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러니까. 여기가 그 던전이란 장소고, 당신들은 이 던전의 보스를 잡으려고 한다...?"
"맞습니다."
"으음."
태완에게도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복잡한 이야기에 머리를 긁적이는 창수.
"일단 묻겠는데, 만약 그렇게 해서 던전이라는 게 닫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안에 있는 우리도 던전이 붕괴하면서 다 같이 죽는 건가?"
"설마요."
던전은 이계의 존재들에 의한 테라포밍의 결과.
던전의 붕괴는 일그러진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그러진 환경이라는 건 해가 뜨지 않는 점이나, 도시를 덮은 저 물들. 그리고 곳곳에 세워진 이상한 문자의 비석들 같은 걸 말하는 거겠지."
뭔가 우리가 모르는 이상 현상이 더 있었나 본데.
아무튼 그런 게 사라진다는 거다.
그 얘기를 들은 갑자기 창수가 눈을 번뜩였다.
"아니 잠깐. 저 물바다가 사라진다고?"
"그렇게 될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인 놈들은 물 밖에서는 숨을 쉬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전멸하게 되겠군."
턱을 매만지며 스산한 웃음을 짓는 그.
"괴물 놈들을 쳐 죽이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씨를 마르게 한다.... 게다가 질식사라니.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 아닌가...."
"예?"
"아. 혼잣말이니 신경쓰지 마시오. 당신의 제안. 아주 마음에 들어."
그 반응을 들은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보통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초점을 두지 않나?'
이들은 다른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괴물들이 몰살된다는 점.
그 부분만이 마음에 든다는 듯 중얼거리는 남자.
하지만 뭐.
중요한 것은 우리 쪽 제안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던전 공략에 도움만 된다면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지.'
생각보다 쉽게 이들을 설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하지만 어렵겠어."
"예?"
뭐야 이 사람.
방금까지 되게 마음에 든다는 듯 킥킥거리지 않았나.
"제안은 마음에 들어. 괴물 놈들을 다 쳐 죽일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럼 왜...."
"당신들을 어떻게 믿나."
창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은 아닙니다만."
"백 보 양보해서 던전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사실이라고 치지. 하지만 당신들이 같이 싸워도 될 만한 이들인지는 모르는 일이지."
"...."
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애초에. 난 당신들이 이곳에 찾아온 것부터가 의아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괴물들을 쳐 죽이는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지. 복수요."
그가 주변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던 대로 영자 아주머니는 온 가족이 괴물들에게 잡아 먹혔소. 저기 보이는 저 청년은 형제의 희생으로 목숨만 겨우 부지했지. 그게 전부가 아니오. 저기. 저 방이 보이나?"
"예."
"이 건물에서도 가장 큰 방이오. 저 안에는 사람들이 누워 있지."
누워 있다니.
침실 개념으로 쓰는 방인 건가 했는데.
"정신을 놓은 채, 허공만 바라보면서 말이야."
"...?"
"저번 사태로 인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지. 일부는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느라 바빴고, 일부는 또 우리처럼 복수심에 불탔지."
말을 이어 가던 창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또 일부는, 끔찍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렸소. 우리 중에는 그렇게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의 가족, 친구도 많아. 가까운 사람을 그렇게 만든 존재에 대한 분노를 원동력 삼아 우리 그룹에 들어온 거지. 하지만 당신들은?"
창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이곳이 위험한 공간이란 것을 알면서도 굳이 찾아온 사람들이 있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거든."
과연.
믿을 수 없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겠지.
목적과 동기를 모르는 이들을 신용할 수는 없다는 거다.
창수의 얘기를 들은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던전에 들어온 이유.
하나는 구원 요청이 들어와서.
하나는 던전 공략을 성공시켜 보상을 얻고, 힘을 키우기 위해.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공략을 선택한 동기는 따로 있긴 했다.
"그거 아십니까?"
"?"
"이 던전. 조금씩 넓어지고 있거든요."
"대충은 알고 있소. 우리도 바보는 아니니까."
던전이란 이계의 존재들에 의한 테라포밍.
즉.
"저 녀석들은 인간들의 영역을 침범한 걸로 모자라, 자신들의 영역을 점차 넓혀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가...."
"열받잖아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면.
나는 지금쯤 전역하고 민간인이 돼서 여유롭게 요리 공부를 하고 있었겠지.
아니면 전역 기념 여행을 다니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런 일상이 무너진 것만 해도 열받는데.
우리 영역을 침공하고 자기들의 땅으로 만든다니.
짜증나잖아.
"놈들이 원하는 대로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이 위험한 곳에 들어왔다고?"
"지금은 위험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 될 겁니다."
이 던전의 환경은 조금 특이하다.
괴물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지 않더라도.
물이 없는 고층에 있다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약간 더 수명이 늘어날 뿐.
"고층에서 버티기만 하다가는 언젠가 사냥당하기 마련이죠."
"...."
"저희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당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 힘을 기를 거고요. 그러기 위해선... 혹시 게임해 보셨습니까?"
뜬금 없는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창수는 내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 큰 보상이 따르기 마련이지."
"뭐, 그런 겁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창수.
만약 던전 공략을 함께하게 된다고 한다면, 서로의 등을 믿고 맡겨야 할 테니.
믿어도 되는 건지 아닌지 신중하게 선택하려는 거겠지.
"이 얘기는 조금 길어질 것 같군."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고민을 좀 해 봐야겠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동안은 여기서 머무르도록 하시오."
"여기서 말입니까?"
"우리는 인원수가 적은 편이거든. 공간이야 남아돌아. 한 층을 통째로 내어 주도록 하지. 배가 고프군. 식사들은 했나?"
그러고 보니.
'해가 뜨지 않는 공간이라서 몰랐는데, 아까 먹은 요리의 효과도 사라진 지 꽤 됐지.'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란 거다.
"보아하니 식량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대접해 드리지."
"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내가 요리사인데.
굳이 남에게 요리를 시킬 이유가 있나.
하지만 창수는 내가 괜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보아하니 군장도 가볍고, 식량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건-."
"굳이 거절하지 않아도 돼서 하는 말이오. 우리는 다른 그룹들하고 다르게 물속에 직접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남들보다 식량을 얻을 기회도 많다는 뜻이지. 다른 그룹에 비하면 식량 여유는 있는 편이오. 걱정할 필요는 없어."
차량에 실려 있던 군용 전투식량들은 이전에 만난 생존자들에게 대부분 털려 버렸다.
언제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병사들의 군장도 가벼운 게 사실.
저들이 보기엔 우리가 식량이 많아 보이진 않았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거리낌이 없네.'
창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남들보다 조금 더 사정이 나을 뿐.
식량이 넘쳐나는 건 아닐 테지.
그럼에도 굳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는 건.
"손님 대접은 해야지."
"...."
"당신네가 양보해 준 덕분에 각성자도 늘었으니 말이야. 한 끼 정도 제공하는 건 어렵지 않아."
새삼스럽지만.
직전에 만났던 인간들과는 꽤 차이가 큰 반응이었다.
'저쪽은 오히려 식량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는데 말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마운 배려다.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거절하는 게 오히려 실례가 되겠지.
"알겠습니다."
"어. 신 병장님...?"
내 식사를 못 먹게 된 부대원들이 약간 울상이 되었지만.
그렇게 본다고 뭐 방법이 있냐.
"저, 저희는 그냥 전투식량 먹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식사 대접해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냐."
"그, 그래도."
"한 끼 정도 맛없는 요리 먹는다고 안 죽어. 이것들아."
"끄으응."
병사들에게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일단은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달그락.
치이이익....
횃불의 빛에 의지해 요리를 시작하는 사람들.
요리라고 해도 별건 없었다.
구석에서 물고기를 손질하고, 굽고.
거기에 상점에서 파는 호밀빵을 챙겨 넣는 정도.
'열악하다.'
취사병의 입장에서 보면 영양실조 같은 게 걸리진 않을까 걱정된다만.
생각해 보면 각성자들은 영양실조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했지.
'아니....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는다기보단, 마력을 소모해서 망가진 몸을 억지로 유지하는 느낌.'
그다지 좋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이들에게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각성자들이라면 저런 식사만 한다고 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완성된 요리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디 가는 겁니까?"
"아. 저건."
별거 아닌 질문이었으나.
들려온 대답은 꽤 무거운 것이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먹여 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슬쩍 몸을 일으키고 그들을 따라갔다.
요리를 챙겨 들고 건물의 한쪽 구석에 있는 방에 들어가는 이들.
방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
"바아...."
정신이 나가 버린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미쳐 버린 인간들.'
우리 부대에서도 저런 이들이 나올 뻔했었다.
갑작스러운 괴물의 습격.
첫날만 해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헛소리를 해 대던 녀석들이 많았지.
'우리 부대는 요리로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아 놨지.'
그리고.
지상에 내려온 뒤로 그런 이들을 본 적은 없었다.
이유는 아마도 하나.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죽어 버린 거겠지.'
바깥과 달리.
이 던전은 물 안으로 뛰어들지 않는 이상 살해당할 일은 없다.
그래서 저렇게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중에는 지인이 저런 꼴이 돼 버린 탓에 합류한 이들이 많아. 저들 모두가 그룹원 누군가의 지인이지."
"습기도 높고, 위생도 썩 좋아 보이진 않는데요. 질병 문제 같은 건 없는 겁니까?"
"글쎄. 얕은 지식으로나마 조금씩 자세를 바꿔 주면서 간호를 하고는 있지만, 그게 전부요. 이상하게도 질병에 걸리는 이들은 없더군."
"이 안에서는 바이러스도 돌아다니지 못하는가 보군요?"
"우리도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있기는 하지. 운이 좋다고 해도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러다가도 아주 드물게 정신을 차리는 경우도 있기는 해. 말 그대로 드문 일이지만."
그러고 보니.
아까 각성을 거쳤던 중년 여성도 저런 느낌이었지.
'그 사람이 어느 순간 정신 차린 예시 같은 건가.'
그나저나.
흠.
"잠시만요."
"음?"
나는 누워 있는 사람에게 식사를 먹이려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누워 있는 이들을 간호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가족이거나 지인이거나 한 거겠지.
그들이 내게 약간의 적의를 보내왔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그 적의 섞인 눈빛을 대충 흘려넘긴 뒤.
누워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건강 상태 같은 거야 당연히 좋을 수는 없겠지만.
[식재료 감별(강화)]
[신선도 - 중상]
'나름대로 잘 보살펴 준 덕분인가. 다들 상태가 최악까지는 아니야.'
습기도 많고 위생적으로도 좋지는 않은 환경.
질병이라도 돌았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테지만, 던전이라는 특수성 덕분일까.
평범한 수준의 간호만으로도 그럭저럭 상태가 나쁘진 않았다.
'이 정도라면... 되겠는데?'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창수를 보며 말했다.
"아까 식사를 대접해 주겠다고 한 것 말입니다."
"음?"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혹시 이들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한 거라면 그럴 필요 없소. 아까 말했듯이 한 끼 정도야-."
"아니. 예의 차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몸을 일으키고 창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한 요리가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
"...."
창수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야 어이없을 만도 하지.
식사를 대접해 주겠다는 사람한테
'네 요리보다 내 요리가 맛있을걸.'
하면서 거절하는 미친놈이 어딨겠냐.
하지만 뭐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
"...진심인가?"
"예."
"...그러면 뭐. 마음대로 하시오. 그런데."
창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리 부대원들의 짐을 살펴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보아하니 뭐 식량을 엄청 싣고 온 그런 느낌은 아닌데?"
"아. 재료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덤으로."
난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 식사도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 밥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좀 전해 주십쇼."
"그게 무슨 소리...."
그렇게 바닥에 앉은 뒤.
건물의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땅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줍는 듯한 어정쩡한 자세.
그 손이 바닥에 닿은 순간.
쑤욱.
"뭐, 뭐야!?"
사람들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게.
내 손이 바닥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당황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나는 바닥을 뚫고 들어간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터억.
누군가가 내 손에 무언가를 건네는 게 느껴졌다.
난 그 물건을 잡아들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양배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턱.
터억.
쿵....
"배추, 당근, 오이...."
"저건 뭐야. 달걀이랑 고기까지 있는데?"
"...프라이팬이 왜 저기서 나와?"
바닥...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닥에 생겨난 내 그림자 속에 손을 넣었다 뺄 때마다 쌓여 가는 요리 재료들.
그렇게 꺼낸 재료들이 엄청나게 쌓였을 때쯤.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혹시라도 부족하면 말만 해.
얼마든지 더 꺼내 줄 수 있으니.
99화 환자식 (1)
건물 안을 밝힌 작은 횃불들.
그로 인해 생긴 그림자.
그 안에 손을 집어넣자 온갖 물건들이 잡혀 나왔다.
"배추, 당근, 오이...."
"저건 뭐야. 달걀이랑 고기까지 있는데?"
"이번엔 요리 도구들까지."
사실.
이건 엄밀히 따지면 내 능력은 아니다.
[그림자 장막].
내가 권속으로 받아들인 남작급 뱀파이어.
아리엘라의 특성.
-귀족만의 우아한 개인 공간이, 어쩌다 이렇게....
그림자 안쪽에서 누군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외부인을 초대한 적은 극히 드물다고 했지.'
내가 들어갔을 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꽤 섬세한 감성의 개인 공간이었던 모양이다만.
-여관방으로 모자라서.
지금 저 안에는 뱀파이어 100인이 꾸득꾸득 들어차 있는 것은 물론.
-창고로 쓰이는 꼴이라니.
각종 식자재.
그리고 내 개인 물품들로 가득 찬 공간이 되어 버렸다.
-흐윽. 흐으윽....
요리를 통해 굴복시켜 권속으로 삼은 뒤.
대부분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랐던 아리엘라지만.
저 안에 내 물건을 채워 넣겠다는 명령만은 정말로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하겠다는데, 지가 싫어하면 뭐 어쩔 거야.'
싫어했다뿐이지.
그녀에게 거절권 따위는 없었다.
이 좋은 공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잖냐.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이 안에 넣어둔 물건들은 쉽게 썩지도 않는다.
던전에 질병이 돌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가 작용하는 거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최고의 냉장고란 거지.'
이번 던전행.
차량에 많은 식량을 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혹시 부대원들과 내가 떨어질지도 모르니, 쉽게 조리할 수 있는 군용 전투식량만 채웠지.
그 외의 식재료는 모두 그림자 안에 때려 박았다.
그 안에 손을 넣자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재료들을 들어서 내게 건네준 거고.
실제로 안쪽에서 이뤄진 일은 뱀파이어들의 고된 상하차 작업 같은 거였겠지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건물의 돌바닥에서 뜬금없이 온갖 식재료와 도구가 튀어나온 걸로 보였겠지.
사람들이 아연해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간 계열의 마법, 같은 건가?"
"외부인들도 각성자가 있다고 했으니. 저 남자는 마법사란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간을 조종하는 마법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는데."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 거야."
"...괜히 저 군인들의 대장이 아니란 거겠지."
조금 거창한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굳이 나서서 정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동맹으로 꼬드겨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강한 존재로 오해해 준다면 오히려 감사지.'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은.
[그림자 장막]을 사용하는 걸 본 것은 부대원들도 처음이란 건데.
"역시 신 병장님."
"대단하시구만."
뭔가.
그러려니 하며 넘기는 모양.
"...아니. 이게 '역시 신 병장님'하고 끝날 일 맞아요? 저런 능력은 이제 요리사의 영역도 아니잖습니까."
드물게 반발하는 병사도 있기는 했다만.
"뭐야?"
"쟤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됐네."
"신 병장님 하시는 일은 그냥 그러려니 해. 안 그러면 머리 아파, 인마."
...아무튼!
그림자 안의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부대의 여유 식량을 꽉꽉 채워 넣었음에도 여유가 있을 정도.
상당한 양의 식재료.
적은 양의 요리도 복사해 대인원을 먹일 수 있는 스킬, [오병이어]까지.
두 조건이 갖춰진 지금.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수백 명의 인원도 몇 년은 먹여 살릴 수 있다.'
재료를 정돈하며 창수를 비롯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직전에 만났던 태완의 그룹과는 다르지.'
그들은 던전 공략에 협조할 가능성이 아예 없던 이들.
게다가 우리에게 식량을 내놓으라고 반쯤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들은 협조적인 것은 물론, 오히려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려고 했지.
그렇다면.
'성의에 보답해 줘야겠지.'
* * *
창수가 이끄는 그룹, '복수자들'.
그 일원인 범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공간 마법이라니.'
군인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내.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엄청난 양의 식재료와 요리 도구들을 꺼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공간을 조종하는 마법을 이용한 것이겠지.
그들 그룹은 상대적으로 인원수가 적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느 그룹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하지는 못했다.
복수심에 불타 어인을 사냥하는 이들.
그들은 이 도시의 어떤 각성자들 보다도 높은 평균 레벨을 자랑하는 그룹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중의 누구도, 저런 짓은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불을 쏜다거나, 얼음을 만들어 내거나.
그런 종류의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
더 어이가 없는 것은.
턱 턱.
"흠. 준비는 이 정도면 됐고."
그 엄청난 수준의 마법사가 바닥에 요리 도구들을 쌓아 올리는가 싶더니.
대뜸 요리를 시작해 버렸다는 것.
"마법사들! 불 지펴!"
"예!"
"뭐야, 화력이 왜 이렇게 약해?"
"아. 그게. 이 던전에서는 저희 화력이 좀 약해지다 보니...."
"불이 약한 거만큼 요리할 때 화나는 일이 없다는 거 알지? 더 세게!"
심지어 화염 계열의 마법사가 들러붙어 불을 피우는 모습까지.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니, 이런 식으로 요리를 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진 범석은 근처에 서 있는 군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들 대장이란 사람. 공간 계열의 마법사 같은 거 아닙니까?"
"예?"
"그런 사람이 왜 요리를 하고 있답니까? 요리가 취미인 건가?"
순수한 궁금증이었으나.
얘기를 들은 병사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조금 기다려 보시면, 다 알게 되실 겁니다."
"그게 무슨."
궁금한 점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커지는 대답.
범석은 조금 짜증을 느꼈으나.
'...아니. 저 남자의 취미가 요리든 뭐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곧 관심을 꺼 버리기로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
괴물들을 쳐 죽이는 것.
외부에서 왔다는 저 군인들도 마찬가지.
괴물 놈들을 쳐 죽이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가 중요할 뿐.
'다른 일에 괜히 심력을 써 봐야 손해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구석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소.
그 방 중 한 곳에는....
범석의 아버지도 있었다.
어렸을 적.
언제나 당당하게 그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던 아버지.
어린 기억 속의 그는 마치 거인처럼 거대하게만 보였다.
나이를 먹어 가며 덩치는 점점 자신과 비슷해졌으나.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존경스러운 사람.
하지만.
갑작스러운 수해와 괴물의 등장.
그로 인해 범석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거기서 멈췄으면 그래도 다행이었겠지만.
범석의 아버지는 그런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정신을 깊은 곳에 가둬 버리기를 택했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새끼들... 그놈들한테 복수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지금 요리를 하고 있는 남자도 그렇다.
그의 취미가 요리니 뭐니.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보아하니. 꽤... 아니,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사인 것은 확실해 보여.'
그들의 대장은 저들과의 동맹을 고려하는 중이었다.
꽤 강력한 마법사.
동맹이 된다고 한다면 그의 복수에 도움이 되겠지.
그 외의 것은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일.
범석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뒤.
멀리서 요리가 진행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양이 묘하게 적은 것 같은데.'
자기가 대접을 하겠다느니 거창하게 말하더니.
정작 그가 만드는 요리는 기껏해야 1인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쯧... 한바탕 싸우고 와서 출출한데. 저런 식으로 언제 요리를 다 만들겠다고.'
식사 따윈 허기만 달랠 수 있으면 그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재료를 꺼내던 모습은 확실히 경악스러웠지만.
괜히 맛을 챙기겠답시고 거창하게 요리를 하는 꼴은 시간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1인분의 요리를 그릇에 나눠 담은 남자가, 그 위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병이어]
그 순간.
"...어!?"
범석의 눈앞에.
남자가 만들었던 요리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그 공간 마법으로 이동시킨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이건."
"요리가 복사...된 건가?"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옆을 둘러보자.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의 앞에 요리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군인들까지 포함해 100명이 훨씬 넘는 인원들.
그 모두에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범석이었으나.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신화에서 기적으로나 다뤄질 법한 짓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런 걸 보고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범석은 아까 질문을 했던 병사에게 다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기."
"잘 먹겠습... 아. 예? 또 뭐 질문 있으십니까?"
막 요리를 입에 담을 생각에 싱글싱글 웃던 병사.
그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표정에 범석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이것만은 물어야 한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바깥의 인간들은 모두 저렇소?"
"모두 저렇냐는 게 뭔 소립니까?"
"그러니까... 당신이나 다른 군인들, 바깥의 인간들. 모두 저 남자하고 비슷한 수준이냐 이거요."
꽤 진지한 질문이었다.
창수가 이끄는 그룹.
'복수자들.'
그들은 이 수몰된 도시에서는 강자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범석 자신만 해도 그렇다.
물속이라는 불리한 환경에서도 어인 두세 마리를 동시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강자.
하지만 저 남자가 한 짓에 비하면.
그딴 전투 능력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저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수준이라면?'
어쩌면.
이 도시에서는 강한 편이라고 뻗대던 자신들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복수를 위해 힘을 키우던 시간이 모두 허무해질 것 같은, 끔찍한 상상이었으나.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설마요. 무서운 소리를 하시네."
질문을 받은 군인은 오히려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란 거요?"
"당연히 아니지! 부대원들이 전부 신 병장님 수준이었으면 이깟 던전은 진입하고 한 시간도 안 돼서 클리어됐을걸요. 신 병장님이 돌연변이 수준으로 뛰어나신 겁니다."
"그, 그런 건가? 후... 다행이군."
그 끔찍한 상상은 아무래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범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신 병장님하고 지낸 지 꽤 오래된 편이긴 한데. 그런 우리도 신 병장님 하는 일에는 놀랄 때가 많거든요."
"그 정도인가?"
"...어차피 이 던전에서는 우리랑 같이 활동할 테니. 잠깐은 전우라고 봐야하려나?"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군인.
그는 무언가 혼자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임시 전우라고 생각해서. 서비스 하나 해 드리죠. 간단한 조언입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 병장님이 하는 일에 일일이 놀라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괜히 정신적으로 지치게 되기 마련이거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게 베스트예요."
"그러려니 하라니...."
"'저런 게 말이 되나?' 같은 생각은 해 봐야 답도 없고 스트레스만 받기 마련이오. 대신 그만큼 신 병장님이 대단하신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편하단 거지."
방금 부대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공간 같은 건 요리사랑 아예 상관이 없는데? 이게 말이 되나?] X
[그만큼 신 병장님이 대단하다는 뜻이구나!] O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노하우 중 하나니까, 새겨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
"...."
범석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강력한 이가 동맹이 되려고 한다는 뜻이니까.
좋게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잡설은 그만하고. 슬슬 밥 좀 먹읍시다. 배고파 죽겠네."
"아. 미안하오."
"사과는 안 해도 되고. 대신, 기대는 해도 좋을 겁니다."
"기대라니?"
"신 병장님의 다른 능력들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요리 실력이거든."
피식.
농담이라도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한 범석은 작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뭐. 맛있어 보이긴 하네.'
다양한 반찬들이 섞인 백반 세트.
몇 달을 호밀빵과 생선 정도로 때웠으니, 군침이 조금 도는 것도 같았다.
그 요리를 한 숟가락 입 안에 담는 순간.
"...!?"
아공간 마법을 본 기억은.
'따위'로 만들 수 있는 충격이 찾아왔다.
100화 환자식 (2)
"뭐, 뭐야 이 맛은!"
"맛있어...!"
'복수자들'이라는 이름의 그룹.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누가 만든 요린데.'
솔직히 나보고 공간 마법사니 뭐니 하면서 감탄할 때.
약간은 서운했다.
'내 요리는 아직 먹지도 않았으면서 말이야.'
진짜를 보여 주기도 전에 다른 부분에서 감탄하는 모습을 보니.
요리사로서 조금은 서운했단 말이지.
하지만 뭐.
결국은 시간문제였다는 거다.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다른 감정이 희석된 것일까.
묘하게 인간미 없이 무뚝뚝하게 굴던 인간들.
복수를 위해 괴물을 처치할 때 외에는 그 표정이 밝아질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으나.
-와구와구.
-후루룩....
-쩝쩝.
지금.
급하게 밥을 씹어 넘기는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활력이 돌았다.
"쩝쩝. 아무리 제대로 된 요리를 안 먹은 지 오래됐다고 해도 그렇지."
"제기랄, 너무 맛있잖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 안에 요리를 쑤셔 넣는 사람들.
저러다 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맛있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구만.'
그 풍경을 보다 보니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이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푸하! 잘 먹었습니다!"
입이 어지간히 큰 모양인지, 엄청난 속도로 식사를 마쳐 버린 남자.
그가 그릇을 비우고 잘 먹었다고 선언한 순간.
띠링.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요리를 통해 상태 이상을 치료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엥?'
동시에 몸 안에 경험치라 불리는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뭘 치료했다고?
[상태 이상 - 영양실조]
[몸 안의 영양이 불균형을 일으킵니다. 신체 능력이 붕괴합니다.]
[활동 가능한 신체 능력 유지를 위해, 마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아... 저 사람들을 [식재료 감별]로 둘러볼 때, 그런 문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요리를 먹인 내게도 나타난 메시지.
상태 이상이 치료된 본인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이봐. 잠깐만."
식사를 마친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 이봐. 잠깐만."
"와구 와구... 뭐야, 밥 먹는 데 방해되게."
"요리를 다 먹으니까. 디버프가 해제됐어."
"뭐?"
"아니, 그게 다가 아니군. 능력치가 엄청나게 상승했어.... 버프 스킬 같은 건가?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그렇지. 능력치가 이만큼 오른다고...?"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햇빛도 들지 않는 던전이다 보니, 채소 재배는 불가능.
영양의 불균형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불균형은 몸을 붕괴시키기 마련이다.
'나도 예전부터 신경 써야 했던 부분이고.'
급양대에서 정해 주는 메뉴만 요리하면 되던 신세에서 직접 영양을 고려한 메뉴를 짜야 했으니.
꽤 머리 아팠지.
이들은 애초에 식재료가 한정적이라, 머리를 굴려 볼 기회조차 없었던 거고.
'그나마 각성자의 마력이 그 붕괴를 막아 왔던 거야.'
신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꾸준히 마력이 소모된다.
그것이 하나의 디버프로써 작용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중급 요리사의 정성이 들어간 건강식 백반 세트]
내 요리로 인해 영양이 보충된 순간.
그 디버프가 치료돼 버렸단 거겠지.
'반대로 말하면. 이 사람들은 디버프를 안고도 괴물들과 싸우면서 생존해 온 이들이란 거지?'
그 디버프가 해제됐다.
이 동맹의 능력이 급격하게 상승한 셈.
'이왕 만들어 주는 거, 영양도 고려해서 만든 것뿐인데.'
설마 이런 식으로 작동하게 될 줄은.
심지어 상태 이상이 치료되면서 내게 들어오는 경험치의 양도 엄청났다.
한 사람의 상태 이상을 치료했을 때 들어오는 경험치가 부대원들을 위한 식사 일주일 치를 만들었을 때와 비슷한 양과 비슷할 정도.
몰려 들어오는 기운을 받아들이기 버거울 정도였다.
"...굉장하군."
식사를 마친 창수가 슬쩍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디버프가 해제된 거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서 그런 거라 쳐도. 요리를 먹는다고 능력치가 상승하다니. 이것도 마법인가? 인챈트라든가, 뭐 그런...."
"그냥 요리인데요."
"마법이 아니라고?"
그때였다.
구석에서 한 남자가 요리를 들고 일어나는 게 보였다.
"마법이 아니라면 무슨-."
"잠시만요."
눈을 크게 뜨며 의아해하는 창수였으나.
나는 그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 죄송...."
그 남자를 발견한 창수가 말했다.
"범석 씨? 무슨 일입니까."
"그게. 정말 별건 아닙니다만."
남자는 오히려 이런 일로 시선이 끌리자 민망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먹어 본 건 처음이라, 아버지에게도 조금 맛을 보게 해 드리고 싶어서...."
"아버지?"
"...저 방 안에 누워 있는 사람 중 한 분이 제 아버지십니다."
역시.
요리를 들고 일어날 때 혹시나 했는데, 멈추길 잘했다.
"그 요리는 당신 먹으라고 만든 거니까, 다 드십쇼."
"그래도."
"저 사람들을 위한 요리는 따로 만들 예정이거든요."
"예?"
요리는 그저 잘 만든다고 전부가 아니다.
식사의 대상이 되는 손님의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요리.
"그건 당신들처럼 그나마 멀쩡한 사람들 먹으라고 만든 요리고. 저 사람들은 환자잖습니까."
"아...."
"환자식으로 만들어야죠."
그 얘기를 듣고 눈을 크게 뜨는 남자.
"저 사람들을 위한 요리도 만들 생각이었던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일부만 굶길 거면 차라리 요리를 안 하는 게 낫죠."
그러자.
범석이라는 남자는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이래?'
잘은 모르겠지만.
그가 얌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뒤.
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환자식에는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요."
"도움이라. 아까도 말했지만, 뭐든지 말만 하시오."
"아까 죽인 어인들의 시체 있잖습니까."
"그건 왜...?"
그나마 멀쩡한 이들을 위한 음식은 내가 가져온 재료들로 처리했지만.
환자식은 이왕이면 신선한 재료를 쓰는 게 나을 테니까.
"줬다 뺏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재료로 써도 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왕이면 신선한 재료를 쓰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였으나.
그 말을 들은 창수가 기겁하며 대답했다.
이 남자가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은데.
"어차피 각성용으로 데려온 거 아닙니까? 그거 좀 쓴다고."
"그게 아니라. 괴물을 먹겠다는 거 아니오."
"...아."
아차.
부대에서는 몬스터를 요리해 먹는 문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생각 못 했는데.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을 다시 먹는다는 게 꽤 꺼림칙한 일이란 걸 까먹었네.'
그런데.
창수가 기겁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괴물의 사체를 먹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기는 하고 하는 말이오?"
"...?"
그 말을 듣고.
나는 물론, 병사들 역시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괴물의 사체를 먹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냐고?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삼시 세끼를 몬스터 요리만 먹는 사람들인데.
나와 창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병사들이 말했다.
"거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신 병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맞지. 특히 다른 것도 아니고, 요리 관련된 분야라면야...."
"으, 으음."
부대원들까지 이렇게 말하자.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가만있지 않을 거요."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창수.
아무래도 이들이 저 어인들의 고기를 먹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뭐, 그거야 나중에 알아볼 일이고.
나는 곧바로 어인의 시체에 다가가 요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꽤 처참하구만.'
각성에 사용되는 과정에서 꽤 험하게 죽어 나간 괴물들.
몬스터의 재료를 활용해 능력을 발휘하는 생산직의 입장으로 보면, 뭐 이렇게 험하게 다뤘냐고 인상부터 찌푸려질 비주얼이지만.
지금은 뭐.
상관없겠지.
마법사들을 시켜 물을 끓인 뒤.
괴물들의 살점을 물 안에 넣고 푹 삶아줬다.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꺼내 뒀던 쌀을 물 안에 담아 조금 불려 주었다.
'대충 다 익었나.'
조금 시간이 지나 살점이 다 익었을 때쯤.
채를 집어넣어 살점을 모두 건져 낸 뒤.
푸서서서석....
식칼을 옆으로 눕힌 뒤, 살점들을 모두 으깨 버렸다.
'육질을 좀 거칠게 다뤘어도, 어차피 으깨 버릴 재료라면 상관이 없거든.'
내가 만들려는 요리는 꽤 단순한 것이었다.
'환자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죽.
그리고 신선한 재료도 있고 하니.
'어죽.'
사실.
부대에 구조 요청을 하고 기절해 버린 그 남자에게도 이런 요리를 해 줄까 생각했었다.
아예 기절해 있는 사람인 만큼 잘못하면 기도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다고 해서 참았지.
'저 사람들은 정신을 놓아 버렸을 뿐, 입에 넣으면 본능적으로 씹기는 하는 것 같으니.'
부드러운 죽이라면 부담 없이 넘어가겠지.
마지막으로 요리의 위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슬쩍 비벼 주었다.
[특별 소스]를 뿌리면 마무리.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중급 요리사의 삶의 활력이 담긴 다스무르 특제 어죽]
"완성입니다."
"이걸 먹이면 되는 겁니까...?"
요리가 완성되자.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요리를 받아 들었다.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의 가족이라고 했지.'
어죽을 받아든 그들은 그릇을 들고 방 안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복수자들' 중 한 명이 슬쩍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어차피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인데, 정성껏 요리해서 먹여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가족들에게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야.
의미 없는 일이라고?
'글쎄올시다.'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잖냐.
"아버지. 저 왔습니다."
"...바아...."
범석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한 노인의 앞에 앉아서 말했다.
하지만.
아들이 찾아왔음에도 알아보기는커녕,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노인.
"...큭."
그 모습을 보자 분노가 차오른 것일까.
이를 악무는 범석.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은 그는 숟가락을 움직여 어죽을 한 숟갈 펐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재료가 좀 그렇긴 한데, 환자식이랍니다. 이 사람이 만든 요리는 저도 먹어 봤는데 엄청 맛있더라고요."
혼잣말하며 어죽을 담은 숟가락을 노인의 입에 가져다 대는 범석.
이런 보살핌이 꽤 오래된 것일까.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한 숟갈, 한 숟갈.
노인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어죽.
"...감사합니다."
이윽고.
그릇을 모두 비운 범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 드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군요."
"다행이네요."
"어차피 맛을 느끼실 수도 없을 테니, 자기만족에 불과할 테지만요."
쓰게 웃으며 말하는 범석.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맛을 못 느낀다니? 무슨 소립니까."
"예? 보이는 대로입니다.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놓아 버린지라."
이 남자.
아무래도 뭘 착각하고 있나 본데.
"제가 맛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요리를 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솔직히,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범석.
그 순간.
"범석아? 너냐?"
"...!?"
범석의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네.'
그 목소리를 들은 범석이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영혼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보던 노인은 없었다.
거기 있는 것은.
"아, 아버지!?"
"아들. 맞지? 얼굴은 비슷한데,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했어."
범석의 아버지였다.
"끄응. 악몽이라도 꾼 것 같구나."
"기적이야...."
"그나저나. 여기는 대체 어디냐? 너는 왜 그렇게 살이 빠졌고."
"차근차근... 다 설명해 드릴게요. 아버지."
"뭐, 뭐냐 갑자기. 다 큰 놈이 남사스럽게!"
범석이 눈물을 흘리며 제 아버지를 품에 안았다.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으으, 몸이 왜 이렇게 찌뿌둥하지?"
"여, 여보? 정신이 든 거야?"
"뭐가 이리 어두워. 불이라도 켜야...."
"엄마아아아...!"
마음의 상처로 인해 정신을 놓아 버렸던 사람들.
그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막 정신이 든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들을 보살피던 가족들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껴안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사람들. 정신을 차린 건가?"
"갑자기...?"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난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고 슬쩍 뒤로 물러나 방을 나왔다.
"뭐야. 신 병장님이 또 뭔가 하셨나 본데."
"이번에 또 무슨 짓을."
그중에는 부대원들도 껴 있었다만.
난 신경 끄고 뒤로 물러났다.
'나도 부모님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당장 걱정해 봐야 의미는 없으니까.'
당장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부모님들을 만나러 갈 수 있을 만한 힘을 키우는 것.
그러기 위해선.
'끄으. 배고파 죽겠네.'
일단.
요리하느라 못 먹은 식사부터 해결해야지.
* * *
범석은 눈물이 흐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언제나 거인처럼 굳건해 보이던 아버지.
그가 괴물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정신을 놓아 버린 모습을 본 뒤.
범석은 다짐했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한다. 내 인생을 모두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다짐은 더욱더 굳건해져 갔다.
범석의 삶은 복수를 위한 것이 되었다.
괴물들을 쳐 죽일 때.
범석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다.
힘든 전투였음에도 피로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큰 희열을.
하지만, 아주 가끔.
다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괴물 놈들을 쳐 죽이고.
젖은 몸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온 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보살피다 보면 가끔씩 드는 생각.
'...이딴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괴물들을 아무리 쳐 죽인들.
정신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복수한다고 날뛰는 것도... 사실은 아무 의미 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복수를 포기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 또한 아니다.
답이 없는 상황 속.
범석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 없다는 두려운 상상을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복수에 매진하기를 택했다.
그래.
그 아버지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래.... 내가 누워 있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흐윽. 예."
범석은 그동안의 일을 아버지에게 설명해 드렸다.
그러면서도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범석의 아버지는 잠깐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고맙다. 아들."
"아버지...."
"끄응. 내심 나이에 비해 정정한 편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설마하니 이 나이에 정신줄 놓고 아들한테 뒷바라지나 시키는 꼴이 될 줄은 몰랐지."
"하하...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
"그래도 이제 아비도 정신을 차렸으니까. 가족끼리 같이 고생해 보자꾸나."
"고생하자니, 뭘요?"
"뭐냐니."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답하는 노인.
"앞으로도 살아가긴 해야 할 것 아니냐."
"아...."
그 말에 범석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복수만 생각했지.
복수 외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일단은 이 도시의 이상 현상이란 걸 해결해야겠지. 그러려면 저 군인 양반들이랑 협력해야 할 테고."
"그, 그렇죠."
"끄응. 애비가 도움이 될 구석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일단은 그 각성? 그것부터 해야 뭐라도 될 것 같은데."
범석의 아버지가 정신을 놓고 멍하니 지낸 시간이 길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수해와 괴물의 등장.
그로 인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평생 동안 이룬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어. 이제 난... 살 자신이 없다.'
그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놓아 버렸던 것.
하지만 지금 그는 어떠한가.
"내가 멍청했지.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고, 남아 있는 걸 생각하지 못했었어."
"...."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를 게다. 앞으로는 같이 살아갈 방법을 궁리해 보자꾸나."
복수심에 사로잡힌 채 살아온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긍정적이고, 삶에 대한 활력으로 가득 찬 모습.
"...아버지. 고백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음? 뭐냐?"
범석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주눅 들어 말했다.
"아버지가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 저는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101화 환자식 (3)
구석으로 돌아와 나도 밥 먹을 준비를 하고 있자니.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업적 : 치료의 요리사]
'오.'
업적 달성 메시지가 나왔다.
아무래도 누워 있던 환자들이 모두 식사를 마친 것 같았다.
'업적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요리를 통해 많은 환자의 상태 이상 및 정신 이상을 치료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요리의 영역이 단순한 미식이 아닌, 그 너머까지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업적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경험치를 대량으로 획득합니다.]
['랜덤 스킬 강화권'이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들어오는 경험치의 양이 상당했다.
그리고 다른 보상은....
'랜덤 스킬 강화?'
원하는 특성을 강화해 주던 특성 강화권과 달리.
랜덤 스킬을 강화해 주는 보상이었다.
'선택권이 없는 건 아쉽지만... 강화해 주는 게 어디야.'
난 곧바로 스킬 강화권을 사용했다.
[랜덤한 스킬이 강화됩니다.]
[랜덤 스킬 선정 중....]
눈앞에 작은 룰렛 같은 게 나타났다.
룰렛의 각 영역에는 내가 가진 스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룰렛이 돌아가고....
띠링!
['절대 미각' 스킬이 강화되었습니다!]
['절대 미각' → '절대 미각(강화)']
'오.'
강화된 스킬은 절대 미각.
어떻게 강화된 것인지, 그 효과를 읽으려던 찰나.
"굉장한 짓을 해 주셨군."
창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
"무슨 짓이요?"
"당신 덕에 사람들이 정신을 되찾은 것 말이오. 그 사람들을 보살피던 그룹원들이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나보다 당신을 더 따르려고 할 지경이야."
아.
정신을 놓고 있는 사람들이 딱해서 가볍게 한 요리였는데.
이 남자의 입장에서는 부하들을 꾀려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네.
"당신네 그룹원들을 어떻게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미안하게 됐군요."
"미안하다니?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창수는 내 사과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소."
"예?"
아무래도 내 생각은 오해였는 듯.
"저 친구들은 소중한 사람들이 정신을 놓아 버린 충격에 복수를 결심한 이들이야. 그들이 정신을 되찾았으니, 이제 복수를 포기하겠지. 잘된 일이야."
"잘됐다니. 당신 입장에서는 안 좋은 일 아닙니까?"
이 사람들을 이끄는 장본인.
본인 역시 누구보다 괴물들을 혐오하고 있을 터.
그 괴물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인원이 줄어든다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지만.
"솔직히, 우리 쪽 사람들이 정상으로 보이진 않잖소?"
어.
그건 그렇긴 하지.
"나 역시 그중의 한 명이긴 하지만, 이딴 길은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
"나는 운이 더럽게 없어서 영원히 이 길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벗어나려는 걸 막고 싶지도 않아."
솔직히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조금 신기했다.
'그냥 미친 사람들은 아니란 건가.'
괴물 사냥에 미쳐 있는 이들.
던전 공략에 쓸 만하겠다, 정도의 감상이었지만.
괜히 이 사람들의 리더 역할이 아니란 거겠지.
"그리고 뭐. 몇 명이 그룹을 나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
"예?"
"어차피 당신들도 던전 공략이 목표 아니오.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사실상 같은 집단이나 다름없을 테지."
어.
그 얘기는 설마.
"던전 공략이란 거. 한번 도전해 봐야겠어."
"...!"
실제로 떠오른 메시지 같은 것은 없었으나.
[동맹을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에.
이런 메시지가 떠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창수의 그룹과의 동맹이 성사된 뒤.
본격적인 공략 회의가 시작됐다.
"그러니까. 여기가 던전이라고 친다면 어딘가에 보스가 있다는 건데.... 사실 짐작 가는 곳이 있기는 해."
창수는 우리를 데리고 옥상으로 향한 뒤.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시의 중심부지."
"근거는 뭡니까?"
"잘 보시오."
보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듯.
팔짱을 끼고 물러나는 창수.
그의 말을 따라 그 주변을 조금 보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수위가 높군요."
"맞아. 그나마 외곽 쪽인 여기는 그나마 건물의 2층, 못해도 3층까지만 올라가면 괴물들에게서 안전해지지. 하지만."
"저긴 어지간한 3층 건물은 다 잠겨 있는 것 같은데요."
"바로 그거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창수.
"그뿐만이 아니야.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저 괴물 놈들의 출현 빈도도 높아지고, 수준도 올라가거든."
"허어."
"수위가 높아지는 것만 해도 싸우기 힘든 환경이 된다는 뜻인데. 숫자도 늘어나고 힘도 강해지니, 우리 그룹도 일정 이상은 진입하지 못하고 외곽만 돌고 있던 형편이지. 노골적으로 수상하잖나. 저 안에 무언가 있기는 할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지."
"접근이 어렵다는 건, 그 안에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니.... 일리가 있네요."
"뭐. 이 도시의 인간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야. 문제는 그만큼 접근이 어렵고 괴물들도 많다는 건데."
창수는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암만 밖에서 온 군인들이라고 해도, 저기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거든."
"뭐.... 그건 한번 해 봐야죠."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대답은 아니긴 한데. 으음. 뭐, 그건 넘어가도록 하지."
그렇게 공략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
어느 정도 경계심도 없어진 것 같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점을 묻기로 했다.
"이 도시에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아시는 건 없습니까?"
"응? 당신들이 말한 것 아니오. 그 보스라는 놈을 잡으라고."
"그거 말고도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 한 명 정도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그런 게 있으면 진작에 다들 탈출했겠지."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한테 구원 요청을 해 온 그 남자는. 대체 뭐야?'
춘천에서 왔다던 남자.
자기가 온 곳을 잘못 말한 게 아니고서야.
이 던전에서 탈출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대체 어떻게 이 던전을 탈출해서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했단 말인가.
'기절해 있는 양반이니, 깨워서 물을 수도 없고.'
"사실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한데...."
"?"
"질문인데, 여기서 못 나가는 이유가 뭐일 것 같은가?"
"글쎄요."
"저 벽 보이지?"
폭포처럼 흐르는 벽
"수압이 엄청나. 아직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탈출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차량을 타고 나가려고 해도 차량째로 갈려 버리더군."
"저 폭포가 문제라는 거죠?"
"...? 그렇지."
역시.
'던전은 한번 입장하면 클리어 전에는 나갈 수 없어.'
하지만.
'이 던전은 멸망의 날 첫날에 발생했고... 이 사람들은 여기가 던전인 줄도 몰랐다.'
던전에 입장하면 입장 관련 문구가 나온다.
던전에 입장한다는 과정을 거쳤다면, 여기가 던전이란 걸 모를 수가 없다는 것.
즉.
'이 사람들은, 던전에 입장한 적이 없는 거야.'
우연히 원래 살던 곳이 던전이 되었을 뿐.
시스템적으로 '던전에 입장'한 적은 없다는 거다.
'입장한 적이 없으니, 나가려고 한다면 나갈 수 있어야 정상인 거다.'
지하철의 던전의 경우.
입장하면 나갈 수 없다는 문구와 함께 검은 장벽이 우리를 가로막았지.
이들은 조금 다르다.
외부와 던전의 경계에 내리치고 있는 엄청난 수압의 폭포.
그 폭포를 뚫을 수만 있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어려워. 차량조차 갈려 나갈 정도였다니까."
"저희는 실제로 탈출한 사람을 만났습니다만."
"으음. 그렇게 말해도. ...아."
무언가 떠올린 듯.
짧은소리를 내는 창수.
"그런 게 가능할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있기는 한데."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겁니까?"
"아니, 아마 정답은 아닐 거요."
그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능력은 되지만, 그럴 이유는 없는 녀석이니까."
"가능한 존재가 있기는 하단 거군요."
"그다지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뭐. 비밀은 아니니까."
짐작 가는 존재가 뭐길래.
"아까. 당신이 어인으로 요리를 만들려고 하는 걸 내가 막았던 것. 기억나시오?"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창수.
아.
그러고 보니 왜 막았나 했었지.
"이유는 간단해. 괴물이고 인간이고 가리지 않고 잡아먹었던 사례가 있었거든."
"...?"
"그리고...."
창수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지."
아.
짧은 얘기였지만.
어떤 얘기가 나올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비대해지고, 강한 힘을 얻었지.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지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어."
"...."
"나중에 가서는 인간까지 산 채로 씹어 먹으려고 들더군."
역시나.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괴물을 잡아먹는 건 금기가 되었지. 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는 금기 중의 하나야."
"그렇군요."
"가끔 복수를 위한 힘을 얻겠다고 괴물을 씹어 먹으려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최대한 뜯어말리고 있소. 잠깐 강한 힘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지능을 잃어 버리고 배회하는 짐승이 될 뿐일 테니."
나는 비슷한 존재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이상 식욕자.'
우리가 토벌했던 대규모 약탈자 그룹.
그 그룹의 대장으로 군림하던 인간은,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를 많이 벗어나 있었다.
우리 부대의 정예들이 단체로 덤벼들어도 우위를 점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던 것은 덤.
"그 괴물은 여전히 살아서 이 도시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지. 녀석이라면 저 수압도 버텨 낼 수 있을지 몰라."
내가 만난 이상 식욕자.
난 그 모습이 동족을 잡아먹은 결과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가 인간까지 잡아먹은 건 좀 나중 일이오. 그전에는 어인만 먹은 걸로 알고 있어."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궁금하군. 당신은 무슨 짓을 했길래, 괴물을 먹은 사람들이 멀쩡할 수 있던 거요?"
창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렇게 물어도 말이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뭐? 크하하하! 그것참 대단하군!"
그나마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중급 요리사 Lv. 22]
요리사라는 직업.
이게 뭔가 효과를 일으킨 게 아닐까.
* * *
대충 대화가 끝난 뒤.
옥상에 선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도시 하나를 뒤덮은 던전.
우리가 공략했던 지하철의 던전과는 규모 자체가 차원이 다르단 말이지.
우리 부대의 전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네.'
창수의 그룹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다른 문제들은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해결한다고 쳐도.
'절대적인 전력이 너무 모자라.'
으음.
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음?"
"던전 공략에 참가할 만한 사람. 더 없습니까?"
솔직히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다.
창수의 그룹이 특별할 뿐.
그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굳이 위험한 전투에 발을 들이밀 사람은 없을 테니.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있기는 하지."
"어?"
그런데.
창수의 대답은 반대였다.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괴물과의 교전을 피하지 않는 그룹이 몇 곳 있기는 하거든."
"정말입니까?"
"어인 놈들을 쳐 죽이는 걸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우리하곤 좀 달라. 괴물을 사냥하면 레벨을 올릴 수도 있고. 포인트도 얻을 수 있으니...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안전한 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이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던전 공략에 대해 말을 꺼내 볼 수는 있을 거요."
뭐야.
그러면 당연히 꼬드겨 봐야지.
"다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
창수는 우려된다는 듯 말했다.
"말했듯이. 그들이 괴물과 전투를 벌이는 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일이야. 사냥 자체가 목적인 우리와는 다르지. 즉."
"목숨을 바쳐야 할 만한 싸움이 된다면 발을 뺄 가능성이 크단 거군요."
"뭐. 그런 셈이오."
당연한 일이다.
던전 공략이고 뭐고, 자신의 생존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뭣보다 그 위험한 전투 끝에 공략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도 없고.
그러니.
"당신네가 말하는 던전 공략... 거기에 꼬드기려면, 저 괴물 놈들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줄 필요가 있어."
"과연."
"아마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발을 빼 버리겠지. 그렇다고 그런 확신을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니.... 사실상 없는 전력이라고 생각하는 게 맘 편할 거요."
흠.
창수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응? 상관없다니. 뭐가."
"설득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하신 거요.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들 여기 불러주십쇼."
"뭐?"
창수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뭔가 자신이 있는 거요? 당신 마법은 확실히 대단해 보이지만.... 그거랑 저 괴물들을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가랑은 별개일 텐데."
"저 어인들을 누구보다 많이 사냥하던 사람들이 할 말입니까?"
"그 와중에 죽는 사람이 없었을 것 같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나마 외곽에 있는 괴물들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으니 가능했던 일이야. 깊숙이 들어갈수록 적들은 덩치도 커지고, 이빨이나 골격도 점차 단단해지지. 수위가 올라갈수록 싸우기 힘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흠."
"이 도시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요. 괴물 놈들을 처치하고 던전을 공략한다? 솔직히 가능 불가능을 따지면 나도 불가능 쪽에 손을 들 일이야."
던전 입장 전에도 생각했던 일이다.
도시 하나를 덮는 던전을 만들어 버린 괴물.
약할 리가 없겠지.
"그 괴물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단 말이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나."
꽤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안 되면 뭐. 되게 해 봐야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난 말 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뭔가 생각이 있나 보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오래 걸려도 이틀이면 충분할 거요. 숫자가 많은 건 아니니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창수는 영 석연치 않은 듯했지만.
그럼에도 내 말을 믿고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이동했다.
건물 옥상에 연결된 구름다리를 타고 이동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름 생각해 놓은 구석이 있긴 하거든.'
여차하면 우리 부대만으로 던전을 공략해야 했을 수도 있으니까.
위험한 던전에 굳이 입장한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거든.
그 '생각해 놓은 구석'에게 다가갔다.
"표정이 왜 그래?"
"음? 아.... 영준이 왔냐."
건물 구석.
약간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던 민재 형이 말했다.
"으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니 뭐가."
"...아무래도 나는 이 던전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물로 뒤덮인 도시.
심지어 무슨 조화인지, 건물의 외벽에서도 폭포처럼 물이 흐르고 있다.
건물 안쪽은 그나마 덜한 편이라고 하나, 습기 때문인지 바닥에도 조금씩 물기가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내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을 테니까."
민재 형의 전공은 번개 계열의 마법.
던전의 환경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위력이 강화되었다든가.
저격까지 가능한 사수들과 달리.
마법사들의 마법은 사정거리가 그렇게 길지는 않으니.
'좋든 싫든 간에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아군에게도 영향이 올 거란 말이지.'
덕분에 던전 진입 후 벌어진 전투 내내 민재 형과 번개 마법사들은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때 꽤 자존감이 깎여 나간 모양.
"차라리 내가 탄약대대를 맡고 이상아가 여길 오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가위 같은 날카로운 무기는 물속에서도 꽤 효과가 있을 테니까.... 아까 그 아공간. 그때 그 뱀파이어의 능력이지?"
"아. 눈치챘어?"
"그 녀석을 쳐 내자고 해 놓고서, 정작 쓸모없는 건 내 쪽이로군."
아군을 죽인 뱀파이어를 굳이 써야 하냐는 의문을 던졌던 민재 형.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었나 보다.
"...내가 너무 안 좋은 얘기만 늘어놨나?"
이제야 아차, 싶은 듯.
"크흠. 미안하게 됐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민재 형은 헛기침을 하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대충 얘기는 듣고 있었다. 작전은 알겠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문제라고?"
"어. 우리끼리 공략할 수 있겠다면 좋겠지만... 그래도 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최대한 그 사람들을 설득해 봐야지."
"던전 공략이 가능하다고 확신을 줘야 한다는 건데.... 그런 게 가능한가? 적어도 난 방법이 잘 안 떠오른다만."
"방법이 있긴 해."
"뭐?"
놀라는 민재 형에게.
난 반대로 뭘 묻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생각해 놓은.
잘 먹힐 거라는 확신이 있는 방법.
"정확히는. 여기 있지."
내가 가리킨 것은.
이민재 병장, 본인이었다.
"형이 고생 좀 해 줘야겠어."
"...뭐라고?"
102화 신벌 (1)
'후우. 이게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군.'
한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는 수몰된 도시에서 작은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나름대로 능력도 있어서 그룹은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었으나.
'도시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으니. 곧 싸움이 있을 거야.'
낚시를 통해 얻는 식량이나, 포인트를 통해 얻는 빵 정도로는 도시의 인간들을 모두 먹일 수 없다.
과거에도 한 차례 식량을 두고 큰 싸움이 있었다.
곧 다시 인간들끼리 칼을 들 일이 생길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그룹원들을 데리고 사냥을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레벨을 올리고, 포인트를 얻어 더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왔다.
-여길 탈출할 방법을 알아냈소.
미쳐 버린 전투광들로만 구성된 그룹, 복수자들.
그 그룹의 리더인 창수였다.
듣자 하니, 외부에서 온 군인들과 합류했고.
그들과 함께 여길 탈출할 작전을 짜고 있다고 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은 남자는 생각했다.
'복수에 미친 놈들. 또 헛소리로군.'
괴물 놈들에 대한 적대심이야 없는 사람이 없다지만.
저들은 그 정도가 많이 과했다.
도시에 살아남은 대부분의 인간이 그들을 꺼릴 정도로.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젠 그놈의 복수에 우리까지 끌어들일 셈인가.'
외부에서 온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태완의 그룹이 그들을 맞이했다가 안 좋게 헤어졌다던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도 모자랄 이들을 내쫓았다는 얘기에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군인들이 같이 괴물을 사냥하자느니 소리를 내뱉는다면 나라도 거절했을 거야.'
미안한 얘기지만.
남자는 그런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정체불명의 벽에 갇혀 건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고는 하나.
그런 상황이라도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게 그의 심경이었으니.
괴물들을 사냥하는 걸로 모자라, 중심부에 들어가 그 우두머리를 잡는다?
자살 방법치고는 참신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목숨이 조금이라도 아까운 이들은 결코 동참하지 않겠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하려는 그였으나.
-믿기 힘든 것도 이해해. 하지만 잠깐 우리 건물을 찾아와 얘기를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나.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3일 치의 식량을 제공하지.
-...3일 치나?
말이 3일 치지.
하루 먹을 식량조차 소중한 상황에서 말도 안 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 조건에 눈이 돌아가 버려서 얼떨결에 와 버렸지만, 잘한 선택이었을는지.'
주변에는 그처럼 조건에 넘어가서 찾아온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나름대로 강자가 득실거리는 창수의 그룹과 친해져서 나쁠 게 없다는 판단도 깔려 있었으나.
그것과 별개로 창수가 말한 방법은 현실성이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저 괴물 놈들을 사냥하는 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짓거리인데. 그놈들의 우두머리를 사냥한다는 게 가능할 리가 있나.'
그래도 뭐.
자신이 약간의 시간을 낭비하는 대가로 그룹원들의 3일 치 식량을 받을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이득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의 옥상에 올라간 남자.
그가 보게 된 것은.
"...어?"
콰르르르르르릉....
쿠릉....
도시의 중심부.
그 상공에 떠 있는 거대한 번개 구름이었다.
* * *
던전에 진입한 뒤.
번개 계열의 마법사들은 사실상 쓸모없는 직군으로 변해 버렸다.
이유는 간단.
'너무 강해져서 문제지.'
이 던전.
지상을 뒤덮은 물은 물론이고, 공기 중에도 습기가 넘쳐난다.
그나마 건물 안쪽은 덜한 편이나, 역시나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이런 환경인데 아직까지 질병 같은 게 돌지 않은 건 던전이라는 특이성 때문이겠지.'
아무튼.
최고의 전도력을 자랑하는 물이 사방에 퍼져 있는 상황.
번개 계열의 마법사들.
그들의 마법은 너무 강해져 버렸다.
'최대한 먼 곳에 번개를 던져도 그 번개가 아군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
건물 안에 있을 때도 건물 외벽을 흘러내리고 있는 저 폭포 탓에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이 간다.
이 도시에서도 번개 계열의 각성자가 나오긴 했지만.
그들 모두가 전력 외로 취급되었다.
'저레벨의 마법사는 안 그래도 마법의 사정거리가 그렇게 길지 못하니까.'
괜히 가까운 곳에 마법을 사용했다가 아군과 자신만 피해를 입게 되는 것.
반면.
[식재료 감별(강화)]
[이민재]
[Lv. 21 중급 번개 마법사]
[황선욱]
[Lv. 16 하급 번개 마법사]
우리 쪽 마법사들은 꽤 고레벨이란 말이지.
"정말 위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최대 사정거리에만 쏘는 식으로 한다면... 어느 정도는 활약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희가 사수들처럼 장거리 공격에 특화된 것도 아니고. 위력을 줄이고 멀리 쏜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 부탁으로 모인 마법사들은 영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위력을 억제하면 안 되지."
"예?"
"그러면 결국 아군한테도 영향이 갈 겁니다. 이 던전의 환경 자체가...…."
"맞는 말이긴 한데. 발상을 좀 바꿔 보자고."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위력을 줄인다는 건.
너무 소극적인 발상이잖냐.
"반대로 가야지."
"...?"
"위력도 늘리고, 사정거리도 늘린다."
안 그래도 강해진 마법.
그걸 더 강화하고.
"그럼에도 아군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을 정도의 사정거리가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아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
"안 될 것 같냐?"
"...?"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되게 할 능력도 있고.'
전차대대를 탈환할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전력을 다해서 만든 요리를 먹고 쓰러지듯 기절한 서수혁 상병.
녀석이 기절하기 직전에 한 말.
-이만큼 강력한 버프는, 가급적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야 어떻게든 버텨내긴 했습니다만,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약한 녀석이었다면 진작에 기절했을 겁니다.
그 얘기를 들은 후.
요리의 효과를 조금씩 조절해 왔다만.
'조절하는 걸 포기한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진단 말이지.'
씨익.
나는 그림자 속에 손을 집어넣은 뒤.
안에 있는 재료들을 차곡차곡 꺼내 들었다.
"정말로 안 될 것 같아?"
"...어."
내 표정을 본 마법사들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되는 겁니까, 이거?"
* * *
그 결과가 바로.
지금 하늘에 생긴 저것.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하늘에 생긴 거대한 먹구름.
먹구름의 주위로는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스파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창수는 그 구름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곳에 갇히고 난 뒤에는... 해도 뜨지 않고, 비도 오지 않게 됐지. 바람도 불지 않았고. 일반적인 기상 현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어."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태완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태양이 뜨지 않고, 구름 자체가 사라졌다고 했던가.
"저건... 평범한 기상 현상은 당연히 아니겠지."
그야 뭐.
구름 한 점 없던 공간에 갑자기 먹구름이 낄 리는 없으니까.
기상 현상인 먹구름은 일종의 자연재해.
번개를 머금고 비를 쏟아 내는, 인간이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영역의 일이다.
'저건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다들 식은땀을 흘리면서 쳐다보고 있었으나.
사실 진짜 번개 구름하고 비교하면 꽤 차이가 있을 거다.
사방이 막히고 구름 한 점 없는 던전 내부.
심지어 위치한 고도도 좀 낮은 편이다 보니 쓸데없이 커 보이는 거지.
사실 번개를 품은 먹구름의 크기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충분할 정도의 크기지만.'
실제 자연 현상의 규모를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그래도 굉장한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만큼.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커허...."
"...끄르륵."
번개 계열의 마법사들.
그리고 마법의 위력이 줄어 들어 할 일이 없어진 화염 계열의 마법사들까지.
그들 모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일부는 입에서 게거품을 물기까지.
저들이 저렇게 고통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내가 전력을 다한 요리를 먹었으니, 죽을 맛이겠지.'
맛도 맛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얻은 버프가 핵심.
'지나치게 강한 힘은 사용자에게도 무리를 주는 법.'
내가 직접 하기엔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다 보니, 능력치와 레벨이 다른 부대원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상승해 버린 나.
그런 내가 전력을 다해 만드는 요리는, 부대원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버프를 제공한다.
덕분에 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들.
하지만 버프를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마력 전이.'
마법사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든가.
내 요리를 먹고 마력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마법사들.
그들은.
그렇게 증폭된 마력을 한곳으로 전이시키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부대 최강의 마법사.
이민재 병장.
그가 시전하는 마법을 향해.
"죽겠군...."
이민재 병장 역시 내가 '전력을 다해' 만든 요리를 먹었다.
그 상태에서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을 모조리 받아 내기까지 하고 있으니.
'아마 이 자리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고 있겠지.'
어쩌면.
서수혁 상병이 겪은 것보다 더한 고통을.
하지만.
이래 봬도 부대에서 내 바로 다음으로 각성한 양반이란 말이지.
"던전에서 쓸모없어질 것 같다고 하자마자, 이딴 개고생이라니...."
"그래서 말했잖아. 고생 좀 해 줘야 할 것 같다고."
부대 최고참인 나도 일하고 있는 참인데.
어딜 혼자 꿀을 빨려고 그러나.
그리고....
"맛있는 밥 먹여 줬으니. 일해야지."
"큭큭.... 개자식."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정신을 잃지는 않은 채, 손을 드는 이민재 병장.
그가 즐겨 사용하는 마법인 번개의 창이 그 손에 쥐어지고.
파악!
상공의 먹구름으로 던져졌다.
'민재 형의 마법.'
나보다는 꽤 늦었지만, 최근 20레벨을 넘어 중급 마법사가 된 민재 형이다.
당연히 처음 각성했을 때와는 다룰 수 있는 마법의 가짓수가 달랐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것.
효과는 간단하다.
먹구름 안에 마법을 응축해서 한 번에 발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지속 시간이 짧은 편이고, 원래라면 그렇게 멀리 이동시킬 수도 없어서 효용성은 크지 않았지만.'
버프를 몸에 두른 지금은 다르다.
번개를 계속해서 집어삼킨 먹구름은 저 멀리, 도시의 중심부에 있었다.
아마도 이 던전의 괴물과 보스가 집결해 있을 그 장소의 바로 위쪽.
우리가 있는 건물과는 상당한 거리다.
아무리 강력한 번개라고 한들.
우리에게 피해가 오지는 않을 정도로.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구름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창수가 데려온 다른 그룹의 인간들.
그들은 모두 상공에 생겨난 먹구름을 보며 경악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짓을 하려고 한 건 저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도 있었으니까.
확신이 없다면 던전 공략에 참가하지 않을 사람들.
그렇다면.
'확신이 들 정도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면 되는 거지.'
이 정도면 시선은 충분히 끈 것 같고.
조금은 더 위력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끄르륵...."
아무래도 더 시간을 끌면 슬슬 기절하는 사람이 나올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민재 형의 등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사격 개시."
"...개시!"
내 명령에 복명복창하는 이민재 병장.
그 모습을 보며 동시에 생각했다.
'분명... 바다에서 전기로 낚시를 하는 건 불법이었지?'
너무 강한 위력에 낚시꾼들도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던가.
그럼에도 꾸준히 바닷속에 배터리를 꽂아 넣는 낚시꾼들이 뉴스에 나오곤 했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리스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 주기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너무 효과적이니까.'
그 순간.
수몰된 도시의 중심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콰르릉...!
신벌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번개의 창이.
103화 신벌 (2)
콰르릉...
콰릉-
상공에 자리 잡은 먹구름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번개가 내리쳤다.
멀리 있는 여기서도 위압감이 전해질 정도의 번개.
그 번개가 지상에 꽂히자.
둥둥....
엄청난 숫자의 물고기.
아니.
어인들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른 건물들에 가려져 중심부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숫자라는 것이 보일 정도.
그리고.
[당신의 요리를 대접받은 이들이 전투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의 활약을 남겼습니다!]
[요리사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크윽.'
내 몸 안에 거대한 기운이 몰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몰려 들어오는 기운에 약간의 고통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간접적으로 경험치를 나눠 받는 내가 이 정도라고?'
그렇다면.
저 마법에 참가한 마법사들.
그리고 마법을 발현한 민재 형은 얼마나 많은 경험치를 얻고 있다는 걸까.
'대박이다.'
중심부로 갈수록 괴물들의 밀도가 늘어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다.
반대로 저 괴물들을 그냥 뚫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얼마나 고생해야 했을지.
기대 이상의 결과에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고오오오오오오오-
"!?"
"이 소리는."
번개가 내려치는 도시의 중심부.
그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무언가.
비명이 이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것을 보면 평범한 녀석은 아니겠지.
'보스 몬스터.'
이 도시를 던전화시킨 장본인.
바로 그 녀석이겠지.
방금 저 번개는 현시점에서 우리 길드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이었다.
그게 저 안에 숨어 있을 보스 녀석에게도 영향을 줬다는 거겠지.
그 여파는 곧바로 나타났다.
"어어. 저기 좀 봐."
"수위가 낮아지고 있어...!"
던전이라는 이름의 테라포밍.
그걸 진행하는 것은 보스 몬스터다.
중앙부로 갈수록 높아지는 수위.
도시 중앙부는 어지간한 고층 건물 수준으로 물이 차올라 있었으나.
'그 수위가 낮아지고 있다.'
도시 중앙부만이 아니였다.
던전 전체의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는 듯.
원래도 가슴께까지 차올랐던 이 근방 역시.
이제는 허벅지에 겨우 닿을 정도로 낮아졌다.
'이런 거까진 기대 안 했는데.'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최대한 억누르며 뒤를 돌아봤다.
"미, 미친."
"저 물이 낮아지고 있는거. 우연은 아니겠지?"
"그럴리가 있나. 잘은 모르겠지만. 저 군인들이 뭔가를 한거겠지."
방금 일어난 현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괴물이 많아지고, 수위가 높아지는 게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이딴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늘에서 번개를 불러내는 기적 따윈 일상에 불과하다는 태도로.
"그래서, 괴물을 줄이고 수위를 낮춰 봤습니다."
"...."
"맙소사."
꿀꺽.
식은땀을 흘리며 지상을 내려 보는 사람들.
그곳에는, 둥둥 떠오른 채 돌아다니는 어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이 정도면."
"공략이란 거.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 * *
"정말 가능한 거겠지?"
"하하. 저희만 믿고 따라와 주신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창수가 데려온 사람들은 김 중위에게 맡겼다.
호방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김 중위.
"꼼짝없이 저 건물에서 말라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무서운 말씀을. 아무리 위험한 순간이라도 다 살아날 구멍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이 도시에 굳이 입장한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짓이거든요."
"역시...!"
"괜히 군인들이 아니야. 믿음직스럽구먼!"
안 그래도 저 번개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던전 공략에 희망을 품었던 이들이다.
거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김 중위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은 점점 더 던전 공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
김 중위와 사람들을 지켜보던 내게 의무병이 다가와 말했다.
"신 병장님."
"어."
"방금 공격에 가담했던 마법사들, 전부 기절했습니다."
"...조용히 얘기하자."
다른 각성자들에게 들리지 않는 곳까지 이동한 뒤.
의무병의 보고를 들었다.
"상태는 어떤데?"
"마력 폭주와 마력 탈진을 동시에 겪은 셈이니까요.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더군요."
"...."
"정신을 차리더라도 저 정도의 마법을 다시 사용하기는 힘들 겁니다."
저만한 공격 마법을 발동하는데 대가가 없을 리가 없다.
할 일이 없는 마법사들을 싸그리 모은 뒤.
충격으로 기절해 버릴 만큼 강력한 버프가 담긴 음식을 꾸역꾸역 먹이고.
그렇게 미친 듯이 증폭된 마력을, 부대 최고의 마법사.
이민재 병장에게 몰아넣었기에 가능한 결과.
'다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마법의 발현에 참가한 마법사들은 모두 탈진해 버렸다.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만.
"잘 좀 간호해 줘. 습기가 많고 하니 병이 돌기 좋은 환경이니까. 아직까지 전염병 같은 게 돈 적은 없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지. 다른 사람들이 운이 좋았던 걸지도."
"예. 맡겨만 주십쇼."
어차피 이 던전에서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마법사들이다.
그들을 이용해 다른 각성자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데에 의의를 둬야겠지.
실제로.
"애초에 우리가 필요할지도 의문이군."
"그러게. 방금 같은 번개 몇 방만 더 쏘면 괴물 놈들도 전멸하는 거 아니야?"
"하하하!!!"
방금 마법을 보고 합류한 이들.
그들은 이제는 던전 공략이 가능하다고 아예 확신을 가진 채 떠들고 있었다.
물론 저들이 말하는 그 번개를 다시 쏘는 건 어렵다.
아마 최소한으로 잡아도 한 달은 더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만.
'...굳이 밝히진 않아도 되겠지 뭐!'
불편한 진실은 묻어두기로 한다.
창수가 데려온 그룹들의 각성자들을 모두 포함하면 그 숫자는 우리 부대의 2~3배.
멸망의 날 이후로 이만한 인원수의 인간을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우리 부대 수준으로 레벨이 높은 그룹은 창수의 그룹 정도인가.'
그 창수의 그룹 역시 레벨만 높을 뿐.
얻게 된 포인트는 대부분 식량에 투자한 것은 물론.
우리 길드 같은 단체 스킬이나 생산 계열 각성자들이 만든 아이템의 효과를 받지는 못했다.
"숫자는 엄청 늘어났지만, 전력으로만 따지면 우리 부대만 있을 때와 비교해서 1.5배에서 2배 정도겠군요."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거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서수혁 상병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눈빛이었다.
뭐 어쩌겠냐.
다른 이들이 우리 부대원들 정도로 정예화되어 있길 바라는 게 사치지.
'이 병력으로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도 있었다.
"수위가 줄어든 덕에 대충이지만 정찰이 될 것 같아요."
정수아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직업은 정령사.
아무래도 전투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은 편이다보니.
언제나 드론으로만 사용되고 있다만.
그녀가 계약한 정령은 다름 아닌 물의 정령이다.
'물을 매개로 이동할 수 있는 정령.... 이 던전이라면 어디든 시야에 들어온다는 뜻이지.'
아마 전투 면에서도 밖에서보다 기대할 수 있겠지.
그녀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상성이 좋은 던전인 셈.
"중심부는 수위가 너무 높아서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방해가 들어와서 정찰하기가 힘들었거든요."
"이제는 아니란 거군."
"네. 시야를 방해하던 존재가 치명상을 입은 거겠죠. 이제는 대충이나마 중심부의 풍경도 정찰할 수 있겠어요."
정찰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건 의미가 크다.
도시의 생존자들은 외곽의 고층 건물에 퍼져서 활동하고 있다.
중심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적 어인이 어디에 더 많이 분포되어있는지만 파악할 수 있어도 큰 이득.
그런데.
"어? 이건 좀 예상외네요."
"응? 뭐가 있길래 그래?"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던 도시의 중심부.
도시를 뒤덮은 물은 맑은 편이라고 하나.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 불빛 한 점 제대로 드는 곳이 드물다.
"건물이 생겼어요."
아무리 고층 빌딩에 주거하는 생존자들이라고 한들.
그 안쪽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책에서도 본 적 없는 양식의 건물들이."
"흐음."
그렇게 사람들의 눈이 가려진 사이.
안쪽에는 건물을 짓고 있었다는 거다.
"도시 중심부면 원래도 건물들이 많았을 텐데. 그 건물들은?"
"물에 잠겨 있던 건물들은 전부 사라졌어요."
"설마. 건물들을 철거해 버렸다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물에 잠기기 전의 풍경을 상상하면 안 될 것 같네요."
정체불명의 새하얀 자재들로 만들어진 건축물들.
"뭐. 던전이 테라포밍이라는 가정이 맞다면, 결국 자기들이 생활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겠다는 거니까. 자기들 양식의 건물을 짓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건물을 지을 정도로 문화가 발달한 종족이란 게 놀랍습니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지역은 도시의 외곽.
이쪽은 말이 던전이지.
물에 잠겨 있다는 특별한 환경을 제외하면 바깥과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좀비가 없고, 괴물은 물속에만 돌아다닌다는 점에서는 바깥보다도 안전할 지경.
'중앙부는 다르단 건가.'
괴물들의 핵심 전력과 보스 몬스터가 자리하고 있을 장소.
그곳에 있던 인간들의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저들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들.
그래.
정말 던전이라 불러야 할 만한 장소가 돼 버렸다는 거다.
* * *
풍덩....
수백 명의 인간이 물속에 몸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체온을 낮추고, 옷을 비롯한 장비들을 무겁게 만든다.
"쯧."
"이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군."
물 속 자체가 애초에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니니까.
물론, 그 정도면 그냥 거슬리고 말 일이겠지만.
진짜 문제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파바바바바바.
물 안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검은색 형체들.
"저, 저기!"
"옵니다!"
본래.
이 도시의 인간들 대부분은 어인과의 전투를 꺼렸다.
그나마 전투를 벌이는 이들 역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전투를 펼쳐야만 했다던가.
환경적으로도, 숫자로도 크게 밀리는 상황이니.
당연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걸 무시하고 어인과 자주 격돌한 이들이 창수의 그룹이었지만.
그렇게 싸움을 거듭하며 오래 살아남은 이는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으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인이 보이기만 해도 긴장감에 손을 떨던 남자.
"하하! 홈런이다, 자식아!"
그가 휘두른 거대한 망치가 튀어 오른 어인을 후려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너무 가볍잖아!"
"핫하! 죽어라! 피라미 새끼들!"
"끼요오오옷!!!"
어인들에게 먹잇감에 불과했던 인간들.
불과 얼마 전에 우리 부대의 동맹이 된 이들이 용맹하게 괴물을 베어 넘겼다.
"대단한 버프로군."
그게 가능한 이유는 당연히 하나.
김 중위의 함성과, 내 요리 등.
우리 부대가 자랑하는 광역 버프의 효과였다.
"우리 중에서도 버퍼 계열의 각성자가 있기는 했지만.... 수준이 달라. 특히 이 환경 적응이라는 버프가."
콰직!
덤벼드는 어인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순식간에 마무리 하는 창수.
그가 자신의 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군인 양반. 혹시 내가 왜 창을 쓰게 된 건지 아시오?"
"예? 각성한 특성 때문 아닙니까?"
"그것도 있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달라. 물속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선택지가 얼마 없었거든."
물속에서는 대부분의 행동이 제한된다.
특히 부피가 큰 것일수록 물의 저항을 더 크게 받아 힘을 잃기 마련.
"그나마 점으로 찌르는 창이나, 아니면 애초에 면적이 적은 단검 정도. 그게 물속에서 전투가 가능한 마지노선이었지."
"과연."
"우리 그룹의 대부분은 그 둘 중 하나를 무기로 사용하오. 저 괴물 놈들과 가장 많은 전투를 거쳐 온 우리만의 노하우 중 하나랄까. 하지만...."
창수의 그룹과 달리.
다른 각성자들은, 어인과의 전투를 자주 겪지는 못했다.
새로운 일원을 각성시킬 때나 조금씩 전투를 벌여 본 정도.
"물속에서 망치를 휘두르다니. 본래라면 맨손보다 못한 무기였을 텐데...."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는 각자가 각성하면서 부여받은 특성에 따라 달랐다.
당장 처음 괴물을 쳐 낸 각성자가 휘두른 것은 망치였기도 하고.
"그런 무기들이. 제힘을 다하고 있어."
내 요리를 통한 버프는 능력치를 향상시키는 부분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가장 큰 것은 일시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특성이다.
[환경 적응 - 수]
[특정 환경에 뛰어난 적응력을 지닙니다. 물속에서 활동할 시, 환경으로 인한 행동 제약이 80%까지 완화됩니다.]
"말도 안 되는 효과로군."
"뭐. 효과가 조금 좋긴 하죠."
"조금이라?"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창수.
"저번에 다른 병사들한테도 물어봤지만. 바깥의 각성자들은 모두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던가. 그런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다행이군. 자신감이 크게 상할 뻔했어."
저런 버프를 뿌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부대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강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다른 그룹의 인간들이 합류한다고 해도 큰 영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소. 환경의 제약이 있으니 기껏해야 괴물 놈들을 몸으로 막아주는 역할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했지."
"이제는 아닙니다."
그 말대로.
능력치 상승은 물론.
이전과는 달리 물속에서도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각성자들.
그렇게 되자.
포식자였던 어인들이 오히려 밀리기 시작했다.
창수가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놈들을 모두 쳐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어."
104화 다스무르 공략전 (1)
"이놈이 마지막이다!"
"끼요오오옷!!!"
괴성을 내지르며 괴물의 숨통을 끊는 남자.
그 말대로 마지막 놈을 처치하며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피해 보고."
"예!"
곧 병사 중 한 명이 다가와 전투의 결과를 보고했다.
"조력자로 온 도시의 사람 중에 부상자가 세 명. 부대원 중에 경상자가 한 명. 그 외에는 이상 없습니다."
"나쁘지 않네."
부대원들이야 워낙 전투에 이골이 났으니 당연하지만.
레벨이 낮고 전투 경험도 적은 편인 사람들.
그들 역시 나름대로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이었다.
'아직까지는 우리 쪽이 완전히 우세인가.'
이제 막 던전 공략을 위해 물속으로 내려온 참이다.
창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외곽 지역의 괴물들은 비교적 약한 편이라던가.
아무리 내 버프가 있었다고 한들, 저 사람들이 활약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부분도 컸겠지.
[식재료 감별(강화)]
[심해의 다스무리안 유체]
외곽의 괴물들은 약하다.
그 말인즉슨.
던전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카아아아악!"
"크윽!"
더 강한 괴물이 나타난다는 뜻.
"뭐야, 이 자식들은!"
"조심해! 엄청나게 강하다!"
외곽의 괴물들을 처치하면서 중앙 쪽으로 진출하던 중.
이제까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강한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해의 다스무리안 아성체]
[깊은 물의 세계, 다스무르의 수호 종족인 다스무리안의 아성체입니다.]
[다스무르의 생명체들에게는 그들 세계를 수호하는 어인, 다스무리안의 살점을 먹는 자는 불로불사를 이룰 수 있다는 민간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귀한 식재료입니다.]
[높은 잠재력을 지닌 종족이지만, 잠재력의 대부분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전까지의 어인들은 [유체].
녀석들의 크기는 잘 쳐줘 봐야 평범한 성인 남성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다만.
지금 나타나기 시작한 녀석들은 [아성체].
키만 해도 거의 2m에 달하는 수준에, 손과 발의 길이도 기괴할 정도로 길었다.
단순히 크기만 커진 게 아니라 힘도 피부의 단단함도 배가 된 느낌.
"다들 진정해라!"
"숫자가 많지는 않아! 한 마리당 두세 명씩 덤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단 것이었다.
각 그룹의 리더 격인 인원들이 지휘하며 진형을 짜고 상대하자.
그럭저럭 피해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숫자가 적어서 다행이군."
"그래. 아마 저번의 그 마법 덕분이겠지."
"새삼 대단하군. 그때 물 위로 떠오른 엄청난 숫자의 시체들이 다 이 정도 수준의 괴물이었다는 거 아닌가?"
본래라면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괴물의 숫자도 많아지고.
그 강함도 더 강해진다고 했다만.
민재 형과 마법사들을 갈아 넣어가면서 만들어 낸 공격.
그 대규모 번개 마법으로 인해, 중앙부에 있던 괴물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든 것.
"원래라면 이 정도 수준의 괴물들이 말 그대로 떼를 지어서 몰려 왔을 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배터리 낚시가 불법이긴 하다만.
효과는 직빵이였다는거다.
해 둬서 다행이지.
게다가.
강해진 괴물에게 고전하는 것은 도시의 사람들뿐.
서걱-
회칼의 형태를 한 식칼.
[독고구식]을 쥐고 어인을 베어 넘겼다.
녀석도 제 용도로 쓰이는 것이 기쁜 것일까.
여느 때보다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란 말이지.
'괴물들의 평균 수준이 올라가긴 했지만. 부대원들은 물론이고, 창수의 그룹원들 정도라면 충분히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정도.'
괴물뿐만이 아니라 중앙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수위도 문제였지만.
보스 녀석에게 피해를 입힌 덕인지 수위가 낮아진 지금.
중심부로 전진하는 데에 걸림돌은 하나도 없었다.
* * *
피를 닦아내며 다음 괴물을 찾아 이동하려던 순간.
-카라낙.... 다스....
"...."
약점을 찔러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괴물.
녀석이 무언가 언어를 중얼거렸다.
"이놈들은 언어를 사용하는군요."
근처에서 함께 싸우고 있던 광일이 녀석이 말했다.
그 말대로.
외곽에 있던 괴물들과 달리.
안쪽에서 나온 이 녀석들은 무언가 언어를 구사했다.
"외곽의 괴물들과는 확실히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저도 느꼈습니다. 뭐랄까. 지성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외곽의 괴물들은 [유체].
이 녀석들은 거기서 한 단계 넘어간 [아성체]였다.
'인간으로 치면 초등학생쯤일 테니,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나?'
언어를 사용하는 괴물 자체는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인제군청을 장악하고 있던 고블린들도 그렇고.
당장 지금도 부대원들의 시선 밖에서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을 뱀파이어들.
그 수장이자, 내 권속이 돼 버린 아리엘라도 평범하게 말을 했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둘과는 의사소통이 되었지만, 이 괴물의 언어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 정도.
"잠깐 휴식!"
"옆 건물로 들어간다!"
전진을 잠시 멈추고 부대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여 그림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생각해 보니까... 너나 그때 그 고블린들은 어떻게 나하고 의사소통이 된 거지?"
외계의 존재.
본래라면 저 어인들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놨어야 정상 아닌가.
-간단해요.
머지않아 그림자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언어를 익혔거든요.
"언어를 익혔다고?"
-그 난쟁이들도 같은 이유겠죠. 드물긴 하지만 타 종족의 언어를 금방 익히는 종족도 종종 있거든요. 말투가 어눌했던 걸 보면, 언어의 습득만 빠를 뿐 지능이 높은 건 아니겠지만요.
"그 녀석들은 그렇다 치고. 너는?"
-제 경우는 조금 특별하답니다.
특별하다니.
그 고블린들처럼 익힌 게 아니라는 건가.
-벙커에 갑자기 소환된 뒤,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앞에 있던 인간을 첫 번째 권속으로 만드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때, 녀석의 피를 마시면서 지식을 조금 가져왔거든요.
"뭐?"
지식을 가져오다니.
그딴 짓도 가능해?
-당연하죠. 피에는 그 존재의 일부가 담겨있으니까요. 고위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인간을 잡아먹고 그 인간의 행세를 하는 경우도 있죠.
"세상에."
인간을 잡아먹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 인간인 척 행세한다.
'이건 뱀파이어라기보단... 다른 괴물 아닌가?'
왜.
도플갱어라던가.
"내가 아는 뱀파이어한테는 그런 설정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애초에 뱀파이어라는 종족 명부터가 잘못됐는걸요.
"?"
-주인님이 어째서 저를 뱀파이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지는 대충 이해하지만요. 저는 밤의 귀족이에요. 제 세계의 언어로 제 종족 명을 읽었을 때의 발음은 뱀파이어와 단 한 음절도 겹치지 않죠.
"아."
생각해 보니.
몬스터들의 정체는 이계의 존재들이라고 했지.
'뱀파이어는 인간의 창작물 속에 나오는 종족.'
몬스터의 종족 명이 우리가 흔히 아는 종족인 게 오히려 이상한 일.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자기를 뱀파이어라고 소개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매번 밤의 귀족이라고만 소개했지.'
그전에 싸웠던 이 녀석의 권속들도 마찬가지.
녀석들을 뱀파이어라고 부르게 된 건....
[뱀파이어 준남작]
'상태창 때문이었잖아.'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녀석은 뱀파이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종족이었고.
...설마.
번역할 이름이 마땅치 않으니, 대충 성질이 비슷한 뱀파이어로 표기해 버렸다던가.
뭐 그런 건가?
'어이가 없네.'
이 상태창.
여러모로 조금 대충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어쨌든.
이 녀석도 자기가 인간의 언어를 익혔을 뿐.
일반적인 몬스터들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겠지.
'아니 잠깐.'
이 녀석이 특별한 경우라고?
그렇다면.
다시 그림자를 보며 말을 걸었다.
"피를 빨아서 인간의 언어를 익혔다고 했지?"
-네.
"그럼 저 어인들의 언어도 배울 수 있나?"
이 도시를 던전으로 만든 어인들.
우리 입장에서야 다른 괴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만.
'언어를 사용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들만의 건축 양식까지 가지고 있었어.'
어쩌면.
생각보다 발달한 문명과 지식을 가진 괴물들일지도 모른다.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괴물들.
그 침공의 원인은 아직까지도 불분명했다.
그나마 권속으로 삼는 데 성공한 괴물이 아리엘라이지만.
그녀는 봉인을 당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구였다고만 말했다.
'어째서 자신이 지구에 온 것인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
하지만 저 괴물들은 조금 다르다.
저만한 숫자에.
지구를 향한 테라포밍까지 진행하고 있는 녀석들.
'지구를 침공한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어떤 의도인지는 이해하지만... 어려울 거예요.
"왜지?"
-저는 하급 귀족에 불과하니까요.
아무래도 기대한 방법은 쓸 수 없다는 것 같았다.
-그 존재의 모든 기억을 흡수할 수 있는 것도 고위 귀족이나 가능한 일. 저로서는 언어 지식을 흡수하는 것도 비슷한 종족이어야만 가능한 수준이라....
뭐야, 이 녀석.
생각보다 무능하잖아.
-...호호. 그런 말을 주인님이 하실 줄은 몰랐네요...!
"?"
-...원래대로라면 힘을 키워서 최소한 남작급으로 올라갔을 예정이었거든요? 누구 씨가 찾아와서 애써서 키운 권속들을 모두 죽이고 피까지 빨아가지 않았더라면.
"아."
과연.
지금의 무능은 내가 만든 결과란 거다.
생각해보니, [그림자 장막] 역시 녀석이 약해짐과 동시에 엄청나게 좁아졌었지.
본래는 [기동요새]가 아슬아슬하게 구현 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으나, 지금은 아니니.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괴물들도 성장은 할 수 있단 건가.'
지금까지 만나본 것을 생각해 보면,
레벨이라는 명확한 성장 기준이 존재하는 우리와 달리.
몬스터들은 레벨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장이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이 녀석을 권속으로 만들 때 떠올랐던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혈족으로서의 서열은 말석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권속입니다.]
[권속을 소중하게 대하고, 키워보세요!]
[당신의 보조에 따라 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괴물이라고 여겨서 그냥 이용하는 것만 생각했다만.'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시켜 줄 필요도 있겠는데.
준남작에 불과한 녀석은 영 쓸모가 없어 보이고 하니.
못해도 백작은 되어야 그나마 쓸 만하지 않을까.
'어쨌든... 의사소통은 어려울 거라는 뜻인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종족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한다던가.
그런 게 가능하려면, 정말 엄청나게 고등한 존재여야만 할 테니.
* * *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마친 뒤.
우리는 몇 번의 전투를 거듭해가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슬슬 물이 높아지는군요."
"음."
몇 번의 전투를 거쳤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까지는 허리 정도밖에 닿지 않았던 물이 꽤 높이 올라온 게 느껴졌다.
키가 작은 병사들은 가슴까지 차오른 물에 조금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저기! 보입니다!"
방금까지 보였던 수몰된 도시의 풍경은 사라지고
무언가 새하얀 재질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신전... 같은 걸까요?"
"글쎄다."
거대한 기둥으로 둘러싸인 건물.
기둥의 벽면에는 정체 모를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묘하게 장엄한 분위기가 신전을 연상시키긴 했다.
실제로 그런 용도의 건물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중앙의 건물 근처에는 다른 작은 건물들도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몰된 고대 도시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애초부터 물속에서 만들어졌을 건물이라는 게 다른 점일까.
가슴까지 차오른 물을 보며 생각했다.
'공략하려면 지금이다.'
본래는 저 커다란 건물조차 전체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환경적응 - 수] 버프를 얻는다고 해도 물속에서 싸우는 건 쉽지 않았을 테지.
마법사들의 대규모 번개 마법이 보스에게도 피해를 줬기에 진입이 가능해진 거다.
'반대로 말하면, 보스가 회복하기 전에 빠르게 결판을 내야 한다는 거지.'
조금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진입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녀석이 다시 회복해서 이곳의 환경이 변한다면 공략의 난이도가 차원이 달라질 테니.
나는 신전 같은 건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중심부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엄청 크네."
"저 괴물들이 2m 정도 된다는 걸 감안해도...."
"좀 지나치게 큰데요?"
못해도 5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문.
그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물러나라.]
"...어?"
갑작스러운 소리에 주변을 살펴봤으나.
다른 사람들 역시 놀라는 눈치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러나라.]
그리고 다시금 울려 퍼지는 소리.
두 번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한국어는 아니다.'
아마도 저 괴물들이 쓰던 언어.
그 소리 자체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째서인지, 그 의미만이 번역되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전혀 다른 언어를 가진 종족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등한 존재여야 한다.'
그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어머?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안쪽에서. 굉장히 맛있는 피냄새가 나는데요?
105화 다스무르 공략전 (2)
[물러나라.]
"...!"
"방금 무슨 목소리가."
"뭐, 뭐야 이건."
갑자기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왜... 이해가 되는 거지?'
귀로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하지만 머리로는 그 소리의 의미가 정확히 이해가 갔다.
말도 안 되는 기현상.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진정해.'
이내 마음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애초에 던전 자체가 기현상이다.'
던전을 만드는 것도.
언어를 강제로 이해하게 하는 능력도 기현상.
즉.
머릿속에 꽂혀 들어 오는 이 목소리의 주인은 아마도.
'보스 몬스터겠지.'
이런 던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
무슨 짓을 할 수 있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어머. 안쪽에서 굉장히 맛있는 피냄새가 나는데요?
내 추측을 긍정하는 듯.
그림자 속에 있던 준남작이 말했다.
-살짝 향이 비릿하긴 한데. 이건 이것대로 별미겠다 싶은....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질 좋은 피를 섭취하면 힘을 키울 수 있다고 했지.'
이 녀석이 맛있는 냄새라고 했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 안쪽에 있는 괴물이. 밤의 귀족이 입맛을 다시게 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는 것.'
그때.
[어째서 우리의 영역을 침공하는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 왜 침공하냐는데요."
"침공이라니. 뭐라는 거야."
"...우리도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병사들이 약간 주춤거렸다.
지성 없는 몬스터라면 그냥 열심히 싸워서 처치하면 됐으니까.
저쪽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씁. 어쩔 수 없지.'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
대치가 길어져서 좋을 건 없다.
게다가.
'나도 한 번 얘기를 해보고 싶긴 했으니까.'
우선.
이해가 안 가는 내용부터 지적해 보기로 했다.
"여기가 왜 너희의 영역이라는 거지?"
우리가 영역을 침공했다니.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나와 동포들은 바다를. 그대들 토착종들은 하늘을.]
되돌아온 답변은 짧은 말이었으나.
대충 의미는 이해가 갔다.
'물속은 자기들 영역이고, 그 위는 인간들의 영역이다. 뭐 그런 건가?'
미친 소리.
"애초에 이 도시는 인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영토거든. 그쪽은 남의 국가 영토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셈이고."
[크흐흐.... 정당성을 논하고자 하는가.]
헛소리에 반박을 해 주려고 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새어 나오는 비웃음 소리였다.
[국가라니. 우물 안에 갇혀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구나.]
"뭐가 웃기지?"
[가엾도다. 외부에서 온 나보다도 이 세상의 일을 모르는 토착종들이라니.]
...이 새끼.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우리 부대는 강원도에 갇혀 있는 신세.
바깥은커녕, 강원도 내의 다른 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잘 모른다.
일개 군인인 우리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부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역시 그 형태는 유지하고 있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도 낮지 않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으나.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사과하지. 허나 그대의 주장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바다를, 그대들은 하늘을. 지난 시간동안 그렇게 합의가 이루어진 것 아니었는가.]
"그딴 헛소리를 할 시간에 아까 말한 걸 더 자세히-"
[지상을 양도받은 대가 또한 치르고 있음이라. 우리가 외부의 적들을 막아 주고 있으니.]
"...?"
국가에 대한 얘기를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으나.
녀석이 내뱉은 말은 다소 뜬금없는 것이었다.
"외부의 적을 막아주고 있다고?"
"저 괴물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도시의 인간들은 그 얘기를 듣고 불쾌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상을 빼앗은 대가로 적들을 막아주고 있다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무슨 헛소린가 싶겠지.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외부에서 온 우리 입장에선.
저게 마냥 헛소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착종들이여. 그대들은 저 벽 바깥의 그대 동족들이 얼마나 살아있는지 아는가.]
"뭐, 뭔 소리래."
"그야 뭐. 각자 잘 살고 있겠지."
[그대들 토착종의 숫자는 전과 비교해 1할도 남아 있지 않음이라. 그중 대부분은 망자가 되어 제대로 죽지도 못한 채 지상을 배회하고 있지.]
"뭐, 뭐라고?"
그 얘기를 듣자.
도시의 각성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저 말이 진짜냐.'
그렇게 묻는 듯한 표정.
바깥에도 괴물이 나타난 것 정도는 얘기해 줬지만.
'인류가 얼마나 죽었는지 같은 건 굳이 말하지 않았으니까.'
괜히 말해봐야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열의만 줄어들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돌아오나.
'던전에 진입하고 가장 놀랐던 건 사람들의 숫자.'
던전이라는 특수한 환경.
그럼에도 이 곳은....
이상할 정도로 살아있는 인간들이 많았다.
[내가 외적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임이라.]
그게 이 녀석이 의도한 일이었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이 공간을 떠돌던 질병의 기운 역시 정화해 주었다. 지상을 양보받은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습기가 많고 더러운 환경.
전염병이 돌아도 진작에 돌아야 했을 텐데 병자들이 멀쩡한 게 이상하다고도 생각했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그때.
한 남자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약혼자를 너희 괴물 놈들이 뼈째로 씹어 먹었다. 양보받은 대가? 이게 양보하고 사는 자들의 모습인가?"
[우리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우리가 누군가를 공격하지는 않았음이라.]
"말은 똑바로 하자, 생선 대가리.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물 위로 나오면 숨도 제대로 못 쉬잖아, 네놈들은."
[....]
창수였다.
[그대가 누군지 안다. 동족의 아이들을 가장 많이 살해한 토착종이로군.]
"알아주셔서 영광이군, 그래."
[우리가 죽인 토착종을 모두 합쳐도 그대가 살해한 나의 동족의 절반도 되지 않겠지. 그거 아는가? 그대가 살해한 동족은 모두 어린아이였다.]
"...그건."
[그대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은 그대들 간의 상잔이 원인이었지.]
그런 얘기를 하긴 했었다.
인간들 간에 큰 싸움이 있었다고.
[물러나라.]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점잖게 바뀌었다.
[우리는 우리의 안식처가 필요할 뿐, 누군가를 침략할 생각은 없다.]
"...."
[우리 영역을 침공해 왔을 때는 대응할 것이나, 그대들을 적대할 생각도 없지. 물러나기만 한다면 그대들에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 줄과 바늘을 드리워 물속의 생명을 가져가는 것도 묵인하고 있었음이라. 그러니 물러나라.]
이래저래 말이 길긴 했다만.
녀석이 하고자 하는 말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휴전 제안.'
아쉽지만.
나와 병사들은 들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보스를 처치해야 던전에서 나갈 수 있으니.'
이 던전에 쳐박혀서 평생을 살 생각은 없거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부대의 사정인 모양.
"...저, 정말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언제 괴물들에게 사냥당할까 봐 두려웠는데. 저 녀석들이 봐주고 있던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도 없던 거잖아?"
"밖의 인간들이 더 많이 죽었다니."
"바, 밖이 더 위험한 곳이란 거잖아? 그럼 굳이 이렇게 고생해서 나갈 필요가 있나...?"
도시의 인간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와 달리 저들은 이 도시의 환경에 적응한 이들.
괴물의 말을 믿는다는 점이 어이가 없었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흔들릴 만도 했다.
실제로 바깥이 그렇게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니까.
"개소리를...!"
"저 괴물 새끼의 말을 믿는 거냐!"
그나마 그 말에 흔들리지 않는 이들은 창수의 그룹뿐이었다.
"당신들도 알잖나. 낚시 따위로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먹일 수 없어."
그중에서도 리더인 창수가 그나마 냉정을 되찾은 듯.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이대로라면 결국 식량이 모자라게 될 거요. 여기 갇혀 있어 봤자 굶어 죽을 뿐이지.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바깥으로 나가야만 해."
"...지금의 숫자라면 그렇겠지."
"뭐라고?"
그러나.
그 설득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먹을 입이 크게 줄어들면, 낚시만으로도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잖아."
"너 이 새끼.... 내가 생각하는 그 얘기가 아니길 빌지."
"우, 우리는 괴물과 전투하면서 그럭저럭 레벨을 올려 왔어. 각성만 하고 숨어 지내던 다른 인간들보다 유리하지.... 인간들 간의 전쟁이 일어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제기랄. 기어코 그 얘기를 해 버리는군."
그 설득은 크게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가장 유리한 건 당신들 아닌가?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니까."
"복수 따윈 부질없는 거야! 산 사람이 중요한 거지. 괜히 복수하겠답시고 멀쩡한 사람들을 내몰기보다 자신들이 살 걱정을 하는 게 좋지 않겠소!"
뭔가 그럴싸해 보이게 말하긴 하는데.
결국은 약한 인간들을 죽이고 강한 자기들만 살아남자는 얘기.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데려온 이들이었는데 이래서야 역효과다.
전의가 넘치는 창수의 그룹까지 꼬드기려 하다니.
'쯧. 그냥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정도라면 괜찮을 텐데.'
저 괴물을 토벌하는 데 성공한다면 던전은 사라진다.
저들은 원하지 않는 바깥 세계와의 조우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으려나.'
갑자기 복잡해진 상황.
난 잠깐의 고민을 거친 뒤.
'쯧. 역시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지.'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앞.
신전 같은 건물의 문을 향해서.
"어어! 거기 군인 양반!"
"거기서 멈춰! 그 이상 움직이면 가만두지...."
도시의 인간들이 나를 막기 위해 나서려고 했으나.
"움직이면. 뭐."
그들의 앞을 커다란 팔이 가로막았다.
"뭐, 뭐야 당신은."
"신 병장님이 움직이시겠다는데, 뭐 어쩌시려는지 말이나 해 보십쇼."
전광일 상병을 필두로 한 병사들.
그 거구에서 오는 위압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으음...."
"그게 아니라, 좀 더 대화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아아, 뭐야! 그런 거였나. 난 또 무력 행사라도 하시려는 줄 알았지!"
"...."
"설마 그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는데 말이오.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해 버렸어. 허허!"
퍽퍽!
껄껄 웃으며 사람들의 등을 내리치는 광일이.
녀석은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소."
"이, 이거는 놓고 말 좀."
"신영준 병장님이 그렇게 정 없으신 분이 아니거든. 다 생각이 있으실 테니 지켜봅시다."
녀석 덕에 방해받지 않고 문 앞에 선 나는.
그 문을 열기 위해 양손을 가져다 댔다.
[이건. 거절의 표현이라 봐도 되는 것인가?]
"되겠다. 이 자식아."
얌전히 물러나면 건드리지 않겠다?
'X랄.'
애초에.
우리의 생사 여탈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떠드는 꼴 부터가 어이가 없다.
'너 지금 엄청 다쳤잖아.'
던전의 수위가 순식간에 낮아진 것.
녀석이 힘을 크게 잃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다.
쫄리는 건 저쪽이란 말이지.
게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말에 거짓은 없었음이라. 서로에게 좋은 일을 어째서 거절하지?]
"우리가 굳이 지금 던전에 입장한 이유가 뭔지 알아?"
밖에서 봐도 규모가 상당했던 던전이다.
본래라면 좀 더 힘을 기른 뒤에 도전하던가 했겠지.
그럼에도 발견 즉시 던전에 진입하기로 한 이유는 하나.
"넓어지고 있더라고. 여기."
[....]
이 던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단 말이지.
던전이 넓어진다는 것은 간단하다.
안쪽에 던전을 만든 존재의 힘도 점점 강력해진다는 것.
"잘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네 힘은 강해지고 있다는 거잖아?"
[....]
"네가 상처를 입고 힘을 잃자 이 던전의 수위가 낮아졌지. 그러면 반대로... 네가 강해지면 이 던전의 수위도 올라간다는 거 아냐?]
[흠.]
"나도 하나 묻자. 이 상태로 2~3년쯤 지나면 이 던전의 풍경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쿠우우웅....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누워 있던 존재가 대답했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첨탑조차 바다 안으로 가라앉아 있겠지.]
"""...!"""
뻔한 얘기다.
물이 차오르다 보면 결국 사람들은 건물을 버리고 도망가야 할 터.
그때면 던전의 크기도 넓어졌을 테니, 더 외곽의 고층 건물로 가면 되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 이동을 쉽게 허락할까?
'물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기네 영역이랍시고 덤벼드는 놈들.'
바다와 하늘.
그렇게 영역을 나눴다고 하니 얼핏 공평해 보이지만.
바다가 점점 하늘에 가까워져 간다면 얘기가 다르다.
자기들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고?
인간들이 죽은 이유는 자신들끼리의 동족상잔 때문이었다고?
애초에 그 전제부터가 틀렸다.
"멀쩡한 세계를 침공해서. 동족상잔을 벌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든 거. 바로 너잖아."
[흐으음!]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물러난다고 한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뻔하다.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침범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면 그만이란 거지.
'결국은 어떻게든 인간들을 제거하려고 할 터.'
내가 국가 운운했던 것도 의미가 없지만.
녀석이 대가 운운한 것 역시 의미 없는 말이었다는 것.
그래.
뭘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랬냐.
중요한 건 결국 하나.
"더 강한 놈이 살아남는다. 그게 전부지."
[큭... 큭큭... 하하하....]
거대한 신전.
그 중앙에 누워있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눈치가 빠르구나. 벌레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