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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 22

* * *

"...라고 한다."

묘양사의 식당.

그곳에 모인 병사들에게 승주 스님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허. 그 스님.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건가 했더니."

"그런 이유가...."

병사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스님들이 익힌 '무예' 자체에 흥미를 가지는 녀석들.

"그 괴물은 또 뭐랍니까."

"얘기만 들으면 평범한 놈은 절대 아닐 것 같은데."

"...악마 같은 건 아니겠죠?"

장막 안의 '손'을 경계하는 녀석들.

그리고.

"...."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는.

전광일 상병까지.

사실.

내가 혼자서 판단했다면, 바로 절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도박을 하게 될지언정,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는 피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가는 건 좋지 않겠지.'

군단의 규모는 커져 가고 있으니까.

지금이야 나나, 민재 형 등.

몇몇 고참 병사들이 모든 일을 파악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지만.

점점 그런 단순한 체계로는 일을 해결해나가기 어려워질 것이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423대대 시절부터 함께한 놈들.'

말하자면 우리 부대의 간부 후보생들 같은 느낌이다.

언젠가 중요한 결정을 맡게 될지도 모르는 녀석들.

이번 일은 이 녀석들의 목숨도 걸려 있는바.

이 녀석들의 판단과 의견도 들어두고 싶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도박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합니다."

한 병사가 의견을 꺼냈다.

"저 산 위에 있느라 지상의 상황을 모를 때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만, 지상에 내려오고 보니 알겠더군요. 지금 우리 길드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최소한 몇 개월은 앞서가고 있다는 거."

그 말에는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거점조차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라면 모를까. 저 요새도 그렇고, 용아병도 그렇고. 우리가 당장 무너질 것 같지는 않거든요. 안정적으로 사람만 늘리고 레벨만 올려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도박을?"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녹색갈기]가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새가 생긴 뒤로는 그쪽도 우리를 함락하기 버거워할 테니까.

"그런 도박은 나중에 필요할 때 해도 되지 않을까요."

슬쩍 다른 병사들의 눈치를 살피자.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그 스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결국, 그렇게 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승주 스님 말입니다."

스님이라.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그 스님이 말한 대로라면, 언젠가 그 괴물이 찾아와서 살해당하게 되겠지. 아마."

"우리한테 그 녀석에 대한 정보를 넘긴 대가로 말입니까."

"...광일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광일이 이 녀석은 워낙에 순박한 성격이라.

죽음이 예정된 사람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뭐 그런 거겠지.

"승주 스님은 과거 일로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에게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 건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한 거였고. 스님께서 죽음을 각오하고 하신 일이야.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 자격은-"

"아뇨. 신 병장님. 제가 하려는 말은 그런 게 아닙니다."

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바라보자,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녀석.

"승주 스님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로 스님은 죽을 위기에 처한 셈입니다."

"일단은 그렇지."

"문제는 이 상황이 이번 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응?

"신 병장님은 믿을 수 있는 각성자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야... 다른 각성자들도 점점 힘을 키우고 있으니까. 우리만으로는 버거울 때 도움이 될만한 이들을 만들어 두는 건 나쁘지 않지."

"문제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인 이가 그 행동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위기를 알면서도 그냥 방치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우리는 신뢰를 잃어 버리게 되겠죠."

"...!"

그 얘기에.

나는 눈을 부릅뜨고 광일이를 바라보았다.

"당장 우리는 이 절의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만, 아직도 저들은 우리를 믿어도 되는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그 스님을 살리는 데 성공한다면...."

"성공한다면?"

"군단은 자신들에게 호의를 보인 이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전례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절의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도 있겠죠."

이 녀석.

그냥 순박하기만 한 놈인 줄 알았는데.

"승주 스님이 그 존재와 마주친 건 각성을 거치기도 전의 얘기입니다. 얘기만 들어보면 초월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도 과거의 인간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초인이죠."

전투 능력으로는 최고 수준일지언정,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낸 적은 드물던 전광일 상병.

"그놈도 물론 강하겠지만, 우리 군단도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놈을 찾아간 뒤, 어떻게든 무예를 얻어 내고, 동시에 승주 스님을 향한 위협을 막아내는 게 되겠죠."

"...대단하군."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어째서 지금까지 회의에서 조용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하. 그게... 언제나 신 병장님에게 판단을 맡기기만 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

"지난번에 상담받은 후로도, 역시 저는 너무 민폐만 끼쳤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도 생각이란 걸 좀 해 보려고 노력해보고 있습니다."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녀석.

"사실, 이번 일에는 개인적인 욕심도 좀 있구요."

"욕심이라니?"

"솔직히 말하면, 방금 말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겁니다."

멍하니.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녀석.

"저는 너무 약합니다. 힘만 바보같이 세지, 가진 힘을 활용하지 못하는 거로는 아마 부대에서도 제일가는 멍청이가 저겠죠."

"야, 그건 광기 때문에."

"광기. 맞습니다. 그것도 문제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광일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산문을 지키고 있던 그 스님. 기억나십니까."

"...."

"승주 스님과 신 병장님이 아니었다면. 전 그분을 죽이고 말았겠죠."

그것이 [광기]의 페널티다.

엄청난 힘을 선사해 주는 대신.

이성을 빼앗아 가는 힘.

"이 힘 덕에 여기까지 왔지만. 전 이 힘이 두렵습니다."

"그건."

"이런 힘에 의존하고, 얽매인다는 것 자체가. 제가 약하니까 그런 것이겠죠."

그야.

이 녀석이 엄청나게 강했다면, 굳이 [광기]를 해방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러니까, 그건 네 잘못이 아니-"

갑자기 자기 비하를 시작하는 녀석.

저번처럼 우울증이라도 도진 것인가 했으나.

"그 무예라는 거. 각성자의 힘을 다루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승주 스님은. 실제로 그만한 힘을 가지고 계셨고요."

고개를 든 녀석의 눈빛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걸 익힌다면, 광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한 힘을 얻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신 병장님에게도 민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주먹을 세게 쥐는 녀석.

"하지만, 이건 너무 개인적인 욕심이잖습니까? 어떻게든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리다가 나온 게 아까 그 얘기입니다."

"하하.... 짜식."

대견하잖아.

지난번에 면담을 거치긴 했지만.

결국 이 녀석이 가진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진 못했다는 생각에, 못내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써 줄 필요도 없었나.'

이 녀석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거다.

다른 병사들을 보니.

광일이의 말에 의의를 표하는 병사는 없었다.

"도박이기는 해도."

"전광일 상병님 말대로지. 우리도 약하진 않으니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부대의 각성자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정예들.

어지간히 강력한 괴물이라도 어렵지 않게 토벌 가능한 전력이었다.

"도박을 굳이 걸 필요가 있나 싶었습니다만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의견을 꺼냈던 병사도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정해졌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단순히 무예를 얻는 것으로 그친다면 몰라.

승주 스님을 살려본다는 목적까지 추가되었다.

그 '손'과의 교전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높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만전의 준비를 다 하고 임해야 할 터.

사실.

그래서 회의 장소를 주방으로 정한 거기도 하거든.

나는 주방으로 들어간 뒤.

버너에 불을 켜며 말했다.

"밥부터 먹자."

* * *

"결정을 내리셨나 보군요."

우리가 절벽을 내려가겠다고 말하자.

승주 스님이 고개를 끄덕임.

"예. 무예도 무예거니와... 이 절과는 동맹을 맺게 됐으니까요. 동맹 관계인 승주 스님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제 걱정까지...!"

감격에 약간 몸을 떠는 스님.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제가 만난 그 존재...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평범한 괴물과는 격이 다를 터. 각오는 충분히 되신 겁니까."

"예, 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저희도 그렇게 만만한 놈들은 아니라서요."

"...."

"뭐. 저희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하는 짓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으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와 병사들은 승주 스님의 안내를 따라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승주 스님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던 신비로운 존재.

그 녀석이 얼마나 강력할지.

일말의 긴장감을 품은 채로.

* * *

그런데.

-나를 죽이러 왔는가.

"...예?"

절벽 아래에 위치한 검은색 장막.

그 안에서.

비통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모자란 너를 제자처럼 여겨 무예까지 건네주었거늘... 큭큭. 이렇게 배신을 당할 줄이야.

"그, 그게 무슨."

-어리석긴. 내가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가.

스륵....

장막을 헤치고 튀어나온 손이, 병사들을 가리킨다.

-저놈들.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구나. 그래도... 여유롭게 감당할 만하다. 문제는.

그 손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병사.

-저놈.

나를 가리켰다.

-짙은 혈향이 코를 찌를 정도로구나.

"시, 신영준 시주님?"

-거기에, 기름 낀 쇳덩이의 냄새까지.... 나를 죽이기 위함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할 수밖에.

무거운 침음성과 함께.

덜덜 떨리는 손가락.

-과연.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존재감이로다....

그 말에.

"서, 설마. 제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가."

승주 스님은 물론.

병사들 모두가 입을 떡 벌리며 나를 바라본다.

"이 존재를, 죽일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겁니까...!"

그 말에.

나는 덤덤하게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 개소리야.'

155화 먼저 멸망한 세계

처음.

승주 스님의 안내를 따라 절벽 아래로 이동할 때만 해도.

"그렇게 대단한 괴물이라니."

"저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신 병장님이 계시니까, 못해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부대원들은 긴장하고.

"정말로 제 목숨을 걱정해서 하는 짓이라면 괜찮습...."

"됐습니다. 승주 스님은 나중에 절 사람들한테 저희 얘기를 잘 전해줄 생각만 하고 계십쇼."

"으음."

안내를 맡은 승주 스님 역시.

얼굴의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장벽 앞에 도착하니.

-흐흐흐.... 비통하구나. 나약한 존재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렇게 배신을 당할 줄이야.

"...."

장벽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놈은 정말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약간 울먹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저 감추려도 감출 수 없는 짙은 피와 철의 냄새! 그야말로 수라... 수라의 그것이거늘.

승주 스님이 해명하려 했음에도 흥분을 잠재우지 못하고 떠들어 대는 장막 안의 존재.

저 녀석이 하는 얘기가 뭔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짙은 혈향에, 기름 묻은 쇠 냄새라....'

짐작 가지 않을 수가 있나.

지금 내 그림자 속에서 대기 중인 두 존재.

[뱀파이어 남작]

[강철을 먹는 맥]

-저희 얘기하는 것 같은데요?

아리엘라와 까망이를 일컫는 것이겠지.

-대단하네요.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데도 저희 존재를 느끼다니.

-끼잉.

승주 스님의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초월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녀석.

녀석과 교전을 벌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든 마당에.

이 둘을 동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만.

-내 비록 여기서 죽게 되겠지만, 쉽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

"효과가 너무 직빵인데...."

설마하니.

싸우기도 전에 저렇게 바싹 쫄게 만들 정도일 줄은 몰랐지.

지금은 우리 부대와 함께하고 있지만.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저 둘은 일종의 보스 몬스터.

[전투력 측정기]에 의하면 파란색 등급으로 책정되는, 진짜배기 괴물들이다.

거기에 아리엘라가 만든 뱀파이어들의 군대까지.

'뭐야. 생각해 보니까 엄청 살벌한 전력이잖아?'

[녹색갈기]처럼 상당한 세력을 군대를 이룬 적이 아니고서야.

어지간하면 질 것 같은 느낌은 안 들긴 한다.

"...야. 들었냐?"

"예.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병사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열 명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존재가, 신 병장님 한 명은 감당할 수 없다고...."

"말이 우리 열 명이지. 전광일 상병님도 껴 있는데."

그러고 보니.

광일이를 제외하면 내가 뱀파이어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비밀이다 보니.

병사들 입장에서는, 저게 내가 아닌 다른 두 괴물의 얘기라는 걸 알 도리가 없었다.

"시, 신영준 시주님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 겁니까?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글쎄요.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 분이셔서."

"어느 정도로 강하신 건지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그냥 어마어마하다는 것 정도밖에."

"허어!"

얘기를 안 하긴.

딱히 말할 만한 강함이 없으니까 안 말하는 거지...!

-오라! 네놈들에게도 그럴싸한 상처 하나는 남겨 줄 테니...!

그림자 속에 있는 두 괴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은 물론.

얘기만 들어 봤을 땐 그토록 강해 보이던 녀석이, 싸우면 자기가 죽을 것은 확정이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으니.

오해가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다만.

'나쁘진 않은 거 아닌가?'

저 장막 안의 괴물도 결코 약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다른 세계에서 온 괴물임에도, 이렇게 의사소통이 성립되고 있다는 점.

이것부터가 놈이 예사롭지 않은 존재라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장막 안의 괴물은, 까망이와 아리엘라를 이겨 낼 자신이 없다는 거다.

어찌 됐든.

그 둘이 내 아군인 건 변함 없는 사실이고.

음.

그렇다면.

'뻔뻔하게 나간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뜬 뒤.

절벽을 뒤덮은 검은 장막에 대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딱히 죽이겠다 말한 적은 없다만."

-...뭐라?

슬쩍 운을 떼자.

안에 있던 존재의 목소리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쉽게 죽어 주진 않겠다느니 했지만.

역시 죽고 싶지는 않다는 거지.

"살고 싶으냐."

나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살고 싶다고 한다면,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물론. 대신에...."

승주 스님의 말대로라면.

이 녀석은 아마도 트레이너 NPC.

"거래를 하지."

그러니.

"대가는... 글쎄."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가 줘야겠지.

"네가 가진 모든 것 정도면 적당하겠군."

* * *

-...모든 것이라.

장막 안의 목소리는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느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기로 했다.

"네가 가진 지식을 넘겨라. 일단은, 저 승주 스님에게 가르친 무예라는 것부터."

-무예를?

내 입장에선 당연한 요구였으나.

목소리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대가 그런 것을 왜 원하는가?

"왜 원하냐니."

-무예란, 약한 존재가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이겨내기 위한 기술이다. 본래라면 야생에서 도태되어 마땅한 약자들이, 천적들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 하지만 그대는 무예 따위가 없어도 이만한 존재감을 풍기는 강자가 아닌가.

이 녀석.

그림자 속에 있는 두 괴물의 존재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게 나와는 별개라는 것까진 눈치채지 못한 모양.

-내가 가진 잡기 따위는, 너 같은 존재에게는 필요하지 않을 텐데?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필요한지 아닌지. 그걸 정하는 건 나야."

-...하긴. 저 뒤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럭저럭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어지는 녀석.

-과거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일축했겠지만... 이미 저 대머리에게도 무예를 가르친 적이 있으니. 이제 와서 그럴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군.

"빠르게 정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싸우고 죽을지, 네가 가진 걸 내놓을지."

얘기를 너무 안 들어 먹는다면.

두 괴물을 시켜 협박성 퍼포먼스라도 해야 하나 싶어질 때쯤.

-좋다.

녀석이 그런 말을 해 왔다.

-내가 가진 무예들을, 그대들에게 전수하도록 하지.

그 말에.

'나이스!'

나는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춤을 추고 싶었으나.

일단은 힘으로 짓누르고 있는 입장.

겉으로는 당연한 선택이라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결정이다."

-그렇다면 일단... 들어오도록 하라.

그런데.

이어진 말에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라니?"

-무예의 전수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그대들은 한 명도 아니지.

"승주 스님은 어디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그 대머리를 말함인가.

뒤에서 듣고 있던 승주 스님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녀석은 나약했다. 나로서도 선택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무예를 전수했을 뿐. 이 안에 들일 마음이 들 정도는 아니었지.

"우리는 다르단 건가?"

-그대들이라기보단.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내가 무예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죽이려 들 테니. 저 대머리가 무예를 익히는 데 3일의 시간이 걸렸지. 그대들은 이 절벽에서 그만한 시간을 보낼 셈인가?

승주 스님 한 명이 3일이 걸렸다면.

우리 길드원 10명은, 30일 정도가 걸릴 수도 있다는 뜻.

'뭐 텐트를 설치하고 하면 못 할 건 없겠지만, 좀 그렇긴 하네.'

문제는.

'들어오라는 건... 저 검은 장막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겠지.'

내 예상대로라면.

저 장막은 아마도 '던전'의 입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공략한 던전들의 공통점이 하나.

"던전은 들어가면 보스를 처치하기 전에는 나오지 못할 텐데."

보스를 클리어하기 전까지.

입장한 자는 나갈 수 없다는 것.

"함정으로 나를 유인하려는 셈은 아니겠지."

조금 경계를 담아 말한다.

어쩌면, 이 안에 있는 보스가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기 혼자서는 나를 이길 수 없으니 유인하는 걸지도 모르는 일.

-던전이라니? 아아. 침식지를 말하는 건가.

"침식지?"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 이곳은 그런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장소이니. 뭣하면 직접 확인해 보아도 좋다.

그 말에.

나는 의아해하며 장막을 향해 조금씩 접근했다.

그 입구에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하자.

[멸망한 세계의 파편 - 게이트를 발견하였습니다.]

눈앞을 채우는 메시지.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라고?

[처참하게 파괴된 채, 우주를 유영하는 세계의 파편.]

[그곳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어떻게 멸망을 거친 세계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질병이 돌아 멸망한 세계로써, 입장하는 순간 피를 토하며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어쩌면 유용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진입할 것인지, 아닌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던전이 아니라... 게이트."

게이트.

들어 본 적이 있다.

[게이트 소환권]

[이상식욕자]를 인간으로 돌려놓은 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얻었던 아이템에 적혀 있던 이름.

그 정체는 잘은 모르겠지만.

던전과는 달리,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문구는 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 외에 신경 쓰이는 문구가 하나.

[멸망한 세계의 파편]

"멸망한 세계라."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묘양사가 위치한 높은 산.

저 멀리에, 폐허가 되어 버린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멸망한 세계라니.

그건.

'우리 얘기 같잖아.'

* * *

"오! 진짜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았는가. 금세 들통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일단은 던전이 아니라는 건 확인됐으니.

병사 한 명이 시험 삼아 안에 들어간 뒤 곧바로 나와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저 녀석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럼. 저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한 명씩 안쪽으로 몸을 집어넣는 병사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신 병장님."

"오냐."

이윽고 광일이까지 안쪽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나 역시 장막 안으로 몸을 옮기려던 찰나.

팍.

장막 안에서, 기괴할 정도로 빼빼 마른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마도 승주 스님이 말했다던, 그 손.

"뭐지? 이제 와서 배신인가?"

-설마.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안다. 무예를 가르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내 쪽에서도 조건을 한 가지 제시하고 싶은데.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치며 오만하게 대답했다.

"네가 조건을 걸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나?"

-물론 아니지. 이 안에 있는 이들을 볼모로 삼는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럼 뭔데."

-이 조건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처절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녀석.

그런 녀석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한 조건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일단 들어나 보지."

-고맙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간단하다.

대체 어떤 조건이길래.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했더니.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다른 이들은 건드리지 말아 줬으면 한다.

...다른 이들?

이 안에, 이 '손'의 주인 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다는 건가.

"일단 묻겠는데. 네가 말한 다른 이들이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내가 말릴 것이고. 그럼에도 그들이 그대를 먼저 적대할 경우에는, 저 조건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그 정도야, 뭐."

애초에 전투를 벌이려고 온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군.

"무슨 증거?"

-그 피 냄새의 근원을 치워 주었으면 한다.

피 냄새의 근원이라.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대가 장막에 다가왔을 때 느꼈다. 그 피 냄새와 쇠 냄새는, 아마 그대에게 종속된 존재들이겠지.

정확히 말하면 까망이는 아니긴 하다.

먹이로 길들였다는 쪽이 맞긴 한데... 뭐 둘 다 그 의미로는 같나?

-쇠 냄새가 나는 쪽은 괜찮다. 그 역시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무차별적으로 해를 끼칠 것 같은 위험한 기세는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저 혈향은 그렇지 않다.

"내 명령에 복종하는 녀석이다. 이상한 짓을 저지를 일은 없어."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들, 그렇게 불쾌한 냄새를 내뿜는 존재를 저 안에 들여 보내고 싶지는 않다. 이해해다오.

이해해 달라니.

조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믿고 들어갔다가, 공격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개소리는 그만-"

"주인님."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그림자 속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낸 여자.

아리엘라가 말했다.

"저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뭐?"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불쾌하다는 듯 장막 안의 손을 바라보는 그녀.

"문전박대는 솔직히 기분 나쁘긴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 봐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저 말대로라면 그 '무예'라는 걸 익히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렇긴 하겠지."

"호위는 다른 병사들이나 '맥'에게 맡겨도 충분하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다른 일을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다른 일이라니?

아니, 그보다도 의아한 것은 이 녀석이 이렇게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는 것 자체.

내 명령을 강제적으로 따라야 하는 입장이다.

굳이 이렇게 성실하게 나설 녀석이 아닌데.

"사실. 예전부터 생각해 둔 제안이 있거든요.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제안?"

"아마 주인님도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가 말한 '제안'을 들었다.

그 내용을 모두 파악한 뒤.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왜 진작에 이 생각을 못 했지?'

그녀가 말한 '제안.'

그녀가 원해서 할 만한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음에 드네."

"역시. 주인님이라면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답니다."

우리 부대에도 큰 도움이 될 내용이었다.

씨익.

"이쪽은 제게 맡기고. 주인님은 편하게 다녀오시길."

"좋아. 그 부분은 네게 맡긴다."

내 허가가 떨어지자.

"...후후."

작은 미소를 짓는 그녀.

"믿고 맡겨 주세요. 임무를 완료하고 돌아왔을 때, 베풀어 주실 은총이나 충분히 준비해 두시길."

"그래. 선짓국이랑 피순대. 배부르게 먹여 주마."

"헤헤."

이윽고, 피안개로 변하며 저 멀리 사라지는 아리엘라.

"그럼. 주인님의 주인님이시여."

"다녀오겠나이다."

그림자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뱀파이어 군대들이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이걸로 됐나?"

-양보해 준 점에는 감사하지.

그제서야 만족한 듯, 장막 안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손.

나도 그를 따라 안으로 몸을 옮겼다.

[게이트 - 천산 무관에 입장합니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그 안에 펼쳐진 풍경은....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깍아 지른 듯 드높은 산이 하나.

산 곳곳에는 커다란 전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낡고 허름해진 상태지만.

전성기에는 상당한 위용을 자랑했을 것 같은 화려한 건축물들.

그리고....

"뭐야, 이건."

그 산의 바깥에는.

넓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우주에, 홀로 떠다니는 산 하나.

그 주변에는.

산산조각 난 땅의 조각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이게 게이트.'

게이트에 대해 적혀 있던 설명.

그게 어떤 내용이었는지, 단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산.

그리고 그곳에 있는 전각들.

그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세계.

아니.

'...세계의 파편.'

고개를 돌리자.

"내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그곳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농담으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지만. 뭐. 잘 머물다 가길 바라지."

156화 천산 무관

[게이트 - 천산 무관에 입장합니다.]

[천산 무관]

[지금은 멸망해 버린 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르고 높은 산맥에 위치해 있던 무관입니다.]

[구름에 가려질 정도로 높은 산맥은 발붙일 수 있는 땅 중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웠기에, 천산은 하늘과 소통하는 의례의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 하늘마저 무너져 버린 지금은 아쉽게도 과거형이 되어 버렸지만요!]

[멸망해 버린 세계에 입장하였습니다.]

[오래된 선기의 잔재가 어려 있는 장소입니다.]

[다음과 같은 효과가 부과됩니다.]

[무예 수련 시, 수련 속도에 보너스 부여]

[체력 회복 속도 소폭 상승]

[입장해 있는 인원 전원에게, 특성 - 통합 언어 부여.]

[통합 언어]

[하늘의 신선들이 지상의 여러 민족들을 굽어보기 위해 만들어 낸 언어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 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처참하게 파괴되어 잔해만 남은 세상.

이곳이 바로.

"네 고향이라고?"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그대가 말한... 던전이라고 했나. 그건 아마도 침식지를 말하는 거겠지."

"침식지?"

"이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땅 말이다."

시스템에 의하면.

던전은 지구의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들이 살아남기 위해.

해당 지역을 '테라포밍'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장소였다.

그래서일까.

'발견하는 던전마다... 시스템이 화를 내고 있었지.'

용납할 수 없는 침략행위라느니.

적을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느니.

던전을 발견했을 때.

시스템 메시지에는 언제나 적대적인 문구가 따라왔다.

반면.

"이 공간은 그런 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우리 세상에서는 이계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이계문...."

이곳에서는.

시스템이 어떠한 적대적인 의사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세상의 환경을 억지로 뜯어고치는 침식지와는 달라. 이곳은 말 그대로 내 고향이다."

지구의 환경이 이계의 존재에 의해 테라포밍된 것이 던전이라면.

게이트는, 아예 이계 그 자체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얘기.

"...지금은 멸망한 채 이렇게 작은 산 하나만 남아 있지만."

"맙소사."

그 얘기대로라면.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은.

'지구가 아니란 거잖아?'

* * *

괴물들이 우리의 세계를 침공해 왔고.

지구의 문명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 버렸다.

남아 있는 인간들의 숫자가 적은 편은 아니라고 하나.

많은 이들이, '세계가 멸망했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담고는 했었지.

하지만.

'진짜 멸망에 비하면, 우리가 겪은 건 별것도 아니란 건가.'

우리 세계는 아직 이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지는 않았다.

넓은 우주에, 산 하나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광경.

원래도 이런 모습일 리는 없으니.

이 산을 제외한 모든 세계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보는 게 맞겠지.

'그저 우리보다 조금 심한 멸망을 겪은 것뿐인 걸까. 아니면.'

언젠가.

우리 세계도 이런 식으로 변하고 마는 걸까.

'아니.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갈수록 더 강한 괴물들이 나타나고, 세계가 황폐해질 거라는 것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사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앞으로 나타날 더욱 강한 괴물들을 어떻게든 저지하고.

잃어버린 문명을 복구하는 것.

우리의 세계도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파괴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런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면, 어떻게든 막아 내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기도 하고.'

게이트의 풍경을 보자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이었으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지. 따라오라."

나와 병사들.

그리고 승주 스님은, 가면을 쓴 남자의 안내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기 떨어지면 죽겠지?"

이동하면서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병사들.

전각들이 세워진 산의 바깥 부분은 아예 땅이랄 게 존재하지 않았다.

워낙 비현실적인 광경을 많이 봐 왔다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당혹스러운 풍경.

그야, 아예 다른 세계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것도 그건데.'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르게 발달한 근육.

낡고 해진 옷.

얼굴을 가린 가면.

그리고.

'...귀랑 꼬리?'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우리를 안내하는 남자의 허리춤에서는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쥐...인가?'

그것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이 녀석도 인간은 아니라는 것.

[식재료 감별(강화)]

[영장류 - 수인(獸人)종 - 서인]

[신선도 - 중상]

[고급 요리 비결 - 수인종, 쥐 인간 손질법의 깨달음]

[수인은 야수와 인간의 성질을 절반씩 가지고 태어나는 종족입니다.]

[타고난 야성이 강해 양식이 불가능한 만큼 일반적인 식재료로 여겨지지는 않으나, 많은 운동량을 자랑하는 만큼 탱글한 식감을 자랑하며...]

'수인... 짐승 인간이라.'

짐승 인간이라는 단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간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할 텐데.

저 남자가 온 세상에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시스템은 번역에 있어서는 조금 대충인 부분이 있으니까.'

아마도 '밤의 귀족'이라던 아리엘라를 '뱀파이어'라고 지칭한 것과 마찬가지.

상태창이 대충 비슷한 개념으로 표현한 것뿐.

실제 종족명이 수인인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며 산을 오르고 있자니.

"저기."

"왜 그러지, 배신자여."

"...크흠.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소?"

승주 스님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밖에서 말했던, 날 제자라고 생각했다느니 하는 얘기. 그건 진심이었소?"

"흥."

가면을 써서 보이지는 않지만.

안내를 하고 있던 남자가 승주 스님을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고향의 문화다."

"음?"

"무예를 가르친 자는 부모와 같고, 가르침을 받은 자는 자식과 같지. 네놈이 아무리 나약하다고 한들, 내 무예를 전수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제자와 비슷한 존재, 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얘기에.

승주 스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기술을 멋대로 전수하거나 남에게 알리면 날 죽이겠다 하지 않았소!"

"그것도 고향의 문화다. 무예의 전수는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네놈에게 무예를 가르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랬을 뿐. 네가 다시 그것을 멋대로 퍼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남에게 내 존재를 알리지 말라 한 것은...."

조금 생각이 깊어진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 남자.

"그냥. 이곳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제자라고 생각했다면서, 그걸 어기면 죽였을 거라고?"

"당연히 진심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조금 강하게 말해둬야 경고가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무예까지 건네준 녀석의 목숨을 그리 쉽게 빼앗지는 않아. 아마 나름대로 제재를 가하긴 했겠지만."

"그런."

"애초에. 네가 내게 따질 처지인가?"

말을 끊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남자.

"따지고 싶은 건 나인데 말이지. 설마하니 이렇게 배신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진심이었단 말인가."

결국.

저 가면남은 승주 스님을 해할 마음이 없었다는 거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무예를 가르쳐준 이에게서 배신을 당한 셈.

승주 스님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하오. 나는 그런 줄은 모르고."

"...미안해할 것 없다. 말했다시피, 내가 있던 세상의 문화가 그런 것일 뿐. 이계의 존재에게 내가 가진 문화를 강요하고, 제자니 뭐니 하는 생각을 품은 내 잘못이니."

산맥을 오르며 주변을 둘러보는 가면남.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산산조각 난 대지의 조각들만이 우주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멸망한 세상의 문화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거늘."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승주 스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것 같았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내 잘못이지."

* * *

가면남의 안내를 따라 산 중턱에 도착하자.

주변에 나열된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어오도록 하라."

사극에서나 보던 목재 건물들.

낡은 전각이지만 꾸준히 관리를 해 온 것인지 크게 더럽지는 않았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잠시 뒤.

부대원들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나는 가면남과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내가 가진 무예의 전수였지. 그래, 누구부터 시작하길 바라는가."

"그 전에, 일단 통성명부터 하자고."

계속 가면남이라고 부르긴 뭐하잖냐.

"통성명이라. 친하게 지낼 것도 아닌데 굳이 필요할까 싶다만. 서환이라 부르라."

"신영준이라고 한다. 그럼 일단 질문이 있는데."

"...질문이라니. 나는 무예만 가르치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인상을 찌푸리는 서환.

"그대의 요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이긴 했지만, 이 땅에 외지인들이 있는 것이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야. 가급적 빠르게 무예의 전수를 끝낸 뒤, 그대들은 나가 주었으면 하는데."

"아니. 조건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은데."

"뭐라?"

무예의 전수는 어디까지나 조건 중의 하나.

내가 녀석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건 조건은.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했지."

"...."

"네가 가진 지식이나 기억. 나한테는 좀 필요한 것들이거든."

"후우."

그다지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내 그림자 속에는, 여전히 까망이가 대기 중이다.

"질문이라고 했나. 내가 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 보도록."

녀석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는지.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투력 측정기]

특성이 발동했다.

놈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파란색.'

역시.

상대가 안 좋았을 뿐.

이 녀석 역시 상당히 강한 괴물이라는 거다.

"질문은 간단해."

그런 녀석이, 어째서.

"이 세상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이 조각난 세상 속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거든.

* * *

갑작스럽게 우리 세상에 나타난 괴물들.

지금은 그 정체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고는 있었다.

'이계의 존재.'

시스템 창은.

괴물들을 그렇게 지칭했다.

하지만.

어째서 놈들이 우리 세상을 침공해 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리엘라는 흡혈귀 사냥꾼들에게 봉인을 당한 뒤, 눈을 뜨니 지구였다고 했고.

[깊은 자들의 교황]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내가 자기 동족들을 요리해 버린 탓인지.

결국 중요한 것을 알려 주진 않았다.

"내 고향이 어떻게 멸망했냐, 라."

그리고 지금.

이 녀석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간단하게 설명하지. 마물들이 나타났다."

마물.

아마 몬스터를 말하는 거겠지.

교황 역시 자신들의 세상이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까지는 말했으니까.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어째서 우리 세상을 노렸는지. 그 마물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쯧. 쓸모가 없네."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뿐."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무는 가면남.

"무언가, 뚜렷한 악의를 지닌 존재가 그 과정에 개입했다는 것."

"...!"

그 말에.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나와... 같은 생각을 했구나.'

세상을 침공한 괴물들.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난 것도 신기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괴물들이 나타나, 집중적으로 파괴한 것이 다름 아닌.

"놈들은, 우리 세상의 무력을 가장 먼저 제압했다."

저 괴물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힘.

군대였으니까.

"가장 먼저 무너진 건 황실이었다. 그 후에는 천심맹. 흑마련. 대명교까지...."

"천심... 뭐?"

"우리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많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세력들이다. 온 세상을 뒤엎은 마물들이라고 할지언정, 그들의 전력이 온전했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가장 먼저 무너졌다는 거군."

"...나중에 생존자들에게 듣기를, 그들에게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물에게 대응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더군."

역시.

우리 세상의 군부대들이 가장 먼저 무너진 것과 같았다.

서환의 세계와, 우리 세계.

그 둘에 일어난 현상의 흐름이 동일하다는 것.

'그 악의는... 실존한다.'

두리뭉실한 추측이었으나.

지금에 와서야 확신을 얻게 되었다.

"마물들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초기에 나타난 마물들은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었지만, 황실을 무너트린 강력한 대마수와 같은 이들이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배회하게 되었지."

이 부분 역시, 교황에게서 들었던 얘기다.

시간이 갈수록 나타나는 괴물들은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

'돌겠네.'

지금도 괴물들을 토벌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

여기서 점점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날 거라니.

"그즈음부터는 다른 이들과의 연락도 두절되었다. 더 이상 밖을 돌아다닐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까.... 아마 모두 마수에게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죽어 나갔겠지."

"그놈들은 왜 그렇게 다른 세상을 침공하는 거지? 원인은 뭐고, 막을 방법은?"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도 모른다고. 심지어 어떻게 파괴된 세상에서 이곳만이 남아 있는 건지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모르다니. 넌 그 침공에서 살아남은 거 아냐?"

"그저 살아남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니까."

뭐야, 이 녀석.

영 쓸모가 없네.

"뭐라도 아는 이가 있다고 한다면... 글쎄."

서환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스승님 정도겠지."

"스승?"

산꼭대기.

그곳에 지어진 커다란 전각.

"나는 우리 세상에서는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님 덕분이지."

"그 스승이란 양반이, 많이 강했던 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만인의 인정을 받은 분이었지. 번잡한 걸 싫어하는 성정 탓에 특정 단체에 들어가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은 천상의 신선들과도 가끔 교류를 나누었으니, 무언가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내게 따로 귀띔해 주신 것은 없었지만."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천상의 신선이라니.

"이곳이 어떻게든 형태나마 남아 있는 것도 신선들이나 가능할 법한 짓이니. 스승님 외에는 알 만한 이도 없겠지."

어이가 없기는 한데.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한들 이상하진 않겠지.

"그럼 그 스승이란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군."

"왜지? 아. 혹시 이미 죽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살아는 계시지. 문제는."

한숨을 내쉬는 서환.

"살아만 계시단 거다."

"...?"

"스승님께서는 강하셨지만, 최후의 전투에 몰려든 적들은 더욱더 강했다. 스승님께서는 놈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주화입마에 드셨고... 그 후로는, 나조차도 스승님을 뵙지 못했지.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서환의 시선을 따라.

산꼭대기에 세워진 전각을 바라보았다.

조금 집중해서 그곳을 바라보자.

[전투력 측정기]

특성이 발동했다.

그리고....

움찔.

특성을 통해 바라본, 산꼭대기의 풍경에.

나는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전투력 측정기]는 적의 강함을 색을 통해 알려 주는 바.

강함은 빨주노초파남보의 순서로 정해진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괴물들 중 가장 강한 괴물들은.

파란색 기운을 내뿜고 있었지.

그런데.

'...보라색이라고?'

산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전각.

그곳을 마치 안개처럼 뒤덮은.

거대하고 화려한 보랏빛 기운.

"스승님을 뵙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테니."

* * *

결국.

서환의 스승과 만난다는 계획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쩔 수 있나.

'갑자기 보라색은 좀 너무했잖아.'

지금까지 만난 괴물들 중.

가장 강했던 이들은 파란색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남색 기운조차 본 적이 없는 지금.

갑자기 보라색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산 전체를 에워싸듯 퍼져 있던 짙은 보랏빛 기운.

그런 기운을 가지고 있는 놈이 머무르는 곳으로 무턱대고 향한다?

조금 참신한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겠지.

그 후에는.

"그럼 이제 약속한 대로, 무예를 전수해 주도록 하지."

처음 이곳을 찾아왔던 목적.

무예의 전수가 시작되었다.

승주 스님에게서 대충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어떤 식으로 무예가 전수되는 건지 조금 궁금했는데.

"그래.... 일단은 대련부터 시작해 보도록 할까."

대련?

157화 천살성

"그래.... 일단은 대련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지."

"대련?"

"그대에게 협박받아서 하는 일. 마음 같아서는 대충 저 대머리에게 전한 무예로 때우고 싶으나...."

넓은 전각.

그 한가운데에는 훈련 용도로 만들어진 듯한 넓은 공간이 있었다.

"결국은 나도 무예의 길을 걷는 자. 아무리 강제로 하게 된 일이라고 한들, 허투루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거랑 대련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무예의 길은 복잡하다. 아무런 무예를 잡고 대충 익힌다고 해서 경지에 이를 수는 없지. 모든 이들에게는 그에게 적합한 무예가 있는 법."

"...그런 건가?"

"누구에게도 적합한 무예라는 것도 존재는 하나. 그런 무예는 아무래도 질이 낮은 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니,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은, 승주 스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항마승병무예'였다.

묘양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무예를 익히고 있었지만.

무예의 등급은 C-로 꽤 낮은 편이었지.

"보통은 스스로 실력을 쌓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무예를 찾게 되나...."

서환이 목봉 하나를 들고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직접 무기를 주고받은 뒤, 적합하다 생각되는 무예를 전수해 주도록 하지."

그렇게 시작된 대련.

서환이 입고 있는 옷가지는 낡았고, 쥐고 있는 목봉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파란색 기운을 품고 있다고 한들.

온갖 장비로 무장한 우리 부대원들을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조금 의문이었다만.

빠악!

"케흑!"

"흠. 신체 능력은 분명 뛰어나나, 능력을 다루는 기술은 처참할 정도로군."

서환의 목봉에 얻어맞은 이병민 이병이 짧은 단말마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 같네.

"걱정하지 말라. 그대에게 어울리는 무예가 하나 떠오르는 게 있으니."

그 후로도 이어지는 대련.

"커허억!"

"허어. 기괴하도다."

"으겍."

"과연. 어째서 무예를 원한 것인지 이해가 가는군."

훈련장의 바닥을 뒹구는 부대원들.

그들을 내려다보는 서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신기함이 담겨 있었다.

"신체 능력과 기술의 조화가 이렇게까지 맞지 않을 줄이야.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말마따나.

놈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우리 부대원들은, 신체 능력이 크게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기술.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니다. 타고난 기질을 보려고 했음이니. 기술이 모자란 것은 무예의 선정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 그저 의아할 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서환이 말했다.

"심, 기, 체라는 것이 있다."

"?"

"정신. 기술. 그리고 신체. 저 셋을 성장시킴으로써 무인은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셋이 고르게 성장한다. 아니면 정신만이 뒤처지거나.... 그런데 그대들은 다르군. 신체 능력만이 이상할 정도로 앞서 있어. 이만한 불균형은 본 적이 없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

나야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했다.

"결국 우리가 강해진 건 시스템 덕분이니까."

괴물을 사냥해 레벨을 올리고.

포인트를 통해 능력치 물약을 먹고.

길드 스킬, 장비 등을 통해 능력치 보너스를 얻고.

덕분에 신체 능력만 엄청나게 뛰어나졌을 뿐.

그 외에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

"...? 그게 뭐지?"

아, 그러고 보니.

던전이라는 단어도 못 알아듣고, 게이트 역시 이계문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던 녀석.

시스템이란 단어도 아마 다른 식인 게 아닐까.

"그, 괴물을 잡아서 기운을 흡수하고, 그걸로 각성해서 직업을 얻고 하는 것 있잖아."

"음...?"

"허공에 남들한테는 안 보이는 글자가 나와서 뭐라 뭐라 알려 주고, 그런 거. 너희들한테도 있었을 거 아냐?"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 보았으나.

"처음 들어보는군. 남들한테는 안 보이는 글자가 보인다니. 의방을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녀석들한테는... 시스템이 없었던 거구나.'

괴물의 습격과, 시스템의 출현.

그 둘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둘은 완전히 별개.

서환의 세계는 괴물에 의해 습격을 받았으나.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한테만 시스템이 나타나는 거지?'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답은 없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모종의 방법으로 신체 능력은 빠르게 키울 수 있지만, 그 외에는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음. 그러한가. 확실히 내 무예를 탐낼 만한 상황이야."

서환은 그저 처음 보는 불균형에 신경이 쓰였을 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크허억."

"아야!"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대련이 이어졌다.

"...혹시 화풀이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내게 협박당해 억지로 무예를 전수하고 있는 화풀이가 아닐까 싶었지만.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는 채로 대부분의 대련이 끝나고.

"대충 이 정도인가. 뭐. 대부분 자질은 무난한 편이로군."

남은 병사는.

단둘뿐이 되었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병사.

그중.

먼저 나서기로 한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잠깐."

"예?"

바로 대련에 나서려던 전광일이었으나.

신영준 병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예?"

"다른 애들하고 대련하는 거 대충 보니까. 광일이 너, 전력으로 해도 될 것 같다."

"전력으로, 말입니까."

그 말에.

전광일 상병의 눈이 크게 떠진다.

전력으로 하라는 것.

그건 즉.

"광기를 최대한으로 해방하라고...."

"그래."

"...적과 싸울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반쯤 협박당해서 무예를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서환은 굳이 따지면 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대련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함으로써 적당한 무예를 찾아주기 위해 치르고 있는 것.

그 의의를 생각한다면.

'내보일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건가.'

그제야, 전광일 상병도 그 말을 이해했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신영준 병장의 조언대로.

"호오."

"크르륵...!"

온몸의 광기를 해방한 전광일 상병.

그가 서환을 향해, 마치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어중이떠중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나 보군."

그 기세를 느낀 서환 역시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공격에 맞섰다.

병사들과 치러지던 대련 내내 시종일관 덤덤했던 서환.

그 태도는 처음 몇 합까지만 해도 변함이 없었으나.

"...맙소사!"

대련이 열 합을 넘어가는 순간.

처음으로 그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이 기운은... 설마, 정말로...?"

대련이 지속될수록.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서환.

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천살성이란 말인가."

열 합을 넘지 않고 끝났던 기존 대련들과는 달리.

전력을 다한 전광일은 서환 역시 단숨에 끝내기는 힘들 정도였다는 걸까.

수십.

어쩌면 백에 가까운 공격을 서로 주고받은 뒤에서야, 대련이 끝나게 되었다.

"...후욱!"

"쿨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는 전광일 상병.

광기의 여파로 인해, 승패가 갈린 후에도 여전히 그 기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크르륵."

"어우. 야, 괜찮냐?"

"...아, 신 병장님."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내던 전광일이었으나.

신 병장의 목소리에 그 광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전광일 상병의 상태를 살피던 신영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강제로 가르치게 됐다고 화풀이한 것 아닌가? 그래 봐야 대련인데 이렇게 패다니."

"그 정도가 아니었으면 멈추지 않았을 테니까."

서환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전광일 상병을 내려다보았다.

"...네놈. 대단하구나."

"큭큭. 대단하다니. 이렇게 두들겨 패 놓은 자가 할 말인가."

전광일 상병을 보며 중얼거리는 서환.

광기의 영향이 남아 있던 전광일 상병은 그 말에 비아냥댔으나.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내가 놀란 것은 네 강함이 아니야."

"...?"

서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하나, 지금의 네놈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 100번 싸우면 100번 모두 내가 이기겠지."

"큭! 비꼬실 셈인가. 그럼 뭐가 대단하단 말이오."

"네놈의 재능."

"뭐?"

놀랐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가면을 쓴 서환의 옆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내 살아생전에 천살지체를 보게 될 줄이야."

"아까부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서환.

그런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광일이였으나.

"네놈. 전투에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해 곤란할 때가 많았겠지. 맞나?"

"...광기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서환의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최고의 재능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흥분감.

"무예란, 약한 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단련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아까 말한 심기체니 뭐니 하는 것 아니오? 그, 심 부분 얘기인가."

"맞다. 내 종족은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야성을 타고나지. 그렇기에 무예를 통해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놈이 타고난 천살... 광기라고 했나? 그건 내 야성과 비슷하면서도 더 강하더군."

"...비슷하다니. 설마."

서환의 말에.

전광일 상병은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내 광기를... 억누를 수 있다는 말이오!?"

[광기]는 전광일 상병의 가장 큰 무기이자, 걸림돌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의도치 않게 튀어나온 광기로 인해, 멀쩡한 스님 한 분을 해칠 뻔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걸 원하는 대로 억누를 수만 있다면...!'

흥분한 전광일이었으나.

그에 대답하는 서환의 얼굴에 갑자기 그림자가 졌다.

"그래서 더욱 아쉽구나."

"...?"

"나로서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기껏 하늘이 내린 재능을 만났거늘, 그 재능이 썩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니...."

이 자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 *

서환의 말에 의하면.

광일이가 가지고 있는 광기는, 다른 이름으로 서환의 세계에도 존재했다는 것 같다.

'천살성.'

안 그래도 그들 종족은 야성이 강한 편이지만.

그 살벌한 이름답게, 천살성을 타고난 이들은 평생을 미치광이 살인마로 살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하지만.

"아주 드물게,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경우가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무인이 되었지."

즉.

광일에게는 이 무예라는 것에 대한 재능이 차고 넘친다는 것.

문제는.

서환은, 광일이를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것.

"계약을 잊었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모든 것을 바친다.

그것이 서환과 내가 나눈 계약.

그 안에는 서환이 가진 모든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가르침을 아끼려는 모습에, 나는 무력 시위를 벌여야 하나 고민했으나.

"말했지 않는가. 나 역시 아쉽다고."

"...?"

"그 녀석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내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능력이 모자라서이지."

한숨을 내쉰 그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따라오라. 내 직접 설명해 줄 터이니."

나와 광일이는 의문을 품은 채.

서환의 안내를 따라, 전각의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여긴?"

"무예를 담은 책들을 보관하는 장소다."

조선시대의 도서관이 이런 느낌일까.

나무로 된 서가에는 옛날 방식으로 엮어진 책들이 수없이 많이 꽂혀 있었다.

"나는 봉술을 주로 익혔다. 그 외의 무예에 대해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밖에 모르지. 다른 무예를 가르치려면 이 비급들을 참고해야만 해."

"책의 양이 상당한데."

"스승님의 취미셨지. 자기가 쓰러트린 상대의 무예를 뺏어 오는 것을 좋아하셨거든."

...잘은 모르는데.

그거 상당히 악질인 거 아닌가?

"그런 면으로는 꽤 악명이 자자하신 분이었다. 너무 강한 탓에 남들도 차마 어쩌지 못했을 뿐."

"...."

그렇게 말하며 서가를 뒤지는가 싶더니.

곧 책 한 권을 뽑아드는 서환.

그 책을 바라보자.

[식재료 감별(강화)]

세상 모든 것을 식재료로 인식할 수 있게 된 뒤.

어떤 것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된 내 특성.

식재료 감별이 발동했다.

[무예 비급 - 한천검 A+]

"가장 먼저 나와 대련했던 칼잡이. 이름이 뭐지?"

"이병민 이병?"

"신기한 이름이군. 아무튼, 그 칼잡이한테는 이걸 가르치면 좋을 것 같더군. 몸놀림이 둔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좇는 동체 시력은 나쁘지 않았으니. 작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 무예가 잘 어울릴 거야."

"오...."

뭔가 대단해 보이는 느낌.

그 후로도 여러 책을 꺼내 드는 서환.

그 대부분이 A, A+급의 무예였다.

'승주 스님이 익히고 있던 게 딱 이정도 급이었지.'

최소한 그와 비슷한 수준의 무예라는 뜻.

하지만.

'갑자기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서환은 나와 광일이를 서고의 한구석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그리고... 천살성을 위한 무예는 이쪽에 있다."

흉흉한 쇠사슬과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대한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158화 봉인 (1)

두꺼운 쇠사슬과,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부적.

그것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거대한 철문.

"이 안에, 광일이를 위한 무예가 있다고?"

"일단은 그렇다."

광일이가 불안한 시선으로 서환을 바라보았다.

"나를 가르치지 못한다고 한 이유는, 설마."

"천살성을 위한 무예는 비동에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지."

봉인이라니.

"천살성의 살성을 제어하고, 이용할 수 있는 무예는 많지 않다."

서환의 설명이 이어졌다.

"애초에 특별한 이를 위한 무공인 만큼, 천살성이 아닌 이가 익힌다면 반대로 미친 살인귀가 되고 말지. 강대한 힘을 줄 수 있는 무예이면서도, 지나치게 위험한 무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비동에 봉인해 둔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무예라서 내보여 줄 수 없다, 뭐 그런 건가?"

"...과거라면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는 상관없다."

서환은 손가락을 뻗어 그가 이미 꺼내둔 다른 책들을 가리켰다.

우리 부대원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 말했던 책들.

"본래라면 지금 꺼낸 무예들 하나하나가 함부로 가르칠 수 없는 귀한 지식이다. 외부인에게는 보여 주는 것조차 해선 안 되는 일."

"그럼 왜."

"말했잖나. 나의 세계는 멸망해 버렸다고."

낡은 서책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서환.

"멸망한 세계의 문화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그렇다면 가르침을 아까워할 필요도 없다는 거 아니겠나."

"...그런 건가."

"비록 협박을 받아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내 세계가 쌓아 올린 지식만이라도 이 세계에 전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멸망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 될 테니."

잘은 모르겠지만.

멸망한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무언가 결단을 내렸다는 거겠지.

'남 얘기는 아닌가.'

나의 세계도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서환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묘하게 씁쓸했다.

"천살성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 비동의 무예가 너무 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저 비동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지."

"...."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광일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 천살성으로 인해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우리 역시 타고난 야성을 제어하지 못해 원치 않은 불행을 겪는 경우가 많으니까."

"...."

"마음 같아서는 네 불행을 막아주고 싶다. 저 안의 무예를 가르칠 수만 있다면, 네 광기를 잠재울 수 있겠지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

그 말에.

기대에 가득 차 있던 광일이가 눈에 띄게 우울해하는 것이 보였다.

"꼭 그 천살성을 위한 무예여야만 하는 건가? 광일이 이 녀석. 격투기 전반에 재능이 좀 있는 것 같던데. 다른 병사들한테 주기로 한 무예 정도만 되어도...."

"그런 게 가능했다면 천살성들이 미친 살인귀로 이름을 날리지도 않았겠지. 그 기운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무예가 아니라면 오히려 익히지 않는 것이 낫다. 어울리지 않는 무예를 익힘으로써 광기에 지배당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질 테니."

"아니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을 것 아냐."

"미안하지만, 이 비동 안에 있는 무예를 가르치는 것. 그 외의 방법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 제기랄. 그럼 이 문을 박살 내거나, 뭐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자.

광일이가 당황해하며 내 앞에 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진정하십쇼. 신 병장님."

"괜찮기는. 조용하고 있어 봐. 이 녀석한테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라고 할 테니."

하지만.

서환은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힘으로 열릴 만한 문이었다면 진작에 열었겠지."

"...."

"단순한 철문이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다고 알려진 광물에, 온갖 주술로 봉인된 문이다. 스승님이 돌아오지 않고서야, 이 문을 힘으로 열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나는 슬쩍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강철을 먹는 맥]

까망이라면 어떻게든 저 문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끼잉....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자신감 없는 울음소리.

온갖 주술로 봉인되어 있다더니.

어떤 광물도 씹어 삼킬 수 있는 까망이조차 뚫을 수 없다는 것.

까득.

내가 입술을 깨물자.

광일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막아섰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깟 무예가 없어도 저는 충분히 강하다는 거."

"...."

"하, 하하. 물론 광기를 제어할 수 없게 된건 좀 아쉽지만... 그딴 기술이 없어도, 제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아. 신 병장님도 누누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안 되면 되게 하라고."

"후.... 광일아."

"악바리 정신으로, 언젠가는 제어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이건 결국 제 일 아닙니까. 제 일은 저를 믿고 맡겨 주십...."

"너만의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

"예?"

이거.

너 한 명한테만 중요한 일 아니라고.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린 뒤.

서환에게 말했다.

"둘이서 잠깐 얘기 좀 하지."

"...?"

"광일이 너는 다른 병사들이랑 같이 쉬고 있어."

"...예."

내 반응이 이해가지 않는 듯했지만.

명령에는 고분고분 따르는 녀석.

참 순한 놈이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

"아까 하던 얘기의 연장선이다. 저 녀석 광기 해결할 만한 방법. 뭐라도 좋으니까 내놔봐."

"...말했잖나.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너는 왜 저 거인의 일에 그렇게 분노하는 거지?"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는 녀석.

"저 거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이 일은 네가 아닌 저 거인의 일이다.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하지 않나? 네 그림자에 속해있던 그 둘. 그 둘의 힘만 해도 굳이 천살성의 무예가 없어도 충분할 정도일 텐데."

"말했잖냐. 이 일은 광일이만의 일이 아니라고."

"...?"

나는 품 안의 식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남에게 밝히기는 영 꺼림직한 이야기.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광기... 나 때문에 생긴 거거든."

"...뭐라?"

내 죄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주방장의 특별소스]

웃기는 이름을 한 스킬이지만.

우스워 보이는 그 이름과 달리.

매우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스킬이다.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힘.'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힘이, 바로 이것.

지금은 완벽하게 파악이 끝난 능력이지만.

초창기에는.

이 능력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지 몰랐다.

"광일이는 광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녀석이었다. 오히려 지독한 겁쟁이였지. 너무 겁이 많아서 무서운 이야기조차 못 들을 정도로."

"그걸 네가 바꿨다는 뜻인가?"

"겁 많은 성격은 살아남는 데 좋지 않으니까. 그땐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 자체는 변함없어. 문제는... 너무 과했다는 거지."

[용기]를 담은 요리.

그 용기가 지나치게 커진 결과.

광일이는 광기에 휘말린 채 각성을 거쳤다.

'광전사로의 각성.'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녀석을 평생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할 광기.

그걸 탄생시킨 건.

다름 아닌 나라는 뜻이다.

"내가 살고 싶다고 만들어내 버린 광기다."

남에게 이 얘기를 남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내 능력을 가장 먼저 눈치챈 민재 형에게조차.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부채에 대해서는 얘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책임을 지는 것도 나여야 하거든."

"...과연."

오히려 생판 처음 보는 녀석이라서 그런 것일까.

벽을 보고 중얼거리는 느낌으로 풀어놓을 수 있었다.

얘기를 들은 서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힘으로 억압하기에, 어지간히 쓰레기 같은 놈이겠구나 생각했거늘."

"뭐 인마?"

"우리 무예가 넘어갈 녀석은 그렇게까지 악인은 아닌 모양이군.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어."

"...."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서환의 얼굴.

그 표정이, 조금은 호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일단 하나 정정하도록 하지."

"?"

"천살성이 네놈에 의해 나타났다는 것은, 아마 네 착각일 거다."

"뭐?"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내 요리 때문에 녀석이 광전사로 전직한 게 원인.

그런데 착각이라니.

"이 세계와 내가 살던 세계의 규칙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큰 차이는 없겠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천살성이란 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

아니, 하지만.

광일이는 원래 광기니 미치광이 살인마와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다.

오히려 겁이 많아서 위험한 짓은 하지도 못하는 놈이었는데.

"다만, 천살성이 언제 발현되느냐에는 차이가 있겠지."

"발현...?"

"어린 나이에 천살성이 발현된 이는 십중팔구는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는다. 지나치게 강대한 기운이니까. 그렇기에, 천살을 부여받은 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발현을 늦추게 되어 있다."

"늦추다니."

"대부분의 경우, 천살성과는 가장 거리가 먼 모습을 함으로써 그 발현을 늦추지. 대부분의 천살성들은 그 피를 개화하기 전에는 겁 많은 유생 같은 모습을 보인다."

"...."

광일이 역시 마찬가지라는건가.

"네놈이 한 짓은... 잠들어 있던 그 기운을 일깨워 준 것일 뿐. 그 시기가 빠르건 늦었든 간에, 언젠가 천살성의 기운은 눈을 떴을 것이다."

"그것도 결국은 내가 계기가 되어서 그렇게 됐다는 거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나쁜 결과를 낳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닐 것 같군."

팔짱을 끼며, 광일이가 대기하고 있을 숙소를 내려다보는 녀석.

"육체적으로는 이미 완성에 가까운 전사다. 천살의 기운을 담아낼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였어. 오히려 그 기운이 더 강해지기 전에 눈을 뜸으로써, 이성이 광기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은 것 같더군."

"...!"

"천살성의 기운이 훨씬 더 강해진 뒤에 발현되었다면, 정말 미치광이 살인귀가 되어 버렸을 거다. 네가 한 일은 시기적으로는 오히려 적절했던 셈이지. 그 기운 덕에 많은 싸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더더욱."

서환이 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냐? 나를 달래려고 거짓말을 하려는 건...."

"달래다니? 나를 힘으로 겁박해서 무예를 내놓으라고 하는 자를 내가 왜 달래야 하나."

"...하하."

뭐야.

그런 거였냐.

"네가 계기를 주지 않았다면, 저 거인은 더 큰 해를 입었을 수도 있는 일.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온몸에 힘이 팍 풀리는 기분이다.

평생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죄악감 중 하나.

그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니.

"이제 마음이 놓이는가."

"조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환.

"말했듯이. 네가 그 기운을 빠르게 해방한 덕에, 그 남자의 이성은 광기에 완전히 침식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천살성의 기운은 강대하니, 무예를 익히지 않더라도 익힌 이들과 비등한 힘을 낼 수 있을 터. 그의 무예는 포기...."

"아니.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뭐라?"

이 녀석 덕분에.

광일이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거랑 광일이의 무예를 찾아주고 말고는 전혀 다른 얘기잖냐.

"죄책감은 덜어내더라도. 책임감도 없는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얘기인가."

"그 녀석은 우리 부대원이고, 난 그 부대의 장이거든."

"...."

죄책감과는 별개로.

내게는 여전히, 내 부대원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뭣보다.

다른 부대원들 전부 그럴싸한 무예 하나씩 챙겨가는데.

광일이만 아무것도 없다니.

그건 좀.

"너무 왕따 같잖냐."

"...."

우리 부대는 그런 분위기 아니거든.

159화 봉인 (2)

"너무 왕따 같잖냐. 우리 부대는 그런 분위기 아니거든."

"큭큭... 어이가 없군."

내 말이 어지간히 웃기게 들린 것인지.

가면을 붙잡고 키득거리는 서환.

"그래.... 네놈은 어떻게든 그 녀석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싶다, 이거로군."

"음. 필요하다면 탱크라도 끌고 와서 저 비동이란 걸 부술 생각이다."

"탱크? 뭔지는 모르겠다만. 외부에서부터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거다. 다만...."

"다만?"

조금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입을 여는 녀석.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

방법이 없다고 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다니.

"이 새끼. 역시 아깐 거짓말한 거였냐?"

"거짓말은 아니다.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방법이라 그런 것이니."

"?"

"...나로서는 저 비동을 열 방법이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다른 이들?

"비동을 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 * *

다른 이들이라.

이 게이트 안에서 만난 존재들 중, 서환 외에 기억나는 이라고 한다면.

"네 스승이라는 양반 말인가? 얼굴 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라던."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저 산꼭대기의 전각에 있는, 무시무시한 보라색 기운.

그 주인 정도가 떠오른다.

"아니. 스승님도 물론 그중 한 명이겠지만. 그분까지 가지 않아도 비동을 열 방법을 알 만한 이들은 많다."

다행히도 그 스승을 말하는 건 아닌 모양.

"나야 이 천산문의 말단이지만, 고위직에 계신 분들도 있으니까."

"그럼 뭐야. 뭘 망설이고 있어? 당장 그놈들한테 안내를...!"

"...."

"?"

내가 몸을 일으키며 이동하자고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망설여진다는 듯 몸을 움츠리는 녀석.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나한테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지?'

서환은 천산문의 말단.

그 고위직이라는 양반들은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고위직인 만큼 서환보다 강한 이들일 확률이 높겠지.

그런데도 내게 건드리지 말아 달라느니 하는 얘기를 꺼냈다는 건.

즉....

"그 고위직이라는 양반들. 뭔가 문제가 있나 보군."

"...!"

그 말에.

서환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말실수를 했군."

"이왕 실수한 거, 좀 더 말해 보지 그래."

"...어디까지나 그분들이라면 방법을 알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네놈에게 그분들을 안내하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어."

이건 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 확정이네.

"에이. 그러지 말고."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약조하지 않았느냐! 그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누가 손댄대? 얼굴만 한 번 보자는 거지."

"안 된다!"

내 말에 서환은 유독 격하게 반응했다.

"어차피 그분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네게 도움을 주지도 못해!"

"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알아? 내가 살펴보면 뭔가 답이 나올지?"

"하하.... 네놈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냐."

흐음.

방금 광일이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서환은 내게 조금은 좋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 같다.

'말실수를 하게 된 원인도 그것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조금 좋은 이미지' 정도.

녀석은 여전히 내게 힘으로 협박을 당하고 있는 입장이니.

나를 쉽게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정 그들을 보고 싶다면...."

그때.

서환이 긴장한 낯빛으로 그런 말을 꺼냈다.

"금제를 받고 가라."

"금제?"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 위에 올리자.

[금제가 제시됩니다.]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금제]

[금제 대상자 - 신영준, 서환]

[조건 (신영준) - 천산문 내의 문도들에게 어떠한 적대적 행위도 하지 않을 것.]

[조건 (서환) - 신영준을 천산문 문도들에게 안내할 것]

[상대가 제시하는 특정 조건을 이행하지 않을 시.]

[커다란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페널티 - 모든 스탯의 50% 소멸.]

[예외 - 천산문의 문도가 먼저 적대적인 행위를 할 경우. 적대적 행위를 한 문도에 한해, 조건을 어겨도 페널티를 받지 아니한다.]

[주의!]

[금제를 받아들일 경우, 1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금제를 해제할 수 없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금제라.

심지어 최소한 1년은 유지된다는 금제.

"이 금제를 받아들인다면 너를 인정하고 그분들에게 데려가도록 하지."

내용이 꽤 살벌하긴 하다.

어기면 모든 스탯의 50%가 증발한다니.

스탯 말고는 뭣도 없는 나로서는 특히나 치명적인 부분.

"물론 거절하겠지. 이만한 금제를 받아서까지 그분들을 찾아갈 이유가 없으니."

"수락한다."

"그 거인에 대한 건 포기하... 뭐?"

[금제가 성립되었습니다!]

[한번 맺어진 금제는, 상호 간의 합의가 있더라도 절대 파기가 불가능합니다!]

"지, 진심이냐!"

내가 가볍게 금제를 수락하자.

기겁을 하며 놀라는 서환.

"어차피 그분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말했잖느냐! 네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그건 가 봐야 아는 거 아닌가?"

"네놈이 가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고, 내가 분명히...!"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고."

이 녀석의 말에 따르면.

광일이가 광기를 제어할 수 있는 무예를 얻으려면.

결국 그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놈들의 도움이 필요하단 것.

금제의 페널티가 상당하기는 하다만.

"그딴 거에 쫄 정도였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거든."

"...!"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한다.

그 방식으로 살아왔기에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거 아니겠냐.

* * *

"믿기지가 않는군.... 본인의 일도 아니고, 남의 일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금제를 받아들이다니."

"내 부대원 일이라면 내 일이나 다름없으니까. 이 한 몸 바치지 못할 것 있나."

사실.

금제의 내용이 이들을 적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게 컸다.

애초에 이 녀석들을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마도 일종의 몬스터... 같은 거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녀석들은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내 부대원을 죽이기까지 한 아리엘라도 필요에 의해 활용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이계의 존재라고 한들.

부대원들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 녀석을 굳이 적대할 이유는 없다.

심지어 그 녀석이 상당히 쓸모 있는 놈이기도 하니까.

"후우.... 이게 맞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이트 안에 들어온 뒤.

서환은 전각의 일부 지역만을 돌아다녀도 좋다고 허용했다만.

"저기다."

지금 그가 가리킨 곳은.

그 너머의 영역에 있었다.

서환이 접근을 금지했던 영역.

산의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넓은 전각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 서환의 안내를 따라 이동하자.

'...!'

그곳에 있는 한 방.

열 명이 넘는 수인들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자는 건가?"

"나도 모른다."

무뚝뚝한 서환의 태도.

설마하니 이 사람들에게 나를 안내한 것 때문에 삐진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어보았다.

"대충이라도 아는 게 있을 것 아냐? 일단 말해두지만. 난 정말로 너희를 적대할 생각은 없거든? 뭐라도 아는 게 있어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냐."

"...민망하지만,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모른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이유가 있다."

한숨을 내쉬는 서환.

그가 얼굴에 끼고 있던 가면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뽈칵.

가면을 벗었다.

그 가면 안에 있는 것은.

"나의 고향을 덮친 마의 무리... 그놈들과의 마지막 결전은, 이 천산에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분위기와 다르게, 앳된 얼굴.

쥐의 그것과 닮은 귀.

그리고.

"그 전투에서, 나약한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지."

"...."

그 얼굴 한가운데를 그대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상처였다.

'괜히 가면을 쓴 게 아니었군.'

어지간히 큰 상처였는지.

코는 거의 두 동강이 나 있었고, 한쪽 눈은 안구까지 베여 나가서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것 같았다.

오히려 어떻게 살아있는지 신기할 정도의 큰 상처.

아직 어려 보이는 얼굴과 비교되어, 그 상처가 더 흉측하게 보였다.

"마수의 공격을 당한 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고 난 뒤에는, 보다시피."

"세상이 멸망해 있었군."

"그래.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때부터 저런 상태였고."

계속 저런 상태였다고?

마치 잠든 듯 누워 있는 이들.

이 게이트는 멸망의 날 당일부터 있었을 텐데.

"그럼, 식사라든가 영양 보충은 어떻게...."

"그 대머리에게 무예를 가르친 이유. 뭐라고 생각하나."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승주 스님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는 대가로.

괴물의 사체를 받기로 했었다.

"그 대머리는 내 무예를 가르침 받기에는 자격이 한참은 모자란 녀석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선택지가 없었지."

"...."

내가 만난 승주 스님은 꽤 괜찮은 인물이었지만.

그건 이 녀석의 무예를 통해 정신을 단련한 결과.

그전에는 뭐, 쉽게 말해 폐급 땡중이었다고 하니.

그런 사람을 골라야만 했던 서환도 꽤 갑갑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놈과 계약을 맺은 후에는, 마수들의 사체를 대충 조리해 먹였다."

"조리?"

"음. 우리 천산문의 오랜 전통 중에 하나지. 모든 요리는 막내가 담당한다는...."

"무슨 그딴 악폐습이."

"덕분에 기본적인 요리는 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저런 악폐습이 있을 줄이야.

아.

정작 내가 군인이구나.

"내가 음식을 만들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요리사다 보니."

"...요리사? 네가 숙수라고?"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직업을 설명 안 했구나.

"아무리 다른 세계라고 해도 그렇지. 숙수가 이만한 힘을 거느리고 다니는 게 보통인가...? 아니, 천살성을 부하로 다루는 숙수라니. 우리 세계였다면 길거리의 삼류 이야기꾼도 다루지 않을 소재인데."

"크흠."

아무튼.

괴물을 먹어서 괴물이 되는 것은 마력에 내성이 없는 인간뿐이라는 것 같으니.

이 녀석들은 그렇게 괴물의 사체로 연명을 해 왔다는 거겠지.

"일단 좀 살펴봐야겠네."

"...음. 금제를 맺었으니 상관은 없다만."

가까이 있는 사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접근하자.

영 믿음이 안 간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서환.

"네놈은 숙수라고 하지 않았나?"

"일단은."

"의원도 아닌 숙수가 병자들을 살펴본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만."

세상에.

이제는 다른 세계에서 온 녀석도 요리사라고 무시하네.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딱히 내 행동을 제지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슬쩍 다가가서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용태를 살핀다.

'엄청나게 크군.'

광일이가 연상되는.

아니, 그보다도 더 거대해 보이는 엄청난 덩치의 사내.

온몸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털이 수북했으며.

험악한 인상과 달리, 머리에는 귀엽게 생긴 고양이 같은 귀가 달려 있었다.

너무 언밸런스 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의 외형.

'호랑이 인간?'

[식재료 감별(강화)]

[영장류 - 수인종 - 고양이과 - 호인]

[천호]

"천호 사형이시다. 우리 천산문의 대사형이자... 내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지."

그를 내려다보는 서환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상태이상은, 없네?'

일단 식재료 감별을 통해 살펴보았으나.

당연히 뭔가의 상태 이상에 걸려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렇다 할 상태이상은 없었다.

그런데.

"어?"

"뭐냐. 설마, 정말 뭔가를 알아낸 것인가!"

결론만 말하자면, 상태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신기한 것이 하나.

[봉인 중....]

[대상 위험도 수치 - 9↑]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235,928,309....]

"뭐여 이건."

봉인이라고?

160화 불량 식품 (1)

[천호]

[봉인 중....]

[대상 위험도 수치 - 9↑]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235,928,304....]

봉인이라니.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에 적힌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1초당 1씩 줄어든다고 쳤을 때.

이 추세라면 아마 10년쯤 걸리지 않을까.

"봉인, 이라고."

그 사실을 전하자.

서환 역시 크게 놀라는 분위기.

"짐작 가는 건 없나?"

"어, 없다. 기절하고 일어나니 이 상황이었으니.... 아니 그보다, 이들이 봉인을 당했다면 왜 나만 아무렇지 않다는 말인가."

"글쎄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만.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

"웅연 사매시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상냥하시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자랑하시는 분이시지."

다음으로 확인한 것은 곰 같은 귀가 달린 거구의 여인이었다.

[웅연]

[대상 위험도 수치 - 7]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55,115,256....]

흠.

이쪽은 처음 봤던 천호라는 남자와 달리.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이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대충 1년 정도 남은 셈인데.

'위험도 수치가 9와 7이라.'

그 후로도 몇 사람의 상황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이분은 사린 사매. 독술의 달인이시다."

"흐음흐음."

"신종 사형. 본문에서도 권각술로는 손꼽히는 분이시지.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라. 나와도 자주 놀아 주셨다."

"그렇구만."

그렇게 몇 사람을 더 확인한 결과.

위험도 수치와,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그 두 수치의 상관 관계가, 대충 파악이 되었다.

"여기서 가장 약한 게 너라고 했지?"

"그건. 부끄럽지만, 그렇지."

"얼굴에 그 부상 때문에, 전성기보다 약해진 상태고?"

"아쉽지만, 그 또한 사실이지."

이 녀석이 혼자서 눈을 뜬 이유도.

대충 알 것 같고.

그렇다면, 흐음.

곰곰이 머릿속으로 견적을 짜내 본다.

이거.

잘한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라!'

무심코 중얼거린 말.

그 말을 들은 서환이 내 어깨를 거칠게 쥐었다.

"바, 방법이 있다니. 그 말이 진심인가!"

"진심이긴 한데. 일단 진정하자...?"

"의, 의원도 아니고. 숙수가 그런 방법을 어떻게."

진정하라는 말은 쥐뿔도 안 통하는구만.

"문제는,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지."

"뭐?"

아마 먹힐 것 같긴 한데....

먹힌다고 해도 다 먹히진 않을 것 같고.

"설마. 뭔가 위험한 방법인 건가."

"음. 아마 그렇진 않을걸?"

내가 방법이 있다고 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독촉하는 서환.

"뭐. 그 방법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그럼 뭐하나, 최대한 빠르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이라니?"

"너. 아까 전에 날 못 믿는다고 금제를 걸었지?"

"...?"

사실.

널 못 믿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금제에 조건을 추가해라."

"...어떤 조건을 말하는 거지?"

"만약 내 덕분에 깨어난 이들이 나를 적대할 경우, 너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를 지킬 것."

"...!"

지금이야 까망이와 부대원들만으로도 이 녀석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다른 이들을 깨운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거든.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지. 애초에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네 모든 것을 받기로 했으니, 그것도 금제에 추가해야겠네."

"...네가 저들을 깨우려는건 네 부하의 무예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깨우지 않는다면 너도 손해일텐데."

"뭐래. 죽는 것보단 손해를 입는 게 낫잖냐."

"...."

"명심하자. 난 네 목숨만 살려준다고 했지. 저 녀석들을 깨워 줄 의무 같은 건 없어."

깨워 줄 수는 있지.

깨워 줄 수는 있는데.

그러러면.

계약을 좀 더 확실히 해야지 않겠냐.

이 녀석의 입장에서도, 동료들이 저렇게 눈 감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을 터.

나는 자신만만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믿겠다."

[금제가 추가됩니다.]

['신영준'이 천산문의 문도를 깨우는 것에 성공할 경우, '서환'은 신영준의 모든 명령을 듣기로 한다.]

[페널티 - 사망]

"좋은 선택이야."

그럼, 일단은....

분류작업부터 시작해 볼까.

* * *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된다고 하면 가능한 건 이 정도다."

내 눈앞에는, 3명의 수인이 누워 있었다.

[미호]

[대상 위험도 수치 - 3]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11,251,128....]

여우 여자.

[저칠]

[대상 위험도 수치 - 3]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9,784,734....]

돼지 남자.

[우진]

[대상 위험도 수치 - 3]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10,532,708....]

말 남자.

총 3인.

"...공통점이 있군."

"오? 눈치챈 거야?"

"전투 능력이 가장 약한 분들 아닌가. 물론 셋 모두 나보다는 강하시지만."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걸.

나는 서환을 보며 물었다.

"이 중에서 비동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녀석은 있나?"

"...미호 사매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

확실히.

이 셋 중에서 가장 남은 시간이 길기는 하다만.

"미호 사매는 본신의 무예 실력은 낮은 편이나... 본 문에서의 위치는 꽤 높은 편이니까."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거리낄 것은 없다.

나는 곧바로 요리의 준비에 들어갔다.

"...?"

내가 그림자 속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꺼내자.

의아한 듯 바라보는 서환.

"뭘 하려는 것이냐."

"말했잖아? 나는 요리사라고."

요리사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뭐가 있겠냐.

'요리지.'

내가 이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본 결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위험도 수치가 낮을수록,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든다.'

강한 존재일수록 봉인에 오래 얽매여 있어야만 하며.

약한 자일수록 빠르게 풀려난다는 것.

이 개념을 처음 깨달았을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은 강대해질 것이라.

'깊은 자들의 교황'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

시간이 지날수록 나타나는 존재들이 강해졌다는 얘기는 서환도 했었다만.

'딱 이 봉인 얘기랑 똑같잖아?'

강한 적일수록 나중에서야 풀려난다는 점이.

교황과 서환이 말한 이야기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 시점에서.

추측이긴 하다만.

이 봉인을 건 존재가 누구인지도 짐작이 갔다.

아마.

아니, 십중팔구는 맞을 것 같은데.

'...우리 세계겠지.'

이런 짓을 할 만한 존재는 달리 없다.

침공당한 세계.

그 세계의 방어 기제 같은 것이 아닐까.

'침공을 당하긴 했어도, 그냥 당해주진 않는다는 거겠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첫날부터 활동을 개시한다면.

침공 첫날에 세계가 멸망해 버릴 수도 있는 일.

이 봉인은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이 세계 자체가 건 봉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군부대를 습격한 괴물들 중에는, 딱 봐도 말도 안 되게 센 녀석들도 있었단 말이지.'

우리 부대를 습격한 리자드들은 그나마 양반.

우리 부대가 소규모 부대에, 상당한 가라 부대였기 때문일까.

어떻게든 봉인을 당할만한 강적은 아니었다고 치고 넘어갈 수 있다만.

탄약대대를 지키고 있던 거미 여왕.

벙커의 아리엘라.

전차대대의 눈깔 괴물까지.

이놈들은, 지금 생각해도 상대하기 버거운 강적들이었다.

이 봉인이란 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애초에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어야 정상일 존재들.

'서환도 말했지. 황궁을 무너트린 괴물은 어마어마하게 강력했다고.'

이 부분에 대한 답도.

사실 어느 정도는 추측하고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명백한 악의.'

그 악의가, 그 세계의 가장 강한 힘을 먼저 무너트리기 위해.

본래라면 봉인당해 있었어야 할 존재들을 강제로 풀어놓은 게 아닐까 하는 것.

이 추측대로라면.

어째서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괴물들이 나타나는지.

왜 군부대에는 유독 강한 이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는지.

모두 설명이 가능해진다.

'뭐.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살펴본 대로라면.

내 앞에 있는 이 녀석들.

'한 100일 뒤면 어차피 눈 뜰 거란 말이지.'

서환에겐 말 안 했지만.

문제는, 내가 그 100일을 기다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말이 100일이지.

이런 세상에서 3달 뒤에 내가 살아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당장에 광일이의 광기가 언제 사고를 터트릴지 모르는 일.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앞당긴다.'

100일 뒤에 풀릴 예정일 봉인.

그거.

바로 깨워 버리는 걸로 하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