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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12

* * *

진현우가 지하의 마법진을 발견했을 때, 아바는 속이 터지는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도 끝이 보였다.

"...그럼 정찰을 하면 되겠습니까?"

- 그래.... 드라이어드의 숲을 빼앗겼으니, 마족들이... 으음!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워든 길드에게....

"알겠습니다. 카오틱들의 모습이 보였다고 하니까 지금 바로 정찰에 나서겠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다.

아바는 엘더 그로브의 말을 끊으면서, 길드원들을 이끌고 바로 정찰에 나서기로 했다.

거목이 그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시간은 잘 끌었습니까?"

- 물론. 그러는 너는, 성과가....

엘더 그로브의 눈앞에 화면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비뚜름하게 웃는 진현우.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그 너머의 풍경.

- 이건, 대체....

진현우가 서 있는 지하. 그곳에는 엘더 그로브도 모르는 기다란 통로가 뚫려 있었다.

구불구불한 통로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통로, 보입니까? 그냥 뚫은 통로가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뚫은 통로죠."

진현우는 통로를 걸었다.

통로는 원의 형태로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에 줄기처럼 짧은 통로가 복잡하게 이어졌다.

엘더 그로브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 마법진을 구성하기 위해서 뚫은 통로군. 길을 뚫어서 마법진을 연결한 것이야.

"잘 아시네요. 맞습니다."

- 모르겠군. 나는 모르는 마법진이다. 그 마법진의 목적은 무엇인가? 알고 있는가?

"전이 마법진입니다."

진현우가 바닥을 보이면서 대답했다.

빼곡히 마법 문자가 새겨진 것이 보였다.

"아마 마족 측의 거점과 연결된 전이 마법진일 겁니다. 이걸로 마족과 카오틱들을 대거 소환하고 내부에서 공격하려는 거겠죠."

- 나는... 지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뭐가요?"

- 저 마법진의 존재 말이다. 감각을 넓게 펼쳤음에도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워든 길드가 바보도 아니고, 그쪽이 감지하지 못하게끔 따로 준비를 해 뒀겠죠."

- 그렇, 군.

엘더 그로브가 침음했다.

- 합리적이다. 내가 만든 요새는 바깥에서는 공략할 수 없다. 적들을 내부로 전이시켜서 안에서부터 공략하겠다. 적절한 방법이군.

"감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 아무래도 수맥을 이용한 것 같구나. 생명의 샘에는 막대한 마력이 녹아 있지. 수맥을 활용한다면 이 정도 규모의 마법진도 가능하다.

실로 대담한 마법진이었다.

이걸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 워든 길드와는 오랫동안 인연을 쌓아 왔지. 그들은... 나를 너무도 잘 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의심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

확신과 방심이 불러온 사태였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지냈다면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 믿기지가 않는군.

거목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가정이 현실이 되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충격이 느껴졌다.

- 다른 이들도 아니고 아바가, 그 동료들이... 우리를, 엘프를 배신했단 말인가.

"애초부터 그러려고 온 겁니다."

- 믿기지가 않는군. 저들은 카오틱과 마족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던 이들이다. 그것조차 이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 했다는 건가.

"그렇겠죠. 아시잖아요."

- 그래, 알고 있다. 이 샘에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지. 이곳을 빼앗기면 마족은 베카샤로 직행할 수 있는 통로를 얻는 셈이니까.

엘더 그로브는 한숨을 토했다. 그런 거목에게 진현우는 마법진의 모습을 보여 줬다.

마법진에 검은 결정체가 심겨 있었다.

"마법진 곳곳에 마기의 근원이 심겨 있습니다. 전이 마법진이 작동하면 같이 발동하지 않을까 싶네요. 마족이 버틸 수 있게끔요."

미리 심어 둔 마기의 근원이 발동하면 주변의 땅이 마기로 물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족들이 세계수의 장막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 마기의 근원이 제대로 활성화되면 나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 요새는 내 몸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위험하군....

엘더 그로브도 움직이기 힘들어질 테니, 이 요새는 마족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미래였다.

- 지금 바로 제거할 수 있겠나? 아니,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없앨 수 없을 거다.

"그러면 적들이 이상을 눈치챌 겁니다."

- 마법진을 제거하지 않겠다는 건가?

"예."

엘더 그로브는 진현우를 놀란 듯 봤다.

당장에라도 제거해야 할 것 같은 마법진인데, 이걸 제거하지 않고 그냥 놔두겠다니.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이걸 왜 파괴합니까? 좋은 기회인데."

- 적이 침입하는 것을, 기회라고?

"기회죠. 기습이 왜 위협적입니까? 상대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기습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위협적인 거 아닙니까?"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기습한다.

그렇기에 성공한 기습이 효과적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기습할 것을 알고 있다면.

"다르게 말해서, 공격해 올 걸 이미 알고 있다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죠. 오히려...."

- 기회가 되겠구나. 기습해 온 적들에게 역으로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기회가.

"예. 역으로 이용하자는 겁니다."

마족과 다수의 카오틱이 전이해 올 터.

그것도 평범한 놈들이 아니라 정예가. 놈들을 이곳에서 소탕할 수 있다면, 조만간 있을 전쟁에서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 위험할 것이다.

"그래도 감수할 만한 위험이죠. 마기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미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 그 의견에는... 동의하겠다.

엘더 그로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우는 전이해 올 마족과 카오틱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두고 거목과 대화했다.

의견이 교차하고, 빠르게 방법이 나왔다.

- 좋다. 네 말대로 하마. 마기의 근원이 발동하면 내 뿌리로는 다가갈 수가 없다. 생명은 마기의 상극이니까. 따로 방법이 있나?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요. 이 마법진을 역으로 이용할 순 없습니까?"

- 역으로 이용한다? 무슨 뜻이지?

"적들이 여기로 전이하는 것처럼, 저희도 이걸 이용해서 적들이 있는 곳으로 전이할 수는 없냐는 겁니다. 역으로 이용하는 거죠."

간단한 얘기였다.

마족과 카오틱이 이곳을 기습한 것처럼, 역으로 넘어가서 적들을 기습하겠다는 것.

잘 통한다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 전이 마법진을 강제로 유지하면 될 것이다. 다만, 그리한다면 굉장히 위험할 텐데. 마족들의 거점으로 돌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그만큼의 이득이 있겠죠."

- 동의한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전이 마법진이 발동하고 유지될 수 있게끔 하겠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럼...."

진현우는 그림자를 휘감았다.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리죠."

- 그래....

거목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배신자는 마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반드시.

116화

배신 (2)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이번 일과 관련 있는 이들은 모두 바삐 움직였다.

워든 길드도 그러했다.

- 전이 마법진의 준비는 끝났나?

"샘의 마력을 충분히 다 머금었다. 말만 하면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다. 너희들은?"

- 마찬가지다. 우리 거점의 병력들을 대거 투입할 준비가 끝났다. 모두 피에 굶주렸지.

"그거 좋군. 그럼 시작은?"

아바는 화면 너머의 베라칸을 봤다.

흐릿한 형상을 한 마족의 입가가 뒤틀렸다.

- 내일 자정.

"엘더 그로브가 잠들 시간이군. 좋아."

- 그럼, 모든 게 시작됐을 때 다시 만나지.

화면이 꺼졌다.

아바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곁에서 지켜보던 루이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드디어, 내일이군."

"막상 시작한다니까 긴장되는데, 누나."

"어느 정도의 긴장은 필요하다. 그 긴장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아바는 지하의 마법진을 돌아봤다.

그녀가 알고 있던 엘더 그로브의 습성 그리고 온갖 수단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감췄다.

그 고생의 결실을 맞이할 때가 됐다.

"내일,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마인이 될 수 있다."

아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3층의 전장에서 마주쳤었던 마인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마인이 되라는 제안을 했던 자.

'혼자서 전장을 휩쓸던 그 괴물처럼.'

자신들도 마인이 될 수 있다.

강한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가혹한 탑에서도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아바는 의욕을 다졌다.

"마법진 가동 준비해."

내일 밤, 이 요새는 마족의 것이 되리라.

그렇게 아바가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진현우도 누군가에게 통신을 보내고 있었다.

"어, 이리샤. 나야. 내일 자정에 도착할 수 있게끔 준비해 줘. 엘프들 데리고 오고, 드라이어드 숲에 있는 플레이어들한테도 연락해."

그림자 속에서 진현우는 지하를 봤다.

그 시선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슬슬 시작해야지."

* * *

그리고 다음 날, 깊은 밤.

요새를 지키던 나무 정령과 플레이어들은 연이은 전투에 큰 피로감을 호소했다.

- 오늘따라 공격이... 너무 거세....

"카오틱 저것들 미쳤나? 오늘 왜 이래?"

"몰라. 다 물러난 거 맞지?"

낮 동안에 카오틱들이 요새를 공격한 탓이었다. 그것도 여태껏 겪은 적이 없는 규모로.

접경 지역인 탓에 장막 밖에서 마족들의 지원까지 있었는데, 굉장히 까다로웠다.

덕분에 모두가 크게 지친 상태였다.

"아, 또 공격해 오는 건 아니겠지?"

"글쎄다. 근데 지금까지 저놈들 패턴을 생각해 보면 그러지는 않을 거 같은데. 한번 공격하다가 실패하면 한동안은 쉬었잖아."

"그렇긴 한데, 흠...."

"아, 모르겠다. 일단 좀 쉬자. 엘더 그로브가 있잖아. 뭔 일이 있으면 알려 주겠지."

플레이어들은 일부 병력에게 경계 임무를 맡긴 후, 모두 지하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어차피 이 요새에는 엘더 그로브가 있다.

또 기습이 온다면 그가 알려 줄 것이다.

"슬슬 움직이지."

그렇게 모두가 휴식을 취할 때.

대기하던 워든 길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에 수면향을 피웠어. 여기 있는 놈들은 일이 끝날 때까지 못 일어날 거야."

"엘더 그로브는 낮의 전투 때문에 쉬고 있습니다. 지상에는 경계 병력이 좀 있긴 한데."

"얼마 없어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좋아, 훌륭하군."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일이다.

모든 걸 계획한 대로 진행한 아바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와 길드원들은 지상에 섰다.

"전이 마법진을 가동해라."

- 예.

마법진의 각 지점에서 대기하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기계가 가동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마법진이 샘의 수맥으로부터 마력을 흡수했다.

마법진이 검붉은 빛을 내뿜었다.

- 키이이이잉!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 듣는다면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큰 소음.

하지만 지하에 있는 이들은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기에, 누구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

"마기의 근원을 발동시켜라. 얼른!"

마법진 곳곳에 박혀 있던 검은 결정체가 검은 마기를 흩뿌리며 요사스레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아바와 그 일행이 서 있는 지상에 수많은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이 대상인 카오틱과 마족들의 형상이다.

"좋아, 좋아... 드디어! 드디어...!"

아바가 광소를 머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던가. 저 나무 정령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참았던가.

마족들을 소환해서 이곳을 쓸어버리고, 여길 거점으로 삼아 베카샤까지 장악하리라.

'그리고 난 마인이 된다.'

자신이 이룬 업적의 보상으로, 정당하게.

화아악! 불길한 빛이 지상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때.

- 고생했다, 아바.

"아아...."

아바의 눈앞에는, 그녀가 기다리던 수많은 마족과 카오틱이 서 있었다.

그 선두에 서 있던 거대한 마족, 군단장 베라칸이 아바를 보며 히죽 웃었다.

- 저 역겨운 장막을 이런 식으로 넘게 될 줄이야. 이 모든 것에는 네 공헌이 크다.

"감사, 합니다. 그럼...."

- 그래, 대적자가 약속한 보상을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족이, 마인이 된 네가 더 강해질 수 있게끔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지.

아바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다수의 눈동자를 가진 베라칸은 고개를 돌리면서, 적막이 감도는 지상을 돌아봤다.

그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어렸다.

- 엘더 그로브의 위치는?

"저곳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좋다. 그럼, 나의 군단이여! 나를 따르라! 이 요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먹어 삼켜라! 우리는 엘더 그로브가 있는 곳으로 간다!

베라칸이 두 손에 마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땅을 있는 힘껏 짓밟자 지하에 있던 마기의 근원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 스으으으!

마법진이 마기의 근원을 빠르게 활성화하면서 지상에 검은 마기가 나타났다.

이 마기가 있으면 세계수의 장막의 영향으로부터 어느 정도나마 벗어날 수 있다.

군단장에게서 마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 빠르게 움직인다. 돌진! 이 요새를...!

"이야, 더럽게도 많이 왔네."

그렇게 베라칸이 진군을 명령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맥 빠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 진현우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인지한 순간.

- 쉬이이익! 푸욱!

- 구, 군단장님. 하늘이...!

"이, 미친...."

화살이 보였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이. 그리고 저 너머에서 들이닥치는 정령 마법들이.

거기에 땅에서 일어나는 나무뿌리까지.

그걸 본 베라칸은 직감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그리고 직감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잠시 후.

- 크아아아아악!

"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쏟아지는 화살은 하나하나가 스킬이었으며, 나무 정령들의 마법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대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런 개... 크학!"

화살이 카오틱의 목을 꿰뚫었다.

그 뒤에 있던 카오틱은 심장을, 바로 옆에 있던 마족은 정령 마법에 몸이 찢어졌다.

뒤늦게라도 대응하려고 했던 아군들은 나무뿌리에 온몸이 묶인 채 저항력을 상실했다.

- 크으... 크아아아아아!

아군이 쓰레기처럼 죽어 가고 있다.

그 사실에 분노한 베라칸은 들이닥치는 화살들을 마기로 지우면서 두 손을 펼쳤다.

화르륵! 불길처럼 들끓는 마기가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거대한 장막을 전개했다.

- 빌어먹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쏟아지는 공격이 장막에 가로막혔다.

약간의 시간을 번 베라칸은 주변을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카오틱과 마족들의 사체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 네놈들은....

바깥쪽에 있던 카오틱과 마족들이 쏟아지는 공격에 무방비하게 당한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 네놈들은... 왜 무사한 거냐?

"예, 예? 그게 무슨...."

죽은 아군과 함께 있었을 워든 길드.

그놈들이 무사했다. 그것도 본인들의 힘이 아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은 형태로.

그걸 본 베라칸이 분노했다.

- 왜 저놈들이 너희를 보호해 주냔 말이다!

워든의 길드원들은 주변을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난장판이 된 상황. 그런데 워든 길드는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이게 왜?"

"뭐야, 이 나무들은...."

나무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촘촘하게 엮인 줄기와 뿌리 따위가 돔 형태의 방어막이 되어 워든 길드를 지켰다.

마치, 그들이 아군이라는 것처럼.

- 대답해라, 아바! 설마, 네년이...!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전부 오해입니다. 저놈들이 누명을 씌우는 겁니다!"

- 누명이라고? 이게 누명이란 말이냐!

베라칸과 아바가 격하게 싸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쏠린 상황. 진현우는 손을 펼치면서 남몰래 검은 화살을 쏘아 냈다.

쏘아지는 검은 화살들이 워든의 길드원 한 명에게 적중했다. 그 몸에 디버프가 작용했다.

"들어 주십시오! 그러니까!"

"왜긴 왜야, 그 사람들이 도와줘서 그렇지."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부정하려던 아바의 귓가에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베라칸이 진현우를 노려봤다.

- 도와줬다고? 네놈....

"저기 있는 사람들이 너희가 기습해 올 거라고 우리한테 알려 줬거든. 거기에다가 여기까지 유인하는 위험한 임무까지 맡았지."

- 뭐라고?

정적이 흘렀다.

아바는 저 미친X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당황한 상태였고.

마족과 카오틱들은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 네 말대로였어. 오랫동안 마족들을 속이느라 고생 많았다, 아바. 네 덕분이야."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하, 이제 연기는 안 해도 됩니다."

"연기? X발, 대체 뭔!"

화가 난 나머지 아바가 분노를 터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 들켰다.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놈이 날 배신자로 몰려고!'

진현우, 저놈이 자신을 배신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바는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 쿠후훗.

바로 그때, 진현우의 어깨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미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마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 인간... 너에게 환각을 보여 주마.

그 마안이 닿는 곳은 워든의 길드원. 조금 전 진현우의 검은 화살들에 적중한 이였다.

강한 디버프에 당한 길드원은 마안에 저항하지 못했고, 그 시선이 곧 몽롱해졌다.

- 네 적을....

미호가 자그마한 손을 움직였다.

그에 동조하듯, 워든 길드원이 검을 들었다.

- 찔러라.

"으아아아아아!"

푸욱!

갑작스레 광증이라도 도진 듯, 워든 길드원 하나가 앞으로 돌진하며 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하필이면.

"끄으으윽...!"

그 궤적에 카오틱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 날카로운 칼날이 카오틱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카오틱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검을 내려다보고, 워든 길드원을 노려봤다.

"카학!"

그리고 카오틱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일련의 사태를 본 아바는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미, 미친 거냐?!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바가 경악했다.

안 그래도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인데 아군을 검으로 찌르다니. 이래서야....

"이런 X, 워든 길드가 배신했다!"

"저 새끼가 우리를 공격했어! 배신자다!"

"아, 아니다! 우리는 배신한 게 아니야! 이건 뭔가 오해가, 일단, 진정하고 내 얘기를!"

쉬이익!

아바는 어떻게든 카오틱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화살이었다.

화살이 스친 뺨에서 피가 흘렀다.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 아바... 이 빌어먹을 년이!

- 하등 종족 따위가 우리를 배신한 것이냐!

"뭐라고?! 아냐! 그게 아니라고!"

마족들이 워든 길드에게 무기를 겨눴다. 그들을 아군으로 보지 않는다는 움직임이었다.

아바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치겠군."

방법이 없어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극비리에 준비했던 계획이 이미 들통난 상황이었고, 엘프 측은 미리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 대단하군, 아바. 네 연기력에 감탄했다. 마인의 힘을 탐내는 그 모습이 모두 연기였나?

"하, 하하."

그 모든 것이 설명되는 답이 있었다.

아바와 워든 길드가 마족들을 배신하고, 엘프 측에게 아는 것들을 모조리 불었다.

그리고 그걸 숨긴 채 마족을 유인했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었다.

"엿같네, 진짜."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렸다.

그 사실을 알아챈 아바는 허탈하게 웃었다.

117화

배신의 대가 (1)

아바와 워든 길드원들을 보는 베라칸의 눈동자에게 귀기 어린 불길이 튀었다.

놈이 두 손을 펼쳤다.

-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베라칸의 두 손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손톱 형태로 구축되는 마기. 베라칸은 아바를 겨누면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바로 그게 진현우가 원하는 상황이었다.

"아바는 약속을 지켰다! 워든 길드와 협력해서 침입해 온 마족들을 격퇴하라!"

"시위를 당겨라, 동족들이여!"

- 샘은 너희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하늘에 커다란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그러자 사방이 밝혀지면서, 장벽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엘프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상에서는 분노한 나무 정령들이 마족들을 노려봤고, 그 뒤에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워든, 이 개새끼들. 너희부터 죽인다."

"하이드! 마족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일이 끝날 때까지만 좀 참아. 제발...."

"크으으윽!"

하이드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워든 길드에게 겪은 일이 있는 하이드는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였지만, 겨우 인내했다.

참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왜냐하면.

- 쉬리릭!

- 아바... 크아아아악!

"아니, X발! 이게 왜 이래!"

일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땅에서부터 치솟은 나무뿌리가 워든 길드원들을 다시금 보호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듯, 마족과 카오틱들에게 공격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베라칸의 눈이 돌아갔다.

- 네년부터 죽여 주마! 네년은, 내 손으로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 아바아아아!

"큭, 이익, X바아알!"

워든 길드는 마법진을 발동해야 하기 때문에 마족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마족들이 격노하며 달려들었고, 그렇기에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말을 좀 들어! 배신한 게 아니란 말이다!"

- 워든 길드가 배신했다! 모조리 죽여라!

"개새끼들아!"

아바가 뭐라 말해도 소용없었다.

모든 정황이 그들이 배신했다고 마족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마족과 카오틱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워든 길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나! 이대로는 다 죽게 생겼어!"

"아, X발! 도망... 하, 도망칠 수도 없어."

"그냥 싸워! 마족들에게 반격해라!"

아바는 도망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사방을 진현우를 비롯한 엘프와 나무 정령이 포위하고 있다.

도망치려고 한다면 이쪽을 공격할 터.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그들을 보호하던 나무뿌리가 파괴됐다.

부서진 나무뿌리를 넘어선 베라칸과 그 부하들이 아바와 워든 길드원들을 공격했다.

아바는 이를 악물었다.

"개같네, 진짜! 맞서 싸워!"

"누, 누나! 그래도 괜찮겠어?"

"그러면 이대로 다 죽을 거야? 저 새끼들 눈 돌아갔다고! 여기서 뭘 어떻게 해!"

아바의 눈이 새빨개졌다.

극도의 분노와 억울함,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

"기회를 엿보고 도망친다! 다 틀렸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워든 길드는 무기를 들고 마족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베라칸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 가증스러운 놈들.

- 화르르르륵!

검붉은 화염이 거대한 파도처럼 솟구쳤다.

베라칸이 피워 낸 불꽃은 쏟아지던 화살과 정령 마법을 단번에 잡아먹었다. 강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뿌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독한 마기가 생명력을 삼켰다.

- 네놈들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콰아앙!

베라칸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벌레를 내치는 것 같은 손놀림. 하지만 그 손끝에서 펼쳐지는 마법은 경이로웠다.

발 아래에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검붉은 장막이 마족과 워든 길드를 에워쌌다.

- 바깥의 저 버러지들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 전에, 네놈들부터 죽여 주마.

베라칸이 또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하늘에서부터 검은 낙뢰가 끝없이 내리쳤다.

"꺄아아아악!"

"크하악!"

낙뢰가 워든 길드원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 대륙으로 파견된 마족 중에서 손에 꼽히는 흑마법 지식을 가진 게 베라칸이었다.

그 존재가 마족들에게 안정감을 줬다.

- 당황하지 마라, 군단이여. 우리는 저것들보다 강하다. 마계에서 우리가 넘었던 사지를 잊었느냐? 이건, 너무도 사소하다.

- 군단장님!

- 배신자들을 섬멸하라!

베라칸은 끝없는 흑마법으로 배신자와 적들을 처리했고, 마족들이 거세게 돌진했다.

수적으로도 열세인 데다가 상황도 좋지 않은 워든 길드는 일방적으로 당했다.

군단장은 땅에 기다란 손톱을 꽂았다.

- 내게 응답하라, 마기의 근원이여.

그 움직임에 마법진이 화답했다.

이미 활성화된 마기의 근원이 마족들을 세계수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줬다.

마기는 생명의 상극. 엘더 그로브의 저 뿌리도 이미 발동된 마기의 근원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 저 샘의 생명력을 삼켜라. 가진 마기를 모두 내뿜어라. 이 땅을 마기로 뒤덮어라.

베라칸은 손끝의 마기에 집중하면서 마기의 근원들을 과부화시키려고 했다.

지하에 마기가 들끓는 것이 느껴진다. 생명이 넘치는 바닥이 진흙으로 변하고 있다.

- 그래, 이 땅을 오염시켜라!

- 사아아아!

지하에서부터 강렬한 마기가 솟구쳤다.

솟아오른 마기가 주변을 가득 뒤덮었고, 그에 닿은 생명이 모조리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베라칸이 광소를 터트렸다.

- 버러지들! 감히, 이 군단장 베라칸에게 하찮은 장난질을 해? 네놈들은 모두...!

- 파아아앗!

바로 그때, 강렬한 빛이 터졌다.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는 광휘. 마족은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녹을 것 같은 강력한 신성.

사방을 에워싼 마기의 장벽이 희미해지고, 자욱하게 펼쳐진 마기가 옅어졌다.

- 끄아아아아아아!

- 비, 빛이...!

마족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베라칸은 그들보다는 자유로웠다. 강력하지만, 이 정도 신성력이면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 안 돼! 마기의 근원이!

강력한 신성은 지상을 넘어 지하까지 파고들었다. 활성화된 마기의 근원이 심긴 마법진이, 그를 보호하던 마기가 흩어졌다.

엘더 그로브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큭, 으윽...!

마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던 나무뿌리가 지하의 마법진으로 파고들었다.

나무뿌리는 마법진 곳곳에서 불길한 빛을 내뿜는 마기의 근원을 낚아챘고.

- 카드득!

- 크아아아악!

마기의 근원을 그대로 파괴했다.

단번에 부서지는 결정체. 마기의 근원이 파괴되면서 마기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졌다.

안개처럼 흩어진 마기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 안 돼, 안 돼... 큭, 아아아악!

- 구, 군단장님. 장막이...!

- 으아아아아아!

마기의 근원이 있었기에 세계수의 장막이 가진 마족을 거부하는 힘을 견딜 수 있었다.

그게 사라진 지금.

- 쉬이이익....

- 캬아아아아아!

마족들에게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계수의 장막이 침입한 마족들을 거부하면서 몸이 조금씩 타들어 가는 것이었다.

동시에 엄청난 무게감이 어깨를 짓누르면서 마족들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 크으, 으으윽... 이 빌어먹을...!

일이 잘못됐다.

아니, 실패했다. 베라칸은 직감했다.

그리고 몸을 휘청거리는 그를 향해서 회오리치는 냉기를 휘감은 도끼들이 쇄도했다.

- 퍼어억!

- 크하아악!

사지를 꿰뚫는 도끼.

고통에 비명을 내지른 베라칸이 도끼를 던진 장본인을 봤다. 저 너머에 있는 진현우.

그가 성배를 쥔 채 씨익 웃고 있었다.

"제대로 역습당한 기분이 어때?"

- 하찮은,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그 쓰레기한테 당하니 아주 비참하겠어."

진현우는 손아귀에서 검을 빼 들었다.

신성한 빛을 내뿜는 성검이 어둠을 밝혔다.

"다 죽여."

- 와아아아아아!

검을 내세우며 돌진하는 진현우.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숨 쉴 틈 없이 들이닥치는 공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베라칸은 그렇게 생각했다.

- 크윽, 크, 으으아아아아!

베라칸의 두 손이 흑마법을 내뿜었다.

한 손에는 마기로 잠식시키며 불태우는 흑염과 또 한 손에는 지독한 저주가 담긴 마기.

그것들이 노리는 것은 진현우였다.

하지만.

- 카드드득!

- 인간 따위가, 어떻게!

진현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들이닥치는 흑마법을 본 그는 빛의 수호를 내세우면서 신성한 방패를 전개했다.

거대한 방패는 닥치는 흑마법들을 모조리 흡수했고, 흡수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 콰아아앙!

- 캬아아아악!

"으아아아아...!"

신성한 방패가 흑마법을 충분히 흡수했고, 이윽고 강력한 파동을 내뿜었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신성한 파동이 그 궤적에 서 있던 마족과 카오틱을 덮쳤다.

그들이 단번에 날아갈 정도의 위력.

- 나를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그 공격에 베라칸이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의 흑마법이 역으로 이용되어 부하들을 덮치는 용도로 쓰였으니 그럴 수밖에.

그리고 그 공격은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적들의 진형이 무너졌다!"

"쏴라! 아군을 사격하지 않게끔 조심해라!"

- 나쁜 괴물들, 우리 샘에서 물러나!

예상치 못한 충격파에 적들의 방어가 무너졌다. 그 틈을 노린 아군이 맹공을 펼쳤다.

수많은 화살과 마법이 쏘아졌고, 살아 움직이는 나무들이 마족들에게로 돌진했다.

나무 정령들이 깃든 나무들이었다.

"X자식들, 다 죽여 주마."

"하이드! 좀 성급하게 움직이지 마!"

그 뒤에서 플레이어들이 뛰쳐나왔다.

드라이어드의 숲에서 붙잡혔었던 하이드와 그 동료들이었다. 마족이 굳이 포획하려고 했을 만큼, 그들은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개... 크아아악!"

- 마기가, 제길! 몸이 무겁다...!

적들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세계수의 장막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마족들은 온갖 디버프에 시달리고 있었고, 카오틱들로 막기에는 숫자가 역부족이었다.

'위험하다.'

베라칸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계의 군단장인 자신이,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였다.

- 크아아아아악!

도끼를 쥔 손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쏘아지는 도끼가 분열하여 베라칸의 사지를 노렸다. 무시할 수 없는 위력. 그의 정신이 도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진현우는 그 틈을 노렸다.

- 퍼어엉!

- 크하아악!

흡사 대포가 쏘아지는 것 같은 굉음.

진현우의 주먹이 허공을 강타했고, 예기치 못한 충격파가 베라칸의 복부를 강타했다.

도끼를 막으려던 움직임이 무산되었다. 쏘아지던 도끼가 그의 사지를 베고 지나갔다.

- 인간, 빌어먹을, 인간 놈이...!

베라칸은 이를 갈았다.

몸이 무겁다. 마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모든 게 저놈이 내뿜는 빛 때문이다.

이 사태를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놈을 죽여야 한다. 어떻게든!'

베라칸은 눈을 부릅뜨며 두 손을 펼쳤다.

그러자 진현우의 코앞에서 거대한 손이 기습적으로 나타나더니 그의 몸을 힘껏 밀쳤다.

뒤로 밀려나는 진현우를 노리고, 순식간에 허공에 나타난 다수의 검은 구체가 쏘아졌다.

- 콰아아앙!

섬광이 번쩍였다.

진현우의 신형은 두 번 번쩍이면서 검은 구체들을 피했고, 베라칸에게로 돌진했다.

- 빌어먹을...!

베라칸은 이를 악물며 손을 내저었다.

넘실거리는 마기가 바닥을 갈랐고, 그 사이에서 검은 가시가 무수히 솟구쳤다.

- 서걱!

진현우의 성검이 빛을 내뿜었다.

신성한 빛을 머금은 성검이 가시들을 베어 냈고, 베어 내지 못한 가시는 방패로 막았다.

베라칸이 분노하며 양손을 크게 펼쳤다.

- 죽어... 죽으란 말이다!

그러자 진현우의 양옆에서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놈이 양손을 마주치자, 두 벽이 그를 압살할 기세로 빠르게 좁혀졌다.

서로 충돌한 검은 벽이 폭발했다.

- 퍼어어엉!

하지만 진현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것인가? 주변을 돌아보던 베라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로 그곳에, 거대한 그리폰에 올라탄 진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 키아아아아아!

- 크으으윽!

그리폰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깃털을 빗물처럼 쏟아 내면서 베라칸을 향해 돌진했다.

베라칸은 그 깃털들을 몸으로 받아 내면서 마기를 집중했고,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 화아아악!

허공에 자그마한 구체가 생겼다.

검은 구체가 불길한 빛을 내뿜더니, 블랙홀처럼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폰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 무슨...!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리폰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하늘을 날던 그리폰이 사라지고, 진현우가 추락했다.

그걸 본 베라칸의 생각이 순간 멈췄다.

'뭘 하려는 거지? 그리폰은 왜?'

- 쿠어어어엉!

그런 베라칸의 귓가에 포효가 들렸다.

놈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있는 것은 거대한 그리즐리 베어였다.

엄청난 덩치의 곰이 베라칸을 짓눌렀다.

그리고 추락하던 진현우가 활을 쥐었다.

- 푸우욱!

- 으, 크으으윽...!

손아귀의 아공간으로 소환한 실피르.

분열하는 여풍의 화살이 곰에게 짓눌린 베라칸을 사방에서 덮치고, 꿰뚫었다. 연이은 공격에 휘말린 베라칸의 마법은 불안정해졌다.

- 미물 따위가... 꺼지란 말이다!

- 커어엉!

수많은 검은 화살이 곰을 사방에서 꿰뚫었다. 곰은 사라졌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주변을 빨아들이던 구체의 흡인력이 약해졌고, 그건 진현우가 노리던 타이밍이었다.

'빠르다.'

진현우가 돌진했다.

베라칸이 황급히 펼친 마법이 그를 뒤쫓았다. 하지만 또 한 번 섬광을 사용하자, 흑마법도 그를 쫓지 못하고 땅에 처박혔다.

거리가 좁혀진다.

'이렇게 된 이상...!'

베라칸은 자신의 심장을 인지했다.

마족, 그중에서도 군단장인 베라칸의 심장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깃들어 있다.

생명을 대가로 심장을 과부하시킨다면, 이 마기를 바깥으로 내뿜는 것이 가능하다.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여 주마.'

마기는 살아 있는 것의 상극.

진현우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를 노려서 심장을 과부하시킨다면, 심장이 내뿜을 마기로 그를 단번에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

베라칸은 그걸 노렸다.

'와라. 어서... 조금 더 빨리!'

거리가 좁혀진다. 점점, 더 빠르게.

베라칸은 때를 기다렸다. 확실하게 적을 죽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때를 노렸다.

'지금!'

그때가 왔다.

베라칸은 체내의 마기를 순환시켜 심장을 과부하시켰다. 동시에 저 너머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끝났다. 이걸로 저놈을.

- ...!

바로 그 순간, 진현우가 멈췄다.

발목에 무리가 갈 정도로 억지로 멈춘 그는 성검을 쥔 채, 베라칸을 보며 웃었다.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비웃음이었다.

"내가 바보냐?"

푸욱!

진현우가 성검을 투척했다. 일직선으로 쏘아진 성검이 마기를 뚫고 베라칸을 꿰뚫었다.

복부를 꿰뚫은 성검이 빛을 내뿜었고, 그 신성력이 베라칸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 컥...!

조금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그 순간에 강제로 걸음을 멈추고 검을 투척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진현우는 주먹으로 허공을 강타했고, 쏘아진 충격파가 성검의 손잡이를 강타했다.

- 끄, 으으윽...!

성검이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신성력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끔찍한 감각에 베라칸은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현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리샤! 쏴!"

베라칸은 멍하니 주변을 돌아봤다.

함께 왔던 부하들이 대거 쓰러진 것이 보였다. 남은 이라고 해 봤자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엄청난 숫자의 화살이 오직 베라칸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 하.

베라칸은 실소를 터트렸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해서인 건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인 건지, 둘 다인 건지.

쏟아지는 화살들이 그를 꿰뚫었다.

- 이런, 빌어먹을....

그리고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베라칸의 앞까지 도달한 그는 복부를 꿰뚫은 성검을 잡고 그대로 올려 쳤다.

촤아악! 베라칸의 몸을 가른 성검이 놈의 어깨 위에서 솟구쳤다. 진현우는 왼손으로 도끼를 받고 남은 어깨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 이 내가, 군단장인 내가....

두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법을 봉쇄당한 베라칸은 황망한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그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진현우는 성검을 쥔 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너희들은 하는 말은 너무 뻔해."

- ...!

성검이 베라칸의 목을 베었다.

떨어져 나간 머리가 떠올랐다가 추락했다. 진현우는 바닥에 나뒹구는 머리를 짓밟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 와아아아아아!

베라칸의 최후를 본 이들이 함성을 토했다.

전투의 끝을 알리는 함성이었다.

118화

배신의 대가 (2)

군단장이 죽자 적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남은 생존자들은 항복하면서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 마족은 모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카오틱들은... 아직 쓸모가 있겠지.

그들을 놓고 엘더 그로브가 한 말이었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간단하게 말해서 죽이고 숲의 거름으로 쓰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카오틱뿐이었다.

"다, 다 말할게! 목숨만 살려 줘! 제발!"

"살고 싶으면 그래야지."

어쨌든 카오틱들은 쓸모가 있다.

진현우는 곧바로 놈들에게 정보를 캐냈다.

"어디서 왔지?"

"푸, 풍요로운 초원. 거기서 넘어왔다."

"좋아. 거기 남은 병력 숫자는?"

"많지 않아! 여길 확실하게 점령할 생각이라서 수비 병력까지 같이 데리고 왔다!"

"그래? 지원 병력은 없나?"

"베, 베라칸이 요청한 걸로 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가 되면 초원에 도착할 거야!"

정보를 들은 진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정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풍요로운 초원의 지도를 그리게끔 했다.

미호는 옆에서 마안을 이용하여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고 있었다.

"인간! 이놈은 거짓말을 했다!"

"뭐, 뭐라고?! 아냐! 난 거짓말을...!"

"이 새끼가 나한테 거짓말을 해?"

"끄아아악!"

거짓말을 한 카오틱은 그 자리에서 머리가 쪼개졌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니 누구도 진현우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모든 정보를 캐낸 진현우는 턱을 매만졌다.

"풍요로운 초원이라."

진현우는 지도를 확인했다.

이 마법진이 연결된 곳은 마족 측의 거점, 풍요로운 초원이라는 이름의 지역이었다.

다양한 약재가 자라는 곳이다.

"흠, 만약 여기를 먹는다면...."

풍요로운 초원을 차지하면 새로이 갈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이 있다.

그중에 흥미로운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중립 거점, 고요한 구덩이."

엘프와 마족, 어느 진영도 점령하지 않은 지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령할 수가 없었고, 점령할 필요도 없는 지역이었다.

곁에 있던 이리샤가 지도를 흘깃 봤다.

"응? 고요한 구덩이? 거긴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왜? 따로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까. 넓은 고원에 거대한 구덩이만 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점령도 안 되는 곳이었다. 점령한다고 해 봤자 별다른 이점도 없으니 엘프든 마족이든 탐내지 않았지만.

'여기에 퀘스트가 있단 말이지.'

그것도 '히든 퀘스트'가 있다.

문제는 퀘스트의 난이도다. S등급의 퀘스트로, 폭군 퀘스트에 버금갈 정도의 난이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군 퀘스트처럼 까다롭지는 않다는 것. 퀘스트의 조건은 간단하다.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

특수한 조건을 충족하면 고요한 구덩이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

그놈을 처리하면 되는 간단한 퀘스트다.

그게 너무도 어려워서 그렇지.

'만약 처리할 수만 있다면 S등급 보스 몬스터의 소환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또 하나.

'정보를 흘려서 여기에 마족이나 카오틱들을 불러모을 수만 있다면....'

히든 퀘스트의 보스 몬스터를 소환해서 서로 공멸하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진현우는 생각을 정리했다.

"좋아, 일단 초원부터 먹어야겠어."

진현우는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며 정비하던 엘프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마족에게 반격할 때가 왔다.

* * *

풍요로운 초원.

한때는 엘프가 수많은 약초와 식량을 재배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마족에게 빼앗긴 곳.

그곳을 마족과 카오틱이 지키고 있었다.

"이건 너무 많이 빼 간 거 아냐?"

초원에 세워진 요새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카오틱이 주변을 보며 투덜거렸다.

평소에는 마족과 카오틱으로 가득한 곳인데, 지금은 인원이 많이 준 상태였다.

베라칸이 데리고 간 탓이었다.

-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인간.

"어엉?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

그에게 마족이 다가왔다. 베라칸을 대신해서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마족이었다.

카오틱이 짜증을 토했다.

"수비 병력까지 다 빼 간 건 너무한 거 아냐? 이러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어쩌려고?"

- 나무 정령의 샘을 점령하면 문제없다. 지리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거기를 통하지 않으면 이 지역으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긴... 하지."

정확하게 말하면 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중립 거점을 경유하거나 마족이 점령한 거점을 지나와야만 한다.

거의 올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 흠, 베라칸 님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나? 이번 계획이 실패할 확률은 없다고 본다만.

"거, 자신감 한번 대단하네. 나도 너희처럼 자신감 좀 가지고 살아 봤으면 좋겠다."

대화가 안 통한다.

마족들은 당연히 성공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카오틱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걸려서 그렇지.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 걱정하지 마라, 인간. 베라칸 님은 성공하실 거다. 계획도 잘 진행되지 않았나. 조금 있으면 나무 정령의 샘에서 통신을....

"어?"

마족의 말을 무시하고 주변을 돌아보던 카오틱은 불현듯 뭔가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요새의 중앙에 있는 마법진.

"저거... 왜 빛나냐?"

- 뭐라고?

그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베라칸과 그 부하들이 전이하는 데 썼던 마법진. 빛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력도 돌고 있었다. 다르게 말해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법진이, 다시 작동한다고?"

이곳에 있는 전이 마법진은 일회용이다.

한 번 사용하면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왕복하는 용도로 만들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에 베라칸도 일회용으로 만들었다.

근데 그게 다시금 작동하고 있다.

"야, 마족! 저거 이상해! 빨리...!"

- 파아아아앗!

"우아아아아악!"

마법진의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워낙에 강렬한 빛이었기에 요새에 남아 있던 이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멀었다.

그리고 그때, 소리가 들렸다.

- 푸슈욱!

"커헉!"

"끄르륵...!"

날카로운 파공음.

그리고 뭔가에 꿰뚫린 이들이 내뱉는 신음.

눈이 멀었던 카오틱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요새의 한복판에 있는 마법진.

그 위에 어떤 이들이 서 있었다. 마족인가? 아니었다. 카오틱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새끼들이 여긴 왜...."

엘프와 플레이어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 빛을 몰고 온 이들이 요새의 아군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윽고 처절한 비명이 초원에 울려 퍼졌다.

* * *

- '풍요로운 초원'을 탈환했습니다. 이곳에 자라는 다양한 약초가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 해당 지역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군에게 특수한 버프를 제공하는 지역입니다.

- 버프: 해당 거점에서 자라는 약초를 이용해 제작한 아이템의 효과 +100%.

- 레벨이 두 단계 상승했습니다!

요새에서의 전투는 금방 끝났다.

오래 걸릴 이유가 없었다. 이곳을 지키던 수비 병력은 나무 정령의 샘을 공략하는 데 투입되었고, 거기서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곳을 되찾게 될 줄이야."

아드네아가 주변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엘프의 상황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되찾을 줄이야.

"약초 상황은 어떻습니까?"

"마기에 다소 잠식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땅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잘됐네요."

"모두 은인의 덕분입니다."

아드네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진현우는 됐다는 듯이 대강 손을 내저었다.

실제로 고맙다는 소리를 너무도 많이 들어서 이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 그래서, 저 인간들은 어쩔 것이냐?

"글쎄다."

요새 한가운데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바와 그녀를 따르는 워든 길드원들이다.

"그냥 죽여라."

아바는 의연하게 말했다.

눈을 감은 채 그리 말하고 있으니 죽음을 각오한, 몹시 고결한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할 말은 없다. 내가 졌고, 너는 이겼다. 죽여라. 내 입에서 나올 말은 없으니까."

"하이드,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찢어 죽이고 싶다."

해머를 쥔 하이드가 으르렁거렸다.

그 눈빛을 받은 워든 길드원이 몸을 떨었지만, 아바는 여전히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본 진현우가 혀를 찼다.

"그럼 그렇게 해. 일단 손목 하나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콰아앙!

진현우의 허락을 받은 하이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해머를 크게 내리쳤다.

그 해머가 노린 것은 아바의 손이었다.

"끄으... 끄흐으윽!"

"자기들 잘 살겠다고 배신하려고 했던 주제에 뭔, 네가 고결한 기사라도 되냐?"

"흐으으! 그냥... 죽이라고!"

"죽일 거야. 근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잖아."

아바의 오른손이 완전히 짓뭉개졌다.

그녀가 핏발 선 눈동자로 진현우를 노려봤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하이드에게 눈짓했다.

다시금 해머가 땅을 내리쳤다.

"아아아아악!"

아바가 몸을 웅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오른손에 이어 왼손까지 짓뭉개진 탓이었다. 하나 그 모습을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저 여자 때문에 죽었던, 아니면 죽을 뻔한 엘프 측의 이들을 생각하면 그럴 이유가 없다.

"저놈이 저리 구르는 꼴을 보니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는군. 다 죽이는 건 안 되겠나?"

"살려 둬야지. 쓸데가 많잖아. 뭐, 여기서 몇 명 숫자를 줄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 역할은 꼭 내게 맡겨 다오."

진현우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바를 무시한 채, 뒤에 있던 아드네아를 흘깃 봤다.

아바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스산했다.

"엘프한테 특수한 심문법이 있다던데요."

"예. 특수한 약재를 이용해서 속내를 숨기지 못하게끔 하는 심문법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초원이 그 약재가 자라는 곳이지요."

"맡겨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제발 맡겨 주십시오."

아드네아가 차갑게 웃었다.

"엘프와의 신뢰를 더럽힌 배신자들은, 부디 저희의 손으로 끝내고 싶으니까요."

"그럼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진현우의 허가를 받은 아드네아는 주변의 엘프들에게 움직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찬가지로 스산한 눈빛으로 워든 길드를 노려보던 엘프들이 즉각 움직였다.

"자, 잠깐! 나, 나는 억울해! 저 미친 여자가 억지로 시켜서 한 것뿐이라고!"

"맞아! 동참하지 않는 놈들은 다 죽였어! 미친X이라고! 우리는 선택지가... 아아악!"

"변명은 가서 듣겠다."

워든 길드원이 구질구질한 변명을 내뱉었지만, 그 변명을 듣는 이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변명이 아닐 수도 있다.

아바가 길드원들에게 엘프를 배신하겠다고 밝히고, 거절하는 이들을 죽였을 수도 있지.

'그게 내 알 바겠냐마는.'

진현우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는 요새를 돌아보면서 기지개를 켰다.

'한동안은 여기에 머물러야겠지.'

풍요로운 초원은 나무 정령의 샘과 이어진 지역이다. 엘프 쪽에서 나무 정령의 샘을 통해서 지원 병력을 보내겠다고 했었다.

그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엘프 여왕을 만나러 가야겠어.'

그녀한테 제안할 것이 있다.

진현우는 세계수의 팔찌를 내려다봤다.

119화

미친 생각

그리고 며칠 후.

엘프 지원 병력이 도착한 걸 확인한 진현우는 곧바로 피난처 베카샤로 돌아갔다.

"인가안, 나는 쉬고 싶느니라...."

"나도 쉬고 싶어."

진현우의 어깨에 매달린 미호가 칭얼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에 거대한 세계수가 빛을 발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저기가 엘프 여왕이 머무는 왕궁이지? 엘프 여왕이 그렇게 예쁘다던데...."

"미친X, NPC들 외모가 중요하냐?"

"NPC는 무슨 NPC야? 살아 있는 엘프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얼굴이나 봤음 좋겠다."

"가끔씩 마을 둘러보러 나온다던데."

플레이어들이 쑥덕거리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건물이 엘프 여왕이 머무는 왕궁이었다. 세계수 근처에 있고, 건물 자체가 아름다웠기에 보러 오는 이들이 많았다.

"좀 더 가까이서는 못 보나?"

"야, 더 가면...."

플레이어 하나가 왕궁에 접근했다.

그러자 왕궁 주변에 서 있던 엘프들이 그에게 활을 겨누면서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더 다가오지 마시오. 여왕님은 높은 공헌도를 쌓은 여행자가 아니면 만나지 않소."

"아, 알아요. 알아.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그럼 거기서 구경하시오."

입구를 지키던 경비들이 그들을 막았다.

엘프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까칠한 반응. 플레이어들은 입을 비쭉 내밀며 떠났다.

"더럽게 까칠하네. 왜 저래?"

"여왕은 공헌도를 쌓은 플레이어가 아니면 안 만나 주잖아. 예전에 있었던 그 사건 때문에."

"아, 그 트롤러 새끼들. 마족들한테 뭐 받고 여왕 암살하려고 했다던가? 맞지?"

"어. 그거."

플레이어 사이에는 배신자가 많다.

카오틱에서 파견된 첩자들이다. 그리고 과거에 그 카오틱들이 엘프 여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당연히 실패하긴 했지만.

"암살 사건 이후로 플레이어들한테 중요한 퀘스트는 잘 안 맡긴다던데...."

"나 참, 미친X들 때문에 별꼴을 다 보네."

"응? 어어!"

플레이어들이 구시렁거렸다.

진현우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왕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기요, 왕궁으로 가면...."

"흠, 조금 늦으셨군요. 여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현우 님."

"거봐, 경비들이 막을... 어엉?"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엘프들이 진현우를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프 경비들은 오히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진현우가 지나가게끔 비켜 줬다.

- 끼이이익, 쿠웅!

닫힌 왕궁의 문이 열렸다.

외부인에게는 어지간해서는 열리지 않는 왕궁의 문이, 그것도 너무도 쉽게.

진현우가 문 너머로 나아갔다.

"뭐, 뭐야? 쟤들이 문을 왜 열어 줘?"

"공헌도가 엄청 높은 플레이어 아냐? 응? 잠깐만, 저거 어디서 본 얼굴인데...."

"본 얼굴이라고? 어, 그러고 보니까."

진현우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일부러 돌아봤다. 그 얼굴을 본 플레이어들이 그제야 누가 왕궁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눈치챘다.

"진현우잖아."

"아니, 3층으로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왕궁에 들어갈 정도로 공헌도를 쌓았대?"

"이걸 부럽다고 해야 하나...."

진현우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얼굴을 확실히 인지하게끔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미호가 질색했다.

- 인간, 드디어 미친 것이냐? 그 뭐냐, 갑자기 자기 과시욕이라도 생긴 것이냐...?

"...필요해서 한 일이야."

- 필요? 으음, 자신감을 채우는 데 필요한 건가? 인간,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진현우는 미호의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가 엘프 여왕을 만나려고 왕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플레이어들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좋아, 그럼...."

진현우는 왕궁의 안쪽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자 저 너머에 있는 거대한 문이 열리고, 그리 넓지 않은 알현실이 나타났다.

그곳에 엘프 여왕이 서 있었다.

"반가워요. 그대가 진현우인가요?"

"예, 맞습니다. 여왕님."

"그렇군요. 부디 자세는 편히...."

진현우는 여왕에게 예의를 갖췄다.

여왕은 무릎을 꿇은 그에게 자세를 편히 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자마자 이런 말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여왕님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할 것이라고요? 그게 무슨...."

"티아라."

여왕은 티아라를 쓰고 있었다.

일반적인 티아라와는 다르게 세계수의 나뭇잎과 가지를 엮어서 만든 티아라였다.

"여왕님이 쓰시는 티아라가 필요합니다. 저한테 빌려주시거나, 함께 가 주십시오."

"함께 가 달라니, 어디로 말인가요?"

"고요한 구덩이."

여왕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깃들었다.

"고대의 괴물이 봉인된 곳입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야심한 밤.

진현우는 고요한 구덩이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한 무리의 엘프가 동행하고 있었다.

"여왕님, 이런 무모한 행동은...."

"그만 좀 말하세요, 라시드. 제가 선택한 겁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니까요."

"여긴 접경 지역입니다. 위험하단 말입니다. 마족들이라도 만나면 어쩌시려고!"

"아아, 제발. 그만하세요."

엘프 여왕과 그녀를 수행하는 라시드였다.

원래는 많은 호위를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진현우가 라시드 말고는 안 된다고 막았다.

그렇게 데리고 온 라시드는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엘프 여왕을 타박하는 중이었다.

질린 여왕이 귀를 막을 정도로.

- 저 남자, 생각보다 말이 많구나.

'여왕이 이런 곳으로 온다고 하면 나 같아도 저럴 거다. 진짜로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 흠, 티아라만 빌릴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진현우도 티아라만 빌리고 따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 건지, 엘프 여왕이 따라오고 싶다면서 흥미를 드러냈다.

거절했지만, 그게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조용히 움직이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요한 구덩이는 가치가 없는 곳이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엘프든 마족이든 여기는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 그래서 여행자, 다른 곳도 아니고 고요한 구덩이로 가자고 한 이유가 뭔가?"

"거기서 찾을 게 있습니다."

"찾을 것? 후우, 다른 사람이 한 말이면 의심했을 거다. 하지만 또 네 얘기니...."

라시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태껏 한 일이 있는 진현우이기에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여왕이 따라오려고 한 것도 그래서일 터.

"다 왔습니다."

"고요한 구덩이는 오랜만에 보는군요. 언제 봐도 참... 아무것도 없는 곳이에요."

"먼 옛날에는 이곳이 초원이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지금은 그냥 황무지입니다만."

일행은 고요한 구덩이에 도착했다.

보이는 곳은 한때는 넓은 초원이었을 것 같은 황무지. 그리고 그 황무지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뻥 뚫려 있었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다.

"이 구덩이에 뭐가 있다는 건가요?"

"흠, 그것보다 먼저... 이곳에 이런 구덩이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유 말인가요? 그건...."

여왕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 구덩이와 연관된 설화가 있다.

"음, 정말 옛날 얘기긴 해요. 아득히 먼 옛날에, 이곳에 엘프들을 멸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괴물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지고, 독을 흩뿌리는 괴물이."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당시에 엘프 왕국을 이끌던 왕이, 따르던 용사들을 이끌고 격퇴했다고 해요. 그 부상으로 왕은 얼마 가지 못해서 죽었고요."

여왕이 어렸을 때 들은 설화였다.

어머니가 그녀를 품에 안고서 동화책을 읽듯이 들려줬던 옛날 얘기. 너무도 먼 옛날이라서 이제는 진위도 의심받는 얘기였다.

"그 설화가 사실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진현우는 고요한 구덩이로 떨어졌다.

구덩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그는 손아귀의 아공간에서 부서진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고대의 왕이, 그 괴물을 격퇴한 것이 아니라 봉인한 것에 그쳤다면?"

"무슨...."

"잘 보십시오."

푸욱!

검기가 실린 검이 땅 깊숙히 꽂혔다. 모두의 귓가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 드르륵... 쿠우우웅!

구덩이에서 어떤 장치가 솟구쳤다.

마법으로 구성된 장치였다. 그 장치를 본 여왕은 까닭 모를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

진현우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여왕님의 티아라가 필요합니다."

"제가...."

여왕은 마법 장치 앞에 섰다.

진현우는 말없이 그녀에게 장치에 손을 대라고 손짓했다. 여왕은 머리에 티아라를 쓴 채, 조심스럽게 장치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 '왕의 권위'를 인지했습니다.

- 신전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내부로 들어갈 경우 특수한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뒤흔들렸다. 진현우는 여왕을 안고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있었던 구덩이의 밑바닥에서부터 거대한 건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저건...."

난생처음 본 신전의 존재에 여왕은 할 말을 잃었고, 진현우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 히든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 처음으로 발견한 보상으로 몬스터의 경험치와 드롭률이 상승합니다. 보스 몬스터가 무조건 희귀 아이템을 드롭합니다.

눈앞에 있는 신전.

저게 이곳에 숨겨진 히든 던전이었다.

[고대의 신전]

· 권장 레벨: Lv.70.

· 최대 인원: 최대 20명.

· 출입 제한: 마족은 출입 불가.

· 설명: 아득히 먼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신전. 무엇을 목적으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자체가 특수한 목적을 갖고 있다.

내부에는 침입자를 거부하는 고대의 가디언과 영혼들이 가득하지만, 그들이 생전에 남겼던 귀한 물건들이 보상으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끝까지 간다면....

히든 던전의 이름은 고대의 신전이었다.

신전을 바라보던 여왕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곁에 있던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군. 그 설화가 사실이었나?"

"그러니까, 먼 옛날에 정말로 괴물이 여기 나타났었고. 그 당시의 왕이 그걸 물리치려 했지만 실패하고 여기 봉인했다... 이건가요?"

"예, 맞습니다."

진현우는 신전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여왕은 그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봤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던전을 공략할 원정대를 꾸려 주십시오. 아주 크게, 사람들이 알게끔 홍보해서요."

"그건...."

"카오틱과 마족들도 알게 될... 아니군."

라시드는 말을 하다 말고 씨익 웃었다.

"그걸 노리는 건가?"

"네. 제가 여태껏 한 것들이 있잖습니까? 이번에도 좀 믿고 맡겨 주셨으면 하는데요."

"흠."

라시드가 여왕을 바라봤다. 그녀는 쏠리는 시선들을 인지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말해 보세요. 진현우, 그대가 뭘 하려는 건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현우는 여왕과 라시드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상세하게 밝혔다.

그걸 들은 여왕이 다시금 한숨을 토했다.

"미친 생각을...."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계획이었다.

* * *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드라이어드의 숲에 풍요로운 초원을 되찾고 나무 정령의 샘까지 지키는 데 성공한 엘프는, 한동안 수비에 전념하며 내부를 점검했다.

배신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길, 활동하기가 너무 힘들어졌어.'

카오틱, 이승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2층에서 카오틱으로 전향한 그는 플레이어로 위장한 채 여러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조심하면서 활동하면 지낼 만했는데, 최근에는 활동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진현우, 그 새끼 때문이야.'

워든 길드가 배신 혐의로 몰락했다.

그 뒤부터 엘프들의 경계가 심해졌다. 어지간한 정보에는 접근조차 못 할 정도였다.

엘프 왕궁 내부에도 카오틱에게 정보를 주던 이들 몇 명이 축출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나도 위험하겠는데. 도망쳐야 하나."

이승호는 한숨을 내쉬며 광장으로 향했다.

평소 플레이어들이 거래를 하거나, 파티를 구하기 위해서 모이는 곳. 원래 사람이 많기는 한데, 오늘은 유독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뭐야?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사람들은 광장의 게시판에 모여 있었다.

뭔가 싶어서 게시판을 들여다보니, 평소에는 없었던 큼직한 게시물이 붙은 게 보였다.

그 내용을 본 이승호가 경악했다.

[플레이어 모집 공고]

- 이번에 탈환한 풍요로운 초원에 인접한 지역인 고요한 구덩이에 히든 퀘스트와 관련된 '고대의 신전'이 나타났다.

고요한 구덩이의 점령 권한과 관련 있는 퀘스트라고 하니, 실력에 자신 있는 플레이어는 1차 공략대에 참가하기를 바란다.

성공한 이에게는 왕궁이 포상하겠다.

고요한 구덩이.

그리고 히든 퀘스트.

"X발, 이게 뭐야...?"

이승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120화

실피르 (1)

갑작스러운 공고로 엘프 측이 떠들썩해졌지만, 마족 측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여러 거점을 빼앗기면서 입었던 큰 피해를 추스르기 위해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게 마음에 안 드는 이도 있었다.

-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하이아칸 대륙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

한때 엘프의 수도였던 헤이시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곳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마기에 물들어서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 수도에서 부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 우리의 손에 들어왔던 드라이어드의 숲과 풍요로운 초원까지 빼앗겼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 그리고 나무 정령의 샘은 오랫동안 준비했으면서 성과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헤이시스의 왕궁.

인간 같은 형태를 한 마족 군단장이 왕궁의 알현실 내부의 장막 앞에서 부복하고 있었다.

장막 너머에는 거대한 샘이 있었는데, 그 샘은 완전히 마기로 잠식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샘에 거대한 대악마가 잠겨 있었다.

- 군단장 아스튼, 이런 실패를 거듭하는 네놈을 내가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베라칸의 실수를... 제가 되돌리겠습니다."

- 그 샘을 네가 뺏을 수 있다는 것이냐?

"그건...."

군단장 아스튼이 침음성을 흘렸다.

베라칸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갔고, 그 병력들을 나무 정령의 샘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갈아 버렸다.

그건 마족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 그 요새를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이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힘들 것 같습니다."

- 가능성이 없는 말은 꺼내지도 말거라.

"죄송합니다, 헬만 님."

아스튼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었다.

대악마의 모습은 장막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엄청난 체격과 위압감은 장막으로도 숨길 수 없었다.

'대악마 헬만.'

마계의 왕 아래로 강한 권력을 가진 이들.

먼 과거에 마계에서 일어났던 전쟁에서 승리해 대악마를 지위를 얻은 헬만은, 마왕의 명령으로 하이아칸 대륙을 차지하려 내려왔다.

'지금은 마계에서보다는 약해졌지만....'

첫 번째로 마족들을 이끌고 인간계로 넘어오는 과정에 가진 힘의 상당수를 소비한 것.

두 번째로 막 대륙에 도착한 마족들을 막으려던 세계수와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것.

그런 이유로 대악마 헬만은 엘프의 수도에 머물러 요양하면서 부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 지금 나는 움직일 수 없다, 아스튼. 마왕님께서 내게 맡기신 정벌의 임무를, 한동안은 너희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알고 있습니다, 헬만 님."

- 이 대륙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데, 너희 군단장이 나를 너무도 크게 실망시키는구나.

마왕은 이 대륙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간계를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몹시도 중요한 임무였기에, 대악마 헬만에게도 실패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실패했다. 그것도 크게.

- 전쟁이 멀지 않았다.

세계수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마족을 막는 저 장막이 사라질 날도 머지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거점을 빼앗기다니.

- 그 전에, 너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손실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만 님."

아스튼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살짝 열렸던 장막이 완전히 닫혔다. 더는 할 얘기가 없으니 퇴실하라는 뜻이었다.

군단장은 알현실을 떠났다.

"후우, 병신 같은 베라칸 놈."

그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욕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스튼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왕궁의 기나긴 복도를 걸어갔다.

"후후후...."

"...."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스튼은 인상을 구기면서 웃음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복도의 구석, 그림자가 진 곳.

그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마인,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대적자에게서 강력한 힘을 선물받고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자.

마인(魔人)이었다.

"아니이, 재밌는 대화를 하는 것 같아서. 대악마한테 어지간히도 까였나 본데?"

"너하고 말장난을 할 기분은 아니다."

"후후. 이거, 화가 많이 나셨어."

아스튼이 인상을 확 구겼다.

그는 저 마인이라는 족속이 싫었다. 인간 주제에 자신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걸 넘어서는 마기를 가진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힘을 하사한 게 마왕님이 아니라는 것도.'

저런 강력한 힘을 하사한 존재가 마왕이 아니라 대적자라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저 마인은 전장의 귀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장에서 엄청난 위용을 뽐내는 여자였다.

아스튼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

'정말로 마음에 안 드는군.'

아스튼은 고개를 돌렸다.

"네놈과 할 말은 없다. 꺼져라."

"쌀쌀맞네. 근데 무시해도 괜찮을까? 내가 지금부터 할 얘기, 너한테도 도움이 될 텐데."

"...."

"한번 들어 봐."

떠나려던 아스튼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걸 본 마인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녀가 요사스럽게 웃었다.

"도움이 된다고?"

"그래. 헬만한테 까이고 온 거 아냐?"

"그분을 편하게 부르지 마라."

마인이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마족의 예의범절을 모르는 족속들. 저 마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또 다른 이유였다.

그래도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었다.

"후... 좋아, 말해 봐라."

"재밌는 소문이 들려서. 알고 있어?"

"소문? 어떤 소문을 말하는 것이지?"

"있잖아. 엘프 쪽에 심어 둔 첩자들. 그놈들이 어젠가 꽤 흥미로운 소식을 보냈거든."

아스튼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고요한 구덩이. 그곳에 히든 퀘스트가 있다네. 엘프 왕궁이 플레이어들을 모집했어."

"...."

고요한 구덩이.

중립 거점.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이상하게 점령할 수가 없는 특수한 거점.

그곳에 히든 퀘스트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수정구를 보는 게 빠를걸."

마인이 수정구로 영상을 보여 줬다.

수정구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넓은 구덩이. 고요한 구덩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뭔가가 솟구쳐 있었다.

"저건...."

"신전이야. 그것도 고대의 신전."

고요한 구덩이에 신전이 솟구쳐 있었다.

수정구를 보던 아스튼의 눈매가 좁혀졌다.

"정확히 어떤 신전이지?"

"그건 모르겠네. 일단 지하 신전이라는 것만 알아. 안에 있는 건... 영혼 계통의 몬스터들하고 가디언. 이것도 옛날 것들이고."

"고대 엘프가 만든 것인가."

그걸 엘프가 플레이어들을 모집하는 공고를 내걸면서까지 공략하려고 하고 있다.

아스튼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급한 것인가, 유혹하는 것인가."

"글쎄, 잘 모르겠네. 어느 쪽이든 움직이긴 해야 하지 않겠어? 고요한 구덩이를 점령하면 어떤 버프를 줄지 모르는 상황이잖아."

"그리고 그 신전을 공략하면 뭘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엘프가 저 정도로 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뭔가가 있다는 건데."

아스튼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신전이 나타나는 바람에 숨길 수가 없었던 건가? 히든 퀘스트는 누가 발견한 거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진현우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공표하기 전날에 그놈이 여왕을 만났거든."

"진현우. 진현우라...."

최근 계속 귓가에 들리는 이름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아스튼을 이 처지로 만든 장본인의 이름이었다.

"진현우, 그놈도 거기에 있겠군."

"그럴 확률이 높겠지. 뭐, 어쩔 거야?"

"여러모로 수상하다. 그놈이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스튼의 검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기회이기도 하지."

"아하, 진현우 그놈을 이번에 죽이겠다?"

"그래. 마인, 카오틱들에게 공표해라. 고요한 구덩이로 가서 신전을 공략하라고. 마족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보상하겠다."

"그럼 너는?"

아스튼이 등을 돌렸다.

"중립 거점은 세계수의 장막이 닿지 않는 곳이지. 내가 직접 가서...."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진현우, 그놈을 죽이겠다."

아스튼이 왕궁을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인이 기지개를 켰다.

"아, 가능하면 내가 죽이고 싶은데."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최근 이름을 떨치는 진현우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고, 알아내야 할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분이 맡기신 것부터 끝내야겠지."

이 엘프 왕궁 심층부에 매장된 '조각'.

대적자가 그녀에게 맡긴 것을 끝내야 한다.

"망할 조각.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어."

마인, 무월은 씨익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왕궁의 통로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그래서, 진현우. 만족하나요?"

피난처 베카샤에 있는 엘프 왕궁의 알현실.

엘프 여왕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현우를 묘한 눈빛으로 보면서 그리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히든 퀘스트가 있다는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들 겁니다. 플레이어든, 카오틱이든요."

"예, 제가 바라던 겁니다."

"정말입니까?"

여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몰래 공략해도 모자랄 히든 퀘스트를 왜 공표해서 사람들이 널리 알게끔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요한 구덩이는 중립 거점입니다. 마족들이 올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중요합니다."

"마족들을 처리하겠다고 했었죠."

여왕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곳에 봉인된 괴물을 이용해서."

듣고도 믿을 수가 없는 계획이었다.

아니, 계획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막고 싶었지만, 본인의 의지가 너무 확고했다.

'저 자신감의 원천은 도대체 뭐지?'

우스운 것은 그 자신감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여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일단 1차 공략대가 완성됐어요. 그대가 말한 명단으로 꾸렸습니다. 당신이 들어갈 자리는 비워뒀고요. 그래야지 그대가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근데, 이 명단. 괜찮겠습니까?"

여왕은 명단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는 고대의 신전 공략에 참가하겠다는 이들의 명단을 보더니 직접 인원을 골라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었다.

"당신을 제외하면 모두 배신자들이잖아요."

"그래서 뽑은 겁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통자를 어떻게 안 건지도...."

진현우는 이번에 포획한 카오틱들과 아바 길드를 심문해서 알아낸 배신자들을 골랐다.

사실 그들이 아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전생을 통해서 아는 정보를 조합하자 대부분의 배신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썩은 싹은 다 쳐내야죠. 안 그렇습니까? 신전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음, 이번 공략대에 참가할 정도니까 이들을 다 쳐내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요...."

"그게 아니더라도 필요합니다. 신전 내부에서 이 배신자들이... 쓸모가 있을 거거든요."

여왕도 처음 명단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3층의 플레이어 중에서 이름을 떨치는 이들이 다수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이 정도로 배신자가 많았던가.

'그래도, 너무 위험해.'

말려야 하나? 그게 맞다. 하지만.

'만약에 성공한다면.'

봉인된 괴물을 이용해서 그곳에 모인 카오틱들과 마족들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번 공략대를 이용해서, 내부에 있던 배신자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곧 있을 전쟁에서 큰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제안을 한 것이 진현우라는 것 때문에, 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마음이 혹하고 있었다.

여왕은 이마를 감쌌다.

"위험해지더라도 돕지는 못할 겁니다. 고요한 구덩이로 플레이어가 몰리더라도 마족들이 보이면 움직이지 않으려 할 테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후우."

여왕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갑자기 진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여왕이 내민 손을 빤히 봤다.

"제가 썼던 활, 실피르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잠깐만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진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 활이라고 뺏어 가려는 건가?'

- 이 흐름에 그런 말이 나오느냐...?

미호가 혀를 찼다.

121화

실피르 (2)

실피르는 원래 엘프 여왕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다시 가져가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역시. 실피르가 힘을 많이 잃었군요. 하긴, 제가 이 활을 잃은 지도 오래됐으니까요. 걱정 마세요. 금방 돌려드릴 테니까요."

"안 가져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아니요, 저한테는 이미 다른 활이 있답니다. 이건 그대의 손에 있는 게... 제 손에 있는 것보다 더 귀중한 일을 할 것 같군요."

"오."

진현우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가져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 인간, 너는 정말... 놀랍구나.

'야, 이거 내가 보상으로 얻은 거거든?'

- 그래애, 그렇겠지.

미호가 진현우를 질린 눈으로 봤다.

그는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엘프 여왕이 내뻗은 손에 실피르를 쥐여 줬다.

"이 활은 제가 태어났을 때 만든 겁니다. 선대 여왕이셨던 제 어머니가 만드시고, 어머니의 힘과 제 힘을 섞어서 실피르에 불어넣었지요.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여왕은 실피르를 쥔 손에 힘을 담았다.

그 손에서 연초록빛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실피르 속으로 스며들었다.

"힘을 잃은 실피르라도, 제 힘을 불어넣으면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거죠."

실피르가 따사로운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때, 진현우는 실피르가 무언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안에 담긴 무언가가.

- 엘프 여왕이 실피르에 힘을 담았습니다. 실피르가 가진 힘을 일부 되찾았습니다.

진현우는 실피르의 변화를 확인했다.

[실피르 (영웅)]

· 설명: 엘프 여왕이 사용했던 활이다. 그녀의 힘 상당수가 활에 담겨 있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옵션: 폭풍시, 다발 화살, 저격.

* 폭풍시: 쏘아지는 화살에 바람이 깃들어 위력과 속도가 향상되며, 관통력이 강해진다. 착탄 지점에 거센 폭풍이 일어난다.

* 다발 화살: 정신을 집중하여 활을 쏠 경우,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쏘아 낸다.

* 저격: 표적과의 거리가 멀수록 화살의 위력이 최대 80%까지 강화된다.

눈에 띌 정도로 강화된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여왕은 어딘가 아쉬운 눈치였다.

"어느 정도 복구하기는 했는데, 제 힘으로는 부족하군요. 이 정도도 괜찮겠죠?"

"충분합니다. 그리고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신전 공략에 필요한 물건들은...."

"이 주머니에 담아 뒀어요. 가져가십시오."

여왕이 가득 찬 주머니를 건넸다.

진현우가 고대의 신전 공략에 필요한 아이템들이니 챙겨 달라고 한 것들이 든 주머니.

하나같이 눈이 뒤집히도록 비싼 것이었다.

"구하기 힘든 재료들일 텐데 감사합니다."

"선조의 정원에서도 드문 재료들이기는 했지만, 괜찮습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요."

"예. 그럼...."

진현우는 실피르와 주머니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후, 그 안에서 부서진 검을 꺼냈다.

고요한 구덩이에 대한 얘기는 끝났다. 이제 여기로 온 또 다른 이유를 달성해야 한다.

"여왕님이 알고 계시는 '조각'. 이게 어디 숨어 있는지, 그 위치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웨펀 마스터가 남긴 조각.

직업 퀘스트는 엘프 여왕이 그 조각이 어디에 숨겨졌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보여 줬다.

"그 검... 익숙하군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있고말고요. 그 검이 부서지지 않았을 때, 원래 주인이 썼을 때 직접 봤었습니다."

"선대 말이죠."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하고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제 어머니가 큰 은혜를 입었었지요. 그래서 무엇이든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습니다."

"그 부탁이라는 게...."

"조각을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여왕의 시선이 부서진 검을 향했다.

"그리고 위험할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이 조각을 탐할 것이라면서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결계를 만들었지요."

여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마력이 뭉치더니, 진현우의 바로 코앞에 낯선 풍경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건 어딘지 모를 왕궁의 지하였다.

"수도의 왕궁입니다. 그곳의 지하에 선대들의 힘을 빌려서 결계를 만들었습니다. 여왕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결계를요."

"만든 장본인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요?"

"그래야지 결계가 강력해질 테니까요."

"흠,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군요."

"그렇죠. 왕궁을... 빼앗겼으니까요."

진현우의 말에 여왕이 쓰게 웃었다.

"그럼 왕궁의 지하에 있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진현우는 이마를 짚었다.

영체 상태로 떠 있던 미호가 입가를 가리면서 쿡쿡 웃는 것이 보였다.

'진짜 죽여 버릴까?'

진현우의 살기를 느꼈는지, 미호가 몸을 덜덜 떨면서 여왕 뒤로 숨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겪은 일인데, 그 조각을 탐내는 놈들이 있습니다. 다른 놈들이 가져갔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되는데요."

"아직은 괜찮을 겁니다. 결계가 파괴됐다면 저도 알 수 있으니까요. 다만...."

여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누군가 결계를 건드리고 있는 건 맞습니다. 점점 위태로워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여왕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결계를요?"

"저도 궁금합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저조차도 어쩔 수 없는 결계를 건드리는 건지."

진현우는 의자에 등을 깊게 파묻었다.

확실해진 것은 둘.

'하나, 조각은 엘프 왕궁 지하에 있다. 둘, 2층에서 만났던 마인처럼 그 조각을 탐내는 놈이 결계를 해제하려고 하고 있다....'

시간은 진현우의 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결계가 파괴되기 전에 어떻게든 엘프 왕궁에 도달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대로서는 꼭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예. 따로 방법이 없을까요?"

"있기는 합니다."

여왕이 다시금 손가락을 튕기자, 진현우의 앞에 있던 풍경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그건 어두운 지하 통로였다.

"마족들의 공습은 갑작스러웠습니다. 저희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가까스로 도망쳤죠. 그때 저희가 탈출하면서 썼던 통로입니다."

"흠, 마족들도 이미 알고 있겠는데요."

"그렇겠지요. 그래도 이곳을 통하면 바로 왕궁의 지하로 갈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위험하다는 거겠군요."

마족들도 존재를 알고 있는 통로다.

아예 막혔을 가능성도 있고, 누군가 올 것을 대비해서 뭔가를 준비해 뒀을 수도 있다.

"만약에 통로가 막혔다면, 그건 괜찮습니다. 통로를 다시 개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에 함정이 있다면...."

"그건 감수해야 한다는 거군요."

진현우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위험하다.

하지만 메리트는 있다. 아니, 크다.

"수도로 가는 건 위험합니다. 마족들이 개조를 거듭한 탓에 요새처럼 바뀌었거든요. 통로로 진입하면 무조건 적에게 들킬 테고요."

"흠, 방법은 제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겠다고요?"

거기까지 말한 여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이상하네요. 그대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니, 꼭 조만간 수도를 공략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예, 그렇게 할 겁니다."

"네?"

진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왕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려고 이번 일을 벌인 겁니다."

"이번 일은... 고요한 구덩이 말인가요?"

"맞습니다."

고요한 구덩이에 있는 히든 퀘스트.

그곳에 잠든 보스 몬스터를 죽여서 '소환석'을 얻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진현우가 이번 일을 벌인 것도 그래서였다.

"일단 여왕님은 말씀하신 통로를 이용해서 수도로 갈 방법을 생각해 주십시오. 아, 그리고 쓰고 계신 티아라는 빌려주시고요."

"네? 아, 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티아라도 지금, 어디에 쓰려는 거죠? 일단 드릴게요."

"잘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여왕은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쉼 없이 떠올리면서도 진현우의 말에 수긍했다.

그는 등을 돌렸고, 이내 알현실을 떠났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 뒷모습을 보던 여왕이 중얼거렸다.

엘프 수도. 그녀로서는 공략할 엄두도 못 냈던 곳을 공략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다니.

"미친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 * *

고대의 신전 공략대가 소집되었다.

총 인원은 20명. 거기서 진현우를 제외하면 모두가 카오틱과 내통하는 배신자인 상황.

공략대를 이끄는 건 크로커스라는 이름을 가진, 3층에서 꽤 유명한 노인 플레이어였다.

"네가 진현우인가? 반갑다. 난 이번 공략대를 이끄는 역할을 맡은 크로커스다."

"예, 반갑습니다. 전 진현우라고 합니다."

"유명한 플레이어가 와서 좋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진현우 아닙니까? 제가 공략대에 저 이름이 있는 거 보고 바로 합류했다니까요."

크로커스는 진현우를 보며 씨익 웃었다.

다른 공략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현우를 보는 얼굴이 호의로 가득했다. 하지만.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죽인다.'

'저놈만 죽이면 마족들이 약속한 보상을 얻을 수 있어. 거기에다가 공헌도까지....'

'X발, 이번 일만 끝내면 4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이것만 끝내면 돼. 이것만!'

그 속내는 전혀 달랐다.

전원이 배신자. 공략대가 소집되면서 서로가 모두 배신자라는 것도 알게 됐다.

물론 찝찝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공략 대원이 모두 배신자인데....'

'혹시 누구한테 정보라도 얻은 거 아닌가? 아바, 그년이 내통자들을 다 불었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우리도 모이고 나서야 서로가 배신자라는 걸 알았는데.'

마족과 카오틱들은 내통자가 서로 내통자인 것을 모르게끔 철저히 관리해 뒀다.

아바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놈들이 정보를 불었다고 한들 내통자를 알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설령 함정이라고 한들....'

크로커스는 진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포기할 수 없는 기회다.'

던전이라는 제한된 환경.

진현우를 제외한 전원이 배신자라는 상황.

- 마지막 지령이다. 고대의 신전 공략대에 참가해서 진현우를 죽여라. 반드시. 성공한다면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

마족이 마지막으로 내린, '진현우를 죽여라'는 지령을 달성하기에 최적의 상태다.

설령 함정이라고 한들 해야만 한다.

'엘프 진영의 기세를 꺾을 기회다.'

크로커스는 그리 판단했다.

플레이어를 죽인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그든, 공략대에 참가한 배신자들이든 수많은 이를 죽였다.

시체 하나가 더 늘어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넌 내 성공의 발판이 되어 줘야겠다.'

크로커스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어렸다.

여태껏 많은 플레이어를 배신하고, 그 대가로 성공해 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노인장, 신전이 보입니다."

"음."

공략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행군했고, 목적지인 고대의 신전에 도달했다.

신전은 엘프 측의 군대가 지키는 상황.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족 측의 군대가 기회를 엿보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족들이 공격해 올 수도 있다. 엘프 측의 호위를 받으면서 신전으로 이동하지."

"알겠습니다. 전원, 이동!"

크로커스는 마족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진현우를 죽인다'는 목적을 달성할 좋은 기회를 방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

그들은 최대한 연기하면서 신전으로 향했고, 무사히 신전의 입구에 도달했다.

"3층까지 온 놈들이니 던전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잘 알겠지? 아무런 정보도 없는 던전이니, 일단 진입한 다음에 상황에 맞춰서 대처할 것이다. 그럼...."

크로커스는 닫힌 신전의 문을 열었다.

"신전에 진입한다. 가자!"

고대의 신전 1차 공략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고대의 신전이라는 무대에 진입했다.

그들의 후방을 걷던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122화

당하기 전에 먼저

신전 내부는 굉장히 어두웠다.

크로커스는 품속에서 횃불을 꺼내더니 앞으로 힘껏 내던졌다. 전방으로 쏘아지는 횃불이 저 너머에 자리 잡은 어둠을 밝혔다.

"통로군."

"몬스터는...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불을 밝히지. 라이트."

크로커스가 아이템으로 빛을 밝혔다.

그러자 일직선의 통로가 보였다. 몬스터는 없고, 끝을 모를 통로만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크로커스가 인상을 구겼다.

"이건... 피인가?"

"예. 수로 같은데, 피가 흐르는군요."

"굉장히 기분 나쁜 곳이군."

통로의 양 끝에는 좁은 수로가 나 있었는데, 거기에 피가 액체처럼 흐르고 있었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노인장."

"...."

곁에 있던 공략 대원이 딴 곳을 보는 진현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걸어왔다.

지금 저놈을 죽이자는 뜻이었다.

'저놈만 죽이고 빠져나가면 되잖아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일 수만 있다면 위험한 던전을 굳이 공략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는 겨우 하나지 않은가.

'여기서 바로 처리하는 건... 아니, 이르다.'

크로커스는 진현우를 흘깃 봤다.

어두운 통로. 이 지형을 이용해서 진현우를 포위하고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은 이르다. 놈이 도망칠 수도 있다.

'더 안으로.'

진현우가 도망칠 수 없는 자리를 찾아서.

그곳에서 놈을 죽인다. 판단을 끝낸 크로커스는 공략대를 돌아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궁수는 경계 스킬을 사용하고 도적은 함정을 살펴라. 내가 앞장서서 길을 확인하겠다."

"예."

공략대의 각 인원이 스킬을 사용했다.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긴 했으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성기사인 크로커스는 메이스와 방패를 쥔 채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일행이 그를 뒤따랐다.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하군."

"느껴지는 기척은 없어요, 노인장."

"함정이나 마법진도 따로 없습니다."

"그래. 근데 이상할 정도로 불길하다."

아무것도 없는 통로지만, 크로커스는 불길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탑을 여행하면서 단련된 감각이 뭔가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음?"

"대장님, 수로가...!"

모두가 피가 흐르는 수로를 봤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핏물이 요사스럽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 피... 더 많은 피가 필요하다....

"전원, 진형을 갖추고 주변을 경계해라!"

"뭐야! 어디서 들리는 거야!"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들리는 불길하고 끈적한 목소리. 수로에서 흐르던 핏물이 솟구쳤다.

바닥이 핏물로 흠뻑 적셔졌다.

- 생명, 피, 필요해... 날 가둔 이 가증스러운 봉인을 해제하려면, 피가, 너희의 영혼이!

"노인장, 마법진입니다! 피해를 입히는 종류는 아니에요. 전이 마법진 같은데?"

"아, 어째 느낌이 안 좋더라니."

핏물이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렸다.

크로커스는 한숨을 쉬며 메이스를 쥐었다.

- 환영한다, 내 신전에 온 것을....

"전이에 대비하라!"

그리고 시야가 적색으로 물들었다.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공략대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굉장히 넓은 백색의 방이었다.

"X발, 여긴 또 어디야?"

"모두 괜찮나?! 인원 확인해!"

"20명 전원 다 있습니다! 저길 보십쇼!"

모두의 시선이 방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 빛무리가 모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증거다.

"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건...."

빛무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방 중앙에 거대한 갑옷을 입은 거구들이 나타났다.

갑옷 내부는 텅 비어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거구들. '가디언'들이다.

- 명령. 침입자, 배제한다.

- 폐하를 위해 피를 내놓아라...!

그리고 그들 곁에 흐릿한 형체의 엘프들이 나타났다. 먼 과거, 이곳에 잠든 괴물을 봉인하기 위해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이었다.

지금은 반쯤 미쳐 버린 엘프들.

"적이다!"

"전원, 진형을 갖춰라! 전사는 앞에서 방어 태세를! 도적은 함정이 있는지 파악해라! 우선 방어하면서 적들의 전력을 확인한다!"

"예, 노인장! 함정은 없습니다!"

배신자이기는 하지만, 크로커스는 여러 파티와 공략대를 이끈 경험이 있는 자였다.

당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공략대는 크로커스의 지휘 아래에 빠르게 정상화됐다.

그리고 진현우는.

- '엘프 왕의 티아라'가 신전과 공명합니다.

- 기록된 목소리가 들립니다....

눈앞에 뜬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직 엘프의 왕만 가질 수 있는 티아라를 가진 자여, 그대는 아마 나의 후손일 테지.

- 나는 먼 과거, '히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신화 속의 괴물과 싸웠고 패배했다. 이대로면 엘프라는 종족이 모두 죽을 상황이었다.

- 그렇기에 나는, 금지된 마법인 '혈마법'을 이용해서 히드라를 내 몸속에 봉인했다.

진현우의 눈앞에 환상이 보였다.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고대의 엘프들. 수많은 희생을 감수했음에도 이길 수는 없었다.

고대의 왕은 최후의 발악으로, 힘이 약해진 괴물을 자신의 몸에 봉인하기로 했다.

- 하지만... 내 몸을 이용한 봉인은 유지될 수 없다. 내 정신은 무너질 것이고, 괴물은 내 몸을 차지하여 부활하려고 할 것이다.

- 이 신전은 그때를 대비해 만든 곳이다.

눈앞에 보이던 환각이 흐릿해졌다.

- 이 신전을 조작할 권한을 네게 주마.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미친 나를 약화시키거라.

- 내 안에 갇힌 괴물은 나와 동화되어 있다. 나를 약화시킨다면 놈도 필시 약해질 터. 놈을 최대한 약하게 만들고 봉인을 해제하거라.

- 그걸 위한 함정들을 나조차도 모르는 곳에 숨겨 놓았다. 그것들을 이용해라. 그리고 최대한 약해진 괴물을, 너희가 죽여라.

그리고 사라진 환각을 대신하듯, 진현우의 시선에 수많은 홀로그램 창이 보였다.

- 그게 후손인 네가 해야 할 일이다.

그걸 끝으로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만 보일 뿐.

- 신전의 제어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 신전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가디언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 신전의 구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습니다. 내부에 설치된 함정을 다룰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설치하거나 제거할 수 있습니다.

- 신전 내부의 도면이 제공됩니다.

홀로그램은 신전을 관리하는 창이었다.

신전의 도면이 넓게 그려져 있고, 통로나 함정들을 자유롭게 고치거나 배치할 수 있었다.

진현우는 함정 목록을 확인했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뱀 불꽃 함정, 뇌전 함정, 화살 함정, 추락 함정, 쇠구 함정....]

[위 함정들은 보충 후 재사용 가능합니다.]

[함정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신전에 설치된 수많은 함정이 보였다.

진현우는 가디언과 영혼 엘프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공략대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이 새끼들 더럽게 튼튼해!"

"영혼 엘프들이 공격해 온다! 화살! 마법사, 방어막을 펼쳐라! 천장 방향으로 집중해서!"

"지금 전개합니다!"

적들은 강력했지만, 여기 모인 공략대는 3층의 플레이어 중에서도 실력 있는 자들.

공략대는 크로커스의 지휘 아래에서 처음 만난 적을 상대로 대등히 싸우고 있었다.

이대로면 큰 피해 없이 승리할 터.

'그건 곤란하지.'

그래서는 안 된다.

진현우는 치열하게 싸우는 공략대의 뒤에서, 홀로그램을 재빨리 조작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절반은 여기서 죽어 줘야 돼.'

그래야 이 신전의 기믹을 달성할 수 있다.

지금 진현우와 공략대가 있는 방은 아무런 함정도 없는 곳이었다. 재빠르게 홀로그램을 조작한 진현우는 이 방에 함정들을 배치했다.

[설치했습니다: 뱀 불꽃 함정, 추락 함정, 속박의 사슬 함정, 뇌전 함정, 쇠구 함정.]

그러자 소리가 들렸다.

우우웅! 마력이 작동하는 소리. 신전의 다른 방에 설치되어 있던 함정이 마력으로 전이하면서, 지금 진현우가 있는 방에 설치되었다.

"가디언들이 돌진해 옵니다!"

"충돌에 대비하라! 방패를 들어라!"

바로 그때, 가디언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뒤에 있던 영혼 엘프들이 당황했다. 그들이 내린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디언들이 돌진하는 것은, 신전의 제어 권한을 얻은 진현우의 명령을 받아서였다.

'돌진해서 공략대를 밀리게끔 만들어라.'

가디언들은 그 명령에 충직히 따랐다.

콰아앙! 공략대의 선두에 선 전사들과 엄청난 무게를 지닌 가디언들이 그대로 충돌했다.

"크으으윽!"

"미, 미친, 뭐 이리 무겁... 으아! 밀린다!"

"후열은 뒤로 물러나라! 휘말리지 마!"

"예, 예! 뒤로 빠져!"

전사들의 진형이 무너졌다.

크로커스는 후열의 마법사들이 휘말릴까 봐 그들이 조금 뒤로 물러나게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게 실책이었다.

- 철컥!

"응?"

물러나던 마법사가 땅을 밟았다.

그러자 뭔가가 움푹 들어가는 느낌이 나더니 기계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발밑을 내려다본 순간.

- 덜컹!

"우와아아아악!"

"꺄아아아아!"

그들이 선 바닥이 활짝 열렸다.

갑자기 사라진 바닥. 마법사들은 허우적거리며 손을 내저었고, 근처에 있던 도적이나 궁수들이 가까스로 일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손을 잡지 못한 이들은.

"으아아아... 커헉!"

"끄으윽! 나, 나 다리가 부러졌어!"

그대로 열린 바닥 아래로 추락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낙법을 취할 수도 없었다. 부자연스럽게 착지한 마법사들의 발목이나 다리가 부러졌고, 비명이 퍼졌다.

그걸 본 크로커스가 기함했다.

"이승호! 함정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어, 없었어요! 정말입니다! 조금 전에 함정 감지 스킬을 썼는데 아무런 함정도...!"

"그럼 지금 다시... 안 돼!"

크로커스가 천장을 보며 다급히 외쳤다.

마법사들이 갇힌 추락 함정. 그 위의 천장이 열리면서 그 너머의 붉은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법진이 화염을 내뿜었다.

- 화르르륵!

"끼아아아아악!"

"흐아아아!"

마법진의 화염은 추락 함정에 갇혀 있던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거센 불길이 마법사들을 불태웠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불길에 저항할 여력도 없었다.

"안 돼! 마법사들이!"

"제기랄, 지금 그쪽을 신경 쓸 때가... 컥!"

"노, 노인장! 앞에! 저, 저거요!"

귀중한 전력인 마법사들이 죽었다.

추락 함정에 갇힌 채 타 죽은 숫자만 넷. 공략대의 4분의 1이 단번에 날아간 셈이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때도 아니었다.

"저건 또, X발... 뭐야?"

정면을 본 공략대원이 넋을 잃었다.

저 너머의 벽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압도적인 질량을 가진 쇠구.

거대한 쇠구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 쿠르르르르!

"노, 노인장! 저건 못 막아요!"

"제길! 양옆으로 갈라져! 어서 피해라!"

"깔리면 죽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굴러온 쇠구가 공략대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공략대는 아슬아슬하게 쇠구를 피했고, 누구도 깔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략대의 진형이 흩어졌다.

그게 진현우가 노리던 것이었다.

'가디언, 좌측 공략대를 향해 돌진해라.'

- 명령, 돌진.

진현우의 명령을 받은 가디언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좌측 공략대, 다른 누구도 아닌 크로커스가 있는 곳을 향해서.

"가디언들이 또 옵니다!"

"막아! 피하면 후열이 휩쓸린다! 일단 저 공격만 버티고 빠르게 진형을 복구한다!"

크로커스와 전사들이 황급히 방패를 들어, 돌진하는 가디언들을 막으려 했다.

그들의 시선이 가디언에게로만 쏠렸다.

바로 그때가 진현우가 움직일 때였다.

- 끼리릭!

진현우는 실피르의 시위를 당겼다.

그 시위에 여러 발의 화살이 걸렸다. 한껏 정신을 집중한 그는 단번에 화살을 쏘아 냈다.

- 쉬이이익!

쏘아지는 다발 화살에 바람이 깃들었다.

시위 촉에 자그마한 폭풍이 결집했다. 쏘아진 폭풍시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착탄했다.

가디언이 아닌, 공략대.

크로커스가 있는 곳을 향해서.

- 콰르르르르!

"무, 슨... 우아아아악!"

"크아아아!"

목적지에 착탄한 폭풍시들이 닿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는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크로커스를, 그리고 그 곁에 있던 전사들을 무자비하게 찢었다.

"커헉!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여러 발의 화살에 적중한 크로커스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기 위함이었다.

정확히 후방에서 날아온 화살.

그 시야에 비치는 것은.

"지, 진현우. 네놈,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실피르를 쥔 진현우였다.

그 모습을 본 크로커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진현우는 다시금 시위를 당겼다.

그의 입가가 비뚜름해졌다.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지. 안 그래?"

"뭐... 크아아아악!"

다시금 일어나는 작은 폭풍.

크로커스가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123화

원하지 않는 부활 (1)

고대의 신전에는 특수한 기믹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기믹이라기보다는 페널티. 공략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페널티다.

- 신전에 진입한 공략대가 절반 죽을 경우, 지하에 봉인된 보스 몬스터가 나타난다.

고대의 왕은 괴물을 자신의 몸에 봉인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왕의 정신은 무너졌고, 괴물은 그런 왕의 육체를 빼앗았다.

이제 고대의 왕은 없다.

그 몸을 대신 차지한 '히드라'만 있을 뿐.

- 고대의 왕의 육체를 차지한 히드라는 자신을 봉인한 혈마법의 구조를 깨달았다. 그걸 이용해서 봉인을 완전히 해제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던전을 공략할 때 중요한 것은 공략 대원의 그 누구도 죽지 않는 것이다.

보스 몬스터의 봉인이 풀리면 공략하기가 너무도 까다로워지니까. 그게 정석이다.

그걸 다르게 말하자면.

'굉장히 위험하기는 하지만, 신전을 공략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보스와 싸울 수 있다.'

진현우가 공략대를 공격하는 이유였다. 배신자들로 공략대를 꾸린 이유이기도 했고.

보스 몬스터의 봉인을 해제해도 상관없다. 신전의 제어 권한이 있는 지금이라면, 봉인이 해제된 보스 몬스터와 싸울 방법이 있으니까.

"으아아아악!"

"진현우... 이 X새끼가!"

"엘프한테 이 사실을 밝힐 거다! 네가 공략대를 배신했다고 고발할 거라고!"

전방은 가디언, 후방은 진현우에게 휩싸인 공략대가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하지만 진현우의 표정은 무심했다.

"글쎄다, 그 엘프 여왕도 너희가 배신자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서."

"뭐, 뭐라고? 우리가 배신자라는 걸...."

"나가도 너희만 죽지 않을까?"

모두의 시선이 진현우에게 쏠린 상태.

그는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 손아귀에 빛이 어리면서 찬란한 광휘가 터졌다.

그 빛이 공략대의 시야를 빼앗았다.

"크으윽! 눈이!"

진현우가 곧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략대의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걸 인지한 공략대가 피하기도 전에, 마법진에서 수많은 사슬이 솟구쳤다.

"크윽... 커허억!"

"노, 노인장! 발이 묶였습니다!"

"안 돼, 방어...!"

필사적으로 쇠사슬을 끊던 크로커스와 공략대는 눈앞에 전기가 파직거리는 걸 봤다.

파직거리는 전기는 화살의 형태를 갖추었고, 공략대를 포위하더니 단번에 쏘아졌다.

- 파지지직!

"카이아아악!"

"끄어어...."

쇠사슬이 뇌전에 꿰뚫린 공략대원들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그렇게 죽은 것이 다섯.

"자, 잠깐. 저건 뭐야?"

"바닥이...."

시체가 닿은 바닥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바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더니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를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그걸로 모자라서 시체까지 삼켰다.

- 그래, 이것이다... 피! 너희는 강대한 영혼을 가졌구나. 조금만, 조금만 더 바쳐라...!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크로커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체를 보며 몸을 떨더니,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진, 현우...!"

진현우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크로커스는 신성력을 일으켜 상처를 회복하면서 메이스를 들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걸어오던 진현우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대신, 섬광이 번뜩였다.

'제길,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빨라.'

말 그대로 섬광.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속도.

하나 대처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크로커스는 재빠르게 온갖 버프를 자신에게 부여했다.

'대처할 수 없다. 그럼, 궤적을 읽어서!'

크로커스는 섬광의 궤적을 읽었다.

그 궤적은 자신의 등 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리면서 메이스를 힘껏 내리쳤다.

메이스에 신성한 빛이 어렸다.

"죽어라!"

크로커스의 등 뒤에 섬광이 도달했다.

진현우는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메이스를 인지했다. 하지만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 뻐어엉!

오히려 메이스의 궤적을 침착하게 읽더니 갑자기 허공을 강타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메이스를 힘껏 강타했다.

궤도가 틀어져 땅에 꽂히는 메이스.

크로커스의 몸이 뒤틀렸다.

"크허억!"

- 쿠우웅!

진현우가 힘껏 땅을 짓밟았다.

진각. 관절을 회전하면서 체중을 이동시킨다. 그리고 온 힘을 주먹에 집중시켰다.

그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 쿠웅! 콰지지직!

묵직한 타격음이 퍼졌다.

거인의 괴력을 머금은 주먹이 크로커스의 복부를 강타했다. 어떤 공격이든 튕겨 낼 수 있는 갑옷이 종잇장 구겨지듯 단번에 찌그러졌다.

그리고.

- 뻐어어어엉!

"꺄아아악!"

"크하악!"

땅이 진동할 정도의 폭음이 울렸다.

복부가 꿰뚫린 가디언의 등 뒤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쏘아지면서 후방의 적들을 덮쳤다.

그에 휘말린 공략대원들이 쓰러졌다.

"가디언!"

- 명령, 적들을, 제압하라.

그 순간을 노리고 가디언들이 움직였다.

쓰러진 공략대원들이 저항할 새도 없었다. 가디언들의 거대한 몸체가 그들을 짓눌렀다.

"끄으으으...."

"X발, X발! 그러니까 들어오자마자 죽이자고 했잖아! 이 멍청한 노인네가!"

"사, 살려 줘! 난 아무것도 몰라!"

공략대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모두가 배신자. 살려 둘 이유는 없다. 진현우는 가디언들을 시켜 그들을 구속했다.

그를 영혼 엘프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 가디언을, 인간이 어떻게...?

- 그 티아라는 알베이타 님의 것이다. 인간 침입자여, 그걸 왜 네가 갖고 있는 것이냐?

"아, 제가 좀 바빠요. 나중에 얘기합시다."

영혼 엘프들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지금은 저걸 대답할 때가 아니다.

진현우는 쓰러진 크로커스를 붙잡았다.

"크허억, 끄으, 으으으...."

- 쿠훗! 배에 난 구멍이 꽤 시원해 보이는구나.

거인의 괴력이 적용된 파쇄권을 얻어맞은 크로커스는 복부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일단 여기 고정해 두고."

"사, 살려... 날, 제발, 살려 주게...."

"서로 알 거 다 아는 마당에 이러지 맙시다. 배신으로 죽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면서."

진현우는 아직 살아 있는 크로커스를 방의 중심부에 배치한 후, 신전의 도면을 봤다.

지하 가장 깊숙한 곳에 히드라가 봉인되어 있는 방이 보였다. 그곳은 다른 방과는 다르게 커다란 X 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 해당 방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권한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방입니다.

- 함정을 배치할 수 없습니다.

히드라가 봉인된 방과 그 일대의 방은 진현우의 권한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왕의 몸을 차지한 괴물, 히드라가 어떤 수작을 부려 놓은 모양이었다.

'저놈을 여기로 끌어내야 한다.'

함정을 배치할 수 있는 방으로.

진현우는 도면의 구석을 봤다. 그곳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끔 동떨어진 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특이한 함정들이 숨겨져 있었다.

[배치할 수 있습니다: 쇠약의 저주, 구속의 사슬, 훼방의 낙인, 세계수의 가지....]

[위 함정들은 일회용입니다.]

고대의 왕이 언젠가 자신의 몸을 빼앗을 괴물을 막기 위해 준비해 둔 함정이었다.

그조차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둔 함정들.

[설치했습니다: 쇠약의 저주, 구속의 사슬, 훼방의 낙인, 세계수의 가지....]

진현우는 그 함정들을 죽어 가는 크로커스의 밑에 설치했다. 다수의 마법진과 복잡한 장치들이 굉음을 내면서 방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진현우는 활을 들었다.

"슬슬 시작할까."

9명의 공략 대원이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 푸욱!

"커, 헉!"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쏘아진 화살이 심장을 꿰뚫었다.

"네가 마지막이다."

자신의 심장을 찌른 화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던 크로커스의 몸이 무너졌다.

수많은 플레이어를 배신한 대가로 여태껏 성공해 왔던 노괴가 죽는 순간이었다.

그 시체가 바닥으로 사라졌다.

- [고대의 신전] 공략대의 절반이 사망했습니다. 던전의 공략에 실패했습니다.

- 지하의 괴물이 깨어납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그리고.

- 스으으으으...!

이변이 일어났다.

죽은 공략대원의 시체를 빨아들인 바닥에서부터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소리가 들렸다.

- 두근, 두근!

- 피... 그래, 이것이 필요했다....

심장이 뛰는 것 같은 소리.

지하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바닥 위로 솟구쳤다.

기괴할 정도로 비쩍 마른 인체가 나타났다.

- 이 가증스러운 봉인을 깨려면, 이 약해진 봉인을 파괴하려면... 아주 조금의 생명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

나타난 것은 비쩍 마른 미라였다.

한때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을 것 같은 엘프지만 지금은 추한 외형을 가진 괴물.

복잡한 문자가 그려진, 피처럼 붉은 방벽이 미라를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 이, 인간. 저건 무엇이냐?

어깨 위의 미호가 미라를 가리켰다.

미라의 등 뒤에 거대한 형체가 일렁거렸다.

"히드라."

9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 괴물.

특이하게도 8개는 뱀의 머리였고, 남은 하나는 인간을 닮은 흉측한 머리였다.

신화 속의 괴물은 고대의 왕의 몸에 봉인된 채, 언젠가 벗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 그런데, 흐으으, 멍청한 인간이... 지하에 처박힌 신전을 끄집어낼 줄이야...!

- 키아아아아아!

일렁거리는 히드라가 진현우를 보며 포효했다. 방이 울릴 정도로 흉포한 포효였다.

미라가 광소를 터트렸다.

- 고맙다, 멍청한 인간이여! 흐흐하하하!

미라는 두 팔을 펼쳤다.

놈의 뒤에는 지하로 빨려 들어간 공략대원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 시체에 남은 피가 모조리 빠져나왔고, 새하얀 기체가 흘러나왔다.

- 아앗! 인간! 영혼이니라! 저 비쩍 마른 놈이 인간들의 영혼을 먹으려 하고 있느니라!

새하얀 기체는 영혼이었다.

그 피와 영혼들이 미라에게 흡수되자, 놈을 에워싼 붉은 방벽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크흐, 크흐흐하하! 알베이타, 느껴지느냐? 네 머릿속에 든 혈마법의 지식으로, 네가 만든 봉인을 푸는 절망감과 무력감을...!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이 답답한 몸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더 많은 피가, 더 많은 영혼이 필요하다.

미라가 눈을 돌렸다. 때마침 주변에는 아직 살아 있는 먹잇감들이 많이 있었다.

- 이제....

그중에 가장 탐스러운 먹이가 있었다.

진현우. 이 중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힘과 영혼을 가진 자. 미라의 입에서 침이 흘렀다.

놈의 두 손에 붉은 마력이 가득 어렸다.

- 무엇도 날 방해할 수 없다...!

콰드득!

미라가 두 팔을 펼치자, 놈을 여태껏 구속하면서 동시에 보호하던 방벽이 파괴됐다.

그리고 바로 그때가.

- 크흐하하하하! 네놈들을 잡아먹으면 난 이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드디어!

"거 새끼, 말 더럽게 많네."

진현우가 기다리던 때였다.

붉은 방벽을 파괴한 미라가 광소를 터트리며 진현우를 향해 돌진하려고 했다.

그때, 진현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 [세계수의 가지] 함정이 발동합니다.

- 뭣...!

바닥의 마법진이 연녹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미라가 반응할 새도 없이, 바닥에서 수많은 나뭇가지가 솟구쳐 미라를 덮쳤다.

- 크, 하아악!

푸우욱!

나뭇가지들이 미라의 전신을 꿰뚫었다.

꼬챙이처럼 꿰뚫린 미라가 강제로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마법진이 더욱 강한 빛을 내뿜었고, 미라를 꿰뚫은 나뭇가지가 빛났다.

- [세계수의 가지] 효과가 적용됩니다.

"좋아, 그럼."

미라가 진현우를 노려봤다.

그 눈빛은 분노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현우는 놈을 비웃으며 박수를 쳤다.

- 함정이 발동합니다.

"내가 해 줄게. 네가 원하던 부활."

- 뭐라... 크흐으으아아아아!

이 순간을 위해 알베이타가 준비한 것들.

미라가 등장하기 전부터 놈의 발밑에 설치되어 있었던 수많은 함정이, 놈을 덮쳤다.

124화

원하지 않는 부활 (2)

수많은 함정이 미라를 덮쳤다.

전신을 옭아매는 사슬, 힘을 약화시키는 쇠약의 저주, 상처의 재생을 막는 낙인, 이글거리는 칼날, 거세게 회오리치는 바람이.

미라의 전신을 찢어발겼다.

- 흐으으어아아아아!

미라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왜냐! 왜 상처의 재생이 늦는 것이냐!'

히드라는 불사의 괴물.

강력한 재생력을 가졌고, 그게 고대의 엘프 왕이 히드라를 꺾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 미라의 몸체는 히드라와 동화된 상태.

그 재생력을 미라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건, 이 고통은!'

히드라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미라의 몸체가 입은 부상 때문에 느껴지는 고통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그래. 자신의 영혼이 상처를 입은 듯한 느낌.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 키아아아아아아!

미라의 등 뒤에는 거대한 형체가 떠 있었다.

그 몸에 봉인된 히드라의 영체였다. 미라가 상처를 입으면 영체에 똑같은 상처가 생겼다. 저주도, 낙인도 영체에 똑같이 새겨졌다.

"세계수의 가지가 가진 효과다. 신기하지?"

- 뭐, 라고...!

세계수는 영혼을 다루는 힘을 지녔다.

그 가지도 마찬가지다. 알베이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만든 세계수의 가지라는 함정이 히드라의 영체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진현우는 허리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자, 받아. 마음의 선물이다."

- 끄으아아아! 그만, 그만하란 말이다!

치이이이익!

그리고 주머니 안에 담긴 내용물을 모조리 미라에게 쏟아부었다. 안에 든 액체가 몸에 닿자 미라의 몸이 불타며 녹아내렸다.

히드라의 영체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안 그래도 그만할 거야. 가디언!"

- 명령.

진현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가디언들은 남은 공략대원을 구속한 상태였다. 그들이 제각기 무기를 들어 올렸다.

공략대원들의 눈이 떨렸다.

"아, 안 돼. 설마!"

"제발, 살려...!"

"다 죽여."

가디언들이 무기를 내리쳤다.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저놈들은 배신자였으니까.

3층을 이 꼴로 만든 원흉들이다.

- [고대의 신전] 공략대가 궤멸했습니다.

- 아, 안 돼. 안 돼! 이런 식으로는!

공략대 중에 남은 것은 진현우뿐.

다른 공략 대원은 모조리 죽었다. 그리고 이곳에 막 나타났을 때, 히드라는 말했었다.

'크흐하하하하! 네놈들을 잡아먹으면 난 이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드디어!'

바닥이 붉게 빛났다.

죽은 공략 대원의 시체와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영혼이 미라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미라에 깃든 히드라가 원하던 상황.

- 안 된다! 이 부활은, 나를...!

미라는, 히드라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의 몸이 뒤틀리면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빛이 방을 가득 메웠다.

- 신화의 괴물, '히드라'가 모든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히드라가 지상에 부활합니다.

- 신전이 당신을 강제로 추방합니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현우와 히드라가 지상으로 전이되었다. 백색의 시야 속, 진현우는 목소리를 들었다.

- 이제 마지막... 이걸....

흐릿한 목소리.

진현우는 사념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품속에 어떤 아이템이 들어오는 것도.

곧 시야가 완전히 암전했다.

* * *

아스튼은 저 너머의 신전을 바라봤다.

커다란 구덩이에서 하룻밤 만에 불쑥 솟구친 신전. 겉으로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흥, 엘프 놈들. 뒤로 물러났군."

신전을 에워싼 채 지키고 있던 엘프들은 공략대가 신전에 진입하자마자 물러났다.

놈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족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걸 본 아스튼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든지 다 죽일 수 있는 놈들이다만."

- 크르, 군단장님.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 말씀만 하신다면 언제든지 저놈들을....

"나도 그러고 싶군. 하지만 아직이다."

아스튼은 전의를 보이는 부하를 막았다.

저 엘프들도 당연히 모두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진현우. 그놈부터 죽여야 한다.'

믿고 싶지 않고, 도저히 믿을 수도 없지만.

진현우라는 플레이어 하나가 3층에서 끼친 영향은 너무도 컸다. 조만간 벌어질 전쟁까지 놈이 살아 있다면 또 어떤 수작을 부릴까.

짐작할 수도 없다. 지금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에 신전에서 살아 나온다면.'

아스튼은 자신의 군단을 돌아봤다.

이 군단이 살아나온 진현우를 죽일 것이다. 그때는 큰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공략대가 진입하고 얼마나 지났지?"

- 크흐, 이제 두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아마 오늘 안으로 공략이 끝나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아스튼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진현우, 그놈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래서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는데.

- 아, 아스튼 님! 크륵, 신전이!

"무슨 일이냐?"

- 뭔가가...!

퍼어엉! 신전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아니, 발사됐다.

"우아아아아악!"

"저건...."

아스튼은 발사된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건 진현우였다. 신전에서 발사된 진현우는 그대로 마족 진영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낙법을 취하지 못한 그가 바닥을 굴렀다.

그에 휘말린 마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 캬아악!

"이게 대체 무슨...."

아스튼의 생각이 순간 정지했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마족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마족들이여! 진현우다! 저놈을 포위...!"

- 으으으아아아아아아!

- 쿠우우웅!

갑자기 땅이 울렸다.

거대한 뭔가가 떨어진 듯한 진동. 순간 짙은 혈향이 코를 찔렀다. 아스튼은 신전을 봤다.

"또, 무슨 일이."

신전에서 핏물처럼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기운이 모이더니 신전을 에워쌌고, 신전이 그대로 갈라졌다.

그리고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 흐으으아아아아아!

신전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기괴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거대한 살덩어리. 붉은 기운이 그 살덩어리에게로 모였다.

그러자 살덩어리가 변이하기 시작했다.

- 우득, 콰드득! 쩌어억!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짓이겨지면서.

거대한 살덩어리는 형태를 바꾸어 가고 있었다. 아스튼은 끔찍한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살덩어리 일부가 뱀의 꼬리로 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대체, 무슨."

다음으로 먼저 나타난 것은 거대한 몸.

드높은 건물을 보는 듯한 몸체는 상처로 가득했고,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썩고 있었다.

- 알베이타, 알베이타아아....

그다음으로 생긴 것은 수많은 머리였다.

여덟 개의 뱀 머리가 입에서 독액을 내뿜었고, 하나의 인간 머리가 울부짖고 있었다.

저건, 괴물이었다.

- 키아아아아아아!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가 포효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힘이 담긴 피어. 공포를 담은 포효가 그대로 마족들을 덮쳤다.

마족 군단은 두려움을 모른다. 하지만 저 포효를 들은 순간, 공포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 으, 으으아아아!

- 캬하악! 괴, 괴물! 괴물이다!

- 군단장님!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아스튼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크다'. 그가 고개를 한참 들어야지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

그다음으로는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

'위험하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괴물, 히드라는 전신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고통 때문인지 히드라의 정신이 맛이 간 상태였다. 눈이 돌아간 것이 보일 정도였다.

- 키히아아아아악!

"무, 물러난다! 전군! 우선 뒤로...!"

"히드라! 나는 여기에 있다!"

"뭐?!"

광란 상태에 빠진 히드라를 상대할 이유는 없다. 아스튼은 병력을 물릴 생각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진현우였다.

"어이, 히드라! 보이냐! 내가 여기 있다!"

- 네노오옴...!

히드라의 아홉 머리가 진현우를 인지했다.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고 이 꼴로 만든 당사자. 당장 찢여 죽여 버리고 싶은 가증스러운 인간.

괴물이 노성을 터트렸다.

- 크르아아아아! 네놈, 인간, 네노오옴!

"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진현우!"

"보면 모르겠냐?"

진현우가 아스튼을 보며 씨익 웃었다.

히드라의 입가에 독기로 가득한 숨결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너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지."

"진현...!"

섬광이 되어 사라지는 진현우.

그 신형을 향해 분노를 토하려던 아스튼은 지독히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걸 느꼈다.

소리가 들렸다. 목이 끓어오르는 소리.

마족은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비친 것은.

- 크라아아아아아!

"아, 안 돼!"

브레스를 내뿜는 아홉 개의 머리였다.

강력한 맹독과 산성으로 이루어진 아홉 줄기의 브레스가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하지만 진현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목표를 잃은 브레스는 애먼 이들을 덮쳤다.

- 흐아아아아! 몸, 내 몸이!

- 쿠하악! 숨을, 그르르르륵...!

- 키이이이이이....

바로 마족의 군단이었다.

끈적한 액체로 된 브레스가 마족 군단을 가로질렀다. 지독한 산성과 맹독으로 된 액체.

그에 직접적으로 닿은 마족들의 몸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간접적인 영향권에 있었던 이들은 맹독에 중독되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

"이럴, 이럴 수가."

그렇게 마족 군단의 3분의 1이 죽었다.

단 일격. 갑자기 나타난 히드라가 내뿜은 브레스에 의해서, 그것도 너무도 허무하게.

하지만 참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말했을 텐데! 히드라! 난 여기 있다!"

- 인간, 인가아아안!

쏘아지는 화살이 히드라를 꿰뚫었다.

진현우가 쏜 화살이었다. 머리들을 마구 돌리며 그를 찾던 히드라가 분노를 토했다.

거대한 몸체가, 그 덩치로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돌진했다. 오직 진현우를 노리고서.

- 으아아아악!

- 크르윽! 저 괴물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문제는 그 경로에 마족들이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히드라라는 괴물은 항시 독기를 내뿜고 있기에, 닿는 것만으로 중독된다는 것.

중독된 마족 군단이 피를 쏟아 냈다.

"이, 이익... 이 X새끼가!"

아스튼이 분노를 토했다.

자신의 군단이 벌레처럼 죽어 가고 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이는 없다.

마기가 그의 분노에 응답했다.

- 파지지직!

아스튼을 휘감는 마기. 그 몸에서 검보랏빛의 뇌전이 뿜어져 나오더니 몸을 뒤덮었다.

인간을 닮은 형체가 뇌전을 휘감으며 커지더니, 뇌전으로 이루어진 거인으로 변했다.

군단장 아스튼, 그가 가진 힘이었다.

"빌어먹을, 벌레 같은 놈이...!"

진현우가 멈춰 선 것이 보였다.

뇌전으로 이루어진 몸체에서 유일하게 원래 형상을 하고 있는 두 눈이 귀기로 빛났다.

아스튼의 몸을 감싼 뇌전이 한데 모였다.

"네놈부터 죽여 주마!"

수많은 검은 뇌전이 허공을 수놓으면서 진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뒤늦게 그 존재를 인지한 진현우가 섬광을 사용해 도망치려 했다.

아스튼이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반응.

"내 뇌전은 목표를 놓치지 않는다!"

진현우가 회피하자, 쏘아지던 뇌전이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그를 쫓아갔다.

명중할 때까지 끝까지 쫓아가는 뇌전.

군단장, 아스튼이 가진 힘 중 하나였다.

'저놈의 회피 거리로는 절대 피할 수 없다.'

섬광처럼 달아나는 기술이 한 번에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는 조금 전에 봤다.

그 정도 거리로는 뇌전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방심할 이유도 없다. 뇌전을 일으킨 아스튼은 진현우를 향해서 돌진했다.

'죽인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저 너머, 섬광이 느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스튼은 진현우가 멈출 거리를 정확하게 예측하고는 다시금 뇌전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 파아아앗!

"뭐...!"

느려지던 섬광이 다시금 가속했다.

땅을 내달리던 섬광은 순식간에 마족 진영을 가로질렀고, 검은 뇌전이 그를 뒤쫓았다.

그리고 섬광은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했다.

- 콰아아아앙!

- 키아아아아아아!

바로 히드라의 등 뒤로.

진현우를 치열하게 쫓아오던 검은 뇌전이 앞을 막는 히드라의 몸체에 적중했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적중한 히드라의 몸통이 불탔고, 놈이 고통에 포효했다.

- 크흐으....

은신을 사용한 진현우가 모습을 감췄다.

누가 자신을 공격한 것인가. 주변을 찾던 히드라의 눈이 뇌전으로 된 거인을 인지했다.

그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아, 안 돼."

곧 이어질 일을 짐작한 아스튼이 신음했고.

- 캬하아아아악! 감히!

분노한 히드라의 숨결이 그를 덮쳤다.

125화

이독제독

라시드는 멍하니 전방을 보고 있었다.

지금 눈에 비치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장님, 저게... 히드라인가요?"

"그래, 우리가 설화로 듣던 그 괴물이다. 내 눈으로 저 괴물을 보게 될 줄이야."

저 너머에 아홉 머리의 괴물이 보였다.

거대한 괴물은 마족들의 진영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말이 난동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학살극이나 다름없었다.

"저 괴물을 이용할 생각이 드나...?"

진현우가 만들어 낸 상황이었다.

그는 일부러 히드라의 시선을 끌고, 마족 진영 한복판으로 들어가 놈의 공격을 유도했다.

마족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크아아아아! 진현우, 빌어먹을 놈이!"

군단장, 아스튼이 분노를 토하는 게 들렸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군단이 벌레처럼 죽어 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만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진현우라는 것도 컸다.

"진현우...."

라시드는 이마를 짚었다.

"저런 미친X을 다 봤나."

그런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과감하다고 해야 할까,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엘프에게 유리한 상황은 맞았다.

라시드는 도망치려 하는 마족들을 봤다.

"정령 마법을 준비하라."

"예, 대장님."

진현우가 부탁한 것을 이뤄 줄 시간이다.

"놈들의 퇴로를 차단한다."

* * *

아스튼은 미칠 것만 같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고 있다.

그뿐인가. 걸어다니기만 해도 독기를 내뿜는 탓에 마족들이 무력하게 죽어 나간다.

"우리는 널 적대할 생각이 없단 말이다!"

- 아파, 아프다... 크흐아아아아!

"멍청한 뱀 새끼가!"

히드라의 머리들이 아스튼을 덮쳤다.

그 덩치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 아스튼은 이빨을 피하면서 분노를 토했다.

빠르지만 피할 수는 있다. 문제는.

- 콰아앙!

- 크아아아악!

- 먹이, 흐으... 먹이가 필요하다...!

아스튼이 피하면 부하들이 당했다.

마냥 피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마족 군단은 히드라에게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짐승의 머리를 가진 마족이 히드라를 물어뜯었고, 온몸이 불타는 마족이 히드라를 태웠다. 어떤 마족은 강력한 흑마법을 펼쳤다.

- 쉬이이이익!

- 미, 미친.

하지만 무의미했다.

히드라가 독기를 내뿜자 마족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마법은 히드라의 몸에 닿았고 피해를 줬지만, 죽이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오히려 화만 돋울 뿐.

- 퍼어어엉!

- 먹이, 흐으, 왜 상처가 재생하지 않는 것이냐! 상처를, 상처를 회복해야 한다...!

분노한 히드라가 땅을 박찼다.

히드라는 그 덩치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거대한 꼬리가 땅을 한 번 치자, 히드라의 몸이 순식간에 마족들 한복판에 도달했다.

- 네놈들의 살점을 바치란 말이다!

히드라에 달린 인간의 머리가 절규했다.

곧이어 여덟 개의 머리가 미친 듯이 움직이면서 주변의 마족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마족들이라고 그냥 당해 준 것은 아니었다.

- 반격! 저 괴물을... 끄하악!

- 사, 상대가 안 돼....

마족들이 쓰레기처럼 죽어 가고 있다.

반격은 무의미하다. 피해를 입혀도 놈의 상처가 그것보다 더욱 빠르게 재생했다.

이대로면 군단의 숫자만 줄어들 뿐.

아스튼은 이를 악물었다.

- 파지지직!

"빌어먹을, 뱀 새끼가...!"

아스튼의 전신이 뇌전을 내뿜었다.

그에 화답하듯 하늘에서 수많은 낙뢰가 내리치더니 히드라를 덮쳤고, 바닥을 내달리던 뇌전이 히드라의 발아래에 멈췄다.

- 화아아악!

- 키하아아아아!

히드라의 발아래에 멈춘 뇌전이 솟구치더니, 새장의 형태가 되어 놈을 구속했다.

새장이 천천히 옥죄면서 히드라를 불태웠다. 살이 타는 고통에 히드라가 신음했다.

'어쩔 수 없다. 싸울 수밖에.'

눈이 돌아간 히드라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대로 뒀다가는 군단이 학살당할 터.

아스튼은 각오를 굳혔다.

"나를 봐라, 히드라!"

- 크흐아! 네노오오옴...!

거대한 낙뢰가 히드라를 덮쳤다.

히드라의 머리들이 아스튼을 인지했다. 눈앞의 적이 위협적인 상대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 입에서 독액이 흘렀다.

-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구나...! 좋다, 그 인간을 죽이기 전에 네놈부터 먹어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 키하아아아!

히드라가 피어를 내뿜었다.

땅을 울리는 포효. 놈의 거체를 구속하고 있던 뇌전의 새장이 단번에 흩어졌다.

신화의 괴물이 아스튼에게 돌진했다. 각각의 머리가 제각기 다른 공격을 퍼부었다.

- 크흐으으아아아!

"태워 죽여 주마...!"

둘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원래라면 히드라가 일방적으로 아스튼을 밀어붙이고 끝날 싸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싸우고 있는 아스튼이 제일 잘 알았다.

'이놈,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히드라의 상태가 그러했다.

거대한 몸에는 온갖 치명적인 상처가 새겨져 있고, 움직임도 어딘가 모르게 느렸다.

그리고 또 하나.

'원래는 강한 재생력을 가진 놈이었나?'

히드라는 아스튼의 뇌전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식한 공격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강한 재생력을 가진 괴물들의 특징이다.

재생력을 믿고, 어지간한 공격은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이어 나가려 하는 것.

- 크흐아아아아아!

히드라가 고통에 찬 절규를 내뱉었다.

놈은 알베이타와 동화된 상태였다. 미라가 함정으로 입은 디버프와 저주가 히드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하던 부활도 불안정한 상태로 해 버렸다.

- 먹이, 흐으으! 먹이를 내놔라!

히드라는 근처에 널브러진 마족의 사체를 잡아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상처를 회복했다.

그걸 본 아스튼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할 만하다.'

히드라가 쏘아낸 독액이 아스튼의 뇌전을 뚫고 몸을 녹였다. 하지만 아스튼은 녹아내린 부위를 재생하면서 높이 날아올랐다.

저 괴물을 막아야 한다.

- 파지지직!

- 키아아아아아아!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혈투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야, 더럽게 잘 싸우네."

- 이런 남자를 주인으로 삼는 게 맞나....

진현우였다.

마족들의 진영 한복판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그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괴물들이다.

직접 상대했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음, 일단...."

진현우는 품속을 뒤적거렸다.

거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이 있었다. 너무도 불길하게 생긴 핏빛의 화살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새하얀 깃털이 보였다.

[필멸의 화살 (영웅)]

· 설명: 수많은 엘프의 희생으로 빚어 낸 화살. 화살이 적중한 부위의 재생을 막는다.

[영혼의 깃털 (영웅)]

· 설명: 히드라와 함께 봉인되어 있던 알베이타의 혼의 조각. 희미한 힘이 담겨 있다.

새하얀 깃털이 빛을 내뿜었다.

그에 화답하듯 실피르가 빛났다. 새하얀 깃털이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활에 깃들었다.

- 영혼의 깃털에 남은 엘프 왕, 알베이타의 영혼 조각이 실피르를 복구합니다.

- 실피르가 완전한 힘을 되찾았습니다.

파아앗!

실피르가 강한 빛을 내뿜었다. 외형의 변화는 없었지만, 뭔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실피르 (전설)]

· 설명: 엘프 여왕이 사용했던 활이다. 그녀의 힘 상당수가 활에 담겨 있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옵션: 폭풍시, 다발 화살, 저격.

· 스킬: 폭풍의 눈.

* 폭풍의 눈: 거센 바람을 휘감은 화살을 쏘아 낸다. 화살은 쏘아지는 도중에 주변의 바람을 빨아들여 강렬한 폭풍으로 변한다.

실피르에 새로이 스킬이 생긴 것이 보였다.

등급이 전설로 오른 것은 덤이었다. 진현우는 작게 휘파람을 불면서 실피르를 붙잡았다.

지금 자신에게 도움이 될 스킬이다.

- 군단장님!

"너희는 물러나라! 이놈에게 먹이를 줘서는 안 된다! 떨어져서 진영을 구축해라!"

- 예! 알겠습니다!

마족들이 전장에서 달아나는 게 보였다.

히드라에게 회복할 먹이만 주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는 아스튼의 판단 때문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어딜 가려고?"

- 큭?! 인간, 네놈...!

진현우의 목걸이가 빛났다.

바닥에서 수많은 나무뿌리와 줄기들이 나타나더니 달아나던 마족의 발을 붙잡았다.

그 움직임에 누군가가 화답했다.

"쏴라!"

"...!"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튼은 고개를 홱 돌렸다.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의 화살 비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그 뒤를 잇는 정령들의 마법도.

"엘프!"

엘프들의 공격이었다.

그들이 쏘아 낸 화살과 정령 마법은 히드라와 아스튼이 아닌, 마족 군단을 노렸다.

발이 묶인 군단은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 흐아아아악!

- 구, 군단장, 님...!

무력하게 죽어 가는 마족 군단.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사기가 꺾인 상태였고,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아스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인간, 네노오오오옴!"

"불러 주는 건 좋은데, 날 신경 쓸 때인가?"

"크아아아악!"

히드라의 거대한 꼬리가 순간 진현우에게 시선이 쏠린 아스튼의 몸을 붙잡았다.

콰앙! 바닥에 내리쳐지는 몸뚱어리.

그 위로 독액이 쏟아져 내렸다.

"꺼지란 말이다!"

- 캬하아아악!

격한 뇌전이 히드라의 몸을 태웠다.

둘 다 당장 진현우를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 빌어먹을 인간 따위가!

- 저놈만 어떻게 죽일 수 있다면....

진현우의 주변을 마족들이 에워쌌다.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던 마족 군단도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거의 절반 이하.

마족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셈이다.

'이걸로는 부족하지.'

더 큰 피해를 입혀야 한다.

진현우는 실피르의 시위를 당겼다. 그 손아귀에 너무나도 작은 화살이 만들어졌다.

바람으로 빚어진 화살이었다.

- 적이 활을 들었다! 경계해라!

- 잠깐, 저거....

- 안 돼! 공격해라!

쉬이이익!

진현우의 손아귀에 바람이 집결했다.

자그마한 화살이 거센 바람을 휘감으며 점점 커져 갔다. 그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마족들이 바로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 투우웅!

화살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화살이 주변의 바람을 탐욕스럽게 삼키고, 휘감았다.

점점 거대해진 화살은 하나의 폭풍이 되어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휩쓸며 나아갔다.

- 콰르르르르!

- 으아아아아악!

폭풍이 휘감은 바람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에 닿은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말 그대로 갈려 나갔다. 화살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고, 목표에 적중했다.

"크아아아아악!"

히드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아스튼을.

그 등을 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폭풍의 눈이 적중했다. 거센 바람이 뇌전을 흐트러트리면서 그 안에 감춰진 몸을 찢었다.

아스튼이 고통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등 뒤는 조심해야지."

- 키하아아아!

진현우가 쏜 화살에 맞기 전까지만 해도 아스튼이 히드라를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한 히드라가 역공을 펼쳤다. 아스튼이 분노를 터트렸다.

"군단이여! 저 인간을 죽여라! 얼른!"

- 예, 예! 군단장님!

- 하지만....

진현우를 에워싼 포위망은 이미 무너졌다. 군단장의 명령을 들은 마족들이 머뭇거렸다.

그는 실피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대신 마르실의 성검을 빼 든 후 적진에 돌진했다.

성검이 마족들을 베어 냈다.

- 이놈이...!

- 콰아앙!

마족들의 흑마법이 진현우를 덮쳤다.

그는 신성한 방패로 흑마법을 적들에게 되돌려 주면서 주변의 상황을 확인했다.

수많은 마족의 시체가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진현우의 손에 거대한 깃발이 나타났다.

쿠웅! 검은 깃발이 땅에 꽂히면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지하에서 언데드들이 나타났고, 죽은 마족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어, 언데드?! 네놈, 사령술사였나!

"사령술사는 아닌데... 알아서 뭐 할래?"

- 끄르륵!

언데드들이 주변의 마족들을 공격했다.

마족들을 언데드로 되살려서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것인가. 아스튼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진현우의 노림수는 그게 아니었다.

"먹어라, 히드라! 네 먹이다!"

- 크르르르...?

진현우는 언데드들을 히드라에게 바쳤다.

의아해하던 히드라는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보며 머뭇거렸지만, 곧 놈들을 잡아먹었다.

그러자 히드라의 상처가 일부 재생되었다.

- 크라아아아아!

"미, 미친 것이냐! 진현우!"

상처를 회복한 히드라가 아스튼에게 다시금 거센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겨우 피해를 추스르고 다시 반격을 펼치던 아스튼으로서는 미칠 것만 같았다.

"평생 싸우다가 죽어라."

"빌어먹을 인간 놈이이이이!"

진현우는 히드라와 아스튼 간의 균형을 절묘하게 조절하며 둘이 계속 싸우게끔 했다.

치열한 전투가 거듭되면서 둘 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 균형의 추가 약간이라도 무너지면 위험해질 상황.

'이제 끝낼 때가 됐군.'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빼 들었다.

126화

최후

두 괴물의 혈전은 계속 이어졌다.

"허억, 허어억!"

- 키하아아....

아스튼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 상대였던 히드라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상처가 가득한 둘은 잔뜩 지친 상태였다.

군단장의 몸을 감쌌던 뇌전도 약해졌다. 가려져 있던 마족의 몸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

"흐아아아아!"

- 파지지직!

아스튼이 필사적으로 뇌전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방사된 뇌전이 히드라를 덮쳤다. 놈의 갑피가 녹아내리고 살점이 불탔다.

여덟 개의 머리가 움직였다.

- 크르, 벌레 같은 놈이!

"크흐윽!"

아스튼을 사방에서 에워싼 여덟 개의 머리.

세 개의 머리가 아스튼의 몸을 물어뜯었고, 두 개의 머리가 극독을 입에서 내뿜었다.

나머지는 닿는 것을 모조리 녹이는 산성을 내뿜었다. 그 기세도 너무도 약해진 상태였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

- 크하아악!

그럼에도 아스튼의 몸 절반이 녹아내렸다.

그는 고통을 억누르면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뇌전을 내뿜었다. 그가 쏘아 낸 뇌전이 사방에서 히드라의 머리들을 단번에 덮쳤다.

- 쿠우웅!

그 충격에 두 개의 머리가 떨어졌다.

여러 번의 공격으로 내구력이 한계에 달한 머리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떨어진 부위에서 거품이 일더니 재생하기 시작했다.

히드라의 재생력 때문이었다.

'약해졌는데도 이 정도 재생력이라니!'

온갖 디버프에 혈전을 겪은 히드라의 재생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마족 군단을 먹으면서 일부 회복했고, 떨어진 머리를 재생할 정도가 됐다.

저놈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아스튼은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이 개 같은, 뱀 새...!"

어떻게든 재생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거대한 꼬리가 아스튼을 내리쳤다. 그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아스튼이 어떻게든 자세를 추스르고 거의 고갈된 마기를 끌어내려는 바로 그 순간.

- 콰르르르르!

해일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계치까지 응축된 검기가 해방되면서, 엄청난 숫자의 검기가 쏘아졌다.

바로 히드라의 남은 머리를 향해서.

'무슨, 어떻게 저 정도의 검기를....'

아스튼이 넋을 잃을 정도의 검기였다.

쏘아진 검기들은 히드라의 머리 셋을 단번에 베어 냈다. 쿠우웅! 거대한 머리가 떨어졌다. 하지만 금방 상처에 거품이 일어났다.

머리를 새로이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 끼리릭!

'진현우, 저놈. 뭘 하려는 것이지?'

검기를 쏘아 낸 장본인, 진현우는 시위에 화살을 건 채 히드라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와 아스튼의 눈이 마주쳤다.

"가디언!"

"뭐?"

진현우가 불현듯 외쳤다.

그리고 갑자기 땅이 울렸다. 육중한 무게를 가진 기사가 돌진해 올 때 땅울림이었다.

아스튼은 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지척에서 거대한 갑옷 덩어리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 저건!"

- 명령, 적을 제압하라.

신전에서 튀어나온 가디언들이었다.

아직 진현우에게는 가디언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남아 있었다. 그걸 이용한 것이었다.

신전 내부에 있던 가디언의 숫자는 수백.

- 쿠우우웅!

"크하악! 이, 고철 덩어리들이!"

가디언들이 아스튼을 짓눌렀다.

뇌전을 일으킬 마기조차 고갈될 정도로 힘이 빠진 아스튼으로서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스튼이 짓눌린 가운데.

- 투우웅!

진현우가 화살을 쐈다.

피처럼 붉은, 지독히 불길한 화살을.

- 푸우욱!

- 크하...!

순식간에 쏘아진 화살이 히드라를, 정확하게 머리가 떨어진 목 부위들을 꿰뚫었다.

히드라가 턱 막힌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 캬하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목을 꿰뚫은 붉은 화살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화살은 기분 나쁜 벌레로 변해서 상처로 파고들었고, 저주가 놈의 재생력을 막았다.

거품이 일면서 재생하던 게 단번에 썩었다.

- 필멸의 화살에 담긴 저주가 대상의 재생력을 5분 동안 크게 약화시킵니다.

"도대체 무슨...."

아스튼은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짧은 순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생각이 멈췄다. 그리고 그건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

아스튼은 진현우가 접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 느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아니, 애초에 뭘 할 수도 없었다. 수많은 가디언이 아스튼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푸욱! 심장이 꿰뚫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카, 학...."

아스튼은 심장을 꿰뚫은 칼날을 봤다.

기분 나쁠 정도로 푸른 검기. 그것이 아스튼이 두른 뇌전을 탐욕스레 흡수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빌어, 먹을...."

아스튼과 진현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제 넌 쓸모가 없거든. 죽어 줘야겠다."

"개, 같은, 인간 놈...."

원래라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스튼의 몸을 뒤덮는 뇌전이 방어막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기가 고갈되었고, 히드라 때문에 뇌전이 약해진 상황.

그의 몸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이었다.

"멍청한, 뱀, 새끼, 내 말을...."

서걱! 검이 아스튼의 목을 베었다.

히드라가 이성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진현우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군단장, 아스튼은 그런 후회를 안은 채 그대로 영면했다.

너무도 허무한 최후였다.

- 흐으으, 크하악!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기계였기에 히드라의 강점인 맹독도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놈들을 처리할 방법은 산성뿐.

남은 히드라의 머리가 산성을 내뿜었다.

- 치이이이익!

- 꺼져! 캬하악! 꺼지란 말이다!

놈을 붙잡던 가디언들이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가디언이 남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진현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히드라의 인간을 닮은 얼굴이 이를 갈았다.

- 내게... 뭔 짓을 한 것이냐?

"뭘 하긴. 네가 빼앗은 몸뚱어리 주인이 널 죽이려고 준비해 둔 것들을 쓴 거지."

- 이 몸? 알베이타 말이냐? 하!

신전에 숨겨져 있던 함정.

그리고 진현우에게 주어진 이 화살들.

과거, 히드라를 죽이는 데 실패했던 알베이타가 이 순간을 위해서 준비한 것들이었다.

히드라가 실소를 터트렸다.

- 이 저주가 평생 날 방해할 것 같나? 크르,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내가...!

"그래서 그 전에 끝내려고."

- 케아아악!

뻐어엉!

거인의 괴력이 적용된 파쇄권이 히드라의 몸통을 강타했다. 약해진 갑피가 단번에 파괴되고, 놈의 몸뚱어리에 큰 구멍이 뚫렸다.

히드라가 그 충격에 목을 구부렸다.

'시간이 얼마 없다. 틀린 말은 아니야.'

쇠약의 저주와 훼방의 낙인 그리고 필멸의 화살의 효과도 영구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거기에다가 전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히드라에게 많은 마족을 먹이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면 놈은 힘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끝낸다.'

산성에 녹아내리던 가디언들이 움직였다.

거대한 갑옷들이 때마침 구부러진 히드라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진현우는 빙정의 효과가 적용된 도끼를 투척해 그 목을 고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돌진.

- 콰드드득!

손아귀로 되돌아온 도끼를 붙잡고, 대분쇄로 히드라의 목을 그대로 베어 냈다.

이제 남은 머리는 셋.

- 크하아아아아!

히드라의 머리들이 일제히 진현우를 향해서 맹독과 산성이 섞인 브레스를 내뿜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리폰을 소환해서 올라탄 진현우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히드라의 머리가 그를 추적했다.

"쏴라!"

"은인을 도와라! 집중 사격!"

- 케헤아아악! 귀쟁이 놈들이이이!

엘프들의 공격이 히드라를 덮쳤다.

일제히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들이 히드라의 고개를 강제로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브레스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때가 진현우가 그리폰을 박차고 도약할 순간이었다.

- 서걱!

정확하게 일섬.

번뜩이는 섬광이 히드라의 목을 베었다.

이제 남은 목은 둘.

- 겨우 풀려났다. 이렇게, 허망하게는!

히드라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놈의 몸뚱어리에서 맹독이 독무처럼 뿜어져 나왔다. 미리 그걸 눈치채고 피한 진현우의 발밑에서 기다렸다는 듯 산성 기둥이 솟구쳤다.

- 푸쉬이이!

"씁, 발악하기는!"

산성이 진현우의 왼쪽 몸을 덮쳤다.

전설급 아이템인 폭정의 상징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갑옷이 보호하던 살점 역시도.

히드라가 가진 산성의 위력이었다.

- 죽을 수 없단 말이다...!

히드라가 광란 상태에 빠졌다.

놈이 내뿜는 독무가, 그리고 산성액이 거대한 몸뚱어리를 갑옷처럼 보호하고 있었다.

콰아앙! 거대한 꼬리가 쉼 없이 사방을 내리쳤고, 두 머리가 계속해서 숨을 토해 냈다.

"진현우! 거기 있으면 위험하다!"

"저도 알아요. 라시드! 제가 신호하면 저를 향해서 공격하세요! 온 힘을 다해서!"

"뭐, 뭐라고? 도대체 뭔 소리를...!"

라시드가 다급히 외쳤다.

히드라의 주변이 산성과 맹독으로 뒤덮이면서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구역으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지.'

진현우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냈다.

[뛰어난 저항의 물약 (영웅)]

· 설명: 상태 이상을 회복하고 짧은 시간 동안 강력한 상태 이상 저항력을 부여한다.

엘프 여왕에게 부탁해서 받았던 주머니에 담긴 재료로 만들어 둔 포션이었다.

물론, 만능 포션은 아니다.

잠깐 동안 저항력을 높여 주기는 하지만 맹독과 산성에 면역이 되는 수준은 아니다.

'감당하는 수밖에.'

진현우는 활을 쥐었다.

히드라가 거대한 몸으로 믿기지 않는 속도로 돌진하며 그를 향해 숨을 토해 냈다.

그는 남은 가디언들을 끌어모았다.

- 쿠우우웅!

광화한 히드라가 내뿜는, 더욱 강해진 산성이 가디언들의 몸을 순식간에 녹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가디언들이 놈의 시선을 가린 순간. 그게 필요했을 뿐이니까.

- 쉬이익!

진현우의 손아귀에 바람이 집결했다.

그 손에서 쏘아지는 것은 폭풍의 눈.

화살은 주변의 바람을, 그리고 독무를 탐욕스럽게 삼키면서 히드라를 향해서 쇄도했다.

- 콰아아앙!

독무를 휘감은 폭풍의 눈이 히드라에 적중했다. 독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히드라에게 큰 피해를 주기에는 부족한 일격이었다.

하나, 덕분에 주변의 독무가 사라졌다.

'지금.'

진현우가 그리폰과 함께 활공했다.

둘은 재빠르게 히드라의 바로 앞까지 쇄도했고, 그는 도중에 라시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대체 무슨... 제길, 모르겠군. 쏴라!"

"저, 정말로 여행자를 상대로 쏩니까?"

"그래! 당장!"

엘프들의 공격이 일제히 진현우에게로 쏟아졌다. 온갖 화살과 정령 마법이 그를 덮쳤다.

진현우와 엘프들을 경계하던 히드라가 당황한 나머지 순간 굳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잠시 후, 히드라는 경악했다.

- 이놈...!

진현우의 검이 흐르는 강물처럼 움직이더니, 쏟아지는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냈다.

그렇게 흘려 낸 화살과 마법들을 그냥 보내지 않고 자신의 곁에 맴돌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 크아아아아악!

이 상황을 전혀 예기치 못한 히드라의 머리를 향해서, 흘려 낸 공격을 모두 쏘아 냈다.

꿰뚫는 화살과 폭발하는 마법들.

히드라의 시야가 가려졌다.

- 뛰어난 저항의 물약을 복용합니다.

진현우는 그리폰의 등을 박찼다.

남은 머리는 단 하나. 인간을 닮은 흉측한 머리. 그 얼굴이 진현우를 직시했다.

놈의 눈빛에 증오가 가득 어린 게 보였다.

- 인간 따위가, 감히, 알베이타! 네놈이이!

광란에 빠진 히드라가 산성을 토해 내면서 완성되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진현우는 몸을 덮치는 산성을 받아 내며,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짜냈다.

그 검이 허공을 갈랐다.

- 콰르르르르르!

갈라지는 공간.

그 속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검기.

절규를 토해 내던 히드라의 마지막 머리가 쏟아지는 검기에 무참히 난도질되었다.

- 치이이익!

"흐읍!"

몸이 불타는 게 느껴졌다.

진현우는 히드라의 몸통에 올라타면서 활의 시위에 남은 필멸의 화살을 모두 걸었다.

그리고 단번에 화살을 쏘아 냈다.

- 키익...!

재생되려고 하던 머리에 꽂히는 필멸의 화살들. 과거의 알베이타와 엘프들이 희생해서 만들어 낸 저주가 그 몸에 깃들었다.

먼 과거, 알베이타가 후손은 자신과 달리 성공하기를 바라며 안배해 놨던 것들.

진현우는 그의 원념을 검에 담았다.

- 캬아아아아아아!

흐릿해진 검기가 히드라의 몸을 갈랐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내려치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 내던 히드라의 몸이 굳었다.

제 몸을 건사할 수 없다는 듯이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거대한 몸뚱어리가 이내 쓰러졌다.

- 쿠우우웅!

땅을 울리는 진동.

마치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거대한 몸이 끝부분부터 가루가 되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 빌어, 먹을....

그런 유언을 남긴 채.

히드라의 몸이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를 토벌했습니다.

기나긴 전투의 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127화

기다리던 순간

히드라가 죽었다.

군단장, 아스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현우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무릎을 꿇었다. 체내의 마력이 고갈된 게 느껴졌다.

- 인간, 괜찮느냐?

"네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냐...?"

- 음, 몸 반쪽이 잘 녹았구나.

히드라의 산성 때문에 몸 절반이 녹았다.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엄습했다. 진현우는 포션을 들이켜면서 주변을 돌아봤다.

마족들은 대다수가 죽었고, 남은 적들도 엘프들이 사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디언들은... 그래도 꽤 남았군.'

히드라와 아스튼을 상대하느라고 많이 소모하기는 했지만, 아직 꽤 남은 상태였다.

아마 쓸데가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진현우는 포션에 취한 채 허공을 봤다.

둘 다 강력한 보스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 당연하지만 큰 보상이 뒤따랐다.

그의 눈에 메시지들이 보였다.

-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를 토벌했습니다.

- 흑뢰의 군단장 '아스튼'을 토벌했습니다.

- 믿을 수 없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하이아칸 대륙에 당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집니다. 공헌도가 8,000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연이어 업적 보상이 빼곡하게 나타났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를 영면에 들게끔 만들 것.

- 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신화의 구현자 (효과: 모든 능력치 +10, 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10% 증가 및 받는 대미지 10% 감소)]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공략하지 못한 고대의 신전을 발견해 공략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비밀을 파헤치는 자 (효과: 던전을 공략했을 때 특수한 보상을 얻을 확률이 생김)]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마족의 군단장을 둘 이상 처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군단장의 사신 (효과: 마족 계통의 적에게 주는 대미지 +20%, 마족들 사이에서 악명이 퍼지며 적들이 당신을 두려워함)]을 획득했습니다.

마족들 잡기에는 좋겠군.

진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고 히드라와 아스튼이 드롭한 아이템을 챙겼다.

여러 아이템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시선이 가는 아이템은 딱 두 개 있었다.

[히드라의 내단 (전설)]

· 설명: 강력한 독기가 담긴 내단이다. 섭취할 경우 독과 관련된 특성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독기를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흑뢰의 회동 (전설)]

· 설명: 흑뢰가 모여서 만들어진 반지. 강력한 군단장의 힘이 그대로 담겨 있다.

· 착용 제한: 레벨 60.

· 옵션: 흑뢰, 마기 내성.

* 흑뢰: 마기로 이루어진 뇌전을 일으킨다. 다양한 방법으로 뇌전을 사용할 수 있다.

* 마기 내성: 흑뢰에 담긴 마기의 영향으로 마기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진다.

내단 그리고 반지.

반지인 흑뢰의 회동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치고는 옵션이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럴 만도 했다.

'사실상 흑뢰라는 스킬이 생긴 셈이군.'

진현우는 흑뢰 옵션을 사용했다.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손아귀에 검은 뇌전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흑뢰 옵션의 효과였다.

- 파지지직!

- 후끼야아악! 미친 것이냐!

"가서 정기나 먹어. 먹을 거 많잖아."

그 흑뢰를 미호에게 쏴 봤다. 기겁하면서 달아난 미호가 진현우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하나 그것도 잠시, 히드라와 아스튼의 사체를 보고 눈을 반짝이더니 정기를 흡수했다.

"음, 쏘아 내는 식으로 쓸 수도 있고."

이렇게 쏘아 내는 형태가 아니라 무기나 몸에 두르는 등 다양한 식으로 쓸 수 있었다.

꽤… 아니, 몹시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소환석: 히드라 (전설)]

· 설명: 히드라가 깃든 소환석이다. 하이아칸 대륙에서만 쓸 수 있으며, 전쟁이 벌어졌을 때 특수한 장소에서 히드라를 소환할 수 있다.

진현우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

히드라의 소환석이 드롭되었다. 이 소환석을 얻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온전한 상태의 히드라를 소환할 수 있다.'

이번에 부활한 히드라는 온갖 디버프를 받고 불안정한 상태로 부활했다.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히드라의 소환석을 이용한다면, 온전한 상태의 히드라를 소환할 수 있다.

'전쟁에 큰 도움이 되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전쟁.

거기서 승리하려면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진현우는 자신이 가진 소환석들의 종류를 떠올리면서,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생각했다.

"진현우!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자는 모두 여기로! 시급한 부상자가 여기 있다!"

빠르게 달려온 라시드는 진현우의 상태를 보자마자 기겁했다. 빠르게 치료하기는 했지만, 독과 산성 때문에 상태가 몹시 안 좋았다.

금방 달려온 엘프들이 그를 치유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 해야겠군. 그런 식으로 싸우는 인간은 살면서 처음 봤다."

"앞으로 더 보게 될 겁니다."

"후우, 누가 보면 목숨이 둘인 줄 알겠어."

라시드가 혀를 내둘렀다.

강력한 괴물 둘을 서로 싸우게끔 유도하고, 그걸 이용해서 두 괴물을 다 처리할 줄이야.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임에도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만 잘못됐어도 죽었을 것이다.'

진현우의 몸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강한 신뢰감도 들었다.

'거점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이 정도까지 해 줄 줄이야. 이 남자라면 확실히....'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다르다.

아바를 비롯한 이들에게 속았던 엘프에게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이가 필요했다.

진현우는 그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여왕님에게 더 큰 보상을 부탁드려야겠군.'

라시드는 그리 생각했다.

진현우의 곁에서는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엘프들이 상처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상태는 어떤가?"

"피부가 녹은 건 금방 치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히드라의 독에 당한 겁니다."

"지금은 멀쩡히 움직일 수 있어도 조금만 지나면 독 기운 때문에 못 움직일 거예요. 일단 빠르게 베카샤로 돌아가서 치료를...."

산성으로 몸이 녹은 것은 괜찮다.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알게 모르게 흡입한 히드라의 맹독이었다.

진현우의 전신이 독에 당한 상태였다.

"그럼 빠르게 움직여야지. 진현우,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겠나? 아니면 우리가...."

"괜찮습니다.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진현우는 히드라의 내단을 꺼냈다.

까맣고 진흙처럼 질척거리는 내단. 라시드는 그 내단이 몹시 불길하다는 생각을 했다.

말릴 새도 없이 진현우는 내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라시드가 기겁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아니, 미쳤나! 그걸 먹을 생각을 해!"

"여, 여행자님! 그러다가 죽습니다!"

"괜찮다니... 푸흑!"

진현우가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 냈다.

내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리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잠시 후, 엄청난 격통이 덮쳤다.

"큭, 끄으윽...!"

- 이, 인간. 괜찮은 것이냐? 네가 죽는 건 상관없다만, 난 정기가 필요하느니라. 음... 아니지, 네가 죽으면 네 정기를 흡수해서....

"넌, 내가 찢어 죽인다...."

- 히이이익!

미호가 꼬리를 잡으며 덜덜 떨었다.

조금 풀어 줬다 싶으면 까부는 게 일상이다. 진현우는 떨리는 눈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죽기는 누가 죽어. 방법이 있는데.'

진현우가 미친 짓을 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갑옷, 폭정의 상징이 불길하게 빛났다. 갑옷에서 검은 연기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그 연기가 주변의 사체들을 뒤덮었다.

- 죽은 적이 가진 생명력을 약탈합니다.

폭정의 상징이 가진 옵션, 약탈.

죽은 적에게서 남은 생명력과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옵션. 적이 강할수록 더 많은 양을 흡수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강한 적이 있었다.

히드라와 아스튼.

"오, 오오. 상처가... 회복되고 있어."

- 인간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구나....

두 강자가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진현우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됐다.

내단으로 입은 내상도 마찬가지였다.

- 치이이익!

내장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약탈의 효과로 회복하기를 반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단의 효과가 끝났다.

그리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 히드라의 내단을 흡수했습니다.

- 특성, '만독불침 (S)'이 생성됐습니다.

특성이 생겼다는 메시지.

처음으로 얻는 S등급 특성이었다.

· 만독불침 (S): 만 가지 독에도 침범당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독에 면역력을 가진다.

진현우의 체내를 헤집고 있던 히드라의 독이 단번에 쫓겨나는 것이 느껴졌다.

만독불침. 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독 걱정할 일은 없겠군.'

물론 이 특성을 넘어서는 수준의 독이라면 걱정해야겠지만, 그건 고층에서나 가능하다.

오랫동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고요한 구덩이'를 점령했습니다. 이곳의 신전이 신비로운 힘을 제공합니다.

- 해당 지역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군에게 특수한 버프를 제공하는 지역입니다.

- 버프: 모든 능력치, 스킬 대미지 +30%. 아군의 사기가 쉽게 꺾이지 않음.

이 거점이 제공하는 버프가 보였다.

엄청난 난이도를 가진 히든 던전이 있는 곳답게 제공하는 버프도 화끈하기 그지없었다.

"여긴 누가 지킵니까?"

"접경 지역이니 우리가 지켜야지. 일단 방어 시설을 지을 때까지 지킬 예정이다."

"그럼 가디언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음. 별 문제 없을 거다."

진현우는 여전히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다수의 가디언이 파괴되었지만, 아직 꽤 많은 가디언이 남아 있었다.

이놈들을 써서 할 일이 있다.

"진현우."

"예."

라시드가 불쑥 저 앞을 가리켰다.

저 너머에 있는 세계수의 장막. 연녹색의 거대한 장막이 평소보다 흐릿한 게 보였다.

"세계수가 한계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막이 거둬질 것이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겠군요."

진현우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제가 바라던 일입니다."

일을 마무리 지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 * *

고요한 구덩이에서 격전을 벌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현우에게 쉴 시간은 없었다.

'아직 조금은 시간이 남았어.'

세계수의 장막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진현우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엘프가 빼앗긴 거점들의 탈환에 나섰다.

성과는 좋았다.

"반지가 좋긴 좋네."

흑뢰의 회동 덕분이었다.

마기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된 덕분에 적 거점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기계이기에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가디언들을 대동하고 있는 것도 컸다.

- '생기 넘치는 숲'을 점령했습니다.

- '사자의 고원'을 점령했습니다.

- '얼어붙은 동굴'을....

그렇게 여러 거점을 탈환하던 중.

마침내 때가 됐다.

"세계수가...."

피난처 베카샤의 중심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던 거대한 나무, 세계수가 빛을 완전히 잃은 것이 보였다.

세계수가 내뿜던 연푸른 기운도 사라졌다.

그게 뜻하는 것은 간단했다.

- 세계수가 힘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소비한 힘을 충전하기 위해 수면에 빠집니다.

- '장막'이 사라집니다. 장막 너머의 마족들이 엘프의 영토를 노리고 움직입니다....

- 에픽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하이아칸 대륙의 에픽 퀘스트.

루윈 대륙에서 진현우가 받았던 것과는 달리, 모든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퀘스트였다.

[악과의 대전쟁.]

· 등급: 에픽 퀘스트.

· 난이도: S.

· 설명: 모든 힘을 소진한 세계수가 힘을 충전하기 위해 잠에 빠졌다. 장막 너머에 있던 마족들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마족들과 맞서 싸워 빼앗긴 거점을 수복하고 놈들을 몰아낼 것인지, 아니면 마족들의 침공을 수비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지....

· 보상: 변동 보상. (어떤 방법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달성했는가.)

하이아칸 대륙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퀘스트.

"하, 또 에픽 퀘스트야...."

"전쟁 끝날 때까지 탑에서 나가 있을까?"

"그것도 좋지."

주변 사람들이 또다시 일어난 에픽 퀘스트에 질려서 한탄하는 게 들렸다.

그중에서 웃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진현우.

그는 에픽 퀘스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대륙도 끝나겠군.'

128화

만개

플레이어들이 에픽 퀘스트를 받았을 무렵, 카오틱들도 똑같은 퀘스트를 받았다.

한동안 수세에 몰렸던 마족 진영은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여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아스튼이 죽었다.

한때 엘프의 수도였던 헤이시스.

그곳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모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프나, 엘프의 동맹이었던 드라이어드 같은 종족들도 함께 있었다.

모두 마기에 잠식된 이들이었다.

- 나를 충직하게 따르던 놈이었지. 놈과 함께 마계를 정벌하던 나날이 떠오르는구나.

헤이시스의 왕궁.

마기가 흐르는 샘에 잠겨 있던 대악마 헬만이 군단장과 카오틱들의 수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 최근 전황이 좋지 않다더군. 여러 거점을 빼앗겼다고 들었다. 피해는 어느 정도지?

"9개의 거점을 빼앗겼습니다. 군단장 셋이 죽었고, 3개의 군단이 무너졌습니다."

- 흐으음....

헬만이 불만스러운 듯이 숨소리를 내뱉었다.

짙은 마기가 왕궁을 가득 메웠다.

- 내부 첩자들은?

"...모두 색출되어 제거됐습니다. 지위가 낮은 첩자들은 아직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희한테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겁니다."

- 어떻게 알아낸 것이지? 정보가 샜나?

보고하는 카오틱, 자인도 미칠 노릇이었다.

그는 대형 카오틱 길드의 길드장으로, 마족 진영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남자였다.

첩자 관리도 그가 주로 맡고 있었다.

"알 수 없습니다. 첩자들이 서로 알지 못하게끔 조치해 뒀으니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모두 색출해 냈더군요."

- 한심하군.

자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요한 구덩이에 나타난 신전의 일은 진현우에게 완전히 놀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헬만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 놈이 히드라의 소환석을 가졌다. 몬스터들을 마기로 잠식시키는 작업은 어떻게 됐지?

"몇몇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히드라는...."

-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이 말인가. 다른 소환석은? 그에 대처할 준비는 해 뒀는가?

"예. 병력의 손실이 크기는 하지만, 일반 플레이어가 내놓는 소환석이라고 해 봤자... 큰 무리 없이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 문제는 히드라, 그 괴물이라는 것이군.

신화 속의 괴물.

마족은 고요한 구덩이에서 있었던 일의 전말을 들었고, 히드라가 어떤 괴물인지 알아냈다.

강력한 맹독과 산성을 지닌 괴물.

그 존재 자체가 전쟁에서는 너무 까다롭다.

- 각 군단에서 정예 병력을 차출하라. 내가 직접 이끌고 히드라, 그놈을 죽이겠다.

"대악마님께서 말입니까?"

- 그래. 많은 마족과 군단장들이 죽으면서 이 샘의 효과가 더욱 강해졌다. 이 정도면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지.

헬만이 몸을 담그고 있던 샘.

이곳은 원래 세계수와 연관이 있던 곳으로, 죽은 이들의 영혼이 모이는 샘이었다.

하지만 마기로 오염되면서, 죽은 마족들의 혼이나 마기가 모이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헬만은 그것들을 이용해 힘을 복구했다.

- 전쟁을 준비해라.

대악마 헬만이 불길하게 웃었다.

- 우린, 빼앗긴 것들을 모두 되찾을 것이다.

모든 군단장과 카오틱이 그에 부복했다.

* * *

전쟁이 코앞까지 닥쳤다.

덕분에 피난처 베카샤가 뒤숭숭해졌다.

모든 엘프가 결사항전을 외치면서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다소 달랐다.

"어우, 개죽음에 동참하는 건 좀...."

"저희는 빠지겠습니다."

일부 플레이어는 마족과의 전쟁에 큰 부담감을 느끼고 세계의 탑을 탈출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플레이어가 그런 것은 아니다.

"확실히 위험하기는 한데, 단번에 공헌도를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란 말이지."

"방어만 도와주다가 가면 안 되나?"

"공헌도만 채우고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공헌도가 필요한 이들은 남았다.

하지만 그들도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희는 지금까지 계속 패배해 왔습니다."

엘프 여왕이 그리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런 발상이 떠오를 리가 없지요. 플레이어든, 심지어 엘프든."

"여왕님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그렇습니다."

장막이 사라진 건 처음이 아니다.

마족과의 전쟁 역시 처음이 아니었다. 여러 번 겪었고, 엘프들은 그때마다 패배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엘프가 죽었고, 거점을 빼앗겼다. 그러면서 패배를 학습하게 됐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엘프는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엘프 사이에서 진현우의 명성은 하늘을 뚫을 정도였다. 여태껏 밀리기만 하던 엘프가 반격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따르지 않을 엘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지금까지 당신이 저희를 위해서 해 준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이건... 꽃이군요."

엘프 여왕이 진현우에게 꽃을 건넸다.

수백 년에 한 번 핀다는 꽃. 단순히 꽃잎을 준 것이 아니라, 꽃 자체를 그에게 줬다.

[탄생의 꽃 (전설)]

- 설명: 탄생의 힘이 깃든 꽃. 엄청난 생명력과 힘이 담겨 있다. 자체로도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잘 조제해서 쓴다면....

· 옵션: 탄생의 숨결, 잠재력, 귀속.

* 탄생의 숨결: 단순히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용자의 재생력을 크게 향상시키며, 마력을 더욱 빠르게 재생시킨다.

* 잠재력: 엄청난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특수한 조제법으로 잠재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

* 귀속: 획득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아름다운 꽃이 신비로운 빛을 내뿜었다.

손에 쥐자 청량감이 온몸을 감돌았다. 소모 아이템이 가지는 것만으로 이 정도 효과라니.

"저도 함께 갈 거지만, 헤이시스의 왕궁 지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 꽃이 도움이 될 겁니다. 조제법을 알려 드리죠."

"예,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절대 받을 수 없는 보상.

하나 다른 누구도 아닌 진현우라면 이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여왕은 그리 생각했다.

"그럼 일단...."

진현우는 머릿속에서 계획을 떠올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회의부터 좀 합시다."

* * *

왕궁의 대회의실.

그곳에 극소수의 인원이 모였다.

진현우와 엘프 여왕 그리고 라시드였다.

'사람이 많아 봤자 좋을 것도 없지.'

괜히 얘기만 새어 나간다.

극소수의 인원만 모아서 얘기하고, 결정된 것들을 알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진현우는 눈앞의 수정구를 봤다.

- 크르르르르....

- 엘프! 네놈들의 동족이 보이느냐? 마기를 받아들인 모습이 보이느냔 말이다! 너희들도 금방 이렇게 만들어 주마! 여왕까지도!

수정구에 비치는 것은 전선의 광경이었다.

접경 지역의 여러 거점을 마족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마기로 잠식된 다크 엘프나, 여러 동맹의 종족들이 서 있었다.

"사기를 꺾으려는 용도다. 빌어먹을 놈들."

"라시드,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입니까?"

"그래. 마족 군단과 카오틱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부 다 잔뜩 약이 올랐더군. 공격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 지금은 참는 것 같다만."

타락한 엘프들을 복잡한 눈으로 보던 엘프 여왕이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들의 움직임이 좀 이상한 것 같군요. 원래라면 진작에 공격하고도 남았을 놈들인데."

"히드라 때문이겠죠."

진현우는 소환석을 꺼냈다.

히드라가 깃들어 있는 전설급 소환석.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마족들도 제가 히드라의 소환석을 가진 걸 알 겁니다. 히드라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움직이고 싶을 거고요."

마족 진영이 가장 경계하는 건 히드라다.

한 군단을 지워 버릴 정도로 강력한 괴물. 전장에 나타나면 어떤 피해를 입힐지 모른다.

가능하면 히드라부터 처리하고 싶을 터.

"최근 마족들의 피해가 컸었죠. 히드라를 처리하려면 몇 개의 군단을 보내야 할 겁니다.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거고요."

"마족들이 원하는 상황은 아니겠지."

"예.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싶을 겁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면서, 강력한 괴물인 히드라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놈을 혼자 죽일 수 있는 자가 나서는 것.

딱 하나, 그럴 수 있는 마족이 있었다.

"어쩌면 대악마가 나설 수도 있겠군요."

"대악마가 전쟁에 나서는 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히드라가 상대라면 그럴 수 있겠지."

"흠...."

진현우는 헤이시스의 왕궁에 잠입해야 한다. 거기에 가장 거슬리는 건 대악마의 존재.

히드라를 잘 이용한다면.

'놈을 바깥으로 빼낼 수가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군단을 히드라에 묶이게끔 할 수 있다.

진현우는 테이블 위의 지도를 바라봤다.

"수도로 갈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는 건 여기고. 마족이 수도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이다."

라시드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수도와 떨어진 곳에 있는 '태양의 대장간'. 한때는 엘프들의 장비를 만들던 거점이다.

"이 거점에서 주는 버프가 강력하다. 다양한 장비가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지. 마족들이 기를 쓰고 지키려고 들 것이다."

"여기에 히드라가 나타나면 적들이 수도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릴 테고요."

"음. 이곳에 히드라를 풀 건가?"

"그렇게 하죠. 그 전에 접경 지역 사방에서 몬스터를 풀고요. 강력한 몬스터들이라서 적들이 혼란스러워할 겁니다. 그리고...."

진현우는 여왕과 시선을 마주쳤다.

"저와 여왕님을 포함한 소수의 별동대가 지하 통로를 이용해서 왕궁으로 가죠."

"지하 통로가 어떤 상황인지는 파악해 뒀어요. 입구를 지키는 자는 없더군요."

"내부가 어떤 상황인지가 관건이겠군요."

대장간에 히드라를 풀고, 진현우와 여왕은 곧바로 통로를 이용해서 수도로 향한다.

그리고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얻는다.

'수도로 갈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게 많다.

진현우는 성배를 만지작거렸다.

중요한 건 사방에 몬스터를 풀어서 마족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끔 만드는 것.

그러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좀 부릅시다."

오랜만에 만날 사람들이 있다.

* * *

그날 밤.

엘프들의 왕궁에 있는 조제실.

진현우는 조제실에 있던 엘프 조제사에게 부탁해서 특수한 약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조제사의 표정이 몹시 안 좋았다.

"여행자님. 뭘 만드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위험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위험하긴 하죠."

"꼭 만드셔야겠습니까?"

"예. 필요하니까요."

자신이 만드는 약의 위험성을 대강 눈치챈 조제사의 표정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약을 빻고, 끓이는 등의 작업을 반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 훌륭한 솜씨를 가진 엘프 조제사가 당신의 부탁으로 약을 조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만개 (전설)를 조제했습니다!

꽃잎을 이용해서 만든 약.

사실 약이라기보다는 독에 가깝다.

[만개 (전설)]

- 설명: 강한 생명력을 가진 꽃잎과 특수한 약재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낸 알약.

복용하면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신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치명상을 입힌다.

이 효과는 복용자가 죽음에 달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해제되지 않는다.

전생에서 몇 번 만든 적이 있는 약이다.

그때는 꽃잎이 아니라 다른 재료를 쓰기는 했지만, 결과물은 대강 비슷하게 나왔다.

아니, 오히려 더 좋게 나왔다.

"이걸... 정말로 쓸 생각입니까?"

"다른 사람한테 선물로 줄 수도 없잖아요."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몸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겁니다. 그래도 쓰시겠다고요?"

"필요하면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목숨을 대가로 일시적으로 강력한 힘을 얻게 해 주는, 금지된 약물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라면 만들지도,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층에서 플레이어 생활을 그만둘 것도 아닌데 이런 약을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할 이유가 있지.'

폭군 세트의 옵션.

단 한 번, 죽음에 달하는 부상을 입었을 때 상처를 회복하고 능력치는 강화하는 옵션.

그 옵션이 있다면 만개의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다. 죽음에 달하기 전까지는 해제되지 않지만, 죽음에 달하면 해제할 수 있으니까.

'마인 그리고 멸망의 목도자.'

진현우가 이 약을 만든 이유다.

2층에서 만났던 마인 그리고 3층에도 있다는 마인. 공통점은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찾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마인은 오직 대적자를 따르는 자.

'대적자가 조각을 찾고 있다.'

진현우의 가장 큰 목적은 엘프 왕궁에 숨겨져 있는 웨펀 마스터의 유산을 찾는 것이다.

그가 남긴 조각을 찾아야만 한다.

'엘프 여왕이 말했었지. 누군가가 조각을 봉인해 둔 결계를 건드리고 있다고.'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아니, 사실은 확신에 가깝지만 그건 마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을 보낸 놈은, 대적자 중 하나인 멸망의 목도자일 것이다.

'대적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번에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쓸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럴 것 같지가 않아서 한숨이 나왔다.

129화

마수 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