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름 비장했던 내 각오가 무색하게도.
다른 괴물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비교적 수월했다.
"뭐지?"
"뭔가, 아까보다 기세가 떨어진 것 같은데요."
큰 부상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덤벼들던 괴물들이었으나.
그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주술사들과 연계하던 전술도 없고, 묘하게 우왕좌왕하는 모습.
-하, 하라발...!
"?"
그런 와중에, 몇몇 괴물들이 내 뒤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몸의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채 움찔거리고 있는 괴물.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녹색갈기 치프틴]이라고 돼 있었지.'
괴물들이 중얼거리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한 단어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라발.
[지휘관]
[녹색갈기 부족 워 치프틴 하라-발 VS 강철 군단 지휘관 김현석 중위]
"미친. 지휘관이었어?"
어쩐지 엄청 강하더라니!
분위기를 보아하니, 평범한 지휘관 정도도 아닌 것 같았다.
이 괴물들 사이에서 꽤 입지가 큰 놈이었던 듯.
놈의 시체를 보는 괴물마다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굳이 지휘관이 직접.... 음. 직접 올 만도 했나?'
생각해 보면.
저들이 이번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요새의 안쪽을 두들기는 것은 필수였다.
지휘관이 직접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작전.
실제로 녀석이 없었으면 우리 부대는 무난하게 적들을 처치했겠지.
녀석이 있었기에, 광일이가 쓰러지는 위기도 생겼다.
'뒤통수 갈겨 가면서 어찌어찌 처리했으니 다행이지.'
내가 나서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다른 곳에서 활약 중인 병사들도 놈에게 한 명씩 처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강한 광일이마저 쓰러트린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놈의 처치가 늦었을 때의 경우.
빠르게 놈들의 지휘관을 처치한 덕에, 적들은 우왕좌왕하며 기세를 잃었다.
결국.
"이놈이 마지막임다!"
"족쳐!"
투석기를 타고 요새 안쪽으로 들어온 괴물들.
그놈들을 모두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방심하긴 아직 일러.'
요새 성벽 밖.
성문에 막혀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할 뿐, 여전히 많은 괴물들이 남아 있다.
엄청난 숫자.
어떤 억지를 부려서 요새의 방어를 뚫으려 들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그렇게 나온다고 질 생각은 없다.
'나도 아직 남은 수가 있으니까.'
품 안에서 쉬고 있는 까망이는 물론.
가급적 사람들 앞에서 꺼내고 싶진 않지만.
아직 동원하지 않은 뱀파이어들까지.
놈들의 다음 행동에 따라, 나 역시 숨겨둔 수를 꺼내 들어야겠지.
그러기 위해 적들의 동향을 살피려고 하던 찰나.
"놈들이 물러갑니다!"
"어?"
어떻게든 요새를 공략하려 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적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벌써?'
아직 병력이 많이 남아 있는 놈들.
패전을 확정 짓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나 싶다만.
짐작 가는 이유는 하나.
"지휘관을 잃은 것 때문인가."
어떻게든 뚫으려면 뚫을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놈들은 지휘관을 잃은 상황이다.
제대로 된 지휘가 이뤄질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리 요새를 공략한다고 한들, 저쪽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
그런 큰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전투를 지속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확인해 주려는 듯.
띠링.
[점령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교전 세력]
[녹색갈기 부족 VS 강철 군단]
[지휘관]
[녹색갈기 부족 워 치프틴 하라-발 VS 강철 군단 지휘관 김현석 중위]
[교전 지역]
[대도시 (3)]
[교전 결과]
[강철 군단의 승리]
[첫 점령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첫 점령전 승리에 대한 보너스로, 보상이 지급됩니다.]
[단체 스킬 - 전쟁 노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
그리고.
[레벨이 상승합니다.]
[중급 요리사 Lv.30]
"...오."
레벨업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 * *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적들.
물론.
그걸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추격해라!"
"조져!!!"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을 상대로 치러진 이번 전투.
요새를 끼고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지.
야전이었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병력이라도, 방어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후퇴할 때.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적 병력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괴롭혀 주었다.
다 추격하면 오히려 역공을 당하겠다 싶은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난 뒤에야 요새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렇게 요새로 복귀하자.
[무당 : 굉장하군.... 정말 굉장해.]
태준이 녀석이 길드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지막까지 추격을 하면서 피해를 입힌 덕분일까.
직접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녀석이 상당히 흥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당 : 놈들이 입은 피해가 정말 엄청나군.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셰프 : 그 정도야?]
[무당 : 그 정도냐고? 네가 상상하는 이상일 거다!]
태준이 녀석은 산속에 처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
얼마 전까지는 저쪽과 정보전을 펼치느라 우리의 행보를 보지도 못했다 보니.
[무당 : 놈들은 자기들이 질 거라는 생각조차 안 했을걸.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고.]
그동안 우리 부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도 이르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격퇴했다지만.
생각보다 놈들이 후퇴하는 타이밍이 빨랐다.
'아마도 그 치프틴이란 녀석이 죽은 걸 알자마자 후퇴한 거겠지.'
이번에는 어떻게든 막아 냈다지만.
다음에도 우리가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무당 : 그렇긴 하다만. 놈들도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공격하는 건 힘들 거다.]
[셰프 : 음?]
금방 다시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만.
태준이 녀석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무당 : 놈들의 숫자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 병력을 지휘할 수 있을 만한 개체는 얼마 없을 거야.]
아.
확실히, 저 괴물 중에 특별한 강자는 드물긴 했었다.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수준의 괴물이었지.
이번에 쓰러트린 그 지휘관 같은 녀석.
그놈이 적들에게 있어서는 생각보다 중요한 전력이었단 건가.
[무당 : 이번 공격이 실패했으니, 같은 전력으로 공략을 하려면 더 뛰어난 지휘관이 있어야 할 텐데... 너희가 쓰러트린 놈보다 뛰어난 개체는 저들 사이에도 없거나, 있어 봐야 한두 마리 정도겠지.]
[셰프 : 더럽게 강하긴 했어.]
[무당 : 더 뛰어난 지휘관을 투입하기는 힘드니, 다시 너희를 공략하려면 몇 배는 더 되는 전력이 필요하다 판단하겠지. 그전까지는 지금 같은 요새 공략을 시도하기는 어려울 거야. 기껏해야 소규모 부대를 보내 괴롭히는 수준이 한계가 아닐까 싶군.]
이번과 같은 대규모 공세는 한동안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번 전투의 여파가 컸나 보네.'
반대로.
우리가 이번에 패배하거나, 후퇴하기라도 했으면 저놈이 이 일대를 휩쓸고 다녔을 테지.
요새니, 용아병이니.
그동안 꿍쳐 놨던 특전을 모두 쏟아부은 것으로 모자라.
'신력'까지 동원한 덕에 참사를 막아 낼 수 있었다.
"적들도 이번 피해 때문에 주춤할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뭐. 그것도 오래가진 않겠지. 결국 서쪽에 저놈들 본진이 있다는 건 변함 없으니까."
"끄응."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리가 놈들을 토벌해야 해."
민재 형이 그렇게 말하자.
병사 중 한 명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거 뭐 안 될 것 있습니까?"
"...응?"
"저 쇳덩이들만 있으면, 어렵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부대원들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요새의 성벽을 순찰 중인 병사들.
"맞네. 저것들이 있었네."
"솔직히 저것들이 나보다 강할 것 같은데."
[열화 용아병]의 모습이 보였다.
"저놈들. 신 병장님 말대로라면 몇 시간마다 한 마리씩 늘어난다는 거 아닙니까?"
"일단은 그렇지. 아직은 병영의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최대 200체까지가 한계긴 하지만."
"저런 녀석들이 200체라니. 그쯤 되면 괴물들 본진이고 뭐고...!"
음.
병사들은 용아병들이 활약하는 모습만을 봤으니.
이놈들을 무슨 전천후 무적 병기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만.
"아~ 그건 좀 어려울걸."
"예?"
한번 보면 알겠지.
나는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 용아병 한 마리를 보며 소리쳤다.
"거기 한 마리! 이리콤."
-....
내 명령을 인식한 듯.
우리 앞으로 삐걱거리며 다가오는 용아병.
"오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기깔나네."
검은 강철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기사.
나중에 가슴팍에 군단 마크 같은 거라도 하나 붙여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멋있는 건 맞는데, 그게 다거든.
난 눈앞의 용아병을 향해, 이번에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앉아."
-....
내가 명령을 내렸으나.
용아병은 반응이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몇몇 병사들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신 병장님...."
"너무하시네. 얘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앉아.'라니."
나는 병사들의 반응은 무시하고, 다음 명령을 이어 갔다.
"손."
-....
"뒤로 취침."
-....
"앞으로 취침."
-....
몇 가지의 명령을 계속해서 내려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용아병.
"...봤지?"
"뭘요?'
몇몇 병사들은 뭐 하시는 거냐는 듯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눈치가 좋은 병사들은, 명령이 거듭될수록 인상을 찌푸렸다.
그중 한 명인, 서수혁 상병이 말했다.
"제한적인 명령밖에 수행하지 못한다. 이겁니까?"
"바로 그거야."
이놈들.
와라, 가라, 공격해라, 방어해라 정도의 명령은 어느 정도 알아먹는다만.
그 외의 명령은 못 알아먹는다.
몇몇 게임에서 고용 가능한 NPC들이 떠올랐다.
어디 가서 공격하라든가 그런 명령은 참 기깔나게 수행한다만.
그 외에는 간단한 명령도 못 알아먹는 경우가 대다수인 NPC들.
"사실 전투도 비슷해. 공격은 빠르고, 방어력도 뛰어난데. 임기응변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를 이끌어 가는 센스가 없거든."
"아...."
"신체 스펙 자체는 버프 없는 광일이랑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로 맞붙으면 십중팔구는 광일이가 이길 거다."
이놈들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은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저 성문 틀어막기 같은 것.
좁은 곳에서 치러지는 전투는, 변수랄 게 거의 없다.
그렇기에 용아병들의 성능이 십분 발휘되었다만.
"우리가 공격을 나서는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지."
"...아무래도 공격 측은 능동적인 상황 판단이 필수니까요."
사실.
설명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열화 용아병]
[강대한 힘을 지닌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용아병들은, 용들이 자신들의 창고를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최고의 수호자들입니다.]
[보물창고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병사들인 만큼, 무언가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서 높은 효율을 자랑합니다.]
'방어에 특화된 수호자.'
이 말대로.
공격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방어용 병력에 가깝다는 것.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놈들.
"AI가 개구려."
병사들이 묘한 눈으로 용아병들을 쳐다보았다.
이전의 멋있는 기사를 보는 눈은 온데간데없는....
"...."
고철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 * *
그렇게, 전투의 뒤처리가 진행되고.
그마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쯤.
나는.
생활관의 한 방을 찾아갔다.
문을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자.
"뭐하냐?"
"아, 신 병장님...."
방 안에서 궁상을 떨고 있던 거구.
전광일 상병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할 거 없으면 면담 좀 하자."
간만에.
군단장다운 일도 해 봐야지 않겠어.
139화 돌고 돌아 취사병이냐.
전투 뒤처리가 어느 정도 끝난 뒤.
"일단 임시로 지급해 드린 장비 말입니다만."
이번 방어에 협력해 준 각성자들.
그들에 대한 보상을 지급할 차례가 되었다.
"그대로 가져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오...!?"
[군단제 보급 전투복]
[군단제 보급 장검]
이번 전투에 대비해, 급하게 탄약대대 쪽에 연락을 해 만든 장비들.
급조한 장비들이긴 하다만.
그동안 생산직 부대원들의 실력도 꾸준히 올랐다.
내가 봐도 꽤 쓸 만하다 싶은 수준.
이상아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장비들과 비슷한 급이었다.
"이걸 정말로 그냥 준다고?"
꽤 쓸 만한 장비긴 하다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대원들한테 지급되는 장비에 비하면 애매한 것도 사실이니까.
"장비들은 어디까지나 감사 표시입니다. 본래 약속했던 대가도 치를 예정이니."
"이, 이런 장비를 그냥 주면서 따로 보상까지 챙겨 준다고?"
전투식량이나, 그 외에 군단에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가능한 선에서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우리 입장에서야 전투식량 같은 건 넘쳐 나기에 가능한 일.
물론 저들의 능력을 감안하면 전투 한 번에 주기엔 과한 보상인 것도 사실이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이유는 있다.
'앞으로 우리 길드만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 많아질 거야.'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때도 있을 테지.
도시를 버리고 도망쳐도 됐을 텐데, 협력을 약속하고 끝까지 싸워 준 이들.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둬서 나쁠 것은 없다.
'부대원들도 외부인들한테는 영 까칠하지만, 한 번이라도 같이 싸워 본 사람들한테는 꽤 호의적이고.'
당장은 조금 퍼 주는 느낌도 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조금 퍼 주더라도 이들을 성장시키는 게 군단에도 이득이 되겠지.
* * *
자세한 보상에 대한 것은 다른 병사들에게 맡기고.
나는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 의자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첫 점령전 승리에 대한 보너스로, 보상이 지급됩니다.]
[단체 스킬 - 전쟁 노래]
점령지를 가지고 있는 다른 세력과 처음으로 벌인 전쟁.
그 전쟁에서 승리한 보상으로 얻은 단체 스킬.
그 이름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이거 아마 그거겠지?'
저 괴물들이 부르던 노래.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자, 그 노래가 하나의 피어가 되어 적들에게 버프를 부여했었다.
그것과 비슷한 스킬인 셈인데....
"...미필들한테는 군가도 가르쳐야겠네."
아무튼 유용한 버프가 생긴 셈.
아마도 광역 버프일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좋은 스킬이었다.
이건 그렇다 치고.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그다음으로 받은 보상.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이것 자체는 뭐.
흔히 보던 메시지다.
괴물을 처치할 때마다 나타나던 메시지.
이번에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레벨이 상승합니다.]
[중급 요리사 Lv.30]
저 보상으로.
내 레벨이 30에 도달했다는 것.
[승급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이 게임이라고 한다면.
10레벨 단위는 일종의 전직 포인트였다.
'20레벨 찍은 지도 꽤 됐으니까.'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중급 다음이면 역시 고급이려나?"
지금 내 직업은 '중급 요리사'
길드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게 나다 보니, 다음 단계의 직업명이 무엇일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도 나였다.
견습, 하급, 중급.
지금까지 거쳐 온 단계를 생각해 보면, 다음은 고급이나 상급 같은 게 아닐까?
[요리사의 경지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요리사들은, 자신만의 색채를 지니게 됩니다.]
[중견 요리사라 할 만한 단계를 지나, 이제 요리사로서 일가를 이룬 당신!]
[당신이 걸어온 요리사로서의 길이, 그 색을 이룰 것입니다.]
[플레이 로그를 분석합니다.]
[...분석 중.]
[승급이 완료되었습니다!]
[Lv.30]
[전쟁 요리사]
내게 주어진 새로운 직업명은....
전쟁 요리사였다.
[당신의 요리는 무엇보다 전장에서 그 빛을 발했습니다.]
[전투와 관련된 요리 효과가 배가됩니다.]
[대규모 요리의 효율이 대폭 증가합니다.]
[....]
[....]
[모든 특성이 고급으로 진화합니다.]
[스킬을 획득합니다.]
[스킬 - 보조 셰프]
레벨업으로 인해, 직업의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갔다.
모든 특성이 강화된 것은 물론, 새로운 스킬까지.
여러모로 많은 걸 얻었으나.
"전쟁 요리사...."
내 새로운 직업명.
뭔가 기분이 묘했다.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조금 있어 보이긴 한다만.
이거 암만 생각해도.
"취사병 아니냐?"
...뭐랄까.
돌고 돌아 제자리라는 느낌.
일개 취사병 병장으로 시작했다.
괴물들을 처치하면서, 참 여러모로 개같이 구르기도 했다.
그 결과, 나름대로 시스템이 인정하는 고레벨 구간에 들어선 것 같다만.
'그 결과가 취사병이라니.'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눈앞에 나열되는 효과를 읽어 보니.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전투에 관련된 요리 효과나, 대규모 요리 효율이 대폭 증가된다라....'
요리사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중요하단 것은, 얼마 전에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평범한 요리사들의 목표가 손님들의 전투 능력을 올리는 것에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난 대부분의 요리를 전투 목적으로만 만들었다.
그 결과, 전투에 특화된 요리사로 전직하게 되었단 거겠지.
"괜찮네."
어차피 앞으로도 전투 목적으로 요리를 제작하게 될 일이 많을 테니까.
그쪽으로 특화된다는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확인할 것은, 스킬.
10레벨 단위로 전직을 거칠 때마다, 새로운 스킬이 하나 공짜로 지급된다.
[보조 셰프]
이번에 얻은 스킬은 이것.
[훌륭한 요리사들은, '셰프'라는 명칭으로 불리고는 합니다.]
[치프와 어원을 같이 하는 이 단어는, 주방의 요리사들을 지휘하는 수석 요리사.]
[즉, 주방장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요리사들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헤드 셰프로서의 자질 역시, 요리사의 필수 소양!]
[보이지 않는 보조 셰프들이 당신의 작업을 보조합니다.]
"?"
설명에 의하면.
내 요리 작업을 돕는 보조 요리사가 생긴다는 뜻인데.
뭐.
직접 써 보면 알겠지.
그런 생각에 스킬을 사용해 봤는데....
"...이게 된다고?"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 * *
이번 전투로 인한 보상들의 확인이 끝난 뒤.
나는 생활관의 한 방을 찾아갔다.
문을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자.
"뭐하냐?"
"아, 신 병장님...."
방 안에서 궁상을 떨고 있던 거구.
전광일 상병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할 거 없으면 면담 좀 하자."
예?
전광일 상병이 인상을 썼다.
부대 대장이 와서 면담하자고 하면 일단 경계심부터 드는 게 당연하겠지.
"혹시 지난번 일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아시잖습니까. 광기 효과."
"알긴 아는데."
그때 한 말이 광기 효과가 전부는 아닐 것 같아서.
라고는 말 못 하겠고.
"그거랑 별개로. 부대원들 면담 한번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김 중위님이 어느 정도 하고 있는 일 아닙니까? 무슨 예전 대대장님도 아니고 갑자기 왜...."
"나 얼마 전에 죽을 뻔했다."
"예?"
갑작스러운 말에.
전광일 상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쪽팔려서 말은 안 하고 다녔다만. 아무튼."
"어, 언제 말입니까? 이번 방어전에서 제가 기절해 있을 때...."
"그때 말고. 저놈들이 암살자 보냈을 때."
"아."
그때.
광일이 녀석은 상처 없이 적을 격퇴했던 걸로 기억한다.
반면 나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가 꽤 잘 살아남고 있잖냐."
"그렇죠."
"그동안 위기도 잘 헤쳐 나갔고. 슬슬 길 지나가다가 괴물한테 죽을 위험은 없겠다 싶어져서... 방심했거든."
"...."
"그때 딱 그 암살자 놈들이 오더라. 까망이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시체가 됐을 거다."
광일이 녀석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역시 그 뱀파이어들 외에도 호위병을 따로 두시는 게."
"그것도 고려해 보긴 해야겠지. 지금 여기에 내 얘기하자고 온 건 아니고. 나처럼 해이해졌다거나,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쪽에 신경이 팔려 있다거나. 그런 놈들이 있을 수 있잖냐. 혹시 모르니 해결해 두고 가려는 거지."
"...으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의 광일이.
저런 상태여서야, 듣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듣기 힘들겠지.
하지만.
"광일아."
"예."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야. 대충 넘어가면 나중에 큰 사고가 될 수도 있는."
"그건 이해합니다만. 전 딱히 문제랄 게...."
"그리고 난, 부대가 살아남기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
"...?"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광일이.
난 그 앞에, 두 종류의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한쪽에 있는 것은, 간단한 볶음밥과 고기볶음.
그리고 반대쪽에 있는 것은, 종이컵에 든 작은 사탕 하나.
[전쟁 요리사의 솔직한 감정의 알사탕]
"이건...."
"먹으면 아주 약간 솔직해지는 사탕."
"...허."
다른 말로는, 음.
세상에서 가장 달달한 자백제라고도 한다.
[특별 소스]를 통해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를 제외하면 민재 형뿐.
광일이 녀석은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역시 신 병장님. 이런 것도 가능하시군요."
"내가 좀 잘났잖냐."
대충 '이 사람이면 이런 것도 가능한가 보다' 하고 넘기는 눈치였다.
"맛은 보장한다. 사탕이지만 건강에도 좋고."
"...."
"먹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허. 말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여유롭게 멘탈 클리닉 할 시간은 없어서."
내가 생각해도 조금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알사탕을 바라보던 광일이 녀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냥 말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난 알사탕을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남겨진 요리를 본 광일이가 물었다.
"그럼 이 요리들은 뭡니까?"
"아, 이거?"
씨익.
"그냥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입 심심하잖냐."
* * *
과거에도 한 번.
이 녀석과는 꽤 진솔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친해지면 친해졌지.
거리가 멀어지진 않았다 보니.
한번 말하기로 마음먹은 녀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민을 스스럼없이 풀어놓았다.
다만.
그 얘기를 듣는 나는.
'이게 무슨 소리야.'
싶어진 게 문제지만.
"그러니까."
"예."
"...내가 너무 잘나서, 무슨 문제든지 다 해결해 버리니까. 너나 다른 병사들은 쓸모없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드셨다?"
고개를 끄덕이는 전광일 상병.
"대충 그렇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강해졌는데,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안 되고. 나와의 격차가 벌어지는 느낌에 자괴감이 들었다. 맞냐?"
"옙."
내가 잘못 이해한 건 아닌가 보군.
이야기를 모두 정리한 나의 감상은, 간단했다.
'그건 어디 사는 초인이야....'
병사들이 날 과대평가하는 건 알고 있었다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이 녀석은 말 그대로 나를 무슨 초인처럼 알고 있었다.
너무 대단한 나머지, 자신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뿐인 초인.
대표적인 게 바로.
"내가 싸움에 안 끼는 이유가, 너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양보하기 위함이라고...?"
"그럼 아닙니까?"
"...."
내 직업은 [요리사].
원래가 후방 지원직이다.
전면에서 싸울 때도 있기는 하다만.
비전투직이 전투에 끼는 게 효율이 좋을 리가 있나.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에는 요리로 지원하는 데에 그쳤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것마저 이상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나서면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적들.
그런 적들을, 부대원들의 성장을 위해 양보하는 것이라고.
'돌겠네.'
스트레스에 미간을 매만지고 있자.
광일이가 말을 이었다.
"전 신 병장님 덕에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든 갚고 싶다는 생각도 있구요."
"어어, 그래."
"하지만 은혜를 갚기는커녕... 민폐만 끼치는 꼴이니."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긴 한데. 일단 이해했어."
병사들이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단은 내가 길드장... 군단장이라는 위치에 있기도 하니.
'그런 오해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부담스럽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니까.'
언제, 어디서 죽음이 다가올지 모르는 세상.
그렇기에.
리더는, 언제나 강한 인물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자기들 대장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속원들은 안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조금은 일부러 방치해 둔 것도 있다만.
"누굴 탓하겠냐. 방치해 둔 내 잘못이지."
"예?"
"됐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내가 몸을 일으키자.
광일이 녀석이 의아한 듯 말했다.
"일어나자니. 여기가 제 방인데요...?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얘기십니까?"
"훈련장."
"훈련장은 왜...."
신장 2.3미터에 달하는 거구.
앉은 상태에서도 나와 눈높이가 비슷한 녀석에게.
"식후 운동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말했다.
"스파링 좀 해 보자고."
* * *
[Lv.2 훈련장]
포인트를 투자해 만든 시설이다.
이곳에서 훈련을 하면 효과가 증대된다거나.
훈련만으로도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거나.
뭐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만.
그건 지금은 중요하지 않고.
"전광일 상병님 오셨습니까."
"어, 신 병장님도 같이 오신 겁니까?"
안쪽에서는 열심히 훈련을 진행 중이던 전사들이 보였다.
전사로 각성한 이들은 성장판도 각성을 하는 것일까.
죄다 엄청난 키와 근육을 자랑하는 헬창들뿐이었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이 사이에 껴 있자니, 영락없는 난쟁이가 되어 버렸다.
조금 민망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광일이랑 할 일이 있어서. 미안한데 잠깐만 비켜 줄래?"
"아, 예. 뭐어."
"안 그래도 거의 끝나가던 참이었슴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워 주자.
나는 말 없이 구석으로 가서 목제 단검을 주워 들었다.
"스파링이라...."
전광일 상병 역시 글로브를 끼며 중얼거렸다.
"병사들을 내보내신 건, 저를 배려해 주신 거군요."
"응?"
"아무래도 제가 전사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얻어맞는 모습을 남들한테 보이면 안 된다는 거겠죠.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어, 뭐. 그렇다고 치자고."
난 헛소리를 하는 녀석 앞에 선 뒤.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해라."
"압니다. 전력으로 하지 않으면 금방 결판이 나 버릴 테니."
툭툭.
서로의 무기를 두 번 부딪힌 뒤.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분쯤 지났을까.
철푸덕.
바닥에 쓰러진 것은.
"지, 진심으로 하란다고 진짜 선임을 개 패듯 패네."
"...."
"야 이 양심도 없는, 으웨엑."
당연하지만.
나였다.
140화 상병 전광일
"지, 진심으로 하란다고 진짜 선임을 개 패듯 패네. 으웨엑."
"...."
제기랄.
진짜 더럽게 아프네.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는, 솔직히 나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요리사답게 전투 특성은 거의 없는 나다만.
[절대 미각]의 효과나, 아리엘라를 상대로 한 흡혈 등.
깡 스탯 하나만큼은 엄청난 편이었으니까.
그 자신이 사라져 버린 것은.
스파링 시작 후 5초쯤 지났을 때.
뭐랄까....
일방적인 구타였지.
"신영준 병장님."
"끄윽. 아파 죽겠네. 뭐 임마."
"진심으로 해 주십쇼."
내가 아파 죽거나 말거나.
광일이 녀석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뭔 개소리야. 완전 진심이었는데."
"...신 병장님이 얼마나 강한지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이런 짓은 저를 모욕하는 거라고밖에."
"크흐흐. 그럼 너도 [광기]를 최대한으로 해방하시던가."
아직도 저 소리냐.
나는 바닥에 누운 채 헛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광일아."
"예."
"재밌는 거 하나 보여 줄까."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은 뒤.
나는 품속에 있던 전투식량들을 꺼내 들었다.
'언제나 강한 척만 하는 것도. 슬슬 질리던 참이니까.'
이 녀석이라면.
조금은 약한 모습을 보여 줘도 되겠지.
서로 다른 종류의 전투식량들.
나는 그중에서 네 개를 골라, 한입에 집어넣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일반적인 경우.
요리의 효과는 한 번에 하나만 적용된다.
여러 요리를 한 번에 먹는다고 한들 유의미한 추가 버프는 없다는 것이.
병사들에게 알려진 상식.
하지만.
[절대 미각(강화)]의 효과로 인해.
내게는 요리의 버프가 중첩된다.
[적용 중인 요리 효과 - (4)]
"...!"
요리의 효과가 적용되자.
전신을 가득 채우는 힘이 느껴진다.
힘, 민첩, 마력.
능력치는 물론.
요리사인 나로서는 가질 수 없을.
강력한 특성들까지.
"드디어 진심으로...!"
내 기세가 변하자, 이제야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고 착각한 것일까.
희열을 느끼는 듯한 놈이었으나.
"끄어억."
"?"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다.
녀석에게 얻어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신 병장님? 대체 무슨!"
"크, 크큭.... 재밌는 거 보여 준다고 했잖아. 봐."
당황스러워하는 녀석에게 팔을 내밀자.
내 팔을 본 녀석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이건."
주먹을 쥔 손.
내가 봐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빠지지지직....
"근육이, 뒤틀리고 있는 겁니까...?"
"재밌지? 당사자는 죽겠다, 야."
멀쩡한 근육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과도하게 많은 버프를 몸에 몰아넣은 대가.'
[절대 미각]으로 인해 안 그래도 요리의 효과를 증폭시켜서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효과가 증폭된 요리를 하나도 아니고 몇 개씩 쑤셔 박아 버리니.
몸이 요리의 효과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있나.
이렇게, 비명을 내지르고 마는 것이다.
"네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냐. 정확히 말하면. 반쯤 정답이지."
"그게 대체 무슨."
"맘만 먹으면 너보다 강해질 수 있기는 해. 근데 너도 알잖냐. 난 전투직이 아니라는 거."
요리사라는 직업이 최소한 레어 클래스에 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
전투직이 아닌 서포터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레어 서포터든, 일반 서포터든.
서포터는 서포터거든.
"이게, 비전투직이 강해지기 위한 대가란 거야."
"...."
식은땀을 흘리며, 내 팔을 바라보는 녀석.
"사실 원래라면, 이 정도 요리를 한 번에 먹은 시점에서 몸이 터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걸."
"예!? 몸이 터져 죽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니. 평범한 경우에 그렇다는 거고. 나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해. 아니었으면 진작에 몸이 터져 죽었겠지."
과도한 버프는 몸에 큰 부담을 준다.
내가 아무리 높은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버틸 수 없었어야 정상.
그럼에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아리엘라의 피.'
과거 아리엘라의 피를 한계까지 빨아들이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몸이 뱀파이어에 가까워졌다.
'그 결과 얻게 된 회복력.'
그 회복력이.
이 부작용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고 있었다.
몸을 파괴시키는 과도한 버프.
그렇게 몸이 파괴됨과 동시에, 파괴된 몸을 회복시키는 귀족의 피.
"자주 싸우지 않는 이유? 매번 이 꼴 나면서까지 싸우긴 좀 그렇잖아. 애초에 난 서포터니까."
아무리 저 회복력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해 준다고 한들.
이 회복력의 근간은 괴물에게서 온 것.
마냥 이것만 믿기에도 부담이 컸다.
혹시라도 이 재생력에만 의존하다가, 어느 순간 선을 넘어 버린다면.
그대로 뱀파이어가 돼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 하지만. 대부분의 위기는 신 병장님이 모두 처리하셨잖습니까. 전투뿐만이 아니라, 요리로 위기를 해결하신 적도...."
"뭐... 그건 그렇지? 내가 싸움은 못해도 요리는 좀 잘하거든. 카하하."
"...."
전투 쪽은 이런 상황이지만 뭐.
요리 쪽은, 솔직히 좀 자부심이 있거든.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농담할 기분은 아니라는 듯, 눈빛으로 바라보는 녀석.
"뭐. 방금 건 그냥 해 본 말이고."
나도 조금은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 된단 거야."
"...."
"잠깐 싸우는 건 가능해. 네 말대로, 저 부작용만 버티면 너보다도 훨씬 강해질 수 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뿐이다. 부작용도 명확하고."
요리로 인한 버프가 없어지는 순간.
내 전투 능력은 광일이는커녕.
전사조의 중상위권과 비슷하거나, 그것보다 못해지겠지.
"같이 싸워 주는 병사들이 없었으면, 난 진작에 시체가 됐을 거다."
"그, 그렇군요."
"너희들이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넌 엄청 도움 되고 있으니까."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전광일 상병.
얼굴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런 것 치곤 아직도 불만 있는 얼굴인데."
"아. 그건."
잠깐 대답을 망설이던 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제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건 변함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이해를-"
"서포터인 신 병장님이 이렇게 무리를 하시는 이유는. 결국 다른 병사들의 힘만으로는 모자란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음."
그건 뭐.
그렇긴 하지.
다른 부대원들이 충분히 강했다면.
내가 머리 싸매 가면서 요리를 만들고 난리 칠 필요도 없었을 거다.
그냥 버프만 주면 그걸로 충분했을 테니.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해진단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너만 해도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강해."
"신 병장님이 이루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
어쩐다.
이 녀석의 마음에 박힌 패배감과 조급함.
가볍게 뽑아내기엔, 너무 깊게 박혀 있는 느낌이다.
'아니. 이렇게 강한 놈이 조급할 게 뭐가 있다고.'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성장한 녀석이 이러니.
뭐 어떻게 해결을 해 줘야 할지 감도 안 온다.
내가 이 녀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해진 듯하다만.
그것과 이 녀석이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별개니까.
'하필 비교 대상이 나기도 하고.'
내가 좀 잘난 게 아니잖냐.
나랑 비교해서 모자라다 느끼는 것이라면 특히나 힘든 문제가 돼 버린단 말이지.
사실.
방법이 있기는 하다.
심플하기도 하고, 한 방에 해결 가능한 방법.
쓰읍.
'요리를 쓸까?'
과한 [용기]의 요리를 먹임으로써, 겁 많던 이 녀석은 '광전사'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스스로의 모자람에 자격지심을 느낄 뿐.
어떤 강적을 만나도 겁도 없이 들이대는 건 여전하다.
전력을 다한 요리에, 전력을 다한 [특별 소스]를 담아 먹인다면.
저 패배감을 흔적도 없이 밀어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그러고 싶진 않네.'
이놈이 광전사가 된 것.
어느 정도... 아니.
100% 내 탓일 것이다.
그 순하던 녀석이 미치광이 광전사가 되어 버린 거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한 사람의 인격을 개조해 버린 셈.
심지어 그게 어떤 범죄를 저지른 녀석도 아니고, 착해빠진 저 후임이었으니.
솔직히,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상이 범죄자라거나.
아니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평생 영향이 갈 만큼 강력한 [특별 소스]를 사용할 생각은 없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히, 내 설득이 아예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닌 듯.
"제가 신 병장님께 도움이 되고는 있다는 점. 잘 알았습니다."
"그건 뭐. 알아먹었다니 다행이네."
"예. 괜한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뭐, 그런 건 사과할 필요 없고. 굳이 사과하려면 선임을 개 패듯 팬 점을 사과해야...."
일단 내게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만은 전달이 된 듯하니.
당장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기가 죽으면 내게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안 지금.
'차라리 죽게 두시지 그랬냐' 따위의 헛소리를 하진 않을 테니까.
"신 병장님."
"어."
"저.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러냐."
이 녀석이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신 병장님이 직접 싸울 필요도 없다 생각하게 되실 정도로. 강해질겁니다..., 무조건."
스스로 강해지는 것 외에는 해결법이 없는 일.
그렇다면.
"고생해라. 도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하하. 예!"
나는 그저 믿고 기다려 주면 되는 거다.
이 녀석이,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강해질 때까지.
* * *
그 후로도 몇몇 병사들과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이 끝난 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병원 Lv.2]
병원이었다.
"아, 군인분...!"
"아. 누워 계셔도 됩니다."
안쪽으로 이동하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 부대의 병사는 아니었다.
도시 방어에 협력한 각성자도 아니고.
"누워 있으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 괴물 놈들한테 구해 주신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번 전투에서 괴물 측에 서 있던 인간들.
놈들이 끌고 온 전차를 조종하던 노예병들이었다.
놈들이 후퇴하는 것을 계속 추격하며 피해를 입힌 탓일까.
노예로 굴리던 이들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던 모양.
이들은 그대로 우리 부대에 구조되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잡아먹겠다는 협박을 들어서."
"듣기만 한 게 뭐야. 실제로 몇 명은...."
그들의 말을 들은 나는 조금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협박이라니. 저놈들이 한국말도 한답니까?"
"아아. 전부 그런 건 당연히 아닙니다만. 자기들을 주술사라고 자칭하는 괴물들이 있습니다. 다른 괴물들하고 다르게 징그러울 정도로 빼빼 마른 놈들입죠."
아.
확실히 마법 같은 걸 사용하던 괴물들이 있었지.
그놈들이 강 사이에 길을 만들어 버린 덕에 꽤 당황했었지.
"놈들 중 일부가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익힌 것 같았습니다."
"어눌하긴 했습니다만...."
괴물들이 언어를 익힐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만.
인간을 노예로 쓰는 괴물이 있을 줄이야.
"실례가 안 된다면. 여러분이 있던 곳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만."
"아, 예.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이들에게 들은 서쪽의 상황은 대충 이랬다.
강원도 서부의 도시들 중 반 정도는 이미 놈들이 차지한 상태.
그 와중에, 도시에 숨어 있던 인간들 역시 괴물들에 의해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저항한 사람은 죽이고, 그 외에는 노예로 삼은 겁니까?"
"아뇨. 저항한 사람들을 모두 죽인 건 맞습니다만. 투항한다고 살려 둔 건 아닙니다."
"?"
"저희들처럼 그나마 쓸 만한 구석이 있다 싶은 사람만 노예로 살아남은 거죠. 그 외에 쓸모가 없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
나도 속으로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살아남은 인간 숫자가 적은데. 서쪽은 사실상 전멸이라 봐야 하는 건가.'
차라리 모두 노예가 되었다면, 언젠가 구출이라도 해 보았을 것을.
얘기를 들어 보면 노예로나마 살아남은 인간조차 소수라는 것 아닌가.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력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데.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럼, 노예가 된 사람들의 대우는 어떻습니까?"
"아.... 말을 안 들으면 심하게 구타할 때도 있고, 심할 땐 그대로 잡아먹히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심하게 거역하는 게 아닌 이상 죽이진 않습니다. 쓸 만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살려서 쓰려고 하는 것 같더군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노예가 된 사람들은 당장 죽을 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상황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
언젠가는, 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도 탈환해야만 한다.
* * *
"그 후로는 어때?"
"태준이 녀석 말대로 대규모 공세가 올 기미는 없다. 하지만."
민재 형은 지도의 몇 군데를 체크했다.
"여기서 수십 마리 단위의 녹색갈기들과 교전이 있었다. 용아병들이 있어서 어떻게든 격퇴하긴 했다만."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만."
태준이 녀석이 말한 대로.
놈들은 우리의 요새를 뚫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 요새를 중심으로 더 많은 방어시설들이 설치될 것이고, 용아병까지 있다.
안 그래도 방어전에 특화되어있던 우리 부대.
어지간히 전력을 모아서 오는 게 아닌 한,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저들이 선택한 것은
'게릴라전.'
숫자가 넘쳐 나는 저들이기에 가능한 선택.
게릴라전은 이렇다 할 지휘관도 필요 없다.
그냥 퍼져서 이 근처의 사람들을 습격하면 그만.
"용아병들 덕에 순찰대의 숫자를 늘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당장 피해가 크진 않다만."
"작은 피해라도 조금씩 쌓이다 보면 커지는 건 시간 문제겠지."
저 게릴라전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역으로 저들의 본진을 토벌하기 전까진.
'토벌이라.'
요새도 있고 하니 방어에는 자신이 있다만.
문제는 공격.
일반적으로 공성 측은 수성 측의 3배 전력이 필요하다던가.
"...그게 되나?"
현시점에서는 까마득했다.
'애초에 생존해 있는 인간들의 숫자가 한정적인 게 커.'
인간들을 아무리 끌어모은들.
그 숫자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숫자의 한계를 돌파하려면, 병사 한 명 한 명이 엄청나게 강해져야 하는데."
"아무리 레벨을 올리고 좋은 장비를 챙긴다고 한들... 그 정도 수준까지 강해질 수가 있을까?"
지금도 다른 각성자들과 비교하면 강자들이 즐비한 우리 부대다만.
저 '녹색갈기'와의 전력 차이를 따라잡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고 하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
최소한 우리 부대만으로는 불가능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 병장님? 회의 중이신데 죄송합니다만."
"무슨 일이야?"
"그게, 상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할 얘기가 있다고...."
우리 부대에 상인이 찾아왔다.
처음 보는 인물은 아니었다.
"왜 있잖습니까. 저번에 신 병장님이 찾던 정보를 알려 준."
"아~ 그 사람. 직업이 상인이라고 했었지."
"예. 김 중위님이 일단 맞이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신 병장님도 같이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흠."
분명 이름이 상협이었나.
이상식욕자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제보해 줬던 인물이었지.
'나한테는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니.'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병사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이상협이라고 합니다."
"김현석 중위라고 합니다. 편하게 김 중위라고 불러 주시오."
그러자.
김 중위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상인이라는 양반이 우리 부대를 찾아온 이유가 뭔지 듣고 싶소만."
"실은, 상행을 떠나 볼까 합니다."
나름 규모 있는 집단의 대외적인 리더라는 걸까.
분위기 잡는 김 중위를 보니 조금 오그라드네.
"상행이라?"
"예. 실은 거기에 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왜 우리 길드를 찾아왔나 했는데.
그는 먼 곳으로 떠나는 상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듯했다.
거기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 싶다는 얘기.
그나저나.
상행이라니.
"...어디로 말인가?"
김 중위 역시 나와 같은 의문을 품은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상인에게 물었다.
'상행을 갈 만한 곳이 있나?'
사방에 넘쳐 나는 건 괴물뿐.
물건을 사고팔 만한 사람이 있어야 상행도 성립할 수 있을 텐데.
"크흠. 이건 지금 저만 알고 있는 정보입니다만."
"?"
"여기서 북쪽... 양구군 쪽으로 올라가면, 꽤 큰 집단을 이룬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군인 여러분들에 비견될 정도로요."
"...!"
"그런 이들이라면 쓸 만한 물건들도 많을 테니, 상행을 떠나볼 만한 가치도 충분하죠."
그 후로도 뭐라 뭐라 얘기하며 김 중위를 설득하려 드는 상협이었으나.
내게는, 그 내용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내게 중요한 내용은, 단 하나.
'우리랑 비견될지도 모르는 집단이 있다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고민이 뭔가.
단체의 힘을 키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늘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부대원들의 성장에는 시간이 걸리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가장 빠르게 힘을 키우는 방법이, 하나 있잖아.
동맹.
이미 강한 힘을 가진 다른 세력과.
그 힘을 합치는 것.
"물론 공짜로 도와 달란 얘기는 아닙니다. 군인 여러분들에게도 득이 될 만한...."
"갑시다."
"예?"
김 중위와 대화하고 있던 중이었으나.
뒤에 있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놀란 눈을 하며 내 쪽을 쳐다보는 상협.
"그 상행. 같이 가자고요."
141화 어딜 사기 치려고 하고 있어?
우리 길드를 찾아온 상인, 상협.
그는 과거 내가 요구한 정보를 가져다준 전적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 길드와 이렇게 직접적인 거래를 틀 수 있게 되었지.
그때는 그냥 '우연히 지하 수로의 소리를 들은 건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만.
이제 보니.
나름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식재료 감별(강화)]
[이상협]
[최하급 상인 Lv.9]
[특성]
[최하급 정보 습득 숙련]
'정보 습득 숙련이라?'
우리 부대원들 중에서도 저런 특성을 가진 사람은 본 적 없다.
아마 상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란 거겠지.
우리 역시 정수아의 [정령안]이나, 태준이 녀석의 [점성술]을 통해 주변의 정보를 모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춘천 내부의 위험을 탐색하는 데 주력하는 편.
다른 지역의 정보는 알 길이 없었다만.
이 상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북쪽에 있는 도시.
그곳에 꽤 큰 인간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게다가 양구라....'
저 녹색갈기 부족들이 자리 잡고 있는 도시는 철원과 화천.
강원도의 서북부 외곽이었다.
'아리엘라의 말대로라면, 검은 장벽 때문에 강원도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 잡고 있는 도시가 춘천.
그리고, 그들이 있다는 양구.
두 도시에서 방어선을 펼친다면.
저 괴물들은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진 채, 포위를 당하게 되는 위치였다.
그 세력과 동맹을 맺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상행. 같이 하자고요."
"그. 김 중위님? 저분은...."
"아아."
그게, 내가 이 대화에 끼어든 이유.
갑자기 내가 대화에 끼어들자 조금 당황한 듯한 김 중위였으나.
그도 이제는 꽤 긴 바지사장 경력을 자랑하는 편.
"신영준 병장. 우리 부대 최고참 병사 중 한 명이오."
"...!"
"영준아. 그래도 얘기하는데 말은 하고 끼어들어야지."
"죄송합니다, 김 중위님. 그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우리 부대에 간부가 한 명뿐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알려진 사항.
그 당사자인 김 중위는, 자연히 우리 부대의 지휘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병장...!"
최고참 병사라는 것은 즉.
김 중위 다음가는 부대의 권력자라는 뜻.
"바, 반갑습니다. 저는 이상협이라고 하고, 직업은 상인...."
"예. 반갑습니다."
상협에게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김 중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끼어든 건 죄송합니다만, 김 중위님. 그 상행,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우리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습니까."
어차피 내 말을 들을 김 중위지만.
대외적으로는 그가 지휘관의 역할을 맡는 게 좋을 것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
남의 눈이 있으니, 나도 김 중위의 권한을 존중하는 연기가 필요했다.
"상인이 오가면서 교류가 생기면 다른 지역의 정보를 얻기도 쉬워질 겁니다. 이 거래 자체가 양측의 생존에 좀 더 도움이 되기도 하겠죠."
"으음."
"게다가. 우리 부대도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
김 중위는 고민에 빠진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아니, 구란데?
일단 김 중위를 설득하는 척을 해야 했기에 한 거짓말이다.
마냥 전부 거짓도 아니지만.
저런 선의만 가득한 의도는 또 아니거든.
'중요한 건 동맹을 맺을 수 있을 만한 세력에 접촉하는 것.'
북쪽에 있다는 그 집단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 이 상인이니.
그의 상행에 숟가락 좀 얹겠다 이거다.
어차피 김 중위는 내 말을 거스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을 테니.
고민하는 척 연기하던 그가 상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상협 씨라고 했나."
"예에!"
"당신의 제안에 대해... 솔직히 나는 조금 회의적이오. 우리는 지금 춘천시와 인제군 근처를 방어하는데도 벅찬 상황이거든."
"그, 그런."
"특히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원정은 병사들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 난 안전한지 확인조차 되지 않은 전장에 내 병사들을 몰아넣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방금 전까지 그랬다는 얘기요. 영준이 녀석의 말을 들어 보니 생각이 좀 바뀌는군."
김 중위는 앞에 있는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우리 12군단은 원래 춘천시가 아닌 강원도 전반의 방어를 맡고 있소. 하지만 다른 부대들과의 연락이 끊기고, 우리 부대만으로는 도시 하나 방어하기 힘겨운 상황이지."
"...."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눈을 돌리고 살았지만... 우리 부대의 역할은 변하지 않소. 강원도 전역을 방어한다는 것. 힘이 모자라 병사를 보낼 수는 없을지언정, 다른 도시의 상황을 확인해 둘 필요는 있겠지."
"그 말씀은."
"그 상행. 우리 부대가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소."
"오, 오오...! 감사합니다!"
이렇게 쉽게 수락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상협이 크게 놀라며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상행을 간다는 건 좋은데."
그 인사를 대충 받으며 김 중위가 말했다.
"예. 뭐 궁금하신 거라도...."
"팔 만한 물건이 있기는 한 거요?"
이 도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에 잠겨 있었다.
지상에 있던 대부분의 물건을 못 쓰게 되어 버린 상황이다 보니.
대도시임에도 불구.
우리가 온 인제군보다도 쓸 만한 물건들이 적을 정도였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한테 팔 만한 물건이 있기는 할까 싶었으나.
"허허. 그걸 군인분들이 말씀하실 줄이야."
"?"
상협은 무슨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한 태도였다.
"전투식량이 있잖습니까."
"아아."
어, 맞네?
나도 그건 생각 못 했다.
우리 부대에는 워낙 흔한 물건이다 보니.
다른 데서 귀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잘 못한단 말이지.
"아시다시피. 안 그래도 식량이 귀한 세상입니다. 어떻게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얻으려고 한다고 쳐도 시간이 걸리고, 괴물의 고기는 먹을 수도 없으니.... 게다가, 곧 겨울이 오지 않겠습니까."
"겨울... 그렇군."
김 중위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자연의 힘은 강력하다.
과거에 자연을 이기게 만들어 준 문명은 박살이 나 버린 상황.
겨울이 온다면, 각성자들조차 활동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겠지.
아직은 그래도 시간이 남아 있는 편이긴 하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겨울을 버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에 들어가야 할 터.
"김 중위님. 겨울이 오면... 많이들 죽을 겁니다."
"음. 아마도 그 사인의 대부분은 아사겠지."
"예. 살아남기 위해서는 식량을 보존하는 것이 필수일 텐데.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보존되는 식량 자체가 드물죠. 그런데 심지어 그게 먹으면 버프까지 얻을 수 있고, 맛도 있으니."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사실 이 도시에서도 전투식량은 귀한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전투식량을 만들어 주는 군인분들이 있는 곳이니까요. 공급처가 바로 근처여서야."
"우리 쪽에서 물량이 공급될수록, 가치도 떨어지고 있겠지."
"...크흠."
내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응? 영준 씨라고 하셨나요. 뭐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아니.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 얘기 계속하시죠"
내 요리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서운하구만.
"아무튼! 여기서도 귀한 전투식량이지만, 그 전투식량을 공급받을 방법조차 없던 다른 곳에서는 비교도 안 되게 귀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호오."
"이 전투식량을 다른 곳에 가져가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가져오고. 그 가치 있는 물건들을 비교적 전투식량의 가격이 저렴한 이곳에서 다시 전투식량으로 바꾸고. 그걸 또 저기 가서 팔고... 이걸 반복하다 보면."
"반복하다 보면?"
"돈이 복사...가 아니구나. 그 종이 쪼가리들은 휴지로 쓰이고 있으니. 아무튼 복사가 된다, 이겁니다!"
결국은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구조라는 뜻이다.
우리도 동맹을 맺기 위해 접촉하는 게 최우선 목표라고 하나.
이득을 볼 수 있다면 마다할 필요가 없지.
"그럼 우리한테 원하는 건 무엇이오. 원하는 게 있으니 찾아온 것일 텐데."
"예. 그, 제가 거래 쪽으로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자신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상행 가는 길에 좀비 무리 하나만 만나도 얄짤 없이 사망할 처지인지라."
"비전투직이시니 어쩔 수 없지. 용건은 호위 병력을 빌려 달라는 것이겠군."
"덤으로. 전투식량도 투자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번에 받은 보상을 밑천 삼아 해 볼까 했습니다만. 규모가 커질수록 좋으니까요."
투자라.
전투식량이야 여유가 있다 못해 넘치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 투자해서 쓸 만한 물건들을 얻어 올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만.
문제는 투자의 효율이 얼마나 좋은가겠지.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투자해 주신 전투식량을 그대로 갚는 건 물론이고. 이번 거래로 얻을 이익의 1할을 드리겠습니다!"
"1할?"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싶었으나.
그런 말이 나오기도 전에, 상협이 설명을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거래이실 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불어나는 셈이니까요. 물론 군인분들이야 모자랄 게 없으시겠지만, 뭐든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뭐라 뭐라 설명을 이어 가는 상협.
그 말을 들을수록.
이 거래가 우리에게 나쁘지 않다는... 아니.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거래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으음. 그렇게까지 양보해 준다는 뜻인가."
"예에! 그리고 어쩌구 저쩌구."
"허어! 너무 우리만 이득 보는 거래가 아닌가 싶소만."
"하하,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의미에서..."
"흐음. 흐음."
나뿐만이 아니라, 김 중위 역시 비슷한 듯.
1할이라는 수치.
저 상인이 엄청나게 양보한.
매우 합리적인 것을 넘어, 파격적인 비율이라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하였으나-
"잠깐만요."
그렇기에.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 신 병장님이라고 하셨나요. 뭐 질문이라도."
"3할로 합시다."
"...예?"
신나게 떠들며 우리 쪽을 설득하던 상협.
그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가 가져가는 거. 이익의 3할로 하자고요."
"...예에?"
내 말을 들은 상협은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듯.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1할이라는 비율도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제 쪽에서 피해를 감수하고 엄청나게 많이 떼 드린 겁니다! 그런데 그 3배라니요!"
"4할."
"...그, 그런 식으로 계약을 맺게 되면, 저는 상행을 해도 손해를 보게-"
"5할."
"...김현석 중위님! 뭐라고 말 좀 해 주십쇼!"
"나, 나 말인가."
나와 상인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김 중위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얘기 들어 보니까 1할도 엄청 좋은 조건 같은데?'
'너무 그렇게 요구하다가 파토 나면 우리만 손해 아니냐?'
'상행 끼자고 한 건 영준이 너 아니었냐. 갑자기 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뭐, 대충 이런 뜻이겠지.
하지만, 그건 뭘 모르니까 나오는 생각이고.
'오늘 저녁 굶고 싶은 거 아니면 닥치고 제 말대로 하세요.'
그런 눈빛을 담아 김 중위를 쳐다보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크흠. 나는 거래의 세세한 수치까지는 잘 몰라서 말이오. 자세한 비율 조정은 신영준 병장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 그런...!"
다 넘어온 것 같은 분위기였던 김 중위마저 망설임 없이 내 편을 들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이 좌절하는 상협.
"정말 억울합니다. 군인분들이 거래를 잘 안 해 보셨나 본데. 이런 식의 거래는 양측 모두 좋을 게 없-."
"6ㅎ...."
"오케이! 거기까지."
6할로 하자는 말을 꺼내려고 하자.
그가 다급히 손을 뻗어 내 입을 막으며 말했다.
"5, 5할로 합시다. 5할. 좋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상협.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5할이 적정가였나 보군.'
사실.
그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1할이 우리 쪽에 많이 유리한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이 우리에게 호의를 얻고자 출혈을 감수해 가면서 건넨 제안이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순이익의 1할?
'투자는 물론 호위까지 담당하는 쪽이, 고작 1할?'
이딴 거래가 이득일 리가 없거든.
조금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중위는 물론 나까지 그 1할이라는 비율이 합리적이라고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이유야 뭐 뻔하지.
[식재료 감별(강화)]
[이상협]
[특성]
[최하급 신뢰도 향상]
[최하급 화법 숙련]
[스킬]
[가격 후려치기]
[호구잡기]
말도 안 되는 비율로 후려쳐도 그럴싸하게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는.
저 스킬셋의 영향이겠지.
'어딜 사기 치려고 하고 있어?'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상태창을 살펴볼 수는 없다만.
나는 [식재료 감별(강화)]를 가지고 있다.
다른 인간 역시 내 직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식재료의 한 종류에 불과한 바.
상태창을 엿보는 건 어렵지 않다.
특성과 스킬을 미리 살펴본 덕분에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만.
그게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호구 잡힐 뻔했다.
아마도 5할이 적정가.
6할부터는, 정말로 저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였지 않을까.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하, 하하... 저야말로. 크흑."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상인이란 이득을 추구해야 하는 직업.
굳이 이걸로 뭐라 할 생각은 없다만.
'그렇다고 호구 잡혀 줄 생각도 없거든.'
142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1)
그렇게 상행에 참여하는 것이 결정되었으나.
당장 떠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일.
저쪽도 이쪽도 준비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우와아."
"얘기로는 들었지만. 진짜 엄청난 요새네요...!"
그렇게 상행에 떠날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중.
우리 길드의 요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저기 걸어 다니고 있는 것 좀 봐."
"저게 그 용아병인가 그건가 봐."
요새의 모습을 둘러 보며 막 도시에 상경한 시골 사람처럼 흥분한 모습.
그들은 모두 우리 부대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부대원이니, 당연한 일.
"오셨습니까."
"아! 군단장님."
[재봉사] 이상아와 [대장장이] 박씨 할아버지.
거기에 [공병]들까지.
탄약대대에 머무르고 있던 생산직 각성자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예.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각성을 한 뒤로는 잔병치레도 잘 안 한다. 솔직히 젊었을 때보다도 건강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 그런데...."
이상아가 탄약대대 자체의 관리를 맡았다면.
생산직들의 리더 같은 역할을 맡고 있던 것은 박씨 할아버지.
"우릴 부른 건 좋다만. 용건이 뭐냐?"
그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들이 여기에 온 이유.
내가 불러서 그런 거거든.
춘천으로의 원정 당시.
대부분의 생산직 각성자들은 인제군에 잔류했다.
이유는 간단.
"[공방]을 통해 물건을 만들고 보내 주는 쪽이 네놈들에게도 낫지 않느냐?"
"그러게요. 저쪽이 공방도 설치돼 있고 하니, 뭘 만드는 데는 더 좋았던 것 같은데."
원정을 나가게 되면, [공방]을 이용할 수 없게 되니까.
인제군의 탄약대대에는 박씨 할아버지와 공병들이 만든 공방이 있었다.
생산직 각성자들은 이런 공방이 있냐 없냐에 따라 작업 능률이 크게 달라진다.
나만 해도 밖에서 야전 취사를 하는 것보다는 식당에서 하는 편이 요리의 질이 올라가니까.
"뭐. 따라와 보면 아실 겁니다."
그런 그들을 지금 여기로 부른 이유는 하나.
[대장간 Lv.2]
[가죽공방 Lv.2]
[직물공방 Lv.2]
더 좋은 공방들이 여기 있거든.
"맙소사. 진짜 대장간이잖아."
"...우리가 만든 공방하고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공방 계열의 건물들은 일부러 요새의 한쪽에 몰아서 지었다.
이쪽은 일종의 생산지구가 되겠지.
공병들이 여러 생산 시설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대장간이라...."
박 씨 할아버지는 [대장간 Lv.2]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더니.
건물에 손을 대며 말했다.
"진짜로구나."
"...그야 뭐. 가짜는 아니죠?"
"크흠. 그 소리가 아니라."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는 박씨 할아버지.
"저번에 말했잖느냐. 우리가 탄약대대에 만든 공방은 간이 공방.... 진짜 공방에 비하면 성능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아."
"이 공방은 '진짜'다."
대장간의 풀무를 매만지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 박씨 할아버지.
"우리가 만드는 장비들도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될 것이야."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클클. 이런 공방을 선물 받고 기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탄약대대에 잘 적응한 이들을 이곳으로 부를 때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만.
이렇게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마침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음?"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이시니.
뭘 부탁하려면 이런 때 아니겠냐.
나는 이번 요새 방어전에서 주웠던 물건 하나를 가져왔다.
[하라-발의 머드 혼 엑스]
[강대한 힘을 가진 마수, 머드 혼의 뼈로 만들어진 대형 도끼입니다.]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들에게는 스스로 사냥한 마수의 부산물로 자신의 무기를 만드는 전통이 있습니다.]
[강인한 전사가 직접 사냥한 마수로 만들어진 무기.]
[그 전사의 손에 들려 수없이 많은 전투를 거듭한 끝에, 질 높은 마력이 깃들었습니다.]
"이건...?"
"이번에 있었던 전투에서 지휘관 역할을 하던 괴물이 있습니다만. 그놈이 가지고 있던 도끼입니다."
지금까지는 몬스터들의 부산물들만 재료로 사용했지만.
저렇게 스스로 만든 무구를 사용하는 괴물을 만난 적은 드물다.
그중에서도, 이렇게 있어 보이는 설명을 가진 무구를 가진 놈은 또 처음.
"하긴. 괴물들도 좋은 무기는 탐낼 테니. 저쪽에도 나름의 무구 장인이 있나 보군."
"예. 그래서 말인데, 이걸 이용하면 괜찮은 무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흠. 좋은 요리사들은 여러 칼을 다루는 법이니. 네놈도 무기가 늘어날 때가 되긴 했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무기는 두 가지.
일식도, [독고구식].
중식도, [검정중식].
탄약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흰거미들의 여왕.
그 양 앞발을 재료로 만든 두 자루의 식칼들.
만든 지 시간이 꽤 지나긴 했다만, 워낙 재료가 좋았다.
여왕의 원혼이 들어가 있어 치명타 확률이 증가한다던가?
꽤 많은 효과들이 붙어있기도 해서, 아직까지 모자람을 느껴본 적이 없는 명품.
이놈들은 아마 앞으로도 애용하지 않을까 싶다만.
사람이란 게,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어도 하나씩 더 마련하고 싶어지는 거 아니겠냐.
슬슬 새로운 무기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좋은 재료가 들어온 셈이고.
"흠. 알겠다. 재료가 나쁘지 않으니 쓸 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겠어."
"그리고... 사실은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물건들이 더 많거든요."
"음?"
"크흠. 칼도 칼이지만. 왜 있잖습니까. 냄비라든가, 국자라든가."
"...."
박씨 할아버지의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니.
이때다 싶어서 질러 보았으나.
'역시 주문량이 너무 많았나?'
영 꺼림칙하단 표정.
그가 조금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 네놈이 군단장인데, 나야 명령하면 따라야지. 내 전공은 칼 쪽이기는 하다만.... 다른 물건들도 만들어 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하지만."
"아, 예."
"그만한 물건들을 만들려면 재료들이 꽤 많이 필요할 텐데?"
박씨 할아버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허접한 재료로 대충 만들어서 줄 생각은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건 내 자존심이 용서 못 해. 하나하나 질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들 것이야."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나도 작업을 하면서 눈이 높아져서 말이다. 내 기준을 만족시킬 만한 재료는 구하기 힘들 텐데. 그만한 재료가 있기는 한 거냐?"
박 씨 할아버지는 장인 중에도 장인.
대충 아무 재료나 주워서 만들어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무기를 만들 수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말마따나, 그가 요구하는 수준의 재료들을 구하는 건 쉽지 않겠지.
하지만.
씨익.
"뭐 그건, 직접 한번 보시겠습니까."
"...?"
나는 생산직 각성자들을 이끌고 요새의 한쪽으로 이동했다.
[창고 Lv.2]
우리 부대가 모은 괴물의 부산물이나 재료들을 모아 놓은 장소.
그 문을 열자.
"이, 이건...!"
"세상에."
부대원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게.
"구, 군단장님. 이 양은 대체...?"
"네놈들. 그동안 이렇게 많은 재료를 모았단 말이냐."
창고 안에 쌓여 있는 몬스터의 부산물들.
그 양이 너무 많아, 창고에 산처럼 쌓여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어떻습니까. 이 정도 양의 재료들이면, 박 노야의 기준을 채울 만한 것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으, 으음. 확실히. 저만한 양이라면...."
당연히, 창고에 있는 모든 재료가 양질의 재료라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저 안에서 양질의 재료들을 골라내기만 해도 상당한 양이 나오겠지.
"잠시 둘러봐도 되겠느냐."
"예. 편하신 대로."
내가 [식재료 감별]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공병이나 대장장이와 같은 이들은 [소재 감별] 특성을 지닌다.
박씨 할아버지의 시선이 창고 내부를 훑었다.
"오오. 이 특성은...."
"이것도 나쁘지 않군. 잘만 사용한다면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허어. 저쪽 공방에서 작업할 때도 이 재료가 있었더라면!"
쌓여 있는 재료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박씨 할아버지.
아무래도 생산직 각성자들은 재료에 민감한 편이니까.
나만 해도 좋은 식재료를 얻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박씨 할아버지라고 오죽할까.
"확실히 나쁘지 않구나. 아니, 솔직히 말해 아주 훌륭해."
"헤헤. 기뻐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Lv.2 대장간]에 이어, 이 재료들까지.
장인으로서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무뚝뚝하던 박씨 할아버지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히죽거렸다.
"이 양은 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반면.
창고에 쌓인 재료의 양을 본 이상아는 경악하며 말했다.
"상아 양. 우리가 탄약대대에서 원하는 물건이나 만들며 편하게 지내는 사이, 원정을 나간 병사들은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걸세. 딱 보면 느껴지지 않는가. 이만큼의 재료를 쌓으려면 얼마나 많은 전투를 거듭해야 했을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재료들을 보는 이상아.
"이건, 노력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양이 아닌데요?"
쳇.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감이 좋은 사람은 이래서 싫다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테지만.
아무래도 쉽게 납득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설명을 해 주기로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희끼리 사냥해서 모은 물건은 아니니까요."
"네?"
"그러면. 이만한 양을 대체 어떻게 모았다는 게냐?"
이상아의 말대로.
우리 부대가 사냥만 해서 모으려면 최소한 반년은 더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양.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얘기가 조금 길어지는데.... 제가 도시의 각성자들에게 전투식량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아, 네. 그건 저번에 길드 메시지로 들었죠."
"으음. 도시의 시민들에게도 좋고, 우리 부대도 이득을 볼 수 있는 일. 안 그래도 네놈이 참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왜?"
크흠.
나는 작은 헛기침과 함께.
저 재료들의 출처에 대한 설명에 들어갔다.
"그 전투식량이란 게. 다른 사람들이 괴물의 시체를 가져오면, 그 고기를 가공해서 전투식량으로 만들어 주는 식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수료의 개념으로 완성된 전투식량의 일부를 우리가 가져가고요."
"...어. 설마?"
그 순간.
무언가 눈치챈 듯.
'아, 아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고 중얼거리는 이상아.
반면 박씨 할아버지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게냐?"
"그게,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전투식량의 양이 맞는지는 엄청나게 확인합니다. 혹시나 저희가 더 가져가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그래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뼈나 뿔, 이빨 같은 걸 돌려 달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구요?"
"...."
"하하.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묘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군단장님? 이 재료들, 설마...."
잠깐의 침묵이 끝난 뒤.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이상아.
"삐, 삥땅 치신 거예요?"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뭐.
...맞기는 하지만.
143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2)
"삐, 삥땅 치신 거예요?"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뭐.
삥땅 친 거 맞기는 하다만.
"두고 가신 물건들을 우리가 고맙게 쓰기로 했다. 뭐 그런 거지."
"그게 삥땅 아닌가요?"
"말의 뉘앙스란 게 있잖아."
"...."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그야, 이렇게만 들으면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들리기도 하겠지.
하지만.
딱히 악의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니다.
"말했잖아? 돌려 달라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기는 했다고. 당연하지만 그들에겐 모든 재료를 돌려 줬어."
"그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요...."
"부산물들을 돌려 달라고 한 이들은 아마 생산직 각성자가 그룹에 있는 경우겠지."
나는 창고에 널브러진 뼈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괴물의 뼈나 이빨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거든."
반대로 말하면.
돌려 달라고 말하지 않은 사람들은, 생산직 각성자와 연이 없다는 뜻.
"생각해 봐. 생산직 각성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부산물들을 가지고 있어 봐야 뭐 하겠어."
"으음. 쓸모가 없긴 하겠죠?"
"맞아. 대부분은 활용도 못 하고 어차피 버려졌을 부산물들이란 거지."
"아...!"
그제야 내 말뜻을 알아들은 듯.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는 이상아.
"그걸 우리가 쓴다는 게, 딱히 나쁜 건 아니잖아?"
"그, 그렇긴 하네요."
내 설명이 끝나자.
자기가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상아.
생산직 각성자들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지금.
괴물들의 부산물들은, 생산직 각성자들과 연이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들이다.
그것들이 가치를 가지고.
거래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
나는 그저, 그 가치를 가지기 전의 부산물들이 버려지는 것을 막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뿐이다.
"죄, 죄송해요. 저는 당연히 군단장님이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라도 치신 줄."
조금 민망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진 이상아가 말을 이었다.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헤헤. 아니었다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쌓여 있는 재료들의 양이 상당하다 보니.
그중에는, 상당히 쓸 만한 재료들도 많았다.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물론이다. 네가 말하는 대로 재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원하는 물건들이 있다고? 뭐든지 말해 보거라."
"옙. 그럼 바로 여기에."
"...준비성도 철저하구나."
사실 이 부분은 안 그래도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미리 작성해 둔 리스트를 박씨 할아버지에게 전달했다.
"으음?"
그러자, 박씨 할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렇게 많이?"
"아. 역시 너무 많나요?"
사실.
리스트를 작성할 때, 나도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다.
장비 하나하나에 엄청난 정성을 들이는 장인.
그에게 이런 많은 양을 전달하는 건, 너무 과한 노동을 시키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이 정도야. 나한테 어려울 건 아니다만."
아무래도 박씨 할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린 이유는 그것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 뭐가...?"
"네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예?"
박씨 할아버지가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요리 도구라는 것은 무작정 많다고 좋은 게 아니야. 그 도구를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느냐, 얼마나 손에 익었느냐가 도구의 양과 질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제 나름대로 짬이 찬 요리사.
요리에 관련된 철학이라면 조금이나마 깨달은 부분들이 많다.
"이해하고 있다면 긴말은 필요 없겠군. 새로운 도구 하나를 손에 익히는 것만 해도 나름대로 시간을 투자해야 할 일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도구를 한 번에 받아 봐야, 하나하나에 익숙해지기 위한 시간만 길어질 뿐일 게다."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말투의 박씨 할아버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이거다. 이번에는 저 도끼로 만든 칼 한 자루만 받고, 그 한 자루를 충분히 잘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음 도구를 받는 것. 아마 그게 네게도 득이 될 것 같다만."
"으음. 박 노야의 말씀도 이해는 합니다만."
나도 이제 마냥 초보 요리사는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도구 수백 개보다, 손에 익은 도구 하나가 낫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아마 괜찮을걸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 맞느냐?"
"예. 다만, 뭐라고 해야 하나."
씨익.
"그 도구들. 제가 쓸 게 아니거든요."
내가 아니라.
내 '보조 셰프'들이 쓸 도구들이거든.
* * *
박씨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도구들이 모두 완성되었을 때쯤.
"상행 준비. 끝났습니다!"
상협이 우리 부대를 찾아와, 준비가 끝났다는 말을 전해 왔다.
마침 도구도 받았겠다.
우리 쪽도 상행을 나선 준비는 끝난 상태.
"오랜만이오."
"아, 예. 김 중위님. 오랜만입니다."
상협을 마중 나온 김 중위.
그는 상협과 악수를 나눈 뒤, 이번 상행에 대한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흠. 우리 쪽에서 맡게 된 호위 말인데."
"예에."
"이쪽이 이번에 그 호위를 맡게 된 병사들이오."
김 중위의 손이, 나와 몇몇 병사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아...."
짧은 순간이었으나.
우리 모습을 본 상협의 표정이 살짝 어둡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휘휘 젓는 상협.
"귀한 전력을 내 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금 김 중위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세상 밝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김 중위가 상협을 보며 물어본다.
"상행 준비라는 건 어떻게 된 거요? 일단 전투식량도 준비는 해 놓았는데, 어떻게 옮기시려고."
"아. 여기에 넣어 갈 생각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등 뒤에 메고 있는 배낭을 보여 주는 상협.
나는 물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뭔 소리냐' 싶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동에 차량이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준비할 수도 있는데."
"에이. 이 가방이면 충분합니다."
"충분하다니.... 기름이 문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으니 말씀하시오."
"하하. 무슨 생각이신지는 이해합니다만."
싱긋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는 상협.
"이것도 썩 나쁜 물건은 아니거든요."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몸을 옮기더니.
우리가 준비한 전투식량을 가방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자.
우리도 상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한의 가방?"
"오. 게임 좀 해 보셨나 봅니다."
그가 가방에 집어넣은 전투식량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
가방의 면적을 초월할 정도로.
"정말 무한은 아닙니다. 한계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이번 상행에 필요한 물건들은 다 넣을 수 있을 정도죠."
"오오."
일종의 아공간 주머니.
나 역시 '그림자 장막'이라는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기는 하다만.
나 외에도 저런 물건을 지닌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긴 한데. 그런 가방은 대체 어디서...?"
우리 길드의 생산직들이 만드는 물건들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성능을 자랑하긴 한다만.
저런 가방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하하. 다 여러분들 덕분이죠."
"음?"
"저번에 판 정보 있잖습니까. 간단한 정보 하나로, 엄청나게 많은 대가를 받아 버려서. 상당히 큰 거래를 성공시킨 것으로 판정되더군요."
헤헤, 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
"업적이 달성될 정도로 말입니다."
"아아."
"이건 그 업적 보상으로 얻은 물건입죠."
그 말에.
주변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우와. 업적이라니."
"저 양반. 보기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나 본데."
업적을 달성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부대원들이 그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
나만 빼고.
툭툭.
병사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던 나는, 옆에 서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병민아."
"예. 이병 이병민."
"그, 업적 달성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병사.
"그야 대단한 거죠. 아. 물론 저희 길드원들이야 던전 클리어 업적 같은 건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저 사람은 개인 업적을 달성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단체 업적도 물론 대단한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좀 묻어가면서 얻을 수도 있는 거라.... 반면 개인 업적은 온전히 스스로 달성해야 하는 업적인지라,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하잖습니까."
"그 정돈가?"
"그 정도가 아니죠. 저희 부대에서도 개인 업적을 달성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설명을 이어 가던 병사가 내 얼굴을 보고 '아' 소리를 내었다.
"크흠. 생각해 보니 신 병장님이 그 손에 꼽을 케이스셨죠."
"뭐. 일단은."
"병장님이라면 개인 업적 하나 정도는 당연히 달성하셨을 테니."
어어.
일단 그렇긴 한데.
"아니. 오히려 궁금하군요. 사실 하나 정도가 아닌 거 아닙니까? 막 2~3개씩 달성하신 상태라거나."
"...대충 뭐. 그 근처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크으... 역시 신 병장님. 대단하십니다 정말."
정말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병사.
정작 그 소리를 듣는 나는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다.
'2~3개는 무슨.'
업적?
'너무 많아서 세기가 귀찮을 정도인데.'
너무 자주 달성하다 보니.
이게 대단한 일이란 것도 모르고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말해 봐야 믿기는 할지도 의문이고.
아무튼.
내가 너무 자주 달성해 버려서 그렇지.
업적 달성이란 건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인 모양.
심지어 우리 부대원 중에서도 길드 단위의 업적에 묻어간 것은 있어도, 개인별 업적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과연. 업적 보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는군."
그렇게 업적을 달성하기가 힘든 만큼.
달성했을 때의 보상은 매력적인 편.
"크흠. 제가 이런 걸 가지고 있다는 건 좀 비밀로 해 주십쇼. 아시다시피...."
"잘못하면 노려질 수도 있으니. 이해했소."
"하하.... 믿겠습니다."
말하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모습.
우리야 워낙 앞서나가고 있는 단체다 보니 굳이 탐낼 정도의 물건은 아니다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남들이라면 손을 더럽히는 한이 있더라도 탐낼 만한 물건이다.
그 존재를 밝힌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도박이었겠지.
우리는 가방 안에 전투식량을 가득 담았다.
"그럼. 출발하시죠."
그렇게.
상행이 시작되었다.
* * *
상행은 도보로 이루어졌다.
전투 차량을 사용할까 생각도 했지만.
멸망의 날 이후로 대부분의 도로는 사용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망가진 상태.
특히 고속도로 등은 사용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보니.
다른 도시로의 이동은 도보가 나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상행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묘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아아."
나를 지켜보고 있던 상인.
상협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그때 그분이시군요."
"아. 오랜만입니다."
눈이 마주쳤으니.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하긴 했다만.
내심 생각했다.
'크흠. 조금 껄끄러운데.'
아니.
사실 내 쪽에서 껄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아마 저쪽이 날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나 때문에 손해를 본 셈이니까.'
이번 상행으로 얻는 이득의 비율을 정할 때.
그는 우리 부대를 호구 잡아 큰 이득을 볼 수도 있었다.
그 기회를 가로막은 게 바로 나.
'어찌어찌 적정가를 맞춘 거라고 해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니까.'
내게 앙심을 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하. 영준 씨라고 했나? 같이하게 돼서 든든하군요."
"...?"
상협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음? 뭐 신경 쓰이시는 거라도."
"그게. 절 그다지 마음에 안 들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예? 제가 왜 그쪽을 싫어합니까."
그런 내 생각을 말하자.
별거 아니라는 듯 웃는 상협.
"아~ 그거. 솔직히 말하면 아쉽긴 하죠?"
"그러시겠죠. 1할만 주고 퉁 치려던 걸 5할이나 주게 됐으니."
"크흐흐. 그걸 다 먹었으면 또 업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 텐데."
꽤 뻔뻔한 양반이구만.
"그래도 뭐. 5할을 챙겨 드리는 거래도 손해는 아니니까요. 그런 거로 앙심 품으려면 에누리하려는 손님 중에 제 원수가 수십 명은 될 겁니다. 게다가...."
씨익.
"군인분들의 경우엔,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협업 관계니까요."
"?"
입은 웃고 있으나.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는 상협.
"그때. 제가 제시한 거래가 이상하단 걸 눈치채셨을 때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가능했는지 조금은 의아할 정도로요."
"뭐. 이쪽도 나름의 비결이 있어서."
"하하. 상당히 능력이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했죠."
능력이라면 능력이긴 하다.
특성이라는 이름의 능력.
"아무튼. 단순한 손님이라면 호구가 최고입니다만, 지금은 같이 일하는 협업 관계니까요."
"협업 파트너가 능력이 좋다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런 얘깁니다."
과연.
지금 그와 우리는 일종의 동맹 관계.
상인과 군단이 협업해서 다른 곳으로 상행을 가는 것이니.
협업 상대의 능력이 좋다는 건 오히려 좋아할 일이라는 거다.
"은근 호방한 구석이 있으시네."
"사소한 거에 신경 쓰다간 대성하지 못하는 법이거든요."
뭐,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지.
"크흠. 그런데 말입니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대화를 트게 되자.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상협.
"...호위 병력은 이게 정말 최대였을까요?"
"예?"
"아. 물론 군인분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이 도시에서 군단병의 실력을 의심할 사람이 있을 리가요. 다만."
슬쩍 주변을 돌아보는 상협.
"아무리 그래도 이 숫자는... 좀."
이번 원정에 참여하기로 한 병사는 나를 포함해서 10명.
"너무 적은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아아. 과연."
김 중위가 우리를 호위 병력으로 소개할 때.
짧은 순간, 그의 얼굴이 어두워진 걸 봤었다.
금방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길래, 뭔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적은 병력을 보고 꽤 실망했었던 모양.
"아시겠지만. 이번 상행은 꽤 중요한 일이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크흠. 이게 호들갑처럼 들릴 수도 있긴 한데. 저는 이번 상행에 거의 제 목숨을 걸고 있거든요."
상협의 입장에선, 이런 중요한 상행에 10명이라는 호위는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저희도 상협 씨 이상으로 이번 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역시 가용 병력이 적은 상황이었나 보군요."
"아뇨?"
"?"
도시 근처의 방어는 용아병들이 도와주게 된 지금.
필요하다면 30명 정도가 함께 가도 문제는 없었겠지.
"예에? 그럼 왜 고작 이 숫자로...."
"상협 씨. 전투를 겪어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예? 아아.... 딱 한 번 있습니다. 저 도시에 갇혀 있을 때, 그룹 단위로 각성을 치렀거든요."
"그럼 직접 싸워 보신 적은 없는 셈이로군요. 저희가 한 가지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
씨익.
"각성자의 전력은, 머릿수로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2미터 30센티의 거구가 가장 앞서서 호위를 하고 있었다.
144화 뭐, 그러실 것 같긴 했지.
지난번에 녹색갈기 치프틴에게 패배한 뒤.
광일이는 이전보다도 더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더 강해지고 싶단 거겠지.'
지금도 병사 중에서 가장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
전사조의 조장 역할을 하던 녀석이 저러니.
다른 후임들도 긴장을 놓지 못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머릿수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니."
"뭐. 나중 가면 아실 겁니다."
저렇게 군기가 팍 들어가 있는 녀석들.
이번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은 부대에서도 평균 레벨이 높은 편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거기에 전광일 상병.
그리고.
'나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상행의 호위로 붙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과한 병력이다.
'상행도 상행이지만 동맹 제의를 해야 하니까.'
이만한 전력에, 나까지 직접 나서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결국 상행이란 건 겉절이에 불과하다.
이 남자가 양구군에 있다는 그룹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 거기에 숟가락을 얹고자 했을 뿐.
본 목적을 따지자면 동맹 쪽이 우선이다.
'우리가 강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저들도 동맹을 수락할 확률이 높겠지.'
광일이 정도면 우리 쪽 무력을 보여 주기에 딱 적당한 강자라는 거다.
사실 과거에도 다른 세력과의 동맹을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만.
하필이면 그 세력이 뱀파이어라서 무산됐다.
'이번에는 제발 좀 제대로 된 세력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걷기를 계속했다.
각성자들이니만큼,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쉴 필요는 없었기에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도 빨랐다.
중간에 몬스터들의 습격도 있었지만.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히, 히익."
"끝났으니까. 고개 드십쇼."
적당한 수준의 괴물들은 부대원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어갔을까.
멀리서 보이는 표지판이 하나.
[양구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
그 표지판을 보고 있자니.
광일이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슬쩍 귀띔했다.
"신 병장님."
"어."
"여기서부터는 저희 영향력이 끝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우리 부대는 춘천시와 인제군에 자리 잡았다.
그 근방에는 우리 부대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황.
두 도시의 사람들은 우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덕분에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숫자가 매우 적은 편이었지.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사소한 소문도 세계로 뻗어 나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약간만 멀리 이동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
같은 지역 안에서라면 모를까.
소문 같은 게 그리 멀리 퍼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도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니까.
우리에 대한 것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별문제 없겠지."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
아마,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정체불명의 세력의 영향권일 것이다.
그들이 정말 우리와 비견될 만한 세력이라면.
범죄자들은 기도 펴지 못하고 있어야 정상이거든.
* * *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양구군의 표지판을 발견하고 조금 더 걸어.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멈칫.
"어, 갑자기 다들 왜...?"
나와 부대원들이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별생각 없이 걸어가던 상협만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대답을 해 줄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조금 지나면 알게 될 테니.
나는 앞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집중했다.
저벅....
괴물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침착한 발소리.
인간의 기척에.
"자자. 다들 거기까지."
"어, 어어?"
건물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명의 사람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뒤쪽은 물론.
양옆의 건물.
그 옥상 근처에서부터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들.
"어, 어느 틈에."
모두가 상점에서 산 칼이나 석궁 따위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불량한 태도로 석궁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여길 지나가시려면 통행세를 내주셔야겠는데."
"통행세라니?"
"이 길은 우리가 관리하고 있거든. 그 길을 쓰려면 통행세를 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대사를 들어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약탈자의 토벌은 대부분 아리엘라에게 맡기고 있었으니.
비교적 여유로운 나와 달리.
던전 안에 갇혀 있다가, 바깥세상으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협.
그는 상협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길 관리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요. 이 길에 있던 좀비나 괴물들을 우리가 다 처리했지. 꽤 힘든 작업이었어. 그러니 이 길을 쓰는 사람들도 우리 노력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 주셔야 하지 않겠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통행세 같은 걸 받는단 말입니까."
"도로를 관리하는 국가가 망했으니, 누군가는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도 사실은 이런 거 귀찮아. 일일이 말싸움하는 건 더 귀찮고."
그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군복이라. 탈영병들이신가 보군."
"...."
"어디 부대 출신인지는 모르겠는데, 총 든 사람은 없어 보이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총알도 다 떨어졌겠지."
상협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사방의 건물에 퍼져 있는 적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서른 명 이상.
"현명하게 선택합시다. 우리 중 반 이상이 각성자야. 딱 보면 아시겠지만 당신들 위치는 많이 안 좋고. 응?"
"우리도 이제 사람 죽이기 싫다고."
"큭큭큭."
절반 이상이 각성자라는 얘기를 듣자.
상협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있는 식량이 많지는 않습니다. 부디 이걸로."
"클클. 진작에 그러셨어야지."
"알고 보면 우리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거든."
상협은 적당히 타협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했다.
하지만.
"쓰읍."
가방을 열고, 전투식량 한 주먹을 꺼내 든 상협.
그의 손을 내가 붙잡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영준 씨."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게. 전투식량을 조금 나눠 줘서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일 거라고...."
뭐.
상인으로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누구 맘대로요?"
"예?"
"그 식량들. 우리가 투자한 거잖습니까."
난 상협의 손에 들린 전투식량을 뺏어 든 뒤.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거기 아저씨들!"
"아, 아저씨?"
자존심 상한 듯 일그러지는 사내의 얼굴.
뭐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도로를 관리하셨으니 통행세를 받겠다는 건데.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는 건 봐준다는 겁니까?"
맘 같아선 바로 밀어 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도 탄약대대 인간의 마을에서 일종의 보호비를 걷고 있으니.
이들에게도 한 번만 기회를 주려고 했으나.
"에헤이. 그건 안 되지."
"아까는 도로를 이용하는 대가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미 땅을 밟으셨잖아. 이미 도로를 이용하셨으니, 후불로라도 지불은 하셔야지."
큭.
"뭐. 그러실 것 같긴 했지."
기회는 무슨 기회냐.
"광일아."
"예."
"우리가 경찰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불법적인 통행세 갈취를 목격한 상황인데. 어떻게 할까."
"흐흐. 다녀오겠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쿵!
병사들이 몸을 날렸다.
* * *
"하.... 좀 멀리 여행 왔다고 이런 일도 다 겪네."
"대, 대단하신 분들을 몰라봤습니다. 정말이지 죄송...."
"아니 뭐. 아저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
약탈자들을 이끌던 남자.
범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나서는....'
30여 명의 약탈자 그룹.
비교적 초창기에 각성한 범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이제 막 각성자를 늘리며 힘을 키우던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는....
남들에게서 얻어 냈다.
덕분에 꽤 빠르게 힘을 키웠다고 생각했으나.
'5분도 안 걸렸어.'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10명 정도 되는 군인들이 그들 30명을 제압하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음에도!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군....'
한 번의 서전트 점프로 4층 높이를 뛰어 버리거나.
건물에 손가락을 박고 바퀴벌레처럼 기어올라, 고층에 자리 잡고 있던 그룹원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던 모습.
두려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전투에 참여한 것은 단 9명.
한 명은 원래 전투직이 아닌지, 뒤에서 벌벌 떨며 지켜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뒤에서 채소나 손질하고 있었지.'
전투를 지켜보며, 뒤에서 양파나 손질하고 있던 남자.
엎드려 있는 범재를 깔고 앉아 있던 군인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예, 예!"
"이런 짓 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꽤 자주 하신 것 같던데."
"그, 그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면 믿어 주실지...."
"...너 같으면 믿겠냐?"
남자가 몸을 일으키면서 다른 부대원들에게 말했다.
"아니 뭐.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시간 아깝네. 얘들아."
"예, 병장님."
"이 사람들. 어디 보자. 저 건물 1층에다가 몰아넣어 둬."
그러자.
병사들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우리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좀 그렇잖냐. 이놈들 물건도 대충 다 압수했고."
그 얘기에.
범재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하, 하하! 순진한 자식!'
이 군인들.
엄청 강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그래 봐야 스무 살 언저리의 군인들.
이런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아직 지나치게 순진한 놈들이란 거겠지.
'우리가 털고 죽인 사람들이 얼만데. 가지고 있는 게 고작 그거뿐일 리가.'
군인들에게 빼앗긴 약탈물들은 근 1주일간 모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걸 빼앗기는 건 조금 뼈아프긴 하지만.
그들의 진짜 재산이라 할 만한 물자들은 다른 곳에 고이 모셔 둔 상태.
"아저씨들."
"예, 예에."
"앞으로는 나쁜 짓 하지 마시고. 어디 보자...."
말을 멈추고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
하늘에는 노을이 천천히 지고 있었다.
"저 정도면. 음. 한 시간쯤 지나서 나오십쇼."
"한 시간 뒤에... 말입니까?"
"예. 그 전에 나오면 그때는 진짜로 뒈지십니다."
"예, 예에...."
그 말만을 남긴 채.
그들 모두를 한 방에 몰아 놓고 떠나는 군인들.
"뭐, 뭐야."
"진짜 가나?"
군인들이 정말로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방 안에 몰린 약탈자들이 웅성거렸다.
"제기랄. 뭐 하는 놈들이야 저건."
"...주, 죽는 줄 알았다. 진짜로."
"그 뭐냐. 저 절에 있다는 무승들하고 비슷한 수준 아닐까?"
곡소리를 내는 약탈자들 사이.
한 남자가 말했다.
"그럼. 그만 나가죠?"
"뭐?"
"한 시간 뒤에 나가라고는 했는데. 굳이 따를 필요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며 문을 열려고 하는 남자.
그때.
"자, 잠깐만."
그 손을 붙잡은 것은 범재였다.
"형님?"
"혹시. 혹시 모르는 거잖냐.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우릴 다 죽이면 죽였지. 그렇게까지 할까요...?"
"안 할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문제지. 사람이 얻어맞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야채 손질이나 하고 있던 놈이야. 제정신이 아니란 거다."
"...."
"그런 미친놈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한 시간 기다리는 거야 일도 아니잖냐. 조금만 참자."
"예, 뭐."
결국 얌전히 건물 안에 처박혀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
창밖을 보니.
천천히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한 시간 지난 거 아뇨?"
"음. 아마 조금 더 지났겠지."
밤이 찾아오자.
몸을 일으키는 약탈자들.
"좋아, 나가자고."
"제길. 오늘 장사는 완전 공쳤네."
"다들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약탈할 기회가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맞는 말이다. 오늘 장사는 공쳤지만, 내일부터 다시 성실하게 뺏고 죽이고 하다 보면 되는 거야."
"하하. 형님 말이 맞습니다. 오늘 공친 만큼 성실하게 죽이고 다녀야겠는데요."
건실한 대화를 나누며 문으로 다가가는 사람들.
범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안녕?"
"...?"
열린 문 밖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요사한 붉은 눈빛을 가진, 금발의 미녀.
그 얼굴에 시선이 팔려 눈치채는 것이 늦었으나.
"누, 누구야. 당신."
여자는 화사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의상.
군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 군복은 설마, 아까 그 군인들의 동료인가?"
"우, 우리는 시키는 대로 갇혀 있었어!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 나가려는 거라고!"
"성질이 급한 아이들이구나, 그래.... 일단은."
여자는 범재를 살짝 밀며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으며 말했다.
"존댓말부터 가르쳐 줘야겠는걸."
창밖에서 새어 나온 달빛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비췄다.
145화 힘을 다루는 법
"으음."
"저렇게 보내줘도 되는 건가 싶습니다만."
약탈자들을 몰아넣은 건물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병사들이 중얼거렸다.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진 말고."
"아, 그렇습니까?"
"신 병장님 말이라면 뭐 틀림 없겠죠."
"...."
당연히 설명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납득하는 녀석들.
"크흠. 문제는 다른 거지."
"예? 뭐가 문제라는겁니까?"
"우리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도착하고 아직 반나절도 안 지났어. 그런데 벌써 약탈자들하고 조우했잖냐."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병사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뭐... 요즘 세상에 저런 놈들이 한두 명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 병장님은 순찰까지는 안 하시니까 모를 수도 있습니다만. 병사들은 순찰 중에 약탈자들 토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건 아는데. 춘천에서는 그런 놈들도 얼마 없었잖아?"
"그건...."
"그렇긴 하죠."
우리가 자리 잡는 데도 바빴던 인제군과 달리.
춘천은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운 다음에 진출한 땅이기에 가능한 일.
춘천에서 약탈자들이 보이지 않았단 건.
그만큼 우리가 강하니까, 다른 놈들도 눈치 보느라 바빴던 것이 주된 이유.
"여기 자리 잡은 세력은 우리만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단 뜻이지."
"아아.... 확실히. 그렇겠군요."
우리와 비등한 세력이라길래 조금 기대하긴 했다.
적어도 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조우한 약탈자.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놈들이 딱히 약탈을 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그룹일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그놈들이 약탈자 그룹일 수도 있지."
"으음."
"다른 하나는, 그냥 우리 기대 이하로 무능한 단체라는 거고."
"둘 다, 저희 입장에서는 썩 좋은 상황은 아니겠군요."
"그렇지."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조금 불안하긴 하다만. 뭐.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째 묘하게 동맹 구하기가 어렵다.
저번에는 뱀파이어에, 이번에는 만나기도 전부터 기대치가 팍팍 떨어지는 상황.
'우리가 너무 앞서나가고 있는 탓인가.'
어쩌면.
내가 다른 세력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높아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한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정말 우리하고 동등한 단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할 것 같고.
'적어도 동맹을 맺을 만한 가치가 있는 단체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상협이 다가오며 말했다.
"대, 대단하십니다."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뭐."
"군인분들이 평범한 각성자들보다 강하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 차이라니...!"
상협은 직접적인 전투를 겪어본 적이 거의 없는 인물.
우리가 10명이란 것만 보고 실망했던 시점에서 그런 건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머릿수가 전부가 아니란 건 이런 의미였군요...."
"좀 안심이 되십니까."
"물론이죠!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호위 병력이 적다는 불만은 금세 사라진 듯.
상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부대원들을 칭찬했다.
슬쩍 보니.
칭찬을 들은 광일이 녀석이 조금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게 생겨버린 녀석.
이번에 전투는 나는 끼어들기도 전에 끝났으니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거겠지.
다만.
나는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생각했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
고작 30명.
아무리 저쪽이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한들.
그중에 각성자는 20여 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
제압에는 3분 정도의 시간이 들었다.
'역시 모자라.'
서북부에 위치한 '녹색갈기 부족'을 토벌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랐다.
저 괴물들에 비하면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니.
한 명 한 명의 힘을 키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방법이 있을까.'
일단은, 그런 정예화에 한계를 느끼기에 선택한 것이 이번 동맹.
동맹 상대가 생각보다 강력한 세력이라면, 이런 걱정도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 * *
"아. 저기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이동한 뒤.
상협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 있는 산.
난 그 산을 보며 상협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이쯤 왔으면 설명해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예? 뭘 말입니까?"
"그 거래 상대라는 단체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저희도 대충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상인.
상행에 동참한 것도 그 점 때문이었다만.
"그게. 저도 잘 모릅니다."
"?"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그냥 이곳에 상당히 큰 세력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거든요. 제 입장에서도 사실 좀 도박이었죠."
결국 상협도 저 단체에 대해서 아는 건 없다는 뜻.
'아~ 불안해지는데.'
정말 이번 원정에서 아무것도 못 얻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을 가지고 산을 올랐다.
"신 병장님."
"음?"
"저기 보십쇼."
산을 오르는 길.
산 안쪽에 늘어져 있는 괴물들의 시체가 보였다.
'...오?'
일일이 처리하기도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니 저기에 쌓아둔 것 같다만.
생각보다 약한 세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달리, 꽤 많은 양의 몬스터 사체들.
'상처를 보아하니, 사냥하는 데 딱히 고전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주변 영역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꽤 강한 각성자가 포함된 세력이란 점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 산을 올랐다.
그러자.
"멈추시오!"
"...!"
저 위쪽에서 들려오는 경고음.
그와 함께.
산 위에서부터 한 사람이 걸어 내려왔다.
전신을 덮는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사내.
우리 전사조와 비슷한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는 전사였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소!"
갑옷을 입은 장성이 외치는 모습.
꽤 위압감 있어 보이긴 했다만.
"신 병장님."
"어."
"저거. 상점산 장비입니다."
멋들어져 보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
그건 상점에서 판매하는, 뭐랄까.
기성품이었다.
'생산직 각성자는 없다는 건가.'
우리가 입은 군복의 경우.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성능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어지간한 철판 갑옷을 몇 겹 겹친 것과 비슷한 방어력.
거기에 더해 여러 가지 부과 효과를 제공하는 장비.
반면.
저 남자가 입은 것은 상점산.
겉보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아무런 능력치도 제공하지 않는다.
두꺼운 철판인 만큼 나름대로 방호력을 제공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라는 것.
그 전신 갑옷에 투구까지 끼고, 상점에서 파는 긴 장봉을 든 사내.
그가 우리를 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탈영병들이 이곳엔 무슨 일이오."
아.
그놈의 탈영병 타령 진짜.
이 정도면 질린다는 생각을 하며.
해명을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으나.
"착각하시는 건 이해합니다만, 저희는 탈영병이 아니라...."
"갈!!!"
괴성과 함께.
사내가 우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곳을 떠날 수 없어 패악질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만!"
"아니, 사람 말을 좀."
"내 눈에 모습을 보인 이상 그냥은 보내주지 않겠다!"
"아."
별 이상한 오해와 함께.
나를 향해 봉을 휘두르는 갑옷남.
'귀찮게 하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일.
나도 일단은 칼을 뽑아 대응하려 했으나.
"신 병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어? 어어."
"신 병장님 스타일은 너무 과격하잖습니까. 뒤에서 쉬고 계십쇼."
허허 하고 웃으며 내 어깨를 뒤로 당긴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내가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신체에 무리가 간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예전보다도 나를 더 감싸고 도는 녀석.
솔직히 약간은 부담스럽긴 하다만.
'뭐 상관없겠지?'
보아하니.
저들은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
녀석의 말대로, 내 '손질'을 통한 전투는 지나치게 살벌한 면이 있으니까.
광일이는 기본적으로 순한 성격에, 단단한 건틀릿을 낀 주먹을 통한 무투술을 사용한다.
적당한 선에서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나보다 제격이니까.
광일이라면 빠르게 해결해 주겠지.
그런데.
"...어?"
그런 내 예상과는 달리.
광일이와 갑옷남의 싸움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 * *
팡!
"크윽...!"
전광일 상병이 건틀릿을 낀 주먹을 내뻗자.
그 위력에 당황한 듯 약간의 신음소리와 함께 밀려나는 남자.
"...!"
하지만.
방금의 교환에서.
더 큰 충격을 받은 쪽은 광일이 쪽이었다.
'이걸 막다니.'
광일이 녀석이 봐줬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다.
첫 일격에 힘의 차이를 보여 준 뒤, 상대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의도에 내뻗은 공격.
그걸 막아낸 것은 순전히 상대의 역량이었으니까.
"타, 탈영병 주제에, 제법 힘이 강한 것 같구나!"
확실히 상대도 그 힘을 느끼긴 했는지.
조금 당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힘만 셀 뿐!"
그 전의가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투.
퍽!
"크윽, 무식하게 힘만 센 녀석이."
콰앙!
"커헉."
쿠웅!
"뭐, 뭐 이리 무식하게 세!?"
전투의 흐름 자체는 시종일관 광일이의 우세였다.
갑옷을 입은 남자는 그 공세에 밀려 방어를 하는 것이 고작.
그러나.
그런 전황과는 별개로.
"전광일 상병님하고 저렇게 겨룰 수가 있다니...."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중얼거리는 병사들의 말에 나 역시 어느 정도 공감했다.
'굉장하다.'
분명 광일이 녀석이 어떤 버프도 두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만.
그렇다고 해서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장비 차이가 있으니까.'
저쪽이 입고 있는 장비는, 아무런 능력치도 붙지 않은 상점산 장비.
반면 광일이는 이상아와 박 노야.
두 생산직 각성자가 심혈을 다해 만든 군단원 용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움직임을 보면 알아.'
내뻗는 무기에 담긴 힘.
몸을 움직이는 속도.
스탯 면에서는, 전광일 상병이 압도하고 있다.
본래라면 이런 교전이 성립되지 않아야 정상일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길어지고 있는 이유.
그건 아마도.
"...기술의 차이."
봉을 휘두르는 갑옷남.
그 속도는 분명 평범한 편이었으나.
기교 면에서는 차원이 달랐다.
힘에서는 압도적으로 밀리지만.
그럼에도 광일이의 공격을 모두 흘려 내고 있는 남자.
평범한 호신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예.
"하하! 힘만 세지, 그 힘을 다루는 법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구, 케흑."
전광일 상병은 우리 부대에서 몇 안 되는 격투기 경험자.
부대원들 간의 스파링을 통해 그 실력을 계속해서 갈고 닦아 온 녀석이다.
상대가 말하는 '힘을 다루는 법'은, 평범한 무술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마도... 각성자의 힘을 다루는 법.'
그렇기에.
그 기예를 지켜보며, 나는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저 남자의 말대로, 우리가 아직 각성자의 힘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고 한다면.'
그 방법을 익히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다는 걸까.
* * *
갑옷을 입은 남자의 기술을 보며 신영준 병장이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
전광일 상병은 깊은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날파리 같군.'
자신의 모든 공격을 최소한의 피해로 흘려 넘기는 남자.
속도는 느리지만, 기묘한 몸놀림으로 인해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웠다.
작은 피해는 분명 꾸준히 누적되고 있다.
그 피해만 해도 상당하겠지.
하지만... 제압하기에 충분한 유효타는 입힐 수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맡겨 달라고 해 놓고선, 고작 이런 놈 하나 처리하지 못하다니.'
까득.
부대에서는 최고의 전사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들.
실상은 언제나 더 강한 괴물을 만나 얻어터지기만 하는 꼴.
그것만으로도 자괴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는데.
이제는 자신보다 약한 적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나는 이렇게도 나약하다.'
나약함이 자괴감을 불러오고.
자괴감이 분노를 일으켰다.
'아니. 난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광기를 억누르고 사는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광기란.
본래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기에 광기라고 불리는 것.
'전력을 다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를 제압하는 선에서 그치려던 첫 의도와 달리.
그의 몸을, 광기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놈을 쳐 죽이는 데 5초면 충분하다.'
146화 이거 좀 싸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