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보물들을 싹 다 수거하고 떠나려는 찰나.
탐욕이 물었다.
"생각중이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검성 라일리와 1:1은 말이 안된다.
황금 티켓으로 말미암아 디버프를 지운 뒤 더 나은 상황에서 싸울 수 있다 해도, 정상적인 대결에서 승리를 점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탐욕을 곁들이면 조금 더 수월하긴 할 테다.
12레벨에다가 탐욕 역시 심연의 지배자였으니까.
여기에 다른 파티원들과 함께 공략을 시도하면······.
'이길 확률이 10%쯤 되겠지.'
그래서 고민중이었다.
탐욕에게 얻은 것이 라일리를 공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탓이다.
지금 얻은 보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낮은 확률에 베팅하는 것보단 한 발 물러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탐욕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이곳 심연에 파고들어 검성 라일리를 오랜시간 지켜봤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강력한 탓에 4개의 봉인으로 스스로를 봉인했습니다.
"스스로를 봉인했다? 심연에 가라앉은 뒤에 말이냐?"
-심연의 구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잘은 알지 못한다."
심연은 미지다.
심연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기회는 한정적이었고, 그곳의 지배자들은 항상 공격적이었기에 제대로 탐구할 시간이 부족했다.
-심연에는 네가지 종류의 지배자들이 있습니다. 원래부터 심연에서 살아왔던 자, 심연에 가라앉은 자, 심연을 파고든 자, 심연 그 자체인 자.
탐욕은 세 번째 경우였다.
심연에 파고든 자.
중첩심연, 하위심연이라 말하는 곳의 지배자!
-검성 라일리는 '심연에 가라앉은 자'입니다. 문제는 간혹 '가라앉은 자'들 중에 '심연 그 자체가 되는 자'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뭐가 다르지?"
-심연 그 자체가 되어버리면, 그 순간 천공의 도시 중 하나를 강제로 침식합니다.
"······끔찍하군."
'강제 침식'이 벌어지는 경우를 나는 딱 한 번 보았다.
멀쩡했던 도시가 심연에 가라앉은 일.
처음에는 워프의 문제인 줄 알았다.
후에 조사에서 워프가 살아있음에도 침식이 벌어졌음이 밝혀져, 난리가 났던 사건이다.
그게 '심연 그 자체인 자'의 탄생과 관계되어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봉인이 풀리면 라일리는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됩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스스로를 봉인한 겁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인간 따위를 걱정하는 건 탐욕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인간이었다.
정말 인간인지조차 의심될 수준의 '격이 다른' 존재 말이다.
만약 그가 검성 라일리의 공략을 시작하면, 4개의 봉인구가 벗겨지게 될 터. 그리하면 다른 천공의 도시, 인간의 도시가 강제 침식을 당하게 된다.
강제 침식 당한 도시의 인간은 몰살이다.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니 괜찮느냐고 묻는 것이다.
"'강제 침식'이 무엇을 기준으로 일어나는지 아나?"
-이곳 '미궁'과 연결된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전부로군."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러다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잠깐. 미궁과 연결된 도시?'
판게니아와 미궁은 모든 도시가 워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도 미궁과 연결된 워프가 수없이 많았다.
왜 지구에 미궁으로 연결된 워프가 떠오른 것인지 솔직히 이해가 안됐다.
어차피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지닌 건 플레이어뿐이고, 플레이어는 판게니아에서 미궁으로 향하면 그만일 뿐이었으니까.
이제야 지구와 미궁이 연결된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강제 침식······ 그게 지구에서 일어난다면.
"'강제 침식'을 막을 방법은 없나?"
-없습니다.
즉답이다.
···방법이 없다고?
탐욕이 말했다면 사실일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아무도 공략하지 못하게끔 방해라도 해야되나?
캬캬캬캬캬컄!
헬은 내 뒤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의 산을 자유롭게 헤집는 중이었다.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다.
녀석을 보고있노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씻겨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군."
*
플레이어 톡의 게시판이 실시간으로 터져나가는 중이었다.
-와, 벌써 페이즈 3?
-10분 전에 2 아니었나?
-근데 페이즈 몇 까지 있는 거냐?
-아무리 많아도 보통 3페이즈가 끝 아님?
-말하는 순간에 4 돌입했다!
-대박사건;;
-검성 라일리가 약한 거 아님?
-개소리. 혼자서 지고룡 대가리 딴 영웅임
-마왕이랑도 한따까리 했을걸?
-전설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걍 라일리가 약한 거 맞는듯
그때였다.
페이즈 4에 돌입했다는 문구가 뜨기 무섭게.
-어?
-응?
-뭐야, 후퇴?
-미궁을 벗어났다는데?
그라시아가 로그아웃하여 미궁을 벗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확히 '도전자 검성이 후퇴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 것이다.
빠르게 페이즈 4까지 도달했던 그라시아가 4에 도달하자마자 후퇴하다니.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엥, 바로 다음 도전자 나타났다.
-제국 삼검? 이건 또 누구야?
-제국이면 아르혼 제국?
-와. 제국에서도 눈독들이고 있었나보네
-그라시아가 못깬걸 제국이 깨나?
-제국이면 가능할지도. 거기 강자들은 진짜 강하다매?
그렇게 입장한지 30초나 지났을까.
-아, 아니네. 제국도 바로 후퇴했네
-페이즈 4에 뭐가 있나?
-뭘 봤길래 이렇게 빠르게 퇴장하냐?
-그런데 그라시아도, 제국도 못 깨면 그냥 못깨는 거 아님?
-아직 사왕 남았잖아ㅋㅋㅋ 사왕이 깬다에 내 부랄 건다
-백왕 세력이 커지면 더 문제 아니냐 근데
-진짜 그럼 좆될 거 같은데
-오늘부터 집에 백왕 사진 걸어놓는다
-미친새끼....
*
탐욕과 함께 황금 심연을 벗어났다.
이어 원래 있던 지하 미궁으로 돌아오자 주변이 휑했다.
'아이작과 이자벨라는 어디 갔지?'
아무도 없다.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하지만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핏자국?'
사람은 없고, 대신 핏자국만 있다.
분명히 사람의 피였다.
그럼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위험에 처한 걸까?
혹시 몰라 '탐지기'를 사용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확실한 건 전투가 벌어진 것 같다.
격렬한 전투까지는 아니지만 핏자국을 보건대 습격이라도 당한 형태다.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도망갔다.'
다행스럽게도 피의 양이 즉사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누구의 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명의 피다.
습격을 당하고, 자리를 피한 게 분명하다.
'누가?'
내가 황금 심연에 있는 동안 지하 미궁에 입장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 중 하나. 누굴까?
그라시아는 검성에게 도전하고 후퇴했다. 제국 삼검이라 칭한 존재는 아마도 은여우 가면일 터였다.
그 둘을 제외한 누군가가 더있다.
'미궁 상인에게서 필요한 물건을 사야겠군.'
도망간 방향 정도는 파악했지만 피가 계속 이어져있진 않다.
무작정 찾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기약없이 찾는 것보단 미궁상인에게서 추적 관련 도구를 사는 게 훨씬 현실적이었다.
-미궁 상인이 곧 나타날 겁니다. 미리 가서 대기하시죠.
"어디서 나타날지 알고 있나?"
-짐작은 갑니다. 워낙 오랜 시간 이곳에 있다보니······.
다행이다.
하기야 황금 고블린처럼 미궁에 익숙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중 대장격인 탐욕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탐욕이 앞장서며 나아갔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을 걸어나가 멈춰서자.
"'지하미궁 상인'이 568.1199에 나타났습니다!"
··· 바로 앞에 미궁 상인, 자판기가 나타났다.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 정확하게 위치를 특정해낸 것이다.
-황금 티켓을 넣으면 문이 열릴 겁니다. 하지만 저도 그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더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탐욕이 말했다.
직접 황금 티켓을 미궁 상인에게 넣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딱히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천천히 탐욕에게서 받은 황금 티켓을 자판기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탐욕의 황금 티켓'을 사용했습니다."
"'히든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미궁 상인'의 판매목록이 바뀝니다."
"'검성 라일리'에게로 향하는 '황금률의 문'이 열렸습니다."
문이 열리고, 상인의 판매목록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 판매목록을 확인한 순간.
'······ 이게 진짜였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아이템들.
그것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유일급 도안
지금까지 보여줬던 '미궁 상인'의 판매목록은 맛보기였다.
아니,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것에 비하면 맛보기 수준도 되지 않았다.
가짜다. 진짜를 숨기기 위한 떡밥과 다를 게 없다.
'자판기에 티켓을 넣는다는 행위 자체를 생각하기가 어렵지.'
이벤트.
아마도 미궁 상인이라 이름 붙은 자판기에 티켓을 넣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리라.
지상층에서도 상인에게 산 '미궁 티켓'을 다시 넣으면 이와 같은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넣는 티켓의 종류에 따라 급이 달라진다.'
당연히 넣는 티켓에 따라서도 바뀌는 목록이 달라질 테다.
지금 내가 넣은 '탐욕의 황금 티켓'은 무려 중첩 심연의 지배자에게서 얻은 것.
'히든'이라 이름 붙을 자격이 있다.
지하 미궁을 찾아, 열 마리의 황금 고블린을 혼자서 독식한 뒤, '탐욕'을 상대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티켓이니까.
그게 가능할 확률이 몇 %나 되겠는가?
그러니, 이게 진짜다.
「히드라곤의 혼 - 100점」
「처형자의 혼 - 200점」
「황금용아병의 혼 - 400점」
「칼날사자의 혼 - 400점」
혼의 종류 네 종.
이 네 개 모두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혼들이다.
당장 히드라곤의 혼만 하더라도 나를 제외하면 판게니아에서 보유한 이가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물건이었다.
'같은 혼으로 초월시킬 수 있지.'
뿐만인가.
이런 종류의 혼들은 대게 '유일급' 아이템의 재료다.
구하기가 힘든 만큼 들어가는 재료로서의 급 자체가 격이 다르다.
무엇 하나 버리기 아깝다.
책정된 점수보다 더 높은 가치의 혼이라 자신한다.
하지만, 점수가 문제다.
여태껏 얻은 점수로는 절대로 구매할 수 없다.
'탐욕의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한 뒤 얻은 점수가 천 점.'
그러나 탐욕에게서 마지막으로 갈취한 점수가 있었다.
그게 무려 1,000점.
기존 점수와 합치면 1,350점가량.
네 종의 혼을 모두 구매하기에 넉넉한 점수다.
그렇다고 바로 지를 순 없다.
목록이 이게 다가 아니니까.
「탐욕의 낙인 - 500점」
「고난의 낙인 - 500점」
「포효의 낙인 - 500점」
「죽음의 낙인 - 500점」
낙인도 네 종.
낙인은 능력을 갖춘 문신이다.
그러나 낙인 자체가 워낙에 구하기가 어렵다.
아주 기초적인 낙인 말고, 특정 낙인의 기술을 계승한 '문신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9할 9푼 9리의 확률로 사기꾼이다.
위의 네 종의 낙인은 모두 '특급 낙인'이었다.
낙인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능력 자체도 출중한.
나 역시 이름만 들어봤지, 저 네 개의 낙인을 새길 줄 아는 문신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제대로 된 문신사에게 보이면 군침을 줄줄 흘리겠군.'
군침뿐이겠나.
흘릴 수 있는 건 전부 흘릴 것이다.
'더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도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태양의 반지 - 300점」
「공허한 녹슨 철 반지 - 500점」
「오래된 계약의 반지 - 200점」
「깊은 총애의 반지 - 300점」
마찬가지로 구하기 힘든 반지들.
이 외에도 족히 20종은 더 있었다.
하나 같이 유니크하지만, 내 시선을 끈 건 그중 두 개뿐이었다.
「신록의 씨앗 – 500점」
「유일급 도안 – 1,000점」
'······ 신록의 씨앗, 유일급 도안이라니.'
신록.
그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른 도시가 하나 있다.
바로 '신록의 도시'라 이름 붙은 대도시.
숲과 관련된 이종의 종족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서 그사이에 신록이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만약 이 신록의 씨앗과 그곳의 신록이 같은 것이라면, 엄청난 자원이 분명하다.
급속성장과도 연계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유일급 도안이 무엇의 도안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모든 유일급 도안과 대체된다는 뜻인가?'
유일급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선 도안이 필요하다.
재료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이 도안이다.
재료를 다 모아도, 도안이 없으면 제작할 수 없으므로.
'만약 그렇다면······.'
꿀꺽!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목록을 재차 살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재료들을 확인했다.
이어 양쪽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손에서 땀이 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 만들 수 있겠군.'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급 장비 한 가지.
············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전부 있었으니까.
그동안 판게니아에 존재한다고 확인된 유일급 아이템은 총 15종.
그중 8종을 빌헬름에게 몰빵 했고, 산화했다.
하지만 그건 마왕의 특수성에 기인해서이지, 유일급 아이템은 그 하나하나가 천지개벽이다.
농담이 아니라 유일급 아이템 하나는 별 하나와 같은 가치다.
사람들이 유일급 장비에 목을 매는 이유가 있다.
하물며 지금 상황에서 유일급 장비를 착용한다?
레벨 10에 도달하는 게 세월아네월아 기약없는 지금 내 상태에서?
'레벨 10을 찍고 초월하는 것보다 유일급 장비를 모으는 게 더 현실적이다.'
이 미친 경험치 덕분에 내 레벨은 6에 고정된 수준이었다.
탐욕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에도 레벨업을 하지 못한 걸 보면, 7레벨로 가는 여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10레벨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고.
언젠가는 닿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다.
······빌어먹을.
하여간, 차라리 유일급 장비를 두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유일급 장비를 착용하면 그만큼 한계가 늘어나고 강한 적과 마주할 수 있을 테니.
더 강한 적과 싸워서 승리하면 레벨업도 빨라지기 마련이었다.
고로, 이 선택은 옳다.
'황금용아병의 혼, 탐욕의 낙인, 공허한 녹슨 철반지, 유일급 도안. 이 네 개를 사야한다.'
유일한 걸림돌은 사야할 게 많다는 것이다.
정확히 2,400점이 필요하다.
내가 가진 점수보다 천점은 더 필요했다.
여기에 이자벨라와 아이작을 추적하기 위한 물건을 구매하는데 100점이 필요했다.
'그라시아도, 은여우 가면도 실패했으니 시간은 조금 더 있을 거다.'
냉정하게 상황을 관철해본다.
아직 검성 라일리의 봉인은 4단계에 머물러있다.
5단계에 이르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지만 그라시아도, 은여우 가면도 이미 후퇴한 상태다.
물론 후퇴한 뒤 재정비하고 재도전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게 당장은 아닐 터.
사막여왕이 살짝 걸리기는 하는데.
여왕이 그라시아보다 더 강하진 않으리라 판단했다.
'우선 둘을 구해야겠군.'
히든 이벤트로 등장한 황금 자판기는 유효시간이 무제한이다.
그리고 자판기를 열면 황금률의 문이 나타난다.
이자벨라와 아이작을 구하고, 점수를 구해 유일급 장비를 만든 뒤 도전하자.
생각을 정리한 즉시 탐욕에게 말했다.
"미궁 상인을 들어라."
-제가 말입니······ 예,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
꽈아악!
이자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선 피가 송글송글 맺혔다.
아이작과 함께 그녀는 도주 중이었다.
"먼저 후퇴하라니까!"
"······ 그쪽이나."
아이작은 성녀를 엎고 연신 이자벨라에게 후퇴를 권했다. 미궁의 입장자들은 '후퇴'하는 순간 다시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쇠고집이었다.
말로는 설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작은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젠장, 대체 저 괴물은 뭐야? 왜 우리를 쫓아오는 건데?"
"사막여왕."
"뭐?"
"······ 우리를 쫓아오는 건, 사막여왕."
"사막여왕? 파이살메르의 여왕? 네 고향?"
일전 데미갓 특성 던전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말했다.
분명히 사막여왕이라면 파이살메르의 주인이다. 그리고 이자벨라는 파이살메르의 주민이었다.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쫓는 거야."
"너를? 왜?"
"내가 뱀공주니까."
"여왕의 딸이라고? 그런데 종족 자체가 너무 다른 거 아니냐?"
"······ 시간이 없어."
이자벨라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뉘어지자. 내가 내간을 벌게."
"개소리하지마라. 저런 거 상대로 혼자 시간을 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개죽음이다. 아이작은 뒤를 따라오는 사막여왕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 그것은, 분명히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을 초월한, 어쩌면 괴물조차도 초월한 무언가.
진짜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니까.
후퇴하고 싶지만 성녀가 걸린다.
성녀 세아를 두고 가면 그녀는 저 괴물에게 처참하게 찢겨죽는다.
그리고 아직 란돌프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황금빛 워프를 통해 사라진 란돌프가 생존해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한 번 후퇴했다간 이곳까지 도달하지 못할 터. 그러기엔 황금률의 조각이 너무 부족했다. 그를 두고 도저히 후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넌 다쳤잖아."
이자벨라가 아이작의 허리춤을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여왕의 습격에서 아이작은 허리를 관통당했다.
주요 장기나 뼈가 다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출혈상태다.
그러나 상처를 치료할만큼 상황은 여의치가 않았다.
"뱀공주!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느냐?"
"호오. 진짜 뱀공주로군. 파이살메르의 배신자!"
······ 바바리안들.
그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하나같이 뱀공주를 언급하며 살의를 보이고 있다.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고향에서 쫓기는 신세였어?'
여왕까지 쫓는 걸 보면 대체 무슨 짓을 벌인건가 싶었다.
단순한 도둑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이자벨라 역시 순탄치는 않은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질감마저 느껴지지만, 진퇴양난이었다.
"빌어먹을 대머리 변태새끼들. 오냐! 오늘 끝장을 보자! 덤벼 개새끼들아!"
아이작은 기절한 성녀를 내려놓고 검을 들었다.
이자벨라 역시 반대편을 보며 경계했다.
이윽고.
-내 귀여운 아이야. 너는 영원히 나의 것이란다.
······ 사막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피부가 벌어져 마치 날개처럼 펼쳐졌다.
얼굴도 반으로 찢어지며 수많은 가시가 보였다.
저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아이들을 잡아먹은 괴물. 피를 탐하는 악귀다.
공주라 불렸던 자들은 모두 여왕에 의해 죽었다.
여왕이 영원불멸하여 도시에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자신 역시 여왕에게 먹힐 운명이었다.
-내가 무섭니? 이리오렴, 이자벨라. 말 잘 듣는 아이 아니었니?
말을 잘 들으면 오래 살 수 있다.
유능해보이면 조금 더 생명이 연장됐다.
철저하게 가면을 쓴 채 인형처럼 명령을 이행했다.
가라면 가고, 죽이라면 죽였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성각자를 만나며 다시 도주의 꿈을 꾸었다.
지긋지긋한 여왕을 벗어나고자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명령을 어겼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선택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분명히 성공했는데.
드디어 벗어났는데.
······ 왜 아직도 몸이 떨린단 말인가.
-이 미궁은 재밌단다. 옛날 기억을 나게하는 곳이야. 그러니 반드시 이곳을 내가 가져야겠다. 그러려거든 너가 필요하단다, 이자벨라.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내가······ 왜?"
-너의 신비. 그 뱀의 신비엔 숨겨진 효과가 있단다. 그리고 이자벨라, 너 역시도 아주 특별한 재능을 지녔지. 나와 영원히 함께하는 모든 아이들보다도 너는 특출나단다.
이자벨라가 몸을 떨었다.
결국, 자신을 먹겠다는 말이다.
여왕은 절대로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영원토록.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쫓아올 것이다.
저 괴물과 바바리안들이. 사막의 모든 게.
끔찍하게 싫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이 둘은······ 놓아줘. 얌전히 있을 테니까."
-당연하다마다. 내게 필요한 건 너뿐이란다. 너만 있으면, 이 미궁의 주인은 내가 될 수 있어. 귀찮은 사왕 떨거지도 죽일 수 있지.
······ 사왕?
사왕이 미궁에 있다고?
그럼 저 모습이 된 게 설마 사왕 때문인가?
사막여왕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절대 인간의 모습을 벗지 않는다. 그럼에도 벗었다는 건 그만큼 강한 적을 마주했다는 뜻이었다.
만약 사왕을 마주해 저 상태가 된 것이라면.
······ 사막여왕은,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 이리오렴.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날개 같은 가죽을 더 펼쳤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
몸이 떨리고,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모습으로 아이들을 잡아먹는 걸 먼발치에서 몇 번이나 봤기 때문이다.
무섭다. 두렵다.
하지만, 아이작과 성녀를 살리려면 이 수밖에 없다.
이자벨라가 천천히 발을 떼려는 찰나.
"웬 커다란 가오리 한 마리가 미궁에 있군."
"······ 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가오리라니.
지금 사막 여왕을 뒤에서 보면 비슷하게 생겼긴 하겠지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고서야!
잘못 들은건가 싶었지만, 곧이어 사막여왕의 등 뒤로 그가 나타났다.
"말하는 가오리야, 적당히 하고 비키거라. 언제까지 길을 막고 서 있을 셈이냐?"
순간 현기증이 났다.
아이작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란돌프.
그가 거대한 황금 고블린의 머리 위에 앉은 채, 언제나와 같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으니까.
너무나도 찬란한
'왜 탈출하지 않은 거지?'
추적의 기물을 사용하자 아이작과 이자벨라의 위치가 떠오른다.
그렇게 멀지는 않은 장소.
하지만 의아한 일이었다.
습격에서 벗어났다면 그 즉시 탈출해도 모자라거늘.
추적의 기물 위에 떠오른 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허나 탐욕은 미궁의 지리에 훤했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최적의 길을 찾아 순식간에 둘을 따라잡은 이후 거대한 가오리 한 마리를 목격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리안들. 사막 여왕이로군.'
바바리안들이 따르는 괴물이라면 필시 사막 여왕이다.
이자벨라를 목격한 사막 여왕이 사력을 다해 둘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마혈족이라······.'
인간으로 둔갑한 채 피부를 열어 날개처럼 보이게끔 하는 괴물.
흡사 가오리처럼 생긴 저것은 흡혈족 중에서도 극소수라 알려진 '마혈족'이 분명했다.
마혈족은 특별한 피를 품은 생명체를 취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종족. 생명을 취하고 남은 껍데기에 알을 낳기로 유명한 악취미를 가진 놈들이었다.
[Lv.12]
그를 증명하듯, 레벨 역시 12다.
붉은색 글씨.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
호적수를 만난 탐욕의 피부표면이 살짝 일렁였다. 사막의 주인과 중첩심연의 주인.
둘 중 누가 이길지 관심은 가지만 패배는 있어선 안 된다.
나는 최대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하고 비키거라. 언제까지 길을 막고 서 있을 셈이냐?"
-······ 나를 그렇게 부른 거니? 가오리라고?
가오리. 마혈족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개한 바다생물과 위대한 마혈족을 동일시에 놓는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본 사막 여왕은 실로 그로테스크하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괴물은 거의 만나본 적이 없건만.
"말실수를 했군. 사과하마."
실수도 이런 실수가 없다.
작게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말하는 신기한 가오리라고 불렀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깟 황금 고블린 따위를 믿고 설치는구나, 아이야.
순간 사막 여왕의 전신이 움찔거렸다.
고작 단어 하나에 발끈하는 게 참으로 인간다웠다.
그때였다.
"도망······ 치십시오, 위험합니다."
겨우 입을 연 이자벨라. 그녀의 전신은 아직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두려운 게다.
미치도록 무서운 것이다.
사막 여왕이.
저 괴물이.
마혈족인 그녀가 자신을 잡아먹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내게 도망치라고 말한다.
몸은 떨고 있지만 각오를 다진 눈빛이었다.
자신을 희생해, 나머지를 살리려는.
-아. 그렇구나. 너가 내 사랑스러운 아이와 사랑의 도피를 한 남자로구나?
내 정체를 깨달은 사막 여왕이 깔깔거렸다.
-성각자라고? 호홋! 순진한 처녀를 속이니까 좋았니? 그런데 너 같은 성각자는 본 적이 없단다. '성각의 낙인'조차 없는 성각자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니?
성각의 낙인?
처음 들어본다.
성각자들 중에 문신을 한 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막 여왕만이 아는 성각자의 특징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별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순진한 아이를 꼬드겼겠지. 저주를 푼 방법은 궁금하지만, 정말로 살려둘 수 없겠구나?
화아아아악!
순간 보랏빛의 심연과도 닮은 기운이 사막 여왕의 전신에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마력을 응집해 만들어진 신비다.
곧이어 탐욕 역시 황금빛의 신비를 발산시켰다.
괴물들에게 있어서 신비란 갈기, 뿔과 같은 것.
더욱 크게, 더욱 치명적이게끔 만들어주는 게 신비였다.
인간의 것과 달리 그 능력 또한 비범했으니.
기선을 제압하고, 상대를 공격하며,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저게 사막 여왕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일 터.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다.
확신해서도 안 된다.
마혈족이라면 다른 신비들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으므로.
-자. 누구부터 죽고 싶니? 특별히 내장을 꺼내어 보여줄게. 팔딱팔딱 뛰는 자기 심장을 보면 감회가 새로울 거란다.
"멋진 신비를 지녔군. 그게 제일 특출난 건가?"
-나는 먹잇감을 두고 최선을 다한단다. 인제 와서 두렵니?
"그래? 그게 네가 지닌 제일 좋은 신비라고?"
-그렇단다. 네까짓 인간은 꿈도 못 꿀 신비지? 자, 이제 끝내자꾸나.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작게 웃었다.
따악!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그 순간.
-···································· 뭐?
신비가 파괴됐다.
동시에.
[Lv.11]
사막 여왕의 레벨이 다운됐다.
사막 여왕이 지닌 저 신비 자체가 그녀의 격을 이루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기야, 인간이 별을 먹어 초월한다면, 괴물들은 신비로 레벨을 올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지금 눈앞의 괴물처럼 말이다.
-아······? 무슨 짓을 한 거니············?
사막 여왕이 당황한 채 사라진 신비를 찾았다.
그러나 파괴된 신비가 돌아올 리 없었다.
영원의 란돌프. 그로 인해 나는 상대의 신비 하나를 무조건 파괴할 수 있으니까.
다만, 신비 파괴는 신중히 행해야 하는 일이다.
상대가 지닌 가장 좋은 신비를 파괴해야만 했다.
제알아서 정답을 알려준 사막 여왕이 고마울 따름.
-내, 내 신비를 어떻게 한 거니? 네가 가져간 거니? 응? 아아!!
좌절하고 절망하는 중이다.
평생을 연마한 신비가 눈깜빡할 사이에 날아갔다.
레벨다운이 될 정도면 어지간히도 신비에 자신의 격을 몰아둔 것일진대.
툭툭.
나는 탐욕의 머리를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탐욕이 손을 뻗었다.
녀석의 손 위에 올라, 천천히 바닥에 내려온 뒤 탐욕에게 말했다.
"알아서 제압하거라.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테지."
-마, 맡겨만 주신다면 반드시 저 간악한 가오리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제압만 해라."
탐욕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신비마저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이라니!
역시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는 모습.
탐욕이 본 나의 가치 안에는 '영원의 란돌프'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수치가 몇인지 모른다.
몇이냐 물어봤으나 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이자벨라에게 다가갔다.
"괜찮나?"
"괘, 괜찮으십니까? 그보다 저 고블린은······."
"내 애완동물이다."
"······ 예?"
이자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산만한 덩치의 황금 고블린을 누가 본 적이 있을까.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고블린이다.
그런 괴물을 고작 '애완동물'이라니.
"그런데 저 바닥에 엎어진 여자는 누구냐?"
아까부터 궁금했던 바를 이제야 물었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기절해있는 여자.
마음대로 내동냉이 쳐진 것 같은데, 저 여자와 함께 도주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대답은 아이작에게서 나왔다.
"세아 성녀입니다."
"······?"
뭐?
세아 성녀?
"그럴 리가."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세아 성녀는 죽었다. 온갖 저주와 함께 마계에 매몰됐다.
마계를 관통하며 얻은 모든 저주들을 그녀가 대신 뒤집어썼다.
그 저주의 총량은, 결코 한 인간의 생존을 두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불가하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콰릉! 콰드득!
사막 여왕과 탐욕이 맞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괴물의 소리는 내게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연히 눈살을 찌푸렸다.
······ 그럴 리가 없는데.
"음."
············ 세아 성녀다.
틀림없다.
별에게서 계승한 빌헬름의 기억.
그 기억속의 얼굴과 지금 눈앞의 얼굴이 일치했다.
뿐만아니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도 틀림없이 세아 성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예상하지 못한 때에 그녀와 재회한 것이다.
"감히 여왕님을!"
"죽어라!"
아이작과 이자벨라도 바바리안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만한 충격은 오랜만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 저주와 붕괴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그런데 왜 미궁에 혼자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살아있냐가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살아있는 거지?'
왜?
누가, 무슨 의도로?
내가 기억하는 대원정 막판의 그 상황에서 세아 성녀를 살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마왕.'
혹, 마왕이 개입한 건 아닐까.
무언가의 의도를 지닌 채 이곳 미궁에 집어넣은 건 아닐까?
"으음······."
때마침 세아 성녀가 짧게 신음하며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툭!
세아 성녀가 그대로 다시 기절했다.
*
탐욕의 전투능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긴 하였다.
레벨은 높지만 겜블 쪽으로 몰려있다면 실제 무력 자체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탓이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을 뒤엎고 탐욕은 사막 여왕을 어렵지않게 제압해냈다.
'제압'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지한 듯 죽이진 않았다.
날개와 같은 가죽을 뜯어내고, 목덜미를 쥔 채 무릎으로 사막 여왕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압이다.
'훌륭하군.'
썩어도 준치라고.
탐욕 역시 심연의 지배자였으니, 전투능력을 의심한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고개를 돌려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이자벨라. 네가 죽여라."
그녀에게 사막 여왕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주었다.
아까와 달리,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두려움으로 떨리지 않았다.
-사, 살려다오.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단다.
"······ 괜찮습니다. 더이상 여왕이 두렵지 않으니까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다된 밥에 숟가락만 얹지는 않겠다는 태도다.
허나 사막 여왕은 이자벨라의 영원한 트라우마였다.
그것을 직접 제거하게 할 셈이었지만, 이미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도리어 이자벨라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 강렬해졌다.
괜찮다는데 억지로 시킬 수도 없는 노릇.
어깨를 으쓱하며 샤티로스의 활을 꺼내들었다.
휘이익!
푹!
-악!
짧은 비명과 함께 공포 효과가 새겨졌다.
무작위 능력치도 10이나 깎여나갔으리라.
휘이익!
푹!
나는 계속해서 활을 쐈다.
화살에 맞을 때마다 무작위 능력치가 깎여나간다.
-머, 멈춰! 제발 멈추렴! 제발! 악!
그것은 실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약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며 죽어간다는 건.
피를 흘리고, 저항할 수 없는 죽음에 몸을 떤다는 건 말이다.
수십발을 쏘아내자, 더 이상 사막 여왕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모든 능력치가 0이 됐으니까.
축 늘어진 채 입하나 뻐끔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서야 사막 여왕은 명을 달리했다.
"'사막 여왕'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업적 '격이 다른 적을 죽인 도전자'를 획득했습니다."
"명예가 200 상승합니다."
"'마혈족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226h를 획득했습니다."
"점수 1,000점이 추가됩니다."
점수 천 점.
이로써 2,350점.
약간 부족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남은 바바리안들도 정리해야겠군."
아직 정리할 놈들이 많이 남았으므로.
*
플레이어 톡의 이용자들은 참담한 심정을 게시판에 토로했다.
-거의 다 로그아웃 한 거 같네
-약한놈들이 낄 자리가 아니니까...
-그라시아는 뭐함? 누구 아는 사람 없음?
-재정비하고 재도전하지 않을까?
-미궁 클리어 못하면 어떻게 됨?
-침식 속도 빨라지는 거 같은데
-미친. 진짜네;; 벌써 13%야?
-하루 사이에 1%가 올랐어???
미궁의 클리어가 지체되자 판게니아의 침식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검성 라일리'가 4페이즈에 돌입한 이후 침식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12%였던 게 13%가 된 것이다.
이 속도면 7일 후 20%가 된다.
-라일리 봉인 해제랑 침식 속도랑 관계가 있나본데?
-20% 되면 2차 침공 시작 아님?
-일주일 뒤에 2차 침공? 너무 빠름
-1차 침공은 란돌프가 막았다지만, 이건 못 막지 않을까?
-마스터 뭐하냐. 매일 센척만 존나 하더니
-타차원 커뮤니티 관리로 바쁨ㅋㅋㅋㅋㅋ
-아니;; 침식 속도 빨라진다고 미리 알려줬어야지. 그럼 로그아웃 안했지;;
-네가 로그아웃 안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ㅂㅅ
차원 침식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플레이어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것을 기회라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 묻히고 있을뿐.
-누가 타차원 커뮤니티에 글좀 올려봐 침식 속도 빨라진다고
-광삭당함
-그걸 왜 삭제해?
-그라시아가 실패했으니까 도전하기 싫은가봄ㅋㅋㅋㅋㅋ
-다른 영웅들은?
-거의 다 미궁 나왔을걸
-다크스타는 사왕 보고 런침
-책임 없는 명예냐? 진짜 염병이네?
-다 같이 공략하면 되는 거 아님? 왜 따로 노냐 걔네는?
-내말이zzzz
-지하 미궁 가는법 대공개 미궁 상인한테 미궁 티켓사서 사방이 막힌 벽 뚫고 들어가면 지하로 향하는 계단 나옴
-그걸 지금 말하면 뭐하냐 이미 다 나왔는데
몇 번이나 재도전 한 플레이어는 있지만 이제는 그조차 멈췄다.
더 이상 미궁에 도전해봤자 조각만 낭비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더불어 남아있는 조각도 모두 형편없는 상태였다.
이제와서 지하 미궁으로 향하는 방법을 알려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누가 사왕한테 지하미궁 가는 법좀 알려줘라
-차라리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덤프트럭에 치이면 이세계로 갈 수 있는데 왜 사왕한테 가서 자살함
-지인이 말해주는데 그라시아 오피셜 떴다. 재도전 할거래
-ㄹㅇ? 와, 그래도 다행이다. 역시 마스터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클라스!
-저거 개구라임 여기서 저런 말을 믿냐ㅋㅋ
그때였다.
-어? 잠깐 이거 실화냐?
-어어? 민초 떴다!!!
느닷없이 모두의 앞에 떠오른 문구 하나.
'민트초코맛있어요'가 검성에게 도전한다는 글이 떠오른 것이다.
게시판이 순식간에 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됐다.
-헐 민초단이 진짜 있었네
-영웅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가라 민초몬!
-솔직히 그라시아보다 민초가 더 강할 듯
-그건 아님
-제발 깼으면 좋겠다
-깨면 오늘부터 나도 민초단 한다
-난 이미 베라에서 민초시킴ㅋㅋ
-나도 민트초코 삼겹살 시켰다
-또 떴다!
-이번엔 또 뭐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어서 떠오른 문구가 하나 더 있었으니!
-유일급 제작?
-유일급 장비가 제작됐다는데?
-누가 제작한 거야?
-...'찬란한 유일급 장비'?
검성 vs 란돌프
재접속한 그라시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미궁이 아닌 대륙.
워프의 앞이다.
강제 퇴장된 것이다.
'거지 같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검성 라일리.
놈이 말도 안 됐으니까.
처음에는 쉬웠다.
세 개의 봉인구를 깨트릴 정도의 타격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문제는 페이즈 4.
족쇄 세 개가 풀린 직후의 일.
'변했다.'
검성 라일리는 족쇄가 풀릴 때마다 변했다.
빨라지고, 강해졌으며, 맷집도 늘어나 조금씩 천검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페이즈 4에 이르러 나타난 변화였다.
극적인 변화. 이전까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그 모습은 분명······.'
손을 쥐었다가 편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된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으므로.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런 준비 없이 깰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준비가 필요하다.
너무 쉽게 봤다.
당연히 이기리라 생각했건만.
물론 그러한 확신은 이미 검성 라일리에 대한 사전조사를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백 명이 넘는 전문가가 달려들어 대도서관에서 라일리의 전설과 신화를 심도 있게 파고들었다. 라일리가 등장하는 모든 내용을 샅샅이 뒤졌다.
이후 조사한 내용을 재현하고 라일리의 검술과 그의 평소 습관까지 모두 파악해냈다.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마련해놓은 뒤 도전한 것이다.
거기에 '푸른 서광'까지 갖췄으니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로그아웃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변수가.
'제국이 끼어든 건 예상 밖이지만, 그들로서도 페이즈 4의 모습은 의외였을 터.'
제국 삼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제국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게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리고 제국이라면 검성 라일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도전한 제국 삼검도 입장하자마자 후퇴하였다.
왜겠나.
검성 라일리의 그 극적인 변화는, 제국으로서도 상정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검성 라일리'에게 '민트초코맛있어요'가 도전합니다."
"페이즈 4가 진행 중입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른 글자들.
······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는 도전자의 이름을 보고, 그라시아는 표정을 굳혔다.
'어디 숨어있나 했더니··· 미궁에 도전 중이었군.'
민트초코맛있어요.
숨겨진 하이랭커다.
절대로 공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하여 심연 미궁에는 도전하지 않을 줄 알았다.
심연 미궁은 정체가 들통나기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으니.
그런데 나타났다.
나타나서, 자신이 진행해놓은 페이즈 4에 숟가락을 얹었다.
'내가 못 깬 걸 네놈이 깰 수 있을 성싶은가?'
어이가 없었다.
가소로웠다.
그라시아는 민트초코맛있어요를 알고 있다.
시체를 다루는 최상위계의 시체술사라는 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놈은 '강시'를 다룬다.
그렇게 시체에 부적을 붙여서 움직이는 자들을 '영환술사'라고 부른다지.
솔직히 그라시아는 강시술이나 언데드나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검성 라일리의 페이즈 4는 그깟 강시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놈도 제국 삼검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로그아웃하겠지.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유일급 장비'가 제작되었습니다!"
이건 또 뭐냐.
"······ 유일급 제작?"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월드 공지.
월드 공지는 세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사건, 혹은 무언가의 등장에만 사용된다.
새로운 유일급 제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은.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유일급 장비를 제작했다.'
저 제작을 완료한 존재가 플레이어라는 것이다.
판게니아인이 유일급의 제작을 하면 월드 공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유일급의 장비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유일급이라 이름 붙은 장비는 개인이 사용하지만 군단과 같은 힘을 발휘하는 탓이다.
또한.
'새로운 유일급. 기존 빌헬름이 떨어트린 재료를 사용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빌헬름이 대원정에서 죽은 뒤 떨어트린 재료들.
그것을 황금률 상점에서 구입하고 사용해, 몇몇 플레이어들이 유일급 장비를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유일급의 장비를 만들기 위해선 '도안'도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새로운 유일급 장비'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말인 즉,
'플레이어가 만든 16번 째 유일급 아이템이다.'
그간 플레이어가 제작했다고 알려진 유일급 아이템은 15개.
그중 여덟 개를 팬텀이 혼자 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정체된 지 무려 1년이 넘었다.
지난 1년간 새로운 유일급 무기나 도구 따위는 전혀 발견된 게 없었다.
빌헬름이 죽고, 그가 만들었던 유일급 아이템을 답습해 그대로 만든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새롭진 않았다.
저 월드공지가 나타난 것도 1년만이라는 의미다.
'누군가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빠드득!
그라시아가 이빨을 갈았다.
원래 저 공지의 주인공은 자신이었어야 했으니까.
히드라곤의 혼.
그거 하나만 구하면, 16번 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혼 하나를 구하지 못해서 늦춰지다니.'
고작해야 히드라곤의 혼이다.
그 혼을 구하려고 히드라곤만 천 마리 넘게 죽였다.
수소문을 해서 안 가본 곳이 없다.
심지어 지구에서마저도 한국을 찾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못 구했다.
다른 건 다 구했는데 히드라곤의 혼 하나를 구하지 못해서 새로운 유일급 장비를 제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저 월드 공지를 보고 부아가 치밀 수밖에.
"강화를 시도합니다."
"제작된 유일급 장비의 가치가 상승합니다."
"강화를 시도합니다."
"제작된 유일급 장비의 가치가 상승합니다."
"강화를 시도합니다."
"제작된 유일급 장비의 가치가 상승합니다."
······.
게다가 제작이 끝이 아니었다.
강화하여 가치가 상승한다는 월드 공지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유일급 장비를 강화하는 미친놈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장비를, 실패확률이 있는 강화에 불태우는 건 정신나간 짓이었다.
빌헬름도 그런 짓은 안 했다.
어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미친 짓이 계속해서 성공하는 중이다.
"'찬란한 유일급 장비'가 제작되었습니다!"
"······."
마침내, 찬란한 접두사가 붙어버렸다.
일반적인 강화가 아니었던 게다.
일반적인 강화였다면 '극진멸참'이 붙었을 터.
아마도 접두사를 붙이기 위해 특수한 강화를 시도한 것이리라.
간혹 그런 장비가 있었으니까. 접두사를 붙여야만 위력을 발휘하는.
다만, 그러한 장비들은 특별한 접두사가 붙었을 때 기능이 극대화된다.
극히 희귀한 경우이고 유일급 중에서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데, '찬란한' 접두사라니······!
그라시아의 동공이 작게 떨렸다.
"대체······ 뭘 만든 거냐?"
*
민트초코맛있어요의 도전에 희망을 건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로 회의적인 사람들 역시 많았다.
-금방 후퇴할듯?
-그라시아도 제국도 페이즈 4 보자마자 도망쳤는데
-민초단 분탕임 어차피 성공 못함
그라시아와 제국이 실패한 걸 어떻게 민트초코맛있어요가 성공하겠느냐는 말이었다.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은둔형 플레이어.
알려진 게 거의 없는만큼 실질적인 성과도 거둔 게 적었다.
명예의 전당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하이랭커들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까가 있으면 빠도 있기 마련.
-드러내길 꺼리는 것뿐이지, 민초 실력은 진퉁이다
-한번 그라시아가 실패한 거 민초가 성공하지 않았던가?
-맞음. 사자심왕 시련 혼자서 성공했잖아
-솔직히 그라시아가 다한 거 숟가락만 올린 거지 올려치긴ㅋㅋ
-그럼 이번에도 숟가락 올려서 성공하는 거 아님?
민트초코맛있어요의 실력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앞선 두 도전자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후퇴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전하고 두 시간 넘어간 거 같은데... 설마 아직도 도전 중인 거?
-이 정도면 죽은 거 같은데
-죽은 거 아님 아직 도전 중이라고 뜬다
-어디서 그런 메시지 봄? 난 안 보임
-미궁에서 방금 로그아웃했음. 미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함
-진짜 2시간 넘게 도전 중이라고?
-찬란한 유일급 그거 민초가 만든 거 아님?
-오... 그럼 진짜 가능할지도?
그라시아도, 제국도 보자마자 도망친 괴물.
그 괴물을 상대로 혼자 두 시간 넘게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확실히 달랐다.
만약 찬란한 유일급 장비를 제작한 게 민트초코맛있어요라면?
그럼, 정말로 성공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의심반, 기대반으로 계속해서 기다렸다.
-...12시간 넘었는데?
-침식률 14% 다 돼간다
-정말 도전 중인 거 맞냐?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실패했다거나, 후퇴했다거나, 다음 페이즈로 넘어갔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침식률은 올라가는 중이었다.
14%에 다다라가는 침식률.
이 속도면 20%까지 단 6일.
-슬슬 2차 침공 대비해야 할 듯
-사람들한테 알려야 되지 않을까?
-앞으로 6일 뒤에 침공 시작 된다고? 백프로 말나온다
-근데 이 속도면 마왕도 당황해서 침공 준비 못하고 있을삘ㅋㅋㅋㅋㅋ
-차라리 마계를 치는건?
-대원정도 실패했는데 무슨 구실로 또 마계를 치냐. 제국이 도우면 몰라도
-빌헬름이나 되니까 그렇게 모은거지 어림도 없다
-기사왕이 좆으로 보이냐? 대륙 전역에서 빌헬름 이름만 듣고 몰려온 기사만 만이 넘었다. 그래도 실패한 게 마계 공략임
-너나 가라. 난 마계 안 간다. 절대로
-ㄹㅇ자살행위임 그럴거면 이세계 트럭이 최고지
-민초는 승리한다
-민초가 이기면 되는데 설레발들은ㅋㅋㅋ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끊임없이 넘쳐나는 글들.
수십, 수백 페이지가 넘어가는 와중에도 공략은 끝나지 않았다.
-24시간... 지났다고
-기어코 14% 넘어버렸네
-안에서 뭔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거야
-누가 제발 좀 알려줘봐 현기증 나려고해
궁금해 죽겠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는 도전자 외에는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
-아...
-아....
-아아...
-그는 갔습니다
-민초도 후퇴했네 결국
장장 30시간 가까이 혈투를 벌이던 민트초코맛있어요가 결국 후퇴했다는 내용의 글귀가 모두의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좆됐다!
-그래도 이 정도면 피 많이 깎였을 거 같은데?
-그라시아 정말 재도전함?
-몰?루?
-정말 찬란한 유일급 장비 만든 게 민초면, 그거 들고도 못 깼다는 뜻 아님?
-준비하자 다들 가족은 지켜야지
-남은 조각 얼마 없는데
-미궁에서 조각 너무 많이 씀
-오바다;;; 나 조각 10분 남음
-난 다씀
-여기 다들 비슷한 상황이지 않음?
-아니 이럴거면 미리 알려주던가 라일리 공략 못하면 침식 빨라진다고!
-우리 친구는 판게니아 하루이틀 하니?
-진짜 사왕한테 지하미궁 가는 법좀 누가 제발 알려줘라...
-ㄹㅇ그거밖에 방법 없는 듯
다들 검성 라일리의 공략을 포기했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사왕에게 지하 미궁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서 사왕이 라일리를 공략하도록 하는 방법뿐이었다.
살다살다 괴물에게 기도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면 답이 없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대부분 탕진했기 때문이다.
6일 뒤 2차 침공이 시작되면, 강림할 수 있는 플레이어 자체가 너무 적다.
아무리 영웅들이 강하다 해도 지킬 수 있는 한계면적이라는 게 있다.
결국, 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리라.
-내가 가볼게 사왕 좌표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
-미친놈아 사왕이 네 말을 듣겠냐
-스치면 사망이라서 사왕아니었냐ㅋㅋㅋ
-마지막으로 본 게 645.1594 부근 16시간 전임
-599.1432 8시간 전
-더 최근은 없음?
-660.1744 이 주변 계속 배회하는 듯
-딱 봐도 왕복중이네 저기 뭐 있나?
-ㅇㅋ 더 없으면 갔다옴
-무운을 빈다
-진짜냐?
-영웅놀이하네 또
-개구라지ㅋㅋㅋ 또 속냐!
-어 잠ㄲㄴㄴㄴㄴ
-어?
-어?
-엉?
-???
-어라???
-엥?
-응?
-뭐야 이거 내가 본 게 맞음?
-어어어어???!
-아니지?
-도전 안한 거 아니었어?
-잘못 본 거겠지?
-뭐야 미궁에 있었음??????
-실화냐?
-와
-?????????????????
-뭐냐
-진짜로?????
-란돌프?
-란돌프 떴다!!!!!!!!!
*
찬란한 유일급 장비의 제작을 끝마친 뒤.
황금률의 문을 열고,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했다.
그리하여 마주한 검성 라일리의 모습에,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다들 도망쳤던 거군.'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
거대하기 짝이 없는 동체와 비늘. 파충류의 그것과도 같은 황금안이 나를 내려다본다.
"페이즈 4, '지고룡 라일리'에게 도전합니다."
신화가 잘못 됐다.
··· 검성 라일리가 지고룡을 죽인 게 아니라, 지고룡 그 자체였을 줄이야.
찬란한 빛의 옥좌
"히든피스! '황금률의 문'으로 입장했습니다."
"'황금률'에 따라 모든 '검성의 위압'이 반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시야가 넓어집니다."
"재생능력이 대폭 향상됩니다."
"육체의 체온조절 기능이 대폭 향상됩니다."
"마력의 방어능력이 향상됩니다."
"입장해있는 동안 저주(행동 조건추가)에 걸리지 않습니다."
······.
"심연에 가라앉은 '검성 라일리'의 영혼이 다시 육체에 깃듭니다."
히든피스, 황금률의 문.
황금티켓을 자판기에 넣자 변한 건 판매하는 목록뿐만이 아니었다.
황금률의 문을 넘자, 판이 바뀌었다.
모든 검성의 위압을 반대로 적용해 '버프'가 되도록 하는 기능.
"'지고룡 라일리'의 눈을 마주쳤습니다."
"'지고룡 라일리'의 눈에 새겨진 권능 '무작위 행동 조건 10가지 추가'가 황금률에 의해 무위로 돌아갑니다."
귀찮기 그지없는 행동 조건을 추가시키는 권능도 황금률에 의해 막혔다.
흰색과 검은색이 절묘하게 섞여있는 거대한 용.
옛적 신화에서 검성 라일리에 의해 목이 잘렸다고 했으나, 그 전승은 틀렸다.
라일리가 지고룡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지고룡의 눈을 재차 마주했다.
[Lv.??]
레벨이 물음표로 뜬다.
확실한 건 두 자리라는 것이다.
적어도 10은 넘는다는 뜻.
'황금률의 문은 황금 티켓을 넣었던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지.'
탐욕을 동반하고는 싶었으나 '황금률의 문'은 오직 한 명만 넘을 수 있었다.
하여,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경로로 입장해 파티로 도전하느냐, 황금률의 문을 넘어 나 혼자 도전하느냐.
나는 후자를 택했고, 그게 정답이었다.
또한.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앞선 도전자들한테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자세히 보면 지고룡의 전신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었다.
몸통에 3개의 작살이 꽂혀있고, 강제로 쥐어뜯긴 흔적도 있다.
다수가 아니라 한 명한테 저만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도전한 민트초코맛있어요가 남긴 흔적이리라.
그래서일까. 놈은 나를 살피며 탐색하는 중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저건······.'
그때 시선을 끄는 작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닥을 뒹구는, 찢어진 그림 한 장이 있었다.
검성 라일리로 추정되는 남자가 그려진 그림.
그려진지 얼마 안 된 느낌이 드는 걸로 보아 도전자 중 누군가가 가져온 것이다.
보자마자 후퇴한 그라시아는 아닐 테고, 정석적으로 공략을 진행한 민트초코맛있어요도 저 그림의 주인은 아닐 터.
그럼 은여우 가면이 가져온 그림인가?
라일리에게 보여서 정신을 되찾게하고 싶었던 건지.
하지만 은여우 가면은 '사명'에 의해 미궁의 망자를 제거해야한다고 말했다. 라일리를 뒤덮은 심연을 '망자'라고 칭한다면, 그걸 거둬내는 게 사명이었던 걸까.
머리를 털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
"라일리, 오롯이 위대한 검성이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라일리에게 말을 걸었다.
황금률의 문을 넘으며 나타난 문구 중 '영혼이 되돌아왔다'는 내용.
그 내용에 따라, 위대한 검성이라 불렸던 라일리가 정신을 되찾았을 수도 있으므로.
곧장 공격해오지 않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평화.
이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
평화로운 해결이야 말로 21세기의 화두였다.
캬아아아아-!
지고룡이 날개를 펼쳤다.
위압적힌 행태를 보이며 날개를 펼치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력구가 맺히기 시작했다.
평화 협정은 부결됐다.
"···해보자는 거로군."
쾅!
콰콰콰쾅!
콰르르릉!
*
이상하다.
김하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 sns와 유튜브 등을 모조리 검색하여 나타난 결과는 더더욱 이상했다.
"모든 워리어들이 활동을 멈췄어······?"
"그게 무슨 소리야, 김원?"
옆자리에 앉은 서정아의 물음에 김하나가 엄지를 한차례 물어뜯곤 입을 열었다.
"워리어들 중에 지금 활동하는 사람이 없어요."
"에이, 착각이겠지. 방금 전까지 카톡·········을 아무도 안받네?"
핸드폰을 열고 확인한 서정아가 이맛살을 구겼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상대들이 갑자기 답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서정아는 '김하나와 커피 한잔'을 조건으로 한국의 남자 워리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답장을 해오던 그들 모두가 한순간에 대화를 멈춘 것이다.
'얘네들이 미쳤나?'
물론 김하나는 이 조건에 대해 모르지만, 알고 있는 서정아로선 정말로 의아한 일이었다.
실시간으로 답장해오던 놈들이 하나같이 빠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언가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거 같아요."
"집중한다니? 뭐에?"
"워리어들은 특수한 상황에 대해 미리 알고 있잖아요. 마치 누군가가 고지를 해주는 듯이."
"그런 썰이 있기는 했지."
"모든 워리어들이 정신을 집중해야할만큼 커다란 일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일전의 침공처럼?"
김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모든 워리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활동을 멈췄다.
이 비슷한 적이 과거에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침공의 순간에.
하지만 그때는 라이브 방송을 켜놓는 워리어들이 꽤 있었다.
결과적으로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워리어들 모두가 침공에 대해서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는 게 정론이었다.
김하나가 의문 하나를 더 꺼냈다.
"그라시아가 한국을 왜 떠났을까요?"
"침략 끝났으니까 본토로 돌아간 거 아니야?"
"그라시아에게 가려졌지만 상당한 숫자의 워리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한국을 떠났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흠···."
"떠나기만 한 거면 좋은데 하나같이 잠적했잖아요."
떠난 자들.
그라시아를 포함한 영웅들.
그들 모두가 잠적했다.
이로 인해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람은 김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구글에 검색하자 관련된 기사들이 주루룩 떠올랐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갑자기 사라진 영웅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메이저 언론사에 실리지 않았을 뿐, 의문을 감추지 않고 기사화한 기자들은 해외에도 많았다.
뿐만이 아니다.
'박현명씨를 분명히 공항에서 봤어.'
잘못봤을 리가 없다.
박현명. 그가 공항을 나서는 걸 분명히 봤다.
심지어 그라시아와 같이 SGBAC으로 들어갔다.
SGBAC은 전용기를 타는 VIP들을 위한 출항공간.
설마 박현명이 숨겨진 재벌가의 아들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현명씨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퇴사한 평범한 일반인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전용기에 탄다고?
어쩌면, 생각보다 엄청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라시아도, 박현명도, 그리고 수많은 워리어들도 해외로 향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다발적으로.
왜일까?
툭!
김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찾아보죠."
"뭐를?"
"워리어요.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우리한테 제대로된 대답을 해줄 워리어가 있을까?"
"있어요. 분명히. 하지만 집단에 속한 워리어는 안 돼요. 개인. 철저한 개인을 찾아야만 해요."
"그런 게 있어······?"
있다.
자신에게 영웅들이 가짜라는 걸 몰래 메모지에 적어서 알려준 누군가처럼.
말 하고 싶으나, 말할 수 없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아야한다.
은둔자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숨어있는 자들을.
*
마스터가 미궁에 다시 입장했다.
'란돌프. 놈이 라일리에게 도전했다고?'
참을 수가 없었다.
란돌프란 이름을 가진 다른 누군가일 가능성도 있지만,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했다면 그건 분명히 팬텀일 터.
녀석에 의해 칼을 잃었다.
갈고 닦은 칼. 숨겨놓았던 수들이 심연에 매몰되어 몰살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판게니아.
"미궁 상인에게서 필요한 걸 모조리 쓸어와라."
"예."
"따르겠습니다, 마스터."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미궁을 돌며 미궁상인에게서 특수한 물건을 구매했다.
바로 '조건 추가의 거울'이다.
'상대의 이름을 알고, 미궁에 입장해있다면 거울을 쓸 수 있다.'
이미 미궁에 도전한 대다수의 도전자들이 로그아웃 한 상황.
미궁상인은 곳곳에 넘쳐흘렀다.
그들을 찾아 조건 추가의 거울을 모조리 매입했다.
이어 열 개가 모였을 때.
<'조건 추가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조건 추가의 거울'을 사용할 상대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열 개의 거울을 사용해, 열 개의 조건을 추가한다.
한순간에 추가되면 놈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은 팬텀의 실책이다.
오만한 놈.
마스터가 웃으며 말했다.
"란돌프."
<'란돌프'가 미궁 내에 존재합니다.>
아!
역시. 놈이 있다.
아직도 있다면,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팬텀뿐일 터!
마스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조건'이 추가되지 않습니다.>
<'저주 불가' 상태입니다.>
"······."
마스터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
주변이 폭사한다.
쉴 새 없이 폭발하며 지면이 뒤집혔다.
하지만, 지고룡의 공격은 내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찬란한 빛의 옥좌'가 발현합니다.>
찬란한 빛의 옥좌!
손가락에 낀 반지에서 찬란한 빛이 점멸하며 옥좌의 형태를 띄었다.
그곳에 앉아, 나는 가만히 지고룡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유일급 장비. 모든 것을 쏟아내어 만든 건 바로 이 반지였다.
이 반지는 붙은 접두사에 의해 능력을 달리한다.
[찬란한 빛의 옥좌(찬란한 유일급)]
-먼 옛날, 태양을 떠받든 신이 앉았다고 전해지는 빛의 옥좌입니다.
-빛의 옥좌에 재물을 바쳐 능력을 개방하십시오.
-붙은 접두사에 따라 빛의 옥좌가 가진 능력이 달라집니다.
-현재 붙은 접두사 : 찬란한
-찬란한 빛의 옥좌에 앉으면 빛이 점멸하는 모든 공간의 공격을 무효화시킵니다.
-'찬란한 광명(20Lv)'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찬란한 광명' 사용시 접두사가 소멸합니다.
모든 공격 무효화!
내가 옥좌에 앉아있는 동안은 아무리 지고룡이라 할지라도 내게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지름은 2m 정도에 불과하나, 위치고정의 무적기다.
하지만 무한정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시간에도 침식은 계속해서 진행중이었으니.
구오오오오-!
지고룡이 입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이어 브레스를 내뱉었지만 여전히 내게 닿지는 않았다.
"그게 전부냐? 고작 그 정도로 내게 닿을 수 있을 것 같나?"
지고룡을 도발했다.
놈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다.
하지만 브레스마저 통하지 않자, 지고룡이 멈춰섰다.
그리곤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아아아아.
스아아아아아아!
순간 모든 바닥에서 '손'이 나타났다.
심연의 손.
모든 것을 흡수하는 심연의 망령들!
억겹의 손들이 빠르게 옥좌에 도달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빛의 장막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였다.
'앞이 안보이는군.'
문제는 시야다.
심연의 손에 둘러싸여 시야가 가려졌다.
저 공중에서 지고룡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선 패턴을 보겠다는 계획도 물거품이다.'
작게 혀를 찼다.
빛의 옥좌에 앉아 놈의 패턴을 모조리 확인한 뒤 재도전하려는 계획이었다.
활을 쏘고 싶지만, 샤티로스의 활도 모조리 재료로 바쳤다.
가장 좋은 접두사를 띄우기 위해서 말이다.
'찬란한 광명.'
그리하여 얻어낸 찬란한 광명.
20레벨의 스킬이라는 것 외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빛의 옥좌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접두사에 따른 능력은 미정인 탓이었다.
사용하는 순간 찬란한 접두사가 소멸되는 1회성의 스킬.
이걸 사용해야할까?
이대로 시간만 버티는 건 비효율적이다.
지고룡은 내게 자신의 패턴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찬란한 광명(20Lv)'을 사용합니다.>
<오직 찬란했던, 영광스러운 자의 혼을 옥좌로 불러올 수 있습니다.>
<불러온 혼의 격에 따라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빠르게 소모됩니다.>
과연. 사용한 뒤에야 이게 무슨 스킬인지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웅들.
그들 중 한 명의 혼을 불러와 싸우는 스킬이다.
어떤 식으로 작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옥좌로 불러온다면, 아마도 앉아있는 내게로 강림되는 형식이겠지.
찬란했던, 가장 영광스러웠던 존재.
순간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지고하며 위대한,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이룩했던 최강의 존재들!
그중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누구를 불러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겠는가?
격이 다르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라일리와 관련된 옛 영웅들이었다.
검성 라일리와 함께 '6각'이라 불리며 세계를 오시했던 자들.
그들 중 한 명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었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오로지 입으로 전승되어왔을 따름. 정확한 무력 데이터를 갖추지 못한 채로는 도박과 다름없다.
'가장 확실하게 데이터를 갖춘 존재라면.'
있기는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승기를 점칠 수 있는 이가.
바로 나다.
······기사왕 빌헬름.
기사왕 빌헬름이라면, 가능하다.
지고룡과 그 너머마저도.
'빌헬름의 영혼이라.'
그러나 기사왕 빌헬름에게 영혼이 있을까?
아이작과 이자벨라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내가 플레이한, 혹은 모든 플레이어가 플레이했던 캐릭터에게 영혼이 있는가?
그냥 인공지능 같은 건 아닐까?
만약에 있다면 이 몸, '란돌프'의 영혼은 어디에 있나?
'해보면 그만인 것을.'
소환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찬란한 빛의 왕좌'가 죽은 자의 영혼을 소환해내는 메커니즘을 지녔다면 소환 여부에 따라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터.
'어차피 아끼다가 똥 된다.'
내가 플레이한 판게니아는 쓸 수 있을 때 써야 하는 게임이다.
아끼다가 죽으면 초기화되어 날아가는 탓이다.
정말로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게임도 없으리라.
게다가 소환에 성공한다면 클리어할 수 있다.
심연 미궁.
그라시아도, 민트초코도, 제국도 실패한 이 미궁의 정복을!
"빌헬름."
빛의 옥좌에 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환할 수 없습니다.>
곧이어 튀어나온 짧은 문장 하나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무슨 이유로 소환할 수 없는 건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냐.'
아예 영혼이 없는 건지, 찬란한 광명으로는 소환할 수 없는 건지, 혹은 보유한 황금률의 조각이 부족한 것인지 등등 이유는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불친절함의 끝을 달리는 문구에 허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쿠아아아!
쿵! 쿵! 쿵!
바깥이 요란하다. 지고룡이 아직 포기는 안 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놈의 힘이 빠지길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작전이겠으나.
'아직 쌩쌩하다.'
이미 하루를 넘게 싸운 놈치곤 쌩쌩했다.
가만히 시간만 흘러가면 침식률만 높아질 것이다.
빛의 옥좌에서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운율에 맞춰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중 하나.
가장 확실하게 지고룡을 사냥할 수 있는 자.
'그라면, 가능하겠군.'
*
플레이어 톡은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 있었다.
-...내가 본 이름이 정말 맞나?
-미궁에서 란돌프 본 사람 있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냥 이름 도용 아님?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는 도전자의 이름은 직접 정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검성이라 불리는 건 그라시아 뿐이었고, 반대로 민트초코맛있어요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란돌프'라는 이름도 도전자가 정하기 나름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진짜 란돌프가 맞냐'로 불이 붙었다.
-그간의 행보를 보면 란돌프 아닐듯
-ㄴㄴ압도적인 성적으로 올라오고 있는데 처음부터 심연 미궁 도전 안하는 게 이상했긴함
-아니, 생각해봐. 메인퀘스트 6까지 란돌프 본 사람 있음? 그 이름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사람 있냐고?
-동의한다. 다 어디서 조용히 진행했지. 우리가 모르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심지어 1차 침공도 혼자 막았잖아
-그러니까. 그런데 모두가 들어가는 '심연 미궁'에 도전한다? 그간의 행보랑 너무 다르지 않냐?
-1차 침공을 혼자 막을 정도면 이미 빌헬름급 수준으로 성장한 거 아님? 그럼 당연히 심연 미궁 도전할거 같은데
-아오 답답아, 그게 말이 되냐. 빌헬름 급으로 성장하려면 별 다섯 개 먹고 유일급 장비도 여덟 개는 착용해야하는데 그 정도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음
-말이 별 다섯 개지, 빌헬름은 단순한 별 다섯 개가 아니지 않음?
-뭐... 그것도 소문뿐이고 본인만 알겠지. 어쨌든 빌헬름은 대원정 일으키면서 자기 스펙에 대해 대충 말해줬으니까, 그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란돌프는 아직 그 수준은 한참 멀었음. 위험한 모험을 할 것 같진 않아
-그런데 그 '스펙'도 좀 말이 안 되긴 한데. 어떻게 인간이 5성에 유일급 8개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여간 지금 도전한 란돌프는 가짜라고. 괜한 믿음 갖지 말고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나 준비해야함
정론이었다.
란돌프라는 이름은 단순히 혼란을 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자 사용하는 가명으로 란돌프를 택한 것이다.
왜 하필 란돌프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성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도만 하고 있을 바엔 앞으로 벌어질 '2차 침공'에 대비하는게 여러모로 현명한 판단일 터.
그때였다.
-갔다왔다. 사왕만나고 옴
-미친. 살아있었냐?
-이놈도 가짜네
-진짜 갔다옴. 생각보다 말이 통하던데? 내가 미궁 티켓도 갖다가 바치니까 기특하다고 팔 하나만 잘라갔어
-어케 살았누
-저새끼 사람인척하는 언데드다 내가 봤다
-잘린 팔 하나는 치료함?
-엘릭서로 치료함. 잘 안붙어서 죽는줄
-너도 한가닥 하는 놈인가보네
-그런데 란돌프가 내가 생각하는 그 란돌프냐? 사왕도 아는 눈치던데
-사왕이 란돌프를 알아?
-그게 무슨 소리냐?
-개소리 왈왈!
사왕을 만났다는 사람의 말에, 모두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사왕이 어떻게 란돌프를 안단 말인가?
혹시 여태껏 진행해온 압도적인 메인퀘스트의 점수들이 사왕과 관련되어 있는걸까?
허나, 말이 안 된다.
크람델의 사주력은 인간을 증오한다.
그들을 마주하고 산 사람은 없다.
그러니 지금 사왕을 만났다는 사람의 말도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사왕이 기특해서 팔 하나만 잘라갔다는 게 말이 안 되므로.
-란돌프 이름 뜨니까 엄청 좋아하던데? 음. 그래서 살려준 것 같기도...
-사왕이랑 란돌프가 관계가 있다고?
-나도 자세히는 몰라. 도전자 이름 뜨자마자 갑자기 껄껄 웃더라고. 그리고 팔 하나 잘라감
-그래도 팔 하나는 잘라가네...
-잔악무도한 새끼...
-기분이 엄청 좋아야 팔 하나 잘라가는구나
-대체 무슨 관계인거지?
-그럼 그동안 란돌프가 크람델에 있었다는 말인가?
-크람델에 있었으면 아무도 모를 만도 하네
-인간이 어떻게 크람델에 들어가냐ㅋㅋㅋ말이 되는 소릴
크람델은 인간이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도시다.
그곳에 란돌프가 들어가서 사왕과 관계를 맺는다?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들의 개념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란돌프라면, 그 팬텀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라?
-뭐냐 지금?
-너희들도 봄?
게시판 전체가 다시 물음표로 도배가 됐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공지 때문이다.
-누군가가 미궁 속에서 신화의 완성에 도전한다는데?
-뭔 신화가 완성된다는 거야?
-...??? 무슨 말이야 대체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임?
*
"'검성 라일리'의 영혼을 소환했습니다."
"'찬란한 빛의 옥좌'에 어울리는 명예로운 자입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500배 빠르게 소모됩니다."
"히든 퀘스트 : '실패한 신화의 완성'이 시작됩니다."
옥좌로 소환한 건 다름아닌 검성 라일리였다.
심연에 가라앉았던 그의 영혼이, 황금률의 문에 의해 다시 나타났다는 문구.
그 문구를 떠올리곤 라일리를 소환한 것이다.
「지고룡······.」
목소리가 들린다.
검성 라일리, 그가 마치 내 머릿속에서 말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용이었다.
지고룡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존재.
하지만 인간이기도 하였다.
반인반룡.
용의 피를 이은 인간 말이다.
「나의 반쪽, 나의 저주여.」
그러나 용의 피는 항상 라일리를 괴롭혀왔다.
피는 막강한 힘과 재능을 주어 검성의 칭호까지 갖게 해주었으나, 용의 피에 눈을 뜰때마다 주변의 모든 게 초토화되었다.
용의 피는 라일리에게 있어서 저주였다.
분리하려 하였으나, 끝끝내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6각의 동료들이 힘을 합쳐 제압해주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용이 되어 파괴를 일삼았을 것이다.
저 저주의 형상은 그의 실패를 뜻한다.
'다른 6각의 영웅들에 의해 만들어져 와전된 신화. 라일리는 그 신화를 완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실패한 신화의 완성'이었다.
「저 저주가 눈앞에 있다는 건 심연 그 자체가 되기 직전이라는 뜻이겠지.」
라일리는 심연에 가라앉았다.
이후 자신을 봉인했다.
마지막 봉인을 지키는 것으로 '지고룡'이 되는 걸 택했다.
그 정도로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될 수는 없다는 강한 의지.
"걱정하지 마라. 도시가 침식되는 일은 없을 테니."
캬캬!
헬이 어깨에 앉았다.
처음 지고룡의 등장에 떨더니, 이제는 적응이 완료된 모습.
헬이 이곳에 있는 이상 침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헬이 '거부'한다면, 워프로 인한 침식은 일어날 수 없다.
「과연······ '천상인'과 '심연 그 자체인 자'가 함께 만든 작품중 하나로군. 거기에 '빛의 옥좌'라······ 너는 누구지? 처음 보는 자일진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말투다.
오랜시간 심연에 잠식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궁금한 건 많지만.
"잡담 나눌 시간 없다."
시간이 없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녹고 있다.
그것도 500배로 빠르게.
소유한 조각이 1,500시간넘게 있으니 적어도 3시간 이상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내게 몸을 맡기거라. 나의 저주를 내 손으로 끊겠다.」
"내가 한다."
「아서라. 너는 검사 클래스조차 아니지 않느냐? 설령 검사 클래스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나의 '용검사'의 격에는 미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능력을 다룰 수 있다는 말.
인정한다.
그보다 그의 능력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내게도 기회였다.
'용검사. 한번도 등장한 적 없는 클래스다.'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클래스.
진정한 반인반용의 라일리만이 지닐 수 있었던, 격이 다른 이름.
그러나 이미 나는 '별의 계승자'라는 클래스를 지녔다.
한 사람은 한 개의 클래스만을 지닐 수 있다.
나중에 클래스를 초월시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골자가 되는 이름은 하나만 소유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게 맡겨라, 검성 라일리."
「주도권은 너에게 있다. 허나 잘 생각······ 음?」
스으윽.
순간, 내 손 위로 비늘이 덮힌다.
지고룡의 것과도 같은 비늘이.
곧이어 피부 표면으로 피가 올라오며 붉은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히든 특성 '올마스터'에 의해 일시적으로 '용검사' 클래스로 적응합니다.>
<'검성 라일리'에게 인정받으면 '용검사' 클래스를 계승할 수 있습니다.>
<스킬 '드래곤 소드(10Lv)'를 사용합니다.>
<'용검사' 클래스에 의해 검의 숙련도 제한이 26Lv까지 해제됩니다.>
<'검성 라일리의 혼'에 의해 숙련도가 최대치까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보정됩니다.>
<'검성의 위압'에 의해 능력치가 추가됩니다.>
······.
···.
끊임없이 떠오르는 글귀들.
적응을 완료한 뒤, 붉은기운을 띠는 드래곤 소드를 휘두르자.
잔상과도 같은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검의 숙련도 20레벨을 돌파하면 나오는 특유의 기운.
하지만 단순히 레벨에 도달했다고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검기를 피워내기 위해선 특별한 요령도 필요하다.
제대로 검과 일체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저 적응했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게 결코 아닌.
오롯이 스스로 도달한 자만이 가능한 강자의 증표!
「······ 어이가 없군.」
그것을 본 검성 라일리가 경악했다.
날아보자
검기(劍氣)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갈고닦아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검기를 피워내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검사가 대부분이었다.
10년, 20년을, 그 이상을 수련한 자조차도 깨달음 없이는 피워내는 것이 불가능한 게 검기이건만.
그것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피워내고 있었다.
'저자는 검사조차 아니지 않은가. 헌데······.'
검사 클래스를 보유하지 않았다.
검의 숙련도 자체가 얄팍하고 낮다.
검기는커녕 자신의 스킬을 다루는 것도 불가능해야 정상이다.
'검사만이 검기를 피워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나.'
물론 검이 아닌 창이나 활에서도 검기를 피워내는 자들은 있었다.
극의(極意)를 이루어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자들.
'그조차도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눈앞의 남자는 그 어떤 무기의 대성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검성 라일리.
그는 상대의 실력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예컨대 숙련도의 레벨 따위를 말이다.
진정한 강자는 높은 숙련도와 함께 깨달음을 이룬 존재라 여기기에, 단순히 육신의 레벨만 높인 종자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왔다.
그리고 그런 라일리가 보기에 이 남자는.
'······형편없다.'
형편없었다.
레벨 10에도 이르지 못한 검의 숙련도.
제대로 검을 익히지도 않은 자다.
아무리 자신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검의 숙련도를 최대치로 찍었던들,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할 기지와 깨달음이 있을 리 없다.
자신이 기존에 쥐던 검의 천 배가 넘는 무게의 검을 갑자기 들게 되었는데, 그 검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조리가 맞지 않는 게다.
본래부터 천 배 무거운 검을 들었던 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버거워하며 포기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검기를 피워냈다.
검기를 우연으로 피워내는 일 역시 있을 수 없다.
'검술마저도 그럴까?'
빛의 옥좌와 천상의 정령을 가진 걸 보면 예사롭지 않은 자임은 이제 확실히 알겠다.
검기를 피워냈다면 과연 검술은 어떠할지.
검성.
그는 옛적 검의 정점을 찍었던 자.
하늘아래 검을 맞대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6각의 당당한 일원으로 들어가 영웅이 되었다.
구제국을 떠받든 6각 중에서도 특출나던 자가 바로 그였으니.
「버거우면 언제든지 몸을 넘기거라. 지고룡은 그저 검기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존재. 나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버겁다면 언제든지 고집부리지 말고 주도권을 넘겨라.
자신의 몸을 자신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지고룡의 상대법을 자신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흐음······."
스킬을 사용해 검을 휘두르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본다.
보정되고 추가된 능력치와 라일리의 영혼에 새겨진 스킬.
용검사라는 클래스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다.
전신에 활기가 돋고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몸 상태가 달라졌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적응하는 데 한세월이 걸리겠으나.
"나쁘진 않군."
"'찬란한 빛의 옥좌'에 새겨진 접두사 스킬 '찬란한 광명'을 사용했습니다."
"접두사가 소멸하여 60초 이후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기본유지 기능, 패시브 옵션을 말하는 것이다.
찬란한 빛의 옥좌에 앉아있으면 주변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종의 무적기.
아쉽긴 하지만, 공략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다.
'찬란한 접두사는 또 띄우면 된다.'
······자주 띄우기엔 들어간 재료가 어마어마하긴 했다.
탐욕에게서 강탈한 재물 절반과 신화등급의 샤티로스의 활이 소모됐으니까.
그러나 용검사 클래스를 얻을 수 있다면 본전 이상이다.
'26레벨 숙련도 제한 해제. 미쳤군.'
용검사는 검 숙련도를 무려 26레벨까지 해제해주는 개사기 클래스.
관련된 클래스 없이 보통의 무기 숙련도는 10Lv까지만 올릴 수 있다. 강화하여 극의 이름을 띄운 장비들을 착용해도 10레벨 이상으로 올릴 수 없다.
그동안 굳이 검 숙련도를 올리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극 철검 두 자루가 있기에, 어차피 10레벨 이상은 올릴 수 없으므로!
관련된 클래스를 가지면 보통 15레벨까지 해제된다.
20레벨까지 해제되는 클래스는 거의 없다.
있기는 한데 얻기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그 이상?
'20레벨 이상은 말 그대로 계승하여 얻은 클래스들밖에 없다.'
고유의 무기, 초월한 인간, 혹은 어떤 위대한 존재로부터 계승하여 클래스의 격을 늘리면 가능하다.
숙련도 제한 26레벨이면 계승할 수 있는 클래스들 중에서도 최상급.
여기서 다시 26레벨을 넘으려거든, 관련된 별을 먹어 초월하면 된다.
"푸른 서광은 어디갔지?"
생각해보니 검성 라일리는 유일급의 검을 다룬다고 전해졌다.
바로 푸른 서광.
하지만 푸른 서광의 종적은 묘연했다.
「누군가에게 계승되었다.」
"검성의 계승이 완료되었다는 뜻인가?"
「그래. 내가 인간일 시절 불리었던 칭호와 격의 계승은 끝났다.」
검성.
떠오르는 건 딱 한 명뿐이다.
'그라시아.'
공공연연하게 스스로를 검성이라 부르고 다니는 자는 그라시아밖에 없었다.
푸른 서광을 계승한 게 정말 그라시아라면.
검성으로서의 숙련도 제한 레벨이 몇인지 조금 궁금해진다.
「허나, 그것은 인간을 기준으로한 호칭. 용검사는 심연에 가라앉기 직전 마왕을 상대하며 각성한 클래스다. 아쉽게도 저 껍데기와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했지만······.」
과연.
용검사는 마왕을 상대하며 용의 피를 제어하기 시작했을 때 각성한 클래스라는 의미였다.
결국 실패하고 패배한 뒤 심연에 가라앉았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저 껍데기, 지고룡을 자신이 상대하고 싶어하는 거고.
'어쩐지 생소하더라니.'
라일리는 검성으로 유명했지, 용검사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에 가서 각성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모를 만도 했다.
"20초 이후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양보할 순 없다.
용검사의 계승을 위해선 라일리의 인정이 필요하니까.
「지고룡을 너무 얕봐선 안 될 것이다. 저 용은 피에 의해 파괴본능만이 남은 악 그 자체. 오랜 시간 겪어온 내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
지고룡은 파괴본능만이 남은 껍데기였다.
그럼에도 결국 자기자신일텐데, 악 그 자체라.
「옥좌의 주인이여. 부디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결코 그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검의 길을 걷지 않던 자가 사용하기엔 버거운 그릇이기 때문이니.」
라일리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무시한 채 천천히 몸을 풀었다.
"5초 이후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몸이 떨린다.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기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별로 계승한 빌헬름의 기억.
과연 이 몸으로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구제국의 가장 위대한 6각의 영웅 중 한 명, 검성 라일리.
그의 능력을 빌려 닿을 수 있는 한계가 심히 궁금했다.
나는 검을 양손에 쥐어보였다.
이후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찬란한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빛을 걷으며 나아갔다.
*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구.
저 하나하나가 성벽을 허물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건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심연의 팔이었다.
발 디딜틈 없이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 공격들.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검기로 잘라낼 수는 있으나 비효율적이다.
「심연에 가라앉아 껍데기는 더욱 강해졌다. 저 심연의 팔들은······ 조심해라.」
라일리도 지고룡의 공격 패턴이 익숙하지 않은 듯보였다.
심연의 저 팔들은 본래는 없던 것.
없던 게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빛의 옥좌에 앉아 있으면서, 저 손들의 정체를 파악한 뒤였다.
"지고룡의 신비 '깊은 심연'을 파괴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심연의 수많은 팔들.
역시나.
이처럼 간혹 신비를 숨기고 능력처럼 구는 괴물들이 있다.
능력과 신비를 구분할 수 없게하는 이유는 당연히 숨겨야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궁의 벽에 놓인 것과 같은, 미궁 그 자체의 능력처럼 보이려한 것이다.
'귀찮은 손은 제거됐다. 이제······.'
바닥을 뒹구는 손들만 없으면 움직임도 자유롭다.
쏟아지는 마력구를 검막으로 쳐내며 허공에 떠있는 지고룡을 바라봤다.
'날아보자.'
*
「······.」
라일리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용검사의 능력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지고룡이 심연에서 얻은 신비를 파괴하고, 수많은 탄막을 하나도 빠짐없이 쳐내며, 틈을 찾아, 미궁의 벽을 밟고 날아올랐다.
키아아아!
······ 그리고 지고룡의 날개 한쪽에 긴 검상을 남겼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기에, 라일리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말로는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작해야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육체의 변화에 적응하고, 지고룡의 공격을 막으며, 반대로 공격할 루트를 그 시간 안에 짜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몸의 변화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폭사당해야 정상이었다.
만 명 중 만 명이, 십만 명 중 십만 명이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예외는 없다.
······없었어야 했다.
키아아아아!
지상으로 추락한 지고룡은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지고룡을 중심으로 원형의 화염이 공간 전체에 퍼져나갔다.
충격파와 함께 퍼져나가는 저 화염은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찢어발긴다.
단순히 검기로 잘라낸다 하여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란돌프는 다시 검을 양손에 쥐었다.
그리고.
"후웁-!"
다가오는 화염을 크게 내리쳤다.
그럼에도 충격파와 화염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저 란돌프를 통과해, 지나갔을 뿐이다.
그것을 본 라일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공명···?」
검과의 공명(共鳴)이라니!
검 그 자체가 되어 공격을 흘려냈다.
하지만 저 공명의 검은 검기를 피워낸 이상의 기술이다.
그걸 어찌 검의 길을 걷지 않았던 자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이어서 벌어지는 장면 또한 가히 압도적이었다.
란돌프는 검이 됐다.
그리고 용이 됐다.
그의 전신에 지고룡의 형상이 떠오른다.
잘못본 게 아니다.
검기의 형상이, 마치 지고룡과도 같은 모습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고룡과도······ 공명 한다고······?」
검을 넘어 용검사가 지닌 기질과도 공명하고 있었다.
마왕과 마주하며 라일리 역시 겨우 각성했던 용검사 클래스.
하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용검사란 용과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완벽하게 공명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허나,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신이 이룩하지 못했던 길을, 고작 이 짧은 시간 만에 개척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6각의 일원이며 검성이라 불렸던 자신조차도 넘어서는 재능이라니.
'재능이 아니다. 저건, 재능이라 할 수 없다.'
허나 저것은 단순히 재능이라 설명하기도 부족한 영역이었다.
한 번 경험하고 걸어온 길을 다시 걷는 것과 같은.
창조도, 개척도 아닌, 마치 알고 있는 길을 더욱 빠르게 달리고 있을뿐인 것 같지 않나.
자신이 이제 막 만들기 시작했던 그 길을.
이미 알고 있으며, 완성해놨다는 게.
··················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끝
검성 라일리와 지고룡의 관계.
그 관계는 마치 나와 빌헬름 같았다.
내가 키운 캐릭터였다고는 하나, 내가 아닌.
나라고 할 수 없는 막연한 존재.
라일리가 지고룡을 껍데기라 부르며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는지.
'그럼 나는 빌헬름인가?'
철학적인 물음은 아니다.
그저 내가 키우고 별의 기억으로 계승한 빌헬름을,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일 따름이었다.
현실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라일리 역시 같은 고민을 했으리라.
허나 라일리는 지고룡을 부정한 채 악으로 규정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고민을 접었다.
나는 빌헬름이 아니다.
하지만, 빌헬름이 될 수 있다.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에 도달할 것이다.
'재밌군.'
지금은 그저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게 즐거울 따름이었다.
고민 따위 할 틈이 없다.
이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들.
보정된 육체는 상상만 해왔던 모든 걸 재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했던 플레이와 빌헬름의 기억이 합쳐지자, 나는 오롯이 빌헬름이 되었다.
"'천지개벽'의 '지'를 재현합니다."
공명한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공명했다.
천지개벽의 지(地).
공명하여 모든 공격을 흘려내는 검술.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지고룡의 공격을 상쇄했다.
'더.'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이 환호를 질러댔다.
하지만 부족하다.
'조금만 더.'
한계를 넘어선 한계를 원한다.
이 정도로는 지금 이 해후(邂逅)를 완전하게 풀어낼 수 없다.
그러니까, 더 강하게 나를 몰아 붙여봐라.
'더 해보란 말이다.'
전력을 다해서 나를 밀어 붙여보란 말이다.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내 한계 역시 늘어날 테니까.
하다못해 지(地)를 넘어 개(開)까지.
그 영역에 닿을 수만 있다면, 머릿속의 안개가 걷힐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내 앞에 거대한 용이 있었다.
지고룡.
모든 걸 파괴하는 껍데기이자 악으로 규정했던 그것이 공격을 멈춘 것이다.
'왜?'
왜 멈춘 걸까?
갈증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건만.
이윽고 지고룡과 두 눈을 마주했다.
지고룡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라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생명체마냥.
「그럴, 리가······.」
검성 라일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피에 굶주린 용이 공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용으로 화한 저 지고룡은 파괴행위를 멈춘 적이 없었으므로.
저렇게 지그시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이 현상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고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고룡은 검성 라일리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용검사로 라일리가 각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고룡의 피. 라일리의 저주받은 반쪽은 그에게 수없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검성 라일리는 지고룡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용의 피를 저주받았다 여겼으며, 마음대로 화하여 파괴행위를 일삼는 지고룡을 결코 자신의 일부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6각.
위대한 영웅이었으니.
"라일리여. 그대가 마지막 순간에 용검사로 각성한 것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는가?"
마왕을 상대로 모든 것을 쏟아내서 이뤄낸 각성?
그런건 만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그저, 한순간 라일리는 받아들인 것이다.
지고룡을.
저주받은 피의 힘을 사용해서라도 마왕을 막고 싶었으니까.
「······ 내가 문제였다는 말인가?」
"그대가 외면했기에, 그대의 반쪽은 세상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문제가 아님에도.
라일리는 자신의 반쪽을 악으로 규정해왔다.
갈라진 피, 갈라진 자아.
극명하게 나뉘어버린 그것은 제대로된 학습을 할 수 없었다.
모든걸 라일리의 반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애당초 인간의 사회에서 용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용은 인간들의 두려움을 먹고 공포를 부르는 자가 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인 즉.
'용검사도 반쪽이었군.'
용검사.
용의 피로 말미암아 검성의 기술을 사용하는 클래스.
지금 이것 또한 반쪽이라는 의미다.
결국 라일리는 제대로 용의 피를 사용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렇게 이룬 반쪽짜리 각성.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지고룡에게 닿았다.
수없이 공방을 오가며 어느덧 나는 지고룡과 공명하고 있었다.
용검사의 기질, 설령 반쪽짜리 각성이라 할지라도 지고룡과 공명하기엔 충분했으니.
「이건······?」
그러나 이번 공명의 대상에는 라일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육체를 매개체로 라일리와 지고룡 모두를 묶어버린 것이다.
쩌어억!
동시에 지고룡의 몸이 돌처럼 굳어간다.
툭! 투두두둑!
굳은 몸이 분쇄되어 하나, 둘 떨어져내렸다.
지고룡은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마지막 봉인으로서의 의무가 끝났음을 깨달은 채.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었음에 만족하며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지고룡과 공명했습니다."
"'용검사' 클래스가 '용기사' 클래스로 격상합니다."
"'용기사' 클래스를 계승했습니다."
"'용기사' 클래스에 의해 검의 숙련도 제한이 28Lv까지 해제됩니다."
용기사 클래스로의 격상!
라일리가 아닌 지고룡에게서 계승을 완료했다.
용기사 클래스를 확정적으로 얻은 셈이다.
"마지막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강제침식이 시작됩니다."
지이잉.
순간 거대한 워프 하나가 열렸다.
워프의 반대편에 보이는 건, 지구.
지구의 어느 거대 도시가 보인다.
캬캬컄!
하지만 워프는 정지되었다.
헬이 워프를 통한 침식을 거부한 탓이다.
허나 마지막 시련이 남아있었다.
심연 그 자체인 자.
저 시련을 넘어서지 못하면 침식은 그대로 진행될 터.
"내가 틀렸다면······ 증명해다오."
어느덧, 지고룡이 있던 자리에 라일리가 있었다.
심연 그 자체가 되기 전에 라일리의 영혼이 육체를 움직인 덕이다.
지고룡과 마찬가지로 자멸할 수도 있으나, 그 전에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방금 전의 공명을 통해 알게된 지고룡의 의지. 그 의지가 사실인지. 자신이 진정으로 틀린 것인지를.
"그대. 이름은?"
라일리가 이름을 물었다.
지금의 나는 순수히 별의 기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답해야할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
"빌헬름."
"명호는?"
"기사왕."
"과연. 그리 불렸는가!"
라일리가 껄껄 웃었다.
이제는 이해가 된다는 듯.
그 짧은 시간에 보여준 기예는 마땅히 기사왕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
이후 똑같이 드래곤 소드를 오른손에 만들며 말했다.
"기사왕 빌헬름. 검성 라일리가 대결을 청한다. ······여기서 끝내기엔 그대도 아쉽지 않나?"
"당연한 말을 묻는군."
"역시! 옛적에 만났다면 우린 좋은 동료가 됐을 거다."
"옛적에 만났다면 너는 심연이 아니라 땅에 묻혔을 거다."
"하하! 그것도 좋았을 것 같다. 그러니······."
호쾌하게 웃던 라일리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서늘하게 변했다.
"······ 승리하는 자가, 옳은 것으로 하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
-5페이즈...
-5페이즈.....실화냐?
-심연 그 자체인자? 이게 마지막인가본데?
-란돌프다
-진짜 란돌프야?
-나 지금 소름돋음
-난 팬티 갈아입는 중
-그라시아도, 제국도, 민트초코도 못한걸 란돌프가 해냈다고?
-그야 란돌프가 빌헬름이고 빌헬름은 팬텀이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말이 되나?
플레이어 톡은 순간 반전됐다.
반반이던 여론이 '5페이즈'에 돌입한 순간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진짜 란돌프다.
란돌프가 미궁을 공략하고 있다!
-그래도 마지막 페이즈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앞서서 도전한 사람들이 체력 다 빼놔서 가능했던 거 아님?
-민초가 하루넘게 공략했는데 숟가락만 얹은 거지
물론 여전히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여론은 순식간에 묻혔다.
거의 모든 이들이 환호를 내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봐봐라! 내가 찐 란돌프 맞다고 했제?
-우아아아아아아!!!!!
-진짜가 나타났다!!!!
-엄마! 난 커서 란돌프가 될래요! 엄마! 난 커서 란돌프가 될래요!
-제발! 제발! 제발!
-믿습니다 팬텀신!
-팬텀신이시여! 우매한 가짜들에게 진짜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
쩌엉!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청량한 소리를 냈다.
같은 능력을 지닌 서로의 육체.
오롯이 검술만을 겨루는 실력의 장.
"······ 내가 졌다."
하지만 대결은 길지 않았다.
백합을 채 나누기도 전에 라일리는 검을 거뒀다.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었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낼 생각도 없었다.
허나 라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최선을 다했다. 비록 끝까지 검을 나누지 못한 건 아쉬우나, 이 정도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대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걸."
검을 부딪친 순간, 첫합에서 라일리는 알았다.
아니, 지고룡을 상대할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저게 빌헬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대는 본실력을 숨기고 있다. 지고룡과 나를 상대하면서도, 전부를 내보이지 않아. 본실력을 끌어낼만큼 우리가 강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겠지."
······ 아무래도 라일리는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약해서 내가 전부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인데도.
그저 내가 빌헬름의 전체를 끌어내지 못했을 따름이거늘.
라일리가 천천히 주먹을 쥐어보였다.
"비록 우리는 실패했지만, 그대라면 멸망에게 패배를 안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빛의 옥좌의 주인인 그대는 틀림없이 명예로운 자일 터. 인류의 입장에선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감회가 새롭다는 눈빛.
촉촉하게 추억에 잠겨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비록 자신은 패배했으나, 눈앞의 남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찬.
'낯간지럽군.'
이미 한 번 마왕을 죽였다는 말은 굳이 안 해줘도 될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아직 승리한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도······ 심연 그 자체가 되기 전에 스스로 끝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지고룡의 의지를 전해 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
라일리의 육체가 점점 굳어간다.
지고룡 때와 마찬가지로.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기 전에 자멸을 택한 것이다.
라일리가 웃어보였다.
"내 최후의 최후에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다. 그대와 같은 강자와 마주해서 영광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꼭······."
아쉽다는 음성.
하지만 라일리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툭.
투두둑!
전부 돌처럼 굳고 부숴져 심연에 가라앉은 까닭이다.
시시각각 심연에 침식되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시간이 없었다.
이윽고 라일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심연 그 자체인 자'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강제 침식이 종료됩니다."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용기사' 클래스가 히든 클래스 '용검존'으로 격상합니다."
"'용검존' 클래스에 의해 검의 숙련도 제한이 30Lv까지 해제됩니다."
"히든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 히든 클래스?'
히든 클래스, 용검존!
예상했던 바를 두 단계나 뛰어넘은 자격을 거머쥐었다.
지고룡과 라일리, 둘 모두의 인정에 의해.
어쩌면 라일리가 완성했어야할 극의의 클래스가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오랜 시간을 넘어 내게로 완전하게 계승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습니다!"
"'심연 미궁'이 천공으로 떠오릅니다."
"'미궁도시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미궁도시에 워프가 생성됩니다."
······.
"멀리서 지켜보고있던 백성전의 성좌들이 합류합니다."
"모든 성좌가 당신이 완성한 신화에 주목합니다."
"실패한 신화의 완성! 거짓을 진실로 만든 당신의 행적에 환호를 보냅니다."
"지고룡과 위대한 검성 라일리의 온화한 안식에 모든 성좌가 크게 만족합니다."
"만장일치로 모든 성좌가 보상의 등급을 올리는데 찬성했습니다!"
"생존정산을 시작합니다."
"사용한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에 따라 퀘스트 합산 보상이 달라집니다."
"1,407h 37m을 사용했습니다."
"사용한 시간을 본 몇몇 성좌들이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생존정산
"음."
툭!
"으음."
툭!
"으으음······."
툭!
성녀 세아가 연신 기절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작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기척만 보여도 기절을 시키는 이자벨라의 손속이 잔인하게 느껴진 탓이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그래도 성녀인데······."
그들은 란돌프의 명령에 따라 세아 성녀를 감시하고 기절시켰다.
하지만, 아이작은 차마 성녀에게 손을 들이밀 수가 없었다.
성녀 세아.
그녀는 성녀 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이며 기품있고, 고결한 존재였으니까.
제아무리 아이작이 못 배워먹은 도둑놈이라 할지라도 성녀의 지고지순함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자연히 경배하게 되는 게 성녀라는 이름.
그러나 이자벨라는 그딴 건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했다.
"······."
대답조차 안 한다.
무심하게 성녀만 쳐다보고 있을 뿐.
'점혈법을 배워놓길 잘했네.'
이자벨라의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것을 본 아이작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설마 지금 성녀를 기절시키면서 희열을 느끼는 건가?
'어릴 때는 그렇게 배우기 싫었는데······.'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이자벨라는 과거를 회상하는 중이었다.
어릴 적.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막 도시 파이살메르에 있었다.
헐벗은 아이들과 함께 햇볕 한점 들지 않는 시궁창에서 눈을 떴다.
그곳에서 수많은 아이가 서로 경쟁하며 죽어갔다.
이자벨라는 살기 위해 온갖 잡기를 배워야만 했다.
미칠 듯이 배우기 싫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막 여왕.
그 괴물의 눈에 들어야만 했으므로.
"넌 걱정 안 되냐?"
"······?"
아이작의 물음에 이자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후계자님 말이야. 보아하니 다른 도전자들도 다 실패한 거 같은데."
"안 돼."
"안 된다고?"
끄덕!
이자벨라는 긍정의 반응과 함께 다시 성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걱정보단 명령이 우선이라는 태도.
그야 당연하다.
정말로 걱정이 안 됐으니까.
란돌프의 승리는 이제 이자벨라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사막 여왕을 마주하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 없이, 도리어 비웃고 오시하며 뭉개버린 자.
평생 두려움에 떨며 눈도 마주할 수 없었던 존재를 순식간에 죽였다.
이자벨라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그 사막 여왕을.
신과도 같이 군림하며 사막을 다스려온 제왕을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이작이 작게 혀를 찼다.
'광신도가 다됐군.'
아이작이 보기에 이자벨라는 란돌프의 광신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한한 믿음. 맹목적인 신뢰.
이후 1년의 봉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가 되면 그땐 어찌 될지.
경험상 그러한 믿음의 끝이 보통 좋을 수가 없다는 걸 아이작은 잘 알고 있었기에, 약간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냐.'
그러다가 아이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정말로 란돌프가 심연 미궁을 클리어한다면, 앞으로 펼쳐질 일은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으니.
*
페이즈 5에 돌입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란돌프의 출현을 부정하던 이들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심연 미궁 클리어...
-내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와!!!!!
-란돌프! 란돌프!
-팬텀신! 팬텀신!
-팬텀교는 영원하라!!!
-팬텀교 새끼들 오늘은 게시판 점거를 허락한다
-그라시아 개발렸쥬? 마스터 아무고토 못했쥬? 다크스타 도망치기 바빴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정도면 7영웅 아니라 유일영웅 해야지ㅋㅋㅋㅋㅋㅋㅋㅋ
-영웅이라니. 이 불신한 놈. 팬텀신이시다!
도전자 란돌프가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다는 말.
모든 플레이어가 동시다발적으로 목격한 그 문구에 게시판은 폭주를 넘어 폭발하고 있었다.
-미궁 도시의 지배자ㄷㄷㄷ
-유적 도시가 더 좋냐 미궁 도시가 더 좋냐?
-미궁 도시 여기 구제국 관련 땅이다
-뭐? ㄹㅇ?
-ㅇㅇ지하 미궁에서 구제국 유물 나오더라
-미친;; 구제국 관련 유물이면 다 비싸던데
-먹을 거 없다더니 ㅅㅂ 다 몰래 꿀빨고 있었던 거임?
-당연하지 이미 아는사람들은 조용히 지하 미궁에서 파밍 중이었음
-근데 지금은 전부 강제 추방된 듯
-그래서 유적 도시랑 미궁 도시랑 어디가 더 좋냐고
심연에서 떠오른 도시들은 저마다 지닌 고유의 가치가 다르다.
옛적에 가라앉은 땅이기에 품고 있는 유물이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가 지배한 도시 중에 마스터가 지배한 유적도시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유적을 품고 있었다.
하여 진정한 노른자 땅이라 칭해졌으나.
-당연한 소릴 왜 묻냐. 구제국 땅이 훨씬 좋지
-아르혼 제국이 개쎈 이유가 구제국 땅 다 병합해서임
미궁 도시의 출현으로 순위가 밀려날 것은 자명했다.
구제국의 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지배하고 있는 현 아르혼 제국.
제국이 대륙 제일인 이유가 바로 저 구제국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덕이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님? 제국이 가만히 안 있을 거 같은데
-보호기간 끝나면 두고봐야지... 세력있는 플레이어들도 눈독 들일텐데
-워프 잠가두면 되잖아
-보호기간 지나서도 잠가두면 다시 심연으로 가라앉음
-ㅇㅇ워프들끼리 연결돼서 천공에 떠있는 거니까. 허공에서 연결된 줄 없으면 떨어지는 거랑 같은 이치
-최소 세 개 도시랑 연결해야 유지된다더라
-누가 팬텀신을 건드리는가!!!
-근데 미궁이라 침략하기 빡세지 않을까ㅋㅋㅋ
-미궁 클리어한 거 봤는데도 건드리면 그게 사람새끼냐 금붕어새끼지
미궁 도시가 정말 구제국과 연관되어 있다면 눈독들이는 세력들이 많을 터.
이에 대해 란돌프가 어떻게 대처할지도 궁금증을 모았다.
-아 후련하다 이게 바로 사이다지
-ㄹㅇ영화 한편 다봤다
-그라시아 지금 어떤 표정 짓고 있을지가 제일 궁금하닼ㅋㅋㅋㅋㅋㅋㅋ
-백프로 똥씹은 표정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듯ㅋㅋㅋㅋ
-란돌프 이름 보고 안 믿었을 거 같은데
-민초가 도전했을 때 네놈 따위가 나도 못깬걸 깬다고? 이러고 있었다 무조건
-그래도 민초가 24시간 도전하니까 솔직히 긴장했을 걸ㅋㅋㅋㅋㅋㅋ
-나였으면 창피해서 한동안 얼굴 못 들고 다닌다
-그라시아는 몰라도 마스터는 뻔뻔해서 들고다님
-그런데 란돌프 벌써 그라시아 이상으로 강해진 거임 그럼? 그게 가능한가?
-란돌프는 무적이다. 팬텀은 신이고!
-팬텀신은 전지전능하시다!
-팬텀신!
-팬텀신!
-팬텀신!
*
"백성전의 몇몇 성좌가 당황하고 있습니다."
"미궁의 클리어 점수, 거짓 신화를 완성한 점수, 특히 생존 시간으로 얻은 점수의 합이 성좌들의 예상을 크게 웃돌고있습니다."
찬란한 빛의 옥좌로 불러온 라일리의 영혼.
그의 영혼을 소환한 동안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1,400시간 넘게 사용되었다.
백성전의 성좌들도 그 정도나 사용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하고 있었다.
'생존 보상. 미궁에서의 생존 시간에 따라 보상에 추가 합산되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미궁을 공략하는 점수와 생존한 시간에 따른 점수가 따로 있는 듯싶었다.
혼자서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고, 생존 시간은 더더욱 압도적이니 보상의 등급을 올리는데 차질이 생긴 것 같다.
'성좌가 보상목록의 등급을 올려주는 데에는 출혈이 필요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건 성좌들이 아무 보상이나 등급을 막 올려줄 순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성좌가 가진 무언가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
출혈 없이는 보상 등급을 올려줄 수 없고, 그래서 기준을 넘은 자에 한해서만 선심 쓰듯 등장하는 건 아닐까.
보상의 격이 커지면 커질수록, 출혈 역시 커져서 주저하는 건 아닌지.
'신비를 완성했을 땐 탑에서 획득할 수 있는 보상이 없다면서 성좌들이 따로 보상안을 내밀었지.'
성좌의 보물.
이름 없는 성좌의 머리카락으로 긴고아를 얻었다.
그로 인해 1차 침공직전 아흐람을 성공적으로 봉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번에도 성좌의 보물을 내밀면 되는 거 아닌가?
불현 듯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곤 턱을 쓸었다.
'······ 생각해보니 그땐 보상목록을 업그레이드 한 게 아니라 아예 대체한거였군.'
신비의 탑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목록이 없기에 그냥 메인 퀘스트 점수만 주고 보상을 대체해버렸다.
하지만 이번 심연미궁 공략에선 아니다.
보상을 업그레이드 시켜준다고 말했는데 그 뒤에 점수가 공개되어 당황하고 있었다.
설마 1,400시간이나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뜻이다.
"보상목록의 100단계 업그레이드가 진행됩니다."
"열일곱 성좌의 존재감이 희미해졌습니다."
"새로운 열일곱 성좌가 대두됩니다."
역시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순 없었다.
······ 처음 겪는 상황.
보상목록을 업그레이드 할 때 성좌의 존재감을 유지하는 무언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17명이나 되는 성좌의 자리를 다른 성좌가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설마 성좌 후보같은 것이라도 있는 걸까?
명예의 전당처럼 100순위에 들 수 있는 존재만이 백성전에 들어가는 그런 시스템인지.
'저중에 자주 보이던 성좌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예를들어 행운의 성좌라거나, 탐험의 성좌라거나.
매번 나타나 친근한 성좌들이 저 열 일곱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그런 상념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았다.
곧장 떠오른 메시지들.
마침내 나타난 보상에 온 정신이 쏠렸으니까.
"'온전한 황금률(1)'을 획득했습니다."
"행운 주사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도합 101단계의 보상목록 등급이 올라갑니다."
"아래 여덟 개의 목록 중 두 가지 보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극진멸참의 화신도", "우로보로스의 낙인", "바알 투구", "순혈자 도안", "화신 지그렛의 갑옷", "도리안의 위상", "용암거인의 혼", "람의 눈"
휘유!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떠오른 모든 보상이 최소 신화 등급이기 때문이다.
같은 신화 등급이지만, 샤티로스의 공포보다도 반단계 더 윗급이다.
'온전한 황금률이라.'
게다가 조각이 아닌 온전한 황금률 자체도 처음이다.
나는 천천히 보상들을 살폈다.
'순혈자 도안. 저건 유일등급 도안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띠인 건 나도 처음보는 유일급 도안.
저 도안에는 필요한 재료와 자격 따위도 함께 적혀있을 터.
절로 흥미가 인다.
하지만 도안 외에도 다른 물건들 역시 너무나도 훌륭했다.
'······ 우로보로스의 낙인. 이건 설마 별의 위치를 알려주는 낙인인가?'
여태껏 등장하지 않은 별 중에 하나의 이름이 우로보로스였다.
이자벨라가 지닌 요르문간드 신비와 마찬가지로 같은 뱀 계열의 별.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우로보로스의 이름을 달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신화급 바알 세트 중 한피스가 나왔군.'
바알 투구.
바알이라 이름 붙은 세 개의 세트 무구 중 하나.
다 모으면 유일급 수준의 무력을 낸다고 전해진다.
모아본 사람이 없어서 그저 소문일 뿐이지만.
이 역시 탐난다.
용암거인의 혼은 어떤가.
거인족의 혼이라니, 이 역시 처음본다.
화신 지그렛은 6각의 영웅 중 한 명이다. 그의 갑옷은 대서사에 나올만큼 유명했다.
도리안의 위상, 람의 눈 역시 전혀 꿀리지 않으리라.
'미쳤다.'
탐나지 않는 게 없었다.
하나같이 나조차도 생소한 것들.
이중 두 개를 골라야만 한다.
무엇을 골라야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두 가지 목록을 선택했다.
"보상을 선택했습니다."
"새로운 경험에 의해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아.
'······ 드디어!'
나는 두 눈을 감고 양쪽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지고룡과 싸우고 검성 라일리와 대결을 펼쳐도 오르지 않았던 레벨이!
미궁을 클리어해도 꼼짝하지 않았던 레벨이!
드디어 올라, 레벨 7에 도달한 것이다.
감동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레벨 7이 되면 할 수 있는 게 생기기 때문이다.
"레벨 7에 도달하여 '수련자의 산'에 입장할 자격을 갖췄습니다."
"'메인퀘스트 7 : 수련자의 산에서 숙련도 레벨 15 달성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메인퀘스트 7은 7레벨을 넘어야만 자동으로 시작된다.
오르지 않는 레벨에 설마 영원히 메인 퀘스트 7을 시작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다행히 시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에 앞서 해결해야할 일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황금률의 문을 열고, 다시 동료들이 있는 미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탐욕과 아이작, 이자벨라와 여전히 기절한 세야 성녀가 보였다.
'세아 성녀.'
그중 내 눈은 세아 성녀에게 고정됐다.
이제 그녀를 깨울 시간이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남기고 간 것
별의 기억으로 살핀 세아 성녀의 외관은 거의 일치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른 사람이라 부를 수준은 아니다.
새하얀 백발, 긴 속눈썹, 티 없이 맑은 피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계의 저주로 온몸이 썩었을진대.'
대원정에서 세아 성녀의 역할은 지대했다.
수많은 저주로부터 나와 기사들을 지키는 막중한 역할을 혼자서 해냈으니.
함께한 백여 명의 사제와 그 배에 달하는 성기사 모두가 전멸했음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뒤를 따랐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저주를 혼자 받아낸 탓에 온몸이 썩어 문드러졌다.
전신에서 고름이 흐르고 피부와 내장이 부풀며 도저히 인간의 형상이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가, 가십시오. 앞으로 계속 가십시오. 제 목숨을 바쳐 축복하겠습니다!
최후까지 성녀는 의연했으며 아름다웠다.
그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히 귓가에 들려온다.
성녀의 죽음은 확정이었다.
살 수 없다.
그 상황에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살아있다.
기뻐해야 마땅하나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그녀가 살 수 있는 가능성.
'마왕이 살려냈다······.'
마왕.
놈이 개입한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왜?
성녀에게 쌓인 저주의 독기를 제거하고, 피부와 장기를 재생시켜가면서까지 그녀를 이용하려 한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일까.
[Lv. 12]
레벨 12.
있을 수 없는 수치.
인간의 레벨은 10이 넘으면 별을 먹어 초월해야만 한다.
하지만 성녀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태를 쓰고 있지만 그녀는 여신을 받들고 받아들이는 자.
하여, 레벨을 10 넘게 올리는 게 가능하다.
대신 별을 먹어 초월할 순 없다.
이처럼 간혹 인간임에도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는 존재가 있었다.
'느껴지는 저주는 없다.'
유심히 살핀 바 저주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을 뻗어 피부를 만지자 느껴지는 감촉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이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동공을 확인했다.
'······ 적안.'
바뀐 게 있었다.
세아 성녀의 양쪽 눈이 붉게 물들어 있다.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안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럼 다른 것의 눈인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세아 성녀의 눈이 맞다. 동공의 색이 바뀐 건 마계에서의 저주 때문이다.'
그녀의 몸에 저주가 쌓일수록 동공이 붉게 변해갔다.
과한 축복으로 찬란한 황금안을 잃은 게다.
마왕도 저 눈동자만큼은 되돌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눈 안쪽에 새겨놓았군.'
눈 아래에 작게 새겨져있는 저주를 발견했다.
너무나도 작고 하찮아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저주.
아니······.
'저주의 형식을 띤 신비.'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음흉한 마왕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성녀를 바깥으로 내보낼 리가 없다.
'인간에게 적의를 느끼도록하는 신비다.'
오직 그 하나의 기능만을 담은 신비였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아선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
만약 여신교의 성기사들이 그녀를 먼저 발견하여 옹호했다면 미궁에서 대학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다분했으니까.
성기사는 일반적인 기사와도 궤를 달리하는 강자이며 광신도다.
그들의 변질만큼이나 두려운 건 없다.
여신교와 접선 전에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성녀를 생포한 건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영원의 란돌프'가 발동합니다.>
<상대의 눈에 새겨진 '신비, 적의'를 제거했습니다.>
신비라면 제거 자체는 쉽다.
영원의 란돌프는 그야말로 모든 신비 중 하나를 파괴하는 권능과도 같은 힘을 지녔으므로.
도리어 찾고 발견하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다.
"세아 성녀를 어떻게 생포한 거냐?"
내가 묻자 아이작이 답했다.
"기, 기절해있었습니다. 누군가와 전투를 벌인 흔적이 주변에 가득했고요."
전투라.
성녀는 레벨이 높아도 전투력 자체는 낮다.
자체적인 축복과 재생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긴 하지만.
누가 제압했는지는 몰라도 여러모로 운이 따른 듯싶다.
아무리 전투력이 낮다 한들 아이작과 이자벨라 둘만으로는 생포하기 힘들었을 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성녀를 기절만 시켜놔서 고맙군.'
세아 성녀를 제압한 누군지 모를 자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일이 크고 복잡하게 돌아갈 뻔했으니.
이윽고 아이작이 내 머리를 쳐다보며 경악에 가까운 음성을 흘렸다.
"그, 그런데 후계자님. 그 모습, 아니, 머리에 쓴 건······?"
아. 이거 말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해주었다.
"바알 투구다."
"투구···요? 투구라기보단 검은 염소탈 아닙니까?"
"겉보기엔 그렇지."
투구라 이름 붙었지만 탈에 가깝다.
그러나 생각보다 착용감이 좋다.
쓰고 있는 줄도 모를만큼 가벼운데다 통풍도 잘 됐다.
생존 정산에서 고른 두 개의 신화등급 무구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쓰고 있는 바알 투구였다.
[바알 투구(궁극신화)]
-먼 옛날,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사흉(四凶)' 중 하나인 '바알'이 착용하던 투구
-'저주 강화' : 저주계열 스킬을 강화합니다.
-'궁극의 저주' : 저주계열 스킬 중 하나를 궁극 강화합니다.
-'저주의 상속자' : 저주계열 스킬 사용 시 마력+10(중첩불가)
-'저주의 이면' : 모든 숙련도가 50% 빠르게 상승합니다.
-착용 시 영구적용
-귀속
-착용 제한(1) : '신화를 완성한 자' 이상의 칭호 보유자
-착용 제한(2) : 모든 능력치 90 이상
-세트 무구(1/3)
-바알 갑옷과 함께 착용 시 성능이 강화됩니다.
-바알 탈리스만을 적용 시 성능이 강화됩니다.
이 설명을 보고도 고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한 줄, 한 줄이 가히 아름다움의 영역이다. 옵션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다.
그리고 내가 바알 투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저주의 이면' 때문이다.
숙련도 50% 상승!
'합이 아니라 곱이다. 손재주와 시너지가 있다.'
히든 특성 '손재주'는 숙련도 상승률을 두 배로 올려준다.
투구로 인한 50%의 상승률이 합쳐지면 3배의 효율을 지니게 되는 셈이다.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손재주와 환상의 시너지를 내는 미쳐버린 투구였다.
샤티로스의 저주는 중첩이 가능했지만 그 외엔 이렇다한 기능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격 자체가 다른 기물.
다음 메인 퀘스트의 압도적인 성적을 위해선 필수였다.
하물며 생긴 것도 '염소'이지 않나.
'은여우 가면은 황금 염소 가면을 쓰고오라고 했지만, 괜찮겠지.'
황금 염소나 검은 염소나 다 같은 염소 아닌가.
사신교가 있는 제국으로 향하려거든 이게 제격이다.
그 외의 성능들도 훌륭했고.
저주계열 클래스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해야만 하는 세트.
조건부지만 마력도 10이나 올려준다. 단일 장비로도 놀라운 수치다.
또한, 저주계열 클래스는 특히나 스킬의 숙련작이 중요한데, 숙련도 상승률을 50%나 올려주는 장비는 유일급을 제외하면 없었다.
피스를 올리면 이 성능조차 강화된다는 뜻 아닌가.
영구적용이라 까마귀의 왕으로 변신해도 유지된다.
그리고 까마귀의 왕이 사용하는 스킬이 바로 저주계열이었다.
무엇보다.
'바알 갑옷, 바알 탈리스만. 두 개 다 어디있는지 짐작은 간다. 수련자의 산과 제국!'
하나는 '수련자의 산'에 있다.
바알 투구가 숙련도를 올려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수련자의 산과 관계가 있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자의 산에서 바알 탈리스만이 잠들어있으리라 짐작 가는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바알 갑옷은 확실하게 제국에 있을 터.
공교롭게도 두 곳 다 어차피 들려야 할 곳이었다.
'바알 세트 세 개를 모으면 유일급 이상의 성능을 내지.'
솔직히 순혈자 도안과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도안이 있다고 당장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료를 구하려고 돌고 돌기엔 시간이 없었다.
이번처럼 운이 좋으리란 보장도 없고, 아예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도박을 할바엔 당장 강해질 수 있는 무구 하나가 훨씬 나았다.
'그냥 바알이라 이름 붙은 것들 자체가 사기적이다.'
물론 이런 저런 고민을 상쇄시킬 정도로 바알 투구 자체도 훌륭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남은 바알 피스도 구하는 족족 성능강화가 이뤄진다.
극악의 레벨링을 고려하면 내겐 한줄기 빛과 같은 세트였다.
게다가 세 피스를 다 모으면 유일급 이상의 성능을 내는데, 사흉이라 불린 바알의 전승된 기록을 읽어보면 완성했을 때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구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사흉.
멸망과 저 사흉의 합작으로 구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을만큼 그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옛 사흉은 지금의 백왕 같은 느낌이지.'
북쪽의 백왕과 남쪽의 흑왕.
그 둘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악명을 떨치던 게 사흉이다.
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바알 투구의 마력옵션 부분을 다시 읽었다.
'조건부 마력상승. 10이면 마의 100을 넘어설 수 있다.'
단순히 숙련작 옵션만을 보고 고른 것도 아니다.
단일 장비로 무려 마력 10.
조건부지만 마력 10의 상승이면 마의 100이라 불리는 능력치 구간조차 넘어설 수 있으니!
'바알 투구와 우로보로스의 낙인. 이 두 개를 고른 것에 후회는 없다.'
아주 만족스럽다.
유일급 도안은 포기해도, 네임드 별은 포기할 수 없다.
그것도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네임드 별이라면 더더욱.
우로보로스.
남자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이름이지 않은가.
콸콸콸!
"컥! 후, 후계자님?!"
아이작이 재차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난데없이 성배의 성수를 성녀의 머리에 콸콸 부어대고 있으니까.
"으음."
곧 세아 성녀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성수를 부어도, 눈은 여전히 적안이었다.
그래도 알게모르게 자잘히 남아있던 저주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눈을 뜬 세아 성녀가 말했다.
"누구시죠?"
나를 몰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란돌프. 기사왕의 후계자다."
하지만, 빌헬름은 어떨까.
그녀가 진짜 세아 성녀라면 반응하지 않을 수가.
"기사왕의 후계자······ 그게 뭐죠?"
······ 음?
예상한 반응과 거리가 멀다.
모른다도 아니고, 뭐냐니.
거짓된 반응은 아니다.
설마 빌헬름과 관련된 기억이 아예 지워진 건가?
걸리는 부분이 있어 되물었다.
"너는 누구인지 기억이 나나?"
"저요?"
세아 성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저는··· 누구죠? 아앗······! 목이랑 머리는 왜 이렇게 아픈 걸까요?"
스스로가 누구인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목이랑 머리가 아파?
나는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
동시에 이자벨라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
한참의 소란이 지나간 뒤.
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비록 기억은 상실했지만, 능력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녀를 얻었지 않나.
'세뇌를 걱정할 바엔 차라리 기억상실이 낫다.'
마왕이 숨겨둔 신비와 저주를 제거했으나 마지막으로 걸리는 게 세뇌다.
내가 가진 신비와 성배로도 세뇌를 풀 순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적의의 신비와 저주의 잔재 따위만 남겨둔 채 마왕이 성녀를 미궁으로 보냈으리란 안일한 생각을 해선 안 된다.
특정 조건에서 특정 행동을 실행하게끔 세뇌를 걸어놨을 가능성이 컸다.
예컨대 여신교, 혹은 성기사를 만나면 그들과 합류해 사람들을 공격한다던가 하는.
'내가 마왕이었으면 무조건 여신교와 관련된 밑밥을 깔아놨을 거다.'
내가 생각한 걸 마왕이 생각 안 했을 리가 없다.
"여길······ 넘어가면 되나요?"
세아 성녀가 눈앞에 놓인 붉은 워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워프는 대륙간 도시를 이동할 때 필요한······ 헉! 제 머릿속에 설명이 떠올라요."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니까."
"아, 그렇군요. 그런데··· 불길해요. 이 워프는 뭔가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 같아요."
지금 우리 둘은 워프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침식을 위해 만든 워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침식은 중단되었으나, 헬이 정지시켜 둔 워프는 남아있었다.
바로, 지구와 연결되는 워프가 말이다.
성녀가 불길하다고 말할 정도의 강렬한 기운을 품은.
'오직 침식을 위해 만들어진 워프다.'
다른 워프와는 확실히 궤가 다르다.
아흐람이 1차 침공을 위해 배치했던 차원 워프에 가까운 느낌.
'확률은 반반.'
넘어갈 수 있거나, 넘어갈 수 없거나.
넘어갈 수 있다면 성녀가 올리버의 심장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
판게니아의 허드슨과 지구의 올리버는 양쪽 다 중요한 인재다.
'나 혼자 미궁도시를 운영할 순 없다.'
이자벨라도, 아이작도 도시 운영과는 거리가 좀 멀다.
앞으로 미궁도시를 운영하려거든 그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내가 미궁에 없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허드슨은 오로지 상재만으로 황금도시에서 자기 이름을 단 도박장을 일군 남자다. 레벨만 10이었으면 진즉에 시의원이 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적어도 돈을 굴리고 불리는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 가장 큰 도박장을 운영했던 실력도 어디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워프를 넘어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넘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더욱이 궁금한 건 이 몸, 란돌프가 지구로 향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지구로 직접 향한 바는 없었다.
그러나 이 특수한 워프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남겨둔 워프. 도전해볼 가치는 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완성될 때 단 한 번 '강제침식'을 일으키는 워프.
없어지기 전에 헬을 통해 일부로 정지시켜놓았다.
도전할 가치는 차고넘쳤다.
캬캬?
"헬. 워프를 정상적으로 가동시켜라."
캬캬캬캬!
헬이 워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수아아아!
다시 파란 빛이 돌며 워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프는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사라졌으니, 그가 만든 워프 역시 사라져야 정상이었다.
유지시간은 길어야 30분.
이것도 헬이 아니었으면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가지."
나는 성녀와 함께 심연의 워프를 넘어섰다.
작가의 말
++04:48 투구의 저주옵션이 삭제되고 세부묘사가 추가됐습니다.
+++ 05:05 글이 전체적으로 다듬어졌습니다.
백왕의 호출
영국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에딘버러.
에딘버러 도시 외곽의 워프 앞.
본래라면 군인들에게 통제되고 있어야 하는 그곳에, 단 두 명의 인원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멜슨이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그러나 올리버는 고집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체 누구와 언제 약속을 했다는 겁니까? 설마 이번에도 그분입니까?"
그분.
지금 성에 있는 남자, 박현명을 말하는 것이다.
멜슨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게임 친구인 줄로만 알았다.
허나 이제는 '단순한 게임 친구'가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생명유지장치에 들어간 그는 몇 날 며칠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그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문제는 표시된 '데이터'였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표시되는 모든 데이터가.'
압도적인 생명력과 재생능력.
근육은 끊임없이 소모되고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진다.
그 외의 모든 수치가 정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어떤 생명체에서도 볼 수 없는 데이터들.
'마치 디맨션 워리어 같이.'
유일하게 그게 가능하다면, 강림하여 변신한 디맨션 워리어뿐이다.
그에 대한 데이터를 받아본 게 있는데 박현명과 매우 흡사했다.
해서 강림한 상태인 줄 알았으나, 멜슨이 알기로 강림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5일 이상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그럼 강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디맨션 워리어의 능력을 내는 건가?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지만 박현명은 올리버 도련님의 손님이었다.
'올리버 도련님도 디맨션 워리어이시지.'
멜슨이 모르는 비밀은 없다.
성과 영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는 알고 있다.
주인을 존중하여 굳이 아는척하지 않는 것일 뿐.
이 워프로 찾아온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리라.
다만, 궁금할 따름이다.
대체 뭐가 이곳에서 나타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쩌어어억!
동시에.
워프가 일렁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아······!"
그것을 본 올리버가 전신을 잘게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목도 한 사람 마냥.
기적을 눈앞에 두고 전율하는 것이다.
*
"로그아웃 되었습니다."
눈을 뜨자, 성이었다.
생명유지장치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후 작게 혀를 찼다.
'예상은 했다만.'
란돌프인 상태로 지구에 돌입하는 게 가능하다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해본 도전이었다.
그러나 넘어오지 못했다.
강제로 로그아웃되며 절단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성녀는? 세아 성녀도 못 넘어온 건가?'
일단 주변에 올리버와 멜슨이 없는 걸 보아, 미리 언질한 대로 해당 워프가 있는 곳에 발을 옮긴 듯싶었다.
그 찰나.
"해당 좌표에서 '침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30분간 '???'을 제거하지 않으면 '강제 침식'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눈앞에 해당 글귀와 함께 지도가 펼쳐졌다.
'저 위치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지형.
······ 넘어오려던 워프가 있는 위치였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만든 워프와 연결된 곳.
해당 워프를 통해 넘어간 성녀를 '침식'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예 다른 게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성녀가 아니라 '무언가'가 진짜로 침식을 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
모든 플레이어에게 이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내가 벌인 문제이니 해결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침식'이 종료되었습니다."
성을 벗어나려는 순간 또 다른 글귀가 떠올랐다.
침식을 일으키는 주체가 돌아가서 종료되었다는 말.
'··· 세아 성녀가 맞나 보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소란은 생기겠지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플레이어가 아닌 판게니아인은 지구로 넘어올 수 있다.'
괴물들이 지구를 침략하듯이 말이다.
다만 판게니아인도 '적'으로 규정되는 것 같다.
설마 시스템 메시지 자체가 제거를 종용할 줄이야.
아니면 침식과 관련된 워프로 넘어와서인지.
하지만 아흐람의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지구로 넘어올 수 있는 워프는 모두 침략과 관계되어있었다.
'그럼 침식률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침식률이 높아지면 지구와 판게니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허물어지는 지, 허물어지고 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알 려진 바가 없었다.
판게니아와 지구 간에 전쟁이라도 나는 걸까?
"흠."
턱을 쓸며 고민했지만, 당장 답이 나올 순 없는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단 세아 성녀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
올리버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워프를 통해 나타난 사람.
그게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성녀······ 세아님······.'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세아 성녀는 여신교의 간판이었다.
미리 이곳에서 대기하면 누군가가 넘어올 수도 있다는 언질은 들었지만, 그게 세아 성녀라는 말은 듣지 못했기에, 아직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뛰었다.
그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거세게.
너무나도 건강하게.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그 순간부터 말이다.
"멜슨. 심장이········· 아프지 않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심장이 고쳐졌습니다."
"설마 방금 그분이?"
"예."
주르륵.
절로 눈물이 맺히고 흘렀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심장이,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촛불 같던 그것이 마침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으니까.
직후 세아 성녀는 떠났지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한 사람 덕분이었다.
란돌프.
심연 미궁을 클리어한 그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런데 선물치곤 너무 대단한 것을 받아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하루하루를 죽음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세렝게티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까.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실과도 관계없는 독자적인 루트를 통했으니, 아무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럼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그런 건 제 주특기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돌아가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멜슨."
"예."
멜슨은 의문을 갖지 않았다.
지금 일어난 모든 일에.
때가 되면 도련님께서 말을 해주리라 믿고 있었으므로.
들어온 길 그대로 둘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한참을 돌고 돌아 증거를 완전하게 인멸한 끝에야 겨우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성에 도착하자마자 지하로 향한 올리버는, 누워있는 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갑작스러운 행동에 멜슨이 기겁했지만 올리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멜슨. 이분은 그저 게임친구가 아닙니다. 저의 심장이며, 제가 영원토록 따라야 할 로드(Lord)이십니다."
"······!"
심장이다.
그 말인 즉, 오늘 일어난 모든 일에 저 한국인 남자가 관계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로드라니.
왕을 따르는 기사라도 된 것 같지 않나.
올리버의 혈기 없던 얼굴엔 어느새 혈기가 넘쳐났다.
누가 봐도 건강한 얼굴.
오랜시간 받들었지만 멜슨도 이런 올리버의 모습은 처음 볼 정도였다.
이어서 올리버가 결연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앞으로 저와 같이. 아니, 저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이분을 섬겨야 할 겁니다. 반드시."
*
올리버의 심장이 치료됐음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미궁도시와 연결할 워프를 찾는 것.
최소 세 개의 땅과 연결해야 다시 가라앉지 않는다.
마침 적당한 후보지가 있었다.
"오! 친구여! 오랜만이군!"
바스락 숲.
하이 드라이어드가 나를 보자마자 반겼다.
"친구가 왔다! 오늘은 축제를 벌여야겠구나!"
"잠깐. 친구여, 그전에 이걸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이건?"
내가 내민 씨앗을 본 하이 드라이어드의 눈이 이윽고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신록의 씨앗 아닌가!"
"그대들의 숲에 선물로 주려 한다."
"신록의 씨앗을 선물로 말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어드는 숲의 성장에 따라 강해진다.
바스락 숲에 신록이 들어서면 레벨과 규모가 동시에 늘어날 터.
미궁에서 황금 티켓을 자판기에 넣고 구매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신록의 씨앗이었다.
하이 드라이어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령을 선물로 준 것도 고마운데 신록까지 받을 순 없다네, 친구여."
"당연히 공짜는 아니야."
"그럼?"
"바스락 숲과 내 도시의 워프를 이었으면 싶군."
"그건 씨앗을 받지 않아도 해줄 수 있는 일일세."
역시 드라이어드.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혐오하는 인간의 도시일 수도 있는데 흔쾌히 허락하고 있었다.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뇌물이라 해두지."
"아무리 그래도······."
"더 거절하는 건 친구 간의 예의가 아니다, 친구여."
"끙······ 알았네. 하지만 신록의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그만한 지력이 준비되어야······."
"그것도 걱정 마라. 심을만한 곳이 있나?"
"있기는 하네만······."
"우선 그곳으로 가지."
"으음. 따라오게."
하이 드라이어드가 석연찮은 얼굴로 앞장서며 안내했다.
곧 너른 공터가 나타났고, 나는 그 중심부에 신록의 씨앗을 심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이 드라이어드가 입을 열었다.
"이 땅의 지력으로는 부족할 게야. 신록이 자란 숲은 모두 하나같이 용맥과도 같은 지력을 품은 곳들일세. 친구여. 실망하게 해 미안하네만, 이 땅은 그 정도의 지력은 품고 있지 않아."
신록이 자란 땅은 몇 곳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엘프들의 땅이었다.
신록을 중심으로 강성해진 그들은 인간들도 범접하지 못할 힘을 얻었다.
하지만 신록이 싹을 틔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땅에서 수많은 '용'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용의 시체가 쌓여 '용맥'이 된 땅이라 신록이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 정도 지력을 품은 땅이 아니었다.
바스락 숲의 규모만 보더라도 숲치곤 그리 크진 않았으니까.
'급속성장.'
그러나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싹만 틔우면 되는 일.
"'신록의 씨앗'이 급속성장합니다."
"'신록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스으으으으.
순식간에 씨앗이 발아하며 뿌리가 땅으로 뻗쳐나갔다.
"허억······!"
그 모습을 본 하이드라이어드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
순식간에 신록이 자라났다.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이 발현됩니다."
"'신록'의 1차 성장이 완료되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5가 되어 더 안전한 성장이 가능해졌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7에 도달하면 신록의 2차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신록의 축복으로 주변 '숲의 종족'의 최대레벨이 +1 상승합니다."
"신록의 축복으로 '숲의 성장률'이 200% 빨라집니다."
오.
신록의 효과가 어마어마하다.
드라이어드들의 최대 레벨 상승과 숲의 성장률 두 배.
바스락 숲이 더 번영할 것이라는 증명과도 같았다.
'엄청나군.'
게다가 바알 투구와 손재주 덕분인지, 신록의 씨앗을 틔우자 레벨이 세 단계나 상승했다.
기껏해야 1이나 2쯤 오를 줄 알았건만.
"치, 친구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이 드라이어드의 놀라움을 뒤로한 채 오다가 주웠다는 느낌으로 짧게 답했다.
"선물이다, 친구여."
*
"'바스락 숲'과 '미궁 도시'의 워프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
남은 건 두 곳이었다.
하지만 고민할 틈이 없었다.
바스락 숲을 다녀온 직후.
까아악! 까아악!
내 위를 날아다니는 시체 까마귀들.
······ 나는 지금 크람델에 있었다.
다시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되어 크람델에 방문한 것이다.
'긴급 호출이라.'
다름 아닌 백왕의 긴급한 호출 때문이었다.
오주력이 되었을 때 받은 '인장'이 미칠 듯이 울려대어, 어쩔 수가 없었다.
긴급 호출은 주력들 모두가 모여야 하는 안건이 있을 때만 발동되는데, 특별한 사유 없이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다.
"란돌프!"
크람델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건 사왕이다.
잠시 멈칫했다.
닭살돋게 왜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게다가 사왕이나 되는 작자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 있을 리는 없고.
······ 설마 입구에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한 번 해보자는 건가?
나는 이미 백왕의 앞에서 내 이름을 밝혔다.
사왕을 포함한 다른 사주력도 함께 들었으니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사왕은 사주력 중에서도 가장 나를 친근히 여겼던 존재.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한들 문제는 상황이다.
크람델의 주인이자 이주력이나 되는 작자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수많은 괴물이 지켜보는 곳.
저 많은 시선을 아랑곳않고 서로 이름을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도 괴물들은 나와 사왕을 번갈아보며 수근거렸다.
"저 까마귀는?"
"쉿. 이번에 새로 오주력으로 등극한 자다."
"아무리 그래도. 사왕께서 직접 기다릴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고?"
"신비의 관에서 백왕을 뛰어넘는 성취를 달성했다는군."
"백왕을······!"
"그럼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혼자서 아흐람을 죽였다던데."
"그 망령왕 아흐람을?"
"별 수호자들도 저 오주력을 데려가려고 신경전을 벌였다던데?"
"미친."
"겉보기와는 다르다 이건가."
다 들린다 이놈들아.
오주력으로 등극할 땐 몰랐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나에 대한 소문이 크람델 전체에 제대로 퍼진 모양이다.
몇몇 잘못된 소문 같은 것도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원래 소문이라는 게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다만, 의연하게 걸어나갔다.
사왕 역시 전혀 개의치 않고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행동이 주변에 어떤 식으로 비치는지 아예 신경을 안 쓰고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란돌프! 가까이서 보니 더욱 반갑군."
"오랜만이다, 까악."
"그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허나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사왕은 명백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대체 뭐에 흥분하고 있는 거지?
백왕이 긴급 호출한 내용과 관련된 걸까?
"무엇이 궁금하다는 거냐, 까악."
"심연 미궁! 검성 라일리를 죽인 게 정말 그대인가?"
아. 미궁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생각해보니 사막 여왕이 사왕을 언급했던 것 같기도하다.
사왕이 심연 미궁에 도전했다면 당연히 내 이름을 봤을 것이다.
뭐라고 답해야할까.
'사실 내가 아니라 동명이인의 인간이라 답해야 되나?'
이름만 같은 인간이라고 답했다간 사왕은 실망할 테다.
하지만 내가 클리어했다고 답한다면 미궁 도시는 영락없는 오주력의 도시가 되고 만다.
백왕 산하, 괴물의 도시.
"그렇다, 까악."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바스락 숲을 워프 연결지로 지정하지 않았나.
도시의 주인이 꼭 인간이어야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백왕의 그늘에 있는 게 안전할 것이다.
크람델도 연결할 수 있다면 그 누가 감히 미궁으로 공격을 들어오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백왕을 적으로 돌리며 그런 짓을 벌일 간 큰 놈은 어지간하면 없다.
크람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리라.
"역시······! 이름을 보고 확신했지. 틀림없이 그대일 것이라고."
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심연 미궁의 주인이 오주력이라니?"
"허. 오주력이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이에······."
"이러면 잡음도 사라지겠군."
"주력의 자리를 노리던 자들도 찍소리 못하겠지."
"백왕보다 강한 건 아니야?"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곳은 크람델의 입구.
수많은 괴물이 오가는 곳.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사왕인데 그가 내뱉는 말들로 인해 나에 대한 오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게 궁금했던 거냐, 까악?"
사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보다, 그대에게서 이전과 다른 흉흉한 기색이 느껴지는군. 이 기색은 설마··· 사흉 '바알'인가?"
바알 투구의 옵션은 다른 투구를 끼지 않는한 계속해서 적용된다.
그나저나, 예외였다. 설마 알아차릴 줄이야.
여기까지 왔는데 숨길 필요는 없으리라.
"맞다, 까악."
사왕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말투로 말했다.
"허. 사흉 바알의 힘까지 갖게 되었다? 그럼 그대의 까마귀들이 많아진 게 바알의 권능 때문이었나 보군."
까악! 까악!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시체 까마귀들.
하지만 평범한 시체 까마귀가 아니다.
바알 투구로 강화되고, 궁극 강화까지 이뤄졌다.
그러자 상급 시체 까마귀들은 내가 사용하는 스킬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상급 시체 까마귀 소환술(2Lv)'을 사용하자, 소환된 11마리의 상급 시체 까마귀가 '일반 시체 까마귀 소환술(10Lv)'을 사용한 것이다.
그로 인해 하늘엔 110마리의 시체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별다른 성력의 추가적인 소모 없이.
이게 바로 궁극 강화의 힘인가 싶었다.
"사흉 바알?"
"그 전설 속 사흉?"
"허어어!"
주변의 소란이 더 커진 건 덤이었다.
괴물들에게도 사흉은 전설인 듯싶었다.
구제국의 검성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겐 사흉이 전설이고 신화인 것이다.
어쨌든 간에.
대략 알겠다.
왜 사왕이 나를 마중나와 있던 건지.
"사왕이여, 까악. 지금 내겐 검성 라일리의 시체가 없다, 까악."
처음부터 '검성 라일리'를 언급한 걸 보면 틀림없이 라일리의 시체의 유무를 물어보고 싶어서 대기탄 게 분명했다.
차마 대놓고 말할 수가 없어서 대화를 빙빙 돌린 것이다.
역시나.
사왕의 어깨가 아주 살짝 늘어졌다.
"음, 그런가."
"지금 없을 뿐이다, 까악. 미궁을 찾아보면 나올지도 모른다, 까악."
미궁에 대해선 아직 완전히 밝혀진 게 없다.
유적도시에서 지금도 계속 유적이 나오는 것처럼, 나 역시 시간을 들여 미궁을 더 살펴봐야만 했다.
사왕이 약간의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즉······?"
"가면서 이야기하지, 까악."
"좋은 생각이다! 긴급 호출이니, 더 시간을 끌어선 안 될 일이지."
신났다.
역시 라일리의 시체에 관심이 지대했던 모양.
미궁을 도전한 것도 그럼 라일리의 시체를 얻기 위해서였을까?
차라리 잘 됐다.
라일리의 시체를 핑계로 사왕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물론 찾다가 나오면 미련 없이 줄 생각이다.
사왕에게 빚을 지어두면 나쁠 게 없으므로.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긴급 호출을 한 건지 알고 있나, 까악?"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러자 사왕이 턱을 쓸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두 가지 안건이 있다는 것 외엔. 아마도 한 가지는 그대의 도시에 관한 것일 거다."
"백왕이 미궁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까악."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만······."
"······?"
"음, 아니다. 그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럼 더욱 궁금하군, 까악."
"으음. 오주력이 되었으니 알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잠시 고민하던 사왕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부끄럽지만 우린 한 인간에 의해 패배를 맛봤다. 그때 백왕께서도 자신의 송곳니를 잃으셨지."
갑자기 빌헬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사주력을 패배시키고 백왕의 송곳니를 빼앗은 건 빌헬름 외엔 없었다.
내가 유심히 듣고 있자, 사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심연 미궁에 그 송곳니가 있지 않겠냐고 삼주력 궁기가 말했다. 우리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으나,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 까악."
"궁금하지 않나? 우리 모두를 쓰러트린 인간이 누구인지?"
"별로 안 궁금하다, 까악."
"······ 역시 그대는 보통이 아니야."
내 이야기를 내가 궁금해할 필요가 없을 따름이다.
그런 태도를 보고 사왕은 새삼 놀라하고 있었다.
다만, 백왕이 아직도 자신의 송곳니를 찾고 있다는 건 의외였다.
'아직 황금률 상점에 백왕의 송곳니가 남아있지.'
무려 천 시간의 조각을 사용하면 살 수 있다.
그만한 가치를 투자하여 백왕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간절하게 찾고 있따면 생각은 해둬서 나쁠 게 없을 듯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우린 백왕전에 도착했다.
*
숨막히는 공기.
모든 주력과 함께 다시 같은 자리에 섰다.
대토룡, 사왕, 궁기, 메두사.
하나같이 정점이라 불리우는 괴물들!
'여전히 살벌하군.'
긴장되긴 하지만 주눅 들지 않는다.
사왕이 반응했듯 이들 역시 내가 미궁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전과 달리 확실히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게 뭐하는 놈인가 싶어하는 눈빛에서, 확실하게 뭐가 있는 놈이다 싶은 눈빛으로.
"다들 모였구나."
백왕이 등장했다.
여전히 백호의 가면을 쓴 채로.
"긴급하게 오주력 전원을 호출한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지체없이 이야기하마."
백왕이 모든 주력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에 이르러 내 눈을 본 백왕.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첫번째 이유는 심연 미궁 때문이다. 오주력, 란돌프여. 그대가 정녕 미궁의 주인이 된 건가?"
모두의 시선 속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까악."
"사왕보다 먼저 미궁을 차지하다니, 대단하다."
"미궁에 무슨 볼 일이 있는 거냐, 까악?"
"그래. 오주력의 미궁 도시를 백왕의 이름으로 천명할 생각이다. 크람델과 워프를 잇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자 한다."
"······!"
"······!"
"백왕이시여. 공식적으로 선언하다니요? 크람델을 제외하곤 그런 적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모두가 놀라하는 사이, 대토룡이 말했다.
백왕이 공식적으로 천명한 도시는 오직 크람델뿐이다.
북부로 향하는 크람델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거대한 용의 물음에 백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들을 소집한 두 번째 이유와 이어진다. 남쪽 흑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흑왕이······?"
"남쪽을 벗어나려고 한다는 겁니까?"
흑왕.
백왕이 북부를 지배하는 절대자라면, 흑왕은 남부를 지배하는 절대자다.
궁기와 대토룡이 기겁하며 묻자 백왕이 긍정하였다.
"녀석이 급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자신 있게 세력을 넓히면서. 예감이 좋지 않아."
백왕의 '예감'은 적중률 백프로다.
그의 예감이 좋지 않다면, 실제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에 하나 녀석이 나를 노린다면 오주력부터 공격해올 것이다. 그리고 구제국의 땅인 만큼, 아르혼 제국도 미궁에 눈독을 들일 테지. 나의 이름으로 공식발언을 하면 둘 다 오주력과 미궁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 워프만 연결할 생각이었는데.
백왕의 공식 천명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진짜로 미궁은 안전지대가 된다.
정신나간, 겁대가리 없는 놈들은 항상 존재하는 법이니 침략 자체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거대세력이 전면에 나서진 못할 것이었다.
확실한 억제력.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다.
백왕의 그늘이 엄마의 품처럼 따듯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긴급하게 호출한 마지막 이유는 그대들 중 흑왕의 의도를 알아낼 자를 선출하기 위함이다."
안건이 두 개가 아니었나?
한 마디로 남쪽으로 침투하라는 소리다.
흑왕의 영역에서 흑왕의 의도를 비밀리에 알아낼 자.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는 모험이 될 건 자명했다.
"자원할 자, 있는가?"
백왕이 주력들을 훑었다.
하지만 쉽게 자원할 수 없는 일이다.
흑왕은 백왕과 백팔십도 다르다.
결코 온화하지 않다.
마음에 안 드는 모든 걸 참살하는 미치광이. 그게 흑왕이다.
이윽고 백왕의 시선이 내게서 멈췄다.
······ 그리고 백왕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
설마 지금 나보고 가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너를 내가 지켜줄 테니, 공식적으로 천명해주는 대신 갔다 오라고?
아니, 아니다.
어쩌면, 흑왕과 내가 부딪히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모두 이 마지막을 위한 떡밥에 지나지 않았다.
'······ 한 번 해보자는 건가?'
엄마의 품은 개뿔.
하여,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백왕의 뻔한 의도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까악! 까아아악!
시체 까마귀들이 더 공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고 있을 터.
"으음."
"뭐 하는 짓이냐, 오주력!"
모두가 침음을 흘렸고, 대토룡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건 네놈의 신비를 파괴해버리겠다는 위협.
그뿐만이 아니라.
"백왕. 죽기 싫으면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까악."
진정한 왕좌 (수정)
블러핑.
상대보다 좋지 못한 패를 들고 있을 때 거짓으로 강하게 베팅하는 수법.
일종의 공갈이다.
지금 내 상황과 같다.
백왕은커녕 사주력 중 한 명만 공격을 해와도 목숨이 날아가니까.
아무런 근거 없이 블러핑을 쳤다간 패가망신하기 마련.
하지만 근거가 있는 블러핑이라면?
'신비의 관을 달성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
입구를 넘어서며 들었던 수많은 말.
나에 대한 소문을 내 귀로 직접 듣지 않았는가.
그 소문을 사주력이나 백왕이 모르는 건 말도 안 된다.
하물며.
'사왕이 밑간을 제대로 쳐놨다.'
심연 미궁과 검성 라일리에 대한 양념을 제대로 쳐놨을 것이다.
그 백왕이 스스로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입이 닳도록 말한 게 분명했다.
신비의 관에서 신화를 넘어섰을 때도, 망자왕 아흐람을 봉인했을 때도 내 실질적인 무력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는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말미암아 내 무력의 수위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을 터.
모르긴 몰라도 꽤 놀라지 않았을까.
···사왕보다 빠르게 미궁을 돌파해, 검성 라일리를 죽였다니! 하고.
'검성 라일리는 사흉과 비견되던 존재.'
이들에게 전설이자 신화인 사흉(四凶).
그 사흉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게 검성 라일리다.
그렇다면 나의 최소 무력은 최소 사흉을 위협할 정도라는 소리.
적어도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물론, 근거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왕이 알아본 걸 백왕이 못 알아볼 리 없으니.'
바알 투구.
사흉 중 하나인 바알의 권능이 담긴 물건.
그것을 내가 갖고 있다는 걸 지금쯤이면 백왕도 파악했으리라.
'백왕은 내분을 바라지 않는다. 놈은 겁쟁이니까.'
마지막 근거.
내가 빌헬름을 플레이하며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놈의 겁쟁이 기질!
백왕은 강렬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면 일단 숨는다.
사주력 전부가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에서도 놈은 끝끝내 안 튀어나왔다.
결국, 송곳니라는 '거래'를 통해서야 극적 타결됐을 뿐.
이번에도 예감이 좋지 않다고 언급한바, 백왕은 절대로 내분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자신의 신비를 파괴하는 걸 그는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려 들면 최소 하나는 잃는다.
"······ 죽기 싫으면, 수작을 부리지 마라? 정녕 나한테 한 말인가?"
백왕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모든 게 얼어붙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죽는다니.
그런 협박을, 이곳 백왕전에서 자신에게 하였다.
결코 가만히 넘어갈 수 없다.
넘어가서도 안 된다.
지금 이 발언은 명백하게 선을 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백왕의 반응 역시 예상했다.
아무리 겁이 많다고 한들, 자신을 따르는 사주력의 앞에서 바로 물러나는 짓을 했다간 왕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것이므로.
'으음!'
예상했지만,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영원군주의 심장이 없었다면 지금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대고 있었겠지.
어쩌면 이미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모든건 결국 예상에 지나지 않았으니.
실제 백왕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백왕 외엔 아무도 100% 확신할 수 없다.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까악. 주력과 백왕은 '동등한 자격'을 갖췄다고, 까악. 나는 너의 밑에 있는 게 아니니 이 '긴급 호출'도 내겐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는구나, 까악."
하지만 한번 시작한 블러핑을 멈출 수도 없다.
발사된 로켓은 격추되는 것 외엔 멈춰 서지 않는 법이었다.
백왕과 주력은 서로 특별한 서열 관계가 아니라고 분명히 그리 알렸다.
하지만 말만 그럴 뿐 실제 서열이 있었다.
당장 백왕은 '긴급 호출'로 주력들 모두를 모았다.
그 호출의 권한은 오직 백왕에게만 있다.
이 자체가 내게는 매우 불편하다는 말이었다.
명백한 서열 관계가 있음에도 없다고 하는 저 행태가.
"백왕, 까악. 나는 말장난을 매우 싫어한다, 까악. 나를 멋대로 움직이려거든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까악."
그까짓 주력의 자리.
그까짓 백왕의 천명.
동등하지 않으면 다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말장난이나 하는 놈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포했다.
백왕의 가면이 파르르 떨렸다.
"······ 그래서. 말장난을 하면, 죽이겠다? 이 백왕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 있다.
하지만 살의가 가득한 웃음이다.
그 누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대놓고 발언하겠는가.
그것도 감히 백왕의 앞에서 말이다.
마치 훈계하듯 말장난이나 하지 말고 제대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자가 한 번도 없었기에 백왕은 어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
상황은 더더욱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허나, 그럴수록.
나는 더욱 여유를 부렸다.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렸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서로 퍼담을 생각이 없으니, 남은 건 다시 물을 따르는 것뿐이다.
어떻게 다시 따를 것이냐.
누가 따를 것이냐.
그 문제는 이제부터 정할 일이었고.
"왕좌에 앉아라 백왕, 까악."
왕좌에 앉아라.
백왕전에 마련된 너의 자리에.
내 말을 들은 사주력과 백왕은 잠시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왕좌에 앉으라는 건, 왕임을 인정하겠다는 말 아닌가?
이곳에 마련된 최고의 자리.
신하가 되기를 자처하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그 순간.
"'불길한 빛의 옥좌'를 사용합니다."
"'불길한 빛의 옥좌'에 앉으면 주변 모든 것에 '불길한 형상'으로 투영됩니다."
"'불길함의 끝(Lv10)'을 사용하면 접두사가 소멸합니다."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선 같은 테이블에 앉을 필요가 있었다.
백왕은 백왕의 자리에.
"나는 나의 자리에 앉겠다, 까악."
나도 나의 자리에.
자. 이제부터 정해보자.
누가 다시 컵에 물을 따를지.
'찬란한 접두사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것도 나쁘지 않군.'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불길한 빛의 옥좌.
빛의 옥좌는 제물로 바친 물건에 따라서 붙는 접두사가 천차만별이다.
'불길한' 접두사는 '극 철검' 두 자루를 제물로 바쳐서 띄웠다.
수련자의 산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숙련도를 올리면 어차피 필요 없어질 무기.
미리 띄워둔 게 천만다행이다.
이윽고 내가 자리에 앉자 사주력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특히 메두사의 반응은 더욱 극적이었다.
모든 눈을 가린 메두사는 앞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자세하게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불길함 그 자체인 형상을 마주하자 절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대토룡도, 사왕도, 궁기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주력 전원이 불길한 빛의 옥좌에 반응했다.
그렇다면, 백왕은 어떨까?
그때였다.
"그만하지."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백왕과 나의 사이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면서.
나타난 존재는 사왕이었다.
그가 나와 백왕의 사이에 선 채로 중재를 나선 것이다.
내게 그만하라 말한 사왕은 이내 백왕을 쳐다봤다.
"흑왕의 의도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백왕이시여, 오주력은 다른 주력들과 다르다는걸 인지하셔야합니다. 그는 저희와 달리 백왕께 받은 '은혜'가 없지 않습니까?"
백왕을 따르는 사주력들은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오주력은 다르다.
오주력은 처음 등장부터 백왕에게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
아직 선물로 준다는 '도시'조차도 지정하지 않았으니.
도리어 스스로 자신의 도시를 쟁취했다.
심연 미궁.
구제국의 땅이자, 검성 라일리가 가라앉은 그곳을!
고로, 동등하다.
강제로 명령할 수 없다.
사왕이 재차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주력. 그대도 그만해라. 별 수호자가 아닌 주력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 역시 결국은 그대다. 지금 우리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그대 역시 곤란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 와서 별 수호자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그랬다간 멸악의 거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서 크람델까지 적으로 돌리면 사방천지가 다 적이 된다.
'뭐하는 거지?'
동시에 사왕의 공허한 오른쪽 해골 눈에 붉은 선이 떠올랐다.
나만 볼 수 있게끔 떠오른 그 붉은 선은 ^ 표시를 만들었다.
'······ 윙크?'
설마 지금 나한테 윙크하는 건가?
사왕이 그 상태로 계속해서 말했다.
"오주력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분명히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서로가 극으로 가면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걸 그대도 알진대. 정말 전쟁을 원하는건가? 말장난이 아닌 진실된 '동등함'을 원하는 것 아니었나?"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멋대로 부르고, 강제로 일을 떠맡기는 건 모로 보나 동등한 관계와는 거리가 머니까.
게다가 끼어든 게 사왕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왕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다.
다만.
"내가 주력이 되는 최소조건이다, 까악. 동등하지 않은 자리는 필요 없다, 까악."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처음 주력이 되었을 땐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서 제대로 못 짚고 넘어갔지만, 이 조건이 확실해지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리하여 나는 백왕에게 공을 넘겼다.
동등하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백왕, 너의 생각은 어떠냐.
너와 나를 동일 선상에 두는데 동의하는가?
"······ 정녕 겁을 상실한 놈이로군."
이 정도로 뒤 없이 막 나가는 놈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격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놈은 원래부터 이런 놈인 것이다.
겁이 없고,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도전하길 좋아하는.
백왕이 아니라 설령 상대가 신이라 할지라도 놈은 똑같이 행동할 터였다.
이 정도로 미친 까마귀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단순히 미치기만 했으면 이미 백 번은 죽였을 텐데,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지니고 있어서 여간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 패기는 마음에 든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그래서 백왕은 한발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 한결같은 패기를 본받아, 한 번은 수위를 넘는 발언도 용서하겠다는 의미였다.
앞과 뒤의 말이 다른 태도에서 실수를 먼저 한 것은 어찌됐든 명백하게 자신이었으니.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이게 마지막이다.
'살았다.'
······ 내심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아니, 매우 좋았다.
'진짜 십년감수 했군.'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일단 성공이다.
사왕이 안 끼어들었으면, 끝을 봤을 것이다.
블러핑이 좀 심했던가.
그리고 끝을 봤다면 결과는 뻔했다.
기껏해야 신비 하나 파괴하고 내 몸은 두동강 나 있었겠지.
사왕이 끼어들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래서 사왕을 싫어할 수가 없다.
윙크까지 날린건 좀 그렇다만.
"좋다, 까악. 이제야 서로 '대화'할 자세가 갖춰졌구나, 까악."
"······ 오주력."
기껏 화해시켜놨더니 뭐하는 짓이냐는 투로 사왕이 다그쳤다.
다시 분위기가 안 좋아지길 바라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래도 된다.
동등한 자리에 있다는 건 동등함 이상의 거래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백왕이여, 까악. 내가 너의 잃어버린 '송곳니'를 찾아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것이냐, 까악?"
자세는 됐고, 이제 서로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를 해보자.
잃어버린 송곳니.
그걸 되찾아주면 너는 나한테 무엇을 줄 것이냐?
"······ 두 번은 없다 했음에도, 재밌는 말을 하는군."
백왕의 두 눈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음해냐는 듯.
또 말실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해봤자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황금률 상점에 대놓고 전시되어 있으니까.
빌헬름의 전리품 중 하나로서.
물론 천 시간의 조각을 필요로 하지만, 백왕이 내미는 보상에 따라선 구매를 고민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온전한 황금률.'
내게는 온전한 황금률이 있었으므로.
부서진 조각과는 궤 자체가 다른 완전한 황금률이!
수련자의 산
란돌프가 백왕전을 나선 뒤.
백왕전은 여느 때보다 고요했다.
거센 폭풍이 지나간 뒤의 세계처럼.
엉망이지만 차분한 그런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묘하구나.'
백왕은 왕좌에 앉아 턱을 괴며 조금 전의 폭풍을 떠올렸다.
미친 까마귀, 오주력 란돌프.
놈이 지나간 뒤 백왕의 머릿속은 어그러졌다.
묘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묘하다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존재는 '그' 말고는 처음이었다.
'기사왕 빌헬름. 그놈도 그랬지.'
둘은 명백히 다르다.
빌헬름은 인간이고, 오주력은 시체 까마귀다.
다루는 능력이나 특성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허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예감'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점.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지닌 족속들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놈과도 다르다. 이런 기분은 처음일진대.'
빌헬름을 상대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지금 백왕은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 놈은 나를 읽고 있다. 그래서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게다.'
빌헬름은 자신을 몰랐다.
그런데 란돌프는 자신을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오주력, 그 미친 까마귀는 자신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 예의가 없군, 까악.
첫 만남에서 란돌프는 '스킬'을 읽었다. 자신이 관찰 류 스킬을 사용한다는 걸 깨닫고 '예의'를 운운하며 정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신비를 파괴할 수 있는 란돌프의 권능은 약간의 경계 대상일 뿐이었다.
허나 오늘 란돌프가 보여준 모습은, 첫인상에서의 관념을 모조리 깨트렸다.
스킬만이 아니다.
놈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가면 안의 모습조차도.
그보다 더 깊은 영역마저도 놈은 꿰뚫어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죽인다는 말.
그 허풍을 한 번은 봐준다고 했지만.
'내가······ 긴장했다고?'
어쩌면, 단순한 허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바알의 기색과 빛의 옥좌.
그 두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놀라웠으나, 빙산의 일각이라면?
하여 본능적으로 긴장한 것이다.
놈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긴장감.
"하하하!"
그제야 이 기묘함의 정체를 깨달은 백왕은, 광소를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누군가를 향해 이런 긴장감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이던가.
그 빌헬름도 결국 자신의 '예감'의 범주 내였다.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그 기상천외한 무력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적이었으나 결국 빌헬름도 자신을 죽이진 못했다.
헌데, 란돌프는 '예감'의 밖에 있다.
불길한 듯 불길하지 않고, 강한듯하면서도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옆에 두었지만, 어쩌면 란돌프야말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
죽인다는 그 말에 유독 강하게 반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측 불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미친 까마귀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야 처음 느껴보는 기분일 수밖에.
자신을 꿰뚫고, 예감의 영역을 넘어서 직접 죽음을 암시했으니.
"백왕이시여······?"
갑자기 광소를 터트리자 백왕전에 남아있던 대토룡이 의아해했다.
백왕은 웃음기를 지운 채 일주력 대토룡에게 물었다.
"대토룡. 그대가 보기에 오주력은 어때 보이던가?"
"언젠가 크게 일을 치를 놈입니다. 그 전에 조처해야 합니다."
"내 생각도 같다. 조치를 취해야지."
대토룡은 오주력에게 강한 적의를 갖고 있었다.
주제 모르고 날뛰는 미친 까마귀.
한 입에 삼켜도 성에 차지 않을,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놈.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대토룡을 향해 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도시에 워프를 잇고, 그곳을 백왕의 이름으로 공식 천명하겠다. 그리고 오주력의 거래도 받아들이마."
"배, 백왕이시여?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토룡이 기겁했다.
조치를 취한다는 게 이런 조치를 말하는 거였나?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백왕은 의연했다.
"가만히 놔두면 머지않아 적으로 돌아설 녀석이다. 그 전에 미리 '덕'을 입혀놔야지. 사왕의 말마따나."
"적으로 돌아서면 제가 직접 놈을 죽이겠습니다."
"아서라. 너를 잃고 싶지 않다."
"······ 그 말씀은, 제가 패배라도 할 것이라는?"
"그래."
백왕의 확신에 찬 말에, 대토룡이 표정을 잔뜩 구겼다.
대지의 용들 중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최강의 존재.
그게 바로 자신이거늘.
고작 그런 까마귀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이어진 백왕의 말에, 대토룡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놈은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
백왕이 직접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백왕을 죽일 수 있는 존재라면, 대토룡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주력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주력이 바라는 건 '동등한 자리'다. 말인즉슨, 오주력 역시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일 터. 이제 서로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거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하, 하오나! '송곳니'가 어디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주력은 마지막에 이르러 거래를 권유했다.
빌헬름에 의해 잃어버린 백왕의 송곳니.
빌헬름이 죽고 난 뒤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고.
"아니, 오주력의 말은 사실이다."
단순히 미궁에 있다고 말했다면 거짓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주력은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송곳니는 보유자가 죽은 뒤 '특수한 장소'에 인계되었다, 까악.
-알려줘도 너희들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장소다, 까악.
천하의 백왕과 사주력이 닿을 수 없는 장소에 '인계'되었다는 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옮겨놨다는 뜻이다.
대원정에서 빌헬름이 죽고 난 뒤에.
란돌프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닿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송곳니를 가져오면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묻는다.
'동등하다. 최소한 같은 값어치를 지닌 것이 아니면 거래하지 않겠다.'
하지만 자신의 송곳니와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 물건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백왕 자신의 송곳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므로.
가장 소중한 것을 또 내어줄 순 없지 않은가?
"송곳니를 되찾으려면 무엇을 주어야겠느냐?"
"거래를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대토룡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가 몰려든 탓이다.
백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받아들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송곳니의 가치에 들어맞으며, 오주력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다."
잠시 침묵하던 대토룡이 결국 반쯤 포기한 채 의견을 꺼냈다.
"··· 하나, 있지 않습니까."
"······ 하나?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걸 말하는 것이냐?"
"예."
"나의 딸을, 말하는 것이라고?"
"예."
"······ 흠."
백왕은 턱을 쓸었다.
슬하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이 하나 있기는 하였다.
송곳니와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으로 아끼는 딸이다.
"란돌프가 수컷이던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으음. 녀석은 아직 수련 중일 터인데."
"흑왕의 무리가 '수련자의 산'에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 듣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빼내야 합니다."
"묘안이라면, 묘안이다만······."
백왕이 깊게 탄식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 란돌프.
그를 딸과 묶어 혼인시킨다면 모든 위험은 제거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강력한 우군을 영원히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군.'
그 말괄량이가 자신의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성격 교정과 수련을 위해 수련자의 산으로 보냈지만, 핏줄이 핏줄인지라.
다른 형제들을 닮아 강철처럼 드센 성격이 벌써 죽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만 하다면, 이보다 좋은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흐으으으음."
백왕의 고민이 깊어졌다.
*
심연 미궁의 공략이 끝난 이후.
플레이어 톡 역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사 봄? 한국에서 란돌프 관련해서 기사 난 거.
-ㅇㅇ봄. 진짜 간덩이도 크다
-김하나? 이 사람 그라시아랑 인터뷰한 여자 아니냐?
-맞아. 김하나가 따로 익명으로 취재했나 봄
-''타차원에서 홀로 괴물과 싸우는 진정한 영웅 란돌프"라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ㅋㅋㅋㅋㅋㅋ
-말한 사람 틀림없이 팬텀교 신자일듯
-마스터의 암살자들이 무섭지 않느냐!
-그러니까. 마스터 입장에선 란돌프란 이름은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우고 싶어할건데...
김하나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난 기사.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디맨션 워리어'말고도, 타차원에서 홀로 고군분투중인 '란돌프'에 대해 기사화하며 난리가 난 것이다.
물론 별 거 아닌 내용이다.
타차원에 란돌프라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가 끝이니까.
문제는 란돌프라는 이름의 언급 그 자체였다.
-기사 내용 요약좀 해줄사람?
-현재 새롭게 생성된 워프들은 타차원의 '미궁'에서 지구를 침략하고자 만든 것이다. 그것을 '란돌프'라는 영웅이 목숨을 바쳐 막아냈다.
-뭐야,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긴 뭐가 별 거 아니냐. 이제 사람들이 란돌프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할 거 아니야
-취재한 사람이나, 취재에 응한 사람이나 목숨 두 개냐
-오히려 최근 유명해진 사람이라 쉽게 못 건들 수도?
-이슈화를 안 시키겠지 그냥 덮어버린다에 한표
-알고 있는게 저것 뿐이겠냐? 일단 기사화 시키려고 절제해서 저 정도 내용만 담은 거겠지
-아 이거 내가 다 쫄리네
-애들아 이럴 때가 아님. 판게니아 난리났다.
그때였다.
한창 기사화 관련으로 플레이어 톡이 시끄럽던 찰나.
갑자기 로그아웃한 플레이어들이 판게니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왜? 무슨 일인데?
-난리는 맨날 나는데 호들갑은ㅋㅋㅋ
-모든 도시에 공문 갔다. 그것도 백왕 이름으로!
난데없이 백왕이라니.
그 이름을 모르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백왕? 북부 크람델의 그 백왕?
-와 진짜네 도시 먹은 길드들도 난리났다네
-뭔데 ㅅㅂ 무슨 내용인데
-잠만. 미궁 도시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하겠대. 크람델에 이어 백왕의 두 번째 공식선언임 건들면 다 죽이겠다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미궁 도시 지배한 건 란돌프 아니었음?
-도시를 직접적으로 통치할 지배자는 오주력 란돌프라는데?
-...?
-?????
-오주력?
-그래. 크람델에 새로 등극한 다섯 번째 주력. 시체 까마귀의 왕 란돌프래
-아니, 뭐?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그럼 심연 미궁 클리어한 게 우리가 아는 란돌프가 아니라 시체 까마귀 란돌프였다고?
-동명이인이라는 소리임 지금????
-나 많이 혼란스러운데
-나 지금 머리가 띵해
-그니까 팬텀 란돌프가 아니라, 괴물 시체 까마귀 란돌프다?
-뭐야 이거... 진짜임?
-시체 까마귀 란돌프는 누군데?
-환장하겠네 우리가 열광했던 게 팬텀이 아니라 괴물이었어?
-크람델에서 인간을 받을 리가 없으니까 찐 괴물이겠지
-그럼 진짜 란돌프는 어디 있는데?
-수련자의 산에 있지 않을까?
-누가 가서 확인해봐
-거기 7레벨에 한 번밖에 못 올라가잖아
-산 주변에 괴물 급증했음 아예 산으로 가는 길이 막혔어 가면 죽는다
-와... 소름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