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
결국 이렇게 됐구나.
암살자의 칼끝이 폐부를 뚫고 들어 와 내부를 휘저었다.
그 차갑고도 뜨거운 감촉을 느꼈을 때, 에른은 좌절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올 것이 왔군...
허름한 여관방.
쿰쿰한 곰팡내와 혈향이 뒤섞여 방 안은 구역질 날 것 같은 냄새로 가득 찼다.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집안을 홀라당 말아먹은 것으로 이미 역대급.
그걸로도 모자라 남에게 영지를 고스란히 뺏긴 희대의 망나니.
나바로의 귀족들은 에른 스틸가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 드높은 명성의 스틸가드 가문을 말아먹은 머저리 백작이라고.
호랑이에게서 개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더니 딱 그짝이라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 나 같은 놈한테 이보다 어울리는 최후가 또 있을까.'
스틸가드.
나바로의 북부 지명이자 대대로 이 지역을 다스려온 가문의 이름이기도 한.
그러나 이 나라에서, 스틸가드는 단순한 고유명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위대한 충절과 영웅적인 업적으로.
현재는 몰락 그 자체, 덧없음의 상징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에른은 복부를 움켜쥐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냉혈한 암살자는 그 모습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책은, 어디에 있지?"
"내가… 컥! 그, 그걸 말해줄 것 같아?"
"그건 그렇군. 알아서 찾도록 하지."
암살자가 말하는 책이란 [차원거래서다]
이 책은 기서(奇書) 중의 기서였다.
이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차원의 거주자들과 물품 거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규격 외의 물건.
스틸가드에 전성기를 가져다준 동시에, 몰락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영주직에 오른 에른은 가문의 비고를 뒤지다가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겉표지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속지는 전부 백지인 이상한 책.
이런 게 왜 비고에 있는 건가 하고 의아해하던 에른은, 우연한 기회에 책의 사용법을 알아냈다.
그게 바로 차원거래서였고, 차원거래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기뻐했다.
이걸 잘 활용한다면, 쇠락해가는 스틸가드가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
...라고 생각한 뒤로부터 3년.
에른은 가문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영주직에서 쫓겨났다.
'뭐에 홀렸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멍청할 수가 있나?'
자책감과 자기혐오에 사로잡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물론, 폐를 찔려서이기도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들어 고통마저 잊을 정도였다.
"이건가 보군."
암살자가 차원거래서를 찾아냈다.
그는 대단한 거라도 적혀있나 하고 열어 봤지만 대단하기는커녕 쓰잘데기 없는 내용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의문은 잠시일 뿐.
암살자는 별생각 없이 책을 닫았다.
돈만 제대로 받는다면 의뢰 내용이 어떻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만, 만지지마!"
흐릿하게 꺼져 가던 에른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차원거래서는 오직 나만의 것이다!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어! 절대로!'
퍼억!
암살자는 들은 체도 안하고 에른의 배를 걷어찼다.
"우웩!"
에른이 피를 토했다.
갑자기 과격한 움직임을 보인 탓에, 암살자의 손에 들린 차원거래서에서 뭔가가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툭.
에른의 눈높이로 떨어진 것은 작은 책갈피였다.
그의 숱한 호구짓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가장 심각한 호구짓의 산물.
"[소원의 책갈피]라는 겁니다. 평생에 단 하나, 어떤 소원이라도 다 들어주는 놀라운 기능이 있지요. "
"이봐…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믿어 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거기 설명을 보세요. "
"...…엇?"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강렬한 염이 필요합니다.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은 염원. 간절히 기원해야만 이루어지기 때문에요. "
"간절? 나보다 간절한 사람이 어디있다고. 얼만데?"
"그게, 조금 비쌉니다만...
차원 교류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영지의 일 년 세수를 몽땅 때려박은 끝에 받은 물건이었다.
이때 에른은 차원거래서를 통해 책갈피를 건네받자마자 소원을 빌었다.
나에게 최고의 재능을 달라고.
신이 내린 재능, 건국황제 페이웨어를 뛰어넘는 재능을!
이것으로 가문을 일으켜 보겠다는 계산이었다.
건국황제 급의 재능을 얻는다면 영지를 살리는 것뿐 아니라 나라를 세우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그 결과는?
책갈피는 그냥 책갈피일 뿐이었다.
'나보다 더한 머저리. 골빈 쓰레기에 구제불능 호구가 있을 수 있을까...?'
에른은 스스로를 탓하며 끝도 없이 피를 토했다.
이런!"
암살자가 급히 자기 몸을 뒤졌다.
그는 품에서 힐링포션과 마취약을 꺼내 에른에게 먹였다.
"이, 이걸 왜 나한테?"
당연한 물음에 암살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의뢰인의 부탁이라."
에른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여전히 몸을 가눌 수 없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지금이 딱 적당해."
암살자는 가지고 온 상자를 열었다.
스르릉.
그 안에 든 것은 예리한 단도 수 십자루.
"뭐, 뭘 하려는 거지?"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오히려, 난 지독한 악취미라고 생각하지. 그래도 의뢰는 의뢰고… 까라면 까야 하는게 내 일이라서."
"아하, 아하하...
"하하하! 하하하핫!"
에른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자 암살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결국 미쳐버린 건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쿤츠…? 내 전부를… 소중한 모든 것들을… 남 김없이 다 빼앗아가고도! 그러고도 만족 못 한다 이거지?"
"미치진 않았군.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어디 마음껏 해봐 난 굴복하지 않는다!"
"...과연?"
암살자의 단도가 에른의 몸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암살자인 동시에 고문 기술자였다.
의자에 결박된 채, 살이 저며지는 기괴한 감각을 견디며 에른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몸이 줄어들어 가면서 정신 또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문득,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소원의 책갈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뭐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게 뭐가 중요한가. 다 내 잘못인 것을. 내가 멍청하지만 않았어도 최악은 피할 수 있었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만약,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내가 저지른 수많은 실수를 바로잡고 싶다.'
굳건한 의지도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에른은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또한 절대 호구처럼, 모지리 반푼 이처럼! 당하지도 않으리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처참할 수 없는 몰골이 되어버린 에른.
이러고도 숨이 붙어 있다는게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암살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예술이야. 이렇게까지 오래 살린 적은 없었는데."
그는 넋을 놓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에른을 감상했다.
"음, 그래도 죽이긴 죽여야지."
푸욱.
검이 미간을 뚫고 들어가자 에른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한 많은 33년 인생의 끝은 허망했다.
그렇게,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파아앗-
바닥에 떨어진 소원의 책갈피가 눈부신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뭐, 뭐지?"
암살자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에른의 머릿속에서는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이의 자기 성찰, 끝까지 꺾이지 않은 의지와 개선에 대한 열망.]
[조건을 충족하여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마침내.
소원의 책갈피가 제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에른은 그토록 원하던 소원을 빌 수 없었다.
[...?]
목소리가 멈칫했다.
곧이어 시끄러운 경고음이 뇌리를 때렸다.
[시스템 에러! 시스템 에러!]
[소원자의 자아가 붕괴되어 소원을 빌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소원자의 열망을 분석합니다.]
잠시 뒤.
[3가지 소원이 발견되었습니다. 열망의 정도를 측정합니다.]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
이번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나고.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전부 이루어집니다.]
*
눈 떠 보니, 17년 전이었다.
그때일 수밖에 없었다.
드넓은 영주의 처소가 아닌 아늑한 침실, 추억 속의 내부 장식.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은 은은하면서도 청결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시공간을 건너 뛰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냄새였다.
'이게 가능한 건가?'
에른은 눈을 끔벅거리며 현실을 받 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33년 인생의 끝과 16세 소년 시절 이 연결되어 있다니.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보드라운 손.
강철 같던 근육은 사라져 연약한 신체로 되돌아가 있었다.
'가슴이며 복부며 말랑말랑하군.'
그 복근과 가슴 근육을 만드는 데 들었던 노력만 해도 얼만지.
원체 근육이 안 붙는 체질이라 남 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아깝긴 했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이렇게 돌아오기전,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으니까.
스틸가드가는 나바로 최고의 기사 명가였다.
라제칸 스틸가드.
에른의 할아버지다.
나바로의 전쟁 영웅이자 위대한 기사로, 페이웨어 제국의 정복 야욕을 막아낸 위인이었다.
오직 그 한 사람의 존재로 제국은 진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라제칸이 없었더라면 나바로는 필히 멸망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나바로인은 없었다.
라제칸의 기사 등급은 특급 중에서도 '신화급'.
기사의 등급은 9급에서부터 시작해 1급으로, 여기까지는[일반급]으로 분류된다.
이다음 경지부터는[특급 기사]라고 불린다.
여기에도 단계가 있어서, 각성-영웅—전설—신화—초월 순으로 발전해 나간다.
참고로 제국의 건국황제 페이웨어는 인류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초 월급]이었다는게 정설.
하지만, 라제칸이 올랐던 신화급만 되어도 역대 최강의 기사 반열이었다.
레바단 스틸가드.
이 사람은 에른의 아버지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옛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경지는[영웅급]이었다.
부친만은 못해도, 여전히 일국을 대표할 만한 기사.
라제칸 사후에도 영지를 잘 관리하며 스틸가드의 명성을 유지했다.
반면 그의 막내아들인 에른 스틸가드는.
'...3급에서 막혀 올라가질 못했었지.'
3급이면 기사로 성공했다 할 만한 수준이다.
평민 출신이 이만큼 올라왔으면 자수성가했단 말을 듣고 집안을 일으킨 효자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천재 아버지, 영웅 할아버지를 둔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일 따름이었다.
에른의 33년 인생.
어떻게 해도, 무슨 수를 써 봐도 모두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삶이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의 인생을 재단했다.
위대한 혈통에서 전혀 위대하지 않은 후손이 태어났다고.
형제들은 그렇지 않은데 혹시 주워온 자식 아니냐고.
'내 재능이 거기까진 걸 어떡하라고!'
노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에른은 그렇게 툭 던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해주고 싶었다.
'노력을 안 했다고?'
한때는 그랬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게으른 삶을 청산하고 검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이후부터는 자신할 수 있었다.
노력 부족?
'영혼까지 갈아 넣어 봤다!'
피땀을 흘리고 목에서 피를 토해가 면서도.
손발이 짓무르고 어깨가 탈골되도록.
당장 죽을 것 같아도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또 휘둘렀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이었다.
에른의 재능은 그냥 쓸만한 정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스틸가드란 성을 물려받아 좋았던 것도 있었다.
30대에 접어든 에른에게 상속권이 돌아왔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떠올리기도 싫지만.
'아니,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차원거래서를 얻은 뒤로 그가 해왔던 모든 선택과 결정은, 어리석고 충동적이기만 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몰락한 가문과 빼앗긴 영지.
그 과정 중에 벌어진 일들이 기억 나자 죄책감으로 가슴 한쪽이 꽉 죄 어들어 왔다.
'그래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 졌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에른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와...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소년이 이쪽 을 쳐다보고 있었다.
[2 화]
탐스러운 황금빛 머리카락과 깊고 아름다운 눈.
조화롭고 수려한 이목구비.
노동이라곤 단 한 순간도 해본 적 없을 듯한 하얗고 매끈한 살결.
"이때는 정말… 미모가 물이 오르 긴 했었군."
33세 시절과 비교해 본다면 동일 인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에른은 나바
로 최고의 미소년으로 통했으니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놀랍도록 시 들어서 죽기 전에는 왕년의 미소년 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이번 생은 피부 관리 빡세게 해야 겠어. 음, 머리숱도."
이제는 알았다.
타고난 외모도 관리 안 하면 무너 지고 만다는 것을.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젤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 이젤...?"
그리운 이름이다.
에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흠흠, 들어 오거라."
에른을 수발 드는 하녀, 이젤은 이 상하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왔 다.
어울리지 않는 에른의 위엄 있는 말투.
영주이던 시절, 전생의 습관이 나 온 것이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알리 없다.
아직 변성기가 찾아오지 않은 미성 이라 이런 식으로 말하니 굉장히 어 색한데.
"이젤!"
반색하고 맞이하는 그를 보고, 이 젤의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곧이어.
그녀의 두 눈 또한 크게 확장되었다.
에른의 입가에 번지는 것은.
'도, 도련님이 웃고 계셔?'
영주의 저택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저택에 들어가지 못한 영지의 처녀 가 하는 일.
뙤약볕 아래에서 밭일을 돕거나 마 을의 잡일을 도맡아 한다거나....
그에 비하면 저택의 가사 노동은 꿀 중의 꿀이었다.
그래도 하나 힘든 게 있다면, 에른 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
에른이 힘든 이유?
까탈스럽고 손이 많이 가서, 누가 애 아니랄까 보} 유치하게 괴롭히기 도 하고.
하지만 이보다 참기 어려운 게 있었다.
언제나 얼음장 같은 도련님의 싸늘 한 눈빛.
혐오와 경멸이 뒤섞인 눈으로 자기 를 바라볼 때마다 이 일에 대한 회 의가 들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 보는 에른의 환한 웃음에 이젤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와, 이젤!"
에른이 다가와서 그녀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젊다.
이젤은 젊어도 너무 젊었다.
기억 속의 그녀는 40대를 넘긴 나 이였는데.
발그레한 볼에는 세월의 흔적이라 곤 없고 풋풋한 느낌까지 든다.
"진짜 맞구나...
다시 만난 이젤.
그녀를 붙든 에른의 몸이 격렬히 떨리고 있었다.
돌아왔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게 맞는다는 것.
안도감이 전신으로 퍼져 갔다.
그와 함께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 르르한 감각.
이 흥분과 전율이, 이젤에게 전해 졌을까?
전혀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건조한 목소리.
눈초리에는 의심이 서려 있다.
"있었지, 아주 큰 일… 악몽을 꾼 것 같아."
"...잊어버리십시오. 꿈은 꿈일 뿐입니다."
"아니. 그렇게 가볍게 흘려보내도 되는 게 아니야."
전생? 시간의 역류?
뭐가 됐든 17년을 더 살아간 기억 은 진짜였다.
그로 인해 깨달은 것도 많았고.
"고마워, 이젤."
".…"예?"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모두가 자 길 포기했을 때에도, 이젤만큼은 자 신을 믿고 지지해 줬다.
그럼에도 물론 잘 되지 않았지만.
"고맙다니요, 제가 뭘...
이젤로선 이해 안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어진 일을 해온 것이고, 에른은 하녀들의 봉사를 받아 마땅 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런 삭막하고 딱딱한 뿐인 관계.
'왜 이러시지?'
"이젤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거야."
끝없는 내리막을 타고 있었을 때,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버팀목이 그녀였다.
그러나 이젤은 자신이 미래에 한
일을 알지 못한다.
"도, 도련님. 혹… 제가 뭔가 기분 상하게 한 거라도?"
"응?"
이젤은 에른을 떼어내고 털썩 무릎 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말씀 해 주십시오. 달게 벌을 받고 고치 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닌데."
에른은 머리를 긁적였다.
고맙다는 데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빌고 있다니.
'내가 평생을 헛산 게 맞구나.'
그가 이젤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라. 신종 괴롭힘 수법 뭐, 이런 거 아니니까."
".…"예?"
"지금까지 내가 좀, 아니 많이 못 되게 굴었지?"
"아, 아닙니다. 도련님."
이 또한 테스트로 받아들였는지.
이젤은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또 그러네. 맞잖아. 지금까지 난 열등감을 아랫사람들한테 풀어왔 어."
«..2"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해. 그런다고 그게 해소되는 게 아닌데."
뭔가 달랐다.
평소의 에른과는.
"갑, 갑자기 왜...
"내가 뭘?"
"...도련님답지 않으십니다."
"갑자기가 아니야."
" 네?"
17년을 거슬러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이제 열여섯이니까. 언제까 지고 응석만 부릴 수는 없으니까."
"뭐, 그런 걸로 하자. 그게 좋겠 다."
이젤은 말이 없었다.
워낙에 신뢰가 없어서 이렇게까지 말해도 통하지 않는 듯.
"뭐, 못 믿어도 어쩔 수 없지. 말 로는 뭔들 못해. 차차 보여주면 될 거고."
"예...
"이젤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 고. 달라진 나를 받아들일 때부터가 진짜 첫 단추인 거겠지. 그치?"
멍한 얼굴의 이젤.
'진심일까.'
에른은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그게 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훈련 시간 지난 지 한참 됐다고."
"훈련?"
"앞으로 거르지 않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도 빠지셨구요. 단 장님께서 몹시 화가 나셨습니다."
"아, 그 훈련."
빛바랜 기억이 차츰 선명해져 갔다.
기사단장 하파엘.
그는 영지의 1급 기사다.
스틸가드에서 아버지인 레바단 다음가는 실력자이고, 에른의 검술 스 승이기도 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내 검이 어디 있더라?"
"예?"
"훈련하러 간다니까 뭘 그렇게 놀 라? 안 갔으면 좋겠어?"
"아, 아니… 아닙니다."
이젤이 검을 챙겨다 줬다.
"그럼, 가볼까."
*
저택 옆 훈련장.
기사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족히 6, 70명은 될 듯한 기사들.
그들을 본 에른의 가슴이 두방망이 질 쳤다.
'스틸가드는, 아직 건재하구나.'
기사단의 전력은 영지의 사정이 어 떠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 표다.
망한 영지에는 기사단이 없다.
에른이 다스리던 때의 스틸가드에 는 단 세 명의 기사만이 남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땀내 풍기는 더러 운 아저씨들이라고 무시했겠지.'
그러나 33세 에른의 시각으로 보 니, 그렇게 안심이 되고 든든할 수 가 없었다.
"빨리도 오셨군."
기사단장, 하파엘은 천천히 걸어오 는 에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헐레벌떡 뛰어와도 모자랄 판에.
'거기다가, 웃어?'
에른이 그의 앞으로 왔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조금이 아니고 많이 늦으셨습니다."
"헤, 그게… 잠을 설쳐서."
'뭘 피곤할 게 있다고 늦잠이야?'
하파엘은 내심 욕하면서도 겉으로 는 웃으며 말했다.
"약속하신 건 잊지 않으셨지요?"
"어떤?"
"모른척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하루 빠지면 다음 날 훈련이 두 배라는 거요."
"그, 그랬나?"
"그랬습니다. 훈련장 50바퀴, 휘두 르기 1000회, 찌르기 1000회. 하셔 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파엘은 에른이 약속을 지킬 거라 곤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또 어떤 창의적인 핑계를 댈지 기
대하는 그때.
"알았어요. 할게요."
"이번에는 쉽게 안 넘어갑니…
예?"
"한다니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에른은 묵묵히 하파엘이 시킨 두 배 루틴을 시작했다.
'...이것 봐라?'
지켜보던 하파엘의 눈에 이채가 떠 올랐다.
먼저 훈련장 25바퀴를 돌고, 후들 거리는 다리로 목검을 휘두르는 모 습.
'갑자기 왜 저러시지?'
평소의 에른이라면 시킨 양의 반의 반도 못 하고 더는 못하겠다고 뻗대 야 정상인데.
벌써 훈련량의 절반을 끝내고 있었다.
에른의 온몸이 흠뻑 젖었다.
입에서는 단내와 신음성이 흘러나 왔다.
풀썩.
훈련장 25바퀴를 또 돌고, 휘두르 기를 계속하던 에른이 쓰러졌다.
하파엘이 웃었다.
'그럼 그렇지. 새로운 전법인가? 이번 건 그래도 신선했다.'
이만큼이라도 한 게 어딘가 싶었다.
이 핑계로 또 훈련을 며칠이나 빼 먹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긴 했지만.
하파엘은 다가가서 에른을 부축했다.
"여기까지 하시죠."
노력이 가상해 져준다는 느낌.
그러나.
"괜찮아요, 난."
에른이 손을 내저으며 일어섰다.
그가 다시 목검을 쥐고 훈련을 이 어가자 하파엘의 표정이 변했다.
관둬도 한참 전에 관뒀어야 에른 도련님다운 건데
전에는 본 적 없는 결연한 눈빛.
어떻게든 훈련량을 채우려는 의지 가 엿보였다.
'뭐지? 진짜?'
휘두르기를 마친 에른은 찌르기로 들어갔다.
100히, 200히....
하파엘이 다시 가까이 갔다.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목소리였다.
"진짜로, 여기까지 하시죠. 이러다 몸 상하십니다."
"아까는 약속이라고 하지 않았나 요?"
"아니, 뭐. 그 약속도 도련님을 위 한 거니까요. 이렇게 몸을 혹사시켜 봐야 근골만 상하고 안 좋습니다."
"그러면 더더욱 그만둘 수 없죠. 나와의 약속인데."
에른은 고개를 젓고 손아귀에 힘을 줬다.
300회, 400회....
회수가 늘어날 때마다 하파엘의 입 이 점점 벌어졌다.
상상도 못 했다.
도련님이 기어코 다 해낼 줄은.
기사 기준으론 많은 훈련량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에른 스틸가드인 것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499, 500!'
후웅!
마지막 찌르기를 마친 에른이 목검 을 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이 멈출 줄을 몰랐다.
전신을 덮은 굵은 땀으로 거의 목 욕하다시피 한 그였다.
'내일의 나, 미래의 나에게 모든걸 떠넘기던 에른 스틸가드는 이제 없다.'
이전 생의 에른은 알지 못했던 삶 의 진리.
자신의 모든 과오는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는 되돌아오고야 만다.
마치 부메랑처럼.
뼈저리게 깨닫고 과거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17년 전 그대로였다.
그때 그 사람들, 그 당시의 풍경.
달라진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온 자 신뿐이다.
손 놓고 가만히 있는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말 터.
그렇기에 다른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오직 에른 한 사람에게 달 렸다.
창공을 올려다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순서를 정했다.
훈련 중에 떠올랐던 수많은 생각 들.
숨이 가라앉으면서 서서히 그 윤곽 이 자리 잡혀 갔다.
자신의 약점과 강점, 그리고 앞으 로 벌어질 일들.
'승산은 충분하다.'
벅찬 호흡은 가슴 벅찬 환희로 바 뀌었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피로 탓인가?
그렇다기엔, 주체할 수 없는 떨림 이 파문처럼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번 생은, 똑같은 비극이 반복되 도록 두지 않는다. 기필코!'
요동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는 그 때. 난데없이 시야 가득 이상한 메 시지가 나타났다.
[신규 사용자 감지.]
[차원간 거래를 시작하시겠습니 까?]
에른의 눈이 커졌다.
'...뭐지?'
[3 화]
[차원간 거래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동의/거부)]
푸른빛의 홀로그램 메시지.
모를 수가 없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전생에, 처음 홀로그램을 봤을 땐 놀라 자빠질 삔했다.
하지만 3년을 넘게 쓰다 보니 신
기함은 사라지고 무던해졌다.
그래서 메시지 자체는 딱히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이게 대체 여기서 왜 나와?'
에른은 이 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고 아무것도 없는 품을 뒤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때 차원거래서는 비고에서 먼지 만 쌓인 채, 에른이 자기를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차원거래서가 없는데… 어떻게 차 원거래가 되는 거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하파엘이 다가와 물었다.
걱정 반 놀라움 반이 뒤섞인 얼굴 이었다.
"괜찮긴 한데요. 뭐 이상한 거 안 보여요?"
에른은 메시지를 만지고 있었다.
건드려 보니 굴절이 일어나면서 글 자가 뭉개졌지만 손을 치우니까 다
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뭘 보라는 말씀이신지...?"
"글쎄요."
하파엘도 이게 보인다면 뭔지 말할 필요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 욱 말할 이유가 없다.
"...장난치시는 겁니까?"
"아닌데요."
에른이 정색하자 하파엘은 심각해 졌다.
"탈진해서 힛것을 보시는…? 제가 이래서 그만하시라고 한 겁니다!"
하파엘은 메시지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라면 왕립 극단에 들어가도 될 만한 연기력이었다.
'이거, 나한테만 보이는 거군.'
하파엘은 에른을 일으켜 세웠다.
"안되겠습니다. 치료사한테 가시
죠."
"전 괜찮아요."
"아뇨, 아까도 괜찮다고 하셔 놓곤.
도련님께서 잘못되시면 제 책임인
거 아시죠?"
"괜찮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하파엘을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에른의 눈을 쳐다봤다.
그가 아는 평소의 흐리멍텅한 눈빛 이 아니었다.
무연하면서도 깊은.
마치, 그쪽은 내 검술 스승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가신이기도 하지 않나? 라고 말하는 듯한.
'나도 스틸가드라는 사실을 잊진
않았겠지?'
귓가에서 에른의 목소리가 아른거 리는 것 같았다.
1급 기사인 그가, 먼저 눈을 피했 다.
그런데 그때.
하파엘의 시야 끝에 뭔가가 걸렸 다.
파지 직.
에른의 왼쪽 눈에서 번뜩이는 푸른 광채.
절대 안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있
는 그대로의 빛이었다.
'뭐지?'
얼른 에른의 눈을 다시 봤지만 이 때는 깨끗한 흰자와 눈동자만이 보 일 뿐이었다.
'나도 헛것이 보이나?'
하파엘이 얼떨떨해하는 참, 에른은 정색한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장난 맞았어요. 보이긴 뭐가 보인다고 그래요?"
"예?"
"지치긴 했는데, 그거야 쉬면 나으 니까. 방으로 돌아갈게요."
"무, 무슨 그런 장난을 다 치십니 까?"
"단장님이 자꾸 초를 치니까 그러 죠. 간만에 마음잡고 훈련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그건 도련님을 생각해서...
하파엘이 쩔쩔매자 에른의 입꼬리 가 더 올라갔다.
"이것도 장난인데. 알아요, 단장님 뜨 O "
"예...
"그럼 훈련량도 다 채웠으니 가 봐 도 되죠?"
"물론입니다. 푹 쉬십시오."
에른은 확신했다.
'나만 볼 수 있는 게 맞군.'
갑자기 튀어나온 투명한 책을 보고 도 하파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뼘 두께.
그리고 가죽 질감의 커버.
허공에서 떠다니는 데다 뒤가 다
비쳐 보인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 긴 했지만.
전생에 내내 끼고 다녔던 차원거래 서가 맞았다.
거래를 시작하겠냐는 메시지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시작해 보자고. 동의!'
그러자 나타난 게 이 투명한 차원 거래서 였다.
사용법을 알아낸 뒤로,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항상 곁을 지킨 책.
결국 암살자에게 뺏기기는 했지만,
죽기 전까지도 함께 했던.
그 차원거래서가 확실했다.
'그때는 그냥 평범한 책이었는데 무슨 조화로...
둥실〜
차원거래서가 공중을 떠다니며 에른을 뒤따르는데.
아무도 이상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하파엘뿐 아니라 훈련장의 기사들, 저택의 하인들도.
모두가 짜고 에른을 속이려는 게
아닌 한, 그에게만 보이는 광경이라 고 봐야 했다.
'어이가 없군. 이게 안 보인다고?'
[가입 절차 진행 중.]
[보유 ID 발견!]
[정보를 조회합니다.]
파르륵, 파라라라락!
책장이 제 스스로 넘어가는 기이한
현상.
그러면서, 사방으로 푸른빛이 퍼져 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련님."
집사장 어윈과 마주쳤다.
꼼꼼한 일처리로 하인들을 총괄하 는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바닥의 먼지 한 톨까지 찾아내는 날카로운 눈썰미의 소유자.
그런 그조차,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은 보지 못했다.
"좋기는. 난 죽을 맛인데."
"아… 훈련하고 오셨나 보군요. 수
고하셨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피곤해서 생각 없어. 거를래."
"알겠습니다. 어… 앗?"
"왜 그러지?"
"도, 도련님 왼쪽 눈이...
"내 눈이 왜?"
"...파란 불꽃같은 게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른은 깨달을 수 있었다.
'다 내 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
군.'
어윈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괜, 괜찮으신 겁니까?"
에른은 왼쪽 눈을 감고 태연히 대 답했다.
"집사장은 기사가 아니라서 모르는 구나. 마나가 지나가면서 그렇게 보 이는 거야. 별 건 아니고."
뜬금 윙크 때문인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인지, 어윈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나라… 그렇습니까?"
어윈이 기사였다면 이 말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보통 사람의 인식으 론 마나란 온갖 기적 같은 일의 원 천이자 그 자체였다.
다행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줬다.
그와 헤어지고.
쾅.
방으로 돌아온 에른은 바로 문을 잠갔다.
'차원거래서가 눈 안으로 들어왔 다…. 이건 대체 뭐지?'
에른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곧.
'하긴, 17년 전 과거로 돌아온 게 더 말이 안 되지. 고작 이거 가지 고.'
지극한 비현실성 앞에서, 약간 말 안 되는 일 정도야 간단히 희석되고 마는 것이었다.
"뭐, 나쁜 일도 아니고...
문득, 에른의 입가에 웃음기가 감 돌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행운이었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
천 번 검을 휘두르고 천 번 찌르 면서 에른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일단 미래를 알고. 허송세월이긴 했어도 17년 더 산 경험과 연륜. 하 지만 여전히… 평범한 재능.'
에른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차원거래만이, 살길이다.
변화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전부 그 안에 잠재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차원거래서를 확 보해야 했는데 그게 떡하니 생겨 버
리는 바람에 각종 계획들이 무의미 해져 버렸다.
물론, 좋은 무의미함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첫날부터 차원거래 서를 소유한 채라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삐빅.
조회가 끝나자 알람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계정명 : [S]UserOOOsss, 닉네임 : 에른]
[이 계정으로 계속하시겠습니까?
(동의/승낙)]
'뭐야, 왜 [거부]가 없어?'
에른은 이상함을 느꼈다.
답을 정해놓고 물어볼 거면 애초에 묻지나 말든지.
무조건 승인해야 하는 것도 뭐지 싶은데 계정명 또한 일반적이지 않았다.
앞에 붙은 [S]도 그렇지만 뒷부분 도 이상했다.
원래 ID는 무작위로 정해진다.
'예전 ID가… User014etw 였던 걸 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렇게나 규칙적인 문자열 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일단은, 계속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동의!"
파스스슷-
차원거래서에서 나오는 빛이 더 밝 아졌다.
강렬한 청광이 눈을 찔렀다.
[차원간 거래가 시작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푸른 빛깔 화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활짝 펼친 책을 형상화한 대형 홀 로그램 화면이었다.
[사용자 ID : [S]UserOOOsss 닉네임 : 에른
종족 : 인간
접속 장소 : 0계, 1342호 지구.
거래 등급 : Level 0
혼의 위상 : 길가에 널린 인간. 보유 코인 : 10]
왼쪽 메인 페이지 한편에 뜬 것은 사용자인 에른의 상태 정보다.
전생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특히 이 10코인.
공교롭게도 죽기 전, 마지막으로
수중에 남았던 것과 같은 금액이었다.
'설마, 전생의 계정이 그대로 이어 지는 건가?'
그렇다기엔, 이전 계정의 거래 등 급은 Level 2였는데 지금은 0이라 맞지 않았다.
어떤 건 그대로고 어떤 건 아니고.
완전히 자기들 마음대로였다.
이러면 사실상 맨땅에서부터 시작 인 셈.
하지만, 완전히 맨땅인 것은 아니
었다.
그에게는 활용할 무형의 자산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채널명을 확인했다.
〈0계 채널〉
에른은 다른 채널로 이동해 보려 했으나 채널 이동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상위 채널에 접근하려면 조건을 충 족시켜야 했다.
시선을 낮추자 화면을 가득 채운 0계의 거래자 명단이 눈에 들어왔
다.
-윌슨 : 식량 급구! 육류, 곡류, 과일, 음료, 기타 등등. 다 삽니다! 굶어 죽기 직전임!
-베스 다이더 : 대량 학살 가능한 마법검 구합니다. 스펙만 맞으면 쿨 거래합니다.
-투타치 : 부모님의 원수를… 도 와주세요! 도움 될 만한 거 다 사고 있으니까. 선제시 부탁드립니다.
-온달프 : 5서클 이상 공격 마법
스크롤 구합니다.
옆으로 눈을 돌렸다.
-조각장인 : 손수 만든 공예품 팔 아요〜 삭막한 방을 예술품으로 장 식해 보세요.
-야켈란젤로 : 제가 그린 그림들 입니다. 이세계의 화풍을 느껴 보세 요.
-겐지루 : 희귀 동물 가죽 팝니다. 일단 와서 보시면 그 가치를 알게
될 겁니다.
왼쪽은 구매자, 오른쪽은 판매자 페이지였다.
딱 봐도 알 수 있듯, 수요와 공급 이 완전히 따로 놀았다.
0계 채널의 특징이다.
뭉뚱그려 '하계'로 분류되는 여러 세계들.
[차원거래소]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세계는 0계, 하계 취급을 받 았다.
에른이 Level 0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가 0계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계라고 해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른의 세계에도 초월급 기사, 역 사에 남을 대마법사 등이 존재했었 으니.
문제는, 그런 하계에서 나온 개천 의 용과 같은 인물들은 금세 거래 레벨을 높여 다른 채널로 올라가 버 린다는 것이었다.
'나도 전생엔 2계 채널까진 갔으니
까.'
그러한 이유로, 하계 채널에서 고 급품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 기에 가까웠다.
그렇게 고작 10코인, 레벨 0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 었다.
차원거래서 없이도 차원거래가 된 다는 것을 알았고.
'아니지. 차원거래서가 생기긴 생 겼는데 그게 조금 다른 형태라는 거?'
투명한 차원거래서는 여전히 에른 의 옆에 둥둥 떠 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예상보다 빨리 차원거래를 하게 된 것도 물론 좋지만, 시야를 보다 넓 히면 최고 장점은 그게 아니었다.
전생엔 차원거래를 들키는 바람에 결국 책을 뺏기고 말았다.
그리고 암살자에게 최악, 흉악, 극 악무도한... 온몸이 저며지는 고문을 당해 죽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제는 그럴 염려가 없다는 것.
"내 눈 안의 차원거래서라...
생각할수록 좋았다.
누가 알아채고 왼쪽 눈을 뽑아 가 지 않는 이상, 영원한 자신만의 차 원거래서인 셈이었다.
들끓는 안광만 잘 숨긴다면 언제 어디서든 차원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상당한 장점.
거래 외적으로는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상황이 마련됐다.
몰래 책 펴놓고 거래하다가 인기척 만 들리면 후딱 숨겼던 나날들.
문밖으로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집무실과 침실을 두꺼운 커 튼으로 둘러쳤더니, 하인들은 영주 가 뱀파이어라도 된 게 아니냐며 수 군거 렸다.
이제 그런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만 잘하면 되는군."
전생의 그는 차원 교류자들에게 속 고 또 속으며 선조들이 쌓아온 부를 모조리 날려 먹었다.
에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아니, 달라야만 한다고.
당하기만 하는 건 이미 질리도록 경험해 봤다.
지긋지긋할 뿐이고 그걸 넘어서 치 가 떨렸다.
개 같은 차원 교류자들.
하는 말마다 거짓말에, 숨 쉬듯 남 을 속이는 놈들!
태생 자체가 사기꾼이고 돈에 영혼 을 판 금귀(金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속고 당하고 뒤통수 깨지도록 후드려 맞았던 에른.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는, 내가 너희들 뒤통수를 부 숴줄 차례다!'
그것도 아주 개박살을!
그러기 위해서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이었다.
에른의 한쪽 입매가 쭉 올라갔다.
"일단은, 몸풀기부터 가야지."
[4 화]
에른은 벽장 깊숙한 곳에서 고급스 러운 상자를 꺼냈다.
소년 시절, 그는 쓰고 남은 용돈과 선물로 받은 물건 등을 여기에 보관 해 왔다.
짤랑.
흔들어 보니 묵직한 게 값이 꽤나 나갈 것 같았다.
"그래도 이때는 흥청망청 쓰진 않 았군."
딱히 쓸 데가 없어서인 게 크긴 했으나, 이 정도면 동 나이 기준 최 상위권 저축액이었다.
스틸가드는 아주 부유한 영지라고 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괜히 백작령인 게 아니다.
나바로의 북부 접경지에서는 가장 번성한 편.
그런 집안의 막내.
레바단 스틸가드는 검소함을 미덕 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 말은, 백작가 치고 상대적으로
검소하다는 것.
그래도 쓸 때는 쓰는 사람이었고 인색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따금 내주는 용돈만 해도 평민들 에게는 한 달 생활비에 가까운 금액 이다.
또한 영웅급 기사인 아버지의 지인 들은 다들 나바로에서 한가락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라.
가끔 스틸가드를 방문하면서 형제 들에게 안겨주는 선물만 해도 평민 들에게는 평생 구경도 하기 힘든 귀 중품이었다.
'덕분에 종잣돈 들고 시작할 수 있 어서 다행이지.'
에른은 [거래소] 창을 선택해 화면 을 전환시켰다.
거래소 메뉴는 크게 5가지 카테고 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입]
[판매]
[환전]
[문의]
[VIP 샵]
'매입', '판매'는 거래소 자체에서 구입, 판매하는 물품 목록을 보여준 다.
'환전'으로 들어가면 가진 물건을 코인으로 바꿀 수 있고.
'문의' 카테고리에서는 사기 신고 등을 할 수 있다.
'VIP샵'은 말 그대로 주요 고객을 위한 상점으로, 그에겐 없어도 크게 지장 없는 카테고리였다.
'사실, VIP샵뿐만이 아니지.'
0레벨의 거래 등급으로는 다른 카
테고리도 다 제대로 써먹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환전할 때도 불이익을 받았다.
에른은 [환전] 아이콘으로 손을 가 져갔다.
신기한 건, 실물 차원거래서를 사 용하던 때의 조작법이 여전히 먹힌 다는 것이었다.
의지와 생각으로도 조작이 되지만.
'환전!'
이렇게 하나, 직접 [환전] 아이콘
을 터치하나, 결과는 같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덕에 버벅대지 않고 차원거래서를 다룰 수 있었다.
뿅!
허공에서 거대한 저울 같은 게 튀 어나왔다.
거래소의 [차원 저울]이라는 것이 다.
촤르륵.
동그란 접시 위로 상자를 기울여, 안에 든 것을 전부 쏟아 붓자 바늘
이 돌면서 환전액을 표시했다.
[예상 환전액 : 30코인]
'음? 생각보다 많이 나오네?' 전생의 그는 거래 중독이었다.
'이번이야말로 마刀막/'
'아니, 딱 한 번만 더 하자. '
'진짜 이걸로 끝이야! 되든 안 되 든 끝, 끝!'
이런 말들을 되뇌며 영지와 가문의
재산을 쥐어짰다.
환전을 어찌나 해댔는지, 나중에는 눈금 돌아가는 것만 봐도 마지막 자 리 숫자까지 맞추곤 했다.
거의 인간 저울 급이라 해도 과언 이 아닌 수준.
'그새 감이 무뎌졌나? 한 25코인 나올 줄 알았는데.'
[환전한 물건은 거래소에 귀속되며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계속하시겠 습니까? (승인/거부)]
'승인!'
그러자 코인 계좌에 환전액이 더해 졌다.
"이때는 골드를 좀 더 쳐주던 시절 일지도? 뭐, 그럴 수 있지."
시장 상황에 따라 물품의 가치는 변한다.
전생의 에른은 이를 이용할 수 있 을 거라 생각했었다.
'좋은 매물이 없으면 어때? 그래도 충분히 이득 볼 수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각 세계마다 값어
치는 천차만별로 다르다.
이계에선 값싸지만 이곳에선 비싼.
이곳에선 굴러다니지만 이계에선 희소한.
그런 물건들만 골라서 사고팔고를 반복하다 보면 금세 줄어든 창고를 채우고 영지는 부유해질 줄 알았다.
'근데… 거래소가 그걸 가만 놔둘 정도로 녹록하지 않았지.'
싸게 사서 베싸게 판다.
말이 쉽지 시세 차익을 노리지 못 하게 하는 다양한 장치가 있었다.
특정 물건의 경우 거래량이 제한되 어 있다거나, 수수료를 세게 먹인다 거나.
거래 등급이 낮을수록 제약이 많았다.
등급을 올리려면 실적을 쌓아야 하 는데 실적을 쌓으려면 등급이 높아 야 하는.
그런 딜레마.
하루 종일 거래 목록만 쳐다보고 잽싸게 거래를 한다 해도 이득을 보 는 날이 더 적었는데, 그런 날에도 결국 손에 떨어지는 건, 고작해야
몇에서 많아 봐야 십 몇 코인일 뿐 이었다.
"이거 괜찮군."
판매자 목록을 뒤지던 에른의 시선 이 한곳에 꽂혔다.
-하트스톤 : 하급, 중급 마나석 판 매 중입니다. 낮 시간엔 광산에서 일하므로 제때 확인 못 할 수도 있 습니다.
마나석은 지금 에른에게 가장 필요
한 물건이었다.
전생의 에른은 괜찮은 기사 정도는 됐다. 죽기 몇 달 전에는 '꽤나 괜 찮은' 수준까지도 올랐었고.
그런데 16세 시절은?
냉정흐], 기사 지망생 급도 안 되는 약골이었다.
허약한 신체, 부족한 마나량.
전자는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꼭 필요하지만 후자는 돈만 바른다면 얼마간 폼을 되찾는 게 가능했다.
에른의 머릿속에는 3급 이상의 깨
달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 다.
'여긴 밤이긴 한데… 확인하려나 모르겠네.'
각 세계마다 시간이 달라서 저쪽도 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대화를 걸어 봤다.
조금 기다리자.
삐빅!
[하트스톤님이 대화를 수락하였습
니다.]
대화창이 만들어졌다.
에른이 입을 열자 그의 말이 번역 되어 상대방에게 떠올랐다.
-에른 : 안녕하세요? 마나석 파신 다고 해서.
-하트스톤 : 예. 제가 운영하는 광 산에서 생산한 질 좋은 마나석입니 다.
그때.
하트스톤이란 닉네임이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뭐지?'
활성화 표시인 것 같아 그쪽을 터 치하니 대화창 위에 다른 창이 하나 더 떴다.
[닉네임 : 하트스톤
종족 : 인간
접속 장소 : 하계, 316호 지구.
거래 등급 : Level 2
혼의 위상 : 부유한 자산가.
보유 코인 : 9800
거래소 리포트 - 노예들의 고혈을 짜내 부를 일군 광산 사업가. 이득 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다. 조심하도 록 하자.]
'...'?,
에른의 얼굴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 다.
왜 하트스톤의 상태 정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는 것이고 거래 소 리포트라는 건 또 뭔지?
3년 동안 차원거래서를 썼어도 이 런 건 본 적이 없었다.
-하트스톤 : 하급은 개당 5코인, 중급은 20코인에 모시고 있습니다.
-에른 : 보통 얼마 하나요?
-하트스톤 : 적정가죠. 이거보다 더 받는 판매자도 많습니다.
띠링!
알람이 울렸다.
[현재 채널의 마나석〈하급)의 평균 거래가는 3코인, 마나석(중급)의 평 균 거래가는 12코인.]
[현재 채널의 마나석(하급)의 거래 량은 많음, 마나석(중급)의 거래량은 보통.]
'이건 또 뭔...?'
알 수 없는 현상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당황스럽지만, 지금은 거래 중이다.
거래를 끝마치고 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알람이 사실이라면… 하트스톤, 이 교류자도 거짓말쟁이군.'
적정가라면서 두 배를 올려 팔고 있으니,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가 없 다.
'그렇다고 물량이 적은 품목도 아 니고 말이지.'
딱히 실망스럽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믿을 만한 교류자라는 건 온순한 맹수와도 같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트스톤 : 어떤가요? 합리적이 죠? 저희 광산의 마나석은 순도 높 기로 유명합니다.
-하트스톤 : 아래쪽으로 걸치는 중급, 하급이 아니라 위쪽으로 갈락 말락 한데 아깝게 못 미친 품질이란 말이죠. 후회하실 일 없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에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에른 : 2〜3코인, 11〜12코인 하 는 걸 그 가격 받으니. 최소한 품질 이라도 좋아야지. 안 그래?
-하트스톤 : 무… 뭐요? 이거 큰 일 날 거래자네. 내가 파는 가격이 면 싼 편이구만. 무슨 근거로 그딴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에른 : 근거? 근거는 거래소가 알려주겠지. 사기로 신고해 보면 답
이 나올 테니까.
-하트스톤 : 사기? 뭐, 사아기?
하트스톤은 돌변했다.
-하트스톤 : 그래! 비싸게 파는 거 맞다. 팔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 게 생각해야지. 하계 놈 따위가. 나 아니면 마나석을 어디서 구해?
-에른 : 지도 하계인이면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군.
— 하트스톤 : 나... 난... 이*니이: j
당황한 하트스톤의 반응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아까 그 정보, 설마 진짜인가?'
-하트스톤 : 아, 걍… 사기 싫으면 말아. 얼마에 팔 건 내 마음인 거 고. 백날 신고해 봐라. 그게 먹히나.
거래를 파투 낼 분위기였다.
에른의 말이 빨라졌다.
-에른 : 잘못된 시세 정보를 고지. 그것도 고의로. 윗급에 걸치는 품질 이라고 했나? 당신 같은 사람들 잘 아는데… 100% 허위, 과장 정보일 테고. 이 역시 거래소에서 제재하는 행위지.
지금까지 수많은 교류자들에게 당 하고 또 당해온 에른이다.
정교한 설계로 큰 거 한 방을 노 리는 놈, 가짜 정보로 사람 홀리는 놈, 처음부터 끝까지 언변으로만 조 지는 놈....
호구짓도 3년을 하다 보니 풍월을 읊게 됐다.
속보이는 거짓말이나 하는 피라미 사기꾼쯤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는 그였다.
-에른 : 어떻게, 악성 거래자로 분 류돼서 거래 정지 당해보고 싶나?
-하트스톤 : 어....
할 말을 잃은 듯 메시지가 올라오 지 않았다.
-에른 : 왜 말이 없어? 그럼 뭐, 신고하러 가야겠군.
-하트스톤 : 아니, 손님. 성격도 급하셔 라.
하트스톤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 왔다.
-하트스톤 : 사실 말이죠…. 요즘 광산의 채산성이 너무 떨어져서요.
-하트스톤 : 광부들이 임금 올려 달라고 어찌나 파업을 해대는지. 달
라는 대로 주고 나니까 적정가에 팔 아선 남지를 않아요.
-하트스톤 :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요.
-에른 : 노예들이 감히 파업을 한 다고? 정말 끝도 없이 거짓말을 하 는군.
-하트스톤 : 그, 그걸 어떻게?
-에른 : 됐어, 이 거래 안 흐L 신 고나 하러 가련다.
-하트스톤 : 잠, 잠깐만요! 반값!
특별히 반값으로 쳐 드리겠습니다. 제발 신고만은…!
-에른 : 흐음.
반값이면 하급 2.5코인, 중급 10코 인이다.
평균 거래가가 3코인, 12코인이라 고 하니, 괜찮은 가격이 맞기는 했 다. 하지만 문득,
'계속 몰아붙여 볼까? 더 후려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간, 역으로 책을 잡힐 수도 있었다.
-에른 :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중급 두 개, 하급 두 개 줘봐.
-하트스톤 : 예, 예..
하트스톤이 거래창을 만들었다.
[하트스톤님과의 거래가 시작됩니 다.]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여전히 책을 형상화한 홀로그램.
왼쪽 페이지는 에른이, 오른쪽은 상대방이 보낼 물건 목록. 이런 식 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에른〉
-25 코인
〈하트스톤〉
-마나석(하급) : 2개
-마나석(중급) : 2개
[수락 버튼을 누르면 거래가 진행 됩니다. 상대방이 수락하지 않을 경우 거래가 취소됩니다.]
에른은 오른쪽 페이지로 손을 올렸 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네 개의 마나 석
이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거래소가 어련히 하자 품목을 걸러 내 주기는 한다만, 그래도 직접 봐 야 믿을 수 있었다.
-마나석 (하급)
소량의 마나가 깃든 광물. 재활용 할 수 없다.
-마나석 (중급)
일정량의 마나를 저장하고 있는 광 물. 재활용할 수 없다.
"나쁘지 않군. 수락."
하트스톤도 수락한 것 같았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거래 결과〉
지불 : 22.5코인
구입 : 마나석(하급) 2개, 마나석
(중급) 2개.
'왜 22.5코인?'
이상한 현상이 끊이질 않는다.
특별히 해가 되는 건 아니고, 오히
려 도움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하트스톤 : 거래는 만족스러우셨 나요?
-에른 : 반값이라고 해 보}야 평균 가보다 살짝 싼 정도인데 뭐.
-하트스톤 : 신고는… 안 하실 거 죠?
에른은 악덕 교류자를 단죄한다거 나 사기 행각을 더 이어가지 못하게 한다거나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차원 거래는 속고 속이는 치열한 뒤통수의 장이다.
'이 인간 하나 정지시킨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
그보다는, 오래오래 벗겨 먹는 게 더 남는 장사였다.
-에른 : 앞으로도 이 가격에 팔기 로 하면.
-하트스톤 : 예? 그건 좀....
그띠L
['정신없는 정산'의 효과가 적용됩
니다.]
:: 캐시백- 3코인을 받습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용을 읽은 에른의 표정이 변했 다.
"이건 설마?"
정신없는 정산…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급히 대화창에서 나왔다.
'에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에른은 거래소 메뉴 중, [VIP샵] 카테고리로 들어갔다.
두근.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 다.
새로운 창이 떠오르고, 내용을 읽 는 순간.
두근두근-
더욱 거세지는 심장 박동. 리스트의 각 항목은.
>오늘도 출석 체크 (Lv. Max)
>인벤토리 확장 (Lv. Max)
>흐름 파악 (Lv. Max)
>프로모션의 프로 (Lv. Max)
[>가격 보조 (Lv. Max)
>에누리를 누리리 (Lv. Max)
>제로 커미션 (Lv. Max)
>정신없는 정산 (Lv. Max)
>섭리의 눈 (Lv. Max)
>정보의 비대칭 (Lv. Max)
'미친.…"
순간, 벼락 맞은 것처럼 정수리가 찡하고 울렸다.
충격은 전율이 되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바르르르!
손끝은 물론이고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에른의 목소리 역시도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5 화]
에른은 정신없이 리스트를 훑었다.
커진 눈, 떡 벌어진 입.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믿을 수 없어 계속해서 다시 봤다.
상하, 좌우, 그 역순으로도.
그리고 또다시 몇 번이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거래소의 [VIP샵].
평생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전생의 에른은 이렇게 생각했다.
'좋기는 좋아. 그건 분명한데… 코 인이 썩어 넘치는 사람만 살 수 있 다는 게 문제지.'
예컨대 [오늘도 출석체크]란 상품 의 경우.
이 특전을 구입하면 하루 1번, 공 짜 코인이 주어진다.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연속 출석을 달성하면 보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다.
에른이 기억하기로 레벨 1 특전은.
'1, 2, 5… 10코인. 5일 차부터 다 시 1코인부터 시작이고.'
하루 평균 4.5코인이 주어지는 셈 인데 이것만 보면 좋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가격이… 2000코인? 그쯤 됐었 지.'
어림잡아 계산해 보면, 1년 3개월 이 지나야 겨우 수익이 발생하는 셈 이었다.
이것도 꼬박 개근했을 때의 얘기 고, 바빠서 며칠 빼먹다 보면 그만 큼 손해를 보게 된다.
VIP샵의 특전은 다 이런 식이었다.
분명 좋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 젠가는 투입한 코인 이상을 뽑아낼 수 있긴 하지만 그 '언젠가'가 다 굉장히 먼 미래였다.
특전 레벨을 올리면 올릴수록 장기 적으로 이득이나, 그만큼 더 비싸지 고 회수에 필요한 기간은 그 이상으 로 늘어났다.
'레벨 1만 해도 2000코인인데… 그게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저 코인을 턱턱 낼 수 있는 사람 이 굳이 특전이 필요하기는 할까?'
항상 이런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뭐, 뭐지 대체… 왜 다 레벨 맥스 인 건데?"
뺨을 꼬집어 봤지만 꿈은커녕 현실 이었다.
VIP샵의 10대 특전이 죄다 개방되 어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전부 레벨 최대치 로.
지불한 코인의 15%를 돌려받은 것은 [정신없는 정산]의 효과.
25코인 대신 22.5코인을 지불한, 10% 할인 혜택을 받은 것은 [에누 리를 누리리]의 효과.
구매할 물품의 거래가와 거래량을 알 수 있었던 건 [흐름 파악] 덕분 이었고.
마지막으로 하트스톤의 상태 정보 와 거래소 리포트가 제공된 것은 [섭리의 눈] 특전이었다.
'잠깐… 그럼 환전액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도?'
[제로 커미션 (Lv. Max)]
-거래소에 지불하는 모든 수수료 가 0이 됩니다.
에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0대 특전이 전부 MAX라니!
각 특전의 레벨 하나하나가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코인의 가치 를 지녔다.
지금 당장은.
['오늘도 출석체크' 1일 차 보상!]
:: 10코인을 받았습니다.
'10코인 들고 시작했던 게 이 특전 덕분이었군.'
출석 보상 10코인+할인 효과 2.5 코인+캐시백 3코인+수수료 이득 5 코인?
다 더하면 20코인쯤 이득 본 정도.
'섭리의 눈'과 '에버리지 측정' 덕 분에 싸게 거래했으니 그것도 쳐줘 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30코인이나 되나 싶 은 정도다.
물론 30코인이 적은 금액은 아니 지만, 이 특전들의 가치가 그 정도 에 불과할까?
멀리 내다보면, 수천, 수만, 수십만 코인....
'아니, 수백만도 가능하지!'
스멀스멀 번져가는 소름의 정체 는...
'돈독이 오른다, 막 을라!'
에른의 왼쪽 눈동자가 푸르게 번득
였다.
금화 무더기가 온몸으로 쏟아진다.
코인 잔액을 확인하면 줄지어 선 '0'이 자신을 반긴다.
그것으로 구매할 수 있는 수많은 물품과 아이템들.
온갖 이미지가 마구마구 떠올랐다.
찌르르!
가라앉은 줄 알았던 전율이 다시 에른의 온몸을 감쌌다.
'이거면…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횡재다.
단발성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뽑아 먹을 수 있는 미친 행운.
왜 이런 정신 나간 특전이 주어진 것일까.
에른은 자신의 상태 정보를 봤다.
[사용자 ID : [S]UserOOOsss]
"이 [S]가, 슈퍼의 S였던 건가? 아 니면 스페셜? 슈프림?"
뭔진 몰라도 좋다는 의미임에는 틀 림 없었다.
시작부터 초초 VVVIP 계정인 것 이니.
기분이 묘해졌다.
전생에는 늘 재수가 없었는데.
시간을 역류하고 나니 운수가 트인 것일까?
'이러면 충분히, 비벼볼 만하잖아? 아니...
해볼 만한 수준을 넘어섰다.
에른이 고개를 들었다.
전생의 암울한 기억들이 뇌리를 스 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나름 자신을 했지만 10대 특전까지 주어 졌으니 거기에 날개를 단 셈이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빨라지겠 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골치 아픈 고민이 아니다.
갑자기 생긴 다양한 가능성 때문에 선택지가 너무 많아진, 행복한 고민 이었다.
에른은 속으로 외쳤다.
'인벤토리!'
그러자 [인벤토리] 카테고리의 하 위 메뉴가 떠올랐다.
[보유 물품]
[보관]
[관리]
[추출]
에른은 관리 메뉴를 눌러 인벤토리
정보를 봤다.
[인벤토리 Lv. 1]
-저장 용량 (4/1000)
-인테리어: 싸리문, 눅눅한 지하실
(주의! 물품이 손상될 수 있음)
'1000? 뭐야, 이 무식한 수치는?'
VIP 특전, [인벤토리 확장]의 효과 였다.
맥스 레벨을 찍으면 저장 용량이
1000% 증가한다.
그러나 특전을 받아도 인테리어는 여전했다.
저장 용량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테 리어가 좋아야 다양한 물품을 보관 할 수 있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인벤토리' 글자에 집중하자 다음 과 같은 메시지가 떴다.
[레벨을 올리시겠습니까? 필요 코 인 200.]
'이건 나중에.'
올리긴 올려야 하지만 어차피 200 코인도 없고, 당장은 우선순위가 밀 렸다.
[보유 물품]으로 들어가니 방금 구 입한 물품 리스트가 보였다.
-마나석(하급) : 2개
-마나석(중급) : 2개
여기서 해당 품목을 선택하고 얼마 나 꺼낼지 개수나 양을 지정하면,
물품을 이쪽 차원으로 가져올 수 있 다.
에른은 그렇게 했다.
각각 2개씩 보관된 마나석을 다 꺼냈다.
은은한 빛을 내는 하급과 중급 마 나석.
얼핏 봐서는 별 차이 없다고 느껴 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크기도 그렇고 밝기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중급 마 나석이 우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안에 든 마나의 양과 질 도...
에른은 하급 마나석을 양손에 쥐고 마나호흡을 시작했다.
스틸가드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마 나호흡법인 [강철의 숨결]이었다.
예전에는 이름만 간지폭풍이고 실 제로는 이름값 못 한다는 평가가 지 배적이었다.
하지만 라제칸의 손을 거친 뒤로는 놀랍도록 개량되어 강철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무서운 폭발력을 자랑하는 스틸가드의 비전.
에른도 어릴 때부터 이 호흡법을 익혀 왔다.
5성에서 벽을 느껴 상위 경지로 올라가진 못했지만.
눈을 감고 마나의 행로를 따르자 전생의 깨달음과 노하우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17년은 긴 시간이지만, 에른에게는 고작 하루에 불과했으니.
아버지 레바단은, 자식들을 공평하 게 대한 편이었다.
에른도 처음 강철의 숨결을 전수받 을 당시에는 작은 형이나 큰 형 못 지않은 지원을 받았다.
다양한 등급의 마나석고}, 대자연의 기운을 담뿍 머금은 약재 등.
'밑 빠진 독이라는 게 알려진 뒤로 는 지원이 뚝 끊겼지만.'
그때부터는 형들이 먹다 남은 찌꺼 기 정도만 그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자력으로
올라간 3급의 경지였다.
'같은 3급이어도 지원 몰빵 3급과 내 3급은 깊이에서부터 차이가 나 지.'
그 밑 빠진 독 시절을 상징하는 게 있다.
바로 심장 한쪽에 딱딱하게 뭉친 마나 덩어리.
온전히 흡수되지 못한 마나가 경질 화되어 몸 안쪽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해할 수도 없었다.
지원해 주면 뭐 하나, 제대로 소화
도 못 하는 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드러낼 수 없었던 서운함.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한탄.
오늘, 그 응어리를 전부 풀어버릴 생각이었다.
토독, 토도도독....
마나석의 기운을 빌려 힘껏 부딪치 자 마나 덩어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 다.
그와 함께, 마나석에서 발하는 빛 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깜빡거리던 하급 마나석은 곧 빛을 잃고 무가치한 돌멩이로 변해 버렸 다.
'양념은 쳐 놨고.'
에른은 바로 중급 마나석을 양손에 쥐었다.
보다 강력한 기운으로 덩어리를 두 드리자 곧 반응이 왔다.
쏴아아아—
물꼬가 트였다.
전생의 에른이었으면, 어렵사리 마 나를 풀어놨다 해도 다룰 줄 몰라
다시 경질화됐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다르지! 편법 없이
올라간 3급이라고!'
에른은 거센 마나의 흐름을 무리 없이 컨트롤했다.
스으으읏-
심장으로 모여든 마나가 사지백해 로 퍼져 갔다.
마나가 다니는 길, 마나 로드.
16세 에른의 몸은 마나 로드가 거 의 개척되어 있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심장 주변으로 몇 가
닥 오솔길이 나 있는 그런?
마나 수송의 기능을 간신히 해내기 는 하지만, 폭이 좁고 노면이 울퉁 불퉁해 시늉만 내는 수준이었다.
'싹 다 밀어 버리고 새 길을 깔아 주마!'
그것도 사륜마차가 동시에 오고갈 수 있는 큰길로.
에른은 전생의 경지를 순식간에 회 복해 갔다.
시작과 동시에 강철의 숨결이 3성 에 이르렀다.
3성이면 기사 지망생은 벗어나는 수준이다.
어디 시골 남작령 같은 곳이라면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곧 4성의 벽도 넘어 버렸고.
'조금만 더 하면 5성...
문득, 에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등에 업은 마나 덩어리의 추진력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걸 느낀 것이
다.
시원하게 슥슥 밀고 나가던 마나가 급격히 힘을 잃고 느릿느릿해졌다.
에른이 눈을 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관문만, 마지막 관문만 넘으면 되는데… 아무래도, 마나석을 더 구 해야겠어."
지금도 나쁘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최대한 힘을 되찾는 게 낫다는 판 단.
당장 무슨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겠
으나, 미리 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 수 있는데 당연히 해야지. 그 게 맞는 거 아니야?'
에른이 손짓하자 차원거래서가 앞 으로 날아왔다.
이제는 눈 안으로 들어와 버린, 그 만이 볼 수 있는 투명한 책.
그 위로 손을 얹으니 책이 펼쳐지
면서 다시 차원거래가 시작되었다.
하트스톤과의 대화가 아직 이어지 고 있었다.
-에른 : 이봐 사기꾼.
-하트스톤 : 또 왜요?
-에른 : 그래도 완전 사기꾼은 아 닌가 본데? 마나석, 나쁘지 않았어.
-하트스톤 : 그러게 내가 뭐랬어 요. 윗급에 걸치는 품질이라고....
-에른 : 또 또 과장. 그 정도는 아 니지.
-하트스톤 : 그 얘기 하려고 다시 온 겁니까?
-에른 : 아니. 좋은 물건 맞으니까 더 사고 싶다고.
-하트스톤 : ...?
에른은 하트스톤에게서 중급 2개를 추가로 구매했다.
물론 아까와 같은 금액으로.
[에누리를 누리리]의 할인 효과와 [정신없는 정산]의 캐시백 효과가 적용되었지만, 그렇게 해도 남은 잔
고는 고작 5코인 남짓이었다.
오늘 화끈하게 40코인이나 썼다만, 후회는 없었다.
써야 할 곳에 쓴 것이었다고 생각 했다.
고오오오-
고요 속에 파묻힌 침실.
그러나 마나 흡수를 시작한 에른의 몸 안에서는 격랑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번쩍!
에른이 눈을 떴다.
만족스러운 눈빛.
두 눈에는 정광이 감돌고 전에 없 던 여유 또한 엿보였다.
"그럭저럭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겠 군."
강철의 숨결이 5성에 이르렀다.
이것만으로 전생의 경지를 모두 회 복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상당 부 분 복구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 80%… 아니, 70%쯤? 그러면, 3급 턱걸이 정도는 되겠군.'
마나량이 대폭 늘어나고 마나 로드 도 대부분 개척하긴 했지만, 아직 몸이 이래서.
전생의 검술 실력과 마나가 있어도 이를 펼칠 신체가 따라주지 않으면 효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몸 안쪽은 대강 해결을 했으니, 이젠 바깥쪽이다.'
빡센 훈련만이 답이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바닥난 코인 잔고를 채워야 하고
거래 레벨도 올려야 하고....
"바쁘다 버}빠. 할 일이 뭐가 이렇 게 많냐."
하지만 투덜거리는 에른의 입가에 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하루 지났을 뿐이다.
벌써 하나 해치웠으니 나머지도 금 세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전에...
상의 앞섶을 코에 가져다 대자 시 큼털털한 땀 냄새가 맡아졌다.
녹초가 될 정도로 훈련하고 돌아와
선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으 니.
그런 상태로 차원거래를 하고, 마 나 연공까지 이어가는 만행을 저질 렀다.
원래 자기 체취는 자기가 잘 못 맡는 법.
그런데도 느껴지는 강렬한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군.... 다음부턴 아무리 급해도 이러지 말아 야겠어."
[6 화]
예로부터 나쁜 소문은 한순간에 천 리를 가고 좋은 소문은 문밖으로도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막내 도련님이 달라지셨다!"
이 소식이 저택 전체로 퍼지기까지 는 무려 일주일이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처음은 하인들 사이에서.
"너도 봤지? 도련님이 나한테 웃어 주시는 거?"
"으응… 내 눈을 의심했다니까? 눈 비비고 다시 봤는데도 에른 도련님 이었어."
"난 난생처음으로 수고한다는 말도 들었어."
그다음은 가신인 기사들.
"요즘 훈련에 아주 열심이시더라. 얼마나 가겠어? 했던 게 벌써 일주 일이 지났지?"
"갑자기 독종이 된 게 신기하지. 그 훈련 좋아하시는 단장님이 질려 버리실 정도라니까?"
에른에 대한 영지 내의 일반적인 평가는.
검술 재능 - 3형제 중에서 꼴찌. 누나 두 명을 껴도 4등인데, 둘째 누이인 다렌은 검에 뜻이 없어 사실 상 꼴찌였다.
성실성 - 그런 주제에, 게으르고 훈련을 기피했다. 이 역시 가장 싹 수가 노랗다는 평.
인성 - 높으신 분들이 다 그렇지 만 에른은 특히 성격이 나빴다. 모 든 하녀가 담당하길 꺼려해서 신입
인 이젤이 그를 맡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재능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다른 부분들이 많이 나아지셨지.'
'정신 차리기엔 너무 어린 나이 아 니야? 뭔가 뜬금없다.'
'그러게. 인생의 단맛, 쓴맛, 똥맛 까지 다 보고도 정신 못 차리는 도 련님들이 어디 한둘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르지. 그래도 좋은 변화인 건 맞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다들이 부분에선 한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에른을 이미 놓아 버린 스틸가드 가였지만, 달라진 평판에 가문의 몇 몇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 다.
*
대련을 하시겠다구요?"
하파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에른의
진의를 살폈다.
장난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네. 결국은, 훈련도 실전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누구하고 대련을?"
하파엘의 시선이 기사단원들을 훑 었다.
저 중에서, 에른과 급수가 맞는 기 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삐를 깎는 수련과 끊임없는 마나 호흡 끝에 급수를 인정받고 서
임을 받은 사람들이다.
물론 지난 일주일, 에른도 뼈를 깎 는 노력을 하기는 했다.
기본 훈련을 빠뜨리지 않는 것은 물론, 추가로 기사들과의 훈련도 소 화해 냈다.
아직 균형도 잡히지 않은 몸으로, 버거운 게 대놓고 보이는데도 에른 은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하파엘에게, 그런 변화는 대견스럽 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견한 건 대견한 거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병사들 불러올까요?"
"병사를 이겨서 뭐 하게요? 난, 기
사가 되려고 훈련하는 거 아니었어
요?"
" O 으."
—.
하파엘은 난처해했다.
너무 저돌적으로 변하니 이건 또
이거대로 곤란했다.
'뭐, 장단만 맞춰 주면 되는 거니.' 하파엘이 기사 한 명을 지목했다.
"프라이."
"넵!"
"상대해 드려. 대신 왼손만 쓰고, 마나는 사용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러자 에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프라이, 몇 급이야?"
"넷? 전 6급...
"흐음.…"
에른보다 너덧 살쯤 많아 보이는 나이에 바짝 든 군기.
6급이면, 기사 지망생을 갓 벗어난 견습 중의 견습이다.
아직은 한참 배워야 하는 급수인 데.
'와… 내가 6급한테 핸디캡이나 받 아야겠나.'
하파엘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붙 여 주는 게 당연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른은 목검을 들고 프라이와 마주 보고 섰다.
"단장님 지시는 신경 쓰지 마. 최
선을 다해라."
"옛? 하, 하지만."
"내가 위야, 단장님이 위야?"
"그, 그게...
스틸가드의 핏줄이지만 내놓은 자 식인 에른.
기사단을 이끄는 지휘관이며 견습 기사들에게는 교관이자 롤모델이기 도 한 하파엘.
누구 말을 따라야 할지는 고민할 것도 없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에른이었
다.
"대답 못 하네? 이 땅이 스틸가드 가 아니었던가? 이야… 영지 꼴 잘 도 돌아간다."
"아, 아닙니다! 명을 따르겠습니 다!"
씨익.
에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새파랗게 어린 견습 기사쯤이야, 몇 마디 말로 제압하는 건 일도 아 니었다.
"대신, 무리다 싶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무리는 무슨. 자, 간다!"
대련이 시작됐다.
쑤우웅!
목검이 공기를 갈랐다.
프라이는 방어에만 급급했다. 봐주려는 게 너무 티 나는데.
"공격해!"
"공격…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진심이 되도록 만들어 줘야지.'
에른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딱! 따닥! 따악-!
살벌한 타격음.
마나가 실리자 목검은 진검만큼 위 험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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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치 않다는 걸 느낀 프라이.
그도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한편, 하파엘은 프라이에게 에른을 맡긴 뒤로 단원들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다.
'대련은 하고 있나?'
문득 궁금해진 그가 에른 쪽을 봤 다.
"...프라이, 이 새끼가 미쳤나!"
하파엘의 노호성에 기사들의 시선 이 두 사람을 향했다.
"뭐지?"
"목에 핏줄 선 거 보}. 쟤 왜 저 래?"
"저 고문관 새끼! 도련님 죽이려고 작정했나."
하파엘은 얼른 달려가 프라이를 제
지하려 했다.
"멈춰라!"
하지만 그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격돌이 일어났다.
콰앙!
"으, 으윽…!"
그런데 놀랍게도, 엉덩방아를 찧으 며 넘어진 사람은 에른이 아닌 프라 이였다.
척!
에른은 쓰러진 프라이의 목덜미에 목검을 가져다 댔다.
"내가 이겼지?"
"...졌습니다."
하파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괜, 괜찮으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다친 건 프라이 인데요. 괜찮아?"
"예, 예...
프라이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벙찐 얼굴이었다.
하파엘이 그에게 소리쳤다.
"너! 제정신이 있는 놈이야, 뭐야?
왼손만 쓰랬더니 양손에 마나까지 써?"
"죄… 죄송합니다."
프라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에른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죄송할 거 없어. 단장님, 내가 고 집부려서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자칫 다치기라도 하셨으면."
'그럴 일 없는데.'
에른은 속으로 웃으면서 프라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줬다.
' 잠깐?'
하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이상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장의 기사들 또한 전부 동일한 의문을 품었다.
'도련님이 어떻게 프라이를?'
견습이라곤 해도 기사는 기사다.
집안의 골칫덩이가 간단히 이길 상 대가 아니었다.
가장 현실적인 설명은.
"프라이 저거 사회생활 잘하네. 나 이도 어린 게."
"접대 대련이지 뭐. 자존심도 없 나?"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전력을 다하는 척하면서 티 안 나 게 져 준 것임이 분명했다.
"벌써부터 처세술을."
"나중엔 기사단장도 되겠어?"
여기저기서 비꼬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한껏 냉소를 띄우는 그 때.
"과연 그럴까요?"
훈련장 한구석에서 청아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하다 는 표현이 있다.
이 목소리야말로 그런 소리가 아닐 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음성의 주인은, 첫째 누나 카렌이었다.
"나오셨습니까, 아가씨."
하파엘이 예의를 갖췄다.
기사들 또한 머리를 숙였다.
에른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 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장남 키르 안과 함께 레바단이 가장 신뢰하는 자식이며 재색겸비에 문무겸전, 갓 성인이 된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 을 만큼 현명하고 사려 깊었다.
영지의 모두가 그녀를 존중하고 우 러러 봤다.
단순히 스틸가드란 이름 때문만이 아닌, 그녀 스스로가 발하는 아우라 같은 게 있었다.
"프라이 경은 6급 기사죠?"
과분한 호칭에, 프라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습니다. 아가씨."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리셨죠. 단장님께서 놀라실 만큼."
"죄송합니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에요."
카렌이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져줬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마지막 순간에 마나를 거둬들였다는 건데. 프라이 경을 무시하는 건 아
니지만요. 일반적으로, 6급 기사가 가능한 마나 운용이 아니에요."
듣고 보니 그렇기는 했다.
'그래도 말이 돼야 말이지. 아무리 상대가 프라이라고 해도. 에이...
막내 도련님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떡하나 에른이 그 수준이 아닌 것을.
스틸가드 3대를 통틀어 가장 검에 소질 없는, 안타까운 재능의 소유자 다, 에른은.
하파엘뿐 아니라 다른 모두도 설마
그게 에른의 실력일 리가 있나 하는 반응이었다.
'다 보인다, 이것들아.'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에른은 굳이 어필하지 않았다.
6급 꺾은 게 뭐가 대수라고.
이런 걸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웃으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접대라고 했나…? 그럼, 나와 보 지? 주군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대련할 사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면 개쪽, 이겨도 손해인 대련을 어느 누가 하려고 할까.
"진심이야? 강직함, 눈치 보지 않 는 소신… 기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 아닌가? 기사단에 그런 기사가 한 명도 없다고?"
그렇다면 이쪽에서 정하는 수밖에.
에른이 둘러보자 단원들이 눈을 피 했다.
'누가 좋을까… 실력을 다 드러내
는 건 좀 그렇고.'
그가 기사 한 명을 가리켰다.
"미 하일."
"예... 예?"
"나하고 하자, 대련."
"그, 그게...
미하일은 말려 달라는 듯 하파엘과 카렌을 번갈아 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재밌겠네요."
" 으음...
카렌은 눈을 빛내고, 하파엘은 탐 탁지 않은 듯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마나를 쓰는 대련이라면 목검으로 도 위험합니다. 박투 대련으로 하시 죠."
"좋아요. 그 정도는."
에른은 죽상이 된 미하일과 마주섰 다.
"잘 부탁해."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제대로 해. 대충하는 거 느껴지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알겠습니다."
두 번째 대련이 시작됐다.
하파엘은 에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전부 보려는 것이었다.
역시나 선공은 에른의 몫.
그가 달려들자 미하일이 살짝 물러 났다.
거리 싸움.
박투술의 기본이다.
상대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고, 내 간격은 내주지 않는다.
'미하일이 검술은 약해도 권각에는 소질이 있지. 6급이지만, 박투로는 5급하고 붙어도 밀리지 않을 거야.'
영지의 모든 기사를 지도해 본 하 파엘이라, 기사들의 약점과 강점을 다 꿰고 있었다.
그런데.
스스슷!
에른이 몸을 날리자 미하일은 너무
나도 쉽게 간격을 내줬다.
리치 차이가 미하일 쪽이 월등해서 이렇게 간단히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후웅! 후우웅!
에른이 연이어 주먹을 뻗어내자 미 하일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계속 벌어졌다.
"어어어어?"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에른에게 미하일이, 아무것도 못 해보고 얻어맞기만 하고 있었다.
"단장님이 보시기엔 어때요? 미하 일 경도 막내를 봐주는 걸까요?"
" O "
트...
하파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쯤 되면 한 번의 움직임만 봐도 허실을 파악할 수 있다.
놀이나 접대의 차원이 아니었다.
'진짜잖아...?'
미하일은 이를 악물고 에른의 공세 에 저항해 보지만.
빠각! 빡! 퍼억!
정신없이 휘둘리며 계속해서 유효 타를 내줬다.
압도.
이건 압도다.
에른은 미하일을 애 다루듯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최소 5급 수준이라는 건데. 어떻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파엘도, 대련을 지켜보는 다른 기사들도.
당연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일주일 사이에 5급이 됐을 리는 없잖아.'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왜 손가락질 받으면서까지 그런 짓을?'
'그리고, 굳이 지금 진면목을 드러 내는 이유는?'
복잡해진 하파엘의 머릿속.
"에른...
카렌은 그보다 더 복잡 미묘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쿵!
미하일이 쓰러졌다.
"우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훈련장을 뒤흔 들었다.
기사들은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했 다.
프라이를 꺾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 른 분위기.
에른이 보인 움직임과 예상 밖의 실력에 순수한 감탄을 보내는 단원 들이었다.
'이런 반응… 처음이군.'
에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이전 생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스포트라이트.
벌써부터, 전생과는 다르다는 느낌 이 확 든다.
흡족해하는 그에게, 카렌이 가까이 다가왔다.
턱
에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카렌 이었다.
그녀는 남동생의 상아색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그에게만 들리게끔 속삭 였다.
"지금까지 널, 오해하고 있었구나."
" 누나...?"
[7 화]
카렌의 눈동자는 깊고도 맑았다.
언제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에른에게 첫째 누나는 마냥 어렵기 만 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왠지 모를 거리 감이 느껴졌고 나중에는 말도 안 섞 을 정도로 멀어지고 말았다.
"...왜 그랬던 거니?"
"응? 뭐가?"
"듣지 않아도 됐을 말들… 참고 견 디느라 힘들었을 텐데."
형들의 반도 못 따라가는 막내, 구 제불능 망나니 도련님.
에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수 식어들은 점차 잔인해졌다.
레바단의 실패작, 스틸가드의 수치, 모든 걸 망친 개차반 영주.
너무나도 다정한 카렌의 목소리에 에른은 말을 잇지 못했다.
17년 전으로 돌아온 이후, 카렌 누 나를 몇 번 보긴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온 기를 느낀 것은, 그녀와 대판 싸우 고 연을 끊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물론 그때의 카렌은 지금의 카렌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거의 5년 만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였으면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 거야. 큰누나가 돼서는 버팀목이 되
어 주기는커녕 방치하기만 했구나."
"아니."
에른은 고개를 저었다.
"억울할 것도, 괴로울 것도 없어.
뿌린 대로 거둔 것일 뿐이니까."
그렇다는 건, 일부러 망나니 칼춤 추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온 것은 아 니라는 뜻이었다.
무언가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의 생 활을 청산하고, 오늘에서야 180도 달라진 면모를 내보인 것인데.
왜? 라는 물음보다는 동생이 어떻 게 이 모든 걸 견뎠을까 하는 생각 으로 그녀의 심장 부근이 저릿해져 왔다.
"피나는 노력을 해왔겠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카렌도 스틸가드의 핏줄이다.
가문의 전통이라 강철의 숨결을 전 수받지는 못했지만, 그것 외에는 레 바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호신 목적으로 익힌 정도인데도 어 지간한 풋내기 기사보다 훨씬 낫다 는 평.
레바단은 카렌이 여자라는 것을 안 타까워하곤 했다.
'네가 사내아이였으면 스틸가드가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을 텐 데...
물론 여자라고 해서 강자가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성별의 차이는 근력과 골격 정도의 차이일 뿐, 이쯤은 마나라는 신비로 운 에너지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여성 중에서도 유명한 검호나 특급 기사는 얼마든지 존재했고.
문제는, 그걸 도와줄 강철의 숨결 을 익힐 수 없다는 것.
이 마나호흡법은 스틸가드 가문의 밑천이자 뿌리를 이루는 것이라 딸 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했다.
자이온 대륙의 문화가 그랬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성을 따르 고, 소속 가문 또한 친정에서 시가 로 옮겨진다.
그래서 흔히 쓰이곤 하는 출가외인 이라는 말.
다른 가문으로 유출될 것을 우려하 여 생긴 전통이었다.
그 때문에 카렌이라는 안타까운 케 이스도 나오는 거지만....
그만큼 재능 있는 그녀가 판단하기 에, 방금 본 에른의 실력은 최소 5 급 수준.
정식 기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견습 은 충분히 벗어나는 실력이다.
열여섯에 5급!
무시할 만한 성취가 아니었다.
에른의 절치부심, 묵묵히 노력해
온 나날들… 이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는 카렌이었다.
'뭔가 조금 찔리네.'
감동한 듯한 카렌의 눈빛을 보니 더욱 그랬다.
요즘 꽤 열심히 훈련하기는 했지 만, 남몰래 피나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차원거래서의 도움을 받아, 앉은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 낸 성과라는 걸 알게 된다면 카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미안해, 에른.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 내가 미안하지."
이건 진심이었다.
카렌은 대련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에른은 이를 모르지 않았 고.
프라이를 자극해 마나를 사용하게 만든 것은, 다분히 그녀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카렌이 자신을 달리 보기 시작한다 는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지.
'카렌 누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 면, 내가 너무 쓰레긴가?'
그녀는 선입견을 품지 않는다.
편견 없이 사물과 사람을 바라본 다.
자기가 프라이를 꺾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연한 태도.
그리고 그 안에 숨은 의미를 파악
해 내는 깊은 통찰력.
셀 수 없이 많은 미덕을 갖춘 사 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에른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긴 한데.'
그런 그녀조차도 이것만큼은 알 수 없었다.
열여섯 어린 동생은 에른의 겉껍질 일 뿐, 그 속은 33년 묵은 능구렁이 라는 사실.
어찌 보면 카렌을 이용하는 것이지 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방 법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의도한 대로 됐는데… 이다음이 문제란 말이지.'
*
그날 밤.
저택의 저녁 만찬 자리.
상석에는 영주이자 백작인, 레바단 이 앉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그의 자 식들이 나이순으로, 왼쪽으론 가신
들이 직위 순으로 자리했다.
"오늘은 특별히 메뉴가 좋군."
레바단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40대를 넘었지만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특별히 강렬한 인상도 아니고, 오 히려 문사 같은 느낌이 더 강한 그.
그러나 더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 가 느껴졌다.
그가 말을 시작하면 아무리 사소한
화제일지라도 온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메뉴가 좋다고? 무슨 뜻이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비싼 음식만 축낸다 이건가?'
가신들은 머리를 굴리며 주군의 혼 잣말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파악될 리 없었다.
숨은 의도라는 건 없었으니까.
카렌이 말했다.
"제가 주방장에게 특별히 부탁했어 요. 곧 있으면 에른이 떠나잖아요?"
"음, 벌써 그렇게 됐던가."
레바단의 서늘한 시선이 잠시 식탁 끝에 있는 에른을 향했다가 정면으 로 돌아왔다.
"일단, 들지."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영주에게서 눈을 떼고 식사를 시작했다.
'뭐야, 한번 쳐다보고 끝이라고?'
이러면 계산이 어긋나는 건데.
에른이 당황해하는 찰나, 레바단이 다시 이쪽을 봤다.
"카렌에게 들었다. 훈련 중에 기사 를 꺾었다고."
'휴...
다행이었다.
지난 일주일은, 물론 몸을 만들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 순간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천금 같은 기 회.
이제, 몇 마디 말로 아버지를 만족 시켜야 한다.
형제들과 가신들이 일제히 에른을
쳐다봤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꿈틀거렸다.
에른은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기사를 꺾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 죠. 가벼운 목검 대련일 뿐인데요."
겸손, 겸양.
아버지가 좋아하는 코드다.
'표정 관리, 아무렇지 않은 척.'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 자 레바단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내가 듣기론 그게 아니던데. 진검 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실전과 다름 없었다고 하더군."
에른이 머리를 긁적였다.
"진심으로 상대해 달라고 하긴 했 죠. 무의미하잖아요. 적당히 하다가 일부러 져주는 그런 건. 기분만 좋 지 남는 것은 없고."
" 호오...
치기 어린 말.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누구 입에서 나오냐에 따라 반응은 천차만별이
된다.
어린 막내가 하기엔 딱 알맞아서 레바단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감 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뭐, 6급 견습이라던데요. 그렇지, 카렌?"
별거 아니라는 듯 덧붙이는 맏형 키르안에게서 숨길 수 없는 못마땅 함이 엿보였다.
에른이 아닌 카렌에게 묻는 것만 봐도.
키르안은 에른을 좋아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건 에른도 마찬가지였다.
'큰형 답군.'
카렌이 대답했다.
"내가 보기엔 5급은 족히 되겠던 데. 열여섯에 5급이면 보통이 아닌 거잖아. 그렇죠, 단장님?"
그녀가 맞은편을 봤다.
하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주 빠르다고 할 수 있지 요."
키르안이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지."
"그러는 오빠도, 5급 올라간 건 열 여덟 살 때잖아."
"...열일곱 겨울이다. 그리고 난 정식으로 급수를 딴 건데, 무슨 주 먹질 한 번 이긴 걸로."
키르안은 비교 자체가 모욕적인지 얼굴 가득 불쾌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곧, 속내를 숨기고 슬쩍 아 버지를 봤다.
기대하는 듯한 표정.
영웅급 앞에서 6급 운운이라니.
일반급의 정점에 있는 하파엘조차 도 레바단에 비하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그럴진대 6급이니, 5급이니 하는 것은 소꿉장난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레바단은 키르안이 기대했 던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대단하구나."
입가의 미소는 흡족한 웃음으로 바
뀌었다.
도통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그이지 만.
'주군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군.'
가신들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
기대치 0이었던 막내가 100, 아니 그 이상을 보여줬으니 제아무리 목 석같은 레바단이라도 대견한 마음이 들 수밖에.
레바단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갑자기 마음을 다잡은 이유가 무
엇이 지?"
"저도 이제, 열여섯이니까요."
이 또한 준비한 답변이었다.
가신들과 형제들은 고개를 갸웃거 렸다.
열여섯.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숙 하다기에는 많이 모자른 나이다.
스물여섯이니까요, 라는 대답이었 으면 납득이 됐을 텐데.
어째 10년은 이른 느낌이....
그러나 레바단만은.
"열여섯이라.... 열여섯."
그의 표정이 변했다.
레바단이 흠칫하며 물었다.
"왜 열여섯이지?"
"스틸가드에서, 위대한 영웅담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라 지 않은 아이는 없죠."
"네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전장에 나선 나이가… 지금 네 나이군."
과연, 아버지라면 단번에 알아챌 줄 알았다.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맞서지는 못할망정 제 앞 가림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셋, 둘… 하나.
'바로 지금.'
이쯤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오 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레바단의 입은 일자로 다 물어진 채였다.
'반응이 왜 이러지?'
심기가 불편해질 만한 부분이 있었 나?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무슨 말로 만회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 차, 레바단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의아한 눈빛들.
레바단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에른은 얼떨결에 아버지의 손을 맞 잡았다.
아직 부드럽고 작은 에른의 손과 달리 거칠고 강인한 손아귀였다.
' 헛!'
뜨거운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 다.
에른은 반사적으로 마나를 끌어올 려 대응했다.
'...갑자기 왜 전투 악수를?'
[전투 악수]는 맞잡은 서로의 손에 마나를 흘려 힘을 겨루는 행위다.
결투보다 깔끔하고, 크게 다칠 위 험이 없었다.
무엇보다, 승패는 서로만 아는 것 이라 망신살 뻗치지 않아서 좋았다.
'테스트 같은 건가.'
에른은 레바단이 불어넣은 기운과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다.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훨씬 강력한 마나.
하룻강아지가 사자 앞에서 재롱부 리는 격이다.
애초에 성립이 안 되는 대결이지 만, 아버지의 의중을 읽어야 한다.
에른은 치고 빠지며 아버지의 마나 를 상대했다.
철저히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치고 빠지며 기운을 견제했다.
"흠!"
이 감탄사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 다.
레바단이 마나를 거뒀다.
'...눈치 채셨을까?'
아버지를 만족시키는 것도 중요하 지만 3급의 경지, 그 이상의 노련함 이 있다는 것은 숨기는 편이 좋았다.
"흐음."
레바단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이렇게 늘었지? 내가 알기
생략한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끝을 흐려준 게 배려라면 배려였 다.
레바단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말도 안 되게 늘었어. 하루 이틀? 아니 한두 달로도 부족하다. 그렇다 는 건."
레바단의 눈이 깊어졌다.
"막내가 겉도는 거 같아 마음이 무 거웠는데 조금 안심이 되는군. 스틸가드를 떠나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에른을 인정해 주는 말.
키르안은 얼굴을 찌푸렸고 가신들 은 의외라는 눈으로 에른을 봤다.
오로지 카렌만이 예상했다는 듯 미 소를 보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막내에게는 거의 신 경을 못 써줬지."
레바단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에른을 낳고 아내가 죽은 이후로 의식적으로 막내를 멀리해 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왜인지 오늘에서야.
그 사실이 갑자기 가슴 한구석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라고 할 수도 있겠지 만. 이별 선물 겸해서, 막내에게 뭔 가를 해주고 싶구나. 혹시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느냐?"
'됐다!'
이걸 끌어내기 위한 일주일이었다.
에른은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르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있기는 한데...
"한데?"
모두가 에른의 입만 쳐다봤다.
[8 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전부 놀란 기색을 감 추지 않았다.
주군이 이렇게까지 선심을 쓰는 것 도 흔히 있는 일이 아닌데, 그 대상 이 다른 사람도 아닌 에른이라니.
에른이 입을 열었다.
"음… 아니에요. 어차피 들어주시 지 않을 것 같고."
그러자 레바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아비가, 흰소리나 하는 사람이 란 말이냐?"
대놓고 불편한 기색.
모두 숨을 죽였다.
"아뇨,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죠. 알지만, 무리한 부탁인 것 같아서 요."
스틸가드에서 레바단이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나.
얼마나 어려운 부탁이길래?
레바단이 흐음하며 나이프를 내려 놨다.
"편히 말해 봐라. 어지간해선 다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면, 마나에 대고 맹세해 주 실 수 있나요?"
레바단의 얼굴이 굳었다.
마나의 맹세.
기사라면 꼭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약속이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대자연의 미움을 사 더 이상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가신들과 형제들의 표정 또한 동시 에 굳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급 냉각되었다.
'이건 좀 오버였나?'
괜히 욕심부렸다가 귀중한 기회만 날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조마조마한 기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오는 그때.
"하하하핫!"
레바단이 시원스레 웃어젖혔다.
"우리 막내가 사람 애타게 하는 재
주까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오늘 여러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는구나. 이렇게까지 나오면 궁금해서라도 들 어 봐야지."
"아버님!"
키르안이 목소리를 높여 보지만, 레바단은 듣지 않았다.
그가 엄숙히 선언했다.
"나, 스틸가드의 주인 레바단 스틸가드. 마나에 맹세하오니. 도의에 어 긋나지 않고 내 능력이 허락하는 적 당한 선에서, 내 아들 에른 스틸가드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고자 한
다."
마나에 맹세까지 하다니.
조건을 여럿 붙이기는 했지만 말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바단 스틸가드 의 맹세이니까.
"자, 말해 보아라."
꼴깍.
다들 침을 삼키고 귀를 쫑긋 세웠 다.
"제 부탁은...
에른이 입을 떼자 식당이 바늘 떨 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 로 조용해졌다.
"...가문의 비고를 이용하게 해 주세요."
" 뭣?"
키르안이 벌떡 일어났다.
가문의 비고.
스틸가드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는, 그리고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기 위 한 공간.
오직 영주만이 이용할 수 있는 장
소였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에른, 너 미쳤어?"
키르안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그럴 만했다.
다음 대의 영주는 아무래도 장남인 그일 것이라 벌써부터 소유 의식이 있었다.
"왜 말이 안 되지?"
"가문의 전통입니다. 단 한 사람, 가문의 주인 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관례가 있기는 하다만, 절대 적인 것은 아니지. 전통은, 비고의 통제권은 온전히 가주에게 있다는 것뿐이다. 나도 어릴 적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비고에 들어간 적이 있었 고."
"그것과는 경우가...
레바단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경우가 다르다? 나는 되고 막내는 안 되는 합당한 이유라도?"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았지만, 막내 는 아니지 않나.
아니, 아닌 걸 넘어서 며칠 전까지 만 해도 에른하면 안될 놈의 상징이 자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칠 강력한 후보였다.
'그딴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도 비고에 못 들어가 봤는데!'
키르안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고.
"이미 마나를 앞에 두고 맹세까지 했다. 마나의 맹세를 저버려야 한다 는 것이냐?"
싸늘한 목소리에 더 할 말이 없어 졌다.
"그, 그건 아닙니다...
도의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고 레바 단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도 아니다.
무리한 부탁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하고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에른 이 자식...! 그래서 마나의
맹세를 해 달라고 했구나.'
키르안은 그의 막냇동생을 노려봤 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 안쪽에 이런 음흉함이 숨어 있을 줄이야.
에른이 씩 웃었다.
'봤어, 형? 이렇게 하는 거야.'
입 모양으로 말하자 키르안의 표정
이 잔뜩 일그러졌다.
*
스틸가드 가의 심처.
가문의 비고 앞.
에른은 아버지와 단둘이 이곳으로 왔다.
덜컥.
대대로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마법 열쇠는 그 생김새마저 철저히 비밀 에 부쳐 위조가 불가능했다.
레바단은 열쇠를 구멍에 꽂아 넣고 돌렸다.
삐리리릭.
비고를 둘러친 보안 마법이 해제되
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규칙은 간단해. 가장 안쪽 방은 들어가선 안 된다. 그리고, 뭐가 됐 든 물건 하나만 가지고 나올 수 있 다. 이걸 어긴다면."
"알아요. 전부 뺏기고 영영 비고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는 거. 징계는 기본이구요."
"잘 아는군. 갔다 오너라."
"같이 안 가시나요?"
레바단은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내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기만 하 겠지. 시간 충분히 줄 테니 편하게 고르고 와라."
"아… 네, 아버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 는 않았다.
비고 안은 에른에겐 익숙했다.
'내가 알던 거 하곤 좀 다르긴 한 데.'
강산도 변할 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왔으니 그야 당연한 것.
아직 가세가 기울기 전이라 비고는 귀중품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명검이며 상급의 검술서, 마나석 상자 등, 기사라면 눈 돌아갈 물건 들이 널린 것이며.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은보화들도 보였다.
'이 정도면 마법사를 얼마나 자주 불러야 하는 거지… 거의 분기에 한 번씩?'
비고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전생엔 비용을 아끼느라고 보관 마 법의 효력이 약해졌는데도 정비를 하지 않았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던 것은 에른이 영주직을 물려받기 전부터다.
해서 그에게 비고란 항상 먼지만 풀풀 날리는 공간이었는데.
'정말 꾸준히도 몰락해 왔었군.'
에른의 시선이 비고 안쪽을 향했 다.
여기까지만 해도 전생과는 급이 다 른 스틸가드의 위상을 느낄 수 있지
만, 진짜배기는 다 저 안에 있었다.
아버지가 출입을 엄금했던 비고 안 의 비고.
들어갈 수 있다면 훨씬 수월해질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른은 고개를 돌리고 벽 쪽으로 향했다.
"이쯤 있었지, 아마?"
그가 찾는 것은 차원거래서였다.
바깥 비고의 가장 구석진 곳.
전생에 상자와 상자 사이의 틈에서 허연 먼지를 뒤집어쓴 차원거래서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에른은 우연히 찾은 그 책이 자신 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것이라 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없다?'
차원거래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억이 잘못됐나 싶어 다른 쪽 벽 으로 가 찾아보고, 검술비전을 모아 놓은 책장을 뒤져도 봤지만 그 어디
에도 차원거래서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몇 가지 가설이 세워졌다.
1. 차원거래서는 자기가 모르는 사 이에 한 번 옮겨졌었다. 이를테면, 안쪽 비고에서 바깥쪽 비고로. 지금 시기에는 안쪽 비고에 보관되어 있 을지도 모른다.
2. 현재 누군가가 차원거래서를 사 용 중일 수도?
에른의 이맛살이 오므려졌다.
둘 다 지금으로서는 검증할 수 없
었다.
비고에 온 첫 번째 목적은 차원거 래서가 있나 확인하고, 있다면 거래 기능을 손상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엔 가지고 나와 태워 버리기 위 함이었다.
'이건 멋모르고 쓰다간 독이 된다. 혼자만 먹고 죽는다면야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자칫하다간 차원거래에 중독된 가 주 때문에 가문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
그 산 증인인 에른.
이건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결말 이었다.
물론 그 안에 숨은 다른 마음도 있기는 했다.
'차원거래서는 나만의 것이다. 행 여나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제대로 된 사용법을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 차원거래.
비밀을 유지하고, 우위를 쭉 가져 가기 위해선 실물 차원거래서를 없 애야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다 골랐느냐?"
문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 다.
에른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 아직입니다!"
"슬슬 결정을 내리거라."
"예, 잠시만요!"
여기 온 목적이 차원거래서에만 있 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찾는 데 시간을 다 써 버려 서 결정을 내리기는커녕 골라둔 것 도 없었다.
아쉽지만, 차원거래서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앞으로 17년… 아니 자기가 영주 가 된 시점으로 시기를 좁히면 14 년.
그 사이에 물밑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났는지는 에른이 알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전생에, 차원거래서는 결국 비고 한구석에 처박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
그만큼 책의 진가를 알아보기가 어 렵다는 말이다.
'100년 동안 겨우 두 명이지?'
에른이 아는 한은 그랬다.
1342호의 지구의 차원 교류자는.
할아버지인 라제칸 스틸가드.
그리고 자신, 에른뿐.
'이 부분만큼은, 전생대로 흘러가 길 바라는 수밖에.'
끼이 익.
에른이 반쯤 열린 문을 젖히고 나 오자 레바단이 물었다.
"고민이 꽤 길더구나. 뭘 골랐지?"
"별로 특별한 건 아닙니다."
에른이 손을 쑥 내밀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작은 순 금상이었다.
꽤나 묵직한, 그래도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
"...영웅상?"
번쩍이는 금빛 갑주를 두른 영웅이 긴 칼을 높이 들고 있다.
그 영웅은 다름 아닌 라제칸.
제국으로부터 나바로를 지켜낸 공 로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물건이었다.
겨우 천 개만 만들어진 터라, 일반 적인 골드 시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라제칸은 왕으로부터 수백 개의 영 웅상과 드넓은 영지, 그리고 스틸가드의 수확물에 대한 영구적인 면세 권을 하사받았다.
보잘것없는 시골 영지가 어엿한 백 작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라제칸이 세운 업적 덕분이었다.
그는 그렇게 가문을 크게 일으키 고, 이 중흥을 대대손손 지속하기 위해 값진 물건들로 비고를 가득 채 웠다.
영웅상은 비고에서 가장 흔하게 찾 아볼 수 있는 물건.
그러나 어지간한 보물들보다 나았다.
"하나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고 하 셨죠."
외비고의 보물들.
인벤토리에 싹 다 쓸어 담아 오고 싶은 유혹을 억누르느라 혼났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티 안 나 게 추가로 한두 개쯤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순간에 불과했 다.
아직 비고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
아버지의 물건을 흠치고 싶지 않았 을 뿐더러 그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거만큼 값나가는 게 없어서요."
"...겨우 금덩이 때문에 비고에 출입하겠다고 한 것이냐?"
레바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아버지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거면 왜 마나의 맹세까지 부 탁했던 것이지?'
'고작해야 순간의 이득에 불과한 것. 거기에 눈이 멀어서야...
쯧쯧 혀를 차는 레바단.
에른은 해명할 필요를 느꼈다.
"겨우… 라고 하기에는 큰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이깟 것 때문에 살인까지 벌어지는 세상이니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황금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 다는 거죠. 그 안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기도 하구요."
"이 영웅상이면 검이나 마나석을 사고도 돈이 남겠지요.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온 것뿐입니 다."
레바단은 여전히 이해 안 간다는 표정.
"물건을 사고팔고 할 시간에 수련 에 매진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기사의 표본이었다.
검과 충의를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
고 그 외 나머지는 하잘것없는 것으 로 취급했다.
기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특급, 그 중에서도 영웅급의 기사이니 그 정 도 자부심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른이 입을 열자 레바단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기가 지론을 펴는데 찍소리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은 스틸가드에 존재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내가?
"얘기해 봐라."
"정말로 검에 소질이 있다면, 말씀 하신 대로 시간 낭비일 수 있겠지만 요.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 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이쪽이 시간 절약일 수도 있어요."
정상에 오르기 위해 정직하게 암벽 을 타고 올라가는 타입이 있다면, 산길을 빙 돌아서라도 어떻게든 꼭 대기에 도달하는 타입도 있는 법이 다.
얼핏 후자가 비효율적으로 보이지
만, 타고난 근력과 지구력이 부족해 무슨 짓을 해도 암벽을 오를 수 없 다면 그게 더 효율적인 것이었다.
"위험한 발상이군."
정통 중의 정통파인 아버지다.
이런 발상은 생전 해본 적이 없었 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레바단은 물끄러미 에른을 바라보 다가 비고의 문을 닫았다.
"넌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이 일로, 아버지에게 겨우 따낸 점
수를 왕창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말을 덧붙였다가 실망감만 더 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영웅상은 순풍에 돛 단 듯한 효과 를 내줄 것이다.
비고에 들어온 두 번째 목적은 코 인 확보.
실물 차원거래서의 존재 여부를 먼 저 살핀 두1, 상황 봐서 코인화 가능 한 보물을 들고 나온다… 라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급하게 고르느라 이게 가장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는데.'
바깥쪽 비고에 어떤 물건들이 보관 되어 있는지 대강 아는 에른이었다.
영웅상 정도면 베스트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다음 순위 정도는 될 것이 다.
방으로 돌아온 에른은 곧장 차원거 래를 활성화시켰다.
식사하러 가기 전, [자동거래]로 올려놨던 거래가 성사되어 있었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 졸린눈동자님으로부터 106.5코 인을 받았습니다.]
:: 쿠폰할인이 최고님으로부터 205 코인을 받았습니다.]
[보유 코인 : -36 - 275.5]
[9 화]
[자동거 래]는 내내 차원거 래 서를 들여다볼 수 없을 때 유용한 기능이 다.
판매가를 정해 채널에 올려놓으면, 먼저 그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로 물건이 넘어간다.
구매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거래의 꽃인 흥정을 할 수 없어 다소 매력이 떨어지는 방식.
하지만 거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는 이런 기능 이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진다.
에른은 일주일 내내 자동거래를 이 용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친 뒤, 그늘에 서 땀을 식히며 거래가 성사된 것을 확인하는 즐거움.
예전의 강철 같은 신체를 회복해 감과 동시에 계좌에 보유한 코인 또 한 늘어가고 있으니 일석이조가 따 로 없었다.
"역시 자동거래가 편하긴 편하단 말이지."
에른은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던 졌다.
포근포근한 두께감과 부드러운 촉 감이 전신을 감쌌다.
자동거래도 편하지만 이것도 말도 안 되게 편하다.
누워서 차원거래를 할 수 있다니!
실물 차원거래서를 쓸 때는, 누운 채로 화면을 보면 글자가 안 보여 도저히 거래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인터페이스가 눈 안쪽 에 들어와 있으니까.
자세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른의 왼쪽 눈동자가 좌상단을 향 했다.
[섭리의 눈]의 또 다른 효과.
처음에는 상대방 정보 보는 기능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챘 다. 보이지 않아야 할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품목 : '금' 판매 제한까지
(997.5/2500)]
:: 한도 리셋까지 10일 남았습니다.
:: 다음 거래 등급까지 필요한 거 래량 (2005/3500)
이것들이다.
판매 제한은 물품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거래소가 채택한 규 제 방식이었다.
거래 레벨에 따라, 품목에 따라 한 도는 천차만별.
특정 품목이 판매 제한에 걸리면
그 채널에서는 판매할 수 없다.
거래소는 리셋 시기와 한도를 탄력 적으로 조절해 물품가를 안정시킨 다.
그 정확한 리셋 날짜와 한도는 아 무도 알 수 없는데.
'보인다. 나한테는.'
또한, 거래 등급을 올리는데 필요 한 조건도.
이 역시 비공개 정보이지만 [섭리 의 눈]의 레벨 맥스 효과로 에른에 게 공개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사고판 거래량은 총 2005코인.
앞으로 1495코인만큼 사고팔고를 더 해야 0계 채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분간은, 코인을 버는 것도 중요 하지만 거래량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이를 위해 에른이 고른 품목은 바 로 금.
이쪽 세계의 언어로 하자면 골드.
금은, 전 차원에서 희소한 물건이
었다.
'최소한, 0계에서는 그렇지.'
다양한 차원에서 화폐로 쓰이고 있 는 것이라 가장 거래량이 많고 시세 가 쉽게 요동치지 않는다.
0계 채널의 금 시세는 에른이 사 는 자이온 대륙에서 흔히 쓰이는 금 화 단위인 골드를 기준으로 했을 때, 1코인=10골드 정도.
깔끔하게 떨어져 계산이 쉽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단조로운 패턴 을 반복했다.
1.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출석 체크] 보상을 받고.
2. 가진 코인 전부를 동원해 금을 구매.
3. 구매량 전부를 같은 가격, 자동 거래로 채널에 올려놓는다.
4. 훈련 도중, 휴식 시간마다 확인 하며 2와 3을 반복.
언뜻 보기엔 그랬나 보다 할 수 있지만, 이 루틴을 교류자들이 알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것 이다.
'저거 멍청이 아니야? 뇌 주름이 덜 펴졌나?'
'코인을 아주 길가에 뿌리고 다녀 라. 그럴 거면 나나 주지.'
판매자가 거래를 성사시킬 때마다 거래소는 판매 금액의 일부를 떼어 간다.
차원 교류자들이 거래소에 분개하 는 주된 이유.
그러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지불 할 수밖에 없는 '수수료'라는 놈이 다.
원래 같으면 제 살 깎아 먹는 바 보짓이겠으나 [제로 커미션] 특전을 누리는 에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해도 오히려 코인이 불어 나지.'
오늘로 차원거래를 시작한 지 일주 일째다.
지금까지 [오늘도 출석체크]로 받 은 공짜 코인은.
10+15+20+25+30+35+50=총 185
코인
첫날 보상과 사재를 털어 환전한 코인은 마나석 사는 데 거의 다 썼 고, 그 뒤로 따로 환전한 게 없으니 원래대로라면 180코인을 가지고 있 어야 했다.
하지만.
[정신없는 정산]
[에누리를 누리리]
[가격 보조]
이 세 가지 특전 덕분에 딱히 하 는 것 없이 거래량만 불리는데도 계
속해서 이득을 봤다.
[가격 보조]는 15% 캐시백과 10% 할인에 더한 또 하나의 가격 특전이 다.
[가격 보조 (Lv. Max)]
-물품 구매시 코인 부족분을 거래 소에서 보조해 줍니다.
-보유한 코인의 30%까지 지원됩 니다.
-이후 보조한 금액만큼 마이너스 잔액으로 표시됩니다.
간단히 말해, 100코인이 있으면 130코인으로 당겨 쓸 수 있다는 뜻 이었다.
[에누리를 누리리]의 효과를 받으 면 구매가 144코인인 물건까지 살 수 있다.
물론 지원받은 30코인이 공짜는 아니고 [보유 코인 : -30]이 되어 채무를 해결하기 전까진 물품 구매 를 할 수 없게 되지만.
그러나 여기에 [정신없는 정산]이 적용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거래가 끝난 뒤, '지불에 사용된'
코인의 15%인 19코인을 환급받으 면 남은 채무는 고작 -10.5코인!
세 가지 특전은 이렇게 세 개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가만히 앉아서 거의 100코인을 벌어들였다.
100코인이면 1000골드.
잘 나가는 기사의 1년 봉급이 그 쯤 된다.
"실탄도 이제 쌓일 만큼 쌓인 거 같은데."
이계의 교류자들이 흔히 쓰곤 하던
표현.
자금을 왜 탄에 비유하는지는 모르 겠지만 입에 착착 감겨서 에른도 곧 잘 쓰곤 했다.
275코인, 그리고 손에 든 영웅상.
'일단 이것부터 코인 화해야겠군.'
에른은 먼저 환전 카테고리를 눌러 차원 저울을 불러냈다.
뿅!
접시 위에 영웅상을 올려놓으니 바 늘이 돌기 시작했다.
[예상 환전액 : 115코인]
에른의 표정이 굳었다.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서렸다.
"이런 날강도들이 다 있나."
못해도 140〜150코인은 나갈 물건 이다.
영웅상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나
나바로에서의 희소성.
라제칸을 흠모하는 이들이 눈에 불 을 켜고 수집하려 한다는 점 등은
다른 차원의 놈들이 요만큼도 인정 해 주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후려쳐?'
에른이 눈에 힘을 주자 영웅상이 붉게 물들어 갔다.
[흐름 파악] 특전이 발동된 것이 다.
안개처럼 뭉게뭉게 번지는 이펙트 에 손을 가져다 대자 알람이 울렸 다.
띠링!
[환전할 물품(=순금 2.5kg)의 0계
평균 거래가는 150코인.]
[환전할 물품의 0계 거래량은 풍
부.]
"내가 골드 거래를 일주일 내내 했 는데… 역시 150코인쯤 된다니까. 거래소 놈들, 40코인은 어디다 팔아 먹었냐!"
[흐름 파악] 때문에 이제 더는 환 전을 못 할 것 같았다.
원래 거래소가 이것저것 많이 떼간 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장의 흐 름이 한눈에 들어오니 놈들이 얼마 를 남겨 먹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
이건 교류자의 주머니를 터는 정도 를 넘어 간을 쏙쏙 삐먹는 수준이 다.
'40코인이면 400골드. 400골드가 뉘 집 개 이름이야?'
400골드면 암살자도 살 수 있다.
귀족은 못 죽이겠지만, 줄 없고 빽 없는 평민이라면 100골드만 주겠다 고 해도 손에 피 묻히려는 인간들로
대기열이 길게 늘어설 것이다.
비고에서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떠 오른다.
그것도 평소 생각을 많이 순화 시 켜 표현한 것이었다.
'영웅상 가지고 살인? 영웅이 든 칼만 부러뜨려도 아비규환이 일어날 텐데.'
자신을 지탱해 주던 모든 것을 잃 었을 때의 사나운 인심, 세상의 쓴 맛을 겪을 만큼 겪어본 에른이었다.
어릴 때는 무심코 물처럼 썼던 골
드가 실은 피같이 소중한 것이었음 을 전생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40코인이면 절대 장난이 아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직접 거래를 하 기로 했다.
-에른 : 2.5kg 순금상 판매 중! 분할 없이 150코인에 넘깁니다. (자 동)
자동거래를 걸어놨으니 알아서 판 매가 될 것이다.
거래가 성사되길 기다리는 동안, 가부좌를 틀고 마나호흡이나 하려고 하는데.
"아, 나 바본가."
문득 비고에서는 떠올리지 못했던 다른 가능성이 생각났다.
"차원거래서가 내 눈 안으로 들어 온 거잖아.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세 번째 가설은, 실물 차원거래서 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
제3의 인물이 가지고 있거나, 다른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거나.
이 두 가지 가능성에만 갇혀 있었 던 건 아무래도 14년이란 간극이 보통 큰 게 아니어서이리라.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시간 이니까.
'그렇다면 신경 안 써도 돼서 좋긴 한데...
현재로선 뭐라 확답을 내릴 수 없 었다.
애초에 차원거래서가 왜 자기 몸에 들어와 있는 건지도 모르고 있으니.
띠링!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는 그때, 알
람이 울렸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 마이더스트님으로부터 150코인 을 받았습니다.
:: 보유 코인 : 425.5
에른이 미소지었다.
"역시 금이야. 재깍재깍 팔리는군."
환전 안 하길 잘했다.
에른은 양미간을 오므렸다.
[섭리의 눈]이 발동되었다.
[품목 : '금', 판매 제한까지
(2497.5/2500)]
:: 판매 제한에 임박했습니다.
'이제 이 품목도 끝났군.'
환전 대신 거래를 선택해 손해 본 게 있다면 이거였다.
앞으로 2.5골드만 더 내놓으면 한 도 리셋 전까지 금을 판매할 수 없 게 된다.
물론 40코인을 포기할 정도로 큰 손해는 아니고, 다른 쪽으로 이득을 보기도 했다.
[다음 거래 등급까지 필요한 거래 량 (2155/3500)]
바로 거래량이 채워진 것.
'뭐, 여기서 뽑아먹을 건 다 뽑아
먹었지.'
어차피 얼마 안 가 한도는 꽉 찰 것이었고, 판매 제한이 걸리면 다음 물품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문득, 저번에 만난 교류자에 생각 이 미쳤다.
'말 걸면 있으려나?'
그 교류자란 다름 아닌 하트스톤이 다.
에른은 두둑히 쌓인 코인으로 마나 석을 살 생각이었다.
-에른 : 안녕, 사기꾼?
잠시 뒤.
-하트스톤 : 이게 돌았나, 누구한 테 사기꾼....
-하트스톤 : 앗. 그 손님이시군요.
-에른 : 그래, 난데. 마나석 좀 사 려고. 저번에 산 가격으로 살 수 있 지?
-하트스톤 : 그… 그건 좀. 반값으 로 판 건, 그때만 특별히 해 드린
거구요. 그렇게 팔면 저도 남는 게 없습니다.
-에른 : 내 앞에서 이빨 털지 말 아 줄래? 어차피 안 통하는 거 알 면서.
-하트스톤 : ....
-에른 : 반값이라 해도 시세 정도 지 무슨. 나도 거래 한두 번 해본 거 아니거든?
-에른 : 1, 2코인 더 싸게 판다고 해서 남는 게 없을 거면, 거래소에 올리지도 않았겠지.
-하트스톤 : 어, 음....
-에른 : 아니면, 너하고 했던 대화 기록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저분하 게 가 볼까?
-하트스톤 : 아, 아뇨… 무슨 그런 말씀을. 안 판다는 게 아니라요.
-에른 :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고작 호구 하나 홀리려고 했던 것 으로, 하트스톤이 영구 정지를 당한 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래소가 이런 사소한 일로 일일이
교류자를 퇴출해 왔다면, 채널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을 테니.
'그래도 형식적인 며칠 정지 이런 건 나올 법하니까.'
하트스톤은 1만 코인 가까이 보유 한 자산가다.
며칠 거래 못 해서 입는 손해에 비하면 몇 코인 싸게 파는 것쯤은 거기에 댈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물이 왜 잔돈푼에 연연하 는지 원.'
에른으로서는 이해 안 가지만, 하
트스톤이 그런 인간이라 약점 잡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트스톤 : 뭐… 얼마나 사실 건 데요?
-에른 : 중급 50개, 하급 45개.
-하트스톤 : 예? 뭘 그렇게 많 이…?
-에른 : 기왕 싸게 파는 거, 대량 구매 해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원래 도매가가 더 싼 법이잖아.
-하트스톤 :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만한 물량이 없어요.
-에른 : 얼마나 줄 수 있는데?
-하트스톤 : 반만 해서, 중급 25개 하급 20개로 하죠.
이것도 충분히 많은 양이기는 했 다.
하계의 마나석 시장에선, 하트스톤 정도면 큰손 축에 속한다.
-에른 : 콜.
-하트스톤 : 예, 거래하죠. 다만… 하나 약속해 주시죠.
-에른 : ...?
-하트스톤 : 여기까지만 하는 걸 로요. 언제까지고 이 가격에 팔수는 없잖습니까.
-에른 : 그러지 뭐.
에른이 씩 웃었다.
어차피, 하트스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영원한 호구로 남을 리는 없었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거래 결과〉
지불 : 270코인
구입 : 마나석(중급) 25개, 마나석
(하급) 20개.
[캐시백- 40.5코인을 받습니다.]
하트스톤과 거래를 마치자마자 에른은 구매한 마나석을 전부 채널에
올렸다.
이번에는 할인가가 아니었다.
0계 채널의 평균 거래가.
'마나석이면, 이렇게 팔아도 되지.'
하트스톤에게는 중급 10코인에, 하 급은 2.5코인에 샀지만.
[에른 : 마나석 판매합니다. 중급 12코인, 하급 3코인입니다. (자동)]
전생엔 좀처럼 하지 못했던 최고의
거래법.
싸게 사서 정가에 판다.
무조건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었다.
[10 화]
마나석은, 어느 차원에서나 귀한 물건이었다.
일부 마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낮은 기감의 사람들만 사는 세계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 곳이라면 돌멩이에 불과하겠 지만.'
그러나, 대다수 0계의 교류자들은 마나석을 필요로 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절반 정도가 팔
려 있었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 제스트님으로부터 75코인을 받 았습니다.]
:: 냉철상인님으로부터 45코인을 받았습니다.]
:: 샥스핀님으로부터....
:: 두족류는싫어님으로부터....
총 177코인을 벌어들였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중요한 의 스].
놓쳐서는 안 될 매일 아침 필참 이벤트!
당연히 [오늘도 출석체크]였다.
['오늘도 출석체크' 8일 차 보상!]
:: 70코인을 받습니다.
:: 보유 코인 : 443
'든든하군.'
출석 보상은 '연속으로' 출석 체크 를 했을 띠!, 받을 수 있다.
만약 오늘, 차원거래 시스템에 접 속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면 8일 차 보상을 놓치고 1일 차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70코인이 아닌 달랑 10코인을 받 게 되는 것이고 이어지는 후속 보상 도 사라지는 것이니까 무척 뼈아픈 손해를 보는 셈.
'뭐, 이제는 그럴 염려가… 없나? 없겠지?'
띠링.
그때, [메시지/친구] 탭이 반짝거리며 에른의 시선을 끌었다.
뭔가 하고 보니 하트스톤이 말을 건 것이었다.
-하트스톤 : 야, 이… 양심 없는 새끼야!
-에른 : ...?
-하트스톤 : 갈고리 치워라. 되팔 이 새끼 주제에. 싸게 넘겨줬으면 감사히 여기고 처먹든지.
-하트스톤 : 아니면 너네 세계에
서 처 팔든지 하면 될 걸. 그걸 채 널에 고대로 올리는 건 무슨 심보 냐?
-에른 : ???
어안이 벙벙해진다.
하트스톤이 좋아하진 않을 줄 알았 지만, 다짜고짜 욕을 들을 만한 일 인가?
-하트스톤 : 물음표 찍지 마, 새끼 야! 갈고리 처 부숴 버리기 전에!
'뭔 갈고리? 물음표? 이거?'
하긴, 생긴 게 갈고리하고 좀 비슷 하기는 했다.
음? 흠? 하는 갸웃거림을 읽고 차 원거래서가 미묘한 뉘앙스까지 전달 해 주는 것.
갈고리를 부수겠다는 말은.
'모가지를 꺾어 버리겠다는 건가? 심하네.'
그렇다 해도 무서울 건 없다.
지난 생애, 3년을 온전히 차원거래 에 쏟아 부으면서 느낀 게 많았다.
그중 하나.
상대방이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그 두 배로 높이는 게 좋다.'
교류자가 차원의 벽을 넘어 1342 호 지구로 찾아올 것도 아니다.
괜히 움츠러들면 이쪽을 호구, 그 것도 그냥 호구가 아닌 유약한 호구 로 보고 밑바닥까지 털어가려 할 것 이다.
-에른 : 이 오라질,, 악덕 사업주 쉐리가〜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쉬,,뿔!!!
-하트스톤 : 뭐, 뭐냐 그 말투는?
-에른 : 흐흐,, 왜, 욕 들어 처먹으 니까,, 기분,, 나쁘냐?
-에른 : 아직,, 시동도〜 안 걸었 어. 대굴빡에,, 썬더볼트〜 함 꽂혀,, 볼텨?!!
-하트스톤 : ....
-에른 : 싫다고? 그럼,, 모가지,, 360도로 돌려줄까?!! 쒸이〜 펄!
-하트스톤 : 그, 그만하지?
전생에 차원거래로 얻은 게 있다면 그나마 이런 것 정도.
다양한 차원의 다양한 존재들을 상 대하며 견문을 쌓았다.
어떤 막무가내 교류자가 이 가격엔 못 산다고, 이거 사기니까 신고하겠 다고 엄포를 놓으며 가격을 팍 후려 친 적이 있었다.
그거 진정시키느라고 진땀을 뺐었 는데, 그 특이한 말투가 아주 인상 적이었다.
그래서 한번 따라 해본 것이다.
'인간이 아니고 무슨 이종족이었 지? 아재… 아재로스라고 했었나?'
효과는… 신기하게도 있었다.
하트스톤은 벙찐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하트스톤 : 아, 아무튼! 너무하잖 아, 이건.
-에른 : 뭐가 너무해? 거래에 쓰 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했음 몰라. 우리가 그랬던가?
-하트스톤 : 그런… 적은 없지만.
상도의라는 게 있다고!
-하트스톤 : 같은 가격으로 팔았 으면 그럴 수도 있어. 근데 낮춰 파 는 건 매너가 아니지!
-에른 : 그건, 그냥 당신이 양심 없이 비싸게만 팔아서 그런 거잖이-. 난 적정가에 판 것뿐인데 뭐 어떡하 라고.
하트스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메시지로 찌질거리기나 하
는 거겠지.
에른은 대신, 역제의를 했다.
-에른 : 됐고. 기왕 이렇게 얘기 나누게 된 거, 거래나 하지?
-하트스톤 : 어제 더는 안 한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하트스톤 : 신고할 테면 하라고. 너도 협박으로 같이 신고 넣을 거니 까.
-에른 : 누가 깎아 달래?
아직 마나석이 꽤 남아 있기는 하 지만.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 동년배마법사님으로부터 12코인 을 받았습니다.
이 순간에도 마나석 판매는 이루어 지고 있었다.
재고가 다 떨어지기 전에 채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에른 : 적정가에 팔면 살게.
-하트스톤 : 적정가고 뭐고, 너하 고는 거래 안 한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에른 : 그러지 말고. 당신도 장사 꾼 아니야? 돈 벌 수 있는데 사적 인 감정이 거기에 개입한다고? 감 히?
에른은 킬링 포인트, '감히'를 덧붙
이며 속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라고 했던가?'
거래소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분명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하트스톤과 같은 인간들에게, 돈은 종교이자 신념과도 같은 것이니까.
-하트스톤 : 헛
깨달음의 한숨이 머나먼 차원을 건
너 에른에게도 전해졌다.
-하트스톤 : 그, 그렇군. 그 말이 맞다. 감히 사감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지. 좋다. 적정가라면, 얼마지?
-에른 : 내가 팔고 있는 가격 그 대로. 중급 12코인, 하급 3코인.
-하트스톤 : 얼마나?
현재 보유한 금액은 455코인.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
'657코인까지 당겨 쓸 수 있다… 그러면.'
-에른 : 중급 50개, 하급 19개
-하트스톤 : 너무 중급만 빼가지 말라고. 그만한 물량도 없어.
-에른 : 광산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트스톤 : 마나석이 땅 파면 그 냥 나오는 줄로 아는가 본데. 하급 몇 개만 캐려고 해도 근방을 다 헤 집어야 한다고.
-에른 : 잡설은 집어치우고, 그래 서 몇 개씩 팔 수 있는지나 말해.
-하트스톤 : 중급 25개, 하급 50 개.
하트스톤의 속셈이 보였다.
하계 채널에서 하급 마나석은 꽤나 풀려 있는 편이다.
중급은 그보다는 귀하고.
더 희소한 물품은 얼마든지 올려 받는 게 가능하니, 어떻게든 이득 보려고 딜을 치는 건데.
-에른 : 그러지 뭐.
에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난 빨리 팔아치울 거니까.'
거래량만 늘릴 수 있다면 상관없 다.
하트스톤과의 거래를 마치고 바로 판매글을 썼다.
-에른 : 마나석 특가! 기사, 마법 사, 무도가… 다 들어오시면 됩니다.
하급 2.5코인, 중급 11코인! 놓치면 땅 치고 후회합니다. (자동)
더 싸게 팔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에른은 정가에 사서 정가에 파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해 왔다.
이것도 일반적인 교류자들의 상식 을 벗어난 것이지만, Max급 10대 특전이 적용되는 에른은 더한 것도 가능했다.
1코인, 0.5코인 정도 싸게 판다고
하더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에른은 하급 마나석 두 개를 꺼내 양손에 쥐고 마나호흡을 시작했다.
이런 식의 수련은 기사들에게는 꿈 과도 같은 호사다.
비록 하급이지만, 하나에 2〜30골 드는 하는 비싸고 귀하신 몸이다.
일주일간 틈나는 대로, 마나석을 구해 이 호화로운 호흡법을 계속해 왔더니 전생에 도달했던 경지의 턱 밑까지 추격해 왔다.
'몸만 다 만들면, 어디 가서 꿀리 지는 않겠군.'
나이가 깡패다.
약관도 아직 까마득한 겨우 열여 섯.
홍안의 소년이 2급을 넘보는 3급 상위 수준이라면?
나바로는 물론이고 제국에서도 검 술 천재로 이름을 날릴 것이다.
'그래 봐야 무의미하지만.'
에른은 할아버지 라제칸이나 아버 지 레바단 같은 '진짜' 천재가 아니
다.
미래의 성취를 현재로 끌어왔을 뿐 인.
어릴 때 보면, 꼭 그런 애들이 주 위에 하나씩 있다.
또래 친구들을 아득히 앞지르는, 신동이라 불리는 엄청 조숙한 놈들.
그러나 옥석은 곧 가려진다.
단순히 초반 성장이 빨랐던 것뿐으 로 밝혀지는 케이스는 너무나도 많 았다.
에른 또한 나이가 들면 밑천이 드
러나고 말 것이다.
그 증거로, 이제는 강철의 숨결은 정체기에 이르러 마나석 빨을 세워 도 성취가 매우 더뎠다.
하지만....
에른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걸 위해서는 차원거래에 집중하 는 게 급선무.
마나호흡을 마친 뒤, 거래 상황을 보니 마나석이 1/3 조금 넘게 팔려 있었다.
할인해서 내놓았어도 에른에게 손 해는 없었다.
그가 소모한 것은, 메시지를 확인 하는 데 들어간 시간 정도.
희소식과 함께 뭔가가 같이 딸려왔 다.
-하트스톤 : 이거 도라이 아니야?
-에른 : ???
-하트스톤 : 갈고리 처 빠갠다고 했다. 돈이 썩어 넘치냐?
-하트스톤 : 왜 더 싸게 파는 건
데? 병신 같은 새끼! 머저리 같은 놈! 수수료는 생각 안 해?
상큼한 욕 세 바가지.
그러거나 말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돈 벌 시간도 모자라다. 상대해서 뭐 하나.'
그것도 있고.
에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지 않아서였다.
0계 교류자들의 코인 사정을 너무
후하게 평가했나 싶었다.
1코인 내린 정도로는 마구 달려들 지 않는 0계인들이다.
'...사이클을 더 빨리 돌려야겠 어.'
이전에 계산해본 바로, [정신없는 정산], [가격 보조], [에누리를 누리 리]의 삼신기를 활용하면 떼온 물건 가격보다 더 싸게 팔아도 이윤이 났 다.
그 선은 대략.
'75% 정도.'
이보다 싸게 팔면 제아무리 맥스급 특전을 지닌 에른일지라도 손해를 본다.
그걸 역으로 생각하면.
'25%까지는 마음껏 할인해 줘도 이득이라는 거지.'
원래는 수수료까지 생각해 더 낮게 잡아야 하지만 [제로 커미션]이 있 다.
그걸 모르는 하트스톤은 제 살 깎 아 먹기로 보고 에른이 제정신인지 의심하는 것이지만.
이보다 제정신일 수 없었다.
금 다음 품목을 마나석으로 정한 것은, 딱히 하트스톤을 의식해서는 아니 었다.
값지고, 귀중한 매물이면서 수요가 높은 물품.
그런 데다.
'제한량도 널널하니까.'
[품목 : '마나석(하급)', 판매 제한 까지 (55/350)]
[품목 : '마나석(중급)', 판매 제한
까지 (36/500)]
[한도 리셋까지 80일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