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종삼금(1) >
종교집단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소인족 세계의 교단들은 일반적인 종교들보단 사이비 종교와 훨씬 닮았다.
신을 믿어서 힘을 얻고, 재산을 얻고.
종교가 곧 직업이요 삶이 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보통 사이비라고 하면 광신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단 좀 더 복잡하다.
제대로 기업화된 사이비 종교 집단은 다단계와 비슷한 피라미드 구조다.
가장 위에 교주가 위치하며, 그 아래로 수많은 신도들이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위에 선 자가 모든 것을 거머쥔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도들은 피라미드의 위쪽을 노린다.
교단 내에서 지위를 얻고, 실적을 올리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
그런 달콤한 꿈을 꾸며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곳이 어딨냐고 물을 수도 있다.
어떤 시대에서나, 인간들과 그들의 사회는 수직적이었다.
사이비와 다단계의 최대 특징은 아래층을 끝도없이 착취한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착취 외에 다른 수익원이 없는 집단들도 존재한다.
다행히 내 교단은 그 정도까진 아니다.
상층부가 대부분의 파이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파이가 끝도없이 커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국들이 공물을 보내고, 입교 희망자들이 찾아온다.
'그 쥐새끼들, 어떤 경로로 들어왔지?'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최근 입교 희망자들이 대량으로 찾아와서 분류하던 중 징조를 포착했습니다.]
'신경쓰지 마라. 내가 허가했던 건이니까.'
교단의 규모를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다름아닌 본인이다.
양 제국을 되찾은 덕에 통치해야할 영역이 끝도 없이 넓어져서, 수족들을 늘려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머지않은 곳에서 가디언 골렘을 발견한 나는 피식 웃었다.
골렘을 열심히 정비하던 타샤가 나를 알아보곤 기절할 듯 놀랐으나...
나는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 전에 검지 손가락 하나를 세워서 입술에 댔다.
'못해도 중상급은 되는 외신의 가디언과 싸움을 붙였는데 너무 멀쩡하군. 이 정도면 나보다 강한 거 아닌가?'
적어도 내구력과 완력은 정말 초월적인 수준이다.
타샤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말을 걸자 녀석이 크게 움찔거렸다.
녀석은 그새 인상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보기 거북할 정도로 깡말렀던 몸에는 겨우 살이 좀 붙었는데...
아직 좀 더 붙어야겠다.
"잘 지냈지?"
"예에. 언제나처럼, 로완님의 보살핌덕에..."
"쉿. 조용히 둘러보고 있다."
"그, 그렇군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것이라도 있나요?"
"입교 희망자들이나 이주민들은 어디에 모아놓았지?"
숲의 요새에 찾아온 외지인들을 다짜고짜 기존의 신도들과 섞어두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개중에는 첩자들이 섞여있었다.
타샤는 요새의 외곽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대부분은 기술자들이고, 헤르반 님의 지휘대로 교육 겸 심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제... 제가 직접 모셔도 될까요?"
"네가 따라다니면 들키잖아. 이번엔 느긋하게 머물 생각이니, 임시 거처를 부탁하마."
"끄, 그럼 저희 집을 사용하시죠! 어차피 이 숲의 모든 것은 로완님의 것이니..."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려는 타샤를 만류하곤 외지 출신들이 모여있다는 외곽으로 향했다.
조금 허술한 감이 있지만 아담하고 에쁘게 꾸며진 동네다.
숲의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집들이 다닥닥닥 붙어있는데...
의외로 촌스럽다거나 비좁은 느낌은 강하지 않았다.
"으음, 한 번 볼까."
멀찍이 서서 오른쪽 눈에 힘을 주자 옅은 기운이 보였다.
다른 교단에서 파견한 첩자들은 나름대로 엘리트들이다.
어중간한 녀석들을 보내면 역으로 넘어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외신의 피를 소량이나마 나눠받은 추종자들을 보낸 것이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정도로 옅은 기운이지만...
지금처럼 작정하면 못 볼 것도 없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내 오른쪽 눈은 다른 외신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유용하다.
쥐새끼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은 것을 발견한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잘도 저렇게까지 보냈군. 아주 전문적인데?'
첩자가 확실한 녀석들을 헤르반에게 알려주자 머지않아 답이 나왔다.
녀석이 아주 자신있게 말했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테슈타스의 추종자들이군요.]
'테슈타스?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격이 높은 외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수법으로 악명이 높지요.]
대신 아직도 신전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원래는 가지고 있었는데 신들의 나라에서 쫓겨난 것이다.
투명 외신과 비슷하게, 다른 외신들의 원한을 사버린 케이스다.
[사실 테슈타스 본인은 별 게 없습니다. 하지만 추종자 하나가 걸물이죠.]
'자세히 설명해봐라.'
[변장과 암살, 기만과 이간질의 달인. 자세한 이름조차 알려져있지 않지만, 테슈타스의 제일가는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놈이 멸망시킨 교단만 무려 3곳입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이번 수작질에도 투입되었을 것이다.
헤르반은 그렇게 설명하며 놈들의 목표를 예측했다.
[분명 신도들을 변절시키고, 신전을 빼앗으러 온 겁니다. 테슈타스는 본인 소유의 신전이 없으니까요.]
'있을만한 이야기군.'
[로완님의 뜻에는 아직 변함이 없으십니까?]
헤르반이 나를 말리고 싶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더더욱 녀석들을 가지고 싶어졌다.
'그렇다.'
[그럼 처음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좋은 생각이 있느냐? 나는 언제나 너를 믿는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감격한 듯 대꾸한 헤르반이 준비를 갖추는 사이.
차분히 눈을 돌려서 문제의 사도를 찾아봤다.
그러나 테슈타스의 제일가는 사도로 보이는 녀석따윈 보이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은 너무 쉽게 들켜서 그 녀석같지 않다.
변장과 기만이 달인이라니까 내 눈으로도 쉽게 찾긴 힘들 것이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들어.'
유명한 암살자나 스파이처럼 못 미더운 놈도 없다.
그새 준비를 마친 헤르반이 사제들을 보내서 입교 희망자들을 불러냈다.
도대체 뭘 할 생각인가 싶었는데...
녀석들을 인솔하여 교단의 시설로 데려간다.
멋모르는 입교 희망자들이 살짝 흥분한 채 떠들어댄다.
"여기 너무 깔끔하지 않아?"
"로완교의 시설을 구경할 수 있다니... 이미 합격 직전일지도 몰라!"
나는 아이를 데려온 첩자가 여럿 있는 것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의심받고 싶지 않다지만 자식들까지 데려오다니.
하긴. 이쪽 세계는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 최대한 많이 낳는 게 보통이다.
가장 먼저 신전에 도착하자 적당히 모여있는 노약자들이 보였다.
헬리온의 신전처럼, 내 신전도 어느정도 복지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추종자들이 낮에 아이를 맡겨둘 수 있다.
개중에는 아예 갈 곳이 없는 고아들도 있었다.
낮에 애들을 몇 시간이고 그냥 모아두기도 좀 뭣해서, 머리가 좀 커진 녀석들은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입교 희망자들이 보게 된 것은 바로 그 광경이었다.
녀석들이 그것을 보곤 화들짝 놀란다.
"저건... 수학인가?"
"저런 지식을 그냥 가르쳐주다니..."
"고아들도 있다고? ... 사제 육성을 위한 것이겠지?"
"어쩌면 세뇌 교육같은 걸 할지도..."
그야 당연히 추종자로 키우기 위함이다.
하지만 제대로 운영하고 있다.
이 세계의 복지 수준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고급일 것이다.
그 때, 녀석들의 대화를 엿들은 사제들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로완 님의 사제는 아무나 될 수 있는 줄 아나?"
"예엣? 그, 그게 무슨..."
"사제 교육 과정은 성적 최상위자들만 받을 수 있다. 나머지들은 그냥 일반 신도야."
이 세계의 소환사들은 상당한 고급 인력이다.
외신들을 보좌해야 하기 때문에 수학이나 사회적 지식은 필수다.
외신과 소통하기 위한 외계어는 기본 중의 기본.
미적 감각도 어느정도 요구된다.
물론 아무나 대충 사제로 삼는 외신들도 없진 않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헝그리하진 않다.
"다음은 식당과 취미관이다."
"취... 취미?!"
"아, 후식 별사탕은 한 사람당 두 개씩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다른 게 맛이 없거든."
"별사탕??"
참고로 별사탕이라곤 해도 내가 준 것을 잘게 쪼갠 것이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뒤늦게 헤르반의 노림수를 눈치챘다.
'이 녀석... 억지로 뭘 할 생각이 없군.'
헤르반은 그저 이곳의 상황을 왜곡 없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첩자들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유는 다름아닌 고도차 때문이다.
헤르반에겐 어떠한 확신이 있었다.
로완 교단이라는 이름의 피라미드.
그 최하층의 높이가... 테슈타스 교단의 피라미드 꼭대기보다 훨씬 높다!
두 교단은 이미 체급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벌어져있는 것이다.
테슈타스 교단에서 나름대로 호의호식했던 엘리트들조차 로완 교단의 수준높은 복리후생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정말 평신도들에게 이걸 다 해준다고?"
"거짓말이겠지."
"아니. 급조한 거면 보통 티가 나는데 이건... 너무 자연스럽지 않은가."
"마마, 별사탕이 우마우마한레후~"
"애들은 두 개 더 먹어도 된다."
녀석들이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테슈타스 교단의 첩자들은 결국 첩보원 역할이다.
고르고 고른 엘리트들이라곤 해도, 여차할 땐 미련없이 버려지는 소모품!
미래에 대한 계산 따위가 있다면 저런 역할은 못 한다.
그렇기에 테슈타스는 이런 걸 해주고 싶어도 못해줬을 것이다.
기껏 복리후생을 챙겨줬다가 첩보원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소모품이라는 특성상, 피라미드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도 없다.
녀석들에겐 교단 운영을 위한 지식이나 교양따위가 없다.
아마 테슈타스는 내게서 빼돌린 신도들을 이용하여 본인의 교단을 굴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럼 가치가 사라진 첩보원들은 다시 다른 곳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빛나는 미래를 보여주고 있으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잘도 저런 환경에서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군.'
[사실 테슈타스의 권능은 첩보활동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테슈타스는 갖가지 쾌락을 능숙하게 다루는 외신... 쾌감으로 공포와 불안감을 마비시켜서 쥐새끼들을 부리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약에 취한 암살자들을 부리는 건가.'
헤르반은 마치 경험자처럼 이야기했다.
녀석이 내 피로 회춘한 덕에 엄청 젊어보여도, 내용물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이다.
[하지만 저런 쾌락은 무척 짧게 느껴지는 법... 약효가 끝나면 압도적인 현실감이 찾아옵니다. 몸이 무겁게 변하고, 본인에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실감되죠.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선 더욱 강한 쾌락에 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헤르반은 이야기를 하며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입교 희망자들이 반색하는 사이.
그들의 사이에 숨어있던 스파이들이 낌새를 눈치채곤 몸을 굳혔다.
그러나 이곳은 내 신전의 영향권이다.
테슈타스의 피를 받은 이들도, 이곳에선 놈과 소통하지 못한다.
테슈타스가 너무 약한 외신이라서 그런 것도 있다.
"불순한 목적으로 찾아온 쥐새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늘 그랬듯, 로완께서 한쪽 눈으로 그것을 꿰뚫어보셨다."
그렇게 선언한 헤르반의 옆으로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뒤늦게 나를 인식한 추종자들이 서둘러 자세를 갖췄다.
첩자들은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첩보원으로서의 실력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로완께선 자비로우시다. 늦기 전에 나오거라."
"..."
"저, 잘못했습니다! 제발 아이의 목숨만은..."
셋을 세기도 전에 제일 어설픈 첩자 하나가 호다닥 튀어나왔다.
항복이 너무 빠르다!
그러나 올바른 선택이었다.
이미 잠입 사실을 들킨 이상, 첩보원의 가치는 없다.
늦게 투항해봤자 동료 첩보원이 입을 열면 끝장이다.
여기서부터는 죄수의 딜레마가 적용되는 것이다.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여기선 길게 말하는 것보다 짧게 말하는 게 훨씬 낫다.
"너희들에게 미래를 주겠다."
"허억!"
"저... 접니다! 저도 첩자입니다!"
"로완이시여, 저도 회개하겠습니다!"
"너는 첩자가 아니잖아."
내가 오른쪽 눈을 뜨며 피식 웃자 뻘쭘한 녀석이 대열로 돌아갔다.
정말로 들켜버렸다고 실감해버린 첩자들이 앞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테슈타스의 제일가는 사도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전 동료들의 밀고로 인하여 앞으로 끌려나왔다.
"이 자입니다! 이 자가 바로 테슈타스의 칼날로 유명한..."
"..."
상상 이상으로 평범한 외모이지만, 아마 변장이겠지.
아무리 뛰어난 암살자 겸 첩자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일하려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부하들과 함께 잠입했는데...
부하들의 어설픔이 패착이 됐다.
녀석은 무척 억울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말했다.
"나, 나는 지지 않았다. 미욱한 것들에게 발목을 잡혔을뿐..."
"이 놈!"
격노한 신도들이 놈을 치려 했지만 늦지 않게 막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오른쪽 눈을 좁혔다.
정체를 알고 나서야 확실하게 보인다.
이젠 녀석이 뭘로 변장하든 알 수 있을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 그렇다!"
"좋다. 그럼 다시 한 번 해보거라."
"예에?!"
내 말에 대꾸한 것은 다름아닌 헤르반이었다.
진심으로 놀란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도 조용히 물었다.
[로완이시여! 기껏 붙잡은 놈입니다.]
'상관없다.'
[하지만 놈이 아예 도망가버릴 가능성도...]
'테슈타스는 반드시 다시금 덤벼들 것이다.'
놈은 이미 핵심 추종자들을 내게 빼앗겼다.
테슈타스 교단의 규모를 감안하면, 7할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물러날 줄 아는 것이 현명한 외신이겠지만...
놈이 그 정도로 똑똑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
"숲 밖으로 배웅해줘라."
"예!"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 어조에 추종자들이 즉시 움직였다.
테슈타스의 사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끌려나갔다.
나는 새로 얻은 추종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곤 타샤의 처소로 향했다.
< 삼종삼금(2) >
타샤의 집은 숲에서도 상당히 크고 화려했다.
이미 정체를 밝혀버렸지만, 간다 해놓곤 안 가는 것도 좀 그렇다.
녀석은 이래저래 상처가 많아서 크게 상심할 수도 있다.
"어... 어서오십시오 로완 님!"
집 구경을 하게 된 내 감상은 간단했다.
'우리집보다 좋은데?'
타샤는 숲의 요새 세력의 2인자이자, 부대 단위 공간 이동이 가능한 인간형 전략병기.
대우가 나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하지만 하녀들과 요리사까지 딸려있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정작 집주인인 타샤는 그것을 거의 즐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 교단 업무로 너무 바빠서 여가시간 자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까부터 불쌍할 정도로 내 눈치만 살피고 있다.
"오,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혹 저희가 실망시키진 않았는지..."
"아니. 좋았다."
숲의 요새는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지는 곳이다.
교단의 정예들밖에 없는데다 관리도 굉장히 잘 되어있다.
역시 교단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다.
"그런데... 정말 테슈타스의 추종자들을 용서하실 건가요? 아, 물론 로완 님의 결정에 반대한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구요!"
"어차피 끈 떨어진 연들이다. 녀석들이 여기에 머물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느냐?"
"..."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다른 놈들도 섣불리 수작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신도들을 첩자로 보내는 족족 빼앗겨버리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과도한 쾌락으로 망가진 육체는 이미 내 피로 회복됐다.
다만 녀석들이 너무 빨리 항복한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별사탕의 단맛에 홀린 것인지...
나름대로 충성심이 입증된 정예들이라고 들었는데 이쪽으로 홀라당 넘어와버렸다.
테슈타스가 워낙 별 것 없는 외신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역시 사도 녀석을 손에 넣고 싶은데."
전 동료들에게 고발당해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던 충성심.
그런 모습을 봐버리면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 너희들에겐 미안하구나."
"어,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그야 불안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니까."
인명피해가 없었다지만, 기껏 붙잡은 암살자를 놔줬으니...
내 추종자들의 입장에선 불만이 좀 생길법도 하다.
그래서 헤르반과 타샤까지 드물게도 칭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타샤는 곧바로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테슈타스의 소행이란 것을 알아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을 불태워버리죠. 로완 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불태운다니..."
'네 고향처럼?'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억지로 쑤셔넣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에겐 예의 방화 경험이 사뭇 근사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타죽어도 싼 놈들이었다.
"그런데, 놈이 정말로 이곳에 다시 올까요?"
"테슈타스의 사도? 그야 바로는 안 오겠지."
얼마전에 잡혔는데 또 변장해서 들어오면 그건 첩자가 아니라 바보다.
테슈타스는 신전을 원하고 있을텐데...
신전이라면 다른 곳에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중견급 외신들도 하나밖에 없는 신전이 무려 3개라니.'
"그럼 양 제국인가요?"
"양 제국은 여기서 굉장히 가깝지만, 그런 것치곤 문물이 굉장히 이질적이야. 전문적인 첩자라도 쉽게 섞여들긴 힘들 거다."
차라리 헬리온 쪽의 인종과 문물이 숲의 요새와 훨씬 가깝다.
나는 아주 높은 확률로 헬리온을 노릴 것이라고 예상해봤다.
"헬리온은 멀리 떨어져있어서 지원도 비교적 힘들지. 운하가 있어서 외부인들도 곧잘 드나들고."
"전부 꿰뚫어보셨군요!"
"그래봤자 예상일뿐이다."
다행히 이곳의 식사도 입맛에 제법 맞았다.
손님방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헬리온을 주시했다.
헬리온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벌써 도착하진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런 내 짐작이 무색하도록.
도시의 외곽에 도열한 입교 희망자들에게서 검은색 기운이 보였다.
'저건... 그 녀석이군. 벌써 도착하다니.'
아무래도 타샤와 비슷한 방식으로 차원이동을 감행한 것 같다.
테슈타스도 참 지극정성이다.
하긴. 이제와서 역전할 수 있는 방법은 저것밖에 없다.
'일단 살펴볼까.'
헬리온 왕국은 아직 첩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내가 알려주려던 참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들, 자진 입교를 환영한다!"
헬리온의 전사대장이 입교 희망자들을 주욱 세워놓곤 말했다.
별로 기합을 넣지도 않은 것 같은데, 워낙 기운이 넘치는 녀석이라서 귀가 찢어질 것 같다.
이런 신입들의 면접과 시험까지 직접 진행하다니.
의욕이 가득한 것만큼은 좋다.
그 때, 사막의 쨍쨍한 태양 아래서 두어명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저희는 그냥 뱃일하다가 끌려왔는데요..."
"이런,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
전사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이놈들을 죽음의 사막 한복판에 놔줘라!"
"저는 사실 어릴 적부터 외신 교단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척안의 로완 만세!"
간단히 사태를 수습한 전사대장이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모두 짐마차에 탑승하라! 지금부터 입교 시험을 치르러 가겠다!"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죽음의 사막."
"..."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할말을 잃어버린 사이에도, 테슈타스의 사도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상당한 시간동안 이동하여 황량한 사막 한복판에 도달한 일행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오아시스는 커녕, 자그마한 물웅덩이 하나도 없는 곳이다.
죽음의 사막이란 이름이 잘 어울린다.
"입교 시험은 간단하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2일 동안 생존하면 된다!"
"2, 2일이라니..."
"보급품은 없습니까?"
"없다!"
사람은 물 없이는 3일도 살지 못한다.
이곳처럼 무더운 사막이라면 2일도 위태위태하다.
전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아연실색하고 있자 입교 희망자 하나가 용감히 발언했다.
"하, 하지만 뜨거운 것을 버티는 것과 입교가 무슨 상관인지..."
"나의 신앙심은 햇빛 따위보다 훨씬 뜨겁다! 이것도 버티지 못하고 내 옆에 설 수 있을 것 같나!"
말을 하다가 흥분해버린 전사대장이 어디선가 채찍을 꺼내어 본인의 몸을 마구 때렸다.
"로완이시여!! 이 미천한 것들을 굽어보소서!"
요즘 이상한 소리가 섞인 기도가 있더니... 너였냐?
메이린을 비롯한 사제들에게 짬때려놓아서 다행이다.
입교 희망자들은 다시 한 번 기겁했다.
"로완께서는 그런 기도만 받아주십니까?"
"아니. 이건 내 취향이다. 로완께선 자비로우셔서 기도를 가려받으시진 않는다."
"그, 그렇군요."
한 녀석이 안심하며 누워서 기도를 올리려는데, 전사대장이 그를 박살내버렸다.
콰득!
"이런 건방진 것!"
"로, 로완께선 자비로우시다 하셨잖습니까!"
"로완께선 이 자를 용서하셨다. 하지만 내가 용서할 거라 생각하진 마라!"
내가 사람을 잘못 골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짜고짜 누워서 기도하는 건 좀 심했다.
전사들 중 일부가 돌아간 뒤에도, 전사대장은 자리를 지켰다.
입교 희망자들은 잽싸게 더위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죽음의 사막에는 정말 별 게 없어서 기합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결국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탈락자가 나왔다.
"저, 저는 못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로완 님께 어울리는 인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놈을 돌려보내라!"
그나마 탈락자에겐 물을 주고 온전히 돌려보내준다.
그 모습을 본 인원들이 앞다투어 시험을 포기했다.
이래서야 남아나는 놈이 있을까 싶다.
물론 테슈타스의 사도는 제법 잘 버티는 모습이다.
몸을 살살 떨면서도 밤의 추위를 어떻게든 견딘다.
'저렇게까지 잠입하고 싶은 건가...'
가만히 보고있자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녀석이 아니라, 테슈타스에게 화가 난다.
'저런 추종자를 데리고도 왜 그렇게 약한 거지?'
녀석의 변장술은 마법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지금까진 전사대장도 속아넘어가고 있을 정도다.
타샤의 집에서 편히 쉬며, 계속 시험을 지켜보자...
결국 응시자가 두 명이 남았다.
한 명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테슈타스의 사도.
나머지 한 명은 비교적 평범한 청년이다.
체격이 건장하지만, 전사대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으윽..."
털썩!
상당히 위태로워보이던 그는 결국 탈수증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전사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얼른 물을 먹이고, 충분히 쉬게 한 다음 깨어나면 밥 먹이고 교육을 시켜라."
"예!"
"... 기절했는데도 합격인 겁니까?"
전사들이 녀석을 옮겨주는 사이.
테슈타스의 사도가 살짝 불만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전사대장이 주저없이 몸을 일으켰다.
스르릉!
녀석은 쌍단검을 뽑아들며 피식 웃었다.
"기절해야 합격인 거다."
"?"
"평범한 녀석들은 여기서 이틀씩 못 버티거든."
"..."
정말이지 무식한 방법으로 첩자를 가려낸다.
하지만 더없이 확실한 방법이었다.
전사대장은 대충 자세를 잡으며 물었다.
"너, 웬놈이냐."
"이런 무식한 놈들이..."
테슈타스의 사도가 나와 정확히 똑같은 감상을 내뱉었다.
저쪽은 탈수증세로 팔이 떨리고 있는데다, 암살자라서 전면전은 약하다.
이대로 싸우면 백전백패.
나는 너무 늦기 전에 전사대장의 곁으로 강림했다.
"그만하면 됐다."
"로완이시여!"
전사대장이 나를 보자마자 열사의 대지에 머리를 처박았다.
사도의 황망한 얼굴이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을 정도로 일품이다.
"크으윽..."
"이번엔 또 무어라 변명할테냐?"
"네놈들이 이 정도로 무식할 줄 몰랐다!"
솔직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녀석을 염동력으로 구속한 채, 손수 물을 먹여줬다.
쪼로록...
"그아아악!"
"다음에는 더 잘 해보거라."
내가 풀어주자마자 호다닥 달아나는 녀석.
이대로 사우디 리그까지 도망칠 것 같은 기세다.
피식 웃어버리며 전사대장을 일으켜세우곤 도시로 돌아갔다.
"네가 기껏 붙잡았는데 멋대로 풀어줘서 미안하구나."
"모든 것이 로완 님의 뜻대로이니, 의심하거나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입교 시험이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
"용서하십시오. 헬리온 왕국은 운하 때문에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아서 철저하게 심사했습니다."
"너도 다 생각이 있었구나. 네 뜻대로 하거라."
전사대장을 조금 다시 보며, 헬리온을 느긋하게 거닐다가 귀환했다.
이번 휴가는 예상보다 훨씬 즐거워지고 있다.
'이렇게 해도 지구에선 아직 하루도 안 지났나...'
그쪽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것도 좀 그렇다.
체감시간 사흘 정도만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간단히 몸을 점검하곤 훈련장에 나가기로 했다.
늘 다니던 훈련장의 앞에는 대문짝만한 광고 현수막이 한 장 걸려있었다.
[모닝 헌터 트레이닝 센터의 자랑, 임로완 씨의 A랭크 승급을 축하합니다!]
"..."
잠시 기분이 멍해졌지만 예전에 서비스 기간을 받은 것이 기억나서 봐주기로 했다.
아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못 봐주겠다!
아침의 훈련장에 들어서자마자 매니저가 인사를 건넸다.
"앗, 로완 씨! 너무 오랜만에 나오시는 거 아녜요? A급 됐다고..."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 현수막 대체 뭐에요? 서비스 2개월 더 줘요!"
"에이, 그 정도야 물론이죠!"
무난하게 합의를 마치고, 악수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곤 워밍업을 시작했다.
거의 오픈 직후라서 달리 사람이 없다.
모든 기구가 비어있어서 이따가 뭐부터 쓸까 고민하고 있는데...
돌연 입구에서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익!"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던 TV에서 고개를 슬쩍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녀석에게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로완이, 안녕! 좋은 아침!"
"넌 백룡 길드에 전용 시설도 있잖아..."
"그치만 거기엔 로완이가 없잖아."
매니저는 희희낙락하며 현수막의 내용을 고치러 나갔다.
아비가일이 다녀갔으니, 아마 오후 즈음에는 성지가 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기세를 좀 올려서 빠르게 루틴을 소화하기로 했다.
운동복 차림의 아비가일이 트레드밀의 속도를 최고로 올리더니 산책하듯 가볍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 삼종삼금(3) >
아비가일을 마주하자, 다시금 재단과 뱀들의 어머니에 대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어차피 아비가일이 직접 행차하셨으니 주변의 보안은 완벽할 것이다.
이 참에 지난번에 못다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운동기구의 소음도 적당하다.
"그런데 말야."
"응?"
"그럼 너도 그... 존재의 피를 받은 거야?"
적당한 호칭을 열심히 고민했지만, 정작 아비가일은 크게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녀석은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드밀 위에서 뛰고 있어서 엄청나게 흔들리는데, 정작 숨소리는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
값비싼 헌터 전용 운동기구도 그녀의 전력을 감당하긴 힘들다.
"물론이지!"
"... 그분은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데?"
"흐흠. 로완이도 가끔은 이상한 말을 하네."
"뭣?"
얘한테 이런 소리 들으니까 내게 진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비가일은 괜히 억울해진 내게 웃으며 말한다.
"우린 어머니께 도움이 될 수 있을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
"아, 그래도 즐거움 정도는 제공할 수 있을지도!"
그럼 뱀들의 어머니가 지구를 도와주는 것이 놀이의 일종이라고?
글쎄...
아비가일은 완전 광신도 수준이니까 이건 적당히 걸러들어야겠다.
나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건넸다.
"그럼 너는 언제 사도가 됐는데?"
아비가일은 본인에 대한 질문이 퍽 반가운 듯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너무 신나 보여서 괜히 죄책감이 생길 정도다.
"로완이랑 만나기 직전! 그러니까, 대학교 입학 직전이네!"
"그렇군..."
참고로 아비가일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저 상태였다.
분명 오랜 세월동안 시행된 교육의 결과이리라.
'지난번에 애콜라이트가 말했지. 아비가일은 어사일럼 가문의 선택받은 고아라고 했어.'
그럼 아비가일의 인격은 어사일럼 가문에서 훈련을 받으며 완성된 것이 맞다.
뱀의 어머니 때문에 애가 망가지거나 하진 않은 것 같다.
'이건 어사일럼 가문이 문제네.'
"그럼... 신전 같은 것도 없어?"
"응! 그런 건 남겨두지 않아!"
이건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설령 뱀들의 어머니를 위한 신전이 숨겨져 있다 해도...
지구가 온갖 잡신들의 신전으로 가득차는 것보단 훨씬 낫다.
그럼 어떤 꼴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뱀들의 어머니를 무작정 따를 생각도 없다.
'외신활동에 대해선 계속 숨기는 게 좋겠어.'
그런 걸 섣불리 밝히는 것은 백해무익이다.
뱀들의 어머니는 휘하의 뱀 외신 때문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비가일과 이너 서클의 멤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당장은 외신으로서의 격을 높여야 해.'
"그래서,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어? 뭐든 물어봐도 돼!"
"네 몸무게."
"46이야!"
"양심이 없냐..."
가슴 한쪽에 1kg은 나갈텐데?
저 체형과 저 신장으로 50kg 이하는 절대 안 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대로 루틴을 마칠 즈음에는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서, 아비가일의 경호팀이 나서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날로먹는 경호팀이네.'
"그럼 로완이는 이제 뭐 할 거야?"
"집에 갈래."
"바로? 그러지 말고 점심 안 먹을래?"
"... 사장님께서 사주시는 거에요?"
"응! 이나 씨도 부를게. 그나저나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거 정말 괜찮다!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 좋겠지만."
결국 아비가일에게 든든하게 한 끼를 얻어먹고 돌아왔다.
생각해보니까 이제 내 상관이라서 얻어먹어도 될 것 같다.
그렇게 배부른 상태로 집에 돌아오자, 새로운 뉴스가 도착해 있었다.
[로완이시여! 테슈타스의 사도를 붙잡았습니다!]
'이번엔 결사단인가?'
내가 결사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극비사항인데...
녀석이 조사를 잘 한 것 같다.
아마 결사단이 숲의 요새에 찾아왔던 것 때문에 꼬리가 잡혔으리라.
그러나 결사단은 의심병 환자들밖에 없는 조직이라서 잠입하기엔 최악이다.
첩자를 걸러내기 위한 장치도 몇 겹이나 되어있다.
'너희들의 정체를 들켰느냐?'
[다행히 미리 걸러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내게 맡겨라.'
파아앗!
벌써 세 번째로 붙잡힌 테슈타스의 사도가 잔뜩 주눅든 얼굴로 나를 올려봤다.
이쯤되면 이 녀석이 정말로 유능한 것인지 살짝 의심이 된다.
다만 매번 상대가 나쁘긴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결사단 본부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고평가를 해줘야 하는 것은 맞다.
"로완이시여!"
"역시 네놈과 관련되어 있었군..."
"지금 당장 이 놈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결사단원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무엇이 해결되느냐?"
"예엣?"
어차피 이 녀석은 주군인 테슈타스에게 보고를 했을 것이다.
이제와서 해치워봤자 늦었다.
"불안하게 여길 필요없다. 테슈타스 따위의 말을 누가 믿겠느냐."
"크윽..."
정곡을 찔린 테슈타스의 사도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테슈타스는 다른 외신들의 미움을 많이 사서 신뢰가 전혀 없다.
나는 사도를 다시 한 번 풀어줬다.
"아직 승복하지 못했겠지? 가거라."
"척안의 로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이 분개하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결사단원들은 황망한 얼굴이었지만 감히 무어라 하진 못했다.
"다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로완이시여..."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
물론 나도 아무 생각없이 놔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연락을 받곤 미리 대기하던 헤르반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녀석은 사역마들을 이용하여 도망친 사도를 뒤쫓았다.
'이번에는 찾을 수 있겠느냐?'
[예! 그동안 범위를 많이 좁혀뒀습니다.]
잠입 작전을 실패했으니, 테슈타스의 사도는 본거지로 돌아갈 것이다.
녀석은 베테랑답게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쓰고 있지만...
앞선 2번의 추적에서 성과가 없진 않았다.
[확실히 솜씨가 좋지만... 저도 조금 정도는 합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마라. 뭣하면 한 번 더 잡으면 된다.'
[반드시 이번에 끝장을 보겠습니다.]
집요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추적하던 헤르반은 결국 테슈타스의 본거지를 찾아냈다.
변변한 신전도 없는 외신이라지만 주요 추종자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 정도는 있는 것이다.
덕분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정말 변변찮군.'
테슈타스의 불쌍한 추종자들은 아담한 동굴에 옹기종기 숨어살고 있었다.
그래도 소환사 정도 되면 나름대로 고급 인력인데...
다른 외신들의 원한을 하도 많이 사버려서 떳떳하게 정착하지도 못한 것이다.
놈들의 보안 마법을 손쉽게 돌파한 헤르반이 딱 좋은 자리에 사역마를 배치했다.
테슈타스는 직접 강림하여 사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어린 미소년의 모습이었다.
'뭐야 저건?'
내가 오른쪽 눈을 감자 녀석의 뒤에 추악한 형태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신도들의 선호사항에 맞춰서 모습을 조절한 것 같다.
'변신 능력인가? 편하겠네.'
사실 엄청 놀랄 것까진 아니고... 몬스터들도 저 정도는 가끔씩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실종자를 구조하러 던전에 들어갔을 때 굳이 사진을 확인했던 것이다.
테슈타스는 사역마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길길이 날뛰었다.
작은 체구 뒤에서 검은 기운과 존재감이 미친 듯 휘날렸다.
[네가 또다시 나를 실망시켜?]
[히이익...]
사도를 제외한 추종자들이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으나...
같은 외신인 내가 보기엔 그저 우습다.
사도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주군.]
[왜 척안의 로완을 상대로만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냐!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으면서!]
[주군... 송구하오나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허락하신다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알 것 같았다.
원래 첩보전은 좀 더 치밀하고 느긋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서두른다고 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테슈타스는 본인의 사도를 계속해서 재촉했던 것이리라.
고작 하루만에 다시 헬리온 왕국으로 잠입을 시도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너무 급하게 무작정 들이박고 있다.
테슈타스는 본인의 잘못을 전혀 모른 채 윽박질렀다.
[변명하지 마라!]
[... 죄송합니다.]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것은 네가 내 모욕을 좌시했다는 것이다!]
점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트집을 잡아가는 테슈타스.
아까전에 내가 '테슈타스 따위...'라고 운운했을 때,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던 걸 문제삼는 것 같은데...
거기서 반박하면 과장없이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지금 추종자보고 그냥 죽었어야 한다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의 비밀을 공개하겠다! 외신주제에 반 외신 결사단 따위나 만들고 있다니...]
[고, 고정해주십시오!]
테슈타스가 결사단 관련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하자 사도를 비롯한 추종자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그들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었다.
[그것은 최악의 수입니다!]
[뭣이?]
[지금 저희들에겐 물증도 없을 뿐더러, 결사단은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
지금 결사단은 열심히 조직의 기반을 만들고 있는 단계.
아직 활동실적도 뭣도 없으니, 다른 외신들은 결사단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걸 테슈타스 녀석이 지껄여봤자 믿어줄 리 없다.
또다시 첩자를 들여보내기 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잔뜩 열받은 테슈타스는 추종자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쾌락의 외신답게 성격이 급한 듯 폭력을 휘두른다.
[뭐라고? 네놈은 도대체 누구의 사도냐! 내가 아니라 로완을 모시지 그러냐?]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으윽!]
퍽, 퍼억!
어둡고 축축한 동굴에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그마한 소년의 발길질에 뼈가 부러지고 살가죽이 터져나간다.
사도는 몸을 꾹 웅크린 채 그것을 견뎌냈다.
[이 벌레같은 것들이... 로완이 널 그냥 보내줬을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끄흑...]
테슈타스의 사도는 굉장히 충성스러웠으나...
정작 테슈타스는 그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의 녀석에겐 신도들을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것이다.
마약과도 같은 쾌락으로 충성을 유지하는데에도 한계가 있다.
한동안 폭력을 휘두르던 놈은 겨우 시간이 다 된 듯, 역소환 됐다.
큰 충격을 받은 듯한 헤르반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 외신을 상대로 이런 종류의 혐오감을 느껴본 것은 처음입니다.]
나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로 위엄이 없을 줄이야.
소인족의 언어까지 배운 것을 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는 것 같은데...
'계속 감시하거라. 움직이면 바로 보고하고.'
[예!]
착잡한 기분으로 귀환한 나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스마트폰을 확인해보자 성이나에게서 안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지난번 작전에 참여했던 단원들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정작 신전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나는 너무나도 멀쩡한 것이 조금 찝찝할 정도다.
"걱정 마시라니까."
답장을 보내고도 괜히 불안해져서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오랜만에 잠기운에 푹 취해가는데...
의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완이시여...]
'음? 헤르반?'
하필이면 잠들기 직전에 연락하다니.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는 것을 보니, 급한 용무도 아닌 것 같다.
만약 헤르반이 아니었다면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
[감히 한 말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어찌하여 테슈타스의 사도를 매번 용서하시는 것입니까?]
'그 문제에 대해선 이미 이야기 했을텐데?'
[... 송구합니다.]
이제 보니 헤르반이라기엔 묘한 위화감이 감돈다.
혹시 상대를 착각한 것일까?
하지만 목소리는 확실히 헤르반의 그것이다.
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답했다.
'내가 그렇게 하고싶기 때문이다.'
[놈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보다 못한 녀석들도 이미 나의 자비를 받았다.'
이 녀석, 오늘따라 좀 집요하군.
평소의 헤르반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암흑 속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물었다.
[로완께선 테슈타스의 추종자들에게 미래를 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
[하지만... 미래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겐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미래를 원하지 않는 이들이라.
테슈타스의 사도가 그런 경우라는 뜻인가?
나는 짧은 망설임 끝에 대꾸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의미를 주겠다.'
[...]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제야 편히 잠들 수 있었다.
< 삼종삼금(4) >
잠에서 깨어나자 뒤늦게 위화감이 찾아왔다.
'그 녀석, 정말 헤르반 맞았나?'
당시에는 잠기운에 취해서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신도랑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본인에게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다행히 크게 문제될만한 소리는 안 했던 것 같다.
찝찝함을 떨쳐내곤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이틀 정도 푹 쉬면서 운동까지 거르지 않은 덕에, 컨디션은 최상이다.
지금 당장 싸울 상대가 없다는 것이 살짝 아쉬울 정도!
그러나 우주의 사슴 곤멜을 떠올려보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별로 아쉽진 않네.'
그런 상위의 외신들과 나의 차이점이 뭘까.
이대로 계속 외신 활동을 하면, 나도 상위의 외신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놈들은 나와 태생부터 다른 것 같던데...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리는 없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이 정도 상념으론 흔들리지 않는 게 내 자랑거리다.
딩동!
"응? 성이나 씨? 들어오세요!"
아침부터 성이나가 찾아와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긴장하고 있는데...
그녀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하나 가져왔다.
내용물을 대충 살펴보니 식료품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 좋은 아침이요. 무슨 일 있나요?"
"아뇨! 가끔은 식사라도 챙겨드리려구요."
성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식료품을 정리하곤 손을 씻더니 아침 식사를 척척 만들기 시작했다.
매일 시리얼이나 먹는 게 좀 불쌍해보였나?
그래도 그녀는 기본적으로 아비가일의 보좌일텐데?
"아비가일은요?"
"나이트께선 이미 일과중이셔요. 하루를 일찍 시작하시니까요."
그러고보니 아비가일은 유독 아침에 강했지.
나도 결코 게으르진 않은데...
대학 시절에 단 한 번도 녀석보다 일찍 나가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 성실한 모습 덕분에, 아비가일의 인간관계는 파탄 직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섰다.
애가 좀 이상한 거지 나쁜 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성이나가 만든 밥을 얻어먹으며 TV를 켰다.
모처럼 제대로 된 아침밥이라서 그런지 나쁘지 않다.
"오늘은 특별히 일정이 없죠?"
"네! 하지만 언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계속 별 일 없으면 좋겠네요."
비번일에 2번 연속으로 사교도와 마주친 것은 좀 너무했다.
시종일관 내 눈치를 살피던 성이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헌터쪽 업무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뭐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요?"
다른 헌터들에게 일을 떠넘기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통상적인 몬스터 처리는 그들에게 맡기고 싶다.
몬스터는 내가 안 잡아도 다른 누군가가 잡겠지만, 이단 놈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이나가 언급한 것은 완전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주요 방송사에서 취재 요청이 십여 건 정도... 인터넷 방송인들까지 합치면 수백건이네요."
"켁."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 대한민국에 7명뿐인 A급 헌터다.
A급으로 승급한 뒤에는 헌터다운 일을 거의 못해서 인식이 늦었을뿐.
"모교를 비롯하여 다수의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고, 광고 제안도 몇 건이나..."
"강연이요?"
광고는 그렇다 쳐도 강연은 이해가 안 된다.
괜히 그런 걸 했다가 부정 승급사실이 드러나면 큰일이다.
"원하신다면 제가 몇 건 선별해볼게요!"
"저는 싹 다 거절하고 싶은데요... 그래도 되죠?"
"저, 정말요? 알겠습니다. 그럼 백룡 길드측에서 처리해둘게요. 그런 건 관심이 없으시군요?"
"전혀요."
성이나는 살짝 감탄하는 기색이었으나...
외신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나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이중활동을 하고 있는데, 헌터 관련 업무까지 하면 삼중활동이 된다.
이건 미련없이 포기하는 게 맞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럼 또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호출해주세요!"
"아, 암행용 전투복. 아직 아무에게도 안 보여진 걸로 하나..."
"걱정마세요! 그쪽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제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바로 배달해드릴게요."
"그, 그렇군요."
하여간 철저하다.
이미 전투복이 두 벌이나 있지만, 재단의 일을 할 때엔 인상착의를 매번 바꿔줘야 한다.
그대로 성이나를 배웅하자 추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경험이 쌓여서 대충 어딘지도 알 수 있다.
[로완이시여! 당신의 종들이 애타게 부릅니다!]
'숲의 요새인가.'
파아앗!
고민할 새도 없이 건너가보자, 숲의 외곽에 추종자들이 우르르 몰려있었다.
거대한 인간장벽을 형성한 그들의 앞에 한 여인이 넙죽 엎드려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인 자세인데도 몸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완이시여."
그녀가 고개도 들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께 헌신하겠습니다!"
"...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짐짓 무게를 잡으며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지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제발 누가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다행히, 엎드린 녀석이 큰 소리로 이어나갔다.
"테슈타스의 교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교단의 재산도 모두 가져왔습니다."
'테슈타스?'
뒤늦게 상황이 이해되려고 한다.
설마... 이 녀석이 바로 테슈타스의 사도였던 건가?
'여자였다고?'
매번 남자로 변장했길래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다.
테슈타스가 미소년의 형상을 취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명령을 내렸다.
"고개를 들어라."
사도의 머리가 천천히 올라가자 흙먼지로 더럽혀졌는데도 제법 봐줄만한 얼굴이 드러났다.
테슈타스는 지금쯤 환장하고 있겠지만...
다른 추종자들을 모두 처리하고 온 것 같으니, 방법이 없다.
그 때, 뒤늦게 내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쳤다.
'얘가 갑자기 왜 찾아왔... 아아, 어젯밤에 말을 걸었던 게 이 녀석이었구나!'
녀석은 헤르반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나를 속였다.
기도는 굳이 추종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수작이었다.
'너 성대모사 진짜 잘 하는구나?'
그래도 억하심정따윈 없다.
잠기운에 취했다곤 해도, 추종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내가 나빴다.
게다가 이 녀석은 어제의 문답에서 용기를 얻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건 오히려 일이 잘 풀렸다고 봐야한다.
"잠시나마 나를 속이다니,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했지?"
"저는 잠입에 앞서 상대를 철저하게 조사합니다."
전혀 우쭐거리지 않는 말투로 설명이 시작됐다.
원래 잠입은 저게 정상이다.
테슈타스가 녀석을 너무 쪼아대서 끝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을뿐!
"우선 추종자들의 주변 인물에게 접근하여 주요 추종자들과 로완 님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습니다. 로완님의 고향 차원에 대한 정보는 물론, 평소의 예상 수면 시간, 식습관, 추종자들의 말투, 관계까지..."
"그렇군."
하필이면 잠자리에 들었을 때 기도가 올라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그 시간대를 노린 것이다.
"로완 님..."
"음."
내 허락을 얻은 헤르반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서, 테슈타스의 사도를 일으켜세웠다.
차렷 자세로 서있는 그녀의 눈꺼풀을 뒤집어보거나 소매를 걷어서 팔을 살핀다.
"약물의 흔적이 없군. 테슈타스는 쾌락을 다루는 외신일텐데?"
"저는 쾌락을 탐닉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가 딱 잘라서 말했다.
"과한 쾌락은 몸을 망치고 임무 수행에도 방해가 되니까요. 테슈타스가 선사하는 쾌락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이건 대충 예상했다.
그녀가 앞서 보여준 모습은 마약중독자 따위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그만하면 됐다. 헤르반, 의식을 준비하거라."
"예!"
원래 일일이 의식까진 필요없지만...
테슈타스의 사도는 적대세력 출신이다.
기존의 추종자들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한 번 해줄 필요가 있다.
눈치빠른 헤르반은 즉시 준비를 갖췄다.
"받들어라! 자비로우신 로완께서 너희들에게 두 번째 삶을 선사하시기로 하셨다! 그분의 피로 너희들의 죄업을 씻어내실 것이다!"
"이전의 죄는 모두 불문에 붙이겠다. 너희들은 나의 피를 받고 다시 태어나라."
이 녀석들이 앞서 교단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라서, 반발은 거의 없었다.
사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핏물을 받아마셨다.
"정말로... 제게 의미를 주실 건가요?"
"너희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모두 주겠다."
"... 그럼 새로운 이름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핏물의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던 사도가 눈을 떴다.
나는 고민 끝에 겨우 내뱉었다.
"릴리아다. 환영한다 릴리아."
"감사합니다. 척안의 로완이시여."
"당장은 맡길 일이 없으니 푹 쉬도록 해라.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테니."
"알겠습니다."
타슈테스 교단 출신의 개종자들은 일부러 뿔뿔이 흩어서 배치시켜뒀다.
굳이 녀석들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믿고싶으니까 의심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믿는 것은 무책임에 불과하다.
'후우. 이쪽도 대충 정리됐군.'
바라 마지않던 인재를 얻게 된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디언 골렘 덕분에 교단의 전투력은 보충이 됐지만...
정보력은 아직 조금 모자람이 있었다.
헤르반의 솜씨도 쓸만하지만, 내 교단은 커버해야 하는 영토가 너무 넓은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첩보전 전문가가 알아서 들어와주니까 숨통이 트인다.
'아주 잘 왔다. 소중하게 알뜰살뜰 잘 써먹어주지.'
릴리아에게 위험한 잠입 임무따윈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제대로 된 정보조직을 만드는 것이 훨씬 낫다.
지금은 헤르반의 부담이 너무 크다.
'일단 애가 너무 말랐으니까 좀 먹이고...'
녀석을 어떻게 써먹을지 즐거운 궁리를 시작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로완이시여! 이 땅을 구원하소서!]
'또 뭐야?'
파아앗!
목소리가 아주 찢어지는 것을 보니 심상찮다.
내 경험상, 적대적인 외신이 쳐들어왔을 때의 반응이 대충 이렇다.
어지간한 녀석이라면 가디언을 출격시켜도 되겠지만...
모처럼 여유가 있으니 녀석은 아껴두기로 했다.
가디언은 웬만해선 교단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게 맞긴 하다.
"웬 놈이냐!"
"쉬이잇!
순식간에 현장에 도착하여 외치자, 가까운 곳에서 성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바람이 새어나가는 듯한 음성이 사뭇 익숙하다.
다음 순간, 오늘의 상대를 마주한 나는 살짝 굳어버렸다.
"엇..."
"쉬쉿?"
저쪽도 나를 보곤 어색한 자세로 몸을 움츠린다.
똑같은 외신을 재차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머, 멈췄다!"
"로완이시여! 저 사악한 뱀을 멈춰주소서!"
발밑의 소인족들이 내 심정도 모른 채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집채만한 흰 뱀.
양 제국에서 한 번 싸웠고, 꿈 속에서 한 번 더 만났던 바로 그 녀석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이 세 번째군.'
두 번째든, 세 번째든. 무척 거북한 것은 마찬가지다.
녀석의 전투력이야 대단하지 않다지만...
뒤에 버텨서 있는 뱀들의 어머니가 매우 무섭다.
불행 중 다행으로 녀석도 내게 선뜻 덤벼들진 못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기묘한 교착상태를 유지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녀석의 동공에서 오만가지 감정이 느껴진다.
'어떻게 하지?'
소인족 녀석들의 앞을 막아서며, 녀석에게 대화 비슷한 것을 시도했다.
그래도 여기가 내 구역인데 네가 물러나는 게 맞지 않냐는 제스쳐.
녀석은 불만스럽다는 듯, 갈라진 혀 끝을 낼름거리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로, 로완께서 왜 저러시지?"
"네가 멈춰달래서 멈춰주신 거 아니야?"
"아, 그렇구나! 로완이시여! 저 백사를 해치워주소서!"
우리는 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 우상숭배(1) >
기묘한 대치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쉬이잇!"
백사의 외신은 묘하게 억울한 구석이 있다는 듯, 뒤로 물러나지 못하고 자꾸만 쉿쉿거렸다.
녀석도 내게 덤벼들고 싶진 않은 눈치다.
지난번에 한 번 져봤으니까, 내 염동력은 본인과 극상성이란 사실을 잘 알테고...
그게 아니라도 우린 상당히 애매한 관계인 것이다.
이쪽도 녀석과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뱀들의 어머니와 대면하는 경험은 평생 한 번이면 충분하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소인족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은 이미 이긴 것처럼 날뛰고 있다.
"로완이씨여! 당씬께서 양 제국에서 물리쳤던 그 백사입니다!"
"어서 해치워주십시오!"
"그 입 다물어라!"
"데뎃?!"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녀석들이 꽁꽁 얼어붙었다.
잘 생각해보면, 녀석들이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양 제국 때와는 달라. 그 때는 내가 공격자의 입장이었지.'
저 백사 외신은 양 제국의 전대 황제에게서 공물을 받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 반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왠지는 몰라도 녀석이 쳐들어왔다.
'뭔가가 있어.'
백사의 외신은 뱀들의 어머니와 함께 다니던 녀석.
상위 외신의 총애를 받는 자손 격 외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녀석이 단순한 공물 때문에 먼 걸음을 했을 것 같진 않다.
"솔직하게 고하라! 저 외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쉬이잇!"
백사는 바로 그것이라는 듯, 열심히 혀를 낼름거리며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소인족들은 서로를 주시하며 당황했다.
"옛?!"
"저 백사는 고결한 존재이니 아무 이유도 없이 이곳을 습격했을 리가 없다. 이 몸은 세계의 수호자이지, 네놈들의 보모가 아니다!"
"그, 그것이..."
"경비대! 지금 당장 도시를 뒤져라!"
눈치빠른 성주가 경비대를 닦달했다.
일단 뭐라도 하는 척을 하는 건데... 현명한 선택이다.
소환사들도 경비대를 도왔다.
"뱀신... 뱀신의 심볼이 뭐더라?"
"이거다! 주문으로 찾아봐! 도시 안에 사교도가 있을지도..."
"쉬이이잇!"
위태로운 대치가 이어지는 사이.
후줄근한 상점을 뒤지고 있던 경비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찾았습니다."
"뭐지?"
"이... 이것입니다!"
경비대가 가져온 것은 다름아닌 백사의 시체였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소환사들과 성주가 먼저 기겁했다.
"히이익!"
"하, 하필이면 백사라니... 도대체 누가 잡은 거냐!"
"사아악!"
축 늘어진 백사의 시체를 발견한 외신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역시 저것 때문에 온 것 같다.
분명 뱀 교단에서 신성한 동물로 취급되고 있으리라.
곧이어 상점의 주인이 모두의 앞으로 끌려나왔다.
"네놈의 욕심이 이 도시를 파괴할 뻔했다!"
"아, 아닙니다 나리! 용서해주십시오!"
"슈숫!"
백사가 놈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이내 확신했다는 듯 덥썩 삼켜버렸다.
소인족들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신음소리조차 흘리지 못했다.
녀석의 뱃속에서 처절하면서도 고통스런 비명이 새어나온다.
아마 산채로 천천히 소화당하고 있을 것이다.
"끄어억..."
나는 기세등등한 녀석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고결한 외신이여...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쯤에서 용서해줄 수 없겠나?"
"쉬이잇..."
아직 불만이 남아있다는 듯 머리를 흔들어대는 녀석이었으나...
여긴 내 구역이다.
이대로 파괴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관련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은 물론, 이 녀석들이 공물도 바칠 거다."
"쉬잇?"
"그, 그렇습니다! 공물을 바치겠습니다앗!"
"쉬쉬쉿..."
백사는 그제야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다.
"쉬이이..."
"어떤 공물을 바칠 거냐고? 그야 비싼 걸로..."
"보석! 백사님께 어울리는 크고 아름다운 보석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양 제국산 명품 비단도..."
"쉬잇?"
일이 좀 잘 풀리나 싶던 찰나, 소환사 하나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
"덤으로 통통하게 살찐 쥐들도 드릴테니..."
"사아악!"
"이 새끼,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발광하는 백사를 겨우 진정시키고, 도시의 외곽까지 배웅해줬다.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맙다는 듯 몸을 슥슥 비볐다.
의외로 미끈한 비늘의 감촉이 썩 나쁘지 않다.
"슈슈슛."
"그래, 지난번에 그 예쁜 언니분께 잘 말해줘."
"쉬잇?"
"제대로 들었으면서 왜 그러냐. 그래, 잘 가라."
파아앗!
녀석이 역소환된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도시의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약속을 지켜라. 만약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의 편에 설 것이란 기대는 하지마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척안의 로완은 뱀들과도 친분이 있는 것인가?"
"뱀들의 어머니에게 보복당하지도 않다니. 그럼 저 단검도..."
소환사들이 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두곤 숲의 요새로 돌아왔다.
그냥 귀가하기 뭣해서 잠깐 방문한 것인데, 때마침 월례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숲의 요새의 중진들은 물론이고 양 제국과 헬리온 왕국의 대표들도 차원 마법으로 불러들여서 논의하는 자리.
각지의 신도들을 연계시켜주는 중요한 회의다.
회의는 이름 그대로 1개월에 한 번이지만, 내 입장에선 4일 정도에 한 번이라서 너무 자주 열리는 감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참석을 안 하고 있다.
"헬리온에선 사막에서 입교 희망자들의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데..."
"선진문물이군. 우리도 도입해야겠다. 아앗, 로완이시여!"
편안하게 의견을 교류하던 녀석들이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군! 조금 전의 활약상,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혹 뱀들의 어머니와 친교가 있으신 겁니까?"
"그렇다."
나는 때마침 물어봐준 헤르반에게 기꺼이 대꾸했다.
이런 건 미리미리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
외신들에게 외교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적을 늘릴 필요는 없다.
"그녀에겐 신세를 지고 있지. 너희도 뱀을 조심해서 다루도록 하라."
"세, 세상에... 뱀들의 어머니라니..."
"히이익!"
화들짝 놀란 추종자 한 명이 뒤로 넘어가더니 소리없이 실금했다.
뱀들의 어머니에 대해서, 상위의 외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부분은 오르가즘 비슷한 것을 느끼는 얼굴이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녀석도 있었다.
"오직 로완을 찬미하라..."
하찮으면서도 귀여운 모습을 적당히 감상하다가 본론으로 돌아갔다.
"특별히 보고할 사항이 있느냐?"
"로완 님의 뜻을 구하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다. 이 천것들의 보잘것없는 지혜로는 역부족이라..."
"말해보아라."
"예! 과연 우상숭배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우상숭배?"
우상숭배라면 신의 조각상 따위를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이다.
내 교단에는 이미 한쪽 눈 모양의 심볼이 있지만...
그건 그냥 상징이라서 우상으로 안 쳐준다.
'그러고 보니 내 조각상을 만든 도시가 있었지.'
다만 그쪽은 정식 신도들이 아니라, 공물을 바치는 입장이라서 좀 애매하다.
나는 선뜻 대답하려다 그만뒀다.
사실 내 조각상을 보는 건 굉장히 즐겁고 흐뭇한 일이지만...
고작 그 정도 감상으로 결정을 내려선 안 되는 사안이다.
"... 잘 알았다. 그 문제에 대해선 내가 느긋하게 생각해보마."
"의심없이 따르겠습니다."
파아앗!
시간을 좀 벌고 집으로 돌아온 뒤엔 곧바로 우상숭배에 대해서 찾아봤다.
종교에 대해선 나름대로 공부를 좀 해봤는데, 아직 부족함이 많다.
외신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은 종교와 거의 무관했다.
"음, 의외로 우상숭배를 허용하는 종교들이 많은가? 하긴. 절만 가봐도 불상이 있으니까..."
일단 포교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우상이 있는 편이 좋다.
그러나... 외신으로서는 과연 어떨까?
나는 즉시 재단 지부로 향했다.
훈련과 공부를 핑계삼으려 했지만, 딱히 그러지 않아도 출입 허가가 나왔다.
"지금 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외신 관련 자료를 살펴볼 생각이에요."
[바로 준비할게요!]
내가 사도로 인정받은 이후, 재단 내에서의 취급이 확실히 바뀌었다.
이너 서클 밖에서 내 신분은 극비사항이었으나...
서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다들 대충 눈치 정도는 채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눈치가 나쁜 사람은 재단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너 서클 전용 구역에 출입한 시점에서 최소 서클 멤버 후보 정도는 되는 거지. 아비가일에게 고맙다고 해야하나?'
아마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덕분에 재단에서의 활동이 편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은 없다.
재단 지부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자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뭘 찾고 계시죠?"
"외신 관련 자료요. 조금 메이저한 놈들로..."
재단 서고의 자료들을 살펴봤지만, 일반 대원들에게 허가된 자료다보니 검열된 부분이 너무 많다.
여기서 우상숭배 관련 내용만 찾는 건 정말로 고생이다.
결국 나는 프리스트 토시아키에게 상담했다.
"토시아키 씨. 외신들은 우상숭배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은가요?"
"그건 외신에 따라서 다릅니다. 저마다 특성이 너무 다르니까요."
"그렇겠죠..."
"아, 그래도 신경쓰이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토시아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상위의 외신들은 우상숭배따윈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규칙으로 정해놓진 않아도 아주 싫어하는 눈치죠."
"왜 그럴까요?"
"글쎄요. 일단 형상이 너무 다양해서 우상을 만들기도 힘들고..."
"아하."
토시아키와의 대화에서 뒤늦게 깨달았다.
역시 우상숭배따윈 금지하는 것이 맞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결국 신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
안 그래도 최근 너무 친근해졌다 싶었는데...
그런 걸 허용하는 것은 좋지 않아보인다.
"... 고마워요. 덕분에 알 것 같네요."
"도움이 됐다니 기쁩니다."
흡족한 기분으로 공부를 계속하는데, 머지않아 성이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상황이 발생한 것 같다.
[로완 님. 현재 지부에 계시죠?]
"무슨 일인가요?"
[출동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나이트께서 직접 나서시는데, 로완 님도 꼭 오셨으면 하셔서...]
"... 바로 가죠. 주소를 불러주세요."
아비가일이 작전에 나섰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녀석을 홀로 보내기도 좀 불안하다.
기꺼이 동행하기로 하며 차에 탑승하자 곧바로 브리핑이 시작됐다.
개인적으로는 운전 중에 말 좀 안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애콜라이트 윤하린이 운전석의 문을 두드렸다.
"에스콰이어 님! 제가 현장까지 모실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변장용 사복이에요. "
전투복이 아니라 사복이라니.
시내에서 작전을 진행하게 되는 건가?
뒷좌석에서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있자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현재 상황은 페이즈 1... 하지만 언제든지 페이즈 2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신속한 대처가 요구되는 사안입니다.]
"설마 포교중인 건가요?"
[정확합니다. 아직은 신중하게 후보를 물색하고 있는 것 같지만요.]
외신 추종자주제에 포교를 진행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하긴. 제정신인 놈들은 처음부터 외신을 추종하지도 않겠지.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키지만...
아무리 그래도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외신 소환은 기본적으로 10명 이상의 소환사가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추종자들은 참다못해 섣불리 동지를 늘리려 하고...
그 단계에서 대부분 재단에게 발각된다.
지난번처럼 신전 건설을 시도하는 단계까지 가는 경우는 극소수다.
"이번에는 아직 말려든 사람이 거의 없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대상은 철저하게 감시중이니 확실합니다.]
시현이가 엮였던 건에서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 양아치 대장 놈이 외신 관련 물품을 대놓고 사용해버렸기 때문에...
목격자를 모두 없애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대학살을 벌여야 했다.
원래는 죽일 생각까진 없어서 굉장히 찝찝하게 끝났다.
다행이 이번에는 성이나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감시 대상은 유명 아이돌이니까요. 만약 이미 세를 불렸다면 어떻게든 감시망에 걸렸을 거에요.]
"뭐라구요?"
아이돌.
다시 말해서 우상.
조금 전까지 우상숭배에 대해서 공부했던 나는 기묘한 인연을 느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방송국 스튜디오를 향해서 빠르게 미끄러져갔다.
< 우상숭배(2) >
4인조 보이그룹, B4.
요즘은 그리 드물지도 않은 헌터 컨셉의 그룹이다.
이름 그대로 멤버 전원이 현역 활동중인 헌터로 4명 모두 B급...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레이븐이 보내준 자료를 살펴본 나는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이거 한 명은 C급이잖아? 사기네."
4명 모두 헌터 활동은 거의 구색맞추기 식이다.
연간 최소 활동량도 제대로 못 채워서 연말에 호다닥 몰아서 처리해버리는 실정.
사실상 전업 아이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룹의 인기는 상당히 좋아서, 일반 대원들이 섣불리 접근하긴 힘들다.
그래서 아비가일과 내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출연하는 방송의 녹화현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비가일과 백룡 길드의 명함이 있으면 손쉽게 끼어들 수 있다.
뒷좌석에서 열심히 옷을 갈아입던 나는 한 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 까고 들어간다구요? 그럼 굳이 사복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잖아요?"
[전투복 차림으로 방송국 건물에 가는 건 좀...]
"아, 그것도 그런가. 4명 중에서 누가 용의자에요?"
[한시안 입니다! 마지막 멤버요.]
[아앗, 로완이가 오는 거야? 빨리 와! 빨리!]
"얌전히 기다려."
건너편에서 아비가일의 목소리를 듣곤 냉큼 진정시켰다.
일단 아비가일과 내 얼굴을 깐다는 건 상당히 괜찮은 징조다.
재단에서 이번 사건을 최대한 은밀하고 평화적으로 처리할 계획이란 뜻이니까.
아니면 위험하게 우리를 투입할 이유가 없다.
서번트 성이나가 작전의 목표를 가르쳐줬다.
[용의자의 혐의는 거의 확정입니다. 현장에 투입되는 두 분께선 놈을 감시하고, 혹시라도 포교를 시도하면 어떻게든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방송국에서 포교를 시도한다구요?"
[방송이 끝난 뒤에 팬미팅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조사 결과 그곳에서 포교를 시도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가지가지 하시는군.
한숨을 삼키며 스튜디오 건물에 도착한 나는 즉시 아비가일과 합류했다.
성이나는 레이븐들과 함께 따로 움직일 것 같으니까, 전면에선 내가 재량껏 해야 한다.
"로완이, 좋은 아침이야!"
"이제 거의 점심 아니냐? 포교 시도만 막으면 되는 거죠?"
"네. 방송국에서의 헤프닝만 막아주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좋아요."
아무래도 상대가 유명 연예인이라서 처리에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다.
나와 아비가일은 그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이다.
잔뜩 흥분한 아비가일이 내쪽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좀 진정해라... 아니면 나 혼자 간다?"
"난 완벽하게 진정했어!"
"좋아.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옆에서 장단만 맞춰. 괜찮지?"
"완전 좋아! 로완이를 믿을게!"
대답 하나는 시원시원해서 좋군.
대학 시절에 매번 노트를 보여준 보람이 있다.
대충 정리를 마친 우리는 천천히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수많은 스탭들과 방청객들로 인하여 굉장히 어지러웠다.
세트장 중에서도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인데... 무슨 음악방송같은 것을 찍는 모양이다.
"엇, 아비가일이다. 아비가일 어사일럼..."
"에이 설마."
"실물 같은데? 방송에 나오는 건가?"
"옆에는 누구야?"
스탭과 방청객을 가리지 않고, 벌써부터 아비가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설마 우리가 외신 관련 활동을 수사하러 왔다곤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나는 녀석의 네임밸류를 믿곤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아비가일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아주 신이 났다.
"카메라가 많네!"
"넌 스튜디오 자주 와보지 않았냐?"
"아니. 이나 씨가 나는 금방 들킬 것 같다고, 방송 출연이랑 취재는 최대한 피하랬어."
"이나 씨가 참 똑똑하다니까."
정말 마음에 드는 조치다.
그대로 출연자 대기실까지 들어가자 그제야 스탭들이 우리를 멈춰세운다.
"자, 잠시만요!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인데... 혹시 오늘 방송에 출연하시나요?"
"출입 허가는 받았습니다."
"예에? 아... 그, 그렇군요. 그럼 어떤 건으로 오셨나요?"
성이나가 분명 출입 허가를 받았다고 했는데...
진짜로 출입허가'만' 받아놓은 것 같다.
여기서부턴 내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해야하는 건가?
나는 애꿎은 직원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회장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이야기도 제대로 안 되어있나?"
"아,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다행히 아비가일이 너무 거물이라서 저쪽이 알아서 쫄아붙는다.
아무래도 촬영 현장은 놀라울 정도로 주먹구구식인 것 같다.
아비가일은 나를 따라서 눈을 부라리다가 신이 나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앗, 로완아 저거 봐. 연예인이다!"
"그러게. 유명한 방송인가봐."
아비가일 덕분에 별다른 감흥 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책임자라는 양반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 뒤에는 방송에 별 관심이 없는 나도 알만큼 유명한 연예인들이 열심히 수군거리고 있다.
개중에는 오늘의 감시 대상인 B4의 멤버들도 있었다.
"저, 정말로 오실 줄은... 아니지.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 저 사람도 A급 아니야?"
"맞네. 황금세대의 동기라는 그..."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속으로 성이나를 조금 씹어대며 말했다.
최소한의 상황설정도 안 해준 것을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급했던 것 같다.
사실 전투 담당인 나와 아비가일이 이런 곳에 직접 투입된 것만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냥 구경이나 좀 하러 온 거니까 편하게 대해주세요."
물론 한국 유일의 S급 헌터를 편하게 대하라고 해봤자...
진짜로 그렇게 하는 사람따윈 없었다.
"구경이라면... 단순 관람 목적이신가요?"
"백룡 길드에선 최근 엔터쪽
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왕 전권을 위임받은 김에 막 질러버렸다.
길드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길드의 방침을 설명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었으나...
사람들은 진짜로 믿는 눈치였다.
아비가일이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새로운 기획사라도..."
"그 정도까진 아니고, 투자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의 눈이 욕망으로 희번덕거렸다.
백룡 길드 정도 되는 대형 길드는 몬스터만 때려잡는 곳이 아니다.
풍부한 인적 자원... 즉, 헌터들을 활용하여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는 것이 기본이다.
이 시대에 백룡 길드의 규모는 어지간한 대기업 못지않다.
야자타임에 직원들을 막 자르는 것만 제외하면 상당히 괜찮은 기업이다.
우리는 즉시 좋은 자리로 안내받아서 방송의 준비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됐다.
내 옆자리를 차지한 아비가일이 무척 신기해한다.
"투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네?"
"돈 준다는데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아하."
덕분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저쪽에서 슬금슬금 접근하며 갖가지 정보를 제공해온다.
임기응변으로 해본 것치곤 일이 꽤 잘 풀리고 있다.
"역시 로완이가 하자는대로 하면 잘 되네."
"백룡 길드 명함가지고 이것도 못하는 놈이 이상한 거지."
"그, 그런가..."
"이번에는 네 욕한 거 아니야."
왜냐면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거든.
아비가일은 내 말에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오해한 적 없어!"
"잠깐 집중 좀 할게."
"응!"
오른쪽 눈을 슬쩍 감으며 오늘의 타겟을 주시했다.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 B4의 마지막 멤버인 한시안.
비주얼 담당은 아니라곤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다른 연예인들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이다.
'신기하네.'
너무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외모.
진짜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그래도 아비가일 덕분에 여자들 쪽은 내성이 좀 있는 편이다.
저쪽은 내 시선을 오해한 듯 몸을 살짝 굳히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시안에게선 검은색 기운이 미약하게 솟아오르고 있다.
'사교도가 확실하군. 근데 연기를 너무 못하잖아?'
녀석은 명백히 주눅든 얼굴이었다.
저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것일까.
섣불리 접근해선 안 되겠다.
'다른 멤버들은 깨끗한 것 같고... 팬들은 어떨까?'
"곧 녹화 시작이죠? 방청객들은 저쪽인가요?"
"네! 안내해드릴까요?"
"아뇨, 그냥 구경이나 좀 할게요."
인기 음악 프로그램이다 보니 무대와 방청객이 제법 대형인데...
의외로 팬덤의 연령대가 매우 낮다.
대부분 10대고, 좀 높아봤자 20대 정도.
이번 방송에는 보이그룹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여고생 팬은 좀 부러운데?'
정말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있자 방청객석에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운이 진짜 좋네. 사전 녹화에 당첨될 줄은..."
"그치? 원래 사전 녹화 보려면 새벽에 나와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대도 적당하고."
"앱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니까."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사전 녹화를 신청하려면 아이돌 팬클럽 앱을 이용하여 따로 신청을 해야하는 것 같다.
본방송은 자리 구하는 게 훨씬 힘들고 시세도 비싸다는 모양이다.
'요즘은 아이돌 팬질하려면 앱도 구독해야 하는 건가... 대 구독제의 시대군.'
팬들이 들고있는, 장난감같은 응원봉은 스마트폰 앱과 연동되어 불이 들어오는 제품.
저것도 5만원 정도는 하는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은 촬영 이후에 팬미팅 행사가 있다.
이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 유료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앨범을 20장 샀다느니, 멤버들의 포토카드를 모두 모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
옆에 있던 아비가일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완아, 우리가 늦었어. 이미 페이즈 2 상황인 것 같아."
"뭐야?"
"세뇌같은 걸 당하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잖아. 지금 당장 건물을 폐쇄하고 모두 불태워버려야 해."
"자, 잠깐만 있어봐."
황급히 오른쪽 눈을 감아봤지만, 아이돌 팬들에게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
"그치만 이상한걸?"
오타쿠 짓 좀 하는 거 가지고 너무하네 진짜.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보이그룹 B4가 우리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우리의 목표물인 한시안은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멤버들의 강권에 못이겨서 동행한 눈치다.
그들은 의외로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황금세대의 대선배님들을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아, 아뇨 뭐 그런..."
그래도 꼴에 같은 헌터란 건가?
사실 나도 한시안을 제외한 B4의 멤버들에게 악감정은 없다.
현역 헌터들의 대우가 워낙 안 좋아야지.
기껏 재능을 타고났으니, 아이돌을 할 수 있다면 아이돌이 되는 게 맞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협회에서 정해준 연간 최소 활동량을 제대로 채우고 있어.'
연말에 호다닥 급하게 채운다곤 해도...
헌터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헌터라는 타이틀을 써도 된다.
"그런데, 헌터 아이돌은 어떤 활동을 하는 거죠?"
"헌터 아이돌이라곤 해도 선배님들께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죠."
"5분 뒤에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스탭의 외침을 듣게 된 나는 때마침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B4의 여러분은 백룡 길드에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 정말이신가요?"
"네. 괜찮으시면 녹화 끝나고 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해보시죠."
내 제안에 아비가일이 입을 가리며 오오, 하고 작게 감탄했다.
녹화가 끝난 뒤에는 문제의 팬미팅 행사가 있는데...
여기서 B4가 식사 제안에 응하면 팬미팅 행사는 자연스럽게 캔슬된다!
용의자인 한시안은 팬들을 꼬드길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메이저 중의 메이저 길드인 백룡 길드의 제안.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뒤쪽에 서 있던 B4의 프로듀서는 눈이 반쯤 뒤집어졌다.
그러나 팀의 리더인 녀석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녹화 이후에는 팬미팅 행사가 있어서요."
"자... 잠깐만! 너 미쳤어? 아닙니다 회장님. 팬미팅은 취소될 수 있으니..."
프로듀서가 기겁하며 뛰어와서 말렸으나 리더와 멤버들은 뚝심있게 말했다.
팬들과의 약속이 먼저라는 건가?
솔직히 이건 나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정작 감시 대상인 한시안은 혼자서 발을 뺐다.
녀석의 두 눈이 야망으로 무섭게 타오르고 있다.
지금 이건 나와 아비가일을 사교도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는 갈게요."
"야, 시안아..."
"나는 건강 문제로 불참한다고 해줘. 기껏 대선배님들이 권유해주셨는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가..."
나는 속으로 피식 웃어버렸다.
녹화 이후의 식사 자리에서 한시안을 다른 멤버들과 떼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는데...
이토록 쉽게 해결될 줄이야.
"그럼 프로듀서 님과 시안 씨만 이야기하시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저희 애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요."
"아뇨, 보기 좋은데요."
악수를 마친 나는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서 무대를 구경했다.
귓속의 이어피스에서 살짝 흥분한 성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해요! 아예 오늘 안에 처리할 수 있겠네요.]
"그런가?"
[네, 프로듀서 하나 정도 떼어낼 방법은 많으니... 타겟은 식사 이후 자진해서 그룹을 탈퇴한 것으로 처리하죠. 다만 탈퇴 소식이 묻혀버릴만한 빅뉴스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B4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인기 보이 그룹.
그 일원이 다짜고짜 탈퇴하면 잡음이 생길 수 있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씨익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비밀! 아무튼 나한테 맡겨둬."
[...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진행하죠.]
나는 이유모를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비가일은 뱀처럼 웃으며, 어디선가 가져온 응원봉을 흔들어댔다.
< 우상숭배(3) >
남은 일은 물 흐르듯 처리됐다.
동석했던 프로듀서를 수면제가 든 술로 빠르게 퇴근시키자, 나와 아비가일, 그리고 한시안만 남았다.
한시안은 곧장 우리들을 본인의 집으로 안내했다.
처리 대상이 제 발로 외딴 곳에 들어가주는, 이상적인 상황이다.
"이야. 누추한 곳이라서 죄송합니다. 원래는 조용하게 마실 수 있는 가게로 모시는데, 두 분께서 워낙 거물이셔서..."
"괜찮아! 집 좋네!"
아비가일은 헤실헤실 웃으며 내 팔에 엉겼다.
메소드 연기... 따위가 아니라 그냥 본모습 그 자체.
술보단 음료수를 좋아하면서, 정작 술자리 자체는 싫어하지 않는다.
"맥주는 오랜만에 마시면 왜 이렇게 맛있을까?"
"그러게..."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에는 아비가일과 감상이 똑같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제법 호화로운 아파트가 나타났다.
[감시가 가능한 위치에 도달했습니다.]
"슬슬 그 이야기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예정 시간보다 조금 빨라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한시안과 우리는 그대로 맥주를 한 캔 더 깠다.
그런데, 첫 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녀석이 불쑥 고급스런 편지봉투 같은 것을 내밀었다.
"아, 이건 선물입니다. 별 건 아니지만..."
"선물이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던 찰나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애콜라이트 윤하린이 이어피스 너머에서 소리를 빼액 질렀다.
[받으면 안 돼요!]
퍽!
내가 염동력으로 초대장을 밀어내자마자 아비가일이 움직였다.
유연하게 자세를 변경한 그녀가 날카로운 발차기로 한시안의 목을 찼다.
한시안의 얇은 목은 외마디 신음을 남기곤 뚝, 꺾여버렸다.
"엇?"
털썩.
놈의 몸이 옆으로 넘어가자 애콜라이트가 뒤늦게 설명해줬다.
[그건 미궁의 초대장이에요. 받는 순간 출구가 없는 미궁으로 빠져버린다구요. 제가 가서 회수할테니 절대 손대지 마세요!]
"아... 고마워요."
정말이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군.
외신 관련 물품은 위험한 종류가 너무 많다.
평소처럼 힘으로 부숴버리거나 하는 것도 잘 안 먹힌다.
덜컥.
이윽고 처리반과 성이나, 그리고 윤하린이 우르르 들어와서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윤하린이 초대장을 조심스럽게 챙기고, 처리반이 시체의 운반을 준비하는 동안.
성이나는 이후의 시나리오를 읊어줬다.
"팬미팅에 불참하고 회의에 동석했던 한시안 씨는 백룡 길드 측에서 탈퇴 권유를 받습니다. B4가 투자를 받기 위해선 한시안 씨가 반드시 빠져야 한다는 거죠. 프로 정신의 부재가 그 이유입니다."
"오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활동 중지를 선언하고 혼자서 해외여행을 나가게 되죠. 안타깝지만 비극으로 끝납니다. 괜히 오지에 들어갔다가 실종되거든요."
"요즘 해외에서 자아찾기를 하는 게 유행인 것 같네!"
B4는 워낙 인기 그룹이기 때문에 이것도 나름대로 큰 이슈다.
이걸 덮어버리려면 보통 소식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아까 맡겨달라며?"
"응, 그건..."
아비가일은 다시 한 번 뱀처럼 웃었다.
@
다음 날.
나는 죽고싶은 심정으로 차량의 뒷좌석에 앉았다.
아까부터 스마트폰이 하도 울려대서, 그냥 꺼버렸다.
차 밖에는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백룡 길드의 지하 주차장에는 직통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원래는 그쪽을 썼지만...
오늘은 이슈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아비가일은 너무나도 즐거운 얼굴로 옆자리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로완아, 준비됐어?"
"진짜 이게 최선이야?"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줘!"
"..."
확실히 이슈를 만들기엔 이 이상의 방법이 없다.
나는 마음을 다잡곤 아비가일과 팔짱을 꼈다.
잔뜩 굳은 얼굴의 성이나가 마침내 차를 멈춰세웠다.
"도착했습니다."
"나가볼까!"
덜컥.
아비가일과 함께 길드 본부로 향하자 곧바로 마이크며 카메라가 잔뜩 들이밀어졌다.
기자들이 거품이라도 물 것 같은 기세로 공격해온다.
"아비가일 씨! 최근의 논란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해주세..."
"눈에 보이는 대로야!"
메다닥!
우리는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비가일의 얼굴에서는 아까부터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아하하! 엄청나게 모여들었네!"
불행히도 이슈화는 확실하게 되고있다.
아비가일이 워낙 인기가 있는 헌터인데다, 이런 류의 열애설이 터져나온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정말로 죽을 맛이다.
얘는 사회적 지능이 좀 모자란 이미지가 있고, 실제로도 그래서...
멋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얘를 꼬드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서로의 힘차이를 감안하면 정말로 우스운 이야기다.
'나는 얘가 가슴만 휘둘러도 죽는다고.'
나름대로 현역 B급 헌터였던 한시안도, 아비가일을 상대론 제대로 반응조차 못했다.
겨우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 성이나가 나머지 시나리오를 읊어줬다.
"아이돌 그룹 B4... 아니, B3의 투자는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B3와 소속사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투자는 계속 해야한다.
그나저나 돈 있고 권력있는 놈들이 작정하고 일을 저지르니까 정말로 막을 수가 없다.
"한시안 씨의 출국 절차는 어떻게 됐죠?"
"조금 전에 완료됐습니다."
"잘 됐네! 근데 로완아! 아까 그 애들 봤어?"
"누구?"
"어제 스튜디오에서 봤던 팬들 말야! 걔네들 여기도 왔던데?"
"뭐라고?"
사전 녹화 방송까지 구경하러 왔던 아이돌 팬들이 그새 이쪽으로 갈아타버린 건가...
아비가일은 고속 엘리베이터 안에서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들 왜 그렇게 우상에게 환장하는지 모르겠어."
뱀들의 어머니를 모시는 광신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나는 마침 깨달은 것이 있어서 담담히 대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하고 어리석어서, 본인보다 강하고 위대한 우상을 따르고 싶어하는 걸지도 몰라."
"엇... 그, 런가? 그런 것 같기도..."
아비가일은 물론이고 성이나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봤다.
뒤늦게 부끄러운 소리를 해버렸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적당히 노닥거리다가 퇴근하려는데, 헤르반의 보고가 들려왔다.
[로완이시여! 죄송합니다. 당신을 실망시키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냐. 너무 섣불리 단언하지 말거라.'
[주군의 말씀에 따라 대소환사 에이코그의 흔적을 쫓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 신경쓸 것 없다. 놈은 아무래도 나의 세계로 넘어온 것 같으니.'
[그, 그렇습니까? 과연...]
우리들의 세계는 종이로 된 성이나 마찬가지다.
에이코그가 남긴 말이 재단의 지부에 새겨져있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내친김에 운영방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나의 교단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겠다.'
[주저없이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릴리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테슈타스에게서 빼앗은 사도.
아직은 교단 내에서 제대로 역할을 부여하진 않고 있다.
'릴리아는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지?'
[당장은 얌전히 지내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눈치라서...]
'그렇군.'
편안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오른쪽 눈을 감자 릴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추종자들 사이에 낑겨앉은 채,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내게 직접 축복까지 받은만큼, 생활환경 자체는 최상급.
핵심 추종자 전용 구역의 번듯한 주택까지 받아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릴리아 본인은 영 적응이 안 되는 눈치다.
"정말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경쟁 교단에 파괴 공작을 하고 온다거나..."
"경쟁 교단? 누가 감히 로완 님께 거스른단 말이죠?"
타샤가 살짝 어이없다는 듯 묻다가 손뼉을 짝, 쳤다.
"아, 일거리가 없진 않네요."
"무엇이든 말만 해다오."
"화단에 물 좀 주고 오세요. 너무 많이 주진 말고."
"..."
릴리아는 쭈삣쭈삣 물뿌리개를 들고 나갔다.
녀석의 얼굴에는 정말로 이래도 되는가 싶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당장 써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릴리아도 아비가일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선 일반인 미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미래를 원하지 않는 녀석에게 의미를 주기로 했다.
그러나 의미란 게 꼭 일터나 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닐터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 찾아냈겠지.
'릴리아가 경외할 수 있는 외신이 되어야 해.'
일단 밥 좀 더 든든하게 먹이고.
애가 뼈랑 가죽밖에 없네.
띵, 띵!
이윽고 회의 시간이 되자 헤르반을 비롯한 핵심 추종자들이 신전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릴리아는 아직 정식으로 참여하진 못한 채, 근처에서 화단에 물이나 주고 있다.
나도, 헤르반도 불필요한 회의를 싫어해서 별 일이 없으면 그냥 생략해버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오늘은 그래도 안건이 있는 모양이다.
성이나가 갖다준 커피를 홀짝이며, 눈과 귀만 열어둔 채 참석했다.
[최근 콜렌 왕국 인근을 어슬렁거리는 사교도 집단이 발견됐다는 보고입니다.]
[바로 옆동네군. 단순한 떠돌이들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제대로 된 계급체계와 상징까지 갖춘 것으로 보인다는데... 분명 늑대 모양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늑대...]
진지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돌연 릴리아가 물뿌리개를 들고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잔뜩 주눅든 얼굴로 발언한다.
[그건 종말의 여우를 모시는 교단입니다.]
[종말의 여우?]
[왜 늑대 상징인데 여우지?]
내 추종자들은 살짝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대놓고 무어라 하진 못했다.
릴리아를 받아들였을 때, 성대하게 의식을 거행한 보람이 있다.
그녀는 차분히 근거를 설명했다.
[먼저, 늑대 상징은 갖가지 교단에서 위장용으로 자주 쓰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본거지를 옮기거나 할 때 아주 좋죠.]
[어째서?]
[보통 늑대라고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그야 고독한 늑대다.
소환 즉시 소환사를 포함하여, 반경의 모든 생명을 거둬들인다는 외신!
[고독한 늑대를 모시는 추종자들이라면 껄끄러워서라도 건드리지 않겠죠.]
[과연...]
[계속하라.]
헤르반이 발언하자 릴리아가 담담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종말의 여우는 외신 활동에 굉장히 열정적이었지만, 최근 활동이 뜸해졌습니다. 아주 높은 확률로 고향 차원에 일이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떻게 여우라고 확신하지?]
[이 근처의 교단은 대충 파악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신들의 나라 쪽에서 내려왔다면 진작 들켰을 것이니, 그쪽은 시작부터 제외입니다. 외신 추종자들에게 있어 본거지를 옮기는 것은 무척 위험하고 껄끄러운 일이죠. 최근 이주를 할만한 이슈가 있었던 것은 여우 교단밖에 없습니다.]
나는 사무실에 앉은 채 벅찬 감동을 느꼈다.
진정한 프로는 화단에 물이나 주면서도 제 역할을 해낸다.
[허락하신다면 인원을 파견하여 조사하겠습니다.]
'그럴 것 없다. 그곳은 나의 눈길이 미치는 곳이니.'
[로, 로완께서 말씀하셨다!]
회의를 진행하던 녀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리아. 충분히 쉬었느냐?'
[몸이 근질거릴 정도입니다. 제발 봉사를 허락해주십시오.]
이 녀석은 일 중독이다.
나는 정보 조직의 창설을 허가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스마트폰을 보던 아비가일이 나를 보곤 희번덕거린다.
"로완아, 얼른 와! 우리 사진 한 번 더 찍자! 이번엔 SNS에 올릴 거야!"
"... 꼭 그렇게 해야 해?"
"응! 제대로 이슈를 만들어야지!"
녀석에겐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군.
아비가일에게 일처리를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어색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나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며, 몇 번이나 다시 찍어야 했다.
"후후... 업로드 완료! 이나 씨, 괜찮지?"
"네!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너 인터넷 동영상 보고 있던 거야?"
"응! 이거 꽤 재밌어. 요즘은 헌터펫 영상이 인기야."
나는 동영상 사이트에 중독된 아이를 걱정하는 기분으로 화면을 슬쩍 훔쳐봤다.
최신형 스마트폰 화면의 안쪽에선 자그마한 여우가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이 녀석은 한국말도 할 줄 안다.
"뭐야, 이건... 요즘 이런 헌터펫도 있어?"
"응! 헌터펫이 너무 인기라서, 기존의 펫튜브는 죄다 문 닫고 있다니까."
"아, 그래..."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서 눈살을 찌푸리려던 찰나.
성이나가 재단에서 연락을 받곤 살짝 당황했다.
"넷? 아, 알겠습니다. 두 분, 재단 본부에서 곧 손님이 도착할 예정이라고..."
"본부?"
"네. 이미 거의 다 온 것 같네요."
재단의 본부는 정보 통제가 심하게 되어있다.
나도 해외에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혹시나 싶어서 아비가일을 슬쩍 돌아보자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본부는 미국 프로비던스에 있어!"
"너 기밀유지가 뭔지는 알아?"
"... 전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게요."
애써 아무것도 못 들은 체 한 성이나가 마중을 나갔다.
아비가일은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 무한 아카이브 >
재단의 본부에서 왔다는 손님은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조금 전까지는 본부가 따로 있는 줄도 몰랐다.
"보통 이렇게 불쑥 찾아오나?"
"응! 본부의 모든 활동은 기밀사항이니까 말야."
아비가일이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설명해줬다.
자고로 재단에서는 적게 알수록 안전하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덜컥.
마침내 문이 열리자 살짝 얼어붙은 얼굴의 성이나가 걸어들어왔다.
그녀의 뒤에선 처음 보는 외국인 꼬마 하나가 고개를 비죽 내밀고 있다.
"..."
부끄러워서 저런다기 보단, 먹잇감을 살펴보는 듯한 눈빛이다.
다음 순간. 내 오른쪽 눈이 알싸한 통증을 호소했다.
따로 집중하지도 않았는데 외신 특유의 기묘한 오라가 똑똑히 보인다.
'뭐지? 이건 진짜 외신에게서나 볼 수 있는 반응인데...'
아비가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스마트폰을 내던지곤 여자애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내가 염동력으로 스마트폰을 붙잡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와아앗! 언니다 언니! 안녕하세요?"
"응... 안녕. 오랜만이네."
살짝 쑥스러운 듯 인사하는 소녀.
아비가일이 훨씬 큰데, 태도만 보면 까마득한 상급자같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성이나에게 물으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자리를 비워버렸다.
'어사일럼 가문 사람인가?'
아비가일과 잠시 어울리던 녀석은 이내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에 경직되어 있자 보기 좋은 두 눈이 나를 찔러보듯 자세히 살핀다.
"쉬쉿."
끝이 살짝 갈라진 혀를 낼름거리던 녀석이 그것으로 내 뺨을 핥았다.
화들짝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자 그제야 피식 웃는다.
굳이 요모조모 뜯어보지 않아도, 한 눈에 예쁘장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외모다.
이국적인 것을 넘어서 국적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인상.
오른쪽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겨우 녀석의 오라에서 익숙한 모습을 떠올렸다.
"잠깐, 너..."
"너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
피식 웃은 녀석이 가느다란 양팔을 뻗어서 내 몸을 짚었다.
나름대로 휘감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동작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원래 팔다리가 없던 존재 특유의 위화감이 느껴진다.
'확실하군.'
이 녀석은 얼마전에 소인족 세계에서 마주쳤던 백사의 외신이다.
뱀들의 어머니 휘하의 녀석이 왜 지구에 내려왔나 싶은데...
질문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불평했다.
"너 때문에 외출나갔던 걸 어머니께 들켰잖아.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허락을 받아서 왔어."
"허락?"
"응. 아, 이 모습은 처음이라서 못 알아본 건가? 에이코그가 고생 좀 해줬지."
"!"
전혀 상상도 못했던 곳에서 대소환사 에이코그의 이름이 나왔다.
역시 재단과 협력하고 있던 건가?
그나저나 아직도 살아있었을 줄이야.
어쩌면 재단의 본부에 있을 수도 있겠다.
아비가일은 옆에서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지금까진 거의 내게만 보여줬던 얼굴이다.
"에이코그 영감님의 작품이었구나!"
"... 여기엔 도대체 뭐하러 온 건데?"
"그야 놀러왔지. 내 고향차원은 너무 평화롭고 지루하거든. 아, 네 자그마한 비밀은 지켜줄테니 안심해."
백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아비가일은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재단은 명색이 외신 배척 단체인데...
이런 식으로 외신이 동행해도 되는 건가?
"일단은 어사일럼 가문이란 설정이야. 잘 부탁해. 이름은 뭘로 할까?"
"..."
너무 황당해서 돌아가라 하고싶지만...
저 녀석은 걸어다니는 기밀정보 파일이다.
당장 조금 전만 해도 대소환사 에이코그의 행방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내가 한참을 굳어있자 녀석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직 위장 준비가 다 끝난 건 아니죠?"
"소소한 건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안 돼요! 얼른 이나 씨에게 도와달라고 하죠."
"으응..."
녀석은 살짝 불만스런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심심하답시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재단은 뱀들의 어머니에게 종속된 조직이 맞는 것 같다.
"후우."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것도 잠시.
이번에는 소인족 세계의 결사단이 소란이다.
녀석들은 웬일로 내 이름을 마구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영문모를 환희로 가득차 있다.
[로완이시여! 이곳을 봐주십시오! 저희가... 저희가 희대의 보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결사단은 평소에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지라 오히려 귀가 솔깃했다.
지난번 재단 임무에선 미궁의 초대장이란 물건에 당할 뻔했는데...
외신 관련 물품을 자꾸 보다보니 나도 하나 가지고 싶어지긴 했다.
'무엇이냐.'
[아마 로완께서도 알고 계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것은 무한의 예언서...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지식이 기록된 보물입니다!]
'뭐야?'
미래시가 가능한 보물이라니.
나는 서둘러 오른쪽 눈을 감았다.
결사단의 이너서클 멤버들은 비밀기지에 모인 채, 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웬 스마트폰이 한 대.
벌써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느껴진다.
'스마트폰? 왜 저쪽 차원에 있는 거지?'
내 시선을 느낀 녀석들이 알아서 설명해줬다.
[기뻐해주십시오! 이것은 저희가 이단 놈들을 추적하여 빼앗아온 것입니다!]
[겉보기엔 알 수 없는 고철같지만, 이렇게 전기 마법을 이용하면...]
파지직!
녀석들은 전기 마법으로 요령 좋게 스마트폰을 충전했다.
오늘 정신나갈 것 같은 일이 너무 많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보물이라면서? 그런데 어떻게 그걸 빼앗았다는 것이지?'
[이 무한의 예언서는 해석이 무척 난해합니다! 원주인들은 이것에 담긴 지식의 1%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지금 바로 시연해보겠습니다!]
자신있게 말한 녀석들이 척척 준비를 갖춰나갔다.
난데없이 스마트폰이라니...
게다가 액정에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한국어였다.
'헨리 말고 다른 한국인 외신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만약 한국인 외신이 있다 쳐도, 본인의 스마트폰을 던져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저건 어쩌다 저쪽 차원으로 흘러들어간 분실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좋다! 켜진데스.]
[어서 실행하라! 세레브한 미래를 찾아내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액정 위에 올라가서 직접 조작하던 녀석들은 마침내 무한의 예언서란 것을 작동시켰다.
비디오 재생 애플리케이션이 실행되며, 제법 익숙한 로고와 출연진들이 화면 속에 나타난다.
나는 그것을 보곤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것은...'
[오오, 로완이시여! 역시 알아보시는 것입니까!]
[로완님과 같은 언어를 쓰고 있으니 그럴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화면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 10년 이상 방영됐던 초대박 예능 프로그램...
'무제한 도전'이었다!
국민 MC와 개성 넘치는 멤버들을 이쪽 세계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녀석들이 영상을 정지시키며, 해석이란 것을 진행했다.
[여기, 이곳을 보십시오! 이 추악한 인어의 모습을!]
'뭣?'
화면 속에선 멤버 중 하나가 엉터리 인어공주 분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로완께서 헬리온 왕국에서 물리치셨던 해신 데아곤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아주 흡사하지 않습니까?]
[머리 모양도 닮았습니다!]
'구아악... 아, 아니. 그건 그런 게 아니라...'
이걸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싶어서 헤메고 있자 곧바로 다음 영상이 재생됐다.
[그리고 이것! 여기를 보시면 좀비 특집? 이란 것이 망했다고 나옵니다!]
'... 그게 뭐?'
무제한 도전은 대형 특집을 몇 번이나 연이어서 했을 정도로 다양한 컨텐츠를 소화해냈다.
대부분은 멤버들끼리 떠들고 웃는 모습이었지만...
당시 최정상급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좀비 특집이라면 망한 특집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특집!
소인족들은 그것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좀비가 망했다... 여기서 좀비는 언데드. 즉, 외신 아토카를 의미합니다!]
[로완께서 아토카를 물리치시어 놈이 패망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돌겠다 진짜.
이건 그냥 갖다붙이기잖아.
꿈보다 해몽이란 건가?
무제한 도전은 10년 이상 장수한 초대박 예능 프로그램이라서 없는 장면이 없을 정도다.
방송의 특성상, 특집도 굉장히 다양하게 찍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마구 갖다붙이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하필이면 이 방송을 저장해둔 스마트폰의 주인을 저주하며, 소인족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런 것이 아니다.'
[예엣?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나의 세계에서 비롯된 물건... 하지만 예언용따위는 아니다. 단순한 놀이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녀석들이 최대한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하자...
개중에서 가장 똘똘한 편인 결사단장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앗! 알겠습니다!]
'오오, 이제야 알아주는 것이냐...'
[단장님, 무슨 의미입니까?]
[척안의 로완께선 너무나도 전지전능하시어, 미래를 살피는 것조차 한낱 놀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히이익?!]
'...'
[이, 이런 지식... 나는 감당할 수 없어! 끼아악!]
소인족 하나가 완전히 미쳐버린 나머지 이너서클 밖으로 뛰쳐나가다 처단당했다.
나는 갑자기 헤르반이 몹시 그리워졌다.
녀석을 복제해서 내 세력권마다 한 명씩 배치하면 좋겠다.
이놈들에겐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고싶지 않았으나...
그래도 수습은 해야한다.
'그래. 이것은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내가 다시 거둬가겠다.'
[전지전능하신 로완 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녀석들에게서 스마트폰을 회수한 나는 기종을 확인한 다음, 충전기를 주문해두곤 퇴근을 준비했다.
아비가일과 흰 뱀 녀석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귀신같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아, 로완아! 오늘은 대중교통으로 퇴근하자! 우리 열애설을 제대로 증명해줘야지!"
"진심이야? 근데 걔는 어디갔어?"
"이나 씨와 함께 옷 좀 사러 갔어! 당분간은 나와 함께 지낼 예정이야."
아비가일은 원래 특별 관리 대상이니까 같이 지내는 게 손이 좀 덜 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납득하며, 그녀가 원하는대로 굳이 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왓, 아비가일이다."
"아비가일 씨! 사인 한 장만 해주세요!"
길드 건물을 나가자마자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들이 엄청나게 뜨겁다.
아비가일은 헤실헤실 웃으며 웬일로 친절하게 답했다.
"죄송해요! 데이트 중이라서!"
"그아악..."
옆에서 발연기를 보고있자니 손발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스 정류장에 도달했는데...
앞에서 웬 시위대가 보였다.
그들은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탑승객들이 버스에 타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단단한 방진이라서 도저히 파고들 수 없을 것 같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한 명이 버스에 탑승하려 하자 시위대가 물었다.
"누가 들어오려 하는가!"
"아악, 비켜요! 어머니 병원 가야하는 길이라구요!"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른다!"
돌겠군.
무슨 장애인 시위 같은데...
본인들의 프로파간다를 위하여 공공질서를 방해하는 것도 아랑곳 않는 모습이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탑승자들 입장에선 그냥 몹쓸 놈들이다.
곧이어 다음 사람이 탑승하려 하자 그들이 다시 밀쳐냈다.
"누가 들어오려 하는가!"
"얼른 퇴근해야 하니까 보내줘! 이제 곧 차막힌다고!"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른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육체적인 충돌이 발생할까봐 오히려 일반인들을 막고있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되자, 나는 기묘한 사실을 떠올렸다.
"누가 들어오려 하는가!"
"저도 장애인이에요. 이쪽은 제 안내인."
"그렇다면 들어오라!"
시위대가 우르르 갈라지며 나와 아비가일을 들여보냈다.
대한민국 장애인 분류 기준으로, 나는 경증 시각 장애인이 맞다!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에게 치료받은 이후. 한쪽 눈이 아예 안 보이니까...
가장 경증이라 할 수 있는 6급 시각 장애인이 됐다.
무사히 버스에 탑승한 나는 아비가일이 덜덜 떠는 것을 발견하곤 피식 웃었다.
"로완이, 괜찮아?"
"괜찮아. 아마 너 때문에 들여보내줬을 거야."
만약 국보급 헌터인 아비가일을 막아섰다면 곧바로 저녁 뉴스에 출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악역으로!
아비가일은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듯 엷게 웃으며 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로완이는 눈이 나쁘니까 잘 잡고 있어!"
"... 고맙다."
나는 그녀에게 안기다시피 한 채 집으로 향했다.
< 뜻밖의 소환 - 삽화 >
'드디어 왔군.'
나는 오전에 도착한 택배 박스를 서둘러 해체했다.
안쪽에는 잘 포장된 스마트폰 충전기가 하나 들어있다.
주저없이 꺼내서, 침실로 가져가 콘센트에 꽂아넣는다.
이번에 충전하는 것은 내 스마트폰이 아니다.
얼마전에 결사단에게서 회수한 주인불명의 스마트폰이다.
'기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소인족들의 전기 마법으로도 충전이 될 줄이야.
우리나라가 스마트폰을 잘 만들긴 하는 모양이다.
그대로 30% 정도 충전을 해놓곤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열어봤다.
앞서 배터리가 좀 망가졌을 수도 있으니, 완충은 불안하다.
소인족들이 썼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비밀번호나 잠금 패턴은 따로 걸려있지 않았다.
'연락처는... 뭔가 많긴 한데, 봐도 모르겠군. 저장공간부터 살펴볼까.'
상당한 대용량 스마트폰인데, 저장공간의 대부분은 앞서 봤던 예능 프로그램의 녹화분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걸 애써 무시하며 갤러리로 들어가봤다.
제법 화기애애한 느낌의 사진이 몇 개나 보인다.
셀카 비슷한 것도 있어서 주인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부인가?'
스마트폰의 주인은 헌터도 아닌 것 같다.
겉보기엔 아주 평범한 가정 주부다.
잠금을 안 걸어놓았으니, 어느정도 연령대가 있겠지.
아무리 봐도 외신 활동에 엮였을 확률은 낮아보인다.
'혹시 모르니까 이나 씨에게 조사를 부탁하자.'
꼼꼼히 조사를 마치곤 스마트폰을 다시 숨겨뒀다.
정리를 마치곤 고개를 돌리자 내 스마트폰이 보인다.
내 것은 오래전에 충전이 다 되어있지만... 켜보기가 겁난다.
아비가일이 열애설을 발표한 이후, 정말 미친듯이 울려댔던 것이다.
그래도 언제까지 스마트폰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잇."
삐익.
큰 마음을 먹고 전원을 켜자 무시무시한 양의 메세지와 부재중 통화가 쌓여있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들이나 언론사, 단순 업계 지인들도 죄다 한 마디씩 해놓았다.
그쪽은 제쳐두고, 가장 먼저 시현이부터 찾아봤다.
시현이는 '축하한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 며 나중에 청첩장이나 보내달라고 놀렸다.
진짜 무서운 것은 후배인 서유림 쪽인데, 혼자서 메세지를 60개쯤 보내뒀다.
이건 열어보기도 두려워서 그냥 전화를 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어, 유림아. 안녕. 별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폰을 꽤 오래 꺼놨어."
스르륵.
잽싸게 출근 준비를 하며 유림을 진정시켰다.
염동력으로 옷을 꺼내어 팔을 꿴다.
"어, 그냥 가짜뉴스 비슷한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어, 그래. 나중에 보자. 후우."
그대로 가까운 지인들 몇 명에게만 해명을 하자 어느새 출근시간이 됐다.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 출근하는데도, 아침도 못 먹고 나간다.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성이나가 운전하는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녀석들은 총 2명.
아비가일과 백사의 외신이다.
백사 녀석은 그래도 좀 멀쩡해보이는 옷을 입은 채 나를 맞이했다.
아동복이 조금 위험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오, 왔다!"
"로완아! 그렇게 입으면 안 더워?"
"어차피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곳에서 일하는데 뭘..."
"맞아! 그럼 빙수 먹으러 가자! 빙수! 우리 열애설도 퍼뜨려야 하니까!"
"이미 과할 정도로 퍼졌거든?"
아비가일 녀석, 아무리 봐도 본인의 열애설을 핑계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 같다.
게다가 옆의 백사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건 사양이다.
녀석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몸의 곳곳에 흥분한 기색이 드러난다.
이 녀석에게 이번 여행은 한낱 관광에 불과하다.
"아, 맞아. 이곳에서 쓸 이름을 정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어사일럼이다."
"아비가일의 친척이란 설정이지?"
"응! 사촌동생. 옷도 바꿨다."
어제의 복장은 완전 판타지풍이라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걱정될 정도였으나...
잘 생각해보니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어린 여자애들은 겨울왕국 드레스 같은 거 입고 학교에 가려고 떼쓰곤 하는 것이다.
녀석은 우리들에게 선심쓰듯 말했다.
"혹시라도 도와줄 것이 있다면 간언해봐라.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마."
"그래봤자 오늘은 별 거 안 할 예정인데."
"뭣? 어째서?"
기본적으로 재단의 업무는 우리들이 아니라 사교도 놈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려있다.
사교도들이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이고, 놈들이 쉬면 우리도 쉰다.
훈련이나 연구 등을 제외하면 날마다 업무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은 아직 별 일이 없으므로, 사무실에서 얌전히 헌터 관련 업무를 처리해두기로 했다.
길드 건물에 거의 도착할 즈음.
아비가일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로완이는 언제까지 A급에 있을 거야?"
"응?"
아비가일의 감각은 최신형 측정기계보다 훨씬 정확하다.
녀석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내가 S급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사실 나도 그리 놀랍진 않다.
아마 전갈의 외신 자낙을 물리쳤을 때 이미 S랭크 수준이 됐을 것이다.
"... 승급 안 하고 싶은데. 어차피 재단 활동에 방해만 될 것 같고."
"그런가?"
S급으로서의 명성이 필요하다면 아비가일이 나서면 된다.
양지에서의 영향력은 이미 충분하다.
"애초에 A급 된지 얼마나 됐다고..."
"음, 그것도 그렇네! 알았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자 운전석에 앉은 성이나의 눈매가 좁아졌다.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하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다음,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B3는 어떻게 됐죠?"
"현재 그룹을 재정비하고, 투자금을 바탕으로 새로운 활동을 계획중입니다. 한시안의 탈퇴도 긍정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잘 되고있군요."
죽은 한시안은 아이돌 활동보단 사교도 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B3의 멤버들도 그걸 대충 눈치채서 별 말을 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대로 서류업무를 시작하자 백사의 외신 아멜리아가 멋대로 사무실에 들어와서 구경한다.
"이건 뭐 하는 거지?"
"던전 공략 보고서 작성. 헌터들에겐 연간 최소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
나는 이번년도 초에 진작 다 채웠지만...
승급을 2번이나 해버려서 무효가 되어버렸다.
등급이 높아지면 할당량도 같이 늘어나버린다.
"어차피 아랫것들을 시켜서 대신 처리하는 거 아니냐?"
"그렇긴 한데, 나중에 이야기 했다가 앞뒤가 안 맞으면 안 되잖아. 협회에서 가끔씩 기습적으로 전화걸어서 확인도 한다고."
"철저하군."
아멜리아는 혀를 낼름거리며 손으로 내 팔을 만졌다.
대부분의 뱀들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촉각과 후각에 극단적으로 의존한다고 한다.
어찌보면 나랑 조금 비슷하다.
"그런데 너는 추종자들이나 신전 관리 안 하냐?"
용기를 조금 내서 묻자 의외로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일족은 신전을 짓지 않는다."
"아, 그래? 어째서?"
그러고 보니, 뱀들의 어머니는 매우 강력한 외신인데...
소인족 세계에 그녀와 자손들의 신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지구에는 진작 없다고 듣긴 했지만 재단의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어서 믿지 못했다.
"이유는 필요없다. 그저 어머니의 뜻을 따를뿐이지."
뱀들의 어머니의 방침이란 건가.
그야말로 외신들의 외신이란 느낌이다.
아멜리아는 거기에 사족을 조금 덧붙였다.
"그래도 감히 그 뜻을 추측해보자면, 한 곳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것 같다."
"으음..."
"추종자도 똑같다. 관리를 하지 않아도 결국 유능하고 신실한 놈이 살아남겠지."
상위의 외신답게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다.
하지만 내가 무작정 따라하긴 힘들다.
저건 외신으로서의 체급이 엄청나서 가능한 방침이다.
손을 멈추지 않으며, 제법 유용한 문답을 주고받던 무렵.
돌연. 머릿속으로 어색한 한국어 기도가 들려왔다.
[척안의 로완이씨여! 이곳에 강림하시어 당신의 힘과 지식을 베푸소서!]
'뭐지?'
대부분의 기도는 타샤와 메이린을 비롯한 사제들이 걸러주고 있을텐데...
이번 기도는 그 필터를 꿰뚫곤 곧장 내게 도달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놈들은 내가 무어라 응답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포탈을 열어제꼈다!
파지직!
사무실의 중앙이 크게 일그러지더니, 푸른색 균열이 빈 공간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오, 누가 부르는 건가?"
"왜 하필 여기서!"
내가 거부하면 포탈이 열리는 걸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이번엔 대처가 늦었다.
설마 필터를 뚫고, 다짜고짜 포탈부터 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포탈의 느낌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
"뭐야, 이미 열린 포탈은 못 닫는 건가?"
"그런 게 가능했으면 전 세계의 헌터들이 왜 고생하겠냐."
이미 포탈이 열려버린 이상, 달리 방법이 없다.
저쪽에서 닫아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직접 들어가보는 수밖에.
둘 중에선 후자가 그나마 빠를 것이다.
내 곤혹스러움을 눈치챈 아멜리아가 선심쓰듯 말했다.
"여긴 내가 맡고 있을테니 어서 다녀와라."
"... 부탁할게."
어차피 이곳은 백룡 길드의 심장부니까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나는 잔뜩 열받은 채 포탈로 들어갔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이토록 막무가내로 구는지,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파아앗!
살기등등한 기분으로 소환이 끝나자, 어두운 방 안에 꿇어앉은 사교도들이 보였다.
지하실로 추측되는 방은 그리 넓지 않다.
녀석들은 후드를 뒤집어쓴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나, 나왔다! 척안의 로완을 소환해냈어!"
"... 조금 작은데?"
"그야 소환 장소가 좁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녀석들의 크기다.
소환이 좀 어설펐는지, 놈들의 크기는 나와 거의 비슷했다.
평소보다 압도적으로 작게 소환됐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녀석들이 쓰는 언어가 신경쓰였다.
'잠깐만, 저거... 소인족 세계의 공용어가 아니라 영어잖아?'
파앗!
몸 주변에 펼쳐놓았던 염동력이 순식간에 확장되며,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나는 순식간에 건물 전체와 주변 지역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었다.
눈에 띄게 발전된 감지 능력 덕분이다.
"지금 사소한 게 중요해? 로완이시여! 당신의 위명이 차원 너머까지 닿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영생과 지식을 선사하소서!"
"..."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곳은... 지구다!
그것도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
나는 소인족 세계가 아니라 외국으로 소환된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나한테 직통으로 전달됐던 건가! 처음부터 사제들이라는 필터쪽으로 가지도 않았으니까...'
설마 같은 차원에서도 소환이 가능했을 줄이야.
하긴. 타샤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간이동을 실현하긴 했다.
'이래서 내가 제 때 못 막았구나... 두 번은 안 당한다.'
내가 굳어있자 사교도들은 몹시 주눅들었다.
놈들의 눈이 점점 의심으로 물든다.
"정말 소환에 성공한 건가?"
"척안의 로완... 아닌가?"
'이런 무식한 놈들!'
이놈들은 내 소환을 위해서 분명 한국어를 공부했을텐데...
그게 한국어란 것조차 모르고, 외계어인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진작 한국인이란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실패했나..."
"이 정도면 늦기 전에 처리하는 게 낫겠는데?"
"에에잇, 뭐라고 말 좀... 끄헉?!"
콰득!
사교도 한 놈의 몸이 염동력에 뭉개졌다.
재단의 에스콰이어로서, 그리고 척안의 외신으로서...
이놈들은 절대로 살려둘 수 없다.
"끄아악!"
"어디서 내 이름을 들었지?"
"뭐, 뭐야! 영어를 할 줄 알잖아? 설마 척안의 로완은..."
콰드득!
다시 한 놈이 뭉개지자 그제야 사교도들이 넙죽 엎드렸으나...
차분히 질문할 여유따윈 없다.
넓게 펼쳐진 염동력의 그물에 침입자의 기척이 감지됐다.
'재단이군. 기왕이면 빨리 좀 올 것이지.'
이 타이밍에 난입할 놈들이라면 재단 정도밖에 없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나머지 사교도들을 처리한 다음, 소이 수류탄을 까넣었다.
내가 외신이란 증거물을 남겨둘 순 없다.
'아까 확인했을 때, 이 건물에 다른 사람은 없었으니까...'
사교도들의 연구자료나 소환용 촉매를 염동력으로 긁어모아 불 속에 던져넣곤, 주저없이 귀환했다.
파아앗!
사무실로 돌아와서 후드를 벗자 아멜리아가 쿡쿡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그 표정은 뭐지? 같은 차원에서 소환된 건 처음이냐?"
"뭣?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으응? 그야 포탈 너머를 집중해서 보면 도착지점이 보이잖아? 네 눈으로 그게 안 보일 리 없는데?"
"..."
어린애처럼 굴긴해도 확실히 외신으로서의 짬이 다르군.
나는 그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털썩.
긴장이 풀린 나머지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지난번의 그 스마트폰도 그렇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소인족 세계와 지구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세계 사이에 지속적으로 문물과 지식이 교류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늘고 있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모든 차원은 서로에게 점점 더 가까워진다. 결국은 차원이 충돌해서 하나가 되지. 그 전조가 바로 게이트 현상이다."
아멜리아가 뭐 그런 걸 모르냐는 듯 태연히 말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것을 지켜보자 아주 흡족한 반응이 돌아온다.
"뭐라고?"
"진짜로 몰랐던 거냐..."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야 외신 중의 외신, 눈 먼 혼돈의 의지 때문이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세로로 갈라진 동공을 가까이 들이댔다.
불길한 오라가 녀석의 형상 위에서 백사의 모습을 갖췄다.
< 올렸다 떨어뜨리기(1) >
눈 먼 혼돈.
또 뭔가 엄청 거물같은 외신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당장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따윈 없다.
세계의 운명이고 자시고, 내 코가 석자다.
나는 당장 지구에서 소환당하여 정체를 발각당할뻔 했던 것이다.
'그 사교도 놈들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자기들이 배우고 있는 언어가 한국어인 줄도 몰랐다니...'
만약 한국어인 줄 알았다면 내가 바로 척안의 로완이란 것을 진작 눈치챘으리라.
나는 외신활동 때 진명을 쓰고 있는데다, 한국에 단 7명뿐인 A급이니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A급 헌터가 그리 드물진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7명뿐이지만...
전 세계를 통틀면 적어도 수백명은 나오겠지.
게다가 나는 A급 중에서도 승급한지 얼마 되지않은 말석.
아직은 한국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이 아주 많진 않다.
그나마도 아비가일의 열애설 상대로 알려져 있겠지.
'역시 S급 승급따윈 안 하는 게 맞아. 오히려 다시 B급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야.'
어쨌거나 재단 활동을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로완이란 이름이 그리 드물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 맞아. 네 동명이인이 꽤 많더라."
"그렇지?"
인터넷에 로완을 쳐보니 야구 선수도 나오고, 영국 배우도 나온다.
심지어 대주교도 한 명 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만 세었는데도 이 정도.
나는 로완치곤 상당히 마이너한 셈이다.
"람로완... 은 로완이 아니잖아. 그나저나 이 캐릭터 베트남인이었어?"
"람로완이 누군데?"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악역.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책 같은 거야."
나보다 훨씬 더 출세한 동명이인들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
아멜리아는 소파 위에서 몸을 배배꼬며 뒹굴거린다.
"영화라! 한 번 보고싶다."
"이나 씨에게 부탁해봐."
"나는 네게 말하고 있다."
결국,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한 편 다운받아서 보여줬다.
아저씨는 명작 액션 영화지만 청소년 관람불가인데...
얘는 겉보기만 애인 것 같으니까 상관없겠지.
아비가일도 얘보고 언니라고 했다.
"오오, 이것이... 좀 조악하지만 볼만하구나."
"화면이 좀 작나? 기다려봐."
사무실의 스크린에 연결해준 다음,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아멜리아가 얌전해진 덕분에 업무를 빠르게 처리해가는데...
또다시 필터를 뚫곤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정상적인 느낌이다.
내 추종자들 중 에이스들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은 나와 직통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그 중에서도 양황이다.
[로완이시여! 긴히 상담드릴 것이 있습니다.]
'상당히 오랜만이군. 말해보아라.'
자낙에게서 해방된 이후, 양 제국은 알아서 잘 하고있는 느낌이었다.
매일같이 나를 불러제끼던 것도 옛말이다.
물론 그들도 교단의 월례회의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어지간한 안건은 그곳에서 결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찾는단 건 상당히 비밀스럽고 민감한 안건이 있다는 뜻이다.
양황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완께서 자낙을 물리치시어 이 땅에 평화가 되돌아왔사옵니다. 이제 백성들의 삶이 어느정도 안정되었으니 궁중의 법도를 바로세우려 합니다.]
장황하지만 듣기 싫진 않은 서론.
양황의 말뜻은 간단했다.
'소환사들의 계급체계를 정비하겠다는 것이냐?'
[바로 그렇습니다!]
소환사들은 원래 각국에서 대우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신전이 세워진 뒤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신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해당 국가가 기둥이 되어줄 외신을 제대로 정했다는 뜻이다.
소환사들은 원래 외신 관련 지식의 전문가.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소환사들은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라, 귀족 계급이 되는 것이다.
[저희는 로완 님의 소환사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이를 뽑아, 상궁소환사로 임명하려 합니다.]
'상궁소환사? 봉급이나 의전에도 차이가 있느냐?'
[물론입니다. 상궁소환사는 황제 다음가는 직급으로...]
당장 양 제국의 에이스를 꼽아보라면 양황과 메이린 정도인데...
메이린을 상궁소환사로 임명할 것이었다면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진 않았으리라.
그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시켜뒀다.
'그 자리에 메이린 말고 누굴 추천하는 것이지?'
[여, 역시 로완께선 한쪽 눈으로 모두 꿰뚫어보시고 계셨습니까... 롱 가문의 유에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양 제국은 스케일이 커서 소환사가 워낙 많긴 하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메이린이 1순위였을 것이다.
메이린은 처음부터 나를 직접 안내했던, 소환사들의 우두머리였다.
헤르반이나 타샤처럼 압도적인 실력이나 재능을 자랑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양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소환사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유에란 이름은 따로 들어본 적이 없다.
[유에는 명가의 장녀로서, 소환사가 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훌륭한 재능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렇군. 대충 이해했다.'
명가의 장녀라.
소환사가 천대받을 때엔 자식을 꽁꽁 숨기고 있다가...
막상 귀족계급이 되니까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것인가?
양황조차 무시할 수 없을만큼 위세가 좋은 가문 출신인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선 미리 단호하게 말했다.
'가문의 출신따윈 내가 신경쓸 필요없겠지. 그렇지 않느냐?'
[물론입니다. 로완이시여!]
어느 개미집에서 나온 개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개미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직 유에란 소환사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메이린의 자격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만약 타샤나 헤르반이었다면 저런 말 자체가 안 나왔다.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보겠느냐?'
[시험이라 하심은...]
양황은 내 설명을 듣곤 넙죽 고개를 조아리며 동의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추종자들을 속이고 싶진 않았으나...
내가 메이린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녀석들이 메이린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의혹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지.
[과연 명안이십니다! 그럼 지금 바로 실행하도록 하지요.]
'내가 한쪽 눈으로 지켜보겠다.'
양황과의 대화가 끝나자 체감시간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저쪽 세계의 시간은 7배속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원래라면 대화도 힘들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저쪽과 대화중일 때엔 체감시간이 잠깐 조절된다.
계속 업무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아멜리아가 자리잡은 소파 옆에 앉았다.
영화의 소음을 배경음악삼아 녀석의 과자를 조금씩 빼앗아먹었다.
'어디 한 번 볼까.'
그대로 오른쪽 눈을 살짝 감으니 계획이 척척 진행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양황의 명을 받은 관리가 소환사들을 찾아가서 당당히 선포했다.
[그럼 지금부터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상궁소환사를 임명하겠다! 척안의 로완을 가장 가까이서 모실 영광스런 상궁소환사는... 롱 가문의 유에다!]
[뭐... 뭐라고?]
[어째서 메이린 님이 아니라 유에인 거지?]
새로운 상급자가 발표되자 소환사들은 큰 혼란에 빠져서 웅성거렸다.
메이린도 깜짝 놀라서 굳어있는 가운데, 유에라는 소환사가 냉큼 황금으로 만들어진 관을 받았다.
나와 양황이 계획한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잊지마라. 메이린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물론입니다.]
메이린은 공식적으로 강등을 당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강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소환사들과 관리들은 새 떼가 지진을 감지하듯, 권력의 이동을 감지해냈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메이린은 말단 소환사들이나 하는 허드렛일을 맡게 됐다.
유에는 자낙과의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는지라 이래저래 불만의 목소리가 있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환사들은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고아나 천민들 중 재능있는 녀석들을 뽑아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일단 말씀하신대로 유에를 상궁소환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럼 며칠 정도 느긋하게 지켜볼까.'
양 제국의 관리들이 만들어낸, 상궁소환사라는 직위는 강력하고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상궁소환사는 나의 대변인이으로서 신전을 관리하고 소환사들을 총괄하는 직위.
다른 전통적인 관리들에게 꿇리지 않도록, 막대한 부와 특권이 주어졌다.
그 특권들 중 몇몇은 황제의 권위를 살짝 넘보는 수준이다.
[어서 진귀한 보물을 모아라! 내 취임을 기념하여 척안의 로완께 성대한 제를 올리겠다!]
유에는 즉시 기념 행사부터 준비했다.
롱 가문도 재산을 팍팍 쏟아부어서 장녀를 지원했다.
나를 등에 업고 온 제국을 호령하는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메이린은 신전 청소에 시달리게 됐다.
청소라곤 해도 밤낮조차 없는 중노동.
양 제국의 신전은 크고 번쩍거려서 조금만 방치해도 금방 더러워진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할 건 없는데... 나중에는 좀 쉬엄쉬엄 하라고 해야겠군.'
내가 퇴근하는 그 시간까지, 메이린은 기도는 커녕 불평불만의 푸념 한 마디 없었다.
추종자로서 내 시야를 공유받던 양황은 꽤 오랫동안 할 말을 잃었다.
[... 조금 더 손을 써볼까요?]
'굳이 그럴 것 없다.'
새롭게 상궁소환사로 임명받은 유에는 메이린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메이린은 과거 나의 총애를 받은 소환사.
상궁소환사니 뭐니 해봤자, 결국 인간이 붙여준 칭호다.
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너희는 로완 님의 눈을 더럽힐 셈이냐? 저 지저분한 계집이 신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라.]
[...]
사소한 것 하나하나 내 이름을 빌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벌써 글러먹었다는 느낌이다.
그새 영화를 다 본 아멜리아는 제법 마음에 든다는 듯,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으음, 이 세계의 여흥도 제법 괜찮군."
"슬슬 퇴근 시간이네. 준비할까."
아비가일과 합류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양 제국의 상황이 조금 더 전개되어 있었다.
결국 홀대를 보다못한 메이린의 친구와 가족들이 그녀를 설득하고 있던 것이다.
[아직 로완께 기도조차 올리지 않았다고?]
[얼른 해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잖아!]
메이린은 그들의 권유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 허락받은 특권은 이런 때에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고, 이 답답아. 그럼 언제 쓰라는 건데?]
[좀 있으면 유에가 네 목을 치려고 할 걸?]
[제가 가진 것은 모두 로완께 받은 것이니, 언제 다시 거둬가셔도 불평할 권리따윈 없습니다.]
[...]
친구와 가족들의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양황이 불만이라는 듯 말했다.
[메이린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소환사들의 수장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에가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조금 있으면 알 수 있겠지.'
메이린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새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꿨다.
[그럼 네가 로완께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이 아니니?]
[... 외신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인간이 어디있겠나요?]
[그래도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으니 어서 용서를 빌어봐.]
[그런 건 아녜요.]
메이린은 가슴을 쭉 펴곤 당당하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로완께 떳떳하지 못한 짓은 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사실이에요.]
[메이린...]
'말해보아라.'
내가 양황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것이 정녕 비굴함인가?'
[제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유에가 준비중인 기념 행사는 내일 아침에 시작된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차분히 심판의 날을 기다렸다.
이윽고 행사 당일을 맞이한 양 제국의 수도는 즐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전갈의 외신 자낙의 침공 이후, 처음으로 시행되는 대형 행사다.
간신히 상처에서 회복된 시민들에게 이것은 무척 각별할 것이다.
나는 제가 시작되자마자 저쪽 세계로 넘어갔다.
파아앗!
"아앗, 로, 로완이시여!"
"찬미하라! 이 경사스런 날에 로완께서 직접 강림하셨다!"
상궁소환사 유에는 측근들과 함께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오리란 기대까진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긴. 녀석들은 지금껏 제대로 된 기도 한 번 올리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주저없이 계획을 진행시켰다.
"메이린은 어디있지?"
"엇, 로... 로완이시여. 어찌하여 그런 지저분한 계집을 찾으시는 것인지..."
유에의 안색이 순식간에 불길함으로 물들었다.
지금껏 높게 들어올렸으니...
이제 가차없이 떨어뜨릴 시간이다.
낙하의 스릴을 기대하며,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구나. 내가 임명한 상궁소환사는 네가 아니다."
"예... 예엣?!"
소환사들은 경악한 나머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내 염동력에 의하여 유에의 몸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 올렸다 떨어뜨리기(2) >
"메이린은 어서 나오거라."
"여기 있습니다 로완이시여!"
내 부름에 헐레벌떡 뛰어나온 메이린이 거의 넘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믿기지 않는 행운에 양쪽 뺨은 살짝 상기되어 있다.
나는 대본 그대로 양황에게 말했다.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 나는 메이린을 상궁소환사로 선택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로완 님의 말씀을 잘못 옮긴 것 같습니다!"
"됐다. 사소한 실수이니 굳이 문제삼지 않겠다."
즉석에서 면죄부를 발행하곤, 메이린과 유에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유에는 여전히 염동력에 의하여 강제로 부유중이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에 쪽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로완이시여, 저야말로 당신께 가장 가까운 소환사가 되어야 합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롱 가문의 장녀이자, 이번에 소환사 학당을 수석으로 졸업한..."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내가 일갈하자 녀석이 겁에 질려서 조용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내가 너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낙과 맞서싸웠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내가 손짓 한 번으로 바다를 가르고, 너희들을 먹여살리며 비바람을 막아줬을 때 너는 뭘 하고 있었느냐?"
"저는 가문과 함께 신앙을 지키며 나름대로의 투쟁을..."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으윽..."
유에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으나, 내 질문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선택지따윈 없다.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걸어들어가는 수밖에.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너는 무슨 재주와 자격으로 나를 도우려 하느냐? 나에게 무엇을 바칠 수 있느냐?"
유에는 거의 필사적으로 대꾸했다.
앞서 두 번이나 부정당했으면서 애써 당당히 대꾸한다.
지금은 그릇된 자부심을 발휘할 때가 아니란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양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롱 가문이 저와 함께합니다!"
"나는 그런 것으로 미소지을 수 없다. 너는 나의 입김 한 번이면 날아갈 것을 바치겠다는 것이냐?"
"..."
결국 가문의 위세에 기댈뿐인 얼치기 소환사였다.
양황도 그녀를 추천했던 것이 부끄러워져서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
나는 다음으로 메이린을 불러냈다.
앞서 오답을 구경했으니, 정답을 맞추는 것은 굉장히 쉬울 것이다.
내 눈을 마주한 메이린은 몸을 더욱 낮췄다.
최대한 엄숙하려고 애쓰는 목소리가 황궁 전체를 울려댄다.
"너는 누구냐."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척안의 로완께 과분한 은혜를 받은 몸종입니다."
외신에게 가문따윌 자랑해봤자 우스울 뿐이다.
어느 개미집에서 나온 개미인지 따윈 중요하지 않다.
인종도, 가문도, 학력도. 외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다음 질문을 던지자 넙죽 엎드린 메이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저는 언제나 로완 님의 그림자 아래서 비호받고 있었습니다. 로완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마다 저도 그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
장내는 얼음같은 침묵에 잠겼다.
이것은 나를 납득시키기 위한 문답이 아니다.
소환사들의 우두머리로서, 메이린의 자격을 모두에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조금 다르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바칠 수 있느냐?"
"저는..."
메이린은 잠시 고민하다 몸을 세우며 말했다.
"저는 오직 정직과 충성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외신의 유혹도 그것을 흔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게도 의미가 있다."
단순한 문답인데도 흐뭇한 웃음이 퍼져나간다.
메이린에겐 다른 무엇보다도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짐작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환사의 가장 중요한 재능이다.
"나는 너를 알고있다."
부르르!
짧은 몇 마디에 메이린의 몸이 격정으로 떨렸다.
유에의 머리에 씌워져있던 황금관이 내 손에 쥐여졌다.
상궁소환사로 임명받은 직후부터 줄곧, 잘도 쓰고 다녔다.
"나의 앞으로 나오거라 메이린. 내가 네게 힘과 권위를 수여하겠다."
"아, 안 돼에엣!"
유에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회장을 울려댔다.
여기서 감히 딴지를 걸 수 있을 줄이야.
저 오만함은 확실히 감탄이 나올 정도다.
'자존심 하나는 외신급이군.'
어쩌면 녀석도 나름대로 인재일 수도 있겠다.
그래봤자 굳이 써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스르륵.
상궁소환사만 입을 수 있는 커다란 웃옷이 저절로 벗겨지며, 메이린을 향해서 내려온다.
"안 돼! 내 옷이란 말야! 아아악!"
녀석의 꼴을 보고있자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원래 이대로 유에를 죽이거나 할 생각까진 없었다.
앞서 괘씸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긴 했지만...
이것은 결국 실험이다.
사람은 떨어지기 전에는 스스로의 본모습조차 모르는 법.
유에는 이미 높은 곳에 올라가봤으니, 추락한 뒤의 모습도 살펴보는 것이 공평하다.
녀석은 이대로 메이린의 몸종이 될 예정이었다.
"로완이시여! 제가 당신과 조금 늦게 만났을 뿐, 성심성의껏 모실 자신이 있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유에가 간곡히 외쳤으나 이건 그냥 죽기 싫어서 하는 발악에 불과했다.
나는 살짝 코웃음을 치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이미 기회를 낭비했다."
"그, 그런..."
유에가 상궁소환사로 임명되고, 이 행사가 열릴 때까지 나흘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고작 나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본성이 드러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양황이 병사와 관리들에게 외쳤다.
"너희는 즉시 롱 가문의 창고를 샅샅이 뒤져보아라!"
"예엣!"
우르르!
병사들이 잔뜩 몰려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회장에 갖가지 재물들이 높게 쌓였다.
그것을 본 관리들과 소환사들이 눈을 부릅뜬다.
"저건 로완님께 바치겠다면서 거둬갔던 건데... 왜 롱 가문의 창고에 있지?"
"가주!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 아닙니다! 잠시 저희가문 창고에 보관했을 뿐..."
"거짓말! 행사용 물자는 황궁의 창고에 엄중히 보관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롱 가문의 추락을 감지한 관리들과 소환사들이 앞다투어 고발을 시작했다.
유에는 내 이름을 앞세워 재물을 빼앗았다.
완전히 굳어버린 녀석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계획한 시험이었는데, 몰랐을 리가 없다.
줄곧 지켜봤다.
유에는 급기야 내게 악을 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쁩니까! 제가 로완님의 대변자였는데... 제가 곧 로완님이며 로완님이 곧..."
"그러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형을 집행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들어준 것 같다.
공중에 높게 떠올랐던 유에의 몸은 염동력에서 해방되어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어어엇?! 꺄아아악!"
콰득!
높이가 상당히 애매했는데다, 유에가 소환사인 것도 있어서 단번에 죽진 않았다.
대충 큰 건물 2~3층 높이 정도 됐을까?
바닥과 격돌한 유에는 온몸을 버르적거리며 힘겹게 꿈틀거렸다.
뼈가 몇 군데 부러진 것 같은데, 높이에 비하면 경상이다.
나는 그런 녀석을 다시 공중으로 띄워올렸다.
'잔인해도 어쩔 수 없어.'
일을 이만큼 저질러줬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못할 짓이다.
본보기가 되지 못할 거였다면 굳이 공개적으로 처형하지도 않았다.
"끄허억... 갸아아악!"
콰직!
"히이익..."
"너희는 나의 것을 탐하고 훔쳤으며 이름까지 더럽혔다."
낙하는 점점 더 높은 곳에서 진행됐다.
사람들은 기겁하면서도 감히 눈을 떼지 못했다.
콰드득!
결국 유에는 원래의 형체도 짐작할 수 없는, 기분나쁜 색채의 덩어리가 됐다.
나는 무릎꿇은 메이린에게 손수 황금관을 씌워줬다.
"앞으로의 봉사를 기대하겠다."
"로완께서 주신 것, 모두 로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으윽..."
롱 가문의 사람들이 회장을 탈출하려 했으나 병사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양황은 녀석들을 측근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주 깔끔하게 숙청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때마침 근사한 명분도 생겼으니까.
"죄인들을 모두 감옥으로 끌고가라. 로완이시여! 여기 있는 제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 주인에게 돌려줘라. 너희들의 것이 곧 나의 것이다. 내가 너희들의 재물을 탐낼 일은 없다."
"오오오..."
"축하한다 메이린. 그리고... 앞으로는 억울한 일이 생기면 기도 좀 해라."
메이린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그녀는 두려웠을 것이다.
이번처럼 단순한 착오였을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직접 기도를 올렸다가 내게 반박당하거나 거절당하면?
그 때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지 않게 된다.
내게서 완전히 버려지는 것이다.
'메이린에게만 미안한 짓을 해버렸군. 이래서 추종자들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진짜 적임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적당히 행사를 즐기다가 너무 늦지 않게 귀환했다.
파아앗!
제법 편안한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기상.
빠르게 식사를 챙기곤 오랜만에 완전무장으로 집을 나섰다.
차량의 뒷좌석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아멜리아가 나를 보곤 살짝 흥분했다.
"옷, 나랑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복장이구나. 어디 사냥이라도 가는 건가?"
"아니. 오늘은 장비 정기 점검일이다. 근데 아비가일, 네 장비는?"
옆자리의 아비가일은 여전히 캐주얼한 차림새다.
하긴. 원래 일할 때에도 제대로 장비를 갖추진 않는 녀석이었다.
"내 장비는 트렁크에 있어! 방어구는 답답해서 잘 안 입지만..."
"그래도 입어야지."
"내 피부가 더 단단해."
하긴. 나처럼 약한 놈이나 이것저것 들고다녀야 하는 법이다.
아비가일이라면 지난번처럼 신전 붕괴에 휩쓸려도 멀쩡했을 것이다.
우리는 곧장 백룡 길드가 아니라 시현공방으로 향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비가일도 장비 점검은 시현공방에서 받는다고 한다.
끼익.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이나 씨."
모두와 함께 차에서 내리자 제대로 된 경비병력이 보였다.
적어도 동네 양아치들 정도는 손쉽게 격퇴해줄 것이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제수씨. 기다리고 계셨나요?"
"아뇨, 요즘 한창 정비 시즌이라..."
제수씨가 나와 아비가일을 유심히 살펴보며 웃었다.
원래 시현공방은 자잘한 정비의뢰따윈 맡지 않는다.
내 독 단검처럼, 본인이 직접 제작하거나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장비만 정비의뢰를 받아주는데...
그래도 일거리가 잔뜩 쌓여있다.
공방 구석에 높게 쌓여있는 헌터 장비들.
그것을 구경하던 아멜리아가 내 손에 이끌려서 떨어져나왔다.
"사고 치지 마라."
"그 애는 누구죠?"
"내 친척! 아멜리아 어사일럼이에요!"
"아, 안녕?"
아비가일이 신이 나서 설명하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붙임성이 없는 모습이지만 오히려 저게 낫다.
괜히 친하게 굴었다간 금방 들킨다.
"시현이는 어딨죠?"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두 분의 결혼선물을 준비했다네요."
"짓궂긴."
"결혼? 누구랑 누가요?"
마구 날뛰는 아비가일을 겨우 진정시키며 작업실로 돌입하자 시현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비가일은 묵직한 대검을 작업대 위에 턱 올려놓았다.
선물이고 자시고 일단 정비가 먼저겠지.
나도 장비를 모두 풀어서 정리해뒀다.
"우리꺼 먼저 해주는 거야?"
"그래. 한국 유일의 S급이랑 A급 듀오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역시 친구 잘 둬서 좋다.
시현은 먼저 내 방탄복을 살펴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너 이거 입고 무슨 화물차에 치었냐? 특제 플레이트가 찌그러졌네?"
"아, 그거... 좀 거물을 상대해서."
아마 우주의 사슴 곤멜의 가디언을 상대했을 때 찌그러졌던 것이리라.
직격도 아니고 살짝 스쳤는데 저 꼴이다.
시현은 의아해하면서도 플레이트를 꺼내 폐기물 통에 버렸다.
"요즘 그 정도 거물 몬스터가 있었나? 정비 좀 제 때 받아. 아, 맞다. 지난번에 가져간 시혀니움은 어쨌어?"
"아주 잘 써먹고 있지. 덕분에 지구를 구했어."
만약 로와니움 가디언 골렘이 없었다면 우주의 사슴 곤멜이 지구를 끝장냈을 것이다.
과장 한 마디 없는 칭찬에 시현이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도 참. 응?"
그런데, 내 독 단검을 손에 든 그가 돌연 아비가일의 대검을 슬쩍 돌아봤다.
녀석의 고개가 묘한 느낌으로 살짝 기울어진다.
"뭔가 이상하네."
"왜 그래? 무슨 문제있어?"
"아니, 장비의 상태는 완벽한데 말야.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장비에서 비슷한 느낌이 난다고 해야하나?"
세상에.
시현이는 장인 특유의 눈썰미와 직감으로 두 자루가 자매검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그야말로 신기에 도달한 기술이다.
"아비가일의 대검은 내가 만든 게 아닌데 말이지."
"그래? 어쩌다보니 닮은 것 같네."
"그런가? 그렇겠지?"
나는 순식간에 눈이 죽어가고 있는 아비가일의 손을 붙잡곤 장소를 옮겼다.
시현이의 눈썰미는 확실히 놀라웠지만, 조금도 칭찬해줄 수 없겠다.
다시 미소를 조금 회복한 아비가일이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왜 그래 로완아?"
"너 시현이에게 손대면 용서 안 한다."
"엇... 용서... 안 해줘?"
"어, 절대 안 돼."
"... 알았어."
아비가일은 시무룩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안심한 나는 다시 시현이에게 돌아갔다.
< 종말의 여우 >
친구를 죽이면 안 된다.
아비가일은 그 당연한 사실을 간신히 머릿속에 쑤셔박았다.
다행히 시현이는 이미 대검과 단검에 흥미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대신 녀석은 새로운 타입의 방탄 플레이트를 보여줬다.
"자, 미리 주는 결혼선물."
"결혼? 진짜로?? 고마워!"
"농담이잖아."
작게 핀잔을 주면서도 방탄 플레이트를 받아봤다.
상당히 묵직하면서도 익숙한 느낌.
어두운 금속이 위압적인 반사광을 흩뿌린다.
"이건..."
"신소재로 만들었어. 지난번의 그 시혀니움이지."
"저 이름... 아직 포기 못시켰어요?"
내가 제수씨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양산에 성공한 것 같아서 잘 됐다.
"좀 무거운데."
"그래도 A급 정도면 충분히 쓸 수 있겠지?"
"응. 크게 불편하진 않아."
중량이 좀 있어도 로와니움의 초월적인 내구도를 감안하면 충분히 감수할만하다.
아비가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볍게 주먹을 쥐더니, 방탄 플레이트를 툭 때려봤다.
쩌어엉!
직후, 대형망치로 때린 것 같은 소음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방탄 플레이트는 생채기 하나없이 멀쩡하다.
시현은 플레이트가 주먹질을 버텨내는 것을 보곤 눈에 띄게 안도했다.
"휴우."
"오오, 굉장해! 쉽게는 안 부러지네?"
"당연하지."
혹시나 했으면서 태연히 플레이트를 회수하는 시현.
그러자 아비가일이 녀석의 손이 닿을까봐 움찔거린다.
아까 시현에게 손대지 말라던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도 섣불리 손대는 것보단 저게 낫다.
시현이는 살짝 의아해하면서도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원래 이상하던 녀석이 이상한 짓을 해봤자 정상이다.
"아비가일 너는 방탄복 잘 안 입던데... 이것도 안 쓸 거야?"
"쓸래! 그 정도면 도움이 될지도! 근데 이런 디자인은 답답해서 싫어."
"그럼?"
"좀 편하게 입을 수 있으면 좋겠어. 웨딩 드레스라거나!"
이건 확실히 정신이 나갔군.
어사일럼 가문과 그림자 재단의 교육방침을 다시 한 번 원망하게 된다.
시현이는 당연히 난처함을 표했다.
"수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드레스는 좀..."
"으음... 그럼 다른 건 뭐 없을까? 로완아, 좀 도와줘!"
아비가일의 요청을 받게 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비가일 너 대학교 때 과잠 자주 입고 다녔잖아."
"응! 너무 그것만 입고 다녀서 로완이에게 혼났지."
"그럼 재킷 형태는 어때? 중간에 지퍼를 달아서..."
사실 이래봤자 조끼랑 큰 차이는 없겠지만 아비가일에겐 그게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재킷으로 할래!"
"재킷이라... 관리하기 귀찮겠는데."
시현이는 투덜거리면서도 즉시 디자인을 시작했다.
"역시 로완이는 굉장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니까?"
"사람은 원래 본인에 대해서 잘 몰라."
"과잠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주면 되겠지. 완성해서 보낼테니까 먼저 가 있어.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어?"
"정비는 다 끝난 거지? 고마워. 밥이라도 먹으러 갈래?"
"가고싶은데, 보다시피 일감이 너무 많아서."
방탄 플레이트를 교체한 다음, 인사를 나누곤 공방을 나섰다.
"예상보다 빨리 끝났네. 오늘은 이대로 해산할까..."
"안 돼! 점심 먹으러 가야지!"
"어디로 모실까요?"
"이나 씨 마음대로 해주세요. 저는 정말로 가리는 거 없으니까."
"그럼 애완동물 동반이 가능한 곳으로 가겠습니다."
성이나는 아멜리아가 뒷좌석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결국 점심 식사는 무난하게 고기로 결정됐다.
'새 방탄복... 확실히 묵직하군. 못 입고다닐 정도는 아닌데.'
마음 같아선 어디 벗어놓고 싶지만 도둑이라도 맞을까봐 그렇게는 못하겠다.
로와니움의 가치는 내가 가장 잘 알고있다.
아마 제작자인 시현이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점심부터 바베큐는 좀 어떤가 싶지만..."
"완벽해!"
"좋아요. 헌터들은 원래 많이 먹으니까요."
애완동물 동반이 가능한 식당이라는 게 농담이 아니었는지, 가게는 굉장히 넓었다.
거의 마당에 바베큐 식당을 차려놓은 것 같다.
성이나가 빠르게 세팅을 해주는 사이. 나는 아비가일에게 앞치마를 입혀줬다.
나는 그래도 아비가일에게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하는데... 매번 놀라게 된다.
"앞치마 정도는 혼자서 좀 해라."
"지난번에 해봤는데 찢어졌어."
"..."
외신이나 몬스터 사냥 외의 분야에서, 사람이 어디까지 무능해질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아비가일이다.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도 그녀를 챙겨주곤 아멜리아에게 시선을 옮기자...
녀석은 그새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다.
잔디와 돌이 잘 깔려있는 마당은 척 봐도 제법 근사했다.
그런데, 그런 아멜리아의 맞은편에서 웬 여우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왔다.
흔한 갈색이 아니라, 좀처럼 보기 힘든 흰색 여우.
아비가일이 녀석을 곧바로 알아봤다.
"앗, 동영상에 나오는 그 여우다! 방송하는 여우!"
"아... 그 헌터펫?"
"응! 이름이... 서울여우였나?"
잽싸게 검색해보자 가장 먼저 어처구니 없는 수치의 구독자 숫자가 보였다.
이 녀석은 방송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머지않아 은색 버튼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말하는 여우라는 게 이 정도로 인기있었나..."
"아니죠! 말하고 싸우는데 방송까지 하는 여우라구요!"
여우 녀석이 극렬히 반발하자 아멜리아가 녀석을 살짝 째려봤다.
사이즈는 평균보다 조금 작을까?
사실 평균의 여우 자체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비가일은 녀석에게 함부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조심해. 이상한 진드기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이 분 정말 너무하시네! 만지지 마세요! 저는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B급 헌터펫이에요! 아주 비싼 몸이라구요!"
아비가일은 녀석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S급인데?"
"선배님! 이 후배가 인사 올리겠습니다!"
순백의 여우는 그대로 풀밭에 발라당 드러누워서 배를 드러냈다.
아비가일이 만족하며 녀석을 만지자 이내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녀를 보곤 살짝 굳어버렸다.
"엇, 유림아?"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아비가일 선배님도 계시네요."
"아아. 유림이다! 안녕!"
내가 뭘 착각했나 싶어서 서유림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여우가 벌떡 일어나서 귀를 쫑긋거리며 물었다.
"주인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주인님? 얘가 유림이 네 헌터펫이야?"
"네에... 얼마전에 던전에서 주웠어요. 저보고 헌터펫이 되겠다고 하더니, 자기가 알아서 방송까지 시작해서..."
유림은 무척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아멜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우를 유심히 살피던 아멜리아가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온다.
"그 애는 누군가요? 아비가일 선배님의 친척?"
"맞아. 아멜리아 어사일럼이야. 미국에서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한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왔지."
평소의 억하심정을 담아서 은근히 설득력있게 지껄이자 아멜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무슨 뱀이 풀 뜯어먹는 소리냐? 아얏! 마, 맞다. 늦게나마 반성하고 있다. 한국에선 가급적 조용히 살겠어."
아비가일이 녀석의 뒷목을 꽉 쥐자 그제야 말을 바꾼다.
다행히 서유림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사일럼 가문이란 이름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비가일 선배님의 친척이라면 뭐... 있을 수 있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요즘 로완이가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고 있어! 어사일럼 가문 전용 행동 교정 전문가라는 느낌이네!"
아비가일이 또다시 멋대로 지껄이자 유림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열애설 같은 게 나왔군요. 이제야 알겠어요."
"아니, 그건 진짠ㄷ... 우웁!"
"기왕 만난 김에 합석할래?"
"저야 좋죠! 근데 조심하세요. 얘 털 엄청 날려요."
"아이 참, 아침에 털 정리 하고 나왔잖아요 주인님."
우리는 유림과 합석해서 회포를 좀 풀었다.
요새 좀 잠잠하더니, 설마 이런 헌터펫을 얻었을 줄이야.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얘 이름은 뭔데?"
"히르쉬요. 희안하죠?"
"히르쉬? 여우에겐 거창한 이름이군. 흰둥이 정도로 해라."
아멜리아가 코웃음을 쳤으나 유림은 그냥 버릇없는 어린애의 투정 정도로 알아들었다.
학창시절의 아비가일이 어땠는가를 떠올려보면 이것도 감지덕지다.
그런데, 즐겁게 식사를 하던 내 눈에 자꾸만 이상한 오라가 어른거렸다.
반사적으로 오른쪽 눈을 감았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음? 이건...'
자꾸만 눈을 어지럽히는 오라는 대부분 아멜리아에게서 나오고 있었으나...
서울여우, 히르쉬에게서도 조금씩 오라가 나오고 있다.
다만 이쪽은 외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다.
'뭐야, 하다하다 이런 녀석도 외신이랑 엮여있다고? 설마...'
나는 즉시 숲의 요새에서 쉬고있던 릴리아를 불러봤다.
그 사이, 유림이 타이밍 좋게 자리를 비웠다.
"저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앗, 급한 전화까지..."
"천천히 다녀와."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눈치빠른 성이나가 유림의 감시를 겸해서 자리를 비워줬다.
자리에 홀로 남겨진 여우는 세 쌍의 시선을 받아내며 살짝 굳어버렸다.
가장 먼저 입술을 뗀 것은 아멜리아였다.
"임로완. 부탁인데 네가 이 정도로 둔감하진 않다고 해다오."
"걱정마. 나도 알고있어."
"엣, 그... 뭘요?"
여우가 무어라 하려던 찰나, 아멜리아의 시선이 녀석을 꿰뚫었다.
그러자 녀석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은근슬쩍 녹취라도 시도했던 것 같은데,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살짝 당황해서 물었다.
"이건 또 뭐야?"
"석화의 응시. 뱀신족 공통 권능이다. 격이 낮은 상대는 이렇게 단번에 굳혀버릴 수 있지. 격이 높은 상대도 굼뜨게 만드는 것 정돈 가능하고."
"그런 게 있었으면 나랑 싸울때도 쓰지 그랬냐?"
작게 핀잔을 주자 아멜리아가 내쪽으로 한쪽 눈을 부라렸다.
"그 때도 썼다. 안 통했을 뿐이지."
"그래? 실수한 거 아니야?"
"뭐, 그럴지도..."
석화의 응시도 안 통해, 독액도 주입하지 못해...
아멜리아의 입장에선 정말 최악의 상성이었구나.
불쌍하게 굳어버린 여우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 사이 녀석을 자세히 살펴본 아멜리아가 확언했다.
"이 녀석, 본체다."
"뭣?"
"외신들은 보통 지금의 나처럼 아바타... 즉, 화신체를 사용한다. 근데 이 여우는 이게 본체다. 여기서 죽으면 영영 죽어버려."
"유림이는 모르고 있는 거지?"
아비가일이 주저없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외신을 없애고 사람들의 일상을 지키는데엔 한없이 진심인 여자다.
그녀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길러졌다.
외신은 무조건 죽여서 없앤다.
재단의 방침에 오늘만큼 동의한 적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작고 약한 녀석도 외신활동을 할 줄이야.
하긴, 다른 외신들이 나를 보면 비슷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푸핫!"
아멜리아의 허락을 얻어서 겨우 반론을 할 수 있게 된 여우가 간절히 내뱉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좋아서 이곳 차원으로 넘어온 게 아니라구요!"
"그럼? 널 소환한 소환사들은 어디에 있지?"
"그런 건 없어요! 제 고향 차원이 게이트 현상에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넘어왔어요! 아니면 본체를 가져올 리가 없잖아요!"
녀석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 열심히 재롱부리는 것은 외신활동이라기엔 좀 뭣하다.
나는 확인차 녀석에게 물었다.
"네가 종말의 여우냐?"
"어, 어떻게 그 이름을..."
역시나.
최근 외신활동이 뜸해져서 추종자들이 이주를 하고있다는 바로 그 외신.
나는 앞서 릴리아를 시켜 녀석들의 정체를 확인해냈다.
늑대 교단으로 위장한 이들은 릴리아의 짐작대로 여우 교단이 맞았다.
아비가일은 주저없이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힘만 주면 여우의 얇은 목따윈 그대로 부러져버릴 것이다.
그녀는 그저 내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로완아, 어떻게 할까?"
"유림이가 위험해지도록 놔둘 순 없어."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주인님께 폐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주인님은 던전에서 사냥당할뻔 했던 저를 구해주신 은인이라구요!"
"종말의 여우따위를 어떻게 믿어?"
"으윽..."
나는 말을 하다말고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
이대로 처리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서유림이 돌아와버렸다.
"늦었네요. 다들 뭐하고 있어요? 고기 타잖아요!"
"아, 미안. 이 녀석이 너무 폭신폭신해서."
"그렇죠? 정말이지... 그것 덕분에 이것저것 모두 참고 있다니까요."
"그렇네! 좋은 촉감이야. 목도리로 쓰고 싶을 정도네."
여전히 여우의 목을 잡고있던 아비가일이 말했다.
여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애교 비슷한 것을 부린다.
"낑낑..."
녀석을 처리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서유림에게 무어라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에게 외신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건 최악의 방법이다.
결국 나는 태연히 식사를 계속하며 릴리아를 불렀다.
'릴리아. 잘 조사해줬다.'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로완이시여.]
'그 여우 교단 녀석들, 숲의 요새에 손님으로 초대하거라. 정중하게 말이지.'
[정중하게... 로완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불필요한 폭력을 쓸 필요는 없다.'
방침을 확실히 정해주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에 집중했다.
유림의 시선이 끊임없이 나와 아비가일 사이를 훑었다.
< 외눈의 수호자 >
긴장감 가득한 식사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바베큐답게 조리시간이 제법 걸린다.
평소였다면 점심 식사를 이런 곳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싶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좋다.
그새 릴리아가 일을 제대로 해준 듯, 고기를 탐하던 여우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온몸의 털이 쭈삣 선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살짝 귀엽다.
"오, 이게 실제로 되는 거였구나."
"잠깐. 설마... 네가 척안의 로완이었어?"
소인족 세계 추종자들의 연락을 받은 듯한 여우가 소리죽여 말했다.
지금쯤 녀석의 추종자들은 숲의 요새에 붙잡혀 있을 것이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가만히 녀석을 지켜봤다.
사실 여기서 굳이 내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었다.
이 녀석은 내 정체에 대해서 짐작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림이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질 수 있다면, 내 정체 정도는 기꺼이 밝히기로 했다.
"내 신도들을 어쩔 셈이야!"
"너는 유림이를 어쩔 셈이지?"
"어쩔 생각도 없어! 유림 씨는 내 은인이라니까? 그리고... 어차피 주인이 없는 헌터펫은 무조건 살처분 대상이잖아?"
기대도 못했던 말에 살짝 놀랐다.
이 녀석, 헌터펫 제도에 대해서 잘 알고있군.
헌터펫은 개체마다 특이성이 굉장히 강해서, 아직까진 사육법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등록 자체도 매우 까다롭고, 만약 주인이 죽거나 바뀌면 그냥 살처분 당한다.
다음 주인에게도 얌전히 복종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 녀석은 외신활동중이라서, 여차하면 소인족 세계로 달아날 수 있었으나...
정작 그쪽의 추종자들이 내게 사로잡혀버렸다.
이젠 탈출구가 없는 셈이다.
여우는 내게 넙죽 엎드리며 간절히 빌었다.
"내 추종자들을 해치지 마! 걔들은 아무 잘못없어!"
"둘이 무슨 이야기해요?"
유림이가 슬쩍 고개를 들이밀자, 나는 내친 김에 확실히 물었다.
"유림아. 너 이 녀석 계속 키울 거야?"
"네에? 그, 그야 제가 아니면 살처분당하니까요."
"그건 아비가일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비가일이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살처분하는 대신, 다른 곳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줄게!"
"엣..."
백룡 길드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유림을 계속해서 설득했다.
"이 녀석, 지능이 애매하게 높아. 나중에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읍, 으붑..."
여우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내가 염동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녀석은 외신 그 자체.
재단의 방침에 따르면 발견 즉시 처리하는 것이 맞다.
아무리 조심해도 위험한 상대다.
하지만... 나는 서유림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다.
내 몇 안 되는 지인인데 막무가내로 처리할 수는 없다.
유림은 제법 길게 고민하다가 결단했다.
"저...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아직은 좀 더 해보고싶어요."
"그래?"
"네. 이것도 기연이라면 기연이겠죠. 저 녀석, 자기 밥값 정도는 알아서 벌어오니까요. 던전 공략에도 도움이 많이 돼요."
"... 알았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말리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 여우는 무척 이례적으로 통제가 쉬운 상태이기도 하다.
다시 여우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신신당부했다.
"잘 들어라."
"넵!"
여우의 흰색 귀가 살짝 떨렸다.
"먼저 외신 활동에 대한 모든 사항은 극비다.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나오면, 너랑 네 추종자들, 유림이까지 싹 다 죽는다."
"히이익... 며, 명심할게요! 절대 비밀!"
아무리 그래도 유림이까지 해칠 생각은 없지만 경고의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녀석의 목에 걸려있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성이나에게 넘겨주자 그녀가 즉시 감시용 앱을 설치했다.
헌터펫주제에 개인용 스마트폰도 있을 줄이야.
웃긴 녀석이다.
"던전 공략 같은 일이 생기면 미리 보고해라. 미보고 상태로 5분 이상 연락이 끊기면 즉시 처분이다. 데이터 무제한 가입하는 게 좋을 거다."
"걱정마세요!"
"이나 씨. 이 녀석에게 레이븐 하나 붙여줘요. 눈치가 좋은 분으로."
"딱 적당한 인원이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24시간 감시는 필수.
상대가 외신인데 이 정도도 안 하는 건 그냥 무책임이다.
동영상 업로드도 미리 검수할 생각이다.
"유림이에게 뭘 하든, 내가 2배로 갚아줄 거야. 알겠어?"
"네, 선배님! 그런데 저희 애들 걱정할 필요 없는 거죠?"
"계속 걱정하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 헛짓거리 안 하지."
"..."
결국 여우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새 배불리 먹은 아멜리아가 박하사탕을 하나 먹어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보였다.
"음, 나쁘지 않군."
"얘는 벌써 한국인 다 됐네."
"선배, 이제 가시는 건가요?"
"응. 집에 가서 잘래."
"뭣? 로완아.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피곤해."
내가 딱 잘라서 거절하자 유림이 묘하게 안도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여우를 노려봤다.
녀석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선배님들!"
"유림이, 나중에 또 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대로 성이나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녀가 돌연 연락을 받더니 차를 그대로 U턴시켰다.
나와 아비가일의 사이에 끼어있던 아멜리아가 내쪽으로 풀썩 쓰러진다.
굳이 버티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아, 죄송합니다. 급한 연락이 와서..."
"뭔가요?"
"본부에서 중요 화물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운송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응! 바로 가자!"
한국 지부의 유일한 나이트에게 직접 운송을 도와달라고 하다니.
아멜리아가 왔을 때도 이런 요청은 없었다.
어지간히도 중요한 화물인 것 같다.
곧장 공항으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의 나이트들이 비행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곤 화물을 인계받았다.
제법 묵직하고 부피감이 있는 철제 상자다.
"인수받았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아아, 이 분이 바로... 혹시 악수 한 번만 가능할까요? 아니면 서명이라도..."
이너서클의 멤버들 중 몇몇이 아멜리아에게 다가갔으나 녀석이 내 등 뒤로 숨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그조차 무척 즐겁고 황송해했다.
우리는 그대로 현금수송차 비슷한 것으로 갈아타곤 재단 지부로 향했다.
이 화물이 도대체 뭔지 정말 궁금해졌으나...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질문을 참아야 할 때를 안다.
다만 아비가일은 비교적 익숙한 눈치다.
머지않아 지부에 도착하자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는 드물게도 살짝 흥분한 모습이다.
"오오, 드디어 왔군요. 이번 년도의 최신화 자료가... 안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제가 하죠."
염동력을 이용해서 화물을 옮기는데, 토시아키의 눈이 아멜리아에게 꽂혔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본 듯 곤혹스런 얼굴이 됐다.
하지만 한편으론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설마... 스승님의 작품인가요?"
"음, 너무 신경쓰지 말거라. 과한 호기심은 몸을 망치는 법이니."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관심이 싫지 않은 듯 피식 웃었다.
'스승님?'
현재 아멜리아가 사용중인 아바타는 분명 대소환사 에이코그의 작품이라고 했다.
설마 프리스트들을 키우는 교육담당 같은 역할인 건가?
더 이상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묵묵히 자료를 옮겼다.
이윽고 프리스트가 직접 상자를 개봉하자 갖가지 서적들이 나왔다.
새로 찍어낸 듯한 것도 있고, 낡은 것도 있는데...
크기와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심지어 별 모양으로 인쇄된 책도 있다.
'저딴 건 누가 만든 거지?'
토시아키는 가장 먼저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보더니 씨익 웃었다.
프리스트 휘하의 애콜라이트들이 긴장한 얼굴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까요?"
"괜찮으시면, 구경하시죠. 두 분께선 다른 누구보다도 축하받을 권리가 있으시니."
"예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감사히 구경하기로 했다.
애콜라이트들은 토시아키의 지휘하에 서고를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지금부터 제가 호명하는 자료를 가져오십시오. 전갈의 외신 관련 자료, 투명 외신 하그멤논 관련 자료..."
목록을 살펴보자 이어질 광경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토시아키는 커다란 양철통에 자료를 모두 집어넣더니... 성냥을 슥 그어서 들어올렸다.
"이하의 자료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으므로, 본부의 허가하에 모두 폐기처분하게 됐습니다. 외신들을 상대로 얻어낸 값진 승리입니다!"
짝짝짝짝!
요란스런 박수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해당 외신들은 완전 소멸이 확인된데다, 친척 따위도 없는 개체들이다.
절반 이상은 내가 장사지내준 것 같은데, 그냥 입 꾹 다물고 함께 박수나 쳤다.
애콜라이트들도 살짝 감격한 눈치다.
외신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굉장히 진귀한 경험이다.
화르륵!
양철통 안의 자료들이 모두 타버리자, 토시아키가 새로 추가된 자료들을 공개했다.
"우리들의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번 년도에는 폐기된 자료가 훨씬 더 많군요. 이런 일은 정말로 드뭅니다. 그럼 지금부터 분류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새로 추가된 외신들이라..."
나도 분류 작업을 돕는다는 핑계로 자료를 슬쩍 훔쳐봤다.
그러자 첫머리부터 숨통이 턱 막힌다.
[신생 외신, 외눈의 수호자...]
'켁!'
이거 설마 내 이야기인가?
다행히 재단의 기본 방침에 따라서, 이름은 철저하게 검열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뱀들의 어머니가 직접 손을 써줬을 리는 없고...
이너서클의 멤버들이 알아서 처리해준 것 같다.
지구와 소인족 세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본부에는 대소환사 에이코그도 있으니까, 소인족 세계의 신생 외신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자료를 훑어보던 나는 빠르게 확신을 얻었다.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내게 다가왔다.
"외눈의 수호자군요. 신생 외신들 중에선 가장 강력한 축에 속합니다."
"그런가요?"
"예. 원래 대부분의 신생 외신은 C급으로 분류됩니다. 승급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외신이라고 해서 모두 강력한 것은 아니니까요."
재단도 나름대로의 분류 기준을 가지고 있었구나.
감이 잘 안 잡혀서 예시를 부탁했다.
"아토카 정도면 무슨 등급이죠?"
"아토카면 딱 B급이군요."
"으음."
그렇게 보니까 대충 알 것 같다.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모두의 앞에서 계속 설명했다.
"외눈의 수호자는 아토카를 상대로 무난하게 승리했고, 비교적 온순하고 질서적인 성향의 존재입니다. 외신 치곤 말이 잘 통한다고 하니까 향후 협력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외신은 아주 희귀합니다."
"프리스트 님, 협력이라면..."
"뭐, 그래봤자 우리 세계에 소환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죠."
"아하."
애콜라이트 하나가 곧바로 납득했다.
내가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자 아비가일이 눈치없이 지껄였다.
"외눈이라! 로완이같네!"
"... 하하핫!"
"에이, 에스콰이어 님은 양쪽 다 보이시잖아요. 그렇죠?"
"물론이죠."
재단의 식구들은 난처한 개그를 들은 것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녀석이 내뱉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아비가일이 말하니까 유독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아멜리아는 옆에서 재밌어 죽겠다는 듯 얄밉게 실실 웃는다.
'진정하자. 어차피 재단의 핵심인 이너서클은 내 편이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연히 연기를 이어나가고 있자 마침내 등급 부여의 시간이 다가왔다.
프리스트 토시아키는 살짝 난처한 듯 말했다.
"상당히 강력한 외신이지만, 그래도 신규 등록이니까 일단 B급 정도로..."
"으음... 조, 조금 더 높게 책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완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조심스럽게 발언하자 아비가일이 생글생글 웃으며 캐물었다.
오늘만큼은 저 미소가 진짜로 얄밉다.
나는 자존심을 최대한 억누르며 더듬더듬 말했다.
"소... 솔직히 B급 판정은 좀 아니라고 생각해. 아토카는 완전 물로켓 외신이고... 그런 아토카를 손쉽게 때려눕혔는데 아토카랑 동급은 좀."
"손쉽게 이겼다곤 안 쓰여있는데?"
"말이 그렇단 거지. 별로 고전했을 것 같진 않아."
"으음, 뭐 아토카는 완전 허접이었으니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토시아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규 외신을 너무 얕보는 것도 좋지 않죠. 알겠습니다. 그럼 외눈의 수호자는 A급으로 판정하죠."
"휘유."
속이 급격히 편안해진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정리 작업을 도왔다.
배를 움켜잡고 끅끅거리던 아멜리아가 겨우 내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 인간이 너무 강함(1) - 삽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