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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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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001. 형제 (1)

"예?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서야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끌벅적했던 회식 자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진 상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이야?"

옆자리에 앉은 김현준 대리가 슬쩍 물었다.

성격 좋고, 능력 있는 내 사수.

"대리님.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 깨어났다고 해서요."

"형? 어... 아! 그게 정말이야?"

"예. 그래서 죄송하지만...."

"얼른 가. 윗분들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평소였다면 예의를 차렸을 터.

지금은 그럴 경황이 아니었다.

곧바로 밖으로 달려 나와 택시를 잡았다.

절실했던 덕일까.

다행히 금방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드릴까요?"

"한국대 병원으로 가주세요."

조수석 자리에 앉자, 그날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10년 전 겨울.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여행을 떠났다.

형의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곧이어 다가올 내 고3 생활이 무탈하게 넘어가길 기원하며.

"그 여행만 안 갔더라도...."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안 좋은 일 같으니 깊이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나이 든 운전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화가 끊기자 다시금 그때가 떠올랐다.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반대 차선에서 졸음운전을 하던 트레일러가 중앙선을 넘었고, 하필 우리 차와 부딪혔다.

부딪혔다는 단어가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분쇄기에 들어간 닭처럼 그대로 갈려버렸으니까.

불행 중 다행은 트레일러 운전사가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은 덕에 딱 차의 절반만 갈렸다는 점일까.

앞 좌석에 앉아 있었던 부모님은 즉사.

트레일러 운전사는 급브레이크의 여파로 싣고 있던 쇠파이프가 운전석을 뚫고 나와 사망.

왼쪽 뒷좌석에 앉았던 형은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식물인간.

뒷좌석에 앉았고, 안전벨트까지 했던 나만이 무사히 살아남았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그 뒤로 어떤 차든 뒷좌석에는 타지 못했다.

"손님 다 왔습니다."

"...."

"손님?"

"아. 감사합니다. 여기."

택시비를 계산한 후 병원 입구에 섰다.

술이 확 깸과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형을 보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살아줘서 고마워.'

'걱정하지 마. 형은 내가 지킬게.'

'혼란스럽겠지만 하나부터 천천히 시작해보자.'

여러 고민을 한 끝에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무엇을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가 아니라는 걸.

"형이 날 몰라보면 어떻게 하지?"

내 10년 전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형이기에 지금의 모습을 보면 '누구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천천히 알려주면 되지만 심적 충격이 상당할 것 같다.

이대로 병원 앞에 서 있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에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걸음은 병실에 가까울수록 점점 느려졌다.

***

형의 병실 근처로 가자 큰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달려가 보니 비쩍 마른 남자가 의사와 간호사를 상대로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괜찮다니까! 좀 꺼져!"

비쩍 마른 남자는 다름 아닌 형.

아무리 바빠도 매주 한 번씩은 찾아왔기에 단번에 알아보았다.

"여어, 민석이냐?"

형은 건장한 남자 간호사도 가볍게 제압한 후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감동의 재회임에도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떡 벌어졌다.

혼자서 여러 남자 간호사를 가볍게 제압하다니.

10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 나 기억해?"

"못할 것 같냐?"

"그래도 나 키도 좀 컸고, 모습도 좀 변했고...."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안다."

"그보다 일단 그분들부터 풀어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것들이 꼴 받게 하잖아. 감히 내가 퇴원하겠다는데 길을 막아?"

"이제 막 일어난 사람에게 따지고 싶지는 않은데,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어. 퇴원 수속을 밟아야...."

"시끄럽고. 내가 건강하면 퇴원하는 거다."

한쪽에 있던 의사분을 보았다.

우연찮게도 오늘 당직 의사가 형의 담당의다.

"이런 건 경우 없는 일이라는 건 아는데... 혹시 퇴원 가능할까요? 입원비는 바로 계산하겠습니다."

"환자분의 건강을 생각하면 시간을 두고 경과를 지켜보시는 게 좋습니다만...."

"돌팔이 자식이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난 건강하다니까? 처신 잘해라.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이곳에 있으면 정신이 더 불안정해질 수 있으니 특별 조치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동생분과 있는 게 정서적으로 더 좋을 것 같군요."

의사분은 불쾌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별의별 환자를 다 겪어본 베테랑의 품격이 느껴졌다.

"다만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환자는 작은 자극에도 큰 혼란을 겪거나, 매우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환자분이 안정되면 다시 검진받으러 오시고요."

이 말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예.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담당의는 간호사들을 데리고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고생하신 분들께 일일이 사죄와 감사의 말을 드렸는데, 다행히 다들 이해해 준 것 같았다.

앙금이 남지 않도록 다음에 올 때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다.

"엄빠는?"

모두 바깥으로 나가자, 불의의 질문이 들어왔다.

"응?"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으니까.

하지만 형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

"돌아가셨나 보네."

"응...."

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형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그 사고 뒤로 몇 년이나 지났어?"

"사고는 기억해?"

"생생하게 기억난다."

"9년 9개월 째야. 3개월 뒤면 딱 10년이고."

"고생 많았네."

너무나도 차분한 그 말에 두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 새끼가 왜 우냐."

"이럴 땐 울어도 돼."

"나잇살만 처먹었지, 여린 건 그대로네."

"형이 이상한 거야."

10년간 식물인간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차분한 게 훨씬 이상하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들 내가 정상이라고 할 테지.

"됐고 퇴원하자. 치맥 땡긴다."

"10년간 아무것도 못 먹은 사람이 무슨 치킨이야? 나중에 배 터지게 먹여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

"괜찮다니까? 소 한 마리를 통째로 회 쳐 먹어도 문제없어."

"아무튼 안 돼. 절대 안 돼."

한동안 실랑이를 했지만, 형은 결사반대를 외치는 내 고집을 꺾진 못했다.

"와. 살다 살다 내 앞길을 막는 사람은 처음 본다. 거인 왕의 대가리도 깨버렸는데."

"그, 그래?"

"각 종족의 왕들도 내 앞에서는 벌벌 기지. 넌 내 동생이라 복 받은 거다."

"...참 영광이네."

떠올려보면 형의 취미는 판타지와 무협지를 보는 것이었다.

'남자답다.'라는 이유로 주로 무협지를 봤었지.

과거의 기억과 소설 내용이 섞여 현실을 혼동하는 것일 터.

이럴 때일수록 내가 형을 더 잘 보살펴줘야 한다.

"민석아."

"응."

"너 내 이름 기억하냐?"

"당연하지."

"뭔데?"

형제니 성은 당연히 나와 같은 '김'이다.

마지막 자는 돌림자로 '석'을 쓴다.

"김제석."

"기억하고 있었네. 고맙다."

형은 대한제국의 '제'자를 따와 김제석.

나는 대한민국의 '민'자를 따와 김민석.

"옛날 일이 떠오르네."

"옛날 일?"

"형이 수능을 대차게 말아먹고 한국대에서 떨어진 거."

형은 체육 특기생이었다.

종목은 검도.

무려 전국소년체전, 전국체전(고등부), 전국 학생 검도 대회 우승이라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인재였다.

덕분에 실기로 한국대 체육특기자로 입학할 수도 있었지만....

내신과 수능이 너무 낮아서 실패.

오직 경기 커리어로만 평가해주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나도 기억난다. 아부지가 '이게 다 이름을 잘못 지은 내 탓이다.'라고 한탄하셨었지."

"단순히 형이 공부를 안 한 탓이었지만 말이야."

"그러게."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따뜻해졌다.

"50년 만이다. 민석아. 정말 보고 싶었어."

"10년 만이라니까. 그리고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나에겐 50년 같은 10년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려줘서 고맙다."

사고 이전의 형과 나는 그야말로 '현실 형제'와 똑같았다.

연년생이다 보니 어렸을 땐 툭하면 싸웠고, 사춘기를 겪고 나서는 간단한 인사 외에는 어떠한 소통도 없는 데면데면한 관계.

하지만 이렇게 고난을 겪고 다시 마주하게 되니 형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애틋했다.

"근데 민석아."

"응?"

"너 혹시 지금 인생에 만족하냐?"

"딱히 불만족스러울 건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질 터였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도, 보험금도, 트레일러 회사에서 준 보상금도 병원비로 다 소비된 상태였으니까.

만약 형이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겠지.

그 한계가 왔을 때,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명목으로.

그러나 지금부터는 괜찮다.

새삼 깨닫자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아니. 만족스러워."

"그러냐."

더는 여한이 없다.

"하긴. 얘도 이제 성인인데 인생을 내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되겠지?"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형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계속 나를 쳐다보았다.

어째 형의 눈빛이 탐스러운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

병원을 나와 곧바로 택시를 탔다.

"나 비싼 곳에 입원했었네. 돈은 괜찮냐?"

"이제는 괜찮아."

"저런 돌팔이들한테 돈을 퍼줬구나. 돈이 썩어나네."

"그런 말 하지 마. 형을 살려준 은인분들이니까."

"은인은 개뿔. 식물인간을 건드릴 게 뭐 있냐. 검사비 명목으로 링거 꽂아놓고 돈이나 받아 챙긴 거지."

사정을 모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신랄한 평가였다.

"당연히 기억 못 하겠지만, 저분들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어."

"왜?"

"형은 평범한 식물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상처 입는 식물인간이었어."

"... 응?"

"팔이나 다리, 가슴 등에 갑자기 자상(刺傷)이나 골절상이 생겨났거든.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야."

의사들도 처음 본다고 했다.

인체 발화는 들어봤어도, 갑자기 베인 상처가 나타나다니.

"심지어 7년 전에는 갑자기 왼쪽 가슴에 관통상이 나타나서 그대로 죽을 뻔한 적도 있어."

다행히 심장박동 측정기가 곧바로 이상을 알렸다.

그 즉시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고 수술해서 살려냈고.

만약 형이 입원한 곳이 대학병원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심장전문의가 없었다면.

그대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랬냐?"

"응. 그래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지도 못했어. 언제 또 기이한 상처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재산이 바닥날 뻔했다.

병원 측에서 희소병 연구라는 명목으로 수술비를 크게 감액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했겠지.

"그러니 막말하는 것은 안 돼. 저분들은 정말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렇구나.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집 방향이 아닌데?"

"내 자취방."

"원래 집은 어떻게 됐어?"

"...팔았어."

원래부터 대출이 끼어있는 데다가 상속세까지 내고 나니 생각보다 큰돈은 아니었다.

그 돈은 전부 형의 병원비로 들어갔다.

"예상은 했지만, 할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네."

"많지. 무슨 얘기가 듣고 싶어?"

"네가 살아온 이야기."

"상당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괜찮아?"

"남는 게 시간이다."

"그건 그렇네. 집에 도착하면 말해줄게."

형은 생각보다 침착해 보였다.

또한, 그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 같으니 얼버무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지난 10년간 있었던 일을."

#002. 형제 (2)

자취방에 도착했다.

분리형 원룸.

혼자 살 땐 충분했는데, 성인 남자 둘이 들어오니 상당히 비좁게 느껴졌다.

"아까 이야기마저 하자. 사고 났을 때 넌 고3으로 올라가던 시기였지? 그럼 미성년자 아니야?"

"그렇지."

"부모님 유산은 제대로 다 받았어? 큰아버지들이 빼돌린 건 아니지?"

"이제 막 깨어났으면서 기억력도 참 좋네."

"시간은 많아. 자세히 말해 봐."

"10년 전, 사고에서 깨어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상황 파악... 그리고 돈 계산이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돈 계산이라니.

어쩌면 난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장이 따갑지만, 죄를 고하듯 담담히 그때의 상황을 읊어나간다.

"유산과 보험금, 트레일러 회사에서 나온 손해배상금 등. 그 액수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떤 생각?"

"이 돈을 친척들에게 맡기면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빼돌리겠구나 하는 생각."

생생하게 떠오른다.

장례식장에서 본 친척들은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에는 탐욕이 가득 어려있었다고.

실제로 친척들은 예전에 아버지를 따돌리고 할아버지 유산을 가로챈 적이 있었다.

인과응보라 해야 할까.

그 돈으로 사업을 했다가 크게 망한 상태.

그런 만큼 유일하게 살아남은 내가 무척 거슬렸을 것이다.

나까지 죽었으면 우리 가족의 재산 및 보험금을 자기들이 나눠 가졌을 테니까.

"하지만 미성년자였던 나는 반드시 후견인이 있어야만 했어."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친인척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후견인이 있어야 한다더라."

"후견인이라도 네 재산에는 손 못 대는 거 아니야?"

"원칙은 그렇지."

법의 구멍을 이용해 돈을 빼돌리는 수법은 여러 가지다.

그들은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다.

"혹시 막내 외삼촌 기억나?"

"그 순딩이?"

"응. 막내 외삼촌이 변호사잖아.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어."

"오. 잘했네."

"법에 따르면 내 의사를 반영해 후견인을 선정할 수 있다더라고."

그때 알았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이전부터도 성적은 나름 상위권이었지만, 이때부터 진심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외삼촌을 후견인으로 하고, 재산 관리를 부탁했어."

"잘해주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어주셨어. 덕분에 친가 쪽과는 절연 상태지만."

간단히 말했지만, 꽤 힘든 일이 있었다.

친척들은 법으로 어떻게 못 하니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기도 하고, 학교를 찾아와 깽판을 치기도 했다.

수능이 가까워져 오는 시기에....

"대학은 나왔냐?"

"응... 차라리 대학 같은 건 나오지 말고 곧바로 취업했으면 좀 더 여유롭게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원래는 곧바로 취업하려 했다.

한 푼이 아까웠으니까.

하지만 외삼촌이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하여 진학으로 바꿨다.

이걸 그대로 말하자니 다른 사람 핑계를 대는 것 같아 그대로 입에 담기 꺼려졌다.

결국, 결정한 사람은 나니까.

"뭐 이런 븅신이 다 있지?"

"응?"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사실상 뒤진 놈에게 네 미래까지 쏟아부으려고 했냐?"

"이렇게 살아났잖아."

"그건... 에휴. 됐다."

형은 한숨을 푹 쉬더니 바닥에 대(大)자로 누웠다.

"민석아."

"응?"

"혼자 살아남았다고 해서 죄는 아니야. 불행 중 다행인 거지."

"... 고마워."

"결혼은 했... 아니다. 이 방을 보니 그랬을 것 같지는 않네. 여자친구는 있어?"

"없어."

"연애 몇 번이나 해봤어?"

"...그런 잔인한 질문은 하는 거 아니야."

"설마... 없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 문제로 서로 힘들어질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

미리 단념하는 날 보며 주변 사람들은 무척 답답해했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형의 병원비를 두고 갈등이 생긴다면, 더욱 버티기 힘들었을 테니까.

"에휴. 불쌍한 것. 내가 소개 좀 해줘야겠네."

"그러고 보니 형은 학생 때부터 연애를 꽤 많이 했지? 연락될 만한 사람은 있어?"

"지구에는 없다."

"아...."

"대신 공주나 기사, 마법사, 엘프. 뭣하면 여신도 소개해줄 수 있어. 당연히 전부 미녀고."

세상에는 2차원에 인권을 부여하는 사람도 존재한다던데.

그게 형이었을 줄이야.

"그, 그래. 잘 부탁할게."

"이상형은 있어?"

2D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

"자, 잘 모르겠네. 알아서 부탁해."

"알았어. 황명을 내려서 신청자들을 죄다 모아보지. 안 그래도 황실에 후손이 없다고 징징대던 애들 많았으니 구름처럼 모여들 거야."

"아하하. 기대할게."

"내가 고맙지. 네가 잘만 해주면 '황실의 대를 잇는 것은 황제의 의무'라는 지긋지긋한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

망상이라도 이렇게 구체적이면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한숨 자고 내일 이야기하자. 나도 회식 자리에 있다가 뛰어나온 거라서 엄청 피곤하다."

"그래라."

***

다음 날.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형이 보고 싶은 책이 있다기에 무협지를 보려나 생각했는데, <증기에너지공학>이라는 책을 선택했다.

빈 스터디룸으로 들어간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픈 거 아니지?"

"네가 놀라워하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날 너무 등신 취급하는 거 아니냐."

"형은 공부랑 담을 쌓았잖아."

"나 원래 취미가 독서거든?"

틀린 말은 아니다.

장르가 판타지와 무협지로 치우쳐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형이 스스로 원해서 공부를 한다?

호랑이가 풀을 뜯어 먹는 모습만큼이나 기괴한 일이다.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바뀐다더니....

"이거 내용이 너무 어렵다. 증기기관이 이렇게나 복잡한 거였냐?"

"복잡하지."

"그냥 석탄으로 물 끓이면 되는 거 아니었어?"

"원리는 맞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해주는 장치나 출력을 높여주는 장치, 그리고 출력을 조절하는 제어장치가 필요해. 상당히 정교하지."

"옛날 기계도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넌 이거 만들 수 있냐?"

"구조는 이해해도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 능력은 없어."

"만약 대장장이를 붙여준다면? 거인의 대가리도 깨버릴 수 있는 천둥의 망치나 절대 빗나가지 않는 투창도 만들어내는 실력이야."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다.

북유럽 신화였던가?

"가능하겠지."

"진짜?"

"원리 자체는 간단하니까. 물론 진짜 해보라고 하면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충분해. 혹시 대학 나오면 누구나 아는 거였어?"

"그건 아니지."

세상에 전공이나 분야가 얼마나 다양한데.

"내가 기계공학과를 나왔고, 직업도 엔진을 연구하는 거니까."

"엔진을 연구한다고?"

"미래자동차 연구소 엔진 개발부에 속해 있어."

"거기 우리나라 최고의 자동차 회사 아니야?"

"운이 좋았어."

대학 4학년 때, 하반기 공채에 단번에 붙었으니까.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긴가민가했는데 딱 감이 왔다."

"뭐가?"

"네가 상당한 인재라는 걸."

"칭찬해줘서 고마운데 냉정히 말하자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 특히 박사급 연구원들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지."

"상관없어. 그놈들을 데려갈 것도 아닌데."

"데려가? 어디로?"

"제국으로."

거울이 없어 알 수는 없었지만, 내 얼굴은 기묘하게 뒤틀려있을 거라 확신했다.

"믿지 못할 테니 먼저 내 이야기를 해줄게."

"형 이야기?"

식물인간이 할 이야기가 있나?

"넌 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영혼만 튕겨 나간 거야."

"...그, 그렇구나."

"구라 아니다."

"트레일러가 그 유명한 환생 트럭이었구나."

"환생이 아니라 소환. 떠돌아다니는 내 영혼을 소환했어. 나보고 최강의 육체를 줄 테니, 세계의 종말을 막게 도와달라더라."

그동안 형의 뇌에 이상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월요일이 오는 대로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적당히 맞춰줘야겠지.

"잘 됐어?"

"집에서도 말했지만 나 황제 먹었다. 그것도 전 종족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의 황제!"

"그... 이세계에서 황제가 됐다는 거지? 어쩌다가?"

"나 말고도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와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싸웠어."

"어느새인가 황제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

다행이다. 주변에 우리의 대화를 들을 사람이 없어서.

스터디룸을 고른 건 신의 한 수가 아니었을까.

"황제가 되어서도 계속 찾아다녔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어.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떤 생각?"

"어쩌면 지구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래서 귀환하기로 한 거구나."

"문제는 돌아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였어."

아까 소환된 경위를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상당히 익숙한 클리셰다.

이세계로 소환한 애들이 돌려보낼 방법은 모르는 거.

"형을 소환한 신도 모른대?"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오딘뿐이었는데, 펜리르에게 잡아먹혔거든."

"그래서?"

"밑에 놈들을 갈궜어. 차원 이동 마법 만들어내라고."

"...원리는 알려줬어?"

"그건 걔네들이 생각해야지."

연구소 개발부의 사원으로서, 상상 속 인물인 형의 부하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한 10년쯤 갈구니까 결과를 내놓더라고."

"10년씩이나... 어떤 결관데?"

"내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영혼의 파장을 이용하자는 거지."

"응?"

"만약 지구에 내 육체가 살아있다면, 영혼의 파장에 반응하여 답신을 보내올 수 있다는 이론이었어."

망상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니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다행히 네가 나를 끝까지 살려준 덕분에 좌표를 설정할 수 있었어."

"그렇게 차원 이동 마법을 개발한 거야?"

"아니. 그냥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휙 넘어왔어."

"그럼 저쪽 세계에 있는 형의 육체는 식물인간 상태겠네?"

"...아."

뇌 정지가 온 듯 형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내가 말하기 전엔 생각도 못 했던 것 같다.

"나 잠깐 제국에 가봐야겠다."

"제국이라면 그 이세계를 말하는 거지?"

"어."

덜컥 겁이 났다.

현실 도피성 망상과 인지 부조화로 인해 자살 시도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혹시 일부러 트럭에 치이려고?"

"...차원문 열고 갈 거다."

"설마 한강에 시공의 문을 열었다면서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려고?"

"너 아까부터 자꾸 날 정신병자 취급하는데,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다."

"그럼 아무 마법이나 보여줘 봐."

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지만, 나로선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증거 없이 믿기 힘들었다.

"나 마법은 잘 못 하는데...."

"차원문 여는 건 마법 아니야?"

"그냥 감각으로 쓱 하는 거라서. 제대로 된 마법이 아니라 꼼수 같은 거라고 할까...."

"차원문을 열어보면 되겠네."

"안 돼. 이 육체는 마나가 부족해서 딱 한 번밖에 못 열어."

"증명할 방법이 아예 없어?"

당연히 얼버무릴거라 생각했는데 형은 어깨를 쫙 폈다.

"내가 검술로는 세계 최강이다."

"형 원래 검도 특기생이었잖아."

"검도 수준이 아니야. 보여줄게. 동전 하나만 줘봐."

500원짜리 동전을 건네주었다.

형은 왼손으로 동전을 들고,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었다.

"잘 봐."

형의 검지에 푸른색의 빛이 얕게 덮였다.

검지를 좌에서 우로 빠르게 긋자, 500원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책상 위에 떨어졌다.

"헐...."

진심으로 놀랐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매끄럽게 잘린 단면을 만져보니 확실히 실감이 났다.

내가 준 동전이다.

속임수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어떻게 했어?"

"아아. 이것은 '검기'라는 것이다."

"다시 해봐."

이번에는 반으로 갈라진 동전을 하늘로 던져 올렸다.

푸른빛을 씌운 검지를 휙휙 긋자,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잘린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우와!"

"야. 너도 할 수 있어."

"나도?"

"그뿐이냐? 나 다음가는 강자가 될 수 있다. 최강인 내가 장담한다."

중2병으로 취급했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003. 새로운 세계 (1)

그 뒤 도서관이 문 닫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으로 치맥을 먹으러 갔다.

"캬! 바로 이거야!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넌 모를 거다. 황궁에서도 치맥 맛은 못 느낀다니까!"

형은 생맥주를 원샷하고, 호쾌하게 닭 다리를 뜯으며 그렇게 외쳤다.

둘만 있는 스터디룸에서라면 모를까, 사람 많은 치킨집에서 차원이동이니 제국의 황제니 하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정리하자면 형은 이세계에서 황제가 되었고, 이제 곧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지?"

"마음 같아서는 딴 놈들 다 버려두고 네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근데?"

"후우... 나름 50년간 살다 보니 정 붙인 애들이 있어서 쉽게 결정하기는 힘들다."

"50년?"

"아마 이곳의 1년이 거기의 5년 비율로 시간이 흐르나 봐. 차원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

"형이 처음 깨어났을 때도 '50년 만이다.'라고 했었잖아. 그게 그 뜻이었구나?"

"어."

형의 갈등도 이해가 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하지만 50년의 인연은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겠지.

"50년이라...."

"네 고생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50년 동안 정신연령 업데이트가 안 된 것 같아서."

"이 새끼가...."

이게 그 유명한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다.'라는 건가?

"혹시 돌아가면 다시는 못 와?"

"아니. 이제 좌표를 확인했으니 다음에는 더 쉬워."

"언제든 오갈 수 있어?"

"이쪽 육체와 저쪽 육체를 합치면 언제든 가능해."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가 문제야?"

"저쪽 기준으로 5년마다 한 달간 오갈 수 있는 '길'이 열리니까. 나야 언제든 오갈 수 있지만, 너까지 데리고 오가려면 길이 필요해."

"날 저쪽 세계로 데려간다고?"

"원래는 네 인생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부유하고 평화롭게 살게 해주자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응. 네가 허락만 한다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평소와는 달리, 이번 화제에서는 굉장히 우물쭈물했다.

"왜?"

"네가 언제든 죽을 수도 있으니까. 교통사고라든지...."

"거기는 한국보다 안전한 곳이야?"

"그렇지는 않지."

"그럼 왜?"

"마나가 풍부하고, 내가 황제다 보니 여러 가지 귀한 약들도 구할 수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최소 한국에서는 어떤 사고로도 죽지 않을 만큼만 단련시켜 주고 싶다고."

죽지 않을 정도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구체적으로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대형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쳐도 아무 상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

"그 정도 피지컬이면 차라리 피하면 되잖아."

"가끔은 남자답게 정면으로 맞받아쳐야 할 때도 있으니까."

"대형 트럭을 정면으로 맞받아쳐야 남자라면, 차라리 여자 할게."

이게 바로 남자의 평균 수명이 여자의 평균 수명보다 낮은 이유인가.

"형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역시 결정하기는 어렵네."

"너에게도 삶이 있으니 이해한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는 거고."

"형이 말한 수준까지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 걸릴까?"

"제국에서 5년 정도만 단련하면 그 정도는 될 거야. 아니, 5년 안에 그렇게 성장하도록 '만들어'줄게."

대단한 자신감이다.

내 썩은 피지컬을 본다면 생각을 바꿀 것 같은데....

"결정은 6일 내로 해야 해?"

"무슨 말이야?"

"그쪽 기준으로 한 달 동안 길이 열린다면, 여기 기준으로 6일 동안 열리는 거 아니야?"

"...그러네!"

설마 이걸 지금 알아차린 건가.

제국의 미래가 심히 어둡구나.

"내가 그걸 생각 못 했네. 아무래도 네가 빨리 결정해야겠다."

"곤란해."

"왜?"

"퇴사도 절차도 있고, 방 계약이나 공과금 문제 등등 여러 돈 문제가 있으니까."

제일 문제 되는 건 역시 퇴사.

사직서가 처리되더라도 한 달 정도의 인수인계 기간이 필요하니까.

"만약 간다고 해도 다음 '길'이 열렸을 때 가야 할 것 같아."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라. 남자가 대범해야지."

"돌아올 때를 생각하면 당연히 대비해야지."

"에라이. 마음대로 해라."

형은 마음에 안 드는지 생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뜻을 존중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따스해졌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형은 내게 업히다시피 기댄 채 걸으며 술주정을 했다.

"민석아~ 내가 진짜 많이 보고 싶었다~"

가볍다.

깨어나자마자 미친개 포스를 보여줬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타지에서 온갖 고생을 하니, 진짜 가족 생각이 절실히 나더라."

"나도 지난 10년 간 형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어."

나의 경우 그리움보다는....

형의 산소호흡기를 떼는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근데 말이야. 진짜 이번에 안 갈 거냐?"

횡단보도 앞에 서자 다시 물었다.

어지간히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다음에 생각해본다니까."

"네 성격에 다음이 오면, 또 다음으로 미룰 것 같아서 그런다. 이런 건 남자답게 결정해야지."

"난 안전을 지향해."

"그래... 지금 제국에는 그게 더 필요할 수도 있겠네."

"뭐?"

"아니다. 아무것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설마 나를 이세계로 데려가고 싶은 이유는 후계자로 삼으려고?

파란불이 켜져 횡단보도에 한 걸음 디뎠을 때,

빠아아앙!

내 앞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으나 형이 뒤에서 잡아 당겨줘서 무사했다.

"역시...."

"응?"

"한국도 마냥 안전하진 않네."

"이건 그냥 우연이야. 한국만큼 안전한 나라는...."

몇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형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우리 가족은 큰 사고를 겪었고, 언제 또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래. 안전한 나라지. 하지만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 해도, 사람이 약하면 언제든 죽을 수 있어."

"...."

"민석아."

"...응."

"다음이 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불안이 든다."

"이번은 내가 잠시 딴생각하느라 그랬던 거고. 평소에는 정말 조심하니까 괜찮아."

하지만 잔뜩 굳어진 형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난 50년 만에 겨우 만난 가족을 잃을 수 없어. 한없이 작은 가능성이라 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다."

형의 몸이 푸른 빛으로 뒤덮였다.

"자, 잠깐만!"

"미안하지만 너의 선택권은 지금 이 순간 박탈됐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눈부신 푸른 빛이 우리를 덮었다.

***

눈을 찌르는 푸른 빛이 가라앉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이 보였다.

내가 혼자 살던 작은 원룸과 달리, 언뜻 보기에도 40평은 되어 보이는 워어어어언룸이.

"여긴?"

"후궁이다. 황궁에서도 황제의 집 역할을 하지."

"황궁... 이라고?"

"그래. 당분간 네가 살집이기도 해. 편하게 지내."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금속 종을 울리자,

"엔츄얼디겐 시 미히."

시녀복을 입은 여성들이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흰 피부를 가진 금발 벽안의 아름다운 미녀들.

이곳 사람들이 전부 미녀일 리 없으니, 미모가 출중한 사람들로만 선발한 듯싶었다.

"소개할게. 힐드라고 하는데 후궁의 시녀장. 필요한 거 있으면 얘한테 말하면 돼."

힐드라 불린 여성은 언뜻 보기에도 더 고급스러운 시녀 복을 입었다.

또한, 황금빛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려 우아하면서도 전문직 여성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이히 하이쎄 힐드."

힐드라고 불린 이는 배꼽 인사를 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뭐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인사하는 것 같다.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나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힐드도 다시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뒤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은 움찔하더니 안절부절못했다.

"말이 안 통하겠구나. 잠시만."

형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더니 무언가 주문 같은 것을 외웠다.

술기운이 확 사라지며, 머리가 맑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어때?"

"뭔진 모르겠지만 머리가 개운해진 기분이네."

"그걸 묻는 게 아닌데. 힐드. 아무거나 말해 봐."

"다시금 소개하겠습니다. 힐드라고 합니다. 존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분명 한국어가 아님에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통역되어 들렸다.

놀랍다.

마법 같다.

"폐하. 김민석 전하께서도 후궁에 머무시는 겁니까?"

"당연하다."

"후궁에 주인 외의 남자가 머무는 것은...."

"내가 법이다."

"명을 받듭니다."

형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데, 힐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했다.

"형... 아니, 그... 폐하?"

"징그럽게 폐하는 무슨. 아까처럼 형이라고 해."

"어... 응."

"차차 적응하면 되겠지. 편하게 해. 편하게. 자, 심호흡~"

"후우...."

머릿속 혼란이 가라앉자 수많은 걱정이 떠올랐다.

겨우 들어갔던 회사는 무단결근이 되어 해고.

또, 방 계약 문제나 공과금, 관리비, 보험비 미납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주민등록 말소....

"뭐 하는 짓이야!"

"심호흡하라니까 왜 급발진하냐?"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고 순서가 있어. 내 인생이 걸린 일을 형이 멋대로 결정하면 어떻게 해? 당장 돌려보내!"

내가 화를 내자 주변 시녀들이 모두 움찔하며 경악했다.

심각하게 동공이 떨리며 우리 둘의 눈치를 보는데, 그 모습에 조금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제대로 따지는 건 시녀들이 나간 이후에 해야 할 것 같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마나가 딸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

"마나야 금방 모아. 나 황제야. 황제. 자타공인의 최강이지."

형은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옛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과하게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금방이 어느 정도인데?"

"이쪽 육체랑 동화해야 하니 한 달 정도?"

"그럼 그 '길'이라는 게 닫혀서 나는 못 가는 거 아니야?"

"와. 이렇게 그걸 바로 떠올리네?"

와.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네?

"걱정하지 마. 내가 넘어가서 잘 처리해줄게. 마법을 쓰면 너랑 완벽하게 똑같이 변신할 수 있다."

"더 불안해!"

형 성격이라면 내 얼굴로 연구소 소장님이나 건물주님의 멱살을 잡고 후려칠 수도 있다.

잘 수습해주기는커녕 범죄자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힐드. 뒷일을 맡기겠다."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서는 더 거세게 항의하기 전에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분노가 갈 곳을 잃었지만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내가 허탈해하며 침묵을 지키자, 조심스럽게 힐드가 입을 열었다.

"먼저 김민석 전하께서 사용하실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힐드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어떻게 접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곳에서는 하면 안 되는 금기나 간단한 예절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무표정한 힐드의 입가에 살짝 따뜻한 미소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던 시녀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저 전하의 마음 가시는 대로 행하시면 됩니다."

"네?"

"황족에 관한 법률은 명문화된 바가 없으니까요."

"예전에 있던 걸 참고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홉 세계 역사상 제국이라는 형태도, 황제라는 개념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네? 그러면 형이 최초의 황제라는 뜻입니까?"

시황제.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 황제를 뭐라고 정의합니까?"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며, 세상 만물을 통치하는 자'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개념이다.

중국의 황제조차도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칭했는데.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힐드가 안내해 준 방은 형의 방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여전히 30평 이상 되어 보이는 큰 방이었다.

장식이나 가구도 화려하지는 않되 품격있어 보이는 고급품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위화감이 들었으나, 그 위화감이 어디서 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고용된 입장에서는 손대기 어려운 손님이 온 격이겠군요."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예?"

"저를 포함하여 제국의 수많은 신민들은 김민석 전하의 내방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힐드의 말에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방은 누가 봐도 남성 취향의 인테리어.

하지만 후궁은 황제 외에 다른 남자가 들어올 수 없는 곳.

그런데 이들은 내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고 준비해 놓은 걸까?

"전하께서 무엇을 바라시든 반드시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이곳이 전하의 마음에 드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광신도 같은 그녀의 언행 탓일까.

잠시 떠올랐던 의문은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004. 새로운 세계 (2)

김민석의 형, 제석은 양쪽의 육체를 융합한 뒤 집무실로 향했다.

아직은 불안정하여 갈무리되지 않은 마나가 줄줄이 흘러넘쳤다.

"브륀."

"예. 폐하."

브륀이라 불린 여성은 후궁의 시녀장 힐드와 무척 닮았다.

다만 눈매가 더 날카로웠고, 세련된 단발은 도회적인 느낌을 주었다.

힐드의 쌍둥이 언니이자 황제의 제1비서.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황제의 비서이기에, 실질적인 넘버 2라 여겨지는 강철의 여인이었다.

"동생을 데리고 왔다."

"폐하께서 하신 일이 제국에 도움이 될 때도 있군요."

"이럴 때는 '고생 많으셨습니다.'나 '역시 제국의 빛이십니다.'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폐하의 요망은 포괄적으로 검토하여 향후에 반영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브륀의 태도를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닌지라 가볍게 넘겼다.

"어쩌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라 그런지 어색해서 자꾸만 긴장해버린다."

"폐하께서 긴장이라니... 직접 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로군요."

이 사람이 정녕 거인들의 시체 위에서 광포하게 웃던 황제가 맞단 말인가!

과거에는 피의 숙청제.

현재는 절대 황제라고 불리는 그는 경외의 대상.

그런 황제가 몸을 비비 꼬고 있으니 브륀은 눈이 썩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 대하듯이 하시면 금방 적응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망나니 같은 짓을 어떻게 쟤한테 해?"

"자각하고 계신다면 평소에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싫은데? 꼬우면 알지?"

"예.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현자는 바보와 싸우지 않는다.

브륀은 옛 격언을 떠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떠셨습니까? 폐하의 동생분은."

"비참하게 살고 있더라."

객관적으로 '불행한 과거가 있었지만, 성실하게 잘 성장한 편.' 정도의 평가가 더 옳았지만 브륀으로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다행이군요."

"다행이 아니야. 대충 들어보니까 나 때문에 저렇게 살았던 거니까."

제석은 동생 앞에서 보이지 않았던 한숨을 푹 쉬었다.

형으로서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짐 덩이가 되고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이 아니라니까?"

"저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다행입니다."

"왜?"

"김민석 전하께서는 '천상계'에 미련을 갖지 않으실 테고, 폐하께서는 아낌없이 지원해주실 테니까요."

천상계란 아홉 세계에서 지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오딘이 제석의 영혼을 아스가르드(天) 바깥(上) 세계(界)에서 불러왔다는 것이 와전되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너 성격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하는 거 아니냐. 민석이도 너 같은 성격은 싫어할걸?"

"하지만 제 능력은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건 인정."

"아무튼, 이것으로 마지막 노른의 예언이 정말 실현될 수 있겠군요."

"노른? 운명의 여신을 말하는 거였던가?"

"예. 그녀들의 예언은 언제나 틀림이 없지만, 늘 파멸의 예언만 하고 다녀서 그리 환영받지는 못하는 존재들이었죠."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신들의 황혼(라그나로크)'

아스가르드의 드높은 신들도 태반이 죽고, 지상에도 괴멸적인 피해를 주었던 최악의 전쟁.

그때를 생각하면 천하의 브륀이라 할지라도 몸을 떨 정도였다.

"막상 겪어보고 나니 그녀들의 예언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무척 절제된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짜 최악이긴 했지. 한국전쟁도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을 거야."

"천상계에 있는 폐하의 나라에서 일어났다던 내전 말씀이시군요."

"지금은 잘살고 있어."

"제국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노른의 마지막 예언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하네."

"제가 들었던 예언 중 유일하게 희망적인 예언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상에서 한 명의 초인이 내려와 증오와 조소를 부수고.

이윽고 또 다른 초인이 내려와 번영을 일구어내니.

지상에는 황금의 시대가 열리리라.

브륀은 물론,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운명의 여신이 남긴 마지막 예언을 철석같이 믿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그나로크라는 최악의 시기를 넘어왔기에.

"폐하께서 전자의 초인, 전하는 후자의 초인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민석이를 데려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안전을 위해서니까. 민석이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돌려보낼 거다."

아무리 한국이 안전한 나라라고 해도 교통사고를 비롯하여 위험 요소는 매우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술을 배우면, 한국에서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단 하나뿐인 가족이다. 제국을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거다. 너희들이 그러려고 한다면, 오히려 내가 너희를 버릴 것이다."

"예. 명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민석이가 여기 살면 나도 좋으니 도와주긴 하겠지만...."

"도와주시려고 하지 마시고 제발 가만히만 있어 주십시오."

굉장히 무례한 말이었지만 지은 죄가 많은 제석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제석이 손댔다가 망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뒷수습은 대부분 브륀의 몫이었다.

"이 건은 실패가 용서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에 절로 눈이 뜨인다.

"으음... 몇 시지?"

위성이 없는 탓일까.

스마트폰 시계가 오류가 나서 정확한 시간이 확인되지 않았다.

새벽의 찬 공기와 색이 옅은 하늘을 보니, 무척 이른 시간임은 확실해 보였다.

원래라면 더 자도 되는 시간.

하지만 낯선 곳에서 잔 탓인지 잠이 더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깨어나자 방 밖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예. 일어났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힐드였다.

깔끔하게 씻고 옷을 입은 것을 보면 1시간 전에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마 해 뜨기 전에 일어났겠지.

그녀의 뒤로 시녀 세 명이 줄줄이 들어왔다.

각각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 세면 용구, 수건과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씻겨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우받는 느낌보다 이런 것도 혼자 못하는 바보처럼 느껴지니까.

"바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세수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힐드가 입을 열었다.

"보통 몇 시에 아침을 먹죠?"

"이곳의 모든 생활은 전하께 맞춰 움직입니다."

내가 늦게 먹으면 시녀들도 늦게 먹게 된다는 뜻인가.

"그럼 지금 먹죠."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식당에서 드시겠습니까?"

"식당으로 가죠."

"안내하겠습니다."

힐드를 따라 식당으로 가니, 직사각형의 긴 식탁 위에 끝도 없이 차려진 음식들이 보였다.

자리에 앉자, 시녀들이 음식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부지런히 내 접시 위로 옮긴다.

알아서 먹겠다고 하려다가 일단 이대로 먹기로 했다.

처음 보는 음식이 많아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니까.

"간밤에는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예. 아직까진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네요."

'아직까진' 할 때 한 번, '불편'할 때 한 번 시녀들이 움찔한다.

폭군이 된 것 같다.

"다들 너무 긴장하시면 저까지 긴장됩니다만...."

"죄송합니다!"

시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인다.

그것도 벌벌 떨면서.

단순히 신분 차이가 극심하게 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황족의 특권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인 걸까.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힐드가 중재하듯이 나선다.

무척 고마운 손길이었다.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조속히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육이라는 말에 시녀들이 다시 한번 움찔한다.

힐드는 내게 있어 가장 편한 사람이어도 상사로서는 꽤 엄한가 보다.

"교육하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같이 지내다 보면 차차 익숙해지겠죠."

이런 건 언행으로 보여줘야 비로소 믿게 되는 사항이다.

사단장이 이등병에게 편하게 있으라고 아무리 말해 봐야, 안 통하는 것처럼.

"오늘 특별히 예정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사회 경험상 이럴 때는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

초심자가 나대면 그보다 민폐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가만히'만' 있는 신입 역시도 한숨을 자아내기 마련.

좋든 싫든 이곳에 5년간 살게 되었으니 목표를 찾고 조금씩 걸어가 봐야겠다.

그렇게 하려면....

역시 배워야겠지.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도록.

***

식사를 마친 뒤, 내 방에 가니 시녀들이 쭉 늘어섰다.

제일 앞에는 힐드가, 그 뒷줄에는 다섯 명의 중년 시녀, 세 번째 열에는 24명의 젊은 시녀가 섰다.

힐드와 중년 시녀는 모두 인간이었는데, 젊은 시녀는 종족이 다양했다.

형평성을 고려한 건지.

할당제라도 한 건지.

종족당 세 명.

'차별 금지'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것 같아 위가 쓰리다.

"후궁 시녀장 힐드입니다. 만약 불편함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또한, 특별히 다른 지명이 없으시다면 이후 전하의 비서를 겸하게 되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힐드를 필두로 자기소개 타임이 시작되었다.

"조리 담당의 아미드입니다."

평범한 외모에 후덕한 몸집을 가진 분이었다.

요리 진짜 잘하실 것 같다.

"후궁 주방의 책임자이며, 전하께서 드시고 싶은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만들겠습니다."

"김치볶음밥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네?"

"황제 폐하께서 즐겨 드시는 음식이니 언제든 만들 수 있습니다."

긴장 풀어보려고 농담한 거였는데.

"청소 담당의 모디시입니다. 후궁 어디서든 안심하시고 생활하실 수 있도록 철저한 위생상태를 유지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위생의 개념이 있다니.

이것도 형의 영향인가?

모디시는 무척 깐깐해 보였는데, 손에 낀 하얀 장갑이 인상적이었다.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면 거기 담당을 그대로 담가버릴 것만 같다.

그 뒤로 의복 담당의 말레이, 정원과 인테리어 담당 디오라, 간호 담당의 메디안이 줄줄이 소개했다.

"이제 실무를 담당할 시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리허설이라도 한 것처럼 중년 시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젊은 시녀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온다.

"드라켄 족의 니트나입니다."

"묘인족 뮬랑입니다."

"엘프 족 미스티입니다."

"오크 족 마고트 입니다."

차례로 소개하는데 사람이 워낙 많이 나오는지라 누가 누군지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들의 강렬한 눈빛만은 인상이 남았다.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결의가 보였다고 할까.

마치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전장으로 나서는 결사대를 보는 것 같았다.

조국과 민족?

"그러네."

"어떤 것이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여덟 종족.

종족당 세 명씩, 총 24명.

'대부분' 아름다운 용모.

설마 했는데 각이 나왔다.

이거 분명히 형이 손을 쓴 거다.

++

"에휴. 불쌍한 것. 내가 소개 좀 해줘야겠네."

"대신 공주나 기사, 마법사, 엘프. 뭣하면 여신도 소개해줄 수 있어. 당연히 전부 미녀고."

"알았어. 황명을 내려서 신청자들을 죄다 모아보지. 안 그래도 황실에 후손이 없다고 징징대던 애들 많았으니 구름처럼 모여들 거야."

"내가 고맙지. 네가 잘만 해주면 '황실의 대를 잇는 것은 황제의 의무'라는 지긋지긋한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

그때는 망상으로 치부했었는데, 이게 실화가 되네?

아무리 그래도 작작 해야지.

그리고.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이 오크 숙녀분들은 분명 종족에서 미녀라고 뽑혀 온 거겠지?

"생각해보니 천상계에는 오직 인간만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히 그녀들의 종족에 대해서 덧붙이겠습니다. 먼저 드라켄 족부터 설명해 드리자면..."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소개의 시간이 이어졌다.

***

긴 소개가 끝나고, 힐드를 제외하고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힐드는 저만 상대하고 계셔도 괜찮겠어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원하시는 시녀로 모시게 하겠습니다. 눈여겨보신 아이가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힐드는 시녀장인데 바쁘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실 그녀가 옆에 있어 주는 게 제일 편해서 물어본 거였다.

특히 오크 족 시녀의 팔뚝은 근육이 꿈틀꿈틀 대는데, 식스팩도 선명하게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녀들만 여기 있었다면 일진녀들에게 삥 뜯기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제게 전하를 편히 모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상급 시녀들도 유능하니, 제가 없어도 문제는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무리하진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보다 눈여겨보신 시녀가 정말 없습니까?"

"하나 같이 유능하고 예쁜 사람들이라는 건 알겠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네요."

"그렇습니까...."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감으로는 굉장히 실망하는 듯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수천 명의 지원자 중에서 고르고 고른 아이들이다 보니, 혹여 존귀한 분의 눈에 한두 명은 들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어제 와서 적응하기 바쁜 제가,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갈 정도로 요령이 좋지는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리턴보다는 리스크를 중점적으로 본다.

그리고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덥석 물다가는 주옥 된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하명 하십시오."

"이곳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책이나 문헌, 자료를 주세요."

이곳에서 내 강점은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도록.

아까 시녀들이 소개할 때 느꼈다.

계속 가만히 있다가는 '정치적 상황'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닐 수도 있겠다고.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황제의 동생'이 아닌 '인간 김민석'의 입지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나는 조용히 의지를 불태웠다.

#005. 새로운 세계 (3)

오후가 되자 시녀들이 내 방 안에 책장을 가져다 놓고 서적을 빽빽하게 채웠다.

사람보다 훨씬 큰 원목 책장도.

수십 권의 책이 담긴 상자도 가뿐하게 가져왔다.

시녀들의 근력이 어지간한 헬스 청년보다도 훨씬 강한 것 같다.

"이쪽은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책, 이쪽은 기본법, 그리고 이쪽은 제국민의 매너와 예절에 관한 책입니다."

"빠르네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일이니까요."

어떤 책을 먼저 볼까 고민하다가 <황제 폐하의 업적>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현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똑똑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야 자체가 다르다.

수많은 위인들이 쌓아 올린 지식과 문명의 혜택을 접했기에.

막연히 아는 것만으로도 이쪽 세계에는 엄청난 도움이 될 터.

"음?"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다행히 '언어' 문제는 해결된 상태.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문자까지도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다.

덕분에 책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되긴 하는데....

"리얼? 실화?"

이걸 정말 형이 했다고?

"힐드."

"말씀하십시오."

"여기 신분제가 없어요?"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제국을 건국하실 때 자유와 평등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셨지요."

"그럼 저는 왜 황족으로 대우받는 거죠?"

"황족은 법 위에 있으니까요."

"...."

당연한 상식인 것처럼 말하는데, 예외가 있으면 평등이 아니잖아.

"예전에 있던 귀족이 반대하진 않았나요?"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정말로요?"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모두 나스트론드로 추방되었으니까요."

유배되었나?

"나스트론드가 어디죠?"

"죄인이 가는 사후 세계입니다. 영원토록 사악한 용에게 잡아먹히는 형벌을 당하는 곳이죠."

뭐야. 여기.

개무서워.

"갑작스러운 개혁은 큰 부작용을 초래할 텐데...."

"학자들은 신분제 철폐 덕에 초토화된 세계를 이만큼 복구할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

"대전쟁 이후라면 그나마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세계를 구한 영웅이 주도했으니 지지 세력도 충분했을 테고.

"다음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했다. 오. 이건 좋네요."

"덕분에 수학이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요."

"근데 형의 수학 성적은 매우 처참... 그, 안 좋았는데."

"굉장히 복잡한 학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보통은 숫자와 사칙연산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건 그렇죠."

미적분이 정립되면 과학이 급격히 발전하는 건 맞다.

하지만 대부분은 수학적 계산보다는 '경험상 이렇게 하니 되더라.'라는 게 더 쉽고 빠르다.

비행기만 해도 최초로 띄운 건 저명한 과학자가 아니라, 자전거 가게의 라이트 형제였으니까.

그래서 어려운 과제를 성공한 공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왜 되지?'라고.

"숫자를 도입하신 폐하께서는 도량형 통일을 명하셨다. 폐하께서는 미터나 킬로그램이라는 단위를 말씀하셨지만, 1미터가 어느 정도 길이인지, 1kg이 어느 정도 무게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이거 의외로 모르는 사람 많던데.

"그런 일도 있었지요."

"어떻게 되었죠?"

"임시로 아홉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두 문명인 엘프나 드워프의 단위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단위를 제국 표준으로 할지에 대해 두 종족의 학자들이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지요."

"형은 뭐라고 했나요?"

"팝콘이라는 음식을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아...."

대단하다.

황제가 이렇게 해도 세상은 굴러가는구나.

"혹여 전하께서는 1미터가 어느 정도 길이인지 아십니까?"

"자오선. 그러니까 북극점에서 남극점까지 호의 길이의 2천만 분의 1이요."

나중에는 자오선의 측정 길이에서 오차를 발견.

1m의 실제 길이가 정의된 길이보다 조금 짧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미터의 길이를 바꿀지, 길이는 그대로 두고 새로이 정의할지 논란이 생겼으나 이미 해놓은 게 많아서 정의를 바꿨다.

진공에서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북극점? 남극점? 제가 무지하여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힐드를 오래 봐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늘 나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번에는 달랐다.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는 정보를 눈앞에 둔 사람 같았다.

"알겠습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곧 양피지와 펜, 잉크를 가져왔다.

힐드는 받아 적을 준비를 완료하고는 여느 때보다 눈빛을 빛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것이 '인간 김민석'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영역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결론적으로 지구의 단위를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업적>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줘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업적이 아니라 흑역사라고 제목을 바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부분 실패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높게 평가되고 있는 건, 형이 황제라서 그런 것이겠지.

"제일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지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이 문제였을까요?"

"나중에 경제가 엄청나게 커지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서 지폐를 도입하려면 금이나 은을 기반으로 두어야 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안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경제 규모로는 굳이 지폐를 도입하지 않아도 문제없다.

"기반으로 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폐의 일정 액수와 금의 일정량이 등가 교환될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혹은 현물이 충분하든가.

"물론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의 변동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기준이 흔들리면 지폐는 종이 쪼가리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이해 없이 지폐만 찍어내면 암시장이 활성화되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등 경제가 폭망한다.

짐바브웨처럼.

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만약 그때 전하께서 계셨다면, 브륀이 머리를 쥐어뜯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브륀?"

"황제 폐하의 제1비서로, 사적으로는 제 쌍둥이 언니가 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굉장한 능력자임은 바로 알아차렸다.

<황제 폐하의 업적>에 쓰인 수많은 삽질을 이겨내고 제국을 복구해 내었으니까.

"근데 이곳에서는 왜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을 도입한 건가요?"

"폐하께서 명하신 일을 반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요."

"아...."

"다행히 시범적으로 몇몇 도시에서만 시행했었기에 피해가 엄청나게 크지는 않습니다."

"정 하고 싶었으면 중앙은행이라도 만들고 하지."

황제의 위엄이 이렇게 막대하다면,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전하."

"네?"

"괜찮으시다면 이 지식을 브륀에게 알려주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왜인지 망설인다.

힐드를 포함해 시녀들은 항상 과하게 자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여 국정에 참여해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네?"

갑자기 너무 폭탄 발언인데?

"왜죠?"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정책을 되돌리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름 아닌 황제 폐하의 명이니까요."

"저는 예외인가요?"

"물론입니다. 황족이시니까요."

"하지만 황족이라도 황제와는 격차가 클 텐데요."

이곳에서 내 지위는 '황제의 동생'이라는 전제 위에 성립된다.

그런 내가 형이 만든 정책을 되돌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날 중심으로 반 황제 파벌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본의 아니게 형과 싸우게 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

그런 속 쓰리고 위험한 일을 자청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왜죠?"

"폐하께서 정무에 손을 놓으신 지 20년이 넘었으니까요."

"맙소사."

입헌군주제도 아니고,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파업?

명나라의 만력제가 절로 떠올랐다.

"흐음...."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도 환영하시리라 봅니다만, 걱정되신다면 직접 여쭤보심은 어떠신지요?"

나쁜 제안은 아니다.

장식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내 설 자리는 세워놔야 한다.

문제는 내 강점인 '공학'만으로 입지를 쌓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

하지만 정책에 참여하면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입지를 빠르게 쌓을 수 있겠지.

국가 차원에서 지원도 더 쉽게 받아낼 수 있을 테고.

"한 번 제안해 보죠."

경위가 어찌 됐든 최소 5년간 이곳에 머무르게 된 건 기정사실.

시간을 무익하게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

곧바로 힐드와 함께 형의 집무실에 찾아갔다.

그녀는 밖에서 대기.

홀로 안에 들어간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형은 허탈할 정도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싼 똥을 치워 주겠다고? 나야 고맙지."

"어... 응...."

육체를 융합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바뀐 형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다.

형은 본래 나와 비슷한 175cm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하지만 지금은 2m에 달할 정도로 크고 근육도 튼실해서 야성미가 물씬 풍겼다.

그나마 얼굴은 거의 변화가 없어서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네 입맛대로 다 바꿔도 된다. 아니다. 그냥 네가 황제 할래?"

"...."

형에게는 절대 권력의 황제라는 직위가 짐 덩어리로 여겨지는 모양.

괜히 불편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몸은 좀 괜찮아?"

"괜찮지. 이게 아파 보이냐?"

"그럼 나 지구로 가는 차원문 좀 열어주면 안 되나?"

지금이라면 '길'이 열려 있을 때다.

만약 지구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적응할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지금 잘못 열면 차원의 미아가 된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나 안 보여?"

"응. 안 보여."

뭔가가 일렁이는 것 같기는 한데.

"난 여기 오자마자 마나 인식했는데, 그 쉬운 게 안 된다고?"

"체질이 다른가 보지. 그럼 그 마나라는 게 안정화 될 때까지 얼마나 걸려?"

"한 달 정도."

"에휴. 텄구만."

꼼짝없이 5년은 여기 머물 각이다.

지구에서 일어날 여러 문제를 형이 잘 해결해주길 바랄 뿐이다.

"포기하면 편하다. 형이 다 알아서 해준다는 데 왜 자꾸 계집애처럼 쫑알거리냐."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한국에 가게 되거든 내 모습으로 절대 그런 말 하지 마라."

"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형을 보면 불과 10년 사이에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낀다.

"잘 지냈냐."

"이틀 가지고 뭘...."

"다른 집에서 자도 불편한데 여기는 아예 다른 세계잖냐."

"불편한 건 없었어."

판타지 소설이 으레 그렇듯이 중세 정도의 문명 수준이라 생각한다.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변수가 섞이자 특정 부분에서는 놀랍게 발전해 있었다.

특히 가장 걱정했던 화장실이나 기온 문제 등은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다행이네. 어디 보자. 브륀! 얘가 할 이야기가 있대."

형이 크게 외치자 한 여성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힐드의 쌍둥이 언니, 브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닮았다.

다만 풍성한 머리를 틀어 올린 힐드와는 다르게, 세련된 단발을 했으며 눈매가 매서워 보여서 성격은 다를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민석 전하. 브륀이라고 합니다."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힐드에게는 늘 신세를 지고 있어요."

"동생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얘는 나한테 신세 지고 있어."

브륀이 잠시 형을 바라보았다.

입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전하께서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하명까진 아니고, 힐드가 제안을 해와서요."

"그 이야기라면 방금 힐드에게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앞장서 주신다면 제국에 큰 복이 될 것입니다."

"혹시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이나 필요한 게 있나요?"

"전하께서 움직이시겠다는데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여기는 이래서 곤란하다.

황족의 위엄이 너무 큰 나머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것조차 결례라고 생각해버리니까.

초보에게는 오히려 패널티다.

"이왕 할 거면 효율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다행히도 폐하와 전하는 많은 부분이 다르시군요."

브륀이 활짝 웃는다.

다행히도...?

"정 그러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큰일을 하시기 전에, 작더라도 '증명'이 있으면 좋습니다."

"증명이요?"

"간단한 업적 같은 것입니다. 없더라도 전하를 따르는 것에 주저하지는 않겠지만,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뜻을 펼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재벌 2세, 3세들이 국민의 눈을 의식해서 먼저 신입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물론, 필요한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편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일감 몰아주기.

업무 성과 넘겨주기.

초고속 승진.

내가 혐오했던 짓들을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남이 노력한 성과를 내 것으로 빼앗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아니요. 괜찮아요."

"네?"

"간단한 것이어도 괜찮다면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요."

다행히 <황제 폐하의 업적>을 보면서 할만한 것을 찾아내었으므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더 없나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지만, '성인식'의 결과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성인식?

설마 '홀로 산속에서 짐승을 사냥해오세요.' 같은 건 아니겠지?

주변의 평온한 눈치를 보니 위험한 건 아닌 것 같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언은 받아들이되.

결정은 주도적으로.

그러한 원칙을 세우고 이세계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006. 성인식 (1)

처음 발을 디딘 신입사원의 최우선 과제는 '적응'.

질문은 하되, 토는 달지 말고, 조언에 따라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러면 마음씨 좋은 선배 중 한 명이 퀘스트를 주는 NPC처럼 차근차근 단계별로 가르쳐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토는 달지 말아야 한다는 것.

조언해줄 때 토를 달면,

'아 주관 강한 새퀴.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힘들지, 내가 힘드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다음부터는 조언해주기를 꺼린다.

따라서 겉으로나마 착실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 신입사원 때는 더더욱.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니.

"성인식이 뭐죠?"

"세계수의 힘을 빌려 자신의 재능이 어느 방향인지, 현재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수치로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성년이 된 신민을 대상으로 하기에 성인식이라고 합니다."

'혼자 산짐승을 사냥해라.' 같은 야성적인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신민들이 황궁에서 일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성인식'의 결과가 필요합니다. 물론 황족은 예외지만요."

"필요하다면 하는 게 좋겠죠."

옆에서 듣던 형이 딴지를 건다.

"용쓴다. 왜 구태여 어렵게 가냐."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 못 들어봤어?"

"그니까 여기 법이 황족은 예외라니까?"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것도 조언이라면 조언인데....

너무 막장 같은 조언이라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괜찮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하는 게 더 좋다.'라고 말하는 브륀의 말이 더 신뢰가 간다.

"난 초보니까 이왕이면 착실한 루트를 따라가고 싶어."

"좋을 대로 해라."

당당하게 하겠다고 선언하긴 했는데, 막상 하려니 걱정이 든다.

이곳은 시녀들도 커다란 원목 가구를 가볍게 드는 세계.

내 능력이 높게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얼굴을 보니 무슨 걱정하는지 뻔히 나오네. 등급은 능력과 영향력을 합산해서 나와. 넌 내 동생이니까 최소 자작은 될걸?"

"자작?"

"등급은 준남작부터 공작까지, 그리고 9급에서 1급까지 나와. 남작 1급 바로 위가 자작 9급. 대충 이런 식이야."

"신분제는 없앴다고 하지 않았어?"

"이름은 작위지만, 신분이 아니라 레벨 같은 개념이다. 상속도 안 되고. 뭐... 귀족 비슷한 대우를 받기는 하지."

"그렇게 말하니까 기대되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라. 내가 팍팍 밀어준다고 하잖아."

내가 후궁 밖으로 나온 표면적인 목적은 입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내적 목표는 달랐다.

최대한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가....

"전하. 조금 전 생각해 두신 업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심 실망하고 있는데, 브륀이 타이밍 좋게 물어봐 주었다.

우연일까.

눈치가 빠른 걸까.

"그거요? 진짜 별건 아니에요. 편자라고 해요."

"편자... 입니까?"

"형이 등자를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편자 얘기는 없어서요."

"편자가 뭐죠?"

예상은 했는데 진짜 없어서 다행이었다.

복식부기 같은 다른 계획도 있었지만, 하나 같이 편자보다는 복잡했으니까.

"말이 돌바닥 위를 달리다 보면 발굽이 닳잖아요. 이게 균일하게 닳지 않아서 발굽 때문에 다리뼈가 휘어 버리거든요."

"예. 심하게 악화하면 나중엔 걷지도 못하게 되지요."

그리고 말은 걷지 못하게 되면 내장이 짓눌려 죽는다.

잘 때도 서서 자는 종족이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 말에게 쇠로 된 신발을 신겨준다는 개념입니다. 달리는 속도도 빨라지고요."

"발에 쇠를 달았는데 더 빨라진다고요?"

"마찰력이 늘어나니까요."

"마찰력이 무엇입니까?"

똑똑한 사람이라도 처음 듣는 개념을 바로 이해하는 건 어렵겠지.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었다.

"얼음 위를 달리는 것과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빠르다고 생각하십니까?"

"포장된 도로겠죠."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미끄러지지 않게 해줘서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는 거죠."

"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대장장이와 장제사가 필요합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인 만큼 경험이 풍부한 이가 좋겠죠."

장제사는 말발굽을 평평하게 깎는 사람을 말한다.

나중에는 편자를 달아주는 일까지 하게 되기에,

의외로 상당한 고급 인력이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바로 하게요?"

"빠를수록 좋은 일이니까요."

브륀이 더 달아오른 듯한 모습.

그렇게 환영할 만 한 일인가 싶다.

"폐하. 조속히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만 공방으로 향하겠습니다."

"어. 그래라."

"형. 나도 가볼게. 형태부터 편자를 다는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니."

"그래. 브륀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몸조심하고."

형의 집무실 밖으로 나오자 브륀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냉철한 상사 같은 이미지였는데 의외로 유쾌해 보였다.

"좋은 재료를 선택하셨습니다."

"네?"

"폐하의 업적에 전하의 업적을 더 하여 완성한다. 폐하의 비서인 저로서는 최고의 그림이군요."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당분간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죠."

"황송한 말씀입니다. 모든 준비는 제가 할 테니, 전하께서는 마음껏 뜻을 펼치시길 바랍니다."

***

대장장이에게 편자의 형태를 알려주고 난 후, 후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형도 돌아왔다.

산타 할아버지처럼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이게 다 뭐야?"

"널 위해 준비해 놓은 것들. 여기에 온 목적이 널 단련시켜주는 거였잖냐."

"...전속력으로 달리는 대형 트럭과 부딪혀도 멀쩡할 만큼?"

"그건 최소고. 이왕 할 거면 만점을 노려야지."

이게 최소라면, 만점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설마 날아오는 미사일을 정면에서 맞고도 무사해야 하는 건가.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 말했다시피 5년 이내에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형은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에서 차례차례 무언가를 꺼냈다.

황금색 사과부터, 유리병에 담긴 물 두 병,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고기도 있었고, 향기로운 벌꿀 내음을 풍기는 술도 있었다.

"영약 같은 거다. 이걸 먹고 나에게 수련받으면 아무리 재능이 없더라도 금방 강해질 거다."

"음... 이거 귀한 거지?"

"당연하지. 보통은 황금으로 산을 쌓아도 못 구한다."

"나 혼자 치트키 쓰고 게임을 하는 느낌이라서 좀 그렇네."

내 대답에 형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전의 앙상한 모습이라면 모를까 2m 거구의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형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헛똑똑이구나."

"뭐가?"

"몰랐어? 세상은 원래 불평등해."

세상 사람들!

이런 사람이 평등을 외치며 신분제를 철폐했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일면을 본 듯한 느낌이다.

"같은 선에서 시작할지는 몰라도 타고난 것도, 짊어지고 있는 것도, 지원받을 수 있는 것도 다 제각각이지. 근데 어떻게 평등할 수 있겠냐."

"그건... 그렇지."

"게다가 넌 혼자 살기도 벅찬 세상에서 나라는 짐을 지고 여기까지 달려왔어. 이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만하면 이 정도는 받을 자격 있는 거 아니냐."

"그런가?"

학생 때 공부가 너무 힘들다고 느꼈다.

공부 외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게 너무 많아서.

대학에 갔더니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병원비와 등록금,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동시에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잠자는 시간도 쪼개가며 매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만든 스펙은 널리고 널렸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선택받는 소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마음 졸이고 애썼는지 모른다.

취업 성공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고 나서도 심적으로 힘들었다.

내 연봉이 형의 병원비보다 적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생한 보람이 있네."

"그 보상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나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지원해주는 거니 사양할 필요는 없다."

"고마워. 사양 말고 받을게."

대화하는 사이, 힐드가 영약들을 하나씩 배열했다.

그녀가 주는 순서대로 먹었지만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다.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은데?"

"네가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야. 넌 이미 올림픽에 나가면 어떤 종목이든 금메달을 딸 수 있을 만큼 모든 신체 능력이 향상됐어. 게다가 병도 안 걸리고 불로장생할 수 있지."

형의 말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수련하면서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 하지만 이건 달라. 한 번에 확 알게 될 거야."

"그건 뭔데?"

"미미르의 샘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북유럽 신화에서 오딘이 한쪽 눈을 대가로 마실 수 있었던 지혜의 샘물 아닌가?

"미미르의 샘물로 어떤 지혜를 얻느냐에 따라 향후 네가 얻을 힘이 극명하게 갈린다. 나처럼 절대 강자가 될 수도 있고, 평범한 먼치킨이 될 수도 있겠지."

"형은 마셔본 적 있어?"

"있지."

"어떤 지혜를 얻었는데?"

"그것도 수련을 시작하면 차차 알려줄게."

각오를 다진 나는 미미르의 샘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

시야가 암전되고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대부분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

기억을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자,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보였다.

그때는....

이게 행복이라는 걸 몰랐지....

기억의 끝에 서자 몸 없이 머리만 남은 거대한 얼굴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손님이군.]

내 키보다 큰 얼굴이었지만, 마치 지혜로운 할아버지를 보는 느낌이라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반갑다. 시간이 길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알겠습니다."

[너는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보았을 것이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네요."

특히 지난 10년간 불안과 초조, 그리고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때 이런 걸 노력했다면.

그때 이런 선택을 했다면.

이런 생각들이 수없이 들었다.

[묻겠다.]

내 상념들을 날려버리듯, 미미르는 엄숙한 목소리로 고했다.

[너의 결핍은 무엇이냐. 그리고 결핍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지혜를 원하느냐.]

"결핍...."

가족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돈의 압박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형은 깨어났고, 나는 황족이 되었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구멍이 메워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대답.

미미르는 재촉하지 않고 현명하게 조언해주었다.

[결핍에 굴복한 자는 책망을 하게 되며, 더 심해지면 혐오로 변질되어 간다.]

"...."

[너에겐 자책에서 자기 혐오로 가는 과정이 보인다. 그러니 결핍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며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실패할 수 없기에 내 선택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고뇌했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면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했다.

육체적으로 자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는 그 상처가 남아있었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가슴으로 답해라. 너의 결핍은 무엇이냐.]

"...보상을 원합니다."

[보상?]

"제가 한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대학생 때 알바를 하면서 부당하게 시급을 깎인 적이 많다.

강제로 매일 최소 8시간 이상 2년 동안 일했지만, 월 10만 원도 못 번 시기가 있다.

프로젝트 마감을 맞추기 위해 야근은 물론 주말 출근까지 했지만, '자기 계발할 장소를 제공해준 것뿐'이라는 명분으로 제대로 수당을 받지 못했다.

형의 병원비로 매년 1억씩 빠져나가는, 그야말로 매일 같이 피가 마르던 시절의 이야기.

만약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만 있었다면 미래 계획은 좀 더 선명해졌을 것이고 불필요한 노력은 적어졌을 것이다.

실패에 쫓겨 악수를 고르는 일도.

자신을 쓰레기라고 자학하는 일도 줄었겠지.

"이 욕구가 제 결핍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지혜를 원하느냐.]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원합니다."

[불가. 오딘이 했던 우를 반복하게 둘 수는 없다.]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또한, 그 지혜는 지금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을 주실 수 있습니까?"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는 현재를 정확히 앎으로써 시작되는 법.]

너 자신을 알라.

옛 격언이 절로 떠올랐다.

[너에게 '현재'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주마.]

***

다음 날 아침.

형과 아침 식사를 하며 어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미르에게 좋은 지혜를 얻었어?"

"얻긴 얻었는데,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

"뭔데?"

"현재를 볼 수 있는 혜안이라고 하던데?"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게임 알지? RPG 같은 거."

"응."

"대충 상태창 같은 게 보이는 능력 같아."

그 외에도 다른 효과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단계에선 알 수 없었다.

"난 어때? 그 혜안으로 봤을 때 말이야."

++

이름 : 김제석

작위 : 황제

전투 : ???

마법 : ???

지식 : ???

기술 : ???

성향 : 중립·혼돈

호감 : ???

야심 : ???

++

"...모르겠어. 대부분 물음표로 뜨네."

"흐음. 그러면 저기에 있는 힐드는 어때?"

++

이름 : 힐드 발키리아

작위 : 후작 1급

전투 : 53만

마법 : 53만

지식 : 35만

기술 : 46만

성향 : 중립·선

호감 : 70(모성)

야심 : 50

++

"이름 힐드 발키리아. 작위 후작 1급. 전투력 53만...."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불러나가자 형은 매우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감 70. 가로 열고 모성이라고 쓰여있네. 이건 뭐지?"

"잘 모르겠네. 너에게 얼마나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니냐?"

"70이면 높은 걸까?"

"나야 모르지."

다른 건 만 단위인데, 이것만 십 단위다 보니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알기 어려웠다.

"네 수준은 어때?"

내 손을 보며 '혜안'을 발동시켰다.

++

이름 : 김민석

작위 : ???

전투 : 100(↑↑↑)

마법 : 0(↑↑↑)

지식 : ???(↑↑↑)

기술 : 320(↑↑↑)

성향 : 질서·선

호감 : -40

야심 : 10

++

대충 짐작은 갔다.

(↑↑↑)는 어제 먹은 영약 덕에 붙은 부스팅 같은 거겠지.

"처참하네."

"여유를 가져라. 야 너도 할 수 있다니까."

"알아. 나도 할 수 있겠지."

할 수 없다고 좌절하는 게 아니다.

'언제'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시기가 있기 마련이니까.

"안다면 됐다. 성인식에 갈 준비나 해라."

"언제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이번 달은?"

"오늘 오후."

"...."

형은 이게 문제다.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를 안 준다는 것.

#007. 성인식 (2)