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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49-156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49 >

다음날.

주혁은 평양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각성 관리청 지청 설립.

대단히 큰 행사였다.

특히 상징적인 의미에서.

통일의 첫걸음인데.

주혁의 지인들도 대거 참석할 예정.

박경수 전(前)청장에 전광일 현(現)청장, 이민아 팀장, 그리고 우리 인민무력부장 르스스알 고사극 동지.

원래는 피소환인들도 될 수 있으면 많이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날에 견달래가 와서,

"황송하오나, 저희는 다른 세상에서 할 일이 있사옵니다. 그래서 허락을 구하고자 하옵니다."

할 일이라니.

"으음, 선전 선동? 여론을 움직일 필요가 생겨서."

"···."

아니, 이게 무슨 소리?

선전 선동이라니.

비유적 표현인가?

뭐, 자세하게 물어보진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해주겠지.

그래서 참석인원은 소수.

일단 코사크.

북한 고위 관료님이니까.

또한 디아마트와 광마.

주혁의 경호원 격으로 참석.

이 정도면 충분하다.

검은 탑에 입장해서 탑 퇴장의 가락지로 북한 평양의 탑으로.

코사크가 미리 준비해준 준비된 자동차를 이용해 행사장으로 이동.

참석하고 난 뒤 냉면이나 한 그릇 먹고 와야지.

※ ※ ※

저쪽 세상에 남은 피소환인들은 뭘 하고 있을까?

실제로 진짜 열심히 선전 선동 중이었다.

『관리자들은 하잖은 소인배였사옵니다. 감히 공자님께 뻔뻔하게 딜을 치지 않나, 확률을 조작하지 않나, 어찌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있단 말이옵니까?』

『맞다! 무녀 말이 백번 옳다.』

『확률 조작이 없었다면 카탈로그가 확장되어, 지금쯤 최소 2명 이상의 영혼들이 공자님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을 텐데, 이게 무슨 치졸한 짓인지···,』

『관리자들을 죽이자!』

『목을 매달아라! 이 씨발 새끼들아!』

『전사는 비겁한 짓을 제일 싫어한다. 당당하게 덤벼라!』

『마이 로드의 상심이 얼마나 큰 줄 아십니까? 관리자들에게 정의를! 빛이여!!!』

『그래, 잘한다. 빛이여!!!』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당장 군사재판에 회부해서 총살할 것을 건의합니다.』

『총살이다! 총살!』

『대가리에 구멍을 100개 정도 뚫어버려!』

『호에에에에엑!!!』

『관리자 새끼들아! 일꾼도 니들이 한심하단다.』

『나 밤의 종족이자 귀족으로서 한마디 하겠소. 차라리 모기의 피를 빠시오!』

『이런 씨발! #$&#%&&@$%! 우리 소환사님 마음 아프게 하는 새끼들은 내가 다 죽일 거야! $#%$#%#@&&@, 같은 것들아!』

『욕쟁이 엘프 년도 왔다.』

『욕 더해! 더더더!』

『컹컹! 크러렁! 컹컹!』

『개도 욕한다, 이 개만도 못한 관리자 새끼야.』

원래 무한의 세상은 넓고도 넓다.

그래서 텔레파시의 소통 범위도 제한적.

각 지역마다 소통의 채널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무한의 세상 전 소통 채널이 들썩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기 위함.

저 높디높은 곳으로.

관리자 처벌과 확률 정상화를 위해.

뭐, 피해에 따른 보상도 받으면 좋고.

※ ※ ※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격변하는 한반도.

시대의 요구는 통일이었다.

그 첫걸음이 평양에서 시작되려고 하는 중.

검은 탑 공략을 남북한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노하우를 공유한다?

이건 군사동맹이나 다름없다.

관계가 극히 친밀한 우방국들이 서로 하는 것 말이다.

남과 북의 검은 탑 공략 동맹.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각종 긴장과 갈등은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전 같았으면 혹시 뒤통수나 치지 않을까 걱정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일도 없고,

북한 플레이어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착취만 당했던 그들의 대우도 달라질 것이다.

평양 각성 관리지청에서 일반 및 상급 마정석, 각종 탑 부산물을 매입하고 현 시세에 맞게 북한 플레이어들에게 지급한다.

화폐 종류는 북한 화폐, 위안화, 달러, 원화 종류별로.

이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화폐가 달러와 원화.

이러다 보니 북한 플레이어 등록률이 매우 높아졌다.

탑 공략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됐는데.

그 덕분인지 행사장에 가득 모인 북한 플레이어들.

모두 기대감에 찬 얼굴들.

기자들의 열띤 취재 경쟁도.

신문과 방송 등 한국의 모든 언론사가 행사를 취재하려고 왔다.

평양에서 열리는 지청 설립 행사는 위성 생방송으로 전 세계 각국으로 실시간 송출될 예정.

외신도 마찬가지.

미국, 유럽, 일본, 심지어 중국도.

이제 북한은 닫힌 사회가 아니었다.

행사 장소는 옛 플레이어 수용소.

그곳에 한국 각성 관리청 평양 지청이 세워질 예정.

행사가 끝나면 즉시 업무에 돌입할 것이다.

주혁도 사람들과 섞여서 앉았다.

저 뒤쪽에, 북한 플레이어들이 앉아 있는 장소.

그의 양옆엔 광마와 디아마트도.

북한 플레이어들은 그런 주혁이 궁금한 듯.

"동무, 옷을 입은 걸 보니, 남조선 플레이어요?"

"아, 네."

"엘리트 플레이어?"

"맞습니다."

"하하하, 반갑구만 기래. 내레 개성에서 올라온 정동화요."

주혁도 화답했다.

"봉주혁입니다."

"오! 이름 좋소. 주혁 만세디."

"···으음, 그, 그런가요?"

"그럼 옆에 여성 동무랑 영감님도 엘리트인가?"

"네, 같은 동료입니다."

"동포끼리 이렇게 함께 앉아 있으니까니 반갑소.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이윽고 시작된 행사.

동시에 위성으로 생중계.

내빈들의 인사가 끝나고 사회자의 호명에 코사크가 올라왔다.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인민무력부장 고사극 동지를 큰 박수로 맞아 주시라요!"

짝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차차차차착! 착착!

카메라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인민군복을 입고 가슴에 각종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코사크가 연단에 섰다.

"동무들! 반갑슴메다. 주혁 만세!!!"

의례적인 인사를 한 뒤.

"오늘 우리는 중차대한 사명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슴네다. 통일을 향한 시대의 부름은 더 이상 외면할 순 없는 거디요."

꽤나 진지한 모습의 코사크.

"먼저 북남 검은 탑 공동 대응을 위해, 평양 각성 관리청 지부 설립 결정을 감행한 남조선 정부의 노고에 아낌없는 감사를 드림메다."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박경수와 전광일.

짝짝짝짝, 이어지는 박수.

"우리 북남은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조국 건설을 위해 앞으로 전진! 멈춤 없이 나아갈 것임메다. 주혁 만세!"

확실히 말 잘한다.

타고났다.

그런데 세계로 송출되는 생방송인데, 자꾸 주혁 만세라고 하네.

나중에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겠다.

"마지막으로 위대하신 김인중 위원장 동지의 인사말이 있겠습메다."

요즘 살이 확 빠져 슬림한 체구의 김인중이 연단 위에 섰다.

"고조, 감격스럽슴메다. 내레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한 말씀 드리갔시요. 이제 우리 북남은 갈등과 적대를 지우고···,"

바로 그때!

휘릿! 쿵! 휘릿! 쿵!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

뭐지?

소리가 나는 곳은 하늘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어?"

"헉!"

"뭐, 뭐이가?"

"사람이 날아?"

"설마?"

북한 인민군복을 입고 건물과 건물을 뛰어넘고 있는 한 사람,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움직임.

휘리리릿! 쿵!

어느새 행사장 무대 바로 앞에 떨어져 내린 남자.

순식간이었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었다.

총을 소지한 무장 경비군인들도 타이밍을 놓쳤다.

"다들 꼼짝 말라우! 손가락 까딱하면 터뜨려 버리갔어!"

쩌렁쩌렁한 목소리.

정체불명의 군인은 커다란 원통형의 배낭을 메고 있었다.

핵물질 기호가 새겨진 배낭, 손에는 작은 기계장치를 들고 있었고.

그렇다면?

"등에 메고 있는 뭔지 알갔지? 핵배낭이디. 다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기야!"

핵이다.

핵배낭.

소형이지만 터지면 여기 모인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 있는.

연단 위에 사람들 모두 얼어붙었다.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김인중 위원장.

"···도, 동무는 누구?"

"공화국 인민해방군 플레이어 장창수 소좌입메다. 위원장 동지 만세!"

"그렇구만. 기런데 동무는 지금 뭐 하는 거이가?"

눈에 핏발이 선 장창수.

"내레 악랄한 남조선 정부에게 공화국을 가져다 바치려는 반역행위를 막으러 왔시요."

"반역?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네?"

"저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대표해 충심으로 호소하는 바임메다. 위원장 동지는 지금 속고 있는 겁메다."

그러고는 코사크를 가리키며,

"인민무력부장 고사극은 간악한 반동 분자임네다. 위원장 동지의 눈과 귀를 가린 간신배디요."

픽, 코웃음 치는 코사크.

아직도 저런 놈이 있었나?

아무래도 숙청 작업이 미진한 모양.

될 수 있으면 플레이어들은 건들지 않고 놔둔 것이 실수였다.

코사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장창수 쪽으로 이동하면서.

"동무, 해방의 룬 목걸이 착용했네?"

"맞소. 그러니 허튼수작 마시오."

"어디서 난 거디? 그 핵배낭도."

"알 것 없시요."

"난 알 것 같은데."

어디겠나?

중국이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화국 인민들에게 사죄하시오."

"그카면 핵을 터뜨리지 않을 건가?"

"···."

"왜 대답을 안 하니? 이미 터트리려고 온 거네?"

"공화국을 위해 이 한 몸 장렬하게 바치겠습메다. 그러니 사죄부터 하시라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코사크는 거리를 가늠했다.

장창수의 손에는 무선 격발 장치가 들려 있었다.

지금 도약하면 눈 깜짝할 새에 손목 정도는 자를 수 있다.

장창수도 그런 코사크의 의도를 알아챈 모양.

"경거망동하디 마시라요. 내레 여기서 변을 당해 심장이 멈추면 폭탄은 즉시 터지는 거디요. 이 손에서 격발 장치가 떨어져도 터지디요. 격발 장치가 망가져도 터지디요. 외통입메다."

진짜일까?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모험은 금물.

자신 혼자만이라면야 터지든 말든 바로 손목과 모가지를 잘라버리겠지만,

봉 소환사님은?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살기도 뿌리지 못했다.

"그게 터지면 동무도 무사하지 못해, 알간?"

"일 없습메다. 다 각오하고 왔시오."

"좋아! 진정하라우, 동무가 원하는 게 뭐이가? 내레 다 들어주갔어."

"낄낄낄, 혓바닥 놀리지 마시라요. 이미 결심했소. 오늘의 희생은 공화국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임메다."

이거 환장하겠네.

그나저나 봉 소환사님은 뭐하시지?

빨리 탑으로 피하셔야 하는데 말이다.

※ ※ ※

행사장이 발칵 뒤집혔다.

장창수 소좌가 등에 메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 도망치는 사람들.

스팟! 스팟! 스팟!

플레이어들은 탑 안으로 피신했고.

그러나 주혁은 도망가지 않았다.

딱히 용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뭐, 자신이 탑으로 들어가면 피소환인들도 함께 들어가겠지.

그러고 나서 탑 퇴장 반지로 1번 탑으로 나오면 되고.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전광일 청장, 이민아 팀장이야 플레이어라 탑으로 피신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들은?

혼자만 쏙 도망가는 얌체 같은 짓을 어떻게 해?

떨리는 다리는 어쩔 수 없지만 용기를 내서.

"···저기, 디아마트 씨?"

"네, 주인님."

"꿈을 이용해 저 사람을 제어할 수는 없나요?"

"으음, 잠에 빠지게 하는 건 가능하지만 저자가 무슨 꿈을 꿀지는 모릅니다."

"그럼?"

"저놈이 자다가 격발 장치를 누르는 꿈을 꾼다면?"

현실에서도 눌러지겠지.

아니면 손에서 격발 장치가 떨어지거나.

어떻게 되든지 터진다.

"광마님은?"

"···손목을 자르거나 격발 장치를 부술 순 있소. 하아, 허나 위험 부담이 매우 크오. 암살자도 노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하니, 늦기 전에 탑으로 피신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실제로 코사크는 주혁에게 필사적인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빨리 탑에 입장하십쇼. 빨리! 뭐 하심까? 답답함다!

어떡하지?

진짜 방법이 없나?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핵의 위력이 어떤지 실제 경험도 해봤고.

주혁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중, 탑 입장 가능한 플레이어들도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

박경수 전 청장과 전광일, 그리고 이민아.

그 외 남북한 고위 관료와 하급 공무원과 언론 기자들.

특히 내외신 기자들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

차차착! 차차차착!

심지어 생방송도 그대로 진행.

'···미친 사람들인가?'

주혁은 전광일 청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연신 입술을 움직이며 자신에게 무언으로 외치는 중.

도망쳐요. 빨리! 탑으로!!!

웬만하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광마도 주혁의 옆에서 간곡하게 호소했다.

"소환사, 제발, 탑으로 들어갑시다. 노부의 부탁이요. 제발."

"주인님, 광마님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부득이 피소환인 3원칙 3항으로 소환사 그대를 안고 멀리···,"

"잠깐만요."

시도해볼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게 실패하면 탑 입장해도 늦지 않다.

"무선 격발 장치가 눌러진다고 해도 1초 정도의 여유가 있잖아요."

"그, 그래도···,"

경험해봐서 안다.

누른다고 즉시 터지나?

그리하여 주혁은 누구 한 명 불러냈다.

최고의 스페셜 리스트를.

※ ※ ※

장창수 소좌는 내심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고사극 인민무력부장.

갑자기 나타나 공화국 권력의 핵심이 된 인물.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까 해방의 룬 목걸이로 탑 안에서의 능력이 현실에서 발현된 플레이어.

아마 남조선에서 넘어온 것이 확실할 터.

그러니 통일이니, 뭐니 이딴 짓거리를 해대는 거고.

통일?

나 죽고 나서 통일이라고?

어림도 없다.

이미 불치병에 걸린 몸.

췌장암 4기, 미제 병원, 남조선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그래서 중국 브로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가족들을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평생 먹고살 만큼의 돈을 요구했다.

제안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전달된 물건 2개.

하나는 핵배낭.

또 하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준 해방의 룬 목걸이.

딱 1번의 사용 횟수만 남은 목걸이였다.

하지만 1번이면 충분했다.

무사히 행사장 안으로 진입했고 무선 격발 장치를 손에 쥐었다.

그럼 이제 끝난 게임이지.

누가 와도 막지 못한다.

설령 저 고사극이 해방된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무조건 터진다.

여전히 싸늘한 눈빛의 고사극.

두려움에 벌벌 떠는 김인중.

'간나 새끼들.'

차라리 좀 더 일찍 통일 했더라면.

자신이 췌장암을 앓기 전에 말이다.

장창수가 핵배낭을 바로 터트리지 않았던 이유.

중국의 요구 조건 중 하나.

자신의 자살 핵폭탄 테러를 외부 세력의 개입이 아닌, 통일 논의에 불만을 품은 북한 내 군부 세력의 소행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그러면 2,000만 위안을 가족들에게 더 주겠다는데.

 

그래서 다소 대화를 길게 끌었다.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각인시켰고.

방송에도 그대로 나갔겠지.

목적은 달성했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는 장창수.

이제 이 격발 장치를 놓아버리면···,

그런데 바로 그때!

데굴데굴데굴.

'···응?'

데구르르르.

언제 나타났는지, 이쪽으로 굴러오는 하얀색 털 뭉치.

동그란 공처럼 생겼다.

뒤에 자그마한 배낭도 멨다.

잘도 굴러왔다.

데굴데굴.

'뭐지?'

이 귀여운 생명체는?

마치 햄스터 같은.

"호에에,"

장창수는 굴러오는 물체를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람도 아닌, 귀엽고, 동글동글하고, 무해하게 생긴 복슬복슬한 털 뭉치를 말이다.

"호에?"

심지어 자신의 옆에 다가와 짧은 팔을 흔들며 인사하기까지.

'아아,'

하마터면 같이 손을 흔들 뻔.

위협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에."

털 뭉치가 손을 쭉 뻗었다.

자신의 등 뒤로.

'···왜?'

순간!

스륵!

헐렁! 가벼워지는 어깨.

"···헉!"

이게 무슨?

장창수는 다급하게 손을 뒤로 해서 자신의 등을 더듬었다.

없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핵배낭이 통째로 사라졌다.

"대체···,"

정신을 번쩍 차린 장창수.

쿡쿡!

연신 무선 격발 장치를 눌러댔지만.

"이, 이런!"

터질 리가.

이미 핵배낭은 라직스의 아공간에 들어가 있는데.

"후엑!"

라직스의 양손이 그의 허리에 얹혔다.

그렇게 가슴을 쫙 펴고, 어깨를 으쓱인 후.

한쪽 팔을 앞으로 뻗어 짧은 손가락 2개로 V자.

특유의 자부심 넘치는 표정.

뿜어져 나오는 콧김.

"호엥!"

차차차착! 차차차차차차차차착!

기자들도 이 순간을 놓칠세라 대낮인데도 플래시를 터트려댔고.

"흐흐흐."

코사크도 실소를 터뜨렸다.

인정할 수밖에.

우주대머슴을 넘어 우주 최고의 해결사.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스팟!

어느 틈에 달려온 코사크가 한 손으로 장창수의 모가지를 그러쥐었다.

"동무, 각오는 되어 있갔디?"

"어어어."

살기 가득 넘치는 코사크의 눈빛.

어느 틈에 광마도 달려와.

"이놈은 내게 맡겨라, 부탁이다."

"같이 하십쇼. 이번에는 저도 절대 양보 못하겠슴다."

"알았다."

하지만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라직스에게 있었다.

"호에에엑!"

차차차착! 차착!

장창수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위성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됐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0 >

미국 국토안보부.

맥밀란 장관과 안토니오 국장은 평양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초대장이 왔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히 주변국을 자극할 수 있기에

중국하고 러시아 말이다.

그래서 TV를 통해 생중계로 행사 과정을 시청하는 중.

화면엔 인민무력부장 고사극이 나왔다.

"흠, 나왔군."

"네, 현재 북한에서 가장 수수께끼의 인물이죠."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북한 내 친척도 없고, 연고도 없고, 학력이나 이런 것도 미상이라던데."

"전 봉 플레이어 측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의 조력자 혹은 부하."

"부하? 무슨 근거로?"

때마침 시작된 고사극의 연설.

매번 연설 끝엔 입버릇처럼 주혁 만세.

"보십시오, 주혁 만세! 공교롭지 않습니까?"

"뭐가?"

"봉 플레이어 이름이 주혁입니다."

"하아, 그건 메인 아이덴디티 레볼루션, 한국어로 주체 혁명의 줄임말이잖아."

"정말 그럴까요?"

"그럼 봉주혁의 주혁이란 말인가?"

"전 그렇게 판단합니다만."

어깨를 으쓱하는 맥밀란 장관.

안토니오의 추측은 너무 비약이 심하다.

몇 달 전만 해도 적대 국가였던 북한의 국방장관이 봉 플레이어의 부하라니.

"자네 요즘 망상이 너무 심해. 다른 데 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말게. 미친놈 취급받을 수도···,"

바로 그때!

휘리릿! 쿵!

"어?"

"헉!"

갑자기 행사장에 나타난 북한 군인.

클로즈업되는 화면.

"저, 저건···."

"핵배낭? 저거 맞아?"

"마,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테러다.

핵을 이용한 테러가 일어나려고 하는 중.

북한의 최고 지도자와 한국의 각성 관리청장, 그리고 고위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혹시 봉 플레이어도 행사장에 있나?"

"저, 저기."

잠시 스쳐 지나간 화면.

저 뒤쪽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

봉주혁이었다.

맥밀란 장관은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지저스! 뭐 하고 있어? 미스터 봉! 빨리 탑으로 들어가라고!"

"입장 횟수 다 소모한 건 아닐까요?"

"퍼킹! 제기랄!"

"맙소사."

봉 플레이어는 절대 죽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

지구 최후의 보루이자 구원자.

봉 플레이어의 존재만으로 탑 공략에 대한 부담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그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고자 한 것이고.

특성 강화의 룬을 선물로 주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다면?

탑 붕괴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터.

맥밀란과 안토니오는 그저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제발, 어떻게든 봉 플레이어만은 살아남길.

어서 탑으로 피신하든가, 아니면 폭발이 일어나는 범위 밖으로 탈출하든가.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화면에 잡힌 하얀색 털 뭉치.

"···저건 뭐야? 대형 햄스터?"

"어어, 이, 일단 사람은 아닌 것 같은···, 아니, 사람인가?"

아무튼 햄스터 인간이 나타났다.

그것도 매우 깜찍하게 생겼다.

- 호에!

그가 테러범의 등 뒤에 손을 뻗자,

스륵, 사라지는 핵배낭.

"···."

"···."

테러 위협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인벤토리?"

"아닐 겁니다. 인벤토리에 탑 아이템 이외의 물건이 들어갈 리가."

"그럼 대체?"

화면엔 털 뭉치 햄스터 인간 한 명만 나왔다.

테러범의 얼굴 따윈 비치지도 않았다.

기자들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굴 찍어야 하는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맥빌란 장관과 안토니오 국장은 그저 TV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 ※ ※

중국 베이징.

류자오 주석과 상임위원들도 한자리에 모여 TV를 통해 평양 행사를 시청하고 있는 중.

모두가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장창수가 핵배낭을 메고 행사장 중앙에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든 터지게 해놨으니까.

격발 장치를 누르면 터진다.

격발 장치가 손에서 떨어져도 터진다.

장창수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심장이 멎어도 터진다.

맞다.

끝났다.

이제 김인중 사후, 권력을 공백을 얼마나 빠르게 장악하느냐만 남았다.

이미 대책도 세웠다.

싱가포르에 거주 중인 김인중의 배다른 형제, 그를 내세워 북한을 지배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정체불명의 털 뭉치가 나타나 핵배낭을 집어삼켜?

핵배낭 자체가 사라졌다.

온데간데없이 말이다.

"···."

"?"

"···어."

"대, 대체?"

"핵배낭이 왜?"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모든 장면이 화면에 그대로 송출되고 있었다.

이렇게 실패했다고?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짐승 한 마리 때문에? 

모두가 침묵했다.

다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 ※

생중계로 방송된 행사.

한국에서도 시청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시청률도 20% 이상.

그러다 핵배낭 테러범의 등장.

시청률은 40% 이상으로 치솟았고, 라직스 등장 부분에선 60%를 경신했다.

지금도 쭉쭉 올라갔다.

마치 애니메이션을 찢고 나온 듯한 무자비한 귀여움.

심장을 폭행하는 치명적인 동글동글 자태.

거기에 핵배낭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까지.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당연했다.

속보도 쏟아져 나왔다.

<속보) 평양 각성 관리지청 행사장에서 핵 테러 위협 발생.>

<속보) 용의자는 북한 군부 강경파 소행으로 의심.>

<속보) 해방의 룬 목걸이로 삼엄한 경계를 돌파하고 행사장에 진입.>

<속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일어난 기적.>

<속보) 햄스터 인간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진 핵배낭.>

<속보) 대체 어디서 나타났나? 탑 혹은 외계인?>

<속보) 인간인가, 햄스터인가? 그게 중요해? 치명적인 매력, 귀여우면 됐지(영상첨부)>

기사마다 무수한 댓글들도 달렸다.

└ 저 악랄한 생물 이름이 뭐냐? 나 지금 쟤 때문에 죽을 것 같다. 빨리 알려줘.

└ 하아.

└ 만지고 싶다.

└ 저 하얀 솜털에 코를 박고 막 비빌래.

└ 핵이 아니라 내 심장이 터진다.

└ 나 지금 영상 100번째 돌려보는 중.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어.

└ 합성 아니냐?

└ 생방인데?

└ 지금 월북하면 볼 수 있을까?

└ 치유 받고 싶습니다. 당장 평양 가실 파티원 구합니다.(1/5)

└ 내레 저 자리에 있었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야.

└ 저 햄스터 정체는 알아?

└ 남조선 동무들은 바보구만 기래. 딱 보면 모르갔어?

└ 누군데?

└ 금강산 산신령이디,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 수호신.

└ 산신령은 개뿔, 왜? 선녀도 있다고 그러지.

유행어도 생겼다.

└ 호에?

└ 호에에에에!

└ 후엥?

└ 호엑!

└ 그만해. 미친놈들아!

└ 호엥?

지금까지 피소환인의 얼굴이 영상으로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 HG 호텔에서의 코사크와 고방, 그리고 일본 도심 한가운데에서 혐한 시위대 참교육해버린 광마.

그러나 이번 라직스의 임팩트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한국, 아니 전 세계가 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 ※ ※

평양.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전광일과 이민아 팀장이 나서서 기자들 취재 경쟁에서 라직스를 보호하며 어디론가로 데려갔고, 광마와 코사크는 테러범 장창수를 책임졌다.

주혁과 디아마트도 행사장을 빠져나와 으슥한 곳으로 이동해 비로소 탑에 입장했다.

그리고 그날 밤.

혈랑을 빼고 모든 피소환인들을 불러낸 주혁.

그가 평양에서 겪었던 일들이 모두 공유된 모양.

모두 분노하고 안도하며 자책했다.

"공자님! 죽여주시옵소서. 소녀가 어리석었나이다. 일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자님을 보필하지 못한 죄,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아, 아니, 뭘 잘못했다고? 그리고 잘 끝났잖아요."

고방도 쿵! 무릎을 꿇었다.

"전사는 여전히 어리석다. 르스스알이 되어도 우둔하다.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한다."

뿐인가?

"마이 로드! 신을 용서하지 마소서."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자진해서 영창 가겠습니다."

"저 같은 건 피를 마실 자격도 없습니다."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도 자신의 방 문틈으로 눈만 빼곡 내어놓은 채 눈물을 훌쩍이고 있는 중.

알고 보니 이들 모두 저세상에서 다른 영혼들을 선동하여 확률 정상화와 관리자 처벌 시위를 벌였단다.

그래서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고.

뭐, 참석한들 뾰족한 수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한바탕 통곡의 반성이 끝난 후.

견달래가 스산한 목소리로 코사크에게 물었다.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알 거 다 알아내고 김인중에게 넘겨줬슴다. 아마 평양 보위부 감옥에 있을 검다."

"하! 살려뒀단 말입니까?"

대신 대답하는 광마.

"공주 선녀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죽을 날을 받아둔 놈이더군. 하루하루가 고통일 거요. 그냥 죽여버리면 자비를 베푸는 것 같아서 살려둔 거지."

하나 더.

놈이 단독으로 일을 벌였을까?

"배후는요?"

"어디겠슴까? 한반도 통일을 싫어하는 나라임다."

"일본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까 중국이겠네요."

"정확하심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피소환인들은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데?

이럴 리 없다.

'흠,'

그전 같았으면 반드시 위협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중국 정치인들 모가지를 베어야 한다, 이러면서 길길이 날뛰어야 할 사람들이···,

완전히 대한민국 사람 다 된 건가?

아니면···,

'가만!'

이거 설마?

뭔지 알겠다.

'이미 발동했구나.'

피소환인 3원칙 3항.

소환사의 생명 보호하기 위해 피소환인의 자율적 판단과 행동이 허용되는 것.

이러면 말리지도 못한다.

'아이고.'

곧 중국에서 무슨 일이 터지겠다.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릴 생각도 없다.

무려 핵배낭으로 테러를 계획했던 놈들.

남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정돈 알고 있어야지.

"자자, 분위기 전환합시다. 배지 수여식 들어갑니다."

공을 세웠으니 하나씩 돌려야지.

그런데 배지가 모자란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래서 LSSR 피소환인들은 당분간 배지 수여 중지.

일단 새 식구가 된 제페트와 디아마트에게 각각 배지 하나씩.

"주, 주인님!"

"제 모든 걸 바쳐 모실게요."

그리고 베 상사 하나.

"필승!"

바르딘도.

"빛이여!!!"

이로써 바르딘은 누적 5개. 그리하여 스킬 하나를 업그레이드했다.

광휘의 빛이 눈부실 정도로 밝아진 걸 보니 어떤 걸 올렸는지 짐작이 간다.

마지막으로 우리 라직스.

사실 몇 개를 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어쨌든 최대한 많이 달아주고 싶다.

그래서 각각 나누어 별건으로 진행,

현재 라직스의 누적 배지 숫자는 총 12개.

먼저.

"귀하는 81층의 강화된 몬스터, 초거대 괴수 타이탄 베헤모스를 처리하는 데 있어 핵탄두와 간이 방공호 운반이라는 지대한 공을 세웠으므로 이에 플래티넘 배지 3개를 수여합니다."

"호에!"

3개를 달아주면 15개.

화아앗!

빛이 되어 사라지는 배지.

또 한 번의 스킬 업그레이드.

과연 무엇을 올렸을까?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아직 남았다.

"또한 귀하는 평양 각성 관리지청 개소식 행사에서 테러범의 핵배낭을 빼앗아 다수의 인명 구조에 기여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플래티넘 배지 3개를 수여합니다."

"호에?"

살짝 놀라는 라직스.

받아줄까?

받아야 하는데.

"호에에···,"

가슴을 쑥 내밀었다.

받겠다는 의미.

하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데.

다시 3개를 달아주니 총 6개.

남은 배지 23개에서 13개.

부러운 표정의 피소환인들.

짝짝짝짝!

그러나 축하는 진심이었다.

왜?

라직스는 6개 받아도 된다.

거만해도 상관없다.

그럴 만한 일을 했으니까.

아무튼 라직스의 누적 배지수는 18개.

이제 7개만 더 받으면 25개.

5개의 스킬이 르스스알.

르스스알 등급 조건이 충족된다.

이 시점에서 궁금한 점 하나.

과연 라직스는 어떤 스킬을 업그레이드했을까?

"호에, 청소요."

"···네?"

청소?

아니 왜···,

순간!

스슥!

아공간 배낭에서 황금 빗자루와 황금 쓰레받기, 황금 마대를 꺼내는 라직스.

'흠.'

뭐, 상관없다.

청소든 요리든, 우리 라직스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나저나 큰일이 터졌는데 각성 관리지청 설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전광일 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되겠지만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TV나 틀어봐요. 뉴스 좀 보게."

"예압!"

리모컨으로 쿡, 누르는 코사크.

틱!

화면이 켜지고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호에?"

고개를 갸웃하는 라직스.

그도 그럴 것이.

TV에 자신의 얼굴이 나왔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모습.

봉 소환사님을 보며 칭찬을 바라고 한 동작인데.

"우, 우리 우주대머슴 스타됐슴다."

"···."

그런 것 같다.

계속 라직스 얼굴만 나온다.

귀여운 모습만 편집해서 보여준다.

이미 나왔던 거 또 보여준다.

"채널 돌려보세요."

틱!

라직스의 모습.

틱!

또 라직스.

틱!

또또 라직스.

방송 전 채널 라직스 석권!

"그냥 스타가 아임다. 우주대스타임다."

와!

어떡하지?

귀여운 라직스는 나만 알고 싶었는데.

싹 다 까발려졌네?

※ ※ ※

작당 모의는 그날 밤에 일어났다.

배지 수여식과 파티를 마치고,

피곤했는지 주혁이 방으로 들어가 일찍 잠든 사이.

광마, 코사크, 견달래, 세 사람이 불도 켜지지 않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모였다.

화장실이라고 해도 펜트하우스.

게다가 매일매일 라직스가 청소를 하는 곳이라 누워 자도 될 만큼 쾌적한 공간.

"많이도 필요 없슴다. 저랑 디아마트만 가도 됨다."

"노부는 백업으로 참가하지. 멀리서 엄호하면 되니까."

"류자오 주석은 익히 알려진 인물이라 추적부 활성화는 무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이미 발동된 3원칙 3항.

피소환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소환사님을?

사실 다른 세상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일.

탑이 아닌 같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플레이어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멸망시켰다.

물론 자신들의 잘못도 있었다.

그동안 너무 방심했다.

그래서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렇다면?

따끔한 경고가 필요하겠지.

그러나 문제가 있다.

봉 소환사님이 허락하실까?

"마음이 여리신 분임다. 절대 모르게 해야함다."

"노부도 알고 있다. 우리로 인해 또 다른 근심이 생기면 안 된다는 것도."

"하오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자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나중에 벌을 달게 받으면 그만이지요."

"그렇지."

"옳은 말임다."

몰래 가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제일 큰 걸림돌은 어떻게 중국 베이징으로 가느냐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 가는 데만 반나절이 걸릴지도."

"그러하옵니다. 북한과 만주 벌판을 지나야 하는데."

"비행기 타면 됨다."

"여권은?"

"제가 전광일 청장 명함 가지고 있슴다. 봉 소환사님 몰래 연락해···,"

바로 그때!

탁!

밝아지는 화장실.

"헉!"

"어머나?"

"으음."

그리고 삐걱 문이 열리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 딱 걸렸어."

주혁이었다.

꿍꿍이 피울 줄 알았다.

그래서 자는 척하면서 현장 급습.

몹시 당황한 코사크와 광마, 견달래.

안절부절못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허어, 노, 노부는 그저 샤워나 하려고."

"으아, 저, 저도 쉬가 마려워서 화장실 온 검다."

"···소녀는 화장을 고치기 위해."

참나.

"그니까, 화장실 하나에서, 그것도 동시에, 한 명은 샤워, 한 명은 오줌 누고, 한 명은 화장을 고친다?"

"효, 효율적이지 않슴까."

"그렇소. 일석삼조지."

"남녀가 유별하나, 서로 같은 식구나 마찬가지 아니옵니까?"

주혁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내일 베이징 탑에 모셔드리면 되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을 떡 벌리는 세 사람.

"사실 저도 화가 나긴 했거든요. 통일 막자고 핵을 터트린다?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죠."

맞다.

만약 계획이 성공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피소환인들이 반색했다.

저마다 한껏 웃으며,

"생각 잘하셨소, 소환사."

"이 코사크, 깔끔하게 끝내고 오겠슴다! 쓸데없는 살상은 절대 안 함다. 약속 드림다."

"대의를 위한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공자님."

그냥 넘어가면 언젠가는 또 이런 일이 발생할 터.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1 >

계획이 변경됐다.

든든한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봉 소환사님의 통 큰 허락.

게다가 베이징 탑까지 데려다주신다고 하니.

피소환인들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3원칙 3항과 봉 소환사님의 의지가 일치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그래서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먼저 주혁과 함께 베이징 탑으로 도착한 코사크와 디아마트.

"충! 번거롭게 해서 죄송함다."

"천만에요. 저야 탑 퇴장 반지만 쓰면 되는 건데, 대신 되도록···,"

"예압! 인명 피해 최소! 명심하겠슴다."

주혁과 헤어진 코사크와 디아마트는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무려 두 단계나 승급했슴다. 서큐버스 퀸은 못 돼도 서큐버스 프린세스는 되는 것 같슴다."

"네, 능력을 거의 회복했어요."

또 하나의 전향 귀순자 등급 상승의 룬을 이용해 스알(SR)에서 스스알(SSR)로 돌아온 디아마트.

"으음, 다 주인님 덕분이에요."

"늘 고마운 마음 가지고 있어야 함다."

그러자 디아마트가 몸을 살짝 비틀고는 고혹적인 미소를 뿌리며 말했다.

"아이, 당연하죠. 우리 주인님은 생명의 은인인걸요. 제 모든 걸 드려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세요."

순간 버럭 화를 내는 코사크.

"거, 아무 데나 막 흘리고 다니지 마십쇼. 우리 봉 소환사님, 진숙이 꿈이나 꾸게 만들고 말이야. 어?"

"죄, 죄송해요."

"베 상사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어?"

"그, 그분은 너무 거대하신 분이라."

"시끄럽고."

코사크의 첫 번째 지시 하달.

"디아마트 귀순자, 다른 사람 꿈속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낼 수 있슴까?"

"그건 제 특기인걸요?"

"좋슴다. 당장 중난하이로 가서 고위 관료들 꿈속에 들어가 류자오 주석의 동선과 일정, 위치를 알아오십쇼. 24시간 드림다."

"네에."

"전 북한 대사관 들렀다가 오겠슴다."

1차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디아마트와 코사크는 각자 필요한 정보를 구했다.

그리고 이틀 후.

드디어 결행의 시간.

피소환인들이 작전을 시작했다.

다시 베이징 검은 탑에 나타난 주혁.

그리고 피소환인들.

광마, 코사크, 고방, 바르딘, 베상사, 제페트, 디아마트.

총 7명.

라직스도 특별출연.

그의 임무는 배달.

스슷!

라직스가 아공간 배낭에서 물건을 꺼냈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

"수고했슴다. 우주대해결사."

"호에!"

고방이 핵배낭을 등에 멨다.

평양에서 장창수가 가지고 있던 그것.

북한에서 격발장치 신관을 시한 신관으로 개조해왔다.

우리 물건도 아닌데 되돌려줘야지.

※ ※ ※

중국 베이징.

올해 나이 78세의 류자오 중국 국가 주석.

나이에 맞지 않게 사뭇 젊어 보였다.

한 10년 정도?

처음 취임했을 땐 주름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는데,

왜?

귀한 회춘의 비약을 복용했기 때문이다.

비록 30살 이하는 효능감이 거의 없고, 재복용 시 효과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약이지만,

40세 이상,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회춘의 비약은 더더욱 빛을 발한다.

원래 71층에 등반했을 때 플레이어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약.

오래오래, 건강하게 탑에 등반하도록.

즉 플레이어가 먹어야 한다.

해방의 룬 목걸이, 형상 변환의 반지, 질병 치료의 포션도 그런 의미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그 물건들을 온전하게 차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결국 권력자들에게 다 토해내야 한다.

중국도 3개 탑에서 나온 아이템 모두 자신을 비롯한 상무위원들이 차지했다. 

뭐, 어때?

젊은이보다 노인에게 더 좋은 건데.

아이템을 넘겨준 젊은 플레이어에겐 다른 충분한 보상을 주면 되는 거고.

소중한 10년의 젊음.

그래서인지 류자오 중국주석은 점점 과감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번 평양 각성 관리지청 개소식 테러도 사실상 그가 주도해서 결정한 것.

물론 상무위원회 회의를 거치긴 했지만.

오늘도 자신을 포함한 상무위원 7인의 회의가 있는 날.

평양의 거사가 실패했다.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회의 장소는 대륙 위기관리 본부.

요즘 최고 상무위원 회의는 다 이곳에서 한다.

중난하이가 한번 뚫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납치된 플레이어가 탈출했을 때.

국가적 대망신.

중국의 국격이 추락했던 사건.

그래서 류자오는 대륙 위기관리 본부 지하 벙커를 애용했다.

핵이 터져도 끄떡없는 장소.

입구도 하나밖에 없어 철통같은 방비를 자랑하는 곳.

한마디로 중국에서 가장 안전하다.

외부침입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최근 1년 사이에 주석 지위에 오른 사람이 무려 3명.

린차이밍 전전(前前) 중국주석에 이어 왕위안 전(前) 중국주석, 그리고 자신은 3번째.

이 와중에서 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중국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터.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가 지하 벙커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무조건 안전이 최우선.

"회의 시작합시다. 첫 번째 안건은?"

※ ※ ※

7인의 피소환인.

대륙 위기관리 본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멀리서 지켜봐도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높은 담벼락, 그리고 군데군데 세워진 타워형 초소.

도시와 떨어진 평야 지역에 위치해서 시야가 훤히 트였다.

누구라도 접근하려고 치면 반드시 들킨다.

그러나 그건 일반 사람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

최소 스스알 이상의 피소환인들에게 저깟 경비 초소가 무슨 소용인가?

전투 계열 피소환인 7명이 총출동했다.

성공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빠르게 처리하느냐가 관건.

"본인과 뱀파이어가 먼저 지하 벙커 들어가서 CCTV 중앙 통제실 점거함다. 10분 후에 초소 인원들 정리하면서 들어오십쇼."

CCTV가 100개 달려있으면 뭘 해?

통제실만 점거하면 끝나는데.

철통같은 경비의 맹점.

영화에서 보면 테러범들이 통제실부터 장악하는 이유.

스르륵!

코사크가 은신으로 사라졌다.

펑!

제페트가 박쥐로 변신했다.

10분이 지났다.

디아마트가 행동을 개시했다.

촤라락!

펼쳐지는 날개.

광역 꿈의 영역이 선포됐다.

스스알로 승급해서 범위와 지속 효과가 넓어지고 오래가는 디아마트의 고유 기술.

사실 알고 보면 몽마는 무서운 존재다.

관리자들이 괜히 디아마트를 탑 밖으로 현신시켰을까?

저항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꿈의 영역으로 들어오자마자 잠에 빠져버렸다.

픽픽, 털썩, 털썩.

쓰러지는 경비병들.

픽픽, 털썩, 털썩.

초소 인원 정리하고 다음은 벙커 외부의 군인들도.

날개를 펼치고 대륙 위기관리 본부 위를 한 바퀴 쭉 돌아서 날면 다들 단꿈에 빠져 쓰러진다.

"쟤 그냥 내버려 뒀으면 큰일 날 뻔했군."

"일반인들은 절대 저항 못 하죠."

"성기사인 저도 걸려들었는데 오죽하겠습니까."

"전사는 견딜 수 있다. ···조금은."

쓰러진 경비병들은 광마와 고방, 바르딘, 베 상사가 함께 들어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봉 소환사님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리고 벙커 안으로 진입.

이미 문은 열려 있었다.

픽픽, 털썩, 털썩.

마찬가지로 꿈의 영역을 전개하며 나아가는 디아마트.

쿡쿡, 털썩, 털썩.

영역에서 벗어난 이들은 광마가 수혈을 짚으면서 재웠고.

파죽! 파죽! 털썩, 털썩.

베 상사의 마비탄도 거들었고.

안에서 쓰러진 이들도 밖으로 옮겼다.

벙커 안을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

류자오 주석과 상무위원들만 남기고 말이다.

이 모든 행동은 지극히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안에서 회의하는 사람들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 ※ ※

대륙 위기관리 본부 지하 벙커 회의실.

류자오 주석이 주재하는 상무위원 회의.

"김인중이가 외교 채널을 통해 격렬하게 항의해왔습니다."

"결국 장창수가 다 불었군."

"소국 놈이니까요, 애초에 믿지도 않았습니다."

"남은 증거는?"

"장창수 소좌 진술 말고는 없습니다."

평양 핵 테러에 실패한 후 중국 정부는 모든 증거를 지웠다.

심지어 중국으로 데리고 온 장창수의 가족들도.

따라서 남은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우리와 단교하겠다던데···,"

"흥!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거지같이 구걸하던 주제에."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류자오.

"일단 군사적 압박부터 시작해."

"네, 인민해방군 북부전구 기계화 부대를 압록강 변으로 전진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한령도 강화해."

한한령(限韓令).

대한민국에서 제작한 컨텐츠를 중국 내에서 금지하는 명령.

동시에 한국산 제품과 중국에 진출한 한국업체에도 불이익을 준다.

"서해 쪽으로 중국 어선들 투입해서 들이받아 버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제재 조치들을 구상했다. 

전방위적으로 남한과 북한을 강하게 짓눌러 줄 것이다.

건방진 놈들.

탑 공략 좀 잘한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고 다녀?

회의가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이왕 모였으니 술이나 한잔 마십시다. 어떻소?"

"네, 그렇게 하죠."

"괜찮은 술 있습니까?"

"귀주산 마오타이가 몇 병 있소."

"오! 좋죠."

류자오는 뒤쪽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에게 눈짓했다.

밖으로 나가서 한상 잘 차려오라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비서관.

한참을 기다렸다.

왜 안 오는지 궁금해지던 순간!

끼이익,

열리는 회의실 문,

그러더니 낯선 남자 하나가 술과 음식이 담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드르르륵.

류자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온 남자의 생김새가 특이했기 때문이다.

'···서양인?'

대륙 위기관리 본부에 왜 저런 놈이?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뒤를 따라 들어오는 노인.

그리고 거대한 몸집의 남자.

"암살자야. 술은 챙겨라. 좋은 술 같은데, 가지고 가서 소환사와 한잔해야겠다."

"이거 어떻게 가지고 가려고 하심까? 소환 해제되면 놓고 가야 하는데."

"우리 머슴 부르면···,"

"술 운반하겠다고 우주대머슴 부르면 욕 먹슴다."

"괜찮다. 소환사도 술을 좋아하니."

"이따가 연락해보겠슴다."

류자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상무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놈들이 출입해?

경비병들은 뭘 했길래.

그러고 보니 바깥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다들 어떻게 된 건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너, 너희는 누구···,"

그러자 입을 여는 노인.

"누구긴, 네놈들을 벌하기 위해 온 정의의 용사들이지. 감히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무사할 거라 여겼느냐?"

중국어였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고어(古語)가 약간 섞였다.

"그런 짓?"

"평양말이다."

평양이라니.

"광마님, 말 섞지 말고 빨리 점혈이나 해 주십쇼. 수혈 말고 점혈임다. 죽는 순간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알았다."

피피핏! 피피핏!

광마의 손가락에서 발출되는 탄지공.

류자오와 상무위원들은 모두 뻣뻣하게 굳었다.

입도 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설치하는 코사크.

"거기, 광마님, 화면에 안 나오도록 비키십쇼."

그러더니,

스르륵.

얼굴을 변화시키는 코사크.

"중국인 같슴까?"

"그 얼굴은 고사극이지 않느냐?"

"아차차차! 깜빡했슴다."

멍한 눈빛의 류자오.

고사극이라니.

"다시 바꿨슴다."

"흐음, 중국인 같구나."

"헤헤헤, 한중일 인종이 거기서 거기 아임까."

저게 뭐야?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꿔?

형상 변환의 반지인가.

반지 같은 건 착용하지도 않았는데.

"할 말은 다 외웠느냐?"

"외웠슴다. 북경어 달인 됐슴다."

얼굴을 변화시킨 코사크.

그의 뒤로 꼼짝없이 앉아있는 류자오 주석과 상무위원들.

"고방아, 등에 메고 있는 거, 저기 뒤에 놔둬. 카메라 렌즈에 잡히지 않게."

"알았다."

주섬주섬 등에 멘 원통형 물체를 카메라 뒤편에 놓은 고방.

그러자 점혈로 인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경악했다.

동그랗게 떠진 눈.

거칠어지는 숨소리.

충격받을 수밖에.

핵배낭이다.

평양에서 장창수가 가지고 있건 그것.

이건 또 왜 여기에?

설마 터트리려고?

미친놈들인가?

중국 최고 지도자들을 한 번에 몰살시키려고 하나?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단지 겁을 주려는 것뿐이다.

류자오는 그렇게 확신했다.

코사크는 카메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점검하더니 바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 뒤편에 놓인 핵배낭은 찍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똑똑히 볼 수 있다.

시한장치가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

남은 시간 5분.

코사크의 입이 천천히 열리고,

유창한 중국 북경어가 흘러나왔다.

"본인은 위대한 대중화 사회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플레이어다."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그런데 현 중국 정부는 과연 사회주의의 정신을 잇고 있는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러운 자본의 힘으로 인민들을 착취하는 놈들이 중국을 통치하고 있다. 보라! 번들번들한 류자오 주석의 얼굴을! 회춘의 비약을 마시고 젊어진 돼지 새끼를!"

비장한 표정의 코사크.

"대(大) 중화의 플레이어들이여! 언제까지 돼지들에게 착취만 당하며 살 것인가? 떨쳐 일어서라! 비열한 독재 정부에게 저항하라. 혁명이 그대들 손에 달렸다!!!"

목소리는 더 쩌렁쩌렁해졌다.

"착취자들로 하여금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플레이어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탑의 힘이다. 대륙의 중국 플레이어들이여, 단결하라!!!"

사실 코사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북한 대사관에서 써준 내용을 중국어 발음으로 지껄일 뿐.

"그래서 오늘, 이 돼지들에게 심판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부수지 않고선 세울 수 없다. 새로운 중국을 위해 낡고 썩어빠진 것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만세! 만세!"

류자오와 상무위원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

저 정체불명의 플레이어 놈들이 뭐라고 하는지 중요하진 않았다.

눈앞의 핵배낭.

계속 줄어드는 시한.

이젠 2분도 남지 않았다.

진짜 이대로 터져?

베이징에서 핵배낭을 터트린다고?

살아야 한다.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고개를 조아려 싹싹 빌어야 한다.

미안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다시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10년이나 젊어졌는데,

앞으로 30년은 거뜬히 살 수 있는데.

하지만 입도 열지 못하는 노릇.

게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놈들.

회의실 안엔 자신과 상무위원들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 1분,

류자오는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했다.

시한장치 신관을 중지시키기 위해.

'···제, 제기랄!'

하도 힘을 쓴 나머지 눈에 핏줄이 터졌다.

남은 시간 30초.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인데, 여기서 핵이 터진다고?

너무나 후회됐다.

저 핵배낭.

평양 테러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저게 여기 있을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자신도 전임 주석들의 전철을 밟게 되는 건가?

남은 시간 10, 9, 8···,

몸부림치는 류자오와 상무위원들.

그들의 눈에 절망만이 가득했다.

"끄어···,"

조금씩 입이 열리고 성대가 움직였지만.

3, 2, 1···,

"아, 안돼!!!"

0.

신관 작동.

화아아앗!

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쾅!

결국 터졌다.

평양에서 터지지 못한 핵배낭이 베이징에서 터졌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벙커 안에서 말이다.

후끈한 열기가 회의실을 덮쳤다.

죽는 순간 류자오는 떠올렸다.

벌써 3번째 중국주석의 죽음.

과연 후임이 정해질 수나 있을까?

혼란은 매우 오래갈 것이다.

쿠쿠쿠쿠쿠쿠쿵!

무너져 내리는 지하 벙커.

폭발의 진동은 베이징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 ※ ※

쿠쿠쿠쿠쿠쿵!

7인의 피소환인들은 멀리서 붕괴하는 지하 벙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원함다. 이게 미러링이라는 검다. 그대로 돌려줬슴다."

"근데 녹화는 제대로 되었느냐? 카메라도 부서졌는데."

"에휴, 맨날 술이나 드시지 마시고 좀 배우십쇼. 그러니까 어디 가서 틀딱 소리 듣는 검다."

"···."

"카메라는 찍는 용도고 영상은 여기 스마트폰에 저장되는 검다. 그래야 너튜브에 업로드할 수 있슴다."

싸늘하게 굳어진 광마의 얼굴.

"그래, 네놈도 르스스알이지. 잘됐구나. 몇 대 맞는다고 해도 죽을 일은 없겠군."

"···넴?"

"몸이나 풀어볼까? 서열정리 할 때도 됐고."

지잉!

광마의 손위에 떠오른 초승달 강기.

스팟!

순식간에 도망치는 코사크.

"허허, 그놈 참, 빠르긴 빠르구나."

스팟!

광마의 몸도 사라졌다.

강호의 경신술과 그림자 발걸음.

누가 더 빠를까?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2 >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최종 보고 시간.

사망한 사람은 고작 7명.

그러나 모두 중국의 최고 권력자들.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과 차기, 차차기, 차차차기 대선 후보 7명이 한자리에서 몰살당했다고 보면 된다.

이전의 주석 부재 상황과는 천지 차이.

단시일 내에 수습하기 힘들다.

코사크가 스마트폰을 TV에 연결했다.

뭘 찍어왔다던데.

"미장센의 장인, 예술 영화의 거장, 철저한 고증, CG를 배제한 현실적인 연출, 배역에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 치밀한 시나리오를 명징하게 직조해낸, 천만 감독 겸 배우 바로 저 코사크임다."

소개 길다, 길어.

우리 르스스알 코사크.

뭔들 못할까?

화면이 흘러나왔다.

폴리모프로 얼굴을 변화시킨 코사크가 나와 일장 연설을 하는 장면, 공포에 질린 중국 정치인들.

그리고,

콰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화면 암전.

짝짝짝짝!

울려 퍼지는 피소환인들의 박수.

마치 레드카펫에라도 선 것처럼 손을 들어 화답하는 코사크.

'···.'

아니, 이걸 왜 보여주는 거야?

허락은 했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니 심장이 쿵덕쿵덕거린다.

그럴 수밖에.

이게 보통 일인가?

"작품 멋지게 뽑혔슴다. 그리고 영상은 베이징에서 너튜브에 올렸슴다. 중국인 명의로 계정으로."

심지어 공개까지 하고 왔단다.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담긴 영상을.

대륙의 중국 플레이어들이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이야, 뭐야?

아무튼 당분간 중국은 시끄러울 것이다.

남북한 통일 논의에 관해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을 것이고.

피소환인 3원칙 3항 발동으로 빚어진 결과.

중국주석을 비롯한 상무위원, 총 7명 사망.

이 정도면 최소 희생.

복수도 했고, 위협도 미리 제거했다.

이게 다 자신을 위한 일.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항상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어험, 고맙다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언제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아유, 고맙다는 말씀 안 하셔도 됨다. 이 코사크, 봉 소환사님 눈빛만 봐도 그 마음 잘 암다."

"호에!"

어쨌거나 잘 끝났다.

후폭풍은 거세겠지만.

※ ※ ※

중국 베이징에 폭발음과 진동이 울렸다.

처음엔 지진인가 했다.

핵배낭의 폭발력이 여타 핵무기처럼 강한 편이 아니고, 게다가 지하 벙커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낙진이나 버섯구름 같은 건 피어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금방, 본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군병력이 먼저 들이닥쳤다.

원래 그 부대의 임무가 대륙 위기관리 본부 건물 방어니까.

부대장이 현장에 도착해 구조 작전을 지휘했다.

처참한 현장.

완전히 주저앉은 본부 건물.

이곳저곳에서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

기절초풍할 만한 일.

여기가 어딘데?

베이징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장소.

류자오 국가주석의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벙커.

그런데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이 죄다 부상을 입은 채로 본부 바깥에 널브러져 있었다.

종합해볼 때 폭탄이 터지긴 했는데 바깥이 아니라 벙커 안에서 터진 것이 틀림없다.

여기 쓰러진 자들은 건물과 제법 멀리 떨어진 상태라 간접적인 피해를 당했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경비병들은 모두 최고의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 군인들.

이들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왜 다쳤는지.

그저 정신을 잃고 있었다가 강렬한 폭발과 충격파에 정신을 차렸다던데.

또한 가장 중요한 부분,

군인들도 군인이지만 주석과 상무위원들은?

설마 무너진 벙커 안에 있나?

바깥에서 쓰러진 사람들은 군인뿐만이 아니었다.

본부에 상주하는 직원들, 보좌관들, 비서들도 있었다.

진술 내용은 다 똑 같았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바깥이라는 말만.

정말 귀신인가?

사람이라면 목격자들 정도는 나와야 할 텐데.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니.

아무튼 바깥에선 주석과 상무위원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불길했다.

그분들이 무너진 건물 안에 있다면···,

그런데,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이쪽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부대 장교.

"부, 부대장님!"

"무슨 일인가?"

"폭발 현장에서, 으음, 바, 방사능물질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뭐?"

그럼?

"···핵폭발이라고?"

"추, 추측으로는,"

이게 무슨?

큰일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가 뇌리에 떠올려졌다.

바로 그 순간!

띠링, 띠링, 띠링···,

여기저기서 울리는 스마트폰 알림음.

폭발 사건 때문에?

하지만 아니었다.

"이, 이것 좀 보십시오."

"응? 뭔가? ···너튜브?"

중국 내에선 금지된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하지만 다들 본다.

우회해서 말이다.

"수상한 영상 하나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지인이 보라고 링크를 걸어준 것인데."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시청하는 부대장.

잠시 후.

"마, 맙소사···,"

폰을 잡고 있던 부대장의 손이 벌벌 떨렸다.

※ ※ ※

너튜브 영상 하나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미친 광기로 무장한 중국 플레이어의 주장과 폭발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이었다.

조회수가 폭발한 건 당연했다.

이게 어디 보통 내용인가?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군데?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언론도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았다.

너무 큰 사안이기 때문이다.

딥페이크 영상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영상이 한두 개도 아니고.

하지만 곧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합성은 분명 아니었고, 영상이 찍힌 시각, 장소, 업로드된 위치 등등을 종합할 때 영상은 진본,

그리고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만 지키는 중국 당국.

영상이 거짓이라면 거기에 나왔던 인물 중 한 명만 공식 석상에 나와 얼굴만 보여주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로써 3번째 중국 국가주석의 죽음이 확인됐다.

세상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중국은 혼란의 정도가 심했다.

└ 에이, 거짓말이겠지. 난 아직 못 믿겠는데. 저거 딥페이크가 분명해.

└ 조작은 아니야. 전문가들 다 확인했어.

└ 지금도 봐봐, 영상에 비친 사람들,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던데?

└ 참 공교롭네. 평양에서도 테러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베이징에선 성공했고.

└ 베이징엔 귀여운 호엥 햄스터가 없었잖아.

└ 그렇지. 있었다면 호에! 스륵! 했을 텐데.

└ 호엥?

└ 이러다 플레이어들 탄압받는 거 아냐?

└ 가능성이 높긴 해. 평소엔 일반인이지만 해방의 룬 목걸이가 있으면 달라지니까.

└ 흥. 목걸이가 장비 아이템처럼 흔한 물건이야?

└ 맞아, 그 목걸이, 71층 이상에서만 나오는 아이템인데, 그것도 매우 희박한 보상 확률이고.

└ 국가 육성 플레이어 아니면 구경도 못 할걸?

└ 그럼 평양과 베이징은? 둘 다 해방의 룬 목걸이 사용한 정황이 있잖아.

└ 음모가 있어. 국가가 개입했을 수도.

└ 평양 테러 사건은 중국 정부가 배후라는 소문도 있으니.

└ 혹시 이번에도?

└ 그야 알 수 없지.

└ 저, 베이징 테러범의 주장도 그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맞아, 대중화 사회주의라니, 그건 뭐야?

└ 무슨 중화사상에 사회주의가 들어가?

└ 막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것 같은데.

└ 저 사람, 입으로는 플레이어라 주장했지만 사실은 플레이어가 아닐지도

└ 하지만 맞는 말도 있어. 착취.

└ 돼지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도 일견 타당하지.

└ 류자오 얼굴이 달라지긴 했더라. 회춘의 비약 처먹었기 때문일 거야.

└ 그나저나 주석이 또 바뀌게 생겼네.

그랬다.

원인이야 뭐든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중.

그중 두 번은 플레이어에게 죽었다.

왕위안은 71층 등반 선물 세트에 탐을 내다가 플레이어 바이룽에게 맞아 죽었고.

류자오는 중국 플레이어로 의심되는 정체불명 미친놈의 테러에 의해 폭사 당했고.

권력의 공백으로 급하게 꾸려진 중국 비상 대책위는 영상에 나온 그 플레이어를 찾으라고 공안에 지시했다.

등록된 모든 중국 플레이어가 조사 대상.

광풍이 몰아쳤다.

전면적으로 시작된 플레이어 수사.

중국 공안의 악명이야 널리 알려진 사실.

끌려가는 플레이어, 폭행도 당하고, 고문도 당하고, 견디지 못해 도망친 플레이어에겐 수배가 떨어지고, 

그러자 중국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불만이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특히 중국의 고레벨 플레이어들은 불만의 정도가 날로 심해졌다.

※ ※ ※

그렇다면 중국 말고 다른 국가들은?

이유가 어찌 됐든 해방의 룬 목걸이를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테러가 두 번이나 일어났다.

플레이어들을 규제해야 하나?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규제해?

사실 이 두 사건은 해방의 룬 목걸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미 예견되었던 일.

그래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플레이어들을 규제할 게 아니라, 거꾸로 신뢰와 실력을 갖춘 플레이어들을 확보하는 것이 맞다.

그들에게 해방의 룬 목걸이를 지급해서 혹시나 일어날 사고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번 사건만 봐도 그렇다.

대륙 위기관리 본부 경비병력 중, 해방의 룬 목걸이를 착용한 플레이어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과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미국 워싱턴.

국토 안보부 산하 탑 등반국.

"제랄드, 이거 가지고 있어."

안토니오 국장이 건넨 물건에 눈을 동그랗게 뜬 제랄드 플레이어.

"이, 이거 해방의 룬 목걸이잖아요, 그것도 2개씩이나?"

"그래. 동부 탑, 서부 탑에서 나온 선물이지."

제랄드도 안다.

자신이 직접 받아서 국가에 반납한 아이템.

"이걸 왜 다시?"

"상부에서 결재받았어. 목걸이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기로."

"어, 당황스럽네요. 이게 착용하면 전 초인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렇지. 슈퍼 제랄드지."

"제가 위험인물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피식, 웃는 안토니오.

"그럴 것 같았으면 자네가 이미 가지고 있던 해방의 룬 목걸이도 압수했겠지."

"네?"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자네 집 지하실에서 플레이어 능력을 발현해서 몰래 연습한 사실을?"

"···."

"일단 가지고 있어. 우리 미국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럼 뭐,"

이런 식으로 세계 각국 정부는 검증된 플레이어들에게 해방의 룬 목걸이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뭐, 바람직한 방법이다.

해방의 룬 목걸이는 해방의 룬 목걸이만이 막을 수 있으니까.

※ ※ ※

한편,

누구보다 강한 충격을 받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북한의 김인중 위원장.

그도 베이징 폭발 참사 동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번 돌려봤다.

시청한 소감은?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고사극 동무가 확실해.'

한눈에 직감했다.

비록 얼굴이 다를지라도.

얼굴 다른 게 무슨 상관?

김인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민무력부장 고사극이 자신의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말을 할 때나, 동작을 취할 때나, 조금씩 드러나는 특유의 버릇들.

영상의 중국 플레이어는 분명 고사극이다.

거기에 사용된 폭탄은 장창수 소좌가 가지고 있던 그 핵배낭일 테고.

추측이 아니라 확신.

소름이 끼쳤다.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가.

그래서 이번 테러가 중국의 소행이 분명함에도 자신은 그저 항의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사극은?

중국이 배후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서슴없이 주석과 상무위원들을 제거해버렸다.

이게 뜻하는 바는?

자신은 그저 파리목숨.

손 한번 내저어도 그냥 죽는다.

'조심해야겠군.'

몸이 덜덜 떨린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고사극에게?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사람.

봉주혁 플레이어.

그가 자신의 목숨줄을 잡고 있다.

근데 어떻게 잘 보이지?

그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데,

'어쨌거나 플레이어 신분이니까'

일단 평양 각성 관리지청에 가서 박경수 지청장이나 만나볼까?

※ ※ ※

주혁은 오랜만에 마리와 대화를 나누는 중.

우리 방구석 연금술사님.

피소환인 중에서 견달래, 라직스와 조금 친해졌지만 그들 외엔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어쩌겠나?

틈날 때마다 놀아줘야지.

그런데 오늘은 먼저 톡이 왔다.

<마리> : 똑똑, 소환사님♪♪♬, 지금 뭐 하세요?

<상남자> : 마리씨! 편안하게 쉬는 중이에요. 요즘 제가 못 놀아드려서 미안해요, 바빠서···,

<마리> : 헤헤, 지구는 혼자 놀게 많아서 괜찮아요♡♡♡

<상남자> : 하하하, 가끔 다 같이 모여서 놀아요.

<마리> : 으음, 언젠가는···, 참! 드릴 게 있어요. 그동안 만들어 둔 건데.

오! 

르스스알 연금술사님이 만든 아이템들.

평범할 리가 있나?

주혁은 서둘러 마리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삐걱,

손 하나 들어갈 틈 정도로만 열리는 문.

그러더니 유리병 하나가 나왔다.

툭,

하나, 둘, 셋, 넷···, 모두 10병.

아싸!

술이다, 술!

전에 한번 맛본 술.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현자가 빚은 약초 담금주>

특히 남자에게 좋다.

좋아져봤자 쓸데는 없지만.

<상남자> :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마리> : 저기, 될 수 있으면 혼자 드세요. 좋은 술이라서, 특히 몽마 년에게 주면 절대 안 돼요.

에이, 그러면 쓰나?

술은 친구와 함께 마셔야 더 맛있지.

그리고 남자에게 좋은 술이라 광마와 단둘이 마실 것이다.

<마리> :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또 문틈으로 나오는 물건들.

주혁의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뭐지?

보석인가?

푸른색과 보라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돌멩이.

찬란한 빛이다.

심지어 기운도 뿜뿜 느껴진다.

아주 농밀한 마력의 에너지가. 

<마리> : 최상급 마정석이에요. 연성에 성공했어요. 합하면 12kg 정도는 될거예요,

<상남자> : 네?

최상급 마정석!

정말 오래 기다렸다.

※ ※ ※

최상급 마정석을 받자마자 주혁은 백색 탑 17층에 입장했다.

처음 입장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17층.

푸르른 들판에 유유히 흐르는 강.

저 멀리 세워진 발전소와 통신탑.

그리고 아스팔트 도로 양옆의 주택단지.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선 뭐든 다 할 수 있다.

인터넷도 연결되고 전자기기도 코드를 꽂지 않는 상태로 작동.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벌써 100% 풀충전.

실로 완벽한 자급자족의 세상 아닌가.

'입주권은 어떻게 받는 거지?'

[소유권자 메뉴를 불러옵니다.]

[기초] [배치] [입주권 부여] [입주민 명단]

여기서 입주권 부여 메뉴를 터치하자.

<입주권>

- 영혼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입주권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입주민은 이곳에서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시간의 제한 없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비용은 1개체당 최상급 마정석 1kg입니다.

'발급은 어떻게?'

[입주권을 발급하시겠습니까? 인벤토리 안에 든 최상급 마정석 1kg이 소모됩니다.]

'발급.'

[입주권이 발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로 자동 지급되었습니다. 분실 시 재발급이 가능합니다. 재발급에 드는 비용은 상급 마정석 5kg입니다.]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입주권을 확인했다.

플라스틱 카드처럼 생긴 물건.

앞면엔 백색 탑 17층 입주권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걸 원하는 사람에게 주면 되는 건가?'

바로 그 순간!

[업적 : 최초로 입주권을 발급받았습니다.]

으잉?

이것도 업적?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뭘까?'

[보상 : 입주권 부여 메뉴에 하위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아···,'

메뉴 추가.

전에도 비슷했다.

업적으로 받은 보상이 엘리베이터 설치 메뉴 추가였었지.

그렇다면 이번에 추가된 하위 항목은?

<1일 체험권>

- 영혼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백색 탑 17층 1일 체험권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체험권 소지자는 하루 동안 백색 탑에서 머무를 수 있습니다. 비용은 1개체당 상급 마정석 1kg입니다.

<월세권>

- 영혼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백색 탑 17층 월세권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월세권 소지자는 한 달간 백색 탑에서 머무를 수 있습니다. 비용은 1개체당 상급 마정석 30kg입니다.

이 두 개였다.

참나, 졸지에 부동산 업자 되게 생겼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3 >

주혁은 최상급 마정석 12kg으로 입주권 카드 12장을 발급받았다.

혈랑 포함 카탈로그 피소환인 및 전향 귀순자 디아마트까지 합쳐서 11장, 그리고 여분의 카드 1장.

이게 웃기는 것이 실물 카드라는 점.

신용카드처럼 빳빳한 플라스틱 재질.

그래서 실수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집 앞 천원 샵에 가서 직장인들 사원증 케이스 목걸이도 구매해왔다.

드디어 입주권을 부여해줄 수 있다.

그럼 등록이 되겠지.

여기저기 흩어져 쉬고 있던 피소환인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아서.

"여러분, 주목! 제가 여러분께 나눠드릴 것이 있습니다."

"배, 배지임까? 베이징 폭발 단편영화로 제 예술혼이 인정받은 검까?"

"그건 나중에, ···그리고 르스스알 분들은 좀 자중합시다. 어? 스스알 분들도 배지 달아서 스킬 업그레이드해야지."

"···넴."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자.

"짠! 이겁니다."

다들 눈이 동그래진 피소환인들.

"헐, 법인카드? 막 긁으면 되는 검까?"

"법인카드는 아니고, 입주권인데."

입주권?

영리한 견달래가 먼저 눈치 빠르게 손을 들고,

"공자님, 입주권이라 하오면 설마 백색 탑···,"

"네, 백색탑 17층 입주권,"

"아!"

"으잉?"

"와!"

피소환인들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다.

봉 소환사님이 그곳에 통신 탑을 세우고, 발전소도 건설하고, 주택단지도 조성하고, 도로도 깔고 다 했다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매우 궁금하던 참이었다.

저쪽 세상의 영혼들도 백색 탑의 존재는 몰랐고.

그야말로 수수께끼.

미지의 세계.

그런데 그곳의 입주권이라고?

참을 수 있나?

"줄을 서세요. 한 장씩 나눠드릴게요."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

스팟!

재빠른 코사크가 제일 앞에 섰다.

"제가 먼저 임다. 개국공신 아임까."

그러자 추상같은 견달래의 호통.

"코사크 님! 부끄러운 줄 아세요! 예의도 모르십니까? 동방예의지국에서 어찌 염치도 없이! 광마님에게 양보하세요."

"전 동방예의지국 출신이 아임다만?"

"저저저, 입만 살아서는···,"

순간! 광마가 코사크를 밀치고 나왔다.

"헐, 새치기."

"노부의 소환 해제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양보 좀 해라."

"···으음."

뒹굴뒹굴 굴러가는 코사크의 눈동자.

지이잉, 광마의 손 위에 떠 오른 흑색 초승달 강기.

어쩔 수 있나?

"하, 한 번만 봐 드림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광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피소환인 중에서 가장 현신 기한이 짧은 사람이 바로 광마와 마리.

곧 자동 소환 해제가 될지 모른다.

이분들부터 먼저 드리자.

주혁은 목에 걸기 편하게 사원증 케이스에 입주권을 넣어 목에 직접 걸어주면서,

"광마님, 백색 탑 17층 주민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허허허, 감사하오."

순간!

츠츠츠츠츠!

케이스 안에서 진동하는 카드.

그러더니,

스슥, 스스스슥, 스슥,

카드 뒷면에 글자가 새겨졌다.

물론 한글로.

- 백색 탑 입주민 : 광마 -

"오! 신기하오. 신분증 같소."

그리고,

띠링!

메시지가 떠올랐다.

[업적 : 최초로 입주민을 등록하셨습니다.]

'···또 업적?'

백색 탑은 업적 구덩이야?

업적이 업적을 불러온다.

[보상 : 입주권 등록 메뉴에 하위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하위 항목 추가.

'이건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되고.'

다음은 마리 씨.

부리나케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가 있는 방으로 달려가서,

"입주권 받으세요."

빼곡 문을 열고 문틈으로 넣어주니.

스슷!

새하얀 손이 나와서 입주권을 받아 갔다.

바로 그때!

스팟!

[광마가 소환 해제되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역 소환된 광마.

뒤를 이어서 방문 틈 넘어.

스팟!

[알리아마리가 소환 해제되었습니다.]

마리도 저세상으로 돌아갔고.

이들은 3시간 후에 다시 소환하면 된다.

'이젠 천천히 해도 되겠지?'

동시 소환 가능 숫자 여유도 생겼으니 혈랑도 부르자.

우리 라직스, 영혼의 동반자인데.

그런데 혈랑도 입주민 등록이 될까?

아마 될 것이다.

입주민의 조건은 영혼이 있는 존재니까.

"혈랑 지정 소환!"

스팟!

"호에!"

"컹컹!"

라직스가 만세를 부르며 혈랑을 반겼다.

혈랑도 꼬리를 바람개비처럼 흔들며 라직스 얼굴을 정신없이 핥았고.

어느 틈에 줄을 서고 있는 피소환인들.

지금부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남아있는 피소환인들의 현신 기한은 최소 1시간 이상.

'흠, 누구부터 줄까?'

입주권 부여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그래서.

"···공주님?"

"부르셨사옵나이까."

"먼저 달아드릴게요."

나 또 까였어, 하며 투덜대는 코사크를 무시하고,

견달래의 목에 입주권 목걸이를 달아주는 주혁.

츠츠츠츠츠!

스스슥, 스슥,

글자가 새겨지고.

- 백색 탑 입주민 : 견달래 -

3번째 입주민 등록.

"입주민 됐으니까 백색 탑 들어가 보세요. 공주님."

"음, 어떻게 말이옵니까?"

"머리에 떠오르는 거 없어요? 입주권 사용법 같은 거."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한번 외쳐보세요. 백색 탑 17층 입장이라고."

검은 탑 입장하는 것처럼.

"해보겠나이다. 백색 탑 17층 입장!"

"···."

그러나 아무 일 없다.

다른 방식으로 외쳐야 하나?

"입장! 백색 탑 17층, 백색 탑 입장! 17층에, 17층 입장! 백색 탑···."

다 안되네.

'후우.'

시스템은 뭐해?

어떻게 들어가는지 정도는 알려줘야지.

"소녀의 얕은 추측으론 공자님이 입장하시면 소녀 또한 함께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옵나이다."

그런가?

하긴, 검은 탑도 그렇게 들어가긴 하는데.

쯧! 번거롭게.

입주민 권한을 줬으면 입출도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줄 것이지.

"알았어요. 같이 들어가 봅시다."

주혁은 조용히 읊조렸다.

"백색 탑 17층 입장."

스팟!

[백색 탑 17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입장했다.

하지만,

"엥?"

혼자뿐이었다.

견달래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등록되지 않았나?

주혁은 눈앞에 떠오른 메뉴에서 [입주민 명단]을 터치했다.

[현재 입주민은 3명입니다.]

[목록 : 광마/ 알리아마리/ 견달래/]

3명 다 등록되어 있었다.

아니, 입주권 카드도 부여했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등록도 됐는데, 어떻게 입장하라는 거야?

'여기 17층 안에서 소환해야 하는 거야?'

그때였다.

툭.

"소환사."

"아, 씨발,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는 주혁.

누군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 헉!

"···광마님?"

"그렇소. 나요."

아니, 이분이 왜 여기서 나와?

"소, 소환 해제된 거 아니었어요?"

"맞소이다. 그래서 무한의 감옥,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나 했더니, 이곳으로 이동된 것 같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서 심히 당황하던 참이었고."

소환 해제됐는데 여기라는 말.

"그런데 여기···, 백색 탑 17층이 맞소?"

"네, ···마리 씨는요?"

"저쪽에 있소,"

"아!"

주택단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마리.

그녀도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가?

견달래는 들어오지 못했는데, 이들은 왜?

혹시 소환 해제가 17층 입장 방식···, 음?

'이거 설마?'

확인해보자,

주혁은 즉시 백색 탑 17층에서 퇴장했다.

스팟!

"오셨다!"

"혼자만 가셨슴다."

"소녀, 따라 들어가지지 않았사옵니다."

"사기가 아닐까요?"

"비열한 관리자들의 농간이···,"

앞다투어 질문해오는 피소환인들을 진정시키고는.

"견달래 소환 해제."

"···?"

스팟!

사라지는 견달래.

그리고 다시 17층에 들어가니.

"아, 고, 공자님, 대체 이게···,"

견달래가 있었다.

이제 확실해졌다.

"집이 바뀌셨네요. 무한의 감옥에서 백색 탑 17층으로."

"네?"

"허어."

그렇다.

이들은 피소환인.

원래 지내던 곳은 저쪽 세상 무한의 감옥, 영혼의 세상.

하지만 입주권을 받았다.

백색 탑 17층이라는 집이 생긴 것이다.

그럼?

그들은 이사했다.

영혼 자체가.

무한의 감옥에서 백색 탑 17층으로.

한마디로 주소지 변경 등록.

"납득했소. 그런 식이군. 허어, 이젠 저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섭섭하세요?"

"천만에! 섭섭하다니, 이건 영혼 해방이나 다름없소."

빨갛게 상기된 광마의 얼굴.

"소환사, 이게 엄청난 일인지 아오?"

"그, 글쎄요."

"그대가 이 노부를 구원해주신 거요. 저 끔찍한 세상에서, 단 1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은 감옥에서, 드디어 탈출한 거지. 하하하하하!"

광마가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주혁의 손을 움켜잡으면서,

"그대와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내 절을 받으시오."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아이고, 어서 일어나세요."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오감이 차단된 영혼의 세상.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가지 않아도 된다.

견달래도 매우 기쁜 모양.

역시 날아갈 듯 절을 하며,

"공자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소녀, 항상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겠나이다. ···너무나, 너무나 큰 은공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감사하옵니다. 고맙사옵니다. 황송하옵니다."

어휴.

낯 뜨겁게 왜들 이래?

마리도 기쁠 것이다.

비록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뒷모습에서 기쁨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아무튼 상황을 알았으니, 다른 피소환인들에게도.

스팟!

밖으로 나가 입주민의 혜택이 무엇인지 알려주자.

"···넴? 잘못 들었슴다?"

"사,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잘못 들었지, 말입니다."

"전사는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겠다."

"마, 마이 로드! 워낙 어마어마한 이야기라."

"주인님? 주인님? 다시 한번 천천히···,"

자세하게 설명해주니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지, 진짜요?"

"···어음."

"아아아,"

"그럼 돌아가지 않아도,"

"세상에!"

소환사가 거짓말할 리가 없다는 걸 피소환인들도 다 안다.

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라서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태.

이제 안 돌아가도 된다고?

지긋지긋한 무한의 감옥과는 영영 이별?

모두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소환사님, 허어엉,"

"저, 정말 제 마음을 어떻게 표, 표현해야 할지."

"우, 울지 마, 헝헝헝,"

"지휘관님, 피, 필승!"

"후에에에에···."

눈물바다였다.

슬픔이 아닌 너무 좋아서 흘리는 눈물.

에이, 왜 울어?

"···줄 서세요. 입주권 부여해 드릴게요. 코사크 씨? 우리 인민무력부장님. 빨리 와요."

그런데?

"으음."

우물쭈물하면서 머뭇거리는 코사크.

저 양반, 또 왜 저러나?

"저, 저기 봉 소환사님."

"왜요?"

"입주권 부여, 이따가 하면 안 되겠슴까?"

"이따가 언제?"

"소환 해제 후 무한의 감옥에 갔다 와서···,"

으잉?

거길 또 간다고?

안 가도 되는데.

"지금 입주권 받으면 거긴 영영 못 가는 거 아임까?"

"그렇죠."

"그쪽 영혼들은 우리가 백색 탑 17층으로 이사했다는 것도 모를 검다."

"그런데요?"

"자랑하지 못 함다. 갈 때 가더라고 주소 변경했다고 자랑은 하고 가야 함다."

"아!"

히죽 웃으며 말을 잇는 코사크.

"티배깅은 필수임다. 이 말 들으면 영혼의 세상이 발칵 뒤집힐검다. 눈에 선함다."

"···."

티배깅.

단순한 자랑질을 넘어선 도발과 능욕.

- 나! 이사 간다?

- 이 거지 같은 동네, 다신 안 올 거다.

듣는 영혼들은 부러워서 미칠 것이다.

더불어 분통이 터질 것이다.

코사크는 그걸 즐기고 오겠다는 뜻이고.

'와! 이 사악한···,'

코사크로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

이 기회를 놓치면 그가 아니지.

뭐, 소원대로 해주자.

어려운 것도 없다.

"알았어요. 다음 소환 때 입주권 드릴게요. 그럼 다른 분들은?"

조용.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응?

무슨?

설마?

"다들 다음 소환 때 받겠다고요?"

끄덕끄덕.

"자랑하고 싶습니까?"

끄덕끄덕.

"···."

어쩔 수 없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일괄적으로 소환 해제.

스팟! 스팟! 스팟! 스팟···,

열심히 자랑하고 돌아오세요.

아무튼 기대보다 훨씬 엄청난 보상이다.

이제 피소환인들은 지구와 거의 다름없는 공간에서 편안하게 대기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남은 의문점.

일반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완전하게 이사하게 되는 건가?

그럼 주소지 강제 변경?

'그건 좀 별론데.'

어떻게 실험해볼 수도 없고.

일단 일반 사람들은 입주시키지 말아야겠다.

자칫하면 17층에 갇힐 수 있으니.

주혁은 다시 백색 탑 17층으로 들어갔다.

스팟!

17층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견달래와 광마.

마리 씨는 집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고.

흐뭇하다.

언제든 함께 있게 됐으니까.

달라지는 건 없다.

대기실만 바뀌었을 뿐이다.

주혁에 의해 소환되면 검은 탑 공략, 혹은 현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소환 해제 및 현신 기한이 끝나면 17층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식이겠지.

이로써 피소환인들의 육체적 삶은 계속 유지된다.

자신과 함께 하는 한은 말이다.

'좀 더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어야겠어.'

할 일이 많다.

17층을 가꾸려면 더 많은 상급 마정석이 필요하다.

참! 업적 보상으로 추가된 메뉴는 뭐지?

터치해서 확인해보니.

<추방>

- 등록된 입주민 자격을 취소하고 백색 탑에서 추방합니다.

흠.

추방도 할 수 있다면···,

일반인 대상 실험도 가능하겠는데?

※ ※ ※

한때 무한의 감옥, 영혼들의 세상을 흔들었던 사건.

관리자의 월권과 확률 조정에 반발한 대대적인 시위.

하지만 냄비였다.

확 끓어오르다 팍 식었다.

항의해봤자 달라지는 게 있나?

지구의 소환사가 하루 빨리 카탈로그 확장권을 확보해서 무작위 소환이 재개되길 기다리는 것뿐.

그런데?

『안녕하심까. 잘들 지내셨슴까?』

암살자다.

소환사의 사랑과 신뢰를 얻어 최근에 전설 등급으로 올라선 놈.

『안타깝지만 마지막 작별 인사하러 왔슴다.』

작별 인사라니.

지구에 무슨 일이 또 터졌나?

『백색 탑 알고 계심까? 전에 물어봤는데 다들 모른다고 했던 거 기억 날 검다. 그런데 그곳의 정체가 밝혀졌슴다. 어떤 곳이냐고 하면······,』

이어지는 설명.

백색 탑 분양부터 입주권 부여, 그리고 소환 해제 시 영혼의 세상이 아닌 그곳으로 가서 대기할 거라는 말.

이사했단다.

주소 변경했단다.

충격적인 말.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 정말이냐?』

『예압! 우린 이제 무한의 감옥, 영혼의 세상에서 완전히 떠나게 됐슴다.』

줄줄이 이어지는 말들.

『필승! 상사 베로니카 켈리버, 주둔지 전출을 명 받았습니다. 기한은 영원히, 안녕! 여러분들. 전 이만 갑니다.』

『역시 피소환인은 주군을 잘 만나야 해. 로드께선 나의 새로운 신이오.』

『전사도 그렇다.』

『소환되지 않았다면···,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다행히 막차를 잘 탔어.』

『저도 전향 귀순한 것이 신의 한 수였어요.』

『호에에에!』

『컹컹! 커커컹!』

티배깅 시작.

『여러분들도 걱정하지 마십쇼. 이제 무작위 소환만 되면 감옥 탈출임다.』

『카탈로그 확장이 안 되는데 무작위 소환이 되겠니?』

『아! 그렇구나. 소환 안 되겠구나.』

『쯧쯧, 소환 안 되면 입주권도 없지.』

『등급이 높으면 뭘 해? 여기서 벗어나질 못하는데.』

『아무튼 잘 지내요. 다시 볼일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빠이!』

『후엥!』

영혼들은 침묵했다.

황당함, 어이없음, 절망, 불안, 슬픔, 좌절,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야이 싯팔 새끼들아!!!』

『개새끼, 개쉑! 개똥! 씨바알!!!』

『나, 나가면 암살자, 너부터 죽인다!』

『으아아아아!』

『꺄아아악!!! 꺅! 꺅!』

『나는? 왜 나는? 나는? 왜 나느느느은!』

『내보내 줘. 내보내 달라고, 안 그럼 다 죽인다!!!』

『제기라아아아알!!!』

『죽자, 다 죽자. 이 좆 같은 곳에서 살면 뭐 해?』

『빌어 처먹을 신세, 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아비규환 난장판.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아보려는 듯.

『자자, 이러지 말고 다들 힘냅시다. 언젠간 우리도 소환될 날이 있을 거요. 내가 영! 하면 너희들은 차! 해서 끌어올려 보자고.』

『영!』

『차!』

『영!』

『씨발! 영차고 뭐고, 우린 다 망했다니까!!! 카탈로그 확장이 안 된다는데.』

『망하긴 무슨! 나약한 소리 말고 다 함께, 영!!!』

『차!!!』

『영!!!』

『차!!!』

『영!!!』

영혼들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무한의 감옥의 결계를 뚫고 저 하늘로 올라갈 정도로.

그리하여 마침내 닿았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4 >

주혁은 자랑질을 위해 잠시 무한의 감옥을 방문했던 피소환인들도 싹 소환해서 입주권을 부여해 줬다.

그리고 바로 소환 해제.

여지없이 백색 탑 17층으로.

피소환인과 개, 귀순자를 합쳐 모두 11명이 이곳에서 놀고 있었다.

주혁까지 합하면 12명.

이곳에선 동시 소환 가능 숫자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대기실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작위 소환이든, 전향 귀순이든, 되는 대로 받아서 17층으로 보내면 그만.

안에서 대기하다가 17층 밖에서 주혁이 소환하면 현신 기한 동안 활동하고 나서 다시 돌아오고.

반면 백색 탑 바깥에선 동시 소환 가능 숫자가 적용된다.

딱 10명까지만.

아무튼 대기실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외부 통신은 물론 전자 기기까지 코드 없이 작동.

주택 단지도 있고, 도로도 깔렸고, 주차장도 있고, 수영장도 하나 만들었다.

그래서 육체를 가진 상태로 먹고 마시고, 게임도 하고, 노닥거리다가, TV보다 잠도 자고, 뭐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거지.

건축물과 도로 등, 기반 시설물은 복사와 붙여넣기.

나머지 것들은 라직스가 다 바깥에서 아공간 배낭으로 공수해 왔다.

가전제품이나 음식, 심지어 자동차까지.

'라직스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만능일꾼, 우주대머슴 라직스.

주혁의 파티가 유지되는 근본 중의 근본.

"호에!"

혈랑과 함께 이 집 저 집을 드나들며 청소를 시작하는 라직스. 그리고 가구와 생활용품도 부려 놓고.

르스스알 등급의 청소 스킬이라 그가 다녀간 곳은 번쩍번쩍 광이 날 정도.

덕분에 하루하루 즐겁게 놀면서 보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평백.

오늘도 평화로운 백색 탑 17층.

다들 알아서 잘 논다.

스팟!

주책없이 까불다가 또 광마 심기를 건드렸는지 헐레벌떡 도망가는 코사크.

파파팟!

맹렬한 기세로 코사크를 뒤쫓는 광마.

따스한 햇볕을 벗 삼아 선베드에서 일광욕하는 비키니 차림의 베로니카. 마찬가지로 선베드에 누워 모히또 한 잔을 쪽쪽 빨아 먹는 디아마트.

그 옆에는 견달래.

책을 높이 쌓아 두고 고상하게 독서 중.

고방과 바르딘, 제페트는 17층 탐험하러 간다면서 한참 전에 길을 나섰다.

알리아마리는?

주택 하나를 제집으로 삼고 노트북과 태블릿으로 인터넷 삼매경.

틈틈이 플레이어 샵에 납품할 비약도 제조하면서.

피소환인들에겐 천국이자 유토피아.

주혁도 마음이 흐뭇하다.

하지만 이걸로 부족하다.

더 많이 복사하고 더 많이 붙여넣는다.

그러려면 상급 마정석 확보는 필수.

입주민 등록에 드는 최상급 마정석도 상급 마정석을 연성해야 나오니까.

"봉 소환사님."

"일마를 상마로 연성하면 안 됨까?"

"일마, 상마?"

"일반 마정석, 상급 마정석 줄임말임다."

"아하!"

그럼 최마는 최상급 마정석이겠네.

"마리 씨에게 이미 물어봤어요. 그것도 1 대 1,000 비율이랍니다. 일마 1톤을 연성해야 상마 1kg 나오는데"

시간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아이고, 듣고 보니 굉장히 비효율적인 것 같슴다."

"연성 작업은 상마를 최마로 만드는 것만 하면 돼요."

"동의함다."

그런 의미에서 상마나 캐러 가 볼까?

백색 탑 17층이 대기실이어서 좋은 점 하나.

"상마 채굴 인원, 모집합니다. 탱커 하나, 일꾼 한 명, 딜러 다수."

저요, 저요, 하면서 손을 드는 피소환인들.

"흠, 도적 클래스는 좀...."

"여, 열심히 하겠슴다. 붕대도 혼자 감슴다. 끼워 주십쇼."

"그럼 뭐."

17층은 인력시장이었다.

"귀족 탱커 고방 씨, 부탱 바르딘 씨, 천민 딜러 코사크, 제페트, 우주대귀족 라직스 님과 혈랑, 준비하세요."

필요한 인원만 부르면 된다.

전에는 무작정 다 불러 놓고 집에서 놀게 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숫자가 적어서 지금은 시장이라고 말하긴 초라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더 늘어난다면?

주혁은 백색 탑 17층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정 소환.

스팟! 스팟! 스팟....

오늘 등반 목적은 상급 마정석 캐기.

1번 탑, 2번 탑, 76층을 번갈아 가면서 캐고 있는데, 점점 광맥이 말라 가고 있다.

광맥도 아이템 보물창고처럼 리셋이 되지 않는다.

곧 고갈이 될 터.

그 전에 다른 탑 하나를 확보해야 하는데.

어쨌든 들어가 보자.

오늘 상마 캘 장소는 바로.

[대한민국 검은 탑(NO.2) 76층에 입장합니다.]

스팟!

산수화의 배경 같은 계곡.

자연의 기운이 응집된, 기(氣)의 강줄기가 모이는 바다. 그런 이유로 상급 마정석이 광맥 형태로 발견되는 76층.

'이런 층 또 없나?'

그때였다!

'어?'

누군가 있다.

몬스터는 아니다.

전에도 이런 경우, 경험한 적 있다.

"응?"

"음."

"또?"

"이 새끼가!"

"재미 들린 모양이군."

일행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홀로그램 영상처럼.

"…관리자?"

맞다.

하지만 전에 만났을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

[맞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이라니.

[신임 관리자니까요. 전에 있던 관리자들은 모두 해고당했거든요.]

아....

내 이럴 줄 알았다.

해고당할 만했지.

[전임 관리자들은 월권의 정도가 심했습니다. 상부도 인지했고요. 후우… 무한의 세상, 영혼들이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당연히 화가 나지.

확률 조정 때문에 무작위 소환이 중단된 판에.

아무래도 전에 했던 시위와 코사크의 자랑질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

그나저나 관리자는 잘리면 어떻게 되나?

[적절한 대가를 치를 겁니다. 검은 탑은 정상화될 거고요.]

오! 잘됐네.

[그래서 보상 확률을 되돌려 놓기 전에 그동안 입은 피해에 대해 보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상?'

아니, 이게 웬 떡이냐!

[먼저 전임 관리자의 일탈 행위,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유, 사과는 무슨.

근데 보상은 뭐죠?

[특별 보상입니다. 대한민국 1번 탑 82층을 공략하시면 받게 될 겁니다.]

뭐?

순간 코사크가 버럭 화를 내면서.

"야이, 개새끼야! 너 또 등가교환 저울 운운하며 수작 부리는 거지? 은근슬쩍 난이도 올리려고."

[수작? 지금 절 지금 뭘로 보시고? 맹세하겠습니다. 난이도 변화는 절대 없을 겁니다.]

"거짓말이면?"

[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순수하고 무결한 영혼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순수 무결?

'자기가 무슨 천사인 줄 아나.'

[....]

'진짜?'

[아무튼 82층의 난이도는 그대로입니다. 뭐, 81층보다는 약간 어렵겠죠, 어차피 거대괴수 구간이고, 올라가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탑의 규칙이니까.]

80층 대는 거대괴수 구간.

어쩐지 초장부터 베헤모스가 나오더라니.

근데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더 거대해진다면....

"저기, 그 전에 세계 공지로 화약 혹은 핵분열과 핵융합 등 지구 과학에 기반한 폭발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혹시 정상화 과정에서 공지가 취소될 일은 없나요?"

[그건 안 됩니다.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은 정당한 규제입니다. 화약, 핵분열, 핵융합 반응은 계속 금지될 겁니다.]

에이, 그거나 풀어 주지.

[대신 보상은 마음에 드실 수 있게 준비했습니다. 확정 보상은 초대량의 상급 마정석과 카탈로그 확장권 그리고 1개의 랜덤 룬입니다.]

오!

보상이 3개씩이나.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데.

그리고 드디어 카탈로그 확장권이 나온다.

곧 무작위 소환이 재개된다는 의미.

"초대량의 상급 마정석이라면 어느 정도?"

[인벤토리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일 겁니다. 아마 최소 10톤? 백색 탑을 분양받으셨으니 아마 요즘 제일 필요하실 텐데.]

당연히 필요하지.

더불어 랜덤 룬은?

"특성 강화의 룬도 보상받을 수 있나요?"

[운이 좋다면요.]

자신 있다.

운하면 봉주혁 아닌가.

여기까지 실력으로 왔나?

뽑기 잘해서 온 거지.

[아! 히든 임무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량의 상급 마정석과 1개의 랜덤 룬이 보상으로 걸려 있는.]

응?

히든 임무?

심지어 보상도 좋다.

[마침 82층을 지키는 거대괴수와 인연이 있는 분이 계셔서.]

인연이 있다니.

누굴 말하는 거지?

[물론 히든 임무는 공략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

기본 임무든, 히든 임무든 싹 해치운다.

가만.

혹시....

"다른 탑 82층도 똑같은 보상이 적용되나요? 예를 들어 2번 탑이나 다른 국적의 탑에도...."

[그럴 수야 없죠. 무조건 대한민국 1번 탑 82층만입니다. 그리고 특별 보상은 1회에 한정합니다.]

쯧.

쏘려면 시원하게 쏴 주지.

사실 기대도 안 했지만.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플레이어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주혁은 조심스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요.

멀리 안 나갑니다.

그 모습에 피식 웃는 신임 관리자.

[안심하지 마세요. 전 탑의 운영을 책임지는 관리자이기도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시련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시련은 싫은데.'

[제가 가진 권한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플레이어님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뭐, 어차피 90층에서 절망하실 테지만.]

'....'

가려면 그냥 가지, 왜 저주를 퍼붓고 가시나.

사람 기분 안 좋게.

* * *

전임 관리자들의 월권에 대한 보상.

그리고 확률 정상화.

82층을 공략하면 주어진단다.

백색 탑 17층에 돌아가 신임 관리자와 나눈 대화를 모든 피소환인에게 들려주니.

"호오, 랜덤 룬이라, 괜찮은 보상이오."

"카탈로그 확장권이 확정으로 나온다는 것도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옵니다."

"거대괴수 구간이라던데, 어렵지는 않겠죠?"

"베헤모스보다는 어렵겠지만 난이도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히든 임무입니다."

"예압! 우리 중 누군가가 82층 몬스터와 인연이 있다고 했슴다. 그와 관련된 임무일 검다."

"거대괴수 구간이라면 혹시?"

견달래가 고방을 슬쩍 보면서.

"완전한 성체의 초마수 하이드라가 출현하는 건 아닐는지."

그럴지도.

고방의 테마층.

72층 초고난도 임무에서 만났던 놈은 온전치 않았던 미완성 사령술 하이드라.

성체 하이드라도 거대괴수에 속하니까.

그놈이 나올 수도 있다.

"전사는 상관없다. 오히려 바라던 일이다. 머리 9개를 다 뜯어 주지."

강한 자신감.

역시 르스스알 야만 전사 고방.

일단 가 보자.

대한민국 1번 탑 82층.

1회의 특별 보상이 걸린 장소.

랜덤 룬도 룬이지만 기본 보상도 기대된다.

무려 초대량의 상급 마정석.

그것도 2번씩이나.

최소 10톤이란다.

그렇다면 이걸 쓸 기회.

특전으로 받아 인벤토리에 모셔 둔 아이템.

<아이템 추가 획득의 티켓>

효과: 탑 임무 성공하기 전 사용하면 아이템 보상을 최소 2배에서 최대 10배까지 더 받을 수 있습니다.

한계: 티켓과 룬 아이템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상마 보상 10배 터져라.

그럼 대박이다.

* * *

[대한민국 검은 탑(NO.1) 82층에 입장합니다.]

난이도를 조정하지 않은 임무.

그럼 거저먹는 층이다.

[특별 보상이 주어지는 층입니다.]

[단 1회에 한정합니다.]

네네, 좋아요. 좋습니다.

기본 임무에, 히든 임무까지 다 완료해서 보상을 받는다 치면.

대량의 상급 마정석을 받을 기회가 2번, 랜덤 룬을 받을 기회가 2번 그리고 카탈로그 확장권.

확장권 받아서 카탈로그 목록 늘리고 새로운 피소환인 바로 불러내야지.

아무튼 82층의 환경은?

일단 어둡다.

커다란 동굴에 들어온 느낌.

땅속 지하인 것 같은데.

'초마수 하이드라도 동굴에서 만났었지?'

제가 성체면 어쩌라고?

르스스알 피소환인이 4명이다.

게임 끝난 거지.

거대화 고방이 광휘의 바르딘을 횃불처럼 번쩍 들어 올렸다.

"빛이여!!!"

화아아아악!

눈이 따가울 정도로 밝아지는 주위.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지하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전면에 커다란 공동이 보인다.

거대괴수가 충분히 뛰어놀 만한 넓고 높은 공간.

그러자 띠링!

떠오르는 임무.

[82층 임무: 거대 뱀 아포피스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거대 뱀 아포피스 0/1]

'…초마수 하이드라가 아니네?'

아포피스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리고.

샤사사사사....

저 어두운 공동 한쪽에서 기어 나오는 거대 뱀 아포피스.

얼마나 큰지 KTX 열차보다 훨씬 굵고 길다.

츠릅, 츠르릅.

입에서 빠져나오는 혀의 크기만 아마존 보아뱀.

"…크긴 하네요."

"그래 봐야 베헤모스와 도긴개긴임다."

"그렇다. 전사가 상대하면 된다."

"어렵진 않겠군."

순간!

띠링!

[82층 히든 임무: 거대 뱀 아포피스에 대한 피소환인 라직스의 복수.]

[완료 조건: 라직스가 아포피스를 상대로 최소한 총생명력의 10%의 피해를 입히기 0/10%]

'…뭐?'

라직스였어?

"아!"

이제야 기억난다.

라직스가 죽은 원인.

미궁 지하에서 거대 뱀 아포피스에게 잡아먹혔다.

그런 이유인지 히든 임무의 내용.

라직스가 아포피스에게 복수하는 것이 조건.

놈을 상대로 10% 이상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

하필 라직스라니.

비전투 일꾼 클래스인데.

'될까?'

주혁은 라직스를 슬쩍 쳐다봤다.

그런데.

'응? 어디 갔지?'

방금까지도 옆에 있었는데.

그러자 견달래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저쪽 구석에 라직스가 있었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호달달달 떨고 있었다.

"...."

아포피스를 보기도 두려운 모양.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극심한 트라우마,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처럼 보였다.

저런 상태에서 아포피스 총생명력의 10%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니.

원래 설치류의 천적이 파충류, 뱀 아닌가.

게다가 자신을 한입에 집어삼킨 바로 그놈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이 상황에서 싸우라고 강요하라고?

주혁은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곧 결정을 내렸다.

'히든 임무는 포기야.'

강요할 것이 못 된다.

라직스에겐 너무 무거운 짐.

소환 해제를 해서 17층에서 쉬라고 하....

'아니지.'

피해 간다고 해결되나?

라직스의 트라우마는 영영 남을 텐데.

공략이나 보상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 82층도 임무 리셋할게요."

"…네?"

마침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이 한 장 더 남아 있고.

"좋은 판단임다. 보상이 아깝슴다. 딱 한 번의 기회인데."

"중요한 건 보상이 아니죠. 그딴 건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크기만 잔뜩 큰 하찮은 뱀 새끼 따위가 감히 우리 우주대머슴의 트라우마라고?

참을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가죽을 벗겨서 가방을 만들어 팔아도 모자랄 판에.

아니면 뱀술을 담가 버린다든가.

최우선 과제.

라직스의 트라우마 극복.

"해낼 겁니다."

"그렇슴다. 라직스 일꾼, 만만하지 않슴다."

"소녀도 믿고 있사옵니다. 우주대머슴이란 호칭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보급관님께서 드신 짬밥, 어디 안 갑니다."

"노부도 돕겠소. 소환사 말이 옳소. 보상이 문제가 아니요. 과거의 망령을 극복할 필요가 있소이다."

모두가 라직스를 믿는다.

"2번 탑에도 아포피스가 나올 거예요. 그놈을 상대로 열심히 연습해서 특별 보상이 걸린 1번 탑 공략합시다."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티켓을 꺼냈다.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시 자동으로 퇴장하고, 해당 층의 임무가 리셋되며, 입장 기록이 삭제됩니다.]

찌이익!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탑에서 퇴장합니다.]

그리하여 라직스의 트라우마 극복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훈련장은 2번 탑 82층이었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5 >

거대괴수 구간의 검은 탑 80층대.

82층엔 거대 뱀 아포피스가 출현한다.

전 세계 모든 탑에.

난이도 조정이 없다고 했으니 베헤모스와 비슷하거나 약간 어렵겠지.

주혁과 피소환인들은 라직스의 실전훈련을 위해 2번 탑으로 등반했다.

[대한민국 검은 탑(NO.2) 82층에 입장합니다.]

2번 탑 82층은 특별 보상이 걸리지 않은 층, 히든 임무도 없다.

[82층 임무 : 거대 뱀 아포피스 1마리를 처치하세요.]

[완료 시한 : 15시간 이내.]

[완료 조건 : 거대 뱀 아포피스 0/1]

스사사사삿!

지하 공동에 나타난 거대 뱀 아포피스.

먼저 아포피스의 전체 모습을 스마트폰 동영상에 담고.

거대괴수 구간의 두 번째 몬스터.

사람들에게 이놈이 얼마나 큰지 보여 줘야지.

공략에 앞서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는 주혁과 피소환인들.

"일단 라직스 씨에게 아포피스 따위는 좆밥이란 걸 인식시켜 줘야 해요."

지렁이만도 못한 놈이다.

놈은 그 어떤 해악도 끼칠 수 없다.

그걸 라직스의 머릿속에 각인한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하옵니다."

"맞슴다. 초전박살임다. 싹 다 필살기 꺼내십쇼."

"대형탄 한 발 꽂고 시작하죠."

"광마님, 그 흉측한 초승달 강기도...."

"그것보다 노부가 육탄돌격하마. 몸으로 부딪쳐야지."

"전사가 꽉 잡고 있겠다."

"혈랑도 전투에 참여시켜 물어뜯으라고 시키죠."

거대한 체구의 놈을 또 목격한 뒤 긴 장대를 들고 호달달달, 떨고 있는 라직스.

이미 용기의 포션과 정신력 강화의 비약을 마구마구 들이켰는데도 저 상태였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는 건 이토록 어렵다.

만능일꾼에게도 말이다.

"뭐 하심까? 우주대머슴!"

"호에에...."

"힘 내십쇼. 저 뱀 새끼, 죽여 놓고 술 담가 버리면 됨다. 봉 소환사님 드릴 검다, 뱀술이 얼마나 정력에 좋은 줄 아심까?"

"맞다, 일꾼아. 우리 소환사 장가 보내야 한다."

"...."

"보급관님, 저 베 상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주혁도 라직스를 꼭 껴안아 주며 말했다.

"잘 지켜봐요. 우리가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자, 이제 들어가자.

압도적인 공략을 위해.

"갑시다!"

쿵쿵쿵쿵쿵!

"우오오오오오오!!!"

거대화 고방이 아포피스를 향해 달렸다.

"캬아아악!"

동시에.

찌이이잉!

파주주죽!

출렁!

베 상사의 대형탄 발사.

콰쾅!

대미지를 입고 꿈틀거리는 아포피스의 거대 몸통을 두 팔로 꽉 끌어안은 고방.

그러나 놈이 똬리를 틀어 몸을 옥죄어 왔다.

파바바밧!

견달래의 구속부가 연달아 날아가 붙었다.

뒤를 이어 혈옥강기로 무장한 광마가 두 손을 비교적 부드러운 아포피스의 배 부분에 쑥 찔러넣었다.

"카오오오!"

피 칠갑 하고 뱃속에서 장기를 뽑아내는 광마.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포피스.

바르딘이 광휘의 도리깨를 놈의 거대한 뚝배기에 내려찍었다.

콰직!

"크러렁!"

콰악!

혈랑이 놈의 꼬리 끝을 물고 늘어졌다.

제페트가 몸통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디아마트가 꿈의 저주를 펼쳤다.

주혁도 오랜만에 거들었다.

전격 속성으로 무장한 호문이들을 내보내서 아포피스를 괴롭혔다.

파직! 파지지직!

확실히 강하긴 했다.

거대괴수 아닌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니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사람들.

그러나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방어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무조건 공격.

모두가 전력을 다해 덤볐다.

마침내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만 아포피스.

"헉헉, 말했잖슴까. 좆밥임다. 우주대머슴의 위엄을 보여 줄 기회임다."

"…호에에에."

여전히 호달달.

"이쪽으로 와요, 라직스 씨."

"한 걸음이 시작입니다. 우주대머슴의 힘찬 기상을 보여 주십시오."

"노부가 도와주겠다! 가까이 오라. 와서 이놈의 머리통을 찍어라!"

"일꾼은 이미 전사다!"

"보급관님!!!"

"컹컹! 커커컹! 컹컹컹!"

그러나 잔뜩 울상을 짓고 있는 라직스.

이해한다.

트라우마가 이렇게 쉽게 극복되면 그게 어디 트라우마인가?

그냥 안 좋은 추억일 뿐이지.

하지만 라직스도 나름대로 용기를 내는 중.

다른 피소환인들을 바라보며 한 발 두 발 앞으로.

우물쭈물, 호달달 떨면서,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앞으로.

긴 장대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아장아장 걸음으로 아포피스 앞으로.

"자자, 박수!"

짝짝짝짝!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우주대머슴 나가십니다. 고개를 숙이시오!"

"그렇지! 한 걸음 더!"

"사랑합니다! 보급관님."

"아유우, 씩씩함다."

"빛이여!!!"

"컹컹!"

라직스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매우 고무적이다.

예전에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

바로 그때!

띠링!

[거대 뱀 아포피스 1/1]

[82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82kg]

공략 완료 메시지가 떴다.

너무 심하게 팼나?

[세계 공지 : 검은 탑 NO.2(한국)의 82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그래도 주혁은 매우 만족했다.

비록 라직스가 아포피스에게 단 1%의 대미지도 입히지 못했지만 말이다.

첫술에 배부를까?

이렇게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게 중요한 거지.

*

계속되는 라직스의 트레이닝.

일단 걸음마는 뗐다.

아포피스 직시하기.

남은 건 10%의 대미지를 가해야 하는 건데.

이게 마땅치가 않다.

무기는 어떤 걸로?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서 때리는 게 좋은데.

활이나 베 상사의 마총 같은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면?

라직스는 비전투 계열.

따라서 스킬도 없고 숙련도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길이를 연장한 곡괭이.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도록 멀리서 때리게끔.

아주 긴 장대 끝에 곡괭이 머리를 끼워 넣어 단단히 고정했다.

라직스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의 채광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곡괭이로 바위를 콱콱 깨서 상마를 채굴하는데,

그리하여 연일 맹연습 중인 라직스.

탑 입장 횟수가 다하면?

백색 탑에서 가상 훈련.

코사크가 훈련 조교, 고방은 아포피스 대역.

머리에 뱀의 탈을 쓴 고방이 바닥에 엎드렸다.

뱀 탈만으로 진짜 뱀이 되겠냐마는....

견달래의 환영부(幻影符)가 단점을 보완했다.

이마에 찰싹 붙이니 아포피스로 엇비슷하게 변했다.

엎드린 채 뱀 흉내를 내는 고방.

꿈틀꿈틀.

그의 앞에선 장대 곡괭이를 든 라직스.

"뱀임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뱀임다."

꿈틀꿈틀.

고방이 몸을 비틀면서 전진했다.

엄청 진지하게.

선글라스를 낀 코사크가 손가락질하며 지시했다.

"찍으십쇼, 강하게! 뱀 대가리를 찍듯이."

"호, 호에에."

주혁도.

"라직스 씨, 한 번만 때려 봐요. 힘차게!"

"후에에에."

다른 피소환인들도.

"찍어라!"

"찍어도 되옵니다."

"컹!"

"찍어!!!"

사방에서 들리는 목소리.

움찔하며 장대 곡괭이로 후려쳤는데.

휘릿!

콱!

곡괭이가 정확하게 명중했다.

그것도 환영부 붙인 자리에 맞았다.

그러자.

스르륵.

환영이 걷히고.

이마에 곡괭이가 찍힌 채 본모습을 드러낸 고방.

"후아아아아."

손을 바르르 떠는 라직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직접 동료의 머리를 찍어 버렸는데.

털썩!

라직스가 장대 곡괭이를 땅에 떨어뜨렸다.

글썽글썽,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아장아장 걸어서 고방에게 다가갔다.

"호에에."

때려서 미안하다는 듯 고방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라직스.

"괜찮다. 일꾼. 상처 하나 없잖은가. 더 강하게 쳐도 좋다."

"후에엥."

미안한 마음에 라직스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런 그를 토닥이며 안심시키는 고방.

"아프지 않다. 울지 마라. 전사는 일꾼 마음 다 안다."

하지만 코사크가 비웃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참 꼴 좋슴다. 지금 삼류 신파 영화 찍슴까? 연기도 안 되고 재미도 없고, 눈물도 안 남다."

"...."

"보십쇼. 피도 안 났잖슴까. 최소한 고방 두개골에 구멍은 내야 했슴다."

"...."

"질질 짜지 마십쇼. 강하게 커야 함다."

"...."

흠.

그렇긴 하지.

머리에 구멍 정도는 내야지.

그래서 주혁이 나서서.

"배역 교체합시다."

"교체임까? 그럼 바르딘을...."

"아뇨. 르스스알, 인민무력부장 코사크 동지가 아포피스 역할입니다."

"…넴?"

"아마 라직스 머슴도 바라고 있을 걸요?"

"호에!"

"들었죠?"

"어어...."

빠르게 눈알을 굴리는 코사크.

스윽.

발이 뒤로 빠졌다.

튀려고 준비하는 모양.

"잡아요."

스슷!

퇴로를 막아서는 광마.

벌떡!

일어나 코사크의 다리를 잡아가는 고방.

파팟!

코사크가 하늘로 뛰었다.

스카이워커.

광마도 하늘을 날았다.

능공허도.

파파파팟!

멀리 가진 못했다.

견달래의 구속부가 코사크의 몸에 달라붙었으니까.

그리하여 교체된 배역.

꽁꽁 묶여서 뱀 흉내를 시작하는 코사크.

역시 환영부를 이마에 붙이고.

"흥! 이왕 이렇게 된 거, 메소드 연기 보여 드림다."

캬악!

혀까지 날름거리며 꾸물꾸물 기어가는 코사크.

캭캭! 캬캬캬캭!

"호엣?"

깜짝 놀란 라직스가 본능적으로 장대를 들어 코사크를 찍어 버렸다.

팍!

"…으힉?"

팍!

"켁? 왜 고, 고방은 한 대 때리고 난… 으아아."

팍팍팍팍!

훈련은 순조로웠다.

*

다음 날도 라직스의 트라우마 극복 맹훈련.

그리고 또 2번 탑 82층 실전 훈련장에 방문했다.

계속되는 반복 공략 임무.

열차보다 큰 거대 뱀 아포피스 때리기.

사실 라직스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미궁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대로 집어삼켜졌다.

눈빛이 마주치고 난 후,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한 채로.

그 후론 캄캄한 암흑.

놈의 위산에 온몸이 녹아 버렸다.

죽음의 순간.

그런데 계약 제안이 들어왔다.

다시 살아날 기회를 주마.

영혼의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소환사가 널 부르면 그를 도와 세상을 구원하라.

그러겠다고 했다.

라직스에게 있어 누굴 도와준다는 행위는 본능 같은 것.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일꾼이었다.

영혼의 세상.

다른 이들은 그곳을 감옥이라 불렀다.

그런 것 같다.

소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소환사님과 만났다.

그분과 함께한 짧은 기간.

라직스에겐 최고의 순간이었다.

또한 동료들.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접해줬다.

과분하긴 해도 우주대머슴으로 인정받았다.

심지어 백색 탑 17층 입주민이라니.

이제 무한의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행복하게 오순도순 살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왔다.

탑에서 마주한 과거의 망령.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더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극복하라고 권유하신 소환사님.

그러면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못 할 게 뭐람?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든든한 야만 전사님도 71층, 72층, 73층에서 하이드라와 자신을 속인 사기꾼을 징벌하심으로써 당당하게 트라우마를 이겨냈다.

그 여리신 선녀 공주님도 74층, 75층, 76층에서 원수를 처단하고 스승님을 구원했다.

암살자님은?

자기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신 분이다.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이겨내셨다.

그래서 라직스는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저 앞에 결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아포피스.

자신의 동료들이 놈을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몇 대 때리면 곧 죽을 정도로.

하지만 영혼에 새겨진 두려움.

한 발 한 발 떼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놈의 샛노란 눈.

날름거리는 혀.

그래도 간다.

최소한 장대 곡괭이가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그리고.

멈칫.

"호에에에."

장대를 높이 치켜드니.

꿀꺽!

긴장하는 자신의 동료들.

라직스는 힐끗 옆을 쳐다봤다.

초조한 눈빛의 소환사님이 보였다.

걱정을 끼쳐드리게 해서는 안 된다.

눈을 질끈 감고.

휘릿!

콕!

기어코 한 대 때렸다.

동시에.

짝짝짝짝짝짝짝!

터질 듯 울리는 박수 갈채.

"만세!!!"

"잘한다!"

"실로 놀라운 한 방이로다."

"빛이여!"

"컹컹!"

"보급관님 최고."

라직스와 눈이 마주친 주혁.

엄지를 척 치켜들어주니.

'호에에.'

라직스는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한 번이 어려운 거지, 두 번은?

"후엑!"

정신없이 후드려 팼다.

팍팍팍팍!

콱콱콱콱!

뭐야? 이거.

소환사님 말씀이 맞네?

좆밥.

그 뜻이 뭔지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아무튼 매우 하잖은 것이겠지.

맞다.

이놈은 하찮다.

좆밥이다.

"후에엑!!!"

타작을 시작했다.

채광하는 것처럼 팼다.

퍽퍽, 퍽퍽퍽, 퍽퍽, 퍽퍽퍽.

리듬감 있게 팼다.

신명이 난다.

이번엔 강하게 때려보자.

장대를 머리 뒤로 넘신 후.

스으으윽.

채광과 약초 채집, 청소로 다져진 코어의 힘을 사용해서.

츠피릿!

강하게 내려찍기.

콰직!

라직스의 몸이 타격의 반동으로 높이 떠올랐다.

"좋슴다. 고방 대신 맞은 보람이 있슴다. "

"무공을 배워도 되겠구나."

콰직, 콰직, 콰직....

정신없이 팼다.

소환사님, 보고 계시죠?

저 극복했어요.

그러자.

[거대 뱀 아포피스 1/1]

[82층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 : 상급 마정석 82kg]

"…호엥?"

벌써?

이럴 때가 아니지.

퇴장 메시지가 울리기 전에.

데구르르르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죽어 버린 아포피스에게 다가간 라직스.

그동안 바실리스크와 와이번 가죽을 벗기면서 쌓인 노하우.

재빠르게 아공간 배낭에서 황금 무두칼을 꺼내서.

서걱, 서걱.

놈의 대가리 표피를 잘라 살과 가죽을 분리한 후.

"호에?"

고방에게 눈짓하는 라직스.

"아! 알았다."

고방의 손이 가죽을 움켜잡았다.

라직스가 손을 뻗어 꼬리 쪽으로 가리켰다.

잡고 달려!

"호엑!!!"

쿵쿵쿵쿵쿵!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고방.

쩌저저저적!

동시에 벗겨지는 가죽.

데굴데굴데굴,

라직스도 함께 굴렀다.

그러나.

'후에에에.'

역시 부족한 시간.

아직 반의반도 못 벗겼는데.

안 되겠다.

이것만이라도.

서걱!

라직스는 벗겨지는 가죽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리고 자른 가죽을 아공간 배낭에 집어넣으니.

[83층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은 탑(NO.2)에서 퇴장합니다.]

스팟!

펜트하우스로 나온 주혁과 일행들.

짝짝짝짝짝짝짝!

나오고 나서도 박수는 계속 이어졌다.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놈의 가죽까지 일부 벗겨냈는데.

라직스도 그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콧김을 뿜어댔다.

그의 가슴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

이제 준비는 끝났다.

두려움을 이겨낸 용감한 라직스.

다 함께 특별 임무가 있는 1번 탑으로.

임무가 연달아 떠오르고.

[82층 히든 임무 : 거대 뱀 아포피스에 대한 피소환인 라직스의 복수.]

[완료 조건 : 라직스가 아포피스를 상대로 최소한 총 생명력의 10%의 피해를 입히기 0/10%]

"자신 있습니까?"

"호엑!"

"아포피스 밟을 수 있죠?"

"호엑!"

"그럼 갑시다."

"호엑!"

공략 시작.

찌이익!

아이템 추가 획득의 티켓을 찢고.

[아이템 추가 획득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룬과 티켓을 제외하고, 최대 10배까지 보상 아이템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튼튼한 황금 안전모.

번뜩이는 눈빛.

결의에 찬 걸음걸이.

움켜쥔 장대 곡괭이.

"호우우우, 호우!"

쩌렁쩌렁한 포효!

전사로 다시 태어난 라직스.

거대한 아포피스의 몸에 피소환인들이 달라붙었다.

이윽고 견달래의 구속부가, 한 장, 두 장, 세 장째 붙으니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놈.

라직스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장대 곡괭이의 공격 범위에 들어온 아포피스의 대가리.

라직스가 휘두른 장대 곡괭이가.

휘릿!

아포피스의 머리통에 작열했다.

콰직!

한 방.

휘릿!

콰직!

두 방.

휘릿!

콰직!

세 방.

[라직스가 아포피스를 상대로 최소한 총 생명력의 10%의 피해를 입히기 1%/10%]

곡괭이질 세 방에 1%를 깎았다.

27방 남았다.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