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각성자 김극 - [서장]
요새 기시감을 자주 겪는다. 너무 심하게, 정신과에 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주.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정체 모를 기시감이 뇌리를 스쳐 멈칫한다. 게임을 해도 이미 겪은 일 같고 누군가와 시답잖은 잡담을 해도 이미 나눈 대화 같아서 미칠 지경이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지금도 그렇다.
"헌터가 범죄자 체포하거나 감금하면 체포·감금죄라고 전에 말했죠? 헌터의 형사법적 지위는 어디까지나 사인에 불과해서······"
강사가 더럽게 재미없는 수업 내용을 나불거리고 있다. 헌터 필기시험에 나올 내용이고 특별한 점은 없다.
평소라면 그냥 졸았을 것이다. 헌터 시험에 필기 비중이 작은 건 유명한 일 아닌가. 정부에서 선호하는 헌터란 사리분별을 잘하는 똑똑이가 아니라 돈 준다면 아무 괴수한테나 달려들 빡대가리란 건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난 지금 이 수업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어째서?
오늘따라 수업이 흥미로워서는 결코 아니다. 내 온몸의 신경이 이 순간에 멋대로 쏠려있을 뿐이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층간소음 신고받았다고 입주민 집에 문 따고 들어가서 층간소음 일으킨 주민 두들겨 패면 잡혀가겠죠? 헌터가 그래도 똑같아요. 벌금 내거나 깜방 가는 거야."
이 기묘한 감각······.
"다들 뉴스 보나? 요새 자기가 경찰인 줄 알고 설치다 기소되는 헌터가 많대. 대체 왜들 그러나 몰라."
나는 이 수업을 일찍이 겪어봤다고 느낀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상황에 저 강사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놈의······ 기시감이다. 이게 기시감이기는 한가 싶은, 정신병 혹은 초능력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는 데자뷔.
"물론 법에는 늘 예외가 있어요."
혼란스러워하던 중에 강사가 나를 바라봤다. 그 입이 열리자 나는 불쾌해졌다.
"그 예외가 뭘까. 김극 씨? 대답해볼래요?"
저딴 걸 왜 나한테 묻지. 한 대 처맞고 싶나.
강사의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하려던 차였다.
강사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아, 또 그거네.
*******
'헌터가 범죄자 체포하거나 감금하면······'
강사의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나는 판단했다. 환각이군.
몇 번 겪어본 일이라 새삼 헷갈리지도 않았다. 이런 경우가 요새 자주 있었다.
'헌터의 형사법적 지위는 어디까지나 사인에 불과해서······'
환각 속 강사는 방금 그 지루하고 쓸모없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 마지막에 했던 짜증 나는 질문을 내게 한다.
'물론 법에는 늘 예외가 있어요. 그 예외가 뭘까. 김극 씨? 대답해볼래요?'
환각 속 나는 멀뚱멀뚱 대답한다.
'모르겠는데요.'
강사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주절주절.
'체포·감금 행위가 정당방위·긴급피난·자구행위인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된다······ 시험에 분명 나올 거라고 내가 저번에 그랬죠. 김극 씨, 우리 학원 구세주가 이럴 거야? 실망이야 진짜.'
바로 욱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씨발 새끼가.
선생이랍시고 감히 나한테 꼽을 주다니? 저 안경잽이 멸치 새끼, 길거리에서 나랑 어깨 부딪치면 항의도 못 할 주제에······.
저 주름진 얼굴에 내 주먹을 박아넣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다.
*******
환각은 찰나의 순간 끝났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새삼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미 익숙한 일 아닌가. 그저 빠르게 상황 파악에 나섰다.
강사의 낯짝을 보았다. 저 양반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길래 나는 방금 환각에서 알게 된 내용을 읊었다.
"체포·감금행위가 정당방위·긴급피난·자구행위인 경우?"
맘에 들었나 보군. 강사가 히죽 웃었다.
"오, 김극 씨 복습 제대로 하나 봐요? 사실 수업도 열심히 안 듣는 줄 알았는데, 감동이네 이거."
강사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다른 학생들을 훑었다.
"방금 김극 씨 단어 하나하나 달달 외우는 거 봤죠? A급 각성자도 저리 열심히 공부하는데 딴 사람들이 공부 안 하면 쓰나? 이거 다들 반드시 외워요······"
팔자에도 없는 모범생 취급을 받았군그래. 하지만 칭찬 좀 받았다고 순수하게 기뻐하기는 어렵다.
강사가 수업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나는 심호흡을 했다. 화를 억누르기 위한 심호흡이다.
저 강사한테 핀잔받은 일은 환각에 불과한데도 내 머리에는 여전히 저 선생에 대한 불쾌감이 남아있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물론 이렇게 생겨난 감정이 비정상적인 건 나도 안다. 무시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
이후로는 근면한 헌터 지망생의 하루였다.
학원 헬스장에서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근력운동을 했다. 온몸의 근육이 파열될 때까지 계속.
운동을 마치기 무섭게 초재생능력이 그 모든 신체 손상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새로 생겨난 근섬유가 손상되기 전보다 크고 견고하게 부풀어 오르는 고통은 끔찍했지만, 늘 그렇듯 견뎌냈다. 몸에 듣지도 않을 진통제 따윈 복용하지도 않았다. 도수 높은 술이라도 되는 양 단백질 쉐이크나 들이켰을 뿐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나서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평소처럼, 꿈을 꾸었다.
내가 서울에 핵폭탄을 터뜨리는 꿈을. 그리하여 시뻘건 버섯 한 송이를 피워내고, 한국인 수십만 명을 살상하고서 나 또한 죽어버리는······.
그놈의 기시감이 시작된 날부터 끊이지 않고 반복된 꿈이었다.
*******
2화 김극 - [1]
그놈의 게이트가 열린 날, 우리 남매는 각성했다. 그러니까 오빠와 여동생이 둘 다 초능력자가 됐다는 소리다.
근사한 일 같아도 우리 삶에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신체강화 각성자임이 판명된 난 몇 달 뒤 UFC에서 쫓겨났다. 이런 부류의 각성자는 스포츠 선수로 활동할 수 없다. 그놈의 각성이 자의적 행위가 아니란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제기랄.
그리고 내 여동생은, 감방에 갔다. 정확히는 여자교도소 소년수 건물에 수감됐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인권단체까지 찾아와서 질질 짜고 있는 거죠. 마저 설명할까요?"
내 하소연에 인권단체 아줌마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줌마 이름이 박미형이랬지 아마.
"계속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여동생분 학교에서······"
"내 여동생 학교에서 일진 다섯 명이 죽었어요. 그 일진 씨발년들은 평소에 내 여동생을 죽도록 괴롭혔다 하고요."
"왕따였다죠, 여동생분이."
"그래요. 결국 내 여동생이 피의자로 지목됐고······ 유죄 판결이 났어요. 물증도 없이. 이게 말이 돼요? 무죄추정 원칙은 어디 갔답니까?"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데. 박미형 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입을 열었다.
"소위 유죄추정 원칙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어요."
"물증이 없는데도 유죄인 게 말이 된다고요?"
"말이 안 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이 일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건 절대 아닌데, 성폭행 관련 재판들 봐요. 물증 없이 피해자 발언만 일관적이어도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거 알죠?"
"예. 그래서 무고하게 옥살이하는 양반들이 많다던데."
"그렇듯 문제가 많지만 그러는 이유가 있긴 있어요. 성범죄 특성상 증거를 얻기 어렵거든. 그러니 정황상 유죄다 싶으면 유죄 주는 거지요. 그래서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냐면, 각성자들은······ 알죠?"
"알긴 뭘 알아요?"
박미형 씨는 한숨 쉬더니 말했다.
"각성자들은 현재 수사법으로 밝혀내지 못할 완전범죄를 너무 쉽게 해낸다는 거요."
뭔 소리를 하려는지 대충은 알겠다.
소위 각성자, 우리 초능력자들은, 평생 추리 만화 한 권 읽어본 적 없어도 국과수를 쉽게 농락할 수 있다. 그저 싫은 사람을 뻔히 쳐다보기만 해도 그 인간의 뇌혈관을 얼려버리거나 심장을 으깨버릴 수 있는 각성자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가? 추리소설에 초능력을 등장시키는 게 괜히 금기가 아닌 법이다.
그리고 내 여동생은 쳐다보기만 해도 뇌혈관을 얼릴 수 있는 쪽이었다. 그런데도 웬 년들이 모여서 겁도 없이 괴롭혀대다니? 그러다 죽을 줄 몰랐나 보지, 버러지 년들.
"요새 이런 사건이 한둘이 아니에요. 각성자 관련 판결들은 죄다 이래."
내가 속으로 분개하는 가운데 박미형 씨는 대충 이런 말들을 했다.
초상 범죄에 물증을 확보하기는 어려우니까 심증만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진다느니. 범죄 현장 근처에 있던 사람이 각성자란 이유만으로 피의자로 지목되는 일은 지나치게 흔하다느니.
누군가가 죽었을 때 친족 중에 각성자가 있다면 거의 반드시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다느니 어쩌느니.
"거듭 말씀드리는데 당연히 저도 이게 올바른 일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연 듣고 도와드리려는 거고요."
그러면서 박미형 씨는 자신 또한 각성자라고 했다. 같은 각성자로서 억울한 처지에 놓인 내 여동생을 최대한 도울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후로 내 일과의 대부분은 인권단체와 함께였다.
정말이지 별짓을 다 했다. 단체에서 불러 모은 카메라들 앞에서 난생처음 기자회견이란 것도 해보고, 눈물도 짜보고, 단체시위에 나가서 다 함께 소리도 질러 보고, 사무실에 들이닥친 습격자들을 문 밖으로 집어 던져도 보고······.
성과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긴 뭐하니 했던 헛짓거리들.
그리고 요새 진행하는 헛짓거리는 1인 시위였다. 내 여동생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그 법원 앞에서의 1인 시위 말이다.
나는 법원 후문 앞에 홀로 며칠 내내 서 있었다. 인권단체에서 마련해준 패널 두 개를 가지고서, 잠도 자지 않은 채 쭉 그렇게 했다.
그 짓거리를 한 지 오늘로 일주일이 넘은 지금, 내 감상은 이렇다.
진짜 지랄 같네.
신체강화자답게 다리가 저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끔찍하게 지루했다. 또한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다시 말하건대 이 모든 짓거리는 뭐라도 하는 걸 보이기 위한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여동생이 출소했을 때 제 오빠가 방구석에서 롤이나 하며 낄낄거리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그런 짓거리 말이다.
내 시위는 공중파 뉴스에 나온 적도 없고 성인광고 덕지덕지 달린 인터넷 기사에 몇 줄 나왔을 뿐이란 걸 직접 검색해봐서 안다.
그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은 '저 용역깡패 새끼 얼마 받고 저러냐' 한 줄뿐이었단 것도 직접 봐서 안다.
애초에 난 여동생 그년이랑 전혀 친하지 않았는데. 하여간 이 모든 것이 보람도 쓸모도 없었다. 그저 독기만 남아 오기로 이어나갈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법원에 드나드는 법관들을 노려보며,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걱정되는지 쭉 나를 지켜보는 법원 경비와 눈씨름도 하며 생각했다.
여동생만 출소하면 그년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날 것이다. 강력한 각성자가 필요한 국가는 많으니까 맘만 먹으면 어딜 가든 잘 먹고 잘살 수 있겠지. 찾아보면 전과기록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 나라가 있으리라······
······한창 망상하던 중에 망상이 멈췄다. 내 의지가 아닌 외부적인 이유로.
환각들······.
재생되던 비디오테이프를 억지로 꺼내고 새 비디오테이프를 넣은 것처럼, 내 머릿속에 내 생각이 아닌 소리와 영상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새장에서 빠져나와 창밖으로 날아오르는 새. 야반도주에 성공한 노비. 족쇄를 부수고 탈출한 흑인 노예. 전란을 피해 바다를 가르는 이민선. 거대한 미로의 출구에 도달한 고대 전사.
탈출과 이동의 장면들. 온갖 추상적인 상징들.
어지러울 만치 머리를 꽉 채운 환영들 속에서 나는 놀랐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 아니었다.
이것은 각성이었다. 두 번째 각성.
나는 일찍이 이 비슷한 순간을 겪은 적이 있었다. 옥타곤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을 때, 주먹을 높이 든 그때에도 나는 이런 환각들을 겪었다. 그때 나는 신체강화 각성자로 각성했다······.
그런데, 어?
"아저씨! 언제 거기 들어갔어요? 빨리 나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법원 담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위험인물의 돌출행동에 기겁했는지 경비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손짓하고 있었고 말이다.
내가 공간이동 능력에 각성했단 사실은 수 시간 후에야 알았다.
이 초능력에 각성한 사람이 나 이외에 몇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희소하기 그지없는 부류의 각성자였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
그로부터 반년이 흐른 뒤, 나는 시위고 연대운동이고 뭐고 전부 그만둬야 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우선 하나는 내 저축이 다 떨어진 탓이었다. 선수 생활과 트레이너 노릇으로 벌어둔 돈으로는 더 버틸 수가 없더라.
과자 한 봉지가 두 달 전엔 이만 원이더니 이번 달엔 삼만 원이고 다음 달엔 오만 원 하는 세상 아닌가. 아동용 경제 학습만화에나 나올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내 저축은 돈 한 푼 쓰지 않아도 마구 가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 끔찍한 경제 상황 속에서 내가 몸담은 인권단체인 대한각성연대가 해산됐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우릴 눈엣가시로 여긴 나머지 어떤 압박이라도 해서 해체된 것이라면 비장미라도 있었으련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내 저축이 다 떨어졌듯 이 단체의 후원금이며 활동 자금도 다 떨어졌을 뿐이다.
온갖 은행이며 기업들이 죄 파산한 판국이다. 시민단체와 그 구성원인들 인들 이 끔찍한 경제난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빌어먹을 게이트. 빌어먹을 괴수들.
"그동안 고생했어요, 김극 씨. 여동생분 빨리 풀려나길 기도할게요."
나와 마찬가지로 인권운동가들 개개인 또한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했다. 다들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슬슬 빈 사무실을 떠나려던 차였다.
「김극 씨? 우리 밥 좀 같이 먹으면서 얘기 좀 할까요?」
인권단체 아줌마, 박미형 씨가 만나자고 했다.
바라는 대로 만났더니 박미형 씨는 좋은 옷차림에 말끔한 얼굴이었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다른 인권운동가들과 달리 신수가 훤해 보였다. 하기야 원래부터 돈 많은 아줌마였던가.
"시의원 당선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내 말에 박미형 씨는 어색하게 웃더니 안부를 물어왔다.
"그래서 김극 씨, 요새 어때요?"
"어떻긴요. 그냥 거지 같지."
"그치. 요새 다 힘들죠."
그런 것치고 아줌마는 잘 먹고 잘사는 것 같은데, 하고 비꼬지는 않았다. 이 아줌마한테 신세 진 게 많거든. 요새 내가 공짜로 먹고 자는 빌라부터가 이 아줌마 건물이라 뭐라 하기 어렵다.
묵묵히 듣고 있자니 박미형 씨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김극 씨. 당장 할 일은 있어요?"
"딱히요. 왜요?"
"혹시 헌터 하실 맘 있으신가 해서."
난 이 말에는 못 참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전과 있어서 헌터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전과 있으면 헌터 면허를 못 따요. 그래서 여동생 출소하면 이민 가려는 건데."
"그게, 법이 개정된대요."
박미형 씨가 말하길, 헌터 면허 취득기준이 대폭 완화된다는 것이었다. 기존 법으론 형을 받은 지 5년이 지나지 않았으면 총기 소지를 금했고 헌터 면허도 주지 않았는데 이번에 전부 개정될 것이라고.
"수요에 비해 헌터가 부족하고 각성자 헌터는 더욱 부족해요. 전과고 뭐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헌터 노릇할 수 있게 바꿀 예정이야. 늦어도 올 7월까지 바꿀 거라길래 알려주려고 불렀죠. 그래서 어때요? 해볼 맘 있나?"
뭐라고 감사를 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엄마가 살아있었어도 이 아줌마보다 날 챙겨주진 않았으리라. 분명하다.
나는 속으로 할 말을 고르다가 이내 말했다.
"그래요, 해보죠. 헌터."
*******
3화 학원 수강생 김극 - [1]
약 사 년 전부터, 한국은 거의 망했다.
상황이 어쩔 수 없기는 하다. 괴수들이 주거지들을 습격해 도시의 태반이 슬럼화하고 식인 정령들이 해운을 마비시킨 상황에는 어느 나라든 멀쩡할 수 없는 법 아닌가.
이 와중에 국뽕 TV가 늘어난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뭐라도 취할 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는 낫다는 사실, 그러니까 한국이 거의 망했을 때 다른 나라들은 아예 망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한국인들을 몹시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하는 모양이다.
차라리 한국도 아주 망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죽겠다.
*******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공무원 학원 아니면 헌터 학원뿐이다.
옷가게며 네일샵 따위가 몇 곳 보이지만 죄다 망했는지 불이 꺼져있다. 음식점들도 죄 셔터를 내린 가운데 편의점 하나가 달랑 남아서는 쌀과 라면만 잔뜩 쌓아놓고 파는 중이다. 이곳이 한국의 정신적 수도 인천이란 사실을 새삼 믿기가 어렵다. 젠장.
헌터 학원 중에 제일 볼품없는 곳에 들어섰다.
젊은 여자가 접수대에 앉아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움찔하는 것이 내 덩치에 겁먹은 모양이지. 귀여운 년.
"학원 등록하러 오셨어요?"
여자가 억지로나마 웃었지만 나는 웃지 않고 되물었다.
"예. 한 달에 얼맙니까?"
여자는 우선 상담부터 마쳐야 학원비가 결정된다고 설명하더니 원장님을 불러오겠다며 도망쳤다.
잠시 후 원장인 듯한 남자가 와서는 친한 척을 해댔다.
"보디빌더신가? 몸이 엄청 좋으시네! 진작부터 헌터 되려고 준비하셨나 봐요. 군필이세요?"
"아뇨."
"그럼 사격법 같은 건 추가로 교육받으셔야겠고······ 각성은 안 하셨죠?"
"각성했는데요."
내가 짧게 대답했더니 원장은 어째 놀란 눈치였다. 그는 크게 뜬 눈으로 날 보더니 어리둥절한 듯 내게 물었다.
"각성자시라고요?"
"왜요. 각성자 안 받아요?"
"아뇨, 그게 아니라. 수강생분들 중에 각성하신 분들은 별로 없어서 말입니다. 어, 잠시만요. 여기 수강신청서에다 뭔 능력인지 구체적으로 적어주시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원장은 내가 작성한 수강신청서를 받아들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신체강화에 공간이동?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죠······"
"나 시간 별로 없어요."
내가 짜증 냈는데도 원장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나와 종이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스마트폰을 켜며 물었다.
"성함이?"
"김극이요."
내 대답에 원장은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는 듯했다. 그러곤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맞네. 네이버에 치니까 얼굴 나오네. 아이고, UFC 선수셨구나? 2전 2승 하시고서 한 번 각성하셨고, 대한각성연대 활동하시다가 또 각성하신?"
"그게 인터넷에 다 나와요?"
"나오네요. 하여튼 대단하신 분이었네. 그래서······ 이 학원 다니시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누구 소개를 받았다거나?"
"그냥 여기가 싸 보이길래."
나는 그리 대답하고서 좀 무례하게 대답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원장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 그치. 여기가 싸긴 싸요. 그래서 정말 등록 하시려구?"
나는 그럼 가짜로 등록하러 왔겠느냐 되물었고 원장은 내 대답에 만족하면서도 불안한 듯한 눈치였다.
자꾸 저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각성자 수강생이 몇 없다더니 가르치기가 어렵나? 각성자는 수강생으로 들이기 꺼려지는 건가?
"그래서 수강료 얼맙니까?"
내가 불퉁하게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김극 씨 같은 각성자 분들은 수강료 공짜예요. 교재비랑 헬스장 이용도 무료고요. 사격장 이용료랑 탄약값도 학원에서 내드려요. 거기에 꾸준히 나오시는 거 확인되면 식비랑 교통비도 지원해드려."
나는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물었다.
"왜요?"
"각성자 헌터 누구누구 데뷔시켰다고 학원 광고에 좀 쓰려고요. 또 학원 강사들 커리어도 챙겨주고, 수강생들 인맥도 챙겨주고 해야 하니까. 김극 씨는 이름이랑 초상권 사용에 동의만 해주시면······"
생각지도 못한 특혜였다.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해 동의했고 원장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당황하여 몸이 굳었다.
원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는 게 아닌가.
이 양반이 지금 뭐 하는 거냐? 내가 확 밀쳐내기도 전에 원장이 말했다.
"고마워요. 잘 와줬어 정말. 나도 이제 운이 좀 트이나 보다. 꿈자리가 좋더라니 이런 귀빈이 다 와주고······."
*******
쪽팔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사님들! 잠시 다 여기 와봐. 이 늠름하신 분 보이지? 앞으로 이분 집중적으로 챙겨야 돼. 이분이 말이야, 어?"
원장에게서 날 소개받은 학원 강사는 날 한동안 멀뚱히 쳐다봤고, 갑자기 내게 악수를 청해 나를 당황케 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자 수강생끼리 딱히 친목을 다지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는데도 강사는 굳이 날 모두에게 소개했다.
"다들 이분 봐요. 김극 씨라고, 다들 이분이랑 친해져야 할 거야. 이분이 글쎄······"
내가 UFC 선수였다는 설명에서 수강생들은 오, 하고 한번 감탄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두 가지 능력을 지닌 각성자라는 설명에 이르렀을 때, 그러니까 신체강화니 공간이동니 하는 내 초능력들이 언급된 순간에는 방금까지 멀뚱멀뚱 듣고 있던 수강생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와."
"개부러워, 씨발······."
이런 반응은 꽤 신선했다. 격투기 선수였단 사실보단 각성자란 사실이 훨씬 대단하게 여겨지는 모양이지?
그리하여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가운데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격 시간이었다. 학원 근처에 사격장이 따로 있어서 다들 실탄을 가지고 사격했다.
내 옆에는 강사 한 명이 옆에 달라붙었다. 강사는 영점조절이란 걸 해주더니 내게 총 한 자루를 들려주었는데, 내가 사격 관련 지시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자 의아한 듯했다.
"총 처음 쏴보세요?"
"예, 뭐."
"키가 너무 크셔서 군에서 안 받아줬나? 그래도 훈련소에서 쏴보지 않았어요?"
"훈련소를 가긴 갔는데."
"하기야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도 안 나시겠다."
입소 첫날 훈련소 조교를 폭행해서 총 한 발 쏴보지도 못했단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나이 먹고 보니 이게 자랑스레 떠벌릴 일이 아닌 걸 알겠더라고.
한편 강사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는데도 짜증스럽거나 귀찮은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내게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차근차근 알려주더니, 내게 한번 쏴보라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쐈다. 쏘는 족족 명중하자 강사는 감탄하다 말고 혀를 찼다.
"아, 처음이신데도 너무 잘 맞히셔서 이상하다 싶더니 신체강화자라 그렇구나. 완력이 너무 강하니까 반동이 의미가 없나 봐요. 신체강화자들 전용 총이 따로 있으니까 그걸로 쏴야 연습이 되겠는데······ 기다려봐요. 내가 이번 주까지 어떻게든 구해올 테니까."
강사가 나한테 말하던 중에 근처에 있던 수강생이 끼어들었다.
"강사님 헌터 라이플 빌려오시게요? 그거 이름만 라이플이지 중화기라서 못 빌리지 않나?"
"경찰 아저씨들한테 뽀찌 좀 주면 빌려줄 것 같은데······."
"그래도 그거 아무거나 빌려오면 안 될걸요? 17kg짜리며 22kg짜리며 무게별로 천차만별이잖아요. 먼저 신체 능력 검사부터 해야······"
강사에 수강생들까지 내가 쓸 총기를 두고 토론하고 있었다. 나한테 쏟아지는 이 관심이 과하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계속 당황스럽게도, 이후로도 이 과한 호의는 계속되었다.
나를 제외한 수강생 모두가 군필인 듯 장전이며 탄창 교체며 알아서 잘하는 중에 나 혼자 쩔쩔맸다. 그러면? 강사는 물론 옆자리 수강생까지 불평 한마디 없이 날 돕는 것이었다. 내가 헌터 학원에 온 건지 유치원에 온 건지 긴가민가하더라.
이때 내가 의아하게 여긴 것은 수강생들의 관심과 호의였다.
학원 강사가 날 신경 써주는 것은 원장 지시가 있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수강생들이 그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화장실 거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내가 사람들이 먼저 다가올 만한 면상은 아닌데, 어째서?
정말이지 쉬는 시간마다 수강생들이 얼마나 많이 말을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얌전히 앉아서 웬 형법 강의까지 듣고 나니 수강생 하나가 또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형? 형법 수업은 대충 들어도 돼요."
"나 거지라서 합격 바로 못 하면 굶어야 되는데."
"이 수업 안 들어도 합격해요. 헌터 필기가 운전면허 필기보다 훨씬 쉬운 거 몰라요? 초등학교 도덕 시험처럼 대충 착해 보이는 거 찍으면 합격이라니까."
"그 정도로 쉽나?"
"어. 헌터 시험 자체가 엄청 쉬워요. 나라에 괴수 사냥할 헌터 맨날 부족하잖아?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사지 멀쩡하면 합격시켜주는 수준이래요."
"그럼 학원은 왜 다녀."
"헌터 된 이후가 어려우니까······. 헌터 생활하는 중에 욕 안 먹고 안 죽으려고 학원 다니는 거죠. 그런데 형법? 이건 헌터 되기 전이나 된 후나 필요 없으니까 안 들어도 돼. 진짜예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걸."
"안 들어도 되는 수업이면 강의목록에 왜 있대요?"
"구색 맞추기지 뭐."
"선생 말론 이 수업 엄청 중요하다던데."
"잘리기 싫으니까 우기는 거죠. 형법 강사가 원래 공무원 학원에서 형사법 강의하던 양반이라는데, 요새 경찰 공무원이 인기가 너무 없잖아요? 강의 들으러 수강생이 안 들어오니까 결국 공무원 학원에서 잘린 거지. 여기서도 잘리면 굶어 죽으니까 자리보전하려고 엄청 열심인데 대충 흘려들어요. 저 안경잽이가 헌터 일을 해봤겠어, 업계를 잘 알겠어? 나보다 몰라요. 진짜야."
"그쪽은 헌터 업계 잘 아나 봐?"
"잘 안다기보다는 좆문가? 대충 그런 거지. 헌터 커뮤니티를 하거든요."
"헌터 커뮤니티? 인터넷이요?"
"헌트웹, 몰라요?"
수강생은 그놈의 커뮤니티를 꼭 들어가 보라고, 그 사이트에 현직 헌터들이 많아서 업계 돌아가는 사정이며 이런저런 정보를 습득하기엔 학원 강사들한테 물어보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형은 각성자니까 각성자 인증하고 배지 꼭 달아요!"라고도 말했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고.
이후로 몇 가지 수업을 듣고 나니 헌터 학원에서의 하루가 끝났다.
4화 학원 수강생 김극 - [2]
"내일도 꼭 나오셔야 해요. 안 나오시면 나 울어. 응?"
내가 귀가하려니 원장이 직접 문밖까지 나왔다. 원장은 차비랍시고 이만 원을 쥐여주며 날 배웅했는데, 이쯤 되니 부담스러운 걸 넘어 웃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자니, 이 모든 것이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들떴다. 어째서? 각성자라는 이유로 온갖 특별대우를 받아서?
맞다. 이렇게 대우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걸 왜 미리 몰랐느냐면, 헌터 업계에서 각성자들이 곧 귀족이요 신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몰라서는 아니었다. 내가 원래 해외 나가서 헌터 노릇 하려던 것부터가 나야말로 헌터 노릇에 최적화된 인재임을 알았기 때문 아니던가.
그렇듯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도 이 모든 대우가 새삼 놀랍게 여겨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놈의 인권단체 활동을 너무 오래 해서 그렇다. 불쌍한 각성자들만 보고 살아서.
각성자 인권단체,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할 때 나는 '불쌍한' 각성자들을 접하곤 했다.
각성자들도 다 같은 각성자가 아니다. 모두의 주목과 부러움을 받는 각성자들과 옛날 나병환자 취급받는 각성자들이 따로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정말이지 사는 꼴들이 불쌍하다. 그들은 그저 각성했단 이유만으로 범죄 용의자로 지목되거나 주택 월세 및 전세를 거절당하며, 심지어 돈이 있어도 아파트 매매마저 거부당한 나머지 특별한 수용시설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대한각성연대에서 내가 주로 보던 각성자들이 그런 치들이었다.
전자, 그러니까 헌터 따윌 하며 메이저리거처럼 잘 먹고 잘사는 각성자들은?
바로 나와 같은 경우다. 딱 봐도 강력하고 유용한 능력을 얻은 각성자들.
그리고 나는 불쌍한 각성자들만 보며 활동하다 보니 어느새 모든 각성자를 핍박받는 사회적 약자로 여겨왔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 또한 그들과 같은 각성자란 이유로 나 자신마저 그 불쌍한 치들과 동일시 했던 모양이고.
그래온 탓에 각성자로서의 자존심이 저도 모르게 내려가 있다가, 오늘 귀빈 취급을 받으니 우쭐해진 셈이다.
아니면 비로소 현실을 자각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팔자에도 없는 인권운동 하던 시절에 길거리 행인들에게도 무시당하다가 오늘 일로 자존감이 충족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유쾌하다. 기분이 끝내준다. 정말로.
*******
학원에 가기 전 잠시 컴퓨터를 켰다.
수강생이 추천한 사이트가 헌트웹이던가? 뭐 얻어갈 거 있나 하는 생각으로 그놈의 사이트에 접속했다.
Ⓑ GoodHunter : 헌터 면허취득 기준 완화 확정. 전과자들 헌터업 유입되면 물 흐려질 거 각오해야
Ⓐ syberMagneto : 비각성자 싹 다 가스실 보내야 하면 개추
잠시 사이트 분위기를 살피다가, 빠르게 회원가입을 했다.
내가 하는 게임 속 특정 유저층의 말투를 흉내 내어 글 하나를 작성했다.
BabyBerserker : 아조씨들 질문 있어양!
울 학원에 각성자 옵바야가 새로 왔는데양! 학원 아조씨들이 각성자 옵바한테 엄청 친절하게 구는 거예양!
이 각성자 옵바야 보니까 수강료는 완전 무료인 것 같고양! 수업 시간에 뭐 할 줄 모르면 강사는 물론이고 수강생들까지 옆에서 친절하게 챙겨줘양!
그러는 이유가 있어양? 학원에 비각성자들만 다니던데 각성자가 신기해서 그러는 걸까양?
그러고서 새로고침 할 때마다 댓글이 갱신되는 수에 놀랐다.
이용자 한번 더럽게 많네. 한국에 헌터가 이렇게 많나?
익명 : 말투 어지럽네······.
Ⓐ syberMagneto : 새로 왔다는 각성자 혹시 얼레기임? 얼레기면 괴롭혀서 내쫓으려고 그러는 듯
BabyBerserker : 얼레기가 뭐예양?
Ⓐ syberMagneto : 얼음 능력자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내 여동생은 인터넷에서도 불가촉천민 취급이구나. 불쌍한 년.
BabyBerserker : 아니에양! 신체강화랑 또 뭔 신기한 능력 있었어양!!
익명 : 오······. A급이네. 그럼 가끔 음료수나 커피 뽑아서 바쳐
BabyBerserker : 돈 없어양 ㅠ
익명 : 그럼 가끔 똥꼬라도 빨아주든가. 아무튼 헌터 생활 진지하게 할 거면 무조건 잘 보여라
BabyBerserker : 왜양? 각성자랑 친해지면 뭐 좋아양?
ㅁㅁ : 훨씬 덜 뒤짐. 훨씬 돈 더 벎.
그 아래로도 귀여운 신입에게 조언하려는 댓글이 여럿 달렸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더라.
1. 각성자가 속한 헌터팀은 비각성자들만으로 이루어진 헌터팀보다 수십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다. 이때 헌터팀 인원을 선별할 권한은 각성자에게 있으니 잘 보여야 한다.
2. 헌터 학원의 각성자는 그 학원의 가장 중요한 인맥이다.
학원에서는 한때 자기네 수강생이었던 각성자에게 연락하여 학원 수강생 중 에이스급을 팀원으로 영입하도록 권한다.
이러면 각성자는 주기적으로 좋은 팀원을 수급할 수 있어 이득이요, 학원은 각성자 헌터팀에 자기 수강생들을 꽂아 넣을 수 있어 여러모로 이득이다.
아무튼 주된 내용은 헌터 학원이든, 헌터 지망생이든 각성자와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원 수강생들이 내게 보인 태도를 이제 좀 알겠군.
전체적으로 만족스럽다.
*******
이후로도 흡족한 수강생의 나날이었다.
설마 내가 아침에 일어나 학원에 갈 시간 따윌 기대하게 될 줄이야.
벌써 학원에 다닌 지 몇 주가 지났지만, 학원 수강생들은 여전히 내게 사근사근하다. 내가 결코 사교성 있는 성격이 아님에도 다들 먼저 인사하거나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하도 친한 척하길래 정말 친해진 수강생도 몇 생겼고, 아직 친하지 않은 수강생이야 여럿 있어도 날 굳이 열받게 하는 수강생은 전혀 없다. 음, 이 정도면 완벽한 인간관계 아닌가.
물론 기껏 학원에 와서 친목이나 다진 것은 아니다. 나는 학원이 제공하는 모든 커리큘럼에 참여했고, 온갖 괴수들의 상대법이며 군용 장비 사용법 등을 익혔다.
무엇보다, 각성자로서의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김극 씨? 같은 신체강화자끼리 인사 좀 나누죠."
신체강화자의 훈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같은 신체강화자뿐이라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신체강화자가 벤치프레스 할 때 바벨 같이 들어주는 것도 일반인은 해주기 어렵다. 신체강화자가 쓰는 운동기구 무게를 일반인은 감당할 수 없거든.
그리고 강사 중에 각성자가 한 명 있었다. 신체강화자라는데 확실히 핏만 봐도 티가 나더라.
"제 이름 양태자, 너무 옛날 사람 이름 같죠? 저도 제 이름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냥 양쌤이라 불러줘요."
"예, 양쌤."
"벌써 친한 척하니 좀 부담스러우실 텐데 그냥 참아요. 우리 빨리 친해져야 해. 보니까 회원님 학원 그만 다니실 때까지 제가 전담 트레이너로 붙어 다닐 거 같거든."
"전담 트레이너요?"
"덕분에 월급이 늘었죠!"
양태자는 흐 하고 웃더니 내게 덤벨을 들어보라길래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양손에 덤벨 하나씩 쥐고서 500kg짜리는 매우 가볍게, 1T짜리도 가볍게 들어 올리니 양태자가 보면서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각성하시고서 운동 꾸준히 하셨나 봐요? 하기야 UFC 선수셨다고 하셨지."
양태자는 이 정도면 각성자 헌터 심사에서 A급은 수월하게 받아낼 거라고, 심사 날까지 큰 부상만 없으면 충분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부상 좀 당해도 돼요. 저 초재생능력 있어요."
"어, 진짜요?"
"예. 막 영화 속 울버린처럼 잘린 신체 부위가 순식간에 낫는 수준은 아닌데, 그래도 수술하고서 몇 달 걸려 완치될 부상이 하루 만에 자연치유 될 수준은 돼요. 운동하다 입을 부상이면 자고 일어나면 나을 거고."
"어우 씨, 하기야 신체강화자도 다 같은 신체강화자가 아니죠? 난 그런 능력 없는데. 세상 불공평하네 진짜."
이후론 양태자의 지도 하에 벤치프레스도 했는데, 확실히 평소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뒤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으니 평소에는 자칫하면 깔릴까 봐 들지 않던 무게의 바벨도 들 수 있어서.
오랜만에 제대로 운동했단 느낌에 충만감이 가득한 가운데, 오후에는 사격장에 가서 총까지 쐈다.
웬 강사가 빌려오겠다던 헌터 라이플. 실제로 보니 확실히 일반인이 들고 쏠 무게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초딩 하나보단 무거울 법한 총 한 자루를 멍하니 보았다.
"이게 헌터 라이플이에요?"
신체강화자로서 이 무기를 써본 적이 있는 모양이다. 양태자는 직접 탄창 교체며 장전하는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예. 더럽게 크고 뚱뚱하죠? 중화기를 돌격소총처럼 쓸 수 있게 개조해서 그래요. 너무 못생겨서 밀덕들이 혐오하긴 하는데,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신체강화자 아니면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만 쓸 수 있는 무기입니다. 자, 한번 쏴봐요!"
"잘 안 맞네요."
"반동이 세니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호흡도 골라가며 쏘셔야 해요. 탄약값 비싸니까 너무 막 쏘진 마시구······ 이번엔 지향사격도······ 이야. 성대하게 빗나가네? 연습 많이 하셔야겠다."
그리고 사격장에서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 양태자가 갑자기 뜬금없는 요구를 해왔다.
"걸어가기 귀찮지 않아요? 공간이동으로 단번에, 어때요?"
"공간이동으로 같이 학원 가자고요?"
"예. 좀 먼가? 삼백 미터 거린데."
"가려면 갈 수 있긴 한데, 원래 잘 안 쓰는데. 텔레포트요."
"에이, 그러지 말고! 저번에 다른 사람 하나 붙잡으면 같이 이동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설마 나랑 손잡기 싫어서 그래?"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 안 써요. 일단 말하니까 한번 써볼게."
나는 양태자의 어깨를 붙잡은 뒤, 정신을 집중했다.
그와 함께 가상의 그물망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나 자신만 인지할 수 있는, 촘촘하고 규칙적인 그물망이다.
그물망은 내 순간이동의 최대 거리인 반경 360m까지 뻗어나가 그 범위를 완전히 뒤덮는다.
그물망에 뒤덮인 세상은 장기판처럼 조각조각 분할된다. 분할된 그 정보가 내 뇌에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나는 내 뇌에 생겨난 입체 지도를 살핀다.
씨······, 머리 아파.
그물망에 비둘기며 사람 따위가 포착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 두통을 참아내려 애쓰며 최대한 빠르게 학원의 위치를 찾으려 애썼는데, 영 쉽지가 않다.
조작감이 더러운 게임패드로 지도를 움직여가며 특정 사물을 클릭해야 하는 느낌······.
"오!"
주변 배경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감탄사가 들려왔다.
순간이동에 성공한 것이다.
5화 학원 수강생 김극 - [3]
나는 우리가 학원 앞에 도달했음을 확인한 즉시 주변에 뻗어나간 그물망을 회수했다. 가벼운 현기증 속에서 양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끝내주······ 왜 표정이 그리 안 좋아요?"
"순간이동 할 때마다 신경계에 부하가 가요. 피곤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막 그래."
"딸친 것처럼요?"
이 천박한 새끼. 나는 눈살을 찌푸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요. 아무튼 그래서 잘 안 써요. 초재생능력 덕에 시간 지나면 피로가 금방 회복되긴 하는데, 다 회복될 때까진 온몸에서 힘도 빠지고 집중도 어려워지니까."
"아직 능력 사용에 익숙하지 않으신가 보다. 연습 도와드릴 방법을 찾아볼까요?"
"굳이? 내 듣기론 서울 쪽 고급 센터들에서도 이런 특수 초능력들은 훈련 시킬 방법을 전혀 모른다던데요. 명상이니 뭐니 하면서 웬 종교색채 짙은 이상한 수행들이나 시킨다던데."
"그래도 아깝지 않아요? 그리 귀중한 능력인데 쓰면 피곤하다고 안 쓰긴 좀 그렇잖아요."
"뭐 자주 쓰다 보면 는다니까, 시간 흐르면 어련히 늘겠지 하고 있습니다."
"잘 안 쓰신다매?"
"자기 전에 연습하려고 몇 번 써요. 자기 전이면 피곤해져도 괜찮으니까."
"그걸로 연습이 되나?"
"조금씩 나아지는 거 같긴 해요. 일상에서는 없는 능력이려니 여기고 살긴 하는데······."
그나마 시야 범위 내에 공간이동하는 것은 훨씬 쉽고 훨씬 덜 피로하다고, 그래도 어지간하면 걷거나 뛴다고 설명했더니 양태자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듯했다.
"하기야 뭐, 신체강화만으로도 A급 확정이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영 찝찝한 표정이었다. 기껏 있는 능력을 썩힌다고 생각해서 아까운 걸까?
뭐 어쩔 수 없다. 나 이외 다른 공간이동자의 사례도 찾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외국인도 이 능력을 실용적으로 활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 회계사 일이나 계속하고 있다더라.
그리고 내 경우에는 훈련하는 족족 성장하는 다른 능력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능력은 이쪽이다.
"김극 씨 진짜 열심히네요. 또 전력으로 운동하시게?"
"초재생능력자니까요. 운동하는 족족 근육이 붙으니 안 하고 놀면 아깝죠?"
나는 양태자와 함께, 학원에 돌아와서도 쉬지 않고 다시 근력운동을 했다.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전력으로, 완전히 탈진될 때까지 운동을 거듭하고 나니 비로소 하루를 알차게 보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당연히 공간이동 따윈 하지 않고 걸어서 집에 가자니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박미형 씨였다. 여러모로 고마운 아줌마.
「어때요, 할 만해요?」
왜 전화하셨느냐 물으니 살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수강료랑 생활비는 충분하신가 하고 연락드렸지! 혹시 필요하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 수 있잖아」
"고마운데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슬슬 생활비 다 떨어져 간다고 하소연했던 거 기억나는데?」
이 아줌마는 내가 얼마나 잘나신 놈인지 모르나 본데.
나는 수강료는 전액 면제이며, 오늘은 전담 트레이너까지 붙었는데 그마저 면제라고, 이대로면 A급 헌터로서의 탄탄대로가 확실하다고 자랑했다.
그러고서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걔 출소했을 때 지 오빠가 포르쉐 끌고 오면 엄청 든든하지 않겠어요?"
여동생 년을 일찍 출소시키자는 계획은 사실 인권운동 할 때부터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새로 세운 계획은 A급 헌터, 그러니까 의사며 변호사 같은 직업조차 바라기 어려운 수입을 거두는 갑부가 되어 여동생을 부양하잔 것이다.
그 찌질한 년, 살인 전과 탓에 인생 망했다고 수감실에서 질질 짜고 있겠지?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교도소를 나올 여동생에게 두둑한 통장과 그년 명의의 스포츠카 한 대를 선물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 못생긴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나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분명하다.
그리고 이 계획은, 그저 이대로 밥 먹고 학원 가서 훈련하다 보면 저절로 실현될 것 같단 점에서 훌륭했다.
「확실히 내 오빠가 그래줘도 든든하겠네」
"그렇겠죠?"
「그럼요! 분명 잘 될 거야, 김극 씨」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느끼건대 매우 긴 꿈이었던 듯하다.
또한 꿈속에서 내가 울었고, 화냈으며, 포효하듯 소리 질렀다는 것이 얼추 기억난다.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꿈의 마지막 장면······.
버섯구름.
꿈속에서 나는 핵폭탄을 터뜨렸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사람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도록 그렇게 했다.
길몽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꿈속에서 느낀 감정이 깬 뒤에도 한동안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 이 꿈의 잔류물들은······ 끔찍하다.
제기랄, 토할 것 같다.
심지어 볼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길래 얼굴을 훔쳐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심호흡했다.
진짜, 씨바알······.
이토록 꿈자리가 사나운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요새 쭉 좋았는데 왜 이러지?
갑자기 불길해진다.
*******
맨 먼저 이상을 느낀 것은 학원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종이컵에 물을 받고 있던 원장과 눈을 마주쳤다. 원장은 날 보자마자 만면의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했다.
"오, 일찍 왔네요? 김극 씨 되게 성실해!"
그리고 나는 마주 웃으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어딘가로 내 의식이 빨려드는 느낌이 들더니······.
섬뜩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헤벌쭉 웃고 있던 원장이, 이제 평생 웃지 않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날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무표정하게 울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또한 방금까지만 해도 학원에 오가던 사람들은 원장을 제외하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학원에 나와 원장 둘뿐이다. 어째서?
깊이 생각할 틈이 없다. 나는 거북스러운 적막 속에서, 순간 밀어닥친 우울감에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그 와중에 여전히, 원장은 날 쳐다보고 있다. 멀뚱히. 무표정하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럴 기력도 없는 것처럼 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
눈을 감았다 뜬 나는 다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날 보는 원장은 아까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학원은 아까처럼 컴피 타 마시는 강사며 수강생들로 왁자지껄했다.
이게 대체 뭐냐?
"방금······"
내가 겨우 입을 여니 원장은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방금 뭐요?"
나는 방금 당신이 지은 표정은 뭐였느냐 물으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혹시 방금 그거, 환각이었나?
그럴 수 있다. 어제 트레이닝을 꽤 과하게 했으니까. 아무리 초재생능력자인들 갑작스럽게 무리하면 이런 일을 겪을 수도 있겠지 싶다. 사나웠던 꿈자리 또한 그 영향이었을지도.
"아무것도 아녜요."
"실없기는!"
나는 애써 웃어 보인 다음 강의실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인사하는 수강생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가장 나이 많은 수강생이다.
"여, 김극 씨 왔어요? 여기 와서 이리 앉아요!"
그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 순간, 내 의식이 또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저 빼빼 마른 수강생은 임형택 씨다.
사십 대 아저씨인데, 빈곤한 머리숱 탓에 생긴 것만 봐선 오십 대로 보인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자 많은 사람이 그랬듯 실직했고 그 당시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겼다던가.
저 빈약한 아저씨가 딱 봐도 어울리지 않는 헌터 학원에 나온 것은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서다. 마누라 하나,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평생 몸 쓰는 일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을 종합상사 출신 화이트칼라 인텔리는 괴수의 피와 살을 가족들 생활비로 교환하고자 젊은이들 사이에 섞였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상세히 아는 까닭은 저 양반이 내게 유독 친한 척하는 까닭이다.
그는 미리 업계 정보를 주워듣고는 각성자를 인맥 삼으려 애쓰는 게 확실하다. 물어보지도 않은 신세타령을 구구절절하면서 내게 동정심을 심으려던 걸 보니.
그렇듯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애송이에게 아부하고, 불쌍한 척까지 해가며 노력한 보람이 없는 듯하다.
임형택, 저 처량한 가장은 목이 꺾여서는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다.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사슴처럼 늘어난 목은 꽈배기처럼 뒤틀렸고, 목을 감싸던 피부는 지나치게 늘어난 고무줄처럼 여기저기 툭툭 끊어졌다. 그 탓에 내부의 뼈와 힘줄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그가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긴 어려워 보인다.
이때 내가 비명 지르지 않은 것은 너무 충격적이라 몸이 굳은 탓이지 덤덤해서가 아니었다. 제기랄, 또 뭐냐?
눈을 깜박이고 나니 임형택 씨는 여전히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뭐해요? 앉으래도!"
보아하니 죽지 않았다. 목은 꺾이거나 끊어질 만큼 늘어나지도 않았고.
방금 그것도 환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임형택 씨의 옆에 앉으며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씨발, 진짜 씨발. 이러다 미치겠네.
아마도 환각에서 비롯된 듯한, 정체 모를 울분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가운데 난 어떻게든 이 상황이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선수 시절에도 너무 피로할 때 환각쯤은 몇 번 겪었지 않은가. 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셈이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선명한 환각을 몇 번이고 보는 건 처음이지만······.
여전히 가슴이 쿵쿵거리는 가운데 수업이 시작되었다.
"군에 있을 때 다들 조준사격 위주로 연습했죠? 엎드려 쏴, 서서 쏴, 앉아 쏴. 호흡 가다듬으며 집중해서 총 쏠 시간 넉넉하게 주어지고 말이야······ 사냥 나가서 그때처럼 쏘면 안 돼. 괴수들 보면 정조준을 엄청 빨리 하든 급하게라도 지향사격을 하든 일단 쏘고 봐야 해."
저 강사는 전직 헌터다. 구 개월 정도 하다가 은퇴했다는데 고작 구 개월 경력으로 뭔 강사 일을 하느냐 싶지만 이 정도면 나름 베테랑이라고.
"조준 정확히 하겠다고 뭉그적거린다? 그럼 죽는 거야. 무조건 죽는 거! 괴수 덩치가 커 보여서 느릴 거 같으니 조준 느긋하게 한다? 그래도 죽어요! 내가 딱 한 번 버스만 한 괴수를 봤는데 말이야, 빈말 아니고 그 새끼가 쏘나타만큼 빨랐어. 지구 생물을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이상하게 큰 새끼들이 더 빠르더라니까······"
수업 내용은 평범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이상한 느낌, 그러니까 기시감이라 불러야 할 기묘한 느낌에 휩싸였다.
저 수업을 이미 들어본 것 같았다. 겪어봤다면, 언제?
어젯밤 꿈속에서······.
물론 방금 일어난 일이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다고 느끼는 것은 기시감의 흔한 현상 중 하나다. 피로할 때 기시감을 느끼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수업 시간 내내 그놈의 기시감에 시달렸다.
심지어 다음 형법 수업 시간에도,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에도, 심지어 씻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그놈의 기시감이 계속될 줄은 미처 몰랐다.
*******
그리고 또 그 꿈을 꾸었다.
꿈의 마지막이 핵폭발인 것은 같았지만, 이번에는 그 중간과정이 살짝 더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이번 꿈에는 원장과 임형택 씨가 나왔다. 아니, 사실 저번 꿈에도 나왔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리라.
그들의 모습은 앞서 환각으로 본 그대로였다. 임형택 씨는 목이 꺾여 죽었고, 원장은 피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았다.
둘 다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보는 즉시 구역질이 나왔다.
꿈속에서도 구역질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
6화 학원 수강생 김극 - [4]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었다.
나는 학원에서 마주친 수강생들의 끔찍한 시체를 계속해서 보아야 했다.
이종호. 양팔이 찢겨나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었다.
김진준. 머리가 으깨져 구불구불 뇌가 고스란히 드러난 채 죽었다.
성문영. 가슴팍에 큼지막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서······.
물론 전부 환각이었다. 현실 속 그들은 멀쩡히 살아있었다. 하지만 안도하긴 어려웠다. 매 환각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나는 끔찍한 분노와 우울감을 느껴야 했으니까.
그리고 꿈, 그놈의 꿈이 계속되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니미······."
나는 일어나자마자 숨을 헐떡였다. 입가에 잔뜩 묻은 침을 닦아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정신과에 가봐야 하나?
씻고 학원 갈 준비를 하자니 그 생각은 점차 굳어졌다. 정말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가?
꿈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가슴은 계속해서 쿵쿵거렸고, 라면 하나 끓이는데도 기시감이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병원 갈 돈도 없겠다, 고작 악몽과 기시감 때문에 병원에 갔다간 의사가 호구 새끼 왔냐며 비웃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켰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헌트웹에 들어가니 익숙한 닉네임의 유저가 이상한 글을 올려놓았다.
Ⓐ syberMagneto : 지나가는 길에 비각성자가 나 보고 큰절 안 하길래 삼족을 멸했는데 칭찬 좀
이 친구는 댓글 하나 달리지 않아도 매번 비슷한 내용의 헛소리를 게시판에 꾸준히 올려댄다. 게시판 규정상 가능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가능한 걸까?
BabyBerserker : 아조씨들! 헌터 게시판에 뻘글 올리면 경고 후 정지 아니에양? 사이바매그니토 저 옵바야는 왜 정지 안 먹어양?
헌트웹은 이해할 수 없을 만치 이용자가 많다. 아침인데도 곧바로 댓글이 달린다.
익명 : A배지라서
BabyBerserker : A배지가 뭐예양?
익명 : 각성자 인증하면 닉넴 옆에 붙는 거
어리즌(Arisen) 혹은 어웨이큰(Awaken)의 A였나보다. 각성자의 영미권 명칭들.
BabyBerserker : 그 배지 달면 뻘글 올려도 정지 안 먹어양? 어째서?
익명 : 일종의 각성자 우대 특권임
그런 좋은 풍습이 다 있군, 하고 생각하며 타자를 쳤다.
BabyBerserker : 민주적이지 않네양 ㅠ
곧바로 댓글이 우르르.
익명 : 민주 타령하고 자빠졌네 찌끄레기 짐꾼 새끼가 ㅋ
익명 : 민주적으로 굴면 민주주의 정령이 강림해서 괴수 대신 잡아줌?
익명 : 니 같은 짐꾼 백 명이 공들여 쓰는 헌터 정보보다 각성자가 쓴 일상 잡글이 더 고급정보인 경우 많아 병신아
Ⓐ syberMagneto : 불만이면 느 애미랑 같이 목매달고 뒤져
심통 난 댓글이 계속해서 달리는 가운데 나는 그놈의 각성자 인증을 할 방법을 찾아보고는 실행에 옮겼다.
서류 제출 페이지에 들어가자 웬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다. 전용 앱을 내려받아 각성자 서류를 찍어서 제출하면 알바가 확인하고 배지를 발급한단 것이다.
그 와중에 맨 아래에 적힌 문구가 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 2011년 1월 5일부터 헌터 직무 수행에 부적합하다고 판명된 16종 초상 능력에는 배지를 발급하지 않게 되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각성자용 배지를 발급하지 않는, '헌터 직무 수행에 부적합한' 능력 목록의 맨 앞에는 내 여동생의 얼음 능력이 적혀있다.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차별을 해야 하나 싶어 놀랍고도 경악스러울 뿐이다.
물론, 내 능력은 헌터 노릇에 부적합한 종류가 아니다. 절대로.
명시된 서류를 폰 카메라로 찍어 제출했다.
사이트 알바가 이미 근무 중이었던 듯하다. 오래지 않아 예의 배지가 발급되었단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
Ⓐ BabyBerserker : A배지 잘 어울리나양?
그 즉시 자랑 글을 올렸더니 곧바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익명 : 이 새끼 방금 올린 글에선 비각성자인 것처럼 굴더니 비틱질 하려고 준비하던 거였음? ㅎㄷㄷ
익명 : 기만질 존나 자연스럽네······.
Ⓐ syberMagneto : 비각성 쓰레기인 줄 알았더니 동족이었네? 환영해!
이후로도 댓글이 주르륵 달렸는데, 나는 그 하나하나를 훑으며 웃었다.
질시와 부러움의 반응들. 내가 각성자란 사실을 인증한 결과는 예상외로 뜨거웠다. 갑자기 날 형님이라 부르는 놈부터 특정 RPG 하는 것 같은데 친구 등록하게 닉네임 알려달라는 놈까지 별별 놈이 나타나서 내게 친한 척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스템 메시지 외엔 본 적도 없는 쪽지가 갑자기 와서 보니 자기가 현역 헌터인데 연락하면 선배로서 밥을 사주고 업계 정보를 알려주겠단 제안이다.
아, 쪽지가 하나 더 왔다. 이번엔 좀 더 본격적이다. 과거 작성 글을 보니 아직 현역 헌터는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꾸릴 헌터팀에 베테랑 헌터를 넣을 생각 없느냐며 자기 전화번호와 경력을 적어서 내게 보냈다. 나랑 같이 일하고 싶은 모양이지. 귀여운 놈이.
댓글도, 쪽지도 하나하나 즐거운 맘으로 감상하던 중이었다.
어딘가에 빨려드는 느낌이 들더니, 또 다른 댓글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씨발.
갑작스레 불쾌감이 치솟았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익명 : 애미 뒤진 새끼가. 컨셉질에 기만질에 가지가지 하네 좆같은 새끼가. 운빨로 각성해놓고 지가 잘난 줄 아나?
익명 : 지옥 간 애미애비 따라 너도 얼른 뒤져서 지옥행 버스 타자
이 새끼는 왜 갑자기 욕질이지? 욱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댓글란을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거지 같은 댓글 어디 간 거냐?
다시 보니 댓글에 예의 욕설은 보이지 않았다. 새로고침을 하지 않았으니 댓글 단 놈이 지웠어도 보여야 정상인데 어째서?
설마 또 환각을 봤나?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또 환각에 빠지는 특유의 감각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댓글은 달리지 않았던 모양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로고침을 했다. 그리고 새로 달린 댓글들을 감상하다가 눈을 부릅떴다.
익명 : 애미 뒤진 새끼가. 컨셉질에 기만질에 가지가지 하네 좆같은 새끼가. 운빨로 각성해놓고 지가 잘난 줄 아나?
익명 : 지옥 간 애미애비 따라 너도 얼른 뒤져서 지옥행 버스 타자
방금 환각에서 본 댓글이 그대로 달려있었다.
나는 화를 참는 동시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해보려 애썼다. 뭐지? 대체 뭐냐?
끝내 답을 내지 못한 채 학원에 갔다.
그리고 학원 가는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었다.
"아, 씨발!"
걷다가 웬 대변을 밟아서 욱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아무것도 밟지 않았다.
또 환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나아가다가 절로 몸이 멈췄다.
이게 대체 무슨······.
나는 크게 뜬 눈으로 저 앞에 똬리를 튼 대변을 보았다. 환각에서 본 것만큼 큼지막한 대변, 나무 그림자에 숨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냥 나아갔다면 분명 밟았으리라.
계속 길을 걸어가자니 이번에는 음료수 자판기가 날 분노케 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도 음료수를 뱉어내질 않자 울컥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환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자 주변에 자판기라곤 하나도 없는 걸 보니.
그놈의 자판기는 십 분쯤 더 걷고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시험 삼아 동전을 넣어보니 과연, 자판기는 음료를 내놓지 않았다.
*******
학원에 도착해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형법 수업 중에 겪은 환각이 특히 구체적이었다.
형법 강사는 학생들이 자기 수업에 잘 출석하지도 않고 기껏 출석해서는 스마트폰이나 한다는 사실에 큰 불만을 품고 있다.
그래서 정당하게 짜증을 내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고 싶은 건지 가끔 아무 학생한테나 수업 관련 질문을 던진다.
이번엔 내가 그 대상이 되었다.
'헌터가 범죄자 체포하거나 감금하면 체포·감금죄라고 전에 말했죠? 헌터의 형사법적 지위는 어디까지나 사인에 불과해서······ 물론 법에는 늘 예외가 있어요. 그 예외가 뭘까. 김극 씨? 대답해볼래요?'
장담컨대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형사법적이 뭔지 사인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뭔 수로 대답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대답했다.
'체포·감금행위가 정당방위·긴급피난·자구행위인 경우?'
내가 알지 못하는 저 단어들을 고스란히 읊을 수 있었던 비결은 간단하다. 저 대답을 환각 속에서 봤으니까.
"김극 씨? 수업 시간에 정말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줘!"
그 결과 형법 강사는 내가 생각보다 모범생이었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수업이 끝나고서 내게 커피 한 잔을 뽑아 건넸지만 딱히 기쁘진 않았다. 매 환각이 끝나면 겪게 되는 분노와 울화를 참아내야 했으니까.
모든 감정이 가라앉은 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환각들은 정신병이 아니라 어떤 초능력일지도 모른다고.
왜, 텔레포트도 가능한데 미래 예지가 안 될 이유가 뭔가?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또 한 번 각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별로 대단치는 않은 예언자가 된 것일지도.
물론 내가 멋대로 미래를 보고 있다고 기억을 조작하는 식의 조현병일 수도 있단 생각도 했지만, 이 가능성은 당장엔 고려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정신과에 갈 돈이 없으니까.
아무튼 내가 미래의 어느 순간을 미리 보는 것이라면······.
내가 앞서 보았던, 학원 수강생 누군가의 죽음도 언젠가 닥쳐올 미래일까?
그렇다면 무시하기 어렵다. 내가 주변 사람이 끔찍하게 죽으리란 사실을 무덤덤하게 넘길 만큼 사이코패스도 아니거니와,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해보려 해도 매 환각에서 나는 나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느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먼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왜 죽게 되는 걸까. 그들은 나와 함께 싸우다 죽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죽는 건가? 그래서 나는 매번 환각에 빠질 때마다 분노와 절망을 느끼는 것이고?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
7화 학원 수강생 김극 - [5]
양태자는 내 근력운동 트레이너일 뿐만 아니라 사격 교관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와 함께 사격장에 발을 디뎠다. 오늘도 이것저것 연습하다가, 쉬는 시간에 내가 물었다.
"양쌤? 쌤은 각성자면서 왜 헌터를 안 하고 트레이너를 합니까?"
달갑지 않은 질문이었나 보다. 양태자는 조금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곤 대답했다.
"헌터, 잠깐 하긴 했어요."
"잠깐이면 어느 정도나?"
"한 달 정도? 사실 대부분은 훈련 시간이었고 사냥은 딱 한 번 참여했으니까 이 정도면 전직 헌터라 하기도 웃기네요. 그런데도 신체강화자랍시고 딴 강사님들보다 월급은 더 받으니까 좀 민망해."
내가 왜 그리 일찍 그만뒀느냐 물었더니 양태자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 하러 오신 수강생분께 드릴 말씀은 아닌데, 어휴······ 못 견디겠더라고."
"못 견디겠다뇨?"
"전부 다요. 난 그렇게 사람이 의미 없이 죽어 나갈 줄은 몰랐어요. 괴수라니까 난 그냥 멧돼지의 상위호환쯤 되는 줄 알았지. 아니더라고. 괴수들 상대하면서 사람들이 뭐 비장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맥없이 팍팍 죽어 나가더라. 내 앞에서 가던 사람이 배가 확 그여서는 뭔가 잔뜩 쏟아내고 죽었는데, 내가 만화처럼 막 구토는 안 했지만 그냥 멍해져서······."
그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괜히 물었다고 자조하는 가운데 양태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씨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어. 진짜 조금도 못 움직이겠는데 양옆에선 뭐하냐며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고······. 결국 쭉 제자리에 서 있다가 그냥 때려쳤어요."
양태자는 나까지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랬다간 원장쌤 울 거라며 억지로 농담하더니 내게 총이나 쏘도록 지시했다.
이제 조준사격은 얼추 잘 맞는다. 지향사격이 문제인데, 레이저 사이트인가 하는 물건을 달면 조준 없이 쏘기가 쉬워지지만 괴수들과의 전투에서는 너무 의지해선 안 된다고 한다. 괴수들과의 교전 거리는 생각보다 멀어서 광점이 잘 안 보인다던가? 그래서 평소에는 떼고 연습하게 하더라.
"더럽게 안 맞네, 씨."
또 한 번 조준 없이 표적을 향해 쏘았다가 빗맞히니 저도 모르게 쌍욕이 나올 뻔했다. 뒤에서 감독하던 양태자가 위로하듯 말을 걸어왔다.
"너무 조급하게 굴 필욘 없어요. 내가 보기엔 잘 늘고 있어. 장담하는데 이대로만 하시면 돼요."
아니다. 나도 얼마 전까진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를 악무는 가운데 잠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환각을 보려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다만,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있었다.
꿈속에 빨려 들어갔다 나오는 느낌. 나는 꿈 안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잠시만요."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자 저 앞에 그물망이 펼쳐졌다. 공간이동을 하고자 할 때 생겨나는 정신적 그물망이다. 눈으로 보이는 곳에 공간이동 하면 부담이 적듯, 저 그물망도 시야 범위에만 펼치면 부담이 적다.
펼쳐진 그물망의 한 선을 본다. 그 선은 내 총구와 정확하게 일자로 뻗어나간 상태다. 이 능력을 활용할 때마다 증폭되는 공감각이 그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그쪽에 시선을 준다. 그리고 방아쇠를······.
"오, 맞혔다!"
조준하지 않고, 그러니까 지향사격으로 한 방 맞혔다. 하지만 흥분할 건 없다. 지금까지도 운 좋으면 가끔 맞혔으니까.
나는 연달아 조준하지 않고 쏘았다. 그리고 전부 명중.
"오!"
양태자가 환호하는 가운데 난 더 먼 거리에서 쏴보기로 했다.
먼저 오십 미터 거리, 이번에도 지향사격으로 명중시켰다.
"어?"
그리고 백 미터 거리, 백오십 미터 거리와 이백 미터 거리를 연달아 조준하지 않고 명중시키자 양태자는 어안이 벙벙한 듯 중얼거렸다.
"뭐지? 왜 갑자기 잘 맞히셔?"
"노하우를 알겠네요."
"뭔 노하우를 깨달았길래 갑자기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됐대요? 게다가 백오십 미터며 이백 미터 표적 맞히는 건 노하우 좀 안다고 되는 게 아닌데······."
어떻게 방금 방식을 깨달았는지 설명하긴 어렵다.
그래도 어찌어찌 짧게 말하자면, 꿈속의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방식을 방금 기억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된다고 하는 쪽이 더 대단해 보일 테니까.
이후로도 난 최대한 먼 거리를 조준하지 않고 사격했고, 그때마다 총알은 거의 빗나가지 않고 명중했으며 양태자는 황당해했다.
"뭐지? 대체 뭐지?"
이 양반이 놀라지만 말고 칭송이나 좀 해주면 안 되나. 뇌로 갈 영양이 다 근육으로 갔는지 눈치가 없네.
결국 수십 분 더 이 새로운 사격법을 시험해보다가 학원으로 복귀했다.
다시 체력단련 할 차례였다. 양태자가 물었다.
"마무리 운동이네. 오늘도 런닝 좀 하다가 벤치프레스 할 거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양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양태자는 전문 스포츠지도자 자격증도 있는 실력파요, 본인부터가 신체강화자이기에 자신이 단련한 방법으로 딴 신체강화자를 지도할 능력도 있는 훌륭한 트레이너다. 심지어 날 가르치겠답시고 외국 논문도 여럿 읽어볼 정도로 열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내게 딱히 파격적이거나 놀라운 훈련 방법을 제시하진 않았다. 불성실해서는 아니다. 책임감 있는 코치는 자신의 훈수가 선수를 망칠까 봐 함부로 조언하지 않는 법.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파격적으로 훈련할 것이다.
모험을 할 것이다. 그것을 말했다.
"양쌤? 오늘은 저 좀 다르게 도와줘요."
"다르게? 어떻게요?"
"저 오늘 오버트레이닝 좀 해야겠는데."
"오버트레이닝이요?"
"나 신체강화자잖아요. 초재생능력도 딸린."
내 말에 양태자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좀 더 격렬하게 하시겠다고······ 이야, 의욕 좋네요. 정확히 어떻게 하시려구?"
"근육 파열되고 연골 망가질 때까지 운동할 거예요. 그러니까 나 벤치프레스 하는 거 지켜보다가 나 팔 부러진 것 같으면 바벨 좀 들어서 치워줘요."
"예?"
어이없어하는 양태자에게 나는 이미 한 말을 반복했다. 양태자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했고.
"아니, 왜요?"
"요새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예?"
나는 쉬는 시간에 찾아본 해외사례, 그러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장애인 되기 딱 좋은 막가파식 훈련으로 단기간에 근육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해외 신체강화자의 사례를 직접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 선례를 내가 본받으려 한다는 것도 말했다.
물론, 양태자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굳이요?"
지금 방식으로 해도 충분한데 왜 굳이 이상한 짓을 하려 드느냔 것이다.
난 다시 한번 "꿈자리가 사나워서요."라고 대답한 다음 예고한 운동을 시작했다.
우선 덤벨······, 내가 들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무게로 자세만 올바르게 해서 빠른 속도로 마구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선수 시절에 이딴 짓을 했으면 코치가 쌍욕을 하며 내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쳤으리라.
과연 양태자도 안절부절못하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십수 분 지나, 뭔가 끊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나는 덤벨을 내려놓아야 했다.
"쓰읍······."
"괜찮아요?"
"괜찮아요. 놔두면 나아."
"아니, 이렇게 금방 부상 입고 쉴 거면 그냥 평소처럼 하는 게 낫지 않았어요?"
"아뇨. 좀 쉬고 다시 할 거예요."
그러고서 앉아서 쉬던 중이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쉬던 수강생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대충은 아는 수강생이었다.
이번 환각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정진영, 34세. 수강생끼리 술 마시던 자리에서 취했는지 세상의 모든 고난을 짊어진 얼굴로 고백하길 이 나이까지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백수 생활을 했다고 함.
경제가 이 꼴이 되어 부모마저 실직하자 이제 자기가 부모를 부양해보겠단 각오로 헌터 학원에 나왔음.
운동화 살 돈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헌터가 곧 군인 비슷한 일이라 생각해서인지 늘 신고 다니는 군화가 특징적.
그 군화를 남기고 정진영은 죽었다. 죽은 자의 존엄이라곤 전혀 없이, B급 호러 영화에 나올 몰골로 죽어 나자빠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정진영이었던 고기들이 빈대떡 반죽처럼 얇고 넓게 퍼져있다.
상반신부터 허벅지까지가 완전히 으깨진 것 같다.
정진영의 신체는 신발부터 무릎까지만 온전히 남았는데, 그것만 보고서 그 신상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전역할 때 가지고 나왔다는 군화 덕분이지 얼굴의 일부라도 남아있어서가 아니었다.
환각에서 빠져나온 나는 또다시 숨을 헐떡거리며 생각했다. 방금 죽음이 예고되어버린 저 남자에게 경고라도 해야 하나? 이대로 헌터 노릇하면 죽으리라 말해야 해?
그러나 그리 말한들 별로 놀라워할 것 같지도 않다. 헌터가 고위험직군인 걸 모르는 천치가 어디 있다고.
나는 저 남자가 정확히 어떻게 죽을지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된 조언을 건네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헌터 일 따윈 그만두라고 윽박지를 수만 있을 뿐이다. 내가 정말 그러기도 어렵고······ 씨발.
환각이 끝나면 늘 그렇듯 지독한 분노가 내 신경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체온은 높아지고,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이 내 머리를 지배한다.
그 분노를 연료로 삼아 덤벨을 양손에 들어올렸다. 양태자가 기겁했다.
"벌써 다시 하시려고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다시 덤벨을 들었다 내리기 시작했다.
방금 조금 찢어졌던 근육이 재생되며 좀 더 강인해진 듯하다. 어쩐지 방금보다 더 수월하게 운동이 되는 느낌, 물론 팔 어딘가가 마비된 영향일 수도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이제 뒤에서 세트 좀 봐줘요."
그다음에는 벤치프레스······.
바닥이 꺼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만치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기 시작하자 내 주변에서 운동하던 다른 수강생들이 모여들었다.
날 둘러싼 수강생들이 내 운동을 구경했다.
"오······!"
순수하게 감탄사를 내뱉는 수강생부터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수강생까지, 하여간 별놈이 다 있다.
그렇듯 날 둘러싼 수강생 중에 34세 나이로 피떡이 될 운명인 정진영도 보인다.
친한 사람은 아니다. 히키코모리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원체 내성적이기도 하고, 딱 봐도 덩치 크고 성질 더러워 보이는 내가 무서운지 먼저 말 거는 법도 없다.
그래도 그 또한 학원 유일의 각성자가 신기하기는 한 모양이다. 가끔 내가 헌터 라이플로 사격하거나 신체강화자만 들 수 있는 무게의 운동기구를 들면 그가 힐끔거리는 게 느껴지더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진영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날 보며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데, 내가 자못 놀라운 듯하다.
나로선 그 솔직한 반응이 몹시 맘에 든다. 그리고 정진영 주변의 다른 수강생들의 열띤 환호며 반응도 좋다. 그저 둘러싸여 있기만 해도 신이 난다.
저들의 칭송을 듣는 게 좋다. 날 둘러싼 저 평범한 남자들이 내 별거 아닌 행동에 환호를 보내는 게 좋다. 너무 좋다!
내가 바벨을 들었다 내리니 그들이 응원 비슷한 것을 시작했다.
"한 번 더! 한 번 더!"
사실 저 수강생들과 내가 별 대단한 감정적 교류를 한 적은 없다. 저들은 그저 각성자인 내게 일방적으로 아첨하거나 호들갑을 떨어댈 뿐이며, 난 담담한 척 그들의 칭송을 즐길 뿐이다.
그래서, 저들 중에 얼마나 죽을까? 얼마나 끔찍하게 죽을까?
그들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들의 칭송을 받길 원한다.
그리고 내가 저들의 칭송을 받아내려거든 저들은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 혹시 내가 지켜주지 못해 저들이 죽게 되는 것이라면 더욱 끔찍하다. 그러면 난 그 누구의 칭송도 받지 못할 테니까. 그것은 싫다.
끝내 양팔의 근육이 파열되고 연골들이 망가질 때까지, 나는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운동을 이어나갔다.
*******
8화 바위 정령 - [1]
"정령(精靈), 다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 봤죠? 낭만적으로 나오데. 자연을 수호하고 검 같은 거에 축복을 내려주고······.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정령들은 안 그래요. 그냥 식인에 미친 새끼들인데 그걸 뭐하러 근사하게 정령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어. 해외에서 엘리멘탈(Elemental)이라는 걸 굳이 번역해서 그따위로 된 거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이 새끼들은 그냥 식인에 미쳤습니다.
그리고 얘네 식성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 혹시라도 여러분이 정령을 발견하면 뭘 어떻게 해보겠다 생각하지 말고 숨어야 한단 겁니다. 무조건 튀어요. 여러분이 들고 다닐 소화기론 절대 못 잡으니까.
반대로 정령들은? 여러분을 그냥 쓱 쳐다보기만 해도 죽일 수 있지.
왜, 얼음 능력자들 봐요. 괴수를 못 잡으니까 얼레기, 얼레기 하는 거지 사람이든 코끼리든 그냥 노려보기만 해도 죽일 수 있잖아? 정령들도 그래요. 그냥 여러분을 쳐다보기만 해도 뇌를 태워 버리든 혈관에 산소를 좀 많이 넉넉하게 넣어주든 할 수 있어. 시야에 포착되는 것 자체를 피해야 합니다.
아, 김극 씨는 안 그래도 돼. 왜, 각성자끼린 서로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능력 못 쓰잖아? 정령이나 괴수들이 쓰는 것도 각성 능력이랑 똑같은 거니까 각성자 상대론 못 그러지. 얼음 능력자들이 괴수 체내를 얼리거나 어디 신체 부위째로 얼려서 괴사시켜버릴 수 없는 것처럼······.
어, 김극 씨 할 말 있다고요? 왜 자꾸 얼음 능력자를 예로 드냐구······ 미안해요. 그럼 이제부터 뭘 예로 들까? 암석 능력자? 얘넨 너무 세서 예로 들어도 별로 공감이 안 될 건데······."
*******
헌터 시험 당일, 솔직히 나는 긴장했다.
지금까지 학원에서 내게 지원해준 금액이 결코 적지 않았다. 혹시라도 떨어지면 무슨 민폐인가. 긴장을 누그러뜨릴 겸 스마트폰을 켰다.
Ⓐ BabyBerserker : 헌터 시험 진짜 쉬운 거 맞나양?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원장쌤이 때찌할 거예양ㅜ
익명 : 쉬움. 진짜 빈말 아니고 입대하는 것만큼 쉬움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는 작고 어려서 입대 못 했는데양ㅠ
익명 : 애기버섯? 미쳤나 진짜
익명 : 공익이었나 본데 그래도 마찬가지임. 그냥 헌터 시험장 찾아간 시점에 합격이라 봐도 됨. 협회 미친 새끼들은 그냥 누구든 떨어뜨릴 생각이 없음
익명 : 저 인천 부평에서 헌터 학원 다니는 놈인데요. 버서커 형님 누군지 알 거 같은데 그 컨셉 좀 그만두시면 안 돼요? 딱 봐도 이 미터 넘는 분이 그러시니까 너무 무서워요······.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 미터가 넘는? 이 미터 하고도 십일 센티인데 저 새끼가 눈깔이 삐었나.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은 111cm 아가에양! 햄스터처럼 쪼끄매서 귀여워양!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을 때, 난 선배 헌터들이 말해준 그 모든 증언이 사실이었음을 알았다.
오전에 치른 체력검정이 어땠는지는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정부에서 준비한 한 시간 사십 분짜리 시간 낭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한데 모인 수강생들에게 아침밥 먹었느냔 투로 물었다.
"다들 통과했죠?"
우리 학원에서는 열두 명이 동시에 시험을 치르러 나왔다. 그중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도중에 낮잠 잔 거 아니면 통과 못 할 수가 있나? 이건 뭐 체력검사 하는 게 아니라 팔다리 한두 짝씩 제대로 붙어있나 검사하는 거 같던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런닝머신 좀 뛰고 나면 반송장이 되곤 하는 임형택 씨의 발언이었다.
평소 체력에 자신 있던 김진준도 한마디 했다.
"난 분명 헌터 시험에서 체력검정을 남녀 구별도 없이 똑같은 기준으로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죽어라 헬스했잖아. 그런데 시험 치러보니까 남녀는 물론 노소도 구별하지 않고 모조리 합격시키겠단 의지가 느껴지네요."
"이따위로 할 거면 그냥 헌터 하겠다고 신청하면 면허증 집으로 배달해주면 안 되나? 시험 치르라고 부를 게 아니라."
"그런 식이면 응시료 못 거두잖아요. 협회에서 이걸로 거두는 수익 쏠쏠할 텐데 포기 못 하지."
필기시험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험지를 마킹하며 난 그저 형법 강사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그 양반이 늘 읊어대곤 하는 어려운 법률용어 따윈 시험지에서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더라.
심지어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도 이 시험에서 능히 만점을 받을 만했다. 과장 따위가 아니다.
한글을 모르는 누군가가 시험 치를 경우를 대비한 듯 매 문항에는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등장인물이 표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의 번호를 고르면 정답이 확실했다.
이건 정말 떨어지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떨어질 수가 없다. 고교 입학 첫날에 바로 퇴학당한 중졸인 내가 보장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헌터 시험에 일차 합격했다. 보람 따윈 느낄 수 없었다. 당연히.
이후로는 1차 합격자들을 위한 합숙 훈련이 있었는데, 원래는 한 달짜리 커리큘럼이었다던 이 합숙 훈련의 기간은 놀라운 다이어트를 거친 끝에 일주일로 줄어든 상태였다.
"개꿀이네요, 진짜? 이제 일주일 지나면 헌터 직무 수행평가? 그것만 합격하면 바로 헌터 노릇하며 돈 벌 수 있는 거잖아요."
젊은 수강생 이종호의 말에 임형택 씨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좋아할 일 아니야."
"왜요?"
"이렇게 마구잡이로 합격시킨다는 건 그만큼 현역 헌터들이 마구잡이로 죽어 나간단 뜻이잖아. 심지어 그리 죽어 나가는데 오히려 훈련기간을 줄였다는 건 죽든 말든 별 신경 안 쓴단 뜻이고······."
"그렇겠죠 뭐."
"처음 헌터 면허 발급할 때만 해도 시험이든 훈련이든 고달팠다던데 지금 이건 뭐야? 이 합숙 훈련 분위기만 해도 그냥 예비군 훈련이잖아."
내가 예비군 훈련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만했다. 놀자판이란 뜻이겠군.
확실히 이 합숙 훈련은 훈련이란 단어를 붙여주기 어려울 만큼 여유로웠다. 훈련 시간에 훈련생이 스마트폰을 하든 엎드려 자든 교관들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더라고. 왜 헌터 학원에서 사격법이며 괴물들에 대한 자료까지 미리 배워와야 했는지 알 만했다.
임형택 씨는 여전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죄다 대충인 거 보니 나 무서워 죽겠어. 나 죽으면 남겨질 마누라랑 자식새끼들 어쩔 거야? 헌터 일하다 죽어도 유족 보상금 따윈 쥐뿔도 없다드만."
"그러게요. 왜 헌터 일하다 죽으면 보상금이 없지? 나라 지키다 죽는 건데."
이종호가 툴툴거리자 성문영이 끼어들었다. 내게 헌트웹을 소개해준 친구로, 학원에서도 업계 관련으로 아는 척을 많이 하는 녀석이다.
"애초에 보상금 주기 싫어서 헌터 제도가 있는 거라 그래요. 싸우다 죽었다고 보상금 줄 거면 현역 장병들 부려 먹지 왜 헌터협회 같은 근본 없는 단체를 만들어다 하청 주고 실직자들 모아다가 헌터랍시고 총 들려주겠어?"
"그러니까 어차피 넘쳐나는 실직자들이 헌터 하는 거니까 죽든 말든 신경 안 쓴단 건가?"
"각성자 헌터들만 빼고요. 각성자들은 외국에서 큰돈 주고 데려와야 할 만큼 중요재산이라 누구 다치기라도 하면 바로 지자체에서 난리가 난대. 내가 헌트웹에서 보니까 각성자 헌터들은 범죄 저질러도 무죄나 기소유예 뜨고 헌터 활동 계속하게 해준다더라. 각성자가 활동하는 지역 지자체에서 지방법원에 압박을 준다나?"
"하여간 각성자들 부럽네······ 그 뭐냐, S급? 그 또라이 새끼는 아예 법 위에 자기가 있단 식이드만."
음, 대한각성연대에서 활동한 전직 인권운동가로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애써 참는 중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내 표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성문영이 계속 떠벌리다 말고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급히 말했다.
"아, 김극 형 미안해요. 내가 형 꼽주려던 건 아니야. 알지?"
*******
결국 더 기나긴 시간 낭비에 불과한 합숙 훈련마저 끝난 뒤, 비로소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
헌터 직무 수행 평가.
헌터로서 출동했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시험관들이 지켜보고서 점수를 매기는 마지막 실기시험이다.
시험관이랍시고 나온 아저씨의 졸린 표정을 보니 어지간하면 합격이겠구나, 하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건성으로 하진 말죠? 대충 평가하는 척하면서 마지막에 평가 기준 미달이었다며 뇌물 요구하는 경우가 많대요."
나는 함께 마지막 시험을 치르게 된 인원들을 살폈다.
김진준, 임형택, 이종호, 성문영, 정진영······. 우리 학원 출신 여덟 명과 낯선 인원 열두 명까지. 총 스무 명의 인원이 시험을 함께 치르게 되었다.
시험에 응할 인원들은 모두 K-1 한 자루씩을 멨다.
시험관은 최대한 빨리 일 마치고 돌아가서 쉬고 싶은 게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다들 총 멨죠? 다들 사람한테 총구 겨누지 말고······ 갑시다."
그렇게 우리 학원 수강생들은 시험관을 따라 길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종시험장에 도착했다.
8층짜리 큼지막한 빌딩이었다. 지방의 수많은 건물이 그렇듯 사람들이 다 떠나고 비어버린 폐건물.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며 시험관이 이 평가의 설정을 설명했다.
"자, 이 건물에 괴수가 있는 겁니다? 수색팀이 미리 정찰해서 6층에 괴수 위치가 고정됐단 걸 모두에게 전파했고요. 이제 여러분이 타격팀으로서 목표 위치까지 어떻게 이동할지 보여주시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6층까지 헌터스럽게 이동하면 되는 듯했다. 그러니까 대충 자세 잡고 계단 오를 체력만 있으면 합격한단 뜻이었다.
과연, 다들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표정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극 형, 왜 그리 혼자 심각해요? 시험 끝나고 혼자 각성자 심사 받아야 하니까 그거 걱정해서 그래?"
"아니······"
"형 어차피 A급 확정이잖아. 왜, 어디 아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를 악물었다. 젠장, 지금 내가 겪는 고충을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묵묵히, 눈살을 찌푸린 채 계속 계단을 올랐다. 3F······.
기시감, 강렬한 기시감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장소를 이미 와본 것 같았고, 지금 이 행동을 예전에 똑같이 해본 것 같았다.
처음 이 기시감이 시작된 지 어느덧 넉 달째다. 이후로 격한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어째선지 기시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는데, 오늘은 예전에 겪었던 수준의 기시감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째서?
뭔가가 불길했다. 4F.
그러나 불길하다고 해서 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 자신도 이 기시감의 원인을 모르는 마당 아닌가.
그저 불길하단 이유로 비싼 응시료 따윈 기부한 셈 치고 집에 돌아가자고 말할 수야 없다. 나나 저 사람들이나 다들 이대로면 굶어 죽을 처지다.
5층에서 내가 물었다.
"우리 총에 실탄 안 들었죠?"
임형택 씨가 대답했다.
"안 들었죠. 훈련인데 공포탄이나 몇 발 들었지."
그리고 6F.
목적지에 도달한 시험관이 선언했다.
"목표지점 확인! 타격팀, 돌입······"
그 지시대로 시험생들은 6층에 입장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사방을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자세를 따라 할 겨를이 없었다.
"김극 형, 뭐해요? 너무 대충하진 말라니까."
지금은 성문영의 합당한 지적도 신경 쓸 수 없었다.
나는 6층의 바닥을 보았다.
저 바닥, 도배 장판이 다 벗겨진 저 콘크리트 바닥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기시감 때문에? 맞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저 바닥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다. 언제?
아마도, 환각 속에서······.
"다 끝났죠? 저 배 아픈데 빨리 돌아갑시―"
내가 급히 말하던 중이었다.
등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쿵, 쿵, 쿠웅. 뭔가 무거운 것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걸어 올라온 비상계단, 그 바로 위 천장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비상구가 막혔다. 작위적일 만치 비상구 주변에만 쌓여버린 콘크리트 더미가 출구를 완벽히 봉쇄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전방에서는 시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지 모를 상황을 목격한 사람 특유의 멍청한 목소리가.
"어?"
다시 전방을 본 나는 그것을 보았다.
게이트 너머에서 온 괴수, 온갖 기이한 초상 능력과 압도적인 체급으로 무장한 이계의 존재를 보았다.
6층의 중간벽은 이미 죄다 무너져서 콘크리트 잔해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 콘크리트 잔해들이 저절로 공중에 떠올랐다. 부유하는 잔해들은 한데 모이더니 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상? 아니다. 사람 비슷한 유인원의 형상.
굳이 따지자면 예전에 교육받았던 고블린 같은······.
"저거, 뭐야?"
4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괴수가 이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 말도 안 되게 넓은 어깨 사이의 조그만 얼굴이 이쪽을 보았다.
콘크리트 괴수의 입이 열렸다.
「사랑해요. 해치지 않아요」
육성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는 목소리.
「사랑해요. 나에게 걸어서 와요. 내가 안아줄게요」
우리는 학원에서 수많은 괴수의 특징을 교육받았다. 저게 뭔 괴수인지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령이야. 바위 정령······"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듯, 시험관이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려는 건가? 저 멍청한 양반은 아까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을 때 뒤돌아보지도 않았나?
그 멍청한 시도를 본 콘크리트 괴수―바위 정령이 웃었다. 비웃음일 것이다. 아마도.
「프리허그 선언! 프리허그 선언!」
그 기괴한 정신파와 함께, 나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삼 개월 만의 환각이었다.
********
9화 바위 정령 - [2]
43세 임형택 씨는 내게 아첨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필요하면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얍삽한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는 나름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이 있다. 지금 이 환각에서도 모두가 입 다문 가운데 그 홀로 입을 열었다.
'김극 씨, 공간이동······'
환각 속 나는 저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괴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우물쭈물 대답한다.
'공간이동으로 여기 있는 사람 절반도 피신 못 시켜요.'
'그게 아니라, 공간이동으로 협회에서 헌터 라이플 가져와요. 아니면 로켓포라도.'
저 괴물한테 먹힐 무기를 가져오란 소리다. 꽤 괜찮은 지시 같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이 상황에 지침을 내려준다는 점에서 특히.
'공간이동 할 때 가능하면 사람 몇 명도 같이 데려가 주고······.'
임형택 씨의 말에 나는 임형택 씨에게 손을 뻗는다. 함께 공간이동 하려거든 서로 간의 신체접촉이 필요하다.
임형택 씨도 그 사실을 안다.
탁, 하고. 임형택 씨가 내 손을 쳐낸다.
임형택 씨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휘휘 젓는다. 애새끼나 할 몸짓인데도 어른스러운 거절의 제스처다.
감탄할 여유도, 혹여 다른 뜻이었느냐 물어볼 여유도 없다.
나는 여전히 곁눈질로는 콘크리트 괴수를 살피면서, 학원 수강생 한 명과 그 옆에 이름 모를 한 명을 각각 붙잡는다.
그러고서 정신적 그물망을 펼친다. 시야에 벗어난 장소로 공간이동 하려거든 필요한 작업이다.
그 작업을 최대한 빠르게 해보려 하지만 긴장 탓인지 아니면 이 근처가 익숙지 않아서인지 이동할 장소를 포착해내기는 평소보다도 쉽지 않다.
이 와중에 다행인 것은 정령이 이쪽을 싱글거리며 바라보기만 할 뿐 당장 이쪽을 덮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 나를 경계하느라 당장엔 가만히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떠나면 바로 행동에 나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공간이동 하기도 바쁜 마당이다. 그 생각은 그저 머리를 스칠 뿐 내 행동을 바꾸진 못한다.
마침내 좌표 지정이 끝나자 공간이동이 이루어진다.
주변의 배경이 송두리째 바뀐다.
협회 건물 안이다. 공간이동 할 때 데려온 두 명도 함께다.
'가만히 있지 말고 당장 상황 알려!'
내가 외치며 달린다. 달리면서 외친다.
'헌터 라이플! 헌터 라이플 어딨어!'
최대한 큰 무기가 필요하다. 초등학생보다 무거운 헌터 라이플이라면 그 콘크리트 괴물을 조각낼 수 있으리라.
정신없이 외치고 달린 끝에 나는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는다. 55kg짜리 헌터 라이플.
그 물건을 들고 아까 그 폐건물로 공간이동 하려 하지만 역시나 빠르게 해내기는 어렵다.
그래도 어찌어찌해내는 데 성공한다.
다시 폐건물 내부가 보인다. 나는 밀려든 현기증을 참아내려 애쓴다.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자 방금보다 더 큰 현기증이 덮쳐온다. 이번에는 신경계 부하로 인한 현기증이 아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현기증이다.
'어.'
맨 먼저 사슴처럼 길쭉하게 목이 늘어난 임형택 씨가 보인다. 그다음에는 으깨진 고깃덩이들과 거기 연결된 정진영의 군화가.
양팔이 통째로 뜯겨 나간 이종호와 뇌수를 흘리는 김진준, 근거리에서 샷건이라도 맞은 듯 온몸에 구멍이 잔뜩 뚫린 성문영도 차례차례 눈에 담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저지른 바위 정령이 날 보며 웃는다.
그 콘크리트 얼굴에는 피와 뇌수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전직 헌터 강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식인에 미친 괴물.
나는 본능적으로 헌터 라이플을 정령에게 겨누지만, 놈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놈은 이미 탈출로를 완성했다.
정령의 뒤에서 웬 자줏빛 에너지가 일렁인다.
게이트.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게이트란 사실에도, 게이트 안에서 끊임없이 빠져나오는 온갖 감정과 메타포들에도 신경 쓸 수가 없다.
나는 방아쇠 쪽 검지에 힘을 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정신적 충격을 받아도 너무 크게 받았다. 손이 후들거려서인지 손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뭘 하고 자빠진 거냐? 당겨라, 당겨라!
「양보 고마워요, 착한 청년」
내 헌터 라이플이 불을 뿜는 동시에 콘크리트 괴수의 형상은 무너져 내린다. 발사된 30mm 탄환의 위력이 지나치게 탁월해서는 아니다.
무너지는 콘크리트 사이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빠져나온다. 그 반투명한 것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간다.
사냥에 성공한 괴수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순식간에 정령의 본체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뒤이어 게이트가 수축한다.
이내 게이트마저 사라져버린 현장에는 나와 쳐다보기도 역겨운 시체들만 남겨진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초저주파 섞인 고함과 함께 내 의식은 현실로 추방된다.
*******
늘 그렇듯 환각이 끝나고 나면 환각에서 느낀 감정들이 남겨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울분 속에서 나는 심호흡하려 애썼다.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침착해야 한다. 화났다고 참지 않고 행동하면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만다. 내 인생의 중반부가 그랬듯이.
지금까지 겪은 분노와 절망감의 원인을 알았다. 그 사실이 기껍지는 않다. 씨발.
"김극 씨? 공간이동······"
임형택 씨의 목소리.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안 돼요."
"도망치란 게 아니라 협회 가서―"
뭔가 지시를 내리려 한다. 저놈에게 통할 무기를 가져오란 지시이리라.
환각 속 나는 저 아저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아저씨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찌 행동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니 남이 내린 결정이라도 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쪽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안 된다니까. 나 떠나면 다 죽어."
내 거부에 임형택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남으면 뭐 방법 있구요?"
글쎄, 방법이 있나?
모르겠다.
나는 바위 정령을 보았다. 사 미터 키에 좌우 넓이도 그 못지않은 콘크리트 괴물을.
격투기에서 체급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저 괴물은 아무리 봐도 수 톤은 넘어 보인다. 저 무게를 평소에도 유지하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저놈은 언제나 나보다 몇 배나 무거운 운동기구로 운동하는 셈이다.
그 무거운 몸에 깃든 힘은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그 가공할 힘으로 휘둘러질 질량은 얼마나 파괴적일 것이고?
모르겠다.
나는 초인 신체강화자인데 어떻게 비벼볼 여지는 있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다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슈퍼헤비급 격투기 선수라도 500kg짜리 회색곰을 감당할 수는 없단 사실이다.
"내가 저 새끼랑 눈씨름 하는 동안 협회에 전화나 해요. 지원 병력 보내달라고······."
이 차이를 메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건 공포탄만 채워진 깡마른 K-1 한 정뿐.
제기랄, 임형택 씨의 지시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절망케 하고 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서도 저 괴물에게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괴수도 마찬가지였다. 바위 정령 또한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나만 쳐다봐라. 씹새끼.
저 괴물의 시선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선 안 된다. 수업 시간에 배웠기로 바위 정령은 생물의 신체에 결석(結石)을 응고시킬 수 있다. 뇌혈관이든 척수 한가운데든 간에.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숨 막히는 대치가 계속됐다. 괴수도, 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 내가 저놈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듯 저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 그리고 짐승 새끼들은 만만치 않은 상대와 마주치면 싸우려 드는 게 아니라 물러나려 든다고 들었다.
제발 저놈이 먼저 물러나기를 애타게 바랐다.
그놈의 게이트를 열고 떠나라, 제발. 아니면 이대로 대치하는 동안 협회에서 다른 각성자 누구를 보내든가.
속으로 비는 가운데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새끼지? 뭘 하려는 거냐?
흘긋 보니 이름 모를 응시생이었다. 그는 나와 정령이 대치하는 사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눈치였다. 여기는 6층인데,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으리란 계산일까?
그러나 짐승 새끼들은 도망치려는 사냥감을 두고 보는 법이 없다.
바위 정령의 눈길이 그 불쌍한 놈을 향하더니······.
"어."
짧은 외마디를 내뱉고서 이름 모를 응시생이 비틀거렸다. 정령이 놈의 체내 어딘가를 굳혀버린 것 같았다.
응시생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뒤이어 '흐읍', 누군가가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그다음에는 '허억' 하는 소리가, 그다음에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씨바아아알!"
비명이 모두의 이성을 마비시킨 듯했다. 아니면 정령의 살인 시선을 피해 숨을 장소를 찾으려는 발버둥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건 여기 모인 응시생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지 않았다. 그들의 사냥감다운 움직임이 괴물을 흥분시켰다.
「프리허그 선언!」
바위 정령이 땅을 박찼다. 환각 속 내가 공간이동으로 떠나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괴물이 어떻게 그토록 빨리 모두를 살해하고 게이트까지 열 수 있었는지 그 움직이는 속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침팬지의 달리는 속도는 인간보다 훨씬 빨라서 40km/h 정도라 한다. 몇 년 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빨랐던 우사인 볼트와 비슷한 속도다.
신장 사 미터에 수 톤짜리 우사인 볼트가 한 응시생을 노리고 전력 질주했다. 누굴 향해서?
성문영.
자길 들이받으려는 정령을 보며 성문영이 눈을 부릅떴다.
"악 씨 악!"
괴성을 내다 말고, 성문영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날 보면서도 상황 파악이 어려운 듯 눈을 마구 껌벅거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연속 공간이동의 여파가 생각보다 견딜 만해서 다행이다.
"딴짓 말고 기둥 뒤에 숨어, 새꺄!"
나는 성문영을 밀치며 그 밑에 있던 공구를 들어 올렸다.
아마도 이 건물의 철거 작업에 쓰이다가 버려진 듯한 슬레지해머를. 딱히 무겁지는 않았다.
한편 정령이 이쪽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표정을 보니 사냥감을 놓치고 헛손질해 화가 난 듯했다.
나도 놈을 보았다. 나 역시 놈과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애초에 환각이 끝났을 때부터 울분을 참고 있었으니까.
대치 상황은 이미 끝났다. 놈도 나도 이미 흥분한 상황이다.
"나도, 나도!"
자기도 피신시켜 달란 애원과 여러 비명을 무시했다.
나는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갑작스럽게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전에 한 번 겪어본 현상 같았다. 조준 없이 총 쏘는 법을 깨우친 그때······.
내가 다시 현실로 빠져나온 것은 정령이 달려든 것과 거의 동시였다.
「프리―」
바위 정령이 날 향해 달려올 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슬레지해머를 크게 휘둘렀다.
근처의 누군가에게는 괴물에게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 급하게 먼저 휘두른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아마 저 괴수도 그리 파악했을 테고. 바로 공격할 기회라 여겼을 것이다.
「―허그!」
바위 정령이 내 앞에 도달했다. 놈이 바윗덩이 어깨를 움직이던 그때,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시야 내 공간이동을 할 때는 그물망을 펼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훨씬 쉽고 빠르다.
정령의 살인 펀치가 뻗어나간 시점에 나는 놈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공간이동 하기 전 휘둘렀던 슬레지해머는, 그때 완전히 휘둘러져 목적지에 닿았다.
콘크리트 조각들로 이루어진 놈의 오금에.
'쾅!' 타격음이 요란하고 손에 닿는 감촉이 얼얼하다. 놈의 오금에서 떨어져 나간 돌조각들이 내 얼굴에 튀겼다.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쳤다. '쾅', '쾅!' 두 번, 세 번 치니 놈의 한쪽 다리를 이루던 콘크리트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한 대만 더 치면 완전히 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도록 놈이 내버려 두진 않았다.
「당신 마누라한테 주먹 휘두르는 그런 사람이야!」
정령의 상반신이 회전했다. 양팔을 휘둘러서 나를 후려치려 했다. 살짝 닿기라도 했다간 으깨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슬레지해머를 내리치면서 공간이동 했다.
시야 전환과 함께 내 발은 막 움직임을 멈춘 정령의 어깨 위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끝까지 휘둘러진 슬레지해머가 놈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역시 내리치는 편이 힘을 싣기가 좋다. '쾅!'
*******
10화 바위 정령 - [3]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성문영이 고함질렀다.
"존나 잘 싸운다 씨발! 그대로 죽여버려요!"
물론 그러려는 중이다.
'쾅!' 힘껏 망치를 내리친 뒤 내 몸이 흔들렸다. 내가 올라탄 정령의 어깨가 심히 들썩인 탓이다.
뒤이어 정령의 어깨가 폭발했다. 날 향해 산탄이 쏟아졌다. 수류탄 파편처럼 비산하는 콘크리트 조각과 자갈들, 언뜻 느끼기에도 탄속이 무지막지했다.
환각에서 정령은 이런 식으로 성문영의 온몸에 구멍을 뚫어 죽였을 것이다.
피하기엔 너무 빨랐기에 팔로 얼굴만 겨우 가렸다. 다음 순간 온몸에 산탄이 박혔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산탄이 신체강화자의 근육을 깊숙이 뚫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상관없다.
돌조각이 박힌 살들에서 통증이 번졌지만 이내 아드레날린이 그 모든 통증을 날려 보냈다.
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걸쭉함도 순식간에 잊혔다.
놈이 무슨 짓을 하든 슬레지해머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이미 놈의 머리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망치질 한 번마다 놈의 상체를 조각내고 분쇄했다.
또 한 번 망치를 내리치던 중에 정령이 발악했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울 만치 거대한 손이 날 낚아채려 했다.
물론 그 거센 손짓은 내가 있던 장소를 스칠 뿐이다.
"오!"
공간이동 하여 정령의 뒤에 선 나는 다시 드러난 놈의 오금을 두들겼다. 아까 부숴놓았던 놈의 오금은 잠깐 사이 꽤 복구되어 있었지만 망치질 두 번을 버틸 만큼은 아니었다.
'쾅!' 이제야말로 완전히 분쇄했다. 한쪽 다리를 잃어 기우뚱하는 놈의 등을 발로 밀어 쓰러뜨렸다.
그리하여 노출된 등짝을 강하게 후려쳤다. '쾅!'
이제 놈은 한쪽 다리도, 머리통도 없다. 등짝에는 큼지막한 금이 갔고.
물론 그것만으로는 죽을 괴물이 아니다. 주변의 돌조각들이 놈의 파괴된 부위에 자석처럼 달라붙는 게 보였다.
학원에서 가르치길 정령들은 신체 손상을 주변 물질을 통해 쉽게 복구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 복구를 못 하게 하는 방법도 같이 배웠다. 복구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파괴하기.
"와!"
아까부터 계속 사방에서 감탄인지 안도인지 모를 함성이 들려온다. 비명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 쪽이 압도하고 있는지 모두의 눈에 보이는 모양이지.
또 한 번 망치를 들어 올린 다음 온 힘을 실어 내리쳤다.
「하지 마!」
정령이 쓰러진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그 덩치와 무게에 걸맞지 않은 민첩한 동작이 놀라웠다.
하지만 소용은 없다. 놈이 도망친 그곳으로 공간이동 하며 망치질을 완성했다. '쾅!'
헛손질은 없다. 결코.
「떨어져! 떨어져, 못 배운 인간아!」
정령의 돌덩이 몸체는 이제 균열을 견디지 못했다. 정령이 발악하듯 몸을 뒤틀자 몸체 절반이 무너져 내렸다.
이쯤 되니 눕혀진 채로도 균형을 잡기 어려운 모양이다. 정령은 고개만 날 향하더니 우악스럽게 주먹을 뻗어왔다.
과연, 여전히 그 근력은 살인적이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북 터지는 소리를 동반했다.
당연히도 그 주먹질이 내 머리를 터뜨리진 못했다. 이번에도 나는 망치를 내리치며 공간이동, 놈의 팔이 닿지 않을 장소에서 망치질을 마쳤다. '쾅!'
동작 먼저 하고 공간이동 하고서 동작을 완료하는 일련의 절차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쉽다. 어째서?
난 원래 이렇게 공간이동을 잘 다루지 못했다. 꾸준히 연습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며칠 배워서 겨우 젓가락질하는 법을 알게 된 미국인에 비할 수준이었지 아마.
이것은 불과 몇 분 전, 꿈속에서 가져온 솜씨였다. 그러니까 꿈속의 내게서.
꿈속의 내가 곧 환각 속 나인가? 아니다. 그놈에겐 이 정도의 솜씨가 없었다.
아마도 그보다 미래의 내게서······.
덕분에 지금의 나는 환각 속 나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근육량만 해도 그렇다. 환각 속 나도 꾸준히 단련했지만 이 정도로 폭발적인 근육을 얻지는 못했다.
관절 가동범위를 위협할 만큼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망치를 또 한 번 내리쳤다. '쾅!' 돌조각이 폭발하듯 튀더니, 놈의 마지막 남은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쯤 되니 다 끝났다는 게 파악된 모양이다. 흩어져있던 응시생들은 물론 심사관까지 가까이 다가와서는 구경하는 걸 보니.
"아까부터 뭐해요? 촬영해? 돌았어? 이 와중에 뭐 하는 거야 진짜."
"이게 다 나중에 도움 돼······"
구경꾼 둘이서 뭔가 실랑이하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뭘 하든 도움 되지 않긴 마찬가지니까.
망치질에나 집중했다. 식인 괴물을 치고 또 쳤다.
망치질마다 몸이 분해되어 그 크기가 줄어든 정령은, 이제 사지조차 없이 상반신만 남은 처지다.
「부탁해요」
그 상반신의 맨 위에 웬 얼굴 형상이 떠올랐다. 아까와 같은 침팬지 비슷한 얼굴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고 있던 이종호가 뒤로 물러나며 기겁했다.
"씨······ 이 아줌마 얼굴 뭐야?"
주름지고 살찐 듯한 중년여성의 얼굴이 난데없이 정령의 몸 위에 나타났다. 그 중년여성이 말했다.
「저를 해치지 마세요」
목숨 구걸을 하려나 본데, 그 꼴이 동정심보다는 흉측함을 자아냈다. 말하는 것도 실제 한국인 아줌마의 말투라기엔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더욱 그랬다.
「고백할게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뭐라는 거야, 이게?"
「당신과 러브호텔에 가고 싶어요」
몰려든 응시생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임형택 씨가 말했다.
"이거 그거네. 정령이 사람 잡아먹고서 완전히 소화할 때까진 잡아먹은 사람 기억이랑 동화된다잖아? 웬 아줌마 잡아먹고 그 기억 대충 끄집어내서 한국말 하고 있었나 봐."
다른 응시생들도 하나둘씩 혐오감을 토해냈다.
"이게 그 잡아먹힌 아줌마 얼굴인가 봐요? 그럼 지금 이 괴물 새끼가 아줌마 얼굴로 김극 형 유혹하려는 거야?"
"미쳤나?"
"이렇게 생긴 정령들은 지능이 낮다잖아. 대충 아줌마가 암컷인 것만 파악하고 수컷을 유혹하려는 거지."
"토 나오네, 진짜. 좆같이 생겨갖고······."
불쌍한 아줌마. 이런 데서 잡아먹힌 걸 봐선 노숙하며 힘들게 살아온 모양인데 죽어서까지 조롱감이나 되다니.
「우리 프리허그 해요」
망치질 한 번으로 그 입을 닥치게 했다. 그 얼굴 형상을 후려치자 놈의 몸체는 완전히 갈라져 그 내부를 드러냈다.
그 안에 숨어있던 반투명한 것이 비로소 드러났다. 이게 뭔가?
환각 속에서 본 적이 있다. 정령의 본체 비슷한 무언가.
"뒤져, 씹새야."
그마저 망치로 으깨자 내게 뭔가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환각······.
'킴극! 킴극―!'
머릿속에서 함성이 울려 퍼진다. 승리한 전사를 축복하는 관중의 함성이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자연스레 알겠다. UFC의 옥타곤.
그날 옥타곤에서 나는 승리자로 우뚝 서 있었다. 한쪽 팔을 들어 올린 내게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환호했다.
2승째, 딱히 전설적인 전적은 아니겠지만 내가 느끼건대 그날 세상은 날 위해 존재하는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 넘쳐나는 충만감 속에서 나는 여러 투사들의 환상을 겪은 뒤 신체강화자로 각성했다······.
그날의 옥타곤에 내가 다시 서 있었다. 그날 느낀 희열감 또한 재현되고 있었다.
승리가 내게 힘을 준다. 이건 단순히 정신적인 희열이 아니다.
쓰러뜨린 정령이 내게 흡수되고 있었다.
들어본 적 있다. 각성자의 성장. 괴수와 정령이 식인하여 힘을 키우듯, 각성자 또한 적들을 쓰러뜨리고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잠시 그 희열을 만끽하다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현실 또한 환각과 다르지 않았다. 날 보며 환호하는 관중에게 둘러싸인 채였으니까.
"김극! 김극! 김극!"
나는 다시 팔을, 망치를 든 팔을 들어 내 승리를 선포했다.
보라, 나는 지금 다시 옥타곤에 서 있다.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곳으로 돌아왔다. 한때 부당하게 쫓겨났던 그곳으로.
*******
상황이 종료된 후로도 편히 쉬기는 어려웠다.
나는 아까 쓰러진 사람을 병원에 옮긴 뒤 현장에 복귀했다. 그러고는 작업 시작.
협회 직원인 심사관이 협회에 상황종료를 알리느라 바쁜 가운데, 나는 슬레지해머를 들고 비상구를 가로막은 콘크리트 잔해들을 쳐 날렸다.
망치는 전보다 가볍게 느껴졌고 망치질 또한 수월하기 그지없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 신체강화자로서 능력이 향상된 결과일까? 후자인 것 같은데, 정말로 그렇길 바란다.
한편 내가 일하는 중에, 다른 응시생들은?
"뒤에서 구경만 하자니 눈치 보이네요······."
정령과의 싸움에도 응원 기계에 불과했던 응시생들은 지금도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옆에서 내 작업을 거들기엔 포크레인 근처에 사람들이 얼쩡거리는 꼴이라 방해되지 않게 뒤에서 폰이나 하라고 치워둔 마당이다.
하기야, 괴수 밥에 불과한 비각성 찌꺼기들한테 뭘 바랄 수야 없지. 물론 우리 부평 학원 사람들은 빼고. 신성한 인천 땅의 사람들은 각성을 했든 안 했든 날 응원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으니까······.
어······, 갑자기 든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갑자기 왜 이딴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직 몸속 아드레날린이 다 빠지지 않았나?
"드디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구를 뚫어냈다. 다시 한번 "김극! 김극!"하는 환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 뭐야."
다들 총을 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헌터 팀인 것 같았다. 헌터들은 우릴 보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상황 끝났어요? 헌터 콜 보자마자 바로 달려왔는데 갑자기 상황종료 알림 뜨고 이게 뭐야, 씨발. 기름값 아까워 죽겠네."
저 새끼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상황이 종료돼서 좆같으시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승리로 들떴던 내 기분을 저 버러지들이 망치려 하고 있었다.
내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듯 옆에서 임형택 씨가 속삭였다.
"참아요, 참아. 상대할 가치도 없는 양아치 새끼야······."
협회 직원인 심사관이 다가가서 저 양아치들을 달래는 가운데 성문영이 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 새끼들이 미쳤나. 이쪽은 죽다 살아났는데 저 씹새끼들은 상황 왜 끝났냐고 지랄이네?"
이 상황에 임형택 씨는 내 기분을 풀어줄 필요를 느낀 듯했다. 틈날 때마다 아부하는 그답게 아첨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하여간, 김극 씨 덕에 목숨 건졌어요 정말. UFC 선수라더니 진짜 헌터 라이플도 안 쓰고 맨몸으로 때려 부술 줄은 몰랐잖아!"
그러자 다른 응시생들도 내게 몰려들어 생명의 은인이라느니 뭐라느니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든 칭송을 담담한 얼굴로 받아들이자니 기분이 좀 풀렸다.
한편 저쪽 헌터 팀에서 양아치 하나가 다가왔다. 놈이 따지듯 물었다.
"진짜 정령 나타난 거 맞아요? 뭐 잘못 보고서 가짜로 신고해놓고 구라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우리 중에 한 명이 나섰는데, 의외의 인물이었다.
"뭔 일 있었는지 보여줘요?"
늘 군화를 신고 다니는 정진영이었다. 저 찐따 같은 양반이 웬일로 나서나 해서 봤더니, 갑자기 자기 폰을 들어서는 헌터에게 보라고 들이미는 게 아닌가.
"지금 뭐 하는 거래?"
내 물음에 김진준이 혀를 찼다.
"저 아저씨가 아까 그 장면 폰으로 영상 찍었어요. 그거 보여주나 본데요."
"아니, 그 상황에 동영상을 찍었다고?"
"내 말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짜증 났다니까요? 확 폰 뺏어서 부숴버릴 수도 없고."
한편 양아치 같은 헌터들은 정진영이 보여주는 영상을 감상 중이었다. 건성으로 보는 것 같던 그들이 점차 영상에 집중하는 것이 옆에서도 보였다.
"오······ 씨발. 개쩔어."
영상 감상을 마친 헌터들은 날 보며 한마디 했다.
"몸값 개비싸겠네······?"
그리고 헌터들 상대를 마친 정진영이 내게 다가왔다.
정진영 이 양반은 날 대하기 늘 어려워한다. 방금 양아치 같은 헌터들 상대로는 그럭저럭 또박또박 말하더니, 지금도 내 앞에선 또 쭈뼛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영상······, 아까 그 싸우시는 영상 찍어놨어요."
"알아요. 방금 진준이가 형 유튜버 데뷔하시려는 줄 알았다고 뒷담 하더라."
내가 이상한 짓 좀 하지 말라고 우회적으로 말했건만 정진영은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횡설수설했다.
"방금 헌터들 긴급 출동시켰다가 취소시켰잖아요. 이거 꽤 큰일이니까 이따가 기자들 좀 올 거 같거든요? 그때 이 영상 보여주시면······"
"기자들이 영상 자료 활용해서 기사 이쁘게 써주나?"
그리고 심사관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용사님, 아직 각성자 심사 안 받으셨죠? 지자체랑 계약도 아직 안 맺으셨겠구요."
"그런데요."
"이야, 영상 찍어준 분한테 밥 좀 거하게 사셔야겠네."
나는 오늘 은혜를 베푼 건 나인데 왜 내가 밥을 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다음 날이었다.
*******
11화 바위 정령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