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후
고급스러운 검은 원탁.
나무의 결이 하나, 하나 살아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 위에 찬란한 황금 술잔이 놓여있다.
어떤 싸구려 술도 이 잔에 따르면 천상의 맛이 날 것 같다.
비록 내용물이 치명적인 '맹독'일지라도 말이다.
난 황금 술잔을 덤덤히 집어들었다.
그리고, 겸허히 들이켰다.
근엄한 전대 북부대공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
마시는 동안 저택 밖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제국 시민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킨 건지, 수많은 발소리가 1층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굳게 닫힌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 소음의 정체를 알고 있다.
최근 긴급 수배령이 떨어진 30살의 사내.
나 율리우스 로저를 잡으려는 기사들의 소리니까.
난 제국의 북부 지방을 호령하던 대공, 루튼 공작의 비서장이다.
대공과 가장 밀접한 인물이며, 그의 막대한 자산 관리를 맡고 있었다.
허나, 그런 큰 권력을 만지게 된 탓일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대공작의 재산에 손을 대버린 것이다.
"너희는 1층을 수색하라! 나머진 나를 따라 2층으로!!"
제국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의 재산을 횡령한 죄.
그 죄를 추궁하기 위해 북부 최정예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허나, 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들이 이곳으로 도착하는 동안….
그저 묵묵히 집무실 벽에 걸린 아름다운 명화를 감상할 정도로 여유로웠으니까.
"저걸 매입한 게 언제였더라."
무도복을 입고 우아하게 춤추는 어린 소녀.
감상한 사람 모두가 순수했던 시절의 첫사랑이 떠오른다고 말할 정도로 명화였다.
덕분에 작품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건물 몇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로.
허나, 어떤 자가 이런 물감 덩어리에 막대한 돈을 투자할 수 있겠냐며 모두가 비아냥댔었다.
실제로 내가 이 명화를 매입하자고 했을 때, 수완이 좋았던 대공자조차 이를 말릴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난 적극적으로 몰아붙여서 결국, 집무실에 이 작품을 걸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날, 대공이 된 가문의 장남은 이 작품을 매입한 내 판단을 아직도 심심치 않게 칭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공자가 여태껏 모은 수많은 재산.
다른 사람들이 뇌물로 바치며 올라온 그 시꺼먼 돈을….
내가 저 소녀의 치마 밑에 감춰버렸으니까.
출처가 불분명한 자산은 자고로 세금으로 붙잡혀 조사당하기 일쑤다.
허나, 이런 예술 작품은 가치가 실시간으로 변동되기에 재산으로 잡히기 애매하다.
작품의 가치를 유지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아니, 유지하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다.
북부대공이 투자했다는 입소문 만으로도 이 작품에 대한 광고는 충분했으니까.
오히려 날이 갈수록 값은 더욱 치솟아 전설의 명작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10년간 저택에 수집한 작품이 수십개가 넘는다.
"이젠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난 쓸쓸한 눈빛으로 비서장의 집무실을 둘러봤다.
마치 곧 먼 여행을 떠나 다시는 못 돌아오게 될 것처럼.
오랜 여행이 두려웠는지, 다리가 점차 후들거렸다.
맞춰 입은 정장도 물에 푹 젖은 것처럼 온몸을 조여왔다.
허나,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타인의 앞에서 불편한 기색을 하지 않는 것.
그림자처럼 조용히 주군을 보좌하는 것.
그것이 비서의 일이니까.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난 그 수칙들을 철저히 교육받았다.
덕분에 이제는 감정을 내비치는 법조차 까먹은 것 같다.
"…."
그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후, 떠나기 전에 만날 대공가의 마지막 손님을 기다렸다.
밖에서 들리는 거친 군화 소리.
이윽고 문 앞에서 멈추는 순간….
쾅――――!!
웅장한 집무실 대문이 힘껏 젖혀졌다.
그 벼락같은 소리에 굳게 닫힌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율리우스 로저."
한 여기사의 차가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등장에 원탁 위에 놓여있던 황금 성배도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마주한 상대는 이 루튼 가문에서 가장 냉철한 사람으로 유명했으니까.
"에키나 대공녀님."
수려한 검은 머리칼 속에서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10년간 모셨던 북부대공의 차녀이자, 현 기사단장인 에키나 루튼이다.
"절 체포하러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몸에 딱 맞는 백색 제복 차림의 기사가 내게 검을 겨누었다.
허나, 그녀의 금빛 눈동자엔 일말의 살기도, 분노도 섞이지 않았다.
"정말 그대의 짓인가…?"
그저 간절함 뿐이었다.
내가 재산을 횡령한 범인이라고 아직도 믿지 않는 듯한 간절함.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평소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답하자, 대공녀는 나머지 손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동행한 기사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타국으로 빼돌린 게 정말 자네냔 말이야."
평소엔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
이 차디찬 북부 지방의 기사로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냉철해야 하니까.
"대답하게."
하지만, 그녀는 지금 심란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대공녀의 미세하게 떨리는 붉고 부드러운 입술이 이를 입증했다.
"…그렇습니다."
내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초점 없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간사한 배신자처럼 눈 밑에 돋은 검은 점도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니잖는가."
역시 10년 넘게 같은 가문에서 자란 대공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는지 싸늘히 정색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에릭의 악행이 밝혀져서, 어쩔 수 없이 그대가 뒤집어쓴 거잖아."
에키나의 날카로운 눈매가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마치 천천히 요동치는 금빛 바다처럼.
"역대 비서장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야."
그녀의 말대로 언제나 대공가의 실수를 대신 처리하던 건 나였다.
그것이 비서장의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공녀도 날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오라버니이자 대공가의 장남인 에릭의 비자금 횡령.
그가 여태껏 저지른 악행을 평민인 내가 뒤집어쓴다면….
"하지만, 이번엔 단순히 그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네."
무기 징역은 물론, 빼돌린 횡령금 수색을 위한 고문까지 당할 수도 있으니까.
"영영 빛을 못 보게 될지도 몰라."
기사단장인 그녀는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꼬리가 되어 잘려나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거늘.
사실상 죽음을 자처한 내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능구렁이 같던 자네라도 말이야…."
내게 겨눈 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북부대공녀는 애석한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고개를 젓자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그토록 무정한 사람으로 유명했던 북부대공녀가 말이다.
"제발 멈춰…."
난 떨리는 그녀의 얼굴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생전 처음 보는 에키나의 슬픈 눈빛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10년 차 비서인 나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맞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이번만큼은 빠져나가기 힘들겠죠."
술을 마신 후부터, 점점 참기 힘든 복통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 고통 속에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여태껏 쌓아온 현 대공님의 악행을, 혼자 모두 감당해야 할 테니까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자, 머릿속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전신에 흐르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러니, 저 정도 되는 인물이 범인으로 잡혀야, 황실에서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네 혼자 뒤집어쓰고 끝내겠다는 건가…?"
흑발의 여기사가 비틀거리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순간.
"...!!"
그녀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쓰러지는 날 받쳐주었다.
그리고, 속이 텅 빈 것처럼 맥없는 내 모습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설마…."
내가 쓰러지는 충격으로 원탁에 놓여있던 황금 술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속에 들어있던 검은 액체가 바닥으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액체의 정체를 깨달은 대공녀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10년 전에.... 기억나십니까?"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제 가문이 몰락하고 파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날 루튼 대공께서 제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어떻게든 나의 선택을 합리적인 척 둘러댔다.
그렇게 해야만 모시던 가문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 손을 잡았을 때부터 저는 맹세했습니다."
북부대공이 누구로 바뀌든.
그가 내게 무엇을 명령하든.
"전 언제나 대공가를 지킬 것이라고요."
그것이 바로 비서장의 책무였다.
"이건 자네답지 않은 처사야…."
에키나는 쓰러진 나를 부축했다.
내 머리가 그녀의 안락한 허벅지에 천천히 눕혀졌다.
"너무 무모하고 극단적이라고…."
나답지 않다.
그 말에 난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정말 맞을지도 모르니까.'
철칙대로라면 난 진작에 성배를 마시고 집무실 문을 잠근 채.
조용히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래야 에키나가 날 추적하러 왔을 때,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을 테니까.
늙은 개가 자신의 죽음을 주인한테 보여주지 않으려고 숨어드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난 차마 그러지 못했다.
늦은 사춘기라도 온 것처럼, 죽기 전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이 허망한 죽음을 알리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답지 않은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간신히 손을 뻗어, 차가운 대공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살결과 한 줄기의 눈물.
어쩌면 이번 생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촉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공녀님도 저처럼 변하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치열한 대공가의 차녀로 살아온 에키나에게 애써 미소 지었다.
나처럼 감정이 무뎌졌던 그녀도 지금, 이 순간.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남을 '동정'할 수 있게 되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내 미소를 보고도 대공녀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저 끓어오르는 가슴을 움켜잡듯, 붉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동정심이 아니야…."
공무 집행으로 찾아왔던 그녀의 차가운 말투가 바뀌었다.
마치 가족처럼 따뜻하고 친근하게.
"동정심이 아니라고, 율리우스."
정말로 많이 달라진 대공녀의 모습에 내 미소도 멎고 말았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기에.
"난 아버지도, 에릭도 아닌, 너야말로…."
대공녀는 내 얼굴을 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인형처럼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이 나와 가까워졌다.
"진정한 '가족'이라고 여겼는데…."
고개를 숙인 탓에 에키나의 수려한 검은 머리칼이 내게로 쏟아졌다.
집무실은 그녀의 머릿결에 가려져 커튼이 되었고 세상엔 우리 둘만 남겨졌다.
그 속에서 에키나는 내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감정이 솟구쳤다.
"이제 와서 이렇게 가버리면 어쩌란 말이야…!!"
호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요동쳤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가에서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공녀님."
차갑게 굳어가던 얼굴 위로 그녀의 뜨거운 감정이 떨어졌다.
덕분에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를 잠시나마 불태울 수 있었다.
"전 평생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난 눈물을 머금은 에키나를 측은하게 올려다봤다.
그리고, 마지막 사력을 다해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가끔은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죠."
그러나 이번 미소는 여태껏 지었던 가식적인 미소와 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간신히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일렁이는 눈가를 마주하며 말했다.
"어쩌면 전 생각보다 과분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녀의 마지막 용안을 보면서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날 이토록 깊게 생각해 준 여인 앞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감사합니다."
난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채 눈을 감았다.
덕분에 요란했던 북부대공의 저택에 마침내 조용해졌다.
찬란한 정오의 햇빛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그 속에서 북부대공녀는 핏기 없는 사내를 껴안은 채 미치도록 울부짖었다.
그것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2. 첫 시험 (1)
어릴 적, 내가 깨달은 세상의 진리가 하나 있다.
「바로 부와 명예.」
인간은 부가 있어야 명예롭게 살 수 있으며.
명예가 있어야 부가 따라온다.
서로가 보완되는 이 진리를 알려준 건 바로 내 아버지였다.
율리우스 로빈.
그는 반반한 외모와 특출난 검술 덕분에, 제국에서 인기가 많은 용병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기사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정의를 내세웠지만, 철저히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만 엄선해서 참전했으니까.
「아들아, 명예란 얻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단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얻기만 하면 모두가 박수 쳐주기 마련.
그렇게 아버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마침내 '준남작'이라는 기사 작위를 쟁취했다.
허나,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작위가 생기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전쟁에 더욱 자주 참여했다.
기사가 되면 전리품을 남들보다 더욱 많이 챙길 수 있고, 이는 곧 '부'로 축적되니까.
부가 쌓이니, 곧 저택과 고급스러운 정장이 사치품으로 따라왔다.
아버지는 이를 통해 인맥을 쌓았고. 비로소 이곳 노르드의 명예로운 기사 중 하나로 등극하셨다.
덕분에 아들인 나도 귀족들이 다니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매일 등교할 때마다 아버지께 항상 이 조언을 들었다.
「아들아, 어떤 일이 있어도 부와 명예를 잃어서는 안 된다.」
난 귀가 닳도록 들은 그 말이 심히 못마땅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다니며 배운 명언을 꺼내 반박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내면'이라고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셨다.
이후, 피식 웃으며 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인간의 내면이라…. 하지만, 그 '내면'을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요…?"
「네 내면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상대가 관심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횡설수설하던 나는 곧 깨달았다.
서로의 내면을 공유하려면 일단 서로가 친해져야 한다는 걸.
「모든 관계의 첫걸음은 그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외면'부터 시작된단다.」
아버지는 입고 있던 고급스러운 재킷을 훌훌 터셨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자신의 우아한 저택을 올려다봤다.
「명심하렴. 내면이란 상대가 너를 진정으로 필요하게 되었을 때 겨우 보여줄 수 있는 거야.」
아름다운 여인은 매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행복을 줄 테고.
능력 있는 사내는 곁에 두기만 해도 함께 우월해지는 기분을 제공한다.
「어쩌면 부와 명예보다 훨씬 더 사치스러운 걸지도 모르겠구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수긍한 나는 그때부터 부와 명예를 따라갔다.
허나, 그처럼 기사가 되는 걸 택하진 않았다.
검술에 재능이 출중했던 아버지도 매번 승리만 하실 순 없었으니까.
소소하게 쌓아 올린 공적은 양국 간의 대전에서 패배하자 빠르게 무너졌다.
백전백승의 칭호를 잃고 나니 그에게 남은 건….
이제 곧 은퇴를 앞둔 '왕년에 잘나가던 기사' 정도였다.
나보다 훨씬 검술에 재능이 뛰어났던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봐온 탓일까.
난 기사의 길 대신, 다른 출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바로 북부대공가, '루튼 가문'.
한때 용병으로 참여했던 아버지와의 인연 덕분에 난 그곳으로 취업할 기회를 얻었다.
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를 보필하는 일.
바로 공작가의 '비서직'을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로 비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처럼 거두어진 소년들만 수십 명.
이 중에서 북부 대공의 비서가 될 수 있는 건, 단 한 명이었으니까.
그렇게 난 갖은 고생 끝에 홀로 살아남아 비서장이 되었다.
하지만 비서장의 자리는 부는 몰라도 '명예'와는 거리가 완전히 먼 자리였다.
철없는 대공 자제들의 악행을 뒤처리하는 것부터.
가문을 찾아오는 수많은 뇌물과 로비를 정산하고 처리하는 일까지.
말이 가문의 지배인이지, 실상은 청소부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말했던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긴 했으나, 그들과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까진 되지 않았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자제들의 내면은 생각보다 더 썩어 문드러졌으니까.
갈 곳 잃은 내 영혼은 방황했다.
동조했던 모든 악행에 양심의 가책이 들었고, 점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다음 북부 대공이 된 에릭의 꼬리가 되어 잘려나간 것도….
어쩌면 천벌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애석하게도 아버지가 말했던 내면을 공유한 상대가 찾아왔다.
「난 너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허나,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도 짧았으니까.
에키나.
그녀라는 존재를 인식하기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만약 내게 두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대공녀와 다시 만나 꼭 사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대공가에서 미련 없이 떠나리라.」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방 아르만.」
"네."
그는 차례대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출석을 확인하는 것처럼.
「윈저 콘필드.」
"네."
거듭되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이후,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익숙한 천장이었다.
"…."
아니, 익숙하다 못해 질리도록 본 곳이다.
내가 10년간 관리했던 루튼 저택의 천장이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몸을 일으키자, 온몸이 욱신거렸다.
처음엔 마시고 죽었던 맹독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 거울을 바라봤을 때.
난 입술이 벌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게 대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그 모습은 더 이상 북부 대공가의 비서장이 아니었으니까.
「율리우스 로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10년 전의 나였다.
그것도 비서 후보생 시절, 누군가에 구타라도 당했는지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흰색 와이셔츠에 더러운 구두 자국이 잔뜩 묻었다.
게다가 헝클어진 머리칼과 시퍼렇게 터진 입술까지.
맹독을 마시고 느꼈던 고통은 더 이상 없었지만, 그에 걸맞은 타박상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율리우스 로저는 아직 안 왔나?」
밖에서 날 부르는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10년 전인 걸 깨닫자, 그 목소리의 정체도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실전 시험에 지각이라니…. 기본이 안 됐군.」
차갑고 냉소적인 목소리를 따라 화장실 밖으로 절뚝거렸다.
그의 눈 밖에 나면 안 되는 걸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루튼 가문의 상징인 흑사자 모양의 문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고풍스러운 저택 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군, 율리우스 로저."
중앙에 일렬로 선 4명의 비서 후보생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비서장.
드비어 루튼.
내 전임 비서장이자, 하수인 중 최초로 대공가의 성을 하사받은 사내였다.
"4분 지각이네."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내 모습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뒷짐을 진 그의 모습이 꼭대기에서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독수리와 같았다.
"복장은 왜 그 모양이지?"
북부 대공가의 최고 비서는 다친 내 얼굴보다 격 떨어지는 복장을 지목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어두운 눈 그림자 속에서 번뜩였다.
"변기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먼저 도착해서 열중쉬어 자세를 유지 중인 후보생들이 킥킥대며 말했다.
특히 토방이라는 놈은 자신의 주먹을 치켜세우며 내게 흔들어댔다.
'저놈 짓이군.'
그의 주먹 마디에는 누군가를 때리다가 생긴 멍 자국이 있었다.
허나, 난 이에 드비어에게 아무런 대꾸도, 호소도 하지 않았다.
"자네한테 물은 게 아니네, 토방 아르만."
그래.
저런 식으로 쉽게 입을 열었다간 한 소리 듣기 일쑤였으니까.
"시험을 앞두고 잘도 웃음이 나오나 보지? 그대는 1점 감점이네."
비서란 업무 중일 때 쉽게 감정을 내비치지 말아야 하는 법.
녀석은 기본 중의 기본을 놓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특히 드비어를 마주할 때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변명이나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무려 10년 전 일임에도 또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그는 강렬한 인물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실전 시험 날에 이런 몰골로 나타나다니."
역시 비서장은 내가 다친 이유 따위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저 들고 있던 깃펜을 무심히 휘갈길 뿐이었다.
"복장 불량에 지각. 율리우스 로저는 10점 중 2점 감점."
"달게 받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덤덤히 벌점을 수용했다.
보통 표정을 숨기고 다른 생각을 해야 할 땐, 이런 방법을 써야 한다.
'하필이면 깨어난 날이 난데없이 드비어의 시험날이라니….'
게다가 시작부터 감점을 받고 말았다.
덕분에 몽롱했던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단 마주한 상황에 최대한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곧장 시험 규칙부터 통보하마."
몸에 딱 맞는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
흰 머리가 섞인 검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그는 뒷짐을 졌다.
이어서, 우리가 등지고 서 있던 본가 건물의 웅장한 입구를 가리켰다.
"그대들은 오늘 처음으로 루튼 가문의 자제님들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의 기회를 받게 될 것이다."
첫 접대 시험.
아마 비서 후보생으로서 맡는 가장 큰 테스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분기별로 한 번씩 총 4번 있으며, 모두 10점이 만점이다.
딱히 점수의 커트 라인은 없다.
몇점을 받든, 마음에 든 대공가의 자제들이 자신의 비서로 지목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1년 동안 총합 점수가 30점을 넘지 못하면….
정식 비서 후보에서 탈락이다.
그런데 난 시작부터 2점을 깎였으니, 엄청난 페널티라고 할 수 있다.
"시험 시간은 11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다."
드비어는 뒷짐을 풀고 우리에게 작은 종이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곳엔 각자의 이름과 점수표가 적혀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너희가 접대한 자제님들께서 이곳에 점수를 매겨주실 거다."
내게도 종이가 쥐어지자, 입속에 절로 침이 고였다.
이 익숙하고도 살벌한 시험표.
내가 비서장이 되려고 악착같이 집착했던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이 점수는 절대로 번복되지 않는다."
덕분에 난 상황을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이 단순한 주마등이 아니라 정말 10년 전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 정도로 드비어의 밑에서 겪은 훈련과 시험이란 혹독한 것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3시간 동안 자제분들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대공 가문을 30년 넘게 모신 비서장이었다.
그는 우리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만약 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는 표정으로.
"그럼, 각자 맡은 분께 최선을 다하도록."
후보생들이 모두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또한 눈치껏 이에 동참했다.
"네, 알겠습니다!!"
드비어는 손목에 차고 있던 은시계를 내려다봤다.
현재 시각은 11시 30분.
이제부터 대공자와 대공녀들이 가주에게 정오 인사를 드리러 찾아올 것이다.
「――――――.」
비서장은 실전 시험을 체감시켜 주듯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무심히 중앙 계단을 올라가며,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을 암시했다.
덕분에 광활한 로비에는 비서 후보생 5명만 남고 말았다.
우리는 웅장한 저택 대문을 바라보며 곧 당도할 북부 최고의 귀족들을 기다렸다.
"…."
오랜만에 모두와 함께 경쟁하는 자리인 탓일까.
멈췄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곧 가슴이 벅차오르는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럼, 설마 그녀도 다시 보게 되는 건가...?'
저 문 뒤에서 등장할 한 여인.
겉으로는 그토록 무심했으나, 나를 진정으로 신뢰했다는 그 사람이 곧 도착할 테니까.
3. 첫 시험 (2)
고요한 루튼 저택의 로비.
그곳 한구석에 일렬로 서 있는 정장 차림의 사내들.
"…."
대부분의 후보생은 곧 도착할 공작의 자제들만 기다렸다.
허나, 그들 중 유일하게 날 노려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만신창이가 되어 로비로 나왔을 때 비아냥대던 토방 아르만이다.
"용케 잘 일어났군."
포마드로 금빛 머리칼을 반으로 가른 녹안의 사내.
내 또래로 보이며, 양옆의 후보생들과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녀석은 이 당시에 제국에서 잘나가던 기사 가문의 막내아들이었으니까.
비록 귀족은 아닐지라도 그들에 버금가는 '부'와 '명성'의 소유자였다.
전쟁 막바지에 패전해서 몰락한 내 아버지와 상반된 입장이다.
"하지만, 어쩐다-. 감점까지 당해버렸는데-."
분명 같은 비서 후보생이면서 그의 넥타이는 귀족들과 같은 가게에서 산 것이다.
이 외에도 고급스러운 정장과 잘 닦인 소가죽 구두까지.
이런 유복한 가문조차 비서를 자처할 정도로 북부 대공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 꼴로 오늘 공자님들 뵐 수 있겠어-?"
녀석은 만신창이인 내 복장을 지적하며 비웃었다.
본인이 직접 이 꼴로 만들었으면서 말이다.
"...."
허나, 난 녀석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 영악한 놈에게 어쩌다 구타당했는지 차분히 기억을 더듬거렸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그거' 내놓지 그랬어."
그거.
놈은 턱으로 내 너덜거리는 재킷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들어 있는 감촉이 느껴졌다.
난 속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꺼냈다.
이후, 그곳이 여성용 목걸이 임을 확인했다.
'그래, 이제 조금씩 기억이 나는군….'
아마 이 루비 목걸이는 내가 기숙사에서 저택으로 출근할 때 주운 물건이다.
딱 봐도 상당히 비싼 형태의 디자인.
과거엔 홀로 애지중지 가지고 있다가 고물상에 넘겼었다.
"어차피 우리 구역에서 찾은 거잖아. 너보단 우리가 갖는 게 맞다고 보는데?"
녀석이 말하는 구역은 우리 비서들이 드나드는 저택의 정원 후문이었다.
그는 친한 후보생들과 함께 그곳에서 몰래 담배를 태우곤 했으니까.
놈은 겨우 그런 이유로 내가 주운 목걸이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내가 거부하자, 화장실에서 빼앗으려고 한 것이다.
"닥치고 앞이나 봐."
허나, 이번 생에도 녀석은 목걸이를 받지 못할 테다.
이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지금, 내가 건네줄 리가 있나.
"그러다 또 감점당하지 말고."
내 덤덤한 모습에 녀석은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두 눈을 번뜩였다.
"그래. 화장실에서 아직 덜 맞았다 이거지…?"
녀석은 접대를 위해 팔에 걸어뒀던 하얀 천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내게 덤벼들려던 순간.
――――――.
굳게 닫혀있던 대문 열리는 소리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문밖에서 우아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
문이 열리자, 푸른 초원처럼 아름다운 하얀 스커트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와이셔츠 위에 걸친 고결한 재킷과 가문의 품격을 상징하는 화려한 브로치까지.
가장 먼저 본가에 도착한 건 북부 대공의 장녀, 프레이야였다.
"어머."
어머니 쪽을 더 닮아 그녀의 머리칼은 고결한 은발이었다.
허나, 아버지의 지혜로운 금빛 눈동자도 빼닮았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혹시 드비어의 후임들이신가요?"
장녀의 등장에 비서 후보생들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그럴 만도 하지.'
프레이야는 대공기 자제들 중에서 몇 안 되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니까.
실제로 내가 비서장이 되었을 때 자기를 '레이'라고 편하게 부르라고 했던 인물이다.
"그렇습니다, 대공녀님."
그래서 동기들 모두 그녀에 눈에 들려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프레이야라면 분명히 점수를 쉽게 내줄 테니까.
"저는 오늘 정오 동안 접대를 맞은 토방 아르만입니다."
"전 윈저 콘필드입니다…!"
녀석을 따르던 갈색 머리의 동기도 덩달아 함께 외쳤다.
덕분에 한 자제에게 2명이 구애하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쿡쿡대며 날 비웃던 동지들.
순식간에 천하의 원수처럼 서로를 빤히 노려봤다.
"신기한 일이네요."
그런 두 사람을 중재하듯 레이는 성숙한 미소를 지었다.
서류 가방 하나를 동참한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멋진 사내분들께 동시에 도움을 받다니…."
토방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윈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허나, 곧 프레이야 대공녀의 따뜻한 기운에 밀려 숨을 죽이고 말았다.
"음-. 이것참 행복한 고민이네요."
북부 대공의 장녀는 부드러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걸친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레이는 벗은 재킷을 토방에게.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은 윈저에게 맡겼다.
기어이 한 번에 두 명의 사내를 차지한 것이다.
"아버지는 2층에 계신가요?"
두 손이 가벼워진 대공녀의 물음에 토방은 먼저 나섰다.
내게 보여주던 뱀처럼 살벌한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
그는 또래 여인들을 다루듯이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예, 제가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입니다."
두 젊은 후보생은 활기찬 목소리로 대공녀를 이끌었다.
은발의 대공녀는 그런 사내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프레이야는 앞장서는 그들을 따라 천천히 나머지 후보생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드비어의 후임으로 누가 들어올지 궁금한 듯 우리의 얼굴을 하나둘 익혔다.
이를 눈치챈 나머지 두 동기도 자기소개를 던졌다.
마치 그녀에게 눈도장이 찍히고 싶은 것처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녀님. 루컨입니다.""전 브룩입니다. 록히드 가문의 차남이죠."
프레이야는 후보생들의 말에 모두 장단을 맞춰주었다.
모두와 눈을 맞추며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후, 모두를 지나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멀끔한 동기들과 달리 유독 만신창이인 내 모습에 우뚝 멈춰 섰다.
"어머, 그쪽은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거예요?"
대공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터진 내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허나, 난 장녀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감췄다.
나로 인해 일정의 차질을 빚지 말라는 암묵적인 배려다.
자고로 비서란, 주군의 신경을 거스르게 해선 안 되는 법이니까.
"…."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아버지가 말했던 상류층이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목 중 하나다.
"하하…. 저 친구는 신경 쓰지 마시죠. 화장실에서 넘어졌답니다."
내게 관심을 보이는 대공녀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토방이 대신 답해주었다.
허나, 녀석의 말은 업보가 되어 돌아왔다.
"저런…. 화장실에 물기가 있었나 보네요. 드비어에게 말해둬야겠어요."
"아…. 아닙니다. 어찌 대공녀님께서 이런 사소한 일을…."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녀는 그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게 가벼운 눈 인사를 남기고 유유히 계단에 올랐다.
"좋은 동기들이네요. 어쩌면 경쟁 상대일 텐데 말이죠."
"아무리 경쟁 상대일지라도 루튼 가문에 들어온 이상, 모두 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사내들과 대공녀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토방 씨는 참 상냥하네요. 두 분처럼 든든한 동기들 덕분에 분위기도 화목하겠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동기가 장녀를 따라 올라간 후.
"토방 놈…. 순식간에 뛰쳐나갈 줄이야…."
"모처럼 공자, 자제들이 모이는 날에 활약해야 하는데…!"
각자 팔에 깨끗한 천을 걸치고 꼿꼿이 서 있는 비서 후보들.
그들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대문만 빤히 응시했다.
반면에 난 여우처럼 얄상한 눈매로 그들을 덤덤히 바라봤다.
그들은 오히려 프레이야를 따라가지 않아서 살았으니까.
보통 하수인들은 성깔 있는 군주를 제일 두려워 하기 마련이다.
허나, 실로 가장 무서운 군주는 그 어떤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절대로 티 내지 않는다.
오로지 속으로 그들의 평가를 냉정하게 매길 뿐이니까.
11시 40분.
멀리서 차가운 남성용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잠시 짝다리를 집으며 휴식하던 모두가 일제히 정자세를 취했다.
"…."
구두 소리만 들어도 이번 손님이 누구인지 곧장 알아챌 수 있으니까.
―――――.
문이 열리자 잘 닦인 갈색 구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검은 머리칼을 이마로 넘겼으며, 맹수처럼 살벌한 눈빛을 가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
그의 등장만으로 저택의 온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투덜대던 후보생들도 일제히 침을 깊게 삼켰다.
에드워드 루튼.
대공작의 차남이자, 제국 북부 지역의 모든 무기를 유통하는 사업가다.
그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에릭의 든든한 동업자다.
"아버지는 2층에 계시나."
목소리에서 루튼 가문의 상징인 사자의 기백이 느껴지는 29살의 사내.
그는 프레이야와 달리 눈앞의 후보생들에겐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야망을 묵묵히 좇을 뿐이다.
그 기세에 짓눌린 동기들.
확실히 후보생들에게 차남인 에드워드는 두려운 존재였다.
허나, 그런 와중에도 당당히 도전하는 이가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나를 구타할 때 가담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루컨 페른.
키가 무려 190cm에 육박하는 녀석이 비슷한 체구의 에드워드와 마주 섰다.
"오늘 정오 동안 자제님들을 모실 걸 명받은 루컨 페른입니다."
분명 그 또한 눈앞에 마주한 수사자의 모습에 무척 긴장되었을 것이다.
허나, 갈색 머리칼 속에서 빛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란.
과거, 비서장 자리를 노렸던 나처럼 야망으로 번뜩였다.
"그렇군. 슬슬 드비어도 후임자가 필요할 시기지."
에드워드는 자신의 날렵한 턱선을 덤덤히 쓰다듬었다.
그러다, 마주한 거구의 소년을 빤히 바라보더니….
"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시겠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듯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예…. 허락해주신다면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적당히 거슬리지 않는 겸손한 언변.
비서로서 적당한 문장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닐세. 아버지 댁인데 굳이 무슨 안내가 필요하겠어."
루컨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혼자 가겠네."
후계 계승전을 고려해 항상 자신의 위치를 조심하는 에드워드.
그는 본인의 측근이 아닌 자에게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으니까.
유력한 대공 후보 중 하나인 그에게 접근하는 건 멋진 도전이었으나, 그는 조사가 부족했다.
"꼴 좋군."
로비 중앙에 홀로 남은 그의 모습을 혼자 남은 토방의 친구가 쿡쿡 비웃었다.
그렇게 두 번째 기회도 점점 멀어져만 갔다.
"...."
그동안 나는 혼자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음 손님을 묵묵히 기다렸다.
11시 50분.
곧 정오가 다가오는데 다음 자제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남은 후보생들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러면 가장 부담스러운 두 명뿐이잖아…."
"장남, 에릭님은 출타 중이시다. 이제는 한 명뿐이야."
브룩과 루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아무래도 나머지 자제는 기피 대상인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마침 오늘 응접실에 다른 귀빈들도 방문하셨다니까."
"알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녀석들의 말대로 오늘 우리를 평가해줄 수 있는 인원은 대공의 자제들 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방금처럼 접대를 거부할 경우.
저택에 방문한 다른 손님에게 부탁할 수도 있으니까.
허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루튼 가의 비서직을 노리는 이상, 대공가를 보좌하며 눈도장 찍히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그 사실을 알면서도 브룩은 마지막 기회를 포기했다.
대신, 응접실 쪽 복도를 기웃거리며 만만한 영애가 오진 않나 둘러봤다.
루컨은 계획이 틀어지자 홀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대문 앞에서 홀로 대기중인 비서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
난 여전히 한곳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나고 싶은 인물이 모두가 기피하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
12시 정각.
멀리서 둔탁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거칠던지 응접실을 기웃거리던 동기들조차 들을 정도였다.
"설마, 그 사람인가…?"
사람의 인품은 발소리만으로 알 수있다는 말이 있다.
이를 증명하듯, 문이 열리는 순간.
――――――.
오랫동안 신어서 닳고 닳은 검은 군화가 눈에 들어왔다.
흙먼지를 잔뜩 머금어서 윤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 위로 몇몇 군데 찢어진 검은 스타킹과 백색 제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왔어…."
"눈도 마주치지 마. 오늘 특히 위험한 날이다."
주변의 동기들은 바짝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 나타난 여인이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홀로 담대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덤덤히 다가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에키나 루튼.」
흑사자 가문의 차녀.
대공가에서 유일하게 기사단의 길을 걷고 있는 21살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허나, 그녀의 분위기는 갓 성인이 된 여인들과 완전히 달랐다.
완전히 개방된 대문과 저택 입구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학생들.
그들 모두 북부대공녀, 에키나를 따르는 아카데미 생도들이니까.
"잠시 문 앞에서 대기하도록."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 속에서 대공을 닮은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전쟁을 치르고 온 기사처럼.
4. 첫 시험 (3)
에키나의 긴 손가락에 무수히 많은 붕대가 둘러져 있다.
허나,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가락에 생긴 상처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무심히 넘길 뿐이다.
'저런 눈매로 내게 눈물을 흘려줬다니.'
"…."
비서 후보생들은 그녀의 앞에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딱 봐도 현재 에키나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땀으로 끈적해져 몸매에 착 달라붙은 와이셔츠부터.
올이 나가서 틀어진 검은 스타킹까지.
치열한 대련이라도 치르고 왔는지 입술엔 핏자국도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뵈러 왔다."
차분하고도 덤덤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저택 로비를 강타했다.
모든 언니와 오라버니가 공작을 아버지라고 불렀거늘.
에키나는 그를 남들처럼 차가운 호칭으로 불렀다.
"…."
대공자를 모시려고 했던 루컨조차 에키나 앞에선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자, 북부대공녀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우리를 한심한 벌레 보듯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순간.
"전하께서는 위에 계십니다."
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느긋하게 말했다.
오른팔에 깨끗한 천을 걸친 채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여태까지 제일 조용했던 내가 가장 기피하는 상대에게 나선 상황.
이에 동기들은 화들짝 놀랐다.
"뭐야…. 저 자식 미친 거 아니야…?""대공가의 눈에 들려고 기어이 자충수를 뒀군…."
모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나, 난 그럴수록 더욱 대공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비서는 만만한 상대를 골라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니까.
주군은 당장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에게 관심을 보이기 마련.
그게 바로 이 시험의 진정한 출제 의도이자, 우리 비서의 존재 가치다.
"그대가 날 직접 안내하겠다고?"
북부대공녀, 에키나 루튼.
그녀는 홀로 팔짱을 낀 채,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지금 보좌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 같은데."
과연, 유능한 동시에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한 그녀였다.
그녀의 덤덤한 말에 토방의 동기, 브룩도 작게 비웃었다.
"비록 지금 제 모습이 난잡할지라도, 이 수건만큼은 따뜻하게 준비했습니다."
난 녀석의 비아냥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깨끗한 천을 걸친 오른팔을 우아하게 올릴 뿐이다.
"저야 한낱 비서 후보에 불과하지만, 대공녀님께서는 다르시니까요."
정중하게 손바닥을 뻗어 에키나의 더러워진 제복 포켓을 가리켰다.
그곳엔 루튼 가문을 상징하는 흑사자 뱃지가 채워져 있었다.
"제국의 기사로서 현재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나, 대공께서는 소중한 따님을 건강한 상태로 보고 싶으실 겁니다."
막힘 없이.
최대한 숭배하는 느낌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니 얼굴의 상처를 돌아보셨으면 하는 게, 소인의 작은 바람입니다."
"…."
에키나는 나를 다친 여우처럼 생각하는지 얄상한 눈매와 눈물점을 빤히 올려다봤다.
내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거라곤 생각 못 한 눈치다.
"재밌군, 하지만 아직 후보생이라 그런지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대공녀는 곧 싸늘한 눈빛을 다잡았다.
그리고, 감히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언급한 것을 콕 집었다.
"대공 전하는 내가 어떤 상태로 찾아오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위인이야."
그녀는 자신의 관능적인 굴곡에 앉은 먼지를 무심히 털었다.
이어서 제복 옷깃을 가볍게 정돈하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 상태에서 얼굴 하나 닦는다고 바뀌는 건 없네."
가뜩이나 무섭기로 유명한 에키나의 단호한 대답.
덕분에 저택 로비의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졌다.
"…."
동기들은 상황에 불을 지피는 내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난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만약 미래를 모르는 상태였다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났겠지.'
"허락해 주신다면 아니라고 감히 대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본 그녀의 눈물 탓일까.
난 훗날 대공가를 떠나기 전, 에키나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이토록 모진 대련을 마치고 오셨음에도 얼굴을 정돈한 기특한 모습."
그러므로 다시 부르튼 입술을 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썼어도 아직 솜털이 난 그녀의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그 모습을 싫어할 아버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에키나는 내 대답을 듣곤, 잠시 침묵했다.
감히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어림잡아 추측하다니.
평소 같으면 붙잡아다 모진 추궁을 했을 표정이었다.
허나, 이토록 집요하게 수건을 권하는 모습이 특이하게 느껴진 걸까.
"좋아, 노력이 기상하니 한 번만 응해주지."
그녀는 내 예지력을 한 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다만, 그대의 말대로 했을 때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보기로 한 시간은 정오, 딱 12시였다.
허나, 그녀가 저택 로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을 넘긴 지 오래였다.
"내 시간을 빼앗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난 시니컬한 그녀의 눈빛에 싱긋 입꼬리를 올려 응수했다.
그 묘한 미소를 에키나는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건을 주게."
에키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뽀얀 수건을 건네받았다.
이후,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얼굴에 따뜻한 촉감을 맞이했다.
"후우…."
대련을 하면서 와이셔츠 속에 맺힌 끈적한 땀방울.
이들이 식으면 점점 추워지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얼굴에 감싼 뜨거운 수건의 열기란.
예민했던 자신의 날카로운 눈매도 한결 부드러워지게 만들어 줬다.
"…."
어린 암사자는 곧 고양이처럼 노곤한 표정을 취했다.
허나, 그 모습을 내가 가까이서 빤히 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 금세 표정을 다잡았다.
"흠흠.... 이름이 뭐라고 했지?"
무안했던 그녀는 넌지시 내 이름을 물었다.
이에 난 얄상한 눈매로 활짝 미소 지으며 정중히 답했다.
"율리우스 로저입니다."
에키나는 내 이름을 듣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흙먼지가 묻은 수건을 돌려줬다.
"수건 잘 썼네, 로저."
에키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로 날 스쳐 지나갔다.
이후, 계단을 오르던 중.
"뭐 하고 있나."
중간에 잠시 멈춰 서서 내게 말했다.
"따라오지 않고."
그녀의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동기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날 동행시키는 대공녀의 모습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대의 말대로 아버지의 반응이 달라질지 확인해야 할 거 아닌가."
난 에키나의 말을 듣고, 너덜거리는 와이셔츠 카라를 훌훌 털었다.
이어서 그녀를 따라 저택의 중앙 계단에 올랐다.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아래에서 지켜보는 후보 동기들.
정오까지 아무런 배속도 받지 못 한 채,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
본디 드높은 대공 가문의 일원과 비서장만 오를 수 있던 계단.
그 계단을 익숙한 걸음으로 사뿐히 지르밟았다.
그렇게 계단을 모두 올라 2층 복도에 도착하는 순간.
"…!"
프레이야를 따라 앞서 나갔던 토방과 윈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공작의 집무실 앞에서 홀로 대기 중이었다.
3번째로 이곳에 올라올 사람이 나일 줄은 몰랐는지, 녀석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게다가 동행한 사람이 무려 에키나라는 것에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놈들이 받을 충격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이쪽이네."
토방을 무시한 채, 집무실 문에 도착한 에키나.
그녀가 나를 그곳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했으니까.
――――!!
대공녀의 우아한 손길을 따라 청명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토방은 점차 열리는 굳건한 집무실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복한 기사 집안 출신인 그조차 감히 넘을 수 없었던 대공작의 집무실.
그 신성한 영역을 자신이 괴롭히던 내가 먼저 들어가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난 녀석의 시선 따위에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문틈 사이로 제국의 그 누구보다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바로 이 거대한 대륙의 일부를 다스리는 한 남자.
베일리스 루튼.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의 기세에, 날 죽일 듯이 노려보던 토방도 깊게 침을 삼켰다.
그는 황급히 다시 꼿꼿한 정 자세를 유지했다.
에키나는 나를 힐끗 돌아봤다.
그리고, 전보다 더욱 진지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도 따라오도록."
마침내 대문이 열렸다.
진한 종이 냄새와 가죽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내 아버지가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지 직접 확인시켜 줄 테니까."
수려한 흑발의 여기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나 또한 그녀를 따라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토방은 내가 스쳐 지나가자, 까치발을 들며 집무실을 엿보려고 했다.
허나, 녀석에겐 그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북부대공의 집무실은 다시 굳게 닫혀버렸으니까.
――――――.
웬만한 저택의 거실보다 넓은 집무실.
양쪽 벽에 수많은 책들이 꽂힌 책장과 트로피 진열대가 즐비했다.
「에키나 왔느냐.」
집무실 끄트머리 창가에 고급스러운 책상 하나가 놓여있다.
그곳에 백발의 사내가 근엄하게 앉아있었다.
머리칼을 이마 위로 단호하게 넘겼으며, 미간에 사자처럼 강렬한 주름이 진 얼굴.
동굴처럼 깊은 눈 그림자 속에서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란….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큰 고난과 시련이 있었는지 증명했다.
「늦었구나.」
분명 짧은 한마디였다.
허나, 그 한마디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자식들과 비서장 드비어도 긴장했다.
"죄송합니다."
에키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후, 자신의 두 혈육을 따라 나란히 섰다.
난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문 앞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다 맞은편 모서리의 드비어의 시선에 요령껏 눈빛으로 인사했다.
토방과 달리, 그는 내가 이곳까지 당도한 것을 전혀 신기하게 보지 않았다.
30년 차 비서장답게 묵묵히 자신의 주군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거라.」
과연, 루튼 공작은 에키나의 말대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의 소중한 막내딸인데도 말이다.
"…."
그는 신전의 석상처럼 감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책상에 놓인 문서를 내려다봤다.
덕분에 광활한 집무실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감돌 뿐이었다.
곧, 대공은 그중 한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 문서에는 에키나의 이름과 그녀가 다니는 노르드 아카데미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아카데미 이야기는 들었다. 대련 중 상대 학생이 꽤 크게 다쳤다지.」
"그저 시합에 성실히 임했을 뿐입니다."
대공을 빼닮은 황금빛 눈동자가 무심히 답했다.
누구 딸인지 제국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참으로 당당하다.
「그래, 기사라면 당연히 대련 도중 누군가 다칠 수 있지.」
루튼 공작도 그런 차녀의 태도가 싫진 않았는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곧 우두머리 사자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에키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넌 군인이기 이전에 루튼 가문의 일원이다.」
제아무리 친자식이라고 한들,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 무거운 책임을 진 녀석이, 내 책상 위에 이런 게 놓이도록 해?」
북부 대공은 자신의 검은 책상에 놓인 면담 요구서를 흔들었다.
분명 아카데미에서 가주를 호출하는 일은 큰 문젯거리였다.
허나, 그의 책상에 놓인 다른 문서들은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다.
이웃 왕국과의 회담.
제국의 황제가 직접 참가하는 전국 황실 회의까지.
이 수많은 중요 문서와 함께 놓인 면담 요구서는 유독 가벼워 보였다.
「게다가 상대는 아카데미 이사장의 장녀더군.」
물론, 대공가에 비하면 위상이 낮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본디 높은 가문들끼리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게만 손해인 상황.
「아마 이번 건으로 리암 이사장은 한몫 단단히 챙기려고 들 게다.」
그래서 루튼 공작은 당사자들을 응접실로 직접 초대했다.
아까 동기들이 노리던 접대 대상이 바로 이사장과 그의 장녀인 것이다.
「그러니 가서 네가 벌인 일을 직접 해결하거라.」
분명 면담지에는 가주 동반 호출이라고 적혀있다.
허나, 대공은 이런 시답잖은 일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너의 힘으로 완벽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에키나 또한 이런 그의 반응이 익숙한 듯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이후, 쏟아진 앞머리를 우아하게 넘기며 홀로 왔던 길을 돌아섰다.
문 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생겼다.
그 어둠 속에서 대공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날 빤히 응시했다.
'보았는가, 로저.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내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내가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경위조차 묻지 않는 사람이야.'
허나, 난 그녀를 보고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그를 바라보라며 눈길을 보냈다.
"…?"
에키나는 그런 내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추는 순간.
「잠시 멈추거라, 에키나.」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대공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에 묵묵히 서 있던 프레이야와 에드워드도 반응했다.
「뒤로 돌아보거라.」
에키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다시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후, 능숙하게 군화를 굴려서 그를 돌아봤다.
"부르셨습니까."
막내딸의 물음에 루튼 공작은 마침내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맹수처럼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군화부터 찢어진 검은 스타킹.
무릎에는 붉은 선혈까지 맺혀 있었다.
「가까이 와보거라.」
루튼 공작은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후, 눈의 피로를 풀면서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에 대공녀는 속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보나 마나 자신의 복장을 호되게 지적할 줄 알았으니까.
허나, 그의 책상 앞에 도착한 순간….
「그 난리통에 세수는 하고 온 모양이구나.」
냉철한 대공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예...?"
에키나는 다소 누그러진 아버지의 표정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장녀와 차남도 마찬가지.
그들은 무심한 목소리로 조용히 칭찬하는 대공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직에 오를 기사라면,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최소한의 자기 관리는 해야 하는 법이지.」
루튼 대공은 에키나의 가슴에 걸린 흑사자 뱃지를 눈 여겨봤다.
이후, 다시 국정 문서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잘했다.」
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문 앞에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러다, 반대쪽 모서리에서 대기하던 비서장, 드비어와 눈을 마주쳤다.
"…."
30년차 비서장의 시선이 곧 내가 쥐고 있는 하얀 수건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묻은 흙먼지와 핏자국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드비어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묵묵히 깃펜을 놀렸다.
마치 점수를 채점하는 것처럼.
5. 첫 시험 (4)
근엄한 대공의 입에서 칭찬이 새어 나왔다.
이후, 집무실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
루튼 공작이 다시 입을 연 건, 그가 서랍에서 단안경을 꺼낸 후였다.
대공은 깊은 눈 그림자에 렌즈를 끼우고, 묵묵히 국정 문서로 눈길을 돌렸다.
「더 이상의 할 말은 없다.」
평소처럼 무심해진 그는 에키나가 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조언 하나를 남길 뿐이다.
「내려가서 이사장을 만날 때도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허나, 냉정한 그의 모습에 대공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칭찬과 조언을 되뇌며 겸허한 자세를 취했다.
"그럼, 이만 퇴청하겠습니다."
에키나는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숨겼다.
허나, 난 숨긴 그녀의 감정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반응에 대공녀가 적잖이 당황했다는 걸.
'아마 저 머리칼 속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나는 피식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이를 눈치챘는지 대문으로 향하는 내내 날 힐끗 바라보는 에키나.
그녀는 날 스쳐 지나갈 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라와."
――――――.
넓은 집무실에 그녀의 딱딱한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춤추는 검은 머릿결을 따라 느긋하게 집무실을 따라 나왔다.
과정에서 마주친 프레이야와 에드워드에게도 가벼운 목례를 남겼다.
"신기하네, 저 아이가 여기까지 올라올 줄이야."
루튼 가문의 장녀는 자신의 부드러운 턱선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내 허름한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쟤가 누군데."
뒷짐을 진 에드워드가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그는 내 허름한 정장을 보곤 험악한 미간을 찌푸렸다.
나라는 존재가 1층에 있었는지조차 잊고 있던 모양이다.
"저 비서 후보생 말이야. 동기들한테 따돌림 당해서 곧 낙오될 줄 알았는데."
프레이야는 인형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
1층에서 보여줬던 상냥한 미소가 사라진 그녀는 내가 다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의외로 재능이 있는 모양이네. 우리 에키나에게 간택받다니."
장녀는 까다로운 에키나의 시중을 든 나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렇게 가문의 굵직한 인물들이 실전 시험 첫날부터 나라는 존재를 인지했다.
오로지 북부대공인 루튼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여전한 사람이군.'
자신한테 득이 되지 않으면, 상대를 인간 취급조차 안 하는 사람.
분명히 내 존재를 인식했음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뭐, 당연하다.
현재 난 비서 후보생으로 돌아온 상황이기에.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그가 병들어 죽어가기 전, 난 이곳을 먼저 빠져나갈 테니까.
비서장으로 일하며 듣고 경험했던 지식을 통해 나만의 방식으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전까지 이곳에서 대공가의 믿을 만한 인물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내 현재 1차 목표이다.
――――――.
거대한 집무실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에키나는 잘 닫혔는지 확인하곤 옅은 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았어."
아버지가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그녀.
굳게 닫힌 문 너머에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며 단호히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내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에키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내게 인형처럼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어떻게 세수만으로 아버지가 내게 관심을 보였냔 말이다."
난 느긋한 걸음으로 대공녀와 동행했다.
그러다, 이내 태연한 눈빛을 보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자식을 무시하는 아버지는 세상에 없습니다."
에키나는 애늙은이처럼 말하는 내 모습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에 응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단지 표현하는 법이 서투셔서 그런 것일 뿐이죠."
"표현하는 법이라니,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고픈 말씀이 따로 있었다는 겐가."
그녀의 물음에 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능글맞은 미소가 느끼했는지 에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딸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궂은 상황에서 세수를 하고 왔다. 딱 말도 걸기 좋은 타이밍 아닙니까."
10년도 채 안 남은 미래.
병으로 세상을 떠난 루튼 대공을 떠올렸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평가 받던 그의 임종 자리에는 정작 자식들이 없었다.
그리고, 공작은 죽기 직전, 자신의 딸을 만나지 못한 걸 슬퍼했다.
"책임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쉽게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오른팔에 걸친 흰 수건을 보란 듯이 치켜올렸다.
하얀 수건엔 에키나가 닦은 붉은 핏자국과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제 역할은 그런 분들이 편히 행동하실 수 있도록 어깨를 밀어드리는 것뿐이죠,"
"어깨를 두드린다라...."
에키나는 그 문장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러다 잠시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너...."
대공녀 특유의 차가운 시선이 날 강타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루하게 대기하던 토방과 윈저도 흥미롭게 구경했다.
에키나가 자꾸 주제넘은 나를 추궁할 줄 알았으니까.
"어디 가문에서 보낸 첩자 아니야?"
역시나 눈치가 빠른 그녀.
또래와 분위기가 다른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여태껏 숱한 비서후보생을 봤지만, 너처럼 말하는 자는 없었어."
'여기서 말을 잘해야 한다.'
괜히 타 가문에서 대공가의 정보를 빼 오기 위해 투입한 첩자로 의심받으면 위험하니까.
아직은 이곳에서 인맥과 경력을 쌓아야 하기에 무사히 넘겨야 한다.
"드비어 비서장이 가르쳐 준 말을 그대로 읊었을 뿐입니다."
"비서장 아저씨가?"
까다로운 아버지를 곁에서 평생 모신 자의 화술을 배웠다.
이 말만으로도 꽤나 신빙성이 보장된다.
"예, 항상 주군께 도움이 되도록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전 그 구절 중 하나를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에키나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을 반쯤 지그시 감고, 날 유심히 바라보았다.
허나, 눈앞에 보이는 꾀죄죄한 정장 차림.
그리고 얼굴에 석탄을 캐는 소년처럼 흙먼지를 묻힌 모습에 잠시 침묵했다.
"...."
아무리 봐도 현재 내 모습이 타 가문의 잘 훈련된 첩자라고 보기엔 무척 초라했으니까.
토방 무리에게 처맞은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그런 줄도 모르고 녀석들은 에키나가 날 추궁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너."
과연, 대공녀 특유의 차가운 시선이 날 강타했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은 멀리서 지켜보던 경쟁 후보들이 바라던 게 아니었다.
"몇 살이지?"
짧고 단호한 물음에 두 눈을 꿈벅거렸다.
얼굴에 새겨진 눈물점도 덩달아 움직였다.
"올해 열아홉입니다."
난 차가운 그녀의 시선에 특유의 따뜻한 눈웃음으로 응수했다.
에키나는 자신과 상반된 분위기가 불편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나이는 내가 한 살 더 많은데...."
그녀는 내 능글맞은 미소를 피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홀로 소녀처럼 궁시렁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말하는 건 꼭 드비어 아저씨 같단 말이지...."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훈육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대공녀는 1층 로비로 혼자 먼저 내려가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감이 좋군."
점점 작아지는 검은 정수리를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집무실 입구를 돌아봤다.
그곳엔 아까 전부터 우리를 뚫어질 듯 응시하던 토방과 윈저가 있었다.
여전히 복도에 방치된 그들의 모습이 가게로 들어간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 같았다.
문고리에 초라하게 묶여 있는 것처럼.
"뭘 보나."
토방은 내 느긋한 눈매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정말 개처럼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는 어떻게든 날 깎아내리고 싶은 것처럼 험담을 던졌다.
"대공녀님께 지목 한 번 받았다고 뭐라도 된 것 같아?"
평소 에키나가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지 잘 알던 녀석이었다.
북부대공의 기사단 교관 출신인 아버지를 둬서 미리 귀띔을 받았을 테니까.
"착각하지 마, 넌 그저 운이 잠깐 좋았을 뿐이니까."
이러한 이유로 자신이 다른 후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녀석.
사실 본인도 아버지 덕분에 안 정보들인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내 공녀님은 네놈의 이름 따위도 모르실걸?"
난 홀로 지껄이는 갓 스무 살의 금발 청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 그를 비웃었다.
"빨리 내려와라, 율리우스 로저."
애석하게도 대공녀께서 내 이름을 아주 '정확하게' 불러줬으니까.
"...."
나나 하얗게 굳은 토방의 얼굴을 보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특유의 애늙은이 같은 눈웃음에 눈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려왔다.
"방금 뭐라고 말했지, 토방?"
고개를 기울이며 놈에게 되물었다.
기가 찼는지 토방은 입술을 벌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잘 안들리는데 더 가까이 와서 말하지 그래?"
비서 후보생은 접대하기로 한 주군을 집무실 입구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렇기에 난 멀찌감치서 여유롭게 뒷짐을 질 수 있었다.
"아, 개 목줄 때문에 힘드려나?"
내 목을 톡톡 건드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비서장 시절처럼 우아한 손길로 작별 인사를 남겼다.
"어쩔 수 없지. 그쪽 주인님이 자유 시간을 주셨을 때 이야기하자고."
"네놈.... 이 일만 끝나면 가만 안 두겠어...."
토방은 평소와 달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나, 난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저 1층 계단에서 기다리던 대공녀를 만날 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발소리를 죽이며 대공녀의 곁에 당도했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다가온 내 모습에 순간 눈썹이 번뜩였다.
"그래."
"말씀하시죠, 명에 따르겠습니다."
에키나는 다시 체통을 지키려는지, 다시 싸늘한 목소리와 톤을 가다듬었다.
"너도 배워서 알고 있겠지만, 우리 루튼 가문은 보상과 처벌이 철저하다."
"맞습니다. 3대째 내려오는 철칙이죠."
난 그녀의 철칙을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키나는 또다시 엄습한 애늙은이의 기운에 잠시 정색했다.
그러다,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로, 나 또한 너의 판단 덕분에 도움을 받았으니, 상을 내릴 생각이다."
백색 제복 차림의 대공녀가 홀로 팔짱을 끼며 날 올려다봤다.
이제 갓 21살 영애가 제법 군주 태가 났다.
"따로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는가?"
공적인 행사에 참석한 것처럼 차가운 말투로 묻는 모습.
이에 난 잠시 에키나가 가야 할 응접실 쪽을 바라봤다.
집무실에서 함께 들었던 대련 과잉 대응 논란.
상대가 아카데미 이사장의 딸이었던 꽤나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실제로 에키나는 마법으로 상대를 농락하던 그녀를 강하게 응징했었으니까.
아마 과거 이 당시에도 서로 설전만 펼치다가 흐지부지 끝났다.
덕분에 대공녀의 아카데미 기록부에 '자기주장이 강함'이라는 미세한 오점 하나가 남고 말았지.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날 가족이라고 말해줬던 만큼, 이번 생엔 그녀를 든든한 파트너로 만들 테니까.
이곳을 떠나기 전에 선물을 줄 것이다.
"예, 있습니다."
에키나는 느긋하던 내가 보상 이야기에 응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봤을 때는 속물처럼 보였을 수도 있으나, 그녀는 딱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말해 보거라."
벌써부터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어린 암사자.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도 모르면서 담대한 표정이었다.
"허나, 걱정이군요. 제가 바라는 보상이 꽤나 난처해서 말입니다."
"걱정 말거라. 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니까."
미리 언질을 줬음에도 무덤덤한 눈빛의 에키나였다.
이에 난 비장한 눈빛으로 내 보상을 요구했다.
"제가 바라는 보상은...."
오른팔에 걸려있던 더러워진 수건을 양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에키나의 고결한 얼굴에 들이밀며 말했다.
"바로 대공녀님께서 다시 얼굴을 더럽히시는 겁니다."
조용한 저택 1층 로비.
그곳에서 비장한 눈빛으로 요구한 보상.
"최대한 처량하고, 측은한 여기사처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보상의 정체에 에키나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항상 무표정을 유지했던 그녀의 얼굴이 시원하게 오만상을 지었다.
"자네, 이상한 취향을...."
대공녀는 수건을 들고 다가오는 내 모습에 뒤로 물러섰다.
경멸하는 표정으로 치를 떨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닙니다!!"
6. 응접실 대결 (1)
"조금 전에 세수를 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난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후, 흙먼지가 묻은 수건을 치켜들며 말했다.
"지친 와중에도 얼굴을 정돈하고 아버지를 뵙다니. 대공께서는 속으로 기특해하셨을 겁니다."
에키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묵묵히 동의했다.
그녀의 검은 눈꺼풀이 정오의 햇빛을 받아서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이처럼 사람은 외면이 중요합니다."
난 눈물점을 톡톡 두드리며 덧붙였다.
"상대가 대련에서 다친 걸 문제 삼지 못하도록, 우리도 다친 척을 하는 거죠."
"다친 척...?"
북부대공녀는 '다친'이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차갑게 정색했다.
루튼 가문은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이번 논란의 요점은 공녀님께서 상대를 과하게 몰아붙인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었어. 마법사는 여유가 있을 때, 확실하게 처리해야 편하거든."
에키나의 암사자처럼 섬뜩한 눈매가 번뜩였다.
제아무리 강한 기사도 지형, 지물을 활용하는 마법사는 짜증 나는 법이니까.
"그때 먼지가 얼마나 날리던지, 마나로 신체를 보호했어도 잔기침이 나오더군."
"맞습니다. 그 기침을 강조하면 상대도 세게 나오지 못할 겁니다."
대공녀는 내 계책을 듣던 중,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 보고 다친 척을 하라는 건가?"
아카데미 최고 유망주인 그녀가 동급생에게 다쳤다니.
북부 지방은 물론, 황실까지 소문 날 것이다.
"그건 명예롭지 못한 행위네. 난 괜찮지만, 아버지께서 심기가 불편하실 거야."
그렇게 되면 평소 루튼 공작을 견제하던 다른 대공들도 자존심을 건들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뒷짐을 진 채, 애늙은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온갖 비리와 정치로 찌든 칠흑 같은 눈동자로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영원히 입 밖으로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로저?"
대공녀는 내 의미심장한 말을 듣곤 고개를 기울였다.
의아한 그녀에게 난 수건을 건네며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일단 응접실로 먼저 들어가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수건을 받아든 에키나.
한낱 후보생인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말에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계책이 또 있는 모양이군."
"예, '준비'해서 뒤따라가겠습니다."
에키나는 일단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을 보여준 나를 한 번 더 믿어 볼 생각이었다.
"그래, 계획대로 행동해 보도록."
대공녀는 자신의 뽀얀 피부에 흙먼지와 하얀 흙가루를 묵묵히 묻혔다.
그동안 나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러섰다.
하지만, 떠나려던 중.
여기사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 다시 불러세웠다.
"율리우스 로저."
"예, 공녀님."
다시 느긋한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에키나는 홀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무심히 바라봤다.
'막상 얼굴을 더럽히니 기분이 불쾌해졌나...?'
과거, 그녀의 살벌하고 예민한 성격을 알던 나는 깊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에키나의 붉은 입술을 조용히 바라본 순간.
"원하는 보상은 이게 다인가?"
생각도 못 한 그녀의 반응에 두 눈을 꿈뻑거렸다.
"내가 얼굴을 더럽히는 건 하나의 계책일 뿐. 너를 위한 보상이 아니잖아."
다른 귀족들은 상을 주기 싫어서 회피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차갑기로 유명한 에키나가 바쁜 와중에 수하를 생각하다니.
"...."
죽기 직전에 봤던 그녀의 슬픈 얼굴이 현재의 에키나와 교차되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아니요, 아직 하나 더 있습니다."
보상을 바란다는 말에 '그럼 그렇지' 싶은 눈빛으로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 어떤 인물도 루튼 가문이 은혜를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말해 보게."
찬란한 금화부터, 대공가의 정식 비서 자리까지.
어떤 욕망을 내비칠지 생각하며 에키나는 홀로 팔짱을 꼈다.
하지만.
"대공가의 주치의를 만나고 싶습니다."
내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었다.
"주치의라니.... 설마 많이 생각보다 많이 다친 거야?"
"그렇습니다. 몸이 조금 불편해서요."
에키나는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내 와이셔츠를 빤히 바라봤다.
"하긴, 그 꼴로 여태까지 잘도 걸어 다녔구나."
딱히 날 걱정해 주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임시 부하가 다친 걸 몰랐다는 사실을 자책할 뿐이다.
"그럼, 가서 쉬고 있거라."
"감사합니다, 공녀님."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다 에키나의 군화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홀로 주치의가 근무하는 진료실로 향했다.
아픈 사람치고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
응접실 앞에 선 에키나.
새하얀 제복 차림의 그녀가 양손으로 힘껏 대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한 부녀였다.
그들은 소파에 묵묵히 앉아서 대공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포마드로 이마를 시원하게 넘긴 중년 사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고급스러운 정장과 명품 넥타이가 감싸고 있었다.
"에키나 루튼. 기다리고 있었네."
이사장은 겉으로는 아카데미를 후원하는 자애로운 이미지였다.
허나, 항상 저가의 자재를 공급하고, 차익은 자신이 챙겨서 세금을 깎는 영악한 인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리암 이사장."
대공녀는 아카데미의 이사장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자신과 문제가 있었던 붉은 양갈래 머리의 영애와 마주했다.
"늦었네. 손님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거야?"
리제 리암.
팔에 멍 자국이 가득한 그녀가 에키나를 싸늘히 맞이했다.
"잠시 아버지를 뵙고 오느라 말이야."
대공녀는 부녀를 앞에 두고도 느긋하게 뒷짐을 졌다.
그녀는 응접실 벽에 걸린 루튼 공작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업무차 바쁘신 것 같아서, 오늘은 나만 오게 되었어."
"여기까지 오게 해놓고, 직접 안 나오셨다고...?"
리제는 무표정한 에키나의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번 기회에 아카데미에서 서열을 뒤집으려 했건만, 오히려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의아했다.
하지만,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모두 알다시피 워낙 바쁘신 분이잖아?"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에 주먹을 올리는 북부대공녀.
순간 청초한 표정을 짓더니....
"콜록. 콜록."
조금 전까지 죽어라 패줬던 동기 앞에서 기침을 뱉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어색하게.
"...?"
리제는 생전 처음 보는 아카데미 에이스의 연기에 오만상을 지었다.
저런 뻔뻔한 연기에 누가 속겠냐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에키나가 노린 건 리제가 아니었다.
"기침을 하다니..., 혹시 어디 불편한 건가?"
그녀가 노린 건 바로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리제의 아버지였으니까.
제아무리 자기 자식과의 문제라도 교내 간판 스타의 부상 또한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아, 대련 이후 조금씩 나오더군요...."
"기침은 나도 잔뜩 했거든? 어디서 엄살을 부리는 거야!"
리제는 손바닥을 뻗어서 자신의 앞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엔 기침 자국이 다분한 휴지 조각들이 즐비했다.
"일단 둘 다 진정하고 자리에 앉거라. 모두 몸 상태가 안 좋잖느냐."
이사장 리암은 일단 두 영애를 진정시켰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지러 온 입장이었건만, 분위기가 요상해졌다.
"내 딸의 이야기만 들었을 땐, 에키나 자네가 이런 상태일 줄 몰랐네."
쌍방과실.
양 대련자 모두 다쳤으니, 한쪽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잘잘못을 따질 이유가 없겠어."
리암은 착잡한 마음을 숨기며,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사장은 제가 다친 모습에 안도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대공녀는 이쯤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당황한 상대를 특유의 차가운 눈빛으로 압박했다.
"그럴 리 있겠나. 단지 과실을 논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네."
"맞아, 차라리 잘됐어."
리제도 거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법사다운 지적인 눈매로 입을 열었다.
"서로를 탓할 필요 없을 만큼 '박빙'의 승부를 펼친 셈이니까."
젊은 영애는 이 상황을
자존심 강한 어린 엘리트답게 대공녀의 마음을 살살 긁었다.
"그 유명한 대공녀의 호적수와 호각으로 다퉜으니, 덕분에 내 명성도 올라가겠죠."
단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바로 명성.
대공 가문의 유일한 기사인 에키나는 여론의 기대와 인지도가 상당하다.
그런데 난데없이 평범한 백작가 여식에게 함께 다쳤다?
리제가 그녀의 호적수로 인정되는 순간.
에키나의 실력도 딱 그 수준으로 평판이 낮아질 것이다.
"고마워, 에키나. 덕분에 이번 건국제의 가십거리가 하나 생겼네."
리제는 이 맹점을 파고들어 대공녀를 도발했다.
화려한 루비 귀고리를 한 그녀는 '명예'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가주석에 앉은 에키나는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리제의 도발을 듣곤,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였다.
"너다운 생각이군, 리제."
자신의 부드러운 턱에 손을 얹은 채, 묵묵히 생각에 잠긴 그녀.
허나, 이곳에 있는 시종들 모두 알고 있다.
저 반쯤 감긴 아름다운 눈매가 사실....
자신을 업신여긴 먹잇감의 숨통을 어떻게 물어뜯을지 궁리 중이라는 걸.
"어쩌겠어, 난 누구처럼 기자들에게 둘러싸이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 줄도 모르는 리제가 피식 웃으며 우아하게 허벅지를 꼬았다.
에키나와의 거친 대련 탓에 올이 뜯어진 스타킹이 부드럽게 늘어났다.
"위대한 대공가와 달리, 내 쪽에선 잃을 게 전혀 없거든."
"리제, 굳이 상대를 도발할 필요 있겠느냐. 이번 일은 무승부로 조용히 처리하자꾸나."
중년의 사내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무마하려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나, 미소의 이면에는 얼른 돌아가서 자신의 딸이 천하의 에키나와 무승부를 냈다고 자랑할 생각뿐이었다.
"...."
이를 본능적으로 눈치챈 대공녀는 차가운 무표정을 지었다.
명예에 딱히 집착하진 않지만, 대련 성적에 흠이 생겼을 때 실망하실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이는 응접실에 조용히 들어온 드비어 비서장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대공가의 지배인은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처럼.
어느 쪽을 선택해도 곤란한 상황 속에서, 노련한 드비어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응접실에는 차가운 침묵만 맴돌았다.
하지만.
싸늘했던 적막을 깨는 발소리 하나가 멀리서 들려왔다.
――――――.
소리를 따라 모두가 대문을 바라봤다.
그 순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초라하게 구겨진 구두가 아름답게 닦인 응접실 바닥을 지르밟았다.
이후, 허름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에키나 대공녀님을 담당한 예비 비서, 율리우스 로저입니다."
여전히 와이셔츠에 가득한 발자국과 얼굴에 난 멍 자국.
그 초라한 모습에 아카데미 부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에키나와 드비어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분명히 휴식을 취하러 간 줄 알았건만.
보란 듯이 돌아온 비서 후보의 모습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대공녀님께 휴식을 명 받았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이지?"
드비어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후보생인 내가 실수를 하진 않을까, 먼저 냉철하게 물었다.
그렇게 제국 최상류층 4명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순간.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들렀습니다."
난 느긋한 표정으로 부르튼 입술을 열었다.
마치 이 저택에서 수십 년간 있었으며....
이런 사사로운 언쟁도 수백 번 경험해 본 것처럼.
"제가 휴식을 명 받고 주치의를 만나던 중, 한 가지 정보를 알게 돼서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전 대공녀님도 대련을 치르신 후, 기침이 심해지셨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꺼내 든 종이는 주치의의 소견서였다.
그것도 대륙에서 제일가는 명의 중 하나가 직접 쓴 내용으로.
"그랬더니 주치의는 에키나님 정도의 강자가 쉽게 기침을 하실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난 아카데미의 유망주인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에키나도 내 얄상한 눈 밑에 돋은 눈물점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서 환경의 문제 같다며, 대련장을 어떤 자재로 만들었냐고 제게 물으셨죠."
응접실 테이블에 서류 하나를 당당히 내려놓았다.
'석회 가루'를 흡입할 시 발생할 수 있는 질환 목록을.
"노르드 아카데미의 대련장 바닥은 모두 석회 타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난 리암 부녀를 바라보며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서장 시절의 윤기 없는 눈동자로.
"그랬더니 바닥 전체가 그런 곳이 붕괴되면 소드마스터도 폐병에 걸릴 거라고 했습니다."
부상의 원인이 리제의 일격이 아니라, 단순히 석회 타일 탓이다.
그 말에 리제와 리암 이사장은 일제히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을 석회로 지은 사람은 대체 어떤 멍청이냐고 누구냐고 묻더군요."
에키나는 내 능글맞은 목소리를 듣곤 기가 찼는지,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드비어도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듯,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대공가에서 가장 무심한 인물들이 내게 감정을 들키는 순간이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암 이사장."
난 그 멍청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대해서 하실 말씀 더 있으신지요?"
이제부터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7. 응접실 대결 (2)
"하, 석회 가루라고...?"
홀로 팔짱을 낀 엘리트 마법사 리제.
그녀는 양갈래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씩씩대며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떻게 돌가루 좀 마셨다고 내상을 입어?"
난 영애의 말에 응하듯 손바닥을 뻗어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의 앞에는 너저분한 휴지 조각들이 즐비했다.
"영애님께서도 연기를 마신 후, 같은 현상을 겪으셨을 텐데요."
"뭐야...?"
리제는 순간적으로 휴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무안해졌는지 괜히 치우지 못한 다른 비서 후보생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여태까지 대지 마법을 자주 사용하셨을 텐데, 유독 오늘만 기침이 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냉정하게 묻자, 이사장은 미간을 무섭게 찌푸렸다.
허나, 난 그런 그의 눈빛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못 믿으시겠으면, 두 영애님 차례로 대련장에 오른 학생들에게 물어보시죠."
오히려 그들이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앞으로 3년 후.
마법사 학생들의 격한 대련으로 대련장이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덕분에 석회 가루가 아카데미 전체로 퍼졌고, 다수의 학생이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결과.
문제는 붕괴되면서 발생한 석회 가루였던 걸로 드러났다.
"아마 그 학생들도 모두 기침에 시달렸을 겁니다."
난 소견서를 이사장 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그리고, 대공가 특유의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기 힘드시면 이 서류와 함께 직접 조사해 보시든지요."
"...."
붉은 머리칼을 이마로 시원하게 넘긴 이사장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그는 감히 비서 따위가 백작인 자신을 몰아붙이는 게 불쾌해 보였다.
"좋은 생각이군."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대공녀도 거들었다.
"잘못된 자재 탓에 제국의 귀중한 미래 인재들이 고통받으면 안 되니까."
"대공녀, 지금 면담의 주제가 흐려지는 것 같은데...?"
중년의 이사장은 입술에 침을 묻히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가 지금 만난 이유는 자네의 과잉 대련 때문 아니었나...?"
그는 뜬금없이 자신이 도마에 오르자, 꽉 맨 넥타이를 움켜잡았다.
이후, 답답했는지 억지로 끌어당겨서 헐렁하게 만들었다.
"맞습니다."
난 그런 이사장의 숨통을 다시 움켜쥐듯 말했다.
세상 순수한 미소와 함께.
"과잉 대련 논란도 계속 합의하셔야죠-. '다만' 기왕 오신 김에 저희 대공녀님을 다치게 할 뻔한 '대련장 문제'도 함께 처리하자는 겁니다."
태연한 표정으로 양손을 벌렸다.
그리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양측에 동의를 구했다.
"여기에 계신 모두가 몸이 하나로는 부족할 만큼 바쁘시고, 위대한 분들이시잖습니까?"
같은 학생들끼리 대련하다가 조금 세게 때린 것과.
대련장을 싸구려 자재로 만들어서 다치게 한 것.
'둘 중에 뭐가 더 쓰레기 같은 짓일까?'
난 리암 이사장을 빤히 바라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했다.
중년의 사내는 비열한 여우 한 마리를 마주한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긴 하지. 이사장을 쭉 기다리게 했을 정도로, 난 바쁜 몸이니까."
내 의도를 눈치챈 영특한 대공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녀는 한결 편해진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주석 소파에 몸을 기댔다.
마치 북부대공처럼.
"로저의 말대로 여기 온 김에 전부 처리하시죠, 이사장."
이사장과 나란히 선 리제는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다급히 올려다봤다.
"아버지, 저 말을 믿는 거예요? 그깟 돌가루 때문에 상급 엑스퍼트인 에키나가 다쳤다는 걸요!"
목소리가 커진 리제의 모습에 내가 반박했다.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지금 대공 전하의 담당 주치의 의견이 거짓이라는 겁니까?"
북부 대공이 구설수에 오르자, 리제는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토록 살벌했던 백작가의 장녀도 루튼 공작에게는 상대가 안 되니까.
"그게 아니라..., 아무리 주치의라도 한 사람의 의견이잖는가."
리제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차분히 말했다.
"단순히 우리 쪽이 자재를 잘못 썼다고 치부하기엔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 아는 일이야."
하지만, 이미 설전의 중심은 바뀌었다.
이제 리제의 입에서도 과잉 대련 대신, 석회만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조사 좋죠."
난 천천히 상황을 풀어나가려는 리제를 기특하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애늙은이처럼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합시다. 저희 대공가 쪽이 피해를 입었으니 기왕이면 다 함께 조사하시죠."
대공녀를 돌아보며 정중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가주석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꼰 에키나가 피식 웃었다.
"좋군. 이참에 리제가 그토록 동경하는 황실에도 요청해서 '본격적으로' 조사해보자고."
황실까지 언급되니, 리암 이사장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다급히 손사래 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기다리시죠. 이런 일 가지고 황실까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라니. 내가 잔기침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사장으로서 그게 할 말인가?"
대공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이 후작가를 강타했다.
하나를 알려주니, 알아서 칼춤을 추는 에키나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건 정말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우리가 고의로 한 실수는 아니잖는가."
"실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질책받을 사유긴 합니다."
난 대공녀라는 거대한 맹수 뒤에 숨어서 집요하게 떠들어댔다.
에키나 또한 내 의견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주도권을 콱 붙잡았다.
"석회는 타일 자재 중 매우 싼 쪽에 속하니까요. 애초에 아카데미의 명성에 걸맞은 소재를 썼으면 이런 일이 발생했겠습니까?"
"좋은 발언이군, 로저. 황실 조사단에게 말할 때 참고하도록 하지."
리암은 넥타이를 헐렁하게 했음에도 속이 답답했는지 테이블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잔을 짚더니 물을 쭉 들이켰다.
"내가 사과하겠네, 에키나."
갈증을 축인 이사장은 최선의 방법이 후퇴임을 깨달았다.
결국, 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우리 측에서 아주 꼼꼼히 조사하고, 자재도 교체하겠네."
지친 아버지의 모습에 리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국의 백작답게 어디서든 당당했던 그의 약한 모습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니 황실에 보고는 하지 말아주게나."
"아버지...."
리제가 다급히 그를 올려다보자, 이사장은 장녀에게 처음으로 살벌한 무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있거라, 리제."
입술을 꽉 다문 채 양 무릎에 손을 올린 그녀.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칠까 참고 말았다.
"...."
확실히 저런 점을 보면 철없는 다른 영애들보단 똑똑한 여인이다.
머리 빈 자제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며, 자신이 다친 것만 억울해했을 테니까.
"기회를 준다면,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대련장을 다시 짓겠네. 주변 환경도 개선하고 말이야."
대련장 재건축은 물론, 주변까지 직접 손보겠다니.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긴 흑사자는 자신의 부드러운 턱에 손을 얹었다.
"흐음.... 이사장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군요."
이후,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뒤편에 서 있던 드비어와 눈을 마주쳤다.
근엄한 비서장은 그녀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드비어도 일을 키우진 않는 쪽을 택했군.'
리암 백작가와 루튼 공작가 모두 북부 영지에 거주하는 이상.
서로 원수를 져봤자 좋을 건 없다.
적당히 기강만 잡아주는 게 맞는 처세다.
"그러면 이번 일은 이사장에게 '특별히' 맡겨보도록 하죠."
어느새 상급자의 위치에 선 대공녀의 모습.
리암은 이빨을 꽉 깨문 채, 소파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 혹시나 조사 인력이 부족하면 연락하세요."
에키나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사장에게 덤덤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언제든 우리 루튼에서 도울 테니까."
형식적인 손길에 리제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빨을 꽉 깨무는 것밖에 없었다.
"노르드의 모든 일은 저희의 소관이잖아요?"
제국 북부 지방의 주인은 루튼 가문이다.
그러니, 다시는 기어오르지 마라.
그 섬뜩한 속뜻을 이해한 리암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말만으로도 든든하군, 꼭 그러도록 하지...."
리암은 애써 웃으며 에키나와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후, 떠나갈 때 본 그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보다 20년 이상 어린 여인에게 그저 공작가라는 이유로 짓밟힌 모멸감.
그리고, 그 모멸감을 딸 앞에서 고스란히 보여준 이 상황.
모든 것이 수치스러웠으니까.
"왜 그러시죠, 이사장?"
에키나 또한 그 감정을 눈치챘는지 떠나가는 리암을 불러세웠다.
"뭐, 더 하고픈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닐세...."
그러게 돈도 많은 백작가 양반이 학생들 시설에 석회 타일을 왜 썼는지.
딸이 예리하게 에키나를 공격했어도, 아버지의 실수 때문에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가자꾸나, 리제."
멀리서 눈치를 살피던 루컨과 브룩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렇게 리암 부녀는 비서후보생들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떠나갔다.
덕분에 살벌했던 응접실은 다시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안락해졌다.
"소견서를 두고 가셨군요."
부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
난 테이블에 놓인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자재를 조사해 보려면 꼭 필요할 텐데 말이죠."
내가 그들을 따라 나가려던 찰나.
에키나의 고운 손이 내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아마 필요 없을 거야."
대공녀는 나머지 손으로 차를 마셨다.
이후, 자신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며 말했다.
"소견서가 있든 없든, 무작정 대련장부터 엎을 테니까."
응접실이 널널해지자, 드비어도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내가 쥔 소견서를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
"석회 가루라.... 싸구려 자재긴 했어도 인체에 해로울지는 상상도 못 했군요."
"그러게 말이야. 저년이랑 싸울 때마다 목이 간지러운 이유가 있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닮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봤다.
마치 자기들도 모르던 정보를 내가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과거에 제 아버지도 저택 마당에 석회 타일을 까셨습니다. 당시에도 값이 쌌거든요."
이에 난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가문이 몰락하고 집을 압류당하는 과정에서, 마당의 대련장도 철거됐습니다."
울적한 이야기를 풀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주군께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건 비서답지 못한 행동이니까.
"그 과정에서 석회 가루가 엄청 날렸는데, 노동자들이 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더군요."
"과연, 현장직에 종사하는 자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
에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적인 눈매를 번뜩였다.
"맞습니다. 그때의 기억과 에키나님의 몸에 묻어 있던 석회 가루를 연결 지어본 것뿐이죠."
난 세상 순수한 목소리와 함께 수건 한 장을 드비어에게 내밀었다.
비서장은 의심 어린 눈빛으로 나와 수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이후,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단안경을 벗어서 묵묵히 렌즈를 닦았다.
"대공녀님, 오늘 저택에서의 일정은 끝나신 것 같은데. 아카데미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비서장."
에키나는 번거로운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자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허락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사단에 돌아가려던 중.
무언가 떠올랐는지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
대공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날 바라보며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로 미소 지었다.
"율리우스 로저."
부름에 응하듯, 나 또한 에키나 쪽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
내 눈앞에 바짝 다가온 검은 머리의 북부대공녀.
새하얀 피부에 돋은 솜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실적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갓 스물한 살의 외모와 다르게 아버지를 흉내 내는 아저씨 말투.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다음 접대도 기대하지."
에키나는 그렇게 말한 뒤,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난 봐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얼굴을 돌리던 찰나....
조용히 올라가던 싱그러운 붉은 입술을.
"...."
난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떠나가는 대공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에키나는 뒷짐을 진 채,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복도를 떠나갔다.
'잠깐, 생각해 보니 '다음 접대도'라고 했었나...?'
8. 응접실 대결 (3)
에키나가 아카데미로 떠난 후.
내 능글맞던 미소도 싹 사라지고 말았다.
"율리우스 로저."
이제 응접실에 남은 건 나와 비서계의 전설....
드비어 루튼뿐이었으니까.
"잠시 이쪽으로 와보도록."
난 비서장을 따라 소파로 향했다.
그러자, 대공가의 지배인은 정장 재킷 속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3시가 넘었으니 평가도 끝났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태껏 보여준 내 모습을 채점했다.
이 시절의 나였으면 상황을 잘 해결했으니, 보너스 점수라도 주려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일말의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드비어라면 내 행동을 마냥 칭찬만 할 수 없을 테니까.
"조금 전, 응접실에서 있었던 너의 행동들이 옳다고 생각했는가."
"...."
과연, 드비어는 채점하는 동시에 냉철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지."
내가 보상을 바라지 않는 태도를 취하자, 드비어의 눈썹이 올라갔다.
"방금 제가 한 행동에는 적어도 세 가지 잘못이 있었으니까요."
잘못을 인정한 것을 넘어 3개씩이나 특정하다니.
비서장은 내 대답이 흥미로웠는지 다시 단안경을 치켜 썼다.
"뭔지 말해보게."
그의 투명한 렌즈 너머로 나의 덤덤한 얼굴이 비쳤다.
난 60세가 넘은 비서장과 똑 닮은 눈빛으로 말했다.
"첫째로, 응접실에 대공녀님이 혼자 들어가시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아직 가르치지도 않은 정보를 읊자, 드비어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의 수업 방침은 주입식 교육이 아닌, 스스로 찾아 배우게 하는 스타일이니까.
"둘째는, 논쟁의 파훼법을 알고도 미리 주군께 알려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소견서를 집었다.
이후, 비서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전에 입을 맞추지 않은 계획은 주군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드비어는 뒷짐을 진 채,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이후,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인가."
"마지막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척 간단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비서장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너무도 늦게 에키나님을 모신 것입니다."
비서장은 내 의미심장한 대답에 단안경을 벗었다.
이후, 안경닦이로 천천히 렌즈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자네는 가문에 이제 막 들어온 후보생일 텐데."
잘 닦인 안경 렌즈를 묵묵히 살펴보는 드비어.
그 모습이 마치 저명한 세공 장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에 들어온 후보생일 뿐인데, 어째서 그런 대답을 한 겐가."
그는 렌즈 속에 비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드비어는 하루 사이에 분위기가 바뀐 내 내면을 투시하고자 했다.
"만약 제가 에키나님의 전속 비서였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자신감이다.
허나, 이 말을 남긴 순간만큼은 내 새까만 눈동자에 윤기가 맴돌았다.
"주군을 뒤늦게 알아 뵙고 모셨으니 제 잘못인 셈이죠."
어떤 일이 발생해도 오로지 루튼 가문만을 생각하는 척해야 한다.
그 광기와 집념이 바로 비서장이 된 역대 인물들의 공통점이자....
'드비어가 원하는 정답일 테니까.'
"뒤늦게 간택 받은 것조차 본인의 탓이라는 건가?"
30년 차 비서장은 기가 찼는지 단안경을 내렸다.
마치 더 이상 투시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재밌는 생각을 했군, 율리우스 로저."
노년을 앞둔 대공가의 지배인은 느긋하게 뒷짐을 졌다.
이후, 뒤돌아서며 말했다.
"이만 로비로 나가지. 평가는 모두가 모였을 때 다시 하도록 할 테니."
앞서 나가는 비서장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난 그 소리를 따라 덤덤히 응접실을 나섰다.
――――――.
대저택 중앙 홀로 나오니, 이미 다른 후보생들은 먼저 도착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리제 부녀를 배웅한 루컨과 브룩도 서둘러 대기열에 합류했다.
떠나가는 그들의 살벌한 분위기에 데였는지 표정들이 썩 좋지 않았었다.
전생에는 내가 그들 대신했던 일들이다.
"다들 제시간에 도착했군."
마지막으로 나까지 대기열 끄트머리에 합류하자, 드비어는 근엄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다잡았다.
뒷짐을 진 그는 차례대로 비서 후보생들을 둘러봤다.
"그럼, 이제 개인 평가를 시작하마."
비서장은 가장 먼저 토방과 윈저 앞에 섰다.
루튼가의 장녀, 프레이야를 모셨던 그들은 기세등등했다.
대공의 자제들을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도장을 찍은 것이니까.
여기서 운이 좋으면 곧장 간택을 받아서 개인 비서로 승격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서장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무척 섬뜩했다.
"토방과 윈저. 너희들은 오늘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프레이야님을 모셨더군."
"예, 그렇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두 금발의 사내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중 토방은 힐끗 고개를 돌려서 내 표정을 살펴봤다.
가장 늦게 도착한 나를 보며 피식 비웃는 녀석.
아무리 에키나가 이름을 기억해 줬어도 자신은 장녀를 모셨으니 더욱 큰 점수를 받을 줄 아는 모양이다.
"프레이야님께서는 너희를 이렇게 평가하셨다."
하지만.
강한 인물을 모실수록 난이도는 더욱 높아지는 법이다.
"여태껏 올라왔던 후보생 중, 가장 무례했다고 말이다."
비서장의 눈썹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생겼다.
그 어둠 속에서 윤기 없는 검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모시는 내내 표정이 좋으셨는데...."
두 청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먼저 프레이야의 선택을 받으려고 으르렁댔건만.
"전혀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막상 위험이 닥치니 다시 의존하게 된 모양이다.
그만큼 드비어의 기세는 원수조차 화해하게 할 정도로 섬뜩한 것이었다.
"...."
비서장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는 후보들의 모습에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로저. 자네라면 알겠지?"
비서장이 날 지목하자 일렬로 서 있던 후보들이 일제히 내게 집중했다.
"오늘 토방과 윈저가 저지른 실수들 말이다."
토방 무리는 기가 찼는지 몰래 혀를 찼다.
자기들도 모르는 걸 도태된 내가 어찌 아냐는 눈빛으로.
그러나, 오만한 그들의 시선도 이내 박살 나고 말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읊어보도록."
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전방을 꼿꼿이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는 주군이 허락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계속해 보게."
고개를 돌려 토방과 윈저를 바라봤다.
"둘째는 그렇게 서로 나서다 겹쳤으면, 대공녀께서 곤란하지 않도록 한 명이 빠져야 했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감정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더군요. 덕분에 프레이야님께서 직접 중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가방과 재킷을 나눠주시며 일거리를 '직접' 분배하셨지."
드비어는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토방과 윈저의 눈 밑이 일제히 파르르 떨렸다.
"지금 당장 공작님을 뵙고 중요한 안건을 보고해야 하는데, 네놈들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 셈이다."
비서장의 짙은 눈썹이 섬뜩하게 찌푸려졌다.
"만약 너희들이 진정으로 자제님들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안 왔겠지."
드비어는 정장 재킷 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만년필에 점수를 휘갈겼다.
"로저. 동기들의 실수는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가?"
비서장의 물음에 난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눈동자를 굴리다 천천히 답했다.
"예, 마지막 하나는 저도 잘...."
물론, 마지막 실수도 알고 있다.
다만 모든 걸 술술 읊었다가는 에키나가 그랬던 것처럼 스파이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마지막은 바로 흑심이다."
드비어는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비서들이 왜 다른 하수인들에 비해 많은 봉급을 받는지 아는가?"
검은 정장 차림의 노부가 물었다.
그의 넥타이에는 고급스러운 다이아몬드 핀이 걸려 있었다.
"메이드나 소작농, 주방장은 모두 자기 할 일만 하고 퇴근하면 끝이다. 하지만, 비서들은 오로지 주군만을 생각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야."
비서장은 손가락을 치켜들어 창문 너머 멀리 보이는 후보생들 기숙사를 가리켰다.
그는 우리가 다른 하수인들과 달리 24시간을 주군을 위해 써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그런데 어떻게든 출세 한번 해보겠다고 그런 추태를 부려?"
멀리서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말문이 막힌 토방 무리들.
그들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숨을 푹 쉬었다.
'괜히 찔리는군.'
이번엔 나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 또한 이번 생만큼은 비서 일에 몰두할 생각이 없으니까.
"토방 아르만, 윈저 콘필드 너희의 1분기 평가 점수는 3점이다."
토방과 윈저는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졌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껏 오만했던 얼굴을 숨기고 말았다.
"다음으로 루컨과 브룩. 너희는 대공가 자제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더군."
"죄송합니다...."
거구의 루컨이 먼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브룩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내게 죄송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게 감점 사항은 아니니까."
비서장은 두 사람에게 점수가 적힌 종이를 무심히 건네주었다.
"너희들의 점수는 모두 6점이다."
토방과 윈저보다는 나은 2배의 점수.
이에 브룩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
허나, 루컨은 달랐다.
그는 비서직이 간절한 만큼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율리우스 로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노부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에키나 루튼 대공녀님을 모셨던 너에 대한 평가를 시작하마."
하얀 장갑을 낀 비서장의 손이 우아하게 정장 재킷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미리 자제들에게 제공했던 점수표를 꺼내들었다.
비서장은 단안경을 고쳐 쓰며 그녀가 준 점수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음...?"
노부는 살면서 이런 점수는 처음 보는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나와 종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공녀님께서 너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리셨군."
드비어는 내게 보란 듯이 점수표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행실, 태도, 업무 능력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허나, 에키나는 이 중 어디 하나에도 점수를 매기지 않았다.
'뭐지...? 이건 전생에도 겪지 못한 일인데....'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서 쭉 읽어내려가던 찰나.
아름다운 필체로 맨 마지막에 적힌 한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피곤한 일이 많았던 관계로 율리우스 로저에 대한 평가는 생략한다...?"
분명 내 도움을 받아놓고 무심하게 적힌 글귀.
이에 기가 찼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에 대한 점수는 다음 만남에 주겠다고 하시더군."
다음 만남.
그 말에 난 검은 눈동자를 꿈뻑거렸다.
"그러니, 1분기 평가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마."
홀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드비어는 묵묵히 나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호출이 있을 때까지 모두 기숙사에서 대기한다."
드비어가 떠나가자, 유일하게 점수를 받지 않은 날 동기들이 빤히 바라봤다.
허나, 난 여전히 멀어지는 비서장의 뒷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저 노인네도....'
에키나처럼 미소를 숨긴 것 같았으니까.
마치 대공녀의 뜻을 혼자서만 이해한 것처럼.
9. 만찬의 시간 (1)
대망의 첫 실습이 끝났다.
허나, 점수를 받은 동기들의 표정은 대부분 썩어 문드러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대공가의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된 스무 살 청년들.
날 괴롭힐 기운조차 없는지 다들 기숙사를 향해 털털 걸어가기 바빴다.
나 또한 기숙사 문을 열고 끄트머리 방으로 들어갔다.
이후, 출근하기 전에 정리해둔 침대에 몸을 눕혔다.
"...."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손가락 하나, 하나 피아노 건반을 치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정말 다시 살아나다니.'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봤을 때, 절대로 주마등이 아니다.
내 선택대로 과거 인물들의 행동이 전부 바뀌었으니까.
특히 한창 예민한 시기의 에키나와 드비어가 내게 미소를 지어줬다니.
토방 무리에게 처맞아서 느낀 고통보다 그들의 표정이 훨씬 실감 났다.
"그럼, 대공가에서 당한 개죽음도 바꿀 수 있다는 건가...?"
확신이 들자, 침대에서 몸을 벌컥 일으켰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려 낮에 했던 미래 계획을 되짚었다.
'일단 첫 목표는 대공가에서 나가는 거다.'
루튼 공작이 죽으면 가문은 어마어마한 상속 전쟁에 휘말리니까.
이 사건에 터지기 전에 은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둘째로는 은퇴 자금과 인맥 확보.'
이곳에 있는 동안, 대공가라는 소속을 잘 활용해야 한다.
이 소속감이 곧 신뢰가 되어 여러 사업체와 인맥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인물 중에는 에키나 루튼도 있을 것이다.
대공가에서 날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생각해 준 여인.
그녀가 내게 눈물을 흘려줬던 장면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내 평가는 갑자기 왜 미룬 거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대공가의 자제들은 원래 성격이 모두 괴팍했기에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일까.
아마 나를 시기하는 토방이겠지.
녀석은 능력도 좋지만, 경쟁자를 괴롭히는 것도 선수였으니까.
'일단 이 시험판에서 내 편부터 만드는 게 먼저야.'
난 토방으로부터 지켜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동시에 침대에서 일어나 기숙사 문을 벌컥 열었다.
――――――.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맞은편 호실이었다.
203호.
난 그곳에 사는 게 누군지 알고 있다.
바로 오늘 응접실에서 쭉 만났던 루컨 페른.
토방과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녀석이며, 체구도 좋은 전당포집 아들이다.
'목걸이값을 제대로 쳐줄 전문가를 찾은 것 같군.'
그의 방으로 유유히 다가갔다.
이후, 손등으로 가볍게 노크했다.
「....」
내부에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분명히 그가 호실로 들어가는 걸 두 눈으로 봤었다.
그렇기에 조용히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았다.
"후우우...."
홀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루컨은 운동조차 평범하게 하지 않았다.
바닥에는 오늘 내내 자신이 적은 메모가, 벽에는 일정표가 적혀 있었다.
그는 팔을 굽힐 때는 바닥의 메모를 읽고.
필 때는 벽보를 보며 일정을 숙지하는 광기를 보였다.
"로저? 내 방엔 무슨 일이지."
거구의 동기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두 종이만 바라보며 살벌한 운동을 이어갈 뿐이다.
"별거 아니고."
난 그런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후, 벽에 기댄 채 은근슬쩍 물었다.
"오늘 상당히 고생한 것 같길래 찾아와 봤어."
"하, 너도 토방처럼 날 농락하러 온 거냐."
이미 토방 녀석도 이 녀석에게 왔다 간 건가.
재수 없는 명문가 자제 특성상 그를 업신여기며 포섭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눈앞의 거구에게 통할 리가 있나.
"아니, 농락할 게 뭐가 있나. 같은 동기생 처지에 말이야."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넌 원래 항상 호실 속에 쥐 죽은 듯이 지냈잖아."
녀석은 내 의도가 궁금했는지 마침내 운동을 멈췄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잘나서 토방 무리의 견제를 받고 있거든."
갈색 머리의 사내는 당당한 내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은 눈빛이다.
"그래서 말인데 거래를 좀 했으면 해."
"거래?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지?"
루컨은 기가 찼는지 홀로 팔짱을 꼈다.
녀석의 튀어나온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너도 오늘 봤잖아. 내가 능숙하게 에키나님을 접대하는걸."
녀석은 오늘 본 내 능력만큼은 인정하는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자기는 응접실에서 버려진 휴지나 줍고, 난 백작가 부녀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하인과 정식 비서의 압도적인 차이였다.
"넌 내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 주고, 난 그 보답으로 비서의 요령을 가르쳐 주는 거지."
"...."
야생 맹수를 닮은 그의 우락부락한 눈매가 날 빤히 관찰했다.
적인지 아군인지, 아니면 먹잇감인지 구분하려는 것처럼.
"든든한 파트너라.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군."
루컨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어서 우람한 팔뚝으로 홀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토방 무리가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경비견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경비견이라니. 파트너라니까."
난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어차피 너도 간절하잖아. 어떻게든 이번 연도 안에 정식 비서가 되고 싶은 거 아니야?"
의자 옆에는 서랍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위로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정장 재킷과 벗어놓은 반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절하긴 무슨. 어차피 이 짓 안 해도 할 일은 많아."
루컨은 오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그는 내게 온 시선을 집중하고 말았다.
"하긴. 노르드에서 제일 잘나가는 전당포집 아들이니, 돈은 문제없겠지."
내가 녀석의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약혼반지를 들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누가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군."
루컨은 곧장 침대에서 벌컥 일어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브릴리언트 컷팅으로 깎인 아름다운 반지만 응시했다.
세공 과정에서 원석 손실이 제일 큰 디자인.
갑자기 주문이 취소되거나, 환불이 들어오면 세공사들만 손해라서 귀족들의 오더만 받는 수작이다.
"아무리 잘나가는 전당포라도 이런 반지는 제작하기 힘든데-. 아마 약혼녀분께서 귀족 영애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설마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냐!"
녀석의 높아진 언성에 여우처럼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비서직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약혼녀 때문이라는 거야."
쥐고 있던 반지를 도로 재킷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기를 재우듯이 소매로 꼬옥 덮어주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상인의 아들이라도 계급은 평민이니, 귀족 영애와 급을 맞추기 위해서 대공가의 비서가 되려는 거 아닌가?"
"...."
루컨은 숨기고 있던 본심을 들켰는지 입술이 벌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내 능글맞은 미소를 기가 찬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이번 연도 안에 무조건 정식 비서가 되도록 말이야."
거구의 동기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는지 자기 뒷머리를 박박 털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녀석에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혹시 내가 토방 무리에 굴복하여 스파이가 된 건 아닐지 의심하는 듯한 녀석.
"내가 뭘 믿고 너와 뭉쳐야 하는데?"
난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인 자들을 자주 봐왔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도 잘 알고 있다.
'상대에게 확실한 신뢰를 주기 위해 우리 인류는 무엇을 활용해 왔는가?'
정장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루컨의 반지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목걸이를 꺼냈다.
"우리의 첫 계약을 축하하는 의미로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검지손가락에 걸린 루비 목걸이가 아름답게 춤췄다.
그 매끈한 단면에 루컨의 얼굴이 비쳤다.
녀석은 전당포 아들답게 이 보물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너.... 그거 안 빼앗기려고 하루 종일 맞은 거잖아. 그런데 갑자기 넘기겠다고?"
"지금 이게 필요한 건 나보단 너 같아서 말이지."
"나한테...?"
난 녀석의 두툼한 손에 어울리지 않는 목걸이를 내려주었다.
아름다운 황금색 줄이 그의 굳은살 위에서 똬리를 틀었다.
"그래, 이 정도 물건이면 약혼녀 쪽 가문에서도 충분히 만족할 테니까."
녀석이 바라보던 일정표를 지목했다.
그곳엔 이틀 뒤의 날짜가 붉은색으로 별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번 주말에 약혼녀 가족을 만나면, 오찬 자리에서 그걸 건네주도록 해."
비서장 시절, 상견례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장인어른 댁에서 얼 타고 있을 루컨의 모습도 눈에 훤했다.
이런 듬직한 녀석은 보통 대화보다 행동이 편해서 말주변이 없으니까.
그럴 땐 이런 선물 하나를 건네는 쪽이 가정을 더욱 화목하게 만드는 법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여주면, 약혼녀가 어머니께 자랑할 테고, 가치를 알아본 어머니가 설명하면 장인어른도 네가 대공가에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이런 목걸이 하나로?"
난 생각 좀 해보라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비서들은 월급보다 현장에서 받는 금일봉이 훨씬 많아."
녀석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는 눈빛이었다.
애초에 우리는 아직 정식 비서가 아니었으니까.
"월급날도 아닌데 이런 귀족의 물건을 사 오면 장인어른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비열한 간신처럼 웃으며 뒷짐을 졌다.
"대공가에서 실적이 좋으니 자제들이 따로 챙겨줬다고 추측할 거야."
녀석은 간사한 미소를 짓는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네 얼굴.... 마치 드비어 같아."
난 감 좋은 녀석의 어깨를 능청스럽게 토닥였다.
그러다 내 눈 밑에 돋은 눈물점을 보란 듯이 두드리며 당부했다.
"너도 비서장님의 행동을 잘 보고 분석해. 정식 비서가 되기 위한 기본기가 되어 줄 테니까."
가벼운 걸음으로 루컨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슬슬 돌아가서 미래 계획을 세우려던 중.
"...!"
먼저 복도에 나와 있던 다른 동기들과 눈을 마주쳤다.
토방과 브룩이었다.
우두머리를 배신하고 프레이야에게 집적댄 윈저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지?"
금발의 사내가 양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은 채 다가왔다.
기숙사로 돌아오니 녀석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
난 놈에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내 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자, 내 팔목에서 순간적으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자식이 오늘 여러 번 화나게 하네...? 대답 안 하냐?"
놈의 손바닥이 뱀의 주둥이처럼 내 팔목을 콱 움켜잡았다.
허나, 난 욱신거리는 팔목에도 전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네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토방."
"뭐야...?"
토방이 움켜쥔 팔을 순간 강하게 털었다.
이후, 놈을 바라보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못나서 부모님께 무시당하는 걸, 왜 나한테 풀려고 하냐? 한심한 자식."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소리를 했다간 바로 주먹이 날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자 녀석은 잠시 멍을 때리고 말았다.
마치 내가 자신의 치부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표정으로.
놈이 넋이 나간 동안, 묵묵히 내 방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들어가려는 순간.
"멈춰. 누가 마음대로 간다고 된다 했지?"
놈은 내 등을 강하게 밀어, 호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후, 주먹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
녀석의 주먹은 내 얼굴에 내리꽂힐 수 없었다.
아무리 힘을 쥐어도 토방의 얼굴만 일그러질 뿐이었다.
"토방...."
브룩의 애달픈 목소리에 녀석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힘껏 젖혀진 방문에 뭉개지고 있는 브룩이었다.
"석식 때까지 좀 조용히 있지, 그래?"
금발의 명문가 자제가 살벌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그토록 포섭하려고 했던 동기들 중 최강의 사내를 마주하고 말았다.
"운동하는 데 방해되잖아."
아무리 악을 써도 자신의 팔을 움켜잡은 루컨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녀석은 바들거리는 목을 겨우 돌려서 눈앞에서 놓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문 좀 조용히 닫지 그랬어, 토방."
난 뒷짐을 진 채, 토방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폭군을 조종하는 간신처럼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운동하시는 데 방해된다잖아-."
10. 만찬의 시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