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무조건 사기라니깐, 저거."
비쩍 마른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다.
"요즘 세상에 돈을 거저 주는 놈이 어디 있어? 땅 파면 돈이 나오남? 다 사기야. 사기."
나도 동의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역 앞 포장마차 사이.
한 남자가 현수막을 걸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팔씨름 한판 해주시면 10만 원 드립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말이 되냐?
돈이 썩어 나는 게 아니면 팔씨름한다고 누가 돈을 줘?
따로 노리는 게 있지 않고서야.
"정말 10만 원 줍니까?"
"예. 드립니다."
"그럼 어디, 한 판...."
가끔 무모한 도전을 벌이는 사람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바람잡이네.'
다 개수작이다.
이딴 짓거리에는 안 넘어간다.
그렇게 무심코 그 자리를 지나쳤다.
그날도 다음날도.
세 번째 날도, 네 번째 날도.
다른 사람들 생각은 달랐던 걸까?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났을 때, 현수막이 걸린 자리 앞은 팔씨름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싸! 10만 원이다!"
"아저씨! 한 판만 더 해요!"
"저한테 지셨잖습니까. 이기신 분만 한 판 더 해 드립니다."
"아, 그러지 말고요!"
"죄송합니다."
"우헤헤! 10만 원이다!"
그중에는 낯익은 할아버지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신사임당 두 장을 쥐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걸 보며, 난 한쪽 뺨을 긁적였다.
설마 진짠가?
'밑져야 본전인데....'
2주 넘게 지켜보니 남자에겐 원칙이 있었다.
팔씨름은 자기가 이길 때까지만 한다는 것.
대부분 남자가 이겼다.
가뭄에 콩 나듯 한 번 졌고, 두 번 지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 판 할 때마다 무조건 10만 원을 지급했다.
앉은 자리에서.
신사임당 두 장으로.
경찰들도 와서 얘기를 나누다가 팔씨름을 하고 10만 원씩 받아 가는 걸 보면 특별한 문제는 없는 모양.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도 줄을 섰다.
10만 원이다.
꽁돈이 들어오는데 구경만 하고 있으면 바보지.
"신중하신 분이시네요."
책상 앞에 앉자 남자가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묘한 인상이다.
병이라도 걸렸는지 누리끼리한 얼굴에 다크서클이 주르륵 내려온 눈 밑.
반면 몸은 탄탄했다.
평범한 추리닝을 입었는데도 근육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이기긴 힘들겠다.'
내 가느다란 팔을 보니 저절로 드는 생각.
'그래도 이기고 싶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남자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어디가 아파도 단단히 아픈 모양.
실제로 남자를 이긴 사람 중엔 초등학생도 몇 명 있었다.
"혹시나 해서요."
"후후. 좋은 거지요. 신중해서 손해 볼 건 없습니다. 그럼, 할까요?"
남자가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는다.
상당히 거친, 굳은살 가득한 손이 내 손을 부술 듯이 감싸 쥐었다.
와, 이거....
무슨 격투기 선수라도 돼?
땡!
남자가 종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시작.
최대한 힘을 주고 밀어붙였다.
퍽!
남자의 손이 힘없이 반대로 넘어갔다.
나는 얼떨떨해서는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드럽고 연약한 손이다.
그런데 이토록 쉽게 이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예!"
얼떨떨한 것도 잠시.
나는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야."
남자가 나를 관찰하듯 들여다본다.
"보기보다 통뼈십니다."
"에이, 그건 아니에요. 완전 약골이라고요."
여자보다 가느다란 손목.
어릴 때는 친구들한테 놀림도 많이 당했지.
초중고 내내 별명이 멸치였다고 하면 알겠지?
"이기신 걸 축하드립니다. 먼저 이것부터 받으시죠."
10만 원을 척 내미는 남자.
혹시나 해서 형광등 빛에 지폐를 비춰 보았다.
5만 원권 두 장, 정확했다.
남자가 내 눈을 보며 묻는다.
"어떻게, 한 판 더 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책상 한쪽에 깔았다.
꿀꺽.
거절할 이유가 있어?
침을 한 번 삼키고는 팔꿈치를 책상에 붙였다.
"하죠. 이번에도 제가 이길 겁니다."
"후후.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요."
옹골찬 감각.
저항감이 상당했다.
힘없이 넘어갔던 첫 번째와는 달랐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힘을 쓰자 남자의 팔이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고, 더욱 용을 쓰자 어느 순간 넘어가고 말았다.
"오호."
무기질적이던 남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두 번이나 절 이기시다니... 이거 의외인데요?"
"제가 이긴다고 했잖습니까."
"후후. 그 행운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한 번 더 하시겠습니까?"
"하죠."
세 번째도 나의 승리.
솔직히 말해서 어려웠다.
안간힘을 쓴 끝에 겨우 이겼다.
"헥, 헥, 헥."
얼마나 힘을 썼는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지경.
내가 숨을 몰아쉬는 것을, 남자는 가만히 나를 주시하며 기다려 주었다.
"그거 아십니까?"
"헥헥, 뭘요?"
"지금까지 절 세 번 이긴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저 두툼한 팔과 떡 벌어진 어깨를 봐라.
남자가 정상이었으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떡바르겠지.
나 같은 멸치는 당연하고.
"그리고 절 네 번 이긴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지요."
"대단하시네요. 팔씨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많이 했지요. 아주, 아주아주 많이."
잠깐 침묵하던 남자.
주머니를 뒤져 신사임당 뭉치를 꺼낸다.
지금까지처럼 두 장만 꺼낸 게 아니라 한 뭉치.
뉴스에서나 보던 그 묶음이다.
"어...."
5만 원이 100장.
즉, 5백만 원!
내가 멍해져서는 남자를 보자, 남자가 5백만 원을 내게 쭈욱 내밀었다.
"막판 하시죠. 이기든 지든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정말 이걸 저한테 준다고요?"
"예. 대신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합니다."
5백만 원이다.
내 월급의 거의 두 배이고, 지금 통장에 들어 있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다.
의심하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었다.
이미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폐 뭉치를 덥석 움켜쥐자 남자가 흐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결정된 겁니다. 최선을 다해 주시기로요."
"그러죠."
"막판도 이기시면 제가 아주 큰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부디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이쯤 되자 나도 오기가 솟았다.
이미 세 번을 이겼다고.
3연승 했는데 4연승 못 할 것 같아?
땡!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꽉 힘을 주었다.
팔을 넘기려고 했으나 어마어마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사람 팔이 아니라 강철 쇠기둥을 잡은 듯한 반응.
"이이익!"
이를 악물고 용을 쓰지만 남자의 팔에는 미동도 없었다.
얼굴도 마찬가지.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한 채 날 쳐다볼 뿐이다.
"고작 이게 전부입니까?"
"이익!"
"아쉽네요. 드디어 적합자를 찾나 했더니...."
남자가 힘을 준다.
굵은 근육이 구렁이처럼 춤을 췄다.
자연스럽게 내 팔이 무력하게 꺾였다.
손목이 뒤로 넘어가고, 각도가 점차 책상에 가까워지고....
이대로 지는 걸까?
지고 마는 걸까?
사실 져도 된다.
지든 이기든 5백만 원은 내 것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오기가 솟았다.
저 눈!
명백히 깔보는 저 눈!
기억 속 그 눈들과 놀랍도록 닮은 저 눈깔!
이놈한테만은 질 수 없다.
절대로, 이놈한테만은!
"으아아아!"
비명 지르듯 고함을 질렀다.
배때기에 힘을 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부들부들.
손등이 책상에 닿기 직전.
손이 넘어가던 것을 겨우 멈춰 세웠다.
"오호."
남자가 의외라는 눈빛을 던졌다.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만."
"으...."
"포기하시죠. 역전은 불가능합니다."
"두... 두고 봐...."
힘을 준다.
남자의 손을 쥐어짜듯 움켜쥔다.
내 손만 하얗게 변하지만,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천천히 밀어 올렸다.
아주 천천히, 느지막하게, 굼벵이 담벼락 오르듯이.
올라간다!
속도가 지독하게 느리긴 해도 어쨌든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파란이 스쳤다.
그걸 보자 뚝, 뚝,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옅은 희열이 느껴졌다.
이길 수 있다!
내가, 이 멸치 같은 내가 저 격투기남을 네 번이나 이길 수 있다!
"으아아아!"
포효 터뜨리듯 내지른 고함.
전력을 쏟아부었다.
남자의 팔이 거짓말처럼 홱 꺾인다.
마치 처음 팔씨름했던 때처럼, 무력하게 뒤로 넘어가서는 책상에 꽂히고 만다.
"허...."
남자가 시선을 자기 팔에 고정했다.
나는 남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길 거라고 했죠?"
"하하. 하하하하."
네 번이나 진 게 충격이었던 걸까?
남자가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상 위의 5백만 원을 잽싸게 챙겼다.
으, 더는 못 하겠다.
전신이 다 쑤신다.
더구나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젠 5백만 원이 아니라 천만 원을 준다고 해도 안 해.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그 생각으로 막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남자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번뜩이는데, 평범하던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뭐, 뭡니까?"
"드디어... 드디어...."
"저기, 저 이제 집에 가야 되거든요? 이거 놔주세요."
"드디어, 후후후, 드디어...."
"놔 달라니까요?"
분위기가 이상하다.
무엇보다도 짐승 같은 눈에, 육식 동물 같은 분위기에 겁이 덜컥 났다.
손을 흔들어 빼내려고 하지만 무슨 힘이 이렇게 센지 도저히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뭐야 이거?
나한테 팔씨름 네 번이나 진 인간 맞아?
"경찰 부를 겁니다!"
"후후후. 불러 보십쇼. 부를 수 있다면."
"여기 좀 도와.... 어?"
묘한 정적.
나는 비로소 주위가 적막에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히 처음 팔씨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글우글 모여 있던 사람들.
지금은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다.
포장마차 주인마저 싹 다 증발해 버렸다.
저 앞 도로도 텅텅 비어서는 차 한 대 지나가질 않았다.
지금 시간이라면 차도 사람도 빽빽하게 차 있어야 함에도.
불가사의한 현상.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뒷목이 뻣뻣해진다.
몸이 부르르 떨릴 무렵, 남자가 기묘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내가 주머니에 넣었던 5만 원권 지폐가 나비 떼처럼 날아올라 남자의 손에 잡혔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뭐...."
이어 남자가 신사임당 뭉치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괴상한 흑금색 불꽃이 피어올라 지폐 표면을 변화시킨다.
여전히 5만 원권 지폐.
그러나 뭔가 달랐다.
지폐 색깔이 살짝 옅어졌다.
신사임당 얼굴이 조금 후덕해졌다.
한국은행, 오만원, 50000 폰트가 약간씩 바뀌었다.
5만 원권은 여전히 5만 원권.
하지만 내가 아는 5만 원권이 아닌,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대한민국에서 발행한 것처럼, 비슷하되 명백히 다른 지폐 뭉치가 내 앞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스스슷.
남자가 손을 떨치자 지폐가 팔랑팔랑 내 주머니로 들어온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
꿈을 꾸는 걸까?
그러나 남자가 뻗은 손이, 내 어깨를 누르는 손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강제로 실감하게 했다.
"100억 명, 100억 명입니다."
남자가 기괴한 안광을 발하며 말했다.
"100억 명과 팔씨름한 끝에, 겨우 적합자를 찾았습니다."
"이거 놔!"
"후후. 그럴 수는 없지요."
남자의 눈에 어린 안광이 짙어졌다.
"당신은 저를 네 번 이겼고 네 번 대가를 받아 갔습니다. 인과율에 따라, 당신은 제게 아주 큰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선물? 안 받아! 안 받는다고!"
"이미 대가를 받은 이상 거절은 불가능합니다."
아뿔싸.
주머니 안의 지폐를 꺼내 던지려고 했으나 너무 늦어 버렸다.
남자가 나를 휙 끌어당긴다.
피어오르는 검은빛과 누런빛.
의식이 멀어진다.
빛무리에 잡아먹히는 내게, 세계가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X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진짜 사기였잖아."
더 의심했어야 했는데.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였다.
얼마 후 눈을 떴을 때.
나는 기묘한 세상의 이상한 서울에 떨어져 있었다.
2화 이상한 서울 (1)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시민님. 시민님."
생소한 호칭.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일어나세요."
머리가 무겁다.
안개라도 낀 듯 정신이 멍하기 그지없었다.
"시민님?"
"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 아래 역무원 둘이 서 있었다.
둘을 본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헉!"
역무원들이 총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이저건도 소구경 권총도 아닌, K2 닮은 자동소총을!
펄쩍 뛰듯 상체를 일으키자 역무원들이 되레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으세요?"
명료해진 시야.
둘의 무장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동소총만이 아니었다.
상체에는 방탄복 조끼를 껴입었고, 머리에는 투명 헬멧을 눌러썼다.
심지어 탄띠와 권총, 곤봉 등 보조 장비도 여럿 보였다.
'뭐지?'
전투 경찰인가?
아닌데.
복장이 경찰과는 거리가 멀다.
방탄복 아래는 분명히 역무원 정복이었다.
무장만 갖췄다뿐이지 분위기도 경찰이나 군인과는 거리가 멀었고.
'전쟁 났나?'
덜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역무원들이 총을 들고 다닐 리가 없잖아!
아니지, 아니야.
설령 전쟁이 났어도 마찬가지다.
나라에서 미쳤다고 역무원한테 총을 들려 주겠어?
"시민님. 괜찮으십니까?"
좀 젊어 보이는 역무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흠."
반면 더 늙은 역무원은 어째선지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흘린다.
"약 좀 하신 모양입니다. 약 하시는 거야 시민님 자유지만 안전한 곳에서 하셔야지요. 2계급 시민님께서 4계급 지역에서 약 빨다 돌아가시면 저희만 고달파집니다."
2계급? 4계급?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젊은 역무원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런 거였어요? 어쩐지.... 시민님. 얼른 정신 차리시고 집에 가세요. 최소한 2계급 구역으로 가시거나요."
"어, 그게요...."
"지하철 타고 가시게요? 여기 역은 오늘부터 당분간 폐쇄에요. 신대방역에서 갱단 놈들끼리 싸우다가 폭탄 터뜨려서 철로가 망가졌거든요. 아오, 싸울 거면 지들끼리 죽이고 끝낼 것이지. 왜 애꿎은 철로를 폭파하고 난린지 원."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갱단? 폭탄?
아픈 머리를 붙잡고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역무원들이 한쪽을 가리켰다.
"6번 출구로 나가신 다음에 구로교 건너서 북쪽으로 쭉 직진하십쇼."
"조금만 가서 영림초 지나가면 바로 3계급 구역이에요. 거기서 택시 타시면 2계급까지는 금방입니다."
"아시죠? 4계급 구역에서 택시 타면 절대 안 되는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비틀거리는 내가 마음에 걸렸던 걸까?
역무원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시하며 얼떨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흔한 지하철 승강장.
그런데... 많이 달랐다.
'이거 무슨 냄새야?'
우선 지린내.
뉴욕 여행 가서, 또 파리 여행 가서 탔던 지하철에서 나던 냄새가 독하게 코를 찔렀다.
무엇보다도 역 전체가 누리끼리하니 더러웠다.
깨끗하고 세련된, 내 기억 속 지하철역은 어디에도 없다.
벽면에는 꺼먼 얼룩이 그득하고, 제멋대로 휘갈긴 낙서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스크린 도어는 왜 또 없어?'
가장 큰 차이점은 이것.
스크린 도어가 없다.
2천 년대 초반처럼 휑하니 비어 있다.
자연히 시커먼 지하철 통로가 여과 없이 노출된다.
거대한 괴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곤 자리를 떴다.
찍찍!
막 승강장을 떠나 연결 통로로 들어갔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난 쓰레기통을 뒤지던 시궁쥐와 마주쳤다.
얼마나 잘 먹고 잘 컸는지 고양이만큼이나 컸다.
시궁쥐가 날 보고는 찍찍거렸다.
무섭지도 않은 모양.
이내 누군가 버린 김밥 쓰레기에 고개를 처박고 찍찍거리며 먹어 치웠다.
"하, 진짜...."
대한민국 지하철에 쥐가 왜 있지?
자세히 보니 한 마리도 아니다.
찍찍! 찍찍찍!
쓰레기통은 물론 연결 통로 여기저기 우글거렸다.
"에이, 썅!"
"찍!"
연결 통로에 누워 있던 노숙자가 슬리퍼를 내리쳤다.
쥐가 한 대 얻어맞고는 기겁해서 도망쳤다.
내가 그걸 멀거니 쳐다보자 노숙자가 내 시선을 느끼곤 씨익 웃는다.
"엉? 못 보던 분이네? 여기 있으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주머니 두둑해 보이는 나으리. 어떻게, 한 푼 주실랍니까?"
기묘한 얼굴이다.
아래턱 전체가 강철로 되어 있었다.
더구나 치아는 다 톱니바퀴.
사람이 아니라 공포 영화 속 크리처 같은 노숙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하게 된다.
"크흠!"
헛기침하는 노숙자.
그 시선이 집요하도록 내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신사임당 뭉치, 즉 530만 원이 들어 있을 내 주머니에.
"어이, 김 씨! 쫓겨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크흠! 알았수다."
뒤에서 역무원들이 경고하지 않았으면 구걸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시비를 걸었겠지.
어쩌면 정말로 폭력 사태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여긴, 여긴 뭐지?'
완전 무장 한 역무원.
심각하게 더러운 지하철역.
기괴한 용모의 노숙자.
이 모든 것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
이게 현실인가?
여기가 대한민국이라고?
내가 살던 그 대한민국이, 서울이 맞아?
"이상해...."
나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상하다고...."
특히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표지판.
노숙자들이 모여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기둥 위.
거기 박힌 역명이 내게 강렬한 이질감을 선사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역]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내 직장이 있는 곳이니까.
일주일에 다섯 번, 재수 없으면 주말 반납해 가며 출퇴근했던 그곳이니까.
또한 정체불명의 남자를 2주 넘게 관찰했던, 그 끝에 팔씨름 4판을 따낸 그 지점이니까!
"아."
이제 알겠다.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괴상한 광경을 연출하며 빛으로 변하던 팔씨름남.
분명히 구디역인데 낯설기만 한 이 지하철역.
대한민국에 있을 수 없는 무장 역무원.
이것들을 종합하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이세계.'
웹소설과 만화책, 게임에서 단골로 나오는 그것.
몸이 떨렸다.
이가 딱딱 마주쳤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세계, 이세계라니!
말이 되냐?
말이 돼?
'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
떨리는 몸과 별개로 내 머리는 착착착 결론을 내놓고 있었다.
아마도 팔씨름남이 악마든 신이든 초월적인 존재였지 싶다.
적합자 운운한 걸로 봐선 팔씨름이 뭔가 의식 같은 거였겠지.
"옘병."
옘병, 정말로 옘병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욕을 하든 절망해 주저앉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하나.
행동하는 것이다.
무턱대고 아무 데나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방향으로 최고의 선택지를 골라서!
'방법은 있어.'
팔씨름남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자.
분명히 아주 큰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 했겠다.
그게 이 세상으로 납치해 오는 걸 말하는 거였을까?
그럴 리가.
팔씨름남은 날 적합자라고 칭했다.
뭔가 쓸모가 있다는 뜻.
그렇다면 초반에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 방법을 마련해 놨겠지.
무협으로 치면 기연.
웹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 보정 같은 것을.
'역 안에는 뭐 없지?'
특별한 것은 안 보인다.
관심 없는 척 훔쳐보는 노숙자와 어서 나가라고 손짓하는 역무원이 전부.
일단 지하철역을 벗어났다.
역무원들 말대로 6번 출구를 따라 나오자, 나는 비로소 팔씨름남이 날 위해 뭘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건....'
하늘을 향해 치솟은 빛의 기둥.
칠흑 바탕에 황금빛을 화려하게 뿌리는 빛의 기둥이 수도 없이 치솟아 있었다.
절대 자연적이지 않은 물체.
그냥 구조물 아니냐고?
콰아아아!
자동차 한 대가 쌩 날아서 빛의 기둥을 통과하는 것을 봐선 유형의 물체는 확실히 아니다.
"비행차라니.... 하, 나 참."
비행차가 다가 아니었다.
원래는 서울 시내 비행 금지였을 드론이 쌕쌕 날아다녔다.
타앙! 타아앙!
더구나 은은하게 들려오는 총성.
동쪽, 신대방역이 있는 방향이다.
갱단끼리 싸움이 붙었다더니 총질을 하는 모양.
'경찰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접어 버렸다.
이 이상한 세상에서 경찰이라고 이상하지 않을 리가 있겠냔 생각이 들어서.
'서쪽으로 가자.'
이유는 간단하다.
흑금빛 기둥.
그중 가장 가까운 게 서쪽에 보였기 때문에.
구디역 6번 출구에서 대략 5백 미터 지점.
내 기억으로는 조그마한 아파트 단지가 있던 곳인데, 엉뚱하게도 모텔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마법이 머무는 모텔]
이름이 특이하네.
멀리서 볼 때는 건물 전체를 감싸던 흑금빛 기둥이다.
그런데 내가 모텔 안으로 들어가자 도망치듯이 달음박질쳐 사라졌다.
저 위층으로.
기둥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쭉 따라가야 하는 모양.
내가 천장을 힐끗거릴 때, 카운터에 앉아 있던 험상궂은 사장이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숙박? 대실?"
"숙박이죠. 기본 방으로 하나 주세요."
"의자 방은 2만 원이요."
주머니에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약간 더 보들보들해서 이질적인 감촉.
사장이 형광등 불빛에 지폐를 비춰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은 열쇠와 만 원권 지폐 세 장을 내밀었다.
"운이 좋으시고만. 오늘 남자 손님이 적어서 쾌적하게 잘 수 있을 거요. 202호가 남자 방이니까 202호로 가쇼."
"남자 방이요?"
"그럼, 여자 방에 묵으시게? 그러다 총 맞수다. 괜히 넘보지 말고 잠이나 자쇼. 샤워할 거면 미리 말씀하시고. 의자 방이랑 침대 방 손님은 샤워하면 별도 요금 있으니깐."
어째 느낌이 안 좋다?
의자 방? 침대 방?
샤워는 별도 요금?
2층으로 올라가 202호로 들어갔을 때, 내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억?"
말 그대로 의자 방이다.
성당이나 교회에서 흔히 보이는 5인용 장의자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 눕거니 앉거니 해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으으, 뭐야."
"밤도 늦었는데...."
"잠 좀 잡시다!"
202호 불을 켜자마자 아우성이었다.
몇몇은 몸을 수그린 채 코를 골고 있었고.
침대? 베개? 이불?
하나도 없다.
심지어 난방을 안 했는지 1층과는 확연히 다른 찬 공기가 훅 얼굴을 할퀴었다.
진심이야?
지금 10월이라고.
이런 곳에서 잤다가는 감기 걸리기 딱 좋겠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직 잠들지 않은 몇 명.
내가 들어오자마자 예리한 눈길을 던지는 중이다.
왜 그러는지 이제는 안다.
나는 퇴근길이라 양복을 입고 있었고, 여기 이 사람들은 거의 노숙자 수준으로 다 떨어지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
역무원들이 나를 보고 2계급 시민이라고 부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잘 차려입은 옷.
파르라니 면도한 턱.
최근, 미용실에서 잘라서 정돈된 머리카락 때문에.
"실례했습니다."
바로 불을 끄고 돌아 나왔다.
쿵쿵쿵 심장이 뛰고 있었다.
'위험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2만 원이다.
하루 숙박하기에 큰돈은 아니지만, 적당한 모텔방 2시간 대실에는 충분한 돈이라고.
그런데 이따위 방을 줘?
프라이버시 보장도 안 되고, 침대도 없는 방을?
'잠깐.'
아까 뭐라고 했지?
의자 방, 침대 방, 특실, VIP실이 있다고 했지?
그럼 설마 침대 방도 침대만 있는 거 아냐?
뭐냐, 일본에 많이 있다는 캡슐 호텔처럼.
1층으로 돌아와 열쇠를 반납했다.
"방 바꾸겠습니다."
"흐."
사장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흐릿하게 웃는다.
"2계급 시민님이라 의자 방은 마음에 안 드셨나 봐? 뭐, 나야 고급 방 나가면 좋지. 뭘로 드릴까? 특실? VIP실?"
"차이점이 뭡니까? 침대 방부터 설명해 주세요."
"간단하요. 침대 방은 다인실이고 8인 1실이요. 가격은 5만 원이고."
게스트 하우스나 도미토리 같은 종류라는 거네.
그딴 걸 5만 원이나 받아?
에라이.
"특실부터 1인실이지. 특실에는 샤워실이랑 화장실이 딸려 있고, VIP실에는 욕조와 미니 냉장고 추가요. 말 그대로 VIP를 위한 공간이지. 이런 최고급 객실을 갖고 있는 건 이 근방 모텔 중에선 우리 모텔밖에 없어."
사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듣고 있는 나로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뭐? 특실에 샤워실 겸 화장실?
VIP실에는 욕조에 미니 냉장고?
장난하나.
월풀 욕조 어디 갔냐?
스타일러랑 최신식 컴퓨터, OLED TV는?
요즘 모텔들 시설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
"하...."
가격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특실 10만 원]
[VIP실 20만 원]
사장이 카운터 옆에 단 표지판을 톡톡 두드렸기 때문에.
기본 모텔방만도 못한 곳에서 자는 데 20만 원을 내놓으라고?
원래 같았으면 7만 원, 아니 6만 원이면 떡을 쳐!
20만 원이면 특급 호텔 중에 좀 저렴한 곳 찾으면 충분히 자고도 남겠다.
"하아...."
한숨 한 번 길게 내쉰 후 지폐 몇 장을 건넸다.
신사임당 셋, 세종대왕님 셋.
처음에 의자 방 가격까지 치면 20만 원.
"VIP실로 하나 주세요."
"흐흐흐! 아무렴요! 시민 나으리의 품격에 어울리는 곳은 VIP실밖에 없지요! 자, 여기 있습니다. 안에서 잠가 놓으면 저도 못 들어가니까 안전하고 편한 밤을 보내십쇼!"
돈을 썼다고 말투까지 바뀌었다.
내가 무심히 열쇠를 받아 드는 찰나, 사장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런데 혼자십니까? 긴 밤이 적적하실 것 같은데.... 어떻게, 이쁜이 몇 명 불러 드릴까요? 팁만 적당히 꽂아 주면 아주 화끈하게 봉사할 애들입니다."
"됐습니다."
여자는 무슨 여자.
단칼에 거절하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편안한 밤 보내십쇼!"
사장이 카운터에서 나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이상할 정도의 과잉 친절.
현금으로 20만 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심각한 태세 전환.
나는 배 한쪽이 꼬이듯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문 잘 잠가야겠다.'
어쩌면, 어쩌면....
오늘 밤은 늦게까지 잠들지 말아야 할 수도 있겠다.
단순한 기우일 수도 있지만 이미 한 번 된통 당했잖아?
팔씨름남한테.
최대한 의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지.
[5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VIP실이 있는 최상층에 도착.
거기서 나를 반기는 것이 있었다.
어느새 사라진 흑금빛 기둥.
대신 기둥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나타난 어떤 것.
[마]
글자였다.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검은색 글자.
그것이 황금빛 눈꽃 입자를 왕관처럼 두른 채.
조용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3화 이상한 서울 (2)
저거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었다.
그냥 보는 즉시 뇌에 개념이 주입된 느낌이었다.
"후우."
잠시 망설였다.
팔씨름남이 안배한 장치다.
기연이며 보정이다.
저 글자에 접촉하는 게 나한테 과연 이득이기만 할까?
'어쩔 수 없어.'
방법이 없다.
이 이상한 세상은 원래 세계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눈빛만 봐도 알지.
역무원도 노숙자도 모텔 사장도 원래 세계였다면 뉴스에나 나올 흉악범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언제든 수틀리면 칼을, 아니 총을 쏘고도 남을 분위기.
그런 세상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원래 세계에서처럼 평온하게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나는 내 말라깽이 몸과 가냘픈 팔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 해야 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팔씨름남이 마련했을 기연, 아마도 초자연적인 힘 말고는 내가 생존할 길이 안 보인다.
나는 이를 갈며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래.
지금은 따라 준다.
휘둘려 준다.
하지만 두고 봐라.
언젠가는 팔씨름남, 그 새끼 얼굴에 찰지게 주먹을 날려 주고 말 테니!
그렇게 다짐하며 한 발짝 내디뎠다.
글자와의 거리 5미터.
3미터, 2미터, 1미터.
그리고... 접촉.
파아앗!
"헉!"
빛과 함께 강렬한 자극이 나를 덮쳤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전기 감전?
인두 고문?
얼음 송곳?
찌릿하고 뜨겁고 차가운 감각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글자와 접촉한 부분부터.
척추를 쭉 따라 질주하고 다시 심장으로, 또 뇌로 치솟는다.
그러나 고통은 잠깐이었다.
아픔은 금방 가시고 시원하면서 상쾌한, 쾌감에 가까운 감각이 내 신경계를 자극했다.
"허억,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였지?
글자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대신 예민해진 감각이 나를 반겼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가 낱낱이 보인다.
아래층에서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모텔 특유의 찌든 냄새가 코를 찔러 온다.
여기에....
세상에 부유하는 어떤 것들이 느껴진다.
무형의 존재.
아니, 힘.
에너지 그 자체.
그렇게 불러야 할 어떤 것들이 물결처럼 밀려와 내 피부 표면에서 뭉그러지는 중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문양.
[마□□]
아니, 파편화된 단어.
[마] 글자는 사라졌다.
대신 내게 들어왔다.
기이한 감각을 일깨우면서.
또, 뜻 모를 속삭임을 남겨 놓으면서.
"하...."
참 신기한 느낌이다.
충만감과 허탈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새로운 힘이 내 전신을 활력으로 가득 채우는 한편,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본능의 외침이 내 목을 갈망으로 타오르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써 보려다 말고 멈칫했다.
위이이잉.
아주 작은 기계음.
천장에 매달린 CCTV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보여 주면 안 되지.'
내가 정확히 무슨 능력을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의심이 현실이 된다면, CCTV에 정보를 노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철컥. 기이잉.
나한테 배정된 VIP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
VIP실이라고 하기엔 허름한, 원래 세계 모텔 기본 방보다 작은 방에 들어가자 두 번째 글자가 둥둥 떠 있었으니.
[력]
'마력?'
마력으로 시작하는 세 글자 단어?
그게 뭐가 있지?
문을 닫고 두 번째 글자와 접촉했다.
두 번째라 그런지 더 쉬웠다.
통증은 줄었고 쾌감은 강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또 기이한 힘이 체내 특정 지점에 각인되는 것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후아아."
달뜬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참을 수가 없었다.
넘쳐 나는 힘을 손에 집중하자, 짙고 짙은 검푸른 색이 밤바다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건...."
마력이다.
나도 모르게 주입된 지식이 그렇게 속삭였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아직은 아무것도 못 한다.
지금처럼 마력광을 방출하는 것이 전부.
마력광을 발한다고 힘이 강해지거나 특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력광을 내려다보았다.
'하나가 부족해.'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심장부터 팔에 이어지는 경로.
거기에 글자처럼 마력 회로가 박혀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요소요소가 끊어져서 마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즉, 단어를 완성해야 마력 회로도 완성된다.
'마지막 글자는 어디 있지?'
흑금빛 기둥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묘한 기척이 나를 간지럽혔다.
여기 최상층은 아니고....
조금 더 위, 천장을 통과하고 더 위쪽에서.
고고한 존재감이 흐물흐물 웃음 짓고 있었다.
'옥상?'
바로 움직였다.
다행히 비상문이 열려 있었다.
다 녹슨 철문을 통과해 옥상으로 나오자, 녹색 방수 페인트 위 흑금 글자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이했다.
[탄]
세 글자를 합치면 그 유명한 마법이 된다.
저벅저벅.
글자를 향해 걸어간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심장이 아니다.
마력 회로가 저릿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어서 하나로 만들어 달라는 듯.
얼른 저걸 먹고 자기들과 합체시켜 달라는 듯이.
글자 앞에 멈췄다.
파앗! 파앗! 파앗!
마력 회로와 감응하며 글자 또한 검은빛 황금빛을 뿌린다.
과연 이걸 먹는 게 잘하는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올라타는 것이 아닐까?
계속 의심이 든다.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등골을 간지럽힌다.
"젠장."
하지만 말이다.
치트키 없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취직해서 먹고 살 수 있겠어?
주민 등록도 안 된 이계 체류자.
주머니에 있는 것이라곤 현금 510만 원이 전부인데?
다시 생각하고 거듭 고민해도 이게 유일한 길.
결단을 내리고 손을 뻗었다.
파아앗!
번져 오는 빛.
세상이 무너진다.
인지가 파괴되며 마력의 격류가 휘몰아친다.
"흐읍!"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짜릿하도록 치솟는 쾌감과 급변하는 주위 광경 속에서 갈피를 못 잡을 뿐.
구웅. 구우우웅.
둔중하고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무너지는 세계 속.
거대한 탑이 세계의 지붕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어찌나 높고 거대한지 5층 이상은 무지갯빛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을 지경.
탑 외벽은 몽땅 책장이었다.
거인보다 큰 책장이, 역시 거인보다 큰 책을 품고 정렬해 있었다.
덜컹, 덜컹.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치던 거탑이 드디어 멈췄다.
외벽 책장에 꽂힌 책들이 일제히 덜그럭거린다.
2층 이상은 안 보이지만, 1층은 그리 높지 않아서 책장 표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
[■■]
[■■■]
이렇게 표시된 책 제목.
일부러 가린 듯한 흑금 문양.
저걸 걷어 내야 책 제목을 알지 싶다.
쿠웅!
그중 유난히 크게 진동하는 책.
저절로 펼쳐져서는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어, 책에서 쏟아지는 흑금 문양들.
책이 쪼개진다.
한 움큼 한 움큼 여섯 개로 나뉘고, 다섯 개는 그 자리에 남아 있는데 하나만 내 앞으로 꾸물꾸물 날아왔다.
이어 어떤 단어로 변형.
[마력탄]
내가 수집한 흑금 글자의 조합.
그러자 새롭게 새겨진 마력 회로가 반응했다.
서로 이어지기만 했지 아직은 따로 놀던 세 마력 회로가 공고하게 결합한 것.
우우웅...
그리고 낮은 진동.
청량하고도 열띤 힘이 새로운 마력 회로에서 피어났다.
힘이 신경계를 따라 질주하여 대뇌에 꽂힌다.
동시에 직접 주입되는 개념, 지식, 경험의 총체.
"아...."
임무를 마친 책 파편이 내게서 빠져나왔다.
대기하던 다섯 파편과 합쳐진 다음 거대 책장으로 복귀.
퍼엉! 퍼엉!
이것은 축하일까 조롱일까.
흑금색 불꽃이 마천루 책장 위에서 가득 번졌다.
자연히 나도 시선을 올리게 된다.
저 하늘 위, 흑금색 은하수가 도도히 흐르는 곳으로.
"어어?"
그리고 목격했다.
별처럼 무수히 많은 초월적인 자들 위.
지고적 신성함과 심연적 불길함을 품은 13좌 위.
불가할 정도로 광대한 세 군주 위.
어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존재가 있어 날 내려다보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혼돈의 권좌?
위대하고 거룩한 아버지?
절대적으로 존숭받아 마땅한 성위?
확실한 것은 하나.
보는 순간 숨이 막혀 오면서 정신이 짜부라지기 시작했다는 점.
잠시 후, 존재가 스스로 퇴장해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알고 싶지 않다.
"쿠억! 커허억!"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속을 게워 내고 있었다.
먹은 게 없어 나오는 거라고는 누런 위액이 전부.
따끔하고 시큼한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흐흐흐...."
웃음이 나온다.
"X발 새끼가."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적당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나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밥벌이하고 있었는데!
"으드득."
새삼 이를 갈게 된다.
날 이 이상한 세계로 데려온 팔씨름남이 생각나서.
세계 자체가 위험한 걸로 모자라서, 저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는 곳에 날 납치했다고?
"두고 보자."
정말 죽빵 세게 갈겨 줘야지 당하고는 못 살아.
나는 다시 한번 다짐을 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영 거탑은 정체불명 존재의 퇴장과 함께 사라진 다음.
이미 모텔 옥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디...."
어쨌든 할 일은 해야지.
"후읍."
심호흡과 함게 마력을 그러모았다.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운용.
다양하고 다채로운 운용을 할 수는 없다.
내가 마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
손을 들었다.
검푸른 마력광이 손바닥 중심에 모여든다.
심장부터 팔을 거쳐 손으로 가는 마력 회로가 글자처럼 망막에 투사되고 있다.
뇌에 입력된 개념, 지식, 경험 그대로.
[마력탄]
내가 처음으로 얻은 마법.
투앙!
발동시켰다.
검푸른 마력탄이 야구공처럼 뛰쳐나간다.
허공을 조준한 탓에 수 미터를 비행한 후 그대로 흩어졌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마력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위력은 성인 주먹질 정도.'
약한 거 아니냐고?
초짜 마법사한테 뭘 바래.
뇌에 각인된 정보에 따르면 마력탄은 1레벨 마법조차 못 된다.
0레벨 마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간단 마법술?
환영 거탑에서 본 책을 완성해야 1레벨 마법의 면모를 보여 주겠지.
대신 생각의 속도로 날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
나는 혀만 굴려서 짧게 읊조렸다.
'나는 이제 마법사야.'
마법사!
살짝 가슴이 뛰었다.
거, 남자라면 누구나 해 보는 상상이 있잖아.
전설의 용사든 마법사든 돼서 악당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한 뒤 잘 먹고 잘 사는 상상.
나는 멸치인 탓에 그 대상이 주로 마법사였다.
웹소설을 봐도 마법사 주인공을 선호했고, 판타지 영화를 보면 마법사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곤 했지.
'침착하자.'
나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심장을 안정시켰다.
마법사가 되었다고 일이 다 해결된 건 아니다.
힘이 부족하다.
마력과 마법, 둘 다 심각하게 모자란다.
괜찮아.
해결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글자.'
단순한 글자가 아닌 마법 글자.
기본적으로 마력을 품고 있으며, 단어를 완성하면 마법을 선사한다.
그럼 간단하지.
글자를 주구장창 모으면 된다.
어디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흑금 기둥들에서.
'많기도 많네.'
근처에 보이는 흑금 기둥만 수십 개다.
어떤 것은 움직이고, 어떤 것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서울 전역으로 확장하면 수백 개는 되겠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어떨까?
아시아는? 지구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중에는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나 싶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원래 세계에서는 꿈도 못 꿨던 세계 여행이다.
일본 한 번, 베트남 한 번 가 본 게 내 세계 여행 커리어의 전부.
마법사로서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가면 그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물론, 팔씨름남을 패 주겠다는 목적을 잊어선 안 되겠지만.
'좋아.'
해보자고.
누가 이기는지.
끝에 가서 누가 웃는지.
"흐아아."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모텔 특유의 딱딱한, 원래 세계보다 더 딱딱한 침대가 날 받아 냈다.
몸이 무겁다.
그러나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잠을 청하려고 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히죽대며 날 훔쳐보던 모텔 사장의 눈빛이 생각나서다.
'기우면 좋겠는데....'
하지만 강렬한 육감이 날 움직이게 만들었다.
단어를 완성하고 마력 감각을 개방한 탓일까?
예지에 가까운 확신이 조금 전부터 내 등골을 핥아 댔다.
'정면 승부는 불가능해.'
내 가냘픈 주먹으로 때려 봤자 웃고 말겠지.
마력탄도 마찬가지.
세 글자짜리 빈약한 마력량으로는 세 번이 한계다.
옥상에서 실험을 위해 한 번을 썼으니 두 번으로 끝.
무기를 찾아야 한다.
'다리미 없어?'
호텔에는 다리미가 비치된 경우가 왕왕 있다.
아쉽게도 여기 모텔엔 다리미가 없었다.
병맥주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없고....
그러다 우연처럼, 스테인리스 커피포트가 눈에 들어왔다.
"빙고."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래도 물을 가득 채우면 아쉬운 대로 둔기처럼 쓸 수가 있다.
적당히 물을 채운 다음 침대를 정돈했다.
기본으로 주는 큼지막한 베개 넷.
그것들을 밀어 넣어 사람 모양으로 만들고, 이불을 높이 끌어 올려 사람이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게 해 놓은 것.
어둠 속에서라면 영락없이 속아 넘어가지 싶다.
여기까지 하고 좁은 옷장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품에는 물 채운 전기 포트를 끌어안은 상태.
옷장 틈으로 방 안을 주시하는 한편 마력 감각을 끌어 올렸다.
공기 중의 마력이 느껴지며 방 안은 물론 벽 너머 다른 방과 복도 상황까지 느껴진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는데....'
간절히 바랐다.
단지 내 의심병이길 절실히 기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새벽 3시 반.
반쯤 졸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게 되었다.
끼이이익.
마력 감각을 동원한 탓에 들린다.
비상계단 철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열린 문을 통해 우락부락한 남자, 모텔 사장이 들어오는 것도 느껴지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마력 감각으로 더듬은 모텔 사장의 두 손.
거기 들린 길쭉한 금속 막대기 때문에.
'미친 새끼가!'
총.
모텔 사장이 총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4화 이상한 서울 (3)
사실 당연한 거다.
완전 무장 하고 있던 역무원들.
신대방역에서 울리던 총성.
저마다 칼을 눈빛으로 품고 있던 사람들.
원래 세계 미국도 여차하면 총이 튀어나오는 판국에, 이 이상한 세상의 강도가 총 한 자루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침착하자.'
버릇처럼 입속으로 읊조렸다.
북처럼 쾅쾅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오로지 문밖에만 집중.
더듬이처럼 뻗어 나간 마력 감각을 통해 모텔 사장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스윽, 스으윽.
모텔 사장은 조용히,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아예 신발도 안 신은 것 같다.
발소리마저 걱정됐던 모양.
그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르는 한편 마른침을 삼켰다.
철컥. 기이익.
잠금장치 따위 다 소용없었다.
걸쇠까지 걸어 놨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 단번에 풀린 것.
아마 내가 모르는 장치가 있겠지.
더욱 긴장해서 몸을 움츠릴 때, 마침내 모텔 사장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커먼 형체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모텔 바닥에는 싸구려 양탄자가 깔려 있다.
양탄자 때문에 맨발인 모텔 사장은 아무 소리 없이 침대에 접근할 수 있었다.
꿀꺽.
마른침이 또다시 목구멍을 넘어갔다.
천둥처럼 울린 소리에 잠깐 긴장.
다행히 모텔 사장은 내 침 소리를 듣지 못한 성싶었다.
내가 있는 옷장 앞을 지나쳐 침대 앞에 버티고 섰다.
"흐...."
당연히 침대 위 사람 형체는 미동조차 없다.
복도 조명까지 꺼 놓은 탓에 방 안은 완전한 칠흑의 구덩이.
모텔 사장은 저 사람 형체를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속이지 못하면 죽는 건 내가 될 테니.
스윽.
모텔 사장이 총을 들어 올렸다.
쌍열 산탄총.
탄창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약실에 직접 장전하는 더블배럴 샷건.
총이 사신의 낫처럼 사람 형체 위에 드리워졌다.
"원한은 갖지 말라고. 유령도 되지 말고."
모텔 사장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잘 가셔. 기부 감사히 받겠수다."
슉!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쌍열 총구 앞에 달린 소음기.
녹색 마력광을 발하며 총성을 흡수하고 있었다.
거의 영화에서나 보던 소음기 수준으로 총성을 줄여 준 것.
슉!
2연발.
즉, 장전된 총알을 다 쏜 것.
쏠 때마다 구멍이 폭폭 뚫리고 솜털이 치솟았다.
그런데 그게 뭔가 이상해 보였던 걸까?
"응?"
모텔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내 몸을 확 낮추고, 산탄총을 꺾어 탄피 배출.
호주머니에서 총알 두 개를 꺼내 장전하려고 한다.
안 돼!
눈치챘다!
"개새끼야!"
꽝!
즉시 뛰쳐나갔다.
왼손으로 옷장 문을 열어젖히고 몸을 날린다.
오른손에는 물 담긴 전기 포트가 들려 있다.
모텔 사장과의 거리는 겨우 수 미터.
단숨에 덮치려고 했는데....
모텔 사장이 장전을 완료했다.
냉혈 동물 같은 눈이 나를 주시한다.
입이 삐뚜름한 비소를 짓고 있다.
명백히 깔보는 눈빛.
잠깐은 놀랐지만 넌 결국 나한테 안 돼, 속삭이는 듯한 눈이 어둠 속에서도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잘 가라."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모텔 사장이 아직 장전 중이던 그 시각.
방아쇠에 손을 넣기 직전.
발동시켰던 마법이 한발 앞서 모텔 사장을 후려갈겼다.
퍼억!
"컥!"
마력탄은 정확히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효과가 있었다.
모텔 사장의 몸이 핑그르르 돌아가고, 어깨가 젖혀지면서 산탄총을 놓친 것.
슉!
총알이 발사되어 천장에 꽂혔지만 괜찮다.
모텔 사장은 벽까지 밀려났고, 산탄총은 화장실 쪽으로 떨어졌으니까.
"마법사? 아니, 마술꾼?"
모텔 사장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나는 고함을 치며 그대로 덤볐다.
"죽어!"
물을 채운 전기 포트는 훌륭한 흉기.
쌔액 공기가 갈라지며 모텔 사장에게 내리꽂힌다.
"이익!"
모텔 사장도 그냥 당해 주지는 않았다.
악에 받친 얼굴로 왼팔을 내민 것.
전기 포트는 얼굴 대신 그 왼팔에 꽂혔다.
퍽!
뭔가 부러지는 감촉이 전해졌다.
모텔 사장의 왼팔이 축 늘어졌다.
"으어억! 내 팔!"
고통에 차 울부짖는 모텔 사장.
그러나 기가 죽질 않는다.
마력 감각으로 보는 모텔 사장의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체온도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거기서 뿜어지는 감정은... 분노.
모텔 사장이 상처 입은 맹수처럼 고함을 질렀다.
"개새끼! 죽여 버린다!"
크게 내지르는 오른 주먹.
아까 오른쪽 어깨는 심한 부상이 아니었단 얘기.
"헉!"
가까스로 피해 냈으나 속임수.
모텔 사장은 날 쫓아오려면 쫓아올 수 있었다.
키도 덩치도 우월하니까.
그런데 날 공격하는 대신 한쪽으로 몸을 날렸다.
다름 아닌 화장실을 향해.
화장실과 침실 사이 공간, 거기 떨어진 산탄총을 향해.
"안 돼!"
쌍열 산탄총이다.
2발을 장전했고 1발이 발사됐으니 1발이 남아 있다.
모텔 사장이 산탄총을 거머쥐었다.
"윽!"
왼팔이 아픈지 신음을 뱉지만 전의는 여전히 선명하다.
마력 감각으로 보는 모텔 사장의 눈빛은 놀랍도록 차가웠고, 한편으로 전신의 피가 미친 듯이 빠르게 돌고 있었다.
세상이 느리게 움직인다.
모텔 사장이 몸을 돌리기 시작한다.
완전히 날 향한다면 그 즉시 총성이 날 찢어 놓겠지.
두근!
심장이 뛴다.
얼마나 크게 뛰는지 북소리가 고막을 두들기는 것 같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송곳 같은 긴장감이 뇌리를 꿰뚫는다.
죽는다!
이대로면 죽는다!
넋 놓고 있다간 죽고 만다!
본능적으로 마력을 쥐어짰다.
세 글자 마력을 전부, 최후의 한 방울까지 전부.
어쩌면 그보다 더.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잠재되어 있던 마력까지 몽땅.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 상황 따위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된다.
마력 감각도 일순 꺼지며 오로지 한 점만이 남는다.
송곳 구멍 같은 일 점.
그 안에는 오로지 모텔 사장만 남아 느릿느릿 몸을 돌리고 있었다.
손을 들었다.
마력을 방출한다.
내 몸에 새겨진 마력 회로대로 쏘아 낸다.
과아앙!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환청?
자동차 엔진을 공회전시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 대탈주.
내 모든 마력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검푸른 마력탄이 발사된다.
시험 삼아 옥상에서 발사했던 마력탄보다.
싸움을 시작하면서 발사했던 마력탄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
어쩌면 그보다 더 크고 강한 마력탄이.
"뭐...."
모텔 사장의 눈이 커진다.
동공이 확대된다.
이어서 얼굴 가득 덧칠되는 두려움의 표정.
마력탄은 정확히 그 위에 꽂혔다.
뻐어억!
처음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게 찰진 타격음.
코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었다.
모텔 사장이 피를 뿌리며 고꾸라진다.
"허억, 허억, 허억."
나는 몸을 꺾고 숨을 몰아쉬었다.
쓰러진 모텔 사장은 전혀 움직이지를 않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때, 죽지는 않고 기절한 것 같다.
"끄으으으...."
그것도 옅은 신음을 흘리면서.
"허억, 허억, 허억."
마력을 다 소모한 탓일까?
숨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가슴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흥분이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아, 머릿속 심지가 허옇게 타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침착하자. 침착해. 김도현, 침착하자.'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비로소 심장 박동이 가라앉으며 열기가 가신다.
겨우 식은 머리.
나는 차게 눈을 빛내며 모텔 사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쩌지?'
우선 산탄총을 뺏었다.
약실에는 총알이 1발 남아 있다.
남은 것은 이 총알의 향방.
"으으으으...."
모텔 사장이 신음을 흘린다.
손가락 끝이 움찔거리고 있다.
서서히 깨어나는 중.
'어쩌지?'
다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경찰에 넘겨?
아서라.
그런 건 원래 세계에서나 통한다.
이 세상 경찰들이 어떤 성향일지도 모르고, 법적 절차에 들어가 봐야 이계 체류자인 나만 당할 공산이 크다.
'그럼....'
답은 오로지 하나.
나는 처음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죽여야 하나?'
그렇다.
죽여야 한다.
이 산탄총으로 모텔 사장을 끝장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하지만 어떻게?
살면서 싸움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나다.
싸움이라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난치다 치고받은 게 전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니 중학교 때부터도 다른 사람에게 주먹 한 번 날려 본 적이 없다.
닭 모가지를 비틀라고 해도 못 비틀 인간.
돼지 도축하는 동영상만 봐도 기겁하던 인간.
그게 나였다.
그런 나한테 사람을 죽이라고?
절대 못 한다!
"으으으음."
하지만 카운트다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텔 사장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한다.
깨어나려는 것.
곧 모텔 사장이 눈을 뜬다.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회유, 협박....
그런 말랑말랑한 수단이 이 남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쯤,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까.
'...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뿐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까?
적당히 용서하고 넘어갔는데 모텔 사장이 작정하고 나를 노린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갱단들을 고용해서 날 암살하려고 하면?
뒷돈을 찔러주고 경찰들이 날 잡아가게 한다면?
눈을 질끈 감았다.
환영 거탑을 상기했다.
그 위에서 날 굽어보던 존재를 생각했다.
그리고 팔씨름남을, 오만하게 날 내려 보던 눈깔을 기억했다.
놈에게 한 방 먹여 주려면 여기서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
겨우 모텔 사장 같은 시시한 악당에게 끌려다니다간 죽도 밥도 안 될 테니.
몇 번을 거듭 생각해도 이게 맞다.
여기서 끊고 나아가야 한다.
총을 들었다.
모텔 사장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살짝 왼쪽.
정확히 심장이 있을 지점에.
"허어억!"
모텔 사장이 깨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고, 핏발 선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도 검푸른 안광을 뿜어내는, 지독히 마법사적인 내 눈동자.
나는 마력 감각을 통해 나마저도 외부적 시점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사, 살려...."
최후를 직감한 것일까.
모텔 사장이 입을 열고 목숨을 구걸하려 한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겼다.
내 마음속 방아쇠를 먼저.
두 번째로 당겼다.
현실의 산탄총 방아쇠를.
슛!
낮은 총성이 모텔 사장을 후벼 팠다.
장전된 것은 슬러그탄.
대구경 총탄이 갈비뼈와 심장, 폐를 한꺼번에 부숴 놓았다.
일그러지는 모텔 사장의 얼굴.
천천히 머리를 떨어뜨린다.
가슴에 난 구멍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본다.
"저주한다...."
유언 대신 남기는 저주.
"저주한다.... 죽어서도 널 저주하겠다! 널 저주한단 말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는 모텔 사장.
피가 빠르게 번졌다.
뻘건 웅덩이에 몸과 얼굴을 함께 묻은 채, 모텔 사장은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그걸 보자 실감이 든다.
사람을 죽였다는 현실.
내 손으로 쏴 죽였다는 사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우웨엑!"
욕지기가 치밀었다.
눈을 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하지만 뭐 나오는 게 있겠나.
먹은 게 없는데.
시큼한 위액만 꽥꽥 토해 내며 신음할 뿐이다.
"우우욱! 우어어억!"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머릿속에서 기억이 강제로 재생되고 있다.
당겨지는 방아쇠.
둔중한 반동.
퍽, 꿰뚫리는 육체.
치솟는 피.
흐르는 피.
뿌려지는 피.
피, 피, 피!
"우에엑!"
다시 욕지기가 치민다.
나는 치를 떨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마법 소음기의 성능은 확실히 굉장했다.
최상층 손님은 나뿐이니, 다른 손님들은 잘 모르고 있겠지.
하지만 운이 좋아도 내일 아침까지다.
다른 직원이 출근하면, 또 피 냄새가 본격적으로 퍼져 나가면 모텔 사장의 죽음은 금방 알려지겠지.
그 전에 자리를 떠야 한다.
최대한 뒷수습을 해서.
그러려면 이렇게 구토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움직여야 한다.
지금 당장!
"후우우."
여전히 역겨웠다.
지금도 속이 울렁거렸다.
겨우 안정시키고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검푸른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흑금 기둥을 따라가는 것?
보류다.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
이 세상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를 할 것 같진 않지만 모르는 일이니까.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좋아.
'정보가 필요해.'
정보....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침실로 돌아가 모텔 사장의 주머니를 뒤졌다.
피 냄새가 역해서 당장 토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목표했던 걸 찾았다.
스마트폰.
다행히 지문 잠금 방식.
치를 떨며 잠금을 풀었다.
그 후 빠르게 검색 시작.
[경찰]
[구로경찰서]
[공권력]
[치안 안 좋은 곳]
[갱단]
이런 단어를 넣어서.
생각보다 많았다.
또, 이 세상 경찰은 생각보다 무능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여기가 무슨 멕시코 오지라도 돼?'
1계급, 2계급 구역을 제외하곤 갱단들이 서울을 지배하고 있었다.
순찰도 갱단이 돌고 사건이 터져도 갱단이 해결한다고.
물론 경찰이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가끔 대규모 사건이 터지면 경찰이 초인들을 앞세워 대규모 작전을 펼쳤고, 그러면 해당 구역 갱단은 반드시 초토화되었다.
우열이 분명한 적대적 공생.
이 세상 경찰과 갱단의 관계였다.
'이 정도면 괜찮아.'
평소 경찰은 뒷돈만 받아먹지 갱단 구역에 굳이 손을 대진 않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갱단 본부에는 더 그랬다.
고층 빌라 벽을 다 이어 놓아서, 하나의 성채처럼 만든 초대형 구조물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이 세상에서는 빌라성채라고 부르는 곳.
마침 근처에 악명 높은 어떤 갱단의 빌라성채가 있었다.
이 빌라성채가 있는 곳은 내게도 익숙했다.
원래 세계에서는 대림중앙시장이 있는 지점이었으니까.
또, 옥상에서 미리 파악해 뒀던 흑금 기둥의 위치와도 정확히 겹쳤다.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다.
마법 글자도 새로 주울 수 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가자.'
산탄총을 챙겼다.
총알도 최대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스마트폰은 아쉽지만 패스.
혹시 모를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저벅저벅.
어느새 새벽.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그 날카롭도록 차가운 가을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는 어둑한 빌라성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5화 빌라성채
제멋대로 쌓아 올린 블록 집합 건물.
빌라성채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이상하게도 생겼네.'
통일성도 균질성도 없다.
난립한 건물의 탑이 빽빽하니 들어차 있다.
어지럽게 박힌 간판에 때가 잔뜩 낀 외벽, 후줄근하게 휘날리는 빨래 무더기를 보자니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다.
홍콩의 구룡채성을 연상케 하는 외형.
규모는 훨씬 더 컸다.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좌우를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높이도 모든 건물이 최소 20층은 넘어갔고.
중심부에는 50층 이상 마천루가 있어 하늘을 찌를 것만 같다.
'여기가 빌라성채.'
갱단, 망치파의 힘의 근원.
여기 사는 사람들은 세입자이면서 사람 방벽 역할을 한다.
잡생각은 그만.
빌라성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시선이 집중된다.
떡볶이 파는 노점상도, 편의점 알바도, 담배 태우던 택시 기사도 은근슬쩍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왜?
내가 등에 짊어진 산탄총 때문이다.
급히 모텔에서 도망치느라 침대보로 둘둘 감아 놓은 게 전부.
살짝 봐도 총이라는 걸 알 수 있으니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
"크흠!"
빌라성채 입구에서 얼쩡거리던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섰다.
왼쪽 팔다리가 모두 의수, 의족.
심지어 얼굴 오른쪽은 통째로 강철 의체.
공포 게임 크리처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용모였다.
"어딜 가시나?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사람도 망치파 소속일까?
나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입자가 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으응? 세입자?"
의체남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런 곳에서 사실 양반은 아닌 것 같은데?"
"사정이 있습니다."
"흐음, 사정이라, 흐음."
여전히 내 옷차림은 정갈하고 단정하다.
모텔에서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였음에도 그렇다.
3계급 구역, 빌라성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
이 세상에 떨어진 지 8시간도 안 지났지만, 나도 서서히 이 세상의 법칙을 깨닫고 있었다.
여기서 필요한 게 하나 있지.
공손한 태도로 신사임당 한 장을 의체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세입자 담당하시는 분께 안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오호! 이거 세상 사는 법 아는 양반이구만!"
의체남이 지폐를 확 낚아챘다.
햇볕에 지폐를 비춰 보더니 입을 함지박처럼 크게 벌리며 웃는다.
덕택에 상어 이빨 같은 기괴한 치아가 드러나서, 나는 애써 표정 관리와 시선 관리를 해야 했다.
"좋지! 기꺼이 안내해 드리리다. 1계급이건 2계급이건 3계급이건, 저주받고도 남을 4계급이건 일단 여기 들어오면 다 평등한 세입자거든!"
"감사합니다."
"나만 따라오슈! 흐흐흐!"
의체남은 신사임당 지폐를 담배 궐련처럼 돌돌 말았다.
그러더니 의체 얼굴 일부를 젖히곤 거기다가 꽂아 버린다.
철컥, 소리를 내며 수납되는 5만 원권 한 장.
내가 눈만 끔뻑거리자 의체남이 날 돌아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어때? 내 지갑이?"
"어.... 힙하네요."
"흐흐, 그렇지? 당신 미적 감각이 좀 있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의체남이 팔랑팔랑 소녀처럼 나비처럼 걸으며 나를 인도했다.
칙, 척, 철컥.
칙, 척, 철컥.
의수 의족이 삐걱거리며 기묘한 박자를 만들었다.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에 맞춰서.
나는 또다시 애써 표정 관리, 시선 관리를 했다.
이 사람 묘하게 텐션이 높다?
겉보기에는 완전 괴물처럼 생겼으면서.
"아오, 또 시작이네."
"저 인간 왜 또 저래?"
"혼자 신났네, 혼자 신났어."
"어디서 삥이라도 뜯은 모양이지?"
"저기 봐. 2계급이야."
"진짜네.... 2계급이 여긴 왜? 총까지 가지고."
"설마 망치파를 토벌하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경찰도 망치파 못 건드리는 거 몰라?"
텐션 높은 것은 의체남뿐.
누더기 성문 같은 입구를 통과하자 성채의 민낯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빼곡한 건물에 막혀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거리.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축축한 길바닥.
곰팡이가 외벽과 천장 곳곳에 피어 있다.
사람들의 눈빛은 축축하게 죽은 상태.
길거리에 널브러진 사람도, 거적때기 건물 안에서 나를 훔쳐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죽은 도시.
곰팡이의 거리.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기야!"
한참 내부로 들어간 뒤.
분위기가 다른 거리가 나왔다.
우선 깨끗했다.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지 건물 외벽은 물론 도로 구석까지도 청결했고.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붉은 간판 건물.
[망치 빌라 관리 사무소]
커다란 강철 망치가 간판을 관통하듯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
빌라성채 중심 50층 마천루에 흑금 기둥이 보였다.
'저기에 글자가 있구나.'
수집은 나중에.
우선은 이곳에 익숙해지는 게 급선무다.
의체남이 내게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 망치파 단원들이 상주하는 곳이거든. 누구라도 소란 피우면 바로 뚝배기 깨지는 거야. 뭔 말인지 알지?"
"충고 감사합니다."
"흐, 그리고 말이야. 계약하고 나오면 어때? 그때도 내가 안내해 줄까? 여기 구조가 복잡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아가기가 쉽지 않거든."
의체남은 노골적으로 내 호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인의 적당한 도움은 나한테도 필요했으니까.
"좋습니다. 이따 안내해 주시면 한 장 더 드리지요."
"흐! 역시 호쾌해! 흐, 반해 버릴 것만 같아!"
"그건 좀...."
"흐흐흐. 그럼 얼른 처리하고 나오라고. 난 형씨가 준 걸로 약담배 한 대 태워야겠어!"
근처 가게로 달려가는 의체남.
담배 비슷한 걸 사서 코에 꽂더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를 향해 한 대 필텨? 하고 손짓하지만 거절.
관리 사무소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쿵쿵쿵.
"계십니까?"
"들어오쇼."
거친 목소리.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너구리 소굴 같은 공간이 나왔다.
세상에,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워 대는 거야?
연기가 심각하게 쌓여 눈앞이 안 보일 지경.
"쿨럭!"
정말이지 머리에 털 나고 처음 겪어 보는 농도.
저절로 기침이 나왔다.
입을 가리고 기침하자, 소파에 앉아 있던 문신 덩치가 내게 시선을 던졌다.
"몸이 좀 약한가 봐?"
"그건 아닙니다만 기침이 나오네요. 쿨럭!"
"쯔쯔. 이러다 숨넘어가겠네. 어쨌든 얘기는 들었어. 사정이 있어서 세입자로 들어오고 싶다고?"
"예! 맞습니다."
의체남이 갱단원인지 아닌진 몰라도 정보원이긴 한 모양.
하긴 얼굴에 의체 박아 놓고 지갑으로만 쓰진 않겠지.
텅!
문신 덩치가 책상에 계약서와 인주, 볼펜을 늘어놓았다.
"읽어 보고 지장 찍어."
"예."
겨우 기침이 멎었다.
덩치 반대편에 앉아 계약서를 읽기 시작.
독소 조항이 주렁주렁 달려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필요한 내용만 딱딱 적혀 있었다.
하긴 여차하면 사람 방벽으로 써야 할 세입자다.
착취하다가 반란이 일어나면 갱단도 골치 아프지.
문신 덩치가 담배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보증금 제로. 월세 백만 원. 그게 기본이야. 더 넓고 더 깨끗하고 더 안쪽에 좋은 방으로 가고 싶으면 백오십이나 이백을 내야 해."
"이해했습니다."
"삼백짜리도 있고 오백짜리도 있지만 그건 우리 단원 추천이 있어야 한다는 점 명심하쇼. 월세는 구역장한테 내. 하루라도 밀리면 퇴거야. 밀릴 것 같으면 조용히 떠나."
"알겠습니다."
"지내는 동안 사고 치지 마. 사람 패면 우리도 널 팰 거고 사람 죽이면 우리가 널 죽일 거다. 좀 시끄럽고 더러워도 좋게 좋게 넘어가라, 이 말이요. 뭔 말인지 알지?"
"그럼요."
"좋게 좋게. 조용히 조용히. 이것만 명심하면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어. 알겠지?"
문신 덩치가 눈을 부라렸다.
다른 갱단원도 그랬다.
괴상한 강철 의수를 장착한 갱단원, 머리에 강철 가시를 박아 넣은 갱단원, 기관단총 다섯 자루를 저글링하던 갱단원....
그리고 저 뒤 상석.
책상에 한가로이 발을 올려놓은, 흐릿한 기파를 발하는 갱단원 역시도.
'초능력잔가?'
마력이 느껴진다.
여기 있는 갱단원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력탄을 수집한 나보다도 더 강렬한 마력.
그래서일까?
살짝 의식하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당장 고개를 조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난 정중하게 묵례할망정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저 정중하게.
적당히 예의를 차려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음...."
의외라는 시선을 던지는 문신 덩치.
나는 볼펜으로 내 이름을 적고 지장까지 찍었다.
[김도현 印]
덩치가 책상에서 열쇠를 꺼내 던졌다.
"H20 구역 3동 1905호야. 좀 시끄럽겠지만 버텨 보라고."
뭐지?
왜 이런 말을 하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어, 그래. 시민 나으리도 좋은 하루 보내고. 정 못 버티겠으면 백오십짜리나 이백짜리로 옮겨. 시민 나으리한텐 이백짜리도 불만스러울 거야."
나 원.
옷을 새로 사 입든지 해야지.
보는 사람마다 시민 시민 거리니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다.
밖으로 나오니 의체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열쇠를 보여 주자 얼굴이 찌그러진다.
"하필 거기야?"
"왜 그러세요?"
"거기 몇 달째 세입자 없는 곳이야. 거의 매주 한 명씩 들어가는데 사흘도 못 버티고 도망치는 곳이란 말이야."
"왜요? 귀신이라도 나옵니까?"
"귀신 나오면 차라리 낫지.... 할 수 없지. 사무소에서 거기 내줬으면. 가자고."
H20 구역은 빌라성채 최북단에 있었다.
여기가 빌라성채 외곽 구역 중에서는 명당이라고.
길 건너에 주민 센터와 초등학교가 있어서 그렇다나?
주민 센터가 있어 봤자 빌라성채에는 이 악물고 관심 하나 안 주지만.
"여기 19층이야."
역시나 후줄근한 건물.
어?
그런데 여기도 흑금 기둥이 있네.
'여긴 기둥이 두 개구나.'
멀리서 봤을 때는 하나처럼 겹쳐 보여서 몰랐다.
내부로 들어온 다음에야 구분되어 보이는 것.
의체남이 건물 입구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섰다.
무언의 시위.
내가 신사임당 한 장을 내밀자 비로소 헤- 하고 웃음을 짓는다.
"고마워! 시민 출신이라 그런지 정말 된 사람이네. 여기 사는 거지새끼들은 허구한 날 말 바꾸기 일쑨데."
"거짓말은 안 합니다."
"흐흐. 그런 것 같아. 역시 정규 교육받은 사람은 다르다니깐? 내가 당신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지. 아, 이 사람은 된 사람이구나! 될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야."
의체남이 성한 눈을 찡긋했다.
"뭐든 일 있으면 남쪽 관문으로 와서 칙척이 동수를 찾아! 내가 이래 봬도 마당발이거든? 뭐든 도와줄 수 있어!"
"예. 일 생기면 찾아가겠습니다."
"어. 또 보자고!"
의체남은 또 신사임당을 자기 의체에 밀어 넣었다.
이내 삐걱삐걱 춤을 추며 멀어져 간다.
자연히 거친 쇳소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아, 누가 칙척이 데려왔어!"
"어휴, 진짜!"
"저 인간은 저 짓만 아니면 다 좋은데!"
불평불만이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는 의체남.
아니, 칙척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어, 그런데...."
이거 이상하다.
아파트 1층으로 들어왔는데 뭐가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전부.
당연히 있어야 할 엘리베이터가 안 보였다.
'설마?'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마침 주변에 널브러진 말라깽이에게 묻자, 말라깽이가 뚱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 그런 건 이백짜리 방에는 가야 있는데?"
"아...."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덩치의 얼굴.
또, 혀를 차던 칙척이의 눈빛.
당한 건가?
아니다.
이 세상에선 그게 상식이었을 뿐.
싼 방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게.
나는 열쇠를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1905호다. 1905호.
무려 19층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뜻.
"죽겠네."
어쩌겠나.
내 손에 남은 건 달랑 4백만 원이 전부.
월세 백만 원이면 4달을 버틸 수 있지만 2백만 원이면 2달밖에 못 버틴다.
생활비를 생각하면?
19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한이 있어도 견뎌야 한다.
"아오."
계단을 오르며 이를 갈았다.
"돈 좀 많이 주지."
달랑 530만 원이 뭐냐? 530만 원이?
초기 자본 1억 정도 주면 오죽 좋아?
너는 인마, 싸대기 1스택 더 적립이다.
"헉, 헉, 헉."
19층을 올라가는 건 내 인생에서도 처음.
간신히 도착한 1905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간살이 제로.
무옵션 그 자체.
에어컨, 냉장고, TV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보일러도 없는 건 선 넘은 거 아니냐?
넓이도 기껏해야 1.5평.
몸 누이고, 이불이랑 옷 몇 벌만 놔도 꽉 찰 크기.
화장실?
당연히 없다.
층마다 하나 있는 공동 화장실 겸 세면장을 써야 한다.
'고시원이 차라리 낫네.'
이게 백만 원이라고?
욕이 저절로 나온다.
고시원은 깨끗하기라도 하고 밥, 김치, 라면을 무한으로 주기라도 하지 여긴 그런 것도 없어.
타닥!
바퀴벌레 두 마리가 곰팡이 가득한 벽을 기는 것을 보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
'좀 자자.'
흑금 기둥이고 뭐고 잠부터 자야겠다.
생각해 보면 밤을 꼴딱 새웠지.
몇 시간 넘게 긴장하고 있다가 사투까지 벌였고.
게다가....
아냐, 아냐.
생각하지 말자.
나는 텅 빈 방에 누워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한다.
피로로 눈꺼풀을 누르며 머나먼 피안으로....
쾅!
떠나려는 찰나.
쿠앙!
세계가 진동했다.
꽈르릉!
방 전체가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허억!"
뭐야!
당연히 펄쩍 뛰며 일어났다.
급히 손을 뻗어 산탄총도 챙겼다.
그쯤, 또 격렬한 진동이 방을 꿰뚫었다.
우르르릉!
지진이라도 났나?
다행히 지진은 아니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꽈아앙!
천장.
위층 사는 사람이 뭘 하고 있었던 것.
"흐아아압!"
귀를 기울이면 기합 소리 같은 것도 들린다.
그리고 다시 진동.
꽈아앙!
아니, 뭘 하는데 층간 소음이 이렇게 지독해?
아령을 들었다가 떨구기라도 하냐?
마력이 모자란 탓에 마력 감각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잠을 자야 마력이 회복될 텐데....
진저리를 치며 다시 누웠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지만 도무지 잘 수가 없다.
쿵! 쾅! 꽈앙! 쿠르릉! 꽈릉! 우르르릉!
미쳤냐?
돌았어?
너 혼자 이 아파트 다 전세 냈어?
왜 전 세입자들이 사흘도 못 버텼는지 알겠다.
꽈과광!
"아, 진짜!"
더는 못 참겠다!
인간을 초월하는 인내심으로 산탄총만큼은 안 챙겼다.
이 정도면 성인군자 아니냐?
하지만 수틀리면 마력탄 날리는 수가 있어!
"저기요!"
쾅쾅쾅!
2005호로 올라가 문을 두들겼다.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실내.
"저기요!"
쾅쾅쾅!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들겼다.
"방금 1905호 이사 온 사람인데요! 잠깐 나와 보세요!"
"지금 나간다."
문 안에서 들린 것은 묘하게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허스키하면서 높고, 한편으로는 낮은 듯한 목소리.
끼이익.
문이 열렸다.
낡아 빠진 철문 뒤로 거대한 덩치가 걸어 나온다.
상체를 탈의하고, 붕대로만 가슴을 돌돌 감아 놓은 여자.
잠깐만.
이게 여자야, 덩치야?
아니면 괴물이야?
2미터가 넘는 체구.
오우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팽창한 근육 덩어리.
전신이 땀에 젖은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
처음에는 이 무시무시한 근육의 폭력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곧 한 곳에 눈이 고정되고 만다.
내 허리보다 두꺼운 이두박근에.
거기 떠올라 있는 어떤 글자에.
오른쪽 이두박근에는 [강].
왼쪽 이두박근에는 [철].
합쳐서 [강철]이 될 단어.
모텔에서 흡수했던 것과 똑같은 흑금 글자가, 이번에는 사람에게서 모습을 드러냈다.
6화 아이신기오로 날범 (1)
근육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남자."
내 손을 쥐고는 가볍게 흔든다.
악수는 악순데 이상한 악수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서는 손끝으로만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작고 소중한 유리 햄스터를 쥔 듯한 행동.
혹시라도 부서질까 무섭다는 듯이.
사실 그럴 만하다.
이 여자, 손이 무지막지하게 컸거든.
내 손도 작은 편이 아닌데 3배 이상 컸다.
관절 마디는 무식하게 튀어나왔고, 손가락 근육마저 엄청나게 부푼 상태였고.
"아이신기오로 날범. 아이신기오로의 딸이다. 여섯 무기의 주인이며 벌판 야생마의 정복자이고 전문 마수 사냥꾼이자 예언의 아이로 점지받은 몸이다. 간단히 날범이라고 불러라."
어... 뭐라고요?
아이신기오로?
설마 내가 아는 그 아이신기오로는 아니겠지?
"김도현입니다. 아이신기오로시라고요?"
"그렇다."
근육녀가 자부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위대한 대청제국의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적통 후예다. 그분의 피가 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현대에 아이신기오로 가문이 남아 있다고?
아니, 뭐, 그럴 수 있긴 해.
역대 청나라 황족은 씨앗을 엄청나게 퍼뜨렸으니까.
내 당혹감을 눈치챘는지 근육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옛 신분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만주민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다 민국이다. 푸이 황제 이후 우리 일족은 일개 시민이자 수호자의 위치로 내려왔고, 황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미 중원도 몽골도 티베트도 동튀르키스탄도 다 잃었는데 황족이라 뻗대는 것도 우습지 않나."
괴상한 말투.
그와 겹치는 거친 목소리.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쯤 되면 만주민국이라는 이름은 놀랍지도 않을 지경.
"음.... 어쨌든 반갑습니다. 한국인이 아니신가 보죠?"
"1/8만 한국인이다. 내 어머니께서 날범이란 이름을 주셨다. 국적은 만주민국인이고 임무 때문에 망치파의 협조를 받는 중이다."
그러셔?
사정이 있나 본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남의 일.
나는 내 일이 더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하시는 일 잘 풀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런데요. 이거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일까.
근육녀, 아이신기오로 날범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뇨?"
"잠깐 봐 주겠나?"
날범이 문을 열어 놓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1.5평짜리 작은 방.
날범 하나만 들어가도 꽉 찬다.
그 안에서 날범은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후읍!"
숨을 들이마시고.
"흡!"
숨을 내뱉고.
어마어마한 폐활량이었다.
한 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상체가 터질 듯이 부푼다.
이어서 내쉬면 날범의 몸 전체에서 괴상한 진동이 발생했다.
쾅!
거기에 공명하듯 떨리는 건물.
나는 입을 쩌억 벌렸다.
마력 감각 탓에 날범이 뭘 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숨을 쉴 때마다 마력이, 힘이 흡수되고 있다!
엄청난 용량에 엄청난 속도로!
그 탓에 진동이 증폭되어 층간 소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게, 그게 뭡니까?"
"강철의 힘이다."
날범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께서 남기신 초월법이다. 태조께서는 강철의 힘을 극한까지 연마하시어 저 별의 하늘로 승천하셨다. 지금도 가끔 일족의 주술사와 접신하시어 귀한 말씀을 들려주신다."
초월법?
승천?
그걸 물어보려는 찰나 옆방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진짜! 이봐! 여진족!"
밖으로 나온 한 난쟁이.
짓무른 고름투성이 얼굴에, 다리가 서로 엉겨 붙어 지팡이를 짚고 절룩대고 있었다.
난쟁이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아침에는 좀 조용히 하라고 했지!"
"아침은 이미 지났다. 남자."
날범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리의 약속은 아침 8시까지였다. 지금은 내가 운동하는 시간이다. 너도 일어나서 일할 시간이다."
"이익! 나도 늦잠 좀 자자!"
"꼬우면 다른 방 구하면 된다."
"제길, 누가 나 같은 돌연변이한테 방을 준다고 그래? 여기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들어왔고만! 왜 19층 다른 방은 다 비어 있는지 몰라? 민폐인 거 알면 좀 조용히 하라고! 1층에 공터 가서 하던가!"
"망치파에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아오, 아오, 아오오! 내 팔자 꼬라지 좀 보라지. 이따위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옆방 사는 년이 하필 여진족 미친년이야!"
돌연변이라....
나는 의식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했다.
난쟁이가 날 보고 흐, 하고 웃었다.
"아랫방 사람인가 보지? 어때? 우리 여진족 년 강철 진동 맛본 소감이?"
"건물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지진 난 줄 알았지?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지? 염병! 저년만 모른다니까!"
"근데 이거 괜찮은 겁니까? 정말 건물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진동이 장난 아니던데?"
날범이 대답했다.
"절대 아니다. 건물에 직접 손상은 가지 않는다. 원래는 아파트도 산도 무너뜨리는 광역 충격파지만, 내가 전수받은 초월법에는 핵심 정수가 빠져 있어 그런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핵심 정수는 도대체 언제 따먹는 건데!"
"모르겠다."
날범이 머리를 살짝 떨어뜨렸다.
"정수가 위대하신 태조의 갑옷에 깃들어 있다는 것까진 알아냈다. 그런데 뭘 해도 추출은커녕 감지도 할 수 없다. 저번에 초빙한 마법사도 감지되는 게 없다고 했다."
"내가 말했잖아. 1레벨 쩌리 말고 고레벨 마법사를 초빙해야 한다고."
"돈이 없다."
"체, 그래서 그 돈은 언제 다 모으는데?"
"망치파가 의뢰를 주긴 했다만,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진짜 미친년이네. 야, 이거 따지고 저거 따져서 돈은 언제 다 모으냐? 걍 시원하게 몇 놈 죽이고 돈 따서 니네 정수 챙겨서 꺼지라니까? 그래야 나도 잠 좀 기분 좋게 자지!"
"그럴 수는 없다."
"으아악! 끝까지 이럴 거야?"
"내 신념과 일족의 서약, 둘 모두를 저버리는 행위다. 나는 수호자 일족의 일원으로서 신념과 서약을 저버릴 수는 없다."
"미친년이 빌라성채에 들어와 살면서 못 하는 말이 없네."
"이건 단순히 거래다. 엄연히 다른 문제다."
"말이라도 못하면!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만주인 아니지? 한국인이지?"
탁.
날범이 빙글 돌며 자세를 잡았다.
보디빌딩 3번, 측면 가슴 자세.
흉근과 어깨 근육이 꿈틀거리며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다.
꽝!
동시에 마력 진동이 발동.
건물을 무너뜨릴 듯이 흔들었다.
날범이 나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원래 강철의 힘을 연마하면 체내에 마력이 쌓여야 한다. 그것도 평범한 마력 연공법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음...."
"하지만 우리 일족은 함풍제 시기, 아편 전쟁에서 강철 정수를 잃어버린 이래 마력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있다. 강철 같은 육신은 건재하되 마력을 잃었으니 초월법이라 할 수도 없다. 한때 아시아를 평정했던 초월법이 한낱 보디빌딩용 연공법으로 추락한 거다."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강해져야 한다. 일족의 염원이 모두 내게 달려 있다. 위대하신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께서는 당신의 머나먼 딸인 나만이 강철 정수를 회수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날범이 내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뭐, 뭐야?
위협을 느끼고 대처하기 전, 날범이 먼저 행동했다.
부웅!
90도로 허리를 숙인 것.
저 무지막지한 근육으로 적당히 윽박지르고 넘어가도 될 이 야만적인 세상에서.
"정말로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하지만 내가 강철 정수를 회수하고 떠나는 그날까지, 미안하지만 조금만 참아 줬으면 좋겠다."
"어...."
이러면 난감해지는데.
차라리 진상 피우면 마음 편하지.
미워하면 그만이니까.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자 날범이 더더욱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본래 사과는 금전적인 보상이 제일이라고 들었지만, 나도 일족도 돈 버는 재주가 없어 궁핍한 몸이다. 대신 남자, 네가 여기 있는 동안은 누구도 손을 못 대게 하겠다. 누가 시비 걸면 당장 나한테 말해라. 아주 곤죽을 내 주겠다."
어, 그건 끌리는데.
하지만 정말로 내 눈을 잡아끄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강철] 이 두 글자.
층간 소음을 감수하는 대신 새로운 마법 글자를 흡수하면 나한테도 이익 아냐?
"에휴, 좋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척 머리를 끄덕였다.
날범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고맙다! 남자, 너는 이제부터 내 친구다!"
"고맙기는요. 이웃끼리 좋게 좋게 살아야죠. 그런데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말만 해라. 뭐든지 들어주겠다!"
날범이 근육을 울룩불룩 꿈틀거리며 말했다.
자연히 [강철] 글자도 율동하듯 움찔거린다.
나는 두 글자를, 날범의 두 팔에 시선을 집중했다.
"팔 한 번씩만 만져 보면 안 됩니까?"
"뭐?"
"응?"
"보시다시피 제가 좀 약골이라서요."
소매를 살짝 걷어 팔을 드러냈다.
날범과 비교하면 대나무처럼 비쩍 마른.
거의 뼈밖에 없는 수준의 팔.
"평소에 헬창분들 보면 좀 만져 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모르는 사이에 만져 보자고 하기도 그렇고.... 우연히 이웃이 됐으니 딱 한 번만 날범 씨 팔을 만져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단순 접촉으로 저 글자가 흡수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장소에 생긴 게 아니라 사람 몸에 생긴 거니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남자, 너...."
그래서 부탁한 거였는데 날범은 엉뚱한 상상을 했나 보다.
"크흑, 그래!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어 보디빌딩 자세를 취하며 근육을 자랑하기 시작.
"힘들었을 거다! 당연하다! 그 비리비리한 몸으로 이 각박한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힘들었겠나! 우리 정 있는 만주인들도 남자, 너처럼 비리비리하면 남자 취급을 안 하는데 여기서는 정말로 죽고 싶었을 거다! 나는 널 이해한다! 나는 널 동정한다!"
저, 저기요?
왜 갑자기 급발진이세요?
날범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와라! 이 아이신기오로의 딸, 여섯 무기의 주인! 벌판 야생마의 정복자! 전문 마수 사냥꾼! 예언의 아이, 아이신기오로 날범! 기꺼이 이 너른 품으로 남자, 너를 안아 주겠다!"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난쟁이가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또 나왔네. 저 버릇."
"또라고요?"
"어. 여진족들이 감정 과잉이긴 한데 날범은 더 심해. 불쌍하다 싶으면 껴안아 주려고 한다니까? 조심해. 저 미친년이 힘 조절 못 해서 실려 나간 새끼 여럿 봤어."
"그놈들이 약한 거다!"
"그건 맞는데 약한 거 알면 힘을 주지 말아야지. 너 근육은 아주 흉기라니까, 흉기?"
날범이 머쓱한 얼굴을 하고 팔을 내렸다.
특별한 의도 없이 위로해 주고 싶었던 모양.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전 그냥 살짝만 만져 보면 됩니다. 저도 나름 잘 살았으니까 불쌍하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연약한 몸과 다르게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구나. 알았다. 나도 너를 존중하마. 남자."
"그러면 감사하고요."
날범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무시무시하다.
사람이 아니라 고릴라가 서 있다고 해도 믿겠는데?
성벽 같은 어깨에 아름드리나무 같은 팔뚝 라인 좀 봐라.
주먹 한 대 맞으면 바로 황천행이겠다.
'글자만 가져오고 멀리해야지.'
걸어 다니는 재해 같은 인간 병기.
신중히 손을 뻗었다.
먼저 오른쪽 이두박근 [강] 글자를 향해.
치지직!
예의 마력 자극이 나를 관통한다.
날범이 깜짝 놀라 근육을 펄떡거렸다.
"어?"
"뭐야, 왜 그래? 정전기라도 통했어?"
"이상한, 이상한 느낌이 든다."
"뭐? 진짜로?"
난쟁이가 낄낄대며 웃었다.
"미친 호랑이 날범한테도 봄날이 오나? 언제는 너보다 강한 남자가 좋다더니 이런 말라깽이 형씨한테 끌리는 겨?"
그러더니 내 얼굴을 보며 납득했다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긴 이 정도면 훈남이지. 존잘은 아니어도."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거 아니면?"
"정말로, 정말로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그게 사랑이라니까!"
"천만에!"
날범이 격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한 남자가 좋다! 이런 작고 귀여운 어린 남자가 아니라!"
"응? 어, 너보다 어리기는 하겠다. 근데 그런 게 아니면 왜 정전기가 통해? 운명 아니야?"
"미친 소리! 남자. 죽고 싶나!"
날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난쟁이가 꼬랑지를 내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놀릴게. 난 출근해야 하니까 간다?"
"얼른 가라. 반장 놈이 또 난장 피우기 전에."
"엉. 저녁에 보자고!"
쿠웅, 퍽. 쿠웅, 퍽.
난쟁이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팡이에 몸을 싣다시피 하고.
엉겨 붙은 다리를 힘겹게 찍어 가면서.
여긴 20층인데.
저 몸으로 매일 20층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단 말이야?
"저분도 고생이네요."
"몸은 약하지만 전사 중의 전사다. 인생이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적에 맞서 온몸으로 싸우는 자다."
날범은 서슴없이 낯 뜨거운 말을 내뱉었다.
이 세상 여진족은 다 저러나?
원래 세계에선 없어진 민족이라 잘 모르겠다.
"다른 팔도 만져 봐도 될까요?"
"만져도 좋다."
날범이 왼쪽 팔을 내주었다.
두 눈 가득 기대가 어려 있었다.
설마, 내가 느낀 걸 날범도 느낀 걸까?
아무래도 좋다.
마력은 분명히 흡수되었고 마력 회로 절반이 내 등에 새겨졌다.
일단 흡수해서 마력이랑 마법을 받고 나서 생각하자.
파파팟!
[철] 글자도 접촉.
시원한 쾌감이 날 덮치며 환영 거탑 전개.
역시나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시선들과 함께 책이 날아오고, 1/6이 내게 흡수되었다.
당연히 새롭게 얻은 마력 회로가 활성화된다.
직후 돌아온 현실.
나는 보았다.
날범의 덩어리 근육 요소요소에 흑금 문양이 죽순처럼 돋아나는 장면을.
[강철]로 끝이 아니었던 것.
최소한 몇 개 더.
마법을 얻을 방법이 날범에게 숨어 있었다.
7화 아이신기오로 날범 (2)
어떻게 해야 개방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런 생각에 빠질 무렵이었다.
날범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이건...."
양쪽 이두박근을 번갈아 쳐다보는 날범.
그래. 나도 보인다.
마력이 아주 살짝 일어났다가 혈맥으로 흡수되는 것이.
혈관과 신경 사이 어느 께를 타고 들어가 심장으로 흘러가지만, 제대로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장면도.
은회색 마력.
내 검푸른 마력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저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강철]
이 단어를 완성한 순간, 나도 저 은회색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느껴진다..., 느껴진다!"
날범이 고개를 홱 들었다.
두 눈이 호랑이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날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남자, 너. 정체가 뭐냐? 주술사? 아니면 마법사? 사기꾼? 나한테 헛수작을 부리는 거면 죽는다!"
잠시 망설였다.
나에 대해 감춰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손대자마자 자기 초월법 고유 마력을 느끼게끔 했는데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게 더 수상하지.
"사실은 말입니다...."
모든 걸 밝힐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아.
"전 마법사입니다."
"뭐? 마법사?"
날범이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력의 법이 안 느껴지는데? 정말로 마법사 맞나?"
"맞습니다. 아직은 견습입니다만."
이 세계에서도 견습이라고 하는 거 맞나?
적당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오른쪽 손에 방사.
검푸른 마력광이 흐릿하게나마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마력광은 마력광.
날범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0레벨 마술꾼.... 알겠다. 이해했다. 잠깐, 그래도 이상하다. 나는 거금을 들여 1레벨 마법사를 초빙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마법사는 날 보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위대하신 태조의 조끼가 있는 곳에 데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제가 익힌 마법이 특수해서 그럴 겁니다."
"그래?"
"예. 전 세계에 존재하는 특수한 힘을 제 것으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날범 씨한테도 그런 걸 봤고요. 그래서 날범 씨가 마력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 네가 내 힘을 흡수해도 내가 그걸 느낄 수가 있다?"
"그렇습니다."
"큼...."
잠깐 뭘 골똘히 생각하는 날범.
"혹시 나한테 보여 줄 수 있나? 네가 나한테 흡수했다는 걸."
"그러죠."
설마 내놓으란 말은 하지 않겠지?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나는 [강철] 마법을 끌어 올렸다.
아니, 아니다.
마법이 아니다.
이건 일반적인 마법과는 전혀 다른 거였다.
내 손에서 피어난 검푸른 마력광.
중심이 일렁이며 은회색 광채가 태어난다.
이내 마력광 전체가 은회색으로 변했다.
"오...."
날범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스르륵, 손을 가져다 댄다.
그러나 은회색 마력광은 온전히 나의 것.
자비심 없이 날범을 밀쳐 냈다.
흡사 강철 방패라도 된 듯이.
그래서 [강철].
다시 말하지만 이건 마법이 아니다.
속성이었다.
마력에 강철 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 것.
"잠시 실례."
텅 빈 복도를 겨눴다.
최소한의 마력으로 마력탄 발사.
단, 강철 속성을 활용해서.
문자로 표현하면 이쯤 되지 싶다.
[강철 마력탄]
퍼억!
마력탄이 날아간다.
검푸른 마력탄 대신 은회색 마력탄이다.
마력탄은 버려져 있던 옷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제법 날카로운 구멍을 내면서.
원래 마력탄의 위력으로는 힘든 일.
당연하다.
내 마력탄은 끽해야 성인 남자 주먹질 정도 위력이니까.
의지를 꽉꽉 담으면 강해진다는 건 확인했지만, 그래도 터뜨릴 수는 있을망정 저렇게 깔끔한 구멍을 내지는 못한다.
'말 그대로 강철 속성이네.'
게임식으로 말하면 관통 효과가 생긴 거잖아.
단점도 있다.
나는 허탈해진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마력을 엄청 쓰는구나.'
두 단어 조합의 상승효과만큼 마력도 소모하는 느낌.
그래도 위급 상황에는 쓸 만하지 싶다.
부족한 마력이야 글자를 더 모으면 되고.
"강철 화살...."
날범이 신음을 흘렸다.
숫제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남자!"
이내 아파트 건물이 무너지도록 고함을 지른다.
"너구나! 위대하신 태조께서 말씀하신 인연이 너였어!"
"네?"
"나는 아이신기오로의 딸이며 여섯 무기의 주인인 동시에 벌판 야생마의 정복자이자 전문 마수 사냥꾼이다!"
아니, 자기소개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한 마디 한 마디 토할 때마다 대기가 우르릉 떨리고 있었다.
감정 과잉이 지나쳐, 날범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살짝 맺혔다.
거의 울 듯한, 아니 감격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야차처럼 변한 얼굴로 날범이 함성을 질렀다.
"이 예언의 아이, 아이신기오로 날범이 너에게 부탁이 있다! 남자! 일생일대의 부탁이다! 우리 일족 전원의 염원을 담아 간청하겠다! 부디 나를 도와 다오!"
"그 부탁이라는 게 뭔데요?"
"강철의 힘 정수를 회수하는 걸 도와 다오! 부탁이다!"
쿵!
날범이 무릎을 꿇었다.
적어도 수백 킬로그램은 될 거구.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근육 덩어리.
아파트가 울리며 바닥에 쩌적 금이 갔다.
뭐야 이거!
미쳤어?
이거 완전 괴물 아니야!
나는 짧은 순간에도 주판을 튕겼다.
나한테도 손해는 아니다.
어차피 날범에게 새겨진 흑금 문양을 개방해야 한다고.
그래야 문양이 글자가 되고, 글자들을 흡수할 수 있겠지.
"공짜로 해 달라는 말씀은 아니죠?"
하지만 무료 봉사는 할 생각이 없다.
나도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날범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비록 나도 우리 일족도 궁핍한 편이지만 만주에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금은 좀 있다. 그걸 주마!"
"금이요? 얼마나 되는데요?"
"적어도 수백 킬로그램은 된다!"
"오...."
청나라 황실 후예치곤 적지만 그만큼 영락했다는 뜻이겠지.
금 수백 킬로그램이라.
그 정도면 최소 백억은 하지 싶은데....
하지만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다.
'이 세상에선 돈이 문제가 아니야.'
물론 돈도 중요하다.
돈이 있으면 많은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지.
'힘이 필요해.'
수백억을 쌓아 두면 뭐 하냐.
지킬 수가 없는데.
신분증 만들러 갔다가 갱단한테 잡히면?
갑자기 떼강도가 쳐들어와서 다 빼앗기면?
힘, 마력, 마법.
이런 것들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그리고 소설, 만화, 게임 등 온갖 매체에서 단골 설정으로 등장하는 게 있지.
[저레벨 마법사는 약하다.]
초반에 마법사는 전사한테 밀린다.
아주 압도적으로 밀리지.
후반 가면 마법사가 다 캐리하지만, 초반에는 AOS 게임에서 서포터가 원딜 밥 먹여 주듯 숟가락으로 떠먹여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럼 봐라.
눈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날범을.
이 근육녀라면 어떨까?
사시미칼을 쑤셔도 안 박히고, 철봉쯤은 웃으며 구부릴 것 같은 이 괴력의 여진족 전사라면?
그야말로 최고.
현시점 최적의 선택.
"금 말고 다른 것은 어떻습니까?"
"유물이 있으면 주겠다만 우리 일족은 선조의 유물을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다른 걸 원합니다."
"말해라, 남자."
잠시 한 호흡 쉬고.
웅장한 승모, 치솟은 삼두, 두툼한 이두를 한 번씩 보고 말했다.
"날범 씨가 당분간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남자, 너를?"
"예. 보시다시피 저는 약한 마법사.... 아니, 마술꾼입니다."
허공으로 마력광을 흩뿌린다.
검푸른 마력광을 은회색으로 바꿨다가, 다시 검푸른색으로 변화시킨다.
불타는 시선이 접착제 붙인 것처럼 내 손을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많죠. 찾아야 할 것도 많고요. 그러다 보니 위험해질 때가 많습니다."
"핵심을 말해라. 남자."
"예. 날범 씨가 절 보호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호원으로요. 날범 씨 같은 분이 제 경호원이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유급 아니어도 괜찮지?
무급이어도 되지?
평생 공짜로 부려 먹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일족의 염원을 이뤄 주는 건데, 한 3년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대신 금은 안 받잖아.
"좋다!"
날범이 시원하게 내질렀다.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내 영혼이 위대한 태조께 귀환할 때까지! 남자, 너를 목숨 바쳐 경호하겠다!"
어?
"아, 평생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히 3년 정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날범이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일족의 염원이다! 평생의 소원이다! 일을 이뤄만 준다면 평생 무급 봉사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이뤄 주기만 한다면!"
"그, 그렇습니까."
"그래! 흠, 남자. 너는...."
날범이 내 몸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왜 저래?
"비록 내 취향은 아니지만 설령 수청을 들라 해도 기꺼이 들도록 하겠다."
케에엑!
미친 거 아니야?
당신도 내 취향 아니야!
"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어쨌든 제 경호원 돼 주시는 겁니다?"
"물론이다. 단 핵심 정수를 제대로 회수했을 때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경호는 없는 것으로 하겠다."
"당연하죠."
말은 무급이지만 적당히 챙겨 줘야겠지.
인간관계에는 윤활유가 필요한 법.
또, 순간의 고마움은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는 법.
날범을 챙겨 줄 무렵에는 나도 어느 정도 위치에 있지 않을까?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남자."
"우선 편하게 앉으세요. 저도 편하게 앉을게요."
방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날범 혼자 있어도 꽉 차는 공간이라.
날범은 문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는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날범 씨한테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마력이 없다곤 해도,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아이신기오로 날범, 당연히 평범한 힘꾼이 아니다!"
날범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우선 나는 일족에게 공인받은 여섯 무기의 주인이다. 대도, 활, 도끼, 망치, 채찍, 창을 달인 수준으로 다룬다!"
"무기를 여섯이나 쓰신다고요?"
"그렇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무기가 달라지지 않나. 마수와 싸울 때는 마수 뼈를 분지를 중무기가 필요하고 사람과 싸울 때는 창이나 도끼가 최고다. 또, 멀리 있는 적한테는 활이 좋다."
다 동의하지만 마지막 말에는 동의 못 하겠다.
"총은요?"
"총?"
"예. 총이야말로 만병지왕 아닙니까?"
일부러 던진 질문이었다.
이 세상 초능력 수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까.
초능력 수준이 높은 동네면 총의 가치가 낮을 거고, 반대면 총의 가치가 높겠지.
어설픈 초능력자 따위 다 쏴 죽일 테니.
"하, 총?"
날범이 코웃음을 쳤다.
"남자, 네 생각은 알겠다. 일반인이 보기엔 총이 확실히 강하다. 1레벨 초현급만 해도 총 앞에서 왕왕 무력해지지 않나."
1레벨 초현급....
"하지만 육체 계열 전사들은 2레벨 단련급만 되어도 총알 따위 쉽게 막는다. 거기서 더 강해지면 어떻겠나. 일반인이 든 총으로는 어떤 효과도 기대하기 힘들다. 만약에 5레벨을 넘어 초월자에 도달한다? 총은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초월자가 들고 있다고 해도! 총잡이 초월자도 마찬가지다. 같은 조건이라면 절대로 활잡이를 당할 수 없다!"
초인, 초월자.
나는 그 단어들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아하.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거기까진 몰랐습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인과 초월자에 알려진 게 적으니 그럴 수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라, 남자. 일족에 전승된 지식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겠다."
청나라 황실의 지식이라....
이건 또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이네.
날범이 몸을 들썩였다.
"한국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게 어떠냐? 남자?"
"좋습니다. 바로 가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곳이다."
날범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더러운 창문 너머.
빌라성채 중심부와 정확히 일치하는 방향이었다.
우연이었을까?
관리사무소에서 봤던 흑금 기둥이 있는 지점.
50층 마천루.
그 건물이 날범의 손가락 끝에 정확히 겹쳐 있었다.
망치파 갱단 본부 구역.
갱단원들이 막고 있어 들어갈 수 없던 곳.
하지만 날범에겐 들어갈 방법이 있겠지.
1레벨 마법사를 초빙한 적도 있다고 한 걸 보면.
자, 가자.
새 마법을 수집할 시간이다.
8화 아이신기오로 날범 (3)
망치파 관리 사무소.
날범이 신명 나게 문을 걷어찼다.
"나 왔다!"
꽝!
얼마나 세게 찼는지 철문이 찌그러질 정도.
"뭐야!"
"어떤 새끼야!"
너구리 소굴을 만들던 갱단원들이 기겁해서 일어난다.
저마다 산탄총, 기관단총, 쇠도끼, 장도리를 들고 있었다.
적이 쳐들어온 줄 안 모양.
그러거나 말거나 날범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 왔다고!"
날범을 확인한 갱단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또 저년이네."
"미친년이 진짜."
"큰형님이 오냐오냐한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아주."
"걍 따 버릴까?"
불온한 공기가 일렁이는 것도 잠시.
"쯧."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 책상에 발을 걸친 남자가 머리를 들었다.
사무소에 와서 계약 체결할 때 봤던 그 남자.
흐릿한 마력 파장을 풍기던.
"보내 줘라. 무기 내리고."
"형님!"
"저년 저거 버릇을 고쳐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큰형님한테는 네가 가서 말할래?"
"형님. 그게 말입니다...."
"큰형님 만주 계실 때 도와줬던 은인분 조카한테 총질했다고 네가 직접 보고할 거면 뭐, 니 ㅈ 꼴리는 대로 해. 난 모른다."
"끄으응."
반발하던 갱단원이 머리를 숙였다.
기관단총을 자기 허리춤에 꽂자 다른 갱단원들도 한 발짝씩 물러난다.
하지만 눈빛은 썩 곱지 않았다.
당장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을 날범에게 꽂고 있었다.
물론 날범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여, 아이신기오로 씨."
남자가 여전히 누운 채 날범을 불렀다.
"왜 그러나. 남자."
"댁도 적당히 해. 댁네 일족이 대단한 일족인 것도 알겠고 댁이 0레벨 힘꾼 주제에 마수 말도 조련하고 마수 표범도 때려잡은 대단한 인간이란 건 알겠어. 우리 큰형님이 댁네 일족한테 입은 은혜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적당히 하셔야지, 적당히. 큰형님 얼굴 봐서 우리가 참고는 있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남자 입장에선 잘 절제해서 한 말.
그런데도 날범은 코웃음만 날렸다.
"흥. 꼬운가? 꼬우면 덤벼라."
"후.... 이봐, 아이신기오로 씨. 그러다 정말로 큰코다쳐. 그쪽만 힘꾼이야? 나도 힘꾼이야."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죽으면 죽었지 굴복하지는 않는다!"
"하.... 진짜."
남자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아서 해. 알아서."
그러더니 애꿎은 부하들을 보며 화를 낸다.
"뭐 해? 길 안 비켜 주고?"
"예, 예."
"지나가라. 재수 없는 여진족 년아."
"골목길 조심해라."
"빌라성채에서 나가기만 하면 그냥...."
흉흉한 분위기 속, 겨우 길이 트였다.
사무소를 가로질러야 갱단 구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
갱단원 사이를 지나가자 험악한 눈빛이 쏟아진다.
나와 계약했던 덩치는 우악스럽게 문신을 꿈틀거리고.
눈이 움푹 팬 갱단원은 뚫어져라 나와 날범을 직시하고.
잔인한 인상의 남자는 쌍칼을 마찰시켜 쇳소리를 냈다.
어깨가 움츠러들려고 했지만 견뎠다.
당당히 허리를 세우고 통과.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오랜 마법의 주문으로 흘려보냈다.
'침착하자. 침착해.'
사무소를 나오고 문을 닫자 겨우 압박감이 사라졌다.
"날범 씨. 망치파와는 원래 사이가 안 좋습니까?"
"아니. 좋은 편이다. 망치파 보스는 나와 친구다. 우리 일족 전체와도 친구다."
"그런데 왜...."
"저놈들은 보스 직계가 아니다. 다른 간부 휘하에 있다. 그래서 나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이를 간다."
"아하."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하긴 이 정도 규모의 빌라성채를 가진 갱단이다.
파벌이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
"훗."
날범이 짧게 비웃음을 흘렸다.
"한 달 전이 생각난다."
"한 달 전이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 기억하나?"
"예. 기억합니다."
"그놈이 나한테 덤볐다가 개박살 났다."
"예에? 그 남자 만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별거 아니다. 같은 0레벨이라도 다 같은 0레벨이 아니다. 그놈 초능력쯤 내 근력으로 압도하면 그만이다."
"와...."
"남자. 당분간 내 곁에 항상 붙어 있어라. 오늘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봤으니 쇠주먹 부하 놈들이 널 한 번은 손보려고 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놈도 좀 멍청하네요. 날범 씨한테 마력은 없어도 근육이 초능력급인 건 눈치챘어야 하는데요."
"흐하하. 그렇다. 너는 보는 눈이 있다, 남자. 내 근육은 초능력급이다."
날범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인도한다.
콘크리트 길을 따라서.
빌라성채 정중앙.
하늘마저 꿰뚫을 듯이 선 50층 마천루를 쫓아.
흑금 기둥이 관통해 있는 그곳을 향해.
"저기다."
날범은 프리패스였다.
마천루에 접근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인사를 날렸다.
"이봐! 여자!"
"어, 남자."
"여자! 오늘도 왔냐!"
"오늘도 왔다, 남자."
말투들이 원래 저래?
아니면 날범을 따라 하는 거야?
엘리베이터에 타고 슬쩍 물어보았다.
"말끝에 남자, 여자 붙이는 건 여기 전통입니까?"
"아니다. 우리 위대하신 태조의 습관이다."
"태조.... 아, 누르하치 님이요?"
안 붙이던 님 자를 붙이려니 어색하네.
그렇다고 남의 조상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도 뭐하고.
"그렇다."
날범이 묵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위대하신 태조와 몇 번 대화하다 보니 나도 이렇게 되었지.... 그 뒤로는 태조를 접견하지 못했다. 이 정도 침식은 괜찮은데, 더 심해지면 나는 나를 유지하지 못하고 태조께 소화될 거라 하셨다."
소화된다?
물어보려 했으나 엘리베이터가 조금 빨랐다.
땡!
최상층에 도착한 것.
엘리베이터 밖은 뜻밖에도 조그마한 밀실이었다.
흡사 강철의 감옥.
"구조가 특이하네요?"
"일반 엘리베이터가 최상층까지 직행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보스 집무실이 바로 노출되지 않나. 유사시에는 차단한 다음 독가스와 화염 방사기로 침입자를 격퇴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하긴. 갱단이니까.
날범이 보안 장치에 얼굴을 들이댔다.
곧 보안 장치에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삑! 기이익.
드디어 개방되는 최상층.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육중한 나무 문 앞을 무장한 갱단원 여럿이 지키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범. 넌 지치지도 않냐? 그제도 왔었잖아?"
"어제는 안 왔다."
"하. 말로도 안 지지."
"야! 여자! 또 찾아올 거면 두 손 가득 무겁게 하고 오라고 한 거 못 들었어?"
"돈 없다. 남자."
갱단원이 익숙하게 옆 쪽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들어선 회장실.
말이 필요 없었다.
초고층 전망을 배경으로 최고급 가구가 가득 깔려 있었다.
"빨리 와라."
본다고 닳냐?
같이 들어온 갱단원이 몸으로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정말 방법 찾기 전에는 찾아오지 말고. 큰형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작은 형님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유물을 확인하는 것은 나와 우리 일족의 어엿한 권리다."
"그야 그렇지만, 사람 일이 다 원리 원칙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거 몰라?"
회장실 한쪽 벽면.
유물들이 자랑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상서로운 빛을 머금은 청동 거울.
살벌한 예기를 뿌리는 일본도.
심장 박동하듯 마력을 퍼뜨리는 낡은 책.
봉황 닮은 새를 조각한 오래된 금반지.
날범은 그것들을 다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 있는 것은 마네킹.
아니, 마네킹이 입은 조끼가 진짜 목표였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다 삭아 버린 가죽조끼.
나는 조끼를 보고 살며시 눈을 가늘게 떴다.
[강][화]
갱단원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알지? 시간은 10분이야. 얼마든지 봐도 되고 만져도 되지만, 갖고 나가면 안 돼. 이게 예전엔 너희 일족 거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엄연히 큰형님 거라고."
"안다."
내게 눈짓하는 날범.
앞으로 나섰다.
꼼꼼하게 조끼를 살피자 갱단원이 지루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번 주엔 마법사 데리고 오더니, 오늘은 뭐야?"
"마술꾼이다."
"마술꾼? 마법사도 못 알아낸 걸 어떻게 하게. 차라리 큰형님 말씀대로 돈 벌어서 한 3레벨 응축급 마법사님을 초빙하라니까."
"그러고 싶지는 않다."
"하여간 똥고집은."
날범이 시선을 잘 끌어 주고 있었다.
나는 슬쩍 조끼 몇 군데를 매만졌다.
특히 흑금 글자가 있는 지점을.
"10분 지났다."
"시간 더 필요하다."
"안 돼. 쇠주먹 형님한테 혼나. 저번에 칼침 맞은 거 기억 안 나?"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미안하면 이제 좀 가. 다음에 올 때는 제대로 된 마법사 데려오고. 0레벨 마술꾼 말고."
갱단원이 우리 둘을 강제로 쫓아냈다.
억지로 나가며 날 돌아보는 날범.
나는 엄지를 들까 하다가 일부러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날범이 자기 감정을 잘 숨길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프흐하아아아."
역시나.
날범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진실도 모르고 갱단원이 날범을 위로했다.
"너무 낙심하지 마라. 진짜 마법사라면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우리 일족은 100년 넘게 강철 정수를 복원하려고 대마법사, 대주술사, 지고 교단의 주교, 심지어 사신 교단의 힘까지 빌렸다. 그런데 다 실패했다. 이제 와서 마법사 몇 명 초빙한다고 비밀을 알아내기는 힘들 거라고 본다."
"너희 조상님이 너라면 가능하다고 했다며."
"후...."
말없이 나를 보는 날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은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도 갱단원들이 눈이 여기저기 있었으니까.
"힘내! 인마!"
격려를 뒤로하고 H20 구역으로 돌아왔다.
20층 계단을 올라 또다시 마주 앉은 우리 둘.
날범이 미간에 깊은 골을 새기며 물었다.
"정말로 실패했나?"
씨익 웃어 주었다.
"아뇨. 성공했습니다."
"뭐?"
"성공했다고요. 조끼에 있던 힘. 확실히 회수했습니다."
날범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나를 보았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
더욱 크게 뜨이는 눈.
전신의 근육이 푸들푸들 경련하기 시작한다.
"남자아아!"
이윽고 내지르는 포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대기가 일제히 진동하고, 고막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남자아아!"
"으악!"
날범이 나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불도저 같은 압력이 전신을 압박한다.
아, 안 돼!
허리 부러진다!
"남자아아아!"
엉엉 울다시피 하는 날범.
압력이, 압력이 더 강해진다!
이러다 정말 죽어!
위기감 속에서, 본능적으로 새로 얻은 마법을 사용했다.
[강화]
나 자신을 강화한 것.
아냐.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강철 강화]
비로소 효과가 있었다.
과아아앙.
범종 울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내 전신 피부에 찬란한 은회색 빛이 깃들었다.
빛은 완전히 압력을 해소하진 못했지만 상당히 방어해 주었다.
그야말로 강철이 된 것처럼.
...진짜 강철에 비교하면 턱도 없이 약하긴 해도.
날범도 내 몸에 새겨진 빛을 확인했다.
"그거...."
홀린 듯한 눈빛.
신음처럼 내뱉는 탄성.
"그거다! 바로 그거다! 태조께서 보여 주신 것과 똑같다! 과거에 강철 마탑 마법사와 우리 일족 주술사들이 힘을 합쳐 빚어낸 강철 정수다!"
문제가 있었다.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
마력도 많이 들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쉬자 마력광이 파드득 꺼져 버린다.
전신으로 뿜어서 그런가?
아니다.
기본적 마력 소모량이 많았다.
몸이 아니라 손으로 뿌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날범이 발작하듯이 날뛰었다.
"왜 그러나, 남자! 내게 정수를 넘겨주기로 했지 않나!"
"진정하고 저 좀 보세요."
나는 길게 기른 앞머리를 들어 이마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날범이 멈칫 놀란다.
내 머리가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기 때문.
"이거 만들기 엄청 힘들어요. 일단 제 마력량이 너무 적어요. 날범 씨한테 필요한 양을 확보할 수가 없다고요."
"그럴 수가.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방금 내가 만든 강철 강화 마력.
그걸 일정량 이상 날범에게 먹여 주면 된다.
그러면 내부에서 응집되어 일종의 씨앗이자 정수로 정착된다.
이후에는 날범이 열심히 수련만 하면 된다.
흡수하는 마력들이 강철 정수에 이끌려 이동하고, 결합하여 일종의 마력 기관을 형성하는 거겠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년간의 내 웹소설 경력으로 추리하면 그렇다.
문제는 마력량.
가만히 놔둬도 흩어지지 않게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마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까지 내가 모은 분량으로는 택도 없다.
10배가 되어도 모자라겠지.
날범이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인제 와서 안 된다고? 인제 와서?"
이내 홱 고개를 돌렸다.
부리부리한 눈이 내게 망치처럼 떨어져 내렸다.
"남자!"
세상이 떠나가라 함성을 터뜨리는 날범.
"내 정수! 내 강철 정수! 남자!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이 어디 있나! 인제 와서 안 된다니! 그게 고추 달고 태어나서 할 말인가! 하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라! 책임을!"
뭐, 나도 동의한다.
사실 이대로 입을 씻는 것도 불가능.
먹튀하면 날범이 날 때려죽일 기세라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내 머리는 아직 쓸 만했다.
금방 해결책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영약으로 가공하죠."
"영약?"
"예. 날범 씨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날범 씨 선조분들도 마법사랑 주술사들 도움을 받았다고요. 그분들이 순수하게 마력만으로 정수를 만들었겠습니까? 영약을 만들어서 먹였겠지요. 안 그러면 감당 못 해요."
"어...."
잠시 빙글빙글 돌아가던 날범의 눈동자.
금세 정상을 되찾는다.
허공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다. 예전에 태조께서 보여 주신 기억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주술사 여럿이 초대형 돌솥에 약액을 넣고, 마법사들이 강철 마력을 부으며 졸이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남은 약액을 굳히자 은철육기단이 되었었다. 맞다! 분명히 그랬다!"
날범이 꽥 소리를 질렀다.
이어 나를 끌어안고는 마구 비벼 댔다.
"천재다! 천재! 남자, 너는 천재가 분명하다! 세기의 천재다! 100프로 확신한다! 네 아버지는 IQ가 200 훨씬 넘을 거고, 네 어머니는 서울대, 아니 하버드 정도는 나왔을 거다!"
거, 우리 부모님 칭찬하는 건 고마운데....
"켁! 켁! 이거 좀 놔요! 나 죽습니다! 케엑!"
저 근육 덩어리가 날 껴안고 있으니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죽어라 발버둥을 치자 날범이 겨우 나를 놓았다.
자기도 머쓱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하다. 남자. 본의는 아니었다. 네가 말라깽이에 약골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그만큼 기뻤다. 어쨌든 넌 몸은 빈약할지 몰라도 천재 중의 천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인간이 분명하다. 남자."
이거 디스야 칭찬이야?
켁켁 숨을 고르다 물었다.
"어쨌든, 약을 만들려면 연금술사든 주술사든 찾아봐야 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 있습니까?"
사실 기대 안 하고 던진 질문이다.
성격과 행동을 볼 때 알고 지내는 연금술사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날범은 의외의 대답을 전해 왔다.
"있다."
"있다고요?"
"이 빌라성채에 아주 유명한 대마법사의 후손이 산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내가 목숨을 구해 준 적도 있으니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 줄 것이다."
"누굽니까? 그건?"
"구도마법공이라고 아나?"
구도마법공?
뭐지.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별명은.
날범이 입을 우물거렸다.
잘 기억나지 않는 모양.
간신히 뱉은 이름도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율무 이..., 율무 이 누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그게 사람 이름이야?
율무 이 누구?
차라리 율무기라고 하면 외국인이구나 하고 이해라도 하겠다.
피식, 한 번 웃으려는 찰나였다.
번쩍하고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구도마법공.
율무.
이 누구.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단어들이지만, 조금씩 변형하면 이런 이름이 된다.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이런 이름이.
9화 일도마법공 이신 (1)
어이없긴 하다.
자기가 구해 준 사람이라면서 왜 주소도 몰라?
그 점을 묻자 날범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소한 건 기억하지 않는다."
"연금술사라면서요? 대마법사의 후손이고. 언제든 도움받을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필요하면 칙척이한테 부탁하면 된다."
"아, 그분이요."
칙척이는 부르자마자 달려왔다.
"나 불렀어?"
칙, 척, 철컥.
칙, 척, 철컥.
의족으로 칙척 박자를 맞추며 등장한 칙척이.
대놓고 검지와 엄지를 비볐다.
"얘기는 다 들었어. 팁만 조금 주면 일도마법공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지!"
"일도마법공이요?"
"어, 일도마법공."
칙척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도마법공의 적장손이잖아, 그치. 돈도 많을 텐데 왜 이런 곳까지 기어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마탑의 촉망받는 유망주였다고 하더라고! 마법도 몇 개 쓸 수 있더라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누구나 다 일도마법공이라고 불러! 마법사잖아, 마법사!"
"엄밀히 말하면 마법사는 아니다."
날범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는 법을 세워 세계를 건설하는 자. 아직 법을 세우지 못한 자는 마술꾼일 뿐이다. 내가 힘꾼일 수는 있어도 전사는 아닌 것과 같다."
"참 내. 따지기는. 날범 당신은 덩치에 안 맞게 소심한 구석이 있다니까."
"소심하다니!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인가!"
"급발진 좀 그만하고. 하여튼 날 따라와."
날범이 고함을 치지만 칙척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앞장서 걸어갔다.
날범이 그 뒤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약한 남자를 때릴 수도 없고...."
그러면 대형 사고지.
날범 주먹 한 방에 칙척이는 황천 건넌다고.
저벅저벅. 쿵, 쿵.
칙척이를 따라 걸어간다.
당연히 길 따라갈 줄 알았는데 칙척이는 중간에 이상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이크, 실례."
다른 빌라의 가정집 안으로 들어간 것.
"저기요. 왜 여기로 들어.... 아."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빌라 5층 외곽 호수.
벽면을 틔우고 불법 증축을 해 놓았다.
그리고 바로 옆 건물과 이어지는 철제 난간까지 설치.
칙척이가 그 위를 위태롭게 건너가는 것이다.
"별게 다 있네요."
"엉. 20구역들은 최외곽이라 망치파가 들여다보는 시늉이라도 하거든? 근데 안쪽 구역은 달라. 다 이 모양 이 꼴이지."
"비 오면요?"
"덮개 덮으면 돼."
태풍은 어쩌고?
하긴, 이 성채 같은 건물 안이면 바람도 약해지겠다.
칙척이 뒤를 따라가는 중,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피부에 버섯 같은 혹이 가득 난 남자.
두 눈은 퀭하니 빛을 잃었다.
머리카락은 말라비틀어진 지푸라기 같다.
입에 문 담배에선 기이한 초록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 집을 들어가고 나가도 됩니까?"
"어, 괜찮아. 한 대여섯 번 쓸 때마다 담배 한 까치 주면 돼. 소주도 좋고."
5층 가정집을 통과한 다음에는 다시 1층.
어떤 음식점이었다.
원래는 가정집 같은데 식당으로 개조한 것.
명백히 불법이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상태.
왜앵 왱.
걸어 놓은 고기 사이로 파리 떼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1자 탁자 앞에 앉은 손님들은 후르륵 제육 덮밥을 먹어 치웠다.
"역시 박가네가 최고야!"
"박 씨! 한 그릇 더 줘!"
"그럼 돈을 더 내야지!"
"아, 사람 나고 고기 났지, 고기 나고 사람 났나!"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집도 있었다.
오전인데도 성업 중이다.
좁디좁은 1자 탁자에 서로 몸이 비벼지도록 가까이 앉아, 코가 비뚤어지도록 정체불명의 액체를 목에 들이붓고 있었다.
"크, 좋다!"
"한 잔 더!"
"주인장! 여기 녹색 병 소주 하나!"
"이야, 소주를 마셔?"
"김 씨 저거 어제 노름판에서 제대로 땄대잖아."
"아니, 그럼 지만 처먹지 말고 한 병씩 싹 돌리던가! 나도 오랜만에 소주 좀 마셔 보자!"
"미쳤냐? 나 혼자 먹고 죽을 돈도 없어!"
기가 막힌 일이다.
녹색 병 소주.
원래 세계에선 오직 취하려고 마시는 편의점 기준 2,100원짜리 소주가 여기선 고급술 취급이라니.
정말로 고급술은 아니고, 그만큼 이들 주머니가 가볍단 뜻.
"여기야!"
한참 헤매듯 가정집과 다닥다닥 붙은 가게를 통과한 이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지나친 곳과 다를 게 없었다.
가게들은 따개비처럼 서로 엉겨 붙어 있었고, 고성방가가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김창수 성형외과]
[박주미 치과]
[정보훈 내과]
[최소윤 한의원]
이런 식으로 병의원이 밀집해 있다는 것.
나는 그중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석담 약국]
다른 간판과 조금 느낌이 달랐다.
한 획 한 획 정성을 담아 찍어 낸 붓글씨.
'석담.'
어쩐지 익숙한 단어.
금방 그 의미가 떠올랐다.
율곡 이이의 호(號) 중 하나였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헷! 고마워!"
칙척이가 5만 원권을 똘똘 말아 의체 얼굴에 넣었다.
그러더니 또 손을 비빈다.
"돌아갈 때도 안내 필요하지? 나 기다리고 있을까? 갈 때 한 장만 더 주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엉?"
"길 다 외웠어요."
입체적으로 오르락내리락 걷느라 복잡했던 길.
하지만 그 정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아.
자랑 같긴 해도 내가 길 하나는 잘 외우거든.
평소에도 길 잘 찾고.
글쎄 그 복잡한 신주쿠역 처음 갔을 때도 지도 한 번 보고 목적지 잘 찾아갔다니까?
"정말로? 그걸 외웠다고?"
"예.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은 거지? 길 잃어도 난 모른다? 여기 사람들 좀 위험해! 길 잃은 선량한 양을 보면 당장 도축 들어간다고!"
"뭐 어떻습니까. 우리 든든한 날범 씨가 같이 있는데."
"으흠!"
날범이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었다.
그 단순한 동작에 근육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칙척이가 입을 오물거리며 물러났다.
"그... 알았어! 혹시 길 못 찾겠으면 나한테 연락해. 아무한테나 칙척이 불러 달라고 하면 바로 올게!"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간다?"
"네."
"진짜 간다?"
"네."
"진짜 진짜 진짜 간다?"
"네네."
"쩌업!"
칙척이가 의족을 끌며 사라졌다.
풀이 죽은 듯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나는 잠시 칙척이 등을 바라보았지만 날범은 그런 게 없었다.
거침없이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자! 여기 있나, 남자!"
약국은 불법 증축 건물이었다.
원래는 1.5평이었을 방 2개를 임차, 사이에 있는 벽을 틔워 하나처럼 쓰는 것.
망치파가 알면 화낼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이 정도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 뭐야?"
커튼으로 가려 놓은 건너편 방에서 짜증 박힌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이 아침부터 부르고 지... 어?"
커튼을 젖히고 나온 것은 키가 껑충한 청년.
나랑 거의 비슷할까?
빼빼 마른 것까지 똑 닮았다.
날카로운 인상이고, 도수 심한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만 빼면.
청년이 날범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여진족! 여긴 왜 왔냐? 항상 칙척이 시켜서 오라고 그러더니?"
"약 때문에 왔다."
"약? 야아아악?"
청년이 코웃음을 쳤다.
"야! 언제까지 꽁으로 약 먹으려고 그래? 유통 기한 다 끝났어! 이제 돈 내고 먹어!"
"남자. 생명의 은인에게 너무한다. 고마움을 보여라."
"어쭈. 나는 뭐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저번에 너 중독됐을 때 내가 살려 줬잖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
"방사능 피폭됐을 때는 어떻고!"
"나는 모르는 일이다."
"기생식물 감염됐을 때도 그랬지!"
"그런 일이 있었나? 잊어버렸다."
"얌마! 세 번 살려 줬으면 나도 빚은 갚을 만큼 갚았어! 이제부턴 돈 내고 사 먹어!"
맺힌 게 많은 모양.
안경 청년이 퍼붓듯이 말을 쏘아 댔다.
날범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었고.
나?
청년을 빤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 아래.
청년의 눈동자 위에 흑금 글자가 보였거든.
[왜][곡]
저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안녕하세요."
그래서 먼저 꾸벅 인사했다.
"김도현이라고 합니다. 약 제조 문제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 근처에선 가장 실력 있는 약사분이라고 들어서요."
"흠! 으흠!"
청년도 냉정을 되찾고 목을 가다듬었다.
날범을 한 번 쏘아보고는, 내게 정중한 태도로 화답했다.
"예. 어서 오세요. 빌라성채 사시는 분치고는 예의가 바르시네요. 많이 배우신 분 같고.... 약사 이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접촉, 위아래 왕복 운동.
이게 악수지.
이게 문명인들의 첫인사고.
아침에 있었던, 날범과의 첫 대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그리고 여기 날범 씨는 잘 아시죠?"
"알죠."
청년, 이신이 날범에게 눈을 흘겼다.
"저 한 번 구해 줬다고 매번 공짜로 약 털어 가는 놈 아닙니까."
"하하하...."
끼익.
이신이 오래된 나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이어서 나를 보며 묻는다.
"뭐, 저 여진족이야 그렇다 치고, 왜 찾아온 거예요? 그것도 저 엉덩이 무거운 여진족이랑 같이. 희귀약이라도 사시게요?"
이신이 날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우선 이쪽 문제는 아닐 것 같고...."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주시.
"김도현 씨 문제에요? 저기 여진족이랑은 다르게 약하게 생기긴 하셨네요. 어, 잠깐만."
이내 뭘 생각했는지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설마?"
나와 날범을 번갈아 쳐다보는 이신.
왜 저래?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안경 속 작아 보이는 눈이 묘하게 굴러가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애초에 저도 날범도 서로가 서로의 스타일이 아니에요."
"엉? 갑자기 무슨 소리 하나. 남자, 빨리 약 얘기나 해라. 급하다"
"음...."
질색하는 나.
눈만 멀뚱거리는 날범.
반면 수상하다는 듯이 보는 이신.
가슴이 웅장해지는 조합이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겠다.
"여기 비밀 보장됩니까? 은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보장은 못 합니다. 벽이 이따위라서요. 크게 얘기하면 옆에 한의원에서 다 들릴걸요."
"그래도 최소한 약사님 입으로 말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저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거 싫어해요."
나는 일부러 약국의 문을 닫았다.
다행히 잠금장치는 최신.
문을 잠그고 날범이 문에 기대고 섰다.
쥐새끼 하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얼굴로.
이신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뭐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얼굴.
나는 약국 카운터에 몸을 바짝 기댔다.
몸으로 바깥을 가리다시피 하며 두 손을 합장.
[강철 강화]를 끌어냈다.
과와왕.
은은히 울리는 진동.
서서히 피어나는 은회색 꽃잎!
이신이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 그건!"
나는 이신의 눈앞에 마력광을 흔들며 말했다.
"이 속성의 영약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영약이요...."
꼴깍.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두 눈에 짙은 탐욕이 맺힌다.
어, 이거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어째서인지 탐욕 어린 빛은 사라지고, 대신 음울한 어둠만 두 눈 가득 차올랐다.
"영약 제조란 말이죠...."
이신이 돋보기를 하나 꺼내서는 마력광을 들여다본다.
녹색 글자와 문양이 어지럽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돋보기.
마력광을 유지하느라 내 마력이 다 바닥날 지경이다.
내가 숨을 헥헥대기 시작할 무렵에야 이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거 대단하네요. 말로만 듣던 강철의 힘 정수입니까?"
"그거까지 아세요?"
"저도 듣는 게 있으니까요. 왜 비밀 보장해 달라고 하셨는지 알겠네요."
"크흠!"
날범이 위협하듯 숨소리를 냈다.
이신은 흐릿하게 한 번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비밀을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어. 그러다 네가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나만 손해야."
"잘 생각했다, 남자."
"어, 여진족."
이신이 다시 나를 보았다.
"정수 마력량이 부족한 모양이죠? 영약을 찾는 것을 보면요."
"정확하십니다."
"특별히 필요한 건 없어요? 특수 정제하거나, 따로 제사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거요."
"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양만 불리면 될 것 같네요."
"그렇겠죠. 초월법은 자체로 정제법이면서 제사법이니까."
응? 정제법이면서 제사법?
정제는 그렇다 쳐도, 제사?
이신이 자리에 앉았다.
한쪽 손에 턱을 괴고는 뭔가 궁리하기 시작.
한참을 그러다 손가락을 꼽아 보고는 나를 보았다.
"저기요, 김도현 씨?"
"네. 말씀하세요."
"대충 100억짜리 약이랑 50억짜리 약이랑 10억짜리 약이 있거든요? 낼 수 있어요?"
미쳤냐?
나한테 그만한 돈이 어디 있어?
날범을 돌아봤지만 날범도 사정은 마찬가지.
"돈 없다!"
더없이 당당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자연히 찌그러지는 이신의 얼굴.
"하. 그런데 영약을 만들겠다고?"
"안 되나?"
"안 되지!"
"나중에 갚겠다! 남자!"
"내가 당신 뭘 믿고? 안 돼! 이 여진족아!"
악악대며 고함을 지르는 둘.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영약에 돈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료비는 얼마나 들며, 가공에 또 얼마나 많은 품이 들어가겠어?
현실적으로, 나도 날범도 돈이 없다는 게 문제.
그렇다면....
"약사님.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뭔데? 아, 실례. 뭔데요?"
"등가 교환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저야말로 김도현 씨가 그 말을 아시는 게 신기.... 아, 마술꾼이시니까 아시겠네요."
마술꾼.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복잡한 빛이 이신의 눈을 스쳤다.
빙고.
생각대로였다.
대마법사의 후예.
마탑의 유망주.
마법도 몇 개 쓸 수 있는 이.
일도마법공이라는 별명.
과연 이 남자는 어떤 열망을 감추고 있을까?
어떤 소원을 속에 품고, 어떤 미련을 가지고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저랑 등가 교환 하나 하시죠."
"그 말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요."
"의미만 통하면 되지 않습니까. 의미만."
"그야 그렇죠. 어쨌든 뭘 교환하자는 말씀이시죠?"
이신을 본다.
눈을 들여다본다.
안경 아래에서 부유하는 [왜][곡] 두 글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지지 않고 날 마주 보는 이신.
거기다 대고 낚시를 던졌다.
"약사님께서 영약을 만들어 주는 대신, 제가 약사님을 마법사로 만들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10화 일도마법공 이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