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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1화. 선택

[업적 달성: 미다스의 손]

[축하합니다! 공개된 모든 신앙의 엔딩을 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기분 좋은 알림음에 이삭은 미소 지었다.

'황금 우상'의 엔딩을 달성한 이삭의 눈에 사람들을 비롯해 온 세상이 금은보화로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삭이 황금 우상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에 현신한 결과였다.

이제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삭은 엔딩을 봤고, 뒷일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극악무도한 난이도로 소문난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의 엔딩을 본 것은 이번이 여덟 번째였기 때문이었다.

'언노운 소프트웨어(Unknown Software)'라는 제작사에서 만든 이 게임은 미친 난이도와 불친절한 게임 구성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 반비례하듯, 말도 안 되는 자유도와 오픈월드 세계관, 디테일 때문에 매니악한 유저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내 어둠이 드리워지고, 여덟 명의 캐릭터들이 나타났다.

인간, 오크, 엘프, 거인 등등... 이삭이 이때까지 만들어서 플레이해 왔던 캐릭터들이었다. 이삭은 그 캐릭터들을 보면서 아쉬움 섞인 소리를 중얼거렸다.

"으음... 이제 이 게임 컨텐츠도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은 것 같고, 더 할 것도 없으려나?"

네임리스 카오스는 여덟 가지 신앙과 종족을 선택해 자신의 신이 제시한 목표를 이루는 게임이다. 선택지마다 상호작용이나 스토리가 천차만별로 바뀌어서 도무지 질리지 않고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신앙의 엔딩을 봤다는 것은 이제 거의 모든 컨텐츠를 즐겼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약간의 아쉬움으로 게임 종료를 망설이고 있을 때, 이삭의 눈에 낯선 메시지가 나타났다.

[전세계 최초 업적 달성 기념으로 새로운 신앙이 등장합니다.]

[히든 신앙: 이름 없는 혼돈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응?"

새 캐릭터를 만드는 칸에 본 적 없는 아홉 번째 신앙을 선택하는 칸이 나타나 있었다. 기이한 촉수 문양에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는 모습이었다. 이삭은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명칭에 당황했다.

"...몬스터 신앙?"

네임리스 카오스에 존재하는 메이저 신앙들은 '아홉 신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가 가능한 것은 여덟 개의 신앙뿐, 아홉 번째 신앙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아홉 번째 신앙인 '이름 없는 혼돈'은 몬스터, 그것도 지성 없는 기이한 촉수 괴물과 구더기 군집들, 꿈틀거리는 살점들이 숭배하는 외우주의 신앙이었다. 덕분에 쉼 없이 뒤얽히는 신들 간의 관계 속에서도, 이름 없는 혼돈은 무조건 적으로 취급받았다.

'진짜 히든 신앙인가?'

이삭은 혹시나 해서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 검색해 봤으나, 어떤 공략 사이트나 위키, 포럼에서도 이 신앙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신앙 중에 유일하게 선택할 수 없는 신앙이니 떡밥 아니냐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과 지독하기 짝이 없는 난이도, 한 번만 죽어도 캐릭터가 가차 없이 삭제되는 시스템 때문에 한 번 클리어한 사람도 찾기 힘들었다.

신앙을 모두 클리어한 이삭이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고 보니 최초 업적이라고 했지... 정보가 없는 게 당연하겠군.'

그는 즉시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어떻게 해야 재밌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까."

이삭은 기왕 특이한 신앙을 얻었으니 컨셉을 확실하게 살려 보기로 했다.

네임리스 카오스는 직업과 종족이 다양한 게임이지만 뭣보다 신앙이 주축이 되는 게임이다. 특별한 신앙의 컨셉을 살리려면 사제 직업군이 가장 좋겠지만, 사제 엔딩은 너무 많이 봐서 질리는 감이 있었다.

'성기사로 할까?'

생각해 보니 이쪽이 괜찮아 보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그 컨셉 그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온갖 신앙들로부터 적대시 당하고 있을 것이다. 사제는 생존기가 별로 없지만 이른바 '성퀴벌레'라고도 불리는 성기사라면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직업은 게임을 하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 일단 성기사 엔딩을 목표로.'

종족은 인간.

이삭이 캐릭터 메이킹 주사위를 굴리자 회색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게임의 특성상 캐릭터의 외견에도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긴 했지만, 그는 이른바 '고인물 패션'이라고 불리는 기괴한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캐릭터는 이쁘장한 맛이 있어야지.'

다행히 캐릭터 랜덤 외형 세트는 대부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삭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공들여 캐릭터 외모를 세팅했다. 별로 의미는 없지만,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캐릭터에 애착이 생긴다는 것이 이삭의 철학이었다.

캐릭터 메이킹 작업을 마치자 능력치를 찍는 창이 나타났다. 힘, 민첩, 체력, 지력, 신앙으로 나뉜 상태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성기사를 키운다면 체력과 신앙에 치중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이삭은 별 고민 없이 초반 장비를 착용하기에 필수적인 능력치를 제외하고는, 신앙으로 능력치를 꽉 채웠다.

'어차피 특수 신앙이라면 그 컨셉을 즐겨야지.'

이미 고일 대로 고인 이삭이었기에, 적어도 초반부에 죽을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성장한다면 성기사의 강력한 방어력이 생존을 보장해 줄 테니까. 사제 같은 성기사가 이삭이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권능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죽은 신의 내장: '포식'한 상대의 능력치 일부와 특성을 흡수합니다.]

[밤 중의 양 떼 울음: 이계의 문을 열어 권속들을 소환합니다.]

[가죽 아래에: 상대방의 내부를 '포식'하고 그 가죽을 당신의 외피로 이용합니다.]

"...."

기괴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삭은 기분 나쁜 것보다 그 권능들이 가진 힘에 먼저 놀랐다. 다른 신앙이라면 하나같이 큰 업적 하나쯤은 달성해야 줄 법한 최상급 권능들이었다.

'이런 권능을 시작하자마자 준다고?'

다른 신앙들도 시작하자마자 제법 좋은 권능을 주긴 하지만, 그걸 따지더라도 이 권능들은 전부 하나같이 사기라도 불러도 좋을 권능들이었다.

하지만 이삭은 반대로도 생각했다.

네임리스 카오스는 결코 일방적으로 퍼주는 게임이 아니다. 뭔가 큰 선물을 준다면 반드시 뒤에 커다란 엿도 준비해 놓고 있다.

이삭은 고민 끝에 첫 번째 권능, '죽은 신의 내장'을 선택했다.

아직은 '포식'이 무슨 능력인지 알 수 없지만 상대방의 능력치와 특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장점이었다.

능력치보다는 특성이 주요했다. 어떤 특성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으니까.

적은 확률이라도 그 특성들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히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

이삭이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진짜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내 머리가 아득해졌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영롱한 파란 눈동자였다.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문제는 그 눈동자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천 개는 넘어 보였고, 붉은 살점과 꿈틀거리는 근육, 맥동하는 혈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삭이 이전 여덟 번의 플레이를 하는 동안 본 적 없는 기괴한 영상이었다.

그는 기절할 것 같았지만 눈을 감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삭은 눈을 감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수천 개의 눈동자와 눈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유리한 환경은 아니었다.

깜빡.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눈을 깜빡인 것은 수천 개의 눈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데 소리가 들릴 리 없겠지만, 그 눈동자가 수천 개쯤 되면 다르다.

[이름 없는 혼돈이 이런 가짜 대신]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기계음처럼 느껴졌다.

[당신에게 진짜 어울리는 세상을 안내합니다.]

이삭은 어딘가 그 메시지가, 명칭이 낯익다고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짚어보려 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고 칼 가지고 오라고, 아이작!"

쩌억.

눈앞을 가득 뒤덮었던 눈과 살점의 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타는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삭은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와 피비린내에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쾅! 쿠르르릉....

밤의 어둠이 기이하게 물결쳤다. 거대한 석탑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집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에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 마른 형체들이 소리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이작!!"

어디선가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이삭은 고개를 돌렸다. 중년 남자가 부러진 칼로 힘겹게 웬 해골 병사 셋과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삭은 그제야 남자의 외침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자신이 아이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저앉아 있던 이삭은 자신이 칼을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남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해골 병사들의 녹슨 칼날이 남자를 꿰뚫었다.

"컥, 허억...."

이삭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마를 만져보자 흥건하게 피가 묻어나왔다.

이삭은 아찔해지는 기분 속에 건물의 잔해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건지 살아있었다.

'이게 무슨?'

건물 잔해라니? 이건 분명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삭은 아찔한 기분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이삭'으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엉뚱한 기억들이었다.

이삭이 아닌 '아이작'으로서의 기억이었다.

이삭은 밀려오는 14살짜리 꼬마의 기억 때문에 머리가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는 지독한 통증과 타는 냄새, 미끌거리는 피의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는 기억들.

이삭은 그제야 무너진 건물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에 생기 없는 잿빛 눈동자. 가냘픈 체구에 고작 해봐야 1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이작이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 만들었던 캐릭터가 어린 모습이라면 정확히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눈앞에 기묘한 창이 나타났다.

[아이작(EX+) / 충격, 탈진]

[종족: 인간/네필림]

[직업: 어린아이(F)]

[능력: 죽은 신의 내장, 혼돈의 손길]

'뭐?'

이삭은 어지러운 기분 속에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직감했다. 아이작은 그가 지은 캐릭터 이름이다. 그런데 종족이 네필림이라니? 아이작은 네필림 종족을 선택한 적 없었다.

네필림은 게임 설정상에서 천사와 인간의 혼혈을 뜻했다.

사람들을 홀리는 아름다운 외견과 함께 천부적으로 터무니없이 높은 신앙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신들의 저주를 받은 '저주받은 피' 특성 때문에 쇠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종족.

'캐릭터를 만들 때 극악의 확률로 부여되는 종족이라고 듣긴 했는데, 하필 지금?'

이삭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이 캐릭터를 만들던 과정이 떠올랐다. 무작정 높은 신앙을 찍고, 공들여 외모를 깎고, 신들과 최악의 관계인 신앙을 골랐던 것. 그 모든 변수가 네필림이라는 종족 특성 부여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억들을 더듬어 보고서야 이삭은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네임리스 카오스' 세계 안에 들어왔고, 이제 자신이 만든 캐릭터, '아이작'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시이이이잇─!

어디선가 날카롭게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수도사 남자를 죽인 해골 병사들이 아이작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윽...!"

아이작은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깐 칼을 들어 저항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이작은 금방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필림 특유의 최악의 신체 능력 때문이었다.

대신 알 수 없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는다고는 하지만, 아이작은 그 매력이 과연 언데드들에게도 통할지 의심스러웠다.

아이작은 토할 것 같은 속을 억누르며, 최대한 해골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이동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네임리스 카오스를 홍보하던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렸다.

[이곳은 거인과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

[당신은 이곳에서 무가치하고 의미 없게 죽게 될 것이다.]

2화. 살아남은 아이

흑발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불타오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빛의 법전'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성갑이 그가 상당히 높은 고위층 성기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전체가 불타고 일반인들이 학살당하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냉혹하게 입을 열었다.

"동쪽에 탈출로가 있소. 슬슬 그쪽으로 여자와 아이들이 도망치고 있을 테니 거기로 병사들을 보내시오."

그러자 곁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데스나이트가 잠시 멈칫하더니, 음색을 바꿨다. 바이올린을 켜는 소리가 화재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지자 해골 병사들 일부가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는 바이올린을 켜며 말했다.

"진작에 말하지 그랬나?"

"이 마을에 탈출로는 내가 아는 것만도 10개는 넘소. 확실하게 하려면 우리 움직임을 알지 못하게 해야지. 상황도 봐야 하고."

데스나이트는 남자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백제국 최전방을 지키던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단장 칼센 밀터는 데스나이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칼센 밀터.

백제국의 성기사들 사이에서는 칼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성기사였다. 죽은 뒤 천사의 반열에 오를 것은 당연했고, 어쩌면 신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는 '명천사의 위계'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결정했다.

그가 본색을 드러냈을 때 같은 기사단원들은 물론,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 불사교단조차도 믿기 힘들어했다.

그러자 칼센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모조리 가져다 바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흑제국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걸로 재앙의 씨앗이 될 그릇들은 모두 사라졌겠군."

데스나이트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공격한 마을은 백제국 안에서도 비밀스럽게 숨겨진 장소 중 하나였다. 이 마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배교 행위로 낙인이 찍힐 일인데, 결국 칼센에 의해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왜 이곳이 그렇게 숨겨지고 있는지는 칼센은 물론 교단 상층부조차 알지 못했다. 보호하는 것도 파괴하는 것도 그저 신들의 은밀한 명령에 의해 수행될 뿐.

"동쪽은 마무리되었네. 이제 슬슬 직접 둘러보는 것은 어떤가?"

데스나이트는 칼센을 향해 도발하듯 물었다.

칼센 덕분에 마을을 지키는 첨탑도, 방어벽도 모두 무력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배교가 이루어지는 동안 칼센이 직접 사람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함정에 빠뜨려 포로로 잡거나 해골 병사들로 하여금 죽이고, 마을을 공격할 때에도 벽과 첨탑을 무너뜨린 것이 전부였다.

데스나이트의 말은 이제 슬슬 직접 손에 피를 묻힐 때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칼센은 표정 없이 불타는 마을을 응시하다가 말을 움직였다. 훈련된 전마는 불꽃에도 아랑곳 않고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헉, 허억!"

아이작은 힘겹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딜 가나 해골 병사들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난이도가 정신 나간 게임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이작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였다. 연약한 네필림이 아니었더라도 지금 이 상황은 뚫고 나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게임에서는 HP가 바닥나기 전까지는 피 좀 흘렸다고 지치거나 어지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이 딛고 있는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발걸음을 딛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때 아이작은 해골 병사들의 움직임이 기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해골 병사들은 아이작을 공격하는 대신 구석진 곳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이작은 어느새 무너진 벽 귀퉁이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해골 병사들 사이로 누군가 나타났다.

아이작은 그를 보자마자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칼센 밀터.

대륙 8대 강자이자 백제국의 칼끝, 해골 분쇄기라고도 불리는 검의 성자.

오늘 이후 지난 100년 이래 최악의 배교자라고 불리게 되는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단장, 칼센 밀터가 눈앞에 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 세계관에서는 진영에 따라 최종보스급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해골 병사 하나도 버거운데 저걸 여기서?'

아이작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덕분에 지금이 무슨 시점인지 깨달았다.

네임리스 카오스의 보스인 '배교자 칼센 밀터'가 타락하는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거대한 중갑에 새파란 안광, 바이올린을 든 데스나이트가 곁에 있음에도 칼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아이작은 칼센을 본 순간 세계가 응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도망 못 가.'

게임 속에서 묘사된 분위기 그대로였다. 플레이어의 캐릭터들은 칼센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낮아지고 울렁이는 효과를 받는다. 칼센은 그만큼 강력한 존재감으로 아이작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데스나이트 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공기가 떨리면서 나오는 소리였다.

"애송이인데 뭐 어떤가? 자네가 데려가서 배교자 한 명을 더 늘리는 것도 괜찮겠군. 아직 어린아이니 우리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칼센은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잠깐. 칼센. 내 말 못 들었나? 애라니까. 죽일 필요 없어."

"저걸 죽이려고 여기까지 온 거요."

칼센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듯 중얼거렸다. 지금이 바로 그의 계획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신도들을 학살한 것이나 전우들을 배반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눈앞의 아이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칼센은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생각이었다.

칼센은 데스나이트를 지나쳐 성큼성큼 아이작을 향해 다가왔다.

아이작이 칼센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의 눈동자에선 어떤 감정이나 회의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는 칼센의 모습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냈지만 검날은 그대로 그의 가슴팍을 베어 내렸다.

가슴팍에서 선혈이 솟구쳐 나왔다.

'죽는다.'

아이작은 공허한 고독감을 느꼈다.

이 세계에서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이 세계에는 그를 기억해 줄 가족이나 친구, 지인도 없었다. 심지어 죽은 뒤 사후세계를 설명해 줄 종교마저 없었다. 그는 '이삭'이었을 때도 종교를 가져 본 적 없었지만,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조차 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자 아이작은 고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다못해 곁을 지켜 줄 존재라도 있었다면....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이 폭발했다.

선혈과 함께 폭발하듯 솟구쳐나온 것은 거대한 촉수 다발이었다.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에 칼을 갖다 댄 것처럼 거대한 촉수의 무리가 범람하며 터져 나왔다. 거대한 촉수는 단숨에 눈앞에 있던 칼센부터 단숨에 집어삼켰다.

칼센은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올렸으나, 이미 그때에는 그의 온몸이 조각조각 나서 씹혀 들어가고 있었다. 두개골이 두터운 어금니에 박살 나는 순간까지도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

데스나이트가 뭔가 이변을 알아차리고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움직임은 너무 늦었다.

촉수의 무리는 칼센으로 멈추지 않고 주변에 있던 해골 병사들 무리까지 휩쓸었다. 해골 병사들은 순식간에 뭉개지고 부서지며 파도에 휩쓸린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졌다. 뒤늦게 데스나이트가 말을 돌린 순간 붉은 촉수가 그의 위를 스쳐 지나갔다.

해골 말이 하반신만 남은 데스나이트를 달고 맹렬하게 뛰었다. 하반신은 덜그럭거리다 말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촉수는 사방을 휩쓸어 버린 뒤, 입안에 털어 넣은 것들을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콰드드드득. 콰득, 우득, 우드득.

철이건, 뼈건, 살점이건 상관없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분쇄되었다. 촉수는 이내 다 씹어 삼킨 듯 입맛을 다시더니 서서히 아이작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은 갑작스러운 정적에 휩싸였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아이작 한 명뿐이었다.

아이작은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가 겪은 일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칼센이 벤 흔적대로 흉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놀리듯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칼센 밀터(EX)'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신앙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파수자의 등대(EX)을 습득하였습니다.]

[오류. 캐릭터에 비해 포식 대상의 레벨이 과도하게 높아 소화가 지연됩니다.]

['혼돈의 대리인' 재사용 대기 시간 30일]

아이작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나 착각이길 바랐다.

"끄윽."

하지만 어째선지 먹은 것도 없는데 트림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맹렬한 졸음이 그를 기습해 왔다. 아이작은 가라앉는 눈꺼풀을 버티지 못해 이내 풀썩 쓰러졌다.

***

따각.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한 남자가 마을 폐허 앞에 도착했다. 그는 사색이 되어 다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타다남은 폐허와 그 위로 싸늘하게 가라앉은 이슬뿐이었다.

'빌어먹을.'

가장 먼저 도착한 남자, 게벨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서둘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큰 습격이었음에도 아직도 도착한 경비대나 성기사단은 없었다. 인근 수도원에 거주하는 게벨만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서 밤새 말을 달리고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지금쯤 영지의 경비대원들과 근방 성기사단도 죄다 몰려오고 있을 테지만, 그들이 보게 될 것은 시체와 폐허뿐이었다. 게벨은 지원이 이렇게나 늦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무능한 교단 사제 놈들!'

칼센 밀터의 배교 때문이었다.

교단은 칼센의 배교 조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성자이자 영웅이었던 칼센이 배교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신도들에게 큰 충격과 동요를 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머뭇거리는 사이, 칼센은 보란 듯이 백제국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마을을 침략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교단은 각지의 수도원과 성당, 성기사단에 알려 대응을 지시했지만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게벨이 걷는 길에는 온통 폐허뿐이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불사교단이 침략한 자리에는 살아있건 죽었건 시체가 남지 않으니까....'

둘 다 결국 언데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들을 찾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게벨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피 냄새와 함께 널브러진 잔해와 시신들이 보였다.

'시체가 남아 있다고?'

게벨은 당혹감을 느꼈다. 불사교단은 대개 뼈 한 조각도 아낌없이 살뜰하게 쓸어 간다. 뼈가 그들의 자원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신을 남기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황급히 도망가야만 할 때.

게벨은 주변 곳곳에 병장기와 시신, 그리고 불사교단의 해골 병사들의 잔해가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무슨...."

벽이며 땅이며, 마치 거대한 낫으로 긁어 놓은 것처럼 패여 있었다. 심지어 해골 병사들의 잔해 역시 이빨로 물어뜯은 것처럼 듬성듬성 잔해가 흩뿌려져 있었다. 대체 무엇이 이런 흔적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칼센? 아니면 천사라도 나타났던 건가?'

어쩌면 천사가 성지를 지키기 위해 현신했을지도 모른다. 게벨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주변을 황급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에 걸리는 것은 먼지투성이 돌조각과 차갑게 식은 시체들뿐이었다.

게벨은 어쩌면 천사가 보호가 아닌 응징을 위해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것은 시체뿐일 것이다.

후두두둑.

그때 게벨의 손끝에 걸린 돌무더기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게벨은 그 무더기 속에서 파묻혀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안색은 창백했다. 게벨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얼어붙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아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이마와 가슴팍에 상처가 있긴 했지만 오래된 흉터인 듯 아물어 있었다.

게벨은 본능적으로 이 아이가 살아남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고 불사교단의 갑작스러운 후퇴와 분명히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그러나 동시에, 게벨은 같은 이유로 아이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불사교단의 후퇴가 이 아이 때문이라면 교단은 이 아이를 또 다른 칼센으로 키울 것이다.'

게벨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아이를 숨기듯 얼굴을 가렸다.

그는 아이를 안아 든 채 멍하니 안개가 가득한 폐허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어떻게 안전하게 숨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몸을 의탁하고 있는 수도원이 떠올랐다.

수도원은 이미 많은 고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곳이라면 이 아이를 숨기기에 적합하리라.

3화. 포식 (1)

아이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푸른 볕이 들어오는 이른 새벽이었다. 수도원을 둘러싼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가 깨어 있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나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삭이었던 그가 '아이작'이 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불사교단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 수도원에 맡겨진 상태였다. 수도원장은 그를 구출했다고만 말할 뿐 더 자세한 것은 알려 주지 않았다.

무수한 추궁을 당하거나 질문 세례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작에게는 얼떨떨한 일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자세한 사정을 물어봤자 곤란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작에게 있어서도 그 사건은 최우선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지난 한 달간을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보냈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고,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아이작은 로그아웃을 시도하거나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한 달을 보내 왔다.

하지만 차차 의식이 선명해지면서 목적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오늘 그는 모든 기대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삭은 이제 아이작이다. 그는 이제 이 세계의 주민이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상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철저히 이곳의 주민으로 융화되어야 했다.

아이작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며 완력을 확인해 보았다. 조금 무거운 나뭇가지 하나도 쩔쩔매며 들어올려야 하는 근력.

나약하기 짝이 없는 네필림의 완력은, 어린 나이 탓에 더욱 약해져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아이작은 자신이 대여섯 살배기 수준의 아이와 비교할 수준이라고 보았다.

'제기랄, 게임 속에 들어와서 살 줄 알았으면 그따위로 능력치를 찍진 않았지.'

네필림이 안 좋은 종족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할 정도로 좋은 종족이다. 최악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높은 신앙, 그리고 매력 수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력, 운, 지능 같은 능력은 '숨겨진 능력치'로 불린다.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네필림은 신들과 관계가 안 좋은 대신, 인간의 호감을 사는 '매력' 수치가 특출하게 높았다. 자신이 직접 깎은 얼굴을 두고 이런 말 하기는 뭐 했지만, 이 세계관에서 아이작의 현재 외형은 열에 아홉은 넋 놓고 쳐다볼 만한 외모였다.

'그야 현실에 한국 온라인 게임형 미인을 던져놓았으니까... 내가 예시를 들어놓고도 어이가 없군.'

하지만 혈통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신과의 관계 대신, 인간의 호감이라도 사두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겉보기에는 그냥 선남선녀로 보일 뿐이니까. 아이작이 잘 숨기기만 한다면 문제가 될 여지는 없어 보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나약해 빠진 육신.

질병에도 취약하고 제대로 된 장비를 입기도 어렵다. 아이작은 이 현실적인, 아니, 중세 판타지 현실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일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분명 칼센을 흡수했을 때 신체 능력이 상승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설마 상승해서 이 수준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칼센의 레벨이 높아서 '소화가 지연'된다는 메시지도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지만 설명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사실 그때 얻었던 스킬도 미개방 상태였으니까.

[파수자의 등대(미개방)]

'파수자의 등대라니... 시작부터 말도 안 되는 걸 얻었군.'

아이작은 네임리스 카오스를 8번이나 클리어했다. 당연히 게임상에서 가장 거대한 신앙인 빛의 법전 신앙으로도 플레이해 보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대를 '천국'으로 바꾸는 궁극기였다. 그러나 등대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시전자가 원치 않는 위험한 천국의 생물들도 모여들 수 있었다.

그만큼 '빛의 법전' 성기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위급 궁극기다. 명천사로부터 인정받아야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할 만큼 말도 안 되는 능력인데, 그걸 아이작은 간단하게 냠냠쩝쩝해서 얻어 버린 것이다.

'다른 신앙인 내가 이걸 가질 수는 있는 건가?'

어쩌면 미개방 상태인 이유도 아이작이 다른 신앙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는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는 분수에 맞지 않는 스킬을 쓰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체력 고갈과 재난으로 이어지니까.

'칼센이 죽기 전에 이 스킬을 썼다면 죽은 것은 나였을지도 모르겠군.'

아이작은 오싹해졌다.

그는 자신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순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팍을 스다듬었다. 가슴팍에는 아직도 칼센이 베었던 흉터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무수한 촉수 다발이 범람하듯 넘쳐 나와 칼센 밀터와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을 휩쓸었던 장면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구역질 나기에 앞서 등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름 없는 혼돈... 의 권능이겠지. 아마도.'

아이작은 캐릭터를 만들 때 '이름 없는 혼돈'을 신앙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촉수는 이름 없는 혼돈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름 없는 혼돈은 다른 신앙 모두에게 적대시되는 신앙이다.

'이름 없는 혼돈은 과거에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백사병(白死病)을 일으킨 뒤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했던가....'

온몸이 하얗게 표백되다 재처럼 흩어져 버리는 병이라 하여 백사병이었다.

남부 사막지대에는 당시 멸망한 도시들이 아직도 시체들의 하얀 재에 뒤덮인 채 남아 있다고 했다. 그곳도 네임리스 카오스의 난이도 최상급 던전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원래 이름이 있던 혼돈 신은, 그를 아는 자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이름 없는 혼돈'이 되었다.

딱 여기까지가 아이작이 아는 바였다.

이후 문명 세계는 빛의 법전이 주도하는 백제국과 불사 교단이 주도하는 흑제국으로 양분되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에 많은 왕국이 몰락했고, 이후 모든 교단은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한 기록을 모조리 지워 버리거나 봉인해 버렸다.

특히나, 지금 아이작이 있는 '빛의 법전' 수도원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인 자신이 어떻게 비밀스런 성지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정체를 들키면 죽은 목숨이라는 것.

'목격자가 없어서 다행이군.'

성지에서 죽은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아이작의 목숨을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목격자들은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이다. 빛의 법전 사제들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은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흥미 삼아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을 선택하긴 했지만, 현대인인 그에게 그나마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신앙은 빛의 법전이었다. 어떻게든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산중의 원숭이나 움직이는 해골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온몸이 촉수로 이루어진 점액질 괴물만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작에게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식이 충분했다.

'여덟 신앙을 클리어한 짬밥이 있는데, 당연하지.'

네필림 특유의 빡센 초반부만 극복하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생존.

그것이 아이작의 최우선 목표였다.

***

아침 예배 시간이 다가오자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젊은 수도사가 들어와 아이들을 깨우고 예배실로 데려갔다. 아이작은 조용히 순종하며 시키는 대로 기도를 올리는 척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기도는커녕 살아남을 방법에 대해 맹렬히 생각 중이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수도원에서 아이작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루 종일 기도─노동─식사─수면 이 네 가지의 반복뿐이었다.

그가 생존자라고 해서 딱히 더 신경 써주거나 돌봐주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수도원 자체에 자원이 부족하고, 돌봐줄 인력도 부족했다.

'그나마 빛의 법전 교단의 수도원이라는 게 다행이군.'

'빛의 법전'은 아홉 신앙 중 가장 세력이 큰 교단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작의 기준에서 보편적인 사회 질서를 지키는 교단이기도 했다.

어떤 신앙을 고르더라도 결국 빛의 법전과는 좋든 싫든 엮이게 된다. 덕분에 아이작은 빛의 법전의 체계와 생리,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비밀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비록 이 수도원은 본단이 아닌 변방의 수도원 같지만, 그래도 이용할 정보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약 게임 속 세계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이 수도원 안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뭣보다 이 세계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상황을 기묘할 정도로 안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가 '아이작'으로서 14년 동안 살아온 기억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세계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지금 이 세계의 '현재' 시점은 네임리스 카오스의 스타팅 시점으로부터 대략 4년 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뒤 아홉 신앙 간의 전쟁이 시작되지.'

정확히는 '빛의 법전'과 '불사교단'이라는 두 개의 축을 두고 합종연횡하며 부딪치는 경쟁이 벌어진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신앙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혹은 배교하여 다른 신앙의 승리에 참여할 수도 있다.

'배교라....'

'이름 없는 혼돈'이 공적 내지는 악마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이작의 종족인 '네필림'은 어차피 저주받은 피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저주받은 피' 특성을 가진 네필림은 어떤 신들과도 사이가 안 좋다. 단지 천사와 인간의 혼혈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설정상 네필림들은 자신들의 혈통과 이어진 신앙이라면 신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기적을 훔쳐 쓸 수 있다.

네필림이라고 신앙심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무임 승차하는 놈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아예 다른 신을 섬기면서도 기적을 훔쳐 쓸 수 있으니.

덕분에 어느 신앙을 숭배하든 네필림을 환영하는 신앙은 없었다.

게다가 배교 페널티도 문제였다. 신들은 신도들이 제멋대로 옮겨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저주가 따라붙는데, 이 저주라는 게 잘못 붙으면 캐릭터를 지우고 재시작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러나 과연 아이작에게 재시작할 기회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결심했던 대로 이름 없는 혼돈을 소중히 아끼고 사랑하며 잘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 달 전 있었던 사건을 생각해보면 이름 없는 혼돈이 약한 신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들키면 사냥당하겠지만.

'주어진 시간은 4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아이작은 게임 내 거의 모든 비밀과 보물의 위치, 역사 등을 파악하고 있다. 그런 보물들이 정말 기억하던 위치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급적 빨리 회수하는 것이 안전하기도 하고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아이작의 몸뚱이가 연약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아이작은 앙상한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특별히 학대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수도원 자체가 가난하기도 하고, 수도사들 또한 청빈함을 앞세워 살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이 몸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어.'

적어도 길을 걷다가 객사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은 키워 놔야 했다.

***

네임리스 카오스는 게임을 클리어한 사람의 숫자도 전체 게이머 중 1%도 될까 말까 한 게임이다. 클리어하지는 못해도 플레이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됐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작은 그 어렵다는 클리어를 무려 여덟 번이나 각각 다른 신앙으로 해본 사람이다.

그런 영웅 중의 영웅이 빛의 법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빛의 법전에 있어 다시 없을 경사 중의 경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성지를 탈환하고 악의 괴수들에게 맞설지도 모르는 영웅은 식탁 앞에서 좌절하고 있었다.

'진짜 이게 식사인가?'

아이작은 하얀 죽그릇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매일 같이 나오는 멀건 죽과 껍질도 벗기지 않은 삶은 감자, 그리고 검은 빵 반 조각.

단순하고 슴슴한 수도원식 아침 식사였다.

아이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잽싸게 감자를 껍질째 베어 물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 입맛이 없니?"

수도사 한 명이 상냥하게 물었다. 아이작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을 열 순 없었다. 수도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이 충격받은 것은 식단이 형편없어서도, 입맛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전부 탄수화물뿐이잖아....'

밥투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심지어 이 식단은 그나마 늦가을이라서 꽤 풍족하게 나온 편이며, 밀죽 한 그릇에 감지덕지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게임에서는 한 끼도 안 먹어도 되겠지만 현실에서는 이딴 걸 먹고 살면 그냥 깡마른 수도사처럼 될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수도사들도 당연히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아이인데... 배가 고파?

아이인데... 단백질과 칼슘 섭취가 부족해?

아이인데... 성장기 필수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할 기회가 없어서 키와 근육 성장이 늦어?

'이런 사소한 데서부터 게임과 현실의 갭을 느낄 줄이야....'

안 그래도 아이작에게 지금 몸은 빼빼 마른 수수깡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 자랄 성장기 아이. 그런데 이런 빈곤하고 불균형한 식단만 섭취했다간 커서도 비리비리한 몸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일과가 끝난 뒤 아이작은 침실로 돌아갔다.

당연하지만 아이들에게 개인 공간 따위는 없었다. 수도원의 고아들은 전부 넓은 방 하나에 모여서 잠들었다. 바닥의 냉기를 피할 지푸라기 침대와 얇은 이불만이 유일한 개인 공간이었다.

아이작은 침실로 돌아간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통 오질 않았다. 잠자리가 불편해서도 아니고, 전생의 자아를 깨달아 버린 것 때문도 아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수도원의 환경은 현대인이었던 아이작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보인다면 참고 노력해서 버틸 수라도 있다. 그런데 수도원에 맡겨진 연고 없는 고아에게 미래? 게다가 이렇게 빈곤하고, 자기 계발할 시간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곳에서?

'지금이라도 수도원 밖으로 도망칠까?'

그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은 아직 어린 14살짜리 아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어른의 지식과 스킬이 있어도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도 아이작에게는 낯설디 낯선 중세 시대다. 길거리에서 객사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이작은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사실 그는 이미 오늘 하루 동안만 최소 8번은 기도를 올렸다.

물론 제대로 된 기도문을 읊은 것은 아니고 수도사가 기도를 올리는 동안 손을 모아쥐고 눈을 감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래도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도 잊고 빛의 법전을 향해 제법 간절하게 기원했다.

'저녁에는 제발 고기 좀 올려 달라고 했는데.'

모처럼 치즈 한 조각이 올라오긴 했다. 예상 못 한 성과기는 했지만, 이게 과연 기도를 들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성장기 어린이 몸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마저도 수도원 고양이 무르지크가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비비적거려 치즈 반을 쪼개서 나눠주었다.

아이작은 이 상황이 대단히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원래는 밍밍한 수프로도 만족하던 몸이었지만 이제는 전생에 즐겨 먹던 온갖 요리들만 떠올랐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빈약한 14살짜리 아이가 굶주린 채 잠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단백질을 보충하지? 콩이라도 심어야 하나?'

아이작이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수도사가 아이들을 확인하러 온 건가 싶어 아이작은 재빨리 몸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조그마한 실루엣이었다.

"무르지크."

수도원의 게으른 짬타이거... 아니, 고양이. 무르지크였다.

무르지크는 수도원에서 키우는 고양이였다. 키운다기보다 방치하는 것이었지만 그냥 제멋대로 들어와 사는 것을 쥐잡이용으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야옹."

"웬일로 일을 다 했네."

쥐잡이를 게을리한다고 혼이라도 난 건지, 무르지크는 입에 죽은 쥐 한 마리를 물고 있었다. 저녁때 준 치즈에 대한 은혜 갚음이라도 하는 거냐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썩 달가운 선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르지크는 칭찬이라도 기대하는 듯 침대로 다가와 쥐를 내려놓았다. 아이작은 대충 무르지크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고 쥐를 치우기 위해 꼬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따뜻한 것이 잡아 죽인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문득 아이작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고기긴 한데 말이지.'

물론 현대인으로서의 자아를 가진 아이작은 쥐를 먹을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뭐?"

예상치 못했던 소리에 아이작이 당황한 순간, 갑작스럽게 손바닥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

쥐가 물기라도 한 건가 싶어 아이작은 당황하며 손에 들고 있던 쥐를 내던졌다. 그러나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붉은 촉수가 튀어나와 쥐를 낚아챘다.

아니, 어디선가가 아니었다.

아이작의 손바닥에서였다.

"?!"

아이작의 살갗에서 기어 나온 가느다란 촉수들이 순식간에 쥐 사체를 집어삼켰다.

늦가을 밭에 떨어진 밀알을 먹고 통통해진 들쥐는 아이작의 손바닥보다 컸다. 하지만 그것이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와득, 와드득.

촉수는 들쥐를 포식한 뒤 다시 손바닥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살과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사라진 침실은 다시 금세 정적에 빠져들었다. 오직 아이작과 무르지크만이 얼어붙은 채 방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때 아이작에게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들쥐'를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저급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4화. 포식 (2)

'포식?'

들어본 적 있는 단어였다.

아이작은 캐릭터를 만들 때 보았던 설명이 떠올랐다.

[죽은 신의 내장: '포식'한 상대의 능력치 일부와 특성을 흡수합니다.]

이게 포식의 효과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촉수 무리가 칼센을 집어삼켰을 때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표시됐었다.

'그렇다면 내 몸에도 칼센의 능력치와 특성 일부가 흡수됐다는 건가?'

하지만 아이작은 이 점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르지크, 방금...."

아이작은 당황한 나머지 고양이에게 의견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르지크는 섭섭하게도 크게 하악질을 하더니 잽싸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누가 고양이 새끼 아니랄까 봐!'

"아이작?"

아이작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던 아이, 요르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가 혹시 전부 다 봤나 싶어서 기겁했다.

"아이작...? 뭐 먹고 있었어?"

"아, 아니. 무르지크가 들어와서 쥐를 잡아먹고 있었나 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다행히 요르한은 잠결에 들은 소리 때문에 깬 것 같았다. 요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금방 다시 잠에 들었다.

아이작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손에서 촉수가 나타났어? 쥐를 먹었어? 뭐가 상승해?'

아이작은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칼에 베인 순간 가슴팍에서 촉수들이 솟구쳐 나와 일대를 휩쓸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와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면 방 안의 아이들은 다 죽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거야?'

아이작은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가슴팍의 흉터와 달리 왼손에는 살갗을 가르고 튀어나왔던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꿈처럼.

하지만 꿈 깨라는 듯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혼돈의 손길]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초 능력. 부정형의 촉수를 불러들여 적을 물어뜯는다. 체력과 신앙에 비례하여 강해진다.]

"...."

각 신앙에는 기초 스킬들이 있다. 빛의 법전에는 빛과 불을 만드는 능력이 있고, 황금 우상에는 금전을 바쳐 조언을 얻는 능력이 있듯이, 촉수는 이름 없는 혼돈의 신앙이 가진 가장 기초적인 스킬이었다.

'그야 당연히... 있겠지만.'

아이작은 스킬이라는 것을 깨닫자 차라리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몸 안에 뭔지 모를 괴물이 들어있는 것보다는 게임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

쥐를 먹은 건 촉수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아이작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쓰며 침대에 누웠다.

***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잘 수 있었다. 14살짜리 아이의 몸은 수면 욕구에 정직했다. 심지어,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배도 적당히 불렀기 때문에 솔솔 잠들었다.

다음 날, 아이작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촉수 문제이기도 했고, 이 세상에 대한 것이기도 했으며, 가치관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계속 승리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연약한 몸뚱이.

신들로부터 외면받는 혈통.

들키면 척살당할 신앙의 신도.

틈만 나면 튀어나오는 촉수.

그중에서도 사실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신앙 그 자체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변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이런 퀘스트가 뜬다. 불길하고 음산한 지역, 수상한 분위기와 실종되는 사람들. 호러 영화 같은 연출이 시작되면 십중팔구 '그것'이 나타난다.

촉수 괴물들.

아이작의 몸에서 튀어나온 것과 같은 괴물들 말이다.

그런 존재들은 어떤 신앙을 골랐든 무조건적으로 퇴치해야 할 '특수 퀘스트'처럼 취급받았다.

'이건...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들키면 당장 매달려 화형당할 것이다.

아이작은 지금은 상냥한 수도사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고 불을 붙이거나, 돌팔매질하거나, 혹은 중세스러운 온갖 끔찍한 고문 도구에 던져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아이작이 오한에 떨거나 말거나, 이름 없는 혼돈은 그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난제가 많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틀어박혀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아이작은 역시 동굴 속에 숨어 야만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 게임의 공략자였다. 추한 모습으로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부터 하고 싶진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승리의 조건'이었다.

무엇이 승리 조건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아남아야 했다.

'일단 나가서 객사라도 면하려면 몸부터 만들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창고에 가서 고기를 훔쳐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훔쳐먹을 고기나 있으면 다행이고.

"꼬맹이, 어디 아프냐?"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작은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은 자신이 밭일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감자를 캐던 손이 엉뚱한 곳을 파헤치고 있었다는 것도.

고개를 돌리자 다른 수도사들과는 다른 덥수룩한 수염에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기억을 뒤져 그가 누군지 금방 떠올렸다.

게벨.

수도사도 아닌데 어째선지 수도원에 빌붙어 살고 있는 남자였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수도원에서 험한 일과 사냥 등을 하며 식객으로 지내는 모양이었다. 탈영병이라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아이작을 자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곤 했다. 덕분에 아이작도 은근히 경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걸자 긴장했다.

'응?'

그때 아이작은 게벨의 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확실했다. 게벨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성기사단 복식의 벨트였다. 넝마나 다름없는 꼴이었지만 성기사의 것임은 틀림없었다.

'진짜 탈영병인가? 아니, 성기사 탈영병이라고?'

아이작의 기억만 뒤져 봐도 성기사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직업이다. 그만큼 요구되는 것도 많지만 저렇게 거렁뱅이 꼴로 다닐 지위는 아니다. 훔친 물건이라면 보란 듯 드러내고 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다.

아마도 이미 전역했거나 잠시 수도원에 몸을 의탁 중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니, 잠깐. 성기사? 성기사라.'

아이작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그때 그의 생각을 끊듯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 때리는 걸 보니 수도사님께 게으름 부린다고 일러바쳐야겠군."

게벨이 짓궂은 투로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일단 다급히 얼버무렸다.

"별일 없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말투가 괴상한 꼬마군. 그런데 쪼그려있지 마라. 걷어찰 뻔했다."

게벨은 코웃음 치며 아이작 곁을 지나갔다. 그때 아이작의 코에 익숙한 비린내가 스쳤다.

아이작은 게벨이 가진 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혹시 쥐인가요?"

"응? 어떻게 알았냐? 쥐가 극성이라 요 며칠 동안 덫을 놓고 잡았다. 겨울날 식량을 다 축내버리면 곤란하니까."

게벨은 짓궂게 웃더니 아이작에게 쥐 사체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덜컥 내려놓았다. 겁주려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아이작은 소리 지르며 도망치는 대신 물끄러미 그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것은 게벨이었다.

"좀 아깝긴 하군. 가을 쥐가 살이 통통하게 올라 구워 먹기 딱 적당한데...."

"쥐도 먹을 수 있나요?"

아이작이 눈을 번뜩이며 물어보자 게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빛의 법전에서는 쥐가 병을 옮기는 어둠의 생물이라면서 먹는 것을 금지한다. 뭐, 그래봤자 전장에서 가릴 처지겠느냐마는. 하지만 수도사들은 신경을 쓰겠지."

위생적인 이유보다는 율법적인 이유란 말이지. 어차피 아이작은 율법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세균은 좀 신경 쓰이지만, 어차피 입으로 먹는 게 아니라 다른 수단을 쓴다면....

아이작은 게벨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치워도 될까요?"

"치워?"

게벨은 묘한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똑같다. 나서서 일하겠다고 하니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게벨의 시선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흠... 뭐, 상관없으려나. 이미 구덩이는 파뒀으니까 묻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면 애들도 할 수 있겠지."

게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쥐 사체로 장난치거나 할 생각은 아니겠지? 수도원 어디서 쥐 사체로 장난질했다는 이야기 들리면 두들겨 맞을 줄 알아라."

"그럴 일 없습니다."

게벨은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알렉 형제님께는 내가 말해두마. 구멍은 저쪽으로 가면 있다. 묻기 전에 사체에 양잿물 뿌리는 거 잊지 말고."

게벨은 내려놓은 바구니를 그대로 두고 돌아갔다.

아이작은 이 짧은 대화에서 게벨의 신분을 확신했다.

'성기사가 맞군. 지위도 꽤 높았던 것 같은데....'

지금 이 세계에서 주변 사람들이 굶주릴 정도로 '전장'이라고 할만한 곳은 성지 인근의 불사교단과 맞붙은 경계선뿐이다.

성기사일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자 다른 수도사들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그저 잡역부라기에는 미묘할 정도로 눈치를 보고, 일부러 말을 걸지 않는 등의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다. 너무 고고하셔서 말을 걸지 않는 건가 했는데 성기사 출신이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이것을 일단 기억해 두고 나중에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아이작은 쥐 사체가 가득 든 바구니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게벨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져갔다. 그의 말대로 꽤 깊게 파인 구멍이 있었다. 여기에 쥐 사체를 쏟아 넣고 양잿물을 쏟은 뒤 흙으로 파묻으면 끝이다.

아이작은 우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숨어서 지켜볼 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몸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 고민에 빠졌다.

'정말 이걸 먹어도 되나?'

안될 거 있나? 역사적으로도 쥐 고기를 먹은 일은 많이 있다. 프랑스에는 쥐 고기로 만든 메뉴와 레시피도 있었다.

과연 촉수가 또 나타날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그때 일은 지극히 우연일 뿐, 또 그런 일이 일어나란 법은 없으니까.

물론 촉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몰래 쥐를 먹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바닥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손에 든 쥐를 낼름 집어삼켰다.

우드득, 와득.

['들쥐'를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저급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아이작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촉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무섭다기보다는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먹어라. 먹어. 다 먹어라."

아이작은 반쯤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녀석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가난한 수도원에서 단백질을 보충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부디 게벨이 이 구덩이를 다시 파보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

아이작은 게벨, 아니 정확히는 성기사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신이 분명히 실존하고, 자신의 신도들에게 힘을 나누어 준다. 세계를 지배하는 정점도, 권력도 모두 신에게서 나온다.

수도사들은 촛불을 밝히는 기적부터 물을 뜨겁게 데우는 기적까지, 크든 작든 기적을 일상적으로 행했다. 물론 일상의 편리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행을 위해서였지만, 책에는 이보다 더 큰 기적도 당연하다는 듯 기록되어 있었다.

태양을 멈춰서 일주일 동안 적의 도시를 불태우거나, 불경을 행한 이단자들의 눈을 멀게 만든다든가, 빛으로 이루어진 신의 사도를 불러내 전언을 듣는다든가.

당연히 사제와 성기사들의 힘이 막강할 수밖에 없다.

'둘 다 네임리스 카오스 세계의 1티어 직업이지.'

사제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아이작의 낮은 체력이 걸린다. 하지만 성기사에게는 많은 생존기가 있었다. 리트라이도 불가능한 하나뿐인 목숨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작에게는 그 생존기가 강하게 끌렸다.

게다가 네필림의 높은 신앙 능력이라면 성기사도 사제 못지않은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가 빛의 법전 수도원이라는 건데....'

촉수.

이놈의 촉수가 문제였다.

5화. 포식 (3)

촉수의 존재를 들키면 죽는데, 쓸모 있고 없고는 둘째 문제다.

아이작은 지금이라도 빛의 법전의 눈을 피해 도망쳐야 하나 생각했다. 모처럼 주어진 두 번째 삶이 고작 화형대 위의 잿더미 엔딩으로 끝나는 꼴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불사교단조차도 이름 없는 혼돈을 쫓는다고!'

아이작은 한참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냥 잘 숨기는 수밖에 없겠군.'

어느 교단으로 가도 들키면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빛의 법전은 포용력이 넓은 덕분에 규모가 크고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정체를 숨기기 쉬운 것이다

성기사도 신앙심을 증명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수도사만큼 까다롭지는 않다. 수도사처럼 골방 속에 틀어박혀 주구장창 공부만 하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단련을 더 중요시했다.

'기적을 부여받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교단의 권위 정도는 이용할 수 있을지도....'

뿐만 아니라 먼 곳에 있는 이교도의 영토를 침공하면 그 땅의 영주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교단에 헌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결국 교단이 그 먼 곳을 무슨 수로 통치하겠는가. 교단에게는 명예만 안기고 실권은 자신이 갖는 것이다.

물론 수도원을 세우거나 적당한 액수를 지불해야겠지만.

일단 성기사가 되기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은 다음,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 보자. 도주는 들킨 다음에 해도 된다.

아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성기사가 되어야만 했다.

나무는 숲속에 숨기라고 했다.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성기사 중의 성기사가 된다면 누구도 자신을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성물을 찾아내고, 성지를 되찾고, 불사교단까지 아예 박살을 내버리자.

그러면 아무도 자신을 이름 없는 혼돈의 촉수 괴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은 자신이 가진 모든 특전과 재능, 정보들을 총동원해서 성기사가 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결국 이 촉수가 자신의 인생을 꼬아 놓을 거라면 차라리 빛의 법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쪽이 안전하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싸워야 하니 잘 단련해야겠지만... 그건 아직 어리니까 충분히 시간 있어.'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가 빛의 법전 교단 안에서 성기사가 된다.

아이작은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쥐 사냥을 돕겠다고?"

"예."

아이작은 어차피 마음먹은 이상, 꾸준하게 단백질 섭취를 보조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수도사들은 감자 한 개로도 만족하고 살지만 아이작은 아니었다.

'촉수로 맛을 느끼지는 못해도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좋은 기회다.'

아이작의 몸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왜소하지는 않았다. 즉 토양이 나쁜 것은 아니다. 충분한 영양만 섭취할 수 있다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포식한 대상은 모두 아이작에게 천천히 '소화─흡수'된다. 며칠간 화장실에서 변을 보면서 확인해 봤지만 털이나 이빨, 발톱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완전 흡수한 것 같았다. 덕분에 혈색은 몰라볼 정도로 좋아지고 더 이상 허기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꼬맹이 손을 빌릴 정도로 바쁘진 않은데. 쥐잡이가 재밌어 보이냐?"

"쥐잡이 말고도 시간 되는대로 다른 일도 도울게요."

게벨이 수도원에서 도맡고 있는 일들은 상당히 많다. 수도사들이 워낙에 생활력이 없기 때문에 어지간한 잡무는 게벨이 처리하고 있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일손을 부탁할까 했는데 때마침 아이작이 딱 맞춰 찾아온 것이다.

"꼬맹이 데리고 다니려면 수도사님 허락이 필요하다. 말씀은 드렸냐?"

"알렉 수도사님께 말씀드렸어요."

어차피 텃밭에서 일을 하는 것도 실제로 크게 도움이 된다기보다 아이들에게 '노동' 그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다. 오히려 게벨이 하는 일은 험하고 궂은 일이 많아 아이들이 기피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건강과 실력, 모두를 챙길 수 있는 방법은 게벨을 따라다니는 것뿐이다.'

아이작의 눈이 욕심으로 번쩍거렸다.

쥐잡이도 쥐잡이지만, 게벨은 성기사다.

성기사는 단순히 축복뿐만 아니라 검술 실력만으로도 일반병 열쯤은 상대할 수 있어야 정식 성기사로 취급해 주었다.

'더군다나 전장까지 경험한 실전경험 풍부한 노장? 이걸 놓치면 머저리지.'

단순히 짬으로만 생각해도 평범한 성기사를 넘어 지휘하는 단계, 가르치는 단계까지 올라갔을 가능성도 풍부했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인연을 쌓는다면 성기사가 되는 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벨은 크게 코웃음 치고는 쏘아붙였다.

"방해되면 엉덩이 맞을 줄 알아라. 알겠어?"

"네!"

아이작은 그날부터 게벨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

쥐 사냥이라고는 해도 정확히 따지자면 덫에 잡힌 쥐들을 수거하거나, 어디선가 게벨이 수북하게 잡아 온 쥐들을 땅에 묻는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쥐들을 촉수에게 먹이는 것이었지만.

고된 일도 많이 했지만, 텃밭에서 일하거나 하나 마나한 잡무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히려 아이작에게는 텃밭 일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뭣보다 하루하루 근육이 붙는 느낌과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감각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

게벨은 그런 아이작의 모습을 꾸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게벨은 사실 아이작을 수도원에 데려온 이후 쭉 관찰해 왔다. 한 달간의 평가는 '예쁘장하지만 말이 없고 조용한 소년'이 전부였다.

'마을 주민들이 전부 살해당했는데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 하지만 칼센도, 불사교단의 족속들도 모조리 쫓기듯이 사라져서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

아이작이 살아남은 것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게벨이 아이작에게 품은 인상은 그냥 운 좋은 생존자, 그뿐이었다. 만약 뭔가 더 있었으면 했던 게벨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사이, 아이작의 태도가 뭔가 달라졌다.

'꽤 하는... 아니, 잘하잖아?'

지금까지는 단순히 상황 파악이었을 뿐이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게벨은 아이작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나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려고 했는데, 놀랄 만큼 잘 해내고 있었다.

이때까지 그의 일을 돕겠다고 나선 아이들은 많았다.

공부하기 싫어서, 밭일이 힘들어서 등등.

하지만 게벨이 하는 일은 밭일보다 더럽고 고된 일이 많다. 그러면서 눈에 띄지는 않으니 인정받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작은 매일 공부까지 빼먹지 않고 게벨의 뒤를 따라다녔다.

14살인데도 글자를 읽고 수 계산도 할 줄 안다면 머리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나중에 더 편한 일이나 공부에 집중할 수도 있는데, 아이작은 남는 시간을 모두 게벨을 돕는 데 쏟고 있었다. 덕분에 게벨은 어느새 부담을 꽤 덜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아이작이 게벨로부터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단순한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원리와 이유를 알려 했다. 게벨로서는 귀찮을 법도 했지만 한 번만 가르쳐도 나머지를 다 알아들을 정도였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다.

나무를 패는 법, 쥐덫을 놓는 법, 짐승을 쫓는 법, 말 편자 관리, 약초 구분 등등 아이작은 한 번만 봐도 쑥쑥 익히고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칼센에게서 살아남은 생존자'에 어울리는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과 재주를 가진 아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게벨은 아이작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그는 이제 아이작을 조수처럼 부리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편, 다른 아이들은 따로 놀기 시작한 아이작을 불편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갑자기 아이들 사이에 들어와서 겉돌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은커녕, 어른들하고만 어울리고 아이들은 아예 무시하다시피 했다. 수도사들은 의젓한 아이작을 좋아하니 자연스레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애초에 아이작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의 평판에 관심이 없었다.

당장 생존을 위해 모든 것에 매달려도 모자란 상황이다. 그 와중에 애들의 눈치까지 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오직 자신만을 위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촉수에 대한 공부였다.

'이 빌어먹을 것이 멋대로 튀어나오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 써먹을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해.'

그간 아이작이 촉수에 대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소화'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다 소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거의 며칠 동안 배도 고프지 않고 '포식'을 통해 얻은 능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작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억지로 밥을 먹어야 하는, 다소 고역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이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 아이작은 포식 대상에게서 흡수한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뭘 먹어도 체내에 상당히 높은 효율로 흡수된다.

당장 체감하기 어려운 효과기는 했지만, 이 시대에 사람들은 부족한 영양과 사소한 원인으로도 픽픽 죽었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한 특전이었다.

둘, '촉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에게 호의적이다.

몸속에서 피부를 가르고 튀어나오는 촉수가 호의적이라니 이상했지만, 실제로 촉수들은 아이작에게 친절했다. 그가 무의식중에 멀리 떨어진 물컵을 집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 촉수가 튀어나와 물컵을 잡아 가져다주기도 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기에 다행이지, 아이작에게는 심장이 떨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촉수를 '포식'할 때 외에도 꺼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스킬처럼 되어있었지만, 사실상 또 하나의 팔이나 다름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잘 써먹을 수 있지?'

단순히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다.

이름 없는 혼돈은 빛의 법전은 물론 불사교단에서조차 적대하는 존재다. 아이작은 언제고 정체가 들통난다면 홀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결국 믿을 구석은 자신뿐이다. 그리고 이 촉수는 미우나 고우나, 결국 자신과 운명공동체였다.

알렉 수도사는 '이름 없는 혼돈'이 아직도 지평선 너머에서 이 세상에 침입하기 위해 촉수를 넘실거린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촉수가 넘실거리면서 쥐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래도 이놈이 없으면 나는 감자나 씹고 있어야 했을 테니.'

우득, 우드득.

아이작은 텅 빈 구덩이 앞에서 촉수가 쥐를 삼키는 모습을 보았다. 촉수는 어쩐지 이전보다 더 굵고 가닥수도 늘어난 것 같았다. 아이작이 건강해지면서 촉수도 강해졌다.

'우선 이걸 제대로 통제하는 법부터 배워야 해.'

촉수가 사라지길 원하자 촉수는 재빨리 피부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지길 바랄 때 제때 사라지는 것은 다행이지만, 나타나는 순간은 통제하기 힘들었다.

'주로 나를 돕고 싶을 때, 혹은 도움이 될 것 같을 때, 아니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이작은 문득 촉수가 보기보다 멍청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조건을 다 달성할 때마다 촉수가 튀어나왔다면 아이작은 이미 진작에 들켜서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 말은 촉수도 나름 눈치가 있다는 뜻이다.

나름의 자의식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당분간은 촉수의 눈치를 믿으면서 통제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겠군.'

***

쥐 한 마리가 쥐덫 미끼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녀석은 미끼에 흥미가 있는 듯 냄새를 맡으며 서성였지만, 망설이다가 이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이미 주변에 동족이 죽은 냄새가 가득했던 것이다.

달칵.

순간 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간 바람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몸이 꿰뚫렸다.

콰드득.

촉수에 꿰뚫린 쥐는 바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아이작은 쥐를 씹어 삼키는 촉수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확실히 전보다 굵고 길어졌군.'

단백질을 섭취하면 할수록 아이작의 몸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촉수도 더 굵고 길어지고 있었다. 다만 아이작의 몸은 체질적으로 쉽게 건강해지지 않는 반면, 촉수는 빠르게 더 굵고 길어지고 있었다.

'이건 신앙 능력과 연관이 있을지도.'

촉수도 엄연히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이 부여한 권능이다. 레벨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것도 네필림 특유의 높은 신앙 수치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지금처럼 무기가 없을 때 써먹기 좋아 보였다.

아이작은 쥐를 먹어 치우면서 덫을 살펴보았다.

게벨은 쥐들이 다닐만한 길목에 미끼를 설치하고 먹는 순간 조이는 올가미 덫, 그리고 큰 통에 기름을 발라두고 안에 미끼를 두는 덫을 즐겨 사용했다.

무난한 덫이었다. 이미 통 안에는 서너 마리의 쥐들이 잡혀서 역청에 잠겨 있었다.

'이전보다 수가 많이 줄었어.'

지금까지는 성과가 제법 좋았지만 이제 슬슬 약빨이 떨어지고 있었다.

쥐의 수 자체가 많이 줄기도 했지만, 영악한 쥐 떼들이 덫을 피해 가는 법을 알아내기 시작한 탓이다. 쥐가 덜 잡힌다는 것은 단백질 공급량이 줄어든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쥐덫의 상태를 좀 살펴봐야겠군.'

아이작은 덫을 관찰하다가 살짝 손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화. 더 큰 먹이 (1)

며칠 뒤, 게벨은 오랜만에 쥐덫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통 안에 쥐들이 열 마리나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 며칠 동안 게벨은 잡히는 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쥐들끼리는 학습 능력이 빠르기 때문에 어떤 게 미끼고 덫인지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아이작이 통을 비우는 것을 게을리해서 쥐가 가득 찬 건가?'

게벨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덫의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막 뭐가 달라진 건가 살펴보던 중, 때마침 아이작이 창고로 걸어들어왔다.

"아, 오셨어요? 와, 어제 비웠는데 또 금방 이렇게 찼네요."

"어제 비웠다고?"

"예. 자기들끼리 두면 금방 잡아먹으니까 자주 비워주고 있어요."

게벨은 어떻게 그렇게 쥐가 많이 잡히는지 알 수 없었다. 쥐덫은 아주 작은 부분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게벨은 통 중앙을 가로지르는 봉과 가운데 묶여있는 시큼한 냄새의 곡물 덩어리를 보고 물었다.

"이건 네가 설치한 거냐?"

"아, 네. 약간 손보면 더 잘 잡힐 거 같아서요."

아이작이 손 본 부분은 간단했다. 그냥 기름 바른 통에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봉을 설치한 것이다. 게벨이 그 봉을 건드리자 느슨하게 설치된 봉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이작이 설명을 이어갔다.

"간단한 거예요. 이때까지 쥐들은 먹이를 얻으려면 통 안에 뛰어들어서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바닥에 먹이가 떨어지면 더 이상 쥐가 꼬이지도 않았죠."

"그런데 이 느슨한 봉에 먹이가 붙어있으면 달려들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이거군. 먹이가 떨어질 일도 없고 위기에 처한 쥐도 안 보이니 다른 쥐도 쉽게 꼬이고."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쥐는 치즈나 고기 같은 것보다 곡류를 더 좋아했다. 특히 약간 시큼하게 맛이 가는 듯한 향이 풍기면 환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덕분에 덫을 만들기는 쉬웠다.

"허."

게벨은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이작은 무표정하던 그가 웃자 약간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법이군."

짧은 칭찬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게 게벨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벨은 정말 놀라고 있었다.

아이작의 발상은 간단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작의 태도였다. 이미 열심히 하고 있는 14살짜리 아이가 단순히 일을 돕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

그것은 게벨이 아이작에 대한 평가를 또 한 단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이런 기특한 일을 해냈으니 맨입으로 넘어가긴 뭐하겠군. 선물을 주마."

그때 게벨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작은 자기 좋자고 한 일이었기에 게벨의 제안에 놀랐다. 그는 겸손하게 제안을 거절하려다가 이게 또 한 번 점수를 딸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혹시 양초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초?"

"예. 방에서도 쓸 수 있는 초가 있으면 좋겠어요. 예배당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해요."

초에 불을 붙이는 기적은 수도사들에게 식은 죽 먹기지만 그 불을 붙일 초는 값이 비싸다. 때문에 방 중앙에 밝히는 등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직도 이것저것 읽으면서 알아봐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개인 초가 있다면 책을 읽을 시간이 좀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게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초는 안된다. 화재 위험도 있어서, 알렉 수도사님이 관리하는 등불 외에는 안될 것 같군."

아이작은 약간 실망한 척했지만 정말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은 게벨에게 마음의 빚을 얹어 놓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게벨은 그냥 넘길 생각은 없는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대신 이걸 주마."

아이작의 눈이 반짝였다.

게벨이 꺼내 든 것은 금속으로 된 태양 형태의 목걸이였다. 질긴 끈에 투박하게 묶여 있었지만 평범한 물건이 아닌 듯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도원장님이 직접 기적을 새겨주신 광휘석(光輝石) 목걸이다. 문지르면 빛을 발하다가 서서히 잦아들지. 세게 충격을 주면 빛이 더 커지지만, 더 빨리 사그라든다. 기적의 수명도 줄어들고."

아이작은 목걸이를 들여다보자 눈가가 간질거리면서 무언가 나타났다.

「광휘석(희귀)」

「빛의 법전의 기적이 서린 광석. 흡수하는 충격량에 따라 빛을 발한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보았던 상태창과 똑같았다. 일반적인 물건에는 이런 창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희귀 등급 이상에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기적이 서린 물건이라니.'

화재 위험이나 툭하면 꺼질 수도 있는 초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보물이었다. 시중에 판다면 일반 가정 한 달 치 생활비는 받을 만한 물건.

아이작은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과한 포상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호의는 고맙게 받아들이겠지만, 과한 호의는 경계하는 것이 맞다.

"너무 큰 선물이라...."

"어차피 수명 다 되어 가는 물건이라 상관없다. 한 반년 정도 남았겠지. 나는 수도원장님한테 또 받으면 되고."

게벨 역시 그냥 주는 선물은 아니었다. 이미 아이작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상태에서, 그가 책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려던 물건이었다. 이번 일로 적절한 계기가 생겼을 뿐이다.

아이작은 과하게 부담스러운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고맙게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

'이거 괜찮군.'

아이작은 게벨로부터 받은 광휘석을 시험해 보며 생각했다. 아이작이 광휘석을 문지르자 딱 적당한 수준의 빛을 냈고, 두드리자 점점 더 강한 빛을 냈다.

'세게 때리면 거의 섬광탄 수준으로 빛나겠는데.'

물론 그렇게 하면 광휘석의 수명이 빠르게 줄어들 테니, 그럴 생각은 없었다.

뜻밖의 선물 때문에 아이작은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초를 받았다면 기꺼이 밤새도록 켜놨을 테지만 이건 지나치게 가치 있는 물건이라 도둑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맘때 아이들이란 자고로 기본적으로 거짓말쟁이에 도둑놈, 준비된 폭행범이다. 특히 부족한 것이 많은 고아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체재가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되겠어.'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기에는 아이작의 일이 너무 많았다.

쥐를 잡는 것이 한결 더 쉬워졌음에도 게벨의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겨울을 코앞에 두고 있기도 했고, 쥐잡이 때문에 손대지 못하고 있던 잡무들까지 손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패거나 길을 닦고, 변소를 치우거나 마을에서 온 겨울나기 비축 물품들을 창고로 옮기는 일 따위였다. 눈에 띄지 않는 일이지만, 게벨은 수도원에서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게벨이 없으면 이 생활력 없는 수도사들은 한 달도 안 되어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거 같은데.'

하지만 게벨은 임금조차 받지 않고 묵묵히 수도사들이 수행에만 힘쓸 수 있도록 보조하고 있었다.

'왜지?'

아이들 사이에서는 게벨이 탈영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긴 했지만, 아이작은 그가 성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전쟁까지 참여한 그의 경력이라면 어딜 가도 크게 대우받을 것이 분명하다.

'일종의 속죄 행보인가?'

아이작은 그것도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전장에 두고 온 동료들을 위해 칼을 내려놓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가 다시 검을 쥐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 수 있으려나....'

***

아이작은 창고 귀퉁이에서 쥐가 후다닥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왼손이 튕겨 나가듯 반응했다.

정확히는, 촉수가 반응했다.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단숨에 쥐를 꿰뚫었다.

'이젠 익숙해졌군.'

우득, 우드득. 아이작은 쥐를 집어삼키는 촉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놈도... 확실히 좀 더 빠르고 영악해졌어.'

길이도 굵기도 확실히 늘어났다. 이때까지 촉수가 나오는 길이는 길어 봐야 손끝에서 팔꿈치 정도까지의 길이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2m 가까이 늘어나 단숨에 쥐의 목을 찔렀다. 심지어 동선을 예측해서 최적의 경로로.

변화는 아이작에게도 생기고 있었다. 쥐를 본 순간 한 번도 쥐를 직접 잡은 적 없는데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촉수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다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양 섭취를 충분히 한 덕분인가?'

아이작은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아이작은 시험 삼아 촉수를 뽑아 보았다. 손목과 손바닥 사이에서 얇은 균열을 비집고 나오는 붉은 촉수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에서 넘실거렸다. 아이작은 이 촉수들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가락처럼 쓸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포상 덕분인지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촉수를 통제하는 움직임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여전히 촉수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자아는 분명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슬슬 쥐 말고도 다른 걸 조금 먹으면 좋겠는데.'

쥐가 질려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맛을 느낄 수도 없으니. 그보다는 쥐를 먹었을 때 이런저런 특전을 획득했으니, 다른 동물에게도 그런 특전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이 '더 큰 먹이'를 찾길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이작은 자신이 생각하기 무섭게 내려오는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건가?'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그동안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 온갖 욕설과 모욕들을 퍼부었던 것을 떠올렸다.

'별말은 없는 걸 보니 그릇이 크거나 애초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 가난한 수도원에서 더 큰 먹이라고 해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마구간의 늙은 당나귀와 무르지크, 그리고 수도사 정도일까.

물론 아이작은 그들 중 누구 하나 건드릴 생각 없었다. 설령 시체라 해도.

하지만 기회는 아이작의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아이작은 이 세계도 본질적으로는 원래 살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 요르한. 너 따라와."

노동 시간.

예배와 법전을 공부하는 시간만큼이나 귀하게 여겨지는 시간이지만, 유일하게 수도사들의 감시가 느슨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작의 옆에서 감자를 캐던 요르한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주춤주춤 일어나 따라갔다.

아이작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이었다.

아이작은 요르한을 끌고 가는 놈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16살인 한스는 수도원 고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놈이었다. 녀석은 주변 눈치를 살피듯 둘러보다가 아이작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아이작을 보자마자 흠칫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은 아이작에게 꽤나 이상하게 보였다. 이 나이대 남자애들에게 체격과 나이는 계급이나 다름없다. 아이작은 남자답다기보다는 예쁘장한 외모였고, 체구도 또래에 비해 왜소한 편이었다.

물론 애들이 협박한다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어른인 아이작이 굴복할 리가 없다. 그렇다 해도 먼저 저렇게 꼬리를 마는 것은 이상했다. 특히 이런 고아원에서라면.

요르한과 한스 일행은 수도원 뒤쪽으로 사라졌다. 아이작은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침대 옆자리에서 자는 요르한은 아이작과 그나마 조금이라도 대화를 해본 유일한 아이였다. 수도사들에게 이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어른보다 또래의 폭력이니까.

아이작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7화. 더 큰 먹이 (2)

"야, 내 말 못 들었어? 주방에서 말린 고기들 가져오라고 했잖아."

"수, 수도사님이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창문을 넘든가 싹싹 빌면서 얻어 오든가 했어야 할 거 아냐, 이 멍청한 새끼야."

퍽, 퍽.

구타가 이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지금 이 폭력을 말려 봤자 또 다른 희생자를 찾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부족한 물자와 폐쇄적인 환경이 아이들의 폭력성을 부추기고 있었다.

사실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뒈질래? 뒈지고 싶어? 어?"

퍽, 빡! 한스의 폭행이 점점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정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은 한스의 태도에서 약간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녀석은 어딘가 초조해하고 있었다.

"확 죽여버리...."

결국 주저앉은 요르한을 향해 한스가 발길질을 하려던 순간,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을 가로막은 것도 아니고, 단지 모퉁이에서 몸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스 일행의 시선이 확 쏠렸다.

"...뭐야!"

한스는 당황하다가 머뭇거리며 소리쳤다. 아이작은 표정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스는 뭔가 욱하는 듯 뭐라고 외치려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스와 함께 다니는 패거리들은 왜 그러냐며 당황하다가 결국 한스 뒤를 따라갔다. 아이작은 녀석의 태도를 보고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 수치 때문인가?'

매력이라고 말하면 유혹하는 듯한 어감이 있지만 실제로는 유혹, 신뢰, 존경, 호의, 존재감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아이작은 결국 매력 수치란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높은 매력을 가진 사람이 유혹하면 더 쉽게 넘어가고, 협박을 하면 더 무서워하고, 거짓말을 하면 잘 속아 넘어간다. 특히 어린아이들처럼 본능이 이성보다 강한 경우엔 유달리 매력 수치가 강한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서워하지?'

아이들, 특히 한스는 명백히 겁을 먹은 눈치였다.

아이작은 한 번도 협박이나 겁을 준 적 없었다. 물론 그럴 의도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러나 네필림 특유의 높은 매력 수치는 아이작에게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아이들의 죄악감과 두려움을 자극했다.

덕분에 한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었다.

'여튼 녀석도 운이 좋군. 아니면 감이 좋든가.'

아이작은 손 아래 숨기고 있던 호미를 만지작거렸다. 애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저 커다란 덩치로 덤벼들면 가만히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 아이작."

요르한이 급히 다가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가, 가끔 감자나 가져오라고 하긴 했는데 얼마 전부터 자꾸 훔쳐 오라고 하는 양이 많아져서. 수도사님도 엄하게 지키기 시작하셨고...."

요르한이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아이작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요르한이 훔쳐 온 음식의 양은 명백히 한스와 그 일행이 먹을 양보다 많았다.

'놈들도 촉수를 먹여 살리는 건 아닐 테고, 그걸 다 어디 쓰는 거지?'

***

문제의 답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날 저녁, 한스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밤늦은 시간에 조용히 네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아이작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맨발로 수도원 벽을 따라 나갔다. 녀석들은 미리 따놓은 듯한 뒷문을 열고 아직 캄캄한 숲으로 나갔다.

아이작은 조용히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러니까, 일단 마을까지만 도착하면...."

"...지만 너무 위험... 수도사님한테 말씀...."

단편적인 내용만 들리긴 했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역시 도망치려고 하는군.'

아이들이 요르한에게 훔쳐 오라고 한 음식들은 대부분 보관 기간이 긴 것들이었다. 그 외에도 준비할 것이 잔뜩 있어야 할 테지만 녀석들의 멍청한 머리를 생각하면 뻔했다.

도망.

'솔직히 나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아니, 그는 이미 이 수도원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니라 그의 뼈가 충분히 굳고 어디 가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길 때의 일이었다.

혹은 촉수를 들키거나.

"끼기 싫으면 끼지 마, 새끼야! 수도사들이 알기 전에 도망쳐야 하니까!"

한스는 몰래 빠져나왔다는 사실 자체도 잊어버린 듯, 겁먹은 아이들에게 윽박질러가며 의견을 주도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끌고 가려는 것을 보니까 자기 혼자 도망치는 건 역시 무서운 듯했다.

'그나마 그거 하나만큼은 멍청하지 않군... 나머지는 다 멍청하지만.'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니 몰려가는 편이 낫다.

하지만 어른들도 사회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수도원으로 도망 오는 세상이다. 기술도 없이 도망쳐봤자 굶어 죽거나 거지가 될 뿐이다.

아이작이 알 바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아이들 네 명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혀를 짧게 차며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자."

아이작이 말한 순간 아이들이 조용히 경악했다. 한스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뒤늦게 이를 드러내고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지금 도망쳐서 뭐 하려고? 적어도 나이 조금 더 먹고 나서 수도사님들한테 나가고 싶으니까 공방에 추천이라도 해달라고 해. 아니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든가. 수도원에 있으면 글자라도 배울 수 있잖아."

한스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수도사나 게벨을 데려오진 않았는지 본 것이다. 그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한스는 긴장감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작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한스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저러나 생각했다. 아이작은 간을 보듯 한 걸음 내디뎠다. 순간 한스가 흠칫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것 봐라? 체구도 작은 어린애한테 쫄고 있네?'

단순히 높은 매력 수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우습다기보다는 이상했다.

아이들이 수도 많고 나이도 많으니 자신을 찍어누르려 할 줄 알았다.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윽박질러서라도 들여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정하자, 상대는 애다. 잘 타이르는 것이 어른의 책무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한스 형, 도망쳐봤자 어디로 가겠어?"

"그야 마을로...."

"마을 주민들은 수도사들을 존경하셔. 이 근처에 애 밥 안 굶기고 챙겨주는 고아원이라곤 수도원밖에 없으니까 한눈에 알아볼 거야. 그럼 어른들이 한스 형을 어떻게 할까?"

실제로 도망쳤다가 그렇게 잡혀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게벨이 달려오지 않는 이유나, 수도사들의 경계가 느슨한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재수 없게 몬스터나 범죄자한테 걸리면 죽는 거고.

"게다가 도망친다면서 준비한 게 뭐야. 감자 몇 개랑 말린 소시지 몇 개?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알겠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겨울이잖아.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 부츠랑 모피도 몇 개 훔치지 그랬어? 경전은 돈이 되니까 그것도 몇 개 훔치고?"

한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비가 부실했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말고 17살까지만 기다려. 17살 되면 수도원에서도 선택권을 주잖아."

"나는 16살이라고!"

"17살은 아니지. 그때 밖으로 나가든가, 수도사가 되든가 하라고. 수도사가 되면 존경도 받을 수 있고 밥 굶을 일도 없지."

어른도 밥 얻어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하물며 고아 출신이라면야.

"한스 형이 정말 애들 데리고 다 도망치면 먹을 입이야 줄겠네. 어차피 수도원에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런데 내가 왜 말리고 있지? 멍청한 주둥이들이 도망친 덕분에 내 주둥이에 감자 한 덩이를 더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슬슬 열이 오른 나머지 약간의 도발을 섞어 버렸다. 하지만 한스는 말귀를 알아듣기는 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반면 다른 아이들 표정은 점점 사색이 되고 있었다.

"너 이 새끼가!"

한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머리 하나 차이는 싸움에서 압도적인 차이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쥐에 비하면 미리 지켜보고 있던 한스의 움직임은 한가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물론 그걸 보고 아이작의 몸이 따라주느냐는 다른 문제다.

아이작은 한스가 달려드는 걸 보고도 제때 피하지 못해서 멱살을 붙잡혔다. 아이작이 조금만 더 잘 먹고 컸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장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손에는 혹시 몰라서 가져온 물건이 있었다. 지금 쓸 생각은 없었지만.

"네, 네가 뭘 알아!"

그러나 한스는 아이작을 제압하고도 어쩐지 더 겁먹은 눈치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네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으면...."

"제발 철 좀 들어라, 애새끼야."

멱살을 잡히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이작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 순간, 아이작을 제외한 주변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섬뜩하고 질척한 무언가를 느꼈다.

동시에 한스가 숨통이 턱 막히는 신음을 내뱉더니 쥐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주저앉았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쥐새끼 같다고 생각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 순간 들려온 메시지에 아이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촉수가 손 밖으로 나오려고 꿈틀거리다가 안으로 다시 숨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들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깨닫고 자신의 뺨을 철썩 때렸다.

'미쳤어?'

자신도 모르게 한스를 사냥감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찾던 바로 그 '더 큰 먹이' 말이다.

아이작은 아이들 사이로 죽은 듯한 정적이 번져있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본 건 아니겠지?'

아니다. 촉수는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이었다. 손바닥을 혀로 핥은 것처럼 질척하고 기분 나쁜 감각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모두 겁에 질린 눈치였다. 심지어 한스는 숨을 헐떡이다가 바짓가랑이를 거뭇하게 적시고 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견딜 수 없는 살의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한스가 왜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이름 없는 혼돈의 존재감이 높은 매력 수치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매력이나 존경보다 공포를 먼저 느낀 것도 당연했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기색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미안해졌지만, 아이들이 차분해진 틈을 타서 다시 설득했다.

"내가 말리는 건 형들이 괜히 도망치다가 소아성애자나 노예 상인, 혹은 산짐승이라도 만날까 봐 그러는 거야."

"...."

"그런 일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없으리란 법도 없지. 산짐승이 뭐 대단한 게 아니라 도망치려고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죽을 수도 있다고."

아이들은 여전히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알아들었다기보다는 그냥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매력 때문에 협박으로 인한 공포 효과가 너무 강하게 걸린 듯싶었다.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한스를 향해 다가갔다. 한스는 허겁지겁 도망치려다가 등에 나무가 닿자 멈춰 섰다. 아이작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섭게 안 할 테니까 앞으로는 잘하자, 응? 나 실망시키지 말고."

한스는 결국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았다. 화해를 받아들인 건지, 너무 무서워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친해질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 이건 이거 나름대로 괜찮겠지.'

차라리 지금 서열을 확실히 해둔다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이 좀 인간이 된다면 괜히 양심에 찔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나이대 남자애들은 서열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구니까.

"슬슬 수도사님들이 찾을지도 모르니까...."

그 순간 아이작의 말이 멈췄다.

아이들은 아이작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노란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짙게 풍겨 왔다. 흥분과 지린내 때문에 미처 맡지 못했던 냄새였다.

멧돼지 한 마리가 푸륵거리며 고개를 사납게 휘저으며 다가왔다. 머리 높이가 거의 아이작의 가슴께에 올 정도로 거대한 놈이었다.

'멧돼지? 아무리 애들이라지만 야생동물이 무리 지은 사람들한테 함부로 접근할 리가 없는데.'

아이작은 곧 녀석이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울 수 없는 악취와 날파리가 왱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썩어 가는 냄새였다.

아이작은 침착하게 말했다.

"당황하지 말고, 일단 침착하게 뒤로...."

"으아아아!"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퉈 뒤로 달려 나갔다. 멧돼지는 그걸 보자마자 크게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짐승이라면 인간을 피하기 마련인데, 등을 보이자마자 달려오는 모습이 정상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으, 으아...!"

다리가 풀려 있던 한스는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자빠졌다. 아이작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한스를 확 끌어당겼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뻗어 나온 촉수가 한스의 옷자락 뒤쪽을 휘감았다. 덕분에 아이작은 믿을 수 없는 괴력으로 한스를 뒤로 집어 던지다시피 할 수 있었다.

쾅! 한스 대신 멧돼지에 치인 아이작이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아이작은 촉수의 새로운 사용법에 놀랄 틈도, 한스가 제대로 떨어졌는지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여기다, 돼지 새끼!"

찌잉. 아이작은 허겁지겁 일어나 멧돼지를 향해 보란 듯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수도원이 아닌 바깥 방향이었다. 멧돼지는 무리 지어 도망가는 아이들보다 혼자서 '낙오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작을 먹잇감으로 포착했다.

멧돼지가 맹렬하게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와 잡풀들을 박살 내며 쫓아오는 멧돼지의 기세가 흉흉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더 큰 먹이.'

아이작은 제 몸보다도 더 큰 멧돼지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8화. 더 큰 먹이 (3)

아이작은 산비탈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네발짐승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에 약하다.

멧돼지 역시 광포해진 상태였지만, 다리가 부러지지 않으려는 본능은 있는 듯 주춤거리며 내려왔다. 덕분에 아이작은 금방 따라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유인해서....'

아이작은 멧돼지가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무 앞에서 있는 힘껏 뛰어올라 가지에 매달렸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촉수는 손에서 튀어나와 나무에 매달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쾅! 멧돼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를 들이받았다. 아이작은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흔들렸지만 촉수 덕분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 수 있었다.

'지금!'

아이작은 멧돼지가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재빨리 아래에 있는 놈을 향해 뛰어내렸다.

촉수가 날카로운 창처럼 돌변하며 찔러 들어갔다.

쥐를 잡을 때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촉수는 멧돼지의 두터운 두개골을 뚫지 못하고 대신 가죽을 찢었다. 멧돼지는 촉수가 몸을 휘감는 고통에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와득, 와드득!

촉수는 두개골을 뚫지는 못해도 마치 빨판이나 이빨이라도 달린 것처럼 멧돼지의 가죽을 떼어냈다.

순식간에 멧돼지의 얼굴에 뼈가 드러났다.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고 날뛰었다.

쩍. 결국 촉수는 멧돼지의 얼굴 가죽 일부를 뜯어낸 채 떨어져 나갔다. 멧돼지는 복수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떨어진 촉수를 물어뜯었다.

'질긴 놈이군.'

그러나 아이작에게 느껴진 것은 간지러운 감촉뿐이었다.

잘근잘근 씹히던 촉수가 이상행동을 취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씹히던 촉수는 오히려 멧돼지의 이빨을 부러뜨리고 혀를 물어뜯으며 입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성하지 않은 정신으로도 위험을 감지했는지 뒤늦게 몸부림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야, 잠깐. 야...!"

동시에 촉수에 매달린 아이작의 몸도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촉수를 회수할까 했지만 이를 악물고 꽉 붙들었다.

놈은 잡은 사냥감이다.

뿐만 아니라 상처 입고 흉포해진 놈이 어딜 가서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 아이작은 멧돼지를 끝장내기 위해 촉수를 더더욱 안쪽 깊숙한 곳까지 뻗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작의 몸이 붕 떠올랐다.

아찔한 감각이 스쳤다. 동시에 쾅 소리와 함께 아이작의 몸이 바닥에 닿았다.

"큭...!"

충격도 잠시, 아이작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멍 뚫린 천장이 보였다.

그다지 높지 않은 수직동굴이었다. 위에서 멧돼지와 함께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크륵, 크르르륵...."

어둠 속에서 멧돼지가 흉포한 소리를 내며 절뚝거렸다. 아이작은 촉수가 회수되는 것을 느꼈다. 회수되는 촉수에는 멧돼지의 아래턱 부분이 매달려 있었다.

'역시 괴물 새끼라니까. 멧돼지한테 씹히고도 오히려 턱을 떼 가지고 돌아오네?'

아이작은 어이없으면서도 어째선지 한결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괴물 새끼긴 하지만 그래도 내 괴물 새끼다.

지금은 어지간한 칼보다는 촉수가 더 든든했다.

멧돼지는 충격 때문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멧돼지를 쿠션 삼은 덕분에 상대적으로 충격을 덜 받은 아이작은 멧돼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쿵, 쿵. 멧돼지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털고 머리로 벽을 들이받았다. 이미 병에 걸린 멧돼지는 낙하의 충격과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리하려면 지금 빨리 처리해야 해.'

아이작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대신 재빨리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기척을 느낀 멧돼지가 고개를 돌렸다.

"야!"

어린 목소리지만 동굴 안에서 메아리친 소리는 멧돼지의 신경을 긁기에 충분했다. 멧돼지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아이작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게벨이 얼마 전에 선물로 준 광휘석 목걸이였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광휘석 목걸이를 돌에 내려쳤다.

따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동굴을 가득 메우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뀌이이이이익!"

어둠 속에서 폭발하는 섬광에 눈이 멀어버린 멧돼지가 광분하며 날뛰었다. 아이작은 섬광탄과 비슷한 효과에 만족했다. 게벨이 경고했던 대로 빛이 강하게 터진 대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반년밖에 안 남았다던 광휘석의 수명이 이제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멧돼지는 아이작을 스쳐 지나가 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들이받았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찢어진 얼굴이 한층 더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뀍, 뀌익!"

돼지 멱따는 소리가 끔찍했다. 아이작은 놈의 등 위로 달려들었다. 또 놈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꽉 매달린 순간, 왼손에서 촉수가 빠르게 솟구쳐 나왔다.

휘리리릭! 아이작이 다시 한번 공격한 순간, 채찍이 공기를 찢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촉수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무수한 송곳니들이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처럼 촉수들이 멧돼지의 살갗을 뚫고 파고들었다.

"뒈져!"

와드드득!

뼈를 부수고 부러뜨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멧돼지는 크게 날뛰었지만 아이작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 것은 아이작이다.

멧돼지는 머리고 등이고 마구 벽에 부딪치며 난동을 부렸다. 아이작은 몇 번이나 아찔한 충격에 의식을 놓을 뻔했다. 뼈 어딘가 부러지는 느낌도 들었다. 이러다 손을 놓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순간, 아이작은 몸 안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뚜둑.

전조도 없이 아이작의 가슴팍 상처가 갈라졌다.

또? 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둑이 무너진 제방처럼 순식간에 아이작의 가슴이 쩍 입을 벌리면서 수천 가닥의 혀를 토해냈다. 촉수 무리는 아이작의 몸보다도 더 큰 멧돼지를 단숨에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멧돼지의 비명보다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가닥가닥 찢겨나가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그리고 짧았다. 멧돼지는 촉수 안에서 분해당하며 이빨보다 큰 부위 한쪽도 남기지 못했다.

촉수들은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날름거리며 핥은 뒤, 주변에 다른 생명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아이작의 몸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역병멧돼지(C)'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짐승의 완력(임시)'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질긴 가죽'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임시 특전은 소화될 때까지 유지됩니다.]

['혼돈의 대리인' 재사용 대기 시간 30일]

"...하아."

아이작은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새로 포식한 먹이에 만족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살점 저장고(A) / 포식한 상대를 소화시킬 때까지 재생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이계의 청소부(B) / 이제 양손에서 촉수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저 너머의 기생충(A) / 촉수에 닿은 상대의 살갗 아래 짧은 수명을 가진 기생충을 낳습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대상은 지속적인 고통을 입습니다.]

'포상?'

아이작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이 제시했던 임무를 성공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불길한 문양을 가진 타로 카드들이 나타났다. 불길한 그림체에, 촉수 무늬 테두리로 둘러싸인 카드였다. 카드는 경전과 달리 불길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살점 저장고, 이계의 청소부, 저 너머의 기생충이라... 또 혼돈 속성 몬스터 스킬이군.'

아이작은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처럼, 또 혼돈 속성 몬스터 스킬이 나온 것을 보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기쁨 반, 착잡함 반이었다.

'혼돈' 속성 몬스터들은 최소 상급에서 최상급으로 분류된다. 오죽하면 최상급 혼돈 속성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지역은 미개발 지역이라 일부러 막아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몬스터들도 몬스터들 나름의 스킬을 사용해서 플레이어들을 상대하는데, 몬스터 스킬을 딱히 캐릭터 간 밸런스를 고려해서 만들어 뒀을 리가 없다. 당연히 캐릭터가 갖게 된다면 말도 안 되게 강한 스킬뿐이다.

'문제라면 정작 이 스킬들은 사람들 앞에서 쓸 수 없다는 거겠지.'

찜찜하긴 했지만, 기껏 주어진 특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게 강력한 혼돈 속성 몬스터의 것이라면....

'살점 저장고는 체력 회복, 이계의 청소부는 공격 횟수 증가, 저 너머의 기생충은 도트 데미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려나?'

아이작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제일 현명한 선택을 짜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론은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여기서 이놈의 촉수를 더 늘린다고? 말도 안 되지. 사람 앞에서 촉수를 꺼내서 살갗 아래 고문용 기생충을 심기? 지금 이 수도원에서 이걸 어디에 쓸 것이며, 쓴다 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

게다가 지금 당장은 아이작 본인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가 고른 것은 첫 번째 선택지였다.

[살점 저장고(A)]

이 세계에서 어린아이는 픽하면 죽기 십상이다. 무사히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재생 특전은 귀중했다.

무엇보다 살점 저장고는 갖은 동물과 괴물들을 포식하며 성장해야 하는 아이작에게 필수적인 스킬이었다.

카드를 집은 순간 다른 카드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며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

아이작이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동굴 위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할 때였다. 기지개를 켜려던 아이작은 온몸이 통증으로 비명을 지를 것을 예상하며 움찔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몸이 개운하게 느껴졌다.

'분명 뼈가 몇 군데 부러진 것 같았는데?'

아이작은 몸을 살펴보았다. 뼈는 물론이고 상처도 없었다.

'아, 아까 골랐던 포상 때문인가?'

아이작의 의문에 응답하듯이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살점 저장고' 특전을 부여했습니다.]

[포식한 상대를 소화시킬 때까지 재생 속도를 대폭 증가시킵니다.]

아이작은 그 커다란 멧돼지를 통째로 포식했으니 상처가 회복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회복 효과는 체력과 정신력에도 해당하는 건지, 피곤함도 싹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머릿속이 약간 탁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한 느낌. 수도원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혼돈의 대리인인지 뭔지 그걸 발동한 후유증인가?'

아이작은 자신이 이 수도원에 왔을 때 한 달 동안 몽롱한 상태에서 보냈던 것이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촉수 무리를 불러낸 후유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면 몸에서 튀어나오는 촉수 무리는 확실히 강력하다. 하지만 그때 아이작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자신의 손, 아니 촉수로 멧돼지를 죽일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크게 상처 입은 것도 아니니 칼센에게 당했을 때처럼 정말 위험했던 것도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튀어나와 주변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려는 건... 조금 곤란하긴 하군.'

게다가 한번 발동하면 맹렬한 수면욕 때문에 아이작은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메시지대로라면 30일 동안은 또 그 혼돈의 대리인인지 뭔지가 튀어나오지 않을 테니, 완전히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도망칠 기회마저 잃을 수 있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일단 빨리 돌아가야겠어.'

지금쯤이면 수도사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잡아먹혔다고 생각할 수도.

해가 떠올라도 동굴 안은 캄캄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희끄무레한 동굴을 살펴보고 이 동굴이 자연적으로 생긴 형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통로는 고르게 다져져 있었고, 토굴이 무너지지 않게 만든 받침대나 횃불을 꽂는 고정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방치된 듯 사용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어온 구멍은 우연히 지반이 무너져 생긴 연결된 것 같았다.

'위치를 기억해두는 게 좋겠군.'

수도원 밖에 숨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이작은 빛의 법전 수도사들에게 켕기는 점이 많았으니까.

아이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했다.

덤불을 헤치고 빠져나오자 차가운 가을비가 뺨을 적셨다.

'또 엉뚱한 짐승이랑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때 아이작은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아이작의 몸이 멈췄다.

비에 젖은 잎사귀 사이에서 더 큰 멧돼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작이 죽였던 놈보다 덩치가 훨씬 큰 놈이었다.

'이건 뭔... 아, 설마 이 굴을 집으로 쓰고 있던 놈들인가?'

녀석은 아이작이 죽인 놈이랑 다르게 건강한 듯 경계하며 섣불리 달려들진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에게서는 같은 동족의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긴장하면서 촉수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멧돼지 포식 특전으로 힘이 강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더 쉽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멧돼지는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듯 이내 거칠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촉수를 꺼내려던 순간, 누군가 그의 앞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면에서 달려드는 멧돼지를 향해 침착하게 검을 들어 내려쳤다. 순간 어두컴컴하던 숲 안에 눈이 아플 정도로 섬광이 번뜩였다. 가을비 때문에 햇빛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아이작의 바로 앞에 몸이 절반으로 쪼개진 멧돼지가 보였다.

"꼬맹이, 괜찮냐."

9화. 성체(聖體) (1)

고개를 들어 올리자 비에 홀딱 젖은 게벨이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빨이 다 나간 낡은 검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검광이 그 검신에 은은하게 감돌다가 사그라들었다.

게벨의 손목 안쪽에 초승달과 검이 교차한 문신이 보였다.

게벨은 아이작이 놀라서 대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건지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는 아이작의 얼굴을 더듬더니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눈 두 개, 귀 두 개, 팔다리 각각 두 개. 잠깐. 코는 왜 하나밖에 없냐?"

아이작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코를 움켜쥐자 게벨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농담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사람 같았는데.'

아이작도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게벨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게벨이 성기사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로서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아이작은, 이 세계에서 성기사의 검술은 게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은 그가 쓰던 검술을 꼭 배우기로 했다.

***

그날 도망친 아이들은 바로 수도사들에게 달려갔다.

녀석들은 필사적으로 아이작의 위기에 대해 알렸고, 곧바로 게벨이 수도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늦게 아이작과 멧돼지의 흔적을 뒤쫓았지만, 다음 날 새벽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다들 아이작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벨은 결국 아이작을 데려왔고, 수도원 사람들이 전부 모여 신의 기적을 찬양했다.

물론 거기에 빛의 법전이 행한 기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아이작은 겸손하게 빛의 법전을 찬미했다.

수도사들은 함부로 행동한 아이작을 혼내야 할지, 혹은 영웅적으로 행동했다며 칭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아이작은 저녁 금식이라는 벌을 받았다.

어차피 '포식'을 할 수 있는 아이작에게는 문제가 되는 형벌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도원 전체적으로 아이작에 대해 크게 호의적인 분위기가 번져서, 아이작이 무언가를 부탁하면 거의 대부분 들어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었다.

"미안하다."

다음 날, 바로 한스가 찾아와 사과했다. 아이작은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게 아닌가 했지만 한스에게는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어. 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렇게 말하는 한스는 오히려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이미 은연중에 아이작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아이작을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무리해서 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아예 격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자, 경쟁심조차 느끼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공포의 대상에게 굴복하면, 그다음은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았다.

"요르한한테나 사과해. 이젠 도망칠 생각이 없어졌나 보지?"

"이미 사과하고 왔어. 앞으론 도망칠 일 없을 거야. 나처럼 멍청한 소리 하는 놈 있으면 내가 단단히 타이를게."

그렇게 말하는 한스는 존경의 눈빛까지 보였다. 아이작은 그 눈빛이 거북했지만, 어린애라 그런 모양이라며 넘겼다.

힘세면 다 좋은 줄 아는 나이다. 그리고 한스는 아이들 중 가장 나이 많고 힘이 센 녀석이다. 녀석이 고분고분해진다면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을 맞닥뜨리니 인정하는 건 빠르네. 보기보다 멍청한 건 아닌 모양이군.'

애초에 도주 계획도 단순히 아이작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짰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작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그냥저냥 무난하게 17살까지 지냈을 것이다.

한스는 사과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한스는 화해했다고 생각한 건지 환하게 웃었다.

***

"너 엄청 세더라. 게벨 씨한테서 배운 거야?"

"응? 어어, 뭐 그렇지?"

전생의 기억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슬쩍 둘러댔다. 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여명군(黎明軍)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그때 한스가 묘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작은 익숙한 단어가 나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군.

그게 뭔지는 아이작도 알고 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메인 퀘스트이자 뼈대가 되는 스토리 라인이다.

저 먼 동방에는 빛의 법전이 처음 쓰인 곳이라고 알려진 '성지'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성지는 불사교단의 '불사황제' 베셰크가 신으로 재탄생한 땅이기도 했다.

여명군은 바로 그 성지를 다시 수복하기 위해 빛의 법전 교단이 결성한 연합군대였다.

성지는 어떤 때는 빛의 법전을 국교로 삼은 백제국이, 어떤 때는 불사교단이 지배하는 흑제국이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은 흑제국이 성지를 지배해 왔다. 그리고 가장 최근 여명군이 결성된 것은 15년 전, 12차 여명군이었다.

"가장 최근의 여명군이 15년 전 일이니까 우리가 어른이 될 때쯤에는 또 조직될 거야. 성지는 반드시 탈환해야 하잖아."

한스는 언젠가 반드시 또 빛의 법전 교단에서 여명군을 결성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이작은 정확히 그 시기도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뒤의 일이다.

'확실히 성기사로서 정점을 찍으려면 여명군 참전만 한 커리어가 없기는 하지.'

딱히 성기사가 아니라도 이 게임을 하는 이상 이 여명군 퀘스트는 진행할 수밖에 없다. 전 대륙 전체가 말려 들어가는 전쟁이니 당연하다.

요컨대 '13차 여명군 원정'은 '네임리스 카오스'의 메인 스토리 이벤트라고 보면 된다.

여명군이 결성되면 불사교단 측에서도 월식군(月蝕軍)을 결성해서 뜻이 맞는 교단끼리 손을 잡고 여명군에 대항한다.

즉, 아이작은 이미 13차 여명군 원정을 여덟 번이나 성공시킨 고인물이라는 뜻이다.

아이작은 자신의 목적을 되새겼다.

촉수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숭고한 성기사가 되어야 하고, 그 정점에서 성지를 탈환한다.

'그때가 되면 게임상으로는 엔딩이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허무하게 'The end'가 뜨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결말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때 아이작은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언젠가 반드시 여명군에 들어가야 했다.

"여명군이 될 생각이라면 왜 게벨 씨를 따라다니지 않은 건데?"

아이작의 말에 한스가 얼굴을 붉혔다.

"예전에 따라다닌 적 있었는데 너무 힘들고 더러운 일을 많이 시켜서... 무섭기도 하고."

쫓아다니다가 나가떨어졌다는 뜻이었다. 한스는 말을 돌리려는 듯 급히 말했다.

"그, 그런데 게벨 씨 안 무서워?"

"별로? 보기보다 농담도 잘하고 웃기도 잘 웃는 사람이던데."

"그래도 게벨 씨는 탈영병이라는 말도 있잖아. 탈영병들은 막 도망치면서 약탈하고 같은 신도들까지도 죽이고...."

이 시대에 탈영병이란 거의 산적 떼와 동의어다. 전쟁 한번 치르기 위해서 각지에서 제대로 된 보급조차 없이 징집병을 끌어모은 탓이다.

전투 한 번 치르고 나면 탈영병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그 탈영병은 다시 또 지역 각지에서 말썽을 일으킨다.

"그리고 손목에 문신 봤어? 초승달과 칼이 겹쳐있는 문신 말야. 그거 보면 어쩌면 흑제국 병사였을지도 몰라. 우리나라로 몰래 숨어들어온 거지."

아이작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상상력은 대단하다만 손목에 나 첩자요 하는 문신을 박아놨을까. 게다가 흑제국의 병사라면 언데드다. 뻔뻔하게 살가죽을 입고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아이작도 그 문신을 본 적 있었다. 초승달은 흑제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요르한이 불안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하긴, 나도 게벨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니까...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 봐야겠군.'

***

아이작은 게벨로부터 어떻게 해야 검술을 배울 수 있을지 매일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몸은 만들고 있지만, 검술을 배우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특히 그가 성기사가 되기 위해 가야 할 행보를 생각하면 더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게벨은 동료들을 잃었다. 그에게 다시 검을 쥐여주고, 후대를 키우게 만들려면 적절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가 성기사라는 것을 알 뿐, 어디 소속이었으며 어떤 사정으로 여기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 아이작은 도서관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이미 단서는 나와 있었다.

그렇게 뒤지기를 며칠, 책들을 샅샅이 훑어보던 아이작은 어느 날 옆에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잡아챘다. 두터운 가죽 양장에 묵직한 양피지로 이루어져, 하마터면 놓칠 뻔할 정도로 무거운 책이었다.

그는 책장에 꽂으려던 책 제목을 다시 읽었다.

'12차 여명군 기록.'

15년 전 벌어졌던 바로 그 여명군에 관한 기록이었다. 아이작은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12차 여명군이 시작된 이유, 참전국, 경로, 인원, 부딪친 적대 세력과 어디서 어떤 식으로 보급했는지... 성실하지만 단조롭게 기록된, 말 그대로 기록서였다. 재미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었지만 아이작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참가 단체' 부분에서 멈췄다.

초승달과 겹친 칼의 문장.

게벨의 손목에 있던 문신을 깃발로 쓰던 조직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그 조직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Avalanche holy knights).

'...그렇지, 여기였군.'

게벨은 바로 그 12차 여명군에 참전한 성기사였다.

아이작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에 대해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대략 120여 명 정도의 규모로, 동부 지역에서는 꽤 큰 기사단에 속했다. 게다가 불사교단과의 접경지에 붙어있어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아이작은 기사단원들의 명단에서 눈길을 멈췄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부단장 게벨 크랙톤.

'부단장... 생각보다 거물이었잖아?'

아이작은 어이없는 기분마저 들었다.

성기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거물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니?

성기사들은 개인의 무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의 기적까지 행사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우위로 쳐준다. 교단 안에서도 높은 신분을 보장하니 영주나 왕도 어떻게든 모셔오려고 하는데, 성기사들이 돈으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다 보니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들었다.

이 정도 신분이었다면 적당한 권력자의 도움을 받아 어딘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살아남았을 때 탈주라도 한 건가? 배교라든가?'

확실히 아이작은 게벨이 경전을 읽기는커녕 기도를 올리는 모습조차 한번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배교를 했다면 굳이 빛의 법전 수도원에 몸을 의탁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그때 그의 생각에 맞장구를 쳐주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게벨을 종복으로 삼길 바랍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름 없는 혼돈이 목표를 하향 조정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게벨을 먹잇감으로 삼길 바랍니다.]

"아니, 날 대체 뭘로 보고 있는 거냐고. 사람이 쥐새끼랑 같아?"

[이름 없는 혼돈이 목표를 더 하향 조정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게벨에게서 티끌만 한 승리라도 거두기를 바랍니다.]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고작 14살짜리 아이에게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성기사단 부단장이었던 사람을 굴복시키라고? 게벨이 성기사라는 걸 알자 이름 없는 혼돈이 알 수 없는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어처구니없었지만 잠시 생각해보다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리고 아이작은 어차피 게벨에게 도박수를 한 번 던져 볼 생각이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10화. 성체(聖體) (2)

"저쪽으로 옮겨라."

며칠 후. 게벨이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며 아이작에게 지시했다. 그의 곁에는 이미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이작은 시키는 대로 장작더미를 옮기다가 그 장작들이 모두 반듯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잘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숙련된 솜씨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아이작은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퍽, 퍽.

게벨은 장작을 기계처럼 반복해서 패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정확히 장작의 중앙을 노리는 도끼는 빗나가거나 한 번에 쪼개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이작이 문득 입을 열었다.

"게벨 씨."

"왜?"

"제게 검술을 가르쳐주세요."

퍽. 게벨은 나무 쪼개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장작을 서너 개 더 패다가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거 때문에 날 따라다니던 거였냐?"

"꼭 그거 때문만은 아니지만...."

"내가 왜 칼을 쓸 줄 안다고 생각하는 건데? 탈영병이라서?"

게벨이 오래된 소문을 들먹였다.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이 수도원에 있는 이유는 모르지만 아이작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멧돼지를 반으로 쪼개버린 건 주먹으로 한 거였어요?"

"네가 무서워서 잘못 본 거겠지."

그렇지. 고작 이 정도 말로는 안 넘어올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게벨 씨가 가끔 버리라고 한 통 가득 가져오던 쥐 사체들을 봤어요."

가끔 게벨이 버리라고 따로 지시하던 쥐 사체들. 아이작처럼 함정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직접 잡은 듯한 쥐 사체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 비슷한 상처를 입고 죽어 있었다.

"전부 정교한 솜씨로 뭔가에 깔끔하게 찔려 있었어요. 칼처럼."

"왜 창이나 꼬챙이라고는 생각 안 하고? 그게 더 일반적일 텐데."

게벨은 아이작이 그걸 알아봤다는 것에 놀랐지만, 불쾌해하는 대신 흥미로워했다. 과연 아이작이 뭐라고 대답할지 기대된다는 눈치였다.

아이작은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던져 보기로 했다.

"게벨 씨는 성기사잖아요."

"왜 성기사라고 생각하지?"

"손목 안쪽에 있는 그 문신 때문에요."

게벨은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 역시 딱히 그 문신을 숨기고 다니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작이 알아봤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한스는 그걸 칼과 초승달이 교차하는 문양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초승달을 찌른 칼 모양이죠?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문양이요."

"...."

초승달을 찌른다.

태양이 빛의 법전의 상징이듯, 초승달은 불사교단, 그중 불사 황제의 상징이다.

즉, 게벨의 문신은 불사교단의 신이자 교주인, 불사 황제 '베셰크'를 찌르겠다는 선언과 같다.

게벨이 속했던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극도로 전투적인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명군 참전 기사단 목록 중에서 그 문신을 본 적 있어요. 12차 여명군에 참전한 성기사단이라던데...."

"별걸 다 알아봤군."

"여명군 얘기는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잖아요."

게벨은 착잡한 표정으로 도끼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애들이라고 무시할 게 못 되는군. 수도원장 말고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는데...."

게벨은 딱히 숨길 생각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도끼를 집어 들었다. 아이작은 그가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장작을 팰 뿐이었다.

뭔가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게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뭐?"

"검 쓰는 법 가르쳐주실 건가요?"

물론 성기사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검술은 아니다. 오히려 검술은 성기사가 되는 과정에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성과에 가깝다. 대다수의 성기사단은 폐쇄적인 구조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서 먹고 자라면서 신앙에 세뇌된 자들만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이 성기사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신앙심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켰다간 산 채로 불태워질 것이다.

아이작이 성기사가 되려면 성기사단 바깥에서 부정할 수 없는 성과를 세운 뒤 들어가야 했다.

"내가 성기사인 거랑 칼 가르쳐주는 거랑 뭔 상관인데? 가서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탈영병이 탈영 성기사가 되겠군."

탈영했다는 건 맞는 건가? 이미 게벨은 성기사라는 자리에서 발을 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동료를 모두 잃은 것이 그를 초연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오지의 수도원에서 장작이나 패고 있지.

하지만 아이작은 그가 검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장비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고, 검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언제고 다시 검을 쥘 사람처럼 보였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도원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작이 바라보고 있자 게벨은 피식 웃으면서 도끼를 콱, 두꺼운 장작 안에 꽂아 넣었다.

"뽑아봐라."

"네?"

"칼 가르쳐달라며? 무거운 전투용 도끼도 아니고 손도끼다. 칼은 이것보다 훨씬 무겁지. 아직 뼈도 다 안 자란 녀석이 칼을 들 생각부터 해? 웃기는 소리."

***

아이작은 머뭇거리며 도끼 앞으로 다가갔다.

게벨은 도낏자루를 쥐고 끙끙거리다가 나자빠지는 아이작의 모습을 예상했다.

"이런 가난한 수도원에서는 검사가 될만한 몸을 만들기도 어려워. 밥이 제대로 나오느냐, 아니면 네가 체력단련을 하느냐? 맨날 앉아서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단련이 되겠냐?"

"이 도끼를 뽑으면 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봐서. 바위에 박힌 성검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바위는 아니지만 체중을 실어 이리저리 비틀어도 꿈쩍도 안 할 정도로 깊이 박아 놓은 상태였다. 게벨은 아이작의 몸집만 봐도 그가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게벨은 뭔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게벨은 아이작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은 단지 나이에 비해 성숙할 뿐인 아이였다. 특히나 어린 시절부터 단련해 왔던 그는, 지금 아이작의 체격으로는 가르쳐 봤자 근력 운동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녀석이라면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줄지도.'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도낏자루를 움켜쥐었다. 도낏자루의 높이가 아이작의 얼굴까지 올 정도여서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작은 거의 도끼 목 부분을 잡고 힘을 주었다.

움찔. 장작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게벨은 설마 했지만, 역시나 도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봐라, 괜히 헛소리 말고 경전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러면 수도원장님이 너를 대학 성당에 추천해주실 수도 있으니...."

게벨은 웃으며 말했다.

아이작은 충분히 영리하고 성실했다. 굳이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옆에 두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작이 장작이 박힌 도끼를 번쩍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아이작이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장작을 들어 올리자 게벨의 눈동자가 커졌다.

도끼를 뽑는 게 아니라 아예 장작째로 들어 올린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걸로는 충격을 주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장작이 박혀있던 도끼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도끼가 단숨에 장작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도끼는 그걸로 모자라 땅에 목까지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박혔다. 아이작은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충격을 느꼈지만 애써 참았다.

"후우... 들어 올리는 건 몰라도 뽑는 건 어렵네요."

"아니, 뭔...."

게벨은 어이없어하다가 아이작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게벨에게 당황했지만 일단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이작의 가느다란 손목과 빈약한 근육을 확인한 게벨은 그를 들어 올려서 체중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떻게?"

아이작은 시선을 회피하며 모르는 척했다.

['짐승의 완력(임시)' 특전]

아이작이 역병 멧돼지를 포식하고 얻은 특전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일시적인 효과였지만, 게벨과의 내기에서 승리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아이작도 알고 게벨도 안다. 아이작도 이 힘을 드러낼까 말까 고민했지만, 이 내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든, 앞으로 검술 단련을 위해서든,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보여 줘야만 했다.

완력이 충분하지 않은데 검술 단련을 하겠다는 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게벨은 어떻게든 합리적인 상황을 찾기 위해 궁리하다가 물었다.

"그 많은 쥐들을 다 잡아먹기라도 한 거냐?"

"...."

"아니, 설령 그걸 다 먹었어도 이 체격에 그 힘은 말이 안 되는데...."

의외로 예리한 질문 탓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게벨은 곧바로 자신의 의견을 부정했다.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에선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다다를 수밖에 없는 편리한 납득 수단이 있었다.

게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역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나?"

"기적이요?"

그 순간 아이작은 게벨의 말과 얼굴에 스쳐 지나간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게벨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나?'라고 과거형으로 말했다.

'기적이 일어났나?'라는 현재형이 아니라.

즉, 게벨은 아이작에게서 기적으로 의심되는 무언가를 본 적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그의 표정.

환희와 희열에 찬 그 얼굴은 자신의 기대했던 것이 나타났을 때 짓는 표정이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것을 봤을 때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게벨은 서둘러 표정을 지우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하는 것을 꺼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아이작은 대답을 채근했다.

"들어 올렸으니까 검술 가르쳐 주실 거죠?"

게벨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이름 없는 혼돈이 작은 승리에 만족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늦은 저녁, 도서실에서 책을 읽던 아이작에게 승리 포상이 주어졌다.

아이작은 그 메시지를 듣고 작게 미소 지었다.

'검술을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군.'

낮에 도끼를 들어 올렸을 때는 승패가 바로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늦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메시지가 뜬 걸 보니 결국 게벨도 인정한 것 같았다.

'단순히 도끼를 들어 올린 거 하나만으로 이렇게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게벨의 마음을 돌린 것은 이미 아이작이 쌓아 놓은 이미지 덕분이었다. 똑똑하고 성실하며,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아이라는 이미지. 거기에 자신의 검술을 잇고 싶다는 의욕까지 내비치며 재능까지 발휘하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여튼 잘됐어.'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 자신에게 어떤 포상을 내렸는지 확인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에게 '벽 속의 쥐' 특전을 부여했습니다.]

[이제 촉수를 통해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감각 공유?'

아이작은 그 명칭을 듣고 호기심을 느꼈다. 아직은 주변에 눈이 많기 때문에 당장 써먹기는 어려웠다. 아이작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슬쩍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밖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한번....'

아이작은 구석진 곳에서 촉수를 꺼내 보았다. 그 순간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촉수가 느끼는 시야와 소리가 중첩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벽 속의 쥐 / 촉수를 통해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약간 흐릿한 경계를 사이로 두 시야가 중첩되어 있을 뿐, 많이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두 눈을 감으니 촉수 쪽 시야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촉수를 움직이다가 바닥의 작은 틈으로 밀어 넣어 보았다. 아이작의 발밑은 고해실이 있는 층이었다. 게벨이 수도원장과 고해실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곳을 노린 것이었다.

게벨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촉수는 허술하게 뚫린 벽의 빈틈을 타고 뻗다가 게벨과 예브하르가 있는 벽 근처에서 멈췄다. 작게나마 귀를 만들어 낸 촉수를 통해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

"장작에 박힌 도끼를 들어 올렸다구요?"

"예. 수도원장님."

당연하지만 아이작이 일으킨 일은 수도원장의 귀에 들어갔다.

"그냥 타고난 힘이 센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기적이라기에는 좀 사소해 보이는데."

"다릅니다. 수도원장님."

어두컴컴한 고해실 안에서 게벨은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성체(聖體)일 확률이 높습니다. 기적을 몸 안에 품고 있는 자들 말입니다."

11화. 성체(聖體) (3)

기적이 일어난 몸.

빛의 법전에서는 성체(聖體)라고 부른다.

성체가 언급되자 수도원장이 일순간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게벨은 빠르게 이어 말했다.

"저는 어릴 때 성체를 발현된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죠. 아이작은 나이가 어리고 체구가 작아서 이 정도지, 크면 클수록 더 강하게 발현될 겁니다."

"확실히 생김새부터 평범한 아이는 아닙니다만...."

아이작의 비현실적인 외모는 수도원장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솔직히 좀 무거운 도끼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는 외모 자체가 성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빤히 바라보는 게벨의 시선에 수도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기적은 위업을 통해 부여받는 것이고, 성체는 계시를 받아 발현되는 것이라지요. 만약 정말 아이작이 성체라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실제로 기적을 보유한 사람들은 세상에 많이 있다. 불타는 화로 안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든가 먼 거리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한 사람, 심지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까지도 있다. 수도사들도 양초에 불꽃을 붙이는 기적 정도는 일상적으로 해낼 정도다.

하지만 성체가 발현된 자들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교단에서는 그들을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난 자들이라고 부른다.

아무런 업적 없이도 기적을 몸에 타고났으니, 신이 내린 사명을 해결하기 위해 보낸 사자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 성체 보유자들은 성자의 반열에 오르거나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그중에는 천사의 반열에 오른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즉, 성체 발현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문제였다. 교단의 방향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신의 의지가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느냐를 말해주고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게벨은 차갑게 대답했다.

"등하맹인(燈下盲人)들을 믿으십니까."

등하맹인(燈下盲人), '등 아래 장님'은 빛의 법전 교단의 고위 사제를 칭하는 은어였다. 누구보다 빛 가까이 있지만 너무 눈부셔서 함부로 보지 못하고 되레 깜깜해서 발밑도 보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게벨은 교단의 고위 사제들을 경멸했다.

그가 아이작을 발견했을 때 일부러 수도원에 숨긴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작이 정말 성체라서 신의 사명을 타고났다고 인정받더라도, 결국 그자들 입맛대로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겁니다. 아이작이 나이에 비해 영특하긴 하지만 결국 아이니까요."

아이작이 타고난 용력을 가진 성체라고 치자. 전쟁을 원하는 자들은 아이작의 존재를 교단의 적을 토벌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테고, 현상 유지를 원하는 자들은 백제국의 부강함을 과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어느 정도 저울을 흔들지는 몰라도, 결국 더 세력이 강한 쪽에 의견이 쏠리게 되어 있었다.

수도원장도 게벨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조했다. 그 역시도 그런 중앙교단의 정치가 싫어서 외곽의 수도원으로 온 사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겁니까?"

"아이작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에 조심하자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수도원장님."

게벨의 목소리는 긴장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이 수도원의 수도사님들은 모두 선하신 분들이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지요. 그러니 잘 부탁하면 언행을 삼가주실 겁니다. 하지만 수도원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수도원을 운영하려면 마을로부터 끊임없이 기부를 받거나 상인을 만나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 길 잃은 여행객이나 순례자가 찾아올 수도 있고, 이웃 수도원이나 교단 상부에서 방문할 수도 있다.

"적어도 아이작이 16살은 넘어야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알려졌다간 녀석이 어떻게 될지...."

게벨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수도원장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시겠지만 성체를 숨기라는 것은 신의 뜻을 세상으로부터 가리자는 것과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수도원장님."

"그러면 차라리 제게 말씀하지 말았어야죠."

게벨은 수도원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성체라는 것은 칼센의 실종 때부터 기대했던 일이지만, 이제야 그 사실이 입증되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성체라는 것이 확실했더라면.'

성체를 흔히 신의 의지가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성기사 출신으로서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게벨은 아이작과 너무 가깝게 지냈고, 이제는 그 어린아이가 무거운 사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게벨은 차라리 이 사실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이라도 털어놓고 인정해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아이작의 존재를 모두에게서 숨겨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장은 게벨이 대답하지 않자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체가 나타났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육으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현 게르토니아 황제인 발트제메르 황제가 20살에 성체를 발현하고 6년 만에 제위에 올라섰다는 건 알고 있지요?"

"물론이지요."

게르토니아 제국. 보통은 백제국이라고 많이 부르지만, 제대로 제국 꼴을 갖춘 것은 불과 30여 년 전 일이었다. 발트제메르 황제는 성체 발현자의 힘으로 수많은 제후들과 난립하던 군벌을 무릎 꿇리고 강력한 제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단은 그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성체를 숨긴다면 우리가 그 등 아래 장님들과 무엇이 다르지요?"

"적어도 우리가 세상을 향해 대놓고 나팔수 역할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아이작이 정말 성체라면 반드시 두각을 드러낼 겁니다. 신의 의지를 드러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시기는 신께서 적당하다 생각하시는 때, 너무 이르지 않은 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수도원장의 도움이 있다면 말입니다.

게벨은 뒷말을 숨기고 말을 마쳤다. 수도원장은 얕게 신음하면서도 게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두각을 드러내는 시기는 아이작 본인에게 맡기자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이작이 함부로 이용당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을 때.

그 역시 한때 중앙교단에서 정치놀음을 하던 몸이었다. 정쟁에 질려서 나왔다 하더라도 아직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말이 새더라도 무마할 수 있는 것은 수도원장뿐이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게벨 씨의 부탁이고, 빛의 법전께서 예비하신 계획이 있으실 텐데 우리가 나서서 나팔을 불어대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니까요."

수도원장의 말에 게벨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수도원장이 물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성체가 발현됐습니까?"

"예?"

"성체 발현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더군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부터 빛이나 특별한 현상과 함께 나타나는 것, 혹은 아예 성육신(聖肉身)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육신이라면 육체가 변화하는 것 말입니까?"

"발트제메르 황제는 아시다시피 머리에 빛나는 뿔이 돋아나 있고, 화형대에 여명의 석판을 들고 나타난 등대지기 루앗딘은 온몸이 불에 타는 빛의 형태였었다고 하지요. 신체가 신의 형상에 가깝게 변형될수록 큰 힘과 운명이 예비되었다고 합니다."

수도원장의 말에 게벨은 자신이 보았던 다른 성체를 떠올렸다. 그는 딱히 몸에 드러나지 않는 상태로 성체를 발현했었다.

게벨은 아이작이 도끼를 들어 올리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수도원장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요. 숨기기도 쉬울 테고, 빛의 법전께서도 아이작의 어깨에 큰 운명을 얹어 두신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냥 어린 나이에 힘이 장사인지도 모르죠."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기적이 일시적으로 임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역사적으로 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성체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게벨은 전멸당한 마을에서 아이작을 데려왔을 때부터 그럴 가능성은 지워두고 있었다.

한 번의 기적은 우연이지만, 두 번이나 일어났다면 의도된 것이다.

수도원장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여튼 오늘 대화는 없던 걸로 하지요. 성체에 대해서는 아이작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둘은 비밀을 약속했지만, 이미 그 말을 듣고 있는 또 다른 귀가 있었다.

***

잠시 뒤, 아이작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촉수를 회수했다.

'게벨이 날 수도원으로 데려왔다고?'

아이작은 칼센에게 칼을 맞았던 날을 떠올렸다.

거기서 수도원까지 오게 되기까지가 분명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게벨이 개입했다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정체를 일부러 숨겼다는 뜻이었다.

아이작은 당혹스럽긴 했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왜 그동안은 아는 척도 안 한 거지?'

어쩌면 다른 고아들 사이에 숨겨두고 특별하지 않은 아이로 키우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의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성체'인지 뭔지를 교단 상부에 알리지 않으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고.

'대우받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런 처지가 될 줄은 몰랐군. '

새로 얻은 정보가 놀랍기는 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다만 만약의 사태가 닥쳐왔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서사적으로,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어린아이의 목숨은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아이작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촛불이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세상을 불태울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검술을 가르쳐주마."

다음 날 아침.

이미 알고 있었던 아이작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게벨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도록 적당히 좋아하는 척을 하기는 했다.

"단,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어제 도끼를 들어 올렸던 것처럼 다른 데서 쓸데없이 괴력을 발휘하는 일은 피하도록 해라. 무슨 말인지 알지?"

기적을 발휘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기적이라기보다는 괴물의 권능이지만.'

아이작은 게벨의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는 게벨이 애초부터 자신이 괴력을 발휘한 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보여준 것이었다. 사교성 없는 게벨이 떠들고 다닐 일도 없거니와, 탈영한 전 성기사라는 그의 신분 역시 불필요한 관심을 사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이야말로 자신이 발휘한 힘이 기적이 아니라 촉수 괴물을 이용한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상위 교단에 의해 자세한 조사라도 들어갔다간 당장 잘 구운 바비큐가 될 것이다.

'적당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여기서 꿀 빨다가 도망치려고 했는데 잘됐군.'

"네. 좋습니다."

아이작이 흔쾌하게 대답하자 게벨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군."

'아차, 너무 쉽게 응했나?'

한참 관심에 굶주릴 나이인데.

하지만 아이작은 뻔뻔하게 대응했다.

"싫다고 하면 검술 안 가르쳐 주실 거잖아요?"

게벨은 사실 이젠 아이작이 뭐라고 하든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아이작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과 있다가 실수로 성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언젠가 아이작이 수도원을 떠날 때, 몸을 지킬 수단을 하나라도 터득해놓길 바라기도 했다.

"뭐, 좋아."

게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제 장작에 박아넣었던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일단 이것부터 시작하자."

"...도끼를요? 또 들어 올리나요?"

"아니. 지금 네 몸에 맞는 칼이 없다. 내 칼은 네가 쥐기에는 너무 길고 손에 안 맞지. 그러니 몸이 제대로 크기 전까지는 아무거나 쥐고 연습을 시킬 거다."

수도원에 무기라고 해 봤자 몽둥이나 스태프 정도지 제대로 된 날붙이가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게벨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여벌 무기가 여러 개 있었지만, 말했듯이 아이작에게 맞는 무기는 아니었다.

"무기라는 건 네 생각 이상으로 쉽게 부러지고 상하는 물건이다. 전투 상황이 벌어지면 손에 잡히는 게 뭐든 들고 싸울 수 있어야 해. 어차피 모든 무기의 기본은 똑같다."

"기본?"

"뾰족한 부분으로 적을 빠르게 내려치는 거지."

게벨은 손도끼를 쥐고 정면을 응시했다.

수도원의 시시껄렁한 잡일을 도맡아 하던 게벨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닳을 대로 닳은, 한 명의 백전노장 성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