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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10

* * *

그렇게 부대 주변에 생존자들이 정착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부대 근처는 허허벌판에 가깝고 그나마 있는 건물도 몇 채 안 되는지라.

우리 공병들이 조금 손을 거들어 줘 가며 근처에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첫 수확물이오."

부대 식당에 찾아온 철욱이 큰 바구니를 내려다 놓으며 말했다.

미친.

벌써 수확이 된다고?"

"미안하지만, 양이 많지는 않소."

"양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농사를 짓겠다고 한 지 며칠이 됐다고 벌써 수확물이...."

"스킬이오. 농사도 농사지만 당장 먹을 식량이 중요하니까 말이지. 일단 적은 양이나마 만들고 봤소."

"그렇다는 건."

"본격적으로 양을 늘리는 건 지금부터가 되겠지."

난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채소들을 들여다보았다.

아마 얼마 전까지 씨앗 상태였을 채소들.

그게 이렇게 빨리 성장해서 수확까지 가능하다니.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면.

우리 부대도 식량 수급을 사냥에 의존하던 사회에서 탈피.

농경 사회로 진입하게 되겠지.

"저희 근처에 정착하기로 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이군요."

"나야말로. 이 정도로 빠르게 농사가 가능했던 건 군인분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신 덕분이지. 특히."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에게 어깨를 거는 철욱.

"이 친구가.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줬거든."

그 병사의 얼굴은.

조금 익숙한 것이었다.

"그때 그 탈영병?"

"기, 기억하고 계셨군요."

탄약대대에서 탈영했던 병사 중, 가까스로 살아남아 우리 부대에 합류한 녀석들.

그중에서도, 어째서인지 농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 병사였다.

"탄약대대 병사들이 전멸했다 들었을 때는 조금 울적해졌지만. 밭에 가니 익숙한 얼굴이 있는 것 아니겠소."

"아."

"어찌나 반가웠는지."

그러고 보니.

탄약대대의 간부, 병사들과 친했다던 철욱.

그리고 저 녀석은 바로 그 탄약대대 출신이니.

아무래도 두 사람은 구면이었던 모양.

"탄약대대가 어떻게 전멸했는지는. 이 녀석에게 대충 들었소."

"...네가 그걸 말했다고?"

나는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 병사를 바라보았다.

탄약대대 전멸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탈영.

그 당사자가 전멸에 대해 입에 담았을 줄이야.

"...탄약대대가 전멸한 건. 아마도 저 때문일 테니까요."

하지만.

녀석은 자신이 당사자기에.

더더욱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철욱 아저씨는 친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꼭 말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철욱 씨는. 괜찮으십니까?"

"음? 그야. 이 녀석이 잘못한 건 명백하지. 나야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도 아니고. 하지만."

허허, 웃으며 말하는 철욱.

"얼굴을 알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 나간 시대잖소. 나로서는 반가운 얼굴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기쁠 따름이야."

"철욱 아저씨...."

"이 녀석은 대민지원을 나왔을 때도 농사를 적극적으로 도와줬거든. 지금도 뭔가 모자란 게 있다 싶으면 바로 달려와서 도와주니. 고마울 수밖에."

논밭 쪽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걸거리는 철욱.

"그냥 고향 근처라는 이유로 선택한 거였지만. 그리운 얼굴도 보게 되고."

"...."

"역시. 이쪽으로 오기로 한 게 정답이었어."

그러고 보니.

나는 철욱에게 궁금한 점 하나를 물어보기로 했다.

"어쩌다가 저희 부대 근처에 정착하기로 하게 된 겁니까?"

"음. 최근에 근처에서 패악질을 부리던 약탈자들이 토벌됐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 토벌을 진행한 게 군인들이고, 그 군부대는 비교적 멀쩡한 곳이라고 말이지."

정수아가 퍼트린 소문이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잘 퍼져 나가고 있는 모양.

"우리 그룹에 각성자는 나 한 명뿐이오. 그런 나도 전투직은 아니다 보니, 숨어 지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지."

"그랬군요."

"이 부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시점에서 우리에게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었소."

두 개?

"북쪽의 대규모 생존자 그룹에 합류하느냐. 혹은 남쪽의 군대에 찾아가느냐."

"아."

"내가 원래 살던 곳이 이 근처기도 하니, 여길 선택했을 뿐이오. 결과적으로는 잘됐으니 정말 다행이지."

대규모 생존자 그룹.

그들에 대한 얘기는 이미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어디 벙커라도 털었는지 무기도 식량도 넘쳐난다던 그룹.

"사실. 이건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날이 갈수록 괴물의 숫자가 늘고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소."

"그렇습니까?"

"음. 지금까지는 소규모 생존자 그룹끼리 숨어 지내는 것으로 생존해 왔지만, 앞으로는 한계를 느낀 이들이 점차 큰 세력에 몸을 의탁하지 않을까 싶소. 그중 우리는 이쪽을 선택한 것뿐이지."

이 근처의 단체 중 가장 큰 곳이 둘로 나뉜 셈이다.

인제군의 남쪽에 자리 잡은 우리 부대.

그리고.

생존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북쪽의 대규모 생존자 그룹으로.

* * *

철욱을 보낸 뒤.

식당에 남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주변에 사회를 만들고. 이런 건 나쁘지 않아. 장기적으로 세력을 키우기에는 최선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이 방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지 빛을 발한다.

슬쩍 군내 방향을 바라봤다.

저 안쪽을 정벌할 만큼의 힘을 키우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만약 그 대규모 생존자 그룹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하다못해 우리보다 약간 못한 정도의 세력을 이룬 상태라면?'

그들을 흡수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면.

군내의 괴물들을 정리해 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부대 주변에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상.

굳이 내가 터치하지 않아도 앞으로 자연스럽게 부대 크기는 커져 갈 터.

결론을 내린 나는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북쪽이라.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 하려나?"

70화 대규모 생존자 그룹

북쪽에 모이고 있다는 대규모 생존자 그룹.

그들과 접촉해 보자는 의사를 밝혔을 때.

부대원들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농부 각성자도 근처에 자리 잡았겠다, 저희만으로 자급자족도 가능할 텐데. 굳이...?"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최소 조건만이 충족된 것뿐.

저 군내같이 괴물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근처에 있는 시점에서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거점도 언제 괴물이 침공해 와 파괴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애초에 군대라는 건 한 부대만으로는 그렇게까지 강력하지 못한 법이니.'

현대 군의 강함은 군부대 하나의 힘에서 나오던 것이 아니다.

여러 부대가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협력해 가면서 구축한 강함.

다른 군부대가 전멸한 지금.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인간 동맹을 만들 수가 있다면.

나쁠 건 없잖냐.

"솔직히 처음 그쪽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는 너무 조건이 좋은 것 같아서 의심하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존자들을 받아들이는 조건도 이런 세상에서는 꽤 파격적이잖아? 결국 직접 만나 봐야겠다 싶더라고."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력은 충분히 데리고 가셔야 해요?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부대의 관리는 민재 형과 이상아 조장에게 맡기기로 한 뒤.

나와 함께 이동할 병사들을 구성하기로 했다.

"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신 병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전사조장 전광일 상병.

사수조장 서수혁 상병.

그 외에도 전투조별로 레벨 순으로 뽑아서 3인.

"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죠."

거기에 시야 확보용 드론 정수아까지.

우리 부대의 최고 정예들.

다 합쳐서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지만.

게임에서는 레벨이 깡패라고.

'부대 전력의 3분의 1 정도가 여기 있다고 봐도 되겠네.'

어지간히 강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좀비들 정도는 가볍게 정리하며 지나갈 수 있을 전력이었다.

"대규모 생존자 그룹의 위치요?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어요."

"그쪽으로 안내를 맡겨도 되려나?"

"물론이죠. 꽤 유명한 소문이기도 하고."

길 안내는 정령안을 가진 정수아가 맡기로 했다.

공병들이 개조한 전투차량에 탑승한 우리는 곧바로 이동을 개시했다.

소음을 최소한 차량이라곤 하나.

그건 멀리서 소리를 듣고 접근하는 괴물들을 줄여 줄 뿐.

기본적으로 교전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측으로."

"예? 그러면 오히려 돌아가는 길 아닙니까?"

"가끔은 돌아가는 게 더 빠른 길이 되기도 하거든요. 우측으로."

하지만.

정령안을 통해 교전을 최소화하며 이동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녀가 지시한 길로 이동하자.

저 멀리서 원래의 직선 경로상에 위치한 거대한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암만 봐도 사기적인 능력이란 말이야.'

최근에 확보한 지하철에 저 능력까지.

잘만 활용하면 좀 더 먼 도시로 진출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뭐, 그것도 이곳의 점령전이 끝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게 북쪽으로 어느 정도 이동하자.

"소문으로는 이 근처 어딘가일 텐데요...."

정수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슬슬 도착한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좀비나 괴물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

우리가 탄약대대 인근을 주기적으로 정찰하며 괴물들을 줄여 온 것처럼.

이들도 주변의 치안을 정리하고 있다는 거다.

"소문 자체가 헛소문일 경우도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음?"

그때.

저 멀리에 한 인간들 무리가 보였다.

"저 사람들은...."

"네? 아. 평범한 생존자들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소문이 많이 돈 곳이다 보니, 근처에 저런 그룹이 몇 군데 있긴 하더라구요."

"잠깐 정지."

정수아는 굳이 보고할 일도 아닌 것 같아 말하지 않은 것 같다만.

저 그룹.

나한텐 꽤 익숙한 모습이란 말이지.

차량을 정지시킨 나는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접근했다.

생존자 그룹은 접근하는 나를 보고 경계하는 듯했으나.

"그 군복. 당신들은...."

내가 어느 정도 다가가자.

내 얼굴을 보고는 크게 놀라며 다가오는 한 남자.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그때 그 군인들이로군!"

과거.

부대의 생존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주변의 괴물들을 있는 대로 사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생존자 그룹 하나와 조우했던 적이 있었다.

괴물한테 습격받고 있는 걸 도와줬더니 탈영병 약탈자로 오해해서 꽤 곤란했지.

'나중에 어떻게든 오해는 풀렸지만. 대규모 생존자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했지.'

생각해 보면.

북쪽의 대규모 그룹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은 것도 이들을 통해서였다.

그나저나.

그때부터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대규모 그룹에 합류하러 간다고 한지 꽤 됐는데. 이제야 도착하신 겁니까?"

"설마. 이미 그들하고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 봤소."

"그러면 이미 그 그룹에 소속되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남자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도착한 지는 꽤 됐는데. 그쪽도 무작정 오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 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아."

"믿을 만한 이들인지 확인을 거친 뒤에야 합류를 받아 준다고 해서 말이지. 그때까지 잠시 주변에서 대기 중인 거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그룹이 몇 곳이 더 있지."

하긴.

이상아 조장이 우리 그룹에 찾아왔을 때.

우리도 그 안에 범죄자가 섞여 있었을 줄은 몰랐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무작정 문을 열었다간 누가 섞여 들어올지 모르는 일.

나름대로 이들도 확인 작업을 거치고 있단 거겠지.

"아무래도 그 작업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소."

"그러면 이 주위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건데... 손해 아닙니까?"

기껏 소문을 따라 찾아왔음에도 합류하지 못한 채 주변에서 늘어지고 있는 셈.

그 시간 동안 소모되는 식량만 해도 상당할 텐데.

"손해라니? 설마!"

오히려 호쾌하게 웃는 남자.

"이 주변은 저들이 정리를 어느 정도 해 놓아서 괴물을 걱정할 필요도 없거든. 원래 무기도 충분하다고 했고. 생존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각성자도 많아졌을 테니. 그 힘으로 청소해 둔 거지."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 식량 같은 건 어떻게 합니까."

"그게 대단하다는 거지. 잠깐 기다려 보시오."

그는 그룹의 안쪽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가방 하나를 가지고 와 내게 그 내용물을 보여 줬다.

"이건."

"저들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 식량이오. 합류 의사를 밝힌 그룹들에는 모두 제공해 주는 것 같더군."

맙소사.

길드에 이미 가입한 이들이라며 모를까.

최종적으로 합류를 하게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이들한테도 식량을 나눠 준다니.

'...우리라도 그건 좀 많이 아까울 것 같은데?'

정부의 벙커를 털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걸까.

어지간히 여유가 넘치는 게 아니고서야 상상하기 힘든 일.

"나도 믿기진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라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도 버틸 만했지."

자신도 그랬다며 웃는 남자.

우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협력할 수 있는 인간 동맹을 찾기 위해 온 곳이다.

동맹 세력의 내실이 튼튼하다면야 우리야 좋지.

"뭐 그것도 오늘까지지만."

"예? 오늘까지라는 건...."

"아까 기다리고 있는 그룹들이 꽤 있다고 하지 않았소. 사실. 우리 그룹의 차례가 바로 코 앞이거든. 바로 오늘 밤에 합류하게 될 예정이지."

"오...."

"그러고 보니 그때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아직 못 갚았구려."

"은혜요?"

"까먹으셨나? 그때 분명히 말했잖소. 목숨을 살려 준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다고!"

그러고 보니.

이 그룹과 처음 만난 것은 이들이 괴물에게 습격당했을 때였다.

어차피 각성자들을 늘리기 위해 주변의 괴물을 사냥하고 있던 때라.

별생각 없이 도움을 줬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떠날 때, '이 은혜는 확실히 갚겠다'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는 저희도 사정이 있어서. 괴물을 처치해야 했거든요."

"에이, 그래도 한두 명도 아니고 우리 그룹 전체를 살려 준 셈인데. 그냥 넘어갈 수야 있나. 어디 보자."

사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 어떻소."

"뭘 말입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우리 그룹은 오늘 저쪽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될 예정이란 말이지. 괜찮다면 그때 당신들에 대한 얘기를 전해 주겠소."

우리 얘기를?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쪽도 여기 그룹과 합류하려는 것 아니오?"

"아. 뭐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합류가 아니라 동맹 권유지만.

"그럴 것 같았지! 근데 말했다시피 근처의 생존자들이 이쪽으로 많이 모이고 있어서 말이지. 저 대규모 그룹의 인간을 만나려고만 하는데에도 시간이 꽤 걸린다오. 우리를 보면 알겠지만 가입하는 데는 더 시간이 걸려. 다만. 모든 그룹이 똑같은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거든."

"무슨 의미입니까?"

"뭐. 무기를 가지고 있다거나. 그룹 내에 각성자가 많다거나... 아무튼 저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은 조금 더 빨리 만나준다는 것 같소. 이런 세상이니까. 저들도 인재는 고프다는 거지."

"아."

"아쉽게도 우리 그룹은 그다지 능력이 없어서 대기가 좀 길어졌지만 말이오."

능력이 없다라.

나는 눈앞의 사내를 보고 특성을 발동했다.

[식재료 감별(강화)]

[영장류 - 인간종]

[신선도 - 최상]

[각성자 : 박철곤]

[직업 : 하급 검방 전사 Lv. 12]

'오?'

레벨이 무려 12.

특성이나 스탯도 꽤 고르게 성장한 상태로 보였다.

'우리 부대면 몰라도.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레벨 10 이상을 본 적이 드문데.'

레벨이 10을 넘어 최하급에서 하급 전사로 전직까지 마친 남자.

레벨로만 따지면 우리 부대에서도 최소 중~상위권.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확실히 고레벨에 속할 것이다.

이만한 인간이 능력이 없다고 미뤄질 정도라니.

"저쪽 그룹은 눈이 얼마나 높은 거야?"

"음? 무슨 소리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자세한 직업이나 레벨을 묻는 것이 금기라고 했지.

나야 별생각 없이 [식재료 감별]로 남의 정보를 엿보고 있지만.

사실 이것도 남들한테는 꽤 실례로 여겨질 일인 셈이다.

서로의 레벨을 알 수 없으니.

그냥 각성자가 1명뿐인 그룹으로 취급돼 버린 건가.

"큼.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됐지만, 당신들은 군인이잖소? 군복을 보니 특수부대 출신인 것 같고."

리자드 가죽으로 만든 군복은 평범한 군복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다.

검은색과 회색 패턴에 묘한 질감이 도는 군복.

모르는 사람이 보면 특수부대로 생각할 만한 디자인이긴 하지.

"특수부대 출신들이라면 각성자가 아니어도 대단한 인재들이지. 게다가 당신들 중에는 각성자도 꽤 있지 않소. 당장 당신도, 그때 그 괴물을 찌른 모습을 보니 검사 계열인 것 같은데... 아니오?"

"비슷한 쪽이긴 합니다."

"역시. 내가 그 소식을 전하면 당장 오늘내일 중으로 만날 수도 있을 거요. 그만한 능력자를 내칠 만한 이들은 없을 테니까. 거기에 우리 그룹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점까지 전하면 인성 문제 같은 것도 합격일 거야. 어쩌면 바로 합류를 받아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물론 우리 목적은 저들 길드에 가입하는 게 아닌 동맹이긴 하다.

하지만 당장 대화를 위해 저들과 접촉하는데에도 꽤 시간이 걸린다는 듯하니.

이 남자가 도와주면 시간을 크게 아낄 수 있는 셈.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하. 맡겨 두시오. 물론 이걸로 은혜를 다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사내는 우리에게 약도 하나를 그려 주고 말했다.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으시오. 우리가 원래 지내던 건물인데. 이 주변은 저 대규모 그룹이 치안정리를 해놓은 덕에 괴물도 없고. 여긴 우리가 어느 정도 청소를 해 놔서 며칠 지내는 데에는 불만이 없을 거요."

"거처까지 정해 주시다니. 고맙네요."

"감사는 우리가 하는 게 맞지."

허허 웃으며 말하는 남자.

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그럼 가 보겠소."

"잘되시길 빌겠습니다."

"하하. 나중에 보도록 하지."

사내와 그의 그룹원들은 대규모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갔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겠는데요?"

"좋은 일은 베풀고 볼 일이란 거지."

솔직히.

저 대형 그룹을 믿어도 되는 건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만.

'만약 약탈자 같은 놈들이라면. 대기 중인 사람들한테도 식량을 보급할 이유는 없겠지.'

한 번만 믿어 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무상으로 식량을 제공해 준 이들.

...애초에 식량이 중요하지 않은 이들이 아니고서야.

나름대로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란 뜻일 테니.

* * *

"박철곤 씨?"

"내가 박철곤이오."

북쪽의 대형 그룹.

아니.

[강원도 생존자 연합]이라는 길드.

그 길드와의 접선 장소에 도착한 철곤을 누군가가 불렀다.

창백한 얼굴에 키가 큰 사내였다.

"확인 절차가 끝났습니다. 철곤 씨도 과거에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한 적도 없고, 구성원들도 평범한 이들인 것 같더군요."

"그 말은...?"

"합격입니다. 저희 길드에 합류하시게 된 걸 환영합니다."

"오오...!"

철곤은 내심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자기야 그룹원들을 믿고 있지만, 그들 중에 문제가 되는 이가 있으면 길드에 가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철곤이었다.

"저를 따라오시죠."

"어디로 가게 되는 거요?"

"저희 대표님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의 사내가 철곤에게 말했다.

철곤은 기쁜 마음에 그를 따라 이동하던 중.

눈치를 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담당관 씨? 라고 불러야 하나?"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이제는 가족이 될 사이 아닙니까."

"허허. 그런가? 아무튼.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오."

멈칫.

철곤을 데리고 이동하던 담당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알던 사람이라니요?"

"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는 아니고. 멸망의 날 이후에 알게 된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오늘 저희하고 합류할 예정이라는 건 전했습니까?"

"어어? 일단은 그렇소."

"하아...."

담당관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매만졌다.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한 태도.

그 기색을 눈치챈 철곤은 영문을 몰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왕 말을 꺼낸 것.

용건까지 전달하기로 했다.

"실은. 그 사람들한테 부탁받은 게 하나 있어서 말이오."

"뭡니까."

"그 사람들도 이쪽에 합류를 원하는 것 같소. 위치는 내가 알고 있으니, 한번 만나봐 줄 수는 없겠소?"

"...아, 뭐야. 그런 거였습니까."

살짝 화난 것처럼 보이던 담당관의 표정이 풀렸다.

"죄송합니다만, 철곤 씨도 아시다시피 순서가 많이 밀려서요."

"일단 들어보쇼. 그 사람들, 무려 특수부대원들이라오."

"예?"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는 남자.

"...특수부대라니. 전직이 아니라 현직 말입니까?"

"진짜 군인들이란 말이지. 총도 가지고 있고. 오늘은 군용 차량을 타고 온 것을 마주쳤소."

"호오."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철곤의 말을 듣기 시작하자.

철곤은 관심을 보일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담당관님도 말했다시피, 기다리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한 번 얘기만 하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리잖소. 그 시간 걸리는 게 아까워서 돌아간 생존자들도 꽤 있단 말이지."

"그건 그렇지요."

"이 사람들은 인성도 좋고. 능력도 확실하오. 내가 보증하지. 그러니 내 소개를 받았다 하고, 어떻게 순서를 좀 앞당겨 줄 수는 없을는지...."

"좋습니다."

"오오, 고맙소!"

"뭘요."

창백한 얼굴의 담당관이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저희가 고마운걸요. 얼마나 많이 베풀어 주시는 건지."

"응?"

"아닙니다. 저희와 함께하길 원하신다고 하셨죠?"

"그, 그렇지."

"그렇다면. 이 안으로."

대화에 집중하던 철곤은 그제서야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눈앞에 있는 방문.

이 안에.

이들이 말한 길드.

[강원도 생존자 연합]의 대표가 있다는 뜻일 터.

박철곤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저기, 여기 불이 꺼져 있소만."

문 안에 있는 것은 어둠뿐.

담당관에게 말을 걸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새 어딜 가 버린 건가?'

어쩌면 대표라는 사람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일 수도 있다.

앉아서 기다릴까 싶어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찾으려던 순간.

반짝.

'...?'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반짝거리는가 싶더니.

무언가.

정체 모를 아름다운 형체가 그를 향해 덮쳐 왔다.

"무슨!"

갑작스러운 습격이었으나.

철곤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레벨이 10이 넘는 전사 계열의 각성자.

그 반응 속도는, 어지간한 괴물의 기습 정도는 가볍게 뿌리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콰직.

철곤의 검이 휘둘러지는 것보다.

그 형체가 그의 목에 이빨을 꽂아 넣는 것이 더 빨랐다.

"커... 커어어억...."

철곤의 얼굴에서 점차 혈색이 사라져 가고.

투욱.

결국.

바닥에 쓰러지는 철곤.

"흠? 이 남자. 꽤 쓸 만하구나."

그를 덮쳤던 형체가 말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모습을 감췄던 담당관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전사직 각성자라고 했니? 지금까지 봤던 녀석들 중에서는 충분히 상위권이야. 너하고 비슷하거나 약간 못한 정도가 아닐까 싶구나."

"그렇군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 뭐든 겉으로만 봐서는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그때.

누군가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입맛에 맞으셨다면 다행이군요."

목에 뚫린 이빨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남자.

"넌 좋은 권속이 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박철곤이었다.

"여왕님. 한 가지 전달드릴 게 있습니다."

"응? 무슨 일이지? 하던 대로 권속이 될 만한 녀석들은 데려오고, 쓸모없는 노인이나 아이는 너희가 적당히 먹어 버리면...."

"그게 아니오라... 이 남자가 가족이 되기 전에 한 말이 있습니다."

감독관은 철곤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여왕'이 말했다.

"이 세계에서 전사 계급이었던 이들이라. 흥미롭구나."

"그러면."

"그런 녀석들이라면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훌륭한 권속이 될 테니.... 다른 생존자들은 조금 뒤로 미뤄도 되겠지. 가급적 빠르게 데리고 오도록 하렴."

"알겠습니다."

잠시 고개를 조아린 감독관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박철곤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71화 뱀파이어 (1)

철곤의 그룹이 떠나고 몇 시간 뒤.

밤이 깊어지자 우리는 보초를 정하고 취침에 들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똑똑똑.

누군가가.

우리가 있는 건물을 찾아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과거에도 깊은 밤에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그다지 좋은 용건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

하물며 요즘 같은 세상에서야.

취침 준비를 하던 병사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건물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녕하십니까."

문 앞에는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부하로 보이는 이들이 두 명.

"...누구신지."

"박철곤 씨가 소개해 줘서 왔습니다만."

박철곤.

아까 그 생존자 그룹의 리더였던 아재의 이름이다.

분명 자기가 가서 소개해 주면 빠르게 저쪽의 사람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철곤이 떠나고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설마 저쪽의 인물이 이렇게 빨리.

그것도 이런 시간에 올 줄이야.

조금 당황했네.

나는 뒤의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아까 로테이션 짠 대로. 불침번하고 취침 돌아가면서 하도록 해."

"예."

"광일이랑 수혁이는 같이 좀 가자."

나와 두 조장은 방문객들을 데리고 건물 구석의 방으로 이동했다.

창문 밖에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촛불을 켰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강원도 생존자 연합]이라는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길드...?"

"아. 모르실 수 있겠군요. 각성자가 일정 숫자 이상 모이면 시스템이 인정하는 단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소규모 단체는 클랜. 대규모 단체는 길드라고 부르죠. 각성자가 그리 많이 모인 경우가 드물어서, 클랜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요."

클랜.

길드.

당연히 우리도 알고 있기는 하다.

[길드명 : 강철 군단]

우리도 길드 규모의 단체니까.

'내 기억으로는. 길드에 도달하려면 필요한 건 백 명 이상의 각성자.'

꽤 규모가 큰 단체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각성자만 백 명 이상이라는 건가.

"저는 그 길드에서도 스카우트 담당을 맡은 권완태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권하는 남자.

갑자기 공식 직함으로 나오기냐.

일단 우리 쪽의 직함으로는 나는 길드장이긴 한데.

'대외적으로는 김 중위가 대표의 역할을 맡고 있으니.'

내 직함이라 봐야.

"취사병 신영준입니다."

"취사병?"

푸흡, 하는 소리.

"아아. 죄송합니다. 그러면 저는 누구랑 대화하면 될지."

"일단 여기 최고참 병사가 저라서요. 저랑 얘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취사병이랑...? 일단 알겠습니다."

음.

좀 맘에 안 드네.

"크흠. 일단 늦은 밤에 방문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희로서는 최대한 빨리 만나 뵙고 싶었던 분들인지라."

"저희를 말입니까?"

"철곤 씨에게 들은 말로는 특수부대원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비슷합니다."

"오오, 역시!"

남자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운이 좋게 많은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소문으로 들었을 땐 영 믿기 힘들었지만... 보아하니 사실인 것 같더군요."

"예. 하지만 모자란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죠."

무기와 식량이 풍족하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결국 믿을 수 있는 인간들이 있어야 그것도 의미가 있는 셈이니까.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한다면 저희가 가진 무기들도 잘 다룰 수 있겠죠. 게다가 여러분들은 철곤 씨의 보증을 받은 믿을 만한 인간들이기도 하니. 가급적 빠르게 함께 하고 싶은 인재들이라서요."

"그렇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연합에 합류하시죠."

"아, 그거 말인데...."

우리는 합류가 아니라 동맹을 제의하러 온 거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내 말을 끊고 입을 여는 녀석.

"물론! 여러분들은 총기나 군용 차량 등 군부대의 장비들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수부대 출신이시고 하니 전투력에도 자신이 있으시겠죠. 하지만 믿어 주십쇼. 저희한테 합류한다면 여러분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각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어쩌면 여러분들 중에도 각성자가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숫자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음.

거의 90% 이상이 각성자이긴 한데.

"하지만 저희에게 합류하신다면, 저희는 여러분들을 곧바로 각성시켜 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던 시절과 비교도 안 되는 힘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괴물에게 죽을 걱정도 사라질 겁니다."

곧바로 각성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니.

[길드]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쪽에 각성자가 백 명 이상이라는 건 알겠다.

이만한 세력이니까 각성법에 대해 아는 건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각성이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지 않나?'

살아있는 괴물을 직접 죽여야 하는 작업.

위험한 일인 만큼 각성 작업은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인재들을 영입하려고 약간 허풍을 섞은 건가?'

아니.

혹시 모르는 일이긴 하다.

이 녀석들이 엄청나게 강력해서 각성용으로 생포해 둔 괴물이 넘쳐난다든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식재료 감별(강화)]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진 정보가.

조금 이상했다.

[영장류 - 인간종(뱀파이어)]

[신선도 - 최상]

[각성자 : 권완태]

[직업 : 하급 뱀파이어 나이트 Lv. 14]

[특성 : 하급 흡혈, 하급 안개화, 하급 어둠 친화 ...]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봐선 안 될 걸 봐 버린 듯한 느낌인데.

슬쩍 그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에게도 시선을 주었더니.

[직업 : 최하급 뱀파이어 나이트 Lv. 7]

[직업 : 최하급 뱀파이어 나이트 Lv. 8]

이건....

내가 잘못 본 건 아닌 거 같네.

나는 표정 변화를 숨긴 채 녀석에게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당신도 각성자인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어떤 직업으로 각성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음.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남의 정보를 물어보는 건 실례라는 거, 알아 두셔야 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잘 몰라서."

"...말씀드리지 못할 건 없죠. 전 전사입니다. 칼을 쓰죠."

허리춤의 세검을 툭툭 건드리는 권완태.

전사.

전사라.

[직업 : 하급 뱀파이어 나이트]

[귀족에게 선택받아 권속이 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업입니다.]

'지랄.'

전사는 무슨.

뱀파이어 기사?

아무리 봐도 불길한 이름이잖냐.

이름만 저럴 뿐 인간에게 우호적인 뱀파이어라든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하급 흡혈]

[흡혈을 통해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인간종의 생명을 완전히 흡수함으로써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 흡수한 인간종의 생명 - 37]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흡수한 생명이 37이라.

악인들만 처치했을 가능성을 쳐주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수치.

이 녀석들.

인간의 적이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뭐든지."

"박철곤 씨."

박철곤이라는 남자.

처음에는 우리를 탈영병이라 오해하기도 했지만.

오해였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우리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 소식을 전해 드리지 않았군요. 박철곤 씨와 그 그룹 역시 저희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기뻐하시더군요."

"...그렇군요."

이런 시대에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

'좋은 사람이었는데.'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며.

남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박철곤 씨를 길드에 데려간 것도 당신이었겠죠?"

"예. 저희 연합의 스카웃 업무는 제가 전담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잘됐네."

"예?"

그래도.

복수는 해 줄 수 있게 됐으니.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광일아. 수혁아."

"예."

[스킬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중급 요리 비결 - 영장류 인간종(뱀파이어)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약점은 심장이다. 안개화라는 기술을 쓰면 물리 공격이 통하진 않을 테지만, 기껏해야 하급이야. 유지 시간이 길지는 않을 거다. 꽤 강한 편이지만, 너희 정도면 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

"...대화 내용이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그런 거였군요. 이해했습니다."

"어? 나만 이해 못 한 거냐? 신 병장님,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너는 나만 따라 하면 된다."

내 말을 들은 서수혁 상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광일이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지만.

"예? 무슨 말씀을.... 잠깐. 지금 안개화라고 한 겁니까?"

아직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 남자를 무시하고.

전투식량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절대 미각'의 효과로 인해, 요리의 효과가 50% 상승합니다.]

"가자."

"안개화라니.... 설마 네놈들. 어떻게 눈치챈-."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남자.

그를 향해.

타앙-!

빠르게 총을 꺼내든 서수혁의 총알이 쇄도했다.

"커허...!"

우리와 대화하던 스카우터.

하급 뱀파이어 기사, 권완태의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식재료 감별(강화)]

[신선도 최상 → 중]

녀석의 신선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무슨 짓이냐!"

"열등종 녀석들이, 감히 완태 형님을...!"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난 녀석들을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머릿속에 들어온 '손질법'에 따라 숨통부터 끊어 놓을 작정이었으나.

후우웅-

녀석들의 몸이 붉은 안개처럼 변했다.

기껏 휘두른 칼은 안개 속을 휘저을 뿐

'쯧.'

생각보다 반응이 좋네.

"제기랄. 특성을 쓰게 만들다니. 정체를 들켜 버렸잖아."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서 여왕님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안개로 변한 녀석들이 건물 밖으로 도망치려 들었다.

하지만.

"어딜!"

전광일 상병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레벨이 10이 넘는 '하급 뱀파이어 기사'였던 권완태와 달리.

저 녀석들은 '최하급 뱀파이어 기사.'

안개화 특성 역시 최하급인 만큼 유지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카하하! 드디어 실체를 드러냈구나!"

"컥...."

콰직.

전광일 상병의 주먹이 한 명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뱀파이어의 몸을 관통한 녀석의 손에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히, 히이익."

"크르륵... 친구를 잃어서 슬퍼 보이는군. 같은 곳에서 만나게 해 주지!"

광일이 녀석이 헛소리를 지껄이며 나머지 한 놈의 목을 쥐었다.

나머지 한 손이 뱀파이어의 가슴을 찌르려던 순간.

"전광일. 잠깐 정지."

"충성!"

광기에 뒤덮여 있던 녀석이 내 명령에 즉각 행동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본 서수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처치하지 않으십니까? 다시 안개화하면 그때는 놓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잠깐 기다려 봐."

난 허리춤의 전투식량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럴 때도 있을까 싶어서 만들어 놓은 게 하나 있거든.

[중급 요리사의 무기력함의 육포]

"그 녀석. 입 벌려."

"옙."

"머, 멈춰라. 내게 뭘 먹일 셈이냐...!"

"맛있는 거."

광일이 녀석이 뱀파이어의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피해 안쪽에 육포를 쑤셔 넣으려 했으나.

'잠깐. 이 녀석들. 뱀파이어라고 했지.'

철물창고를 점거하고 있던 '맥'은 철물밖에 먹지 않았다.

'내가 아는 뱀파이어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종족이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면, 이 녀석들에게도 아마 걸맞은 요리가 필요할 텐데.'

흠.

그렇다면.

'급조한 요리는 질이 좀 떨어지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나는 꺼내든 육포 위에 손목을 가져다 댄 뒤.

[독고구식]으로 그 위를 살짝 그었다.

"신 병장님!?"

"진정해, 임마."

갑자기 삶에 미련이 없어진 건 아니고.

육포 위에 내 피가 떨어지자.

요리의 이름이 바뀌었다.

[중급 요리사의 피를 머금은 무기력함의 육포]

바로 이거지.

핏물을 흡수해 다소 촉촉해진 육포.

난 그것을 뱀파이어 녀석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큭큭, 내게 피를 먹이다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후회하게 될 것 드르렁...."

뭐라뭐라 헛소리를 지껄이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지는 녀석.

"...신 병장님 디버프 요리. 날이 갈수록 효과가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레벨이 20이 넘으며 안 그래도 강하던 요리의 효과가 더 강해진지라.

지독한 무기력함에 지배당해 아예 잠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일단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만... 이거, 무슨 일입니까?"

늘어진 뱀파이어를 업어 든 광일이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 녀석은 이 녀석대로 대단하네.

내 명령에 뱀파이어 하나의 심장을 터트려 놓고도 무슨 일인지 모르다니.

"이 녀석들이 안개로 변한 것도 그렇고, 굳이 피를 섞어서 먹인 것도 그렇고."

반면.

서수혁 상병은 냉정하게 상황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거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거 맞습니까."

"아마도."

"...그렇군요."

"아니, 무슨 일이냐니까."

답답해하는 전광일 상병에게 서수혁 상병이 말했다.

"여긴 낙원 같은 게 아니란 뜻이다. 적합한 동맹 세력은 더더욱 아니고."

"그게 무슨...."

"사육장이야."

인간의 피를 통해 힘을 키우는 뱀파이어들.

녀석들이 먹이를 끌어들이고 있는 장소.

그게 바로.

이 [대규모 생존자 그룹]의 정체란 거다.

"병사들 깨우고, 차에 시동 걸어."

"바로 복귀하는 겁니까?"

"네가 쏴죽인 녀석. 레벨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나름 위치가 있는 놈 같거든. 이 녀석이 죽었단 게 알려지면 몇 마리가 더 덤벼들지 몰라."

병사들을 급하게 깨운 우리는 곧바로 탄약대대로 복귀했다.

어둠 속에서 전투차량을 타고 이동하며 생각했다.

'이 근처에서 가장 많이 생존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곳이 아마 저기겠지.'

그러나 그들은 믿을 수 있는 동맹 따위가 아니었다.

모여들고 있는 생존자들은 아마도 뱀파이어의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뱀파이어가 되고 있겠지.

탄약대대라는 거점에 정착하고.

주변에 생존자들이 정착하며 사회가 만들어지고.

농부까지 합류하며 드디어 좀 살 만해졌나 싶었는데.

'살 만해지긴 개뿔.'

우리의 머리 위에.

인간을 잡아먹을 생각으로 가득 찬 박쥐 새끼들이 있을 줄은 몰랐지.

72화 뱀파이어 (2)

제73 탄약대대.

그 한구석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서.

"날 생포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을거다."

의자에 묶인 뱀파이어 녀석이 말했다.

안개화를 해도 밖에서 밀폐된 건물을 탈출할 수는 없다는 걸 확인한바.

작은 건물 하나를 포로실로 바꾼 뒤 녀석을 가둬 놓은 것.

굳이 시간을 끌 일도 아니고 하니.

난 곧바로 놈의 심문에 들어가기로 했다.

"네 녀석들이 뭘 원하든. 내게서 얻어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줏대 없는 네놈들 하등종과 달리 우리들의 여왕님을 향한 충성은 결코 굽혀지지 않거든."

"그러시구나."

물론.

야만스럽게 폭력을 구사할 생각은 없다.

그런 건 좀 무섭잖아.

[중급 요리사의 핏기가 남은 솔직한 감정의 리자드 스테이크]

"또, 또 나한테 뭘 먹일 셈이냐!"

"맛있다니까. 한번 잡숴 봐."

"그으으윽...!"

정말 겉만 살짝 익혀 핏기가 그대로 남은 리자드 고기 스테이크.

그걸 몇 조각 썰어 녀석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 맛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 걸까.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도록...."

금세 '솔직해'져 버린 녀석.

나는 녀석에게 궁금한 것들을 모조리 물어보기로 했다.

"너희들. 직업이나 종족명이 뱀파이어라고 되어 있던데. 내가 아는 그 흡혈귀를 칭하는 뱀파이어가 맞나?"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흡혈귀라는 의미에서는 그러하다...."

"너희는 북쪽의 대규모 생존자 그룹에 섞여들어 간 건가? 그게 아니면...."

"그 그룹 자체가, 우리 뱀파이어들이 만든 것이다."

혹시 북쪽 그룹 자체는 정상적이고.

소수의 뱀파이어들이 섞여들어 간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역시 그건 아닌가 보네.

"생존자들 사이에 도는 소문도 너희가 낸 거겠지."

"맞다. 인간을 초월한 우리에게 기존의 식량은 의미가 없어졌으니. 쓸데없는 식량들로 인간들을 유인해 우리의 양식을 수급하고, 동료를 늘려나가는 계획이었지."

동료를 늘린다라.

"그건 역시. 너희들한테 피를 빨리면 뱀파이어가 된다거나 그런 건가? 박철곤 씨도 너희한테 물린 거고?"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뭐?"

"우리의 지배자는 여왕님.... 인간 출신인 우리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귀족이시지. 다른 이를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는 건 권속을 둘 수 있는 귀족들만의 특권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그분의 권속이고."

인간 출신이 아닌 귀족.

즉.

'몬스터군.'

인간을 각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몬스터.

"너희는 그 권속이 된 것에 불만은 없나?"

"불만이라고? 설마!"

내 질문에 유독 큰 반응을 보이는 녀석.

열의에 찬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말했다.

"언제 괴물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하며 살던 내게 힘이 주어졌다!"

"...인간임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힘 말이지? 게다가 얘기를 들어 보면 자의로 뱀파이어가 된 것도 아닌 것 같던데."

"내가 느끼는 것은 여왕님의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사뿐이다. 나뿐만이 아닌 모든 권속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특별소스]를 사용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권속이란 게 되면 아무래도 정신이 어느 정도 개조되는 모양.

'인간으로 되돌리는 건... 힘들 것 같네.'

그 후로도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생존자들을 바로 수용하지 않는 이유? 여왕님이 하루에 권속을 늘릴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생존자들 중 권속으로 쓸 만한 이들은 권속화하고, 나머지는 권속들에게 먹이로 줘서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래 싸움에 재능이 있던 녀석들은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한다. 너희는 특수부대라고 하니, 시간만 주어진다면 금방 강력한 권속으로 거듭났겠지."

궁금한 점은 대충 다 알아냈다 생각한 나는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너희의 규모. 약점. 네가 생각했을 때 너희들을 토벌할 때 필요한 정보. 전부 알려 줬으면 하는데."

"...흡혈을 통해 힘을 키울 수 있지만. 주기적으로 흡혈을 하지 못하면 오히려 힘이 줄어든다. 태양 아래에 서는 순간 능력치가 대폭 저하된다. 우리는 힘이 크게 약해지는 수준이지만, 여왕님께서는 큰 고통을 느끼신다는 것 같다."

약점 부분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내용들.

굳이 밤에 우리를 찾아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겠지.

"본거지는, 북쪽의 거대한 동굴형 벙커다."

"...벙커라고?"

"그래. 광산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더군. 누가 이용하기 위해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무기와 식량도 비축되어 있었다. 생존자들 사이에도 소문을 퍼트려 놨을 텐데?"

벙커를 털어서 많은 식량과 무기를 확보했다는 소문.

듣기야 했는데.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지금 시대의 인간들은 생각보다 의심이 많다. 한 끼 식사를 위해 남을 속이고 위험에 빠트리는 일 정도는 예사니까. 미끼부터가 거짓이어서야 속는 인간들은 없었을 거다. 실제로 벙커의 내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우리를 의심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

이 녀석들이 뱀파이어인 시점에서 소문 자체가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하필 그 부분은 진짜였냐.

더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 이야기였다.

"규모는... 뱀파이어로 각성한 자들이 약 300."

"뭐?"

"여왕님은 하루에 다섯 명의 권속을 늘릴 수 있다. 근처의 생존자들이 더 이상 모이지 않을 때까지 숫자는 계속 늘어나겠지. 벙커 역시 이미 요새화가 완료되었다. ...우리를 공략할 방법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글쎄. 전차라도 끌고 온다면 또 모르겠군."

"...."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고 있자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혼자서 입을 여는 녀석.

"너희가 죽인 완태 형님은 여왕님이 아끼던 권속 중 하나다. 여왕님이 많이 분노하셨겠지. 권속을 충분히 늘렸다고 판단되는 대로 너희를 토벌하러 올 것이다."

"흠."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는다. 지금이라도 굴복하면 혹시 모르지. 여왕님이 너희 역시 권속으로 받아 주실지도.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권속에 될 기회조차 없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대충 궁금한 건 다 들은 거 같네. 친절하게 알려 줘서 고맙다."

심문을 끝낸 건물을 나오며 생각했다.

'우리 길드 각성자가. 지금 150명이 좀 넘나.'

저쪽은 뱀파이어가 300.

하루에 5명씩 늘어나고.

벙커였던 근거지는 요새화가 완료됐다, 라.

음....

그건.

못 이기지 않나?

* * *

"뱀파이어라니...."

"죽은 사람이 좀비가 돼서 일어나는 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더한 놈들도 있군요."

나는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를 부대원들과 공유했다.

"그보다 충격적인 건."

"그 규모겠군요."

300의 각성자에, 하루에 다섯씩 추가된다니.

그 얘기를 들은 모두가 아연해졌다.

"이제야 좀 살 만한가 싶었는데. 도저히 여유를 주지 않는군요."

"신 병장님이 그쪽을 찾아가 보기로 해서 다행인 거지. 부대에서 마냥 천천히 성장하는 데 초점을 뒀다면."

"저쪽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긴 힘드니까. 언젠가 충돌했을 테고."

아마.

지는 쪽은 우리였겠지.

이상아 조장이 광일이 녀석에게 물었다.

"직접 싸워 본 입장에서 어땠어요? 그 뱀파이어들. 숫자가 저렇게 많다는 건 평범한 각성자보단 약한 편이겠죠?"

"으음. 싸울 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한 편이라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잠깐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던 광일이가 말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만난 각성자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녀석들이 더 강할 겁니다."

"네?"

"우리야 뭐. 길드 스킬에, 장비 아이템 효과까지 전부 받고 있습니다만. 신 병장님 말대로라면 저 녀석들도 흡혈로 능력치를 키우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비슷한 레벨이라고 치면 저희 쪽 병사랑 저쪽 한 명이 동급 정도 아닐까요."

"...저쪽 숫자가 우리 두 배인데. 그럼 못 이기는 거 아니에요?"

"어.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단순히 숫자만 두 배라면 답이 없지는 않다.

내 요리를 어떻게든 활용한다면 전력 차를 메꿀 수도 있겠지.

"문제는 저쪽은 요새화한 벙커에 틀어박혀 있다는 거야. 태양에 약하다고 했다만. 동굴 안에서 농성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심문한 녀석 말로는 전차라도 끌고 가지 않고서야 자기네 방어를 뚫는 건 불가능할 거라더라."

"전차라니...."

그때.

광일이 녀석이 순진하게 말했다.

"그거. 반대로 말하면, 전차를 끌고 가면 뚫을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네?"

"저희가 전차를 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른 병사들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으나.

"...아니.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이민재 병장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잊었냐.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군부대가 몰려 있는 강원도라는 거."

"...설마."

"전차. 구하면 되는 거 아냐?"

* * *

우리는 부대에서 보관하고 있던 군사지도를 펼쳤다.

인제군이야 워낙 넘치는 게 군부대들이라지만.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는 세 곳.

12군단 직할 423 방공대대.

우리 병사들이 근무하던 부대다.

12군수 지원단 제73 탄약대대.

지금 우리가 자리잡은 거점.

그리고.

[12군단 제8 기갑여단 22전차대대]

"우리 길드 이름도 강철 군단이니까. 전차 정도는 있어 줘도 되지 않을까."

병력은 대대급밖에 안 되지만 말이지.

"군부대 탈환이라니...."

"우리는 얼마 전까지 좀비한테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최근에야 합류한 생존자 출신 병사들이 아연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탄약대대를 탈환한 전적이 있다.

탄약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괴물들은 부상당한 상태기는 했지만.

우리 병사들도 그때보다 더 강해졌거든.

'특히. 던전 공략에 성공한 게 크지.'

공략에 모든 부대원들이 폭발적인 레벨 업과 [문을 닫는 자]라는 칭호를 획득했다.

칭호의 효과만 해도 모든 스탯의 10% 상승.

새롭게 획득한 집단 스킬 '군단의 기운'의 효과로 인해, 더 많은 숫자가 모일수록 더 강해지기까지 한다.

군부대를 점거하고 있는 괴물들은 대체로 평범한 괴물들보다도 강력하다지만.

질 생각은 없다.

"으음. 역시. 안 보이네요."

"정령안으로 안을 볼 수 없다고?"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정수아의 정령안을 통한 정찰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

"뭔가가 방울이의 접근을 막고 있어요."

"뭔가라니...."

"사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에요. 방울이도 만능은 아니거든요. 이능에 특화된 몬스터들은 방울이의 존재를 감지하고, 밀어낼 때가 있었거든요."

이능에 특화된 존재라.

사실 저 방울이... 정령만 해도 그렇다.

내가 특성을 통해 관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두려움에 떨던 존재.

'우리 부대원으로 따지면. 천문관으로 각성한 태준이 녀석도 비슷한 짓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존재가 괴물 중에도 있다는 거겠지.

조금 꺼림칙하긴 하다만.

"심문한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여왕도 우리 부대를 인식하고 있을 거야."

"으음."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나 저쪽이나 세력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충돌해야겠지."

하루에 각성자가 5명씩 늘어나는 저쪽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즉.

빠르게 승부를 걸수록 우리한테 이득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빠르게 전차를 확보해야 한다.'

강철군단의 다음 목적지는 전차대대다.

* * *

정령안은 전차대대 내부를 보지 못했을 뿐.

전차대대로 향하는 길에서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저 건물을 지나면 산 같은 게 있어요."

"거기가 전차대대가 있는 곳이 맞을 겁니다."

전차대대 근처에 도착하자.

근처의 병사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차대대라."

"여기도 군부대니까. 꽤 강한 괴물이 자리 잡고 있겠지."

"그래도 뭐. 지금 우리 전력이면 어지간한 괴물한테는 안 지지 않을까? 저 뱀파이어들처럼 숫자가 엄청 많은 게 아니고서야."

그 말에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부대원들도 많은 실전을 거치면서 괴물과의 전투에는 슬슬 이골이 나기 시작했으니.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그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건물을 지나.

저 멀리, 큰 산이 하나 보였다.

'저기에 전차대대가 있다는 건가.'

차량에서 내린 우리는 본격적인 공략을 위해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신감은 충분했다.

어떤 괴물이 나올지 몰라도.

우리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며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반짝.

'...?'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게 뭔지 눈치채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친!"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포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폭격이었다.

콰아아아아앙!!!

73화 전차대대 (1)

콰아아아앙앙!!!!

아군 진형의 근처로 떨어진 포탄이 격렬한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폭발에 직격한 병사는 없었으나,

현대 화기의 무서움은 단발적인 폭발이 아닌, 그 후폭풍에 있는 것.

포탄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아군을 덮쳤다.

"포격이다!"

"전원 산개! 엄폐해라!"

나름대로 많은 전투를 겪으며 경험을 쌓아 온 우리다.

갑작스러운 포격이었으나, 당황한 병사는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근처의 안전한 장소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커허... 컥...."

"...쿨럭."

건물 뒤로 급하게 엄폐한 나는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첫 번째 포격 당시 근처에 있던 병사들.

포탄의 파편에 직격당한 이들은 엄폐는커녕 명령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태.

'제기랄.'

아무리 인간을 초월한 각성자라고 한들.

포격을 맞고도 멀쩡할 정도의 괴물로 성장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살아는 있다.'

포격을 빗맞은 정도라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은 성장했단 건가.

피를 흘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고 있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은 병사들.

하지만 엄폐하지 못한 채 포격 현장에 노출된 상태였다.

'포격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한 번으로 끝나리란 보장은 없다.'

저대로라면 언제 이어지는 공격에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녀석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으나.

꽈악.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너 뭐 하냐?"

"신 병장님.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녀석들입니다."

서수혁 상병.

"냉정하게 판단하십쇼. 다음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릅니다. 병사들을 잃은 건 뼈아프지만, 병장님의 안전을 지키는 게 부대의 생존을 위한 일입니다."

"아니."

나는 녀석의 팔을 뿌리쳤다.

"아직 병사들 안 잃었다."

정말 죽었다면 미련 없이 버렸겠지.

죽은 사람들에 연연하다가 산 사람을 잃을 생각은 없거든.

하지만 저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우리가 입고 있는 군복은 강철 리자드의 가죽과 비늘로 만들어진 물건.

그 방어력은 나도 한 번 경험해 봤기에 잘 알고 있다.

탄약대대 탈환 당시.

탄약고가 폭발하는 충격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줬던 장비니까.

"커허...."

충격으로 인해 죽기 직전으로 보이는 녀석들이지만.

전투복의 방어력 덕에 파편에 관통당하지는 않은 채 목숨만은 붙어 있었다.

포격이 다시 꽂히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두 병사를 들쳐 메고 몸을 움직였다.

최근에 [절대 미각]의 효과로 스탯의 폭발적인 상승을 이뤘다.

전투 특성이 부족해서 그렇지 깡스탯만은 최고라고 자부하는 나.

두 명의 병사를 한 번에 옮겨야 했지만,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의무병, 군종병! 튀어나와!"

"예! 바, 바로 치료 들어가겠습니다!"

다행히 병사들을 옮기는 동안 추가적인 포격은 없었다.

두 병사를 내려놓자마자 근처에 있던 '사제' 신중수 일병과 '치료사' 사의준 일병이 달려왔다.

"살릴 수 있겠냐?"

"상태가 심각하긴 합니다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헐떡이는 병사들.

부대에서 죽어 나간 취사반 후임들이 떠올랐다.

'그 두 명은 그렇게 죽어선 안 될 녀석들이었어.'

이 두 사람도 마찬가지.

다행히.

치료가 진행되자 눈에 띄게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후우.'

그제서야 조금 솜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야 눈치챘는데, 군복 전체가 두 병사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뱀파이어 녀석들이 보면 군침 돌겠네.'

팔에 묻은 피를 대충 바지에 닦아 낼 때쯤.

콰아아아앙!!!

다음 포격이 이어졌다.

거기서 그치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주변으로 쏟아지는 포격.

바로 옆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파편이 비산했다.

"큽!"

건물을 엄폐물로 사용해 어떻게든 버텨 내고는 있다만.

어디까지나 버티는 게 한계.

"신 병장님, 어떻게 합니까!"

"포격을 계속 버틸 순 없습니다!"

각성자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모일수록 시너지를 발휘한다.

포격을 예상했다면 충분한 대책을 마련해 돌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저들의 포격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

포격을 뚫고 접근할 만한 준비는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다들 후퇴한다. 전투차량이라도 폭격에 직격하면 위험하니. 뒤쪽으로 충분히 빠진 뒤에 차량에 탑승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나는 걸로."

"예!"

포격을 피해 후퇴할 때.

나는 포격이 날아오고 있는 장소.

전차대대를 슬쩍 노려보았다.

'여기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군.'

아마도 곡사포 계열의 포격.

포격을 얻어맞으면서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니.

이래서야.

알 수가 없잖아.

"누가 쏘고 있는 거냐."

우리를 포격한 녀석들이 누구인지.

* * *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저 군부대에서 우리를 포격한 것 같은데. 맞나요?"

이상아 조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여기선 드문 편인 미필자라 그런지.

자신이 본 게 맞는지 조심스러운 태도이다.

"맞을 겁니다. 전차대대의 곡사포 포격이었겠죠."

민재 형이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상아의 질문을 긍정했다.

적의 공격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았다고 해서 분위기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악으로 치달았다.

전차대대의 무기가 우리를 향했다는 것.

"그러면 전차대대의 군인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그렇게 이해해도 되는 걸까요?"

"정황상 그렇다고 봐야겠죠."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분명한 사실.

부대원들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살아남은 부대는 우리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외엔 운 좋게 도망친 탈영병들이 전부라고 분명...."

곧 누군가가 의문을 표한 것을 시작으로.

병사들 사이에 혼란스러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사실 오만이었던 거지. 우리가 직접 모든 군부대를 확인한 것도 아니니."

"아니, 근데 우리를 왜 공격한대? 같은 인간이잖아."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건가...? 왜, 저 슬라임 같은 녀석은 인간으로 변신했잖습니까."

우리가 혼란스러운 지점은 바로 이것.

군부대의 탈환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탄약대대의 탈환에 성공한 바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 군부대 탈환이지. 군부대와 격돌한 적은 있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당연히 그곳을 점거하고 있을 괴물을 상대할 것을 상정했다만.

이유는 모르겠으나.

저 전차대대는 군부대로서 우리를 적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이 정말 살아남은 군인이라고 한다면. 우린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그래.

이게 문제란 말이지.

"적이 아니라고 알려야 하나?"

"근처에만 다가가도 포격을 날려대고, 전파도 멸망의 날 이후로 줄곧 먹통인데. 무슨 수로?"

만약 저들이 정말 우리 외에 살아남은 군인들이라면.

우리는 아군이면 아군이었지 적대할 필요가 없는 관계.

왜 우리를 공격한단 말인가.

'정말 우리를 몬스터로 오인하고 있는 건가.'

실제로 괴물들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으니까.

인간인 척 접근한 괴물들에게 호되게 당해 본 적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병사들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냥 공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뭐?"

사수들의 조장.

서수혁 상병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선공을 한 건 저쪽 아닙니까."

"그래도. 같은 군인을 상대로 공격을 하자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냥 군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군인으로서 부여받은 임무가 뭐였습니까?"

우리 부대는 12군단 직할의 423방공대대.

부대의 임무는.

해안이나 공중을 통해 접근하는 적들을 레이더를 통해 감시하고.

레이더를 공격하는 적을 막아 내는 것.

"레이더 방어를 때려치우고 산에서 내려온 시점부터는 이미 반쯤 탈영병이나 다름없는 신세 아닙니까."

이 자식.

우리 부대의 아픈 부분을 당당하게 찌르는구만.

"군부대의 규율을 유지하는 것은 집단의 질서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 찬성이었습니다만... 저들이 같은 국군 소속이니 하는 소속감을 느낄 상대이냐 하면, 전 아니라고 봅니다."

"...."

"우리가 필요한 건 뱀파이어들을 토벌하는 데 필요한 전차들뿐. 저들이 그걸 내놓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공격하겠다 하면 선택지는 단순해지죠. 이쪽이 양보하거나, 아니면... 저쪽에 양보를 강요하거나."

양보를 강요한다라.

'약탈자나 다름없는 생각을 하다니.'

저번에도 느꼈던 부분이다만.

이 녀석.

생각이 좀 극단적으로 효율에 치중되어 있다.

감정.

양심의 가책.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이득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부류.

"기각이다."

미안하지만.

녀석의 의견은 기각이다.

"어째서입니까?"

"평범한 보병 부대라면 모를까. 전차부대와의 교전은 리스크가 너무 커."

"여기 모인 각성자들의 숫자가 몇 명인지 아시잖습니까. 처음이야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했다 쳐도, 충분히 대비하고 들어간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우리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여전히 유효하다만."

"그건 죄 없는 인간들에 한한 것이었죠. 저번 약탈자들과의 싸움은-."

"우리를 공격한 경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저들이 약탈자와 같은 부류일지 판단할 수 없으니까."

물론.

나라고 대책 없이 '안 된다'라고만 말할 생각은 없다.

해결법도 없는 부정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내가 생각한 방법을 녀석에게 설명하려던 때.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시는군요."

"뭐 인마?"

녀석이 그런 말을 꺼냈다.

"신 병장님은 자신이 100명 넘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는 자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있으니까 말하는 거다. 저쪽이 온전하게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군부대라면 전면전은 리스크가-."

"자각이 있다는 사람이 아까 같은 짓을 합니까?"

아까 같은 짓이라니.

뭘 말하는 건가 싶었다.

"병사 두 명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군단장이 몸을 날리다니.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여기서 언급하다니.

'....'

슬쩍 시선을 돌리자.

조금 전에야 겨우 의식을 되찾은 두 명의 병사가 보였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았는지 치료받으면서도 움찔하는 녀석들.

"탄약대대 때도. 탄약고 폭발에 휘말려 죽을 뻔했죠."

"...."

"약탈자들을 상대할 때도, 던전 공략 때도, 직접 나설 필요가 없는 후위 직업군이면서도 혼자 나서지 않았습니까. 일이 성공했으니 별말 없이 넘어간 거지. 무책임한 행동이었습니다."

던전 공략 때는 특히 한 소리 듣긴 했다.

나름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한 일이었으나.

설득이 안 먹힐 거라 생각해 혼자 강행했으니.

내 잘못은 맞다.

"저 두 명이 죽으면 우리는 병사 두 명을 잃었겠죠. 아쉬운 일이지만, 그게 전부였을 겁니다."

"..."

"하지만. 당신이 죽으면?"

길드장의 사망.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 부대 전력의 핵심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요리를 통한 광역 버프.

길드장을 잃으며 오는 혼란과 버프의 소실.

군단의 전력이 절반 이상 줄어들겠지.

"맞는 말이야."

나 역시.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탄약대대 때도, 던전 공략 때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번에 병사를 구하러 달려갈 수 있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

아니.

나를 제외하고도 한 명 있긴 하네.

"그렇게 내 안위를 걱정했으면. 내가 아니라 네가 직접 병사들을 구하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나서려는 것을 붙잡았던 사람.

서수혁, 이 녀석이라면 가능했겠지.

"...자만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는 사수조장에 걸맞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목숨 역시 병장님만큼은 아니더라도 부대에서 높은 가치를-."

"가치. 너는 병사들 목숨의 가치를 하나하나 계산하나 보네. 군단장 100. 조장 10. 병사는 1. 뭐, 이런 식이냐?"

이 녀석의 태도에 대해 언젠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딴 식으로 사는 거 아니다. 서수혁 상병."

솔직히 말해서.

짜증 날 때도 많았거든.

"...."

입을 다문 녀석이 나를 향해 강하게 시선을 부딪쳐 왔다.

저 시선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나는 말년병장이고 저 녀석은 상병.

어느 계급이 높으냐와는 별개로 치고.

부대에서의 권력으로 따지면 상병 쪽이 실세로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더 오래 군 생활을 같이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하극상이라.'

내 군 생활 중에 겪을 줄은 몰랐는걸.

"지, 진정하십쇼! 수혁이 너도 임마! 병장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을 느꼈는지.

전광일 상병이 끼어들어 나와 서수혁 상병의 사이를 갈랐다.

광일이 녀석에게 밀려나는 와중에 서수혁 상병이 소리쳤다.

"하.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물러나야겠군요. 저 뱀파이어 새끼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동안, 전차를 얻지 못한 우리의 전력 강화는 늦춰질 것이고."

"...."

"생판 얼굴도 본 적도 없는, 우리를 공격하기까지 한 저 군바리들 때문에. 대단하신 박애심이십니다. 누가 알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밀려나는 녀석을 보며.

나는 군장 가방을 열었다.

그 한구석에.

작은 유리병 하나가 보였다.

"전면전이 반대라고 했지. 물러나겠다고 한 적은 없다."

[식재료 감별(강화)]

[파란의 물방울]

[신선도 - 중상]

파란의 물방울.

마트에 자리 잡아 찾아오는 생존자들을 사냥하던 슬라임 같은 괴물.

수준이 그렇게 높은 괴물은 아니었는지.

요리로 만들어도 스탯 상승치는 미미하고, 유의미한 특성을 얻지도 못했기에 활용하지 못했지.

다만.

요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젤리 형태의 물방울을 동그랗게 만들어 주고.

그 위에 흑설탕과 꿀, 콩가루 등을 조금 뿌려 주면.

[중급 요리사의 파란의 물방울 케이크]

한때 유행한 물방울떡 같은 외형.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만큼 이 녀석을 먹는다고 스탯이 엄청나게 오르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이걸로도 충분하지.'

'파란의 물방울'의 정보를 떠올린다.

[파란의 물방울은 주변 환경을 모방해 사냥감을 유인하는 습성을 지닌 마도 생명체로서-.]

내가 의도한 대로라면

분명 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터.

완성된 물방울을 입 안에 던져 넣었다.

달달한 젤리 같은 맛이 났다.

[절대 미각의 효과를 발동합니다.]

[특성을 선택해 주십시오.]

눈앞에 나열되는 여러 가지 특성들.

그중에서 내가 찾던 이름을 고르자.

[해당 특성을 획득합니다.]

[특성 – 환경 동화]

스르륵...

내 몸이 점차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돼 버렸다.

"신 병장님이."

"사, 사라졌어?"

병사들의 반응을 보니 효과는 확실한 것 같네.

아무리 저 군인들이라도 보이지 않는 적을 포격할 수는 없겠지.

'우리와 같은 군인들이라면 우릴 공격할 이유는 없다.'

그 이유.

직접 알아봐야지 않겠냐.

74화 전차대대 (2)

수혁이 녀석의 말은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틀리지 않았다.

병사 두 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목숨을 걸어선 안 된다는 것.

나 역시 이성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를 흘리는 병사들을 보면서도 이성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조금 힘들다.

병사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멸망의 날이 떠오른다.

'맞후임 준혁이. 막내 용준이.'

내 눈앞에서 죽어 간 후임들.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부대를 가로지르던 와중에 발견했던 병사들의 시체들까지.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살해당한 인간의 몰골은 생각보다도 훨씬 처참하고, 징그럽고, 추하다는 것.

'나는 뒤져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나와 함께하는 병사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상적이긴 하다만.

운이 좋았는지 뭔지.

아직까지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욕심 좀 내도 되는 거 아니겠냐.

언젠가 죽는 사람은 분명히 나오겠지만,

내가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럴 만한 능력도 있거든.'

[특성 – 환경 동화]

[주위 환경에 완벽하게 동화됩니다.]

[절대 미각]을 통해 얻은 파란의 물방울의 특성.

"신 병장님이."

"사, 사라졌어?"

그 효과는 병사들의 반응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놀라는 병사들.

"아니... 자세히 봐."

그나마 눈썰미가 날카로운 병사 한 명이 내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묘한 일렁거림 같은 게 있어."

"일렁거림이라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대부분의 병사는 얘기를 들어도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나를 가리키고 있는 병사는 분명 사수 각성자이다.

눈썰미가 좋은 편인 녀석이라면 눈치챌 수도 있다는 건가.

"대단하네."

"허, 허공에서 목소리가...!"

'파란의 물방울'과 달리 인간인 내가 사용하는 특성에는 어느 정도 허점이 있다는 것.

아쉽기는 하다만.

반대로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녀석이 집중해서 관찰하는 게 아니면 이상한 점조차 찾기 힘들 정도의 은신 능력이라는 것.

나는 이 능력을 이용하여 전차대대에 직접 방문할 생각이다.

보병부대라면 모를까.

전차대대와의 전면전은 리스크가 크다.

그 과정에서 전차가 손실되기라도 한다면 전차를 노획하고자 온 우리에게는 엄청난 타격일 것이다.

더 쉬운 길이 있다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냐.

만약 저들이 모종의 오해로 우리를 공격한 것이라면 오해를 풀면 그만이다.

잘하면 다른 군부대의 군인들을 통째로 흡수할 수도 있는 일.

물론.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공격한 것이라면,

약탈자와 다름없는 존재로 변한 셈이라면.

그때는 약간의 리스크 정도는 감수해도 되겠지.

* * *

나는 투명해진 몸을 이끌고 전차대대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포격은... 없군.'

환경 동화의 효과.

부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지난번과 같은 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격으로 인해 초토화된 장소에 도착했다.

저 멀리 전차대대가 보이는 위치.

'생각해 보면. 포격은 꽤 가까이 접근하고 나서야 이루어졌지.'

현대 화기의 성능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곡사포 같은 무기들의 사정거리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포격은 전차대대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 장소에서 이뤄졌다.

이유는 상상이 간다.

'모든 전파가 끊긴 마당이니까... 저쪽도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던 거겠지.'

포격은 결코 단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레이더나 정찰기의 도움을 받아 적의 위치를 특정하고.

바람과 같은 대기의 환경을 계산한 뒤.

적의 이동 경로를 예상해 발사하는.

터무니없이 복잡한 물리학과 수학의 영역.

다른 부대의 정보 제공이 끊긴 시점에서 그런 복잡한 작업은 불가능하니,

저들 역시 시야에 의존한 포격이 한계였다는 거다.

[경 고]

[위 지역은 군사지역으로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며-.]

한참을 걸어가자.

우리 부대에서도 몇 번 본 익숙한 푯말이 보였다.

전차대대.

그리고 그 정문에는 몇 명의 병사들이 총을 들고 정자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나는 잠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우리 말고도 살아남은 부대가 있었다니.'

군복을 입고 총을 든 나와 동년배의 남성.

남들에게는 생소한 풍경일지 몰라도 군대를 다녀온 이들에게는 익숙한 풍경.

'이제는 오히려 저 모습이 더 어색하네.'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말이지.

지금 우리 부대는 장비가 군복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총을 사용하는 사수 계열 각성자 정도를 제외하면 현대 군과는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나만 해도 사용하는 무기가 식칼이고.

다른 녀석들은 가시 달린 강철 글러브나, 양손 대검, 전쟁 망치, 활.

심지어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병사들까지 존재하는 판국이니까.

서수혁 상병의 말대로.

기존의 국군과는 꽤 거리가 먼 단체가 돼 버리긴 했지.

그래서 그럴까.

국방색 디지털 무늬 군복을 입고 탄띠에 개머리판을 올려 둔 채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

변형된 부분 없이 순수한 대한민국 군인의 모습 그 자체.

얼마 전까지는 내게도 익숙했던 모습이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난 것도 아닐 텐데.

그동안 겪은 일들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일까.

몇 년은 된 일처럼 생각하게 된단 말이지.

'넋 놓고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놀랍기는 하지만.

우리를 향해 포격이 쏟아진 시점에서 이미 군인들의 존재는 예상하고 있던 바이다.

일단 사정을 파악하고 오해가 있다면 풀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니.

'정문에서부터 정체를 보여 봐야 좋은 일은 없겠지.'

나는 혹시라도 들키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경비가 없는 곳의 펜스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그런 계획...

이었는데.

'...?'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불현듯 머리를 지배하는 위화감에 발걸음을 멈췄다.

위화감의 원인은 정문을 경비하고 있는 저 병사들.

'너무 FM 아닌가?'

초소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

외형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그 자체다.

그리고 어색함이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지나치게 참군인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

경계 태세로 서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

그 몸에서는 약간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 있는 다른 병사와는 사소한 잡담조차 오가지 않는다.

'지켜보고 있는 간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체력적으로 힘든 정자세를 저렇게 고수한다고?'

423대대 당시 부대원들의 근무 태도를 떠올려 보았다.

꾸벅꾸벅 조는 정도는 예사.

후임한테 심심한데 재밌는 얘기 없냐고 묻고 후임들은 얘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게 일상 아니었나?

'우리 부대가 좀 가라 부대였다곤 하지만.'

유독 군인 정신이 투철한 부대일 수도 있다.

괴물들이 나타나 경계심이 늘어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뭔가 이상해.'

다시 몸을 돌린 나는 초소를 지키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면 발각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병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멀리서 슬쩍 봤을 때는 멀쩡하게 보였던 군인.

그러나.

'제기랄.'

미동도 하지 않는 병사.

비유가 아니라 정말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이다.

이 병사들.

숨조차 쉬지 않고 있거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눈동자에서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을 보는 듯한 기분.

'좀 더 알아봐야겠어.'

살짝 소름이 돋은 은신을 유지한 채 칼을 꺼내 들었다.

서걱.

경비 병력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 펜스를 베어 낸 뒤 부대 안쪽으로 진입했다.

초소마다 배치되어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

전차 근처에 대기 중인 병사들.

전차대대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살펴본 결과.

나는 그들 중 누구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달았다.

결론은 하나.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군.'

몬스터들이 곡사포 사격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살아남은 군인들이 우리를 적대한 것이라 판단했지.

하지만 아니었다.

이 전차대대의 병사들은.

모종의 존재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그것도 군부대로서 기능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하면서.'

차라리 조종당하는 병사들이 좀비처럼 우르르 돌격해 왔다면 무서울 건 없었겠지.

하지만 이 병사들은 지휘 검열이 오기라도 한 듯 철저한 FM을 따른다.

군부대로서의 전투력을 완벽히 재현하고 있는 것.

이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만만한 존재는 아니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정보를 얻을 만한 게 있을까 싶어 계속해서 부대 곳곳을 살펴보던 중.

그것은.

굉장히 뜬금없는 장소에.

굉장히 뜬금없이 있었다.

'어?'

처음엔 지나가다가 잘못 본 것인가 했다.

근처에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시설이 있는 곳도 아닌.

전차대대의 한 도로 위.

[....]

그곳에.

거대한 눈알이 있었다.

'미친. 저게 뭐야.'

옛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안구 형태의 괴형체.

그것이 바닥에서 1m 정도 떨어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내가 녀석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기괴한 생김새에 흠칫한 순간.

빙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알이 갑자기 크게 돌아갔다.

나와 눈을 마주친 느낌.

눈알에 표정이 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있는 곳을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알.

나 역시 녀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중급 요리 비결 - '게이저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그 순간.

[——————!!!!!!!!!]

거대한 눈알이 충격받은 듯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지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미친 듯이 회전을 시작하는 녀석.

'제기랄.'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수아가 데리고 다니는 정령, '방울이' 역시 내가 자신을 관찰한 것을 눈치챘던 것처럼,

이 녀석도 내 스킬의 발동을 눈치챈 것이다.

소리를 낼 수 있을 만한 구강구조도 없어 보이는 괴물에게서 기괴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 ——!!!!]

몸에 두른 이상한 기운과 함께 저 위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제거한다!'

손에 든 [독고 구식]에 힘을 주고 몸을 내던졌다.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녀석에게 식칼을 꽂아 넣으려던 순간.

타아앙—!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큽."

무언가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얼굴에 열기가 확 올라왔다.

열기가 느껴지는 부분을 매만지자 옅은 피가 묻어났다.

근처 초소의 병사가 이쪽을 향해 초구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추가 사격이 없는 건... 은신이 유지되고 있어서인가.'

[—!!!! —!!!!!!!]

내가 칼을 꽂는 데 실패하자.

발광하는 눈알 녀석은 아예 손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떠오르더니 곧 5m 이상의 상공에 도달했다.

칼이 닿기 힘든 위치까지 올라간 녀석.

나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녀석을 겨누었다.

'보조 무기로 들고 다니길 잘했다고 해야 하나.'

사수가 아닌 내 총알은 칼에 비하면 위력이 다소 모자란 편이지만.

그래도 상처 정도는 입힐 수는 있을 터.

[———! —!!!!!!!]

그때.

허공에 떠 있는 녀석의 몸을 흐르던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권총을 쥐고 있던 내 손에 그 기운 중 일부가 달라붙었다.

희끄무레한 안개 같은 것이 손에 닿자.

피부를 넘어 신경을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던 걸까.

타악.

'무슨.'

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가락을 하나씩 피더니.

쥐고 있던 권총을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소름이 돋았다.

'조종당했다!'

급하게 몸 안의 마력을 손끝으로 보내 기운을 밀어냈다.

그리고 칼을 휘둘러 접근해오는 희끄무레한 안개를 쫓아내 버렸다.

'여왕'의 한이 담긴 칼날에 닿은 안개들이 스르륵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내게 닿은 기운은 어떻게든 몰아냈으나.

녀석이 높이 떠오를수록 저 안개 역시 점점 더 넓게 퍼져 나갔다.

"높이 올라간 게 몸을 피하기 위한 게 아니었던 건가."

힘을 집중하는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더 높이 떠오를수록 저 안개도 더 넓게 퍼져 나가는 모양.

타다다닥.

그때.

저 멀리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넓게 퍼진 안개에 닿은 병사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슬쩍 눈알 괴물의 위치를 올려다보았다.

저 높이까지 올라간 이상 권총으로도 격추는 힘들겠지.

병사들이 몰려들면 [환경 동화]가 유지된다고 해도 언젠가 들킬 수밖에 없는 일.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탄약대대를 빠져나왔다.

* * *

부대원들이 자리 잡은 임시 막사에 도착한 나는 [환경 동화]를 해제했다.

스륵.

"까, 깜짝이야! 신 병장님!?"

"응? 무슨 소리야. 신 병장님을 갑자기 왜... 어어!?"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병사들.

미안하지만 자세히 설명해 줄 여유는 없고.

"조장들 소집해. 회의한다."

"추, 충성!"

병사 한 명이 곧바로 움직여 흩어져 있는 조장들을 모아 주었다.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었어."

나는 곧바로 전차대대에서 있었던 일들을 공유했다.

군인들이 우리를 적대한 것이 아니다.

저 기괴한 눈깔 괴물이 군인들을 조종.

우리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라고.

"그런 일이...."

"뱀파이어로 모자라서, 이젠 하다 하다 인간을 조종하는 괴물입니까?"

죽은 인간이 짐승처럼 움직이는 좀비나 종족을 바꾸어 버리는 뱀파이어와는 궤가 달랐다.

우리에게 포격을 가한 것은 물론.

경비 병력까지 세워 두기까지.

'인간을 조종하면서 그 인간의 생전 지식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뜻.'

군인이라면 우리를 공격한 사장을 파악하고 온건하게 해결해 볼 생각이었으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족쳐야지."

저 괴물과는 대화로 해결할 여지 따윈 없겠지.

"족친다니."

"그 괴물. 신 병장님의 손을 잠깐이라도 조종했던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 병장님을 조종할 정도의 괴물이라니."

그저 평범한 전차대대였다면 우리도 크게 꿀리지는 않는다.

각성자들은 본래도 강력하며 모일수록 시너지를 일으키는바.

작정하고 대비한다면 포격을 뚫고 전차대대에 진입해 그들을 제압할 수도 있겠지.

문제는 그 눈깔 괴물.

그 녀석이 내뿜는 기운에 닿자.

비록 손가락 정도라고는 하나 나 역시 조종당했을 정도.

그 존재감에 위축된 병사들이 후퇴를 권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오히려 반대거든."

"예?"

"솔직히 말해. 전차대대를 상대로 공략하는 것보다 쉬울걸."

그 말에 몇몇 병사의 표정은 의아하게 바뀌었다.

반대로 몇몇 병사의 표정은 급격하게 밝아졌다.

"역시 신 병장님."

"뭔가 방법이 있으신 거군요."

나는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조장들.

그중 한 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수혁아."

"...? 상병 서수혁."

우리 부대의 사수조장.

즉.

최고의 '사수' 각성자이자.

저격수.

"네가 한다."

"...예?"

75화 전차대대 (3)

[절대 미각] 특성을 얻게 된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많아지긴 했다.

괴물들의 특성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냐고 한다면.

또 그렇진 않거든.

'내게 불가능하거나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

처음 부대를 성장시키는 걸 목표로 잡은 이유가 뭔가.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내가 살아남기 위함.

즉.

이럴 때를 위한 거였지.

"서수혁 상병. 네가 한다."

내가 못 하는 일은 길드원이 해결해 줄 수 있거든.

지목받은 서수혁 상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하필 접니까?"

"가장 적임자니까."

녀석은 우리 부대 최고의 '사수' 각성자.

'사수'들은 원거리 계열의 각성자들이지만.

비슷한 종류의 마법사들과는 조금 다르다.

마법사들과는 달리 광범위한 화력을 내뿜지는 못한다.

다만.

한 발, 한 발의 관통력과 위력.

그리고.

'사정거리에서 우위를 가지지.'

사수조장쯤 되는 서수혁의 사격은 부대의 어떤 마법사나 사수들도 범접하지 못하는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이 녀석만이 적임인 일이 있으니.

"저 눈알을 저격한다."

저격.

귀찮은 일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편리한 해결법이지.

* * *

부르릉...!

"신 병장님! 밥차 준비됐습니다!"

최근.

공병들이 여러 차량을 개조할 때.

나도 한 가지 부탁한 물건이 있었다.

기동형 취사 장비.

...이게 일단 정식 명칭이긴 한데.

"예? 밥차 맞지 않습니까?"

"푸드트럭이라고 하나."

"...둘 다 맞긴 하지. 모르겠다. 그냥 니들 편하게 불러라."

대형 가스버너, 오븐, 싱크대에 각종 요리도구까지.

온갖 요리용 장비들이 들어가 있는 차량.

사실 그냥 밥차 맞다.

군대에서 대규모 훈련을 할 때.

취사병은 야전 취사 훈련을 받는다.

우리 부대는 워낙 작은 부대라 가마솥에 가솔린 버너로 요리했지만.

'큰 부대는 밥차를 운영했지. 엄청 부러웠는데.'

야외에서 본격적인 요리를 가능케 하는 시설.

사실 평범한 군대라면 이런 게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경우도 많겠지만.

내가 있는 이상.

우리 부대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장비인 셈이다.

'수혁이 녀석에게 저격을 맡기기로 했지만, 놀면서 지켜볼 생각은 없거든.'

서포터 계열의 직분에 걸맞게.

전력을 다해 지원해 줄 생각이다.

"요리 버프가 대단한 건 알겠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준비해야 할 일입니까?"

정작 내 요리를 맛보게 될 서수혁 상병은 얼떨떨한 태도였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는 듯.

"전투식량만 해도 엄청난 성능이니,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이 자식. 서운한 소리를 하네."

최근에 내가 본격적인 요리를 대접할 일이 적긴 했다.

[전투식량]으로 인해 병사들에게 기본적으로 버프 요리가 공급되기도 했고.

[절대 미각] 덕분에 나 혼자서 해결한 일도 몇 개 있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녀석은 내 요리의 고점이 전투식량과 큰 차이가 없을 줄로 알고 있는 것 같다만.

전투식량은 기본적으로 보존식.

아무리 맛있게 만들어 봐야.

갓 만들어진 따끈한 요리들에 비하면 한계가 있는 법.

'그러고 보니, 스탯이 급격하게 성장한 뒤에 내 본격적인 요리를 먹어 본 병사가 있던가?'

나 자신을 제외하면 없었던 것 같다.

[절대 미각]으로 인한 스탯 상승.

레벨이 오르며 [중급 요리사]가 되면서 요리 특성 역시 [중급 요리 숙련]으로 진화한바.

그런 내 본격적인 요리를 처음으로 맛보게 될 녀석이 이 녀석이라.

'너는 운 좋은 줄 알아라.'

이왕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대접하게 된 것.

이번에는 아주 작정하고 힘줘서 요리해 줄 생각이거든.

탁탁탁탁.

도마 위에 올려 둔 재료들을 손질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번에도 신 병장님이 옳았군요."

그렇게 요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앉아서 내 요리를 지켜보고 있던 녀석이 말했다.

"내가 옳다니. 뭐가."

"저들이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하셨던 부분 말입니다."

"그걸로 따지면 나도 옳지는 않았지. 괴물이 병사를 조종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으니까."

"그걸 알아낸 게 옳았다는 겁니다. 제가 주장했던 대로 바로 무력진압에 들어갔다면 엄청난 참사가 벌어졌겠죠."

음.

그 경우는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괴물. 어떻게든 포화를 뚫고 전차대대 내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때는 녀석이 그 안개 같은 기운을 퍼트렸겠죠. 그렇게 됐다면."

스탯만은 깡패인 나도 가진 마력을 총동원해서 몰아낸 기운.

부대원들의 절반 정도는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

본의 아닌 내전이 일어났겠지.

"제가 부대를 위험에 몰아넣을 뻔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병장님에게 헛소리나 해 댔으니.... 죄송합니다."

"미안한 거야 뭐. 나도 미안하지."

지난번의 말싸움.

병사들을 구하러 간 나를 뭐라고 한 건 생각해 보면 내 목숨을 걱정해 준 셈인데.

흥분해서 심한 말을 해 버린 게 내심 신경이 쓰이긴 했단 말이지.

"...딱히 심한 말 하신 건 아닙니다."

"응? 무슨."

"맞는 말 하신 겁니다. 제가 인간의 가치에 숫자를 매긴다든지,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된다든지. 솔직히 정곡을 찔린 느낌이더군요."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며 앉은 녀석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뭐가 나쁜 건지. 솔직히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은 극한까지 실리를 추구한다.

실리를 추구한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

나도 가급적이면 이득만 보고 살고 싶은 사람이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녀석은 지나치게 냉정한 면이 있다는 것.

사람인 이상, 아무리 이득을 추구하려고 한들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다르다.

이득이 되는 선택지라고 한다면, 감정 따위는 뒷전으로 둘 수 있는 녀석.

서수혁은 부대 최고의 사수이자 사수조장.

그 자리는 단순히 가장 먼저 각성한 사수라서 얻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최고의 사격 실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

'그 실력에는 이런 성격도 영향을 줬겠지.'

총을 쏜다는 것은 상대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

아무리 훌륭한 스나이퍼라고 해도 방아쇠를 당기는 데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런 순간에도 냉정하게 선택을 내리겠지.

사수로서는 최고의 덕목을 가진 셈.

하지만.

'부대의 동료로서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우리 부대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난 그게 다름 아닌 전우애라는 감정 덕이라고 생각하거든.

나는 예열이 끝난 오븐에 준비된 재료를 넣으며 말했다.

"부대가 생존하기 위해선 내가 부대를 이끄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지."

"예."

"나야 직업이 요리사니까, 다른 녀석들이 없으면 생존조차 힘들어. 칼 한 자루 들고 독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부대를 키우는 걸 최우선으로 삼는 건 사실 그 이유도 크지."

"대충 그런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감정을 배제한 채 최대한 냉정한 선택을 내리는 인간.

그런 녀석이 부대의 생존을 왜 생각하는가.

"너 정도면 총알이 확보된 시점에서 단독 행동을 해도 됐을 텐데. 아닌가?"

나 같은 후방 계열의 버퍼도 아니고.

실력도 출중한 녀석이니만큼 마음만 먹으면 부대를 떠나 자기만의 세력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

부대원들의 탈영에 대한 감시는 느슨해진 지 오래.

총 몇 정을 들고 나간다면 얼마 전에 만났던 그 탈영병 녀석들 같은 단계를 거쳐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녀석은 부대에 남아 훌륭한 병사로서 활동했다.

왜?

"각성 초기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산맥을 탈출하는 대로 탈영할 생각이었죠."

"너무 솔직한데. 지금은 아니란 거냐?"

"언젠가부터, 저 혼자 살아남아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전 부대원들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서로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 어쩌다 보니 한 부대에서 지내게 됐을 뿐. 전역하고 나면 볼 일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했죠."

"그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최근에는, 부대원들에 대한 애착이 조금 생기더군요."

서수혁 상병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신기한 기분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같이 몇 번의 사선을 넘어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요. 남들에게 관심이 없던 저에게도 축적되는 게 있었습니다."

"...."

"부대에 있으면 마음이 안심되고, 함께하면 편안한 마음이 들고."

언제나 냉정하던 인물이 주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이야기.

"동료라면 믿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꽤 감동적인 이야기긴 한데.

'안심이 되고. 편안한 마음이 들고. 믿을 수 있게 됐다고?'

녀석이 말한 키워드들.

안심, 편안, 믿음.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봤던 단어들인데.

'내가 부대원들의 멘탈을 관리하느라 먹였던 요리들.'

[주방장의 특별소스 - 안심]

[안정이 찾아오는 초보 요리사의 콩나물무침]

[주방장의 특별소스 - 편안]

[편안한 마음의 초보 요리사의 오징어 젓갈]

[주방장의 특별소스 - 믿음]

[불안을 쫓아내는 초보 요리사의 제육볶음]

부대 초창기.

갑작스러운 사태에 멘탈이 박살 난 부대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나는 [특별소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매끼 저런 효과를 넣어 요리를 먹였지.

"리자드 치프틴이 병력을 이끌고 온 날. 그 밤의 전투는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냐."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용기가 솟아나더군요.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승기가 없는 전투였는데도 말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치프틴이 부대 주위를 배회할 때의 식사는 '용기'의 소스를 넣어서 만들었으니까.'

확실하다.

이 녀석이 조금씩 바뀌게 된 이유.

내 [특별소스]의 영향이다.

다만.

[특별소스]로 인한 감정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

그 효과가 끝난 뒤에도 유지되는 것은.

특별소스에 담겼던 감정이 아니다.

그 감정으로 인해 생겨난 잔재.

"저는, 전우애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내가 부대원들에게 전우애라는 감정의 요리를 먹인 적은 없거든.

내 요리로 인해 얻은 감정들.

그 잔재들이 모여, 녀석에게 영향을 준 결과.

동료에 대한 애착으로 발현되었다는 거다.

"그래서 이 부대가 와해되는 게 싫었습니다."

"...."

"신 병장님에게 분에 넘치는 조언을 한 것도, 당신이 하는 짓이 부대가 와해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해한다. 네가 한 말도 딱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고."

특히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 것.

잘못해서 내가 죽었다면 정말 큰일이 되었을 테니.

"아뇨. 틀린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리더로 적합한 이유는, 당신이 거기서 병사들을 구하러 뛰쳐나가는 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거기서 다른 병사들을 버렸다면 조금이라도 리더로서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었겠죠."

"딱히 그런 이유로 뛰쳐나간 건 아니다만."

"저도 압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때는 병장님이 옳았다는 얘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은 언제나 올바른 해결법을 가져왔죠."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 나름의 인정을 받은 모양.

"신 병장님은 지금 같은 군단장으로 있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한 헛소리 같은 조언들은 모두 잊고."

"그러냐."

"앞으로는 대드는 일도 없을 테니, 뭐든 명령하십쇼."

고개를 숙인 채.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서수혁 상병.

뭐든 명령하라니.

'음. 그렇다면야.'

[중급 요리사의 정성이 깃든 아라크론 흰거미 데빌드 에그]

"첫 번째 명령이다."

"예."

"맛있게 먹어라."

"...아, 옙."

애피타이저로 내놓은 요리를 입으로 옮기는 녀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든 것을 숫자로만 계산하고, 남들에게는 한없이 냉정했던 녀석.

하지만 우연히 내가 먹인 요리들의 '감정'이 녀석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광일이 녀석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순한 성격이었던 전광일 상병이 광전사로 변한 것.

그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내 잘못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 게 광일이 녀석뿐만이 아니었단 거다.

'특히 이 녀석은... 냉정하던 녀석이 변해 가는 과도기에 있으니까. 혼란스럽기도 하겠지.'

여전히 부대를 제외한 타인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일 것이다.

부대 근처에 정착하려던 생존자들을 내쫓자거나.

전차대대의 군인들은 죽여도 되지 않냐는 등의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할 정도니까.

하지만.

이런 세상이다.

'강철군단... 아군만을 생각하는 태도는 오히려 바람직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자니.

애피타이저를 넘어 메인 요리까지 해치운 녀석이 마지막 디저트를 입 안에 옮겨 넣었다.

내가 명령한 대로.

[코스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A - 아라크론 흰거미 데빌드 에그]

[B - ....]

[....]

[....]

[요리에 담긴 마력들에게서 공통된 성질이 발견되었습니다.]

[테마가 존재하는 코스 요리를 완성하였습니다.]

[공통된 마력 성질 - 감각]

[신영준의 자작 코스 요리 - '예민함']

[시식자의 모든 감각이 매우 크게 증폭됩니다.]

[특정 대상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입니다. 해당 대상이 요리를 섭취할 시, 효과가 대폭 증가합니다.]

서수혁에게 먹인 코스 요리에서 내가 노린 효과는 '감각'

'저격 역시 포격과 마찬가지로 바람과 같은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고 계산해서 이뤄져야 하는 일이니까.'

복잡한 계산이야 사수 각성자인 서수혁이 알아서 할 테니.

내가 할 일은 녀석의 감각을 더없이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이나, 공기 등.

저격에 필요한 요소들의 흐름을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커... 커헉."

요리를 모두 먹어치우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서수혁 상병.

갑작스럽게 호흡이 가팔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경련하기까지.

"서수혁!"

명백한 이상 현상에 나는 당황하며 녀석에게 접근했다.

설마 내 요리가 뭐 잘못된 건가 싶었으나.

"괘, 괜찮습니다."

"괜찮긴 무슨. 내 요리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너무 맛있었습니다."

"뭐?"

"정말이지... 천상의 맛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요."

그런 건 아닌 듯하다.

"그러면, 뭐가 문제길래...."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그렇습니다."

고개를 든 서수혁 상병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동공 안에는 작은 먼지들이 담겼다.

"허공의 먼지가 보이고... 공기의 흐름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도시 곳곳의 시체 썩은 냄새는 꽤 지독하군요."

그제서야 녀석이 고통스러워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예민해진 감각.

그게, 각성자인 녀석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는 것.

이건.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잖아.'

76화 전차대대 (4)

"후욱... 후욱."

녀석의 감각을 증가시키는 건 내가 노린 것이긴 하다만.

문제는 효과가 너무 좋았다는 거다.

'[예민한 청각(열화)] 때와 비슷한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라는 것.

이유도 짐작이 간다.

'내 요리의 효과가 너무 강해졌어.'

정수아에게 코스 요리를 해 줬을 때와 비교해도 그렇다.

[절대 미각] 특성을 얻기 전이라 스탯도 지금보다 낮았고.

레벨도 10레벨대로 요리 숙련 특성 역시 [하급 요리 숙련]에 머물러 있었지.

하지만 스탯 뻥튀기와 중급 요리 숙련에 도달한 지금.

내 요리의 효과가, 지나칠 정도로 강해졌다는 거다.

부대의 각성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레벨의 강자인 서수혁 상병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후욱....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심호흡으로 달래던 녀석이 겨우 눈을 뜨고 말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어느 정도 적응되는군요."

"할 수 있겠냐? 정 힘들다 싶으면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것도 좋다."

"할 수 있겠냐고 물으신 겁니까, 지금?"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이만한 요리를 먹어 놓고, 못 할 리가 없잖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