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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6)

87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뚝뚝.

칼날 끝에 맺힌 핏방울이 느릿하게 떨어진다. 하수로에 내려앉은 끈적한 어둠이 핏방울의 선홍빛을 감췄다.

그건 마치 그림자의 파편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없이 부서진 생명의 마지막 조각 말이다.

나는 그림자로 어둠을 몰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때가 낀 희미한 조명 아래 섰을 때, 눈앞의 두 명의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놀람을 드러냈다.

"대체 너희는 뭐지? 왜 우릴 공격한 거냐?"

먼저 렌즈 위로 누커만 푸글리시라고 인적사항이 뜬 사내는 차가운 분노를 터트렸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흡사 야수와도 같았다.

나는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말은 바로 하지. 상황을 극단으로 끌고 간 건 너희들이다."

"뭣!? 그럼 정체도 모르는 네놈들에게 당하기라도 하란 말이냐!"

"아니. 가만히 있었으면 너희는 아무 일 없었을 거다. 지금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뭐?"

분노를 토하던 누커만의 얼굴에 순간 당황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 불과 조금 전까지 죄수를 죽여댔으니.

나는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서 빠르게 진실을 덧붙였다.

"아! 물론 거기 안경 쓴 양반 빼고. 우리는 저 양반이 목적이었거든."

"히, 히이익!"

원래도 하얗게 질려있던 요제프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며 더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을 몸서리치던 그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반대로 누커만의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아니라 요제프를 노렸다고?"

"애초에 너희를 노렸더라면 귀찮게 왜 그랬겠나? 그냥 수용동 진입하자마자 폭탄 왕창 때려 넣고 닥치는 대로 쏴 죽였겠지."

"······."

누커만은 말없이 나를 노려봤다. 내 말이 진실인지 살펴보면서, 머릿속으로도 열심히 계산하고 있을 거다.

그러다 마침내 견적이 나왔는지, 이를 으드득하고 갈며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럼 이 모든 사단이 이 자 때문이라는 건가?"

누커만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요제프를 노려봤다. 이미 분위기 자체도 조금 전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변했다.

"누, 누커만! 왜, 왜 그러나? 나를 지켜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 그렇지! 그럼 헛소리나 지껄이는 저 미친 칼잡이를 어서······ 커, 컥?"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설득하던 요제프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트렸다. 누커만의 솥뚜껑만 한 손이 요제프의 머리통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이런 미친놈이 아니라 다른 죄수들의 위협에서부터였지. 네 덕분에 내가 수십 년간 쌓은 조직이 풍비박산 났어."

나직하게 내뱉는 누커만의 목소리에 진득한 살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요제프도 그걸 느꼈는지, 급하게 말을 꺼냈다.

"누, 누커만! 지, 진정하게! 내가 사업권을 더 주겠네! 큰돈을 벌 수 있는······ 꺽!"

콰드득!

요제프는 더 입을 놀리지 못했다. 머리가 으깨진 두부처럼 박살 나버렸으니까.

"그따위 돈, 내가 벌어도 된다. 하지만 박살 난 조직은 돌아오지 않아."

누커만이 피와 뇌수에 젖은 손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꽤나 과격하군. 진즉에 이랬으면 좋았잖아?"

"······그랬겠지. 하지만 늦었다."

머리가 사라진 요제프의 시체에서 눈을 뗀 누커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시커먼 동공 아래로 붉은빛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너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순간 그를 중심으로 끈적한 살기가 자욱하게 풍겨왔다.

"후회할 텐데?"

하지만 나는 그 살기를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담담히 대답했다.

이 정도 기세에 영향을 받기엔 내가 걸어온 길이 만만치 않았다. 이 세계에 혼자 떨어진 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내 눈빛을 마주 본 누커만이 입매를 비틀었다.

"설마 네가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곳은 변수가 많아서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변수?"

"그래. 내가 제대로 힘을 쓰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너와 나, 둘뿐인 이곳에선 그런 걱정이 없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놈 역시 비틀어진 입매를 쭉 찢었다.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지이잉!

그때 급격히 가동되는 구동 모터 소음과 함께 누커만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목을 뽑아 죽여주마!"

순간 눈앞에서 누커만이 사라졌다.

* * *

붉게 빛나는 안광이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점멸하듯 공간을 뛰어넘는다.

'빠르다!'

찰나의 순간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시간에 놈이 주먹을 내질렀다. 칼과 부딪친 놈의 손끝에선 갈퀴 같은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카카카캉!

쾅!

순식간에 거세고 빠른 공방이 이어졌다. 놈은 양손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듯한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이어나갔다.

한쪽이 막히면 바로 다른 손으로, 거기가 막히면 또 다시 반대쪽 손으로.

나는 연신 뒤로 물러서며 놈의 거리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놈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내게 쇄도했다.

거리의 이점이 사라진다면, 한 자루의 칼과 두 손에 달린 칼날 중 유리한 건 당연히 후자였다.

게다가 놈의 손에서 튀어나온 칼날은 평범한 크롬 강철 따위가 아니었다.

기형적으로 확장된 검은손과 그 끝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거무튀튀한 칼날. 마치 괴수의 앞발과도 같은 그것의 정체는······

'데스핸드로군.'

데스핸드.

그 오만한 이름처럼 저 사이버웨어는 수많은 이를 죽음으로 인도한 죽음의 손이었다.

고도화된 탄소나노튜브를 첨가한 특수강이 재료인데, 그 단단함이나 날카로움은 물론이고 탄소나노튜브가 운동에너지를 흡수하여 질주하는 덤프트럭도 찢어발길 수 있는 괴물 같은 무기였다.

'과연 메인 에피소드는 메인 에피소드인가? 슬슬 전설급 무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군.'

과학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세계다. 거기에 국가가 사라져 도시끼리 치고받는 국지전이나 벌어졌고, 그나마도 지금은 전쟁다운 전쟁은 사라졌다.

대신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업전쟁은 은밀하고 소규모 전투 위주로 이뤄진다. 서로의 목표가 상대 기업의 공장이나, 건물 정도였으니.

당연히 그런 곳에서 사용하기 위해선 대규모 살상 무기보다 개인화기가 우선시됐고, 엄청나게 고도화된 무기들이 하나씩 발명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중적인 게 워 머신이다. 평범한 도시의 갱들에겐 워 머신도 재앙이나 다름없지만, 천상계 기업전쟁에선 워 머신은 방탄조끼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천상계 무기 중 하나가 바로 데스핸드다.

쾅!

내뻗은 칼끝과 놈의 손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칼날에 맺힌 포스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어마어마한 물리력을 뿜어낸다.

콰아아앙!

터져나간 압력으로 주변 공간이 비틀린다. 바닥과 천장이 쩍쩍 갈라지며 돌가루가 휘날렸다.

워 머신을 착용했더라도 충격이 있었을 법한 광경.

나는 터져나간 물리력의 반작용으로 뒤로 쭉 밀려났다. 서로 부딪쳤기에, 거기에 대한 반작용이다.

하지만 놈은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듯, 오히려 입가를 쭉 찢으며 달려들었다.

시커멓던 데스핸드가 붉게 달아올랐다. 서로 부딪쳤던 운동에너지, 그리고 포스가 뿜어낸 물리력을 흡수한 영향이다.

'······확실히 귀찮군.'

극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같다더니······ 물리법칙을 뒤틀어버리는 무기의 등장은 상대를 한결 까다롭게 만들었다.

"크하하하! 뒈져라!"

카캉! 카캉!

본인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놈의 붉은 안광이 더욱 진해졌다.

어둠 속에서 붉은 궤적을 그리던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점멸했다. 그럴 때마다 놈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다 데스핸드를 휘둘렀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가속된 속도가 공간을 뛰어넘을 정도다.

'데스핸드 말고도 또 뭔가 있다.'

놈의 움직임은 나조차도 눈으로 좇기 어려웠다.

아무리 몸의 대부분을 기계로 바꿨어도 물리적인 한계가 존재해야 하는데, 놈의 움직임엔 그런 게 보이질 않았다.

마치 과충전된 전지를 끼운 미니카마냥 미친 듯이 날뛰었다.

차차차창!

어느새 처음 놈과 부딪쳤던 장소에서 수백 미터나 뒤로 밀려왔다.

운동에너지를 흡수하는 데스핸드와 그 단점을 상쇄하는 미친듯한 속도는 궁합이 아주 좋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끌리는데.'

우리에겐 시간제한이 있었다.

남궁민수가 소울 프리즌을 도시와 격리시킨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시간이 끌리면 아무리 무능한 시 정부라도 이상한 걸 눈치챌 테고, 그럼 시 정부 방위군이 출동한다.

그렇게 되면 해방전선은 전멸이다. 나 역시 위험해질 테고.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정리를 해야······ 음?'

그때 놈의 머리를 비롯한 몸 전체에서 은은한 열기와 함께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아지랑이 질 정도로 달아오른 몸?

그러자 머릿속으로 한가지 정보가 스쳐 지나간다.

'설마 발할라인가?'

발할라(Valhalla).

시냅스와 중추신경계를 조작해 뇌의 연산속도와 거기에 맞춰 신체까지 제어하는 바이오웨어다.

생체와 결합한 바이오웨어 자체가 아직 연구가 덜된 분야라 제한적으로 쓰이는데, 그걸 무시하고 극도로 개량한 제품이 바로 이 발할라라는 놈이었다.

왜 발할라냐고?

'바이킹들이 뒈지기 전에 외쳤던 것처럼 일정 시간이 넘어가면 뇌와 신경계가 모조리 타버리기 때문이지.'

지금도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열을 내뿜고 있지 않던가? 아마 이대로 버티기만 해도 놈은 스스로 무너져 내릴 거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시간제한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놈의 비밀도 모조리 알았겠다, 제대로 확인해보기로 했다.

'발할라가 더 빠른지, 내 기술이 더 빠른지 확인해봐야겠어.'

메인 시나리오에 접어든 이상, 누커만 같은 자가 수시로 등장할 테니 말이다.

나는 호흡을 조절하며 놈의 패턴을 읽어나갔다.

놈의 공격은 빠르고 위협적이었지만,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그건 놈이 무술을 배운 게 아니라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타당!

쇄도하는 놈의 주먹을 검면으로 막았다. 거무튀튀한 주먹이 은색 칼날을 부러뜨릴 듯 거칠게 때렸다.

그때 번쩍! 하고 칼날이 빛을 내뿜었다. 포스가 쏟아낸 물리력에 서로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튕겨 나간 건 나 혼자였다.

데스핸드로 물리력을 모조리 흡수한 놈은 그 기세를 잃지 않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든다.

그리고 이어진 찰나의 순간, 나는 눈을 빛냈다.

나는 모았던 호흡을 단번에 내뱉었다. 온몸을 휘돌던 포스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신체 모든 세포를 가속시킨다.

한계까지 늘린 고무줄이 튀어나가듯, 순간적으로 튀어나가는 신형.

그 순간, 마치 별빛이 가득한 우주 속을 내달리듯 주변의 사물이 한줄기 점이 되는 걸 느꼈다.

서서히 느려지는 시간 속.

그 찰나의 순간이 쪼개진 공간 속에서 우리는 격돌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확신했다.

놈의 속도는 이게 한계임을. 한없는 우주 속 그저 지나치는 별빛 한 조각에 불과한 움직임일 뿐임을.

그리고 나는 그 별빛 사이를 질주하는 단 하나의 존재임을 말이다.

「제로의 영역」 2단계 레벨.

성광 돌파. 「순속(瞬速)의 칼날」.

콰과과과――――!

서거거걱――――!

나와 누커만은 한 줄기 빛과 함께 서로를 교차하며 지나갔다.

"······."

나는 가볍게 밟은 바닥에 멈춰선 채 천천히 뒤를 돌았다.

쿠당탕탕!

놈이 거칠게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피부는 모조리 찢겨나갔고, 놈의 골격과 근육 사이를 빼곡히 채운 크롬이 흉측하게 드러났다.

찰나의 시간. 수백 번의 칼질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놈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놈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꿈틀거렸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피로 바닥은 금세 흥건해졌다.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매캐한 기름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컥, 커억······ 마, 말도 안 돼······ 나보다 빠르다니······ 설마 네놈도 실험체였나?"

"······실험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놈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꺼져가듯 희미한 목소리로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끅, 끄윽······ 빌어먹을 기업새끼들······ 처음부터 믿는 게 아니었는데······."

툭.

꿈틀거리던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윽고 타닥! 하고 몸에서 전깃불이 일더니 온몸이 불타올랐다.

나는 새까맣게 타오르는 놈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놈의 손만 떼어냈다. 달아오른 데스핸드가 뜨거운 열기를 토했다.

'이건 쓸모가 있겠군.'

대충 품에 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사라진 요제프를 바라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타닥타닥!

정적이 내려앉은 하수도엔 시체가 불타는 소리와 오물들이 떠내려가는 물소리만 가득했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7)

88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소울 프리즌이 서서히 검게 물들었다. 그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태양이나, 밤늦게 몰려온다는 소나기 때문은 아니었다.

쿠르르릉!

천둥과 같은 굉음이 하늘을 진동한다. 난데없이 드리운 그림자와 요란한 굉음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우우웅! 우우웅!

하늘을 뒤덮은 거대 비행선들과 부유자동차들이 소울 프리즌 상공을 점령했다.

마치 지상의 어떤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소울 프리즌 전체를 감싼 부유자동차들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시 정부 방위군이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부유자동차의 자동문이 열리며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공을 점유한 거대 비행선에선 격납고가 열리며 반중력 슈트를 착용한 공수부대가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소울 프리즌을 에워싼 그들은 별다른 말도 없이 감옥으로 진입했다.

교도관들은 그저 입을 벌린 채 그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투타타탕!

콰콰쾅!

요란한 폭음과 총성이 감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사이에 들린 비명들은 소음에 묻혀 사라졌다.

* * *

군인들의 등장에 폭동은 빠르게 진압됐다.

물론 다량의 유혈사태와 함께.

"왜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지?

소울 프리즌의 중앙통제실.

방위군을 이끌고 온 부사령관 리차드 대령이 통제실장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통제실장이 흠칫 몸을 떨며 대답했다.

"무, 무슨 소립니까! 우리가 얼마나 지원요청을 했는데! 시 가지에 테러가 발생해서 빨리 못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테러 같은 건 없었다."

"무슨······?"

통제실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테러가 없었다고? 그럴 리 없다. 분명 그 이유로 급하게 기동타격대를 수배해 보내지 않았던가?

통제실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분명 그랬습니다! 그래서 기동타격대를 먼저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동타격대?"

리차드 대령이 고개를 돌려 부관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부관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기동타격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규정상 방위군이 먼저 출동하고, 만에 하나 소요가 소울 프리즌 외부로 번질 경우를 대비해 기동타격대는 난지 섹터 외부를 감시합니다."

"그렇다는군?"

리차드 대령의 시선이 다시 통제실장을 향했다.

일련의 대답을 들은 통제실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도착했단 말입니다!"

"기동타격대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벌써 두 시간은 지났다고요!"

억울한 듯 비명에 가까운 대답을 내뱉은 통제실장의 말에 리차드 대령의 눈빛에 이채가 스쳐 갔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은 단순히 감옥의 소요사태나 폭동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지?"

"1수용동! 1수동용으로 갔습니다!"

"그곳 상황은?"

"그······ 폭동 중에 CCTV 제어기가 고장난 곳이 몇 곳 생겼습니다."

"그중 하나가 1수용동이다?"

"그, 그렇습니다."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통제실장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연은 반복되지 않는 법.

하필 의심스러운 자들이 향한 곳의 CCTV 제어기가 고장 났다는 건, 분명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통제실장의 얼굴을 살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리차드 대령이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감옥의 통제실도 속였다? 꽤나 실력이 좋은 놈들인가 보군."

그가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모두 1수용동으로 향한다!"

"네, 대령님!"

중앙통제실을 에워싸고 있던 군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그제야 통제실의 교도관들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알게 모르게 군인들의 날카로운 기세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숨을 돌린 통제실장 역시 질린 표정으로 군인들이 사라진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번 폭동으로 죽어 나간 죄수 숫자가 몇인지 추정조차 되지 않았다. 못해도 천 단위는 가뿐히 넘을 거다.

게다가 리차드 대령의 말대로 뭔가 이상한 놈들이 끼어들지 않았던가?

"······씨발. 재수 없으면 진짜 옷 벗게 생겼네."

나지막이 중얼거린 통제실장의 목소리에 통제실 교도관들의 얼굴이 전부 구겨졌다.

수천 명이 죽어 나갔지만, 그들에겐 직장을 잃는 게 훨씬 큰일이었다.

* * *

초토화된 1수용동.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화약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여기저기 터지고 갈라진 내부는 검게 그을린 자국과 사방에서 흘러내린 피들로 흥건했으며, 곳곳에 버려지듯 방치된 시체들과 그 시체에서 떨어져나간 신체부위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 방에 들어가 바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몇몇은 극한의 공포에 질리기라도 한 듯, 구석에 쭈그려 앉아 혼잣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기도 했다.

저벅저벅.

그 사이를 군홧발이 걸어나가며 특유의 딱딱한 발소리를 냈다.

리차드 대령은 핏물이 흐르는 곳을 거리낌 없이 밟고 지나가며 쓰러진 시체들을 살폈다.

시체들 대부분이 사이버웨어를 구동한 흔적이 있었다.

감옥에 갇히는 순간, 모든 사이버웨어가 정지당하는데 이놈들은 보란 듯이 사이버웨어를 사용해 전투를 벌였다.

'······멀쩡한 사이버웨어라. 이들이 프리즌 갱이라 불리는 놈들인가 보군.'

리차드 대령도 알고 있었다. 프리즌 갱이라는 필요악에 대해서.

감옥을 감옥답게 유지하려면 필요한 놈들이었고, 그건 그도 일정 부분은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선 쉽사리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놈들을 노린 건가? 대체 왜?'

이들은 쓰레기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넘쳐나는 도시의 하층민 중에서도 걸러진 쓰레기들.

그런 쓰레기들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였다?

감옥에 침투시킨 세력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소울 프리즌을 고립시켜 아무 이상 없는 것처럼 꾸몄으며, 기동타격대로 위장한 처리반까지 보낼 정도로 대단한 놈들이?

'그럴 리 없지. 여기에 소요된 자원만 해도 얼만데······ 분명 놈들에겐 목적이 있다.'

게다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분명 기동타격대로 위장한 수십 명이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곳엔 어딜 봐도 죄수의 시체뿐이었다.

'어디로 빠져나간 거지?'

그는 주변을 살피며 계속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발견한 누커만의 방.

리차드 대령은 방 한가운데에 뚫린 무너진 비밀통로를 내려다보며 섬뜩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비밀통로라······ 운영을 아주 좆 같이 했었군."

이 정도 규모의 비밀통로를 소울 프리즌에서 몰랐을 리 없다.

아니, 몰랐다고 해도 문제다. 그건 결국 운영을 좆 같이 했다는 소리니까.

"배때지가 다들 부르셨어."

원래 이런 도시라는 건 알았지만, 눈앞에서 직접 마주하니 더욱 배알이 꼴렸다.

누구는 도시를 위해서 바다 건너 방사능으로 뒤덮인 대륙에서 십 년이 넘도록 개고생하다 왔는데, 안락한 도시에서 지내면서도 이따위 개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싹 다 갈아엎어야겠군."

그렇게 리차드 대령이 서늘한 눈빛을 뿜어내는 사이,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부관이 달려왔다.

"대령님! 이거 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부관이 건넨 건 어떤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태블릿이었다.

태블릿 화면엔 [Breaking News]라는 표시와 함께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40번대 구역의 전광판들이 지나가듯 보여지고 있었다.

모든 전광판엔 불타는 날개 모양의 심볼이 떠올라 있었으며, 그곳에선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오늘 도시를 좀먹는 바이러스를 없앴다. 우리는 아직 기억한다. 하울을 핑계로 하층민과 노동자를 거리에 나앉게 만들었던 빌어먹을 도시정화 사업을. 요제프 바르코프. 바로 이자가 재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관료다.]

그때 화면이 전환되며 머리가 날아간 요제프의 시체가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우리는 소울 프리즌으로 도망갔던 놈을 심판했다. 거하게 해 처먹고 특사로 풀려날 예정이었지.]

다시 화면이 바뀌고 불타는 날개 심볼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엔 그 심볼 앞에 잔뜩 노이즈가 낀 모습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디에 숨어도 우리의 눈은 더러운 위정자와 기업가를 주시할 것이다. 노동자여! 하층민이여! 우리에게 합류하라! 기득권을 단죄하고, 착취하는 기업을 심판하자!]

그 목소리엔 무수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저 영상으로 보고 있음에도, 그리고 기득권도, 기업가도 아닌 군인임에도, 리차드 대령의 감정에 동요가 일 정도였다.

그때 불타는 날개 심볼이 거세게 타오르며 사내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억하라. 우리는 해방전선이다.]

뚝.

영상이 끝났다.

"······."

리차드 대령은 말없이 까맣게 변한 화면을 보고 있다가 부관에게 태블릿을 넘겼다.

"모두 돌아간다."

"······? 알겠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건만 갑자기 돌아간다는 말에 부관의 얼굴에 순간 의문이 떠올랐으나, 그 의문은 정말 짧았다.

그는 자신이 십 년 가까이 모셔왔든 상관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부관이 물러서고, 바깥에선 복귀를 준비하는 군인들과 아직 후유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죄수들의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무너진 비밀통로를 내려다보던 리차드 대령이 몸을 돌렸다.

그는 발걸음을 떼며 생각했다.

'타이밍이 공교롭군. 하필 내가 돌아온 시기에 수십 년간 없었던 테러단체가 나타나다니.'

도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 * *

45구역의 해방전선 거점.

이번 일의 성공으로 그 활용이 다 했는지, 기지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각종 장비와 짐들이 트럭에 실려 빠져나왔고, 온갖 물건들로 가득했던 내부도 어느새 휑할 정도로 비어있었다.

"소식은 들었다. 덕분에 우리 애들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하더군."

나는 이전에 방문했던 남궁민수의 거처에서 다시 그를 마주했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아직 다수의 장비가 남아있었다.

"뭐, 돈값은 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바로 이글아이를 받고 싶은데?"

"지금 바로 말인가?"

그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마 생각보다 일이 커진 터라 내가 질문을 할거라 예상했나 본데, 나는 이미 해방전선의 창립 목적과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다.

내게 이 정도 일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용도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그리고 이들이 어느 곳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인지 알고 있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기지 상황을 보니 그쪽도 바쁜 것 같은데 서로 시간 아끼는 게 좋지 않나?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

"······쯧. 아쉽군. 네가 합류하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텐데."

정말 내게 또다시 가입권유를 할 생각이었던지, 그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큰 도움을 바라면 큰 대가를 준비해서 의뢰하면 되겠군. 난 언제든지 열려있다."

"뭐? 푸하하핫! 그래! 다음에도 부탁하지. 그때는 뭘 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손가락을 딱딱! 하고 두 번 튕겼다. 그러자 한쪽 벽이 격납고처럼 열리더니 소형트레일러가 다가왔다.

서서히 뚜껑을 여는 트레일러.

마침내 거대한 조기경보드론, 이글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드디어 실물로 보다니······.'

나는 가슴 속 어딘가에서 차오르는 묘한 희열감에 몸을 떨었다. 이 물건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돌아왔던가?

그때 남궁민수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차를 안 가져왔나? 아무리 힘이 좋아도 이걸 들고 바이크를 타는 건 무리일 텐데."

"물론이지. 이거 작동하나?"

"음? 그렇지? 며칠 전까지 떠 있던 걸 가져온 거니."

나는 남궁민수의 의아한 반응에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 없겠군."

"······?"

인벤토리 (1) [삽화]

89화. 인벤토리

남궁민수는 호버바이크를 타고 날아가는 강현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옆에선 이글아이가 마치 대형견처럼 나란히 날아가고 있었다.

"저게 워치 AI라고······?"

그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수많은 AI를 봐왔지만, 워치에 담긴 AI가 조기경보드론을 운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아무리 AI가 0과 1로 이뤄진 프로그래밍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 본체가 담긴 하드웨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G짜리 메모리가 100G, 1000G를 감당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숫자는 정직하니까.

"······그런데 저게 되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이글아이가 비록 수십 년 된 하드웨어라 해도 기본적으로 그 당시 오버 테크놀로지 기술이었던데다가, 군용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꼬라박아서 만든 물건이기에 지금 성능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이글아이의 자체 인공지능을 저 워치 AI가 덮어버린 것도 모자라, 아예 흡수해버렸다.

처음 그 모습을 확인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재의 모습까지도.

"······기업에 대한 반감만 아니었다면, 메가코프의 끄나풀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알면 알수록 강현재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정말 자신이 알아낸 것처럼 이데아로 물들었던, 그날 밤의 영향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유난히 강현재만 특별한 이유가 뭐지? 대체 그날 밤 무엇을 얻었기에?

"음속을 초월하는 속도와 강철을 썰어버리는 괴력이 전부는 아니야. 그에겐 단순한 각성자의 능력, 그 이상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시야 끝으로 강현재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진다. 이내 울퉁불퉁한 스카이라인 너머로 그 모습이 사라졌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남궁민수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 위로 희미한 글씨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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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씩 조각을 모으다 보면······ 뭔가 찾게 되겠지."

피식 웃은 그가 몸을 돌려 기지 안으로 사라졌다.

* * *

나는 호버바이크의 쓰로틀을 강하게 당겼다.

순간적으로 수백 킬로미터 속도로 미끄러지는 바이크가 하늘을 질주한다. 부아앙! 하는 전기 모터의 부하소리와 세차게 바람을 밀어내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뻥 뚫린 천공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걱정과 고민들이 마치 잡념처럼 흩어져 날아가는 기분이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낙조와 그 주위로 평화롭게 늘어진 깃털구름들.

저 멀리 하나, 둘 반짝이는 별빛들은 어둠을 불렀고, 낙조의 지평선은 끝에서부터 서서히 옅어졌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가까이 접근하는 비행물체를 쳐다보며 말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기분이 어때?"

그건 이글아이였다.

아니, 였었다.

지금은 이브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데이터들이 이글아이로 넘어간 터라 이브가 됐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든 게 다 새롭습니다.

이브의 목소리는 어딘가 들떠있었다. 이전에는 드론을 원격조종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예 스스로가 드론이 된 상태니 말이다.

물론 형태가 드론일 뿐, 조기경보드론은 최첨단 공학기술의 집약체이자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컴퓨터나 다름없었다.

이브가 말하는 '새롭다'라는 것도 여기서 기인했을 거다.

이전까지는 워치의 제한된 자원만 사용했던 이브가, 이제는 조기경보드론의 어마어마한 자원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까.

마치 티코만 타던 가난한 레이서가 갑자기 슈퍼카를 선물 받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하나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뭔데?"

-이제는 마스터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

묘하게 기뻐하는 이브의 목소리에 나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각성한 내 능력을 확인하고 본인이 폐기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아직은 이브라는 이름이 없었던 그때의 기억이.

'벌써 그게 거의 1년 전이로군.'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브야. 네가 도움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앞으로도 그럴 테고."

-······감사합니다, 마스터.

우리는 그렇게 잠시 말없이 하늘을 날았다.

지상에선 숨이 막힐 것 같이 답답했던 스카이라인이, 하늘 위에선 마치 캔버스의 라인이 되어 풍광을 수채화처럼 담았다.

붉었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별빛들이 사라지는 낙조를 대신해 반짝였다.

저 멀리 한줄기 별똥별이 기다랗게 떨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별똥별을 따라 나아갔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진 모르지만, 언젠간 추락할 것을 알지만······ 끝없이 스스로를 불태우며 나아가야 하는 운명인 것은 같기에.

우리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

* * *

다음날.

로세툼의 리모델링이 끝났다는 소식에 나는 로세툼으로 향했다.

'내 집은 언제 수리가 끝날지 모르겠군.'

처음엔 다론이 박살 내고, 얼마 후 암살자들이 또 한 번 휘저어놨던 내 집은 여전히 수리중이었다.

나는 새롭게 무너진 천장과 곳곳에 누가 봐도 주먹이 뚫고 들어간 벽을 바라보며 데이지에게 물었었다.

분명 암살자들이라 미사일을 쏴댄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녀는 슬그머니 양손을 뒤로 숨기며 모른 척 대답을 회피했다.

아무튼, 나는 로세툼에 도착해 완공된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 건물 전체가 로세툼이라고?"

나는 외관에서부터 풀풀 풍기는 아찔한 부(富)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약간은 허름한 빌딩 중의 하나였던 건물이었는데 완전히 환골탈태했다. 이 정도면 임독양맥 뚫고 상태창까지 보일 정도의 변화다.

물론 그녀의 취향이 담긴 외관이라 중세풍 느낌이 물씬 나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지나가면서 한 번쯤 돌아볼 만한 건물이 됐다.

"꼭 고급 레스토랑이나 부티크 호텔처럼 생겼······"

나도 모르게 감상평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요, 현재 씨!"

그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살랑이며 짧은 계단을 내려왔다.

반쯤 걸친 얇은 카디건 위로 그녀의 백금발이 물결치듯 출렁거렸고, 그럴 때마다 깊게 파인 어깨선과 쇄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 아래로는 새하얀 반스타킹에 검은색 스트랩슈즈를 신었는데,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뭔가 하울에 다녀온 이후 취향이 많이 바뀐······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기엔 로세툼 외관이 너무 대놓고 중세 앤티크 스타일이다.

'그냥 스스로 제한을 뒀던 걸 풀었다고 보는 게 맞겠군.'

왜 제한을 뒀는지, 그리고 왜 하필 앤티크 스타일인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야 제 나이 때 아가씨 같아서 너무 예쁘고 잘 어울렸다.

나는 폴짝폴짝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에게 말했다.

"뭘 마중까지 나오고 그래?"

"현재 씨한테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요!"

내 앞으로 다가온 로제가 나를 올려다보며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그래?"

고맙긴 한데······ 왜 건물 구경시켜준다면서 수줍어하는 거야?

"어서요!"

뭔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변한 로제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나를 끌고 로세툼으로 들어왔다.

딸랑딸랑.

이전 로세툼 철문에 붙어있던 종을 떼어왔는지, 이번에도 애처로운 종소리가 로세툼의 방문을 알렸다.

그리고 펼쳐진 1층의 광경.

"······와."

이건 정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일단 층고가 말도 안 되게 높아서 개방감이 장난 아니었다. 족히 7~8미터는 할 것 같은데, 이건 2층을 통째로 뚫어서 층고를 높인 것 같았다.

2개 층을 하나로 합쳐버리다니······ 건물 전체를 혼자 쓰니까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대리석 깔린 로비엔 비싸 보이는 소파와 탁자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 뒤로 손님을 맞는 응접실과 로제가 사용할 사무실이 커다랗게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중개인 사무소야?'

이전의 로세툼도 평범한 중개인 사무소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지만, 이번엔 아예 궤를 달리했다.

누가 이곳을 보고 중개인 사무소라고 생각하겠는가? 누가 봐도 호텔 로비인데.

'게다가 이번엔 보안 준비도 철저히 했지.'

애초에 이번 리모델링 목적 자체가 보안이었다.

이 로비에만 해도 기둥 속엔 전투 안드로이드가 열대 가까이 숨어있었고, 천장엔 조명으로 위장한 초정밀 머신건과 대구경 저격총이, 바닥엔 접촉형 EMP충격기가 깔려있었다. 거기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잡아먹는 고출력 펄스 레이저포도 한 대 설치했다고 들었다.

일단 내가 대충 들은 것만 그 정도고, 그 외에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고 알고 있다. 보안공사를 담당한 <소울이터>에서 확인차 몇 번이나 연락이 왔었으니까. 이게 맞냐면서.

"어때요? 멋지죠?"

그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봐도 잘했다고 칭찬해달라는 얼굴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실제로도 (돈지랄할 수 있는 자본력이) 멋지다고 조금 생각했었고.

"응. (돈지랄할 수 있는 자본력이) 멋지네."

"헤헤! 당신이라면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요!"

"······?"

로제가 배시시 웃으면서 2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갔다.

원래 3층에 해당하는 2층에 올라서자 사방이 유리로 분류된 공간이 나왔고, 그 공간들 안에는 컴퓨터와 서버로 추정되는 기계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마 2층은 데이터 센터로 사용하는 것 같다. 중개인이 사용하는 데이터가 생각보다 꽤 방대하니 말이다.

그런데······.

"얘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로제의 손에 붙들려 어디선가 끌려 나온 데이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감자칩을 오물오물 씹어먹고 있었다.

"데이지가 컴퓨터 다루는 솜씨가 예술이더라고요! 혼자서 아파트 방화벽을 뚫고 창고 하나를 쓰고 있더라니까요?"

로제가 놀랍지 않냐는 얼굴로 말했다.

뭐······ 조금 놀랍긴 했다.

나와 데이지가 사는 아파트는 10번대 구역의 고급아파트다. 사이버 스페이스로 연결된 이 세계에선 아파트 역시 연결되어 있었고, 고급아파트답게 사설보안업체가 방화벽을 감시했다.

즉, 아파트 방화벽을 뚫었다면 웬만한 기업들 방화벽 역시 뚫을 수 있는 실력자라는 소리다.

"······그래서?"

"그래서긴요. 그런 인재가 집구석에 처박혀있는 건 언니로서 두고 볼 수 없죠! 그래서 여기로 데려왔어요. 우리 로세툼의 데이터센터장으로!"

"······."

잠깐. 데이터센터장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언니라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데이지를 쳐다봤다.

마침 나를 쳐다보고 있던 데이지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때요? 우리 데이지가 이렇게 능력 좋은 프로그래머일지 누가 알았겠느냐고요!"

"웃······! 우으으!"

그 순간 로제가 딴 곳을 바라보고 있던 데이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로제의 가슴에 파묻혀 데이지가 힘없이 바둥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투명한 유리창 위로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는 로제와 부끄러워하면서도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데이지. 그리고 그 모습에 피식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쳤다.

셋 다 이유는 다르지만, 다들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세계로 끌려와 홀로 살아가는 나와 아버지를 여의고 가문에서 쫓겨나 혼자가 된 로제. 그리고 정확히 몇 살인진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 암살자로 살아가다 은퇴 후 홀로 사는 데이지까지.

'······어쩌면 이 셋이 모인 게, 마냥 우연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외로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들도.

그리고 나 역시도.

인벤토리 (2)

90화. 인벤토리

2층을 넘어 3층으로 향했다.

원래는 4층이었어야 할 이곳도 위층을 뚫어서 층고를 높였는데, 그 용도는 로제의 거처였다.

"이거 혼자 쓰기엔 너무 큰 집 아니야?"

나는 시원하게 뻥 뚫려있는 공간을 바라보며 물었다.

기존 상가건물 한층 전체를 사용하는 거니 족히 4백 평은 넘어갔다. 반대편에 있는 방문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일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사이드를 복층으로 만들어서 계단으로 이어진 위층도 따로 존재했다. 마치 개츠비가 와인 잔을 들고 서 있을 것 같이 말이다.

"그래서 데이지도 함께 살기로 했어요!"

"······어?"

나는 전혀 예상조차 못 한 대답에 귀를 의심했다.

누구랑 같이 산다고?

"데이지요! 그 아이도 혼자서 재미없게 지내더라고요.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데이지는 승낙했고?"

"네! 좋아하던데요?"

"······."

나는 시종일관 무표정에 감정기복이 드문 그녀의 좋아하는 모습이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았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

일단 데이지가 로제와 함께 지낸다는 건 좋은 소식에 가까웠다.

그녀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떤 사건을 불러올진 모르겠으나, 혹시나 있을지 모를 로제의 위험은 확실히 제로에 수렴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로제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머뭇거리듯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 그리고 당신 방도 있어요!"

"내 방?"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다, 당신 말대로 혼자 쓰기엔 너무 크잖아요! 그래서 남는 방 하나 그냥 주는 거예요! 호, 혹시 피곤해서 집까지 가기 힘들 때 쓰라고요!"

로제가 특유의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도 살짝 떨려 나오긴 했지만, 평소의 틱틱대는 목소리였고.

하지만 한껏 붉어진 얼굴까진 숨길 순 없었는지, 지르듯 말하곤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발그랗게 익은 볼이 꼭 복숭아 같았다.

'이래서 입구에서 수줍어했었군?'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나 했더니, 이런 선물을 계획했었나?

나는 차갑고 도도한 그녀의 얼굴이 오늘따라 귀엽다고 느껴졌다. 이 세계에서 살면서 설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고맙군. 네 말대로 잠깐 피곤할 때 쉬다 가도록 하지."

"그, 그러던가요! 당신 방이니까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나를 힐끗 바라본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끼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더 쳐다봤다간 발갛게 익은 얼굴에서 피가 나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집 구경은 이게 끝인가?"

"······아! 사실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공간이 하나 더 있어요."

"날 위해 준비한 공간?"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방 말고 다른 공간을 준비했다고? 그런데 날 위해 준비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지?

"따라와요. 보여줄 테니까. 분명 좋아할 거에요."

"어딘데?"

"지하에요."

* * *

로제와 함께 지하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드러난 뻥 뚫린 공간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사뿐사뿐 걸어서 불을 켠 로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짜잔."

한순간에 달아난 어둠이 공간을 밝힌다.

달아난 어둠이 사방으로 스며든 게 아닌가 싶은 온통 새까만색으로 칠해진 공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탄력. 힐끗 바닥을 내려다보니 탄소강화고무로 만들어진 장판이었다.

'이게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그 외 천장과 벽은 거무튀튀한 강철을 이은 듯 매끄러웠고, 한쪽 벽에는 장식하듯 냉병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스미스의 공방인 <세븐프롱드>에서 본 무기들이다.

이 모든 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설마 연무장인가?"

"맞아요. 당신이 저번에 그랬잖아요? 마땅히 검을 휘둘러서 훈련할 공간이 없다고."

"······."

그걸 기억했나? 집에서 함께 지낼 때 지나가듯 말했던 내용인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너무 큰 선물이로군."

"설마요? 당신이 내게 해줬던 일들을 모조리 잊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 오히려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를 둘러싼 가문의 암투도, 그녀 얼굴에 항상 그늘져있던 그림자의 의미도, 그리고 그녀가 흘렸던 눈물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돈으로 계산되는 이 세계에서 건물 한 층 전체를 훈련장으로 만들어서 내어준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다.

나는 뭔가 말을 더 덧붙이려다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는 그냥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군. 잘 쓰지."

"그럼요! 그래야 해준 저도 뿌듯하죠! 이곳에서 훈련하다가 피곤하면 집으로 올라와서 쉬면 돼요! 이참에 아예 들어와서 살아도 되고요!"

로제가 해맑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군?

"그건 차차 생각해보지. 이 무기들은 전부 스미스 씨에게서 가져온 건가?"

내 대답에 살짝 실망한 얼굴이 된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이 쓸만한 무기로 추천해달랬더니 이걸 전부 보내왔더라고요."

"으음. 그래?"

나는 진열된 무기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체인소드처럼 기발한 무기는 없었으나, 온갖 종류의 냉병기들이 걸려있었다. 품질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스미스 씨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네? 왜요? 새 칼이 필요해서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가 사주겠다고 말할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번에 좋은 물건을 얻어서 말이야. 무라마사 명인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거든."

* * *

세븐프롱드.

오랜만에 방문한 이곳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던 농기계나 전동공구들은 모조리 사라졌고, 그 자리를 날이 바짝 선 냉병기 콜렉션이 대신했다.

물론 평범한 냉병기뿐만 아니라, 플라즈마 소드라든가, 초진동 워해머와 일렉트릭 커터 같은 첨단무기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전광판엔 'VIP용 맞춤형 개조 사이버웨어'를 광고하고 있었다.

무라마사 공작소 출신답게 양산품보단 고급화 전략을 쓰는 것 같았다.

"많이 달라졌군요."

내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아 무언가를 조립하고 있던 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2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그가 몸을 일으키자 카운터가 꽉차는 느낌이었다.

"어서 오시오! 로제 양에게 연락받았소!"

그가 솥뚜껑같이 커다란, 그리고 실제로도 크롬으로 이뤄진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원래 연락을 하고 지내나 봅니다?"

"그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입을 닦겠소? 여길 빼앗겼으면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게 됐을 텐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늙었소이다. 하하하!"

그가 우람한 가슴근육을 꿈틀대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성대도 임플란트한 건지 우렁찬 웃음이 가게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잘하셨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도 정확한 타임라인까진 모르겠지만, 메가코프의 후원을 받아서 소울 시티의 전설명인으로 불리지 않던가?

광휘의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하하! 말만으로도 고맙소! 그건 그렇고, 내 손을 빌려야 할 일이 있다고?"

과연 상남자답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작은 일 하나, 큰일 하나입니다."

"오호? 두 개나? 어떤 흥미로운 일거리일지 기대되는군! 무려 소드마스터가 가져온 일거리라니!"

그가 눈을 반짝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곧장 들고 왔던 가방에서 데스핸드를 꺼냈다.

대충 닦긴 했는데 그래도 사람 몸에 붙어있던 걸 강제로 떼온 거라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이건······ 데스핸드 아니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냅다 데스핸드를 들곤 조명에 이리저리 비춰댔다. 누가 봐도 남의 몸에서 떼어온 물건이었지만, 그는 출처를 묻지 않았다.

나는 데스핸드를 입에 가져가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입에는 왜 넣는 겁니까?"

"아? 하하! 좋은 금속을 보면 씹어보는 게 습관이 돼서. 하하하!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러면서 이번엔 혀로 핥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이 물건을 여기에 맡기는 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기에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로 쓸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음? 이걸 그대로 안 쓰고?"

데스 핸드의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던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쓰려고 했다가도 저 모습을 보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저는 임플란트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 허어? 진짠가?"

"스미스 씨가 보기에 제가 임플란트를 한 몸인 것 같습니까?"

"나는 겉으로 안 보이기에 굉장히 비싸고 고급진 사이버웨어를 사용하는지 알았소. 그래야 당신의 강함이 설명되니 말이오."

스미스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다시 천천히 살펴보고는 물었다.

"대체 임플란트도 없는데 어찌 그리 강하단 말이오? 아무리 좋은 무기를 쓰더라도 순수한 육체론 감당이 안 될 텐데······."

"······."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설명해줘 봤자 이해를 못 할 테니까.

그는 잠시 더 신기한 듯 내 몸을 훑어보다가, 이내 데스핸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이걸 녹여서 다른 물건을 만들어달라는 말 같은데······."

"맞습니다. 재료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요."

"흐음! 그건 맞는 말이지만, 사실 탄소나노튜브특수강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데스 핸드라오. 운동에너지는 손으로 상쇄하고, 공격은 손끝의 칼날로 하는 거지. 공격할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운동에너지의 상실을 날카로운 절단면으로 최대한 줄인 형태니까."

모든 운동에너지는 양방향이다. 작용과 반작용. 이 기본적인 물리법칙에서 탄소나노튜브 역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수비할 때 장점으로 작용하는 운동에너지 상쇄는, 반대로 공격할 때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내가 100의 힘으로 공격해도, 그 운동에너지를 받는 데스 핸드가 그걸 다 상쇄시켜 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그걸 커버하기 위해 손끝에 칼날을 만들어서 공격하는 면적을 최소화한 거다. 운동에너지가 상쇄되기 전에 날카로움으로 찢어버리면 되니까.

"대충 이해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고 슈트를 만들기엔 재료가 터무니없이 모자라고."

고민이 되는 듯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이며 데스 핸드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나를 바라봤다.

"혹시 임플란트를 안 하는 이유가 기계를 아예 못 다루기 때문이오?"

"그건 아닙니다."

내 대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데스 핸드를 카운터에 내려놨다.

"좋소. 그럼 당신을 위한 데스 핸드를 만들어주지. 어차피 기본 형태는 남아있으니 장갑 형태로 착용하는 방식으로 만들면 될 테고······ 따로 전력공급과 형태변환만 추가하면 될 거요."

"······그게 가능합니까?"

스미스의 말은 임플란트로 구동하는 사이버웨어를 착용하는 사이버웨어로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이건 그의 말대로 기본 형태가 같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스미스는 당연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다만, 시간은 좀 걸릴 수도 있소. 당신이 칼을 사용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디자인도 새롭게 해야 하고 경량화도 함께 진행해야 하니까."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단순 형태변환도 놀라운데, 내게 맞춰서 디자인도 바꾸고 경량화까지 한다고?

과연 광휘의 스미스다. 그래. 데스 핸드의 손가락쯤 빠는 게 뭐 어떤가? 다른 것만 안 빨면 되지.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건 이렇게 하는 거로 하고······ 두 번째 일거리는 뭐요? 첫 번째 일거리보다 더 재밌는 일거리요?"

대수롭지 않게 결정을 내린 스미스가 나를 쳐다봤다. 그는 또 새로운 장난감을 달라는 눈빛이었다.

대체 이런 양반이 그동안 농기계나 만들면서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군.

나는 차분히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나를 놀라게 했으니, 이제 그가 놀랄 차례다.

"무라마사 공작소의 인벤토리 프로젝트. 그거 스미스 씨의 아이디어였죠?"

"······! 그걸 어떻게?"

인벤토리 (3)

91화. 인벤토리

인벤토리 프로젝트.

상공에 거대드론들을 띄워 전장 전체의 주요보급을 하자는 아이디어.

어떤 전쟁이든 항상 보급이 문제였기에 냈던 아이디어였다. 보급으로 인해서 전황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스미스가 무라마사 공작소를 나오기 직전까지 진행했던 프로젝트였고, 그가 나오면서 사장된 프로젝트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이 칼잡이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도시엔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죠."

강현재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

"허허······ 딱히 거창한 비밀은 아니지만 놀랍긴 하구려. 그런데 그걸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오?"

"제 전용 인벤토리를 하나 갖고 싶습니다."

"전용 인벤토리?"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스미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인벤토리 프로젝트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나 보군? 그건 불가능하다오. 인벤토리 시스템의 핵심은 드론들이 아니라, 그 드론을 컨트롤하는 사령탑에 있다오."

"알고 있습니다."

"······? 알고 있는데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이오?"

스미스가 의아한 얼굴로 강현재를 쳐다봤다.

정말 알면서 그런 부탁을 한 게 맞을까? 알고 있다면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요구인 줄 알 텐데 말이다.

스미스는 혹시나 이 칼잡이가 뭔가 착각하는 게 있을까 싶어서 말을 덧붙였다.

"다시 말해주겠소. 인벤토리 시스템의 사령탑은 조기경보드론이오. 그게 뭘 뜻하는진 아시겠소? 민간인은 절대 구할 수 없다는 뜻······"

"제가 이글아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때 길어지는 스미스의 말을 끊고 강현재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잠시 강현재가 내뱉은 말을 되새기던 스미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뭐, 뭣! 그게 진짜요?"

이글아이.

지금은 과거에 묻혀 그 이름이 빛바래졌으나, 한때 전 세계의 모든 정부와 메가코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하려고 했던 1세대 조기경보드론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 칼잡이가 갖고 있다고? 대체 무슨 수로?

강현재가 경악에 질린 스미스의 눈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죠. 이글아이를 제 전용 인벤토리로 만들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오."

잠시 머뭇거리던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태도를 봤을 때 이글아이를 가진 건 사실인 듯 보였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강현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엉겁결에 부탁을 받게 된 스미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오. 실제 제작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지. 이글아이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오. 굳이 그런 위험을 부담할 필요가 있겠소?"

스미스가 말한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라는 건, 정말 이론만 존재하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도 실제로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한 대에 천억 원을 호가하는 물건이 조기경보드론이다. 그걸 재료로 실험하고 연구하는 프로젝트인데, 그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졌으니 아무리 스미스라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전 스미스 씨를 믿습니다. 부탁드리죠."

눈앞의 칼잡이는 자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것도 한 치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이.

"······."

스미스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런 일방적인 호의와 믿음을 느꼈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질 않는다. 무라마사 공작소에 들어간 이후, 매 순간이 경쟁의 연속이었으니.

조금 더 그 묘한 감정을 느끼던 스미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일단 이글아이 상태부터 보지."

* * *

세븐프롱드 뒷마당에 위치한 작업실.

이글아이를 확인하던 스미스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랍군! 이렇게 상태가 멀쩡한 이글아이가 존재하다니?"

그는 마치 애인의 몸을 탐구하기라도 하듯 연신 이글아이를 쓰다듬으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햇빛에 바래진 도색부위와 벗겨진 스크래치, 자그마한 볼트 구멍까지도.

손끝의 감각을 느끼듯 한 차례 전부 만져본 스미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입이 벌어지더니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츄릅!

그의 혓바닥이 닿는 그 순간, 갑자기 이글아이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전기모터가 거세게 가동되며 굉음을 내뿜었다.

"······음?"

깜짝 놀란 스미스가 몸을 흠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갑자기 왜 켜졌지? 라는 의문이 든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마, 마스터! 이 미친 인간이 뭘 하려는 겁니까!?

이브가 다급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그사이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둔 채, 스미스의 혓바닥이 다시 이글아이의 본체를 할짝거렸다.

-꺄, 꺄악! 마, 마스터! 살려주세요!

당장에라도 프로펠러를 돌려서 날아갈 것처럼 윙윙대는 이브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나는 스미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스미스 씨. 그만하시죠. 제 AI가 기겁을 하는군요."

"······츄릅. 음? 그게 무슨 소리요? AI가 기겁을 하다니?"

고개를 돌린 그가 입가에 묻은 침을 훔치며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제 AI가 여성체인데······ 그, 스미스 씨가 자기 몸을 핥아대고 있으니 당연히 기겁할만하지 않겠습니까?"

"······? 농담이오?"

"진담입니다만······?"

내 대답을 들은 그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그를 물끄러미 마주봤고.

잠시 나와 시선을 교환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잠시······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러더니 작업대 한쪽에서 기다란 연결선을 뽑아오더니, 그대로 이글아이에 꽂았다.

그러자 스피커로 이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온다.

"야! 이 미친 변태 늙은이야! 남의 몸을 왜 핥아대는 거야? 성욕을 해결하고 싶으면 섹스돌이나 빨아대라고! 알았어!?"

와우······.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여태껏 나에게 말하는 것밖에 듣지 못해서 이런 성격을 갖고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조차 못 했다.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지만, 대체 누구를 모델로 디자인한 거지?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스미스를 쳐다봤는데, 그는 경악에 질린 얼굴이었다.

"자, 잠시만! 혹시 날 놀리는 거요? 통신, 통신이 연결되어 있는 건가?"

그가 애써 부정하는 목소리로 나와 이글아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어림없지.

"뭐라는 거야, 이 변태 늙은이가! 현행범으로 들키니까 발뺌하는 거야? 사과부터 해! 안 그러면 가만있지 않겠어!"

스피커에서 이브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작업실의 조명이 꺼졌다, 켜지고,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꺼져있던 TV와 라디오가 켜지더니 채널과 주파수를 어지럽게 이동하며 소음을 낸다.

누가 봐도 이브가 작업실의 제어권을 장악한 모습이다.

그 광경에 스미스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허, 허허허? 진짜······ 진짜 AI란 말인가?"

그러더니 잔뜩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말씀해보시오. 지금 내가 보는 게 사실이오?"

"네. 이브라고 합니다."

"이브?"

"저 녀석의 이름이죠. 제가 붙여줬습니다."

"허? 어찌 AI에 이름을······?"

그가 이해하기 어렵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과거 다이손 영감이 보였던 태도와 똑같은 모습이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선 여전히 이 세계 사람들의 인식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AI는 이름이 없는 게 당연할까? 인간들의 일상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게 바로 AI인데 말이다.

"저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땐 제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저 녀석도 혼자였고. 그래서 자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이놈 저놈 하는 것보다 이름이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을 들은 스미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대체 무슨 궤변을 늘어놓느냔 표정이다.

그리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이글아이를 힐끗 바라보더니,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허. 당신은 정말 신비한 사람이로군. 발상의 전환이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

"아무튼, 진짜 AI가 맞다는 거요?"

"뭐, 보다시피요."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침 이브가 이글아이에 달린 레이저포인터를 사용해 자신을 힐끗거리는 스미스의 눈을 향해 눈뽕을 시전하고 있었다.

잠시 현타가 온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미스가 이브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그 안에 AI가······ 아니, 네가 있을 줄 몰랐구나."

"흥! 조심하라고요! 다음번엔 얄짤없으니까!"

이브의 성난 목소리가 한 번 더 스피커에서 들려오고 나서야, 난리를 치던 이글아이가 조용해졌다.

스미스는 여전히 현타가 온 얼굴로 이글아이를 바라보며 '허······'하는 숨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그때 귓가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제가 기세를 꺾어놨으니까 마스터가 협상하는데 있어서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뿌듯해하는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 * *

스미스가 다시 이글아이를 살펴본다. 하지만 이번엔 아까와 달리 혓바닥이 마중 나가지도 않았고, 더듬는 손길도 조심스러워졌다.

잠시 후, 내부상태와 데이터까지 모조리 확인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완벽하군. 오히려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개량된 형태야. 뛰어난 엔지니어의 손을 거쳤나 보군."

과연 스미스는 남궁민수의 손길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단순히 누군가의 손을 거친 걸 넘어서, 뛰어난 엔지니어에 의해 개량됐다는 것까지.

작업대에서 일어선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확히 어떤 형태를 원하오? 인벤토리는 원래 100대 이상의 드론을 활용하는 거라 파트가 나뉘어 있소.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않소?"

"네, 아닙니다.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제가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저는 사출된 무기를 보급받는 형태를 원합니다. 당연히 대부분은 검 같은 냉병기가 되겠고요."

"음? 잠시만. 지금 '사출'이라고 했소?"

스미스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네. 상공에서 사출된 무기가 원하는 곳으로 떨어지면 됩니다."

"······너무 만화같이 터무니없는 걸 원하는군?"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터무니없다고 한 이유를.

"작은 문제는 차치하고······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소."

"말씀하시죠."

"첫 번째는 발사체 없이 사출된 냉병기는 원하는 지점까지 도달하기 어렵소. 두 번째는 설령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무기가 멀쩡할 리 없다는 사실이오."

"알고 있습니다."

나를 설득하려던 그의 말에 내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 그런데도 그걸 원하시오? 그렇게 하려면 발사체가 들어간 케이스를 만들면 되지만, 그럼 부피와 무게가 커져서 몇 개 싣지도 못할 거요. 그걸 바라는 건 아니지 않소?"

스미스의 말은 그렇게 만들면 인벤토리라 부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기껏 무기 몇 개 던져주는 게 얼마나 큰 효용이 있겠나?

나는 그런 그의 걱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나도 능력을 얻기 전까진 고민했던 부분이고.

그럼 이제 보여줄 차례다.

"음. 스미스 씨. 일단 이걸 보시는 게 좋겠군요."

내가 왜 그런 형태를 원하는지 말이다.

스르릉.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은빛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집에 숨어있던 날카로운 예기가 사방으로 흘러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고 섬뜩한 감각이 척추를 자극한다.

"왜, 왜 이러시······! 허어?"

난데없이 뽑힌 검에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던 그가 곧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내가 손을 놨음에도 여전히 검은 허공에 고정이라도 된 듯 떠 있었으니까.

톡하고 손잡이를 두드렸다. 그러자 검이 허공을 유영하듯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리고 미끄러지던 검을 향해 손을 내뻗자 이번엔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

스미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부, 분명 그 칼은 그냥 칼인데······?"

"중력제어. 제 능력입니다. 각성자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허, 허허허······ 평생 놀랄 일은 오늘 다 겪는 것 같소. 중력제어라······ 그래. 왜 그런 형태의 인벤토리를 원하는지 알겠군. 능력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주시겠소?"

나는 그에게 중력제어에 관해서 설명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과 앞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능력까지도.

사실 내 능력을 밝히는 게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그는 무라마사 공작소의 명인이다.

그가 내 정확히 능력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결국 인벤토리의 완성도와도 직결된 문제. 그에게까지 숨길 순 없었다.

게다가 꽤나 먼 미래라면 몰라도, 당장에 그가 나를 배신할 것 같진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서 안 쫓겨나게 도와준 게 나니까 말이다.

설명을 전부 들은 스미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소. 그럼 사출된 무기를 충격 없이 받는 건 문제가 없겠군. 그리고······ 중력을 실어서 공격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겠고 말이오. 맞소?"

"그렇습니다."

역시 대충 설명만 해줬는데 어떤 활용까지 가능한 것인지 견적을 내버린다.

잠시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작업노트를 휘갈기던 그가 나를 돌아봤다.

"시간은 조금 걸릴 거요. 일단 이글아이 본체를 확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제어와 연산칩도 꽤 필요하니 말이오. 혹시 그 능력 말고도 내가 몇 가지 더 추가해도 되겠소? 마침 적용할만한 기술이 몇 개 떠오르는데."

"얼마든지요. 무라마사 공작소 명인의 솜씨라면 믿고 맡기겠습니다."

"좋군. 알겠소. 그럼 내가 필요한 게 생기면 연락하겠소."

그리곤 고개를 돌려 다시 작업노트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축객령이었다.

"그럼 다시 오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곤 작업실을 나섰다.

이제 공은 넘어갔다. 남은 건 그를 믿고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렇게 밖으로 걸어가는데 귓가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변태 늙은이가 제 몸을 어떻게 다룰지 걱정되는군요.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것 같은 이브의 목소리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실력자 중 한 명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어차피 그게 싫어서 너도 이리 온 거잖아."

나는 손목에 달린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이브는 이제는 본체가 된 이글아이와 연결을 끊고 워치로 다시 옮겨온 상태였다.

-빨리 돌아가고 싶네요. 여긴 너무 답답해요.

"이글아이를 쓴 지 며칠이나 됐다고 엄살은. 가자! 우린 또 우리 일을 해야지?"

-네! 마스터!

가게 앞에 세워둔 바이크에 올라탔다. 천천히 쓰로틀을 당기자 미끄러지듯 떠오른 바이크는 이내 하늘로 질주했다.

어둑해진 밤하늘을 스크린으로 삼은 거대한 홀로그램 광고를 뚫고 날아올랐다. 답답한 스카이라인이 사라지고, 뻥 뚫린 천공이 열렸다.

잠시 쓰로틀을 놓고 도시를 내려다봤다. 어떤 장애물도 없이 직관적으로 보이는 도시는 선명하게 빛과 그림자로 물들었다.

너무나 찬란한 빛은 눈이 멀 것처럼 화려해서 영원히 밤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 경계에 선 그림자들은 단 한 톨의 빛도 머금지 못한 채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어둠이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우주선이 발사되고 있었다. 솟구치는 우주선의 커다란 불기둥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거다.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도시의 어둠을 밝히려면 붉게 물들여야 한다고.

나는 멍하니 긴 궤적을 그리며 닿지 않을 세계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바라봤다.

구름 너머 희미한 불꽃이 안 보일 때까지. 한참을······.

한밤의 인형극 (1)

92화. 미드나이트 마리오네트

리모델링이 끝난 로세툼은 이전과 완전 달라진 모습이었다.

널찍한 로비엔 청소로봇이 돌아다녔고, 안내로봇이 대기 순번에 따라 해결사와 용병들을 사무실로 데려갔다.

거기에 오피스 공간 자체도 여러 개로 늘어나서, 그곳엔 로제 대신에 일을 처리해주는 수습중개인들이 자리 잡았다.

자잘한 의뢰나, 으레 있는 일상적인 의뢰들은 수습중개인들이 담당하고, 굵직한 의뢰만 로제가 중개하는 형식이었다.

그렇게 내부를 둘러보며 대기석을 지나가는데, 그곳에서 기다리던 해결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흑발흑안! 저자가 소드마스터로군!"

"눈빛 봐. 무시무시하네."

"저 칼로 워 머신을 갈랐다지?"

"2미터는 넘어가는 괴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하네."

로세툼이라는 장소가 특정돼서 그런지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면서 나를 힐끗거렸다.

'꽤나 부담스러운 눈빛들이로군.'

그들의 눈빛엔 여러 가지 감정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었다.

누군가는 동경과 부러움이, 누군가는 질투와 시기가, 또 막연한 호기심과 관심까지.

나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곤, 그대로 로제의 사무실로 향했다.

첫날에 생체등록을 전부 해놓은 터라, 보안설비나 경비 로봇들이 저절로 길을 열어줬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마침 로제가 티 테이블 앞에 서서 차를 내리고 있었다.

"당신 왔어요?"

"이제 로봇들도 많은데 메이드 로봇 하나 사는 게 어때?"

나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바깥과 달리 이 사무실의 물건은 이전 로세툼에서 전부 가져온 물건들뿐이었다.

"됐어요. 이건 제 취미생활이라고요."

로제가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맡았던 그윽한 홍차향이 코끝을 스친다.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다시 티 테이블을 오가며 내려놓은 찻잔이 셋이다.

"으음? 누가 더 오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빨간 똑단발 머리의 데이지다.

그녀는 새하얀 후드티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는데, 후드 위로 토끼 귀가 쫑긋 달린 모양이었다. 거기에 본인 취향이 잔뜩 묻어난 핫팬츠와 망사스타킹까지.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때요? 귀엽죠?"

"어?"

그때 로제가 뿌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저 토끼 후드티요! 제가 사준 거거든요!"

"······."

뭔가 미묘하다 했더니 로제의 취향이었군? 하긴, 원래도 곁에 끼고 다니는 데다가 지금은 같이 살기까지 하니······.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온 그녀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쫑긋했던 토끼귀가 앞으로 축 늘어졌다가 다시 바로 선다.

이게······ 사이버펑크의 암살자?

이전에도 생각했던 것 같은데, 참 어울리지 않는 과거다. 그 움직임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믿지 못했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로제에게 물었다.

"그런데 데이지는 왜 불렀어?"

"사실 데이지가 주인공이거든요!"

"······? 그게 무슨 소리지?"

데이지가 주인공이라는 건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인형술사 찾는 거요. 저도 어느 선까진 접근했는데, 항상 조금씩 늦더라고요. 그만큼 그쪽도 신경을 쓴다는 거겠지만······ 아무튼, 조금 머리가 아파지고 있었는데 데이지가 한번 쓱 보고 가더니 한 시간 뒤에 바로 찾아내던데요?"

"데이지가?"

나는 데이지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도 관심이 없는 듯, 찻잔에 담긴 홍차에 우유를 들이붓고 있었다.

영롱한 호박색 홍차가 순식간에 믹스커피로 바뀌었다. 저게 홍차야, 홍차맛 우유야?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로제를 바라봤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 * *

죽음의 인형술사 마리오.

도시에서 모습을 감춘 지 30년이나 지난 그를 다시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블랙스컬과 같은 조직에 들어가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면 더더욱.

"그런데 얼마 전 바이오 기업끼리 작은 전쟁이 벌어졌어요. 신경안정제 특허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인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과정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한 거죠."

"어떻게 그라고 특정했지? 직접 모습을 드러냈을 리는 없을 텐데."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인형술사를 상대해봤다. 그리고 놈을 상대할수록 느꼈다. 놈이 절대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내가 그라도 비슷했을 거다. 안드로이드를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으니까.

"전투 안드로이드는 정해진 로직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반자율 로봇에 가까워요. 흔히 우리가 아는 '자율적인 사고'를 하는 AI는 절대 넣지 않죠. 과거 몇 차례나 큰 사고가 있었으니까. '로봇 쿠데타'는 알고 있죠?"

"대충은."

로봇 쿠데타.

자율 AI를 가진 안드로이드들이 인간들을 상대로 더 나은 '복지'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선 사건을 말한다.

당연하게도 이 사건은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끝났고, 그제야 인간들은 자율 AI의 위험성을 인지했다.

그때부터 자율 AI들은 현실세계에서 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갖지 못했다. 이브가 워치에 갇혀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이 두 기업 간의 전쟁에서 전투 안드로이드의 움직임은 굉장히 뛰어났어요. 마치 전장을 내려다보는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로제가 태블릿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쪽 벽으로 투사된 홀로그램이 그날의 전투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봐요.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를 조종하는 능력. 그럼 뻔하잖아요?"

"흐음······."

과연 그녀의 설명처럼 안드로이드의 움직임이 남달랐다. 두 기업 모두 안드로이드로 먼저 맞붙었는데, 한쪽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거다.

게다가 직접 눈으로 보니 점점 더 놈과 맞붙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특유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나, 몸을 미끼로 자폭하는 공격과 그걸 스스럼없이 해내는 실행력.

이건 놈이 틀림없다.

"······그래서 놈의 위치는?"

"그건 아직 알 수 없어요. 당신 말대로 저자는 직접 몸을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니까. 하지만 알아낼 방법은 있죠."

그녀가 다시 한번 태블릿을 두드리자, 이번엔 홀로그램이 하나의 공간을 구성한다. 어딘지 특정할 순 없지만, 창고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제가 알아낸······ 아니, 데이지가 알아낸 블랙스컬의 핵심거점 중 하나에요. 그리고······"

그녀가 홀로그램을 바라보자 거기에 맞춰서 이번엔 입체투시도에서 사진으로 변하면서 해상도가 올라간다.

"여기 보이죠?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안드로이드들."

차량이 드나들면서 열린 작은 틈으로 찍은 사진. 그 안을 확대하자, 마네킹처럼 줄지어 서 있는 안드로이드들이 보였다.

그리고 몇몇 안드로이드엔 어울리지 않는 중절모와 트렌치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놈의 안드로이드로군?"

저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맞아요. 아마 이곳이 털리면 인형술사도 가만히 못 있겠죠?"

로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저 정도로 안드로이드를 모아놓은 거점이라면 아마 다른 보급품도 많을 테고, 그런 거점이 통째로 날아간다면 아무리 점조직인 블랙스컬이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놈의 위치를 어떻게 찾는다는 거지? 놈은 어차피 안드로이드만 사용할 텐데?"

분명 그녀는 인형술사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있다고 말했었다.

단순히 거점을 털어버리는 것과 인형술사의 위치를 알아내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그때 옆에서 세상 관심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그건 내가 찾을 수 있어."

데이지가 찻잔에 우유를 새로 부으며 말했다. 홍차맛 우유는 그새 전부 마셨는지, 찻잔엔 새하얀 우유만 가득 담겨 있었다.

"네가?"

"응. 상대가 다수의 안드로이드와 연결되면······ 내가 찾을 수 있어."

찻잔의 우유를 꼴깍꼴깍 전부 마셔버린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윗입술 위로 우유 자국이 선명하다.

"······."

나는 잠시 그 모습에 할 말을 잊었다. 애써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슬슬 진짜 나이가 궁금해진다.

그런데 이 녀석. 암살자 출신 아니었나? 무슨 암살자가 이렇게 컴퓨터를 잘 다루는 거지? 이 정도면 최상급 사이버러너 수준인데.

그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데이지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취미생활. 존중 부탁."

"그, 그래."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43구역. 해안가와 인접한 산속에 있는 창고 부지.

나는 앙상하게 말라가는 나무 위에 서서 블랙스컬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그곳을 내려다봤다.

야구장정도 넓이의 그곳엔 창고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 3동과 컨테이너로 대충 조립한 자그마한 건물들이 어지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제 몸이 멀쩡했으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네요.

이브가 아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와 달리 렌즈 화면으로 보이는 정보들은 빠르게 변환되어 오브젝트화가 되고 있었다.

CCTV들의 시야각이라든가, 숨어있는 자동화 무기들 말이다.

녀석의 엄살에 나는 피식 웃으면 대답했다.

"더 중요할 때 도와줄 수 있으니까 괜찮아. 너도 지금은 툴툴대지만, 나중엔 좋아할 거다."

-그래야죠! 그래야 제 몸을 변태 늙은이에게 맡긴 보람이 있지 않을까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로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날 이후로 이브의 말투가 조금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말투가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랄까?

정확히 뭐라고 꼽을 순 없지만, 이전에도 AI 같지 않았던 성격이 이번엔 더더욱 종잡을 수 없이 바뀌었다.

'아마 이글아이를 본격적으로 이용하면서 딥러닝 수준이 높아진 까닭이겠지만.'

물론 모든 AI가 이브처럼 변하진 않을 거다. 그동안 겪은 바로는 확실히 이브는 다른 AI보다 특별하다는 거였으니까.

'모든 AI가 이브 같았더라면 로봇 쿠데타가 아니었겠지.'

아마 '로봇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인간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거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세계처럼.

'뭐, 스카이넷이 있다면 여전히 가능성이 있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나무에서 내려왔다. AI에 이름조차 안 붙이는 세계에서 스카이넷이 나오는 건 어렵겠지.

잡념을 날리고 눈앞에 집중했다. 흙바닥으로 굴곡진 길 끝에 내려다봤던 창고가 보였다.

나는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느릿하게 검을 뽑아 손목을 풀어줬다.

-마스터?

내가 대놓고 정면으로 걸어가자 이브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괜찮아. 오늘은······ 조금 시끄러워야 하거든."

그래야 초대장을 받아든 상대가 길길이 날뛰며 달려올 테니 말이다.

* * *

입구 경계를 맡고 있는 잭의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처음엔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헛것이 보이나 했더니, 진짜 사람이었다.

잭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더머의 옆구리를 툭하고 찔렀다.

"하아음······ 음? 왜?"

"저길 봐. 저거 사람 맞지?"

"뭔 소릴 하는 거야? 여기를 걸어올라오는 미친놈이 어딨······? 뭐야? 진짜 사람이네?"

졸린 눈을 비비던 더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저 새끼 칼 들고 있는데?"

"근처에 싸이코시스 경고 뜬 거 있어? 웬 미친놈이야?"

"어이 멈춰! 여긴 사유지다!"

잭과 더머가 총구를 겨누며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그런데도 상대는 여전히 처음 걸어왔던 속도 그대로 천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잭이 얼굴을 구기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상대가 걸어오는 길 앞이 패이며 흙이 튀었다.

"다시 경고한다! 멈춰! 더 오면 죽을 줄 알아!"

그러는 사이, 총성을 들었는지 안에서 단원들이 튀어나왔다.

"무슨 소란이야?"

"웬 미친놈이 칼 들고 걸어오는데?"

"캬악! 퉤! 이 동네에 미친개라도 돌아다니냐? 싸이코시스 걸린 미친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야. 그냥 쏴버려."

"시체는 네가 치우고?"

"그냥 놔두면 늑대 같은 놈들이 먹지 않나?"

어느새 열댓 명 가까이 모인 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마침내 서로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는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잭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씨, 씨발! 저거 소드마스터 아니야? 이 날씨에 비옷을 입었잖아!"

"에, 에이 설마! 소드마스터는 흑발흑안이잖아!"

둘의 대화는 컸고, 그 대화를 들은 그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상대의 얼굴로 쏟아졌다.

그제야 걸음을 멈춰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옷 후드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난다. 눈앞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바람이 흩날렸다.

"······흐, 흑발흑안!"

"소, 소드마스터!"

누군가의 경악에 질린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그들의 총구는 전부 불을 뿜었다.

"씨, 씨발! 쏴! 쏘라고!"

"막아! 못 오게 해!"

"접근하면 좆된다!"

투타타탕!

탄환이 쏟아졌다. 십여 미터 거리에서 쏘아진 탄환들은 순식간에 소드마스터의 몸을 꿰뚫을 듯 쇄도했다.

'돼, 됐어!'

잭이 환호에 찬 얼굴로 생각했다. 저 탄환을 다 맞으면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소드마스터 할애비라도 죽을 거다!

하지만······.

"사, 사라졌······! 컥!"

분명 두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사라져버린 소드마스터의 행방에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화끈한 무언가가 목을 가르며 지나갔다.

기우뚱하고 기울어지는 시야. 그리곤 그대로 바닥에 거꾸러지듯 처박힌다.

'뭐지? 내가 왜 쓰러진 거야?'

잭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때 눈앞으로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쓰러졌다.

그제야 잭은 깨달았다.

'씨발······ 인생 좆같네.'

자신에겐 이미 손발이······ 아니, 몸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눈앞에 쓰러진 몸에서 이미 머리가 분리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서히 어둠에 잠기는 그의 시야로 소드마스터가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동료들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제발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죽여줘! 그래야 내가 죽은 게 덜 억울하지!'

잭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참으로 이 세계와 어울리는 바람이었다.

한밤의 인형극 (2)

93화. 한밤의 인형극

나는 놈들에게 쇄도했다.

순식간에 한 놈의 머리를 날렸고, 그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다른 놈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씨, 씨바알――!"

"죽여! 죽이라고!"

눈앞에서 흩뿌려진 피분수에 잠시 멎었던 총성이 다시 울렸다.

투타타탕!

탄환이 빗발쳤다.

나는 근거리에서 쏘아진 탄환을 모조리 피하고, 튕겨내며 놈들 사이를 헤집었다.

그럴 때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신체 부위를 바닥에 떨어뜨려야 했다. 대부분이 머리였다.

그 사이, 창고 안쪽에선 비상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전투는 급작스럽게 벌어졌으나 놈들의 대처는 빨랐다.

처음 입구에 몰려든 놈들이 전부 죽기 전에, 안쪽에서 새로운 놈들이 튀어나왔다.

무엇보다 거점에 설치된 각종 자동화무기들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투투투퉁!

전동포탑이 불을 뿜었다. 기관총 대신 달린 발칸포의 머리가 회전하며 20미리 고폭탄을 쏟아냈다.

콰콰콰쾅!

고폭탄이 터져나가며 주변을 휩쓸었다.

발칸포 탄환의 폭발력은 수류탄 2개가 터진 것과 맞먹는다. 그런 발칸포 탄환이 몇 초 만에 수백 발이 내리꽂혔다.

"뒈져――!"

놈들이 광기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자신들도 발칸포의 폭발범위에 섞여 몸이 찢겨나감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마 적당히 팔, 다리가 뜯겨 나가도 다시 붙이면 된다는 생각이겠지.

나만 죽이면 말이다.

하지만 놈들에게 안타깝게도 나는 발칸포 범위를 철저히 피해서 놈들을 요격하고 있었다.

발칸포는 파괴력에 비해 정밀도가 떨어지는 무기다. 눈앞에서 놈들이 폭발에 휩쓸리는 것처럼 아군에게도 피해가 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정도 정밀도로는 내 움직임을 절대 따라올 수 없다.

쿠콰콰쾅!

발칸포의 궤적이 내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며 대지를 터트려댔고, 사방이 탄약과 흙먼지로 뒤덮였다.

후욱!

나는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자동포탑을 하나씩 박살 냈다.

제법 단단한 외장으로 막아놨지만, 어차피 둥그런 총구만 망가지면 발칸포는 작동하지 못한다.

서거걱!

자동포탑을 지나가며 총구를 베어낸다. 총구가 잘려나간 자동포탑은 그것도 모르고 발칸포를 쏴대다가 스스로 터져나갔다.

콰쾅!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칼로 자동포탑을!?"

그 광경을 목격한 용병들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놈들의 전의가 꺾이는 시발점이다.

나는 그대로 다시 놈들에게 쇄도했다.

"카악!"

"끄, 끄윽!"

몸이 갈라진 놈들이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거꾸러진다. 물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전투가 끝나기까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안쪽에 있던 창고 하나의 문이 터져나가며, 그곳에서 안드로이드들이 튀어나왔다.

전열을 갖춰 늘어선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에서 동시에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드마스터어―――!!"

"소드마스터어―――!!"

"소드마스터어―――!!"

인형술사 마리오.

놈이었다.

* * *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나는 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니 계획이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뭐하다 이제 나왔지? 네놈 늦장에 네 동료들이 전부 죽어버렸잖아?"

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봐라. 이게 네놈 동료의 핏자국이다.

기름을 붓는 내 말에 놈이 버럭 소리를 친다.

"소드마스터! 감히! 감히 네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글쎄? 쓰레기 처리장 아니었나? 지나가다가 하도 냄새나서 직접 치우려고 들어왔지 뭐야?"

"건방진 놈! 묫자리로 찾아온 이상, 갈가리 찢어서 묻어주마!"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둥이만 놀리지 말고 어디 재주껏 해보도록.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도망갔잖아?"

뿌드득!

놈이 없는 이를 갈아대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기필코 죽여주마!"

안드로이드들의 눈이 빨갛게 타올랐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놈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다. 순식간에 전방에 길게 늘어선 놈들이 그대로 총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투타타탕!

총알이 빗발치는 사이로, 전위에 선 안드로이드들이 달려들었다. 묵직하게 움직이는 놈들이 기다랗게 팔을 늘어뜨리자 손끝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전위와 원거리라. 조금 귀찮아졌군.'

나는 총알을 피하며 놈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몸을 숙였다가 옆으로 몸을 틀었다.

정신없이 늘어서 있던 컨테이너 뒤를 향해서.

"뭐 하는 거냐, 소드마스터! 모습을 드러내라!"

콰콰쾅!

멀리서 날아온 폭탄이 컨테이너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구겨진 종잇장처럼 터져나가는 컨테이너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이동했다.

다음 컨테이너를 향해.

"이, 이익! 뭐하는 짓이냐! 이 비겁한 놈아!"

콰콰쾅!

또다시 폭격이 날아들고 컨테이너가 찢겨나간다. 불길에 휩싸인 컨테이너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하지만 이곳엔 아직도 컨테이너가 많이 남았다.

나는 그렇게 전위로 달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을 꼬리에 달고, 창고부지를 크게 뺑 돌았다.

그럴 때마다 정밀하게 날아온 폭격이 컨테이너를 날려버렸다.

콰쾅!

또 하나의 컨테이너가 날아간다.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거세게 불타오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불타는 컨테이너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뛰어넘었다.

넘실거리는 불꽃 너머, 내가 원하는 무대가 지금 막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전부 올라왔군.'

원거리 안드로이드들이 창고부지를 크게 도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죄다 창고 건물 위로 올라섰다. 마치 전선 위 참새처럼 일렬로 늘어선 모습.

마침내 내가 원하던 그림을 그려낸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질주하던 몸을 조금 더 낮춰 하체로 무게중심을 이동했다. 순간적으로 집중되는 근력에 허벅지 근육이 폭발하듯 부풀어 오른다.

그 순간, 강하게 바닥을 밟았다.

콰지직!

흙바닥이 마른논처럼 갈라지며 흙먼지를 피워올렸고, 그 반탄력은 고스란히 하체를 거쳐 몸 전체를 하늘로 쏘아 보냈다.

쐐애애액!

바람이 거칠게 찢겨나가며 몸이 튕겨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쳐 가는 공간들이 서서히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고, 찰나의 시간은 곧 기형적으로 늘어지며 세계가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후우――.

내뱉은 숨이 영원처럼 길어진다. 파문처럼 일렁인 호흡의 파동이 사방으로 확장됐다.

나는 늘어진 세계에 오롯이 존재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정보량은 찰나를 또다시 찰나로 쪼갠 것까지 인식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공간의 지배자는 오직 나뿐이었다.

반개한 시선으로 일렬로 늘어선 안드로이드들이 보인다.

정확히 27기의 안드로이드들. 놈들은 붉은 안구를 번쩍거리며 양팔에 달린 총구를 거침없이 쏘아대고 있었다.

둥― 둥― 둥―

허공을 빼곡히 수놓은 탄환들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든다.

확장된 감각은 그 탄환들 하나하나의 궤적을 모조리 인식했고, 그 사각을 찾아냈다.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찰나의 순간에서 또다시 찰나의 순간을 쪼개며, 그 사각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간이 점멸된다.

깜빡거리는 그 순간 늘어졌던 세계가 다시 정상을 되찾으려 몸부림쳤다. 늘어진 고무줄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듯,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나는 되돌아오는 시간에 되밀려 공간 속을 질주했다.

그렇게 내가 공간을 질주하는 속도와 시간이 되돌아오는 속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그 순간.

나는 움켜쥐었던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제로의 영역」 2단계 레벨.

공간 절단. 「섬광의 지평선」

번쩍――――!

한 줄기 빛이 기다란 궤적을 그렸다. 공간에 녹아든 궤적은 한순간에 사라졌으나······.

쩌어어어억――――

그 궤적에 맞닿은 공간은 뒤틀리고 갈라졌다.

허무의 공간이 투명한 피를 울컥 흘리며 찰나의 어둠을 드러냈고, 그 어둠은 하늘과 땅의 지평선을 분리하듯 공간을 찢어발기며 갈라버렸다.

서걱!

뒤이어 들려오는 미세한 절삭음.

뒤틀린 공간에서 어긋나버린 안드로이드들이 전부 동작을 멈춘 채 기우뚱 기울어진다.

휘이잉.

한차례 창고 위로 매마른 바람이 불어오고.

끼이이익.

일제히 허리가 갈라진 27대의 안드로이드가 두 동강 난 채 지상으로 추락했다.

퍼버벙! 펑!

추락한 안드로이드가 폭발한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불타오른다.

나는 창고 위에 올라서서 멍청하게 서 있는 전위 안드로이드들을 내려다봤다. 매캐한 연기가 놈들을 휘감았다.

그때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놈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이게······ 소드마스터? 대체 어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말없이 검을 고쳐잡았다.

너희는 내가 누군지, 뭘 할 수 있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게 네놈들의 패착이다.

* * *

암흑으로 뒤덮인 시야와 함께 사이버체어에 앉아있던 마리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미쳤군."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소드마스터에 의해서 남부거점이 장악당했다.

그 어떤 세력도 아니라 소드마스터, 단 일인에 의해서.

심지어 놈이 모습을 드러낸 후, 실제로 싸운 시간은 불과 30분이 채 되질 않았다.

유휴인력들을 모조리 소집해도 남부거점에 도착하기까진 2시간은 잡아야 하는 상황.

"제대로 당해버렸군."

단 30분 만에 남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내심 메가코프의 경호부대가 달려들어도 2시간은 버틸 거라 예상했는데 말이다.

그때 통신이 들어왔다.

-마리오. 남부거점이 당했다던데? 어찌 된 일이지?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

마리오에게 거리낌 없이 평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블랙 스컬의 단장인 윌포드였다.

"소드마스터가 쳐들어왔습니다."

-······그자가? 그자는 해결사가 아니던가?

윌포드의 물음엔 두 가지 질문이 담겨있었다.

해결사들은 혼자서 행동하는 자들. 즉, 혼자서 쳐들어왔냐는 물음이 첫 번째. 그리고 혼자 활동하는 그가 어찌 남부거점을 알아냈느냐란 물음이 두 번째였다.

"혼자였습니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한 잡니다. 그리고 꽤 유능한 친구들도 있는 것 같군요."

해결사라고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진 않는다.

해결사들은 해결사들 나름의 인맥과 정보망이 있었고, 의뢰의 성공을 위해선 그 어떤 것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자들이다.

-이런······ 귀찮게 됐군. 하필 이때 놈이 날뛰다니.

통신 너머로 들리는 윌포드의 목소리에 근심이 서렸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귀찮음을 느끼는 정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장은 원정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그리고 마리오 역시, 그런 윌포드의 반응에 당연한 듯 대답했다.

-감당할 수 있겠나? 남부거점이 당했다는 건, 자네 장난감들도 모두 망가졌다는 뜻 같은데?

"그놈을 써야겠습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자네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닐세. 차라리 그냥 몸을 사리고 기다리는 게 어떻겠나?

윌포드가 조심스레 그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만류하는 듯 말했다. 그냥 기다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마리오는 알고 있었다. 저 말에 담긴 음습한 의미를. 진짜 몸을 사리고 기다렸다가 되돌아올 족쇄들을 말이다.

"최대한 빨리 죽이면 됩니다. 마침 놈도 직접 부딪치는 칼잡이니······ 괜찮을 겁니다."

-흐음! 알겠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지.

마리오의 말에 윌포드는 단번에 알았다고 대답하며 통신을 끊었다.

잠시 사이버체어에 조금 더 누워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놈이 불가사의하게 강하긴 하지만······ 이번엔 쉽지 않을 거다."

그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