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PAJSOAS / Chapter 1 - 1

PAJSO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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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프롤로그

[(속보) '분노(Ira)의 탑' 공략 실패 확실시되다.]

[3번의 기적을 보여준 <서울&부산 연합> 길드의 공략 팀, 전원 사망 소식에 세계가 비탄에 빠져.]

[전대미문 불세출 헌터 송기현(27)의 사망. 전 세계가 혼돈.]

어느 날.

혜성 같이 나타나 세 개의 탑을 쭉쭉 클리어 해버리며, 팀을 이끌던 송기현의 사망.

전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인류가 한국의 '젊은 영웅'에게 원했던 구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10년 전 예고되었던 종말… 불확실한 진위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바삐 이어지는 '분노의 탑' 공략. 그러나 희소식은 無.]

[(속보) 이례적인 규모의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사상자 다수 발생… 전 세계가 마비 상태.]

["송기현이 살아 있었다면…" 절망에 빠진 전 세계 사람들. 예고된 종말 앞에서 기도하다.]

* * *

또 실패다.

나는 예고된 종말, 주어진 10년 안에 일곱 개의 탑을 모두 공략하지 못하면 회귀해 버린다.

이번에 열일곱 살로 돌아가면 벌써 여섯 번째 회귀이며 무려 일곱 번째 삶을 살게 되는 거였다.

아직은 목숨이 붙어 있지만… 나는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음.

좀 있으면 망할 여섯 번째 회귀 메시지가 내 눈앞에서 알짱거릴 거다.

"젠장."

함께 탑 등반에 올랐던 다른 녀석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혼자라도 꾸역꾸역 올라왔지만… 나도 결국, 여기까지인 듯했다.

육체 반쪽이 댕강 날아갔으니.

「생명의 숨결」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어 회귀했겠지.

"빌어먹을...."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지금까지 총 여섯 번의 삶을 살아왔지만 나는, 아니. 내가 속했던 길드는 단 한 번도 탑을 세 개 이상 깨본 일이 없었다.

이번엔 그래도 네 번째 탑 중간까지 왔는데.

…혼자지만.

아깝다. 너무 아까웠다. 조금,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여기서 실패해야 한다니.

[ ( ˙-˙ ) ] [흠. 사실 조금은 아니지. 이 탑을 깨고 나가도 아직 세 개가 더 남았는데.]

[ ☆-(๑•̀∀- ) ] [차라리 잘됐다.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몸뚱이로 나가봤자 좀비 취급만 받았을 거니 말이야.]

[ ∠( ᐛ 」∠)_ ] [탑 밖은 이미 탑 브레이크가 시작되었을 테니 늦었고.]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의 경망스러운 이모티콘, 어째 글자만 봐도 얄미운 메시지들이 눈앞에 줄줄 떠올랐다.

나는 틈만 나면 말을 걸어오는 이 녀석을 편의상 '지라퍼'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지랖을 하도 부려서 오'지라퍼'.

[ ヽ(`Д´)ノ ] [오지랖이라니. 이 배은망덕한 녀석.]

[ (ง`0´)ง ] [이 몸의 도움을 감사하게 여기진 못할망정.]

솔직히 이 녀석이 뭐 하는 놈인진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처음 회귀를 시작한 날부터 뜬금없이 나타나서 그 이후 줄곧 내게 찝쩍대며 소소한 도움을 주곤 하는… 음.

사실 자기 입으로 '탑 관리자'라는 소리를 하긴 했다.

근데 이상하지 않은가.

탑 관리자라는 놈이 왜 나를 돕는단 말이지?

아니, 애초에 나를 진짜 돕고 싶으면 탑이나 도로 철거해 가라고. 장난하나.

[ ∑( ◦д⊙) ] [그 문제에 관해선 내 누누이 말했을 텐데. 이 몸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에휴.

잠시 말이 샜는데,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잘해왔다.

탑 공략 때마다 다섯 번의 앞선 경험을 잘 살렸고 단 한 번의 실수조차 하지 않았다.

노련함으로 부족한 스탯을 극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번 회차라면 이 망할 회귀의 저주를 드디어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번에도 실패한 걸까.

1층부터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가던 동료들을 끝까지 데려가려고 애쓴 일?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동료를 버리려던 배신자 놈을 미리 솎아내지 못한 일?

....

사실 이번뿐만이 아니다.

나도 같이 1층에서 전멸당했던 첫 번째 삶을 제외하면 매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어 나간다.

아무리 탑 난이도가 지옥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약해빠진 놈들 같으니. 딱 한 사람분. 딱 그 한 사람분을 못 해서 어? 매번 초를 쳐?

[ (ㆆ_ㆆ) ] [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이 있다. 너도 회귀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음을 알아라.]

[ 〜(꒪꒳꒪)〜 ] [사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몸이 부여한 회귀자 특전 덕분에─]

닥쳐, 인마.

망할 저주를 걸었으면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당연한 거지.

[ (T_T) ] [분명 특전은 이 몸이 주는 것이나 네 회귀에 직접 관여한 건 결코 아니다. 그 부분은 오해라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하.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망가진 시계가 다섯 번이나 되감길 동안 수많은 길드를 만나고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팀이 완벽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그냥 그들은 완벽한 팀을 만들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게 돈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든.

국적이나 인종 차이 때문이든.

세계 멸망보다 당장 눈앞에 떨어진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든.

뭐.

당장 나도 회귀 때문에 구르고 있는 거지, 세계를 위해… 같은 거창한 영웅심 따윈 없었다.

…그래.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거지.

이렇게 된 이상, 나 혼자서라도 탑 공략을 끝내야겠다.

이번 회차를 통해 트리플 탑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파악해 뒀으니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커 줄 거라고 기다리기만 해선 바뀌는 게 없으리라.

그리고 이미 방법은 생각해뒀다.

이번 삶에서 우연히 찾아냈던 S등급 능력 카드 「네크로맨서」.

입 모아 '에쓰레기'라고 부를 만큼 인식이 안 좋은 능력이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분명 나쁘지 않을 터다.

음.

악취 나는 해골들과 10년 부대끼는 게 앞으로 70년 더 구르는 것보단 낫겠지.

아니, 그래야만 하는데.

[ ( ˙ꇴ˙ ) ]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 회귀부터 특전으로 들고 갈 수 있게 바뀐 능력 등급 상한선은 A까지야. 「네크로맨서」는 S라서 불가능하다.]

알아. 네가 다섯 번째 회귀 때 이미 설명해줬던 거잖아.

내가 이번 여섯 번째 회귀 특전으로 들고 갈 능력은 다른 거다. 「네크로맨서」는 국내 사냥터에서 발견됐었으니 회귀하자마자 찾으러 가면 되고.

[ ∠( ᐛ 」∠)_ ] [그래. 이제 시간이 된 듯하다. 다음번 삶에선 꼭 성공하길 바라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다.

이번엔 꼭 이 빌어먹을 회귀의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당신은 운명에 주어진 목표를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10년 전으로 회귀합니다.]

제1화

[당신은 '각성 기프트'를 받았습니다.]

눈을 뜨고 얼마 안 있어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각성.

모든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각성에 성공하였습니다.]

[마나 하트 형성 완료.]

[신체 능력 향상 완료.]

[마나 누적치가 갱신되었습니다.]

[회귀에 성공하였습니다!]

[<회귀자의 특전> 조건이 충족되어 6번째 회귀 보상이 지급됩니다.]

[능력 카드 영구 유지 1회 가능!]

- 회귀 전까지 소지했던 능력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 선택된 능력은 앞으로 회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라퍼가 말하길, 현재 인간들 사이에서 기준 없이 일어나는 '각성'은 정말 랜덤으로 뽑기 추첨하는 거고.

이 메시지는 자동 출력 시스템 같은 거라나 뭐라나.

하지만 '몬스터 웨이브'라 부르는 몬스터 집단 발생 현상을 만든 것도 네 짓이냐고 물었더니 그에 대한 대답은 'NO'였다.

[ ∠( ᐛ 」∠)_ ] [당연하지. 이 몸은 그런 야만적인 짓 안 한다.]

흠.

[ ヽ(`Д´)ノ ] [그 표정은 무엇이냐. 무슨 의미냐.]

뭐, 어쨌든.

수차례 회귀하면서도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는 탑이 생긴 원인, 내가 10년을 기준으로 계속 회귀하는 이유 정도겠다.

지라퍼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물어봐도 항상 얼버무리기만 하니.

[ ( ・᷄ὢ・᷅ ) ] [애송이. 어둠을 알기에 너는 너무 어리다.]

첫 번째 삶에서의 27년과 회귀로 채운 세월을 합하면 족히 70년을 산 셈인데 무슨.

애송이는 너겠지.

중2병이라 불러줄 걸 그랬나?

[ ヽ(`⌒´)ノ ] [시끄럽다. 회귀 특전이나 얼른 받아라.]

예, 예.

끝도 없이 내려가는 능력 카드 목록을 쭉 훑다가 하나를 골라 확정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유 능력 칸을 확인하세요.]

A+등급 「생명의 숨결」.

회귀하는 동안 나를 몇 번이나 살려줬던 회복 계열 능력이고 'A등급 이하'라는 조건에도 알맞다.

등급에 +가 붙는 고정 등급 카드는 육성이 불가능하여, 이하 기준에 들어가기 때문.

[ (ㆆ_ㆆ) ] [역시 그걸 고른 건가.]

뭐. 공격 계열로 골랐어도 좋았겠지만 쓸 만한 공격 계열은 거의 다 S등급이라.

참고로 「네크로맨서」도 S등급이다.

「네크로맨서」… 전 회차에선 늦게 발견한 탓에 제대로 써보지 못했던 능력.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의 회차에서는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능력이다.

그런데도 지금.

스스로 네크로맨서가 되려고 하는 건, 그만한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능력은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직감은 굉장히 잘 맞는 편이다.

'육감'에 스탯을 찍어 일반적인 각성자보다 직감력이 훨씬 좋은 까닭이었다.

정확히는 육체 스탯에 +17SP와 육감 스탯에 +17SP 그리고 감각 스탯에 +15SP.

두 번째 회귀를 해금 조건으로 본래 '인간은 접근할 수 없는 스탯창'에 간섭할 수 있게 된 이후.

회귀할 때마다 육체, 육감에 찍은 2씩 하고. 마나 누적치를 소모해 올린 15이다.

육체 스탯 : 8 (+17)

육감 스탯 : 7 (+17)

감각 스탯 : 8 (+15)

즉, 나와 고유 스탯이-괄호를 제외한 육체 스탯 8을 말한다-같은 각성자가 있더라도 +17만큼 내가 더 앞서는 조건을 가질 수 있었다.

육체 스탯 총 25.

언뜻 보기엔 상당해 보이는 수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 상태로 싱글 탑은 클리어가 가능할지 몰라도 더블 탑은 제대로 돌지도 못하는 수준이니까.

그러니 회귀로 리셋된 내 고유 스탯도 다시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덤으로 성취도.

정말이지.

일부러 인간이 탑을 깨지 못하게 만든 듯한 구린내가 진하게 풍기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우리 인류가 너무 약한 거거나.

[ (ㆆ_ㆆ) ] [아니면 둘 다이거나.]

…탑 관리자란 놈이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하냐? 그것도 내 앞에서?

[ ∠( ᐛ 」∠)_ ] [탑을 관리하는 건 맞지만 탑 자체를 설계한 것은 이 몸이 아니거든.]

진짜 얄밉네.

[ (૭ ᐕ)૭ ] [ (૭ ᐕ)૭ ] [ (૭ ᐕ)૭ ] [ (૭ ᐕ)૭ ] [ (૭ ᐕ)૭ ] [ (૭ ᐕ)૭ ] [ (૭ ᐕ)૭ ]

그만해, 이 자식아.

"송기현! 형아 왔다!"

마침 현관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내 친형인 송주현이다.

일찍 부모님을 잃은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

좀 바보 같긴 해도 부모 없이 자란 내가 행여나 삐뚤어질까 늘 신경 써주는 착한 형이었다.

"아직 자냐?!"

"형."

"뭐? 형?"

"다 좋은데 들어오기 전에 노크는 좀 하자."

"미친… 송기현 입에서 형 소리가 나오는 꼴을 보다니. 오늘 뭐 만우절 같은 거 아니지?"

"아님. 그리고 나 각성했어."

그때.

호들갑 떨면서도 은근히 좋아하던 형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는 걸 놓치지 않았다.

형도 '각성 기프트'를 받고 각성자가 되었다.

나보다 훨씬 먼저.

그렇기에 각성자가 되면 그때부터 평범한 삶을 살긴 힘들다는 걸 나만큼이나 잘 안다.

몬스터 웨이브로 생겨난 사냥터를 돌며 돈을 벌고 있지만, 그 일이 게임처럼 마냥 즐겁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형은 내가 그런 위험한 삶을 살지 않길 바라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루어지지 않을 바램이지만.

"학교도 그만둘 거야. 최소 조건만 채우면 바로 탑 등반할 거라서. 말려도 할 거니까 미리 알아두라고."

"뭐? 잠 덜 깼어? 대낮부터 뭔 헛소리야."

"하나 더. 형은 당분간 사냥터 나가지 마. 아니 이제 안 나가도 괜찮아."

"야, 돈은 지금도 충분해! 용돈 모자라서 그래? 탑 등반이라니, 탑 안이 위험한 건 너도 알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형이 말꼬리를 흐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가 완전히 침묵할 때까지 지켜본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정 백수 짓이 싫으면 딱 한 달만이어도 돼. 사냥터, 절대 나가지 말고 쉬어."

내가 회귀한 날로부터 딱 15일 뒤.

동쪽 사냥터로 나간 형은 그날 주검이 되어서 돌아온다.

특별히 마가 낀 날이라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젠장.

그때 일 떠올렸더니 기분 잡치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빌어먹을 회귀가 하나 남은 가족만큼은 잃지 않게 해준다는 점일까.

아. 형은 내 말을 잘 듣는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한다.

묘한 얼굴로 눈을 굴리던 형은 이번 삶에서도 예외 없이 비슷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한 달이면 되는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다시 눈알을 굴렸다.

"알겠어. 음."

"왜?"

"아니… 음. 아냐. 혹시 점심 같이 먹을래?"

"나갈 거라 밖에서 먹으려고."

"어, 그러냐."

한참 내 눈치를 보며 서 있던 형이 결국 찜찜함을 남긴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

똥 마려운 개, 딱 그 짝이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지… 나 참.

보나 마나 하루아침에 달라진 내 모습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혹시 몬스터가 내 껍데기를 쓴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일 거다.

내 입으로 말하기 좀 부끄러운 흑역사인데… 언젠가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형을 보고 오열하며 운 적이 있었다.

그렇게 울어본 건 아마 살면서 처음이었던 거 같다.

근데 그때 형이 꺼낸 말이.

-이 새끼, 우리 동생 어디 숨겼어! 너 이 자식 뭐 하는 놈이야?!

…였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고, 그 뒤로는 그런 짓 안 했지. 언제였더라.

[ ( ˘ω˘ ) ] [네가 처음 회귀하고 죽었던 형과 재회했던 때지.]

그래. 2회차였다.

지금 생각하면 두고두고 써먹혔을 흑역사가 날아가서 천만다행이라니까.

[ ꉂꉂ(ᵔᗜᵔ*) ] [𐨛 𐌅 𐨛 ヲ 𐨛 𐌅 𐨛 ヲ 𐨛]

야. 너 웃었냐? 지금?

* * *

편의점 음식으로 식사를 때운 뒤, 내가 향한 곳은 각성자 등록 센터였다.

마음 같아선 「네크로맨서」를 얻었던 동남쪽 사냥터로 곧장 가고 싶지만....

모든 사냥터는 헌터 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각성자 등록증을 발급받는 일이 최우선이라 이거다.

이것도 참. 회귀할 때마다 매번 하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송기현 님, 각성 상태 확인되셨고요. 등록증은 여기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등록증 발급에 긴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간단히 몇 가지 검사만 하면 되는 문제이며 이런 체계가 잡힌 지도 벌써 40년째니까.

50년 전, 탑이 처음 나타났던 이래 세상은 많은 게 바뀌고 또 적응했으며 발전했다.

[ (¯ヽ_(ツ)_/¯) ] [그럼 뭐 하겠나. 네가 10년 이내에 탑을 전부 공략하지 못하면 세상은 망하는데. 너는 계속 회귀할 거고 말이지.]

그 꼴 안 내려고 내가 지금 이러는 거 아니냐, 애송아.

[ ∠( ᐛ 」∠)_ ] [이 몸이 애송이라면 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한낱 먼지겠구나. 버스 왔다. 놓치기 전에 얼른 타라, 먼지야.]

뭐래.

여기서 동남쪽 사냥터로 직행하는 헌터 전용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선다.

취시이이익.

문이 열리자. 벌써 몬스터 사체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나는 등록증을 보여주고 올라탔다. 험상궂게 생긴 운전기사가 날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어서 와라,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애송이. 지옥까지 특급 하이패스로 달려주지."

탑승자 중 유독 내가 어려 보이니까 신경이 쓰여서 그런 듯하다.

하긴.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해버린 후, 힘이 생긴 어린 것들이 호기롭게 돌아다니다 그대로 죽는 경우가 정말 많으니까.

물론. 나는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대충 60살쯤 어리던 시절, 나도 기세등등하게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천부적인 적응력, 피지컬이 따라주던 이른바 재능충이었어서 말이지.

무려 1회차부터 탑 등반을 시도해볼 정도-1층에서 죽었지만-였으니.

[ (꒪꒫꒪) ] [....]

왜 그래?

재능충 처음 보는 사람처럼.

[ ( ¯−¯٥) ] [뻔뻔한 얼굴로 잘도 그런 발언을....]

맞는 말만 했잖아?

뭐? 그래서 아니라고?

[ ( ・᷄ὢ・᷅ ) ] [....]

거봐.

[ ( ・᷄ὢ・᷅ ) ] [회귀할 때마다 매번 말하는 거지만, 자만하지 않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을 항상 대비….]

아. 다 왔네, 다 왔어.

[ ∑( ◦д⊙) ] [고얀 놈, 이 몸을 또 무시하는구나.]

버스가 사냥터 입구에 멈춰 섰다.

사람들을 따라 내려서는데, 때마침 쩌렁쩌렁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보니, 웬 거구 한 명이 사냥터 입구에서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걸 상대해야 하는 보초 헌터는 난감한 얼굴이다.

아무래도 사냥터로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 같은데… 근데 잠시만, 저 뒤통수.

쓰읍.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지?

"억지 부리셔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폭행 건으로 3주간 활동 금지 딱지 받은 게 엊그제인데 뻔뻔하신 거 아닙니까?"

"큭큭, 그따위 거 돈으로 면제받은 지가 언젠데 웃기고 있어? 네가 뭐 정의의 사도라도 되냐?!"

퍽!

"꺄악!"

"이봐요! 거 그만 좀 하세요!"

"어 그래, 네놈도 맞고 싶으면 덤비던가! 쫄려? 어?!"

아. 그래, 저놈.

[ ( ˙ㅁ˙ ) ] [아.]

저 저 새끼, 저거. 바로 전 회차에서 팀 뒤통수 때리고 배신하려던 그놈 아니냐, 저거!

자기 혼자 탑에서 나갈 거라고 난리 치다가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죽어버린 놈.

[ ( ¯−¯٥) ] [주먹이 가벼운 건 여전해 보이는군.]

그러고 보니....

사람 하나 반쯤 패죽여서 활동 금지당했던 거 돈으로 해결 봤었다면서 자랑하던 일이 있었지.

하.

떠올리니 또 열 받네.

저놈만 아니었어도… 어쩌면 분노의 탑까진 깰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야. 너."

"X발, 이 새낀 또 뭐…."

―터헉!

"컥!"

인간의 주먹이 인간의 얼굴을 강타한 소리라곤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터졌다.

양쪽 코에서 피를 쏟으며 빙글 회전한 거구의 몸이 저 멀리 나가떨어진다.

불쾌한 소란에 화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댕그랗게 눈을 떴다.

"이, 이 미친, 너 뭐야?!"

데굴데굴 타이어 굴러가듯 나뒹굴었던 놈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흠.

죽지 않을 만큼 조절한 거기도 하지만 확실히 각성자라 튼튼하다.

덕분에 패는 맛은 있겠네.

"넌 오늘 이유 불문, 내 손에 죽는 거다. 알겠냐?"

손을 풀자 새파랗던 얼굴이 이젠 하얗게 질렸다. 드디어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모양이다.

"사, 살려주─"

"응. 닥치고."

물론 지금의 놈에겐 전 회차 기억이 없겠지만… 그게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제2화

먼저 날뛰었던 점을 빌미 삼아 백 번 죽여도 시원찮은 배신자 놈을 마음껏 팼다.

마음 같아선 진심으로 죽여서 매장시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살인죄로 활동 금지당할 테니 참았다.

그래도 속은 후련하네.

놈한테 얻어맞았던 보초한테 고맙다는 말도 들었고.

"저기, 안녕하세요."

문득 등 뒤로 들려온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해죽 미소 짓고 있는 한 사내.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

흠. 뭔가 오늘따라 예상치 못한 구면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았다.

"전 양규혁이라 합니다. 덕분에 재밌는 거 봤네요. 여기 사냥터는 처음이세요?"

곱상한 얼굴로 여성 팬을 여럿 거느린 톱클래스 양규혁.

여기서 톱클래스라 하면 최소 B클래스 이상을 말한다. 그는 곧 있을 국제 클래스 랭크전에서 상위권 기록, 이후 A클래스까지 올라갈 인물이었다.

머잖아 한국을 떠나서, 전 세계 최고 규모의 길드에 소속될 녀석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회귀하자마자 동남쪽 사냥터로 가는 선택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지, 한국에선 만날 일 없었던 인물을 둘이나 만났다.

이 만남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영향을 미칠지.

약간은 흥미가 동한다.

"왜 그러세요? 음. 혹시 저희 이미 아는 사이인데… 제가 실수한 건 아니죠?"

양규혁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묘하게 구체적인 걸 보니 내가 약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 그럼 다행이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이 녀석과는 미리 친분을 쌓아두는 게 좋을 듯싶은데.

[ ( ・᷄ὢ・᷅ ) ] [이 몸의 생각도 그렇다. 지금 놓치면 다음에 만나는 건 몇 년 뒤 유럽에서겠지.]

[ ∑( ◦д⊙) ] [구걸해서라도 번호를 얻어놔라.]

안 그래도 번호 얻어놓을까 했다.

…근데 뭐? 구걸?

이 자식이 날 대체 뭐로 보고.

"전 송기현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와 적당히 대화를 끌다 번호 교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양규혁은 오히려 흔쾌하게 내 요청을 받아주었다.

어쩌면.

그도 처음부터 나처럼 '혹시 모르는 인맥'을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친절할 것 같은 얼굴로 누구보다 이해타산적인 사람이니까.

난 이제 막 각성자 등록을 마친 E클래스고 양규혁은 몇 안 되는 톱클래스지만.

그 왜. 강할수록 상대의 진가를 더 잘 파악한다고 하잖아?

[ ( ˙-˙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응. 나 강하다고.

[ ( ・᷄ὢ・᷅ ) ] […A클래스는 되고 그런 말을 하지 그러나.]

저건 정말 바보 같은 소리다.

현재 클래스는 눈에 보이는 점, 즉 '대외 활동 이력'으로 산정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나를 제외한-인간은 볼 수 없는 스탯과 본인만 아는 상태창 내용, 성취 등은 클래스 산정에 반영되지 않는다.

'못 한다'는 표현이 더 맞으리라.

그러니 힘을 숨겼다간 만년 E클래스도 될 수 있으며.

당연히 같은 클래스라도 수준 차이는 클 수 있다.

거진 30, 40년 동안 몇 번의 개편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문제가 많은 게 '클래스' 체계이건만.

A클래스?

당장 최고 클래스인 S클래스 헌터들을 데려와도 나한테 비빌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을 텐데.

[ ( ・ิω・ิ ) ]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진다니까.]

한 치의 부풀림도 없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란다, 아해야.

"그럼 전 이만."

"네. 수고하세요."

번호를 주고받은 뒤 내가 먼저 방향을 틀자 양규혁은 미련 없이 반대쪽으로 향했다.

서로가 눈치 보지 않고 사냥할 수 있게 거리를 두는 헌터들 간의 암묵적인 예의였다.

특히 이곳은 나름 규모가 크고 비싼 게 잘 나오다 보니 조심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지.

[ ( ˙ㅁ˙ ) ] [무엇이?]

원래 여긴 내가 회귀하고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완전 토벌되어 버리는 곳이었잖아?

항상. 변함없이.

그런데 저번 회차에서는, 어째서인지 토벌되지 않고 방치됐다.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이곳을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손 쓸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진 후, 나한테 토벌 오퍼가 왔던 거였고.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던 까닭에 내가 처음으로 「네크로맨서」를 얻을 수 있었던 거기도 했다.

[ ( ˘ω˘ ) ] [나도 모든 걸 알 순 없다만 네가 모르는 무언가의 개입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흠....

뭐. 지라퍼도 그렇다고 하니 지금은 추리해봤자 알아낼 수 없는 의문일 듯하다.

"다행히 아무도 없네."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본래 묘지였던 곳이지만, 사냥터가 되면서 많이 훼손되고 더 이상 사용하지도 못하게 된 곳.

여기가 바로 전 회차 때 「네크로맨서」 능력 카드를 습득했던 장소였다.

물론 변수는 언제든 일어나는 법.

같은 자리에서 안 나올 수도 있고, 이미 다른 이가 이 근처에서 「네크로맨서」를 습득한 직후라면 당분간 안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올 때까지 쓸고 다니면 되고, 그래도 안 될 땐 다른 곳을 적극적으로 물색하면 되니까.

어차피 오늘. 능력 카드가 나오지 않더라도 이 사냥터는 완전 토벌하고 갈 생각이다.

귀찮지만....

회귀하면서 죄다 잃어버린 성취를 일정 수준 이상 다시 채우기 위해선 필요한 과정이므로.

[(⌒_⌒)] [한국인이라면 노가다 근성으로 버텨내는 거다, 노예야.]

어휴. 떠들 힘 있을 때 버프나 걸어라, 버프 노예야.

[당신은 '카드 수집가' 버프를 받았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능력 카드 드랍률'이 증가합니다.]

주르르 눈앞으로 뜨는 메시지.

과연 몇 장이나 나올까.

거기에 「네크로맨서」는 있을까.

버프를 받았지만, 능력 카드 자체가 희귀한 편이라.

지금으로썬 두 장이 나오더라도 그중 하나가 「네크로맨서」이길 바랄 뿐이었다.

[취익?]

그때 첫 번째 별미가 나타났다.

[오크]

- 단단한 골격과 파괴력을 가졌다. 붉은 몸체가 특징이다.

- 평균 ±30레벨에서 출몰

- 8급 이상 구역에서부터 서식

3회차 이후 회귀자 특전으로 'C등급 이하 능력 1개'를 가져올 수 있었을 때, 내가 선택한 게 바로 「몬스터 감정사」.

그것 덕분에 내 눈엔 몬스터 특징들이 보였다.

[췻, 취이익!]

제 영역을 침범한 날 보고 흥분한 오크가 사납게 달려든다.

휘두르는 손을 흘려 보낸 나는 꼬꾸라지며 드러난 놈의 목을 수도로 내리쳤다.

터억!

오크의 목이 푸딩인 양, 뼈째로 잘려나갔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의 코어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허물어지는 육신. 그걸로 끝이다.

마땅히 아이템도 나오지 않았지만 아쉬울 것까진 없었다.

스스스스스....

오크의 마나가 내게 흘러들어 오는 것이 느껴진다. 게임으로 치면, 경험치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난 그것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모조리 흡수해서 마나 하트에 갈무리했다.

슈우우우우.

심장 부근이 든든해지는 기분.

앞으로 이렇게 계속 일정량의 마나를 갈무리해 나간다면 성취는 착착 오를 것이었다.

흠흠.

첫 시작은 나쁘지 않은 듯하다. 어디 또 맛 좋고 든든한 영양 공급원이 더 없나?

* * *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무렵.

[새로운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동남쪽 사냥터를 싹 토벌한 내 성취는 단번에 3성까지 올라 있었다.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다.

몬스터를 죽이고 얻을 수 있는 마나는 평균 50퍼센트 정도가 채 되지 않고, 나머진 허공으로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1성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인간이 육체 훈련 등을 통한 노력으로 강해지는 덴 한계가 있어서 성취라도 높아야 뭘 할 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회귀로 전성기만 여섯 번을 지낸 덕분에 거의 100퍼센트 가까이 흡수하는 요령을 깨우친 상태.

거기다, 대기 중에 포함된 마나까지-아주 소량이지만-흡수할 수 있다.

가르쳐 줘도 따라 하는 이가 없었으니, 현재로선 나만 할 줄 아는 기행인 셈이다.

이대로만 가면… 5성까진 금방 올릴 수 있겠지.

물론 탑을 오르기 위해선 최소 6성 이상이 권장되니 아직 한참 부족한 것도 사실....

[ ( ´・ω・` ) ] [조바심은 금물이다.]

응. 알고 있어.

유난히 휑한 주위를 둘러본 뒤, 사이클롭스를 잡고 얻은 쌍단검을 양쪽 허벅지에 채웠다.

동남쪽 사냥터를 아예 초토화해 버려 이제는 잡을 몬스터가 없는 까닭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입구를 지키고 있을 보초 헌터 외에는 모두 돌아간 지 오래고.

밤늦게까지 남았던 내가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린 거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대단하고 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와닿지 않는 일.

이미 전 삶, 전전 삶에서도, 내 손에 초토화됐던 사냥터가 한둘이 아니라서.

어차피 이번에 또 탑 올 클리어를 실패하면. 이런 업적들은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쓰레기다.

[ Σ(O_O) ] [긍정, 긍정적인 생각을 하거라.]

[ ( ´ ・ω・`) ] [아무래도 지친 모양이니 확인만 끝내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몬스터 사체 더미 위에 대충 걸터앉아 상태창을 열었다.

보유 능력 칸이 늘어난 걸 확인하니, 피로가 좀 풀린다.

[송기현]

현재 성취

- 3성

현재 마나 누적치

- 89,198,704,106

보유 능력 (레벨 표기)

- 몬스터 감정사 (Lv. max)

- 생명의 숨결 (Lv. max)

- 지도자 (Lv. 1)

- 그림자 시야 (Lv. max)

- 네크로맨서 (Lv. 2)

어둠 속에서 시야 확보 능력이 좋아지는 「그림자 시야」는 육성 불가능 능력이기 때문에 한 장으로도 만렙이다.

그러니까 종일 사냥해서 네 장을 얻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나마 이 네 장도 버프 덕분에 얻을 수 있던 숫자다.

물론 본래 얻고자 한 「네크로맨서」를 두 장이나 얻고 이래저래 도움이 되는 「지도자」를 초반에 얻은 건 운이 좋다고 봐야 하리라.

몬스터와 내 스탯 간의 격차가 커서 성취만 오르고 마나 누적치는 거의 변동이 없긴 하지만.

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결과다.

[ (ㆆ_ㆆ) ] [몇 분 뒤면 막차 올 시간이다. 놓치기 전에 뛰어라.]

뭐? 벌써?

…어쩔 수 없지.

「네크로맨서」는 내일 써보기로 하자. 피곤한 몸으로 집까지 걸어가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 * *

쿵, 쿵쿵.

어째 아침부터 거실 쪽이 시끄럽다. 아니, 아침은 아니구나. 오후 한 시가 넘었네.

머리만 대충 정리하고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벌컥!

별안간 방문이 열렸다.

보나 마나 범인은 형이다. 내가 분명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랬는데?

"송기현! 너 대체 어제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뭐가. 그리고 노크."

…똑똑.

슬쩍 눈을 굴린 형이 뒤늦게 문을 두드리는 시늉만 했다.

기가 차서 헛웃음 지었더니, 잔소리 더 들을까 봐서인지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아, 그것보다 뉴스! 지금 뉴스에 네 얘기 나오는 중이라고."

"무슨 뉴스."

"당일 각성한 E클래스 헌터가 하루아침에 6급 사냥터를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난리인데 버스 CCTV에 찍힌 게 너잖아."

"아하."

어쩐지… 대낮부터 부재중 전화가 뭐 이리 많이 쌓여 있나 했다.

보안이 이따위라니.

내 개인 정보는 이미 공공재나 다름없다니까.

쭉쭉 목록을 훑으니 양규혁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도 하나 있었다. 뭐. 급한 일이면 다시 전화하겠지.

"송기현."

"응?"

"…너 진짜 송기현 맞지?"

형이 약간의 불신과 불안이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 의심병이 도진 모양이다.

몬스터가 내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형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인면귀(人面鬼)라는 이름의 인간을 흉내 내는 몬스터가 존재한다.

우리 부모님을 죽인 것도 그 인면귀다.

원래 몬스터들은 자신의 서식지인 사냥터를 잘 벗어나지 않는데, 그런 특이한 개체가 가끔 있었다.

솔직히… 난 너무 어렸을 때고.

길어지는 회귀 탓에 '열일곱 살 이전'의 과거가 마모되어 그날 일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형한텐 트라우마나 마찬가지니까.

이럴 때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뭐야."

"의심되면 내 맥박 짚어보라고. 송기현 맞으니까."

인면귀들은 인간의 살가죽을 뒤집어쓸 순 있지만 내부에 피는 흐르지 않는다.

당연히 맥박도 뛰지 않고.

그러니 내가 정말 인면귀였더라면 이렇게 고분고분 확인해 보라고 손목을 내밀 일도 없었을 거다.

형이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불신의 눈초리로 볼 땐 언제고 이번엔 친동생을 의심해 버렸다는 걸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했다.

정말 귀찮은 형이다.

"…미안, 기현아. 의심해서."

"미안할 것까진 없지."

[( ¯へ¯ )] [조금 더 유하게 오해를 풀어도 될 것을.]

글쎄.

나는 단지 쓸데없는 덴 노력을 소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앞으로 또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효율적인 선택지였기도 했고.

…음. 그래도 역시 너무 까칠했나.

젠장.

괜히 미안해지게 만들고 말이야.

[ ∠( ᐛ 」∠)_ ] [이 녀석, 탓하지 말아라. 너도 참 솔직하지 못하구나.]

뚜루루-

마침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색 열매를 먹고 서 있던 형은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놓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나는 도망가는 형을 위해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은 동남쪽 사냥터 토벌 건으로 나와 인터뷰가 하고 싶으니 시간을 내줄 수 있냐는 것.

이런 업적들은 밖으로 드러낼수록 클래스 산정에 도움이 된다.

원활한 탑 등반을 위해 높은 클래스가 필요했던 난 당연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곧장 약속 장소를 잡았다.

그날, 내 인터뷰 내용은 일파만파 퍼져 사람들의 입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 * *

[국내서 초신성 등장? 이목 집중]

각성자 등록을 막 마친 E클래스 송기현 헌터는 당일, 서울시 동남쪽에 있던 6급 사냥터 토벌을 홀로 성공하는 데에 성공했다…

평균적인 데이터를 생각했을 때 현재 송기현 헌터는 B클래스 혹은 그 이상에 준하는 수준… 5년 이내 A클래스까지는 무난하게 승급할 거라 전망 중이다.

한편 송기현 헌터는 한 인터뷰에서 "내 최종 목표는 탑 올 클리어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직 성인도 안 된 애가 각성하자마자 6급 사냥터를 완전 토벌? 걍 각성 날짜 속인 거 같은데

┗얘 언론에 돈 뿌렸냐? 평가 죠낸 후하네ㅋ 양규혁도 아직 A클래스가 아닌데

┗탑 올 클리어라니ㅎㅎ 아직 애라서 그런가 순수하구

┗6급 구역이면 웬만한 B클래스도 혼자선 절대 못 깹니다. 이게 조작이 아닌 사실이라면, 미래가 어떻다 장담할 순 없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겠네요.

6급 사냥터를 하루아침에 홀로 토벌하고도 상처 하나 없던 송기현 헌터의 잠재력은 아직 전부 드러난 게 아닐 거라는 것.

제3화

기자와의 인터뷰를 끝내자마자 동쪽 사냥터로 향한 나는 드디어 「네크로맨서」를 써보기로 했다.

[S.네크로맨서] Lv. 2

기본 효과

- 악취가 나지만 충성심 깊은 스켈레톤 2구를 권속으로 둔다. 단, 70레벨 이하 몬스터에 한한다.

- 권속은 상세 레벨이 드러나며 공적치에 따라 레벨이 오른다. 일부 필드에서 생존력 및 재생력이 대폭 상승한다.

추가 옵션

- <1> 모든 권속의 힘을 1.5배 추가 증가시킨다.

연계 기술

- 그림자 보관(1단계)

: 자신의 그림자에 권속을 보관한다. 유지에 필요한 마나가 부족해지면 소멸한다.

"오랜만에 악취 나는 뼈 친구들을 또 보겠네."

그러려면 먼저 준비물부터.

몬스터의 사체가 필요하다.

[끽!]

[카악!]

되도록 육체를 훼손하지 않고 놈들의 생명 코어만 깔끔하게 파괴했다.

머리도 잘 보존시켜야 한다.

목이 날아간 사체는 스켈레톤으로 일으킬 수 없다는 번거로운 조건이 있는지라.

그리고 능력을 습득하게 되면, 자연히 깨닫게 되는 시동어는 『응하라』.

여기까진 전 회차에서 몇 번 시도해보고 알게 된 사실이다.

본래 기본 설명만으론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스스로 알아내야만 하는데, 이미 써본 거라 다행히 그 수고를 덜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지라퍼는… 이러한 능력과 관련된 설명을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다.

맨날 맨입으로 가르쳐 줄 수 없다며 튕기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이런 데나 오지랖 좀 떨지.

[ ( ・᷄ὢ・᷅ ) ] [씁. 가르쳐 줄 수 없는 건 가르쳐 줄 수 없는 거다. 스스로 해내는 어린이가 되도록.]

[캭!]

[취르륵....]

고블린과 오크 몇 마리가 죽어 나뒹군다. 사체는 이만큼 준비하면 된 것 같다.

사체 더미를 쭉 훑다가, 30레벨대인 오크 두 마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곳 동쪽 사냥터는 8급이라서, 30레벨대까지만 서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뭐. 지금은 일단 능력 성능을 살펴보려는 것뿐이니까.

나중에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그때, 더 강한 놈으로 바꾸면 되는 거다.

시체 위에 손을 두며 시동어를 속으로 읊었다.

거무죽죽하고 흉흉한 기운이 감돌자 사체의 살점이 빠르게 녹아 사라진다.

그 사이로, 희고 굵은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죽음의 흔적이 주인이 될 자의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해당 스켈레톤을 종속시키겠습니까?]

YES.

덜그럭-

직후 널브러진 뼈들이 움직인다.

동시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악취가 풍겨왔다.

이 냄새가 그 뭐더라, 죽음의 냄새라고 했던가.

[(⌒_⌒)] [그렇다.]

백골이라, 사체 썩는 수준의 악취는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보다 키가 큰 두 놈이 텅 빈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네크로맨서」 능력으로 확인해 보니 두 녀석의 상세 레벨도 보였다.

[직계 권속 목록(2/2)]

- Lv. 35 오크

- Lv. 35 오크

35레벨.

가끔 20레벨 후반대로도 나타난다고 들었으니 이 정도면 오크치곤 시작이 괜찮은 레벨이었다.

악취는 좀 나지만 주인을 절대 배신하지 않고.

레벨만 올려준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존재들.

내가 「네크로맨서」 능력에 가능성을 느꼈던, 내게 도움 될 거라 직감했던 점이 바로 이러한 부분들이다.

"으억, 씨."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직한 비명이 들렸다.

근처를 지나가다 움직이는 뼈다귀를 보고 놀란 모양.

남자는 방향을 틀어 도망가 버렸다.

사실 네크로맨서는 지난 회차에서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기피 대상이었다.

네크로맨서 본인들도 능력을 드러내길 꺼리거나, 감추고 있다가 우연히 드러난 경우가 많았다.

스켈레톤을 유지하려면 마나를 계속 소모해야 하다 보니 나 같은 경우가 아니면 제대로 쓰는 일도 없었고.

그래서 한때는 나조차도 이게 S등급 능력인지 몰랐지....

그렇기에 이해한다.

뼈다귀-그것도 몬스터 뼈다-와 함께 다니는 인간. 아무래도 꺼림칙하긴 하니까.

'우리 애는 물지 않아요'라 말해도 믿는 사람은 그다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남들 시선 같은 거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냥 이 능력이 장차 내 회귀를 끊어줄 열쇠이길 바랄 뿐이었다.

"너희는 뭘 잘할 수 있지?"

본격적으로 스켈레톤들을 사용해보기 전에 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두 녀석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곤 서로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날 돌아보며 턱을 덜그럭거렸다.

말을 알아듣는 건 확실하고. 표현도 하려는 듯하지만 역시 발성은 안 되는 모양.

의미를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돌연 두 녀석이 다른 행동을 보였다.

달그락, 달그락.

한 놈의 두꺼운 손뼈가 둥글게 말린다.

둘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드니 또 다른 오크가 어슬렁대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취익?]

살아 있는 오크는 뼈다귀가 되어버린 자신의 동족을 보고 당황한 것처럼 굴었지만....

파악!

스켈레톤이 그 틈에 달려가 제 동족의 머리통을 박살 내버렸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어우.

생각보다 쩌는데?

딱딱, 따극.

동족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짓눌러버린 스켈레톤이 나를 보며 이를 부딪쳤다.

응. 합격.

당분간은 이 오크 두 녀석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하다.

* * *

이후, 나는 오크 스켈레톤 두 마리를 앞세워 3주 내도록 쉬지도 않고 사냥터를 토벌하고 다녔다.

그새 '공적치'라는 것도 쑥쑥 쌓였는지 두 녀석의 레벨이 잔뜩 올라 있었다.

[직계 권속 목록(2/2)]

- Lv. 60(▲25) 오크

- Lv. 60(▲25) 오크

그렇다 보니 웬만한 놈들은 뼈 주먹 하나로 잡았다.

거기다 공적치와 별개로, 스켈레톤들이 잡은 몬스터의 마나는 전부 내게 흡수되었기에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내 성취도 5성으로 업.

스켈레톤들이 잡아서 떨군 아이템도 모두 내 거다.

…물론.

나도 너무 염전 노예 부리는 듯해서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도 된다고 허락했다.

그랬더니 검과 쇠몽둥이를 하나씩 가지고 갔다.

무기까지 장착하니 더 살벌하더라.

덕분에 토벌은 순조로웠다.

이는 사람들이-주로 비각성자-환호하기에 딱 좋은 이슈였으므로 세간은 내 행동을 항상 주시하며 들썩였다.

[송기현, 이어지는 토벌 행진!]

["사냥터가 없다?" 깨끗해진 서울]

[6급 사냥터, 종적을 감추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시선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국내 각성자, 즉 헌터들 사이에서의 내 여론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우려 섞인 목소리… 국내 헌터 사회가 흔들릴 수 있어]

[연이은 사냥터 토벌에도 "마냥 기뻐하기엔…"]

어찌 보면 자기들 밥벌이 뺏어가는 나쁜 놈이니까.

몬스터 웨이브 자체는 통상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편이라 할 수 있지만 다시 발생하는 게 언제가 될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전까지 협회가 지급해주는 월급으로 연명하거나 다른 일을 겸해야 하니, 날 좋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뭐. 당연히 내가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이해해줘야 할 이유도 없지만.

[ ∠( ᐛ 」∠)_ ] [이제 국내 사냥터도 몇 안 남았군.]

그렇네.

남아 있는 거라곤 멀어서 보류하고 있는 한반도 남부 구역과 경기도 내에 있는 10급, 9급 몇 개 정도이니.

한국에서 가장 높았던 6급 사냥터는 이미 다 돌았다.

국내에 남은 자잘한 사냥터만으론 이 이상의 성취를 이루기 힘들기에, 슬슬 해외로 눈을 돌릴 때가 온 것이다.

흠.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을까.

미국, 중국 등 탑이 세워진 나라에는 상당한 네임드 사냥터들이 존재한다.

최소 5급 이상으로 60레벨대 몬스터까지 나오는 구역이었다.

문제는.

그런 네임드 구역일수록 국가적인 관리를 받고 있으며 출입 제한이 엄격하단 점이었다.

길드에 소속되면 좀 더 편하게 사냥터를 돌 순 있겠지만… 이번 회차에서 나는 어느 길드에 소속될 생각이 없었다.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덜그럭-

문득 머리 위로 그늘이 지기에 고개를 들었다.

날 내려다보고 있는 듯 보이는 텅 빈 해골의 눈구멍.

그들의 뒤로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산을 이루고 있다.

최근 무기 하나씩 장착하더니,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둘이 알아서 사냥터를 털어버리곤 했다.

"수고했다."

그러자 오크 두 녀석이 빠르게 이를 부딪치며 어깨뼈를 상하로 들썩였다.

혹시 기뻐하고 있는 걸까?

부르르-

마침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양규혁이다.

몇 주 전, 부재중을 남기고 처음이었다.

"예. 송기현입니다."

-아 저 양규혁입니다.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

저번에 부재중을 띄우고는 연락을 돌려주지 않은 걸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시간 됩니다. 무슨 일입니까?"

-송기현 씨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요. 오늘까지 확정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는데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에요.

"제안하고 싶은 거요?"

-네. 혹시 송기현 씨, 5급 사냥터 토벌에 관심 없으세요?

"없을 리가 있습니까. 제가 최근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진 양규혁 씨도 잘 알 텐데요."

-하하. 그렇죠. 반쯤 확신하고 꺼낸 말이긴 해요. 사실 저한테 사냥터 토벌 오퍼가 들어온 상태거든요.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블루마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양규혁은 거기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는 덕분에, A클래스로 올라가는 게 더 쉬웠던 거니까.

근데 그걸 왜 나한테....

-괜찮으면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뭐?

-저 포함해서 총 네 명이 토벌 팀에 들어와 있어요. B클래스 둘, C클래스 둘. 승인은 받았고요. 토벌 일정은 일주일로 잡혀 있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더 빨리 끝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부담스러우시면─

"언제입니까?"

-네?

"가는 날이 언제냐는 겁니다. 그날부터 시간 비워놓게. 가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설마 여기서 인맥 빨이 터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이게 웬 떡이람.

힘들게 남부까지 내려가서 8급, 9급짜리 열심히 토벌해봤자 5급 사냥터 하나만 못하다.

그런 때에 온 제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 ( ˙ꇴ˙ ) ] [이 인연이 이렇게 풀리는구나.]

그러니까 말이야.

그때 번호 받아놓길 잘했다니까.

-내일 저녁 일곱 시까지 제 본가로 오실 수 있겠어요? 전용기 있어서 그거 타고 갈 거거든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양규혁은 본가 주소를 가르쳐 주고 내일 보자며 전화를 마쳤다.

…'블루마린'인가.

5년 전에 처음 발생했으나 억제에 실패한 뒤, 야금야금 영역이 넓어져 지금은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게 된 구역이다.

그리고 이젠 내 훌륭한 점심이 될 운명이지.

[ (ㆆ_ㆆ) ] [매우 사악한 얼굴이도다. 속마음이 너무 빤하게 드러나는구나.]

크흠.

따극따극-

"너희는 왜 웃어."

딱....

…아무튼.

원래 그곳은 양규혁과 기존 팀 멤버들의 노력으로 '반 토막' 내는 데에 성공할 예정이지만.

이번엔 나로 인해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벌써 전 회차와는 알고 있던 것과 많은 게 달라졌다.

물론 변수는 항상 많긴 했지만, 이번 회차만큼 그 정도가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대로면 앞으로 더 많은 일이 달라질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전에 없던 의욕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연계 기술인 '그림자 보관'을 이용해 스켈레톤들을 그림자에 넣은 뒤, 이만 집으로 향했다.

제4화

그날 저녁.

"해외에 나갈 일이 있으니 다녀오겠다"는 말을 들은 형은, 내 예상대로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형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형한테 걱정을 받아야 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시키면 되는 거였으니까.

"저건 누가 산 거지?"

"너지...."

"이건?"

"그것도...."

"저건?"

"그, 그것도...."

내가 근 3주 만에 모은 마정석으로 벌어들인 돈은 형이 1년 내도록 일해야 겨우 모으는 돈보다 훨씬 많았다.

그걸로 TV도 최신형으로 사고, 값비싼 VR게임기도 사고, 차도 최신형으로 두 대 장만했다.

집도 새로 사려고 생각 중이다.

형이 지금 걸치고 있는 옷부터 시계까지 전부 내가 쓰라고 최근에 사준 것들이다.

형은 그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나는 지난 3주간, 형이 모았던 마정석들보다 훨씬 크고 등급 높은 마정석을 모았지."

"그렇지...."

"단독으로 완전 토벌한 사냥터 수만 해도 벌써 20개가 훌쩍 넘고."

"그래, 알지…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너는 아직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미성년자고―"

"그 열일곱 살보다 못한 스물다섯 살이 여기서 할 말이 있다고? 내 걱정할 시간에 본인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데."

"…할 말이 없습니다."

기어코 패배를 인정한 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말로 이겨 보려다가 처참하게 실패하고 꼬리를 만 모습이었다.

그렇게 형을 안심(?)시킨 후, 다음 날.

양규혁의 본가로 향한 나는 으리으리한 '집' 크기에 넋을 놓아야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양규혁 집이고 앞마당 뒷마당이란 말이지?"

대문 앞마당은 사냥터 크기만 하고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은 잠깐 이곳이 한국임을 잊게 한다.

이만한 땅덩어리가 전부 양규혁의 사유지라니.

서울에 따로 아파트도 있으면서.

전용기와 개별 비행장, 활주로까지 소유하고 있을 정도니 돈 많은 부자 집안일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인맥일 줄이야...."

[(⌒_⌒)] [인맥 장사 성공했구나.]

벨을 누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린다.

끼익-

마당으로 들어서니 대문은 저절로 닫혔다. 저택 안에서 수동으로 작동시키는 모양이다.

나는 주변을 구경하며 올라갔다.

마침 반대편에서 마중 나오는 양규혁이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반갑게 인사했다.

"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준비 끝내뒀으니 바로 갈까요?"

조금 걸음을 서두르는 것 같아 나도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비행기에 올라타고 얼마 안 있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새삼 감탄스러운 크기의 사유지였다.

이 정도면 평생 놀고먹어도 되겠는데. 아니지. 이만한 시설과 저택을 관리하려면 오히려 반대려나.

"혹시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양규혁이 맞은편에 앉는다.

나는 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의 양규혁을 지켜보다가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저한테 토벌 제안을 해준 겁니까?"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물음.

그러나 양규혁은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한 듯 오히려 눈을 빛내면서 씩 웃었다.

그건 어떤 야망을 품은 눈이었다.

"저는 송기현 씨의 잠재력을 높이 사고 있거든요. 아,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그냥 전 '싹'이 보이는 사람을 원하는 것뿐이니까."

싹이라.

…그러고 보면.

이전 회차에서 알음알음 알아왔던 양규혁도 마음속에 강한 야망을 품고 있었던 거 같다. 싹수 보이는 헌터들은 사냥터로 데려가 '버스 태우기'도 했었으니.

그건… 내가 매 회차 해오던 것들과도 비슷했다.

성취 빠르게 올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거나-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마나 누적치 쓰는 법에 대해 알려주거나.

괜찮은 능력 카드가 발견되면 동료에게 넘겨주기도....

하지만 양규혁은 끝끝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고. 나와 인연이 깊지 않아 신경 쓰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양규혁 씨도, 탑 올 클리어라는 허무맹랑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신가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물었다.

자조 섞인 말에 그는 도리어 기쁜 느낌으로 웃었다.

음. 내가 제대로 맞춘 것 같다.

"인터뷰 봤어요. 진심이에요?"

탑 올 클리어가 최종 목표라고 말했던 그 인터뷰 말하나 보다.

"그럼 설마 허세를 부렸을까요."

"흠… 뭐, 하긴. 그럴 사람으로 안 보이기는 하죠. 송기현 씨가. 그러고 보니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신 걸로 아는데."

"열일곱 살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그렇다.

여러 생각을 품은 듯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양규혁이 소리 없이 미소했다.

"송기현 씨는 애늙은이 같아요."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거죠? 제가 또 사람을 잘 판단하거든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애늙은이 같다'는 말에 사실 반박할 여지는 없으니.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젊은 날의 패기, 반짝이는 의욕 같은 건 이미 깎여나간 지 오래다.

죽지 못해 살아 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

'…전 회차에서 어떻게든 양규혁을 공략 팀에 합류시켰다면 좀 더 많은 탑을 클리어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봤자 도출해낼 수 있는 답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올 클리어는 무리였을지언정 아예 첫 공략인 것과 한 번이라도 들어가 본 건 천지 차이니까.

내가 만약 이번 회차에서 모든 탑을 오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이 등반해야 하는 탑이 세 개나 있다.

그것도 전부 트리플.

분노의 탑과 동일한 헬 난이도.

....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송기현 씨? 왜 그러세요?"

"...."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아마 예상하건대 엄청 안 좋긴 했을 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내저었다.

양규혁은 신경 쓰이는 듯, 내 눈치를 살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 (ง`0´)ง ]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듯이.]

어딘가 다정함이 느껴지는 메시지.

확실히 여기서 더 깊이 심연에 빠졌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잊자.

지금 당장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사안들이니.

머릿속에서 걱정거리를 싹 지웠다.

미국 도착할 때까지 눈이나 좀 붙여야 할 것 같았다.

* * *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땐 이른 아침의 햇살이 창문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덜컹이는 느낌이 몸으로 전해진다.

마침 착륙을 시도하고 있던 모양.

"잠 덜 깬 것 같은데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지 않다.

아무리 안락한 VIP석이라 해도 비행기 안에서 자는 것은 너무 불편했다.

덕분에 자면서 몇 번이나 뒤척였는지 모르겠다.

탁.

완전히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자 텅텅 빈 비행장이 나를 반겼다.

이 비행장은 블루마린과 가까워서, 현재 일반인들에겐 개방되어 있지 않고 헌터들만 쓰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나는 스켈레톤 두 마리를 미리 꺼내놓았다. 그때 마침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Hey!"

돌아보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보인다. 딱 세 명. 그들이 바로 이번 토벌을 강행하는 기존 멤버인 듯했다.

"윽! 이봐, 꼬맹이! 그 몬스터들의 엄청난 냄새로 날 죽이려는 셈이야? 그렇다면 반쯤 성공했어."

가까이 다가온 무리 중 하나가 코를 잡으며 영어로 호들갑 떨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완전 탈색으로 노랗게 물들인 머리가 인상적인 사내다.

그가 누구인진 이미 잘 알고 있다. 양규혁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니까.

이름은 루카스 볼라미르.

저 녀석도 곧 A클래스로 올라가게 될 B클래스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이거였다.

미친개.

음. 아주 그럴싸한 별명이다.

스위치 눌리면 진짜 고삐 풀린 망나니가 되어 버리는지라.

"네 정수리에서 나는 냄새보단 덜한 것 같은데. 평소에 좀 씻고 다니지 그래?"

유창한 영어로 시비를 받아줬더니 서양권 인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동양인이 영어 잘하는 거 처음 보나?

딱딱!

오크 스켈레톤들이 이를 부딪쳤다.

왠지 동조해주는 느낌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양규혁도 슬쩍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숨겼다.

루카스 볼라미르는 새침하게 콧김을 뱉었다.

"흥! 정말 뭘 모르는 꼬맹이군. 나처럼 잘 씻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 해. 일주일에 세 번은 꼭 머리를 감는다고!"

그리고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Mr.규. 네크로맨서가 온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믿을 만한 거 맞습니까? 그것도 상당히 어려 보이는 친구군요."

안경잡이가 불만스럽게 나를 훑어본다. 네크로맨서에 어린 친구. 이미 그의 눈에는 편견이 가득 자리 잡혀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당해줄 인성이 안 되는 나는, 시비에 친절히 시비로 되받아 주었다.

"혹시 약할수록 잘 짖는다는 말은 알고 있나? 내가 보기에 그쪽은 정말 잘 짖는 것 같군."

말대답에 신경이 몹시 거슬렸는지, 위에서 내려다보던 안경잡이의 눈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거기에 혐오감마저 어리는 눈.

그 혐오감을 마주한 난 오히려 짜릿함을 느꼈다.

자기가 사자인 줄 알고 털을 부풀린 포메라니안이 발밑에서 으르렁대는 것 같아 귀엽기까지 하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났을까.

안경잡이의 눈이 이제는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핏대를 잔뜩 세우며 당장이라도 사자후를 외칠 듯 변했다.

"그만! 기다려요. 싸우지 말고, 네? 일단은 음. 우리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어때요?"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막을 생각인 듯 끼어든 남자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도 안경잡이가 나를 노려보고만 있으니 그는 냉큼 말을 덧붙였다.

"제 이름은 안데르만 허셀이라 합니다. C클래스지만, 사냥터 내부 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이번에 대장을 맡게 됐어요. 그쪽에 대해서도 말해 주실래요?"

안데르만 허셀이 내게 권유했다.

쏘아보는 안경잡이를 피하지 않고 마주한 채 말했다.

"송기현. E클래스. 네크로맨서다."

그러자 안경잡이는 한쪽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리며 코웃음과 함께 받아쳤다.

"데이비드 포르첸. C클래스. 구속자다."

구속자.

네크로맨서처럼 「구속자」 능력을 가진, 그 능력을 주로 쓰는 헌터들을 부르는 명칭이다.

흠. 잘 쓰면 썩 좋은 능력이긴 하지.

"좋은 능력이긴 한데. 아무래도 주인을 잘못 만난 것 같군."

"그런 그쪽은 아주 찰떡이군요. 허약한 해골 뒤에 숨어 아양이나 부리는 네크로맨서라니."

안데르만 허셀이 이마를 짚었다.

풉, 웃은 양규혁이 소개를 이었다.

"전 양규혁입니다. B클래스고요."

"그리고! 두구두구두구두구! 이 몸이 바로 그 유명한 루카스 볼라미르 님이시지! 자, 자. 덕담 시간 끝났으면 얼른 가자고. 이 루카스 님이 앞장설 테니."

"그, 그래요! 일주일 안에 승부 보려면 빨리 움직여야죠. 다들 이동합시다."

루카스 볼라미르가 생각 없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문 안데르만 허셀이 고개를 끄덕인다.

양규혁도 이동하고.

데이비드 포르첸은… 이동하기 전, 나를 흘겨보기에 주머니에서 가운뎃손가락을 꺼내주었다.

그랬더니 좋아서 흥분했는지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아들과 해변을 부르짖으며 가버렸다.

어떤 토벌 여정이 될지 기대된다.

특히 안데르만 허셀, 데이비드 포르첸은 본래 이번 토벌 행군으로 사망하는 인물들이기에 저들의 미래도 궁금했다.

[ ∠( ᐛ 」∠)_ ] [그나저나, 네 형이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은데. 일주일 일정이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괜찮은 것이냐?]

말하면 반대 목소리만 더 커질 텐데 뭐 하러? 나중에 뉴스로 확인하겠지.

뭐,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일주일보다 훨씬 단축시킬 수 있겠지만. 솔로 토벌도 아니고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나는 가능하면 잔챙이들은 저들에게 맡기고 알짜배기 위주로만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앞서가는 일행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뒤를 따라갔다.

제5화

블루마린 사냥터 입구.

그곳까지 도착한 일행을 앞에 두고 안데르만 허셀이 이번 토벌의 룰을 설명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해 뿔뿔이 흩어지게 될 시에는 바로 신호탄을 쏩니다. 그리고 3일 안에 사냥터를 벗어나 대기.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고 판단하고 포기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판단하고 포기.

어쩌면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누구도 불만은 표하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한 곳임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한계 또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아가 돼서 울지 않게 잘 따라와야 할 겁니다, Mr.송. 당신의 역겨운 해골 친구들론 버티기 힘든 곳일 테니."

데이비드 포르첸이 삐딱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난 긴장감이 감도는 일행을 뒤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짹짹-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될 만큼 조용한 사위. 적막함을 해소해주는 건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뿐이다.

반면, 바닥에 깔린 안개는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 ( ˙-˙ ) ] [안개가 짙군. 슬슬 놈들의 구역인 것 같은데.]

음. 분명, 블루마린 물가에서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가 팔눈뱀장어랑 인어랑 머드맨이었던가?

[ ( ˙ㅁ˙ ) ] [그렇다.]

"다들 조심하세요!"

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촤악!

안데르만 허셀의 외침 직후.

안개 너머에서 물방울이 쏟아졌다.

그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무언가의 실루엣은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형히 빛나는 눈이 여덟 개.

"Eight-Eyed Eel로군."

누군가 나직이 뱉은 말을 끝으로, '팔눈뱀장어'가 안개 속에서 위용을 드러냈다.

[팔눈뱀장어]

- 넓적한 안면에 여덟 개의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크기는 다양하나 대부분 중량급이다.

- 평균 ±50레벨에서 출몰

- 6급 이상 구역에서부터 서식

벌어진 아가리에서 분비액이 뚝뚝 떨어지고.

치이이익-

그것과 닿은 식물이 금방 녹아 죽어버렸다. 몸집에 눌린 나무는 꺾이고 돌과 건물은 부식되며 연기를 뿜는다.

팔눈뱀장어는 몸집의 크기도 엄청나지만 저 이빨이 품은 강한 산성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물론 나는 예외다.

「생명의 숨결」의 힘이 없더라도, 놈의 분비액 수준으론 내 피부를 뚫지 못하므로.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래도 마나 양이 제법 짭짭할 것 같아서 내가 나설까 했는데, 데이비드 포르첸이 선수를 쳤다.

검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는 모양새가 아주 여유롭다.

다른 일행들도 팔눈뱀장어 정도는 그리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다들 적극적이라, 이대로면 몬스터 선점을 두고 신경전이 생길 것 같다.

[(⌒_⌒)] [어쩔 텐가?]

어쩌긴. 대놓고 앞에서 가로챘다간 나쁜 놈만 돼버릴 테니까 눈속임을 써야지.

아이템은 상관없지만, 소중한 마나까지 전부 뺏기면 곤란하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그동안 데이비드 포르첸이 소매를 살짝 걷었다. 팔목에 차고 있는 것은 아이템 종류로 보였다.

휘리리릭!

팔로 허공을 가볍게 쳐내니, 촉 달린 실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배회하던 실은 팔눈뱀장어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카아악! 칵!]

화난 팔눈뱀장어가 몸부림치기 시작했으나.

실은 생각보다 튼튼해 버텨주었고, 그 틈을 노린 데이비드 포르첸이 능력을 발동했다.

"『Restriction』!"

순간 팔눈뱀장어의 움직임이 멈춘다. 꼭 돌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과 상대를 잇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구속자」는 성취가 높고, 컨트롤이 좋은 능력자가 쓰면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능력이었다.

타악!

뛰어오른 데이비드 포르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으로 팔눈뱀장어의 눈알을 찔렀다.

푹!

그러나 아쉽게도.

저래선 치명타를 입힐 수 없다.

바로 이때.

교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나는 돌멩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힘껏 튕겼다.

퉁, 쉬익!

매우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 돌멩이가 일순 번쩍이고. 정확히 팔눈뱀장어의 급소, 생명 코어가 위치한 곳에 파고들었다.

투욱!

그리고.

그걸 눈으로 좇을 만큼 동체 시력이 좋거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탁.

데이비드 포르첸이 쓰러지는 팔눈뱀장어를 뒤로하며 검을 거두고 내려선다.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게,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얼굴이었다.

"제법이군. 물론 이 루카스 님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수고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행도 데이비드 포르첸이 팔눈뱀장어를 잡았다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다.

물론.

팔눈뱀장어의 마나는 착실히 내게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아이템에는 주인이 없지만 마나는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힌 사람에게로 흡수되는 것이므로.

훗.

한 방에 보내버리는, 이게 바로 스톤 불릿의 위력이지.

[ ( ¯⌓¯ ) ] [그걸 그런 식으로 가로챌 생각을 하다니. 악마 같은 녀석이로다.]

응. 칭찬 고맙고.

그 뒤로도 상황은 비슷했다.

뒤에서 느긋이 지켜보면, 일행들이-특히 데이비드 포르첸과 안데르만 허셀-열심히 고생하면서 몬스터를 잡아두고.

막타는 내가 친다.

쇼는 남이 하고 이득은 내가 보고.

사실 원래 계획은 알짜배기만 먹으려는 거였는데, (자칭)스톤 불릿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계속 쓰게 되었다.

덕분에 체력은 아끼고, 마나는 듬뿍 얻을 수 있었다. 6성도 조만간일 듯하다.

아이템은, 뭐… 어차피 나중엔 차고 넘치니까 당장 욕심낼 필요도 없고.

썩 만족스럽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다 잡아버리니 스켈레톤들의 공적치는 올릴 수 없었다는 것.

또, 마나 누적치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것 정도일까?

뭐. 마나 누적치의 경우엔 전 회차 때도 겪었던 일이니. 이건 탑을 등반할 즈음 되어야 제대로 모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군요."

그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앙심을 가진 데이비드 포르첸이다.

"Mr.규. 앞으로도 지인과 함께 나올 생각이라면 지금보다 더 잘 생각해서 데려오셔야겠습니다."

그에, 양규혁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어느 순간부터 토벌에서 반쯤 손을 떼고 있던 루카스 볼라미르는 우리를 방관하며 지켜볼 뿐이다.

나도 특별히 대꾸해주진 않았다.

휘잉-

묘한 대치 상황, 한차례 냉랭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이, 이만 쉬어가죠!"

분위기가 안 좋다고 생각한 안데르만 허셀이 휴식을 제안했다.

안 그래도 밤이 찾아오는 중이다.

적당한 곳에다 진을 친 후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일주일 행군을 무사히 이어 나가려면 체력 관리도 필요하니까. 내가 아닌 일행들이 말이다.

타닥, 타닥.

모닥불을 피워두고 둘러 앉은 때.

나무 기둥에 기대어 쉬고 있을 무렵, 안데르만 허셀과 양규혁의 대화가 들려왔다.

"종일 사냥터를 돌았는데도 갈 길이 멀군요. 이래선, 일주일 안에 얼마나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음. 지금 상황으로는 일주일 안에 반 토막이라도 내면 기적이겠네요."

안데르만 허셀의 걱정에, 양규혁이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그걸 듣고 있는 난 코웃음을 삼켜야 했다.

양규혁이 아닌 척 내숭을 떨고 있었으니까.

그는 아직 자신이 쥔 손바닥 안을 전부 보여주지 않았다.

내 생각엔 그가 지금 숨기고 있는 S등급 능력을 꺼내면 혼자서 블루마린 3분의 1은 토벌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 이유.

간단하다.

지금은 팀 동료로 있다지만, 조만간 있을 국제 클래스 랭크전에선 전부 라이벌.

그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수를, 혹여 드러날지도 모르는 약점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던가?

굉장히 이해타산적인 녀석이라고.

솔로 토벌이 아니기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 건 나나 양규혁이나 똑같다.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Mr.송."

돌연 안데르만 허셀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뭔가 싶어 쳐다보니, 그는 어째선지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뉘앙스로 말을 이었다.

"「네크로맨서」로 권속을 유지하는 데엔 많은 마나가 소모된다고 들었거든요. 제가 보기에, 지금 당신의 능력 유지 시간은 상당한 것 같은데 괜찮은가요?"

그러니까. 무리해서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걱정이다. 옆을 돌아보았다.

달그락.

오크 스켈레톤 두 마리도 나를 내려다본다.

역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대기에 있는 마나를 흡수해서 그걸로 유지 중인 거라서요."

내 마나 하트가 비는 족족 대기 중의 공짜 마나를 쑥쑥 흡수해서 공급하는 거다.

그러니 부담될 건 없었다.

그런데, 나를 보는 일행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데이비드 포르첸은 크게 비웃었고. 안데르만 허셀은 당황한 얼굴로 있다가 뒤늦게 웃었다.

"하하. 대기 중의 마나를 흡수한다니, 듣도 보도 못한 발상이에요."

"하지만 흥미롭군.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성취를 좀 더 빠르고 쉽게 올릴 수 있겠지."

"좋은걸요. 혹시 대장장이라면 그런 아이템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이없는 소리 그만들 하세요. 애초에 대기 중에도 마나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애들이나 생각할 법한 공상입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대기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뭐… 나로선 익숙한 반응이다. 애초에 이해를 바라고 꺼낸 말도 아니었고.

그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_⌒)]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라. 다른 이는 몰라도 이 몸이 다- 알고 있지 않으냐.]

누가 슬퍼하는데. 네가?

[ (≖ᴗ≖ ) ] [그런 걸로 해주지.]

그 말투. 이모티콘. 뭔데.

찝찝하네.

[ ( ͜♡・ω・) ͜♡ ] [♥]

징그러우니까 치워라.

"쉿."

그때였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 순식간에 루카스 볼라미르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동시에.

내게도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래쪽. 그것도 아주 깊은 곳.

나는 높아진 육감, 감각 스탯 덕분에 잡아낼 수 있었던 건데. 그는 자기 본연의 감각만으로 그 기척을 잡아낸 모양이었다.

"음,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어디지?"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래도 정확한 위치까지 잡아내지는 못하는 듯.

그래도 놀랐다. 루카스 볼라미르가 가진 감각의 날카로움은 남다른 것이었기에.

[ ∠( ᐛ 」∠)_ ]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났군.]

그러니까. 날 때부터 잘난 놈은 꼭 하나씩 있단 말이지.

"이상한 소리?"

의문을 표하며 가늘게 눈을 뜬 양규혁의 얼굴에 긴장이 감돈다. 루카스 볼라미르의 감을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았다.

"제겐 안 들리는군요."

반면 데이비드 포르첸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고. 안데르만 허셀은 오히려 루카스 볼라미르를 걱정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 아녜요? 음, 오늘 보초는 제가 설 테니까 루카스는 먼저 쉬셔도...."

"흥. 이 루카스 님의 감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지. 분명 근처에서 불쾌한 소리가 들렸단 말이다."

루카스 볼라미르가 급기야 바닥에다 귀를 가져다댈 즈음 나도 아래쪽에 집중했다.

쿠그그그그....

소음이 점점 가까워진다. 땅밑 깊은 곳을 유영하던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크기도 엄청나게 큰 것 같다.

내 감이 맞다면-높은 확률로 맞겠지만-, 이건 60레벨대 중에서도 초 중량급에 해당하는 몬스터 그레이트 웜이었다.

음. 이거 이대로 있다간....

[ ╭( ・ㅂ・)و ] [튕겨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경험을 하겠구나!]

역시. 그렇겠지?

쿠그그그그긍...!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섰다. 튕겨서 올라가더라도 이후에 제대로 착지하기 위함이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예민해져 있는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 꽂힌다.

직후.

놈이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고.

짜자자자작!

일대가 거미줄처럼 쫙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돌가루가 튀고 나무와 건물은 장난감처럼 기울어졌다.

"...! 모두 조심...!"

양규혁이 뒤늦게 외쳤으나. 그들이 대비하려고 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콰앙!

힘껏 뚫고 올라온 놈의 주둥이가, 그대로 바닥을 무너트리면서 우리를 들이박았다.

제6화

푸스슥....

몸을 잔뜩 짓누르고 있는 흙더미 속에서 손을 쭉 뻗었다.

그대로 바닥을 더듬더듬 짚어보니 돌무더기 같은 게 만져진다.

지탱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팔에다 힘을 주면서 힘껏 몸을 밖으로 빼냈다.

터드드득!

"파하!"

묵직한 흙이 흩어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다. 신선한 산소가 폐부로 공급되니 아찔해지던 시야도 돌아왔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깔린 채 호흡 곤란으로 회귀할 뻔했다.

"퉤! 입에 흙 들어갔잖아. 망할."

지저분해진 옷과 어깨, 머리를 탁탁 털어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더니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 (´・ω・`) ] [재수가 없으려니 이렇게도 없구나.]

그러니까.

그레이트 웜이 치고 올라왔다 다시 땅으로 파고들 때, 하필 내 쪽으로 달려들 게 뭐란 말인가.

당시 허공에 떠 있었던 덕분에 덮치는 흙 파도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렸다.

내가 방금까지 땅에 묻혀 있던 이유였다.

젠장.

다시 만나면 구워서 먹어 버려야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제법 어둑어둑해진 시야로, 모든 게 무너져 바람만 휑하니 부는 정경이 보인다.

일행은 여기저기로 튕겨 나가버린 건지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오크 스켈레톤들은....

터드드득… 덜그럭.

아. 저기인가.

근처 더미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곧 오크 스켈레톤들이 얕은 흙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딱딱! 딱딱!

그들은 나를 발견하더니, 급한 것처럼 빠르게 턱을 덜그럭거렸다. 다행히 그들도 뼈 한 짝 날아가는 법 없이 무사해 보인다.

"후."

잠시 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곧 있으면 해가 완전히 떨어진다. 그 말은 흩어진 일행들의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리란 걸 의미했다.

이 사냥터 안에서 어둠을 홀로 버틴다는 건-특히 C클래스의 두 사람은-사실상 죽음에 가까우니까.

「그림자 시야」 같은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이전 회차에서도 일어났던 것과 같다면.

[ ( ˙-˙ ) ] [확실히 죽겠군.]

안데르만 허셀. 데이비드 포르첸.

두 사람은 '이번에도' 죽는다.

루카스 볼라미르와 양규혁은 혼자서도 살아나갈 힘이 있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피우우우웅!

그때 누군가가 신호탄을 쏘았다.

즉시 사냥터를 벗어나라는 신호다. 아마 안데르만 허셀이 쏘아 올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는 주위를 재차 훑었다.

사냥터의 밤이 찾아온다.

무너진 건물 잔해, 꺾이고 잘린 나무들. 그 사이로 보이는 살기 어린 눈들.

나는 어느새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 (。・ω・)ノ゙ ] [이제 어떡할 건가?]

어떡하긴.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처음부터 나는 블루마린을 완전 토벌하고 갈 생각으로 왔고 그걸 실행할 뿐이니까.

팀이 행군할 능력을 잃었다면, 그때부터는. 나 혼자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잘됐어."

이 기회에 공적치나 쌓아야지.

오늘 할 일 없이 따라다니기만 했던 스켈레톤들이 드디어,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덜그럭, 덜그럭.

그들이 내 옆을 지키며 선다. 나도 양쪽 허벅지에 채워둔 단검을 빙글 돌려 빼냈다.

그것이 공격 신호가 된 듯.

타타타타탓!

이곳저곳에 숨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내게로 덤벼들었다.

[컹! 커헝!]

가장 먼저 앞선 것은 무리 지어서 행동하는 다이어울프.

그들은 서로 협동할 생각인 듯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냈다.

[쉬익!]

그 뒤를 따르는 건 리자드맨.

영악한 리자드맨들은 다이어울프를 방패 삼고 리치가 긴 창을 앞세우고 있었다.

푸드득.

그리고 새 인간의 모습을 한 하피들은 여기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한, 꺾인 나무 위에 앉았다.

그들의 붉은 눈이 내 등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 빈틈을 노리려는 것일 터.

하지만.

하피를 제외하면 대부분 30레벨대다. 레벨을 올린 오크 스켈레톤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끽, 깨엥!]

[쉬익, 쉑!]

오크 스켈레톤들이 검과 쇠몽둥이를 휘두르자 주변 몬스터들이 쓸려 나간다.

그즈음 지켜보던 하피 하나가 발톱을 세운 채 날아오기에 단검을 던졌다.

콰즉!

정확히 얼굴에 꽂힌 검날. 고통에 몸을 비틀다 추락한 하피의 생명 코어는 칼잡이 오크 스켈레톤이 마무리한다.

나는 단검을 다시 수거한 후. 오크 스켈레톤들이 공적치를 얻을 수 있게 느슨히 손을 놓았다.

그 덕에 스켈레톤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휘젓고 다녔다.

무기도 계속 쓰다 보니 그런가, 처음 잡았을 때보다 훨씬 노련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의 수가 많다.

특히 리자드맨이 거슬린다.

놈들은 무작정 다가오지 않고, 정말 얍삽하게 빈틈이 생기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거기다 '애매하게' 좋은 지능 때문인지 눈앞의 해골보다 내게 더 관심이 깊었다.

그 탓일까.

[쉬싯!]

스켈레톤들이 다이어울프에게 양쪽 팔뼈를 물렸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파고든 리자드맨 하나가 나를 향해 창을 뻗었다.

달그락!

다이어울프를 떨쳐낸 스켈레톤들이 다급히 몸을 틀었다. 그보다 창끝이 내게로 향하는 속도가 더 빨랐지만.

서걱.

날카롭게 세운 내 단검이 놈의 창을 사선으로 베어내고.

목까지 떨구는 것이 더 빨랐다.

툭… 데구르르.

잘려나간 리자드맨의 목이 허망하게 굴러간다.

순간 긴장 어린 침묵이 감돌았다.

[끼우우웅....]

얕게 퍼트려진 내 살기에 기가 죽은 다이어울프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쳤고.

[쉬, 시이익....]

내 안에 숨은 힘의 존재감을 느끼고 굳어버린 리자드맨들은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피를 털어낸 나는 멍청히 서서 쳐다보는 스켈레톤들에게 턱을 까닥였다.

"뭐 해? 처리 안 하고."

…딱딱!

스켈레톤들은 이전보다 한결 가뿐해진 몸놀림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해 나갔다.

몬스터들이 내 살기에 눌려 일시적으로 둔해진 덕분도 있는 듯하다.

…그리고.

[식식! 식!]

[쉭! 쉬이익!]

눈치가 백 단인 리자드맨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본체'인 나를 쓰러트리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제일 힘든 일이었음을 깨달은 모양.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라서 말이지.

-탓.

"어딜 그렇게들 열심히 가시나."

훌쩍 넘어가 앞을 가로막고 서자 놈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물러설 곳이 없어진 리자드맨들은 냉큼 엎드려 고개를 박았다.

[쉭! 쉬익!]

항복하겠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나는 놈들을 살려 돌려 보낼 생각이 없다.

어차피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그 차이였다. 토벌 대상인 것은 변함없으니까.

날 죽이려던 놈을 곱게 살려 보내줄 만큼 관대하지도 않고. 공적치도 얻어야 하고.

두 개의 단검을 빙글 돌려 잡았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날붙이가 달빛을 받아 번쩍인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면서도 도망갈 길을 최우선으로 탐색 중인 리자드맨들.

그 머리 위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도망갈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저 사신 해골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있고 싶으면."

* * *

양규혁이 문득 고개를 들어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묘한 낌새를 느낀 까닭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거라곤 어둠뿐.

"…후."

숲, 어떨 때는 버려진 마을을 지나며 바깥으로 향하는 중이던 그는 잠시 숨을 돌렸다.

사냥터의 밤이 짙어지고 있다.

무언가와의 충돌로 인해-몬스터로 추정된다-, 안쪽까지 들어와버려 현재는 달 위치를 확인하면서 이동 중인데.

몬스터를 자극하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야 하니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계속 지체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블루마린이 '긴 타원형 형태'를 띤다는 점이었다.

별일만 없다면 새벽… 못해도 오후가 찾아오기 전엔 나갈 수 있으리라.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샐쭉 웃고는 주변을 훑었다.

다른 일행들이 어디까지 날아가버린 건진 양규혁도 알 수 없다. 그리고 현재 가장 걱정스러운 건 C클래스의 두 사람과 송기현이었다.

'살아 있으면 좋을 텐데.'

루카스 볼라미르는 걱정하지 않아도 잘 빠져나갈 것이다.

그와는 제법 오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의 놀라운 육감과 힘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송기현의 경우 '미지수'에 가깝지만.

C클래스의 두 사람은 지켜본 결과 절대 5급을 혼자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문득. 종전의 일이 떠올랐다.

일행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몬스터를 잡을 동안 설렁설렁 구경만 하고 있던 송기현.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

'뭐였던 걸까, 그건. 음… 몬스터를 두려워하는 눈치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이상한 점은 그것 말고도 있었다.

몬스터를 잡을 때 평소와 같은 '손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점이었다.

이건 정말 기묘한 일이다.

원래 몬스터를 잡고 나면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이 있는데 어떤 연구에선 그 감각의 정체를 '몬스터의 마나가 몸속으로 흡수될 때 느끼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게 정확한 연구인지는 모르지만.

사냥터 좀 다녀본 헌터라면, 누구라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는 감각이 있었다.

즉. 다 같이 사냥해도 결정타를 날린 게 자신인지 아닌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손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전투욕이 강한 루카스도 그답지 않게 사냥에서 반쯤 손을 떼고 있었지.

어쩌면,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설마....'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어져 픽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송기현이 B클래스 두 사람의 수준으론 알아차리지도 못할 속도로, 몰래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던 게 아닌가.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

어쨌든.

양규혁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송기현을 데리고 온 게 다름 아닌 자신이니까.

가능하면 그만큼은 살리고 싶은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다른 일행을 찾으러 다니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제 목숨이 아까운 탓도 있으나,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위험성과 단점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디버프 감소 물약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이틀 이상은 몸이 버티지 못해. 그전에 일행을 찾으면 모르겠지만,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양규혁은 머리를 털어냈다.

우선은.

이 사냥터를 빠져나가고 나서다.

무턱대고 찾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재정비 후에 구하러 들어가는 게 낫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일행 전원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적겠지만....

바스락-

"...!"

근처에서 얕은 소음이 들려온다.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세운 양규혁은 그것이 몬스터의 발소리임을 알아차렸다.

'마주치기 전에 움직여야겠군.'

어느 정도 다수라도 싸워서 질 것 같진 않지만, 괜히 소란을 피우다가 밤중에 어그로라도 끌리면 피곤해지니까.

위험이 커질 수 있는 선택지는 피하는 게 낫다.

양규혁은 기척을 죽이고, 달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재차 이동했다. 사냥터의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제7화

토독.

몬스터로 쌓은 시체 산 위에 앉아 있던 난, 비상식량으로 잔뜩 챙겨온 에너지바 하나를 물었다.

정말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다.

주변을 밀어 버렸더니 근처로 다가오는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던 까닭이었다.

마정석과 아이템도 너무 많이 떨어져서 중급 마정석과 물약 그리고 여분의 무기만 좀 챙기고 전부 버려뒀다.

그마저도 희귀한 아이템인 '아공간 주머니'를 습득한 덕분에 챙긴 거였다.

토독. 톡.

일곱 개째를 해치우고 한 개를 더 뜯었다.

그러는 동안, 스켈레톤들은 보초처럼 근처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 ( ˙ㅁ˙ ) ] [아주 잘 먹는구나.]

각성자가 되면 신체가 일반인보다 더 많은 열량을 요구하니까.

에너지바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라 나중엔 몬스터 고기라도 구워 먹을 생각이다.

음. 탑 등반할 때도 식량이 부족할 때 자주 구워 먹었지. 질기고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웰던으로 잘 구우면, 그래도 썩 먹을 만한 음식은 된다.

가져왔던 에너지바를 전부 해치운 나는 탁탁, 손을 털고 내려갔다. 정승처럼 서 있던 스켈레톤들도 척척 내 쪽으로 다가섰다.

"그럼 슬슬 다시 가볼까?"

따극, 따극!

목적지는 딱히 없다.

그저 앞으로 쭉 전진했다.

사냥터 내부 길을 잘 모르니까 불도저처럼 그냥 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몬스터를 만나면 잡고.

없으면 다시 전진.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직계 권속 목록(2/2)]

- Lv. 62(▲2) 오크

- Lv. 62(▲2) 오크

오크 스켈레톤들의 레벨도 올랐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통상 70레벨이 넘는 오크 로드보다 강한 오크가 탄생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가.

이쯤 되니, 한때는 약했던 이 오크 두 녀석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에도 다소 호기심이 생긴다.

[ ∠( ᐛ 」∠)_ ] [사기적이라....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 (૭ ᐕ)૭ ] [네가 대기의 마나를 흡수할 줄 알기에 부담이 크지 않다고 느끼는 것뿐이지.]

…음. 확실히.

마나 소모도가 남다르긴 하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약한 스켈레톤 몇 마리만 일회용으로 쓰고 마는 능력이었겠다.

잠깐 네크로맨서 뽕에 취해서 이게, 세간에선 에쓰레기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네.

딱딱.

그때 검 쓰는 스켈레톤이 이를 딱딱대며 앞을 가리켰다. 건너다보니 울창한 나무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인다.

나는 기척을 최대한 죽인 뒤 빛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슬라임들이 있었다. 형광물질 같던 빛의 정체는 슬라임이 내는 빛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무에 기댄 채 휴식 중인 스콜피온(Scorpion) 한 마리가 있었다.

[스콜피온]

- 인간형에 전갈 특징을 가진 종족. 전투욕이 강하다. 여성체는 이마에 작은 뿔 2개, 남성체는 뿔 1개를 가지고 있다.

- 평균 ±60레벨에서 출몰

- 5급 이상 구역에서부터 서식

주변을 좀 더 찬찬히 살피자.

평범한 나무인 척하는 인면목(人面木) 엔트가 몇 그루 보였으며.

영혼의 형태로 떠도는 몬스터, 유령 몇 마리도 허공을 유영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 외에도 많다.

내가 발견한 것만 해도 상당한 수.

[ ( ˙ꇴ˙ ) ] [오호. 여기가 블루마린 몬스터들의 주요 서식지인 모양이구나.]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적지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그렇기에 무턱대고 스켈레톤을 내보내기도 껄끄러워지는 곳.

따극, 따극.

나와 똑같은 자세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스켈레톤들이 조용히 덜그럭거렸다.

그러더니, 쇠몽둥이를 다루는 스켈레톤이 손가락뼈로 슬라임들을 가리킨다.

슬라임들은 자신들에게 맡겨달라는 의미인 듯.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임들은 모두 20레벨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성정이 거만한 스콜피온은 웬만한 소란으론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고.

분노하면 과격해지는 엔트도, 기본적으론 겁이 많은 녀석이니 한동안은 조용할 거다.

차근차근 정리하면 될 듯했다.

파스슥!

수풀 밖으로 빠져나간 스켈레톤들이 슬라임들을 향해 돌진했다. 소음을 알아차린 슬라임들이 마구 통통거리기 시작했다.

[뀨욱! 뀩!]

열 받은 건지 투명에 가깝던 슬라임의 몸이 붉게 번진다.

정확히는 몸 중앙에 품은 코어가.

덕분에 노리기도 쉬워졌다.

콰작! 콱!

[뀨익....]

[뀨!]

슬라임들이 하나둘 죽어 나간다.

그들의 산성도론 60레벨이 넘어버린 오크의 단단한 뼈를 녹일 수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스콜피온 쪽을 흘겨보았다.

스콜피온은 오크 스켈레톤을 봤지만 반응하기 귀찮은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척추 끝에 달린 전갈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친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철도 자르는 저 전갈 꼬리 끝에는 슬라임의 산성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맹독이 있어 요주의였다.

스스스스스...!

그때, 나무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엔트들의 움직임이 위협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두 스켈레톤의 행보에 내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 ∠( ᐛ 」∠)_ ] [이런. 괴팍한 엔트들이 벌써 화를 내기 시작했군.]

음.

협공이라도 당하면 위험할 수 있겠다. 슬슬 내가 움직여야―

띠링!

…응?

[「네크로맨서」 사용자의 권속이 아주 많은 수의 생명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죽음이 당신의 업적을 치하합니다.]

[「네크로맨서」 - 히든 옵션 획득!]

[「네크로맨서」 - 연계 기술 획득!]

이게 갑자기 뭐지?

그보다 '히든'이라니?

[ ╭( ・ㅂ・)و ] [오호라. 축하한다. 드디어 숨겨져 있던 시스템 하나를 더 찾아냈구나.]

히든 옵션이 뭔데?

[(⌒_⌒)] [능력 카드에 숨겨진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추가 옵션과는 별개로 붙는 것이지.]

이런 게 있으면 있다고 진즉에 말했어야지. 어? 죽고 싶어?

[ 〣(๐_๐;)〣 ] [일부러 숨긴 게 아니다. 간섭력 때문에 시스템의 첫 발견까지는 이 몸이 도와줄 수 없었을 뿐이노라.]

[ (´・ω・`) ] [그보다 엔트가.]

아.

콰지지직!

두껍고 거대한 나무들이 일사불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엔트 하나가 자신의 굵은 가지를 회전시키며 아래쪽으로 빠르게 휘둘렀다.

목표는 검을 다루는 스켈레톤.

칼잡이 스켈레톤이 움직임을 멈추고 돌아본다.

하지만 피하는 것보다 얻어맞아서 뼈에 금이 가는 게 더 먼저일 듯했다.

히든 옵션과 새로 생긴 연계 기술을 확인하는 건 나중에.

허벅지에 채운 검집에서 단검 하나를 뽑음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탓!

이후 몸 쪽으로 쭉 당긴 팔에 힘을 주었고, 엔트와 칼잡이 사이로 파고든 뒤에 약간의 진심을 담아 단검을 올려 그었다.

과그그그극!

순간 대기가 우그러지면서 거대한 '풍압'이 쏘아졌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긁고 지나간 곳에는 깊은 상처가 패인다.

쿠후우우웅....

당연히, 그 길에 있던 엔트는 모조리 갈라지거나 아예 흔적 자체가 사라졌다.

…파그즉.

그리고 내 힘을 못 견뎌낸 단검은 부서져 버렸다.

"쯧."

이래서 도구는 좋은 걸 써야 하는 거다.

부서져 가루가 된 단검을 대충 털어냈다. 그러는 사이 주위는 고요해진 상태다.

레벨 낮고 약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도망가 버렸고.

근처를 배회 중이던 유령도 모습을 감추었으며.

엔트는 언제 난동 부렸냐는 듯, 필사적으로 일반 나무인 척하고 있었다. …어차피 「몬스터 감정사」 때문에 다 보이는데.

일단은 스켈레톤들이 멀쩡한지부터 확인했다.

쇠몽둥이 스켈레톤은 왜인지 입을 짝 벌리고 있고.

눈이 마주친-그런 느낌인- 칼잡이 스켈레톤은 꼭 웃는 것처럼 이를 빠르게 부딪쳤다.

슬라임 한 마리를 머리뼈에 얹어둔 채 말이다.

웃을 시간에 저거나 좀 치우지.

[ (ㆆ_ㆆ) ] [후후.]

…음.

혹시 착각했을까 봐 말하는데. 난 딱히 스켈레톤들을 걱정해서 도와준 건 아니다.

힘 조절하기엔 촉박한 시간이었고.

기껏 62레벨까지 키운 스켈레톤을 이런 데서 잃긴 아까워서 그랬던 거지.

[(⌒_⌒)] [그래그래.]

진짜라니까?

[ ( ˘ω˘ ) ] [이 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찝찝한 기분에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다 문득 살기가 느껴져, 그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스콜피온이 호승심 가득한 눈에 나를 담고 있었다.

녀석이 거만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일어선다. 위로 한껏 치켜세웠던 꼬리 끝의 가시를 냅다 바닥에 꽂았다.

터억!

스콜피온의 그러한 행동은 일종의 도전장. 상대와의 일대일 전투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스콜피온을 봐왔는데, 대부분 스콜피온이 저렇게 강한 자를 향한 호승심을 비추었다.

전투욕이 워낙 강해서인 듯하다.

타악!

아무래도, 내게 직접 던져진 도전장이라 나도 하나 남은 단검을 바닥에 던져 응수해 주었다.

이러면 어련히 알아듣더라고.

실제로 내 답을 철석같이 알아들은 스콜피온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틀어 웃었다.

[ ∠( ᐛ 」∠)_ ] [히든 옵션 시스템을 처음 찾아낸 기념으로 오랜만에 퀘스트를 하나 내주마. 어떤가?]

뭐? 퀘스트라니 당연히 좋지.

뜸들이지 말고 빨리 내놔 봐.

띠링!

[당신이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퀘스트가 있습니다.]

[돌발 퀘스트]

당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몬스터 '스콜피온'의 생명 코어를 전투가 개시된 후 5초 안에 파괴하시오.

- 달성 조건 : 목표의 코어 파괴

- 달성 보상 : 제안된 목록 중 1개

5초 안에 사살?

[ ヽ( ᐛ 」∠)_ ] [보상 좋은 걸로 주려고 난이도를 높게 잡았는데, 혹시 어려운가?]

설마. 픽 웃었다.

"5초 정돈 식은 죽 먹기지."

쇳소리 같은, 위협 소리를 낸 스콜피온이 바닥에 박혀 있던 꼬리를 휘둘렀다.

쇄애액!

카운트다운이 흘러간다.

휘젓는 전갈 꼬리 끝을 수그려 피하면서 바닥에 꽂힌 단검을 낚아챘다.

앞으로 박차고 달릴 즈음, 남은 제한 시간은 4초.

캉!

사선으로 꺾으면서 내려친 꼬리를 단검으로 쳐내고 단숨에 거리를 좁히기까지 3.2초.

스콜피온이 당황스러운 눈을 부릅떴다.

통상 강하고 단단한 꼬리를 무기로 사용하는 스콜피온들은 근접전에 약했다.

뒤로 몸을 물린 후 거리를 만들기 위해 길게 뺀 손톱을 휘두르려고 한다.

[...?!]

그전에 사선 방향으로 비켜나 역수로 잡은 단검을 미간에 박을 때까지 남은 시간 1.9초.

[카윽...!]

중심을 잃은 몸뚱이의 등 뒤를 선점했다. 그리고.

콰즉!

스콜피온의 생명 코어가 있는 위치에 힘껏 손을 찌르자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코어가 파괴되자 육신은 기동력을 잃고 무너졌다.

풀썩.

흙먼지가 너풀댐과 동시에 아이템들이 수두룩 생겨난다. 나는 숨부터 돌렸다.

"후."

남아 있는 시간은 0.2초.

이 정도면 적절하게 끝낸 것 같다.

딱딱딱딱!

졸지에 구경꾼이 된 스켈레톤들이 합을 맞추어 물개 박수를 쳐댔다. 음. 뭔가 떠먹여주는 칭찬 같아서 민망했다.

그즈음, 퀘스트를 클리어했다는 창도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달성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 제안된 목록 중 1개를 선택하세요.

: 영구 유지 가능한 스탯 (랜덤)

: A등급 이상 능력 카드 (선택)

그걸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영구 유지 가능 스탯이라니.

난이도를 높게 잡았다길래 조금… 아니 많이 기대하긴 했는데 설마 진짜 이게 있을 줄이야.

물론 '랜덤'인데다 '기본 스탯'이란 표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큰 효용성이 없는 '보조 스탯'도 포함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지.

[ ( ๑・ω・๑ ) ] [크흠. 널 위해 이 몸이 힘을 좀 썼지.]

진짜 고맙다.

근데 고마운 김에, 운 상승 버프도 좀 걸어주면 안 될까?

[ ( ・᷄ὢ・᷅ ) ] [....]

[당신은 '운 상승!' 버프를 받았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운' 스탯이 일시 형성되어 한마디로… 운이 좋아집니다.]

하.

역시 나한텐 지라퍼 너밖에 없어.

이런 내 마음 너도 알지?

[ ( ¯⌓¯ ) ] [언제는 버프 노예라고 하지 않았─]

자, 그럼 뽑기 간다!

제8화

기본 스탯, 기본 스탯.

그중에서도 육체 스탯!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탯창을 확인하세요.]

제발!

아. 지라퍼, 스탯창 좀 띄워줘.

[ ( ¯⌓¯ ) ] [알았다.]

스탯창을 띄워달라고 했지만, 나는 바로 확인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재차 빌었다.

육체 스탯이기를.

물론 감각 혹은 육감 스탯이 오르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그건 현재로도 충분해서.

원하는 건 육체 스탯뿐이었다.

후.

이게 뭐라고, 이 나이 먹고도 가슴이 떨리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띄워진 스탯창이 서서히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육체 스탯 : 8 (+18) (NEW ▲1)

육감 스탯 : 7 (+17)

감각 스탯 : 8 (+15)

다시 눈을 감았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함이 나를 감싼다. 이게 바로 그 운빨 뽑기 게임에서 원하는 걸 뽑았을 때 느끼는 쾌감인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 아니. 이대로 죽으면 또 회귀하니까 그건 아니지.

번쩍 정신이 든다.

방금까지 아주 좋은 기분이었는데. 회귀를 떠올리는 바람에 좀 찝찝해졌다.

[ ( ¯-¯ ) ] [혼자 기분 좋았다 나빴다 아주 생쇼를 하는구나. 확인 끝났으면 토벌이나 계속해라.]

잠시만. 그전에 아이템 뭐 떨어졌는지 좀 확인하고. 능력창도 확인해봐야 하는… 어.

[ ( ˙ㅁ˙ ) ] [어.]

잘못 본 건가 눈을 비볐다가.

다시 크게 떴다.

퀘스트 보상 확인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콜피온 주위로 떨어진 아이템들. 그리고 사체 위에 둥둥 떠 있는 건.

"능력 카드다...."

[ ( ˙ㅁ˙ ) ] [능력 카드로군.]

근데 능력 카드의 그림이.

"네크로맨서잖아."

[ ( ˙-˙ ) ] [네크로맨서구나.]

본능적으로 카드를 홱 낚아챘다.

7회차 살면서 가장 빠른 속도였다.

[능력 카드 「네크로맨서」 획득! 해당 능력의 레벨이 증가하였습니다.]

음기가 강한 곳을 좋아하는 유령들이 유독 많다 싶긴 했는데 「네크로맨서」도 한 장 얻어가게 될 줄은 몰랐네.

이걸로 「네크로맨서」도 3레벨.

나는 능력 상세 정보를 열람했다.

[S.네크로맨서] Lv. 3

기본 효과

- 온전하지 않지만 충성심 깊은 스켈레톤 3구를 권속으로 둔다. 단, 120레벨 이하 몬스터에 한한다.

...

추가 옵션

...

- <2> 크리티컬 확률이 소폭 증가한다. 크리티컬 타격에 성공하면 레벨에 상관없이 타격된 상대를 죽인다.

히든 옵션

- 죽음의 업적 치하로 '언데드 소환' 기술이 추가된다.

연계 기술

- 그림자 보관(2단계)

: 자신의 그림자에 권속을 보관한다. 유지에 필요한 마나 소모량이 50퍼센트 감소하며, 부족해지면 소멸한다.

- 언데드 소환(1단계)

: 마나를 소모해 죽인 몬스터를 언데드로 되살린다. 1번 사용 시 50마리까지 소환 가능하며, 연속으로는 3번까지 사용할 수 있다. 24시간이 지나면 횟수가 재충전된다. 소환 후 30분이 지난 언데드는 예외 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종속 가능한 수가 3구로 늘고 120레벨로 완화되었다.

그리고 히든 옵션과 새로 생긴 연계 기술 '언데드 소환'.

시간과 횟수 제한이 있지만, 연속으로 세 번까지 사용이 가능하다는 건 결국 총 150마리를 꺼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보유 마나량만 넉넉하면 꽤 쓸 만하리라.

그림자 보관도 2단계가 되면서 훨씬 좋아졌다.

이젠 보관이 가능할 뿐 아니라, 보관 중에는 마나 소모량이 50퍼센트까지 감소하니까.

음음.

이 정도면 내 마음에 족하다.

그러고 보니 악취도 사라진 기분이 드는데. 내 코가 드디어 맛이 가버린 건 아닐 테고.

기본 효과의 설명이 약간 바뀐 탓인가? 응? 지라퍼?

[ ( ¯-¯ ) ] [그렇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나는 사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아이템은 마땅히 들고 갈 게 없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마침 종속 가능 수가 3구로 늘기도 했고.

"『응하라』."

스콜피온 사체 위로 손을 두고 시동어를 읊었다.

저번처럼 메시지가 뜨고 살덩이들이 모두 녹아 사라지며 뼈가 드러났다.

스스스스스슥....

잠시 후.

완전한 백골로 되살아난 스콜피온 스켈레톤이 나를 잠시 바라보다, 절도 있는 몸짓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덜그럭.

낯간지러운 면치레였다.

싱겁게 웃었다.

[직계 권속 목록(3/3)]

- Lv. 62 오크

- Lv. 62 오크

- Lv. 66 스콜피온

오, 66레벨인가.

60레벨대에서 65를 넘기는 경우는 잘 없는데.

특별히 강한 개체였던 모양이었다.

이 녀석과 얼마나 함께할진 모르겠지만 최소 당분간은, 강한 아군으로 있어 주리라.

[ ( ¯-¯ ) ] [그래. 아주 좋겠구나.]

…나 참.

언제까지 토라져 있을 거야.

[( ¯へ¯ )] [흥.]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수밖에.

크흠.

민망함을 애써 외면한 채 랩을 하듯 줄줄 읊었다. 그게 뭐냐면…, 음. 칭찬이다.

착하고 다정하고 지적이기까지 해서 못 하는 게 없고 멋있는 지라퍼가 대체 왜 그럴까? 배려심은 대해와도 같고 아량은 우주와도 같은 너라면 한낱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서 미처 그 마음씨를 보살피지 못한 날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고저쩌고.

[ ( ๑¯へ¯๑ ) ] [어쩔 수 없군.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다.]

정말 단순하다니까.

* * *

그 뒤로도 토벌은 계속되었다.

강력한 지원군이 하나 추가되면서 토벌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타악! 서걱!

쾅, 콰즉!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스켈레톤들이 알아서 방어하고 반격해서 몬스터를 쓸어버렸기 때문에.

뭐… 언데드 소환으로 밀어버려도 됐겠지만.

지금은 그들의 공적치를 생각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껙!]

옆으로 몬스터 하나가 날아간다.

건물 잔해 위에 앉은 나는 무심히 흘겨보며 이어지는 지라퍼의 설명에나 귀를 기울였다.

[ ( ˘ω˘ ) ] [일정한 규칙과 제한이 있는 추가 옵션 개수와 달리, 히든 옵션은 능력 카드마다 종류와 수가 다르다.]

[ ( ˙ꇴ˙ ) ] [그러니 히든까지 합친다면 능력 카드 개당 붙을 수 있는 옵션 개수는 미지수라고 할 수 있지.]

[(⌒_⌒)] [물론, 히든 옵션만 50개 이상 심어진 카든 없을 테지만 말이야.]

히든 옵션....

꽤 좋은 정보를 알게 됐다. 알고만 있으면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도 있으니까.

「네크로맨서」는 히든 옵션이 몇 개까지 숨겨져 있을까.

궁금하지만, 지라퍼는 은근히 언급을 회피하는 느낌이다. 그 정도까지 자세히 알려줄 순 없는 듯.

뭐.

아직 약 10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앞으로 진득이 쓰다 보면, 언젠가 히든 옵션 한두 개쯤은 더 찾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덜그럭, 덜그럭.

주변 정리가 마침 끝났는지 세 구의 스켈레톤이 다가온다.

스콜피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척.

그걸 본 오크들도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까드닥.

뒤이어 스콜피온은 우아함이 느껴지는 손짓으로, 자신이 맡았던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상당한 양의 몬스터가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딱딱!

그에 지지 않으려는 듯 이를 부딪친 오크 두 녀석도 자신들이 맡았던 위치를 가리켰다.

그들의 처치 수엔 큰 차이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 주변에 있었던 건 40에서 50레벨대 정도의 몬스터뿐이었으니.

태생이 60레벨대인 스콜피온과 비슷한 수준까지 레벨을 올린 오크 스켈레톤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으리라.

"모두 수고했다."

그래서 공평히 공치사해 줬다. 스켈레톤들은 서로를 한번 쳐다보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음. 왠지.

스콜피온 스켈레톤과 오크 스켈레톤 두 녀석이 묘하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 같은데.

이건 절대 착각이 아닌 거 같다.

[ ( ・ิω・ิ ) ] [후후. 마치 주인의 칭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새끼 해골 같군.]

새끼 해골이라니. 세상에.

이렇게까지 귀엽지 않은 뉘앙스의 단어가 있을 줄이야.

[(⌒_⌒)]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다. 네게 잘 보이고 싶어 그런 것 같으니.]

[ ( ᴗ ̫ᴗ ) ] [그리고, 애들은 싸우면서 친해진다고도 하지 않으냐.]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어쨌든. 나한테 민폐가 될 일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이동하기 위해 돌아서자 스켈레톤들이 냉큼 뒤따라 붙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깊어질 대로 깊어진 밤중.

지나가는 길목에서 발견되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남김없이 죽이며 나아가는데, 문득 어디선가 거친 기척이 느껴졌다.

'흠?'

본래 사람이 살고 있었는 듯 버려진 집이 띄엄띄엄 보이는 방향.

여기서 상당히 멀다고 할 수 있었지만, 내 속도라면 금방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저기에 몬스터들의 또 다른 주 서식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가볼까."

나는 스켈레톤들이 따라올 수 있는 수준으로 속도를 내어, 기척이 들려오는 곳으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근원지와 가까워진다.

청각을 곤두세우자 기척의 정체는 뚜렷해졌다.

이건… 날붙이가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사람의 음성이었다.

[ (꒪꒫꒪) ] [오. 일행인가 보구나.]

그런 것 같다. 안데르만 허셀인가.

"Hu, damn it...!"

상당히 거칠어진 목소리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그가 고전하고 있는 상대가 먼저 보였다.

[뀨우우우우우....]

5미터는 족히 넘을 듯 거대한 물방울 모양 액체. 그 중앙에 검붉은 색을 뿜어대고 있는 생명 코어.

그리고.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동그란 눈과 귀여운 세모 입.

60레벨대의 슬라임 로드였다.

[ ( ˙ㅁ˙ ) ] [슬라임 로드인가. 아무래도 근처에 물… 호수 같은 게 있는가 본데.]

응. 세인트 클레어 호가 있지.

[ ( ˙ꇴ˙ ) ] [잘하면 유니콘도 만날 수 있겠구나.]

유니콘인가… 글쎄.

그 몬스터는 워낙 희귀하니까.

하지만 만날 수 있다면 꼭 만나고 싶긴 하다.

어차피 탑 들어가기 전에는 한 번쯤 쥐 잡듯 찾아다녀야 하는 몬스터이기도 했다.

유니콘을 잡는 데 성공하면, 높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특정 아이템이 있기 때문.

그 아이템이 또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아, 이런. 그러고 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아악!"

살이 타는 듯 퀴퀴한 냄새가 나면서 굵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을 지나자, 녹아버린 팔을 움켜쥔 채 뒤로 물러서는 안데르만 허셀이 보였다.

[뀨후우우우우....]

나는 슬라임 로드를 시야에 둔 채 안데르만 허셀에게로 다가갔다.

게으르고 느릿느릿한 녀석은 나를 분명 보고도 아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토옹! 통!

대신, 로드에게서 떨어져 나온 새끼 슬라임들이 나를 향해 힘껏 튀었다.

슬라임 몸 자체가 가진 산성을 뒤집어씌우려는 의도다.

물론 철벽 같은 스켈레톤들 덕에 그 공격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크윽...."

울음 섞인 신음에 고개를 들었다.

따라붙으려는 슬라임들을 겨우 떨쳐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안데르만 허셀.

그러던 중, 기척을 느낀 듯 돌아보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혼란스러워서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으나.

"…Jesus!"

바로 코앞에서 눈을 마주하고서야 알아본 그는 순간, 아픔을 잊기라도 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Mr.송! 신이시여, 무사했군요!"

제9화

"당신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아… 이런. 이럴 수가. 정말요!"

처음엔 한껏 놀라워하던 안데르만 허셀이 곧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종전까지 죽음을 턱밑에 두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스켈레톤들이 사방에서 덤비는 슬라임들을 처리할 동안, 쭈그려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흉하게 문드러진 팔뚝뿐만 아니라 다리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론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지.

혹시 몰라 회복 물약을 몇 개 챙겨 뒀었는데. 쓸 데가 생긴 것 같다.

잘그락… 뽕.

허리춤에 달아놨던 아공간 주머니에서 회복 물약을 꺼내고 뚜껑을 땄다.

그걸 상처 부위에 붓자, 서서히 아물어 간다.

중급 물약이라 회복 속도가 썩 훌륭할 정돈 아니나 이 정도 상처에는 충분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Mr.송. 오, 제기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예. 일단 진정하세요."

"그럼요. 예. 그보다 아, 슬라임이. 거대한 슬라임이에요. Oh my…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안데르만 허셀은 횡설수설하며 불안에 떨었다.

슬라임은 스켈레톤들이 전부 컷트해주고 있는데도, 방금까지 겪은 공포 때문인지 공황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흠...."

이래선 대화가 안 된다. 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겠다.

[ ( ´ ・ω・`) ] [조심히, 죽지 않게, 살살해야 한다. 알겠지?]

당연한 말을.

한번 털어낸 손을 둥글게 말았다.

주먹 쥔 손은 곧 사시나무처럼 떠는 안데르만 허셀의 안면에 가벼이, 꽂혔다.

퍼헉!

[ (´・ω・`) ] [오우.]

"컥!"

안데르만 허셀이 종잇장처럼 너풀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입안이 찢어졌는지 피가 흐른다.

…사뿐히 쳤는데.

생각한 것보다 더 약했나 보군.

[ ( ・ิω・ิ ) ] [그 반대가 아니고?]

뭐… 각성자는 한두 대 맞는 걸로 안 죽으니까 괜찮다. 아마도 그렇다.

"으, 어...."

방금까지 불안해하면서 벌벌 떨고 있었던 안데르만 허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방금 뭐였던 거지?' 싶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반쯤 정신 차린 그가 나를 정확히 바라볼 무렵. 그 나사 빠진 정신머리에 콕 박히게끔 한마디 해주었다.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행여나 발목 잡았다가는 그냥 버리고 갈 거니까."

그가 흠칫 어깨를 굳힌다. 얼마 안 있어 흐리멍덩하던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마치 멱살 잡혀 끌려 나오듯 강제로 정신이 든 사람 같았다.

"당신이… 절 살려주는 건가요?"

한다는 물음도 약간 맹하다.

내 말과 행동 안에 신뢰하도록 하는 힘을 불어넣는 「지도자」의 효과 때문인 것 같다.

"하는 거 봐서요."

반응이 우스워 픽 웃고 일어났다.

그즈음, 슬라임 로드는 새끼 슬라임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화가 났는지.

[뀨후! 우우, 우우...!]

육중한 액체 몸을 마구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 출렁일 때마다 밖으로 튀는 액체들은 모두 새끼 슬라임으로 바뀌었다.

다행인 건, 몸 무거운 놈이라 여전히 직접 나설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같은 레벨대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산성을 가지고 있는 '슬라임 로드'.

그 산성액을 이쪽으로 쏟아 내기라도 했다간… 스켈레톤이나 안데르만 허셀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것이다.

"허셀. 당신은 여기서 얌전하게 뼈다귀들이랑 계세요."

토옹!

그때 동그란 눈을 세모꼴로 한, 성난 얼굴의 슬라임 하나가 나를 향해 튀어 올랐다.

그걸 본 안데르만 허셀이 헉 숨을 삼킨다. 하지만 그가 우려했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촤악! 콰즉.

꼬리뼈를 날렵하게 뻗은 스콜피온 스켈레톤이 슬라임을 낚아채듯 날려버린 까닭이다.

동시에 슬라임의 코어가 부서지자, 산성도를 잃고 평범한 액체가 된 채 쏟아졌다.

딱딱!

스콜피온 스켈레톤이 화난 것처럼 이를 부딪치며 거칠게 꼬리를 털어냈다.

오크 스켈레톤들도 사납게 무기를 휘둘러댔다.

그들의 살기에 잔뜩 눌려버린 새끼 슬라임들은 전보다 적극성이 떨어졌다.

[(⌒_⌒)] [사랑받고 있구나.]

…쟤네가, 앞으로도 계속 강해져서 살아남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토끼가 사자를 걱정하는 꼴이지.

휘익, 탁.

열심히 죽어가는 슬라임들 속에서, 하나 남은 단검을 빼 들었다. 내 목표는 슬라임 로드다.

안데르만 허셀은 기겁하며 외쳤다.

"잠시만요! 그쪽은 위험해요!"

"압니다."

"설마… 저걸 잡으실 생각인가요?"

"당연하죠. 저게 마나를 얼마나 많이 주는지 압니까? 눈 뜨고 놔주면 바보죠."

단검으로 슬라임 로드를 가리켰다.

안데르만 허셀은 할 말이 더 있어 보이는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가 입을 떼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탓, 파앙!

[우우! 뀨후우우우!]

단숨에 가까워지는 나를 발견하고 입을 마름모로 만든 슬라임 로드가 마구 성질을 부렸다.

동시에.

검붉은색 코어가 보라색으로 바뀐다. 투명에 가깝던 몸체도 칙칙하고 흉흉한 색이 되었다.

더는 참지 않는 슬라임 로드가 산성액을 쏟아내려는 조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라퍼?

[ ( ˙ㅁ˙ ) ] [음?]

혹시 '마나 획득량 증가' 버프 좀 받을 수 있을까?

[ ( ´ ・ω・`) ] [이런, 미안하구나. 이번에 퀘스트를 준비하느라 간섭력이 바닥 났다. 현재로선 불가능해.]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툐! 툐!]

마침 고개를 들었다. 마름모로 만든 입으로 툭툭 뱉어내는 산성액이 총알처럼 쏘아지고 있다.

쾅! 콰앙!

치이이이익...!

[툐호! 홋!]

그 속도가 어찌나 공격적인지, 언뜻 귀여운 소리와 도무지 매치가 안 됐다.

[툐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산성액을 피하며 달렸다.

내게서 비켜난 산성액이 땅에 박힐 때마다 역한 냄새와 연기가 피어오른다.

호흡할 때면, 여린 목구멍이 살짝씩 따가워졌으나 「생명의 숨결」로 재생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탓!

슬라임 로드를 코앞에 직면한 후.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꾜옥?!]

그대로 높이 치켜든 단검을, 슬라임 로드 머리 위로 떨어지면서 내리꽂았다.

꿀릉...!

일순. 슬라임 로드가 반으로 갈라질 듯 크게 울렁거린다.

단검은 겨우 몇 센티 들어갔을 뿐이지만.

콰직.

일직선으로 내리꽂힌 풍압은 그대로 녀석의 생명 코어까지 닿아 산산조각내 버렸고.

그 여파는 바닥까지 이어졌다.

쿠웅!

둥글게 갈라지며 내려앉은 바닥은 꼭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은 듯 보였다.

[뀨히이잉....]

직후, 둥글게 유지하고 있던 슬라임 로드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산성을 잃은 놈은 평범한 액체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힐끗 보니, 남아 있던 새끼 슬라임들도 하나둘 액체가 되어간다.

[뀨잉....]

[뀨우....]

저들이 아직 로드로부터 자립하지 못한, 동력을 공급받고 있던 슬라임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양의 마나가 내게 흡수된다.

아직 6성으로 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잠시 그 양을 음미하고 사뿐히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즈음, 저편에선 스켈레톤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_⌒)] [흠. 마치 어미를 따르는 귀여운 새끼 해골….]

무시하고.

안데르만 허셀에게 돌아갔다.

아직 정신 없을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난 여기서 더 느긋하게 쉬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허셀, 이만 이동합시다. 3일 안에 완전 토벌하려면 아직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하거든요."

"예?"

"아. 블루마린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으면 먼저 가셔도 되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연실색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안데르만 허셀이 중얼거렸다.

"대체… 당신은 정체가 뭐죠?"

정체가 뭐냐니.

나한테 대단히 의심스러운 거라도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 어이없고도 실없는 질문에.

"벌써 말한 거 까먹으셨습니까?"

나는 대충 답하고 돌아섰다.

"E클, 송기현. 네크로맨서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