어?"
성검이라니?
갑자기 따라갈 수 없는 설명에 라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레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성검의 주인으로서 신탁을 받은 자는 성흔이 없는 스스로에게 또는 후계자에게 직접 새기기도 합니다."
"저, 성검의 주인이라면 혹시...?"
"네, 다른 말로."
라칸의 눈이 커졌다.
"용사라고도 부르지요."
***
"고맙습니다."
과거의, 그리고 먼 미래의 친구가 존댓말을 하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니 라이오넬은 어쩐지 낯간지러움을 느꼈다.
"존댓말은 됐어. 그냥 고마워, 로도 충분해."
"네? 하지만...."
"율리안, 저 거시기에 털도 안 난 것 같은 놈 말대로 해. 저 싸가지 없는 놈은 마담에게도 반말을 찍찍 내뱉는 놈이니까."
갑자기 끼어든 덩치의 말에 율리안이 눈이 동그랗게 뜨고 라이오넬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라이오넬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다 덩치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넌 그 토끼 가면이나 얼른 벗는 게 좋을 텐데? 그 가면에 묻은 게 핏자국이라는 걸 저기 경비병이 눈치채기 전에 말이야."
"쩝."
그 말에 덩치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가면을 벗었다.
그사이 라이오넬은 다시 율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아직이었군. 내 이름은 라이오넬이야."
라이오넬이 율리안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 제 이름은...."
"존댓말은 됐다니까."
"어, 응. 내 이름은 율리안."
"좋아."
마주 잡은 손을 보며 라이오넬이 씨익 웃었고 곧 율리안도 따라 웃었다.
"라이오넬."
그때 그의 곁으로 발렌티나가 다가왔다.
"그건 어디서 난 말이야?"
다가온 그녀는 빈손이 아니었다.
붙잡고 있는 고삐 뒤로 말 한 마리가 얌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놈들의 아지트 근처에 있기에 가지고 왔지. ...그런데."
발렌티나는 라이오넬과 율리안이 맞잡고 있는 손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친구가 됐나 보군."
"누, 누나! 아니야! 아직 친구는...."
"그럼! 친구가 아니라 이미 형제 같은 사이나 다름없지."
"네에?"
"존댓말."
"아, 응."
그 모습에 발렌티나는 물론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고향으로 가는 거지? 그럼 이걸 타고 가."
"가져도 되는 건가?"
"네가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할 말이니까."
"그럼 사양 않고."
발렌티나가 건넨 고삐를 붙잡은 라이오넬은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고향 마을 이름이 산테라고 했던가?"
"맞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지."
"우리 쪽 일이 정리되는 대로 한번 놀러 갈게."
발렌티나가 주먹을 내밀었고 라이오넬은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혔다.
"아 참."
라이오넬은 자리를 뜨기 전에 다시 율리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관상을 볼 줄 아는데, 넌 공부를 하면 크게 성공할 얼굴이야."
"어, 정말?"
그 말에 율리안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고마워, 라이오넬."
미래의 수사관을 향해 한 번 웃어 준 라이오넬은 그동안 함께한 다른 조직원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박차를 가했다.
***
마로니에를 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라이오넬은 아까 있었던 싸움을 떠올렸다.
'확실히 운동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마나만과의 대결에서 보였던 움직임, 훈련소 시절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
'역시 마물을 처치하면 힘이....'
"꺄아아아아악!"
막 숲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비명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리 멀지 않은 곳.
다만 방향은 크게 길이 나지 않은 쪽이었기에 그는 말에서 내린 후 서둘러 발을 놀렸다.
"누, 누가! 누가 좀 살려 주세요!"
라이오넬은 곧 나무에 올라가 있는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왜인지 나무 기둥을 붙잡고 얇은 나뭇가지를 위태롭게 밟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미친 건가?'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그는 곧 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고블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침 잘됐군."
라이오넬은 눈을 빛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실험해 봐야 하는 게 있었는데."
그리고 씨익 웃으며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잠시 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블린들이 모두 재로 변하자 나무 위에 있던 여성은 익숙하게 나무에서 내려선 뒤 라이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역시.'
작은 차이.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라이오넬은 그때 느꼈던 신비한 감각과 함께 몸 상태가 더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홉고블린을 처치할 때보다 희미하긴 했지만 짧게 빛났던 검도.
'내 가설이 맞는 것 같은데?'
"저기... 제 말 들리세요?"
부드럽지만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제야 여성의 존재를 떠올린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몸을 가린 검은 로브 위로 그와 비슷한 검은 생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었다.
나이는 지금의 그보다 많은 20대 초 정도, 옷차림을 봐서는 여행자로 보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 네! 도와주신 덕분에요! 물론 돌에 맞은 부분이 좀 아프긴 하지만요...."
히잉, 하고 울상을 지은 그녀는 굳이 로브를 들춰 퍼렇게 멍든 팔뚝을 그에게 보여 줬다.
그것참, 아프겠군요.
짧게 위로의 말을 건넨 라이오넬은 주변을 살폈다.
곧 근처에서 작은 짐과 함께 완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법사?"
라이오넬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그녀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이름은 에리카! 마법사랍니다!"
***
마법사란 신비를 좇는 자들.
그들은 자연 속에 퍼져 있는 마나와 교류하며 과거 사라진 신비를 재현하거나 새로운 신비를 탄생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다.
마법사는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애초에 마법사로서 태어난다.
마나를 볼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
이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마법사가 될 수 없었고, 반면에 타고난다면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나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존재 따위 없으니까."
마법사에게 '왜 마법사가 됐어요?'라고 질문을 던지면 열이면 열, 모두 저런 이해할 수 없는 답을 꺼냈다.
같은 인간이면서 불가해한 존재들이 바로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길을 잃으셨다고요?"
"네...."
눈에 띄도록 닦인 길만 따라가더라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숲이었다.
그런데 길을 잃었다?
라이오넬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기꾼 같지는 않은데.'
라이오넬은 에리카의 허리에 매달린 완드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게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어쩐지 완드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다시 에리카에게 고개를 돌린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어딘가요? 방향 정도는 알려 드릴 수 있는데."
"어, 이 숲을 지나면 마을 하나가 나온다고 들었거든요. 마을 이름이, 산테라고 들었는데...."
"산테?"
에리카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라이오넬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사라졌다.
"아무런 볼 것도 없는 마을인데, 대체 무슨 일로 찾는지 물어도 될까요?"
"음...."
라이오넬의 질문에 에리카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으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근처에 조사할 것이 있거든요."
"조사?"
"어... 그게, 저희 집안 문제라 설명하면 길기는 한데.... 아무튼!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헤, 헤헤....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에리카의 모습에 라이오넬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죠, 목적지가 같으니."
"와아! 다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길치거든요! ...저기, 그럼."
기뻐하다 말고 눈치를 살피는 에리카의 모습에 라이오넬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기다렸다.
"서로 가는 길도 같은데 편하게 말하면 어떨까 해서요. 헤헤, 저를 부를 때는 누ㄴ...."
"그러지, 에리카."
"누나라고 부르면...."
"에리카."
"힝."
단호한 라이오넬의 태도에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
"우와! 저기가 산테 마을이구나!"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정면으로 아무런 특징 없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에리카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곳을 발견한 탓에 기쁜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푸르릉!
"에리카, 춤을 추고 싶다면 말에서 내린 후 혼자 추는 게 어때? 난 이 녀석과 로데오를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언짢은 듯 콧김을 내뿜는 말을 달래며 라이오넬이 말했다.
"응, 누나가 미안해. 라이오넬...."
그 말에 에리카는 라이오넬의 뒤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데 마을 풍경이 너무 좋다! 저기 처음 마을을 세운 사람은 분명 운치가 있는 사람일 거야!"
금방 기운을 차리고 재잘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라이오넬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마을을 바라봤다.
곧 마을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과거의 풍경이 나타났다.
"...."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의 손짓에 무자비한 마물들이 사람들을 덮쳤고,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던 주민들은 금방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핏빛으로 물든 꽃이 보였다.
"라이오넬, 어서 여기서 도망치거라!"
"아버지는요!"
"난 여기서 저놈들에게 네 누이의 핏값을 받아야겠다!"
그 가운데 지켜야 할 것들을 대부분 잃은 노기사가 이가 빠진 검을 들어 올리며 포효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도 지키려는 그 모습은 의연하기보다 처연해 보였다.
"후."
눈을 깜빡이자 그의 눈으로 다시 평온한 마을이 비쳤다.
'그 일이 다시 반복되게 둘 수는 없지.'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킨 라이오넬이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 뒷자리에 우연의 일치인지 당시에는 함께하지 않았던 검은 로브의 마법사를 태운 채로.
8화. 그 남자의 서툰 귀환
"...."
말없이 서신을 읽던 안토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책상 위에 편안하게 올려 뒀던 주름진 손은 어느새 꽈악 쥐인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너뜨리려던 상단은 무사히 상행을 떠났고, 납치해 꼭꼭 숨겨 둔 인질은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대신전과의 거래도, 이스트본의 뒷골목을 장악하려던 계획도 한 번에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게 대체...!"
시작은 밀리어 상단의 라칸이라는 상인이 용병 대신 뒷골목 건달들을 호위로 고용한 것에서 시작됐다.
'그 상인 놈이 내 계획을 읽고 화원과 손잡은 것인가?'
실제로 라칸이 이끄는 상행단이 마로니에에 들어선 직후 인질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해 볼 법한 의심이었다.
'그놈이 어떻게 인질을.... 아니, 아니야.'
안토니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간 알아본 바에 의하면 라칸은 수완 있는 상인이기는 하나 그의 계획을 한눈에 꿰뚫고 훼방을 놓을 수 있는 이는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화원'이 자체적으로 찾아냈을 리는 없었다.
주먹질이나 하는 천박한 계집이 이끄는 집단에서 그 정도 머리를 쓸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건 이미 조사로 드러났으니까.
감히 어떤 놈이....
똑똑.
노크 소리.
깊숙이 상념을 넘어 아집으로 달려가던 그의 사고가 멈췄다.
"스승님, 접니다."
이어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곧 문이 열리며 짧은 흑발에 단정한 인상의 청년이 들어왔다.
그를 본 안토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청년의 이름은 어셔.
안토니의 제자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며 그가 아끼는 인물이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다름이 아니라 조만간 나와 함께 어딜 다녀와야겠다."
"아, 혹시 저번에 말씀하신...?"
안토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셔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준비하겠습니다."
***
도시 마로니에에서 남쪽 숲길을 빠져나가면 산테라는 이름의 작은 시골 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산테 마을은 원래 마로니에 관리하에 있던 곳이었으나 변경백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기사, 라이오넬의 아버지인 조셉이 은퇴할 때 마을의 권리를 그에게 선물로 넘겨줬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기사라 말했지만....'
영주가 기사에게 땅을 내어 주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조셉의 말과 달리 변경백이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목숨 정도는 구하지 않았을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스스로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을의 권리는 물론 대를 이은 세습까지 허락했으니 아마 보통 공을 세운 게 아닐 거라 라이오넬은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었다.
"어? 도련님이다!"
마을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자경단원이 멀리 라이오넬의 모습을 알아봤는지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귀족은 아니었으나 라이오넬은 마을 지배자의 아들이니 그 호칭은 그럴듯했다.
비록 그 목소리에서 존경심은 빠져 있었지만.
"우와! 라이오넬, 혹시 귀족이었어?"
뒤에 있던 에리카가 그 말에 깜짝 놀란 듯 그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귀족은 아니고 그 하위 호환이라고 해야 하나."
"응? 응?"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무시한 채 라이오넬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마을에서 그를 저렇게까지 격하게 반겨 주는 이는 가족을 제외하면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그와 동갑내기 친구인 잭.
방에 틀어박힌 날이 더 많은 라이오넬이었지만 가끔 밖을 나설 때면 살갑게 먼저 말을 걸어 주던 고마운 친구였다.
마을이 불탄 이후 보지 못했던 그리운 얼굴.
라이오넬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응?"
신나게 손을 흔들다 말고 잭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굳어진 그의 눈은 라이오넬이 아닌 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 시선을 눈치챈 라이오넬은 좋지 않은 예감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잠깐, 잭.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
그러나 잭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휙 돌리더니 허겁지겁 다시 마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련님이 여자를 데리고 돌아왔다아아아아!"
곧 쓸데없이 큰 목소리가 마을 전체로 울려 퍼졌다.
별 볼 일 없는 작은 마을, 늘 새로운 자극이 부족한 이곳이 그 소리에 시끌벅적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뭐? 도련님이 돌아왔다고? 아니, 그보다 여자?"
"세상에! 그 도련님이 반려를 데리고 오다니!"
"믿을 수 없군! 항상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던 도련님인데!"
웅성웅성.
마을은 순식간에 라이오넬과 그 반려(?)가 될 여자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눈치 없는 에리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그 의혹만큼이나 커져 갔다.
"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라이오넬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는 조용히 마을로 돌아와 가족들과 최대한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재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 앞에서 혼자 울고불고하기에는 왠지 낯간지러웠으니까.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그의 가슴속으로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에 들어섰을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누가 봐도 급하게 차려입은 듯한 그의 아버지와 누나의 모습.
그것을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크흠, 아버님이라 불러도 좋네."
앞뒤 잴 것 없이 시원하게 김칫국을 들이켜는 아버지의 한마디.
"...!"
자연스러운 재회를 꿈꾸던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은퇴 기사 조셉은 항상 그의 늦둥이 아들이 걱정이었다.
아내는 노산 이후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난 터라 보듬어 줄 어미 없이 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차라리 나았다.
라이오넬은 작을 때부터 그 나이대 아이라면 가지고 있을 활기도,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과 같은 아이.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
그래 왔기에 조셉은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라이오넬의 모습이 크게 기꺼웠다.
'역시 보내는 게 정답이었어.'
훈련소에 보낼 때만 하더라도 혹시 적응하지 못해 전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을까 우려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인 양 변해 있었다.
거기에.
'고블린만 봐도 까무러치던 녀석이....'
그런 아들이, 세상에.
고블린으로부터 마법사를 구했단다.
함께 식사를 했던 해맑은 마법사가 직접 증언했으니 사실이 틀림없었다.
"달이 참 밝군."
아들을 위한 작은 파티는 이미 끝난 뒤.
조셉은 집무실에 보관하고 있던 값비싼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꿀꺽, 꿀꺽.
시원하게 식도를 넘어가는 위스키와 함께 그간의 걱정거리가 싹 내려가는 듯했다.
"크으."
조셉은 라이오넬으로부터 훈련소에서 퇴소당했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그 탓에 이제 그의 아들이 앞으로 기사가 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 한구석으로는 여전히 라이오넬이 자신의 뒤를 이어 기사가 돼 줬으면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지금 모습만 유지하면 자기 땅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그는 서랍을 열어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세상에는 참 도둑놈들이 많아."
비록 이곳이 시골 마을이긴 하나 온전히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매우 컸다.
그 때문에 호시탐탐 이 마을을 노리는 도둑놈들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
처음 그들이 노린 것은 그의 딸이었다.
이미 그의 늦둥이가 반푼이로 소문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딸은 변경백의 동생인 안드레스 헌틀리의 전속 하녀로 일하고 있었으니 도둑놈들의 눈에는 능력 있는 여자와 땅을 동시에 차지할 수 있는 기회로 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그의 딸은 철벽과도 같았다.
외부에서 쏟아지는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텨 낸 것이다.
'그 탓에 혼기도 놓쳐 버리고 말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부작용에 한숨을 내쉰 그가 손에 쥔 서신을 살폈다.
서신의 겉면에는 그의 동료였던 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또 내 아들을 노린단 말이지?"
서신의 내용은 이미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옛 동료가 손녀를 데리고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
"후욱! 후욱!"
식사를 마쳤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저택에 마련된 작은 훈련장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파마의 힘.'
라이오넬은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정체가 혹시 이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던 그 목소리도 그렇고, 마물을 처치하면 힘이 솟는 것까지 생각하면 그것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힘은 성검의 주인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일 텐데.'
그것은 용사의 전유물이었다.
이미 회귀 전 성검에게 차였던 경험이 있는 라이오넬은 함부로 확신할 수 없었다.
[환생자가 ■■을 획득했습니다.]
"...."
남은 힌트는 하나.
저 내용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이 힘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릴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해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마물을 계속 사냥하면서 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체력 단련도 꾸준히 해 줘야겠지.'
그 힘이 뭐가 됐든 체력 단련은 필수였다.
자칫 몸이 힘을 버티지 못하기라도 하면 그건 그것대로 낭패니까.
"열심히 하는구나."
단련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긴 금발을 단정하게 올려 묶은 무뚝뚝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누나인 스칼렛이었다.
혼기를 놓친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그녀가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걸로는 부족하지. 지금까지 헛되이 보낸 시간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해."
"후후, 그래. 하지만 난 지금도 네가 충분히 자랑스럽단다. 아마 아버지도 그리 생각하시겠지."
"퇴소당했는데도?"
그녀의 입가가 작게 호선을 그렸다.
수건 위로 보이는 라이오넬의 눈동자는 더 이상 그녀가 알던 흐리멍덩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잖니."
그 말에 라이오넬은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다정함이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누나."
"응."
"다시 보니 좋네."
"아버지한테도 그 말, 꼭 하렴."
"...시간이 나면."
그 작은 목소리에 스칼렛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사내들은 왜 이런 걸 쑥스러워할까.
"그런데, 라이오넬."
"...?"
"그 마법사 아가씨와는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니?"
하아, 그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라이오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휴가는 언제까지야?"
일부러 화제를 돌리기 위한 것임을 눈치챘지만 그녀는 쑥스러워하는 동생의 의도에 순순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글쎄, 안드레스 님이 황도의 연회에서 돌아올 때까지? ...또 여자 문제를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스칼렛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편 라이오넬은 방금 그녀의 말에서 회귀 전 그가 모셨던 도련님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물어볼까?'
스칼렛이라면 도련님의 근황에 대해 알고 있을 테지만....
라이오넬은 곧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9화. 변수
이스트본에 있는 훈련소에서 얼마 전 작은 소동이 벌어졌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야 소동이 일어난 제3훈련소는 다섯 개의 훈련소 중 하나였을 뿐이며 종자들이 훈련소에서 쫓겨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토니로부터 두둑한 보상을 받아 낸 훈련소장은 이미 다 끝난 일이라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라이오넬이 훈련소를 나간 시점에서 들킬 걱정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지만 사건은 늘 당연하게 여기던 일이 꼬이면서 터지는 법이다.
아무에게도 언급될 일이 없어 보였던 그 사건이 드러나게 된 건 놀랍게도 현 변경백의 후계자인 레오나 헌틀리의 입에서부터였다.
"조셉 경의 아들이 훈련소에 있다고 들었는데."
하필 그날 레오나는 가문의 전쟁사에 대한 수업을 듣고 있었고 또 하필이면 라이오넬의 아버지인 조셉이 활약했던 전투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소식을 한번 알아볼까요?"
거기에 더해 레오나의 전담 하녀는 눈치가 빠르며 매우 유능한 여자였다.
그녀는 즉시 주인을 위해 몸소 제3훈련소로 향했다.
당연히 이런 일을 대비해 훈련소장은 대놓고 불이익을 부르짖으며 종자들과 교관들의 입단속을 시킨 후였으나....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뭇사람의 입은 막기 어려운 법이었다.
라이오넬에 대한 이야기를 순순히 그녀에게 털어놓은 이는 바로, 양아치 대신 기사를 선택한 케일럽이라는 이름의 종자였다.
미래로부터 회귀한 라이오넬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
오랜만에 고향에서 하룻밤을 보낸 라이오넬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에리카를 향해 말했다.
"마을 주변에 조사할 것이 있다 했었지? 안내해 줄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민 손.
기사로서 갈고닦았던 교양은 그가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몸으로 나타났다.
"우와!"
그 모습에 짧게 감탄한 에리카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손을 올렸다.
"헤헤, 고마워! 누나, 완전 감동이야!"
라이오넬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조셉과 스칼렛이 흐뭇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밖에 좀 다녀올게요."
"천천히 와도 된단다, 라이오넬."
그는 조셉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서둘러 에리카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어? 도련님!"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나무를 하기 위해 마을을 나서려는 장정들과 그 틈에 섞여 있던 잭과 마주치고 말았다.
잭은 라이오넬의 옆에 선 에리카를 보자마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어휴, 너무 뜨거워서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겠는데요?"
점점 커지는 얄미운 얼굴을 보며 라이오넬은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이상한 오해가 생긴 것도 다 저 자식 탓이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잭은 넉살 좋게 에리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법사 맞으시죠?"
"네!"
"혹시 마법 중에 사랑의 마법 같은 것도 있나요?"
"으음, 들어 본 적은 없는데.... 그건 왜요?"
"하하! 도련님이 갑자기 변하셔서 말입니다."
"응?"
"마법사님은 모르시는군요! 남자는 사랑에 빠지면 변하는 법이거...."
그때 도끼눈을 뜬 라이오넬이 끼어들었다.
"잭,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올 수 없다 하지 않았나? 더 이상 혓바닥을 놀린다면 네 볼기짝부터 정말 뜨겁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어이쿠."
라이오넬이 검자루에 손을 올린 채 으르렁거리자 잭은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며 장난스럽게 펄쩍 뛰었다.
"도련님, 저는 이만 나무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얼른 가."
꾸벅 허리를 숙이는 잭을 향해 라이오넬이 휘휘 손을 내저었지만 잭은 말과는 달리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왜?"
"...정말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라이오넬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그를 걱정하던 이가 잭이었으니까.
라이오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잭은 그제야 손을 흔들고는 장정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기다리게 했군."
"헤헤, 괜찮아. 보기 좋은 모습이었으니까."
이후 라이오넬은 마을을 돌며 안내 역할에 집중했다.
중간에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찾아와 마법을 보여 달라며 떼를 쓰기도 했지만.
"미안, 마법을 쓰려면 준비가 필요하거든! 다음에 준비가 되면 이 누나가 꼭 보여 줄게!"
에리카는 능숙하게 아이들을 달래며 돌려보냈다.
내심 어떤 마법을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라이오넬은 아쉬움을 삼키고 안내를 계속했다.
그리고 높이 지붕 위로 십자가가 걸린 낡은 건물 앞을 지날 때였다.
"저기 있는 게 신전인데.... 갑자기 왜 그러지?"
라이오넬은 조금 전까지 옆에서 나란히 걷던 에리카가 갑자기 멈춰 서자 몸을 돌리며 물었다.
"저게, 신전이라고?"
방금만 해도 해맑은 미소가 가득하던 에리카의 표정이 어느새 잔뜩 굳어져 있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라면...."
"아니, 아니야. 얼른 다른 곳도 안내해 줘."
라이오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리카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신전을 보는 것조차 싫은지 라이오넬의 등 뒤로 바짝 붙어 섰다.
"...."
라이오넬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에리카를 데리고 신전을 지나쳤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신전과 멀어질수록 제 컨디션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라이오넬! 저기는 뭐 하는 곳이야?"
그리고 다시 해맑게 웃는 모습에 그녀를 바라보는 청안에서 잠깐이지만 이채가 서렸다 사라졌다.
잠시 후.
"안내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마을뿐 아니라 그 주변까지 안내한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멈춰 섰다.
"무슨 조사를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밖으로 나갈 거면 날 불러. 지금은 괜찮지만 마물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고블린 상대로 나무까지 탄 마법사를 보며 라이오넬이 말했다.
그러나 에리카는 자신만만한 듯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는 답했다.
"누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헤헤, 그거라면 괜찮아! 준비만 제대로 한다면 고블린 정도는 문제없거든!"
이어서 지금부터 그 준비를 할 거라며 저택으로 돌아간다는 에리카를 데려다준 라이오넬은 다시 신전으로 향했다.
"준비라...."
라이오넬은 그 말을 되뇌며 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아까 신전 앞에서 보였던 에리카의 심상치 않은 반응.
그것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계십니까?"
끼이익.
문을 열자 오랜 시간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세월이 그대로 녹아든 소리가 귀를 때렸다.
텅 빈 예배당.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꽃향기가 코를 스쳤다.
언젠가 맡아 본 향기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때 구석에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한 손님이 찾아왔구나."
늙은 사제가 인자한 미소로 라이오넬을 반겼다.
사제 스콧은 라이오넬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을 지키던 자였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하하, 나야 당연히 건강히 지냈지. 이럴 게 아니라 차라도 한잔하자꾸나."
따라오라는 손짓에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이고 늙은 사제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면서 보니 신전 곳곳에 수리가 필요한 곳이 있더군요."
라이오넬의 말에 스콧은 웃으며 차를 건넸다.
"나와 함께 늙어 가는 소중한 동료지."
차를 받아 든 라이오넬은 낡은 찻잔을 한번 살핀 후 고개를 들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람들을 데리고 손보겠습니다."
"하하, 괜찮네 괜찮아. 올해 겨울까지는 버틸 수 있으니."
스콧은 손사래를 치며 라이오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못 알아볼 정도로 많이 의젓해졌구나. 조셉 경이 아주 기뻐하겠어."
"감사합니다."
그 뒤로는 신변잡기 같은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따뜻한 찻잔이 다 식을 때쯤 스콧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데, 그... 네가 데려온 마법사 말이다."
"네, 말씀하시죠."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으음, 스콧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라이오넬은 재촉하지 않고 이미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내 결심했는지 스콧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는 뭔가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더구나."
"그렇습니까."
라이오넬은 들었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찻잔 속 내용물.
그것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푸른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라이오넬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 사건을 억지로 다시 떠올렸다.
안타깝게도 사건의 주범은 라이오넬이 회귀하기 전까지도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저 범인 중 한 사람이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라는 점을 빼면 총 몇 명이며 외부인인지 내부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야 유일한 생존자는 라이오넬, 그 자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라이오넬은 놈이 어떻게 일을 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시간은 아직 내 편이야."
처음에는 의도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 스스로가 변수가 되면서 오늘 하루만 해도 라이오넬은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새로운 정보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일부터는 좀 더 넓게 움직여 볼까?'
겸사겸사 마을 주변을 떠도는 마물을 사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이었나?"
라이오넬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어째서 갑자기 떠오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일은 당시의 라이오넬에게 작은 해프닝조차 되지 않았던 일이었다.
"잠깐, 이것도 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에리카는 '준비'를 위해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방에 틀어박힌 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리카가 조사한다며 외출할 경우 몰래 미행할 생각도 하고 있었던 라이오넬은 이번에도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원래 계획대로 행동 범위를 조금씩 넓혀 갔다.
비록 원하던 새로운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간간이 마주친 마물을 사냥하면서 라이오넬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갔다.
당연히 체력 단련도 빼놓지 않았다.
"라이오넬."
그날은 오전부터 비가 심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라이오넬은 조셉과 스칼렛이 강하게 외출을 반대한 탓에 훈련장에서 오직 체력 단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단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스칼렛이었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구나."
그녀의 말에 라이오넬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니?"
말을 건넨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근심이 묻어 있었지만 라이오넬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들어 보면 알겠지."
라이오넬은 그녀가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낸 후 곧바로 조셉이 기다리고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아버지, 접니다."
"들어오거라."
라이오넬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조셉은 곧바로 서랍에서 서신을 꺼내 라이오넬에게 건넸다.
"읽어 봐도 됩니까?"
"그래."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안토니는 오랜만에 동료인 조셉의 얼굴을 보러 이곳에 올 것이며 오는 김에 자신의 손녀를 데려와 라이오넬과 만나게 하고 싶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라이오넬은 서신을 대충 훑어본 후 다시 조셉에게 건넸다.
"어떻게 할 거냐? 네가 싫다면 굳이 억지로 볼 필요는 없는데."
회귀 전 라이오넬은 그것을 거절했었다.
"만나 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0화. 도둑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