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진심
헌터협회 본부의 당직실은 시설이 좋았다.
의자는 너무 편해서 잠이 올 것 같을 지경이었고, TV는 대형.
무엇보다도 외부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서 노닥거리기 편하다.
원래는 대여섯이 함께 쓰는 방인만큼, 공간이 넓은데다 통풍 시설도 빵빵하게 잘 돌아간다.
이런 최고의 공간에, 나는 최악의 상대와 함께 있다.
금세 기운을 회복한 아비가일은 내 의자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스마트폰을 흔들어댔다.
"야식 먹을래? 내가 사줄게."
"... 벌써 먹으면 졸려서 안 돼."
"아, 그렇구나."
별로 대화를 하고싶진 않은데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당직근무는 앞으로 7시간도 더 남았다.
이쪽의 얼굴을 핥듯이 주시하던 아비가일이 손뼉을 짝! 쳤다.
"좋아. 그럼 야자타임 하자."
"야자타임? 네가 그런것도 했다고?"
아비가일은 술을 아예 안 마시니까, 저건 술게임보단 진실게임같은 느낌일 것이다.
내 색다른 반응에 화색을 띤 그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직원들이랑 했어. 하지만 넌 무슨 대답을 하든지 해고 안 할게."
"잠깐만... 야자타임한 다음에 직원을 해고했다고?"
"그런데?"
"넌 최악의 고용주야!"
나는 진심으로 망연자실했다.
아까전의 즉석 해고도 그렇고...
고용노동부는 이 녀석 안 잡아가고 도대체 뭐하나?
아비가일은 피식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먼저 내 차례야."
완벽하군.
평소처럼 대화가 전혀 안 통하고 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꼭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로완이는 왜 나를 싫어해? 우리 졸업까지만 해도 잘 지내지 않았어?"
"그건 너 혼자 착각했던 거야."
아비가일의 옆에 붙어있던 녀석들은 3학년이 되기도 전에 거의 다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같은 학과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래저래 부딪혔을뿐.
"내가 자꾸 눈치없이 말해서 그래?"
"너야말로 왜 하필 나야?"
"아, 이제 내 차례인가? 좋아. 뭐든 대답해줄게."
근데 이거 야자타임 아닌데?
늘 그랬듯 본인에게 편한대로 해석한 것 같다.
아비가일 어사일럼은 그렇게 살아도 된다.
"왜 하필 로완이냐면... 대학 시절부터 잘 챙겨줬잖아."
"다른 유능한 직원들 많잖아."
"유능한 직원들?"
잠시 어리둥절하던 아비가일이 눈을 크게 뜨더니,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 됐다.
"아, 그렇구나. 로완이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착각?"
"어차피 내 눈에는 모두 평등하게 약해. 게다가 대부분은 쓰잘데기없는 아부밖에 못해."
아, 그렇군.
S급 나리의 눈에는 A급이나 B급이나 그게 그거겠지.
덕분에 살짝 질려버렸는데, 그녀가 태연히 지껄여댔다.
"로완이는 예전부터 나한테 이것저것 제대로 가르쳐줬으니까 좋아."
"결국 실패했지만."
"또, 얼마전에 뉴스 나온 것도 있잖아. 로완이는 진짜 착해서, 실종자를 구하기 위해서 혼자 던전에..."
"아니야."
서유림이 언급했을 때엔 그냥 넘어갔던 부분인데...
아비가일이 하니까 이상하게 열받는다.
사회화도 제대로 안 된 야생동물이 도대체 뭘 안다고 지껄인단 말인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뭐 착해서 거기 들어간 줄 알아?"
"으응?"
"애 엄마가 되도 않는 억지 부리면서 질질 짜고 있다해서, 내가 목숨 걸고 던전에 들어갔을 것 같냐고!"
"그럼 왜 그랬어?"
"내가 하고 싶었으니까!"
고함을 지르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헌터로서의 의무고 뭐고. 그딴 건 둘째 문제였다.
"너희가 자꾸만 나는 그런 거 못 할거라고, 멋대로 쓰레기 취급했잖아! 그래서 증명하고 싶었어!"
아비가일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평소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질문이나 딴지도 지금만큼은 참고있다.
"결국 성공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더라. 그놈들 얼굴 좀 보라고! 흑사자 길드에게서 보상같은 거 안 받아도 배가 다 불렀다!"
"..."
"이제 됐어? 충분해?"
내친김에 쌓였던 말을 모조리 토해내기로 했다.
한 번 진심이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다.
"너를 싫어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야. 지금까지 네가 질리도록 말했어."
"뭣? 언제?"
"내가 약하니까. 그래서 네가 싫어."
아비가일 어사일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천재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천재를 눈앞에 두면,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그녀에게 달라붙어서 기생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못 이길 상대였다고 자위하며, 애써 못 본 체 하든가.
나는 두 번째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보통은 선택하지 않는, 세 번째의 길이 존재한다.
"내가 너 이길거니까, 네 길드엔 못 들어가."
이미 기회는 주어졌다.
지난번의 측정 당시, 나의 종합 능력치는 B랭크 최상위권.
지금쯤은 A랭크 수준이 됐을 것이다.
외신 활동을 시작한 뒤로 내 성장속도는 말도 안 되게 빨라진 것이다.
이 기세라면 S급도 꿈이 아니다.
아비가일은 나를 비웃는 대신, 무섭도록 진지한 표정이 됐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걱정될 정도다.
"그럼 시현이는? 걔는 안 싫어?"
"시현이는 아예 분야가 다르잖아."
"음, 음. 그렇구나. 그럼 말야... 로완이도 나만큼 강해지면 다시 날 좋아하겠네?"
"... 다시?"
"으으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당장은 힘들어. 아무래도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아."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있는 것 같은데, 굳이 말리기도 귀찮아서 그만뒀다.
처음부터 이해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한바탕 털어놓자 묘하게 개운한 기분이 되어서 편해졌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고백했던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젠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니, 아비가일도 아주 밉게 보이진 않는다.
'하는 짓은 마음에 안 들지만... 덩치 크고 힘 센 소인족이라고 생각하자.'
"아, 그리고 야자타임했던 다음에 해고됐던 직원 말야."
"뭐?"
"그 사람은 야자타임에 횡령죄를 고백했어. 그래서 해고할 수밖에 없었어."
"... 그래?"
대한민국 1위 길드라고 꼭 상식적인 놈들만 있는 건 아니구나.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나는 뒤늦게 사과했다.
"알겠어. 넌 최악의 고용주가 아니야."
"음, 음."
"그리고 우리가 조금 전에 했던 게 뭐든간에, 야자타임은 절대 아니야."
"뭣? 그럼 뭔데? 진실게임?"
"그나마 진실게임에 가깝네. 벌칙은 없지만."
진실게임이라면 대답을 거부했을 때의 벌칙이 있어야 한다.
아비가일은 흐응,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그렇구나. 이제 야식 먹을래?"
"... 시간도 좀 됐으니까 먹을까."
"그럼 난 닭갈비로 할래."
"그런 것도 있어?"
"이 근처 가게들은 새벽에도 거의 다 열어."
"아, 당직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나는 족발."
"내가 사줄테니까 같은 거 먹자."
"싫어."
결국 우리는 족발을 시켜먹곤 무난하게 당직 근무를 마쳤다.
중간중간 상황 발생이 없진 않았던 것 같지만, 아비가일은 한국 유일의 S급인만큼 함부로 출동시킬 수 없었다.
덕분에 옆에 있던 나도 혜택을 좀 봤다.
"고생했어. 그럼 나중에 또 봐!"
"... 잘 가."
개운한 마음으로 헤어진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몸의 피로는 별 것 아니지만... 정신이 역대급으로 피곤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솔직하게 앙금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가 싶다.
'지난번처럼 자다가 소환될 수도 있으니까, 잘 수 있을 때 자야겠어.'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씻은 뒤, 곧장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몸을 눕히자마자 의식이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기분 좋은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찰나의 체감시간이 지나자, 나는 황무지에 서있었다.
'뭐지?'
자던 도중에 소환이라도 당한 것인가 싶던 중, 하늘이 열리며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혼돈이 나타났다.
"아... 조졌네."
멍하니 위를 올려보고있자 익숙한 형상이 나타났다.
얼마 전에 소환되어 맞붙었던 뱀의 외신.
내게 패퇴했던 백사가 똬리를 튼 채 기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녀석이 아니다.
녀석을 애완동물처럼 쓰다듬고 있는, 거대한 여인이 문제였다.
짙은 색의 피부에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형상.
전체적으로 여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간적인 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뱀에 팔이 돋아난 듯 기괴한 모습이다.
그녀의 주변에는 기묘한 색채가 감돌고,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뱀들의 어머니.'
외신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외신이라는데, 직접 보자마자 납득이 됐다.
저건 사실상 나와 같은 카테고리에 묶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절대로 못 이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굴욕감이나 무력감조차 없다.
내 기분은 오히려 초연해졌다.
사람이 천재지변과 겨뤄서 이기지 못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은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내려봤다.
백사는 그 옆에서 쉿쉿 기분나쁘게 웃는다.
나는 기왕 죽을 것, 할 말이라도 다 하고 죽자는 심정으로 녀석에게 말했다.
"나한테 발렸다고 엄마를 데려와? 네가 그러고도 외신이냐?"
"쿠, 쿠쿡..."
뱀들의 어머니가 기분나쁘게 웃자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밀려왔다.
내 정신이 저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윽고 그녀는 겨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위하여, 일부러 몇 단계는 낮은 수준의 의사소통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이 아이는 나의 딸이 아니다. 내 손녀의 손녀지."
"... 대가족이시네."
"최근 제법 설치고 있다지. 진정한 외신을 마주한 기분이 어떠냐?"
나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뱀들의 어머니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가락에서 핏물을 한 방울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핏방울이 똑, 떨어지자 드넓은 황무지의 흙이 모조리 검붉게 변했다.
"종복이 될 기회를 주마."
"..."
이제와서 남의 밑으로 들어가라고?
나는 차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자존심은 둘째치고.
저걸 마신 뒤에도 내 정신과 육체가 고스란히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
아마 나도 저 백사처럼 변하겠지.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처억.
이 정도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자리에 들었던 차림새 그대로라서 변변한 무기도 없지만...
자세를 잡고, 염동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뱀들의 어머니는 슬쩍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쏴아아!
끝없이 소용돌이치던 혼돈이 나를 향해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시야가 온통 검게 물들었다.
#
"쿨럭, 쿨럭!"
끔찍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화들짝 몸을 일으킨 나는 가까운 곳에서 검붉은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코입을 가리지 않고 아주 줄줄 흘러나온다.
"켁! 우욱!"
욕실로 달려간 나는 새까만 핏물을 한움큼 토해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사람 목숨이 생각보다 질기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내장이 울어대도 목숨만큼은 이어지고 있다.
"콜록, 케흑... 봐, 봐준 건가?"
꿈속이든 뭐든간에.
뱀들의 어머니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이러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그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백사 녀석의 엄마라고 불러서 살려준 건가... 할머니라고 했으면 죽었겠군.'
한참동안 욕실 바닥을 뒹굴던 나는 구급차를 부르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두 번째 수면은 훨씬 더 편안하고 깊었다.
15화. 외신활동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허겁지겁 훈련장으로 향했다.
당장은 이상할 정도로 개운하지만...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을지 모른다.
헌터 전문 병원은 언제나 환자가 넘치기 때문에, 단순 검진 목적이라면 훈련장이 훨씬 빠르다.
어차피 뚜렷한 증상이 보이지 않으면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도 소용없다.
최대한 정밀한 검사를 요청한 나는 매니저의 대답을 듣곤 겨우 진정했다.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마력량이나 근육량, 호흡계는 오히려 더 좋아졌어요.
"정말인가요..."
"더 자세한 건 병원에 가보셔야겠지만 모든 수치가 너무 좋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훈련을 시작하죠."
나중에 병원에도 가볼 생각이지만, 당장 죽을 염려는 없는 것 같다.
훈련장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기초 루틴을 마치자 방문객이 찾아왔다.
"임로완 고객님. 주문하신 장비가 완성됐습니다."
시현 공방의 여직원이 뱀 외신의 독니로 만든 단검을 건네주자, 주변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된다.
은근슬쩍 물건을 가리듯 몸을 회전시켰다.
"이번에도 빠르네요."
"사장님께선 흥미로운 재료를 좋아하셔서요. 계약서대로 독액을 보수로 챙겼습니다. 세금 문제도 처리해뒀습니다."
"고맙습니다."
조심스럽게 장비를 들어보자, 단검이라기보단 그냥 송곳니를 통째로 들고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걸 투척하거나 염동력으로 쏘아내는 건 좀 힘들 것이다.
사용하기 편한 무기는 아니지만 대신 위력이 엄청나다.
한편, 나이프의 그립은 단단하면서도 확실하게 만들어졌다.
미끄럼방지 처리까지 되어있는 그립이다.
"살짝 두껍네요."
"독이 새어나오거나 흘러내리면 큰일이니까요. 그걸 방지하기 위한 처리가 되어있습니다. 손잡이의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절대 독이 나오지 않죠."
"아하. 수령확인서에 서명할게요."
흔쾌히 장비를 수령한 뒤에는 곧바로 스파링을 진행했다.
보호장비를 착용한 매니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 공격을 막았다.
"로완 씨,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좀 더 유연하게 하셔야죠."
"아, 죄송해요."
어제 뱀들의 어머니에게 당했던 기억 때문에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아비가일을 뛰어넘겠다고 큰소리를 치자마자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덕분에 내 기분은 엉망진창이다.
스파링을 마치고 물을 마실 겸 잠깐 쉬고 있는데, 일전에 함께 공략을 다녀왔던 헌터가 인사를 건넸다.
"로완 씨, 시현공방에서 새 장비 받으셨다면서요? 구경 좀 해봐도 돼요?"
"에이, 별 것도 없어요."
"하하, 시현 씨가 섭섭하시겠네요. 그런데, 장비 이름은 뭐에요?"
"바이퍼요."
대충 생각해둔 이름을 붙여주자 옆에 있던 다른 헌터가 피식 웃었다.
"장비에 이름도 붙여요?"
"아비가일도 그렇게 하던데요."
"아, 그럼 이름 붙이는 게 맞네요!"
"푸핫."
어제의 당직 근무 때 들었다.
아비가일이 사용하는 대검은 도살자라고 한다.
외식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집에 들어가려던 나는 문득 헤르반을 떠올렸다.
녀석이 뭘 하고 있는가 싶어서 궁금해하고 있는데...
돌연 내 시야가 확장되며, 헤르반이 있는 숲의 전경이 보였다.
'이건... 헤르반이 보고있는 풍경인가?'
보일리 없는 오른쪽 눈에 비친 풍경.
아마 헤르반이 내 피를 나눠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숲의 사람들을 모아놓곤 뭔가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오늘 너희들에게 위대한 로완 님의 지식을 공유하겠다! 그 중에서도 외신의 언어에 대해서 가르칠 것이다."
"오오오... 로완 만쎄!"
"외신의 언어라니..."
경외어린 시선으로 단상 위를 우러러보는 사람들.
나는 살짝 놀라면서도 일단 가만히 지켜봤다.
한글은 배우기 쉬운 편이라고 하지만, 한국어는 사정이 다르다.
애초에 처음 배우는 언어는 누구에게나 다 어렵다.
그러나 헤르반의 행동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따라하라, '예!'. 이것은 [알겠습니다]와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
"예!"
어눌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따라하는 사람들.
그런데, 헤르반의 몇 번 복습을 시키더니 그대로 끝내버렸다.
"기억하라. 그럼 오늘의 수업을 종료하겠다."
"엣, 벌써..."
"아직 더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르침을 구했지만, 헤르반은 조소로 답했다.
"예, 말고 다른 말이 필요한가?"
"예에? 그건..."
"부정의 표현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헤르반이 손짓하며 말하자 그의 뒤에 도열해있던 병사 두 명이 창을 들고 나섰다.
그 광경을 훔쳐보던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들에게 '예'말고 다른 대답은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거 참... 잘했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사람들이 빠르게 해산하는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멀찍이서 몰래 엿듣고 있던 전직 마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젠 내 소인족 언어 실력도 꽤 훌륭해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기, 감사의 인사는 어떻게 해요?"
"할 마음이 들었나? 이제부터 상급 추종자용 교육에 참여하도록."
"... 예."
나는 무척 흐뭇한 기분으로 오른쪽 눈을 떴다.
식당에서 혼자 실실 웃고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지만 멈출 수가 없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겸, 정신을 집중하자 다른 추종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헬리온 왕국은 아직 잠잠한가? 아, 이런 녀석들도 있었지.'
나는 이전에 풀어줬던 전설의 세 모험가들을 발견하곤 살짝 미안한 기분이 됐다.
녀석들은 어딘지도 모를 정글을 헤메고 있었다.
선두에서 열심히 풀을 베던 전사가 투덜거렸다.
"이게 도대체 뭐야! 에픽레벨 파티인 우리가 직접 뛰고 있는데, 결사대의 지원도 못 받다니..."
녀석이 말하는 결사대란 반 외신 비밀결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내 피를 강제로 받게 된 녀석들은 더 이상 비밀결사와 함께할 수 없게 됐다.
비밀결사의 입장에서, 전설의 세 모험가는 언제라도 변이할 수 있는 위험분자들인 것이다.
그 때, 궁수가 전사에게 경고했다.
"조심해!"
"우왓?!"
전사는 수풀에서 튀어나온 독충의 공격을 받았다.
궁수가 화살로 독충을 꿰뚫어버렸지만 전사는 이미 물려버린 뒤였다.
"아얏! 염병, 이거 독충이야! 외신 추종자들의 짓인가?"
"그냥 자연서식하는 종류야. 얼른 응급처치나 해. 넌 독 저항력 없잖아."
궁수가 전사의 상처를 살펴봤으나...
전사의 상처에선 독이 퍼져나가는 기미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독 한 방에 죽진 않겠지만 통증이나 마비 등의 증상이라도 있어야하는데, 너무나도 멀쩡한 것이다.
두 사람이 어리둥절하고있자 뒤에 있던 마법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척안의 로완 때문일 거야."
"뭣?"
"우린 외신의 피를 받았잖아. 어지간한 독은 안 통하는 체질이 된 거지."
"그런 게 가능하다고?"
"지난번에 마법군주 헤르반 못봤어? 오늘내일 하던 노인네가 완전히 회춘했어. 나보다 훨씬 건강해보이더라."
"씁... 근데 그놈의 로완이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이럴 일도 없었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얼른 가자. 외신의 소환의식이 끝나기 전에 쳐야해. 지난번에 겪어봤지? 제대로 소환이 되어버린 외신과 싸우는 건 절망적이라고."
이 녀석들은 여전히 외신의 소환을 막으러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외신들의 세를 꺾어준다면 나야 좋다.
'역시 살려두길 잘했군.'
띠링!
슬슬 식사에 집중하려는데 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자 한숨부터 나온다.
"아비가일?"
그녀는 메신저 앱으로 웬 동영상 파일을 보내왔다.
잽싸게 와이파이를 켜고 확인해보자, 웬 외국인이 강연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친절하게도 한글 자막까지 달렸다.
'... 헌터 능력 관련 내용이군. 백룡 길드의 내부 교육용 자료 같은 건가?'
백룡 길드라면 그런 걸 만들고도 남는다.
아마 돈 주고도 못 보는 것이리라.
"한 번 볼까."
식사를 후딱 끝낸 나는 이어폰을 착용하곤 시청을 시작했다.
무슨 다큐멘터리라도 되는 것처럼 참고영상까지 확실히 들어가있다.
"염동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용자의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그건 너무 정신론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당연하고 과학적인 거죠. 염동력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용자 본인도 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듭니다."
강연자는 곧바로 영상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는 각각 A랭크와 B랭크 염동력자의 능력 사용을 비교한 겁니다. 드라이아이스와 LED를 이용하여 해당 능력을 최대한 시각화 해봤습니다."
영상 속의 헌터들이 단단한 철근을 향해서 염동력을 쏘아냈다.
A랭크의 염동력자는 아주 손쉽게 철근을 관통시켜버렸다.
염동력이 아주 선명하고 날카롭게 가다듬어져서 감탄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B랭크 염동력자의 경우였다.
"미리 설명하겠습니다. 두 차례의 실험에서 소모된 마력량은 거의 똑같습니다."
"A랭크의 출력이 좀 낮았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걸 격파하는데에 전력을 다할 필요까진 없었겠죠. 이제 다시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B랭크의 염동력도 처음에는 제법 시원스럽게 쭉쭉 뻗어갔으나...
목표물에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진다.
심지어 형태까지 망가져서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당연히 관통은 실패.
강연자는 두 모델을 확실하게 비교해줬다.
"시작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유지가 안 됐던 겁니다."
"어째서..."
"B랭크는 철근까진 격파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제한을 걸어버렸습니다. 그 사고가 능력에 영향을 미쳐서, 실제로 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염동력은 다른 능력들과 달리, 적에게 닿는 그 순간까지 형태와 강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강력한 염동력자가 되기 위해선 압도적인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 건가...'
최근 내 염동력이 급격히 강해졌던 것은 역시 외신활동 덕분이리라.
소인족들의 차원에서는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일이 많았다.
실제로 벌써 외신을 둘이나 쓰러뜨리기도 했다.
그 차원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것만 가지곤 아직도 말이 안 된다.
아직은 몇 조각이 비어있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그래도... 확실히 귀중한 정보네.'
[화이팅.]
내가 메세지를 읽은 것을 확인한 아비가일이 응원의 한마디를 보냈다.
나는 이모티콘으로 대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집에 도착할 즈음...
[로완이씨여!]
'으음? 잠깐만 기다려라.'
엘리베이터에 타고있던 나는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얼른 장비를 걸쳤다.
새로 얻은 독이빨 단검, 바이퍼까지 허리춤에 차자 한층 든든해졌다.
'뭐냐.'
[로완이씨여! 저희는 양제국의 소환사들입니다! 지난번에 당신께서 뱀신을 물리치고 구해주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입니다!]
'아, 그 반란군인가.'
가족을 인질로 잡혔던 우두머리가 꽤 인상적이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소환사들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는 척안의 외신 로완을 국부로 모시려 합니다! 부디 미천한 저희들의 공물을 받고 제국을 수호해주시옵소서!]
원래 국부란 게 그런 뜻이 아닐텐데, 저쪽 세계에선 좀 다른 것 같다.
하긴. 저쪽에서 나라를 세울 거라면 수호외신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
나는 뱀들의 어머니에게 당했던 것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소환을 받아들였다.
뱀들의 어머니는 외신들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존재였던 것 같으니까 과하게 겁먹을 필요없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볼까. 여차하면 튀지 뭐.'
"좋다. 너무 크게 소환하진 마라. 차분히 둘러보고 싶으니."
[예! 그럼 지금 바로 문을 열겠습니다. 위대한 외신을 위한 통로를 개방하라!]
소용돌이치는 포탈로 걸어들어가자 한창 축제중인 도시가 보였다.
반란에 성공했으니까 신이 날법도 하다.
피식 웃으며 후드를 조금 더 깊게 눌러썼다.
16화. 양 제국
새롭게 소환된 도시는 상당히 컸다.
숲의 요새나 헬리온 왕국은 물론이고, 지금껏 소환됐던 다른 어떤 곳보다도 규모가 있다.
나는 소환사들을 물리치며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안내인 한 명만 남고 물러가라. 직접 살펴보고 결정하겠다."
"예."
신생 제국의 수호외신.
듣기엔 괜찮지만 너무 귀찮아지지 않을까?
내가 정확히 뭘 해줘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할 겸, 성 안팎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도시의 첫 인상은 번화하다는 것이었다.
한창 축제중인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굉장히 북적거린다.
'인구가 많군. 건축양식도 이색적이고.'
내가 소환된 국가들 중에서도 최대규모다.
나는 그나마 조용한 외곽으로 빠져나가며 안내역으로 따라붙은 소환사에게 물었다.
덩치가 작고 소심하게 생긴 소환사지만, 나를 안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직급이 꽤 높을 것이다.
"나라 안에 이런 도시가 여럿 있나?"
"그렇습니다. 이곳 수도가 가장 크고 사람도 많지만 다른 도시들도 만만찮습니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공용어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은 쉬웠다.
반란군에게 쫓겨난 전대 황제가 워낙 폭군이라서 다들 새로운 왕조를 환영하는 눈치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못 알아들은 체 했다.
"저들은 뭐라 말하고 있지?"
"이번 거사에서 쫓겨난 황제가 저질렀던 만행을 욕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신들을 가까이 하고, 백성들을 공사에 동원했으며 사치를 부리고 부모와 형제를 욕보였습니다!"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있진 않다.
적당히 거리를 구경하던 뒤엔 황궁으로 들어가서 연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도시와 마찬가지로 황궁 또한 상당히 화려하고 보기 좋게 지어져 있었다.
동양인인 나로선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그런데, 연회장에 음악소리는 없고 웬 비명과 쇳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챙, 채앵!
'뭐지?'
"히익..."
잘 들어보니까 이건 그냥 쇳소리도 아니고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다.
황궁 한복판에서 웬 검투가 벌어지고 있나 싶어서 소환사를 쳐다보자 그녀가 내 눈을 슬쩍 피했다.
"이놈, 너 따위는 공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냐. 오늘 끝장을 보자!"
칼춤이랍시고 진지하게 싸움을 벌이는 황궁의 신하들.
사실 이름만 공신이고 신하지. 저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반란군이었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반골정신으로 똘똘뭉친 이들인데... 하루아침에 충성심이나 예절이 생겼을 리 없다.
게다가 그들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전에 소환됐으니까 이제 겨우 2~3주 정도 됐을까?
'개판이군.'
신하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황제란 작자는 뭐하고 있냐면...
상석에 앉아서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고 있다.
"당신 지난번에 뭐라고 했어요! 처와 자의 목숨이 아까워 대업을 그르칠 순 없다고?"
"그럼 거기서 병사들을 물렸어야 했단 말이요? 그럼 진짜로 위험해졌을 게 뻔한데."
"지난번엔 아예 국을 끓여먹으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강하게 말해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기껏 황후의 자리로 올려줬는데 이런..."
처자식이 인질로 잡혔는데 새장가니 뭐니 했으니 저렇게 되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도저히 저 혼돈의 도가니에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선 작전상 후퇴가 맞는 것 같다.
"황제와 공신들의 놀이가 백성들의 것만 못하구나."
"로, 로완이시여!"
파아앗!
길게 설명하지 않고 소환을 해제했다.
이번엔 너무 심했으니까, 한 번 정도는 튕겨도 될 것 같다.
아예 저쪽에서 완전히 포기해버려도 전혀 아쉬울 것 같지 않다!
'너희가 급하지 내가 급하냐.'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만큼 말도 잘 통하고 친절한 외신도 잘 없다.
다른 외신들은 나보다도 약하거나 아니면 인간에게 거의 무관심한 것이다.
적어도 국부 역할에 적합한 외신은 없다고 봐도 된다.
반면 나는 초장부터 수호자 컨셉을 잡은 덕분에 적격이 되어버렸다.
"헤르반이 그리워지네. 내가 첫 추종자를 너무 잘 뽑아버렸어."
헤르반은 소환은 물론이고 추종자 교육 등등 관리도 알아서 확실하게 해버린다.
가끔씩 이상한 질문을 던져대는 게 흠이지만 그 정도는 참아줘야지.
물을 좀 마시며, 이번주의 헌터 일정을 확인하고 있자 다시금 소환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완이시여, 제발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이번에는 제대로 예를 갖춰 모시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나는 그쪽 심상방벽을 닫아버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대로 며칠 정도 방치해놓고 나중에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슬슬 던전에 가야지. 외신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좀 여유롭게 확보해두고 싶으니까..."
지난번에 당직을 다녀왔지만, 헌터들의 당직 근무비는 정말 놀랄만큼 짜다.
야식으로 족발 하나 시켜먹으면 남는 게 없을 정도다!
물론 그 때 먹었던 족발은 아비가일이 사줬다.
"이번에도 유림이랑 가야겠다. B급이 되니까 일거리가 많아져서 좋네."
서유림과 약속을 잡은 뒤에는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서 눈을 가렸다.
시각을 봉인한 채 염동력을 이용한 감각확장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이다.
최근 시도중인 훈련인데, 벌써부터 효과가 체감된다.
'감각확장이 더 능숙해졌군. 장난 아니야. 지금이라면 유리컵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분명 검은색 핏물을 줄줄 토해냈는데, 컨디션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눈을 가린 채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자 거실의 TV에서 신경쓰이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TV화면은 못 보니까, 수건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저는 지금 한국대학교 헌터학과의 동창회 현장에 도착해있습니...]
"그딴 걸 왜 중계하고 앉았는데?"
역시 동창회는 핑계고, 저기서 이것저것 하는 모양이다.
황금세대 출신의 A급 헌터나 딱히 학교 출신이 아닌 헌터들도 많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동창회장으로서 초대장을 돌렸던 아비가일은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만약 들렀더라도 하품이나 하다가 금방 질려서 돌아갔을 것이다.
열심히 아비가일을 찾아다니던 보도원은 결국 포기하곤 다른 졸업생들을 인터뷰했다.
어차피 아비가일 외에도 인물은 많다.
아니나 다를까, 나도 알고있는 얼굴이 화면 속에 나타났다.
[오늘은 현직 A랭크 헌터 성우현 씨도 모교를 찾아주셨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성우현입니다.]
황금세대 출신의 A급 헌터, 성우현.
한국에서 활동중인 7인의 A급 중에서도 특별히 유명한 편이다.
다만, 실력은 A급에서도 하위권.
당장 나도 이제 저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상대다.
성우현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아비가일에게 공개적으로 청혼했다가 차였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지.'
녀석도 황금세대의 일원으로서 아비가일의 본모습을 뻔히 봤을텐데, 굳이 청혼한 이유야 뻔하다.
다소 극단적인 상승혼을 꿈꾸는 것이다.
물론 아비가일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맹해보여도, 간신이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상대는 귀신같이 알아본다.
성우현은 노골적으로 아비가일을 찾아다니다가 이내 실망해서 사라졌다.
백룡 길드에서 자꾸 집적거리면 고소한다고 했다던데, 그 뒤로 좀 얌전해진 것이 저거다.
사실 녀석이 아비가일에게만 껄떡거리는 것은 아니고, A급이나 S급 여자 헌터라면 다 껄떡거린다.
나는 TV를 꺼버리곤 작업실로 들어가서 장비 손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고요하던 귓가에 자꾸만 이명이 들려왔다.
아까 쳐놓은 심상방벽 너머에서 소환사들이 계속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척안의 로완이시여! 간청합니다!!]
[딱 한 번만 돌아봐주십시오!]
[후회하고 이씁니닷!]
내 심상장벽을 흔들 정도라니.
소환사들을 있는대로 긁어모은 것 같다.
'저쪽은 시간이 훨씬 빠르니까, 못해도 하루는 지났을텐데?'
하루 내내 목놓아 울고 있던 건가.
이쯤되면 나도 마음이 좀 흔들린다.
원래 저쪽 시간으로 1개월 정도는 튕기려고 했지만 심상방벽까지 흔들어댈 줄은 몰랐다.
"달리 할 일도 없는데 가볼까."
파아앗!
이번에는 한층 거대한 모습으로 소환당한 덕에 금방 주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넓은 황궁의 안마당에 소환사들이 넙죽 엎드려있다.
그들 하나하나가 점이 되어서 소환진을 그리고 있는데... 엄청난 숫자의 소환사를 동원한 것 같다.
맞은편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황제와 측근들.
황제를 긁어대던 황후와 아들들도 보인다.
그들은 내가 소환되자마자 목 놓아 울었다.
"세계의 수호자시여! 추한 꼴을 보여드려 무척 죄송합니다!"
"부디 죄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여..."
슬쩍 고개를 돌려서 황궁의 바깥쪽을 살펴보자...
정작 백성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잘 먹고 잘 노는 중이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황제가 불쌍해보였다.
반란을 일으켰을 때엔 무척 행복해보였는데, 막상 성공하니까 그 때의 일로 바가지나 긁히고 있다니.
녀석들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동안, 대충 방침을 정했다.
나는 후드 속에 표정을 숨긴 채 무겁게 내뱉는다.
"옥좌 위에 홀로 앉은 황제를 동정하라."
"예, 예엣?"
소환사들이 통역을 해주자 모두의 얼굴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신하들부터 질타했다.
"묻겠다. 네놈들이 궁에서 칼을 차고 돌아다니며 너희의 군주를 업신여기는데, 외신이라고 다를까?"
"아, 아니. 그것이..."
"너희가 황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이 몸을 대할 모습도 알 수 있지. 기본 중의 기본도 모르는 놈들의 수호자가 되어줄 생각은 없다!"
크게 꾸짖자 황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반면, 신하들의 이마는 주저없이 흙바닥으로 처박혔다.
"소인들의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외신이시여! 이 천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던 것이니 부디 관대하게..."
나는 신나게 지껄이던 황후를 째려봤다.
사실 그녀도 잘한 것은 전혀 없다.
"군주를 욕하는 신하들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충언과 간언은 종이 한 장 차이인 법이지."
"에엣..."
"하지만 남들의 앞에서 지아비를 헐뜯는 여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구나. 결국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건만."
결국 황제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오늘부터 양 왕조의 국교는 오직 로완교다! 따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 목을 베겠다."
나는 의도했던 결과물을 보곤 피식 웃었다.
무릇 군주는 천하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하지만...
외신인 나는 딱 한 사람, 군주의 마음만 얻으면 된다.
내가 일일이 통치하기엔 너무나도 귀찮지 않은가.
신하들은 내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고 화들짝 놀랐다.
"폐... 폐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급하심이..."
"아직 공물에 대한 논의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갈!!!!!"
황제는 전장 한복판으로 돌아온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입 닥쳐라! 자고로 신앙을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야!!"
"..."
미쳐 날뛰는 기세에 질려버린 신하들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소환사들의 대열로 뛰어든 황제가 그들과 함께 팔을 벌리며 외쳤다.
"로완이시여!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먼저 궁의 율법을 바로세우겠다. 너희가 알아서 하지 않겠다면 내가 친히 알려줘야겠지."
최대한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헤르반을 찾았다.
'헤르반, 헤르반!'
[말씀하십시오 주군!]
'너희쪽 왕과 귀족들의 예법을 알고싶다. 중요한 것만.'
[예법입니까? 금방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역시 헤르반은 편하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머리를 조아린 소인족들을 내려봤다.
17화. 신전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원래는 차를 이용하지만, 오늘은 공략 목표인 던전이 가까워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고작 2정거장이라서 정말 빨리 도착했다.
보통 헌터들은 장비 때문이라도 대중교통을 꺼리는데...
내 장비들은 작아서 크게 불편하거나 시선을 끌진 않았다.
물론 독이 든 단검을 태연히 가지고 대중교통에 탑승하는 게 좀 웃기긴 하다.
하지만 시대가 이런데 어쩌겠는가.
"이쯤에서 준비할까."
적당한 골목으로 들어가서 장비를 점검하고, 확실하게 조인다.
원래는 약속장소에서 했지만 시민들이 보기에 많이 흉흉했던 모양이다.
띠링!
[선배, 어디에요?]
"거의 다 도착했어. 늦진 않을 거야."
함께 가기로 했던 서유림이 확인용 메세지를 보내왔다.
꼼꼼한 성격이라서 믿음직스럽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오른쪽 눈을 감았던 나는 문득 신경쓰이는 광경을 발견했다.
사교도들의 소환 의식을 저지하려던 전설의 세 모험가들이 아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반쯤 실패해버린 듯, 상반신만 소환진 밖으로 나온 외신이 마구 울부짖고 있다.
"키에에엑!"
"망했어! 도망치자. 저거 어차피 못 걷는 거 아니야?"
"하다못해 소환진이라도 망치고 가야해!"
뼈와 근육으로 이뤄진 인간 형태의 외신.
외신으로서의 급이 결코 높아보이진 않지만, 녀석들에겐 대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세 모험가들은 물 맞은 길고양이들처럼 날뛰었다.
그러나 외신이 손바닥으로 땅만 쳐도 땅이 흔들려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동굴 전체가 진동하며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데챠악! 이러다 다 죽엇! 그냥 도망쳐!"
"안 돼! 저 소환진은 장기 소환용이란 말야!"
"그게 뭔데!"
"평소처럼 5분정도 깔짝 소환하는 게 아니야! 소환이 제대로 끝나면 이 주변 생명체들은 다 죽어!"
그런 것도 있었나.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녀석들의 전투를 구경했다.
궁수가 사교도들을 보이는 족족 쏴죽이고 있지만, 정작 외신을 감당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안 좋은데... 그딴 곳에서 죽으라고 살려서 보내준 게 아니란 말야.'
"어엇?"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자 마법사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약속시간까진 아직 5분 정도 여유가 있다.
저쪽 시간으로 환산하면 약 35분. 충분히 가능하다.
'전설의 세 모험가들이여, 나를 소환하라!'
"잠깐, 이 목소리는... 척안의 로완이다!"
"뭣, 다짜고짜 소환하라니..."
모험가들은 무척 당황했지만, 귀가 솔깃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신은 외신으로 상대하는 것이 정석이다.
외신의 소환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다른 외신과의 전투일 정도.
"근데 소환이란 게 준비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
"여기 필요한 건 대충 다 있긴 해."
마법사는 근처의 탁자와 선반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교도들의 은신처인만큼 재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치만 나 혼자선 로완같은 고위 외신을 온전히 소환할 수 없는데..."
'간단히 소환해도 좋다.'
"에에잇!"
마법사가 잽싸게 약식 소환을 준비하는 사이, 전사가 외신의 앞으로 튀어나가서 녀석의 시선을 끌었다.
챙, 채앵!
녀석은 칼로 방패를 두드려대며 당당하면서도 기묘한 포즈를 취했다.
정말 얄미워서 한 대 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와바랏!!"
"크르르릇!"
제대로 열받은 외신이 열심히 헛손질을 하는 사이, 마법사는 초고속으로 소환 준비를 마쳤다.
"척안의 로완이시여! 이곳에 강림하여 흉포한 외신을 처단하소서!"
파아앗!
동굴의 어둠에 빠르게 적응한 나는 가장 먼저 장비를 확인해봤다.
내 장비들도 나와 똑같은 크기로 줄어있었다.
최상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다.
나와 같은 눈높이가 된 마법사가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척안의 로완! 정말로 방법이 있는 건가?"
"세계의 수호자를 얕보지 마라."
어차피 실패하면 여기 있는 놈들은 나 빼고 다 죽을테니까, 허세 좀 부려도 되겠지.
그리고 나도 믿는 구석이 하나쯤은 있다.
"크엑!"
열심히 시선을 끌던 전사가 외신의 오른팔에 맞고 멀리 날아가버렸다.
나는 흑룡의 비늘단검을 꺼내서 염동력으로 크게 휘둘렀다.
차아악!
척봐도 단단한 놈은 아니었는지라, 옆구리에 길쭉한 상처가 생겼다.
놈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자 궁수와 마법사도 합세하여 다른 방향에서 공격을 가했다.
"진짜로 로완을 불러온 거야?!"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저만한 크기로 소환해서 뭘 어쩌려고!"
외신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녀석들 쪽으로 쏠렸다.
저렇게 앵앵거리면서 귀찮게 구는 거, 정말 짜증난다.
나도 당해봐서 잘 안다.
자고로 약한놈부터 노리는 것이야말로 사냥과 전투의 상식.
게다가 놈의 상처는 벌써부터 아물고 있었다.
물렁한 대신 재생능력이 뛰어난 타입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
나는 송곳니 단검, 바이퍼를 꺼내들어서 직접 찔러넣었다.
안쪽에 저장되어 있던 독물이 모조리 주입되자 놈이 크게 몸을 비틀었다.
"쿨럭, 끄힉, 갸아아악!"
바이퍼가 만들어내는 독은 소량으로도 효과가 있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까지 작아진 상태로도 효과가 있을진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독에 당한 녀석의 살점이 순식간에 괴사하더니, 새카맣게 주변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극소량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분량이었을텐데, 그야말로 신의 독이다.
'뱀들의 어머니의 직계 자손이란 건가... 제대로 물렸으면 뼈도 못 추렸겠네.'
나는 혹시 몰라서 따로 저장해놓은 여분의 독을 던졌다.
매우 위험한 물건이라서 2중 3중으로 잠금해뒀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세 모험가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쳐다봤다.
"뭐야, 진짜로 잡았어?"
"어떻게 저 정도의 힘을..."
"우아악!"
쿠웅!
승리에 취해있을 시간따윈 없었다.
외신의 거대한 몸체가 쓰러지자 안 그래도 불안불안하던 동굴이 빠르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세 모험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출구쪽으로 내달렸다.
"키히익..."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외신이 마침내 역소환당했다.
나는 염동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동굴의 출구를 지탱했다.
워낙 붕괴가 심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제대로 소환됐다면 훨씬 쉬웠을텐데.'
"아앗, 척안의 로완이..."
"나가라."
"크흑..."
모험가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동굴을 나섰다.
나는 미련없이 소환을 해제하곤 헤르반에게 연락을 넣었다.
'헤르반. 그곳에서 멀지 않은 동굴에 사교도들의 은신처가 있다. 입구가 무너졌으니 사람들 데려가서 챙길 거 챙겨라. 아, 가는 길에 독충이 있으니까 조심하고.'
[즉시 받들겠습니다.]
돌가루를 툭툭 털어내곤 늦지 않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면식이 있는 것은 후배인 서유림을 포함해서 단 2명.
나머지 팀원들과는 손발도 맞춰보지 않고 곧장 던전에 들어가게 된다.
너무 대충대충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쩔 수 없다.
던전 공략은 이미 일상이자 사업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초창기보다는 현재의 사망률이 훨씬 낮다.
"응?"
그런데, 현장에는 명단에 없던 헌터가 한 명 있었다.
나는 뒤늦게 그를 알아보곤 놀랐다.
"성우현?"
"일찍도 알아본다 야. 잘 지냈어?"
"수술한 뒤로 눈이 좀 침침해서."
"잘 못 지냈구나... 그래도 B랭크 승급했다면서? 축하한다 야."
"고마워."
얼마전에 동창회 방송에서 봤던 바로 그 동기.
나와 아주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먼 사이는 또 아니었다.
보고 있으면 좀 한심하게 느껴지는데 아주 싫진 않은 녀석이다.
물론 한심하다곤 해도 A급이지만...
자꾸만 여자들에게 껄떡거리는 게 평가를 깎아먹는다.
서유림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내게 손짓했다.
"선배, 오셨네요."
"우현이가 여긴 왜 왔어?"
"한 명 일 생겨서 대타로 들어온 거에요. 우현 선배는 좀 껄끄럽던데... 완전 바람둥이로 유명하더라구요."
"아, 우현이? 너무 걱정하지 마. 쟤는 A급이랑 S급밖에 관심없어."
"그래요?"
그리고 정작 A급과 S급에겐 맨날 까인다.
바람둥이란 건 완전 헛소문인 셈이다.
실패한 픽업 아티스트 정도면 적당하겠다.
"우현이는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이 꿈이지."
"에엑. 멀쩡하게 생겨가지곤..."
"얼굴은 괜찮으니까 그런 꿈을 꾸는 거야."
우현이가 외국의 A급 헌터에게도 껄떡거렸을 때엔 다들 깜짝 놀랐다.
딱히 아비가일만 노리던 것도 아닌 셈이다.
급조된 공략팀의 팀장이 손뼉을 치며 사람을 모았다.
"우리팀에 황금세대만 두분을 모시게 됐네요. 사고없이 편하게 갑시다."
"네!"
던전 공략은 굉장히 수월하게 진행됐지만...
나는 자꾸만 성우현의 시선을 느끼게 됐다.
아까부터 묘하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동기의 몸상태를 걱정해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나도 녀석을 힐끔거리긴 했다.
우현이는 한국의 현역 A급 헌터들 중 최약체.
나도 녀석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자꾸만 눈이 간다.
'나랑 큰 차이는 없어보여. 내 염동력, 사실상 A급은 되는 거겠지.'
"로완 선배, 엄청 능숙해지신 것 같네요."
"요즘 특훈중이거든."
"특훈이요?"
"눈 가리고 염동력으로 생활하기."
"그러다 큰일나요!"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공략을 끝내자 술자리 권유가 들어왔다.
나는 피곤하단 핑계로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요즘 내가 관리하는 소인족 왕국만 세 군데.
그 중에서도 양제국은 신생이라서 이것저것 도와줄 것이 아주 많았다.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막상 손 놓고 구경하기엔 또 너무 엉망이란 말이지.'
그래도 오늘의 양제국은 좀 잠잠하다.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던 나는 문득 괜찮은 상품을 발견하곤 피식 웃었다.
'이것도 살까.'
집으로 돌아와서 장비를 벗곤, 외투와 후드만 걸친 채 오른쪽 눈을 감았다.
헬리온 왕국의 소인족들은 오늘도 열심히 신전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어차피 돈은 운하가 알아서 벌어주니까 남는 노동력을 대규모 토목공사에 투입한 것이다.
지난번에 나한테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일부러 빠르게 짓고있는 것 같다.
'벌써 이 정도인가.'
신전의 토대는 이미 완성됐고, 큼지막한 기둥과 특징적인 디자인의 구조물들...
심지어 나를 위한 초대형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다.
정작 나는 앉을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지만.
"너희들 못 산다며? 운하 통행료가 저 정도로 짭짤한가?"
뱃사람들에게 운하는 단순한 지름길이 아니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항해중에 죽을 수도 있다.
"잠깐 가서 구경이나 해볼까... 헬리온의 소환사들아!"
[앗,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파아앗!
적당한 사이즈로 소환된 나는 아까 마트에서 사놓았던 별사탕을 선물해줬다.
소인족들은 그것을 살짝 맛보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별사탕 하나하나가 사람 몸통보다 좀 작은 수준이다.
"오오옷! 어떻게 이런 순수한 단맛이..."
"너무 달아! 극상의 단맛입니다!"
"신전 공사에 참여하는 인원들에게 나눠주도록 하라."
"예엣!"
설탕 100%의 단맛에 취한 녀석들이 방방 날뛰는 사이, 나는 미완성의 신전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봤다.
이번에는 적당한 크기로 소환되었으니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리에 엉덩이를 딱 붙이자마자 막대한 힘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예상치못한 사태에 이를 악문채 움찔거렸다.
"뭐야?"
"로완이시여! 신전이 마음에 드십니까?"
"고대의 기록에 따라서 열심히 건설했습니다!"
"고대의 기록?"
"그렇습니다! 추종자들의 신앙을 힘으로 바꾸는 시설입니다!"
신전이란 게 원래 그런 거였나?
하긴. 외신이 떳떳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일반적인 상식을 바라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몸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18화. 신전(2)
옥좌에서 끊임없이 힘이 흘러들어온다.
처음에 비해서 기세가 좀 줄었지만, 놀랄만한 분량이었다.
이쪽 세계에 소환을 당하면서 얻는 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런 게 꾸준히 들어오는 건가... 말도 안 되는군.'
신전 근처의 뾰족뾰족, 기괴한 모양새의 첨탑도 지금은 그저 예뻐보인다.
미완성 상태로 이 정도인데 제대로 완성되면 어떻게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신전이란 게 이런 거였을 줄이야.
나는 흡족한 기분으로 헬리온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신전이 완성되는 날, 너희들의 채무는 사라질 것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의심할 필요없다."
운하 건설에 대한 대가를 신전으로 받겠다고 하자 소인족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사실 너무 후하게 쳐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도 아무런 계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헬리온 왕국은 계속해서 내게 의존해야 해. 이 녀석들은 아직 운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당장 내 이름과 위엄을 빌려서 운하를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신전의 건설이 완료되면 전사들의 육성을 시작하라."
"예!"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
그렇다면 병사들이 왜 있겠는가.
대부분의 경우, 외신의 소환시간은 극단적으로 짧다.
결국 점령은 보병의 몫인 셈이다.
"로완님을 보좌할 최고의 전사들을 선별하겠습니다!"
"좋아."
파아앗!
헬리온에서 돌아온 뒤에는 곧장 양 제국으로 향했다.
양 제국의 황제, 양황이 1주일마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름은 다른 것이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에 이름을 바꿨다.
그래도 이쪽은 양반인게...
헬리온 쪽은 왕의 이름이 자그마치 다섯 개라서 그냥 헬리온 왕이라 부르기로 했다.
'근데 너무 자주 찾는 거 아니냐?'
양황의 입장에선 1주일이지만, 내 입장에선 하루다.
하긴. 건국 초기니까 상담이 많은 것은 이해를 한다.
파아앗!
"로완이시여! 오늘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입궁하시겠습니까?"
"그러지."
눈에 익은 여성 소환사가 마중을 나왔다.
아담한 사이즈로 소환된 나는 비무장 상태로 입궁했다.
어차피 소인족들은 내가 손가락만 튕겨도 죽는다.
헤르반이 조사해준 서쪽의 예법을 좀 더 느슨하게 만들어서 수입한 덕에, 황궁은 비로소 평온함을 되찾았다.
내궁에선 양황이 측근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화제가 나올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 로완 만세를 삼창하고 궁중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오늘의 첫 회의 주제는 후계자 채택 문제입니다."
"후계자?"
양황에게는 정부인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이 둘 있는 것으로 안다.
황후는 실로 표독스런 여인이었으나, 아들들은 총기가 넘쳐흘러서 궁 안팎으로 평이 좋다.
정부인의 첫째 아들에게 결격사유가 전혀 없으므로, 당연히 첫째가 후계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후계자 채택 문제라니.
"황후의 둘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싶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양황은 아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반면 측근들의 얼굴은 살짝 어두웠다.
내 앞에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심각한 사안인 것이다.
"그렇다면?"
"후궁들 중 한 명, 영씨 부인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궁?"
내가 역사나 예법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쪽 세계에도 엄연히 장자계승의 원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황궁 예법을 만들었을 때 분명히 확인한 사실이다.
나는 살짝 당황해서 캐물었다.
"영씨 부인이 뭘 했길래?"
"영부인은 춤을 아주 잘 추는... 아, 아니. 특별한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현재의 태자가 뭔가 잘못했는가?"
"현재의 태자는 악독한 황후에게 잘못 물들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
역시나.
황후가 매일같이 옆에서 황제를 갈궈대는데, 태자가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래도 후계자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아보인다.
뒤쪽에 도열한 신하들의 안색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단단히 헛바람이 들어가버린 것 같아서, 계속 질문을 던졌다.
"황후의 가문은 분명 개국공신이었지? 영부인의 가문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별 것은 없습니다. 덕분에 외척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 영부인의 자식이 뭔가 뛰어난 모습이나 기량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이제 겨우 8살이건만, 아주 똘똘한 녀석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답이 안 나온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상황을 정리해봤다.
"그러니까... 변변한 지지세력도 없는, 춤 잘 추는 후궁의 자식을 태자로 앉히기 위해서, 멀쩡하고 똘똘하고 정통성 있고 지지세력도 단단한 태자를 쫓아내겠다고?"
내 일장 연설이 끝나자 신하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황제는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안 되는 겁니까?"
"안 되겠지? 외신인 내가 한쪽 눈으로 봐도 이상한데."
"안 되겠군요..."
이런 걸로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지만...
사람들이 가끔씩 이상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황제는 어지간히도 미련이 남은 듯, 신음했다.
"황제가 되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차라리 불한당 시절이 더 낫군요."
"좋은 술과 의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그리고... 외신은 더하다."
나도 진심을 좀 섞어서 타이르자 그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말귀가 빠른 편이다.
"알겠습니다. 태자 책봉은 포기하지요."
"로완의 지혜를 찬미하라!"
뒤쪽의 신하들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환호했다.
회의는 곧장 다음 건으로 넘어갔다.
"가뭄으로 인한 흉년을 방지하기 위하여 농업용수 저장 시설을 건설할 필요가..."
"제국의 내부는 완전히 평정된 것이냐?"
이 녀석들은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았으니, 슬슬 신나는 숙청이 시작될 타이밍 아닌가?
그러나 정작 황제와 신하들은 애매한 반응이었다.
"나라의 안쪽은 평화를 되찾았으니 이제 외적에 맞설 준비를 해야겠지요."
"외적?"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서쪽에 있는 신들의 왕국이 가장 강력한 적수입니다."
녀석들은 지도를 펼쳐서 자세히 설명했다.
이렇게 보니 헬리온 왕국이나 숲의 요새도 아주 멀진 않다.
내가 개입중인 3개국의 한복판에, 드넓은 땅과 군도가 펼쳐져있다.
"이곳이 바로 신들의 왕국입니다.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의 연합이지요."
"왜 그렇게 부르는 거지?"
"이곳의 사람들은 외신을 아주 적극적으로 숭배합니다. 아예 국가의 통치를 전적으로 맡기는 경우도 흔하지요."
"숫자가 아주 많진 않지만, 외신들의 힘과 광기 때문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세력들입니다."
대부분의 군주들에게 외신은 썩 믿음직스럽지 못한 존재다.
기득권들의 입장에서 외신따윈 없는 게 훨씬 낫다.
골방의 사교도들이 소환한 외신에게 나라가 전복될 수 있다는 사실은 썩 달갑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예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나라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외신을 통치자로 인정한단 말이냐? 대부분의 외신들은 흉포하고 이해불가한 존재들일텐데?"
"그...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의 왕국 중 한 곳, 해양도시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내 전속이나 다름없던 소환사가 마법으로 영상을 하나 보여줬다.
영상 속에선 생선처럼 미간이 벌어지고, 양쪽 눈이 따로 노는 기이한 형상들이 보였다.
"저 흉물들이 인간이라고?"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외신의 피를 나눠받아 그들과 같이 변한 것입니다."
"아..."
"저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외신에게 봉사하기 위한 종족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외신들의 국가인 셈이다.
나는 지도 위의 표식들을 가리켰다.
"이 기둥같은 표시는 뭐지?"
"각지에 위치한 신전들의 위치를 기록한 것입니다."
"신전이... 이렇게나 많은가?"
"신들의 왕국이니까요. 보통은 저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이미 버려진 신전들도 많구요."
이렇게 보니까 이쪽 세계도 완전 지옥이다.
심심하면 외신이 튀어나올법도 하다.
충격을 숨긴 채 최대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오늘의 회의는 이쯤하면 되겠지."
"살펴가시옵소서!"
"로완께서 한쪽 눈으로 지켜보신다!"
또 이상한 기도문이 늘었군.
속으로 혀를 차고 있자 자그마한 소환사가 배웅을 겸해서 쪼르르 따라나왔다.
뒤늦게 흥미가 동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소, 소인은 메이린입니다."
"황궁에서의 직책은?"
"소인은 소환사들 중 1인일뿐, 별다른 직책은 없습니다."
"어째서지?"
메이린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환사들은 벼슬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외신들과 자주 접촉하는 소환사들은 업무의 특성상 미치거나 변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평소 섭섭찮게 대우를 해줘도, 권한은 엄격히 제한되며 벼슬을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좀 고급스런 소모품 취급이군. 신들의 왕국을 보면 이게 맞을지도.'
이제와서 보니 헬리온 왕국의 소환사들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헤르반은 소환사 겸 군주이지만, 녀석이야 워낙 난 놈이니까 논외다.
"그럼 이제부터 네 직책은 내 전속 소환사다."
"에엣, 로완이시여! 그런..."
"또 보자."
파아앗!
거실로 돌아온 나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숲의 요새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외신이 더 바쁘다니까 진짜..."
낮에 사냥을 다녀왔는데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세수까지 한 번 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헤르반을 불렀다.
"헤르반."
[오직 로완을 부릅니다!]
파아앗!
이번에는 딱 외신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을만한, 적당한 크기로 소환됐다.
넓게 원을 그린 채 천천히 춤을 추는 추종자들.
그 귀여운 녀석들에게 별사탕을 선물해줬다.
"선물이다."
"우와앗! 찬미하라!"
"달아!!"
별사탕은 색을 입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설탕 100%의 성분을 가지게 된다.
그야말로 순수한 단맛의 덩어리.
평소 맛없는 것만 먹던 소인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흐뭇하게 녀석들을 지켜보던 나는 어김없이 신전을 떠올렸다.
양제국은 아직 내가 해준 것이 별로 없는지라 신전을 지어봤자 큰 효과도 없겠지만...
이곳, 숲의 요새는 수장인 헤르반이 워낙 광신도라서 이미 어엿한 사교도 집단이다.
'근데 신전 지어달란 소리를 어떻게 하지? 내 입으로 지어달라긴 좀 쪽팔리는데... 외신으로서의 위엄도 떨어질테고.'
이래봬도 외신활동을 할 때엔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추종자들의 대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난번에 거둬들였던 전직 마녀다.
"로와니씨여, 감사, 햡니다."
"오... 그래. 맛있게 먹어라."
별 것도 아닌데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헤르반이 내게 재빨리 말해줬다.
"타샤도 좋아하는군요."
"이름을 새로 지었나?"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동굴에서 재보를 회수했습니다. 값진 소환재료들이 아주 많더군요. 그런 곳에서 장기 소환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전설의 세 모험가들이 추적하던 사교도들의 유산도 우리들의 손에 들어왔다.
내가 여전히 신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자, 헤르반이 에이스답게 선수를 쳤다.
"슬슬 신전을 지을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전이라. 내가 도와주랴?"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듯, 애써 담담히 말하자 황급히 고개를 젓는 헤르반.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롯이 저희들의 힘으로 지어야 신전의 효과가 강해질 겁니다."
신전을 짓는 것 자체가 숭배의 일종인 모양이다.
내가 어렵지 않게 납득하자 녀석이 계속 설명해줬다.
"다만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지?"
"그야 신전을 지으면 주변국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요. 특히 신들의 왕국에서 발광할겁니다."
"... 신전이란 게, 지으면 주변의 이목을 모으는 거였나?"
"당연합니다. 신전은 추종자들의 신앙을 힘으로 바꾸는 시설. 외신들이 보기에는 거대한 탑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짓기 시작하면,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해도 반드시 들키게 됩니다."
나는 헤르반의 설명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녀석이 괜히 지금껏 신전을 건설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헤르반은 다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헬리온 왕국은 어떨까?
"헬리온은 그냥 짓던데?"
"예엣? 그런 무모한!"
헤르반은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나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19화. 연애상담
띠링, 띠리리링...
[여보세요.]
시현은 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기도 전에 내 전화를 받았다.
공방에서 한창 작업중인 듯, 그라인더의 소음이 있지만 엄청 신경쓰이는 정도까진 아니다.
나는 시현에게 안부인사 겸, 용건을 밝혔다.
"별 일 없지?"
[그냥... 재미없는 작업뿐이지. 일을 좀 가려서 받을 걸 그랬나. 오늘은 무슨 일이야?]
"혹시 총기같은 거 구할 수 있어?"
[갑자기 웬 총기? 어디서 난사라도 하게?]
"몬스터가 대량으로 나오는 던전에도 대비하고 싶어서."
속마음을 숨긴 채 끙끙 앓았다.
내가 뜬금없이 총기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헬리온 때문이다.
녀석들이 앞 뒤 가리지 않고 신전을 지어버린 탓에, 헬리온 왕국은 근시일 내에 침공을 받을 예정이다.
안 그래도 운하 때문에 위태위태했다.
거기다 신전까지 짓고 있으면 그냥 놔둘 수 없겠지.
'무조건 대비해야 해.'
다만 신전이 완공될 때까지 버틸 수만 있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신전은 그 자체로도 장기 소환진 역할을 해줘서...
신전 근처에선 내가 한층 쉽고 강력하게, 오랫동안 소환될 수 있다.
일단 완성만 할 수 있으면 헬리온은 안전해지는 셈이다.
시현은 내 질문에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런 거 물어보기 좀 미안한데, 너는 오른쪽 눈이 안 보이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근데 조준사격이 가능해?]
"대충 갈겨도 맞는 걸로 쓰면 되지. 완전자동 산탄총이나, 중기관총 같은 거..."
총기는 헌터학과에서 제법 다뤄봤다.
초기의 헌터들은 총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현의 대답은 내 기대를 배신했다.
[죄다 대량살상무기잖아... 요즘은 일반 총기도 허가받기 진짜 어려워. 그마저도 3개월 단위로 갱신해야 하고.]
"신을 죽이는 단검도 그냥 들고다닐 수 있게 해주는데, 중기관총은 안 된다고?"
내가 허리춤의 바이퍼를 내려보며 말하자 시현이 피식 웃었다.
[제정신박힌 정부라면 대량살상무기를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알았어. 고맙다."
시현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장장이 헌터니까 이런 건 확실하겠지.
화약의 힘으로 외신을 물리치는 것은 포기해야겠다.
"옛날에는 잘만 썼는데... 이제와서 허가를 받는 것도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
안 그래도 찔리는 게 많은데, 쓸데없이 의심을 사고싶진 않다.
결국 나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주변의 상황을 알아볼 겸 귀를 열자 소환 희망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노하우가 쌓여서 대충 어느 지역에서 부르는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우선 헬리온과 숲의 요새의 주변 지역에 귀를 기울였다.
[척안의 로완께서 막대한 부를 선사하실 것이다!]
[위대한 지식을 선물하소서!]
[이번 대회에서 반드시 우승하고 싶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소원이 비교적 소박한데다, 소규모 소환도 제법 많다.
저런 소원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소환에 응하면 주변 정세를 손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장비를 걸친 채 외신활동을 준비했다.
'오늘은 훈련장도 쉬는 날이니까, 간만에 빡세게 달려보자.'
[제게 딱 맞는 남자를 찾고 싶어요! 저는 사나울 정도로 남자다운 사람이...]
그래도 이런 소원은 들어주고 싶지 않다.
외신은 데이트 매칭앱이 아니란 말이다.
애초에 내가 연애 관련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신중하게 소원을 고르던 나는 마침내 적당한 것을 발견했다.
[세계의 수호자시여, 악당들을 쳐부숴주십시오!]
역시 뭐 좀 박살내달라는 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마 외신들의 보편적인 이미지 때문이리라.
파아앗!
아담한 사이즈로 소환된 나는 주저없이 지하실을 나섰다.
소환사들과 그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다급히 나를 따라나선다.
"로, 로완이시여! 어디 가십니까! 어서 통역해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면..."
"외신을 멋대로 멈추려 하는 게 훨씬 위험하다구요!"
소인족들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것을 무시하며 밖으로 나와보자, 묘하게 익숙한 성벽이 보였다.
나는 정확한 소환지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긴... 지난번에 소환돼서 부숴달라고 부탁받았던 그 성이군.'
소환자를 죽여서 전쟁을 끝냈던 바로 그곳.
내 덕분에 살아남은 도시의 광장에는 내 동상이 하나 세워져있었다.
후드를 걸친 모습이라서 별 거 없긴 하지만, 한쪽 눈만 빛나는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으음."
"도시의 구원자 로완이시여, 마음에 드십니까?"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소환사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들의 주인이 직접 나섰다.
이제 보니 우리가 있었던 곳은 무슨 대형 상단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로완이시여!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건방진 상단이 있습니다. 부디 놈들을 벌해주십시오!"
촤라락!
무슨 대단한 증거물이라도 되는 양, 종이 한 장을 자신있게 펼쳐서 보여주는 녀석.
그러나 정작 나는 살짝 기가 찼다.
원주민들의 언어는 한창 배우는 중이지만...
내 불완전한 실력으로도 저게 가짜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무슨 주문서 같은데?'
왜 되도 않게 외신을 속여서 부려먹으려는 놈들은 끊이지 않는 걸까.
내가 좀 더 소원을 잘 골랐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곧바로 지적하는 것은 하수다.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체 하며 이야기를 좀 더 시켜봤다.
소환사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간신히 통역을 이어나간다.
"이 상단이 나를 모욕했다고? 이것이 증거라고 하였는가."
"그렇습니다! 놈들은 로완님의 이름을 팔아서 막대한 이득을..."
"너희가 이런 하찮은 수작으로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더냐?"
"히이익!"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소환사들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반면 상인은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어서 멀뚱멀뚱 서있다.
"뭐냐, 무슨 소리를 했길래... 끄욱?!"
콰지직!
상인의 몸이 바이스에 끼인 것처럼 납작하게 뭉개졌다.
나는 다음으로 소환사들을 노려봤으나...
뒤쪽의 동상을 보곤 살려주기로 했다.
헬리온에서의 전쟁이 코앞인데 벌써 적을 늘릴 수는 없다.
"로완이시여! 부디 자비를..."
"로완께선 한쪽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보신다!"
"나의 자비로 연명한 너희가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히이익."
물론 그렇다고 그냥 봐줄 생각도 없다.
"숲의 요새에 있는 나의 종복 헤르반에게 배상금을 가져와라. 만약 내 성에 차지 않으면, 이 도시를 마땅한 모습으로 되돌리겠다."
"바, 반드시 흡족한 배상금을 전달하겠습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한 뒤에 몸을 돌렸다.
파아앗!
"헛걸음했네. 뭐, 저쪽은 됐고..."
적어도 전쟁을 준비하거나 하는 모습은 없었으니 다행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봤다.
아까 들었던 연애관련 기도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남자의 목소리다.
[로완이시여. 꼭 차지하고 싶은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쪽은 데이트 매칭 앱이 아니라니까? 구경이나 한 번 해볼까.'
연애 관련 기도도 은근히 많긴 하다.
남녀간의 사랑은 인기가 끊인 적이 없는 대히트 소재다.
파아앗!
이번 소환자는 기사같은 차림새의 남성.
본인의 저택 마당에서 소환을 시도한 것 같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아까 녀석보다 훨씬 태도가 좋다.
"자비로운 척안의 외신 로완이시여! 경배받으십시오."
"자기소개부터 시작하자."
"예! 저는 기사출신의 영주인 세릭입니다. 이곳은 저의 영지로, 로완님의 것에 비하면 보잘것 없으나..."
세릭은 척 봐도 힘 좀 쓰게 생겼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 잠깐, 이 이야기는...'
어쨌거나 용건은 단순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귀한 여인의 마음을 온전하게 얻고싶다.
내가 소원을 멋대로 왜곡하지 못하도록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이 보였다.
문제는 상대 여인의 신분.
그녀는 벼락출세한 세릭이 손댈 수 없는 명문 귀족가 출신이었다.
그것도 한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실세의 외동딸이다.
"저의 사랑 패트리시아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끝내 사생아의 아들이라며 모욕까지 당했습니다. 부디 로완님의 무한한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
나는 손수 세릭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요리조리 돌려봤다.
이 정도면 인물도 썩 나쁘지 않다.
게다가 재료가 굉장히 기묘하게도 갖춰져서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자세를 잡고, 목소리를 위엄있게 가다듬어서 말했다.
"세릭. 너는 나를 믿고 무엇이든 하겠느냐?"
"예! 전 오직 그걸 위해서 로완님을 초대했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다. 하지만 외신의 지혜를 얻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다. 너도 알고 있겠지?"
"예, 그럼 어떤 것을 바쳐야할지..."
처음에는 나도 대가를 일일이 고민해봤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어이가 없었다.
아우터 갓인 내가 왜 이런 걸로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요즘은 대가를 통일시키고 있다.
"나는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받아갈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저의 소중한 여인 패트리시아 말입니까? 오오, 외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 아니, 그 여자는 네 구혼 상대잖아. 패트리시아 말고."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벌써 제 것인 것처럼 꼴값을 떨고있다.
세릭은 다시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다.
"그렇다면 저희 가문의 비전 검술을 바치겠습니다! 일개 기사였던 저를 영주로 만들어준 보물입니다."
"좋다. 그럼 어서 외출 준비를 끝내라."
"어디로 가십니까?"
"그야 패트리시아를 만나러 가야지."
뛸 듯이 기뻐하며 말을 준비하는 세릭.
나도 녀석과 함께 말을 타고 이웃 도시로 향했다.
이윽고 번듯한 저택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버텨선 것이 보였다.
세릭은 갑자기 기가 죽은 듯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놈들 다 때려눕히고, 패트리시아를 불러내서 매질해라."
"지, 진심이십니까?!"
"선택하라. 이대로 돌아갈지, 사랑하는 여인을 얻을 것인지."
"..."
스릉!
잠시 망설이던 세릭은 검을 뽑아들곤 앞으로 나섰다.
깜작 놀란 경비들이 막아섰으나 세릭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기사로서 출세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아주 손쉽게 때려눕힌다.
'잘 하는군. 여차하면 염동력으로 도와주려 했는데.'
"저놈은 뭐냐, 막아!"
"끄악!"
이윽고 패트리시아의 사촌들마저 땅을 구르자 마침내 본인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세릭을 마주했다.
"세릭? 당신, 이게 무슨 짓인가요!"
"패트리시아! 감히 네가 나를 모욕해?"
"아악!"
세릭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칼집으로 패트리시아를 때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소란은 점점 더 커져서, 결국 가주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포위당한 세릭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칼을 털썩 떨어뜨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옷의 이곳저곳이 찢어진 패트리시아가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잠깐만요! 저 이 남자와 결혼하겠어요!"
"뭐, 뭐야? 패트리시아. 네가 미친 것이냐?"
장인어른께서 화들짝 놀란 사이.
세릭의 눈알이 내쪽으로 멍하니 회전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혀를 찼다.
과연 누가 알았으랴.
고귀한 여인 패트리시아가 척안의 로완에게 연애상담이나 신청했을 줄.
그녀가 아주 거칠고 난폭할 정도로 기운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을 줄...
패트리시아가 원했던 이상적인 남성상은 지금의 세릭이 보여준 것과 딱 맞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외신은 데이트 매칭앱이 맞는 것 같네.'
두 사람을 연결시켜준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장인어른의 앞에서 말했다.
"잘 됐군. 척안의 로완이 두 사람의 혼인을 축복하겠다."
"처, 척안의 로완이라니? 외신이시여, 어찌..."
"저...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세릭의 허리에 매달린 패트리시아가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두 사람의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몸을 돌렸다.
20화. 체험, 외신의 현장
준비운동을 마친 나는 똑바로 서서 연습용 검을 휘둘러봤다.
휙, 휘릭!
소원의 대가로 세릭에게서 받아낸 검술이 서툴게 펼쳐졌다.
기사 가문에 대대로 전해내려온 비전 검술.
솔직히 기대가 없었다곤 못하겠다.
'한국의 헌터용 검술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머니까.'
한국은 원래부터 실전검술과는 거리가 멀었는데다...
마력을 활용하는 헌터용 검술은 일반적인 검술보다 훨씬 난해하다.
협회에서 부랴부랴 헌터용 무술 연구회를 설립했지만 성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나는 헌터학과 출신인만큼, 헌터용 검술의 기초 정도는 익혀뒀다.
그러나...
'이 검술도 별론데?'
세릭의 비전 검술이란 것도 아주 대단할 것은 없었다.
세릭이 제법 출세했다지만, 녀석의 가문은 근본적으로 일개 기사 가문.
그곳의 비전 검술이 수준높았다면 그게 더 놀라웠을 것이다.
결국 세릭이 강한 것이지, 검술이 강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쓸만한 기술을 몇 개 추려서 정리하곤 다음 훈련을 진행하러 갔다.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헬리온에 대한 걱정뿐이다.
헬리온의 신전은 앞으로 1주일 내에 완공된다고 했다.
남은 시간은 지구 기준으로 고작 하루!
외적들은 그 안에 무조건 쳐들어올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불안한 기분으로 훈련을 마치곤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컨디션 조절을 해야한다.
헬리온의 추종자들이 신전의 완성에 전념하는 동안, 헤르반은 주변국의 동태를 파악했다.
다행히 바로 옆나라들은 비교적 잠잠하다.
외신으로서의 내 이미지가 썩 나쁘지 않은데다...
대부분은 신전의 건설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신들의 나라.
그곳에서도 해신의 왕국을 가장 위협적인 상대로 여기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해신과 운하로 통행료 장사를 하는 헬리온.
두 세력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내가 다시 장비를 점검하려는데, 헤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완이시여! 도시에서 보낸 보상금이 도착했습니다. 상단 하나를 통째로 털어온 것 같군요. 당신께 모두 바치겠습니다!]
'그게 벌써 왔나.'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던 상인의 재산.
소환사 놈들에게 배상금을 알아서 보내라고 했는데...
아예 상단 전체를 처분해버린 모양이다.
건성으로 했다간 도시가 지워져버릴 수도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좋아. 그 정도로 용서해줄까. 헤르반. 공물은 네가 알아서 사용하도록.'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적절한 곳에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비밀리에 외신의 소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뭐야, 내 적인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면 직접 보시겠습니까?]
"그래."
헤르반은 새와 쥐 따위의 눈을 빌려서 소환 현장을 감시중인 모양이었다.
나는 오른쪽 눈을 감아서 그런 헤르반의 눈을 빌렸다.
떨리는 심정으로 소파에 앉자 거대한 소환진과 수많은 소환사들이 보인다.
한창 소환을 준비중인 것 같은데, 새삼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소환 과정을 제대로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지금껏 소환을 많이 당하기만 했지, 옆에서 지켜본 적은 거의 없었다.
소인족들은 살짝 헤메고 있었다.
녀석들은 분주히 준비를 하며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그래서, 어떤 외신을 소환하지? 이름이 뭐라고?"
"그건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이다."
척 봐도 수준이 썩 높은 소환사들은 아니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헤르반에게 물었다.
"헤르반. 나는 소환이 쉬운 편인가? 사실대로 고하거라."
[로완님을 소환하는 것은 정확히 평균 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언어를 연구해서 소환주문과 이름을 읊어야하지만... 미천한 저희들의 입으로도 이름을 쉽게 발음할 수 있고, 특별한 제물을 요구하지도 않으시죠.]
"호오."
그 사이, 소인족들은 살짝 의견다툼을 시작했다.
"그냥 메이저한 외신을 소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요즘 유명한 척안의 로완이라든가..."
"맞아! 척안의 로완은 강력하고 말도 잘 통한다던데. 그런 외신은 거의 없다고!"
"추종자들에게도 축복을 아낌없이 내려준다고 들었어!"
내가 흐뭇한 웃음을 짓고있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소환사가 일갈했다.
"안 된다! 척안의 로완은 너무 유명해져서 요즘은 기도도 잘 안 받아준다고!"
"그, 그런가..."
"너희들, 마법군주 헤르반을 뛰어넘어서 로완의 총애를 받을 자신이 있나? 아니면 양 제국보다 큰 영토를 가지고 있어? 이제와서 로완의 추종자가 되어봤자 말석이나 겨우 차지하면 다행이다!"
"듣고보니 일리가 있어!"
소환사들도 참 피곤하겠다.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우두머리 소환사의 입에서 놀라운 소리가 나왔다.
"안심해라. 우리가 지금부터 소환할 것은 척안의 로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외신... 로완보다도 훨씬 일찍 소환된 존재다!"
"오오옷!"
"게다가 그 외신은 힘과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준다고 한다!"
'뭐야?'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면, 한국인인 건가?
어쩌면 예의 황금세대 특집기사를 가져온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헤르반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법을 유지했다.
"그런 외신이 있었다니... 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거지?"
아주 훌륭한 지적이 들어왔지만, 소환사들의 우두머리는 그저 당당했다.
"그야 다른 소환사들은 우리들만큼 똑똑하지 못하니까!"
"옳소!"
"우리는 위대한 존재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환 준비를 마친 소환사들은 마침내 주문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기나긴 소환 주문의 끝에서 외신의 이름을 부를 때가 되자 목소리가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하여, 송유횬이시여, 저희들의 부름에 응하여 강림하십시오!!!"
"강림하십시오!"
그러나... 소환진은 은은하게 빛나기만 할 뿐, 외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고 있자 헤르반이 즉시 설명해줬다.
'왜 안 나오지? 실패한 건가?'
[아무래도 이름을 틀린 것 같습니다. 외신의 이름은 저희들의 언어와 입모양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아, 그렇군.'
내 이름은 별로 한국인답지 않아서, 소인족들이 발음하기 매우 쉬운 편이었다.
이제 보니까 소환 도중 이름을 잘못 불린 기억은 거의 없다.
'근데 송유횬이 누구야?'
본인들의 실수를 깨달은 소환사들이 이름을 조금씩 바꿔봤다.
"위대한 외신 송우혼이시여! 아니, 송유현? 성유횬?"
"..."
"성유현, 성우현... 오옷, 반응이 온다! 성우현이다!"
'성우현?!'
머릿속에서 후보를 몇 명 나열해뒀지만...
설마 우현이었을 줄이야.
녀석은 한국의 A급 헌터 중 꼴찌.
아무리 봐도 외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아비가일의 이름이 나왔다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보다 일찍 소환됐다면서? 근데 아직 A급 말석이라고? 설마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뭐가 됐든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우현은 그야말로 놀라운 속도로 소환에 응했다.
지구와 소인족 세계의 시차를 감안하면, 거의 듣자마자 날아온 수준이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사그라들자 포탈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성우현이 튀어나왔다.
소인족들은 미친 듯 기뻐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날뛰었다.
"성우현! 성우현이시여!"
"저희들에게 당신의 피를 내려주소서!"
"엇, 내 피?"
후드 속에서 헤실헤실 웃던 우현이 몸을 살짝 굳혔다.
소인족들은 외신의 추종자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으니, 피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오직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아니, 그. 괜찮긴 한데 내 피는 좀..."
'뭐지? 추종자를 만들고 싶지 않은 건가? 아앗!'
다음 순간,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성우현은 노골적으로 불안해하면서도, 소환사들의 애원에 못이겨서 피를 한 방울 짜냈다.
손가락에 작게 만든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물어버렸다.
"조심해서 마셔라. 내 피는 효과가 아주 강하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외신이시여! 당신의 제국은 오늘 이 자리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우오오!"
야심차게 외친 우두머리 소환사가 핏물을 솥에 담더니...
그것을 벌컥벌컥 게걸스럽게 마시기 시작했다!
남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물론 체급차가 워낙 심해서 그리 많이 먹진 못했다.
그것과 별개로 효과는 명확했다.
"우, 우욱... 속이, 안 좋ㅇ..."
뻐엉!
핏물을 받아마신 녀석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살가죽과 핏물을 뒤집어쓰게 된 소환사들이 멍하니 굳어있다가 이내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에엑!"
"외신의 분노닷!!"
"아, 아냐! 나 화 안 났어!"
성우현은 필사적으로 해명했으나... 그의 말을 믿어주는 소환사는 없었다.
나는 대충 예상했던 광경에 속으로 혀를 찼다.
'우현이는... 육체강화 능력자란 말이다!'
비록 말석이라곤 해도 A급은 A급.
그 피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진하다.
혈액의 산소 운반량만 5배에, 재생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
연약한 소인족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큰 힘을 품고 있다.
"다들 진정해. 내가 잘 해줄테니까... 우와앗!"
결국 우현이는 순식간에 역소환 당해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소환사들이 현장에서 마구 울부짖었다.
"으아악! 외신의 추종자가 되어서 사치스럽게 지낸다는 내 인생계획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미래를 돌려줘!"
"그러게 왜 저런 듣보잡 외신을 소환해서..."
[...]
"..."
헤르반과 나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기나긴 침묵을 깨고, 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완이시여. 정녕 저 외신이 당신과 같은 종족이란 말입니까?]
"... 안쓰러운 꼴이다만, 그래도 나의 동기이자 전우다. 네게 그런 말을 듣고싶진 않구나."
[용서해주십시오.]
"됐다. 계속 수고하거라. 또, 나와 같은 종족의 외신이 있으면 즉시 알려주고."
[그리하겠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채 비틀비틀 욕실로 향했다.
설마 우현이도 외신활동 중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나와 달리 외신으로서의 명성은 거의 쌓지 못한 것 같다.
'이제 보니...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구나.'
성우현은 이름부터 발음이 어렵다.
게다가 육체강화 능력자란 특성 때문에 추종자를 만드는 것도 힘들다.
나는 헤르반에게 추가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성우현이 언제부터 소환되기 시작했는지 알아보거라."
[예!]
과연 우현이는 내가 외신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다. 그런 기색은 거의 없었다.
만약 눈치를 챘다면 어떻게든 티를 냈겠지.
녀석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하니, 저쪽 세계의 소식을 수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설마 여자 헌터들에게 껄떡거리는 우현이가 외신이었다니...'
내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초인종이 울렸다.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보자 시현 공방의 익숙한 여직원이 부하들까지 데리고 뭔가를 가져왔다.
뭔진 몰라도 부피가 제법 크다.
"안녕하십니까 임로완 고객님. 완성품 배달입니다."
"네에? 저는 주문한 물건이 없는데요?"
"사장님의 선물이니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부하직원들을 먼저 내려보내곤 거실로 들어와서 설명해줬다.
염동력으로 상자를 들어보자 묵직한 쇳덩어리같은 느낌이다.
"열어보시죠. 원래 시현 공방은 이런 걸 제작하지 않지만..."
"네, 네에."
긴가민가하며 상자를 개봉하자 거대한 은색의 중기관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한참동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간신히 토해낸 첫 마디는...
"... 이거 불법이라면서요?"
"아닙니다."
여직원은 살짝 인상을 쓰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잘 들어주세요. 앞서 사장님께서 설명하셨던 것처럼, 현재 헌터들의 총기 사용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대량살상무기는 허가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아, 네."
"하지만, 몬스터의 사체를 이용해서 만든 헌터 장비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녀는 기관총의 각부를 만지며 설명해줬다.
저건 K6 기반의 중기관총이라서 잘못 만지면 손가락이 날아갈 수도 있는 물건인데, 너무나도 능숙하다.
"이 기관총은 거의 100% 몬스터 사체로 제작됐습니다. 시현 사장님께선 대한민국 헌터 협회와 직계약된 특급 장인으로서, 현용 제식장비를 별도의 허가없이 복제 및 생산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나 주려고 일부러 중기관총을 카피 생산했다는 것인가?
그것도 몬스터의 사체를 사용해서?
나는 녀석의 정성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직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쉽게 말해서 편법입니다. 제발 들키지 말아주세요. 동봉된 탄약을 모두 사용하시면 그냥 폐기하시구요."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형수님."
"네엣?"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시현 씨가 말했나요?"
"네에?"
"?"
"..."
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이 이어지던 가운데.
나는 겨우 상황을 깨달았다.
"둘이 진짜로 사귀는 중이었어요?"
"..."
이걸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던가?
괜히 민감하게 반응해서 들켜버린 여직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총기 관련 라이센스 없다는 거, 절대 들키지 마세요! 기왕이면 아예 사용하지 않으시는 게 가장 좋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배웅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근사한 자태를 감상했다.
편법은 법을 교묘하게 피해가는 것일뿐.
정말 들켜도 문제가 없다면 합법이라고 했겠지.
아까 여직원이 말했던 것을 보면, 불법 직전 수준이다.
그래도 저쪽 세계에서만 사용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외신 놈들, 50구경을 처먹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자.'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된 나는 씨익 웃었다.
21화. 해신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나는 헬리온 왕국 추종자들의 목소리를 듣곤 몸을 일으켰다.
[주인이시여! 적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소환사들은 모두 소환을 준비하라."
[예!]
"상황이 정확히 어떻지?"
장비를 걸치고, 물을 한 잔 마시며 오른쪽 눈을 감자 헬리온의 앞바다가 보였다.
넓고 푸른 바다의 저편에 새카만 점들이 다닥다닥 찍혀있다.
'잠깐... 설마 저게 다 군함인가?'
[해신 데아곤의 군세입니다! 상급 외신 디곤의 아들, 바다의 지배자!]
앞서 우려했던대로 바다의 외신이 군대를 보내왔다.
군함은 소인족들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작았지만, 그것이 자그마치 수십척.
갑판 위에서는 기이한 몰골의 해신 추종자들이 전투준비 태세를 갖춘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이렇게 보니까 국가 단위의 사교도 집단이라는 것이 실감된다.
나는 차분히 가슴을 가라앉히곤 위엄있는 목소리를 냈다.
"두려워할 필요없다. 내가 직접 맞설 것이니."
[오직 로완님을 믿습니다!]
"즉시 공사 작업을 중단하고 전투 준비를 시작하라. 노인과 약자들을 신전으로 대피시키도록."
신전은 거의 완성된 상태.
지붕만 씌우면 끝나는 수준이다.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며, 시현이 선물해준 특제 중기관총을 집어들었다.
염동력으로 보조해도 상당히 묵직하게 느껴진다.
'나 혼자 어떻게든 해야 해.'
마음 같아선 숲의 요새의 최정예 추종자들을 지원군으로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적이 하필이면 바다의 외신이라서 제 때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만약 바닷길이 막히지 않았더라도, 항해 기간만 2개월이다.
'숲의 요새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전투 준비! 전투를 준비하라! 적들이 신전을 노리고 있다!]
헬리온의 소인족들은 장비를 챙겨서 빠르게 도열했다.
나름대로 훈련이 된 것 같지만, 어인족들에 비하면 숫자가 너무 적다.
철컥!
마지막으로 기관총을 점검하곤 탄약을 장전했다.
"소환 개시."
[로완이시여! 외적으로부터 헬리온을 지켜주십시오!]
파아앗!
소환이 완료되자, 그 어느때보다도 힘이 넘쳤다.
그동안 부지런히 소환에 응하며 힘을 키워둔 보람이 있었다.
완공 직전의 신전에서도 폭발적인 힘이 흘러들어왔다.
간절히 살아남고 싶어하는 추종자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로완이시여!"
"너희는 모두 대기하라."
저벅, 저벅.
앞바다를 향해서 걸어나간 나는 망설임 없이 중기관총을 겨눴다.
해신의 군함들은 그새 더 가까워졌다.
'아주 바글거리는군.'
반쯤 썩어버렸지만, 이형의 군인들을 가득 태운 배들이 무려 40여척.
좀 허술하지만 대포같은 무기도 잔뜩 실려있다.
해신 데아곤의 피를 나눠받은 전사들은 척 봐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인해보인다.
피를 정말 아낌없이 뿌렸다는 느낌이다.
'저게 그 유명한 봉사 종족인가...'
놈들이 제대로 상륙하거나, 대포로 공격을 시작하게 되면 헬리온군따윈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다.
철컥!
내가 중기관총을 거치해도, 놈들은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삼각대 설치를 완료한 나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꽉 잡곤 엄지를 방아쇠에 갖다댔다.
"로, 로완님께서 뭘 하시는 거지?"
"대피 작업을 서둘러! 의심하지 말고 받들어라!"
염동력의 최대 약점은 사거리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원거리 공격 능력보단 훨씬 짧아서, 저렇게 멀리있는 적은 제대로 타격할 수 없다.
억지로 사거리를 늘리면 마력 소모가 급격히 심해진다.
하지만 k-6 중기관총의 유효사거리는 약 1800m.
최대 사거리는 거의 7km에 달한다.
'너희들의 신을 원망해라.'
투두두두두두!
그대로 방아쇠를 꾹 누르자 묵직한 발사음과 함께 흙먼지가 마구 일어났다.
멀리서 접근하던 군함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격파당했다.
대 몬스터용으로 제작된 탄두가 썩어빠진 군함을 스티로폼처럼 박살내기 시작했다.
투두두두!
"히이익!"
"끼에에에엑!"
적군은 물론이고 아군도 혼비백산해서 바닥에 엎드렸다.
운없이 총탄에 스친 적병이 시체도 찾기 힘들만큼 산산조각났다.
투두두두!
천천히 총을 회전시키며, 수평선을 깨끗이 휩쓸어버린다.
기관총 사격이 지나간 자리에는 배들의 잔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저, 저것이 외신의 무기..."
"로완이시여! 로완을 의심말라!!"
그렇게, 해안선으로 접근하던 함대가 순식간에 쓸려나갔으나...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아까 내 눈에 바다로 뛰어들던 적병이 똑똑히 보였다.
자칭 해신의 종복들이 수영을 못 할 리는 없다.
'그래도 군함이랑 대포는 거의 다 정리했어. 상륙작전은 지옥이란 걸 가르쳐주지.'
쏴아아!
멋대로 한 시름 놓던 찰나, 마침내 적의 외신이 등장했다.
본토의 신전에서 소환되어 여기까지 헤엄쳐온 듯, 물 속에서 나타난다.
'징그럽군.'
봉사종족들을 쏙 빼닮은 탓에 놀라움은 거의 없었다.
앞서 선행학습을 열심히 했으니까.
거대한 생선대가리를 달고있는주제에 몸은 쓸데없이 근육질.
해신 컨셉을 지키려는 듯, 손에는 삼지창을 들고있다.
전체적으로 잔뜩 뒤틀린 인어공주처럼 생겼다.
심해의 공포가 절로 느껴질 정도!
신들의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만큼 상당한 수준의 외신이겠지만...
이곳은 놈의 신전에서 너무 멀다.
뱀들의 어머니 때와 같은, 압도적인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힘의 총량을 비교하면 내가 근소하게 우위일 것이다.
"크, 나겔, 파탄... 크아아!"
무어라 지껄인 놈이 삼지창을 크게 휘둘렀다.
투두두두!
굳이 기다려주지 않고 기관총 사격을 날렸지만, 파도가 높게 일어나서 총탄을 막아버린다.
대 몬스터용 탄환도 두꺼운 물의 장벽을 뚫어내진 못했다.
'역시 이걸로 외신까지 잡는 건 욕심이겠지.'
어차피 탄약도 거의 다 썼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중기관총을 버리곤 염동력을 끌어올렸다.
중기관총 사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다면, 지구 기준으로 최소 A급 몬스터다.
쏴아아!
바다의 외신 데아곤이 삼지창을 앞세우자 높게 일어난 파도가 해안을 향해서 밀려왔다.
소인족들 기준으론 10미터 높이정도 될까?
헬리온은 해안이 가까워서 저딴 거에 당하면 신전이고 왕궁이고 죄다 박살난다.
지난번에 봤던 동영상 강의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막을 수 있냐 없냐를 고민해선 안 된다.
그냥 막는 거다.
"히이익! 로완님 맙소사..."
"저희들을 지켜주십시오!"
"수호하겠다."
콰아앙!
염동력의 장벽과 파도가 부딪히자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왔다.
집채만한 파도는 결국 염동력의 장벽과 공멸하여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데아곤은 계속해서 멀리서 파도만 일으켜댔다.
가까이서 붙으면 바이퍼나 흑룡 단검으로 어떻게든 승부를 볼 수 있을텐데, 나를 묶어두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큰일이군.'
데아곤의 파도는 결코 만만찮아서, 나도 전력을 발휘해야 겨우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원래 공든탑을 부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
그 사이. 데아곤의 추종자들은 어찌어찌 상륙에 성공했다.
처음보다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저딴 파도에 휘말리고도 살아서 상륙한 것을 보니 봉사종족이란 타이틀이 겉치레는 아니었다.
"로완님께서 파도를 막아주고 계신다!"
"적군이 상륙했다! 전원, 사격 준비!"
헬리온의 전사들은 즉시 활과 화살을 꺼내들었다.
"키에엑!"
걸레짝이 된 몰골로 맹렬히 달려오는 생선대가리들.
봉사종족답게 고통도, 두려움도 거세된 모습에선 안쓰러움마저 느껴진다.
나는 손을 쓰고 싶었지만 그새 파도가 한 번 더 밀려왔다.
바다 저편에서 데아곤이 기분나쁘게 웃고있다.
"크크큭..."
계속해서 나를 묶어두고 있지만, 복잡한 전술따윈 아니다.
그저 사람을 괴롭히는데에 능숙한 것이리라.
태어나면서부터 악의에 통달한 것 같은 존재다.
'거슬리는군. 하지만... 파도를 막지 않으면 신전이 무너져.'
신전이 무너지거나, 내 추종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버리면 내 패배다.
내 컨디션과 별개로 소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당기고... 쏴라!"
슈슈슉!
수많은 화살들이 일제히 날아가서 어인족들을 덮쳤다.
그러나 정작 어인족들은 맨몸으로도 화살을 튕겨냈다.
하긴. 저런 높은 파도에 휘말리고도 살아남은 놈들인데, 화살 따위에 상처입을 리가 없다.
나는 상상 이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전사들을 보곤 혀를 찼다.
'이 자식들... 완전 쓸모없잖아?'
"히이익, 화살이 안 먹히다니!"
이대로 접근전에 들어가면 헬리온은 끝장이다.
그나마 실력이 좀 있는 마법사들은 내 소환을 유지하느라 벅차다.
내가 속절없이 녀석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던 중.
돌연, 헤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이시여! 저희도 당신과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마음은 고마운데, 어느 세월에 도착하려고?"
[주군, 길을 허락해주십시오!]
"내가? 뭐... 마음대로 해봐!"
파아앗!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도록.
신전의 앞에 새로운 포탈이 열렸다.
안쪽에서 등장한 것은 헤르반을 위시한 숲의 요새의 정예들이었다.
헤르반은 번개를 날려서 장애물을 돌파하던 어인족들을 지져버렸다.
"누가 주군의 영광스런 전투를 함께할 것인가!"
"나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숲의 광신도들은 앞다투어 전선에 합류했다.
나는 물론이고 소환사들도 놀란 눈으로 포탈을 주시했다.
저 포탈을 저런 식으로 쓸 수 있었던 건가?
아무리 봐도 그렇지 않은데?
내가 의아해하던 중, 포탈에서 마지막으로 타샤가 걸어나왔다.
꾸벅.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이해가 됐다.
'그렇군. 내 집을 경유해서 숲의 요새로 이동했던 것처럼... 다른 차원을 경유해온 건가?'
타샤는 고향 마을에서 내 집으로, 내 집에서 숲의 요새로 이동했던 경험이 있다.
그녀는 그 경험을 살려서 새로운 방식의 소환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부터 남다른 녀석이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재능이다.
헤르반은 최전선에서 번개를 휘두르며 외쳤다.
"신화의 현장에서 싸우게 된 행운을 축하하라!"
"우오오오!"
열심히 싸워주는 광신도들에겐 좀 미안했으나...
헤르반과 타샤를 제외한 녀석들은 여전히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두 녀석이 합류한 것만으로도 훨씬 여유로워졌다.
앞서 기관총에 당한 추종자들이 너무 많아서, 데아곤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서 피해가 더욱 누적되자 쉴새없이 밀어닥치던 파도도 처음보다 훨씬 낮아졌다.
나는 다시 기관총을 집어들어서 탄약을 모두 써버렸다.
투두두두!
"아앗, 운하다! 운하쪽에서 적들이 온다!"
그 때, 운하로 숨어들었던 어인족들이 측면 공격을 시도했다.
녀석들은 오직 내 신전을 향해서 돌진해왔다.
타샤가 공간을 비틀어서 몇 놈을 처리했지만 남은 숫자가 제법 많다.
"아아앗!"
"노약자들을 지켜라! 찬송가와 기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돌파당합니다!"
그러나 시끄러운 비명은 갑작스럽게 뚝 끊겨버렸다.
신전의 뒤쪽에서 홀연히 나타난, 세 명의 소인족들이 봉사종족들을 격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설의 세 모험가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결정타 데샤봇!"
"외신에게 도움받았던 그 굴욕... 절대로 잊지 않아요!"
"오옷, 전설의 세 모험가들이다! 로완의 축복을 받은 용사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키이익..."
추종자를 너무 많이 잃어버린 데아곤이 고통스럽게 비틀거렸다.
나는 앞으로 좀 더 나가서 염동력으로 놈을 붙잡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놈을 직접 죽이고싶다는 일념으로,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도망치지 마라, 생선 대가리!"
"캬악!"
급격히 약해진 데아곤은 결국 내게 붙잡혀서 해안으로 질질 끌려왔다.
나는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들어서 놈의 몸을 마구 찔렀다.
흑룡의 비늘 단검과 바이퍼가 비늘돋힌 몸통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린다.
"키아아악!"
발악하듯 몸을 비틀던 놈이 하늘로 손을 뻗었다.
청명하던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더니, 거대한 눈알이 구름을 비집고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면서도 놈의 정체를 깨달았다.
'상급 외신 디곤! 데아곤의 아버지인가.'
뱀들의 어머니 정도의 존재감은 없지만 나보단 훨씬 강한 외신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조상님을 불러오긴.
외신주제에 가족들끼리 너무 돈독한 것 아닌가?
속으로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놈을 노려봤다.
신도들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순 없다.
"히이익! 하늘을 보지마! 미칠 수도 있어!"
"로완이시여!"
"..."
정작 디곤은 아무말도 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착각이 아니라면... 내 손에 들린 독 단검, 바이퍼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놈은 이내 웃음 한 점 없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심지어 데아곤을 따로 도와주거나 하지도 않았다.
몸을 돌리며 중얼거리는 놈의 목소리는 왠지 몰라도이렇게 들렸다.
[멍청한 딸아. 뱀과 엮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지.]
파아앗!
'잠깐, 얘가 여자라고? 진짜 무섭네.'
내가 진정한 공포를 느끼고 있자...
결국 데아곤은 온몸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며 역소환됐다.
일종의 분신이라곤 해도, 저 정도로 당했으니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다.
겨우 평정을 되찾은 추종자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디, 디곤이 물러갔다!"
"로완 만쎄!! 로완이시여!"
"헬리온은 오직 로완의 왕국입니다!"
"다들 수고했다."
애써 힘차게 몸을 돌린 나는 자리를 수습하곤 승전 기념 축제를 열 것을 명령했다.
22화. 역습의 외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염동력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어제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하룻밤 잤는데도 피로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못 다한 일이 남아있다.
"탄약을 다 쓰면 처분하라고 했지? 좋아."
콰드드득!
제 역할을 다한 특제 중기관총이 내 염동력에 천천히 찌그러졌다.
시현이가 제작한 총기는 어지간한 헌터용 방어구 수준의 내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 염동력으로 어렵지 않게 접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A급 염동력자들 중에서도 이런 게 가능한 인원은 드물 것이다.
콰직, 콰드득...
결국 기관총은 원형을 못 알아볼 정도로 압착됐다.
그것을 대충 보관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해신 데아곤과 어인족들.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만 상상 이상의 강적들이었다.
홈그라운드라서 어찌어찌 이기긴 했지만 동등한 조건이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정작 데아곤의 나라는 완전히 망해버린 것 같지만.'
데아곤은 내게 너무 심각한 타격을 입은데다 추종자들도 많이 죽어버렸다.
덕분에 녀석의 나라는 승전 축제가 끝나기도 전에 멸망해버렸다.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던 주변국들이 냅다 쳐들어가서 데아곤의 신전을 함락시킨 것이다.
신들의 나라는 그야말로 복마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다른 놈들도 괜히 공격당할까봐 덤비지 못했던 거겠지.'
데아곤은 그나마 바닷길을 사용할 수 있어서 내게 덤볐지만...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나는 이번에 녀석에게 배운 것이 무척 많았다.
다만 교사라기보단 반면교사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나는 외신활동의 방식을 재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어인족들... 정말 굉장했지. 화살을 맞아도 안 죽을 줄이야."
외신의 피를 나눠받은 봉사종족은 일반적인 소인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괴물들이었다.
그만한 녀석들을 만들기 위해서 피를 얼마나 뿌려댔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참고로 외신의 혈액은 단순한 피가 아니다.
피에 마력이 담겨있기 때문에, 너무 많이 뿌리면 그만큼 약해진다.
하지만... 그 대단한 어인족들도 중기관총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외신이 작정하고 조지려하면 얼마든지 조져버릴 수 있는 수준.
녀석들이 수천씩 있어도 외신들간의 싸움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
역시 외신은 외신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반적인 추종자들은 그 약한 어인족들보다도 도움이 안 되고."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방식을 변경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이대로 피를 뿌려가며 봉사 종족을 만들어낸들, 뱀들의 어머니같은 상급 외신이 될 수 있을까?
절대 안 되겠지.
게다가 나는 외신으로서의 특색이 상당히 약하다.
내 피를 받은 추종자들은 어인족들처럼 극적으로 변신하거나 하진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전략을 세웠다.
"우선 소환사들과 우수한 소인족들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특별히 관리한다."
소환사들과 헤르반, 타샤, 전설의 세 모험가, 양제국의 황제와 헬리온의 왕 등등.
소환사들과 각 세력의 지도자들은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 녀석들을 특별 사육대상... 사육 소인족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다른 소인족들은 죄다 방목해서 키운다.
말이 방목이지 사실상 방치다.
"내가 너무 일일이 개입하는 건 외신으로서의 위엄을 떨어뜨릴 염려가 있어. 나도 이제 급이 좀 올라갔으니까, 일반적인 소환은 무시하자."
데아곤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급한 김에 이것저것 도와줬지만...
이제 급한 불을 껐다.
이미 신전이 완공됐으니, 나도 좀 더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새로운 추종자들은 헤르반이나 근처의 사육 소인족에게 보내서 선별시킨 다음, 소질이 보이는 경우, 내가 직접 관리한다.
헤르반은 똘똘하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외신으로서의 특성이 약한 것이 내 최대 장점이다.
나는 봉사종족 따위를 만들지 않아도 추종자들의 숭배를 받을 자신이 있다.
척안의 로완은 보편적으로 사랑과 경외를 받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후우."
대전략을 다시 세우자 머리가 매우 맑아진 기분이 되었다.
천천히 옷을 걸치고 훈련장으로 향하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늘 보기 싫었던 엘리베이터의 거울도 한층 보기 편해졌다.
'내가 누구? 척안의 외신 로완이지.'
살짝 으쓱거리다가 기분좋게 날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곤 훈련장에 들어섰다.
"로완 씨, 일찍 오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곤 트레드밀에 올랐다.
2분에 걸쳐서 천천히. 최고 속도까지 올린다.
이건 헌터용 훈련장비는 아니라서 크게 부담되진 않는다.
"후우, 후우, 허억..."
외신활동에서 얻은 마력 덕분에, 내 육체적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A급 수준은 진작 뛰어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멀리서 지켜보던 매니저가 걱정스레 물었다.
"로완 씨, 워밍업인데 무리하시는 거 아니죠?"
"아녜요. 후우, 후우."
뒤이어서 속속 출근하는 헌터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성우현이 떠올랐다.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외신 활동을 시작했던 황금세대의 동기.
녀석이 외신이었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설마 다른 놈들이 더 있는 건 아니겠지?'
뒤늦게 조사를 해봤지만 다른 지구 출신 외신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현이는 외신으로서 활동하기에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이니까 그렇다 쳐도...
다른 지구인의 이름은 아예 찾을 수도 없었다.
저쪽 세계에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소문도 듣지 못했다.
지구 출신의 외신은 역시 나와 우현이밖에 없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기계의 속도를 조금 낮추며 TV를 켰다.
이런저런 헌터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문득 놀라운 소식이 보였다.
[현직 A급 헌터 성우현, 갑작스런 개명 신청... 새 이름은 헨리?]
"... 뭐?"
하도 어이가 없어서 트레드밀에서 떨어질 뻔하자 지나가던 헌터들이 뉴스를 보곤 쿡쿡 웃었다.
"성우현이 이름을 바꿨다고? 갑자기 왜 저런대?"
"이제 본격적으로 외국 헌터들 꼬시려는 거 아니야? 솔직히 아비가일은 아무리 봐도 무리잖아."
"그럼 이제 성헨리인 건가?"
"아니. 그냥 헨리래. 성이 헨, 이름이 리."
"..."
소인족들이 이름을 제대로 못 부르던 것이 어지간히도 싫었나보다.
그런데, 개명신청을 하면 저 이름으로 소환될 수 있는 걸까?
나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은 채 본격적으로 루틴을 시작하려 했다.
삐이익!
헬스장 전원의 스마트폰에서 신경질적인 소음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즉시 비상 경보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수도 북쪽 200km지점에 초대형 몬스터 출현 확인. 모든 헌터는 비상대기...]
"레이드 경보? 이게 얼마만이래?"
"아, 저녁에 한 잔 하러 가기로 했는데..."
헌터들은 짜증을 왈칵 내며 익숙하게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도 얼른 샤워한 다음 장비를 챙겨서 나왔다.
"매니저 님, B급은 협회로 가야하는 거 맞죠?"
"헌터마다 다른데... 문자에 집결 지점 없나요? 아, 이건 협회 본부 맞아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비상 집결 지점으로 향하는 헌터들의 얼굴에 두려움따윈 없었다.
우리에겐 어차피 아비가일이 있으니까.
S급이 없어서 레이드 상황마다 목숨걸고 싸워야하는 국가의 헌터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여유롭다.
"도착했습니다."
다른 헌터들과 택시를 타고 협회에 도착하자 협회의 직원들이 비용을 내줬다.
본부의 로비에는 이미 헌터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차분한 심정으로 그나마 아는 얼굴을 찾아가자 서유림이 보였다.
"선배, 일찍 오셨네요."
"이게 얼마만의 레이드래?"
"한 8개월쯤 되지 않았나요?"
"그런가."
참고로 지난번 레이드 몬스터는 아비가일의 일검에 쓰러졌다.
솔직히 이렇게 호들갑 떨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의 경우란 게 있으니 무어라 못하겠다.
B급은 기껏해야 대피유도나 하겠지.
"앗, 성우현 선배다."
"우현... 아니. 헨리야, 안녕."
내가 아까 봤던 뉴스를 떠올리며 인사하자 녀석이 몸을 잠깐 굳히더니, 감동받은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엇! 로완이 너 어떻게 알았어? 그래, 나 이제 헨리야."
"아까 훈련장에서 개명신청했다는 뉴스에서 봤거든."
"헨리요?"
유림이 기가 찬다는 듯 어색하게 웃자 자칭 헨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사실 예전부터 이름을 바꾸고 싶어서... 이제 무조건 헨리로 불러줘."
"이제 외국 여자 꼬시게요?"
"..."
어째 나랑 반응이 똑같군.
내가 너무 나쁜 선입견을 심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우현이는 살짝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변명했다.
"내가 예전부터 로완이처럼 이국적인 이름을 갖고싶었거든. 그래서..."
이름을 바꿔도 추종자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똑같을텐데.
하지만 저쪽 세계에서 내 이름을 듣기라도 하면 굉장히 골치아파진다.
너무 늦기 전에 어떻게든 하는 것이 좋을까?
속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자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백룡 길드다!"
"아비가일이 왔어?"
슝!
헨리는 육체강화 능력을 사용하여 누구보다도 빠르게 앞으로 치고나갔다.
그는 열심이 아비가일에게 본인의 새로운 이름을 어필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아비가일에게 성우현은 성우현이다.
"오, 로완이 안녕. 열심히 하고있어?"
"그럭저럭."
평소처럼 멍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비가일.
내가 손을 흔들자 피식 웃으며 지나간다.
그러자 서유림이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아비가일 선배랑 언제 화해했어요?"
"화해라니... 내가 쟤랑 싸움이 되겠냐?"
"감정싸움 정돈 되겠죠."
"그냥 내 열등감을 인정하고 조금 솔직해졌을 뿐이야."
유림은 미안한 얼굴로 입을 가리며 더 이상 별 말 하지 않았다.
로비의 헌터들이 서성거리고 있자 마침내 브리핑이 시작됐다.
[대형 몬스터, 남쪽으로 이동 개시. 마력량 판정 결과 S랭크...]
"와, 역시 이쪽으로 오네."
"그야 저 위쪽에는 더 이상 때려부술 것도 남아있지 않을테니까..."
하필이면 북쪽에서 소환된 탓에 초동대처가 늦었다.
만약 남쪽이었다면 던전 밖으로 기어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어서 몬스터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이 뼈로 이뤄진, 사악한 거신.
보기만 해도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일어나는 저 형상은 내 기억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토카?'
외신 활동 초기에 붙었던 거신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자 주변의 헌터들이 메쓰거워했다.
"기분나쁘게 생겼네 진짜."
"엄청 크다. 보기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느낌이야."
"우욱."
경악하면서도 서유림을 부축해주자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선배. 뭔가... 엄청 껄끄럽네요."
"그래?"
확실히 기분나쁘게 생기긴 했지만... 이게 정상적인 반응인가?
소인족들은 원래 반응이 강렬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저나 외신이 지구에서도 소환될 수 있었던 건가? 아토카는 그렇게 급이 높아보이진 않았는데...'
내가 뱀들의 어머니에게 끌려갔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꿈 속이었다.
프로답지 않게 덜덜 떨고있는 카메라맨이 간신히 아토카의 모습을 비추고 있자, 녀석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토카! 커시어, 파탄! 로와아아아아아아아아안!!]
"... 뭐라는 거야?"
"몰라. 기분나빠..."
놈의 포효를 듣고나서야 깨달았다.
아토카는 복수를 위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내 이름을 너무 길게 늘여서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의 목소리를 들은 헌터들이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마침내 아비가일이 현장에 도착했다.
휘릭!
등 뒤에 매달려있던 대검의 손잡이를 꽉 잡은 아비가일이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악!
아토카의 오른팔이 폭발하듯 날아가버렸다.
고통과 공포로 가득찬 비명이 지축을 울려대자, 정찰기가 그대로 추락했다.
23화. 기념회
아토카와 아비가일의 전투는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첫 일격 이후로 싸움이 제대로 성립되지도 못했다는 느낌이다.
"키이익!"
아토카의 비명소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이번에도 분신으로 소환됐을텐데, 이상한 일이다.
마치 진짜 수족이 잘려나가고 있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은 실내의 헌터들이다.
나는 고통스럽게 비틀거리는 서유림을 부축하여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괜찮아?"
"선배... 욱."
주차장에는 이미 병원 이송을 위한 차량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서유림 뿐만이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아토카의 비명을 듣곤 괴로워하고 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나와 A급을 비롯한 몇몇 정도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몬스터의 능력인 건가? 이쪽으로!"
"우현아, 저쪽도!"
"나는 이제 헨리라니까..."
"지금 개소리할 시간없어!"
성우현은 내 다그침을 듣고나서야 투덜거리며 구조활동을 시작했다.
다행히 다들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니다.
헐떡이던 서유림을 구급차에 태워서 보내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헌터들이 이 정도라니... 도시까지 내려왔다면 큰일났겠네."
"B급 이하는 거의 다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직접 보고 들은 것도 아닌데 이 정도야?"
겨우 자리를 수습한 헌터들이 한시름 놓았다.
"로완아, 너는 괜찮아?"
"어. 아무래도 개인차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네. 같은 B급이라도 누군 쓰러지고, 누군 안 쓰러지고..."
이제보니 소인족들이 외신을 앞에 뒀을 때의 반응과 살짝 비슷하다.
감각기관과 뇌가 인식을 거부하는 듯한 기분.
나도 뱀들의 어머니를 마주했을 때 체험했던 적 있다.
"아비가일은... 괜찮겠지 뭐."
"레이드 종료! 레이드 종료! 몬스터 토벌 완료됐습니다!"
"아, 끝났네. 상황 종료!"
결국 평소처럼 아비가일 혼자서 끝내버렸다.
사실 외신 아토카는 내게도 밀렸을만큼 전투기술이 형편없었으니까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지구에서도 외신의 소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시 충격이었다.
소인족들의 세계에선 손쉽게 격퇴했던 녀석이지만 여기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까 분명히 내 이름을 불렀지... 설마 나를 찾아온 건가? 내게 복수하려고?'
만약 그렇다면, 소환은 또 어떻게 됐던 거지?
지구에도 외신을 숭배하는 사교도 집단이 존재하는 건가?
궁금한 점이 너무 많지만, 당장 해결될만한 것은 거의 없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다행히 서유림은 그새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제대로 휴식하세요!"
장비를 벗고 샤워를 마친 다음, 식사까지 해결한 뒤에 헤르반을 불렀다.
요즘은 이것저것 공부할 것이 많다.
"헤르반. 너희 종족들의 신체 구조를 알고싶다."
[신체 구조라하심은... 해부도를 뜻하시는 겁니까?]
"정확하다."
외신의 피를 받은 존재는 외신을 닮는다.
나는 지구인과 소인족들이 얼마나 닮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헤르반은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지금 당장 산제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멀쩡한 사람 죽이진 말고... 뭐 서적이나 자료 같은 건 없나?"
[그거라면 헬리온 왕국이 전문입니다. 지금은 거의 다 잃어버린 것으로 알고있지만, 헬리온인들은 왕의 시체를 방부처리해서 보관하는 풍습이 있으니까요.]
"그러냐? 고맙다."
이번에는 주소를 잘못 찾았군.
내친김에 헬리온 왕국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헬리온 왕국에는 이미 신전이 완성되어서, 소환사들의 도움 없이도 소환이 가능하다.
'일단 장비 좀 걸치고...'
거울 앞에서 차분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정신을 집중하자 눈앞에 포탈이 나타났다.
위엄있는 걸음걸이로 걸어들어가자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적당한 사이즈로 소환되긴 했지만, 내 키에 비교해봐도 결코 꿇리지 않는 기둥과 천장.
확실히 대규모 토목공사에는 일가견이 있다.
웅장하면서도 튼튼하게 지어진 신전이다.
신전의 안쪽에는 노약자들이 적당히 모여있었다.
운하 덕분에 먹고사는 일은 해결됐으니, 사회복지 차원에서 간단한 식사와 교육 정도는 제공하기로 했다.
"로완이시여! 로완께서 내려오셨다!"
"어서 사제들과 소환사들을 불러라!"
옥좌에 앉아서 기다리니 금방 추종자들이 달려왔다.
나는 녀석들 중 그나마 익숙한 소환사를 한 명 지목했다.
"너는 너의 몸에 대해서 잘 아느냐?"
"제가 미욱하나 남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고대의 장례 의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됐군. 그럼 지금부터 차분히 설명해보아라."
"예! 우선 목 아래부터 읊겠습니다."
한국대 헌터학과의 교육과정에는 인체의 구조와 역할에 대한 것도 있었서, 나는 간단히 복습 정도만 해왔다.
헌터들도 간단한 응급조치 정도는 자주 한다.
"우선 목에는 얇고 길쭉한 관이 2개 있습니다. 각각의 관은 역할이 다릅니다. 하나는 음식물을 섭취하는 데 쓰고, 다른 하나는 공기를 섭취합니다."
'기도와 식도.'
"심장의 아래에는 숨통이 있습니다. 이 숨통에는 근육이 달려있지 않고, 가슴뼈로 보호받습니다."
'폐도 제대로 달려있고.'
"이곳의 장기는 독을 분해하고, 등쪽에는 배설기관이 있습니다."
'간과 신장. 장기의 위치도 거의 똑같아.'
소인족들의 신체는 지구인의 것과 놀랄만큼 유사했다.
닮았다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됐다. 네 공부가 헛되지 않았구나."
"영광입니다 로완이시여!"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비를 벗어던지곤 일찍 잤다.
이 몸은 외신 아토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것 같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잘 자고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충전기에서 뽑아내자 협회에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레이드 승리 기념 행사 안내...]
"진짜 별 걸 다 한다니까."
보아하니 협회에서 성대하게 기념회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세금낭비라며 비웃었겠지만, 이번에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당시 본부에 모여있던 헌터들은 아직도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유림아, 괜찮아?]
후배 서유림에게 메세지를 보내봤다.
메세지는 거의 즉시 왔다.
어떻게 이토록 빨리 입력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저는 이미 퇴원했어요. 그냥 멀미였던 것 같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다행이네"
[그런데, 선배도 이번 기념회 가실 거죠?]
"내가?"
평소 같았다면 단칼에 안 간다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서유림을 에스코트할 겸, 참석하기로 했다.
다른 헌터들의 상태가 몹시 신경쓰이기도 했다.
"너도 가게?"
[네, 같이 가요 그럼.]
"알았어."
참석을 결정해버린 뒤에는 옷장을 열어봤다.
대부분은 정장을 입고 올텐데... 내 정장은 좀 심하게 싸구려다.
대학교 졸업 이후로 입어본 적이 없어서, 지금의 체형에 맞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내 옷 중에서 그나마 고급이라면... 역시 전투복이군.'
C급 시절에도 사용했던 전투복이지만, 돈을 아낌없이 써서 나름대로 고급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헌터들을 위한 행사니까 이걸 그대로 입고가도 문제없을 것이다.
무난하게 복장 선택을 마치고 한숨 쉬면서 공부를 계속한다.
요즘은 세계사 공부도 하고있다.
현대 지구의 문물 중에서 소인족들의 세계에 적용할만한 것을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해당 시대의 문물은 주변 환경과 사회, 정세에 최적화된 결과물이다.
무턱대고 바꿨다간 역효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로완이시여! 양제국의 신민들이 당신을 찾습니다!]
'아, 슬슬 시간이네.'
양제국으로의 소환은 월 1회로 줄였다.
내 입장에선 4일에 1회니까, 이래도 상당히 귀찮다.
파아앗!
"로완 만세!"
"로완께서 한쪽 눈으로 지켜보신다!"
포탈을 통과하자 소환사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내 전속 소환사로 임명된 메이린은 정식으로 관직을 하사받아서, 남들보다 조금 더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내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잘 어울리는군."
"가, 감사합니다! 로완이시여..."
그런데, 내궁으로 걸음을 옮기던 내 눈에 쥐 한 마리가 호다닥 궁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이런 황궁에도 쥐새끼가 있다니.
나는 염동력으로 녀석을 짓이겨버렸다.
콰직!
'오늘의 주제는 정해졌군.'
현대 지구의 문물 중 그나마 적용이 쉽고 효과적인 것이라면 역시 위생관념이다.
괜히 흑사병 따위에 걸리지 않으려면 위생과 쥐 박멸은 필수.
특히 쥐는 다른 동식물들과 달리 인류에게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쥐로 인한 득보다 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위생도 필수지. 적어도 손 씻기와 세수 정도는 생활화해야 해.'
물이 부족한 지방이라면 또 몰라.
얘들은 벼농사를 짓는다.
벼는 물을 아주 많이 먹으니까, 수자원이 풍부하지 않으면 농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물이 모자라서 못 씻는다는 변명은 안 통한다.
그러나 정작 내 명을 들은 양제국 관리들의 반응은 신통찮았다.
"로, 로완이시여. 그러니까... 쥐를 잡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농부들이야 잡지말라고 해도 알아서 잡겠지만, 도시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 너희는 대대적인 쥐 박멸 작전을 실시하거라."
어차피 박멸작전을 해도 씨를 말리진 못한다.
그래도 숫자라고 줄여보려 하는 건데...
신하들이 자꾸만 꼬치꼬치 캐묻는다.
"어째서 쥐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까?"
"쥐들이 병균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병균은 무엇입니까?"
"너희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작은 질병 덩어리다. 쥐들이 특히 많이 가지고 있지."
"히, 히이익? 그럼 지금 제 몸에도..."
"그래, 네놈의 꼴을 보니 병균이 득실거리겠군."
"크아아악! 병균에게 잡아먹혀버린다!"
신하들은 아주 발광을 해댔다.
기초적인 보건 개념도 없는 녀석들에게 위생의 중요성을 설파하려니까 진짜 미치겠다.
신하들 가운데엔 흙으로 손을 씻는 녀석도 있었다.
"... 네놈은 뭘 하는 거지?"
"대지신의 입김이 닿은 정결한 흙으로 더러움을 씻어내고 있습니다!"
"물로 씻어라!"
"하지만 로완이시여!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씀인지라..."
"..."
황제와 메이린은 내 진노를 감지하곤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유모를 짜증에 시달리던 나는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녀석들이 내게 말대꾸를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잠깐, 나 외신이잖아. 아우터 갓이 왜 일일이 설명을 하고 앉았냐?'
아무래도 소인족들의 친절한 이웃 이미지가 너무 굳어버린 것 같다.
나는 가장 신경을 긁어대던 신하를 염동력으로 으깨버렸다.
"폐하! 외신의 말이라고 무턱대고 수용하는 것은 제국의 파멸을... 그아악?!"
콰드득!
"히이익?"
신나게 주절거리던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여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눈치와 살피던 황제와 메이린은 거의 동시에 머리를 조아렸다.
본인도 놀랄만큼 화난 목소리가 황궁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적당히 하라!"
"로, 로완이시여!"
헤르반이 통치하는 숲의 요새는 물론이고...
헬리온 왕국의 녀석들도 내가 뭐라고 하면 넙죽 엎드리면서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쪽은 내가 운하를 놓아줘서 그렇겠지만.
예전에 황궁에서 칼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는데, 이놈들은 그냥 개념이 없다.
"네놈들이 납득하지 못하면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것이 외신을 대하는 자세냐?"
""고정하시옵소서!""
이놈들을 위해서 따로 공부까지 했던 것이 전부 바보짓처럼 느껴진다.
나는 몇 놈을 더 족친 뒤에 소환을 해제하곤 방으로 돌아왔다.
"굳이 잘해줄 필요가 없네."
허탈한 심정으로 정비를 하고있자 순식간에 기념행사 당일이 됐다.
일단 가겠다곤 했지만 막상 가게 되니까 귀찮다.
그래도 억지로 전투복을 걸치곤 협회 본부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이르지만, 본부의 앞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헌터들은 다들 세금을 팍팍 뜯기는 편이라 아까워서라도 참석한 것 같다.
때마침 머지않은 곳에서 서유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제대로 된 파티룩이다.
"유림아, 몸은 좀 괜찮아?"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선배는 왜 또 전투복이에요?"
"이게 그나마 고급이야. 몸에 익어서 편하기도 하고."
"못말려요 진짜. 아앗!"
순간 현기증이라도 느낀 듯 발을 헛디디는 서유림.
늦지 않게 그녀를 부축해주자 때마침 아비가일이 나타났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우리를 지켜보던 그녀가 내 근처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급격히 휘청거렸다.
"로완이 안녕? 우옷..."
뻔한 수작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이건 틀렸네.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게. 아마 부활할테니까, 관은 거꾸로 묻어놓고..."
"나는 너무 빨리 포기하는 거 아니야?"
서유림과 마찬가지로 파티룩의 아비가일이 작게 투덜거리며 내 앞에 똑바로 섰다.
넘어지기 0.1초 전이라는 느낌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균형감각과 유연성으로 자세를 회복했다.
서유림도 내가 아비가일을 대하는 것을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멀찍이서 시현을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24화. 파열
회장은 상당히 번잡했다.
아직 시간이 좀 이른데도, 테이블은 거의 다 차버렸다.
늦게 온 사람들은 선채로 행사를 즐겨야 할 것이다.
다행히 시현은 이미 테이블 하나를 맡아두고 있었다.
옆에는 지난번에 봤던 여직원도 보인다.
관계자들까지 데려오는 건 힘든 것으로 아는데, 시현이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나는 테이블의 예약석 표지를 보곤 피식 웃었다.
"이건 또 뭐야?"
"자꾸 누가 앉으려 하더라고."
"그렇겠지. 안녕하세요 제수씨."
시현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직원에게 인사를 건네자 서유림이 살짝 놀랐다.
"제수씨? 둘이 사귀어요?"
"좀 됐대."
"지난번엔 형수님이었는데, 이번엔 왜 제수씨죠?"
"선물의 효과는 24시간까지에요."
여직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시현이 지난번의 선물을 언급했다.
"그거, 폐기했어?"
"그래."
"폐기품은 나중에 공방으로 가져와. 처분해줄게."
"또 시현 선배에게 뭐 받았어요?"
"응.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만약 중기관총이 없었다면 신전을 지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직원은 뒤늦게 몹시 신경쓰인다는 듯 말했다.
"개인적인 일에 사용하신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차라리 개인적인 일에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뭐라구요?"
"자기가 로완이를 잘 몰라서 그래. 의료 헌터 불러서 눈 고쳐준대도 싫다하고, 실종자 구한답시고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고..."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했던 거야."
뒤늦게 변명하자 시현이가 코웃음쳤다.
"보통 그렇게까지 하냐? 이 형님께서 장비라도 제대로 챙겨줘야지..."
"다들 여기에 모여있었네!"
그 때, 아비가일이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했다.
원래 6인용 테이블이라서 아직 자리가 좀 남아있었다.
작게 혀를 차며 염동력으로 맥주병을 낚아챘다.
다 우리 세금으로 차려놓은 거니까, 마음껏 먹고 마시면 된다.
잠깐 뷔페 테이블에 다녀온 나는 일단 배를 좀 채우며 주변을 둘러봤다.
남자들은 전투복차림도 많지만, 여자들은 거의 다 사복이다.
다행히 서유림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다.
'다른 헌터들도 괜찮아보이네.'
정작 외신 아토카를 베어버렸던 아비가일은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을 슬금슬금 쳐다보고있자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너는 괜찮냐? 다른 헌터들은 난리도 아니던데."
"와앗, 걱정해주는 거야? 고마워. 난 멀쩡해. 너희처럼 약하지 않으니까!"
"... 너는 항상 한 마디가 많아."
"그런가?"
정말이지 싫다고 생각하던 중, 성우현... 아니, 헨리가 얼굴을 비췄다.
우리 테이블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호다닥 뛰어온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웃으며 말했다.
"자리 좀 바꿀까!"
"그래."
"엇차."
시현과 나는 자진해서 빈 좌석을 포위했다.
이제와서 아비가일이 어떻게 될 것 같지도 않지만, 성우현이 대놓고 껄떡거리는 것을 지켜보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덕분에 녀석은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죽을상이 됐다.
"진심이야?"
"앉기 싫으면 가라."
"아니, 그건 아니고."
우현이가 출세욕이 강해서 그렇지, 완전 나쁜 놈은 아니다.
같은 황금세대라서 불편함이 덜한 것도 있고.
다른 사람이 앉게 놔두느니 이 녀석에게 줬다.
제법 훌륭한 음식을 술과 함께 즐기고 있자 우현이가 나를 자꾸만 힐끔거렸다.
"왜 그래?"
"전부터 신경쓰이던 건데, 아비가일이 너를 너무 잘 따르는 거 아니야? 우리 동기들 중에서도 너는 확실히 특별취급이야."
"다 비결이 있지."
"그게 뭔데?"
"악용의 여지가 있어서 가르쳐줄 순 없어. 특히 너한테는."
"야, 그러지 말고..."
성우현이 뭐라하든, 가르쳐줄 생각은 없다.
사실 이거 좀 창피하다.
자칫하면 명예훼손이 될 여지가 있는 내용이다.
서유림에겐 대충 설명해줬지만, 아비가일은 성격이 완전 어린애같다.
너무 쉽게 거리를 허락해버리면 순식간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특히 뻔한 칭찬 같은 건 단번에 아웃.
그렇다고 너무 홀대하는 것도 안 된다.
아까 했던 것처럼 가끔은 신경을 써줘야 한다.
여러모로 관리가 까다로운 녀석이다.
"근데 이번 레이드 몬스터는 진짜 특이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좀 소름끼치더라."
"로완 선배는 아무 이상 없었어요?"
"나도 좀 어지러웠어. 눈 때문에 제대로 못 봐서 멀쩡했던 건가?"
"또 그런 농담을..."
다행히 기념회는 제법 즐거웠다.
주최측에서 쓸데없는 짓을 안 해서, 편하게 먹고 마시며 떠들어댈 수 있었다.
순수하게 위로 목적의 행사라는 것이 실감된다.
그새 대충 배를 채운 아비가일이 내쪽을 빤히 쳐다봤다.
언제 봐도 예쁘긴 예쁘다.
외모 점수를 발언이랑 성격으로 다 깎아먹어서 그렇지, 생긴 것은 흠을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다.
노출이 거의 없는 의상인데도 불구하고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보기 즐겁다.
녀석은 내 전투복을 빤히 쳐다보더니, 몸을 조금 기울여서 귓속말했다.
"로완이, 그거 뭐야?"
"응?"
"그런 거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데?"
"엇..."
아비가일이 지적한 것은 내 허리춤의 독 단검, 바이퍼였다.
눈에 띄지 않도록 칼집에 고이 넣고 잠금까지 해뒀는데 그걸 알아본 것이다.
녀석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아니다. 로완이는 괜찮으려나!"
"... 조심해서 관리할게."
"응, 응. 난 음료수 좀 가져올 거야."
이 단검이 위험물이란 걸 알아본 건가?
당혹스런 기분으로 자리를 지키자 오늘의 유일한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선물 추첨식이 시작됐다.
그 때. 돌연 우현이 몸을 흠칫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이동했다.
"어디가? 괜찮냐?"
"아, 괜찮아. 잠깐 화장실좀..."
그러나 녀석이 향한 곳은 화장실과 반대 방향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헤르반을 찾았다.
'헤르반. 근처에 성우현을 모시는 사교도들이 있느냐?'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기껏 개명 신청을 했다지만, 소인족들에게 성우현은 여전히 성우현이다.
애써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며 오른쪽 눈을 살짝 감는다.
[찾았습니다! 뿌려놓은 덫에 걸렸군요.]
'안내하도록.'
[예!]
파아앗!
옹기종기 귀엽게 모여있는 소인족 소환사들의 앞에 성우현이 나타났다.
어디 구석진 방을 찾아서 소환당한 것이다.
'미친 자식.'
헌터들이 득실거리는 건물에서 소환에 응하다니.
코가 석자라지만 좀 지나쳤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소인족들은 그저 신이 났다.
[성우현이시여! 찬미받으소서!]
"나는 더 이상 성우현이 아니다."
성우현은 곧바로 부르기 쉬운 이름을 어필했다.
"나의 이름은 헨리... 외신 헨리로 재탄생했다!"
[에엣...]
[헨리셨군요. 조, 좀 부르기 쉬운 것 같기도...]
"그렇지? 혹시라도 소환이 안 되면 다시 성우현이라고 불러도 된다. 아, 그리고 이건 나의 피다."
미리 희석해놓은 혈액 앰플을 무슨 사은품처럼 척척 내놓는 헨리.
나는 동기의 절박한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오, 외신의 혈액이닷!]
[감사합니다 외신이시여! 당신의 추종자가 되겠습니다!]
[저희들에게 금단의 지식과 부, 영생을 하사하소서!]
첫 소환부터 바라는 것도 많군.
내 경험상 저런 놈들을 도와주면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우현이는 마냥 희희낙락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제대로 된 추종자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선사하겠다. 내 피는 진하니까 조심해서 마셔라."
[조심하라 하심은...]
"아침 저녁 점심, 식후 세 번에 걸쳐서 나눠마시면 된다!"
보고 있으니까 진짜 안쓰럽다.
그런데, 소환사 하나가 위험한 발언을 해버렸다.
[역시 척안의 로완의 동료분이십니다!]
"... 뭐야? 로완이?"
[예! 이 황금의 마도서에 쓰여있지 않습니까! 외신 성우현... 아니, 헨리 님의 동료분들에 관하여...]
저 황금세대 특집기사는 성우현 본인이 배포한 거니까 모를 리 없다.
아마 '나는 이렇게 굉장한 존재다...'하고 어필하기 위해서 공개한 것이리라.
문제는 왜 하필 내 이름이 나왔냐는 것이다.
진지한 얼굴이 된 헨리가 다급히 캐물었다.
"너희들, 나의 전우 로완에 대해서 잘 알고있나?"
[물론입니다! 척안의 로완은 해신 데아곤을 물리치고 헬리온에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
[세계의 수호자! 마법군주 헤르반과 양제국을 거느린 불패의 존재!]
[천금을 소유하셨으며 약자들을 지켜주시는...]
결국 올 것이 왔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을 빠져나갔다.
똑같은 한국어로 소환이 가능한 외신이니까, 소인족들이 나와 성우현을 같이 묶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문제는 우현이가 그것을 언제쯤 눈치채냐는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최악의 타이밍에 깨달아버렸다.
'헤르반, 이만하면 됐다.'
[옛!]
"엇. 선배, 어디가요?"
"아는 얼굴이 보여서 잠깐 다녀올게."
"아, 네엣."
그대로 건물을 나가려는데, 때마침 복도로 나오던 성우현과 딱 마주쳐버렸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손목을 꽉 쥐고 적당한 방으로 들어갔다.
"로완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뭔데 갑자기?"
사실 뿌리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봤자 아무것도 안 된다.
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우현이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철컥.
비어있는 회의실로 들어간 우현이 문을 닫곤 나를 돌아봤다.
"로완이 너... 아우터 갓이라고 알고 있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일단 잡아떼어봐서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나 우현이는 이미 확신한 눈치였다.
녀석의 머릿속에선 이미 모든 정황과 단서가 조합되었다.
"척안의 로완이라니... 어째 요즘 너무 빨리 치고오른다 싶었어."
"헨리야. 너 진짜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어디 아프냐? 갑자기 개명신청도 하더니."
나는 계속해서 잡아뗐다.
어차피 내가 외신으로 활동중이라는 물증따윈 없다.
그렇다고 소인족들의 세계에 대해서 밝힐 것인가?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결국 발을 동동 구르던 우현이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로완아, 나 좀 도와주라! 응?"
"아니 무슨..."
"너 저쪽 세계에서 꽤 잘 나가시더만! 나도 좀만 밀어주라. 너 따지고 보면 나 덕분에 소환당한 거잖아! 내가 황금세대 특집기사를 가져가서, 소인족들이 네 이름을 알게 된..."
"야, 그게 자랑이야?"
특집기사의 불쾌한 내용을 떠올리며 내뱉자 우현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사실 그건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만한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냥 가져가진 않았어. 내가 적당히 편집을 했다고!"
"아, 그러셔."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하자. 응? 아니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생각?"
"그래. 그 소인족 던전, 만약 외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이 자식이 나를 협박하는 건가?
사실 성우현의 입장에선 잃을 것이 없긴 하다.
내가 침묵하자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놈이 멋대로 지껄였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우리가 그냥 같이 활동하면 되는 거야."
"... 어떻게?"
"형제 외신! 내가 형님 할테니까, 네가 아우 해. 이제부터 서로 돕자고."
이 자식이 아주 날로 먹으려고 한다.
녀석의 머릿속에선 여전히 본인이 우위인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걸 진짜 죽여버릴 수도 없고...'
제대로 측정해보진 못했지만, 내 실력은 이미 A급 중에서도 중상위권 수준은 될 것이다.
상성이 살짝 나쁘다곤 해도 성우현따위에게 질 것 같진 않다.
게다가 내 염동력은 대인전 최강으로 꼽히는 능력이다.
인체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섬세해서 잘못 건드리면 훅 가버린다.
"고민할 필요 없어. 그냥 따라오면 된다니까?"
"..."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
똑똑!
방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시선을 교환한 우현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아비가일이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아, 둘 다 여기 있었네! 여기서 뭐해? 곧 스크린 TV추첨 시간이야."
"그냥 남자들끼리 이야기지 뭐. 거의 다 끝났어."
"그럼 들어가도 되겠지?"
우현이 어색하게 답하자 아비가일이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구석에 몰린 기분이 됐다.
"그러고 보니 우현이에게 부탁할 게 있어."
"어... 나한테? 근데 난 이제 헨리인데..."
"우현이는 우현이야."
"... 알겠어, 그냥 성우현 할게. 근데 무슨 부탁?"
우현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살짝 기대하는 눈치다.
아비가일이 귓속말을 하려는 듯, 그런 그에게 몸을 살짝 기댔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곤 완전히 굳어버렸다.
맹수앞의 초식동물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콰득!
곧이어 불쾌한 파육음이 기묘할만큼 작게 새어나왔다.
우현은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육체강화계 헌터의 심장을 손쉽게 뭉개버린 아비가일이 부드럽게 손을 빼냈다.
가슴을 관통했던 손가락에는 핏물도 거의 없었다.
"잘 가."
"..."
털썩.
우현의 몸이 옆으로 쓰러지자마자 웬 사람들이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와서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핏물을 닦고, 시체를 케이스에 넣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현실감이 없다.
"아... 로완이도 봐버렸네."
"이쪽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알아서 할게. 정리하고 나가."
시원스럽게 대꾸한 아비가일이 내게 다가왔다.
당장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것보다도.
그녀의 태연한 태도가 참을 수 없이 두렵다.
간신히 토해낸 말은 상당히 얼빠진 느낌이었다.
"뭐하는... 거야?"
"너희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주고 있지."
"... 뭐?"
"나와 저 사람들은 그림자 재단 소속이야. 우린 외신에게 맞서고 있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 아비가일이 내 손을 잡고 회장으로 돌아갔다.
금발을 휘날리며 달리듯 걷는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도 즐거워보였다.
25화. 재단
파티가 끝나고, 헌터들은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현이를 먼저 보내자 서유림이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성우현 선배는 끝날 때까지 안 돌아왔네요."
"보나마나 어디서 껄떡거리고 있겠지."
"그런가요..."
너무 시원하게 납득해버리는 것이 좀 씁쓸하다.
유림의 옆에 서 있던 아비가일이 잘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죽은 우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망자의 명예보단 살아있는 유림이의 안전이 훨씬 중요하다.
한국에 단 7명뿐인 A급 헌터가 죽었는데...
세상은 눈부실 정도로 평화로웠다.
아무도 성우현이 증발해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철저하게 처리한 거지?'
아비가일이 속해있는 재단이란 조직의 일처리는 장난이 아니다.
적어도 유명인 한 명 정도는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그대로 서유림을 배웅한 나는 아비가일의 차에 탔다.
거절은 불가능하다.
자칫하면 나도 지워져버릴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질문할 것이 산더미다.
"..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집."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아비가일이 짜증날만큼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나마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야."
"우현이는... 왜 죽였지?"
내가 녀석을 아예 죽여버리고 싶었던 것과 별개로.
아비가일과 재단의 범행동기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 봐."
그녀가 불쑥 내민 스마트폰에서는 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화면 속의 장소를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협회 본부인가. 저건 성우현이고.'
아무래도 CCTV영상을 멋대로 가로챈 것 같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성우현은 곧이어 열린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아까 중간에 소인족들에게 소환됐을 때의 영상이다.
'이것 때문에 들켰군.'
역시 협회 본부에서 소환에 응하는 것은 너무 무모했다.
녀석은 직후에 내 정체를 깨닫곤 나를 협박하러 왔다.
"허가받지 않은 차원이동. 그것도 외신활동으로 추정되고 있어."
"외신?"
"지난번에 내가 상대했던 레이드 몬스터 있잖아, 그런 녀석들을 말하는 거지. 그놈들이 바로 외신이야!"
아비가일은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줬다.
미안하지만 아는 부분은 대충 넘기기로 했다.
다행히 현재 소인족 세계의 상황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눈치다.
두 세계는 교류가 거의 없는 모양이다.
'나도 성우현 빼곤 다른 지구 출신 외신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만약 우현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다른 외신들이 지구에 찾아왔을지도 몰라."
"... 놈들이 어떻게 지구로 찾아오는데?"
"보통 사교도들이 놈들을 소환하지."
"누군가가 놈들을 여기로 불러들였다는 거야?"
"그렇지! 역시 로완이는 빨리 배우네. 그래서 외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해."
그럼 그 사실을 왜 나한테 가르쳐주는 건데?
설마 나도 우현이처럼 처분하려고?
차마 토해내지 못하고 목구멍 속으로 다시 밀어넣자 근사한 단독주택에 도착했다.
아비가일은 손수 차를 내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로완이는 녹차? 커피?"
"음료는 아까 많이 마셨어. 그냥 물이면 돼."
"알았어."
그래도 사회인으로서의 기술이 늘긴 했군.
속으로 감격하고 있는데 아비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더 알려주고 싶지만, 이 이상 알게 되면 로완이도 위험해져."
"지금도 충분히 위험해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니야. 이제부터 네가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줄게."
그녀는 내 손을 모아잡곤 말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맑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버려. 우현이랑은 그냥 이야기 다 끝내고 정상적으로 헤어진 거야. 알겠지?"
"우현이는 어떻게 처리되는 건데?"
"그건 재단이 알아서 할거야."
내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괜히 싫다고 하면 성우현처럼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척안의 외신 로완으로서의 신분을 밝히는 것도 역효과다.
아비가일의 패거리들은 그런 걸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니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최소 1년 정도는 감시가 붙을 거야."
"감시?"
"응.이건 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외신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단 확신이 없거든. 아마 자택에서도 계속 감시받게 될 거야."
그건 굉장히 곤란하다.
만약 감시 기간 중 외신으로서 소환을 당하면 들킬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지구에서의 1년이라면 소인족 세계에서의 7년!
7년 동안 추종자들을 방치했다간 제대로 남아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결국 고심하던 나는 다른 선택지를 선택했다.
"너는... 계속 그런 놈들과 싸우고 있었던 거야?"
"응."
"얼마나 오래?"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오직 그걸 위해서 훈련받았으니까."
이 대목에선 가슴이 살짝 먹먹해졌다.
후우.
아무리 봐도 이 방법밖에 없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면 끝장이다.
놈들의 신뢰를 얻고, 놈들에 대해 알기 위해서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만약 내가 재단에 가입하면?"
"뭣? 로완이가? 구, 굳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진심으로 놀란 듯한 아비가일은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히죽히죽 웃는 것이 뻔히 보인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재단이 없으면 지난번처럼 강력한 몬스터들이 지구를 침공하는 거지?"
"... 응! 한 번 상담해볼게!"
아비가일은 즉시 아까전의 운전기사를 호출했다.
잔뜩 주눅든 얼굴의 여성이 쭈삣거리며 나타났다.
"신규 가입인가요... 다른 분도 아니고 아비가일 님의 추천이라면 가능은 하겠네요."
"그렇지? A급이나 되는 헌터는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A급이요? 임로완 씨는 서류상 B급으로 등록되어 있는데요..."
운전기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비가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세간의 평가따윈 의미가 없다.
그보다 훨씬 더 정확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냐, A급 맞아."
"아, 알겠습니다. A급 헌터라면 에스콰이어 후보로 등록이 가능할지도..."
"좋아. 내 직속으로 등록하고, 예정된 감시활동은 모두 취소시켜."
"넷? 감시를요?"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혜택이다.
내가 속으로 희희낙락 하고있자 이내 섬뜩한 소식이 들려왔다.
"응. 만약 내 에스콰이어 후보에 대한 감시를 허락하면,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서 처리하려고 할테니까..."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보고를 올린 뒤에 시험삼아 한 건 맡겨보도록 하죠. 염동력 외에 특이사항이 있나요?"
"로완이는 정신내성이 아주 강해. 아토카의 울음소리에도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어. 그렇지?"
"맞아."
그건 아마 뱀들의 어머니를 상대로 선행학습을 해버려서, 아토카 정도론 효과가 없었던 것이리라.
아비가일의 운전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물러갔다.
나는 찬물을 마시며 정신을 다잡았다.
'차라리 잘 됐어.'
아토카는 결국 사교도들에 의해서 소환된 것이었다.
재단에 소속되면 그런 놈들을 족치게 된다.
앞으로도 외신활동을 하면서 외신들을 적으로 돌릴텐데...
놈들의 소환 현장을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면 좋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자꾸만 다리를 휘휘 저어대던 아비가일이 작게 키득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이해받을 수 있을지도... 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돼. 가까운 시일내로 연락이 갈 거야."
"알았어."
"비밀유지 주의하고, 나중에 봐!"
졸지에 이상한 비밀조직에 가입하게 된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 위로 털썩 쓰러졌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는데 어찌어찌 수습은 된 것 같다.
데구르르...
단검이 걸려있던 허리띠를 풀자 뱀 송곳니 단검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연회장에서 아비가일이 이걸 알아봤다.
'설마 외신의 물건이란 걸 알아본 건가? 근데 이거에 대해선 왜 뭐라고 안 했지?'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그림자 재단이란 것이 굉장히 의심스럽다.
자칭 인류와 일상의 수호자라지만, 이야기만 대충 들어봐도 썩 건전한 조직은 아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헤르반을 찾았다.
당분간 재단 때문에 바빠질 것 같으니 미리 통보해두기로 했다.
'헤르반, 있느냐?'
[무엇이든 분부하십시오!]
'당분간 조금 바빠질 것 같다. 그쪽 상황은 어떻지?'
[매우 순조롭습니다. 주군의 위업을 전해들은 군주들이 앞다투어 공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가.'
나는 신들의 나라에서도 중진격이었던 해신 데아곤을 물리쳤다.
신들의 나라를 경계하고 있던 군주들로선 이런 희소식이 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상황이 상황인지라 숲의 요새에 신전을 짓는 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신전은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다.'
[예, 준비를 더욱 확실히 갖춰두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쥐를 죽여라. 외출 다녀올 때마다 손과 얼굴을 꼭 씻고.'
양제국에서의 사건을 떠올리며 말하자 헤르반이 의아해했다.
[의심없이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쥐는 갑자기 어찌하여...]
'... 그냥 내가 쥐를 싫어한다.'
지난번처럼 길게 설득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둘러댔건만.
[그것은 쥐들이 병을 옮기기 때문입니까?]
왈칵!
용케도 알아듣는 헤르반을 보고있으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추종자들이 모두 이렇게 똘똘했다면 고생따윈 안 할텐데.
'그래. 겸사겸사 다람쥐도 조심해라.'
[다람쥐... 명심하겠습니다. 제 사역마들은 특별히 관리해야겠군요.]
덕분에 조금이나마 만족스럽게 잠들었던 나는 다음 날 아침의 메세지 소리에 눈을 떴다.
충전기에 꽂혀있던 스마트폰을 확인해보자 아비가일의 호출이었다.
"진짜 빠르네."
서둘러 준비를 갖추며 인터넷 뉴스를 확인해봤지만 성우현에 대한 보도는 찾을 수 없었다.
실종이라고 해봤자 아직 24시간도 안 됐으니까 좀 이를지도 모른다.
"끄응..."
뱀 송곳니 단검을 들고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전투복의 깊은 곳에 숨겼다.
이건 집에서 놀려두기엔 너무 강력한 무기다.
어차피 자택이 수색을 당하지 않는단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림자 재단은 그러고도 남을만한 놈들이다.
전투복을 입고, 웃옷을 걸친 뒤에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검은색 세단이 부드럽게 멈춰섰다.
불법 수준의 썬팅이 되어있어서 안쪽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철컥.
"안녕하십니까 임로완 씨. 스마트폰을 포함한 전자기기는 제게 맡겨주시고, 이걸 착용하시죠."
어제 봤던 운전기사가 안대를 하나 건네줬다.
곱게 그것을 쓰자마자 차가 출발한다.
그대로 한참을 달리던 차량은 어딘지 모를 지하공간에 멈춰섰다.
"이제 안대를 벗으셔도 됩니다. 같이 가시죠."
"..."
여긴 어디냐고 물어봤자 답해줄 리 없다.
이제부터는 질문을 신중하게 해야한다.
넓은 지하주차장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런 도서관같은 분위기의 벙커가 나타났다.
굳이 벙커라고 표현한 것은, 금고에나 쓰일법한 특제 방폭문이 떡하니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거라면 A급 몬스터 상대로도 끄떡없겠다.
'그림자 재단의 지부인가.'
이 정도면 한국 지부 정도는 될 것이다.
안쪽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출입구의 현판에는 난해한 필기체로 무어라 쓰여있었다.
"아니, 저건..."
"저걸 알아보시는 건가요?"
"아뇨. 필기체라서 읽을 수가 없네요."
나도 영어를 아주 못하진 않는 편인데...
저건 무슨 외계어 수준으로 꼬아놓았다.
그나마 멀쩡한 왼쪽눈을 찌푸리고 있자 일본인으로 보이는 연구복의 사내가 터벅터벅 다가오며 말했다.
역시 국제적으로 노는 조직이었다.
"우리들의 세계는 종이로 된 성이나 마찬가지다."
"넷?"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문구에 놀라고 있자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저 필기체의 내용이요. '우리들의 세계는 종이로 된 성이나 마찬가지다.' 외신들의 강대함과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장이죠."
"아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인 느낌의 일본인 사내는 자기소개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잘 오셨습니다. 저는 이곳의 프리스트인 토시아키입니다."
"반갑습니다 토시아키 씨."
묘하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이름.
프리스트는 아마 재단 내에서의 직위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어제도 에스콰이어니 뭐니 하는, 알 수 없는 호칭을 들었다.
내 표정에 드러난 호기심을 읽어낸 토시아키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프리스트는 외신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역할입니다. 외신들의 지식은 무척 위험하지만,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선 마땅히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그럼 에스콰이어에 대해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에스콰이어는 유사시에 직접 전투를 담당하는, 나이트의 보좌입니다. 나이트는 재단 내부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으로, 아비가일 씨는 우리 한국 지부의 유일한 나이트죠."
"토시아키 씨. 벌써 그렇게까지 알려주시는 것은..."
"아, 실례했습니다. 이미 가입은 확정된 것 같아서요."
운전기사가 토시아키에게 경고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신입 회원 한 명을 위해서 이너서클 회의가 소집되다니...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너서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도록 굳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쪽에서 아비가일이 튀어나오며 반갑게 말했다.
"내 추천이 통과됐어! 축하해 로완아! 그럼 바로 시험보러 가자."
"시험?"
"응, 실습 시험이야. 입 아프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해보는 게 최고지!"
아비가일은 내 손을 잡곤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토시아키가 잘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26화. 실습 시험
인적없는 건물의 버려진 방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모여있다.
대부분은 그림자 재단의 회원 후보들인 듯 살짝 당황한 눈치다.
연령이나 인상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하여, 건장한 중년의 남자나 엘리트 인상의 여성도 보인다.
그리고 그들 모두 아비가일을 단번에 알아봤다.
"저, 정말로 아비가일 어사일럼이잖아?"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아직 그게 진짜란 보장은..."
"아니면 아비가일 어사일럼이 왜 여기 있겠어? 저기 저 형씨도 현직 헌터인데? 그것도 황금세대!"
아비가일을 앞세우면 다단계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정작 그녀는 느긋하게 앉아서 즐겁게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짝!
아비가일의 운전기사가 손뼉을 치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원래는 좀 더 심약한 인상이었는데, 신입들이 상대라서 그런지 좀 더 자신만만해보인다.
"다들, 필요한만큼은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림자 재단은 오직 외신을 막기 위한 조직입니다. 외신을 막고 이 차원을 장막 속에 감춰두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대가든 지불합니다."
나를 포함한 회원 후보들은 진지하게 설명을 경청했다.
적어도 기본 정도는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재단에서 외신을 막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가치는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꼭 필요하다면 전쟁도 일으킬 겁니다. 이 땅에 제대로 된 외신이 강림하는 것보단 그게 더 평화적일테니까요."
"전쟁이 더 평화적이라니..."
"지난번에 소환된 아토카는 굉장히 약한 외신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상위의 외신이 소환되면 여기있는 아비가일 님을 포함한 그 어떤 헌터들도 소용이 없습니다."
운전기사는 마지막 경고에 앞서 잠시 뜸을 들였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많은 것을 잃게 될 겁니다.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채 은퇴하거나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행운을 바라진 마십시오. 그런 근사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100명 중 5명도 안 됩니다."
"..."
저건 허세가 아니다.
이놈들은 실제로 A급 헌터 성우현을 눈 깜짝할 사이에 처치했다.
슬슬 주소를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방실방실 웃고있는 아비가일을 노려봤다.
동기가 이런 미친 단체에 가입하겠다는데, 좀 더 열심히 뜯어말렸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비가일은 열심히 하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다.
"만약 그럴 각오가 되어있다면, 앞으로 나와서 맹세해주십시오."
"... 제가 먼저 하죠."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형사나 운동쪽 일을 했는지 크고작은 상처들이 엿보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 자리의 회원 후보들도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사교도들이 제 가족들을 모두 죽였어요.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까지 함께하죠."
"... 맹세합니다. 저는 재단의 모든 비밀을 수호하고, 외신을 막기 위해서 몸과 정신을 바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촛불과도 같은 인류의 운명을 함께 지켜냅시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인텔리 인상의 여성이었다.
"맹세합니다. 가문의 위대한 선조들을 본받아서 재단에 봉사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이제 재단이 당신의 가문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뭐지?'
이제와서 외신활동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한 욕심 때문은 아니다.
헬리온을 포함한 많은 곳의 추종자들이 이미 내게 의존하고 있다.
이제와서 발을 빼는 것도 그들에게 못 할 짓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남부럽지 않은 A급 헌터야. 승급시험 통과도 이미 시간문제지.'
지금 당장 외신활동을 그만둔다고 해봤자 절대 손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익절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헤르반, 타샤, 헬리온, 전설의 세 모험가, 그리고 양제국...'
추종자들의 이름을 되뇌이자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이런 곳에서 멈추고 싶지 않다.
비록 본의 아니게 아토카를 불러들여서 무수한 인명피해가 나올 뻔했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손만 뻗으면 바로 닿는다.
"마지막 차례군요. 임로완 씨?"
"... 맹세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고작 그것뿐이냐고 할 수도 있는 맹세였지만 상대는 엷게 웃었다.
거창하지 않아서 오히려 믿음이 가는 걸까.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반응이 좋다.
"환영합니다. 수단과 방법은 재단이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입단 의식이 끝나자 마침내 실습 시험이 공개되었다.
보통 시험을 먼저 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놈들이 하는 일 중에서 이상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 지금부터 실습 시험을 공개하겠습니다. 이 시험은 여러분들이 한 팀이 되어 해결하게 됩니다. 실습의 결과에 따라서 근무처와 직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질문은 허락됩니까?"
"허락됩니다. 자세한 방법을 조언해드릴 수는 없지만요."
파밧!
정회원이 리모컨을 조작하자 스크린에 자료가 나타났다.
오늘의 목표는 교외에서 비밀리에 활동중인 사교도 집단.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외신을 숭배하는 이들로, 소환 시도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저걸 처리하라는 건가... 아마 불법적인 방법을 써야겠지.'
모두가 살짝 굳어있는 가운데, 가족을 잃은 형사 출신의 회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하겠습니다."
"무엇인가요?"
"사교도 집단에 대한 정보는 확실합니까? 무슨 오컬트 동호회 같은 건 아니겠죠?"
가족들이 당했다길래 걱정했는데 의외로 냉정하다.
아비가일의 운전기사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정보입니다. 재단도 동호회 수준의 단체에게 이런 짓을 하진 않습니다. 기껏해야 가짜 정보를 흘려넣는 정도죠."
동호회 상대로도 가짜 정보를 흘려넣는 건가...
여러모로 철저한 집단이다.
하긴. 느슨해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다른 회원이 손을 들었다.
"만약 사체가 나온다면 어떻게 처리하죠?"
"그건 맡기겠습니다. 단, 재단이 소유한 시설의 이용권을 드리죠."
"휴우."
"저, 저는 애콜라이트로 지원했는데... 현장에 나가야 하는 건가요?"
가문 대대로 재단에서 일했다는 여자가 물었다.
애콜라이트라면 카톨릭의 사제를 보조하는 복사服事를 뜻할텐데...
아까 만났던 일본인 프리스트, 토시아키 씨를 보조하는 역할인 것 같다.
"연구직이라도 필요하다면 현장에 나갑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에요. 각오는 되어있습니다!"
"그건 곧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댄 채 자세한 소탕 작전을 논의했다.
자료를 살펴보니 전투를 피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이미 홀려도 단단히 홀려버린 사교도들이다.
"인신공양까지 저지른 건가... 지금까지 잘도 안 들켰네."
"경찰에 신고하면 어떻게 되죠?"
"감옥에서 외신들을 숭배하게 되겠지. 솔직히 말해서 요즘 감옥은 범죄자 양성소야. 죄수들끼리 교류하면서 범죄 노하우를 공유한다니까."
형사 출신의 사내가 투덜거리자 애콜라이트 지망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경찰들이 심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이미 금단의 지식에 접촉했을 겁니다. 무턱대고 쳐들어가면 위험해요."
"이놈들 아지트 건물의 출입구가 하나뿐이에요. 불을 지르는 건 어때요?"
"소방차가 올테니까 안 됩니다. 최대한 은밀하게 처리하라고 되어있어요."
우리가 열심히 토론하고 있자 아비가일이 기어코 한 마디를 해버렸다.
"걱정마! 이번에는 내가 따라가니까."
"오오, 아비가일 님이라면..."
"너희가 처참하게 실패해도 내가 수습할 수 있어!"
"..."
녀석에게 눈총을 주곤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결국 습격 시간은 새벽.
사교도들이 모두 아지트에 있는 것을 확인하곤 진압하기로 했다.
"진입은 제가 먼저하죠."
"현직 헌터가 그래주니까 든든하네요."
"저는 운반과 처리 작업을 준비하겠습니다."
"감시는 나한테 맡겨. 초보가 해봤자 금방 들켜. 마음같아선 CCTV를 확인하고 싶지만, 그건 흔적이 남아."
회의를 마친 우리는 차량을 타고 근처로 이동했다.
커다란 밴차량으로 대부분의 인원을 이동시키고, 감시용으로 따로 한 대를 더 쓴다.
금전적으로는 상당히 여유가 있는 조직같다.
현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긴장이 살짝 풀린 듯한 애콜라이트 지망생이 떠들어댔다.
"그건 그렇고 이런 시험에서 아비가일 님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영광이에요."
"아비가일 씨가 재단에서도 유명한가요?"
다른 후보가 묻자 그녀가 아비가일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 당연하죠! 어사일럼 가문은 재단과 역사를 함께하는 명가 중의 명가. 그 명가의 간택을 받은 것이 바로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기계, 아비가일 어사일럼이라구요."
"..."
운전기사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애콜라이트 후보는 눈치없이 계속 지껄였다.
그 내용에 다른 후보들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간다.
"특히 어사일럼 가문은 선택받은 고아를 입양하는 걸로 유명해요. 어릴 때부터 철저한 훈련으로 인간적인 감정을 말살해서, 정신내성을 극한까지 높이는..."
"그만하면 됐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어제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듣곤 긴가민가했는데...
덕분에 확신했다.
아비가일이 저 모양 저 꼴이 된 것은 모두 재단과 가문의 소행이었다.
사람을 감정도 없는 괴물로 만들어놓곤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꼴이라니.
그녀는 동기를 죽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딴 식으로 지껄이면 입을 찢어주지."
"네, 네에? 제, 제가 뭐 잘못한 건가요?"
"... 좀 심했죠."
다른 후보들도 동의하자 애콜라이트 지망생이 잔뜩 주눅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남의 가정사를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대대로 재단에 봉사한 가문 출신이라서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는 가치관이 많이 다르다.
"흐흠."
아비가일은 나를 보곤 묘하게 만족하며 히죽거렸다.
"...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새벽까지 기다리죠."
"감시팀, 이상 없습니까?"
[현장 도착. 감시 시작.]
"저는 운반용 차량이랑 카트를 준비해둘게요."
"카트는 됐어요. 제가 염동력자니까."
그대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루한 침묵이 끊기고, 마침내 감시팀에서 연락이 왔다.
[사교도 집단 아지트에서 활동 확인. 모두 안에 있어. 야간 순찰도 방금 끝났어.]
"좋아요. 자리 지키세요."
이미 새벽이지만, 사교도들에겐 황금시간대다.
내가 건물 안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차량을 나서자 애콜라이트 지망생이 나를 따라왔다.
"저, 저도 갈게요! 위험한 주문 같은 걸 상대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냥 무전으로 하시지."
"무전으론 상황 파악이 힘들잖아요."
"... 제 뒤에 숨어있어요. 절대 앞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썩 마음에 드는 상대는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곤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27화. 실습 시험(2)
사교도들의 아지트는 비릿한 냄새로 가득차있었다.
철분이 섞인 피냄새도 있지만, 썩은 생선의 냄새도 섞여있다.
내 뒤의 애콜라이트 지망생은 구역질을 참으며, 코와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조심조심 따라오고 있다.
안쪽에서는 제법 활발한 인기척이 느껴지는데도 조명이 거의 없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쁜 나로선 죽을 맛이다.
그래도 염동력을 활용해가며 진행하자 마침내 사교도들이 보인다.
놈들은 방 전체에 이상한 그림과 문자를 새겨놓은 채 기분나쁜 주문을 외우고 있다.
커다란 갈고리에는 정체를 알고싶지 않은, 썩은 고깃조각들이 잔뜩 걸려있다.
사이비 종교의 본거지도 이것보단 건전해보이겠다.
[히익...]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진압해주십시오.]
"라저."
아까 받아온 섬광탄의 핀을 뽑곤, 방 안으로 휙 던져넣었다.
내가 써봤던 군용 섬광탄과는 형태가 많이 다른데... 아무래도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 같다.
살짝 불안했지만 실제 효과는 확실해서 환한 섬광이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안쪽의 사교도들이 무척 괴로워하며 당황했다.
"끼아아악!"
"누... 누구냐!"
"너희가 무슨 어둠의 자식들이냐."
후욱!
등 뒤에 숨어있던 애콜라이트 지망생이 무슨 가루를 뿌리자, 그것이 별처럼 빛나며 방 안을 밝혀줬다.
사교도들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식칼이나 톱, 손도끼따위를 들고 달려들었다.
조금이나마 평화적인 해결을 기대해봤던 나로선 무척 실망스런 광경이었다.
'완전히 미쳤군. 일부러 이런 건을 골라준 건가...'
[진압팀! 어서 시작해주세요!]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내가 염동력을 끌어올리자 칼을 들고 달려오던 사교도 한 명이 그대로 넘어졌다.
뒤이어 쓰러진 사교도의 귀에서는 핏물이 줄줄 새어나온다.
최소한의 힘으로 급소를 노리는 공격.
이것이야말로 염동력의 올바른 사용법이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너무 크고 강하거나, 마땅한 약점을 몰랐지만 인간이 상대라면 너무나도 쉽다.
"허억!"
다만 저쪽도 사교도라는 듯, 그냥 당해주진 않았다.
뒤쪽의 사교도 하나가 조개껍질 같은 것을 들어올리자 기묘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세, 세이렌의 울음소리에요!"
뒤에 있던 애콜라이트 지망생이 풀썩 쓰러지려다 내 부축을 받곤 다시 일어섰다.
나는 염동력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주곤 조개껍질을 부숴버렸다.
"키에엑!"
그 때, 지저분한 비닐커튼 뒤편에서 익숙한 형상의 몬스터가 등장했다.
생선 대가리가 달린 어인족을 발견하곤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사교도들, 디곤 쪽 계파였나? 어쩐지 생선 비린내가 나더라.'
콰득!
놀랄만큼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던 놈들이었지만 이내 염동력에 당해서 바닥을 굴렀다.
이 녀석들은 기껏해야 B급 상위권 정도.
한 번 상대해봤는지라 침착하게 관절을 노렸다.
"하앗, 하아... 봉사종족까지 있다니!"
놀라서 떠들어대는 애콜라이트 지망생을 다시 등 뒤로 밀어넣었다.
어쨌거나 이곳을 습격한 것은 정답이었다.
만약 이놈들을 제 때 막지 못했다면 디곤이나 데아곤이 소환됐을지도 모르는데...
지구에서 그딴 놈들이 소환됐다면 수십만, 수백만 단위의 인명피해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10미터짜리 해일을 밥 먹듯이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니까.
"쿠르릉..."
네 마리의 어인족들도 모두 처리했을 무렵.
갖가지 액체가 말라붙은 비닐커튼을 완전히 찢어버리며, 기분나쁘게 꿈틀거리는 거체가 나타났다.
갖가지 동물의 시체를 한데 뭉쳐놓은 듯, 혐오스런 몰골이었다.
피슉!
반사적으로 염동력의 창을 꽂아넣었지만 놈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움직임은 느리지만 힘이 매우 강하다.
[외신의 하수인까지...]
"잠깐 붙잡아주세요! 제 귀 좀 막아주시구요!"
독 단검을 써야하나 고민하던 무렵, 뒤쪽의 후보생이 낡아빠진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그새 염동력의 창을 몇 개나 더 꽂아넣었지만 소용이 없다.
"저거 왜 안 죽어요?!"
[불사의 존재에요! 외신의 직계 하수인이라서 물리적으로 대항해봤자 소용없어요!]
"엑실리움, 아드 이나니스..."
두루마리를 꺼내든 후보생이 이상한 주문을 외우자 두루마리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외신의 하수인은 그 빛에 닿은 것만으로도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콰드득!
염동력의 창을 더욱 깊게 쑤셔넣어서 몸부림치는 놈을 붙잡았다.
어느새 양피지에서는 빛이 폭주하고 있었다.
환한 빛이 놈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파아앗!
잠시 뒤, 외신의 하수인과 주변의 시체들은 아주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뒤늦게 몸을 돌리자 후보생이 지친 표정으로 설명했다.
"추방의 두루마리에요. 이계의 존재들을 공허로 돌려보냈어요."
"재단에는 그런 게 흔한가요?"
"흔하진 않죠. 하지만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거니까... 아낄 필요는 없습니다. 외신을 추방하는 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존재의의인 걸요."
"... 현장 진압 완료. 후속팀 들어와주세요."
나는 빠르게 방 안의 모든 것을 한데 긁어모았다.
사교도들과 어인족의 시체는 모두 불태우고, 관련 자료도 모두 처분할 계획이다.
한참이 걸려서 작업을 마친 우리는 폐기물 처리장에 나란히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새벽에 작전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단원들에게서 뒤늦은 감상이 흘러나왔다.
한 명이 토해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순식간에 동참한다.
"앞으로 이런 걸 계속 해야하는 건가..."
"대부분은 두 분이 다 했지만요."
"경찰들에게 안 들켰을까요?"
"경찰 신고는 없었어. 나는 에스콰이어 지망이었는데... 덕분에 생각이 바뀌었어."
형사 출신의 단원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건 총을 좀 쓴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실제로 풋맨이나 에스콰이어는 대부분 현직 헌터래요."
에콜라이트 지망생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도 하네."
"지망을 레이븐으로 바꿔야 하나?"
"레이븐?"
"목표물에 대한 감시를 주로 하는 첩보원 역할이에요. 형사 출신이라면 그쪽이 맞을지도..."
"재단에는 쓸모없는 용어가 너무 많아. 그냥 감시 담당이라고 하면 되잖아?"
"그것도 비밀유지의 일환이니까요."
짧은 수다가 끝나자 운전기사가 다가와서 결과를 발표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실습은 전원 통과입니다. 굉장히 인상적인 일처리였네요. 지금부터 근무처와 직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오오..."
"강성남 씨, 레이븐으로 복무해주십시오. 풋맨보다는 레이븐이 적절하다는 판단입니다. 이견이 있습니까?"
"아뇨. 레이븐으로 복무하겠습니다."
형사 출신의 단원이 쓰게 웃으며 대꾸하자 다음으로 애콜라이트 지망생의 차례가 됐다.
"윤하린 씨, 애콜라이트로서 프리스트 토시아키 님을 보좌해주십시오."
"재단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다들 제 자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던 중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됐다.
"임로완 씨, 에스콰이어로서 나이트 아비가일 님을 모셔주십시오."
"네."
간단히 대꾸했지만 주변의 반응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풋맨을 건너뛰고 바로 에스콰이어라니..."
"대단하네요 정말."
"확실히 인상적이었죠. 정말 B급 헌터 맞아요?"
"곧 승급할거에요. 아마도."
"그럼 마지막으로 건배하죠.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들만큼은 서로의 헌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들고있던 500ml 생수병으로 건배했다.
그림자 재단은 고정된 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임무가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적절한 팀을 조직한다.
말라있던 목을 축인 우린 소리없이 흩어졌다.
세단의 뒷자리에 앉은 아비가일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친다.
"얼른!"
"나는 따로 갈게."
"무슨 소리야? 로완이는 이제 내 에스콰이어니까 같이 움직여야 해."
"항상?"
"항상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내 보좌야."
벌써 재단에 가입한 것이 후회되려고 한다.
아비가일과 나란히 앉아서 집으로 향하자 오만감정이 교차한다.
지난번의 사건 이후로 줄곧 아비가일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사정을 알게 되니까 무턱대고 미워하기도 힘들다.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아예 숙소를 옮길래? 우리 집 옆으로..."
"아니."
"왜?"
"갑자기 그렇게 하면 티나잖아."
"그런가! 그럼 주소지를 가만히 놔두면 어때?"
아비가일 녀석, 그새 사회지능이 애매하게 올라갔다.
보다못한 운전기사가 화제를 전환해줬다.
"로완 님. 머리가 어지럽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아까 사교도들과 정면에서 맞서셨는데..."
"아, 네. 괜찮아요."
"정신내성이 정말 강하시군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이런 건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자 아비가일이 산뜻하게 말했다.
"로완이는 특별하니까!"
"... 그렇군요. 내일부터는 제가 아침마다 지부로 모시겠습니다. 에스콰이어 활동을 위해서 필수적인 지식들을 습득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헌터 업무는 어떻게 하죠?"
"그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스럽다.
오묘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장비를 벗지도 않고 숲의 요새로 향했다.
"로완이시여!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크흑."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을 보자 얼굴이 좀 피어난다.
"로완이시여, 왜 그러십니까? 저희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다. 헤르반, 준비가 끝나는대로 신전의 건설을 허락하겠다."
"예! 즉시 거행하겠습니다!"
재단 관련 일이 의외로 빠르게 정리돼서, 신전 건설을 너무 미룰 필요는 없어졌다.
숲의 요새는 천혜의 요새.
신들의 나라에서 숲의 요새를 침공하려면 육지를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나라들을 공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나라들은 내게 공물을 바치며 보호를 기도하는 처지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웃집에 친근한 외신 하나 정도는 있어도 나쁠 게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가 빛을 발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타샤가 다가와서 커다란 관을 건넸다.
물론 녀석들의 입장에서나 좀 크다.
"로완이시여! 여기에 당신을 위한 화관이 있습니다!"
"..."
나무덩굴과 꽃을 얼기설기 엮어서 솜씨좋게 만든 화관.
별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굉장히 예뻐보인다.
어버이의 날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간단한 물건이지만 스케일이 스케일이라서 정성이 꽤 들어갔을 것이다.
마음같아선 집에 가져가서 전시해놓고 싶지만, 가택수사라도 받으면 곤란하다.
나는 그것을 써보곤 피식 웃었다.
"고맙다. 너희들의 정성이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만들었다. 내 신전에 장식해두거라."
"오오오!"
양제국에서 입은 상처를 여기서 다 치유하게 되는군.
흐뭇하게 신전의 터를 구경하던 나는 헤르반을 불러서 조용히 물었다.
"헤르반. 외신 아토카는 요즘 좀 어떻지?"
"아토카말입니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적어도 이 근처는 완전히 깨끗합니다."
놈은 이미 한 번 지구를 침공했던 외신.
양쪽 세계에서 기를 최대한 꺾어두고 싶다.
"아예 씨를 말리고 싶다면?"
"그것은... 제가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좋다."
내가 시키면 일단 하는 체라도 하는 경건한 태도!
정말이지 이뻐서 죽겠다.
나중에 골드바라도 하나 더 사줄까 고민하던 가운데, 세계 각지의 소환사들과 대화를 나누던 헤르반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로완이시여. 당신께서 어찌하여 아토카를 주시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죽음과 사령술의 외신 아토카는...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아토카의 가장 신실한 추종자들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
아토카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설마 지구에 본체를 끌고왔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을텐데?
의문이 꼬리를 물던 와중, 문득 아비가일의 대검에 생각이 닿았다.
녀석이 휘둘러대던 대검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도살자라... 설마 외신의 본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무기인 건가?'
아무리봐도 정황상 아비가일이 아토카를 소멸시킨 것이 맞다.
놈의 고통스런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 로완이시여?"
"... 놀랍진 않구나. 나의 동료가 놈을 패퇴시켰으니."
"오오오오! 역시, 당신께서는 다 뜻이 있으셨습니다! 노래하라! 오직 척안의 외신의 위대함을 노래하라!"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추종자들이 불러주는 찬송가를 즐겼다.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다.
28화. 비밀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