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너도 한 번 죽을 차례네
* * *
* * *
쏴아아.
별안간 쏟아지기 시작한 빗길 속을 걷는다. 다른 때라면 하이퍼루프 정차역에 들어가 그치길 기다리겠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애티튜드는 무사히 진화되겠구나, 하고 얼빠진 감상을 내뱉는 게 전부.
그만큼 토마스의 죽음은 신에게 충격적이었다. 언젠가 그와 헤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물론 이별에 익숙해진 건 사실이었다. 족히 10번은 넘게 신분을 바꿨으니까.
수많은 마지막을 목도한 몸.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절규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한 번도 바란 적 없지만 그런 삶이었다.
그래도 순수하게 슬퍼하는 자신과 지쳐 버려 체념하는 자신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내려다보이는 건―
'질리는군.'
그동안 단련되어서일까, 냉철한 이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사건의 인과를 파헤치면서, 어떻게 해야 복수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만 고심할 뿐.
이런 걸 진심이라 불러도 되는지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전부터 인지하고 있기는 했다.
20년 주기로 거점을 옮기는 것 또한 이러한 비극을 맞이하기 싫어서였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이리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건 퍽 괴로웠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언제까지나 밝게 빛났던 시절만 추억할 수 있도록. 평온한 안식을 맞이했을 거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는, 나약한 면모의 발로이며 부정할 수 없는 결여의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우수에 젖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탁.
발걸음을 멈춘 신의 눈에 네온사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클럽, 다비뉴.
저곳에 해답이 있으리라.
* * *
물에 젖은 생쥐처럼 축 늘어진 신을 맞이한 마크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표정이 시원찮군. 역시 너라도 양후를 발견하는 건 무리였나."
걱정하는 듯한 어투였지만 신은 거기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지."
1년 동안 무소식이었던 마크가 난데없이 나타나 의뢰를 받지 않겠냐고 제안한 거다.
더구나 동양인이라서 구분하기 어렵다니, 변명으로써는 어설프다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마크는 이 거리를 양분하는 조직의 간부. 몸소 모범을 보이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그가 선뜻 다가오다니.
변덕으로라도 생기지 않을 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건 상황뿐.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어쩐지 답지 않게 나불나불 변명을 늘어놓더니, 내 정체를 알아낸 거였어."
뉴델바이어가 토마스에 대해 눈치챘다고, 넌지시 언질을 준 게 결정적이었다.
호의를 베푼 게 아니라, 일부러 말해 준 거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
아마 이곳에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을 거다.
"1년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군."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속내를 드러낸 마크가 낮게 웃었다. 신이 말한 대로였다.
사실 확률은 반반으로 보았다. 그래서 섣불리 습격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신이 다시 돌아오면서 모든 게 확실해졌다.
"그래, 네가 양후였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 주머니에 숨는다고 송곳이 가려질 리 없었다.
애송이였던 시절부터 마크에게 신이란 남자는 연구 대상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았던 거다. 체질이나 관리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처음에는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그러다 몇 가지 연결 고리를 발견했다.
신이 나타난 시기와 양후가 사라진 시기가 묘하게 맞물린다는 점. 그리고 신과 친하게 지내는 노인이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의 주인공이라는 점.
후자는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아낸 거였다.
하지만 우연이 겹치면 필연.
전후 사정을 파악한 신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스터에 대한 정보를 뉴델바이어 측에 넘긴 건 너였고."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실적이 되거든, 차기 보스가 되기 위한. 아마 여기서 널 제압하면 내 입지는 더욱더 공고해지겠지."
"그래서 뉴델바이어 측에 알리지 않고 네가 직접 나선 거냐."
보나 마나 적당히 생포해서 적당히 거래에 이용하겠다는 심산이리라.
"구질구질해서 들어 줄 수가 없네."
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마크를 따르는 조직원들이 그의 주위를 빙 둘러쌌다. 협소한 공간에 가득한 건 서로를 향한 불신뿐.
"의뢰한 건 누구지?"
"말했을 텐데, 뉴델바이어라고."
"그러니까 뉴델바이어의 누구냐고. 솔직히 말하면 고통 없이 보내 주지."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선언에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아도 신이 열세였던 거다. 더구나 마크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게릴라 패밀리에서도 알아주는 정예.
폴딩 나이프를 꺼낸 신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 말이 장난 같아?"
"너야말로 이게 장난같이 보이나?"
마크가 손짓하자 조직원들의 손에 총기가 하나둘씩 쥐어졌다. 개인을 상대하기에는 과분한 전력. 차라리 영역 다툼에 나선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지경이었다.
"대체 뭘 믿고 아무런 방비도 없이 쳐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걸로 넌 끝이다."
"그러고 보니 너는 담당 중개업자면서 내가 현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직접 본 적 없지?"
"그게 중요한가?"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해결사의 자존심이라는 거냐."
오랫동안 이 업계에서 생존했다. 그것만으로도 신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설령 신이 상상 이상의 활약을 보여 준다고 해도 결말은 바뀌지 않으리라. 숫자가, 그리고 무장이 증명해 주었다.
"그러면 내가 후회할 수 있도록 분발해 봐라."
마크가 올린 손을 내린 순간, 장내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사각지대 하나 없이 행해진 사격. 피할 공간 따윈 없었기에, 모두 신이 죽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신에게 죽음이란 가장 무가치한 단어.
반격은 머리가 한 번 꿰뚫린 순간, 정해져 있었다.
서걱.
무언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조직원 중 한 명이 쓰러졌다.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일어난 이변. 동료가 당했지만 남은 이들은 주춤하지 않고 곧바로 후속 사격을 이어 갔다.
하지만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한 사람이 사라진 이상, 포위망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 말인즉슨, 신이 나서기에는 최적의 상황이라는 소리.
허공을 가로지른 폴딩 나이프가 한 조직원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아차하는 사이에 생겨난 두 번째 희생자.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탄환이 뒤따라왔지만 신은 재빠르게 상체를 숙이며 질주했다. 방 끝에서 끝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0.2초.
그 사이 폴딩 나이프를 회수해, 근접한 조직원의 목덜미를 베어 넘기는 시간까지 포함해도 0.5초를 넘기지 않았다.
전조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간결한 동작.
마치 가축을 도륙하는 것 같은 모습에 조직원들이 발작하며 방아쇠를 당겼지만 신에게 닿는 건 한 발도 없었다.
상대가 줄어들면서 파악해야 하는 동선도 덩달아 감소한 거다.
두 눈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탄환을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사격이라는 행동이 언제나 조준하는 과정을 동반하기에 가능한 이야기. 발사한 뒤 겨냥한다는 건 언어도단이었다. 아무리 빨라져도 과정까지 역전되는 건 아니니, 겨냥한 순간을 포착하면 궤적도 능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운동 신경의 영역.
선천적인 능력은 아니었다. 지극히 후천적인 학습의 결과라 해야 할 터. 몇 번 죽으면 싫어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신만이 얻을 수 있는 경험.
그렇게, 장내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조직원들을 볏짚처럼 양단한 신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정체는 여태까지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마크.
묘기를 부리듯, 발목을 튕겨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어깨까지 띄운 신은 그대로 낚아채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마크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흠잡을 데 없는 연사를 무위로 되돌렸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권총째로 신의 손을 꽉 붙들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
신을 내려다본 마크가 비릿하게 웃었다.
"내 의수에 대한 설명은 들었지?"
순간 악력 2,650킬로그램.
나일악어의 아가리와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한번 잡히면 두개골까지 바스러뜨릴 수 있었던 거다. 본디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폭력이었으나, 마크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자, 징벌의 시간이다."
콰직.
권총이 부서지고, 뼈가 어긋난다.
섬뜩한 파열음이 터진 뒤, 그 아래로 흐르는 건 진득한 선혈.
지금 의수는 압착기가 되어 대상을 완벽하게 짓누르는 중이었다. 살아 있는 게 죽어 있는 것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
하지만 신의 입에서는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반응에 마크는 이죽거렸다.
"꼴에 지조는 있다는 거냐."
"아니, 이편이 편할 것 같아서."
그러면서 신이 들어 올린 건 왼 주먹이었다. 그게 어디를 향할지 짐작한 마크는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설마?"
고작해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팔이었다. 강철과 전선으로 구성된 기계의 팔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신은 그 기대를 보란 듯이 배신했다.
우지끈.
상궤를 벗어난 괴력으로 의수를 후려갈긴 거다.
신경계를 강타하는 저릿한 감각에 마크는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가 알기로 신은 내추럴이었다. 관련 슬롯을 이식했다는 정보가 없었다.
비밀리에 수술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만한 출력이 나올 리 없었다.
가능한 게 있다면, 그건―
"유전자 조작?"
그러고 보면 늙지 않는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보면 될 것 같았다. 메가콥이나 그에 비견되는 세력의 후계자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모순이 생겨났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면 이리 쫓겨 다닐 리 없던 거다. 하물며 디바이스까지 없는 신이었다. 그의 신분은 저 밑바닥이라는 소리.
당황해서 잊고 있었지만, 특유의 체취도 나지 않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머리가 해답을 내기 전에 본능이 먼저 이해했다.
세상에 그런 부류가 있다는 건 처음 듣지만,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전부 타고났다고...?"
"그러니까 말했잖아, 괜한 호기심은 명을 재촉한다고."
기어코 마지막 선을 넘은 마크에게 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네가 쌓은 건 모두 사라질 거야."
콰지직.
강제로 의수가 뜯겨 나가자 마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발치에 걸린 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미간에 세 발이나 들이박혔지만 신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죽지 않았다.
"뭣."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짓밟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분명 그랬는데―
"나도 한 번 죽었으니, 너도 한 번 죽을 차례네."
이제는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013 도련님의 말대로 되었군요
* * *
* * *
마크와 긴밀하게 대화를 나눈 끝에 해답을 구할 수 있었다. 워낙 집요하게 물어서 그런지 마크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니엘 후버라....'
뉴델바이어의 전무이사라고 했던가.
회장의 자식인 만큼 이름뿐인 직책이겠지만 그 권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밀레니엄 코드와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까지 마다하지 않는 놈인 거다.
클럽 다비뉴를 나선 신의 목표는 명확했다.
대상이 특정된 거다. 그다음에 조사가 이뤄지는 건 필연이었다.
놀랍게도 이 부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토마스를 처리한 니엘은 보란 듯이 외진 곳에 숙소를 구해 거주 중이었으니까.
[콜렘베르그 호텔]
간단히 말해 인기 없는 3성 호텔이었다.
메가콥에서 파견된 인물이 거주한다고 보기에는 급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장소.
뜬금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신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니엘은 지금 제 영역 안으로 그를 유인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도 미행한 참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보니 SNS상에 몇 번 검색하기만 해도 행적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니엘의 생활 패턴은 퍽 단조로웠다.
오전 9시에 뉴델바이어 본사에 출근, 오후 5시에 퇴근.
어딘가에 들려서 여가 시간을 보낼 법도 하건만 그는 곧바로 콜렘베르그 호텔로 돌아와 다음날까지 나가지 않았다.
호위도 옆에 달고 다니는 사내 한 명이 전부.
빈틈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코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되었다. 10층에 달하는 호텔은 요새화가 된 지 오래였으니까.
교묘하게 가려져 있지만 신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옥상에는 자율 관제 포탑이 포진되어 있어, 외벽을 타고 오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거기에, 새로 고용된 문지기만 해도 서른 명에 달했다. 내부에 상주하는 인원도 그 이상은 된다고 봐야 할 터.
단단히 준비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악조건 속에서도 목적을 달성한 바 있었다.
호텔의 내부 구조를 빠짐없이 외운 신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무장을 점검했다.
니엘을 처리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하고도 뒤를 밟히지 않는 것.
심증은 어쩔 수 없이 남길 수밖에 없다 해도 물증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노이즈 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지 확인한 신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소형 알약.
이른바, 뉴클레이즈였다.
DNA에 새겨진 특정 염기서열을 분해하는 효소가 담긴 약물.
이로써 피를 흘려도, 살이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손상된 유전자 자체를 감식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원리를 들으면 알겠지만 과용하면 독약이 되는 물건이었다.
이를테면 자의로 방사선에 피폭되는 거나 마찬가지.
그 때문에 지금은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물건이었지만, 신은 애용하는 편이었다.
죽음으로 다다르게 하는 약물인 만큼 본디 섭취와 동시에 체내에서 분해가 되겠지만, 그 정도는 제어할 수 있었다.
피치 못하게 죽다 살아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이지만 특수한 체질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거다. 특히나 이 경지에 다다라, 성형 수술이 가능해지면서 운신의 폭이 넓어진 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다란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둘러멘 신은 제랄드에게서 얻은 통제기를 조작했다.
동시에, 순찰 드론의 경로가 변경되었다.
일대가 치안 공백 지대로 변하는 건 한순간.
유동 인구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신은 발걸음을 옮겼다.
콜렘베르그 호텔로.
* * *
오늘로 벌써 일주일째.
니엘의 편집증적인 면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하품을 터트린 에반은 같은 근무조에 속한 지미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정말 올 거라고 보냐?"
"도련님이 말한 양후같이 무서운 상대?"
"그래, 그 녀석."
"글쎄, 모르겠다만."
지미에게는 허황한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었다. 니엘 본인 자체가 원한을 많이 산 사람이지 않던가.
"그리고 무서우면 무서운 거지, 양후같이 무서운 건 또 뭐야."
케케묵은 이름이 나온 걸 보면 그만큼 경계해야 한다는 건데, 여태껏 천둥벌거숭이처럼 굴던 니엘도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고른 듯했다.
기다란 기타 케이스를 둘러멘 사내가 다가온 건 그때.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 코드는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그 안에서 검이 나온다면 더더욱.
화들짝 놀란 에반과 지미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빼 든 즉시 겨냥했지만, 가늠자 끝에 걸려 있어야 할 상대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찰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시간을 틈타 시야 밖으로 벗어난 거다.
'대체 어디?'
지미가 그리 생각한 순간, 바로 옆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그건 에반이었던 것의 머리.
황급히 자세를 낮추고 총구를 돌린 지미였으나, 그렇게나 기민한 대처마저도 그의 목숨을 살려주지는 못했다.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날아온 순풍이 목을 치고 지나간 거다.
서걱.
지미가 마지막에 들은 거라고는 예리한 절삭음이 전부였다.
그렇게 출입구를 지키던 두 사람을 단번에 처리한 사내, 신은 호텔 안으로 진입했다.
로비는 물론이고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니엘이 전세를 냈다는 건 사전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알기에 그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푸쉬익.
기다란 기타 케이스 안에 검을 집어넣은 뒤, 빼내자 깨끗하게 세척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이 날붙이를 애용하는 건 특기이기도 하거니와, 장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총기는 탄환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뿐더러 특유의 격발음을 숨길 수 없었으니.
물론 그러한 약점을 보완한 제품도 있지만 유지 비용이 특출나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 반해 날붙이는 구매하기도, 버리기도 간편했다.
기능 고장이 있을 리도 없고, 관리만 해 준다면 반영구적이기까지 했다.
단독으로 활동하는 신이 불로불사라는 특징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무기를 택하는 건 당연한 이치.
라운지 중앙에 선 신은 품속에서 동그란 공을 하나 꺼내 떨어뜨렸다. 파지직, 하고 나타난 반구형 정전기가 넓게 퍼진 순간, 사위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일렉투스.
그건, 국소적인 지역에 전자기 펄스를 발생시키는 장치였다. 말하자면 상용화된 EMP 폭탄.
전자 제품을 구성하는 집적 회로에 타격을 주는 만큼 감시 장치나 통신 기기를 운용하는 데 상당한 난점이 꽃필 터였다.
상대의 눈과 귀를 막은 신은 날아오르듯이 2층으로 질주했다.
"쏴라!"
"어차피 한 명이다!"
"우측에 집중 사격!"
불청객이 들어왔다는 걸 인지한 건지 먼저 나와 맞이해 주는 이들이 몇 명 있었다.
신속하게 야간 투시경까지 장비한 채로.
한없이 정답에 가까운 대처지만 신 앞에서는 무용했다.
빗발치는 탄환의 호우를 뚫고 내달린 신은 제 몸이 파탄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거리가 좁혀진 순간, 승부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
나이프 파이팅을 시도하는 이도 적지 않았으나, 양단된다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와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싸웠기에 갈린 결과.
피로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신이 입을 열었다.
"이 호텔에 몇 명이나 있지?"
"그건...."
"고민하는 걸 보니 그다지 살고 싶지 않나 보네. 뜻대로 해 줘야지."
"아니, 잠깐!"
무리를 통솔하는 격인 듯, 생김새부터 남달랐지만 신은 손에 움켜쥔 검을 멈추지 않았다.
서걱.
어차피 메가콥이 주는 과실에 취한 사냥개들이었다. 그들의 사상이 올바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사도에 들어섰으니,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무차별적으로 죽여도 죄책감 따윈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베면 벨수록 다급해질 뿐이었다.
잔챙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으니까.
땀에 젖은 코트가 무거워질수록, 예리했던 검이 무뎌질수록 그 생각은 점점 뚜렷해졌다.
6층, 7층, 그리고 8층.
파죽지세로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기다리는 적의 수준 또한 급등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주인 잃은 총기를 현지에서 조달했지만―
'오토 락?'
등록된 지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메가콥의 일원 아니랄까 봐 지급받은 장비 또한 일급품인 듯했다.
그러고 보면 상층은 저층과 다르게 절제된 기운이 느껴졌다.
배치된 인원들도 하나같이 건장했다.
유전자 조작으로 강화된 병사라는 건 말할 것도 없는바, 판단 능력이나 반사 신경 모두 월등하다고 봐야 했다.
방검, 방탄복을 착용한 것도 모자라 전문적인 훈련까지 받은 건지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하고 좀처럼 거리를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길목마다 설치되어 있는 장치에 있었다.
대인용 지향성 산탄 지뢰.
일명, 스톰.
직선상에 있는 건 무엇이든지 날려 버리는 그 무기는 타인의 침범을 불허했다. 범위에 들어가는 순간, 폭발한 쇠구슬에 의해 벌집이 될 거라는 건 불 보듯 자명한 일.
개활지라면 다른 곳으로 돌아가면 될 테지만 이곳은 실내. 즉, 일방통행이었다.
상대의 의도는 알 것 같았다.
지루한 눈치 싸움을 유도해, 병력을 충원하고 싶은 거겠지. 어쩌면 이미 뉴델바이어에서 파견된 원군이 1층에 도착해 있을지도 몰랐다.
앞과 뒤.
양쪽에서 덮친다면 승산이 있다 여긴 것일 터.
하지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작전이었다.
타닥.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빠르게 현황을 파악한 신은 그대로 도약해 벽면을 타고 내달렸다.
X축도, 그렇다고 Y축도 아닌 Z축을 이용한 이동.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교차 사격이 이어졌지만, 사태를 파악한 뒤에는 늦었다. 한껏 가속한 신이 코트 자락을 펄럭이면서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으니까.
금방에라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검을 움켜쥔 채, 신은 한계까지 다다른 원심력을 풀어헤쳤다.
그가 나아가는 궤적에 닿은 스톰은 너나 할 것 없이 오폭했다.
쿠쾅!
그러잖아도 필요 이상으로 밀집해 있던 참이었다. 사방으로 솟구친 쇠구슬은 벽면에 참혹한 흔적을 남겼다.
그 후폭풍에 8층 전체가 들썩이는 건 당연지사.
유일하게 그 참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신은 반쯤 부러진 검을 기다란 기타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교체된 건 한순간.
"얼마 남지 않았나."
* * *
9층은 플로어 전체가 개방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기둥과 격벽을 허물기라도 한 건지 여기저기에 난잡한 흔적이 역력했다. 최후의 방어선인 만큼 아예 엄폐할 여지를 주지 않고 최고 전력으로 깨부수겠다는 의지가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방향성이 무색하게도 지키고 서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도련님의 말대로 되었군요."
"너는 누구지?"
"로이드 바란. 로이드라고 불러 주시길."
014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지
* * *
정중하게 말한 것과 다르게 자기를 로이드라 소개한 남자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외견 또한 그와 비슷한지라 따로 기억할 것도 없었다.
"그래, 미스터 도베르만. 도련님의 말대로 되었다는 건 무슨 뜻이지?"
"당신이 양후 아닙니까? 이 정도의 기량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테니까요. 하물며, 이러한 시기라면 더더욱."
육십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 게 낯설었지만, 로이드는 말을 아꼈다. 화성마저 개척하는 시기였다. 동안은 놀라운 거리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너희가 토마스를 죽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냐?"
"제 대답은 무의미할 텐데요? 실제로 이렇게 당신이 당도했으니까요."
"그래, 우문이었네."
신은 기다란 기타 케이스에 검을 조용히 수납했다.
그 모습에 뒷짐을 지고 있던 로이드가 옆에서 대기 중인 병기에 올라탔다. 아니, 탑승했다.
"피차간에 쌓인 게 많으니,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밀폐식 전신 강화복.
일명, '파워드 아머'.
전고 3미터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날렵한 곡선이 두드러지는 디자인. 겉보기에도 중심이 잡힌 병기는 묵직한 소음을 토해내며 기상했다.
거인의 태동에 신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발매되지 않은 제품이었지만, 세간에서 한창 떠들어대기에 들어본 적 있었다. 뉴델바이어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명품.
4세대 파워드 아머.
'팔랑크스.'
캐치프레이즈는 '입는 전차'.
전해진 바로는, 티타늄 합금으로 구성된 장갑은 갖은 화기에 내성을 가질뿐더러, 그래핀 배터리를 탑재해 단독 운용 시간이 2주에 달하는 폭주 머신이라고.
하물며 추정 출력은 1,500마력에 달했다.
내장된 인공 근육이 착용자의 움직임을 보조해, 운동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건 물론이고 MUG―3 수준의 작전 수행 능력을 보장했다.
MUG란 'Military Utility Grade'를 칭하는 약자로 군사 효용 등급을 일컬는 단어였다.
숫자가 높아질수록 그 범주가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1은 대인전에서 우위를 잡을 수 있는 수준. 2는 시가전에서, 그리고 3은―
'국지전.'
물론 기본적인 사양보다는 전술적인 의미에 초점을 두는 평가 등급인 만큼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할 수도, 또는 능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안주해서는 안 되었다.
탑승하는 것만으로 일개 개인이 하나의 부대에 필적한다는 것부터가 불합리하기까지 짝이 없었던 거다.
다행이게도―
"비슷한 거라면 나도 하나 있는데."
여태껏 둘러메고 있던 기다란 기타 케이스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유명 상표가 찍힌 커버는 위장에 불과했다.
그 실체는 도검류 통합 관리 보관함, 블랙스미스. 그리고 '단 하나의 칼날'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였다.
신이 블랙스미스를 밟은 순간, 증기가 새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가슴 언저리까지 뛰어올랐다.
"또 검입니까."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지."
허공에서 그 검을 낚아챈 신이 자세를 바로잡자 로이드가 한 발자국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까지 당당하니 도리어 궁금하군요, 그 양후가 얼마나 대단한지."
로이드가 밟고 선 지면이 거미줄 모양으로 으스러졌다. 그것은 파격의 전조.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신이 몸을 웅크린 순간―
쿠쾅!
강렬한 충격파가 플로어를 내달렸다.
파멸적인 일격을 정면에서 맞이한 신은 바닥에 스키드 마크를 새기며 주르륵 밀려났다.
"음?"
로이드가 멈칫한 건 한순간.
맹공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가슴 부위의 장갑이 탈피라도 하듯 떨어져 나간 거다.
충돌한 직후에 베였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
평범하지 않았다.
로이드의 눈에 투명한 검신이 들어온 건 그때.
'단분자 블레이드?'
분자와 분자 사이의 결합을 끊어, 절단이라는 개념을 체현한 병기.
MUG는 1.
대인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수준이지만 그 무엇보다 효율적인 살상 병기였다. 닿기만 한다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니까.
하지만―
"구식이군요."
칼날 전체가 아니라 접촉면에만 국소적으로 적용된 하품.
로이드의 말대로였다.
신이 들고 있는 단분자 블레이드는 정품이 아니었다.
한계 또한 명확.
[●●●●◐]
손잡이 부근에 표시된 배터리 잔량이 그 증거였다. 고작 한 번 휘둘렀을 뿐이건만 벌써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던 거다.
쿠쾅!
로이드는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하게 설계된 병사였다.
근밀도가 일반인의 5배에 육박하는 것도 모자라 수많은 무술을 섭렵한 거다.
그중에서도 가장 숙련도가 높은 건 파워드 아머 전용 CQC, 아브람.
무게 중심을 옮겨 거대한 부피와 무거운 질량을 십분 활용하는 백병전 기술 체계는 로이드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하는 건 기본.
무자비하게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거센 바람이 일어나 일대를 두들겼다.
그에 대항하는 신의 무술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가 익힌 건 원심력을 극한까지 활용해 한 점에 꽂아넣는 고류 무술. 관성을 이용하는 만큼 불리한 체격 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본질은 거인과 소인.
서로 대칭점에 선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운동 역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동작에는 한계가 있고,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하게 되는 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로이드가 있는 자리에는 신이,
신이 있던 자리에는 로이드가,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 가면서 이어지는 공방에 9층 전체가 흔들렸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이나 서로를 향한 살의 또한 짙어졌다.
승패를 가르는 건 누가 먼저 상대에게 치명적인 선물을 선사하느냐.
기기긱.
티타늄 합금 장갑이 순두부처럼 잘려 나갔지만 로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어차피 단분자 블레이드가 벨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었다. 역으로 이용한다면 공간을 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바로 이처럼.
쿵.
기민하게 신의 품속으로 파고든 로이드가 주먹을 말아쥔 순간, 팔꿈치에 내장된 부스터가 점화되었다. 일격을 보정해 주기 위한 추진 장치.
격렬한 폭음과 함께 팔이 사라졌다 나타난다.
아니, 워낙 빠른 나머지 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다.
쏘아진 일격은 분명하게 과녁에 적중했으니까.
"크흑."
간발의 차이로 급소는 막은 신이었으나,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까지는 방비하지 못했다.
과연 입는 전차라는 이명이 걸맞는 위용이라고 해야 할까.
황급히 거리를 벌리려고 했으나, 한 번 물어뜯은 로이드는 쉽사리 풀어주지 않았다.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채로 달라붙었던 거다.
달칵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
팔랑크스의 손등에 장착된 회전 실린더가 돌아간 순간, 핸드 캐논이 불을 뿜었다.
일권(一拳)이 발해지는 것과 동시에 쏘아지는 탄환.
콰직.
복부가 관통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인간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처였으나, 신은 오히려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단분자 블레이드를 높이 들어, 고통의 원인이 되는 팔랑크스를 베어 가르려고 한 거다.
허공에 아로새겨지는 섬광.
순간, 파워드 아머의 헬멧 부분이 절단되며 로이드의 얼굴이 노출되었다.
"흡!"
동시에, 그에 대항하듯이 핸드 캐논이 다시 한번 격발되었다.
쾅!
맞부딪친 전력에 폭풍이 휘몰아친다.
격렬한 다툼에 피어오른 먼지가 걷히기도 전에 두 사람은 서로에 달려가 살의를 퍼부었다.
일진일퇴.
백중지세.
정확하게 평형을 이루는 저울추처럼 보였으나, 의외의 곳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
[◐○○○○]
[○○○○○]
투명했던 단분자 블레이드의 검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거다.
"배터리가 다 했습니까."
지금껏 신이 선전한 건 단분자 블레이드가 있어 가능한 거였다. 배터리팩이 밑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
로이드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노련한 사냥꾼은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
단분자 블레이드를 잡아 부러뜨린 로이드는 억지로 신을 넘어뜨렸다.
체격 차를 십분 활용한 테이크 다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신 위로 올라탄 로이드가 주먹을 내리꽂은 순간, 핸드 캐논이 발광했다.
투쾅! 투쾅! 투쾅! 투쾅! 투쾅! 투쾅!
6번의 연사 끝에 9층을 지탱하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콘크리트 더미가 호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건 한순간.
무심하게 잔해를 헤쳐 나온 로이드는 그제야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확실하게 머리를 터트렸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졌는데도 재생하면서 달려드는 건 그의 입장에서도 식겁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저 상태에서 생환하는 건 불가능할 터.
애당초 파워드 아머에 저항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그래도 그 양후라고 하면 어떻게든 수를 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건만―
"시시하군요."
"뭐가?"
등을 돌린 로이드의 귓가에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연, 전신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감각에 허리를 숙인다. 그 찰나의 결정이 명줄을 붙잡았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건 시리도록 날카로운 폴딩 나이프였으니까.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인가.
해명할 수 없는 현상과 마주한 로이드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나, 그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일지라도 신에게는 일상이었다.
도망칠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폐부에 쌓인 먼지를 토해낸 신이 핏물에 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퍽 재미있는 장난감이잖아."
파워드 아머가 시장에 풀린 건 20년 전. 그러니까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태껏 상대해 본 적 없는 유형의 상대인지라,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쯤 되니 슬슬 알 것 같았다.
"여유를 부린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수중에 있는 패는 없을 텐데요."
"아, 이거?"
제한 시간이 다 된 것도 모자라, 반으로 부서진 단분자 블레이드. 로이드의 지적대로 쓸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상황은 최악이 아니었다.
품속을 뒤적여, 자그마한 케이스를 꺼낸다.
덮개를 열어젖히자 정렬된 주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서에 관계없이 한꺼번에 손에 쥔 신은 주저하지 않고 제 목에 꽂아 넣었다.
전신 진통제.
대사 촉진제.
종합 각성제.
하나같이 순도가 높아, 영구적인 후유증을 낳는 드러그 칵테일. 이른바, 마약이었다.
인생을 끝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손도 대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
"자살할 셈입니까."
"살 셈이야."
치사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나, 신은 태연하게 답했다. 모험이라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몸.
폭발하는 호르몬과 달궈진 신경계가 합주한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혈관이 도드라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이긴 뒤에."
015 네가 그토록 찾던 양후가 바로 나다
* * *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까. 추하군요.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마무리 지어 드리죠."
으스러진 지면을 발판 삼아 로이드가 질주했다.
부스터를 이용한 순간 가속과 핸드 캐논을 통한 화력 보충. 이 둘의 조합은 근접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그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그것도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
신에게는 일련의 과정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점점 다가오는 주먹.
돌아가는 회전 실린더.
불을 뿜으려는 핸드 캐논.
확장된 인지 영역 속, 느리게 흘러가는 세계를 유영하면서 로이드에게 접근한다. 그의 동작은 질리도록 본 참이었다. 최적의 동선을 그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신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면 죽지 않고 맞받아쳤을 테니까.
그래도, 그 아래는 된다 자신했다.
겨우 열다섯 번 죽고 난 뒤, 풀 수 없는 문제의 해답을 구했으니까.
투쾅!
바로 코앞에서 발해지는 탄환을 피하며 단분자 블레이드를 휘두른다.
하지만 빛을 잃은 병기가 제 효용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날파리를 쫓는 것처럼 칼날을 튕겨낸 로이드는 재차 반대편 주먹을 내질렀다.
상대방의 복부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일격.
로이드는 이걸로 방점이 찍히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회심의 한 수는 예상과 다르게 애꿎은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뭣."
그대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반신을 뒤로 크게 젖힌 신이 솟구친 건 그 순간.
구름판이라도 밟은 것처럼 폭발적인 도약 끝에 있는 건 장렬한 찌르기였다.
노리는 곳은 단 하나.
두 팔을 X자로 교차해 머리를 꿰뚫을 듯한 검격을 막은 로이드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신에게 달려들었다.
쿵, 쿵!
연달아 터지는 추진 장치의 보조 받은 권격은 변칙적이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가속에 가속을 더한 일격은 더 이상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
그 앞에서, 신은 빙그르르 돌았다.
이동하면서도, 회피하면서도, 심지어 가만히 서 있는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한히 회전하는 팽이.
"개수작!"
분개한 로이드가 신을 억누르기 위해 난타했다.
과열된 부스터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격발된 핸드 캐논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신이 회전하면서 내민 칼날과 부딪치면서 불티가 피어오른 건 한순간.
그로 인해 파생되는 반발까지 모조리 갈무리한 신은 더욱더 강렬하게 돌았다.
마모될 칼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기기긱, 기기긱.
상단과 하단을 오고 가는 검격에 팔랑크스 위로 기다란 실선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있을 리 없는 균열의 전조에 로이드는 한시라도 빨리 신을 저지하기 위해 간격을 좁혔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돌던 신이 갑자기 멈춰 선 거다.
'아니.'
그건 순전히 착각이었다. 지면에 새겨진 동그란 스키드 마크를 발견했으니까.
잔상과 잔상이 겹치면서 오히려 가만히 있는 듯한 착시가 일어난 것뿐이었다.
일명, 스트로보 현상.
"눈치챘어?"
읊조리는 것처럼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로이드에게는 천둥이 울린 것만 같았다.
저 멀리 있던 신이 바로 턱밑까지 치달은 뒤였으니까.
얼마나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건지, 동작 하나하나가 뚝뚝 끊겨서 보일 지경이었다.
다가오는 위협을 뿌리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게 패착이었다. 섬광이 번쩍였나 싶은 순간, 섬뜩한 절삭음이 들려온 거다.
속절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제 팔뚝을 바라본 로이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단분자 블레이드의 효용이 다했건만 절단면은 거울처럼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기술이 선사한 편의가 아니라, 온전히 신이라는 사람이 일으킨 기적.
도저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지라,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전율했다.
"어딜 보는 거지?"
"뭐..., ㅅ."
로이드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신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단분자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 * *
스위트룸을 독차지한 니엘은 야경을 불빛 삼아 여유롭게 와인 잔을 들었다. 몇 분 전, 호텔 내부가 전부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었고, 바라는 대로 되는 중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반쯤 줄어든 와인 잔을 탁자 위에 놓기가 무섭게 폭음이 그쳤다.
지지부진한 교전이 끝났다는 건 기다리던 때가 왔다는 뜻.
벌컥 문이 열린 건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입을 연 니엘은―
"너답지 않게 오래 끌었네. 그래서 그 녀석은? 죽인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살아 있는 게 가치가 큰데 말이야."
상대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충직한 심복, 로이드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청년.
갑작스러운 인지 부조화에 목구멍이 막혔다.
하지만 청년, 신은 아니었다. 여태껏 그 얼굴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올랐던 거니까.
"네가 니엘이냐?"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온 거지."
신이 핏물도 안 닦은 폴딩 나이프를 꺼냈지만 니엘은 눈도 깜빡 안 했다. 상정 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건 보고 알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놀랄 정도는 아니었던 거다.
일단 젊었다.
양후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로이드는?"
"여기."
신은 들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던졌다. 최근 겨뤄본 상대 중에서는 단연코 첫손으로 꼽는 강자였으나, 그래봤자 사냥개.
생기를 잃은 로이드와 시선을 마주친 니엘은 팔걸이에 걸린 지팡이를 들어 휘둘렀다.
로이드와 유형은 다르지만 그도 엄연히 유전자 조작을 거쳤다. 운이 좋다면 치명상을 입히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구상은 초기에 사그라들었다.
난데없이 지팡이의 길이가 반으로 줄어든 거다.
언제 베인 건지 나머지 반은 저 멀리까지 굴러간 뒤.
"이거, 공격으로 간주해도 되는 거지?"
상대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니엘은 너스레를 떨었다.
"진정하라고. 아무래도 우리 둘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오해?"
"아마 양후에게 의뢰를 받은 것 같은데, 아냐?"
어째서 자신만만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자기 좋을 대로 현황을 해석한 듯싶었다.
헛웃음을 흘린 신의 입가가 점점 굳어졌지만 니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10배, 10배로 불려 줄게. 너도 공범으로 몰리기는 싫잖아? 안 그래?"
"너는 누구를 쫓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거냐."
이런 녀석에게 토마스가 희생당해야 했다는 사실이 허망할 따름이었다. 이내, 좌절에 가까운 감정은 곧 분노로 변했다.
신의 얼굴이 살귀처럼 일그러지는 건 한순간.
그제야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니엘이 신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설마...?"
"네가 그토록 찾던 양후가 바로 나다."
"아니, 잠깐...."
아무리 그래도 이리 젊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계산이 맞다면 양후는 올해로 60세나 되는 노인이었던 거다. 물론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잔주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고여 있는 물을 헤집어 진흙탕으로 만들었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지."
니엘을 걷어차 다시 의자에 앉힌 신은 그의 손등에 폴딩 나이프를 꽂았다.
"끄아아악!"
팔걸이에 손이 고정된 니엘이 소리쳤지만, 신은 무심하게 폴딩 나이프를 하나 더 꺼내 반대쪽도 똑같이 교정했다.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고, 친구. 내일 해는 보지 못할 테니까."
"흐흐흐, 눈앞의 복수에 멀어 악수를 두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지?"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인다면 뉴델바이어까지 널 쫓을 거야. 메가콥이 두 곳이나 합심한다면 글쎄, 과연 이 세상에 네가 갈 곳이 있을까?"
"그래서?"
"이쯤 하지? 특별히 내 몸에 손을 댄 건 용서해 줄 테니까. 잘 생각해. 이런 자비는 좀처럼 베풀지 않으니까."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든지, 나는 다 넘길 수 있다든지, 상투적인 말이 몇 개 떠올랐지만 신은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에는 너무 많이 사용해 왔던 거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줄 뿐.
"기껏 걱정해 주는데 미안해서 이거 어쩌지, 나는 널 모욕할 건데."
흔들의자 뒤로 돌아간 신은 니엘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가축에게도 감히 하지 않는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아무리 속내를 숨기려고 해도 부르르 떨리는 어깨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
"어차피 죽지만 않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네 육신보다 정신이 먼저 죽을 테니까."
그건 장담할 수 있었다.
신의 손을 거쳐 간 이들은 하나같이 자살을 선택했으니까.
"일단, 저기 떨어진 지팡이부터 먹어 볼까?"
* * *
뉴델바이어 본사에서 나온 회장, 필릭스 후버는 리무진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본디 자택으로 돌아가야겠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아니, 얼마 전부터 달라졌다.
"늘 가던 호텔로."
계기는 자선 행사에서 한 여자와 만나면서부터.
그녀의 이름은 메릴다 가비. No.3 돔에서 활동하는 인기 가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감이었지만, 이내 운명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관계였다. 메릴다 또한 가정이 있었던 거다.
결국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밀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는 호텔도 그 연장선.
칠십이 다 된 필릭스였지만, 육신만큼은 정정했다. 정력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유전자 조작을 받았으니까.
튼튼한 두 다리로 스위트룸에 입장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두컴컴한 게 음산하기 그지없었던 거다.
무드 등도 켜져 있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메릴다는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진 듯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회의가 길어져서 말이야."
"미안할 필요는 없어. 나도 금방 왔으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필릭스는 디바이스로 운전기사를 호출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먹통이었다.
"...메릴다?"
"나는 메릴다가 아닌데 말이야."
얼마 가지 않아 어둠에 익숙해진 필릭스는 방 한구석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객실을 잘못 찾아온 것 같군. 경비는 부르지 않을 테니 조용히 나가게."
엄중히 타이르는 필릭스였으나―
"오늘 밤에는 많은 일이 있었어. 개 같은 녀석을 처리하고 왔거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대체 뉘 집 자식이길래 이리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걸까, 하고."
들려온 건 넋두리가 전부였다.
"나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인가?"
"있고말고. 네 집 자식인데."
"장난이 심하군."
호텔리어를 호출하기 위해 인터폰을 집어 든 필릭스였으나,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괜찮겠어?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사망한 메릴다를 보게 되어도?"
"뭣...."
뻣뻣하게 굳은 필릭스를 단번에 제압한 청년, 신은 심술궂게 웃었다.
"농담이야. 그녀는 돌려보냈어. 네가 보낸 사람이라고 하니까 의심도 하지 않고 믿던걸."
"대체 원하는 게 뭔가?"
"뒤처리."
"뒤처리?"
"복수의 연쇄를 끊자고 먼저 제안해도 현장을 발견한 너는 이성을 잃고 내 뒤를 쫓아올 테니까. 솔직히 잘못한 녀석들이 성내는 건 추하기도 하고, 여간 귀찮은 게 아니야."
"아까부터 선문답하는데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목숨."
간결하게 답한 신은 주저하지 않고 필릭스의 목을 꺾었다. 자질구레하게 설명하는 건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앞으로 지옥에서 만날 두 부자의 몫이었지.
기기긱.
사이버네틱스 수술이라도 받은 건지 골격에 금속 프레임이 섞여 있었지만, 무용.
아직도 드러그 칵테일의 영향이 남아 있는 신에게는 준비 운동도 되지 않았다.
"그럼 잘 가라고."
빠각.
둔탁한 소리가 들린 순간, 필릭스의 목이 꺾여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꺾였다.
016 얄궂기 그지없군
* * *
* * *
간밤에 일어난 소란은 다음날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뉴델바이어의 필두라 여겨지는 두 부자가 사이좋게 죽은 거다.
그것도 타인의 손에 의해서.
유력한 용의자가 몇 명인가 부각되었지만 공찰은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거산에 호랑이가 사라지자, 승냥이들이 뛰쳐나와 서로를 지목하며 범인이라고 으르렁거렸던 거다.
그렇다고 중심을 잡을 혈족이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남은 자제들도 이때다 싶은 건지, 멈추지 않고 폭주 중이었으니까.
뉴델바이어는 차근차근 분열 중이었다. 법인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벌써부터 시작된 거다. 이윽고, 메가콥이라 불리지 못할 만큼 크기가 작아질 터.
당분간 위협적인 공세는 없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영원히 진상을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방비했다고 해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니까. 그것도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그러니 이제―
'신이라는 신분을 버릴 차례인가.'
복수는 끝났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지만, 현재로서는 마땅한 비책이 없었다. 뇌리에 새겨두고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죽지 않으니,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는 건 자명한 일.
불현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바꾼 외형. 이제는 본판이 어땠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깎여 나갔던 뼈와 살을 재생시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불룩하고 잊혔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불완전하게 아문 상처가 재생되면서 윤곽을 찾아간다.
신도, 양후도 아닌 본래의 윤곽을.
한참을 몸부림친 신은 잦아드는 격통에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잘생겨졌나?"
실없는 감상을 내뱉은 신은 바깥으로 나갔다.
* * *
No.3 돔 외곽에 위치한 봉안당은 이른 시각부터 오가는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인파를 따라, 내부로 들어간 신은 조사했던 자리로 걸어갔다.
1층, 한구석에 자리한 봉안당.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내리던 신은 중앙 부근에서 바라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故 토마스 러셀]
진주처럼 고운 봉안함 안에는 유골이 담겨져 있을 테지. 토마스라는 인간이 치열하게 살아갔다는 증거로써.
"얄궂기 그지없군."
결국 살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살았다. 본의 아니지만 언제나 그래 왔다.
봉안함 앞에 한 쌍의 백합을 놓은 신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누가 먼저 왔다 간 건지 안에는 이미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망울이 가득했다.
토마스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구나. 그 사실에 잠깐 위로받은 신은 재차 입을 열었다.
"일단 갚아 줘야 할 건 갚아 줬어. 네가 준비한 선물을 받지 못한 게 아쉽지만. 뭐, 이런 감상을 내뱉는 것도 염치없는 거겠지."
피식 웃은 신의 귓가에 묵직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선객이 와 있었군요."
앞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해 뒤로 넘긴 머리. 그리고 알이 굵은 안경.
척 보기에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 같은 인상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신의 눈길을 끈 건 중년인의 외모였다. 누군가의 젊은 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던 거다.
"토마스?"
"역시 아버지를 아시는 분입니까?"
토마스의 아들.
제논 러셀.
계산이 맞다면 이제 마흔이 되었을 거다.
어렸을 때 몇 번 만난 게 고작이니 얼른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몰라봤어, 예전에는 토마스를 닮았는데 이제는 분위기부터 다른걸."
초면인 사람이 친근하게 다가오자 제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후다."
이름을 듣고 나서야 두 눈을 부릅뜬 제논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그...?"
"그래."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와 주신 것 같은데."
"아, 너는 그렇게 알고 있는 거냐."
대외적으로 토마스는 노후된 건물이 전기 합선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고는 천재가 아닌 인재였다.
진실을 감춰야 할까, 아니면 그에게는 솔직하게 밝혀야 하는 걸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제논에게는 들을만한 자격이 있었으니까.
"사실은 달라. 토마스가 죽은 건 나 때문이기도 하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걸 어디서부터 밝혀야 하나.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신은 처음부터 풀어놓기로 했다.
* * *
사정을 들었는데도 제논은 침착할 뿐이었다.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는 게 전부. 오히려 자신의 직장으로 안내하기까지 했다.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시죠, 오늘은 휴업하기로 했으니까요."
"토마스에게 듣기로는 한 부호의 주치의가 되었다는데."
그래서일까.
개인 병원인데도 그 규모가 상당했다. 보안이 철저한 건 물론이고, 최신 기기 또한 항시 대기 중이었다.
"마침 연이 닿아 '오메가'의 회장님을 알게 되었거든요. 물론 그분을 직접 진료하는 건 아니고 손녀분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토마스를 죽인 녀석들이 왜 제논은 피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오메가'.
No.3 돔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메가콥이었다. 주력 분야는 전자 기기 전반. 뉴델바이어가 감히 덤빌 수 없는 체급을 가진 진짜배기 괴물이었다.
그런 이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를 해코지하는 건 뉴델바이어 측에서도 삼가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여기는 왜 데려온 거야? 네가 출세한 건 분명 축하해 줄 만한 일이다만 내가 이곳을 다녀가서 너에게 이로울 건 없는데 말이야."
"그건 잠시 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라는 듯, 제논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가 멈춘 곳은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조차 할 수 없는 보관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싸늘한 냉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제가 보여 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밀폐된 용기 안에는 버튼같이 납작하고 동그란 기기가 들어있었다.
신도 익히 알고 있는 장치였다.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기를 이용해 작동하는 지능형 단말기, 통칭 디바이스.
그리고 토마스가 주고 싶어 하던 선물―
"네가 보관하고 있었냐."
마침 유능한 의사가 아들이기도 했으니,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최적의 인선이었으리라.
"대체 어떻게 구한 거지?"
"화성에서 구해온 겁니다."
화성.
아직도 개척 중인 그 땅은 여러모로 규격 외였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통제의 사각지대라고 해야 할까.
완벽하게 관리되는 지구보다는 위태로운 게 사실이었다. 확실히, 디바이스를 구하고 싶다면 그곳보다 유용한 곳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신은 숨이 멎는 듯했다.
"설마, 화성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건...?"
"네, 위장이었죠."
허탈해서 헛바람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은혜를 갚겠다는 토마스의 의지가 느껴져서였다.
"멍청한 자식."
신분 같은 건 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차피 때가 되면 갈아탈 껍질 같은 거였으니까.
하지만 디바이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토마스가 남기고 간 마지막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거다.
"일단 나가시죠, 시술해 드리겠습니다."
방금 전부터 무덤덤한 제논의 태도에 신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시라고. 그렇다면 제게도 은인입니다."
신을 쳐다본 제논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이건 양후 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그 누구보다 바라셨을 테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 드리는 것뿐입니다."
등을 돌린 제논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음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 앞에서 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그 후에 이뤄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제논 그부터가 완성된 의사였고, 신에게는 죽어도 죽지 않는 신체가 있었으니까.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 없었다.
"회복까지는 일주일이 걸릴 겁니다. 커다란 상처는 없지만 디바이스가 신경계와 연결되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전까지 무리한 운동은 삼가시길."
"아니, 괜찮아."
신이 목에 붙어 있던 패치를 떼어 내자 제논은 기함을 토해 내며 저지하려 했으나―
"흉터 자국이 없어?"
아무리 난도가 낮은 시술이라지만 이물을 삽입한 거다. 그에 따른 반동을 감내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런 체질이야."
본인이 그렇다는데 반박할 말이 있을 리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은 제논에게 신이 물었다.
"따로 알아 둬야 할 건?"
"일단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얼굴과 홍채, 지문, 성문 모두 양후 님의 것으로 바꿨습니다."
"나이는?"
"일단 22살로 기록했습니다."
"적당하네."
"그리고 저번 달에 No.3 돔에 입국한 걸로 처리했습니다. 방문 이유는 배낭 여행."
아버지가 비범한 다이버였던 만큼 제논도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없지 않았다. 디바이스와 연결된 정보를 교체하는 작업도 마찬가지. 하물며 토대는 토마스가 일궈 놓은 거였다. 제논이 한 거라고는 적당한 기록을 기입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유전자 정보만큼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화성의 환경이 열악하다고 해도 그건 시드 콜로니에서 따로 관리하니까요."
"기대도 하지 않았어. 원래 디바이스는 타인이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니까."
"유전자 정보는 내장된 디바이스를 기준으로 설정된 상태입니다."
해결사로 오랜 시간을 보낸 신이었다. 제논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따로 검사받는 자리에는 없어야 한다?"
"네, 비교 분석하면 다른 사람이라는 게 들킬 테니까요."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괜찮다는 거 아냐."
지구에서야 닳고 닳은 해결사지만 화성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 그 자체였다. 완전히 깨끗한 도화지라고 해야 할까. 꼬리를 밟힌다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별말씀을."
자리에서 일어난 신은 근처에 널브러진 수첩을 펼쳐 한 가지 이름을 휘갈겼다.
"자."
"이건?"
[신세계의신이되는거다 #0001]
정체불명의 닉네임이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게임에서 흔히 사용하는 양식이었으니까.
"'로스트 사가' 몰라?"
"알긴 합니다만."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작, 로스트 사가.
의사지만 모를 리 없었다.
평생 의술에 매진한 제논이라고 해도 그 열기만큼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게임이었던 거다.
개발사가 지구가 아닌 화성에 있는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
"만약 내게 의뢰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쪽으로 쪽지를 보내.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까. 그게 설령 메가콥의 수장을 죽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제논과 눈을 맞춘 신이 단언했다.
"너라면 특별히 한 번은 무료로 해 줄 테니까."
제논은 그 말에 실린 무게를 새삼스레 알 것 같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도 모두 눈앞의 사내 때문이었던 거다.
토마스라는 연결 고리가 없었더라면 마주치지도 못했을 거물.
그 앞에서 제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017 그럼 되어 볼까
* * *
* * *
제논과 헤어진 신은 곧장 화성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예전이라면 우주 공항에 들어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겠으나, 지금 그는 디바이스를 소유한 시민이었다.
모두 한 사람이 달아 준 날개.
목뒤에서 느껴지는 기기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 어깨가 무거워졌다. 어쩌면 족쇄로도 작용할 수 있는 요소였던 거다. 더 이상 음지로 숨는 것도, 정체를 감추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신은 나아갈 생각이었다. 토마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기다리던 방송이 들려온 건 그때.
[탑승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11시 20분에 화성, 시드 콜로니로 가는 E―401호 우주여객선이 지금 2번 탑승구에서 탑승을 시작합니다. 탑승 마감 시간은 출발 10분 전입니다. 모두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2번 탑승구를 향해 태연하게 걸어가, 벽면에 설치된 터치스크린에 손을 얹는다.
[E―6294567―34 백가온. 탑승 확인 완료]
백가온.
토마스가 구해온 디바이스에는 우연찮게도 오래전 잃어버렸던 본명과 똑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언젠가 토마스에게 스쳐 지나가듯이 말한 게 전부였으나 어떻게 기억해 냈는지 용케 그에 부합하는 신분을 찾아온 거다.
그가 어떠한 심정으로 선별했는지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직접 들을 수 없는 탓에 더욱더 사무치게 다가왔다.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
머나먼 옛날, 음지 생활을 벗어나게 도와주었던 보답을.
덕분에, 지난 삶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누구보다 완벽한 생을 점지받았지만, 그 안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건 남들과 다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강구책.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인류의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또 진보했다. 언젠가 인간이 아닌 '인간'을 잡는 수단이 발견될 수도 있는 일.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될 뿐이었다.
불과 삼백년 전까지만 해도 불로불사란 단어는 비원에 가까웠다. 과거 시황제가 원했고 차르가 추구했던 것처럼.
하지만 인류가 지구를 넘어 화성에까지 진출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꿈의 상징이 되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지언정 결코 이루지 못할 소망은 아니었으니까.
이미 기대 수명을 훌쩍 넘은 이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분명 불로불사의 잔재.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인과 관계가 명확하다면 불로불사의 출현조차 이상하지 않을 시대가 된 거다.
이것은 위기이자 기회.
그리고 다시 없을 도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세월이 얼마나 흘러도 상관없었다. 흩어진 기술을 모아, 발견되지 않은 미지를 추적해 기나긴 방랑을 끝낼 참이었다.
더 이상 신이란 이름은 없었다.
양후란 해결사도 존재치 않았다.
여기에 있는 건 돌고 돌아 원점으로 회귀한 인간, 백가온뿐.
"그럼 되어 볼까."
진정한 의미의 불로불사가.
* * *
우주 공항의 활주로는 발사대의 기능을 겸했다.
거대한 질량체를 우주로 쏘아 올리기 위해 고안된 시설, 매스 드라이버의 힘을 빌려 가속하는 거다.
때문에, 전진한다는 느낌보다 사출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총과 탄환의 관계.
내부에 진입한 발사체는 가속도만으로 초음속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최저 보장 속도는 무려 시속 8,000킬로미터.
이론상, 5시간이면 세계 일주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기반 시설이 설치된 덕분에 우주 공항은 화성뿐만이 아니라 돔과 돔 사이를 오가는 교통수단으로도 각광 받기에 충분했지만, 민간에는 개방되지 않았다.
공격적이다 못해 저돌적인 비행 물체의 출입 허가를 각 돔의 시정부가 쉽사리 내줄 리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난 이들이 몇 명인가 있었다.
No.3 돔이 운영하는 우주 공항에 막 도착한 여자도 그중 하나였다.
No.1 돔에서 제일가는 성세를 자랑하는 메가콥, 밀레니엄 코드의 회장.
린초위.
육감적인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은 그녀는 쥘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린초위가 걷는 곳이 곧 성채가 되었다. 들러붙는 경호 인원만으로 주위가 북적일 정도.
그녀의 곁에서 걷던 사내가 헤실헤실 웃었다.
"회장님이 직접 나서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출장일 뿐이니까요."
사내가 친근하게 다가왔지만 린초위는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그의 호의를 무마했다.
실처럼 가느다랗게 눈을 뜬 사람을 믿지 말라는 건 업계에서 정평 난 사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사내의 행동은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당신들의 개가 아니에요. 기억하세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회장님의 협조에는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매끄럽기 그지없었지만 정작 그 시선은 전방을 향하고 있었다. 애당초 이런 대화엔 관심도 없다는 소리.
쥘부채에 가려진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뒤틀린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어느 메가콥의 수장이 이리 끌려오듯이 다른 돔으로 출장을 온단 말인가.
한숨을 토해내는 린초위였으나, 불만을 토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상하 관계는 명확했으니까.
'No.1 돔 시정부 직속, 비상 재해 대책반.'
이름만 그럴듯하지, 실상은 No.1 돔에서 비밀리에 운영 중인 특수 부대였다.
창단 목적, 부대 규모, 보유 자금, 운용 병기 등등 그 모든 게 불분명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 때 양후의 존재를 인지한 뒤로는 그만을 맹렬하게 추격 중이라는 것.
이번에 동행한 사내, 진건은 그 대표격인 인물이었다.
풍겨 오는 체취부터가 남달랐다.
"일단 사건 현장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혼자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저야 괜찮습니다만.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거스름돈은 받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진건이 자그맣지만 확실하게 두 눈을 떴다.
"정말, 양후의 짓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고민은 찰나에 가까웠다.
"...호의를 마냥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안내하세요."
* * *
콜렘베르그 호텔 외곽에는 노란 줄과 하얀 줄이 교차된 홀로그램이 출입을 통제 중이었다. 내부에는 여러 단체에서 파견된 인원들로 가득했다.
밀레니엄 코드의 이름을 빌린 진건도 그중 하나.
홀연히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의 표정을 슬그머니 확인한 진초위는 단언했다.
"아무래도 니엘 후버가 죽었다는 소식은 사실이었나 보네요."
"'그런 걸' 죽었다고 표현해도 되는지 의문입니다만."
보란 듯이 10층에 전시된 니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린 진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저 위에서는 뉴델바이어에서 고용한 의사들이 니엘이었던 것을 조립하는 중이었다. 호텔 전체에 흩뿌려진 잔재를 찾아가면서.
"어지간히도 상대에게 밉보였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뉴델바이어를 끌어들인 회장님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고 봅니다."
"당연한 귀결이에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면 저 자리에 있는 건 니엘이 아니라 우리일 테니까요."
자금을 쏟아부어 양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고 해도 사살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피해가 속출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경쟁사인데도 불구하고, 밀레니엄 코드가 뉴델바이어에 협력을 구한 건 그들을 방패막이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결과는 보이는 대로.
성과를 독식하려던 니엘은 입이 찢어졌고, 집안 관리를 하지 못한 필릭스는 고인이 되었다.
설령, 상황이 반대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정말 양후가 뉴델바이어에게 잡혀 거래 대상으로 나온다고 해도 린초위는 말없이 받아 줄 생각이었으니까.
본디 서녀였던 그녀가 밀레니엄 코드의 회장이 된 건 양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치적거리는 친족을 모두 처리해 주었으니.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혈혈단신으로 밀레니엄 코드라는 거인을 장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거다. 더구나 마땅한 지지 세력도 없던 그녀였다.
모두가 고꾸라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상황.
그때, 선뜻 손을 내민 게 바로 지금의 시정부였다.
결국 린초위는 외세의 힘을 빌리고 나서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시정부는 말이 통하는 메가콥을 원했으니, 어찌 보면 상부상조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밀레니엄 코드의 이름으로 양후를 찾은 것도, 회장이 지닌 강력한 권력으로 진건을 데려온 것도, 전부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래서 정말 양후가 저지른 짓인가요?"
양후, 그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린초위에게 있어, 양후는 원수임과 동시에 은인에 가까운 자였으니.
물론 사심을 제외하고도 양후는 퍽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그의 그림자를 밟아 해결사가 된 이만 해도 수천, 수만은 되었던 거다.
"어떤가요?"
"그 비정상적인 검술 솜씨, 이 하늘 아래 둘이 있을 리 없겠죠. 그동안 취합한 정보로 보자면 십중팔구 그일 겁니다."
"그런가요?"
"솔직히 놀랍더군요."
진건은 무덤덤하게 제 감상을 내뱉었다.
지난 20년 동안 양후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비교군이 없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과정은 숨길 수 있을지언정 그 결과는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운동 능력이 20년 전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단분자 블레이드의 도움 없이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무리 진건이라도 거울처럼 반짝이는 파워드 아머, 팔랑크스의 단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육십이 넘는다고 들었는데요? 아직도 전성기가 유지되는 걸 보면 주기적으로 관리를 받는 걸까요?"
개인 병원이나 무허가 시술소를 돌아다니면 꼬리가 잡히지 않을까, 하고 제 의견을 피력하는 린초위였으나 진건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특별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죠. 익히 아시겠지만, 시정부는 한때 양후에게 포격을 퍼부은 적이 있습니다."
"세금을 허공에 날린 그 사건 말이죠."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가 터졌을 당시, 불의의 습격을 받은 시정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어코 포문을 개방했던 거다. 그것도 일개 개인을 향해.
"그때, 양후는 저희의 포격을 피한 게 아닙니다. 피하지 않았는데도 무사했던 것뿐입니다."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그에게 힐링 팩터와 유사한 능력이 있다면요? 대부분의 모순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건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깨달은 린초위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극소수의 기득권만 공유하는 비밀.
'이능 발현 개체.'
일명, 메타 휴먼.
그들은 날 때부터 저마다 다른 이능을 간직한 인종의 한 갈래였다.
누군가는 새로운 인류의 등장이라며 환호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멸칭을 부여하며 제한하고자 했다.
"긴가민가했지만 회장님의 조력 덕분에 확정되었습니다. 양후, 그는 감염자가 틀림없습니다."
감염자.
메타 휴먼의 또 다른 이름. 그리고 비상 재해 대책반의 존재 의의로 추정되는 대상의 멸칭이기도 했다.
018 아직 햇병아리지만 말이야
* * *
"다른 개체는 몰라도 그만큼은 꼭 처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니까요."
또다.
No.1 돔에서도 이능 발현 개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특별하다 싶은 이들은 하나같이 비상 재해 대책반의 손길을 거쳐 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을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실체를 파악한 민간인은 없다시피 했다.
철저한 정보 통제.
비상 재해 대책반이 지향하는 건 빅 브라더 그 자체였다. 그리고―
"횡포예요."
"밀레니엄 코드의 필두(筆頭)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메타 휴먼이 위협적이라는 건 린초위도 익히 아는 바였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애당초 억제하는 것보다 이용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요? 시정부는 대체 언제까지 자신들의 과오를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외부인의 시선이군요. 자신이 보았던 세상으로만 재단하는."
"여기에서 뭘 더 알아야 하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저어 대화를 차단한 진건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부디 회장님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어 주세요. 영원히."
* * *
과학 기술의 발전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급변한 건 가상 현실을 활용한 게임이었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기존의 틀이 전부 무위로 돌아갈 정도로 커다란 격변이 일어난 거다.
현실 같은 그래픽?
무한에 가까운 상호 작용?
그런 건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핵심이 되는 건 완벽한 밸런스.
여태껏 MMORPG에서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난제를 해결한 거다.
인공지능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수십, 수백억의 시뮬레이션에 빈틈은 없었다. 여러 요인을 대조해 교차 검증한 결과였으니까.
어떠한 사람이든 실력만 있다면 정상을 노릴 수 있었다.
불합리한 내적, 외적인 요소 없이.
이러한 가상 현실 게임의 선두 주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로스트 사가였다.
오픈한 지도 벌써 5년째.
그런데도 방대한 서사는 마를 줄 몰랐다.
각기 다른 몬스터의 생태를 구성하는 건 물론이고 무작위 퀘스트를 생성해 그에 부합하는 아이템 리스트를 보상으로 지정했다.
얼마 전에는 대규모 업데이트까지 진행된 터라 하반기 들어 가장 큰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기, 유저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신규 레이드 보스 홍련의 용, 타이무트를 과연 어떠한 길드가 먼저 클리어할 것인가.
공개된 지 며칠이 지난 만큼 대부분의 공략은 이미 누출되었다. 하지만 마무리 지은 이는 아직 없었다.
난관은 홍련의 용 타이무트가 드래곤에서 인간으로 변하면서 시작되는 두 번째 페이즈였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랬던 괴물이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드는 거다.
PVE에서 PVP에 가까운 양상을 띠게 되면서 첫 번째 페이즈에서 고수했던 전술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지사.
더구나 가까이 붙을 수 있는 인원수 또한 제한이 있었다. 너무 많으면 동선이 얽히면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그와 반대로 적으면 역공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이 두 간극 사이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게 포인트.
다행히 프라이멀 길드에는 스페셜리스트가 있었다.
"신신!"
길드 마스터의 부름에 뛰쳐나간 사내가 타이무트 앞에 섰다.
겁화가 일렁거리면서 주위를 자욱하게 물들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 직후, 폭풍을 동반한 일격이 전장에 들이닥쳤다. 지반이 무너지면서 먼지구름이 솟구쳤지만 타이무트는 중심을 잃지 않고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녀석이 향한 곳은 후열.
전선을 무너뜨리기 위한 발악에 사내, 신신은 그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훼방을 놓았다.
서로가 서로의 경로를 막아서는 공방. 일진일퇴를 반복하면서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길드원들은 타이무트를 향해 스킬을 쏟아 냈다.
체력 게이지가 일정 수준 밑으로 내려가자 타이무트는 고개를 치켜들어 포효했다.
일명, 침묵의 저주.
게임 내에서 제공하는 자동 타겟팅 시스템을 무효로 돌리는 광역기였다. 피아의 구분이 사라지는 부가 효과는 덤.
때문에, 주관적인 판단하에 스킬을 활용해야 했다. 그것도 가까이서 타이무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아군을 피해서.
만약 프렌들리 파이어가 일어난다면 전열이 붕괴하고, 버프와 힐이 타이무트에게 닿는다면 도리어 도움을 주는 꼴.
오롯이 길드원들의 숙련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기믹이었다.
그래서 해법이 나왔는데도 아직까지 공략에 성공한 사람이 없는 거였다. 단순히 안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그렇기에, 길드원들은 침묵의 저주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사전에 합의한 전술을 구사했다.
이펙트가 보다 직관적인 스킬 위주로 스위칭한 거다.
타이무트를 막고 선 이들이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시야에 들어온 공격을 일일이 파악한 신신이 공세에 나서자 타이무트가 발광했다. 침묵의 저주 뒤에 따라오는 기술은 업화의 업보.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장 많은 대미지를 입힌 네 명에게 회피 불가의 불꽃을 선사하는 특수기.
침묵의 저주가 지닌 특징을 고려한다면 십중팔구 근접한 딜러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차 하는 사이 셋이나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신신도 그 뒤를 따라 녹아내리려고 했으나 후열에서 대기 중인 길드원들이 이변을 눈치채고 한 박자 늦게나마 대응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은 최악이었다.
여태껏 타이무트를 견제하던 전열이 전멸한 거다. 놈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는 건 당연지사.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던 순간, 신신이 뛰쳐나가 검을 휘둘렀다.
로스트 사가는 균형에 미친 게임이었다. 즉사기에 가까운 패턴이 나왔다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뜻. 그게 아니더라도 비슷한 기술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서슴없이 반격할 수 있었다.
울부짖는 타이무트와 짓누르는 신신.
과열된 무대는 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벌써 몇 시간째 시도 중이었다. 집중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쌓아 놓은 물약 또한 밑바닥을 드러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일.
지난 5년 동안 차근차근 올라간 난이도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몸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로스트 사가에서 랭커라는 건 경험과 기술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에 상응하는 재능 또한 필요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신신은 누군가 주지 않더라도 결정적인 한 수를 움켜쥘 수 있는 유저였다.
타이무트의 몸짓을 분석해 사각지대를 노리는 건 그야말로 일순간.
서걱.
능력치의 한계까지 쥐어짠 탓인지 체력 게이지가 0에 도달했지만, 그건 타이무트도 마찬가지.
신신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순간, 재앙이 주저앉았다.
전 서버 최초로 타이무트가 토벌되는 순간이었다.
* * *
레이드가 끝난 뒤, 길드 하우스는 한동안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최초 토벌 업적을 쟁취한 거다. 유저라면 두고두고 자랑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더구나 커뮤니티에 퍼지기까지 했다. 프라이멀 길드의 위상이 높아질 거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명실공히 전 서버를 통틀어도 첫 손에 꼽힐 만한 수준.
하지만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신신은―
"너 레벨이 왜 그 모양이야?"
타박을 받고 있었다.
[Lv. 210 신세계의신이되는거다]
반사적으로 제 머리 위에 떠오른 문구를 읽은 신신, 아니 가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 근래 난리도 아니었다. 도무지 로스트 사가에 집중할 시간이 나지 않았던 거다. 용케 접속해 레이드에 참가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
하지만 사정을 밝힐 수도 없는지라, 가온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길드 마스터와는 오랜 지기였다.
게임은 신분이 없는 가온이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락이었던 거다. 그와 같은 인연이 생기는 건 필연.
비록 오프라인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온라인 친구지만, 그래도 척하면 척인 사이.
"그러는 너는 레벨이 왜 그 모양이야?"
[Lv. 220 극락제조기]
만렙이 확장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목표 지점에 도달한 후. 개발자가 본다면 오열할 광경이었다.
길드 마스터, 극락제조기가 당당하게 선언한 건 그때.
"나야 자지 않고 하니까."
"자랑할 만한 게 아니잖아."
"자랑해야지, 플레이 타임은 돈으로도 못 사는 거잖아. 경쾌, 상쾌, 유쾌! 즐거움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것이라고?"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극락제조기의 성향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자였다. 닉네임부터가 그를 대변했다.
듣기로는 콜로니에 별장도 몇 개인가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돈 많은 한량이니, 충고를 들을 리도 없었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로스트 사가에 입문한 골수 유저. 아니, 망령이 바로 그였다.
"그것보다 요즘 접속이 뜸하지 않아?"
"너와 비교하면 누구든 그렇게 되겠지."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들어왔잖아. 그런데 오늘은 레이드도 늦을 뻔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그날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한 맹세는 잊은 거야?"
"그냥 처리하기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늦은 거야."
인생이 복잡하다는 건 삶이 각박하다는 뜻.
적어도 극락제조기의 입장에서는 그러했다.
"혹시 현실에 치여서 시간이 없는 거야? 그러면 말만 해. 내가 의식주 모두 제공할 테니까."
아무리 친하다지만, 신원도 불분명한 부호의 집에 의탁할 생각은 없었다.
"마음만 받을게."
"설마 접을 건 아니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가까이 달라붙는 극락제조기를 밀어낸 가온이 첨언했다.
"그게 아니라 이사하느라고, 잠깐 개인 시간이 줄어든 것뿐이야. 복잡하다고 해도 한순간이야."
"이사?"
"그래."
"그러고 보니 본업이 해결사라고 했지."
두 달 전에 밝힌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신분을 바꾸기 직전 시점인지라 모순 따윈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살아갈 백가온이라는 사람에게 그럴듯한 이력은 없는지라―
"아직 햇병아리지만 말이야."
거짓을 조금 덧붙여야 했다.
하지만 극락제조기는 해결사란 단어에 꽂힌 듯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의뢰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 * *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관자놀이에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건 가상 현실 접속기, '커넥터'.
안면부를 부드럽게 덮는 고글형 단말기였다. 크기는 작지만, 안에 집약된 건 첨단 기술. 대상의 뇌파를 읽어 들여 현실에 가까운 광경을 투사하는 꿈의 기기였다.
물론 가온의 것은 아니었다.
미리 예약하고 사용했을 뿐이니까.
극락제조기와 긴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이미 다음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던 거다.
결국, 극락제조기의 사정을 듣는 건 화성에서 만난 후가 될 터.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온 건 그때였다.
019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 * *
가온이 인지한 순간, 망막 위로 가상의 이미지가 필터처럼 덧씌워졌다.
연락한 사람은 극락제조기.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주소인가.'
의뢰하고 싶다고 했으니 거주지를 밝히는 건 당연한 수순.
두 사람의 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멀었지만 오가는 통신은 그러한 제약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우주 공간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양자 통신, 에이블의 존재 덕분이었다.
방금 전 로스트 사가에서 무사히 레이드를 치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간단하게 답한 후 1인용 부스를 나선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때마침, 옆 부스에서도 이용객이 자리에서 일어난 듯했다.
힐끗 눈동자를 굴리니 묘한 행색의 소녀가 서 있었다.
다리를 감싸고 있는 건 검은 스타킹. 각선미가 도드라지긴 했지만 특이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재질의―
'반코트?'
그것도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오버핏이었다. 거기에 장갑을 착용한 것도 모자라, 후드를 둘러써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실내에서는 다소 요란하다 할 수 있는 옷차림.
신원이 확실한 시민만 탑승할 수 있는 우주여객선이 아니었더라면 거수자로 신고당했으리라.
소녀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
"저, 로스트 사가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아니, 안 물어봤는데."
소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누가 잡을세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주여객선 한쪽에 설치된 부스는 편의 시설이었다.
그것도 직장인들을 위한.
엄밀히 말하자면 비즈니스용인 거다.
커넥터가 있는 것도 중요한 회의에 늦지 말라고 비치해 둔 거지, 무턱대고 게임하라고 마련해 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목적대로만 되겠는가.
이따금 가온처럼 활용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화성까지 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길었던 거다.
무려 이틀하고도 5분.
혹자는 애매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5분이라는 자투리 시간이.
틀린 지적도 아니었다.
이온 드라이브가 발명된 이후로, 광속 항해가 가능해진 인류였으니.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되었다. 가능한 것과 안전한 건 완전히 별개의 사실이라는걸. 해당 기술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이륙할 때 3분, 착륙할 때 8분 사이에 항공기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듯이 우주여객선도 출항 하루, 입항 하루 사이에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났던 거다.
비행기는 이상이 생긴다고 해도 기장의 역량에 따라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주여객선은 무엇을 하든 대규모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인류가 발전했다지만, 그게 완전하다라는 말과 똑같은 건 아니었다.
세컨드에 비하면 아직도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이온 드라이브를 가동하기 전까지 철저하게 준비하는 건 당연지사.
본격적인 항해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광속 항해까지 앞으로 1시간 남았습니다. 선내에 계신 승객분들은 좌석으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 * *
객실로 들어온 가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독할 정도로 강렬한 냄새가 코끝을 강타했던 거다. 마치 누군가 향수병을 깨트린 것만 같았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각기 다른 체취가 자아낸 현상일 뿐.
퍼스트 클래스에는 부유층으로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날 때부터 유전자 조작을 받았다. 그리고 보유한 재능만큼 강해지는 체취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금 장내에 펼쳐진 향기의 향연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상정해 탈취제도 판매하지만, 사용한 이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의 상징인 거다.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하물며, 외모도 남달랐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니까 수정되었을 때부터 부모의 우성 인자만 받아들인 결과. 그에 관한 세금을 부과하고, 견제해도 권력의 이양은 막을 수 없었다.
빈부 격차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
밑바닥 출신인 가온에게는 썩 달가운 광경은 아니었다.
옆좌석에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그렇게 훑어보는 습관은 좋지 않다네."
훈계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웠다.
중년 특유의 여유와 관록이 느껴지는 의견.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사각턱에 슬며시 드러난 건치까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나이스 가이'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다부진 체격 위로 거친 작업에 익숙해진 군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런 눈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 특히나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주의해야 하지. 괜한 분란이 생길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괜한 염려인 것도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첫날부터 말썽을 부리고 싶지 않아, 가온은 반박하기보다 나지막이 수긍했다.
"우주여객선에 탑승한 게 처음이라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 같네."
"그런 거라면 사과하지. 나도 예민했던 것 같군."
당연하다는 듯 악수를 청한 남자가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앤드류 셔먼이라고 하네. 자네는?"
"백가온."
마주 잡은 손에서는 굳은살이 느껴졌다.
방금 전의 눈썰미도 그렇고, 미어캣처럼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도 그렇고, 아무래도 앤드류는 우주보안관인 듯싶었다.
공찰이 아닌 시정부에 소속된 보안관.
우주여객선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인원이라 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일어날 폭동이나 사고에 대비해 대기 중인 특수 인력인 거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제 속내가 드러날 짓은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런다면 그건 그에 부합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사전에 무언가 언질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이번 여행은 다른 때와 다르다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등골을 스쳐 지나간다.
객실을 스윽 훑어본다.
임산부와 소년, 그리고 청춘 남녀.
눈에 들어오는 승객은 대부분 평이한 인상이었다. 갑자기 돌변해서 무기를 꺼내 드는 장면이 연상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물론 무의미한 감상이었다.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아 신체 내부에 숨길 수도 있고, 알고 보니 유전자를 조작한 강화 인간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많은 선택지를 주었다.
긍정적인 쪽으로든, 부정적인 쪽으로든.
"그러고 보니 자네 옆자리는 아직도 오지 않았나."
앤드류의 말에 가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퍼스트 클래스이기에 좌석과 좌석 간의 간격이 넓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부재를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공석이라면 무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언급하기가 무섭게 저 뒤에서 걸어온 이가 자리에 착석했다.
익숙한 행색에 가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 좌석의 주인은 부스 앞에서 보았던 소녀였다.
어쩐지 자리를 자주 비운다 했더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다.
"로스트 사가 재밌지, 재밌고말고."
"조용히 해 주세요. 저는 그런 거 안 하니까요."
새침하게 답한 소녀는 검지를 제 입에 가져다 대었다. 거기에 몇 마디 더 붙이려던 가온은―
[이온 드라이브 광속 항해 모드 가동. 전 항목 올 그린. 가속 구간 돌파.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이어지는 안내 방송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간 담요를 내린 가온은 하품을 내뱉었다. 광속 항해가 끝났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하루는 더 기다려야 했던 거다.
디바이스를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도 한두 시간이지 익숙해진 뒤에 남는 건 지루함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도 그 연장선.
혹시나 싶어 힐끗 옆자리를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아무래도 부스로 기어들어 간 듯싶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행동 패턴을 예측할 정도로 신통방통한 안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녀라면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취향인가?"
심술궂게 웃은 앤드류가 그리 물었지만, 가온은 들리지 않는 척 무시했다. 한마디라도 거들었다가는 중년 남자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한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할 테니까.
저 앞 좌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난 건 그때.
척 보기에도 어려 보이는 소년은 한동안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장난치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관심을 주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뿐이었다.
기이한 행동이 3분가량 지속되자 점차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주위가 수군거리는데도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 기내식이 나올 때라 승무원이 먼저 소년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메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모두 소년이 순순히 앉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정반대.
"싫은데?"
한 차례 빈정거린 소년은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구부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승무원이 멈칫한 것과 소년의 검지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겨눠진 건 거의 동시.
"빵!"
장난스러운 위협처럼 들렸지만, 그 말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승무원의 머리에 바람구멍이 생긴 거다.
탄피도, 탄환도, 하물며 소리조차 없는 마술.
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승객들은 패닉에 빠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핏물 세례를 당한 여성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소년은 듣기 싫다는 듯, 손가락 총을 겨누었고 그녀의 소리는 두 번 다시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제 무력을 과시한 소년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렇게 만들어 줄게. 불만 있는 사람?"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객실을 맴도는 건 따가울 정도로 고요한 적막뿐.
이윽고, 좌석 곳곳에서 승객 아니 소년의 동료들이 일어났다.
그들의 목적은 명약관화했다.
우주여객선을 탈취하는 것.
품속에서 권총을 꺼낸 앤드류가 발작을 일으키듯 일어나려고 했으나, 소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발 앞서 검지를 내밀었다.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빵.
어떻게 반격할 틈도 없이, 허망하게 쓰러진 앤드류를 받아 든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충격 때문에 기절한 게 아니라는 뜻.
자세히 보니 앤드류의 미간에는 좁쌀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누가 송곳으로 찌르고 도망간 것마냥.
일반적인 총상은 아니었다.
'뭐지?'
아쉽게도 그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이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던 거다.
"동료를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네. 그래도 끝까지 숨겼어야지."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얼추 알 것 같았다.
자신 또한 우주보안관이라 착각할 것일 테지.
하지만 변명할 시간 따윈 없었다. 소년은 자그마한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으니까.
"빵!"
020 아쉽지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
* * *
* * *
"흐아아."
피부를 찌르는 한기에 정신이 돌아온 가온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이내, 얇은 막 같은 게 손가락 끝에 걸렸다. 그것뿐일까.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정수리 부근에서 발견한 지퍼를 내리고 나서야 자유를 되찾은 가온은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시체 가방?"
자신을 옭아맨 허물을 확인한 가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에 가득한 살얼음과 숨을 뱉을 때마다 나오는 수증기.
깨어났을 때부터 짐작한 거지만, 아무래도 냉동 창고에 버려진 듯했다.
죽는 것에는 익숙해졌다 여겼지만, 그리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죽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결과에 다다르는 원인은 가지각색이었던 거다.
인간의 악의가 얼마나 깊은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건 당연지사.
방금 전 마주한 소년도 그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분명 검지 끝에서 무언가 발사된 것까지는 보았으나 그 뒤로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마음만 먹었다면 그 자리에서 소생해 반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온은 일부러 재생 속도를 낮추어 깨어나는 시간을 늦추었다.
가진 걸 드러내기에는 목격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해괴한 기술이 양산되는 시대였기에,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으나 위화감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신분을 얻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첫 단추를 그런 식으로 끼울 수는 없지 않은가.
발치에 또 다른 시체 가방이 걸린 건 그때.
지퍼를 열어 그 안을 확인한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아는 얼굴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아래에 또 다른 시체 가방이 있어서 그런 거였다.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야.'
얼추 보이는 것만 대여섯.
이로써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놈들에게 우주여객선 탈취는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아실현의 도구에 가까울 터.
협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건 마지막 시체 가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앤드류.'
허망하게 사망한 우주보안관. 그의 부재는 승객들에게 악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마냥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녀석들은 커다란 착각에 빠져 있을 테니까.
우주보안관을 모두 죽였다는.
대개 2인 1조로 활동하는 만큼 그들의 예상은 그리 틀리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제대로 처리했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우주여객선에서 이 진실을 아는 건 가온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우주보안관이 빈틈을 노리고 있을 테지.'
당연한 귀결이었다. 습격한 녀석들은 방심하고 있을 테니.
냉동 창고 옆, 조리실에서 제 시체 가방을 깔끔하게 불태운 가온은 행동에 나섰다.
일단 무기부터 구해야 했다.
그래야, 비수를 꽂을 수 있을 테니까.
* * *
우주여객선의 구조는 항공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승객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내부, 없는 공간은 외부에 비치된 거다. 거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오갈 수 없도록 그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가온이 목표로 하는 곳은 화물칸.
온갖 기자재가 쌓여 있는 그곳이라면 유용한 물건이 하나나 둘쯤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솔직히 반쯤 도박이었다.
내부에 위험한 물품을 반입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 때문에 애용하는 폴딩 나이프도 두고 와야 했지 않던가. 애석하지만 없다면 없는 대로 대적해야 했다.
그나마 고무적인 건 아직 함교는 점령되지 않은 듯, 추가적인 행동은 없다는 것.
'인터넷에는 접속할 수 없나.'
하긴, 우주여객선을 탈취하려는 녀석들이 이런 부분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었다.
짧게 혀를 차는 것과 통로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건 거의 동시.
이대로 가면, 코너에서 마주치게 되어 있는지라, 가온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낮추었다.
정체불명의 무리가 객실을 점거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우호적일 리 없었다.
판단을 내렸다면, 그 뒤에 잇따르는 건 적절한 대처뿐.
지척까지 다가온 상대를 향해 가온은 주저하지 않고 태클을 걸었다.
"꺅!"
여린 소리와 함께 후드가 벗겨지면서 흑단 같은 머리칼이 양갈래로 나부낀다.
사각지대에서 나온 건 괴한이 아닌, 누가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반코트에 검은 스타킹.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수상쩍은 복장은 익숙했다.
"너는?"
부스 앞에서, 그리고 옆 좌석에서 보았던 소녀였다. 그러고 보니 사건이 벌어질 당시에 이미 자리에서 벗어났던가.
생각하지도 못한 인물과 마주한 가온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체취가 코끝을 타고 훅 들어왔던 거다.
숲속을 거니는 듯한 청량한 향기라고 해야 하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그 냄새는 객실과 비견될 정도로 강렬한 농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이 뿜어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피해 다니는 건 그 때문인 듯했다.
"언제까지 깔고 있을 셈이에요, 일어나 주세요."
"아, 미안."
가온의 손을 잡고 일어난 소녀는 반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누가 건드릴세라 얼른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체취가 사라진 건 덤. 특수한 소재로 가공된 의복이라는 건 누가 보아도 확실했다.
"대체 뭐예요.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신고할 거예요."
"설마 상황을 모르는 거야?"
"무슨 상황이요? 벌써 기내식이라도 나왔나요?"
평온한 걸 보니 정말 난리가 난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가온이 짤막하게 객실에서 일어난 사태를 설명했지만, 소녀는 두 손을 꼭 끌어모은 채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덮친 사람의 말을 믿으라는 거죠?"
"못 믿겠으면 디바이스를 확인해 봐."
응? 하고 물음표를 머리 위에 띄운 소녀는 빠르게 현황을 파악했다.
"정말 통신이 안 되네요?"
"말했잖아."
"잠깐, 그러면 아저씨가 여기에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잖아요. 아저씨의 말대로라면 모든 승객은 객실에 갇혀 있을 테니까요."
예상외로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지만 가온은 태연하게 답했다.
"마침 화장실에 있었던 덕분에 피해갈 수 있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너도, 부스에서 게임 하다가 이제 나왔잖아."
"저는 로스트 사가 같은 건 안 한다니까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진 걸 자각한 소녀는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화두를 돌렸다.
"아무튼 믿을게요. 제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일부러 접근했다는 추측도 할 수 있지만, 그건 정말 변태 같은 발상이 가능한 범죄자만 할 수 있는 짓이니까요."
"그것참 고맙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숨어 있을 거라면 제가 적당한 장소를 아는데요."
"부스 말이지?"
"제발 그 주제에서 멀어지죠."
소녀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꼬리를 세웠으나 가온은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녀석들에게 갚아 줘야 할 빚이 있어서 말이야."
"설마 대적하겠다는 건 아니죠?"
"그 말대로야."
반사적으로 가온의 옷깃을 잡은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화성방위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괜히 나서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요."
"아쉽지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
방금 전에도 목숨을 잃었던 참이었으니까.
* * *
가온은 제 뒤를 따라오는 소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의 대화가 오갔고, 결과는 보이는 대로.
서순이 반대로 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전한 곳에 바래다주는 게 이상적이지만, 탈취된 우주여객선에 평화가 있을 리 없었던 거다.
이제 와서 객실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자칫 잘못하면, 몹쓸 짓을 당할 수도 있었다.
거슬리는 이들은 죽이고 보는 녀석들이 아니던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난다고 해도 환풍구 안으로 쑤셔 넣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가온은 소녀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미스 피톤치드."
"뭐예요, 듣기만 해도 냄새나는 그 별명은."
"기억에 남는 걸 어떡해."
한 박자 늦게 가온의 말을 이해한 소녀가 펄쩍 뛰어올랐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시나요? 성희롱이에요, 성희롱."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린 소녀가 항의했지만 가온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내뱉었다.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정말 따라와도 되는 거야?"
"으름장을 놓는 걸 보면 최소한의 실력은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붙어 있는 게 낫죠. 지금쯤 제가 자리에 없다는 게 들켰을 테니까요."
"대단히 논리적이네."
"겁먹는다고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맹랑한 소녀의 말에 가온이 선언했다.
"내가 다섯 발자국 안에 갈 수 있는 거리."
"네?"
"그 안에만 있으면 너는 절대 죽지 않아."
"네, 네, 알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위안이 되네요."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래도 그 안에 담긴 호의를 모르는 건 아니어서 소녀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화물칸에 도달한 건 얼마 뒤.
본디 입항한 뒤에나 개방되는 곳이라 항해 중에는 들어갈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비상시에 사용하는 승무원 전용 출입구가 전부.
관계자 외에는 접근을 불허하는 구조인지라 어떠한 조작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당초 정석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생각도 없었던 가온이었다.
이음새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손가락이 들어갈 틈이 있었다.
억지로 열기에는 충분했다.
"뭐 하시는 건가요?"
"경첩을 뜯을 생각이다만."
"원시인이세요? 그리고 사람이 손으로 뜯는다고 뜯기기나 해요?"
물론 그런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가 보기에 가온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강화 인간 특유의 체취도 나지 않을뿐더러, 이렇다 할 슬롯도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유닛'도 장착하지 않은 상태.
조금 모자란 건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접어둔 소녀가 앞에 섰다.
"어휴, 기다려 보세요."
소녀는 컨트롤 패드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주여객선의 보안은 철옹성과 다를 게 없었다. 난수 처리가 된 건 물론이고, 인위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됐어요."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몇 초도 되지 않아 열린 문에 가온은 탄성을 터트렸다. 관련 지식이 있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튜너?"
다이버가 자기 두뇌를 연산 장치 삼아 정보의 바다를 유영하는 부류라면 '튜너'는 온갖 전자 기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류라 할 수 있었다.
해커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그 성향은 확연하게 갈라지는 편. 사무직과 현장직의 차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제야 가온은 소녀의 체취가 어디에서 기인한 재능인 건지 알 수 있었다.
"못 본 척 해 주는 게 예의인 건 알고 계시는 거죠?"
소녀의 이력이 궁금하지만, 말마따나 여기에서 그걸 캐묻는 건 제 능력을 드러낸 소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숙녀의 비밀을 캐묻지 않는 신사거든."
021 꺼진 불도 다시 보지 못한 죄라고 생각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